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이 쓸모를 다하면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이 답일 것 같지만, 그 시간과 의미를 찾아 연결하고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건축물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의 가치를 알아보고 기록하는 조성룡(78) 건축가를 만났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입구로 들어가 노래하는 분수를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꿈마루’가 있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 ‘피크닉정원’을 찾았다. 조명이 없어 어두운 듯하면서도 햇빛이 들어와 어둡지 않은 길을 돌아선 순간,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이 있지만 사이사이가 뚫려 있어 하늘이 보이고, 벽이 있지만 틈이 있어 볕이 닿았다. 내부의 나무들은 천장을 뚫고 자라 있었고, 외부의 나무들은 천장을 넘어 가지를 늘어뜨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새소리가 엉켜 노래하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읽던 소설 속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것 같았다.
건물과 자연이 얽혀 있는 ‘꿈마루’
밖에서 보면 무척 오래되어 낡은 건물 같지만 꿈마루는 건축학도들의 필수 답사 코스다. 2013년에는 ‘한국 최고의 현대 건축’ 14위로 꼽혔다. 철거 직전 이 건물을 남기자고 설득한 사람이 조성룡 건축가다. 그는 꿈마루를 ‘보물 같은 건축물’이라고 했다.
“천장을 조금 뚫어놓기만 해도 바람이 통하고 새소리가 들려요. 나무가 자라 넘어오기도 하고, 새가 날아 들어오기도 하지요. 전혀 다른 구조가 되는 셈이에요. 제가 한 건 이렇게 뜯어내는 작업이었어요.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해서, 종종 이곳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했는데, 이쪽까지 올라오는 게 쉽지 않은가 봐요.”
꿈마루 철거가 정해진 뒤 최광빈 푸른도시국 국장이 그에게 자문했다. 당시만 해도 이 건물에 대한 기록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많이 낡은 데다 페인트가 덧칠된 상태였다.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지어졌지만 이후 어린이들을 위한 교양관으로 쓰였다. 찾아보니 나상진 건축가의 작품이었다.
“보통 솜씨로 지은 건물이 아니었어요. 당시만 해도 이렇게 짓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건물 외벽에 타일처럼 붙여둔 저 파란 조각들이 유럽에서는 흔했고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나 하던 방법이에요. 곳곳에 그런 기법이 적용됐는데, 국내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 많아요. 유학 한 번 안 다녀온 사람이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설득력을 가지고 실현까지 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해요?”
꿈마루는 나상진 건축가가 최초에 설계한 그 원형을 최대한 지켜내면서 관리사무소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공간들을 ‘집 속의 집’처럼 지었다. 그는 건축물만 봐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상진 건축가가 1970년대에 남긴 흔적, 전시장으로 바뀌며 덧댄 흔적, 설계도를 보고 재생하며 조성룡 건축가가 넣은 장치, 세 가지를 모두 볼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의 흔적 남기는 ‘가치 재생’
조성룡 건축가는 역사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 자리에 골프장이 생긴 시대적 배경, 클럽하우스를 사용했을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 교양관이 되어야 했던 사연까지. 건축 재료나 방법이 아니라 꿈마루라는 건축물의 끊어진 역사 속 퍼즐을 찾아 하나씩 맞추어가며 시간을 엮은 것이다.
“건축물이라는 게 산업 사회의 산물이죠. 쓸모를 다했으니 결국 버리거나 고치거나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어떻게’ 버리고 고칠 것인가를 구별해야 하죠. 의미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의미가 없어요. 이 벽을 보세요. 금이 가 있어요. 기둥은 콘크리트고 그사이를 채운 벽은 벽돌이에요. 그런데 벽돌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금이 가게 되어 있어요. 이 벽 아래를 보세요. 뭐가 있던 자리죠? 뭐였을 것 같아요? 라디에이터예요. 이런 게 흔적이죠.”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라디에이터지만, 과거에는 여기에 도시락을 올려 데워 먹었다. 한 공간에 대한 여러 시대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의 추억을 담은 흔적이다.
“1910년부터 건물이 지어졌다고 생각하면 100년 넘는 시간이에요. 얼마나 많이 지었겠어요? 오래된 것 다 헐고 새로 짓는다고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건축은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흔적을 지우기가 쉽지 않거든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살릴 것인가가 중요해요. 그런데 이 중요한 지점이라는 게 시대마다 바뀌어요. 그러니 재생이라는 건 결국 움직이는 생물 같죠. 쓸모를 다해가는 과거 건축물을 소생해내는 ‘재생’은 세계 트렌드예요. 그런데 재생이라는 게 반드시 새것으로 만드는 걸 뜻하는 건 아니에요. 못 쓰게 된 물건이라고 무조건 버리거나, 새롭게 만드는 것, 두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정치·사회적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나 공간이 어떤 이유로 바뀌었는지, 사용하는 사람이 거쳐가는 과정은 어땠는지, 이 흐름을 현재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가 생각하는 ‘재생’이다. 이는 문화재청 위원으로 활동하며 유심히 살펴본 유네스코 문화유산 보존 방법과도 결을 같이한다. 유네스코는 긴 논의 끝에 복원에는 건축의 진정성을 담아 후대 사람들이 차이를 알아볼 수 있도록 보강하는 방법을 택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같은 문화유산 복원 방식을 두고 유럽에서도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성룡 건축가는 꿈마루 재생 이전에 선유도공원에서 이런 방법을 적용해 이미 재생의 ‘좋은 사례’를 만들었다. 그는 외국의 도시재생 사례들을 가져와 무작정 적용하는 게 아니라, 거리, 건축물, 공간마다 상황을 고려해 남길 것은 남기는 재생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다. 꿈마루 재생 작업을 하면서 정부에 선유도공원과 꿈마루 두 곳을 시간의 흐름을 담은 재생 사례집으로 묶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담당자가 바뀌면서 결국 이뤄지지는 않았다.
“아파트는 30년이 넘으면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지만, 다른 건물들은 슬슬 문화재에 들어갈 수 있는 연한이 돼요. 문화재는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건축물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생각해봐야 하죠. 재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집의 시간을 잘 살펴야 한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노출 콘크리트가 트렌드처럼 되어버렸는데, 아무 데나 적용하면 안 돼요. 건축물마다 가진 고유한 시간과 상황을 담아야 하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마을 ‘소록도’
최근 조성룡 건축가가 마음을 쏟고 있는 곳은 소록도다. 10년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폐교를 이용해 문화공간 만드는 사업을 하려고 그를 찾았다. 그저 병원인 줄 알았던 소록도를 처음 방문한 그는 이곳에서 100년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걸 알게 됐다. 국가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이곳에 가두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마을을 이루고 살 정도였는지는 몰랐다. 소록도에는 7개의 마을이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이 중 가볼 수 있는 마을은 두 군데뿐이다. 주민이 가장 많았던 때는 6000여 명이 살았지만, 이제는 400명 정도 남았다.
“한센병이 있으면 결혼을 못 하게 했기 때문에 이들은 가족이 없어요. 있어도 숨기죠. 그러니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소록도’는 소멸할 거예요. 섬만 남겠죠. 그런데 아무도 이 마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소록도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어떻게 모르는 일로 넘길 수 있겠어요. 마치 코로나 팬데믹과 비슷하지 않아요? 국가가 강제로 격리하고, 양성이면 병원에서 치료하고 음성이면 마을에서 생활하도록 한 거죠. 전염도 되지 않고 완치 가능한 병이 되었는데도 1980년대까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용돼 강제로 노동하며 살았던 곳이에요. 그런데 그저 슬픈 이야기로만 구전되고 있죠.”
한센병에 관한 의학적 연구 자료는 많지만 이들이 살았던 마을, 집, 생활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직접 보기 전에는 소록도에 100년간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이를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만들어진 주차장 한가운데 남아 있던 장안리 마을 집 한 채를 발견해 안내소처럼 만들었다. 100주년 기념 조형물을 만들자던 병원 장을 설득해 기념관 조성을 제안한 것. 다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서생리 마을 복원 작업을 시도했다. 가장 오래된 집은 1920년대에 지어졌고, 최소 80년이 지난 집들이었다. 소록도의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일단은 집들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파이프로 보호하는 작업까지만 할 수 있었다.
“앙코르와트 사원처럼 무너져가는 집들과 나무·풀들이 한데 엉켜 있더라고요. 찾아보니 이 집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직접 벽돌 한장 한장 쌓아가며 만든 거예요. 당시 병원장이 이곳에 벽돌 공장도 만들었더라고요. 강제로 노동에 동원된 거죠. 그러니 아무리 무너진 집이라 해도, 그 벽돌 한 장을 그냥 버릴 수 없는 거예요.”
해방 이전까지는 일본인들이 남겨둔 기록이라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의 기록은 아예 없었다. 100년간 사람이 살았지만 누구도 손대지 않은 채 있었으니, 마을마다 집의 형태도 조금씩 다르고 시대마다 지어진 집도 달랐다. 또 처음에는 나무로 지었다가 무너지면 벽돌을 덧대는 등 여러 재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섞여 있었다. 조성룡 건축가는 이런 것을 연구하고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범하게 살았던 이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거예요.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걸 기록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증명하겠어요? 사진 몇 장으로 남아 있을 뿐이겠죠. 이 기록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야 도시를 어떻게 만들지도 고민하죠. 도시는 한 번 쓰고 말 게 아니라 지속해야 하니까요. 또 시대마다 도시의 모습이 다르잖아요. 어찌되었든 그것들을 기록해서 평가도 하고 반성도 하고 본받을 것은 본받고 고칠 것은 고쳐가야죠. 아파트는 재건축한다고 하면 항상 다 허물고 새로 짓잖아요. 그게 돈이 되니까요. 그러니 소록도 마을과 같은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소록도를 기록할 수 있도록 몇 년간 노력해 국가로부터 예산을 받았다. 그런데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이 예산을 다 채어갔다. 무척 기운 빠지는 일이었지만, 소록도의 실상을 알았는데 돈을 주지 않는다고 기록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왕복 10시간 넘는 거리를 달리며 그는 아직도 소록도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
“가치는 상대적이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죠. 지금까지 문화유산은 보존의 필요성만 있었지 ‘왜’ 보존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연구자가 논문을 쓰면서 ‘불편 문화유산’이라는 말을 쓰더라고요. Difficult Heritage를 불편 문화유산이라고 한 것인데, 특별한 해석이에요.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지만 사회가 불편해한다는 뜻이거든요.”
이를테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이 불편 문화유산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군부독재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지어진 건축물에 불편한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다. 조성룡 건축가는 그럴수록 ‘왜, 유산으로 남기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간을 기록한다는 건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국가가 교과서에 남기는 역사만 있는 게 아니에요. 개인의 역사도 역사지요. 역사가 쌓여서 축적되었다는 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준다는 게 중요해요.” 그가 하는 건축물과 공간의 재생은 어쩌면 역사를 기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의재미술관은 광주광역시 무등산 자락에 있다. 광주 사람들의 무등산 애호는 유난하다.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후덕한 산으로 친다. 흔히 대찬 줏대와 넘치는 예술적 풍정을 광주의 개성으로 꼽는다. 이는 무등산을 산소처럼 숨 쉬며 살아가는 지역민들에게 은연중 형성된 토착 정서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등산 하면 한국화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그는 무등산 산방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화가로, 다인(茶人)으로, 농업 교육가로, 실천적 도인으로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의재미술관은 의재의 웅장한 정신과 실천을 톺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초가을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춤춘다. 머잖아 조락할 신세지만 아직은 산목숨이라 기쁘다는 투로. 나무들의 초록 물결 사이로 난 등산로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나무와 등산객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었다. 간혹 의재미술관으로 입장하는 이가 있을 성싶지만 도통 기척이 없다. 미술관에서 노니는 재미가 등산에 못 미칠 게 있나? 그러나 어딜 가나 썰렁하기 십상인 게 미술관이다. 게다가 의재미술관은 없는 듯이 있다. 티 내어 모습을 드러내길 애써 삼갔다. 숨은 듯이 있는 숲속의 미술관이다.
다시 말해 이 미술관은 자연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무등산의 가족이 되기 위해 몸을 낮췄다. 애초 설계가 그랬다. 산보다 돋보이거나, 산색보다 튀거나, 산허리를 갉아먹는 식의 무례를 범하지 않을 설계를 했다. 덕분에 무등산과 좋은 사이로 지낸다. 이런 미술관이 어디 흔하던가? 중견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를 주도했다. 그는 도드라지거나 요란한 건축에 질색한다. 사람의 욕망과 기술이 자연을 타고앉아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미술관은 일직선으로 늘어선 3개의 건물로 구성했다. 전시실이 있는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었다. 건물의 생김새는 극히 모던하다. 노출 콘크리트와 강화유리, 목재를 조합해 세련미와 기능성을 구현했다. 기발한 디자인과 미학을 주조로 삼은 건물은 아니다. 언뜻 보면 차라리 요즘에 흔한 건축 유형이다. 그러나 뜯어보면 참신하다. 자연환경에 녹아들어간 조화로움과 생동감을 불어넣은 섬세한 디테일로 품격과 미를 동시에 잡았다. 이런 미덕을 평가받아 개관한 해인 2001년에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의재미술관은 의재를 기리기 위해 문을 연 사립미술관이다. 의재의 종손 허달재 화백이 재단을 만들어 설립을 주도했다. 흥미로운 건 광주시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점이다.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하고 막대한 건립 재원까지 협찬했다. 사립미술관 건립에 시가 물심양면으로 거들었다? 드문 경우다. 의재의 삶에 서린 오라가 사후까지 여론을 움직여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그림은 물론 덕망과 신망으로 본을 보이고 떠난 이가 의재다. 광주의 ‘큰 어른’으로 똑떨어지는 행장을 남겼다. 다재(多才)와 이타(利他)로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 광주 사람치고 의재의 됨됨이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의재는 남종화의 대가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동양화가 북종화라면, 느끼는 대로 그리는 동양화는 남종화다. 이른바 ‘사의’(寫意)를 표출하는 남종화풍이 성행한 건 18세기 조선 화단의 거두 윤두서, 정선, 조영석 등에 의해서였다. 이후 강세황과 추사에게로 그 맥이 이어졌고, 소치 허련에 이르러 남종화의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소치의 화풍은 그의 후손인 미산 허형과 남농 허건, 그리고 의재 허백련에게 상속돼 화려한 꽃을 피웠다. 20세기 이후 주로 소치의 혈육들에 의해 남종화의 전통이 계승된 셈이다.
“나는 차 한 모금만큼 향기로웠나?”
이제 본관으로 들어선다. 얼마 전 새 단장을 마친 건물 내부는 외부처럼 말끔하다. 벽면과 천장과 기둥은 흰 칠을 입어 환하다. 게다가 병풍처럼 가로로 널따랗게 펼쳐지는 전면 유리창으로 외부의 빛이 물살처럼 솰솰 들이쳐 한층 밝다. 밝기만 하면 무슨 재미? 운치는 무엇으로 돋우나? 유리창을 즐비하게 배치한 이유가 다 있다. 채광은 기본이고 덤으로 차경(借景 : 외부 풍경 끌어들이기) 효과를 거두고 있는 거다. 창 너머 나무들이 토하는 초록과 씽씽한 기세는 그저 본연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일 경우엔 맛깔이 다르다. 그림에 맞먹을 흥취를 야기한다.
전시실에서는 ‘문향(聞香); 인연의 향기를 듣다’전이 진행되고 있다.(11월 28일까지) 산수화, 사군자, 화조도, 서예 등 의재의 작품 34점이 걸렸다. 모두 쌍낙관(雙落款 : 그린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이 함께 들어간 낙관)이 찍힌 작품들이다. 의재가 지인들에게 그려준 그림들을 모은 전시회라는 얘기다.
현대의 서양화는 전위적이고 도발적인 작풍으로 사람의 굳은 상식을 전복한다. 기상천외한 발상과 쇼로 갈채를 유발한다. 이에 비해 오나가나 산수를 소재로 삼는 동양화는 저만치 홀로 핀 들꽃처럼 얌전하다. 고답적이라 따분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가, 푸대접이 다반사다. 요즘은 아예 찬밥 신세다. 전통 수묵화를 그리는 이 자체가 드물어도 너무 드물다. 이 점에서 국내 유일의 남종화 전문 미술관인 의재미술관은 전통 회화의 마지막 보루일지도. 의재의 그림에 관해선 토를 달 게 없다. 필치는 능란하며 드러나는 세계는 따뜻해서 아름답다. 별유천지다. 개결하며 유현하다. 나 같은 석두조차 설레게 하는 화풍이다.
의재는 그림에만 정신을 쏟진 않았다. 그를 지배한 이상과 상상은 광활했다. 심중에 ‘삼애’(三愛)를 품고 살았다. 애천(愛天)·애토(愛土)·애가(愛家)를 푯대로 삼았다. 춘설차를 보급, 대중으로 하여금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진실을 체험하게 했다. 그 무엇보다 그의 생각과 실천은 항상 일치했다. 농업학교를 세워 농사꾼을 양성하기도 했는데, 그를 찾아온 화가 지망생들은 반드시 농사일을 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을 의재미술관 지척에 있는 자그만 산방 춘설헌에서 도모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의재는 “나는 실패한 화가”라 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과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마 향기로웠던가? 얼굴이 붉어진다.” 말년까지 자신을 거울처럼 들여다봤던 것이다. 도란 대체로 자성(自省)으로 무르익는다. 자성엔 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를 도인이라 하고.
소마미술관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드넓은 공원엔 나무들이 많으니 얼추 자연 풍경과 동행하는 미술관이다. 세한에 부는 바람은 차고 황량하다. 공원 외부의 대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마저 강풍에 고꾸라진다. 이런 날씨에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다. 마음을 데워준다는 점에서 미술 작품 관람도 미진할 게 없다. 바람에 산발처럼 너울거리는 옷자락을 여미며 소마미술관으로 접어든다. 어떤 매력의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소마미술관 건축은 단출하다. 박스 형태의 2층 구조물 하나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평으로 전개된 1층 건축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들썩이는 구석이 없어 차분하다. 허공으로 불쑥 솟은 게 없고 거추장스러운 치레도 없어 고상하다. 자연스레 친근감을 자아낸다. 모자라지 않으려면 간명한 게 좋고, 지나치지 않으려면 평범한 게 좋다. 이게 처세에서뿐이랴. 건축도 마찬가지, 거창하면 자칫 허점을 초래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소마미술관의 외양은 미더운 느낌을 준다. 마치 가장과 과장이 없는 성향의 사람을 바라볼 때처럼.
그런데 나지막한 건물을 지은 데엔 유별한 연유가 있다. 어떤? 이 미술관은 2004년 9월에 개관했다. 진통을 겪고서였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이다. 푸르고 향긋한 올림픽공원을 제집 앞마당처럼 여기며 애호했던 주민들이 “미술관 건립이 웬 말이냐?”며 쌍심지를 켜고 반대운동을 했다. 공원 경관 훼손을 이유로 삼아서였다. 기어이 뭔가를 지을 거면 차라리 도서관을 지으라고 했다. 결국 낮은 건물을 짓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서야 공사를 착수할 수 있었다.
건물의 외관은 단아하다. 노출 콘크리트를 주조로 한 벽면의 일부에 적삼목(메타세쿼이아) 패널을 입히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치장을 자제해 실용성과 단순미를 구현했다. 간간이 유리창을 집중 설치한 건 외부의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아울러 내부를 외부로 열어 보이기 위해서다. 따라서 풍경이 소통된다. 건물의 처신이 이러하니 사람도 답답할 게 없다.
창으로 들이치는 자연광의 농도에 따라, 시차에 따라 회랑이나 중정, 혹은 전시실의 광도가 다변한다. 그 소리 없는 빛의 스펙트럼에 실내는 한결 고요하고 유려하다. 차고 건조한 인공조명에 비해 자연 조명은 따뜻한 내면을 지닌 것만 같다. 물론 어느 건물이건, 아파트건 산중 오두막이건 창이 달려 빛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자연조명을 미술 행위의 하나로까지 여기는 미술관 건축에서처럼 매혹적인 자연광은 드물다. 건축가는 자연광을 건축 재료의 하나로 존중해 고도의 기교를 발휘한다. 이 미술관의 건축가도 빛의 포획에 능란하다. 가급적 인공조명 대신 자연광선을 전시장에 배포하기 위해 통유리 창을 매우 과감하게 구성하기도 했다. 그게 살짝 지나쳤나? 과도한 자연광에 전시 작품이 훼손될 걸 우려해 전시실 유리벽의 일부를 패널로 틀어막았다.
소마미술관 설계자는 건축가 조성룡이다. 지형에 순응하기, 수평성을 강조하되 동선의 유기적 순환 체계를 확보하기, 저만치에 있는 몽촌토성의 경관을 위압하지 않도록 규모를 자제하기, 채광과 조망을 위한 개구부를 기능적으로 설비하기, 이것들이 설계의 기본 지침이었다. 조성룡은 ‘결국은 풍화(風化) 과정을 통해 퇴화하고 소멸할 건축물의 숙명’을 염두에 두고 건축을 설계한다. 건축물을 일종의 생명체로 바라보는 것이겠지. 인생의 희로애락을 미술로 토로하는 화가처럼, 그 역시 건축으로 삶과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가보다.
올림픽조각공원, 미술사의 획기적 사건
개관 이래 소마미술관은 묵직한 기획전을 자주 펼쳤다. 이름난 이름들의 작품을 심심할 짬이 없이 불러들였다. 파울 클레, 반 고흐, 피카소, 요셉 보이스, 백남준, 밀레, 프리다 칼로…. 불구경을 하다가도 달려가고플 대가들의 작품전을 펼쳤으니 그 방면으로 한가락 하는 미술관? 올림픽공원의 운영 주체이자 소마미술관 경영주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흐벅진 일을 하고 있다. 체육기관이 예술과 손을 잡았으니 이색이다. 이 미술관은 2006년, 국내 최초로 드로잉센터를 설립, 드로잉 분야 기획전을 집중적으로 펼쳐왔다. 물론 드로잉 외에 다양한 장르의 미술전도 정기적으로 선보인다.
지금은 ‘푸룻푸룻뮤지엄: APPLE IN MY EYES’ 전이 진행(2월 14일까지) 중이다. 주제는 주로 과일과 나무다. 국내 작가 15명이 참여했다. 회화, 설치, 조각,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미술 행위를 통해 주제를 요리한다. 저마다 기발하게, 요상하게, 상큼발랄하게 모티브를 풀어냈다. 눈을 후비는 현란한 색감과 비주얼로 전시실이 아예 만화경 속이다. 미술도 이쯤이면 쉽고 재미있는 유희다. 오감에 스파크 튀게 하는 판타지 영화관이다. 아이들은 여기에서 놀면 좋겠다. 어른들은 여기에서 감각의 굳은살을 벗겨낼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관람객이 가뭄에 콩 난 형국으로 드물다. 도대체 코로나가 삼키지 않은 게 뭐람.
미술관을 나와 올림픽조각공원으로 들어선다. 43만 평에 달하는 올림픽공원의 전체 부지 가운데 자그마치 23만 평이나 되는 너른 공간에 조성된 올림픽조각공원은 소마미술관이 보유한 최상의 자산이다. 국내외 작가들의 조각 220점이 산재했다.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예술 향연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이곳은 공간의 스케일과 작품들의 품격으로 세계적인 조각공원이라 평가된다. 스위스의 저명한 화가 한스 에르니(Hans Erni)는 ‘금세기 미술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 극찬했다.
그러나 정작 알아보는 이가 많지 않다. 일부러 찾아와 유심히 감상하는 눈들로 후끈할 법하지만 실상은 다르단다. 미술계 사람들은 그래 속이 쓰리다. 진수성찬을 차려놨지만 먹자는 사람이 드문 꼴이다. 구미에 맞는 사람만 한갓지게 포식한다. 꿈과 상상을 말없는 말로 두런거리는 조각 작품이 흔전만전한 산책 공원이라니. 한풍이 맵차지만 기분은 상승한다.
< 2편에 계속 >
자연과 건축은 좋은 사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은 자주 자연을 도발한다. 도시 근교 산자락을 파 젖히고 들어앉은 건물들의 현란한 형형색색을 보라. 자연하고 불화를 즐기는 취향? 심술? 그러려면 그러라지, 자연이야 대범하여 그저 태연하다. 지나다니며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만 피곤하다. ‘이응노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러하다. 자연과 친화 관계 맺기에 성공한 건축을 만나는 즐거움의 반향이다. 자연과 좋은 사이로 지내는 미술관을 보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이응노의 집’으로 고고싱!
‘이응노의 집’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생가 터에 지은 기념관이자 미술관이다. 이응노는 생의 후반을 줄곧 파리에서 살았으나 고향을 못내 못 잊어했다. “나는 충청도 홍성 사람이외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고향 땅이 그리워 자랑처럼 흔히 홍성을 얘기했다. 그리운 게 고향의 산천뿐이었겠는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성장기의 순수했던 ‘나’에 대한 그리움도 컸을 게다. 고향이란 인간의 욕망이 회항하는 귀소(歸巢)다. 영혼마저 한 자락 실린 고감도의 어떤 차원이다.
한국을 넘어 유럽으로 창작활동의 범주를 확장했던 거목 이응노. 그의 창작력은 한 번 터져 멈출 줄 모르는 활화산처럼 격렬했다. 미술의 온갖 장르를 편력하며 쏟아 부은 다재다능은 또 어떻고? 이 걸출한 화가는 미술에 목숨을 걸어 얻을 걸 다 얻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응노의 집’을 건립할 때 눈총들이 쏟아졌다. 싫어하는 소리들과 반대하는 입장들이 분분했다. 이응노라 하면 ‘동백림 사건’부터 떠올리며 ‘불온한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재판에 의해 왜곡된 혐의는 벗겨졌고,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은 2년 6개월간의 옥고로 갚았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여파. 미술계 내부에서조차 불편해하는 눈들이 있었다. ‘이응노의 집’은 이 일각의 소음과 맞선 단호한 결행으로 건립되었다. 건립 주체는 홍성군 당국. 그들은 2011년, 마침내 ‘이응노의 집’을 개관해 지자체가 멀뚱히 앉아 한심하게도 펜대만 굴리는 ‘철밥통’ 집단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고개 숙이고 마을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
‘이응노의 집’은 2만6000㎡(약 8000평)의 널찍한 부지에 조성되었다. 991㎡(약 300평)의 미술관을 본동으로 하고 북 카페와 다목적실을 곁에 배치했다. 원래 있었던 지형을 그대로 두고 조경을 한 야외정원은 순박하면서 평온하다. 떠올랐다 가라앉는 상념처럼 일렁이는 정원의 저 부드러운 곡선들. 돌처럼 가만히 앉아 쉬기에 좋은 공간이다. 정원 전면엔 연(蓮)이 자라는 못이 펼쳐진다. 연못과 정원을 거쳐 뒷산으로 흘러들어가는 산책로 역시 그지없이 자연스럽다. 무리가 없어 순리를 느끼게 하는 이 모든 유순한 외경들.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하등의 낯설음을 야기하지 않는 풍경들의 협연. 티 나지 않게 공들인 결과일 게다.
본동 건축을 볼까. 지나치게 크지 않은 사이즈로 지어져 소박하다. 위압이나 위세가 없어 얌전하나 은근히 세련돼 당당하다. 그 무엇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지세 성격과 산세 리듬에 조응해 정당하다. 과거부터 터를 잡고 존재해온 마을과 마을 사람들까지 고려한 수굿한 모습이라 안성맞춤이다.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마을의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이지 않은가. 이런 구색, 이런 조합이 어디 흔할까보냐. 설계자의 의도가 정밀하게 구현된 걸 느낄 수 있다.
미술관 벽채의 색상을 보자. 황토를 이기고 다져 발랐으니 황토색이다. 굳이 황토를 채택한 건 그게 향토의 빛깔을 뿜어서일 게다. 대지의 살갗 색깔 말이다. 그러나 온통 황토색 일색이면 지루하겠지. 외벽을 분할하며 개입한 흑회색 벽면이 대비와 조화를 이루어 조용히 생동한다.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이는 중견 건축가 조성룡. 그는 건축물이 튀거나 돋보이는 걸 질색으로 여긴다. 인위가 자연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일 게다. 사람의 기술이 자연과 풍속을 말처럼 타고앉아서는 무례하다 봐서일 게다.
홍성군청과 설계자는 생가 터만 휑하게 남은 부지에서 이응노의 형적을 찾는 일로부터 사업을 착수했을 것이다. 화가는 이곳에서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생가는 물론, 뭐 하나 남아 있는 유적이 없는 상태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심정으로 생가를 복원했을 테다. 다행히 소년 이응노에게 미술의 싹눈을 틔워준 자연은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안도하지 않았을까. 나지막한 산들은 충청도 말씨처럼 느릿느릿 푸근하게 품을 펼친다. 저만치 띄엄띄엄 산재한 농가들의 지붕 위로는 새가 기쁘게 날고 솔바람이 감나무를 흔들며 지나간다. 인근에서 소음을 쏟아내며 물방개처럼 허우적거리는 차량만 아니라면 마냥 예스러울 농촌 풍경이다. 이응노는 고향에서의 성장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열일곱 살까지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방해했다. 나는 남몰래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외로움을 잊었다.”
찡하지 않은가. 고향 산천은 이응노를 길러 그림에 눈뜨게 했으나, 다만 홀로 외로이 온갖 것에다 끼적거릴 수밖에 없었다지 않은가. 홀로 외로이! 이는 예술을 부양할 수 있는 본성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응노는 고향의 자연과 고향 사람들의 당연한 무신경을 통해, 어차피 홀로 가야 하는 창작의 외길을 견딜 고독의 힘과 강철 같은 인내심을 기른 게 아니었을까. 이응노의 광적인 창작 욕구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의 다산성(그는 자그마치 3만여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의 싹은 이미 고향에서 발아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쯤에서 이응노의 눈으로 이곳의 평범한 자연을 평범치 않은 기분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응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음을 상기하며.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었던 작가
미술관 내부로 들어선다. 로비를 돌아서자 외부처럼 수수한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레와 꾸밈을 한껏 자제해 담박하다. 혹여 전시공간의 장식성이 전시작품으로 향하는 시선들의 집중도를 해할까 염려해 꾸린 의도가 완연하다. 외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계자는 자신의 존재는 물론 공간 자체의 미감까지 과하게 부각되지 않도록 신중한 고려를 했다. 그럼에도 멋 부린 티 없이 멋스러운 게 있다. 벽과 벽 사이에 설치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 채광이 자아내는 효과가 그렇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 밝음과 어둠의 공존으로 공간에 깊이감과 긴장감을 부여했다.
전시실은 네 개로 구성됐다. 현재 ‘고암 이응노의 사생과 소묘’라는 타이틀의 전람회가 진행 중이다. 전시 작품들은 물론 ‘이응노의 집’의 소장품들이다. 이 미술관은 1000여 점에 달하는 이응노의 작품과 유품을 소장했다. 화가의 유족들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기증품이 많지만 홍성군이 직접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사들일 작정이라 한다. 군 단위 지자체가 예술품 구입에 적극 나선다? 아마도 드문 일일 게다. 지역 정책에 예술이 가세하고서야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 터. 시대를 읽는 홍성군의 촉이 예리하다.
이제 전시회에 나온 그림을 둘러볼까?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이응노가 전국을 기행하며 사생한 그림들 12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습작처럼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들 일색이어서 살짝 아쉽다. 그러나 대가의 노련한 필치와 호방한 운필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흔히 이응노가 말년에 그린 ‘군상’ 시리즈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부단히 화풍을 변주하고 전복해 경계를 무너뜨렸다. 어느새 저기까지 갔나 했더니 또 저만치로 내달리는 폭주 열차? 그는 혈관에 팽배한 아드레날린을 주체 못하는 사람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또 그렸다. 추상미술이 판치는 파리에서 동양의 정신을 기저로 한 ‘문자 추상’ 또는 ‘서예적 추상’으로 유럽 화단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 유럽인들은 ‘범신론적 미학’을, ‘주술적 매력’을 발견했다. 주술! 작품 이전에 이응노 자신이 이미 주술의 올가미에 걸린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라는 주술에.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는다.”
이응노의 예술은 만발했다. 그러나 삶엔 그늘이 서려 불운했다. 옥고도 고난이었지만, 이후의 시간들도 밝을 수만은 없었으니. 정치적 파랑에 휩쓸리다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가야 했으니. 그는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로. ‘이응노의 집’ 허공에 서늘한 바람 한 점 서성이걸랑 고인을 기릴 일이다. 바람이 그의 기척인 양.
‘이응노의 집’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
거장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
“그거 아는가? ‘이응노의 집’은 참으로 눈물겹게 지은 기념관이라는 거.”
조성룡 선생의 첫마디에 저릿하다. ‘이응노의 집’ 설계자인 그는 건립 과정상의 곡절을 누구보다 잘 안다. “눈물겹게 지었다”는 한마디에 이미 모든 게 들어 있지만, 그는 ‘이응노의 집’이 여느 미술관과 다르게 많은 애환을 거쳐 건립된 공간이라는 걸 놓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사실 ‘이응노의 집’은 손쉽게 지어진 기념관이 아니다. “좌파 화가에게 무슨 기념관이냐? 어림없다!” 홍성군에 의해 기념관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 일부 주민들 속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에 홍성군은 ‘이응노의 집’이 지역의 문화예술 역량을 북돋울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준공 직후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건축물의 모양새가 너무 소박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 고암 이응노의 담백한 예술정신을 담고자 한 설계자의 진중한 의도를 납득하지 못했던 셈이다.
“홍성은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한 곳이다. 나는 그 ‘켜의 드러내기’를 설계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켜’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걸 주안점으로 했나? “고암이 성장기에 보고 자란 자연 환경을 존중해 일을 진행했다. 이곳의 수려한 용봉산과 월산은 물론, 평온한 마을 풍경은 한 소년을 예술로 이끌어준 벗이자 스승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연 경관을 고려해 건축을 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다.”
건축물은 물론,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외부 정원에서도 설계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관람객이 이곳 쌍바위마을 사람들의 일상적 통행로인 다리와 농로를 거쳐 정원과 만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런 동선을 통해야 고암 선생이 늘 바라보았을 시골 풍경의 정취를 누릴 수 있어서다.”
생가 복원엔 본으로 삼은 자료가 있었나? “어느 시골집을 그린 고암의 풍경화를 참고로 했다. 생가 뒤편에서 울타리를 이룬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고 되살렸다.”
상업적 의도를 중심에 둔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농촌의 한적한 자리에 있는 ‘이응노의 집’은 매우 귀하게 느껴진다. “거장의 소장품이 있고, 아울러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있는 이 미술관은 특유의 공간이다. 그 무엇보다 고암의 숨결이 배인 장소라 소중하다. 농촌에 있는 미술관치고는 관람객도 많은 편이다.”
조성룡 선생은 소마미술관과 의재미술관도 설계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한다.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책 ‘건축과 풍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풍화’의 개념을 이런 요지로 설명했다.
“건축물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기의 영향으로 낡기 시작한다. 따라서 가급적 풍화를 지연시키기, 노화가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이게 짓기. 이게 나의 목표이자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