송광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무소유길을 오른다. 1km 남짓한 숲길이라 오르내리기 쉽다. 불일암에선 법정 스님의 수목장 묘를 놓치지 말자. 하산 뒤엔 조계산의 양대 거찰인 송광사와 선암사를 비교 답사한다. 풍경도 풍토도 서로 완연히 다르다.
얼씨구! 매화꽃 핀다. 조계산 기슭 곳곳에 매화가 지천이다. 이미 피었거나 피고 있거나 피어날 채비를 하거나, 여기저기 오나가나 보나마나 천지간에 매화다. 그렇다는 건 하고많은 초목 중에 유독 매화가 꽂히듯 쏘옥 눈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딴엔 매화에 취미가 있으니 이게 호사다.
예로부터 매화는 애호가들을 몰고 다녔다. 아직 봄 일러 눈발 날릴 때부터 매화는 홀로 고고히 피어 춘색몰이를 선동한다. 동면에서 겨우 깨어난 산야로 성급히 짓쳐드는 매화의 기세에, 은은해서 더 멀리 가는 향에, 희고 차가운 꽃잎의 미색에 사람들은 들떠 입방아를 찧었다. 어떤 고인은 매화를 아내 삼아 청산에 은거했다. 조선의 명인 강희안은 매화에게 정1품 벼슬을 내렸다. 퇴계는 한술 더 뜨셨구나. 이렇게. “아아.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벌 나비들, 매화를 가만 두고 보진 못하리라. 꿀을 얻기 위해 온몸을 들이밀 것이다. 그게 꽃이 바라던 바이며, 그게 기대했던 열락이며,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농밀한 체취를 풍긴다. 활활 타오르는 뭔가 황홀한 게 꽃과 나비 사이에 있을 게다. 그러나 다 지나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꽃 피어 열흘 붉긴 어렵고 지기는 쉽다. 사람의 일도 이와 다를 게 있던가. 청춘남녀의 사랑도,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는 해로(偕老)도, 만개처럼 은성했던 삶도 종국엔 감쪽같이 시든다.
홀리고 끌리어 매화 앞에서 한참을 노닥거리다 숲길로 접어든다. 송광사 옆댕이에서 시작되는 ‘무소유길’을 걸어 오른다. 무소유를 설하길 평생 거듭했던 법정 스님이 즐겨 거닌 산길이다. 길 끝엔 불일암(佛日庵)이 있을 게다. 법정 스님이 많은 날들을 보낸 암자다. 경전을 읽거나 화두를 타거나, 채마밭을 일구거나 글을 쓰거나, 스님은 불일암에 수시로 머물며 할 일을 다 했다. 산수 간에 몸을 두는 게 수행승의 일이지만, 긴히 덧정 들고 딱히 속정 깊어서였을까, 그는 불일암을 각별히 좋아했더란다.
정겨워라, 초봄 숲. 정겨운 건 정 주고 봐야 한다. 흙을 들어 올리고 빠끔히 낯을 내미는 풀들을 보라. 어린것의 첫 어금니처럼 애틋하고 장하지 않은가. 저마다 미끈한 지체를 뽐내는 저 길찬 나무들은 편백이거나 삼나무다. 길 물매는 순해 걷기에 좋다. 이 나라 어디에나 있는 유정한 숲길이다. 쉬 오를 수 있어 만만한 산길이다. 그러니 길과 사람이 죽이 맞는다.
무소유길의 백미는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다. 본새 없이, 하릴없이 목 깁스처럼 빳빳할 뿐 단 한 번을 굽힐 줄 모르는 대나무는 어쩌면 아집의 화신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나무에게 대 회초리 맞아도 싸다. 꺾일 줄 모르니 절개의 상징이요, 속이 텅 비었으니 무욕의 표징이지 않은가. 대나무 죽창은 혁명의 무기였으며, 대나무 피리는 청아한 선율로 사람의 시름을 재운다. 불교하고도 인연이 깊은 게 대나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한 대밭에 세운 죽림정사는 최초의 불교 사원이며, 선가의 스승들은 죽비를 높이 들어 공부에 게으른 제자의 등짝을 후려친다.
대숲을 지나 이윽고 불일암에 닿는다. 대나무와 조릿대 무성히 어울렸으니 사립부터 초록이 짙다. 초록으로 지은 대의 터널이다. 걸어드는 초입이 숫제 컴컴하다. 그리곤 이내 햇살 아래로 채마밭과 요사채가 환히 드러난다. 소박한 구색은 여염집에 가까우며, 고요하기론 물속을 닮았으며, 단아한 기품은 연꽃을 연상시킨다. 이 모든 그윽한 풍경에 법정 스님의 눈길이 스쳤을 테지. 모든 사물에 스님의 손길이 어렸을 테지. 임종 즈음, 제자가 물었다. “생사의 경계가 어떠합니까?” 두고두고 모실 한 말씀 달라는 질문이었다.
“원래부터 없다.”
돌아온 건 그 한마디. 투병엔 격통이 따랐으나 종신(終身)은 그답게 가벼웠다. 장례식 하지 말라, 관 짜지 말라, 사리 찾지 말라, 탑도 비도 세우지 말라. 제자들에게 남긴 당부가 그랬다. 걸리적거릴 게 없는 활보로 이승을 건너셨구나. 불일암 뜰, 후박나무 그늘 아래에 유골을 남기고, 큰스님 후련히 떠났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네 번째는 순천 선암사이다.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에 위치하며,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가람을 배치하였다. 많은 대중이 생활하는 대규모 산사였기 때문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ㅁ’자 형태인 건물이 많이 건립되었다.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백제 성왕 5년(527)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현재의 비로암지에 창건하였고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는 현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였으며 1철불 2보탑 3승탑을 세웠다. 삼창주 의천 대각국사는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여 호남의 중심 사찰로 키웠는데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당한 이후 여러 차례 중창 복원과 화재 등이 반복되면서 절 이름도 조계산 선암사로 다시 청량산 해천사로 개칭, 복칭을 반복하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는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유일한 태고총림(太古叢林)이다.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원(禪院)과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조계종에 5대 총림(조계, 영축, 가야, 덕숭, 고불총림)이 있고, 태고종 유일 태고총림이 있다.
정조 13년(1789),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이 원통전에서, 해붕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 출생하였으며, 순조는 즉위 후 선암사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하사하였다.
선암사 일원은 사적 제07호로 지정되었으며 보유 문화재에 국보는 없으나 보물 제395호 삼층석탑과 400호 승선교 등 14점의 보물 및 다수의 유무형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암매(천연기념물 제88호)로 부르는 400년 이상 된 우리 토종 고매화(古梅花)가 유명하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순천시 서북쪽 상사호 상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계산의 동쪽이며 반대쪽 조계산 서쪽에는 송광사가 위치하고 있다. 트래킹 코스로 선암사-송광사 구간을 찾는 사람도 많다. 절 아래 식당가를 지나 매표소부터 절집까지 이십 분 남짓 숲길을 걸어 올라간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만나는 승선교(昇仙橋)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숙종 24년(1698) 호암 대사가 백일기도에도 관음보살을 뵙지 못하자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이때 관음보살이 나타나 받아주시니 감동하여 원통전과 승선교를 세웠다고 한다.
예전에는 승선교를 지나 계곡을 건너야 절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계곡을 건널 일 없이 절까지 큰길을 따라가므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승선교를 지나려면 그 아래 작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가 승선교로 다시 건너와야 한다.
승선교 뒤에 있는 강선루 역시 오른쪽에서 흘러와 큰 개울과 합쳐지는 작은 시냇물 위의 선원교(仙源橋)라는 작은 다리 위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예전에는 누각 아래로 다리를 건너다녔겠지만 지금은 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어 옛 맛을 잃어 아쉽다.
승선교에 못미처 2개의 승탑군(부도전)이 있는데 먼저 만나는 곳이 숲속의 비석거리이고 두 번째가 선암사 동승탑군(東僧塔群)인데 이곳에 눈길을 끄는 탑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세기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던 상월 스님의 탑비는 후학들을 사랑했던 스님을 기려 제자를 가르치던 강원(講院)을 향해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승탑군을 지나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 아래로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선암사에 도착한다. 방문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일주문이 아니라 삼인당이라는 멋스러운 원형 연못이다. 대개 절집은 앞마당쯤에 연지(蓮池)를 꾸며놓고 있지만 선암사 삼인당은 조금 다르다.
삼인당 앞에는 전통찻집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창 넓은 찻집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전통찻집에 앉아서 삼인당 연못을 바라보는 멋스러움이 나름 괜찮은 곳이다.
선암사 숲길 내내 이어지는 순탄한 오르막 지형은 삼인당 연못을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데 아직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한번 휘돌아 꺾어진 길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그 너머에는 차밭이 늘 푸르게 깔려 있으며 왼쪽 높은 언덕 위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하마비(下馬碑) 하나가 서 있다.
조금은 급격해지는 오르막 경사로가 한 번 더 굽어지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타난다. 몇 개의 계단 위에 화려한 지붕을 이고 선 일주문은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특이한 형태로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특정한 영역이나 큰 건물로 들어서는 대문의 느낌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르막 계단 위에 범종루가 있고 범종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하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는 누하(樓下) 없이 좌우로 돌아 들어가니 바로 대웅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주문을 지난 후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암사의 3무(無)에 기인하는데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인지라 불교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대웅전에 부처님을 혼자 모셨으니 좌우 협시불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가운데에 큰스님이 드나드는 전용문을 어간문(御間門)이라고 하여 신도들은 못 드나들게 하는데 선암사에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드나든다고 하여 가운데에 사람 출입을 위한 문은 없다는 것이다.
만세루는 원래 강당으로 총림에서 많은 학승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원래 강당은 금당의 뒤쪽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불 시 큰 스님 몇 분만 대웅전에 들어가고 나머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강당에서 예불에 동참하는 형태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모두 대웅전에 들어가서 올린다고 한다.
대웅전 영역은 이렇게 만세루와 대웅전이 마주 보며 가운데 마당에 석탑 2기가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설선당, 오른쪽에는 심검당이 있는 ‘ㅁ’자형 네모꼴 구조이다. 대웅전의 왼쪽에는 음향각이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으며 심검당 아래 만세루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에는 종을 치는 나무, 즉 당목(撞木)이 있는데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가 사실은 용의 셋째 아들 포뢰(蒲牢)이다. 이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드리면 종이 더 크게 운다는 것이고 그래서 선운사의 당목이 고래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답사 결과 고래 모양이라던 선운사 당목은 머리 부분을 잘라낸 모양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용 이야기를 모르는 채 무심코 잘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웠다. 생각 없이 자른 결과가 아니기 바란다.
대웅전 영역 뒤로는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 나란히 있고 그 뒤로 순조 임금 출생을 기도한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인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원통전의 뒤쪽은 응진당 영역이며 그 오른쪽은 무우전 영역인데 그 사잇길이 유명한 선암매가 피는 공간이다. 응진당 출입문에는 ‘湖南第一禪院’(호남제일선원) 현판이 달려 있다. 응진당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당우가 있으며 응진당 뒤에는 작은 산신각이 다소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암매 공간을 건너 오른쪽 무우전은 태고종정이 머무는 공간으로 비공개지역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각황전이며 여기에 철불이 모셔져 있어 답사객들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더 뒤로 나가면 숲속에 숙종 때 세운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제92호)와 1929년 세운 선암사 사적비가 서 있고 일반인 출입을 금지한 선원 뒤쪽으로 동부도(보물 제1185호)와 북부도(보물 제1184호)가 있다. 답사꾼들에게는 필수 지역이지만 금지구역이라 아쉽다.
또 하나 선암사의 명물은 ‘뒷간’이다. ‘깐뒤’라고 우스개 소리하는 선암사 뒷간은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도지정 문화재 화장실로 지정된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