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류춘수 건축가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세상에는 ‘운이 좋았다’고 할 만한 일과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의 일생은 후자에 속한다. 언뜻 보면 그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 같지만 그의 인생과 건축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적 문고리가 설계되어 있다.
2002년 서울월드컵경기장과 88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을 비롯해 리츠칼튼호텔, 한계령휴게소, 박경리문학관과 사저, 동숭동 샘터사 등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국가의 위상과 국민의 일상에 맞닿아 있다. 한양대 건축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졸업한 국내파 건축가로서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이란 등지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우고, 영국, 미국,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강연한 그는 젊은 건축인이 뽑은 대한민국의 가장 바람직한 건축가에 두 차례나 선정되는 등 정상을 지키고 있다.
건축가의 꿈과 불교의 운명적 만남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1962년 대구고등학교 2학년 때 경북학생사생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안동에서 막 전학 온 ‘촌놈’이 대구, 경북의 미대 지망생들을 휘저은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남고등학교 출신 이두호가 2등을 했으니. 이두호가 누군가? ‘임꺽정’을 비롯해 김주영의 장편소설 ‘객주’ 전권을 만화화하고, 머털도사를 탄생시킨 한국 만화계의 국보급 작가가 아닌가. 더 재밌는 것은 당시 그가 하숙하던 주인집 아주머니의 친정에서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그때 고교 2학년생 이두호가 거기서 그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대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이두호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학생이 있었다니, 그것도 우리 집 하숙생 중에!’ 하면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셨죠. 하하.”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기하, 수학 등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는 진로 적성검사를 할 때마다 뚜렷하게 건축과로 나왔다. 그의 꿈은 확고했지만 봉화 면서기였던 선친은 1남 2녀의 외동아들이 건축가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건축가에 대한 변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 상대 나와 은행원이 되는 것을 최고로 여기던 때였으니. 아버지를 설득해 정작 허락은 받았지만 대학 입시에서 연거푸 두 차례나 낙방하고 만다.
“초라한 삼수생의 몰골로 고향 봉화 문수산 첩첩산중의 작은 암자인 축서사로 들어갔지요. 마음 다잡고 공부하겠다고 2년간 절에 있었던 게 건축가로서 의미 있는 첫 단추를 꿰는 인연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예민한 성정의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옮겨가는 변곡점에서 불교는 제 인생과 제 건축 밑그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졸업 작품부터 동기들과는 차별적이었다. 한국 불교의 중흥과 중생제도의 구심점을 세운다는 포부 아래, ‘대한불교조계종 대본산 계획안’을 설계했던 것이다. 불교와의 첫 인연의 고리를 꿴 순간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생활은 막막했다. “제 월급이 1만 원이었어요. 은행원은 3만 원을 받던 시절이었죠. 쪼들리며 살던 때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불교 미술 공모전을 하길래 졸업 작품을 응모해 1등을 했습니다. 상금이 5만 원이었으니 무려 제 한 달 급여의 다섯 배였죠. 덕수궁에서 전시도 했고요. 그런데 며칠 후 조계종 총무부장이 연락을 해왔어요. 부산 대각사의 10층짜리 불교회관 설계를 맡아달라고. ‘스님 돌았소?’란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죠. 그때까지 집 한 채도 설계해본 적 없는 초짜한테 할 제안인가요, 어디? 근데 스님 말씀이, 무조건 불자가 설계를 맡아줘야 한다는 거예요. 불교와의 인연이 또 들먹여진 거죠. 더 놀란 건 그때 부산까지 동행해준 스님이 축서사에서 동고동락했던 분이었어요. 스님도 ‘절에 있었던 그 춘수 학생이 설계를 맞게 된 거냐?’며 깜짝 놀라셨죠. 그때가 경부고속도로 개통 일주일째 된 때였어요. 멋들어진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30만 원을 선금으로 받고 총비용 60만 원에 달하는 설계를 계약서도 없이 구두로 맡게 되었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었지요. 부처님의 가피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그가 살던 서울 휘경동 집값이 90만 원이었다. 그때 받은 60만 원으로 부친 생전에 진 본인의 학자금 빚을 갚고, 동생 대학 등록금까지 댔으니, 홀어머니를 모신 장남으로서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투시도를 그리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화여대 조감도를 그리는 데 합류하여 직장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월 5000원을 받는 ‘꿀 알바생’이었던 것. 졸업 후 3년 만에 집을 샀을 정도로 일이 넘치게 들어온 그때가 일생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었던 때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동료들은 설계 사무실보다 봉급이 서너 배 많은 현대건설, 주택공사 등으로 이직을 했죠. 제게도 스카우트 제안이 쇄도했지만 배를 곯아도 건축 설계를 한다는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어요. 만약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류춘수는 없었겠죠.”
김수근의 ‘공간’에서 류춘수의 ‘이공’(異空)으로
20세기 한국 대표 건축가이자 건축계의 우상인 김수근의 ‘공간’에 새 둥지를 튼 것은 그에게 또 다른 변곡점이 되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계를 하는 공간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고 할 수 있겠냐’는 자문이 강하게 일었다. 무작정 공간을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자 김 대표 왈, “자네가 지금 일하는 곳은 내 친구 회산데 의리상 그럴 수는 없지.” 그 길로 다니던 회사에 무작정 사표를 내고 다시 찾아갔다. 이제 입사 자격이 갖춰졌다고 하자, ‘그럼 내일부터 출근해’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또 이랬죠. ‘사표를 냈으니 좀 쉬었다가 일주일 후부터 나오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야, 이놈 봐라’였지요. 하하.”
1974년 9월에 입사, 김 건축가가 55세에 간암으로 타계한 1986년까지 만 12년을 함께 일하며 88서울올림픽공원과 체조경기장 등을 맡아 설계했다. 류 건축가는 돌아가신 스승을 대신해 잠시 공간의 대표직에 있다가 ‘이공’(異空)으로 독립한다. ‘이공’은 단순히 ‘다르다’(different)는 의미가 아니라 ‘다름 그 너머의 보다 나은’이라는 의미인 ‘비욘드’(beyond) 스페이스를 뜻한다. 의미심장한 이름의 ‘이공’은 그의 나이 41세였던 1986년에 탄생해 75세인 지금까지 35년째 대한민국 대표 종합건축사 사무소로 건재하고 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저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시로부터 VIP석에 제 이름을 새긴 ‘건축가의 의자’를 지정받기도 했으니까요. 전례가 없는 파격 대우지요.”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거인 골리앗을 이긴 소년 다윗’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건축업계의 전설이다. 골리앗은 현대건설을, 다윗은 류춘수를 뜻한다.
1998년 IMF 경제위기 여파로 월드컵경기장은 애초 건설 계획이 없었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을 고쳐서 사용하기로 하고 개조 작품 공모전을 실시했는데 류 건축가가 당선된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은 김수근의 작품이니 제자인 그가 월드컵경기장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의미 있는 일. 그런데 새로 짓기를 원한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를 설득, 정부 3분의 1, 서울시 3분의 1, 축구협회 3분의 1 각출로 2000억 원 예산의 공사가 결정됐다. 시공은 당연히 현대건설 측이 맡는 조건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내가 꼭 그 꼴이 됐지요. 개조안이 무산되었으니. 게다가 시공회사가 설계회사를 지정하는 턴키 방식으로 공사가 확정됐지요. ‘턴키’란 설계와 시공을 패키지로 하여, 완공 후 발주자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된다’(Turn Key)는 의미의 건축업계 용어죠. 당시 현대건설은 건축계의 왕이었어요. 지금보다 100배는 센 기업이었던 무소불위의 현대건설은 ‘공간’을 설계 파트너로 지명했어요. 공간에 있을 때부터 원주체육관, 부산야구장 등 한국의 스포츠 건축물은 99% 제가 설계했어요. 말레이시아체육관 등 해외 스포츠 시설 설계 경험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제 존재는 깡그리 무시됐죠.”
턴키 방식은 설계 실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로비 실력으로 하는 거라는 말이 건축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던 때였다. 현대, 대우, 삼성, 엘지, 대림, 포스코 등 한국 6대 기업이 컨소시엄을 짰지만 현대의 들러리에 불과한 요식적 몸짓일 뿐이었다.
“삼성엔지니어링에서 저를 찾아왔어요. 자기들과 함께 응모해보자고. 삼성 계열사라 하지만 공장이나 지어봤지 일반 건축은 해본 경험이 없는 곳이었죠. 맏형인 삼성이 이미 현대와 조인트를 한 상황인데 조무래기가 어디 감히 설치냐며 같잖다는 반응이 들렸어요. 같잖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죠. ‘일반 건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번 기회에 공부 좀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류 건축사님 설계를 부탁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전 이미 다 포기하고 머리 식히러 미국에 나가려던 차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더라고요. 1만분의 1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보고 싶었어요. IMF 사태로 제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던 이유도 한몫했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하기 위해 주머니 속 돌을 만지작거리는 순간이었죠.”
요식적이나마 실시한 현상공모 기간은 세 달, 그로서는 목숨을 건 3개월이었지만 같은 기간 현대건설은 대학의 건축과 교수 등 심사위원 내정자들을 해외 유람까지 시키며 로비를 펼쳤다. 이런 상황에서 그도 단 한 명의 심사위원이라도 안면을 터야 했지만 기회는 어이없이 빗나갔다. 하필 박세직 월드컵조직위원장과 신라호텔에서 조찬 모임이 잡힌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수유리 아카데미 합숙에 들어가버렸으니 배는 이미 떠났다. 다 내려놓는 마음으로 박 위원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설계자가 자기 도면을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국제적 관례가 그렇다는 근거를 내세워.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 말을 하고는 한강을 건너는데 서울시에서 전화가 왔다. 수유리에서 설명회가 ‘혹시’ 있을 수도 있으니 준비하라는 전화였다. 그 ‘혹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역시’로 드러났다.
“제 순서가 먼저였어요. 발표 30분, 질의응답 30분, 한 시간이 주어졌죠. 어차피 두 팀밖에 없었으니 넉넉한 시간이었어요. 100% 현대건설 측으로 낙착된 일이니 들러리들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갔고 저하고 현대만 남았던 거죠. 그때 ‘류춘수가 저리도 해박하게 강의를 잘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는 수군거림이 들리더군요. 반면 현대 측 설계사는 엉망이었어요. 발표 준비를 했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떼어놓은 당상이었으니까요. 설계자 둘 간의 실력 차가 너무 나니 안 뽑아줄 수가 없었던 거죠. 27명 심사위원 중 심사위원장, 부위원장을 제외한 25명이 저를 지지했습니다. 만장일치였다고 해야겠죠.”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니, 신문 등 매체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대서특필했다. 소감을 묻자 “골리앗,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로 류 건축가는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였다. 피 말리는 운명의 3개월, 그의 꿈은 월드컵경기장으로 실현되었고 현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현대건설 측에서는 지금도 ‘류춘수’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고. 턴키 방식에 의해 시공은 삼성물산에게 돌아갔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의 인연으로 영국의 필립 에든버러 공이 2020년 5월 그를 버킹엄 궁에 초청한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방문 날짜를 세 개 주면서 그 가운데 가능한 날을 고르라고 했던 것. “정말 감동했어요. 박원순 시장과 비교되었기 때문이지요. 박 전 시장이 70여 명의 건축가를 초청한 일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날을 잡더라고요. 그러더니 하루 전날 취소 통보가 옵디다. 일주일 후로 연기하겠다고. 그러다가 그마저도 시간이 안 된다며 무기 연기를 하더라고요. 필립 공의 겸손하고 진정 어린 마음과는 대조적인 처사여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내 자리를 만들어준 것은 박 전 시장의 고마운 배려지요.”
박경리문학관, 한계령휴게소, 리츠칼튼호텔, 봉화 우리 집
“원주의 박경리문학관과 사저도 제가 설계해드렸는데, 작가님께 어떻게 짓길 원하시냐고 묻자, ‘지가 뭘 알아야지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이러시는 거예요. 모든 건축주는 자기가 더 잘 아는 줄 알지요. 그런데 천하의 박경리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비범함이 느껴졌습니다. 문학을 안 했으면 건축을 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한편 1979년, 33세에 설계한 한계령휴게소는 40년이 지난 최근에 프랑스 파리에 도면이 전시되어 극찬을 받았다. 한계령휴게소는 가파른 산비탈에 터를 잡아 철골과 목구조를 절묘하게 배치해 뼈대와 인테리어에 구분을 두지 않은 점이 독특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그가 설계한 호텔 중에 가장 큰 리츠칼튼호텔에도 범상치 않은 운명적 요소가 작용했다. 대형 설계회사의 도면으로 지하 7층까지 땅을 파고 공사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후 그에게 설계 의뢰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때도 역시 산비탈을 살리는 오르막 콘셉트였는데 유니크한 그의 설계가 뒤늦게 인정받은 것이다. 공모전 낙선작이 2년 후 당선작으로 뒤바뀌며, 진행되던 공사를 중간에 갈아엎고 류춘수 버전으로 지금의 리츠칼튼호텔을 세운 것이다.
운명의 무늬를 그려온 드라마틱한 건축 행로에서 류 건축가 스스로가 꼽는 가장 애착 가는 건축물은 무엇일까. ‘봉화 우리 집’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진 그의 건축 정서를 또 한 번 느꼈다. 건축, 그 설계는 타인의 기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적 노력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요즘, 유튜브 ‘류춘수 space TV’를 통해 대한민국 건축 역사와 오버랩되는 류춘수의 건축사를 편안하고 진솔하게 풀어내며 참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건강과 돈, 가족과 친구, 명예 등을 떠올린다. 반면 삶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인 습관을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잘 들인 습관이 열 가지 노력 부럽지 않다는 말도 있듯, 습관에는 노년기의 삶을 청춘의 것처럼 빛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커버스토리에서 ‘습관의 물리학’을 다뤘다. 나쁜 습관의 최고봉인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이퇴계의 생활 습관, 습관적 사유와 행동 그리고 ‘약속하는 나’ 등의 콘텐츠를 담았다. 비대면 시대의 시니어가 SNS 사용 시 주의해야 할 나쁜 습관과 좋은 매너, MZ세대에게 배우는 리추얼, 미국 시니어들의 일상 습관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달라지게 만드는 웰에이징 습관은 시니어 독자로 하여금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해 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나는 원래 웃겼다’는 탤런트 김성환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베테랑 연기자이자 30년 넘는 경력의 라디오 진행자, 예능 MC까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인생 철학은 무엇일까. 성공한 방송인이자 가수,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의 변죽 좋은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스페셜 인터뷰에서는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이병철 신한은행 퇴직연금그룹 부행장을 만났다. 은퇴한 시니어가 두 번째 인생을 즐기며 의미 있게 놀고, 행복한 인생을 스스로 만들기를 바란다는 그. 이 부행장에게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뒷얘기와 신한은행이 바라보는 새로운 시니어 라이프 가치 등에 대해 들어봤다.
참 좋은 시절에서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올림픽체조경기장, 리츠칼튼호텔과 박경리문학관 등을 설계한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를 만났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를 맡을 때, 건축계의 ‘골리앗’ 현대건설을 상대로 던진 다윗의 승부수가 무엇이었는지 기사로 확인해보자.
추석 연휴가 있는 9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기분 좋게 대화하는 데 필요한 세대공감 소통법도 담았다. 배우 윤여정과 유튜버 밀라논나, 외식사업가 백종원 등 청년과 원활히 소통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니어 3인방의 소통 노하우도 참고할 수 있다.
최근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인 우주여행 이야기도 담았다. 시니어들의 오랜 로망 우주여행이 국내에서도 가능할 수 있을지, 트렌드 톺아보기에서 국내 우주여행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신문물 설명서에서는 5060세대에게 더 나은 쇼핑 ‘옴니채널’을 소개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쇼핑 채널의 장점만 모아 유기적으로 연결한 옴니채널을 이해하고 나면 쇼핑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추어탕, 판소리와 광한루의 고장, 남원.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거리 많은 이곳에 최근 여행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명소가 등장했다. 감성 솔솔! 미술관 여기에서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을 소개한다. 매혹적인 물의 정원과 ‘생명 작가’ 김병종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김병종미술관으로 떠나보자.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되어줄 ‘브라보 마이 러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상 수상작 ‘대륙에서 길을 묻다’ ▲재개발과 재건축에 투자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주는 구해줘 부동산 ▲연금부자로 가는 지름길 TDF를 소개하는 생활 속 법률 상식 ▲나도 지구도 건강해질 수 있는 특별한 운동 ‘플로깅’을 소개하는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세상’ 등의 알찬 콘텐츠로 시니어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고품격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 열기가 뜨겁다. 이 같은 분위기를 더 뜨겁게 만든 메달로 효도한 스포츠 선수들의 사연이 공개돼 화제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를 위해 도마와 골프장 필드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20 도쿄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여서정(19·수원시청)과 1996 애틀랜타올림픽 도마 은메달리스트 여홍철(50) 경희대 교수가 주인공이다. 여서정은 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기계체조 도마 결선에서 3위를 기록했다. 이번 동메달은 선수 개인에게 첫 올림픽 메달이자 한국 여자 체조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이어서 더욱 값졌다.
부녀는 실수하는 모습마저 닮았다. 여서정은 결선 2차 시기에서 난도 5.4의 비교적 쉬운 기술을 시도했으나 착지 과정에서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 발짝 물러나는 실수를 했다. 이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여홍철이 2차 시기에서 착지할 때 뒤로 밀렸던 장면과 똑같았다.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여홍철·여서정 부녀는 한국 첫 ‘부녀 올림픽 메달리스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여서정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면서 여서정 가족이 11년 전 출연한 방송도 화제가 되고 있다. 2010년 9월 28일 KBS 교양프로그램 ‘여유만만’에 출연한 여홍철과 여서정의 발언이 재조명됐기 때문이다.
당시 여홍철 교수는 “2020년 올림픽에서 딸이 메달리스트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체조를 시작한지 3개월 차였던 9살의 여서정은 “6, 7세부터 체조선수가 꿈이었다”며 “훌륭한 국가대표가 돼서 메달을 많이 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1년 미뤄졌지만 대회 이름은 ‘2020 도쿄올림픽’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부녀는 결과적으로 그 꿈을 이룬 셈이다.
남자 골프 금메달리스트인 잰더 쇼플리(28·미국)의 올림픽 출전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잰더는 그의 아버지이자, 유일한 골프 스승인 스테판 쇼플리가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올림픽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독일계 미국인인 스테판은 젊은 시절 독일 대표 육상선수로 올림픽 출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을 2년 앞 두고 발생한 불의의 사고로 출전이 좌절됐다. 스무살 때 훈련하러 가던 길 음주운전 차량과 추돌 사고가 나면서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잰더가 목에 건 메달은 80여 년 전 할아버지인 리처드 쇼플리가 꿨던 꿈이기도 했다. 리처드 역시 국가대표급 육상선수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준비했으나 부상으로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대만 출신이자 일본에서 생활한 어머니 덕분에 일본 문화에 익숙한 잰더에게 이번 메달은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잰더 쇼플리는 “아버지는 나의 성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셨다. 어머니의 고향도 여기여서 내겐 많은 것들이 (메달 획득의)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1일 2020 도쿄올림픽 골프 남자부 4라운드에서 4언더파를 쳐 최종합계 18언더파 266타를 기록했다. 이로서 미국은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골프 부문 금메달을 획득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우리나라 최초로 도마 종목에서 은메달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1, 여2를 개발해 한국 기계체조를 이끌어온 여홍철(呂洪哲·47). 그는 세상에 한국 기계체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체조를 안 했으면 조폭이 됐을지도 몰라요.”
1994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3위,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도마 1위, 1996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2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체조 도마 2위,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도마 1위 등 세계 무대에서 메달을 휩쓴 여홍철은 말한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체조’였다고.
그의 체조 사랑은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야구가 좋아서 야구부에 지원했지만, 하필 그해에 야구부가 없어졌다. 마침 그때 눈에 띈 게 체조부였다.
“초등학교 때 무협 영화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땐 날아다니고 재주 부리는 체조가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아 이건 내꺼다!’ 당장 체조부에 들어갔죠. 솔직하게 말하면 계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감독님이 찾아오셔서 ‘체조 계속하자, 운동하면 대학도 장학생으로 갈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다’면서 좋은 점만 얘기하시니깐… 거기에 완전히 혹해서 계속하게 된 거죠.(웃음)”
항상 따라다니던 부상
기계체조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금지된 기술이 있을 만큼 위험 종목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머리로 떨어지거나 잘못 착지할 경우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여홍철 또한 부상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하필 국제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사고는 태극마크를 단 그의 발목을 수차례 잡았다. 그는 그동안의 부상이 생각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선수촌에 들어갔는데 평행봉 연습을 하다가 손가락이 골절됐어요. 선수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짐 싸서 나왔죠. 아마 제가 단기간 퇴촌 기록 보유자일 거예요.(웃음)”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땐 경기 두 달을 앞두고 다쳐서 또다시 퇴촌했다.
“철봉에 부딪쳐서 오른쪽 귀가 거의 떨어져나갔어요. 그때는 정말 아쉬웠죠. 어느 때보다 욕심이 났거든요.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목 부위가 찢어졌을 때예요. 당시 부분 마취가 불가능한 시절이라 마취도 안 하고 80바늘을 꿰맸는데 아직도 바늘이 살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해요.”
외상은 치료하면 되므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로 큰 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상, 바로 골수염이었다. 운동을 계속하면 팔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그는 2년 6개월간의 공백기를 가졌다. 하늘이 그의 간절함을 알았던 걸까. 다행히 녹아내리던 뼈가 단단히 굳기 시작했고 여홍철은 고민할 여지도 없이 다시 체조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이런 시련들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말한다.
“솔직히 연습하다가 다치면 몇 개월 동안은 그 기술은 쳐다도 안 봐요. 아예 빼버리고 연습하죠. 사실 좀 겁났거든요.(웃음)”
메달 색을 바꾼 통한의 ‘세 발자국’
운동선수라면 모두가 꿈꾸는 무대인 올림픽. 여홍철은 더 이상의 퇴촌은 없다고 다짐하며 선수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그에게는 첫 올림픽인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비록 결승엔 들지 못했지만 출전만으로도 큰 의미가 됐다.
“그동안 부상을 워낙 많이 겪어서 그런지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행복했어요. 우선 관중 수부터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죠.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대회가 있어도 경기장이 텅 비어 있거든요. 많은 사람 앞에서 기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그땐 메달을 따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실수하지 않고 보여주고 경기를 잘 마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했죠.”
그로부터 4년 뒤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러시아의 알렉세이 네모프를 저지할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 선수로 꼽혔다. 더불어 한국체조 첫 금메달 유력 후보로도 거론됐다. 아니나 다를까, 도마 1차 시기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며 9.837점을 받았다. 이제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2차 시기를 앞둔 그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하얀 탄산마그네슘을 손에 묻히고 최고 속력으로 내달렸다. 힘차게 구름판을 밟고 그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2(두 손을 정면으로 짚고 공중에서 몸을 펴 두 바퀴 반을 비트는 동작)’를 선보였지만, 착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착지 불안으로 세 발을 뒷걸음질했죠. 내려오는데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동안 힘들게 연습하고 훈련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아 4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개인적인 아쉬움은 말로 설명 못하죠.”
그가 착지 불안으로 휘청거리는 순간 경기장에 있던 관중들도 아쉽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경기 결과는 알렉세이 네모프와 0.031점 차이로 은메달. 그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신 되뇌며 눈물을 보였다. 관중들도 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때의 실수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당시 1점은 1등에서 40등까지를 갈라놓을 수 있는 점수였어요. 만약 그때 세 발 뒷걸음이 아니라 뒹굴었다면 메달권에도 못 들어갔을 거예요. 저는 그나마 운 좋게 거기서 그쳤기 때문에 은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에게 가장 아쉬웠던 경기를 묻자 의외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꼽았다.
“그 당시 제가 도마 세계 랭킹 1위였어요. 이번에는 꼭 금메달을 따겠다 다짐하고 출전했는데 웬걸 규칙이 바뀌었더라고요. 원래 두 번씩 기술을 펼쳐야 하는데 한 번만 하면 되는 거로요. 그건 다시 말하면 잘 못하는 선수라도 운 좋게 착지를 잘하면 결승에 올라가고, 실력이 좋아도 실수를 하게 되면 떨어트리겠다는 것이었어요. 바뀐 규칙으로 시드니올림픽 때 세계 랭킹 상위권 선수들이 거의 결승에 올라가지 못했어요. 대신 쉬운 기술로 착지에 성공한 하위권 선수들이 결승에 올라가는 바람에 논란이 많았죠. 결국, 이후엔 다시 원래대로 두 번 연기하는 거로 바뀌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금메달은 신이 주는 선물이구나’ 하고요.”
체조는 상대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거나 불필요한 행동으로 도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혹시 체조도 안 보이는 공간에서 선수들끼리 기 싸움을 할까?
“신경전이요?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어차피 개인마다 기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만 완벽하게 펼치고 오면 되거든요. 오히려 낯익은 선수들이 있으면 선수대기실에서 인사도 하고 서로 몸 장난도 하면서 긴장을 풀곤 했죠.”
여홍철은 체조는 상대와 하는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특히 수백 번, 수천 번씩 반복되는 훈련이야말로 가장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강조한다.
“똑같은 기술을 연습할 때 그 지루함을 이겨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중간에 포기하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거고 이겨내면 내 기술이 되는 거고.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하려면 1~2년? 길게는 3~4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이 기간에 완벽히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한 가지 기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선 무한 반복이 필수였죠. 유연성 훈련은 어릴 때만 고통스러웠지 대표팀 되고 나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 물론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합니다.(웃음)”
우리나라 체조 역사상 전대미문의 영웅이었던 여홍철. 기술에서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그는 비록 올림픽에선 금메달과 인연이 없었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여1, 여2 기술은 국제대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나이로 따지면 거의 끝 무렵까지 국가대표를 했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어요. 이젠 제 체조 DNA를 물려받아 체조선수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을 지지해주는 게 새로운 목표입니다.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큰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요.”
올림픽공원은 집 근처라서 자주 가 본다. 몇 십 년을 근처에 살면서 올림픽 공원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올림픽 공원에는 대표적 조각 작품 ‘대화’ 등 대형 조각상들이 약 180개 정도 있는데 어디 어떤 조각 작품이 있는지 외우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에 숨겨진 구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못 들어가게 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길의 구조가 그 쪽으로 갈 일이 없어 못 본 것이다.
‘평화의 문’에서 남2문 사이는 한성 백제 박물관이 가로 막고 있어 거기까지만 보고 돌아서게 되어 있다. 장미 공원에서 남 2문까지는 수영장, 체조 경기장, 역도 경기장 등으로 가는 큰 길이 있다. 장미공원은 아름다운 화원으로 눈길을 빼앗기게 되어 있다. 그 길은 테니스장으로 통한다. 남2문으로 들어가면 밸로드롬 경기장이 있다. 종종 경마처럼 사이클 경기가 열리는 곳인데 이쪽에는 갈 일이 없다. 그리고 벨로드롬 서쪽으로 애매한 언덕 공원이 있다. 주변에 이렇다 할 시설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차장도 소마미술관 쪽에 있으므로 멀다. 순전히 걸어서 가야한다. 평화의 문에서 올림픽공원 사거리 방향으로 걸어 가다보면 왼쪽에 속한다.
그러니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구역에 조각상들이 대거 있다. 여기까지 둘러 본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인근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에 사는 지인들에게 물어도 엉뚱하게 다른 조각상을 얘기하거나 잘 모르겠다고 헸었다.
여기 여러 가지 조각 작품 중 숨겨진 조각, ‘길’과 ‘마마’가 있다. ‘길’은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조각품인데 남자의 나신과 남근이 그대로 되어 있다. 아이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통로에 놓자니 민망하기도 하고 해서 잘 안 보이는 곳에 위치하게 한 모양이다. 이 조각 작품에 대해 소문은 들은 적이 있으나 정작 아는 사람은 없어서 갈 수가 없었다. 필자도 이번에 처음 가본 것이다. 남자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남자 나신 4개가 나란히 걷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맨 마지막 것에는 목이 없다. 예술 작품이므로 예술로 보면 문제가 없지만, 남근이 너무 적나라하다. 서양에는 이런 조각품이 도심에 있어도 전혀 문제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은 기피 대상이다.
‘마마’는 러시아 작가의 작품이다. 임신한 어머니를 표현한 작품 같은데 탱탱한 유방과 불룩 나온 배, 그리고 다리를 벌리고 있는 하반신, 세 부분으로 나눠 뉘어 놓았다. 역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예술이냐 아니냐로 논란이 있을 법해서 여기 위치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예술 작품으로 보면 이해는 된다.
그길로 소마 미술관 앞을 지나게 되는데 소마 미술관에 가려 안 보이는 조각상들이 몇 개 있다. 대개는 소마 미술관 앞 큰길로 지나치게 되거나 소마미술관을 구경하고 나면 바로 큰 길로 나온다. 그러니 뒷편에 있는 조각상들을 못 보는 것이다. 여기는 중국 조각가의 작품 등이 다른 서양 조각가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소마 미술관 위에 스카이 작품이 있다. 공중에 해놓은 것이라 시선을 밑으로만 하고 다니는 사람은 못 본다. 공중에 얇은 철사를 엮어 물고기 모양도 만들어 놓고 다른 형태의 작품도 있다. 얼핏 보면 잘 안 보이고 햇빛이 강렬하면 더 못 본다.
“하나, 둘, 셋, 넷….” “꽃손, 주먹손, 칼손, 재즈손.”
방배동의 한 무용 연습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음색의 목소리들이 구령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까르르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도 난다. 여학생들일까?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마주하고 나니 맞는 것 같다. 표정과 마음, 몸짓까지 생기 넘치는 치어리더팀. 우리는 그들을 낭랑 18세라 부른다!
평균 나이 74세, 색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다
치어리더. 스포츠 경기장에서 운동선수의 승리를 위해 응원하는 이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야구장 또는 농구장에서 만날 수 있다. 멋진 포즈와 율동으로 선수뿐 아니라 경기를 보러 온 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경기장의 꽃’ 치어리더. 젊고 화려한 여성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이 무대에 평균 나이 74세 ‘낭랑 18세’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소녀처럼 웃고 떠들다가도 치어리더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영락없는 치어리더 아가씨로 변신한다. 본격적인 치어리딩 연습에 앞서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하늘 위로 뻗고 허리를 제법 유연하게 돌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놀랍다. ‘나이 들어도 저렇게 섹시(?)할 수 있구나’란 생각마저 들 정도. 진짜 낭랑 18세의 모습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고나 할까. 작년에는 기아 타이거즈 홈 경기장에서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시니어 치어리더팀이 세상 빛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낭랑 18세 시니어는 전국에 50여 명이 있다. 그중 서울에 있는 20여 명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치매예방체조 배우다 치어리더가 되다
낭랑 18세는 (사)세계전통문화놀이협회(이하 협회·대표 조혜란)의 치매예방체조 프로그램 ‘낭랑스쿨’로 출발했다. 조혜란 대표는 8년 전, 처음 이 협회를 만들면서 시니어의 건강에 관한 관심이 많아졌다.
“협회 초기부터 쭉 전통놀이를 바탕으로 한 치매예방체조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협회 대표를 하면서 동시에 대한치어리딩협회 실버분과를 맡은 적이 있었어요. 시니어들도 치어리더 옷을 입고 뛰어보니 생각보다 잘하시더라고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낭랑 18세로 활동하는 시니어들 대부분 처음에는 ‘다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다고. 몸이 아파 오랫동안 심신이 약해진 시니어들에게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생각운동이 치어리딩을 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했다.
“전통놀이로 치매 예방도 하고 무엇보다 일어서서 나도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필요했어요.”
치어리딩 연습을 하기 전 낭랑 18세들은 빙 둘러앉아 손뼉을 치고 손가락을 접으면서 큰 소리로 셈을 한다. 이 모든 활동이 치매예방운동이자 전통놀이를 통한 생각운동이라는 것. 무엇보다 이곳에서 치어리딩을 하는 시니어들 대부분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할 만큼 체력이 좋아졌다.
“보건소에 가서 체력 측정을 할 때마다 근력도 늘고 전반적으로 건강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있어요.”
치어리딩 지도자로 제2인생을 열다
현재 낭랑 18세 회원 중 12명은 실버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이곳에서 치어리딩을 배운 시니어가 동년배를 가르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지도자 실습을 두 차례 정도 다녀온 회원도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시니어다. 낭랑 18세를 향한 각종 매체의 취재 경쟁(?) 또한 부쩍 늘었다. 치어리딩 연습에 방송에도 얼굴을 비춰야 하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낭랑 18세는 오늘도 초록색 치맛바람 휘날리며 목청껏 응원의 함성을 외치고 있다. 낭랑 18세 파이팅!
mini interview
내 인생 다하는 날까지 파이팅~ (김순덕·80)
치어리딩을 시작한건 1년 됐어요. 원래 다리가 많이 안 좋았어요. 처음 제가 여기 왔을 때 조혜란 대표님이 걷는 모습을 보더니 “뛸 수 있을까요?” 하면서 걱정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남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잘 뛰고 있어요(웃음). 제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아 다들 왕언니라고 불러요. 규칙적인 운동을 하니까 다리가 정말 눈에 띄게 좋아졌어요. 치어리딩을 하면 아무래도 즐겁죠. 병원에서는 제가 나이도 있으니까 평소에 살살 걷고 약으로 달래가면서 생활하라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수영이랑 걷기를 했어요. 그러다 우리 딸이 여기 팀장인데 한번 와보라고 해서 왔다가 완전 재미를 붙였습니다. 좋은 친구 만나 대화도 하고 도시락 서로 싸와서 뷔페식으로 나눠 먹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도 치어리딩을 계속할 생각이에요.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요.
치어리딩 새내기입니다! (임창애·67)
동네에 형님 한 분이 계신데 나를 보더니 운동하러 가자면서 난타를 배우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뭔 난타냐고 그랬어요. 쫓아와보라고 해서 ‘그래 한번 가보자’ 하고 왔지요. 안 그래도 운동은 하려고 했어요. 무릎이 아파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운동은 저같이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에게만 맞춰진 것들이 많잖아요. 그건 또 따라 못할 것 같고. 와서 여러 형님들 하는 거 보니까 나도 조금만 하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3월에 들어왔으니까 몇 번 안 했죠. 이번에 새로운 유니폼으로 바꾼다는데 기대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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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면 으레 떠오르던 디너쇼는 이번 설날에 잠시 쉬어간다. 대신 아이돌 그룹, 중견 가수, 국악인 등 다채로운 음악인들이 공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할 전망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콘서트들을 살펴봤다.
영하의 맹추위 때문일까. 연휴를 앞둔 주말에는 공연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 콘서트들이 줄지어 펼쳐진다. 일본 돔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빅뱅은 국내 팬들을 만난다. 지난해 빅뱅은 개별 활동에 치중해 5명이 함께 무대에 서는 모습을 기다려 온 팬들이 많았다.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이번 콘서트에는 빅뱅의 히트곡과 솔로곡은 물론 빅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은 새로운 레퍼토리들이 등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3인조 힙합 그룹 리듬파워는 25일 서울 홍대에 위치한 예스24무브홀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소속사는 “리듬파워가 부지런히 걸어 온 음악의 길을 한 단계 도약하는 기회라 멤버들의 기대가 매우 큰 무대”라며 “그간 리듬파워를 응원해 준 팬들에게 보답하는 자리로 최선을 다할 예정”이란 소감을 전했다.
솔로가수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JYJ의 김재중은 25일과 26일 서울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전국 투어를 이어간다. 김재중은 예매 개시 5분 만에 1만석이 모두 매진돼 추가 예매를 진행할 정도로 무서운 티켓파워를 자랑했다. 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는 “팬미팅 형식의 생일파티 세션이 약 1시간가량 따로 추가되어 김재중의 정규 1집 라이브 무대 감상은 물론 생일을 함께 축하하는 의미 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방 공연도 풍성하다. 지난해 11월 정규 5집 앨범 ‘고독의 의미’를 발매한 이적은 25일과 26일 대구 경북대 대강당 무대에 오른다.
이적은 3년 만에 발매한 정규 5집 앨범의 타이틀곡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로 온라인 음원 차트 정상을 휩쓴 것은 물론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1위를 거머쥐었다. 새 앨범에 대한 뜨거운 반응만큼 공연에 대한 반응도 뜨거워 지난 연말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에서 8000여 관객을 동원했다. ‘비포 선라이즈’란 타이틀로 전국 투어에 나선 이적은 대구에 이어 부산, 대전, 성남을 차례로 찾을 예정이다.
방송인 김제동은 자신의 토크콘서트 ‘노브레이크 시즌 5’ 공연을 25일과 26일 부산 KBS홀에서 연다. 지난 4년 동안 17만3000여 명의 관객을 웃고 울린 ‘노브레이크’는 언어의 마술사 김제동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를 묶어내 매 시즌마다 남녀노소의 사랑을 받았다.
연휴가 끝난 주말에 이어지는 공연도 눈여겨 볼 만하다. 국악인 김영임은 2월 8일 경기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설맞이 특별공연-김영임의 효 대공연’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 이번 공연은 우리 소리인 국악과 유교사상인 효를 주제로 펼쳐진다. 김영임의 대표곡 ‘회심곡’을 비롯해 우리 귀에 익숙한 민요가 감동적인 드라마, 신명나는 굿 퍼포먼스와 어우러질 예정이다. 공연기획사는 “국악은 꼭 고전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뮤지컬적인 요소를 더해 우리 소리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