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트(rosette)의 사전적인 뜻은 장미꽃 모양. 마치 장미꽃을 펼쳐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추운 겨울에도 잎은 광합성으로 당분 함량을 높여 동상을 막는 부동액 역할을 한다. 민들레, 질경이 달맞이꽃 등이 대표적인 로제트 식물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 은근과 끈기로 월동을 마친 이 로제트식물들이 지금, 3월 초 산과 들 그리고 길가에서 피어나고 있다.
보도블록의 틈새나 아파트 외벽의 작은 틈새의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발로 밟고 잡초라고 마구 뜯어내는 악조건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려고 새싹을 내고 새순을 내며 꽃을 피우고 있다.
"로제트식물은 동장군도 이긴다"고 한다. 질경이는 찻길에서 자라면서 사람이 밟고 차가 다녀도 산다고 하여 질경이의 다른 이름으로 차전초(車前草)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로제트 식물인 질경이, 민들레, 달맞이꽃, 꽃마리, 지칭개, 황새냉이, 제비꽃, 씀바귀, 고들빼기, 망초, 방가지똥 등의 은근과 끈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올겨울이 추웠던 만큼 새싹은 더 싱싱하게 올라온다. 봄이 되니 마을 여기저기서 쑥 뜯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린 시절 누나와 동생이랑 논두렁에서 쑥을 뜯어 끓여 먹던 쑥된장국 냄새가 아련하다. 쑥떡 생각도 난다. 쑥은 왠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따뜻한 고향의 느낌을 주는 음식이자 약초다.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식물이라 하면 무궁화, 진달래, 민들레, 쑥 등을 들 수 있다.
쑥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에서 가장 먼저 자라난 풀이다. 국화과 식물은 대부분 벌레를 이용해 수정을 하는 충매화인데, 쑥은 바람에 의해 수정이 되는 풍매화이기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다. 이처럼 생명력이 강하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와 닮아 있고, 또 그에 걸맞은 약효를 갖고 있다.
쑥은 ‘의초(醫草)’로 불릴 정도로 약효가 뛰어난 풀이다. 단군 신화에는 쑥과 마늘 이야기로 나오고, ‘맹자’에는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이야기로 등장한다. 동양에서는 쑥을 먹기도 했고 쑥 달인 물에 몸을 씻기도 했으며 말려서 뜸을 뜨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쑥을 ‘Gypsy′s Tobacco’라 부르는데, 이는 이동이 많은 집시들이 건조된 쑥을 태워 악귀를 쫓고 역병을 치료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쑥은 동서양 모두에서 의학적 기능을 해온 식물이다.
쑥은 단군 신화에 등장하면서 우리 민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왔다. 웅녀는 동굴에서 쑥과 마늘로 21일을 버틴 끝에 사람으로 변해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 우리 민족의 피 속에 대대로 쑥 향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웅녀가 쑥과 마늘을 먹은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마늘은 강력한 천연 항생제이며 항암작용과 살균작용이 뛰어나다. 구운 마늘은 아랫배를 따뜻하게 해준다. 또 쑥을 태워 악기를 쫓을 수 있고, 묵혀서 뜸을 뜨면 각종 병을 치료하며, 갓 캐어 끓여 먹으면 여성의 자궁에 매우 좋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늘과 쑥이 생명 보존에 매우 소중한 자원이었다.
쑥은 여성과 관련한 풀이다. 여성에게 있어 피의 저장 공간인 자궁과 아랫배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생리의 양이 적거나 너무 많은 경우, 아랫배가 차가워 생리통이 있는 경우, 생리주기가 불규칙한 경우에 좋다. 임신 초기에 태아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피가 비치면서 불안한 경우에도 좋다. 냉이 많은 여성이나 설사를 자주 하는 여성에게도 도움이 된다. 쑥의 속명은 ‘아르테미시아(Artemisia)’인데 그리스 신화에서 탄생과 다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서양에서도 쑥은 여성을 보호하는 식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쑥은 각종 출혈증에도 좋다. 코피를 흘리거나 피를 토할 때, 대변에 피가 섞여 있을 때, 하혈이 심할 때 좋다. 또 차가운 체질의 만성 위장병에도 좋다. 쑥 향기는 식욕을 돋워줄 뿐만 아니라 몸의 습기도 말려줘 습진, 치질 등의 증세를 호전시킨다. 또 쑥 향기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간 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특히 좋다. 이때는 묵힌 쑥이 아니라 갓 캐낸 쑥을 사용해야 더 좋다. 이밖에 쑥 향기는 이목구비를 소통시켜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능도 있다. 또한 나쁜 기운이나 상한 음식 때문에 가슴이나 배가 갑자기 아플 때도 쑥국이 좋다.
탈항(脫肛)이나 치질, 변비 등 항문 질환에는 쑥을 태워서 훈증하거나 달인 물로 씻어주고 뜨거운 김을 쐬어주면 좋다. 한의학의 기본이 침과 뜸, 약인데, 뜸의 주재료가 묵힌 쑥이다. 오래 묵힌 쑥일수록 뜸 효과가 더 좋다. 뜸에는 살을 태우지 않는 간접구(間接灸)와 살을 태우는 직접구가 있다. 간접구(直接灸)는 위장을 운동시켜주고 상열하한(上熱下寒), 즉 머리가 뜨겁고 아랫배와 다리가 차가운 증상을 치료해준다. 간접구는 주로 위장과 배꼽, 단전 부위에 뜸을 뜬다. 직접구는 국소 부위로 피와 에너지를 끌어모으며 회복 작용을 돕는다. 쑥을 뜸으로 쓸 때는 3년 이상 묵힌 쑥을 쓰는 것이 좋은데, 직접구일수록 더욱 그렇다. 쑥뜸의 적용 범위는 매우 넓고 효과 또한 강력하다. 쑥은 진정 ‘의초’라 불릴 자격이 있다.
쑥은 강화도와 백령도 등 서해안의 쑥이 유명한데, 사자발쑥과 싸자리쑥이 있다. 강화도와 백령도는 서해 해풍이 바로 불어오는 곳이다. 소금기와 바람이 식물의 수분을 말려버려 일반 식물은 해풍이 강한 곳에서는 살기 힘들다. 따라서 이곳 식물들은 개질경이처럼 털이 많거나, 선인장처럼 잎이 육질로 변하거나, 퉁퉁마디처럼 스스로 소금기를 머금거나 하는 생존 전략을 선택한다. 원래 건조한 지역에서 살아서 잎 뒷면 털이 발달한 쑥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잎 뒷면 흰 털을 보다 강화해서 수분을 더 잘 갈무리하는 것이다. 해풍이 강한 곳일수록 흰 털이 더 발달해, 강화도에서도 해풍을 직접적으로 받는 화도면 내리의 사자발쑥과 싸자리쑥이 유명하다.
쑥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쑥으로 뜸을 뜨면 수분과 습을 조절해서 몸이 가벼워진다. 참쑥과 사자발쑥은 식용으로 많이 쓰고, 싸자리쑥은 뜸용으로 많이 쓴다. 올해도 앞마당에는 어김없이 쑥이 자라 올라오고 있다. 우리 민족과 역사를 같이 해온 쑥은 우리에게 쑥쑥 힘을 보태주고 있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로 ‘동의보감약선(東醫寶鑑藥膳)’, ‘사람을 살리는 음식 사람을 죽이는 음식’이 있다.
전남 진도의 고군면 회동리에서 의신면 모도리까지 2.8km의 바다가 해마다 두 번씩 3월에 사흘, 4월에 나흘간 조수간만의 차(差)와 인력(引力)의 영향으로, 수심이 낮아지고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한 시간 동안 폭 40여 미터의 길을 연다. ‘모세의 기적’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열리는 바닷길을 걸으며 갯벌을 체험하는 ‘바닷길 축제’가 올해는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열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랬듯이, 어부는 이때를 놓칠세라 등짐을 잔뜩 지고, 어부의 딸은 봇짐을 머리에 이고 그 길을 가고 있다. 한쪽 바다는 격랑의 물결이 사납다. 두려운 이 길을 건너고 있는 부녀는 불편한 돌길에 두 발을 묻고 있다. 옥주산인 김옥진(沃州山人 金玉振, 1928~2017)의 한국화 은 고향의 어느 봄날의 실경(實景)이다. 진도군 임회면에서 출생, 진도의 옛 이름인 옥주(沃州)에서 옥주산인(沃州山人), 옥산(沃山)을 아호로 취했다. 조선 남종화의 시대를 연 운림산방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3)의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에게서 방손(傍孫)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이 묵화를 배우고 그를 사사한 옥주산인이 같은 남종화의 길을 걸었다. 또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만들어진 동양화(東洋畵)라는 명칭을 한국화(韓國畵)로 바꿔야 한다고 주창하고 실천했다.
옥주산인 김옥진
1979년 제28회 국전에서 영예의 초대작가상을 받은 은 전통적인 문인화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진도 앞바다 울돌목(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격전지)의 소용돌이치는 실경을 파격적으로 표현했다. 옥주는 처음 의재를 뵈올 때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임화(臨畵)를 그려와 펼쳐 보였을 정도로 남달랐다. ‘진도농업실기학교’를 다닌 바 있는 그는 의재를 사사하며 의재 선생이 1947년 광주에 세운 ‘농업고등기술학교’ 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0여 년간 시서화(詩書畵)뿐 아니라 춘설헌(春雪軒, 의재 허백련 선생이 1956년 차밭 아래에 화실로 사용했던 곳)의 차 재배와 생산 및 다도(茶道)의 보급 등 명실공히 의재의 고고한 선비정신까지 계승했다. 주위의 예술인들은 “큰 바위와 같이 굵직한 인품을 지니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안목이 굉장히 예리하다”고 칭한다.
오래전 한 도예가의 작업실에서 코발트와 철화(鐵畵), 진사(辰砂)의 안료를 붓에 찍어 도자화를 그리던 옥주 화백을 만나 뵈었는데, 두어 시간 차를 마시며 안광(眼光)을 빛내 열강하던 ‘개결한 예술인의 품성’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수선화를 그린 소품도 받았는데, 그 순간 1972년 무등산자락 ‘춘설헌’으로 의재 선생을 찾아가 큰 절로 뵈었을 때 따라주셨던 ‘춘설차’의 깊은 향이 맴도는 듯했다.
을 통해 옥주 화백은 ‘스스로 걷고 있는 예도(藝道)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고(至高)하되 그러나 신산한 그 길이 이 어부가 식솔과 가고 있는 두렵고 불안한 천형(天刑)의 바닷길과 같을 것이다. 발을 삐끗하면 격랑의 물결 속에 매몰될 것이고,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이 길은 바닷물에 덮일 것이기 때문이다. 친한 수집가에게서 빼앗다시피 해서 갖고 온 이 그림을 펼쳐놓을 때마다 ‘나는 과연 내 길을 바르게 걷고 있나?’ 하고 자성(自省)하게 된다.
우현 송영방
봄기운이 슬며시 산자락 밑 개울의 얼음을 녹이더니, 어느새 낮은 산 양쪽 계곡으로 물이 모여 제법 넓은 내를 이루었다. 개울 위 한쪽에는 좁은 섶다리도 놓였고 두 개울이 만나는 얕은 둔덕에 마른 잡초도 촉촉한 생기로 일어서고, 물가의 버들개지일까 잎끝이 연두의 점을 찍었다. 소나무들이 곧게 자라서 무리를 짓거나 작은 길 둔덕에 즐비하다. 개울 건너 경사가 완만한 조그만 산밭에서는 늙은 촌부가 누런 소에 쟁기 매어 밭갈이 한창이고, 노처는 고개 숙여 씨앗을 묻기에 여념 없다. 쟁기를 지고 왔던 지게와 씨앗을 담아온 종다래끼가 빈 밭의 허전한 구도를 깨고 있다. 한 해의 첫 봄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먹의 농담만으로 그려진 산봉우리는 가로 그은 옅은 붓질이 겹쳐 유현한 빛을 발하고, 담박(淡泊)한 선으로 단숨에 그려진 개울이며 산밭이며 소나무들까지 소박한 실경을 그대로 표현했다. 여느 풍경화보다 고향의 산자락을 생각나게 해,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를 그린 우현 송영방(牛玄 宋榮邦, 1936~)은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국전에서 특선을 하며 화업의 길로 들어선 분이다. 대학 3학년 중반까지 서양화를 그리다 “물감의 느끼한 기름기가 싫어서 한지에 먹으로 그리는 붓을 잡았다”고 술회했다. 대학 스승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과 산정 서세옥(山丁 徐世鈺, 1929~)에게서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사사한 그는 유년기에 한학을 하던 선친에게서 붓 잡기를 익혔고 고향집 벽장, 두껍닫이에 붙은 민화(民畵)를 따라 그려보곤 했다고 회고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揷畵)를 그려 용돈을 마련했던 대학 시절에는 하찮게 여기던 삽화의 경지를 심의(心意)의 그림으로 고양(高揚)시켰다는 출판인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삽화를 삽도(揷圖)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법정(法頂, 1932~2010) 스님 수상집 표지화 등은 지금도 ‘격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 3월 31일부터 6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은 그의 화업을 정리하는 회고전이었다. 오채라 함은 먹의 농(濃), 담(淡), 건(乾), 습(濕), 초(焦)나 흑(黑)을 가리키며 먹색의 풍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불교 재단인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와 예술대학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불가의 오묘한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아호는 12세기 북송 말엽 곽암사원(廓庵師遠, 생몰년대 미상) 선사(禪師)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에서 ‘우(牛)’를 취하고, 노자(老子)의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 멀고 또 그윽하도다! 뭇 묘함이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에서 ‘현(玄)’을 취했다고 한다.
그는 먹을 풀어 담담한 문인화풍의, 그러나 실경을 농축된 심경으로 진솔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그의 많은 그림의 특징은 채색 물감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먹만으로 완성했음에도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또 먹의 선이 간결하고 날씬하되 요체(要諦)를 응집시켜 군더더기나 부족함이 없다. “그림을 그릴 때 채색을 피하고 먹을 위주로 그리는데 그 이유는 먹의 오묘함이 어떤 화려한 색보다 그 전달력에 있어 능란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바람은 나의 개성 표현에 있습니다. 자기다운 것을 하기 위해 예술을 덩어리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려한 색채의 화초보다는 길섶의 질경이꽃같이 살고 싶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우현이 한 말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바야흐로 춘삼월 봄이 되면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녹기 시작한다. 왕성한 봄의 기운은 땅 위로 솟아오르는 식물의 새싹을 보면서 느낀다. 봄이 오고 때맞춰 수많은 자생 산나물의 새싹이 힘차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는 먹을 수 있는 산나물이 참 많다. 냉이를 비롯해 고사리, 달래, 원추리, 쑥, 씀바귀, 민들레, 참취, 머위, 두릅, 더덕 등과 같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종류도 많다.
최근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사회 곳곳에서 불고 있는 웰빙 열풍과 더불어 자연식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자연식품으로 회자되는 것이 우리 산나물이다. 산나물은 산과 들에서 자연 그대로 자라나 특별히 농약이나 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무공해 식품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자연환경에 적절히 적응하였기 때문에 성질이 강하고 병충해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현대인은 단백질 및 지방 위주의 식사에서 벗어나 섬유질과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우리 산나물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자생 산나물은 종류도 많거니와 먹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다. 길가에서 사람들의 모진 발길에 밟히면서도 꿋꿋이 자라는 질경이나 민들레까지도 훌륭한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밥맛이 뚝 떨어진 나른한 봄철에 먹는 음식으로, 날콩가루에 버무려 솥에서 쪄낸 냉이범벅을 비롯해 향긋한 어린 쑥을 된장국에 넣어 끓인 쑥된장국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먹거리이다. 국이나 무침 외에도 날것으로 먹을 수 있는 산나물 종류도 많고 부침이나 튀김, 묵나물, 나물밥, 녹즙 등 식용방법도 가지가지이다. 심지어는 대표적인 한국 음식인 김치로 담궈서 먹을 수 있는 산나물 종류도 많다. 예를 들어 곰취, 곤달비, 참취, 수리취, 고들빼기, 씀바귀, 산마늘, 두메부추, 호장근, 머위, 도라지, 더덕 등과 같이 잘 알려진 종류 외에도 대부분 산나물의 잎이나 줄기, 지하부의 뿌리는 훌륭한 김치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잘 익은 초피나무의 열매나 배초향의 잎은 향신료로도 이용되는 대표적인 산나물이다. 먹을 수 있는 부위도 새순, 꽃, 열매까지도 식용할 수 있는 산나물 종류가 많다.
이른 봄에 채취하는 산나물은 향기가 너무 강하지 않고 독성도 타 계절에 비해 적으므로 저마다 봄철에 산과 들로 나물을 뜯으러 나간다. 특히 산나물이 인기를 얻으면서 상업적으로 채취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봄철 강원도 산간지역의 대표적인 산나물인 곰취나 곤달비 등을 대량으로 채취하기 위해 차량과 사람을 동원하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다. 때로는 해당 지역에서도 소득사업이라는 명목하에 묵인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야생상태의 산나물은 결코 무한한 자연자원이 아니다. 무분별한 산나물 채취는 식물유전자원의 감소와 종의 멸종을 가져오게 된다. 어린잎을 식용으로 하는 곰취, 참나물, 병풍쌈 등과 같은 자생식물의 경우에 너무 과다한 잎의 채취는 식물체가 광합성에 필요한 영양기관을 부족하게 하여 결국 죽게 만든다. 또 더덕이나 잔대, 도라지, 만삼 등과 같이 뿌리를 먹는 산나물 종류는 식물체를 캐는 순간 그 개체는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산나물을 채취하는데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있고 도리가 있다. 잎이나 줄기를 먹는 종류는 너무 과다하게 지상부의 잎을 따지 말아야 이듬해에 또 산나물을 채취할 수 있고 식물체도 유지시키는 방법이다. 뿌리를 먹는 산나물은 자생지에서 송두리째 모든 개체를 캐지 말고 반드시 주위에 몇 개체 정도는 남겨두어야 한다. 만일 이런 산나물에 열매가 달려있다면 씨앗을 따서 주변에 뿌려주어 어린 개체가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배려의 한 방법이다. 뻐꾹채와 같이 꽃을 먹을 수 있는 종류 또는 머루, 다래, 산사나무 열매, 오미자, 구기자, 산딸나무 열매 등은 산속에 사는 동물들의 귀중한 먹이로 이용된다. 그러므로 너무 욕심을 부리게 되면 야생동물의 먹이에까지 손을 대는 우를 범하게 된다.이른 봄의 어린 싹은 독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독초는 잘 가려서 채취해야 한다. 매년 봄철 뉴스에 산나물로 착각한 독초중독 사고가 보도되고 있다. 특히 어린잎이 산나물과 비슷한 앉은 부채나 독미나리를 포함해 투구꽃, 백양꽃, 석산 등의 독성식물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날씨가 좀더 따뜻해지면 건강을 위해서라도 산이나 들로 나가보자. 그리고 귀중한 산나물이 지천으로 깔린 우리의 자연을 만끽하고 그것이 영원히 보전될 수 있도록 하자. 때로 맛있는 산나물도 한웅큼 따서 잃었던 입맛도 살려야겠지만 미래 자손들의 몫은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올해로 31년째, 이 시대를 사는 한국 여성으로서 좋은 그림을 하나 남기고 싶었다. 대중과 가장 빠르고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의식주 가운데 옷이 아닐까. 우리 문화의 철학을 우리 옷에 표현한다. 나는 옷을 많이 팔기보다 내가 지은 옷이 사람의 생각을 바꿔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만든다. 옷에 주문을 넣는 것이다.”
‘질경이 우리옷’ 이기연 대표는 우리 옷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 단순히 외형만 한복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선조의 생활양식과 마음가짐에 녹아 있는 요소를 옷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질경이 옷을 입는 사람만큼은 옛것에 대한 소중함과 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대표는 “대학 때 조소를 전공하다 디자인으로 옮겼다. 그림쟁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옷밖에 없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예술의 폭을 넓히고 싶었고, 사람들과 쉽게 소통하는 것이 옷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을 캔버스에서 가슴으로 옮겨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사람이 바로 움직이는 전시장”이라며 “내가 생각하는 문화의 개념은 생활방식이다. 문예, 자연, 놀이, 의식주, 옛이야기 등을 쭉 찾아다니면서 우리나라 선의 특징을 찾고 전통문화를 배워나갔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철학이 담긴 우리 옷을 만든다’는 이념 아래 우리문화 속 철학을 옷으로 고스란히 재연해냈고, 실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우리 옷인 생활한복을 탄생시켰다. 그는 “우리나라 옷은 보자기 같은 옷”이라고 말했다. 서양 옷은 고정된 형태와 사이즈에 우리의 몸을 끼워 맞춰야 하지만, 우리 옷은 우리 몸의 형태에 맞게 싸는 것이기 때문. 그는 “저는 반만 만드는 사람이다. 완성은 사람 몸에 가서 한다. 우리 옷은 착장자체가 사람에게 여유 공간을 주고 순환시키며 운동하게 한다”며 “현대인들이 입는 옷의 형태는 서구식으로 몸을 꽉 쪼은다. 움직이는 감옥을 입고 다니는 것”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본격적으로 우리 옷에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 옷 입기 운동을 시작했다. 우리 옷을 직접 무료로 수선해주는 ‘낡은 옷 되살리기’ 행사도 진행했다. 약 10여 년간 독일과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어 우리 옷의 한류에 기여했다. 바이어(buyer)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수출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는 “외국인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후원자로 자처하기도 했다. 매장을 내라는 제안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우리 옷에 대한 지독한 열정과 뼈를 깎는 창작노력의 자랑스러운 결과였다.
반면 창작을 바탕으로 하는 디자이너의 세계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창 이 대표가 소신있게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펼쳐나갈 때쯤 디자인 도용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1997년 IMF로 힘들 당시, ‘우리 것에 대해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의 분위기가 일면서 내가 하는 일이 주목받게 됐다”며 “그러면서 모든 곳에서 베끼기 시작했다. 대기업에서 영업을 맡기고 디자인만 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나는 옷을 만드는 이유가 남들과 다르다. 옷을 만들어서 재벌이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목적이 달라서 행복한 동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얼마 뒤 그의 소중한 창작의 결과물들은 타 매장에 보란 듯이 진열됐다. 주간지 광고에도 도배됐다. 결국 해당 기업과 법정싸움까지 갔다. 긴 소송 끝에 법원은 이 대표의 손을 들어줬고, 해당 기업은 문을 닫고 말았다. 이 사건은 디자인 저작권 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며 지금도 학회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이 대표는 30년 디자인 인생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쉼 없이 달렸다. 조금은 쉬어갈 법도 한데 그의 우리 옷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다. 이제는 차세대 디자이너까지 양성한다. 그는 “내가 했던 작업들이 우리 것을 위해 어떤 곳에 어떻게 꽃을 피웠는지 제대로 평가받고 싶다”고 소망했다.
“외국인들이 한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며 각종 행사(파티, 결혼식, 재혼식, 음악회, 공연)에 멋들어지게 입고 간다. 해외 수출 시 부가비용 탓에 한복 가격이 한국보다 3배가량 비싼데도 인기가 좋다.” 질경이 우리옷 이기연 대표가 약 10년간 해외 패션쇼와 컬렉션, 수출을 진행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경험담 중 일부다.
우리 고유의 전통 의상 한복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외국인이 더 높게 평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외국인은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격식을 차려야 하는 각종 행사에서 자랑스럽게 한복 자태를 뽐내는 반면 우리는 양복, 드레스 등 서양식 옷을 입고 마치 신데렐라나 귀공자라도 되는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는 우스운 꼴을 보인다. 한복의 구성과 입는 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양장에 커프스버튼(와이셔츠의 소맷부리를 여미는 장식단추)이나 행거치프(양복 가슴 포켓에 장식하는 작은 천)까지 갖춰 입는 사람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한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마음가짐도 궁색하기 짝이 없다. 100만원을 호가하는 수입옷을 구매할 때는 거침없이 지갑을 열지만, 30만~50만원의 한복은 ‘돈 아깝다’며 빌려입고 마는 문화가 만연됐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민족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20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한복은 홀대당하는 비참한 현실이다.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설빔으로 한복을 지어 입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과연 한복을 보고 감탄해 눈물 흘릴 한국인이 있을까. 전통문화를 계승시키고 바꾸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문화는 자국에서부터 꽃피어 확장돼왔다. 한류의 주역인 K-팝과 K-드라마가 그랬다. K-패션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것을 잃어버린 채 외국 문화를 좇고 그 세계에 젖어든다면 진정한 세계화는 없다. 겉과 속이 다른 한류는 무의미할 뿐이다. 전 세계인이 한류에 주목하고 있다. 문화를 확장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첫 번째의 몫은 우리에게 있다. 이는 불변의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