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들이 있다.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 가운데,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대표 인물로 꼽아봤다. 그들은 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장관을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김수환 추기경의 소통법
“여기 명동대성당부터 명동역을 넘어 신세계백화점까지 조문 행렬이 이어졌죠. 지금도 장례식 때의 장관을 잊지 못합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이자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 홍보를 담당한 허영엽 신부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후 5일간 명동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기간 동안 방문한 추모객은 약 40만 명에 이른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많았다. 허 신부는 “우리 사회 어른으로서 추기경님의 존재감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허영엽 신부. 신학대 학생 시절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한 그는 김 추기경과 처음 만났는데, 당시를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학생인데도 편안하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울대교구 홍보팀에 있으면서 김 추기경과의 만남이 종종 있었지만, 같은 성당에서 함께 지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얘기하는 대표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통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되며, 대표적으로 1987년 6·10 항쟁이 언급된다. 당시 대학생들은 피신을 위해 명동대성당에 들어왔고,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품어줬다.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김 추기경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다.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추기경은 교황 선출권을 가진 최고위 성직자다.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낮추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려고 했다. 힘들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달동네를 찾아다녔고, 일자리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인간적으로 연민이 많고 늘 베푸시는 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희망을 북돋아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선종 당시 김 추기경의 통장에는 1000만 원 정도의 잔액밖에 없었다. 그 돈마저도 신도들에게 묵주를 선물하라는 말을 남긴 터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왜 어른으로 통했을까. 허영엽 신부는 ‘소통법’이 답이라고 봤다. 허 신부는 “추기경님은 대화할 때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한다. 진심이 느껴진다. 대화의 시간을 그냥 때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기쁨을 느끼셨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에게 그동안 받은 편지는 지금도 값진 선물이다. 허 신부는 “크리스마스 때 신부, 수녀 등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주셨는데, 상투적인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하나하나 기억한 내용이 담겼다”면서 본받고 싶은 인간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무엇이 됐든, 상대방이 누구든지 간에 ‘어떻게 생각해?’라고 먼저 물어보고 상대방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다. 그 후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으면 바꾸기도 한다. 생각의 유연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분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허영엽 신부는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됐는데, 그중에서도 세대 갈등이 악화된 것을 우려했다. 이는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5060세대와 2030세대 간 갈등 요인을 묻는 질문에 ‘소통이나 세대 이해의 부족’(36.0%)이 1위를 차지했다. 나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소통하려고 했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어른이 필요한 이유다.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는 아랫사람도, 윗사람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책임감 있는 어른의 자세 아닐까요? 추기경님께서는 선종을 앞두고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큰어른이었던 추기경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집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를 지향하는 것일 테지요.”
◇이어령 장관의 감수성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영인문학관’. ‘영인’은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와 붙였다. 이곳에서는 이어령 장관의 문화적 업적과 철학을 되새길 수 있다. 현재도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시간이 갈수록 선생이 더 그리워진다. 60여 년을 늘 옆에 있던 사람이니까. 혼자 있는 걸 좋아했기에 벌을 받는 건가 싶기도 하다”고 마음을 표현했다.
강인숙 관장은 동갑내기 남편을 ‘이어령 선생’이라고 불렀다. 남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 관장은 “한눈 팔지 않고 원하는 길만 걸어간 선생의 용기를 존경한다”면서 “그와 함께하면서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정직성의 중요성을 알았고, 내 삶에서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은 가장으로서도 어른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강 관장은 “선생은 평생 직장 두 곳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바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고 책임감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했던 이유도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분이다”라고 답했다.
문학인부터 문화부 장관까지 직업도 다양했던 이 장관은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다. 다 좋아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따른다는 그는 “먹고 놀면 안 된다. 놀면서 먹어야 한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장관이 즐기면서 일하는 시간이 쌓이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의 글과 말, 즉 생각에서 배움을 얻었다. 강인숙 관장은 “이 선생은 팬이 많았다. 남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감동받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서 “팬은 정신적인 면에서 친지나 제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이 좋은 영향을 끼치는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유에 대해 강인숙 관장은 “여러 분야를 어우르는 지식, 미래를 투시하는 안목, 독보적인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 이 장관은 고독했던 것 같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저)을 보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척을 할 뿐이라면서, 모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고, 혼날 것이 두려워서 고분고분 둥글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전한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질문자의 삶을 산 이어령 장관은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라고 고백했다. 또한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모든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이어령 장관은 존경받았으나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살았을까. 강인숙 관장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얼마 전에 이 선생의 2주기였어요. 어느 회사의 회장인 제자가 큰 꽃을 집에 보내왔어요. 당시 저밖에 없어서 꽃을 방까지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죠. 연세가 많은 기사분이 꽃을 나르다가 선생의 사진을 보더니 짐을 내려놓고 넋을 잃은 채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애독자였다’면서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꽃 보내는 사람과 꽃 배달하는 사람 모두 진심으로 선생을 사랑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지금도 선생을 스승이라고 말하는 제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걸 보면, 이 선생은 잘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70) 주교가 바티칸 교황청의 장관에 임명됐다. 교황청에 한국인 성직자 장관이 탄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0대 시니어도 현역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려준 사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일(현지시간) 바티칸 시국에서 유흥식 라자로 주교를 교황청 고위직인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하고, 대주교 칭호를 부여했다. 교황청 성직자성은 세계에서 사제·부제의 직무와 생활 업무를 관장하는 부처다. 신부의 사목 활동을 감독·심의하고, 신학교 관할권도 갖는다.
유흥식 대주교가 맡게 될 성직자성 장관은 교황, 국무원장 등으로 구성되는 교황청 행정 10위권 안에 포함되는 핵심 보직이다. 한국인 성직자가 차관보 이상 고위직에 임명된 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유 대주교에 따르면 이번 임명은 이탈리아에서도 이례적인 일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추기경이나 대교구의 대주교가 아닌, 극동의 주교가 유서 깊고 영향력 있는 부서 장관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유 대주교는 대전교구 홈페이지에 ‘대전교구 하느님 백성에게 전하는 서한’을 올려 지난 4월 프란치스코 교황 알현 당시 교황에게서 장관 제안을 받은 사실을 알렸다. 장관 제안을 받고 당황해하는 그에게 교황은 “교황청에는 아프리카 출신 장관은 두 분인데 아시아 출신 장관은 한 분뿐”이라며 “유 주교는 세계 보편교회에 매우 중요한 아시아 대륙 출신”이라고 설득했다.
바티칸 현지에서는 유 대주교의 장관 임명을 두고 북한이나 중국 문제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보도가 나왔다. 유 주교는 지난 12일 세종시 대전교구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북한이 교황님을 초청한다면 북한으로서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황님께서도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며 “제 자신이 교황청에 갔을 때 그러한 역할이 주어진다면 기꺼이 모든 일에 참여하고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축전을 보내 “한국 천주교회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위상을 드높인 기쁜 소식”이라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오신 분이어서 더욱 기대가 크다”고 축하했다.
195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유 대주교는 1979년 이탈리아 로마 라테라노대 교의신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현지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대전가톨릭대 교수와 총장을 거쳐 2003년 주교 서품을 받았다. 2005년 4월부터 지금껏 대전교구장을 맡고 있다.
유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가깝게 소통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인 성직자 중 한 명이다. 2014년 열린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충남 당진 솔뫼성지)에 교황을 초청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 한국을 찾았다. 지난 4월 바티칸에서 교황을 알현해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 시복 문제와 한반도 평화 이슈 등을 설명하기도 했다.
유흥식 대주교는 다음 달 말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출국해 8월 초부터 성직자성 장관직을 수행한다. 일반적으로 장관 임기는 5년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제목처럼 삶의 마무리가 인생에서 중요하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웰다잉, 즉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준비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71)를 만나 현시대 웰다잉의 의미와 필요성, 그리고 실천 방법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원혜영 대표는 은퇴 전 풀무원 창업주, 부천시장, 5선 국회의원 등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그와 관련한 얘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웰다잉’이다. 실제로 마지막 의정 활동을 펼친 20대 국회의원 시절, ‘웰다잉 기본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계기로 웰다잉에 관심을 두게 되었을까?
“2009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이 굉장히 유명했다. 인공호흡기를 찬 채로 소생이 어려운 고령의 환자를 두고 가족과 의료진 간에 이견이 발생했다. 가족은 사전 할머니의 뜻대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원했고, 의료진은 이를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법원 재판까지 갔는데, 대법원은 행복추구권과 자기 결정권을 토대로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당시 연명의료 중단은 이렇게 특수한 경우에만 허락됐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이 하나의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19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조직해서 관련된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2016년에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통과됐다.”
사실 웰다잉은 그가 국회의원 시절에 했던 수많은 의정 활동 중 하나에 불과한데, 인생 2막의 주제를 웰다잉으로 정한 이유가 있을 터.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물어봤다.
“직접 법을 만들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삶에서 무수한 선택이 있듯이 하나의 죽음에도 여러 가지 절차와 수많은 선택이 있다. 장례식장 선정, 화장과 매장 같은 장묘법, 재산 분배, 장기 기증 등과 같이 세심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사전에 잘 결정하면 남은 가족 간의 분쟁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결국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은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로 이어진다. 초고령화로 인한 장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회문화가 바로 웰다잉이라고 생각해, 은퇴 후 봉사활동 차원으로 열심히 웰다잉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웰다잉의 본질은 자기 결정권
‘웰빙’은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만큼 건강한 삶에 대한 요구가 큰 터. 반면 ‘웰다잉’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리나라에서는 인지도가 낮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전통적인 문화의 영향이 크다. 다른 나라는 도심에서도 종종 무덤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산속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의학에 대한 의존이 커서, 의학이 모든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망자의 약 70%는 병원에서 죽는다. 예전에는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병원에서의 사망률이 훨씬 높았지만, 이제는 많이 감소했다. 대신 집에서 죽는 비율이 증가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회 내에서 죽음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고, 현대의학으로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죽음을 굉장히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소생 가능성이 없더라도 병원에 의존하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런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위해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하는 인원이 증가하고 있으며,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엔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남기는 고통이 크다. 개인이 부담하는 경제적 비용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주변인의 임종 과정을 지켜보면서 학습이 된 것 같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인한 가족의 고통이 합당한가?’ 의문이 든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이 증가한 것도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무조건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뜻은 아니다. 소생 가능성이 있다면 치료하는 게 맞다. 하지만 회복이 힘들다면 중단하는 것도 지혜로운 결정이다. 이제 시동조차 걸리지 않는 자동차에 계속 기름을 넣을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우리 사회가 현대의학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스스로 죽음을 택할 권리를 사회에서 용인하고 보장하는 문화가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이러한 자기 결정권이 웰다잉의 본질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어서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다만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상담사와 상담을 진행한 후 등록해야 한다. 이러한 연명의료 중단이 가동하기 위해서는 사망 당시 입원한 병원에 윤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어야 하는데, 큰 병원을 제외하고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통계를 보면 요양병원이나 규모가 작은 병원의 경우는 상급병원과 비교해 윤리위원회를 갖춘 곳이 아직 많지 않다. 위원회를 구성하려면 비용도 들고,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로 회의할 수 있는 구조도 갖춰야 하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 인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 상황에서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는 것이다.”
순리대로 정리하는 삶
그는 삶 속에서 웰다잉이 필요한 이유를 “일종의 순리다”라고 말하며, 첫 번째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소개했다.
“봄에는 새싹이 나고, 가을에는 맺은 열매를 수확한다. 무릇 인생도 같다. 은퇴한 시니어에게 새로운 도전도 좋지만, 이제는 삶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마무리를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 웰다잉의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 단추를 유언장으로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유언장은 내 삶을 정리하며 쓰는 일종의 종합기록부다. 생전에 고마웠던 이들에 대한 마음이나 남는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재산이나 장례 방식 같은 문제를 글로 써보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본인만 할 수 있기에 더 값지다.”
덧붙여 웰다잉을 준비하는 시니어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웰다잉을 위해서 우리는 죽음에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과 일상에서 웰다잉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진석 추기경이 장기 기증을 하고 돌아가셨다는데 나도 해볼까?’ 또는 ‘유언장을 쓰는 게 좋다는데 어때?’ 이런 식으로 가볍게 얘기하면서 하나씩 실천해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자식이 먼저 꺼내는 것보다 당사자가 먼저 얘기하는 것이 좋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웰다잉을 공통의 관심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웰다잉, 즉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일까?
“톨스토이는 ‘인간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죽음을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하지만, 죽음은 필연적이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잘 준비하는 게 지혜로운 인생의 마무리다. 유언장 쓰기, 장기 기증 서약과 같은 과정을 통해 내 삶을 정리하면 삶의 자세가 달라진다. 웰다잉은 잘 죽는 일과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을 한번 정리하고 새로운 자세로 인생을 살게 하는 중요한 중간 점검과 같다. 이는 곧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길이다.”
끝으로 그는 앞으로의 목표와 계획에 대해 말했다.
“천만 노인 시대가 멀지 않았다. 이분들이 삶의 주인으로서,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사회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웰다잉 문화의 지속적인 확산이 필요하다.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죽는 노인이 많을수록 사회가 건강해지고 품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외면하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죽음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싶다. 병원에서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고 준비할 수 있게끔 도와드리고 싶다. 비대면 상황으로 인해 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온라인 영상 콘텐츠를 통해 지속적인 웰다잉 문화 확산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일연 스님(1206~1289)은 몽골의 침입이라는 국난에 맞서 한민족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 5년 동안 5권 2책의 ‘삼국유사’를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나름의 답을 했다. 정사에서는 볼 수 없는 한민족 역사의 대기록이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밝힌 고조선과 단군신화, 14수의 신라 향가는 고대 문학사를 실증하고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이 남긴 기억을 모아 통일된 서사를 완성했다.
이처럼 한민족 정신사에 족적을 남긴 일연 선사의 자취는 군위의 인각사(麟角寺, 사적 제374호)에 남아 있다. 그의 생애를 기록해두었다는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를 보러 가자. 인각사로 가는 여행은 일연 스님의 정신과 그 비문에 얽힌 간곡한 마음 하나 알아보려고 떠난다.
인각사의 비문에 존재한다는 문장을 마음속에서 떠올려본다. 그 비문의 이름은 보각국사비다. 당시 이름난 민지(閔漬)라는 문장가가 글을 지었고, 왕희지의 서체로 4000여 자를 집자했다고 한다. 인각사라 자리한 군위로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가는 김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다는 혜원(김태리 분)의 근사한 집도 들러보고 추억의 기차역 화본역도 다녀왔다. 카메라와 번역본 ‘삼국유사’ 한 권을 배낭에 짊어지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거쳤다. 과연 온전히 이 글의 주인공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느끼고 비문을 찾아볼 수 있을까? 비에 새겨졌다는 일연 스님을 찬하는 민지의 문장이다.
“말할 때 우스개가 없고(語無戱謔), 꾸며대지 않는 성품이며(性無緣飾), 참된 마음으로 사물을 대했다(以眞情遇物). 여럿이 함께 있어도 홀로인 것 같았으며(處衆若獨), 높은 위치에서도 낮게 처신했다(居尊若卑). 스승에게서 배워 공부하지 않고(於學不由於師), 저절로 환하게 알았다(自然通曉).”
인각사를 빛내주는 것은 바로 학소대에 노니는 학처럼 고고한 선사의 정신세계다.
참된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는 힘은 일연 스님의 끝없는 수행의 결과가 아닐까?
경북 군위는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고장이다. 대구에서 가수 김광석 거리와 달성공원을 둘러보고 하루의 일정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군위로 향했다. 간밤에 눈이 내려 앞산 정상이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내는 금세 녹았지만 대구를 분지로 만들며 빙 둘러 병풍처럼 서 있는 산들은 만년설을 두른 듯 하얗다. 군위 방면에 있는 팔공산의 설경은 겨울답게 눈이 부시다. 대구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힘이 눈으로 더욱 영험해진 듯하다.
일연 스님이 말하고 싶은것은?
팔공산의 품은 넓고도 높아 군위로 향하는 내내 시선을 머물게 한다. 군위로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추위 탓인가, 코로나19 때문인가? 텅 빈 들판과 낙엽이 떨어져 벌거벗은 겨울나무 숲은 조용히 추위를 견디고 있다. 응달에는 아직도 하얀 눈이 쌓여 있다. 인각사로 향하는 지방도로는 산길로 접어들어 굽이진 길을 간다.
영천 방향으로 산길을 위태롭게 오르내리며 가는데 영락없는 산촌 풍경이다. 이런 궁벽한 산골에서 고려의 국사였던 일연 선사가 하안소(下安所)로 인각사를 선택하고 ‘삼국유사’의 저술을 마무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얼마나 멀고 먼 땅이던가? 어렵게 산길을 거쳐 왔어도 막상 사찰은 평지에 있었다. 화산의 봉우리 끝에 상상의 동물인 기린의 뿔과 닮은 곳에 세웠다 하여 인각사라 명명했다 한다. 절의 맞은편 위천(渭川)이 흘러가는 강변에는 학이 깃들어 산다는 학소대(鶴巢臺)가 우뚝하다. 일반 여행객이라면 절에 눈길을 주기 전에 틀림없이 이 절벽에 주목할 만큼 절은 평범하다.
고려의 명승 일연 스님이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천년 고찰 인각사도 온통 추위 속에 서 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 이곳에서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국 불교의 본산임을 알 수 있다. 인각사 경내에는 보물 제428호인 보각국사탑과 비가 있다.
도로변 평지에 위치한 인각사에는 엄청난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침 주지 스님은 본찰인 은해사에 가서 부재중이었다. 직원에게 딸기 공양을 맡기러 컨테이너로 된 종무소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순간 발이 얼어붙는 듯했다. 계곡 바람이 차가웠다. 문을 닫고 종무소 안으로 들어가니 시골집 아랫목처럼 따뜻했고 뜨거운 차는 반가웠다. 부처님 품속에라도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보각국사탑과 비를 본다. 비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몇 동강 나 있고 글자는 알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30여 개의 탁본이 남았고 금석학자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해독이 가능하다고 한다. 글자가 명필 왕희지체여서 인기가 많아 수많은 탁본을 떴으며, 과거를 보는 선비들이 효험을 보려고 비를 갈아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게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연 스님이 남긴 민족 역사의 대기록 ‘삼국유사’
민지의 비문으로 일연 스님을 기억한다면 우리 가슴에 새겨진 영원한 비문은 ‘삼국유사’다. 40년간의 몽골항쟁 후 ‘삼국유사’가 쓰였다. 외세 침략을 극복하고 민족 자존감을 고취하기 위해 한민족의 자존 용기와 기백을 그렸다. 스님이 활약하던 시기는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몽골과의 길고 긴 항쟁을 하던 시기였다. 결국 장년기에 들어서는 원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대장경 간행에도 관여했으며, 출가 시절부터 전국의 사찰을 다니면서 민초들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았고 누구보다 그들의 힘을 믿었다. 국사라는 안락한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효도의 예를 다했으며, 당시 시대의 과제를 피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700여 년 전 일연 스님이 남긴 민족 역사의 대기록 ‘삼국유사’, 마지막 생을 불태운 그의 기록은 민족의 뿌리를 기억하게 하는 보물이다.
지금 이 시대에 왜 ‘삼국유사’이고 보각국사비인가? 인간이 되려고 인고의 21일을 견딘 웅녀의 끈기와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나라를 세우며 내세운 홍익인간 같은 사상이 필요한 때다. ‘삼국유사’에는 따뜻한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한민족 최초의 스트리퍼라 불리는 정수 스님의 이야기는 상징적이다. 한겨울 길거리에서 만난 산모에게 옷을 다 벗어주고 간 스님의 이야기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일연 스님의 생애를 새긴 보각국사비 양기(陽記)의 마지막 문장은 ‘온 산하가 다 불타 없어지더라도, 이 비만은 홀로 남아 전해주소서’라는 뜻이다. 비록 비는 부서졌어도 일연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뜻과 문장은 향기롭게 남아 시대의 등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군위 여행의 맛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많은 저작을 남긴 이윤기 작가의 고향이다. 그도 자신의 고향이 ‘삼국유사’의 고향인지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이 고을의 대표 브랜드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다. 군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김수환 추기경의 자서전을 읽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 지역의 사계와 먹거리를 요리로 표현한 김태리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가면 더욱 알찬 여행을 할 수 있다. 영화는 경쟁적 도회의 삶에 지치고 허기져서 귀향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추억 속의 시루떡은 달지 않은데 단맛이 나고 지금 먹는 떡은 짜지 않은데 짠맛이 난다.” 영화는 엄마가 딸에게 주는 인생 레시피다. 군위에서 듣는 일연 스님의 이야기는 시대와 역사가 주는 가르침이다. 군위 여행은 ‘삼국유사’라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뜻밖의 깊은 맛이 난다. 우울함을 단번에 행복감으로 바꿔주는 영화 속 음식 크렘 브륄레처럼, 코로나19 시대 위기를 극복하는 ‘삼국유사’의 비기를 찾아가 보자.
종교를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이기에. 그 어떤 권능에도 휘둘리거나 꼬리치지 않는 자율적 행위이기에. 그러나 자유 혹은 자율을 근간으로 삼기가 쉽던가. 매사 스텝이 꼬이고 뒤엉겨 좁은 세계에 갇히는 게 사람이다. 신의 이름을 간절히 불러 위안을 구하고서도 돌아서면 외로워 보채는 게 사람이다. 도돌이표처럼 자주 되돌아오는 자문은 하나. 나는 누구인가?
경주시 남산 자락 소나무 숲속에 사는 정미연(65)은 성화(聖畫)로 이름을 얻은 화가다. 얻을 만하기에 얻은 이름이다. 무겁지 않을까, 이름이라는 것. 얻으면 얻을수록 어깨에 얹히는 하중도 커지는 게 이름이다. 더구나 성화란 성(聖)을, 지고지순을, 염결(廉潔)을 구현하는 그림이니 속세에 몸을 둔 화가로서는 얻는 게 있을수록 버거워 불편감에 사로잡힐 수 있을 게다. 그림은 고결하나 삶은 어이 부박한가? 이런 의문이 들솟아서.
그러나 그는 세속을 어지간히 건넜다고 한다. 신앙으로, 기도로, 그림으로 부박한 삶의 때를 어지간히 헹구어 이젠 마음의 소란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 어지간히 건넜다는 안도감, 그게 때로 순간의 착시처럼 흩어지는가. 그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갈증을 해 저물기 전에 처리하고 싶다. 살면서 내내 움켜쥐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더 옹글게 타야 할 필연을 느낀다는 거다.
“어떤 선각자가 말했다. 인생은 선반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는 것과 같다고. 잠시라도 닦지 않으면 먼지가 쌓인다고. 실로 그렇다. 잠시만 방심하면 유혹이 스며드는 게 인생이지 않던가.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줄곧 그런 물음을 품고 살아왔다. 신앙으로 그 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여전히 갈등이 도사려 있다. 갈등과 자주 싸운다.”
“당신이 알아낸 당신은 누구인가?”
“창조주의 피조물이다. 여기엔 아무런 회의가 없다. 신의 사랑 속에서 살고 있다는, 내 존재의 근원이 창조주와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깊어져서다. 그러나 여전히 삶에 서툴다. 나는 누구인가 파고들어 매번 깨닫는 또 하나의 진실은 내가 부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신달자 시인은 정미연의 성화가 ‘천상의 모습은 물론, 천상의 평안마저 확신을 가지고 바라보게 한다’고 극찬했더라. 성화가 지닌 감화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작가의 기량? 태도?”
“나에게 성화 그리기는 기도다. 신앙이 무르익기를 염원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지. 절실한 신앙으로 영성을 갈구하는 마음, 정신, 그런 게 그림에 담기기를 희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작으나마 성취가 있었다면 그건 주님이 주신 선물일 뿐이다.”
“화가란 천성적으로 일탈자일 수 있다. 어떤 규율에 길들여지기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지 않던가. 종교생활에서 오는 구속감이 따분하진 않나?”
“초기엔 구속감이 싫었다. 아이고, 나 늙으면 열심히 믿을래! 그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웃음) 그러나 모든 게 운명처럼 돼버렸다. 성화 작가로 자리매김이 되면서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들어가게 되더라. 그 역시 신의 사랑이었다. 결국은 신앙의 진정성, 나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생래적으로는 좀 도발적이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싸움도 불사하는 기질이 다분했거든.”
“가령 어떤 싸움?”
“나의 아버지는 완고해 딸의 미대 진학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법대에 가 법관이 되길 바라는 일념으로. 그러나 난 삐딱선을 탔다. 미술에 품은 뜻을 굽힐 수 없어 정면으로 맞붙어 결국은 고집쟁이 아버지를 꺾었다. 그 시절의 기질대로 살았다면 성화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묵주기도책과 성화
아비들은 흔히 살아온 공력으로 현명하나 고루하다. 외눈으로 자식을 바라봐 일방적인 통제와 선동을 일삼기 십상이다. 사막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물고기처럼 수영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랑이 아니라 할 것도 없다. 모순이 없는 사랑이 있던가. 신의 사랑으로 사는 정미연의 눈은 광각렌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하니 완고했던 아버지를 두고서도 사랑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하랴. 어머니는 온전한 사랑의 화신이었던 모양이다. 살아생전 ‘성모님’이라 불린 분이었다지. 결혼 전 가톨릭에 입문했으나 ‘한동안 날라리 신자로 살았다’는 정미연이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그 어머니가 남긴 묵주기도책 때문이었다.
“심한 관절염으로 30여 년을 걷지 못한 채로 지내면서도 8남매를 어엿하게 길러낸 어머니였다. 노년엔 촛불을 밝히고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로 일관하셨지. 어머니의 표정도 기운도 얼마나 맑았던지, 어린 내 가슴에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갈증이 일렁이곤 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절을 올리는 일도 잦았다. 그런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묵주기도책을 펼쳐들었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게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어머니가 남긴 성스러운 이미지에서 성화 그리기를 착상했다는 얘기?”
“그것만은 아니다. 묵주기도책을 만들어 어머니 영전에 봉헌하고 싶었다. 묵주기도책은 성모님과 예수님의 일생을 그린 성화와 묵상기도문들로 이루어지는데 성화를 내 손으로 그리고 싶었던 거다. 완성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죽을 만치 앓기도 했다. 기도문은 신달자 선생이 맡아주셨다. 과분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주목했다. 가톨릭 성도들에게 묵주기도책은 흔히 후손에게 상속할 신앙의 유산이자 가보로 간주된다.”
성화로 방향을 바꾸기 이전, 정미연의 그림은 사뭇 달랐다. 아름답거나 미묘하거나, 억눌리거나 튀어나오거나, 인간이 지닌 복잡한 내면을 자유분방한 혹은 고즈넉한 작풍으로 표출하기에 능했다. 그러다가 기도와 관조를 실은 성화로 이행했던 것. 그런데 묵주기도책을 위한 성화를 그릴 때 정미연은 한 가지 재미있는 발상을 했다. 기존 성화들이 답습해온 서구적 양식에서 좀 벗어나 한국적 전통 양식을 가미하자는 착안을 했더란다. 그는 예수의 옷을 한복으로 갈아입혔으며, 성모에겐 잔주름 곱살한 한국 어머니의 얼굴을 부여했다. 석굴암 전실이나 에밀레종 비천상을 성화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한국적이고 토착적인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불안했다. 이거 제대로 그리는 거 맞아? 혼자 고민하다 정교회 한국대교구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님(91, 그리스 태생)이 미술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감수를 청했다. 그림을 본 대주교님께서 흡족해 이러시더라. ‘나를 아버지로 여기라!’ 이후 각별한 은혜를 입었다. 그분의 소박한 삶과 실천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떤 분이기에?”
“하염없이 높은 분이 늘 하염없이 낮은 자리에 임하셨다. 생활부터 극도로 검소해 입은 옷은 바늘로 꿰맨 자국투성이였다. 조용한 눈빛과 절제된 언어엔 자비와 존엄이 서려 세상 사람 같지가 않을 지경이었지. 신령스럽다, 그런 표현이 맞을라나?”
“깨달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천진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삶에 대한 모든 욕심과 의문이 사라져서.”
“영성으로 충만한 존재. 대주교님은 그런 분이었다. 그저 소리 없이 빙긋이 웃어주시는 표정만으로도 깊은 위안과 기쁨을 느끼게 했다. ‘제가요, 당뇨도 있고요, 약도 한 움큼씩 먹고요, 저 앞으로 어떡해요?’ 그렇게 내가 방방거리면 ‘오늘 하루의 걱정거리는 오늘 하루로 족해!’ 하시더라.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할 것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내 안의 근심이 순간에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 특별한 분과 함께 그리스의 수도원들을 한 달간 순례하기도 했는데 실로 값진 여행이었다.”
“수도원 순례라. 문외한들은 생각하기 힘든 여행이다. 정결하고 엄숙할 수도원의 무거운 공기부터 연상돼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머물기도 했다. 대주교님과 동행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지. 며칠씩 머무는 곳마다 나를 사로잡더라. 고뇌와 기쁨으로 신을 찬미하는 수도자들, 헌신을 다투고 사랑을 경쟁하는 수녀들, 성스럽고 아름다운 미사, 놀라운 성화들, 고요한 밤에 은총처럼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 성모님의 음성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곤 했다. 무지렁이 같은 나를 보듬는 예수님의 손길을 깨닫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평화신문에 순례기를 연재했지. 대주교님께선 글을, 나는 성화를 맡았다.”
고통은 신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기회
민첩한 거동, 자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분위기에 생기를 집어넣는 순간순간의 센스. 돌돌돌 명랑하게 흐르는 시냇물쯤? 그의 언동엔 거침이 없어 청명한 물살을 연상시킨다. 기도로 진리를 간구하고, 성화 그리기로 영성에 찬 삶을 갈구해왔으니 파란만장 세상사야 이미 관통해 가뿐한가? 그는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이라는 믿음과 실감으로 기쁘다지. 기쁘기에 평화로운 내부엔 에너지가 샘물처럼 고인단다. 흔히들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진을 빼며 그림과 씨름하지만 그는 색과 선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에세이도 많이 썼다. 그간 여러 권의 서화집을 출간했다.
“내가 다작을 한다. 일단 구상을 하고 나면 작업에 속도가 붙어 손쉽게 그림을 완성한다. 남편의 적절한 통제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몰입이 지나쳐 건강을 해쳤거든.”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기념관엔 당신이 만든 성상(聖像) 조각 작품들이 들어가 있다. 성화 작가로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 셈이다.”
“이름이나 위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미술계에선 성화를 쳐주지도 않는다. 외도로 여긴다. 한때 이름에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게 본분임을 알고선 부끄러웠다. 성화는 순수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 영혼을 다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성화가 나올 수 없거든.”
“사람이 순수할 수만 있겠는가? 진정으로 순수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던걸. 신의 숲, 그 안전지대에 들어간 당신은 어떤가?”
“아집과 불순에 휘말린 마음이 망둥이처럼 날뛰기도 한다. 그러나 믿는 자는 믿으면 믿는 대로 된다는 걸 알기에 믿음의 힘으로 망둥이놈을 수월하게 밀어내지. 진실한 신앙인들은 안다. 천사가 늘 우리를 보호한다는 걸. 기적은 성경 안에만 있지 않다. 삶이란 온통 기적이지 않던가? 그렇지 아니한가? 날마다 이어지는 우리의 들숨과 날숨 자체부터가 기적이지 않은가. 세상엔 위선과 탐욕이 횡행하지만 삶을 기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엔 부정적인 마인드라는 게 들러붙을 자리가 없어진다.”
“인도의 어떤 수행 무리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신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이토록 외롭죠? 왜 이토록 괴롭죠?’ 천사가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세상의 암초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선 홀로 고통스럽게 계속 노를 저어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초라한 숙명이지 않나?”
“삶은 고통스럽지만 나는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경로이자 기회로 삼는다. 신을 섬기는 자에게 극복하지 못할 고통은 없다. 있다면 그건 신의 소관사항이지. 신에게 맡기면 그만이지. 그렇다면 삶을 통째 긍정하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부족한 나는 부끄러워 성경 한 구절의 말씀이나마 실천으로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젠 더 먼 길을 떠나고 싶다. 삭발 수도자로 살고 싶다. 그렇게 될 거다. 가족은 어쩔 거냐고? 부부가 함께 간다. 남편도 공감하니까.”
그는,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삶에 올인하는 거다. 내 삶이 꼬였다 느껴지는 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걸 알 때다. 어라,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니네? 이 새삼스러운 발견은 괴롭지만 문제를 풀 실마리? 정미연의 드라마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해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간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인간시장’의 작가, 성공적인 의정 활동을 수행한 국회의원, 그리고 감사와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김홍신의 다양한 삶의 여정은 여러 가지 명칭들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그는 무엇보다도 다시 만년필을 잡고 원고지와 마주한 작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든 외부 활동이 불가해지자 그는 멈췄던 장편소설과 수필집을 완성하기로 했다.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빨갱이’로 몰려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장편소설 ‘적인종’의 집필, 그리고 ‘월간 에세이’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수필집 출간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나 코로나19 여파로 역경의 연속인 삶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울림을 들어봤다.
방송에서 자주 봐서 익숙한 김홍신 특유의 인자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외모는 여전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는 바이지만, 그의 삶은 그런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저 김홍신 인생이 순조롭다고 여기실 테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 또한 순탄하지는 않죠. 모든 삶이 순조롭다면 지구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죽음이 있고 고통과 고뇌가 있고 실수와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죠.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신화와 역사가 될 수 없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감동도 없다
그는 원래 의대를 가고자 했지만 떨어지면서 재수를 해야 했다. 그때 느낀 울분과 절망은 스스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결국 재수를 해서 들어간 건국대학교 국문과. 취업도 안 되고 할 일이 없다 하여 타과 학생들이 ‘국물과’라고 부르는 학과였다.
“그때 집안이 망해서 휴학까지 했죠. 그래서 데뷔도 늦었어요. 그나마 당시에 가장 권위 있던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지만 날 이끌 사람이 없었어요. 종합대학 중 문인 숫자가 가장 적은 학교가 건국대였으니까요. 내 소설이 뛰어났다면야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죠. 신춘문예에도 여러 번 떨어지니 ‘다 지들끼리 해먹는다’ 싶었고…. 물론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핑계를 대야 내가 견디잖아요? 유명한 소설가들을 비판하면 비평력이 있다고 착각하던 때였죠.”
절망의 청춘을 지나 성숙해지다
그의 날선 비판 대상에는 당대의 대표 소설가였던 최인호도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불만만 가득한 야인으로 살던 시절 끝에, 마침내 ‘인간시장’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순식간에 인기 작가가 된 그는 이제 다른 사람 작품의 심사까지 맡게 됐다.
“그때 최인호 형과 같이 심사하게 됐는데, 너무 괴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했었는데 같은 자리에 있으려니까요. 그래서 ‘선배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라고 먼저 말했죠.”
최인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김홍신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다 털어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배님을 비판했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나를 끌어안는 거예요. ‘내 앞에서 최인호를 비판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너무 고맙다’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을 반성하고 속죄하고자 한 김홍신이나 그런 모습을 보고 기탄없이 받아들인 최인호나 둘 다 넉넉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 식사 때 서로 돈을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 결국 의형제를 맺는다.
“그때 인호 형이 한 얘기가 ‘지금 김홍신을 시샘하는 사람이 많다. 그걸 견뎌야 한다. 그리고 유명해질수록 바른 걸음으로 걸으며 세상과 너무 타협하지 말라’는 거였죠.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죠. 나도 그랬는걸(웃음). 온갖 협박 공갈에 편할 날이 없었어요.”
우리 어딘가에 있는 의인들을 도와줘야
그의 고난은 작가 생활을 거쳐 국회의원 시절로도 이어진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한 그는 2000년에는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계속 주변과 싸워야 했다. 15대 국회에서는 ‘이틀만 근무하는 5월에 한 달 치 세비를 받는 건 혈세 남용이라며 세비거부 운동을 벌여 동료 의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2003년에는 당 지도부에 의해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강제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치권에서 배척받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자신의 진심이 닿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5, 16대 연속 의정 활동 1위 국회의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증거였다. 그는 정치에 대해 싸울 때는 침묵하지 않고 자신만의 할 말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몰아내고 영웅이 될 만한 사람들을 쳐냈어요.”
왜 그렇게 된 걸까? 그는 힘 있는 자들의 횡포라고 진단했다. 자기가 역사에 남고 존경받으려면 남을 칠 수밖에 없다는데, 그건 상대를 존중해야 자기도 존중받음을 잊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기적은 일궜는데 기쁨을 잃었어요. 배고픔은 해결했는데 배아픔은 해결 못하고 있죠.”
그래서 그는 시대를 이끄는 현자와 의인들은 시대가 만들어주고 옹호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구석구석에 계십니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끝까지 진실을 향해 항해하는 사람. 우리 사회 곳곳에 계세요.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대구의사협회장의 호소문에 응답하는 의사들의 모습도 그런 것이었다고 봐요.”
굴곡 많은 시련을 어떻게 견뎌왔나
얘기가 자연스럽게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로 들어가게 될 시점이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은 끝나기는커녕 미국과 유럽 등지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 거대한 역병의 파도에 쓸려 심신이 고달프고 막막하며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처럼 굴곡진 삶에서 김홍신은 누구보다도 그런 상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히 지옥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시기는 소설 ‘대발해’를 쓸 때였다. 시작은 법륜 스님의 권고였다. “국회의원, 장관 열 번 하는 것보다 발해 역사를 알리는 게 할일 아닙니까”라는 말에 동의하며 시작된 ‘대발해’ 집필은 2004년 말부터 3년간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며 피폐하게 살게 만들었다. 그때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점도 그를 힘들게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치아와 눈, 허리에 문제가 생겼죠. 불면증도 생겼어요. 자다가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 메모해놓고 잠을 자야 했으니까요.”
소설은 마침내 2007년 여름에 발표됐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요로결석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스카프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연이 있어요. 소설을 쓰면서 밖을 안 나가다 보니 햇볕 알레르기가 생겨서, 햇볕에 노출되면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더군요. 얼굴은 약을 바르면 됐는데 목은 치료가 안 돼서 스카프를 두르게 된 거죠. 그리고 지금도 가끔 손에 마비가 와요. 원고지 만이천 장을 썼으니까요. 교정만 7개월을 봤고요.”
우리는 역경을 거치면 반드시 더 강해지는 민족
김홍신은 ‘대발해’를 발표한 후 7년 동안 소설을 못 썼다. 소설 집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려고만 하면 또 아프다 쓰러지는 것 아닐까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대발해’로 소설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끝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지 소설을 못 쓰겠다’는 두려움이 집필에 대한 부담감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다 그동안 사회비판소설, 역사소설을 주로 썼으니 사랑 이야기를 쓰면 가능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쓴 게 ‘단 한 번의 사랑’이었죠. 그 이후에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쓸 수 있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적인종’을 집필할 수 있게 된 거죠.”
소설을 쓰다 죽을 뻔한 경험을 치른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친분이 있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108배를 하며 세상, 민족, 평화, 북한 동포, 인도 불가촉천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자신이 기도한다고 세상이 변할까마는, ‘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와 같은 희망의 마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품앗이 정신이 대단한 민족이에요. 대구만 봐도 모여드는 의사, 간호사, 봉사자들 보세요. 대구 달구벌과 광주 빛고을이 달빛동맹으로 교류하는 걸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보려고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 걸 보면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토록 남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안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 반드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DNA가 있잖아요.”
나를 존중하고 세상을 존중하라
그는 잘 늙으려면 스스로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존중하려면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 공기, 풀, 햇빛을 사랑하고 그 존엄성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과 세상을 위해 깨달은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고 말한다. 이는 김홍신 자신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사랑 못할지언정 그에 대한 미움은 없어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면 내 전생의 어머니였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려 하면 내가 편안해져요.”
그에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개인적 사연이 있다. 과거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그를 잡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재작년에 사망했다. 그는 그의 부고 소식이 실린 신문을 스크랩해서 노트에 붙여놓고 그 옆에 그와 자신의 사연을 썼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 방향을 향해 108배를 했다. 생전에, 그는 김홍신에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죄를 구했다. 김홍신은 그런 그를 보며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문이 있었다. ‘내가 과연 그를 용서한 걸까?’ 그래서 108배를 해보며 계속 되물었다. 답은, 용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의 평화를 만드는 마음의 다짐
“지금 제가 찬 시계는 흔들어줘야 가는 오토매틱 시계예요. 이틀 가만 놔두면 죽어요. 이 시계처럼 인생도 자꾸 흔들어줘야 해요. 그런데 남한테는 ‘흔들어주세요’라고 말해놓고 자신이 안 하면 안 되겠죠.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흔들어야 해요. 명상과 기도, 고맙다는 감사 등이 그 방법들이에요.”
그는 요즘 모두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진달래, 홍매화도 스승이다. 자신을 기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운 사람이 생겼다고 쳐요. ‘에휴…’ 하다가도 ‘내가 미워하면 안 되지. 잊어버리자’ 하며 다잡습니다. 그리고 저녁기도할 때 ‘내가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반성합니다. 그러면 내가 편해져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제 스승인 거죠.”
물론 무조건 다 그의 말처럼 살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계속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깨달음과 평화가 있음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김홍신이란 이름을 부를 때 기뻤으면 좋겠어요. 아주 기쁘진 않더라도, 싫지 않고 밉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려고 하니까 힘들게 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그걸 해내는 게 기쁨이 될 수 있는 거죠.”
마음 한쪽이 아련히 아팠다. 그렇지만 그와 이야기하면서 지금 ‘장총찬’이 절실한 이 시대에 김홍신이라는 문인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무릎을 탁 치며 늙음과 낡음이 명확히 깨달아지는 축복이 스며들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라 상영하는 극장이 적어서 미뤄두었던 숙제를 설 연휴 중에 대한극장을 찾아가 해결했다. '두 교황'. 영화가 소개되던 초기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다. 교황이 임기 중에 은퇴한 초유의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라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무엇보다도 주연 배우가 연기의 신이라는 ‘안소니 홉킨스’ 아닌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지루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긴장감이 두 시간을 지배한다. 그것은 어쩌면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13억 신자들을 둔 종교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새삼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다.
영화는 교황과 한 예수회 소속 추기경이 교황의 여름주택 정원을 거닐면서 시작된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은 교황청의 보수적 도그마에 회의를 느껴 당시 교황이던 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를 직접 찾아와 은퇴하려는 뜻을 전하고 사직서 서류에 교황의 서명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교황은 한사코 서명을 거부한다.
당시 교황청 고위직 신부들의 성추행 추문으로 교황은 코너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추기경의 사임은 자칫 교황에 대한 불신임으로 비칠 우려가 있었다. 그와 함께 교황은 이미 마음속으로 교황청의 쇄신을 위해 자신의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배경이 서명을 거부한 이유였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교황은 보수적이며 내성적인 자신과 달리 교황 선출 당시 2위를 했던 적극적이며 진보적 성향의 호르헤 추기경에게 끌린다.
그들의 대화는 어느새 교리 논쟁을 넘어서 일상생활과 취미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스웨덴 팝그룹 아바(ABBA)가 등장하고 비틀스가 언급된다. 교황은 피아노를 치는 음악가 지망생이었다. 둘은 어린 시절 성직을 택하던 고뇌의 순간에 관해 얘기를 나눈다. 호르헤 추기경은 약혼자를 버리고 예수회 신부로 입교하고, 살벌하던 군부 통치하에서 친하던 신부들을 배반했다는 가책에 시달린다.
유머를 모르는 독일 출신의 교황은 어느새 탱고를 좋아하는 추기경을 이해하게 된다. 맛없는 독일 음식을 혼자 먹던 그가 추기경과 함께 길거리 피자를 즐기기도 한다. 추기경도 교황의 인간적 고뇌를 알게 되고 그의 은퇴 계획을 받아들인다. 1년 뒤 교황 은퇴가 공식화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에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압도적 표차로 선출된다. 교회의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 영화는 종교 영화라는 외피를 쓰고 있으나 내면은 휴먼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 두 교황이 와인과 독일 맥주를 마시며 2014년 월드컵을 시청하는 장면은 귀엽기까지 하다.
한편 영화에서 나오는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말은 오늘날 우리 상황을 일깨우는 죽비와도 같다. “장벽이 아닌 다리를 지어라.”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모두의 잘못이다.”.
이 영화는 흑백논리, 진영논리가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서로 다른 견해 차이를 어떻게 접근해 풀어가는지 실증적인 방식으로 일깨운다. 아울러 신념이 달라도 시대의 소명을 알아 흔쾌히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운 뒷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감동은 오로지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라는 명배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골든 글로브’에 노미네이트(후보로 지명)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200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내 나이 50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때까지 사내 회의 자료나 외부 강의용 PPT 자료는 직원들이 다 만들어줬다. 문서를 만들거나 심지어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직원들이 대신 해줬다. 프리핸드로 건축 기본 스케치를 해서 넘겨주면 직원들이 캐드로 말끔하게 도면을 그려냈다. 사실 건축 기본 콘셉트를 구상하고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초기 단계에서 삼각자를 이용하거나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면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전개에 방해가 된다. 그런 습관 때문에 나는 컴퓨터와 오래도록 친하지 못했다.
그날도 외부 강의를 준비하면서 여느 때처럼 디자인 부서 여직원에게 강의 교안을 부탁했다. ‘아름다움의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한 강의 슬라이드에 오드리 헵번 사진을 넣고 싶었다. 머리에 보자기를 멋지게 둘러쓴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강의 자료에 넣어 달라고 했더니 “사진을 캡처해서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간단할 텐데요!”라며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이메일도 주고받지 못하는데 캡처는 또 뭔 말인지. 여직원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 나는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듯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책상에서 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커먼 컴퓨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홀로 서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컴맹 탈출이었다. 내 아이들을 가르쳤던 컴퓨터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기초부터 배우기로 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먼저 말했다. 한글 문서를 만들고 싶고, 이메일을 주고받고 싶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싶고, 강의용 PPT 자료를 만들고 싶고, 원하는 사진을 자유롭게 캡처해서 편집하고 싶고, 포토샵과 엑셀도 어느 정도 하고 싶다며 꽤 많은 걸 요구했다. 그리고 몇 개월 개인지도를 받았고 놀랍게도 이 모든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친김에 실행 가능한 목표를 매년 한 가지씩 정하고 퇴직 목표 나이 60세까지 10년 동안 10가지를 이뤄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전문강사자격 과정을 수료했다. 머지않아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러시와 함께 평생학습에 대한 수요가 많을 것이니 그때 필요할 전문 강사의 기본 소양 등을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강사자격 과정에 참여하기 전에 컴퓨터의 기본을 배워둔 것이 주효해 이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원고를 쓰고 사진을 편집하면서 컴퓨터 사용 능력도 한층 향상되었다. ‘무지개 공감’은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나는 ‘나의 건축인생 이야기’를 썼다. ‘시니어 비즈니스 스쿨’은 실버산업 분야의 교수, 요양원 등의 시설 운영자, 실버용품개발 디자이너가 함께 저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시니어의 주거 문제를 다뤘다. 책을 같이 내니 출판비용 부담도 줄었고 멤버들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블로그에 틈틈이 글을 올리면서 신문이나 문예지에서 공모전을 하면 응모했다. 금융위기와 관련한 수기를 모은 책 ‘희망편지’와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글을 모아 펴낸 책 ‘내가 만난 추기경’은 그때 채택된 작품들이다. 블로그를 운영한 지 10년이 지난 2017년, 저장해놓은 포스트를 보니 1700개가 넘었다. 10년 동안 이틀에 한 편꼴로 포스팅을 한 셈이다. 그렇게 모아둔 글 몇 편을 다듬어 계간 ‘문학의 강’ 수필 부문에 응모를 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수필가 등단도 이뤄냈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상담사 활동을 하고 싶어서 심리학 공부도 시작했다. 시동을 건 김에 심리상담사,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결혼상담사, 이혼상담사 자격증까지 땄다. 상담사 공부는 내 문제와 직면하게 해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반대로 미대에 가지 못했다. 그 한이 수십 년 동안 맺혀 있었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석고 데생부터 시작해 기초를 배웠다. 늘 도전해보고 싶었던 목조각도 배웠다. 기타 치는 시니어를 꿈꾸며 중고등학생들이 다니는 기타 학원도 다녔다. 그렇게 10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59세가 되던 해인 2017년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30대 초반에 건축사를 취득해 건축사사무소를 개설했다. 도제생활까지 합하면 35년 가까이 한 분야에서 쉼 없이 달려왔다. 당시에는 건설 경기가 호황이어서 30대를 화려하게 보냈다. 그러나 날벼락 같았던 IMF로 40대가 저당잡혔고 그 뒤 10년은 빚 청산하는 데 바쳤다. 그래도 2007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 부서 여직원에게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현역을 더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미련 없이 자유인이 되었다.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1년 동안은 상당히 불안했다. IMF 때 겪었던 공황장애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10년을 준비했는데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은 사람들과의 교류였다. 그 판단은 옳았다. 만남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지면서 관계를 확장시켜줬다. 놀라운 사실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들이 실타래 풀려나가듯 하나씩 해결되었다.
지금은 현역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다. 준비해둔 대로 여러 기관에서 시니어 대상으로 주거 관련 강의를 한다. 우리의 주거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풀이한 글을 모아 ‘모두의 집’도 출간했다. 몇 군데 언론사와 기관에 글도 기고하고 있다. 답답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듣기 봉사’도 한다.
프리랜서를 선언한 지 이제 만 2년이 지났다. 나를 찾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다녀야 하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다. 언제까지 왕성하게 활동할지 알 수 없다. 초고령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살아가야 할 미래가 가끔은 두렵다. 그러나 지나온 날들처럼 미래에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안전망이 되어줄 것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람을 만난다.
함께 브라운관에 울려 퍼졌던 이 말. 바로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이 라는 군인 대상 TV 프로그램 사회를 보면서 마지막에 외치던 멘트다. 어느새 칠순을 훌쩍 넘긴 그는 요즘 인기 강연자로서 제2의 인생을 숨가쁘게 살고 있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그의 소식을 우리는 듣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프로그램의 종영,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졌던 그의 침묵 뒤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뽀빠이’다운 건강을 뽐내며 살고 있는 그를 만나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활동 안 하세요?”
‘뽀빠이’ 이상용과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인데, 식당 주인이 살갑게 물어왔다. 로 전국을 누비며 당대 최고의 MC로 활약했던 그를 한참 동안 TV에서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물을 것이다.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날리면서 대답했다.
“너무 많이 해요.”
그 말대로다. 그는 요즘 하루에 서너 개의 강연을 뛰고 있다. 한 달이면 쉬는 날을 빼고 대략 오륙십 건에 달한다. 기자가 그를 만난 것도 중구보훈회관의 강연이 끝난 뒤였다. 1990년대 전성기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는 다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73세의 나이에.
죽지 않으려고 한 운동
이상용이라고 하면 누구나 ‘건강’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듯이, 그는 7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건강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기초 체력이 약하지. 여섯 살 때까지 누워 있었거든. 일곱 살 때 처음 걸음마를 뗐어요. 그래서 안 죽으려고, 삶의 의욕이 강했지.”
그에게 건강은 태어날 때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서 쟁취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한 상태로 아버지를 만나러 열 달 동안 부여에서 백두산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만나지 못했고, 다시 부여로 돌아와 그를 낳았다.
열 달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그는 12세까지 여덟 가지 병을 앓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13세에 아령 운동을 시작해 18세에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 미스터 고려대, 고대 응원단장을 거쳐 ROTC 탱크 장교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는 우리가 아는 ‘뽀빠이’의 삶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 있음에 감사
그에게 70세가 넘어서도 젊음을 유지하는 건강 비법을 물어봤다.
“건강? 밥 먹으면 돼. 오래 살려면 나이를 먹으면 되고. 그리고 숨쉬기 운동이 중요해. 숨쉬기 운동은 하다가 안 하면 죽어(웃음).”
슬쩍 치고 들어온 농담과 함께 그는 자신이 평생 담배, 술, 커피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찬물을 마신다고 한다. 밤 동안 속에 쌓인 노폐물을 씻기 위해서다.
“아침은 치즈, 계란, 바나나 하나씩 먹어. 소식이야. 그리고 저녁은 일찍 먹고. 최근에는 콩비지와 두부를 좋아하게 됐어. 고기는 일주일에 두 번 먹고.”
그는 인생의 마지막 승리자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인명은 제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는 날까지 사람들이 자신만 보면 즐거워지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단다.
“사람들이 내 강연을 들으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헛살았다’ 하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
모든 것을 무너뜨린 억울한 누명
이상용과 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89년 4월에 처음 방송을 시작해 1997년 3월에 종영된 는 군인 위문을 예능으로 만든 신선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국민 예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지막 코너인 ‘그리운 어머니’는 를 상징하는 코너로 무수히 패러디되었다. 하면 “뒤에 계신 분은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를 외치는 장병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의 사회자였던 이상용은 를 의미하는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건이 터진다. 공금횡령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당시 그는 사회봉사와 모금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주력한 것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이었다. 그런데 1996년 11월
녹화 도중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쳤고 녹화가 중단됐다. 그들은 경찰이라고 주장하면서 심장병 어린이 기금 횡령 혐의로 이상용을 수사한다고 했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고 온갖 매체에서 그를 횡령범으로 몰았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출처 불명의 소문들이 퍼져나가더니 마치 진실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벤츠 S500을 탄다, 집이 40억짜리다, 만 평이나 되는 땅이 있다….’
진실은 얼마 안 가 드러났다. 검찰에서는 조사를 착수한 지 3개월 만에 그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을 이용해 횡령을 일삼은 파렴치범’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제대로 된 해명 기사도 내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아무도 나한테 확인조차 하지 않았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한지.”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용은 42만원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벤츠S500을 탄다’는 괴소문과는 달리,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 82억원을 쓴 그는 돈 한 푼 없었다. ‘횡령범’ 이미지가 씌워져 방송에서 활동할 수도 없었다. 먹고 살려고,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훈장을 세 개나 받았는데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고 대서특필하면 40년간 해온 일이 어떻게 돼? 나쁜 놈들이야.”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그에게 누명을 씌운 걸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가 당시 제안받은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권의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불쾌하다는 듯 그때의 기억을 단답형으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이상용의 목소리에는 아직 씻지 못한 분노와 억울함이 느껴졌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도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전 재산을 털어가며 무려 567명을 치료했다. 그러나 치료받은 아이들 중 단 3명만 연락이 닿았다.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는 안 해. 다만 좀 서운한 것뿐이지. ‘고맙습니다’ 한마디만 해줘도 좋을 텐데…. 그런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못 나서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힘든 시절, 이상용에게 위로가 됐던 것은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김동길 박사가 해준 말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걱정 마라. 눈이 왔다. 쓸지 마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난다’고 말씀하셨고, 법정 스님은 ‘자루에 너를 넣고 흔든다. 많이 담으려고 그런다. 하루 종일 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땅에다 놓으면 흔들림은 없어지고 너는 많이 담기는 자루가 된다’고 말씀 주셨지. 김동길 박사는 ‘강물이 흐르다 보면 위에서 오줌 누는 놈이 있다. 그렇다고 강이 지려지지 않는다. 너는 흘러가서 큰 바닷물이 되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고마운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준 말대로, 자신을 폄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단다. 그들은 이쪽에서 상관하지 않으면 스스로 죽는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견뎌내면서 단단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멋지게 살다 간 놈’으로 기억되고 싶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매일 명동성당에 간다. 아침 6시면 성당에 앉아 있는 그를 볼 수 있다. 눈비가 와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문득 그의 얼굴이 보살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가 겪은 일들, 그리고 그것을 견뎌낸 세월이 새겨졌기 때문일까.
“법정 스님이 ‘너는 불자다’라고 말씀하셨지. 내 얼굴이 지장보살인데, 지장보살은 베푸는 보살이라고 하시면서 절도 다니라고 하셨어. 그래서 절도 다녀(웃음).”
그는 사회를 보는 것보다 강연하러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서 외로울 때는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사우나, 그리고 독서를 하지. 내가 책을 좋아해.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도 하고.”
그의 큰딸은 쉰 살, 아들은 마흔두 살, 외손주는 열일곱 살이다. 그는 자제들이 잘 자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우직하게 한마디로 말했다.
“멋지게 살다 간 놈.”
그는 마지막으로 독자들을 위해서도 한마디했다.
“브라보 독자님들, 뺏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세요. 악착같이 사는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측은합니다. 돈은 쫓아가면 도망가고 외면하면 찾아옵니다. 그저 오늘을 즐기세요.”
백세시대, ‘얼마만큼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치를 두는 이가 많아졌다. 언론인 최철주(崔喆周·7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장수시대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삶이 더욱 오만하고 지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웰빙’을 위한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그의 생각을 에 담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웰다잉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된다. ‘죽음’과 관련한 법인 만큼 제정 단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시행을 수개월 앞둔 현재, 나라 안팎의 혼란과 희석되며 이에 대한 관심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동안 글과 강연을 통해 ‘웰다잉’을 알렸던 최철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작년에 김영란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웰다잉법’도 우리가 필요해서 여론을 모아 만든 건데, 막상 시행하려 하니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아니, 잊어버린 거죠. 우린 그렇게 죽음을 기피하고 도망가려 해요. 김영란법도 처음 시행됐을 때는 논란과 혼란이 많았죠. 이제 내년이면 웰다잉법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이 법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됐어요.”
웰다잉법은 ‘존엄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안락사로 오해하거나 죽음[死]이라는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다. 그는 괜한 시비를 막기 위해 되도록 ‘웰다잉법’이라 말하지만, 이번 책의 제목에는 ‘죽음’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그 앞에는 ‘존엄한’이라는 수식어가 묵직하게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존엄’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이 ‘존엄’이라 생각해요. 광화문 사거리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어요. 차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거죠. 여성을 성희롱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여성의 존엄을, 학교나 군대에서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건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 모든 부분에 존엄은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게 헌법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존엄이 없느냐.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해야겠다. 그게 웰다잉법의 목적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죽음을 논하라
웰다잉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서류에 따라 자신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생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쉬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연명의료는 더는 의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말기 단계에 이뤄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약물 투여 등을 말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치료할 것은 다 하고, 어느 때가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야 하는데 환자나 가족들이 그걸 인정 못하는 거죠. 그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굉장히 고달파 해요. 평소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막연히 본능적으로 연명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연명의료 과정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팔다리가 묶여 발악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더욱 애석한 점은 말기 환자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자녀나 주변인의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부모님이 사전연면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식으로서 쉽지 않다”며 “부모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평소 부모와 자식이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괘씸하게 여기죠. 그러니 집안의 어른이 먼저 대화의 단초를 열어야 해요. 또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문서화해두고 보관 장소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해져 다툼이 나고, 한 사람의 죽음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그럼 그게 자식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되고요.”
그는 식탁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통이 어렵다는 요즘 가족, 그들이 죽음을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죽음이 등장하잖아요. 가령 ‘얘, 그 주인공 보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게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나중에 그렇게 하기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장례식장을 다녀오거나 주변에 연명의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례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보기도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두 가지가 뭘까요? 생명과 돈이죠. 평생 벌어놓은 돈 자기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라가 또는 자식이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유서는 많이들 써두죠. 그럼 내 생명은요? 내가 결정해두지 않으면 의사나 가족이 연명의료하겠죠.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남에게 맡기나요? 죽음도 돈처럼 자기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죽음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근하게 설명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그다.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아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를 계기로 웰다잉 공부를 하고 책도 쓰게 됐어요. 내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웰다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난 그게 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아픔을 드러내게 되죠.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죽음을 공부하게 됐지만,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인생의 롤 모델을 정하듯, 죽음에도 롤 모델 찾기를 권했다.
“좋은 죽음은 우리 삶에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처럼 최후의 순간에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죠.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씨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자신이 시한부라고 밝히며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죠. 존엄하게 삶을 끝내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겠다고 느끼면,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난 이렇게 죽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알뜰하게 살게 돼요.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 웰다잉을 생각하면 삶은 자연히 웰빙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