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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지 않고 일하는’ 최순호, 그가 현역일 수 있는 이유
- 선수 은퇴 후 31년. 냉혹한 스포츠 세계에서 여전히 최순호(61)는 매력적인 선택지로 건재하다. ‘레전드 대우’가 아니다. 수원FC 단장 공개 모집에서 8대1 경쟁률을 뚫었다. 신입 단장은 자신만의 오랜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쉬지 않고 일하는 최순호식 노하우를 캐왔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한 카페의 널찍한 통창 너머로 최순호 수원FC 단장이 보였다. 185cm의 큰 키, 꼿꼿한 자세. 아이폰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는 통화로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끊자마자 다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만 61세, 현역. 최 단장의 어느 대체 휴무일 풍경이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도자로 또 행정가로 축구 현장에서 숨 쉬는 중이다. “나처럼 일하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 사회적으로는 은퇴할 때라고들 하니까요. 축구계는 그런 개념이 덜하긴 한데, 그래도 후배들이 한마디씩 하죠. ‘어떻게 형은 쉬질 않네?’”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최 단장은 금세 확신에 찬 눈을 밝히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떻게’를 들려줄 채비가 끝난 듯 보였다. 축구 천재와 키다리 아저씨 최순호 단장은 축구계에서 불세출의 재능으로 꼽힌다. 국가대표 통산 96경기, 30골.(참고로 손흥민은 2023년 7월 기준 111경기 37골을 기록 중이다.) 재능에 관한 한 겸손은 없다. “타고났다고 봐야지. 그게 한 3년 동안 쓴 기록이에요. 골 넣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그는 당대 보기 드문 장신에 유연성을 겸비했다. 발이 빠르면 으레 지구력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청년 최순호는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쉬는 시간에 공 차다가 축구부에 뽑혔어요. 워낙 빨랐으니까 눈에 띄었겠죠. 축구를 하면서도 육상부로 청주시 대회에 나가 수상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운동은 타고나는 거예요.” 최 단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포항제철실업축구단(포항스틸러스의 전신) 입단이 확정됐다. 팀 체질 개선을 위해 어린 선수들을 주목했던 ‘실업 최강’ 포항제철은 일찌감치 최 단장을 점찍었다. 1980년대를 풍미한 ‘아시아의 호랑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 4~5년을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타깃형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많은 득점을 올렸습니다. 시기로 따지면 1979년에서 1984년까지죠. 정말 재미있게 축구했어요.” 때로 대중과 개인의 평가는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최 단장도 그렇다.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1골 3도움. 3골 1도움을 기록 중인 손흥민과 동률이다)을 안겨준 1986년 멕시코월드컵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당시 그는 축구에 대한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어느 순간 딱 막히는 느낌이 왔어요. 더 이상 축구가 재밌지 않았죠. 월드컵이 동기부여는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만큼 재밌거나 의욕이 넘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분이 기억하는 멕시코월드컵 이듬해인 1987년에는 오히려 가장 좋지 않았죠. 아예 선수 생활을 접으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부침을 겪을 때마다 최 단장 곁엔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다. 포항제철실업축구단 창립자인 박태준 고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그는 최 단장을 각별히 아꼈다. “왜 유독 예뻐했는지 곰곰이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볼 좀 찬다’는 선수들은 다 포항제철에 모였지요. 그 팀에 고등학생이 입단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병아리죠. 그 병아리가 애정을 주고 돌보니 장닭으로 성장한 겁니다. 그래서 더 예뻐 보였겠죠. 내 유추는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단장이 고교 3학년 때인 1979년부터 박 회장이 작고한 2011년까지 33년 동안 이어졌다. 최 단장은 오랜 시간에 걸쳐 큰 어른의 지혜와 선견지명을 배웠다. 그는 “지금까지 일하는 기틀이 잡힌 건 그때”라고 말한다. “사람 인연이 참 중요합니다. 그분을 못 만났더라면 지금까지 일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분이 강조한 건 결국 하나였습니다. 시스템이지요. 한번은 ‘애국이 뭐라고 생각해?’라고 물었는데, 멀거니 있으니 말씀하시더군요. ‘너는 축구인이지? 그럼 축구를 열심히 하는 게 애국이야.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진짜 애국이야.’ 그렇게 환경, 즉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법 1992년 은퇴 후 최 단장은 포항스틸러스, 현대미포조선, 강원FC 감독을 역임했다. 포항 감독 시절인 2003년에는 K리그 최초로 클럽 유스 시스템을 도입해 한국형 유소년 선수 육성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과 FC서울 미래기획단 단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포항 유스 총괄이사 등을 두루 거쳤다. “30~40년 전부터 구상한 것을 그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 예전엔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최 단장이 벙긋 웃었다. 그를 오래 봐온 이라면 웃음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축구계 이상주의자라고 불릴 만큼 늘 현실 그 이상을 바라봤다. 눈앞의 결과가 중요한 스포츠판에서 때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 커 뜬구름 잡는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기준을 낮추지 않았다. 선진 축구 시스템에 대한 타협 없는 열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의 무기가 됐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옛날에 축구 좀 한 것 가지고 지금까지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축구 금수저’ 아니냐는 거죠.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최 단장은 쉬지 않고 일하는 그만의 방법을 열거할 수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는 기획, 그리고 전문성이다. “저는 행정적으로 일합니다. 항상 기획하죠. 어떻게 해나갈 건지 멀리 보고 플래닝하는 겁니다. 그리고 유소년이라는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유소년은 사회는 물론 축구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유소년팀에서 성장한 선수가 승급해 프로 무대를 누비는 게 시스템의 선순환이니까요. 실은 지도자 할 때도 유소년부터 맡고 싶었습니다. 여건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프로팀 감독을 할 때도 산하 유소년에 관심을 기울였고 지도자들도 꾸준히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늘 유소년 육성 지원 체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다’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깊이 있게 하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기획과 전문성을 두 가지 태도가 뒷받침한다. 깊은 사고와 원칙주의다. “늘 기도하고 계획 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도를 하면 생각이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구체적인 비전을 그려야 기도도 가능하니까요. 또 한 가지는 원칙주의입니다. ‘최순호는 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인식이 축구계에 있는 줄 압니다. 원칙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원칙대로 일하면 누구든 쉽게 보지 않습니다. 대개 이야기가 길어지는 경우는 원칙대로 안 했을 때입니다.” 30여 년에 걸친 노하우를 쏟아낸 최 단장은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며 빠르게 목을 축였다. “일하기 위해서 일을 쉬었습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진지했던 표정은 어느덧 환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일하는 도중 한 번씩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안식년 개념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1년 정도 쉰 게 두 번입니다. 단연 2005년이 기억에 남아요. 미국에서 6개월여를 보냈는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예배를 마친 뒤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했습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 한인 타운에는 이민자들을 위한 영어 아카데미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오전 내내 공부하고 오후에는 골프나 등산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태국 파타야에 약 100일간 머물면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습니다. 목이 타서 새카맣게 변할 때까지요. 재밌는 건 그렇게 1년을 쉬었는데도 사람들은 나더러 안 쉬고 일만 한다고 하는 겁니다.(웃음)” 이상주의자의 현재진행형 꿈 이따금 남몰래 숨을 골라온 최 단장은 현재 일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지도자 때보다 일하는 강도는 훨씬 강하지만 그만큼 즐겁다고 했다. “단장을 맡기 전까지는 사실 일정이 타이트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선수와 지도자는 정신적으로 고되고, 단장은 육체적으로 고되달까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무언가 부탁하고, 답변하고, 협의하고요. 말하는 게 엄청 피곤한 일입니다.(웃음) 챙겨야 할 팀도 남자 성인, 여자 성인, 초중고 유소년까지 여럿입니다. 체력이 예전 같지는 않아요. 예순 조금 넘어서부터 실감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하품이 자꾸 나오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밝다. “그런데 재밌긴 엄청 재밌어요.” 인생 스승에게 얻은 교훈을 오랜 시간 숙성시켜 체화한 그가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밑바탕에는 일상 속 단단히 내린 루틴, 그리고 자기관리가 있다. 새벽 4시 반에서 5시 반 사이에 기상하는 건 오랜 습관. 7시 반이면 사무국에 출근해 늦어도 오전 10시까지 주요 일과를 처리한다. 일주일, 한 달 계획까지 살핀 뒤 직원들이 출근하면 함께 해야 하는 일을 본다. 오후에는 외부 일정을 소화한다. 마케팅 차원으로, 또 관중 유치 차원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하기도 한다. 저녁은 집에서 최대한 일찍 먹고 보통 9시에서 9시 반 사이 잠자리에 든다. 짬이 나면 틈틈이 근력 운동 위주로 몸을 단련한다. 가끔 즐기던 와인은 입에 대지 않은 지 꽤 됐다. 담배는 일절 피우지 않는다. “이런 습관을 들인 지는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운동법만 조금 바꿨지요. 나이가 들면 유산소 운동보다 근력 운동을 하는 게 좋거든요. 신체 건강은 그렇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신 건강도 있을 텐데, 그런 부분은 어쩐지 ‘일한다’고 하면 다 잊어버립니다.(웃음) 오랜 시간 생각한 꿈과 목표가 있으니까요.” 최 단장의 꿈은 ‘글로벌 스탠더드’ 만들기다. 시스템을 보다 구체적으로 명명해 글로벌 스탠더드라 부르고 있다. “표본이 될 만한 팀이 내 기준에는 아직 K리그에 없습니다. 바르셀로나나 레알마드리드, 파리생제르맹 같은 규모가 큰 구단을 만들겠다는 게 아닙니다. 작지만 구조나 내용은 세계적인 수준을 갖춘 팀을 만들고자 합니다. 소프트웨어부터 하드웨어까지 손볼 곳이 많습니다. 홈구장을 개선해야 하고 숙소, 미팅룸, 훈련장, 피트니스센터 등을 갖춘 클럽하우스도 필요합니다. 팀이 더 단단해지려면 유소년팀도 강해야 합니다. 체계를 잡고 내용을 잘 집어넣어서 유소년 선수들이 프로팀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이제 오랫동안 그려온 스케치에 채색하는 일만 남았다. 그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다. “수원FC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문제겠지요. 시간만 넉넉히 주어지면 다 할 수 있어요!”
- 2023-08-08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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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노인 드론축구단 ‘유림어스’… "청춘을 담아 비상"
- 농촌에선 해 지면 할 일 없다더니 다 옛말인가. 전라남도 화순의 작은 창고에서는 매일 밤 드론이 힘차게 날아오른다. 시속 60㎞ 속도로 날아다니며 요란하게 부딪치고, 골문을 시원하게 파고드는 드론볼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손에 땀을 쥐게 된다. 다 함께 모여 동고동락하던 연습 시간, 그로 인해 일궈낸 값진 승리가 주는 희열 앞에서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 주어진 시간은 3분. 소형 드론을 감싼 드론볼을 공중에 떠 있는 골문에 집어넣어야 한다. 각 팀에선 5명의 선수가 출전한다. 수비수 3명, 길잡이 1명과 유일하게 득점이 가능한 스트라이커(공격수) 1명으로 구성된다. 수비수 드론은 골문을 지킨다. 길잡이 드론과 상대팀 수비수 드론이 치열한 육탄전을 벌인다. 길잡이가 비집어 길을 터놓으면 스트라이커가 눈 깜짝할 새 골대를 통과한다. 스코어보드가 올라가는 순간이다. 드론축구 경기는 3세트 중 세트 득실로 승부를 가른다. 한 세트만 해도 스무 골은 가볍게 터진다. 선수단 성향에 따라 전략도 다양하다. 수비수는 스트라이커가 선취점을 얻어낼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가 하면,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상대 팀 스트라이커를 격추시켜 다시 못 날도록 바닥에 꽁꽁 묶어두기도 한다. 세트가 끝나기 전에는 드론을 감싼 기체가 파손되거나, 배터리가 방전돼도 선수를 교체할 수 없는 규칙 탓이다. 정비는 세트 사이 주어지는 5분 동안만 가능하다. 드론, 고요한 농촌의 밤을 가르다 화순의 농부들은 어쩌다 이 생소한 스포츠에 빠져들게 된 걸까. 하율호 단장과 평소 친분이 있던 박인철 유림어스 감독이 드론축구를 해보지 않겠냐고 꾸준히 제안한 게 시작점이 됐다. 하 단장도 처음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아는 드론이란 비료를 살포하기 위한 방제용이 전부였고, 무엇보다 생소한 스포츠에 도전할 마음이 선뜻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박 감독은 지칠 줄 몰랐다. 그는 드론축구단을 운영해 나주 문평중학교를 폐교 위기에서 구하고, 전남 영광에서 노인 대상으로 치매 예방을 위한 드론 교육을 진행한 경력이 있었다. 드론축구가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줄곧 거절하던 하 단장도 연습용 드론이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모습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설득만 어려웠지,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 단장이 알고 지내던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참여 의사를 밝힌 농부 몇몇과 선수단을 창단한 뒤 4종 드론 국가자격증을 취득했다. 국내 최초 노인 드론축구단 ‘유림어스’의 시작이다. 드론 띄우기도 어려워하던 평균 65세 농부들이 어엿한 드론축구 선수로 성장하기까진 수없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박 감독이 개인적으로 챙겨온 드론을 부수는 건 다반사일 정도였으니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하지만 재미가 붙자 연습 삼매경에 빠졌다. 정기 훈련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농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 연습장을 찾아 드론을 날렸고, 유튜브를 보며 혼자 공부하거나 손자들에게 과외를 받기까지 했다. 이들은 내친김에 연습장까지 직접 마련했다. 쓰던 창고를 비워 애플수박 농사에 쓰던 그물망을 두르고, 선박에 두는 플라스틱 구명부환을 천장에 매달아 골대를 만들었다. 드론볼 부품을 미리 사서 ‘셀프 정비소’도 갖췄다. 정식 경기만큼 치열하지는 않지만 연습 중에도 드론볼이 부서지거나 드론이 자주 고장 나 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식 경기장 반절에 불과한 크기지만 이들이 열정을 불태우기엔 충분했다. 지난해 제1회 전남도립대총장배 전국드론축구대회에서 창단 7개월 만에 첫 승을 거뒀고, 지난 2월 열린 광주광역지회장배 드론축구대회에서는 당당히 4위를 차지하며 우수상까지 받았으니까. 이렇게 좋은 드론축구, 왜 안 하세요? 하율호 단장뿐 아니라 유림어스 선수들, 박 감독까지 입을 모아 말한다. 드론축구는 노인, 특히 도시가 아닌 농촌에 거주하는 노인에게 제격인 취미라는 것. 드론축구 선배로서 강력하게 추천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드론축구는 경기 시간이 3분으로 짧기 때문에 순간 집중력이 좋아야 해요. 순식간에 내 편 네 편 할 것 없이 드론볼이 엉키기 때문에 내 드론볼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요, 정면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파악해야 합니다. 내 드론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애먼 곳 쳐다보고 있으면 질 수밖에 없거든요. 드론볼을 어떻게 움직여야 득점할 수 있을지 계산하려면 순발력도 좋아야 하고요.” 즐길거리가 비교적 다양한 도시와는 달리, 해 지면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혀 TV나 봐야 하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 그러나 드론축구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장비와 농기구 보관하던 창고만 있어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드론 국가자격증 취득도 크게 어렵지 않다. 최소 3명은 모여야 경기 출전 자격이 주어지므로, 훈련차 모여 인적 교류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일반적인 스포츠에 비해 체력 소모가 덜하다는 점은 특히 매력적이다. 쉴 새 없이 머리를 써야 하니 치매 예방은 덤이다. 게다가 유림어스 선수단은 ‘국내 유일 노인 드론축구팀’으로 여러 차례 매스컴을 탄 덕분에 응원해주는 팬들도 생겼다. 경기가 끝나고 관객은 물론 상대 선수단의 응원과 박수갈채를 받노라면, 승패와는 무관하게 성취감과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노년기에 쉽게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에 더욱 값지다. 이 모든 감정이 유림어스가 도전하는 원동력이 된다. 최근에는 화순군청이 시행하는 지원 사업에 응모해 5000만 원의 지원금을 따냈다. 이 돈은 화순에 드론축구 정식 경기장을 짓는 데 고스란히 쓰일 예정이다. 지금 사용하는 연습장 크기가 작아 경기할 때 거리감을 잃은 경험이 아쉬움으로 남은 탓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드론축구를 즐기고픈 마음도 한몫했다. 건강한 열정이 옮겨붙은 덕분인지, 화순에선 지난 2월 새로운 선수단이 탄생했다. 40~50대로 구성된 유림어스 2기, ‘화순어벤져스’ 팀이다. 현재 6명이 모인 화순어벤져스와는 매달 셋째 주 월요일에 모여 합동 훈련 겸 대항전을 진행한다. 창단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젊어서 그런지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며 선배들은 내심 부러운 티를 낸다. 그래도 1기가 실력에선 훨씬 앞선다. 유림어스 3기이자 ‘국내 최초 여성 노인 드론축구단’의 탄생도 머지않았다. 유림어스 1기 선수단의 아내들이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작년에 드론축구 장비를 처음 맞출 때, 저희 선수단 모두가 아내 몫의 드론볼까지 미리 사뒀었죠. 3기가 창단되면 브라보에 가장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하 단장과 선수단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직 3부 리그에 속한 유림어스의 목표는 2부 리그 승격이다. 물론 갈 길이 멀다. 3부 리그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해야만 2부 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사전에 포기란 없다. 유림어스의 드론볼은 새로운 골대를 향해 오늘도 날아오르고 있다. [TIP] 나도 드론축구 즐기려면? 1 자격 요건 드론축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4종 드론 국가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4종은 250g 이상 2kg 이하의 소형 무인동력비행장치에 대한 면허로, 온라인 교육만 이수하면 취득할 수 있다. 항공교육훈련포털에서 한국교통안전공단의 무인동력비행장치 4종(무인비행기) 교육을 수강하면 된다. 2 비용 드론볼, 드론 배터리, 충전기, 조종기 등 드론축구에 필요한 장비를 구비하려면 1인당 약 130만 원이 든다. 드론볼의 경우 필요한 재료를 구매해 직접 조립해야 한다. 3 선수단 창단 및 합류 드론축구단에 소속돼야 드론축구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거주하는 지역의 지회, 지부의 팀에 합류하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새로운 팀을 꾸릴 수도 있다. 경기 출전은 최소 3명부터 가능하기 때문에 선수단 구성원도 3명 이상(수비수 2명, 공격수 1명)이어야 한다. 대한드론축구협회 홈페이지에서 선수단 창단 신청을 하면 된다. 그 외 드론축구를 연습할 수 있는 전국의 드론축구장은 대한드론축구협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2022-05-1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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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드론축구 어떠세요?
- 드론축구는 3분 동안 소형 드론을 감싼 드론볼을 공중에 떠 있는 골문에 집어넣어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다. 장비와 농기구 보관하는 창고 크기의 빈 공간만 있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일반 스포츠에 비해 체력 소모가 적고, 쉴 새 없이 머리를 써야 하니 치매 예방은 덤이다. 시니어 맞춤 신(新) 취미, 드론축구에 대해 알아보자. '유림어스'는 전남 화순의 평균 65세 농부들로 구성된 국내 최초 노인 드론축구단이다. 꾸준한 연습 끝에 지난해 제1회 전남도립대총장배 전국드론축구대회에서 창단 7개월만의 첫승을 거뒀고, 지난 3월 광주광역지회장배 드론축구대회 4위를 차지했다. 자격 요건 드론축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4종 드론 국가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4종은 250g 이상 2kg 이하의 소형 무인동력비행장치에 대한 면허로, 온라인 교육만 이수하면 취득할 수 있다. 항공교육훈련포털에서 한국교통안전공단의 무인동력비행장치 4종(무인비행기) 교육을 수강하면 된다. 비용 드론볼, 드론 배터리, 충전기, 조종기 등 드론축구에 필요한 장비를 구비하려면 1인당 약 130만 원이 든다. 드론볼의 경우 필요한 재료를 구매해 직접 조립해야 한다. 선수단 창단 및 합류 드론축구단에 소속돼야 드론축구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거주하는 지역의 지회, 지부의 팀에 합류하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새로운 팀을 꾸릴 수도 있다. 경기 출전은 최소 3명부터 가능하기 때문에 선수단 구성원도 3명 이상(수비수 2명, 공격수 1명)이어야 한다. 대한드론축구협회 홈페이지에서 선수단 창단 신청을 하면 된다.
- 2022-05-1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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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철 피부 병
- 늘 땀이 많은 체질이다. 군대 있을 때는 잡초 제거 작업을 하던 중이었는데 내가 땀을 많이 흘리자 작업관이 나는 그만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농땡이 치느라고 땀도 안 났는데 나는 열심히 했으므로 땀이 많이 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겉보기로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 그 덕을 본 셈이다. 피부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땀이 노폐물을 빨리 빼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명을 들은 일도 있다. 격한 운동 후 땀을 많이 흘리고 나면 피부가 뽀송뽀송해진 느낌이 나기는 한다. 땀을 많이 흘리면 기분이 상쾌해지기는 한다. 피부온도를 낮춰주기 때문이다. 개운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땀이 많으면 불편하기는 하다. 샤워도 자주해야 한다. 땀 냄새도 날 수 있고 옷을 자주 갈아입어야 한다. 운동 할 때는 따로 옷을 가져가서 운동이 끝나면 갈아입기도 한다. 면으로 만든 옷이 피부에 좋다지만 면은 땀을 흡수하여 바로 마르지 않고 땀 냄새가 나는 단점이 있다. 그전에는 여름철이라도 런닝셔츠를 꼭 받쳐 입었으나 몇 년 전부터는 런닝셔츠 없이 바로 셔츠를 입는다. 훨씬 시원하다. 동생에게도 권했으나 과민성대장이라 설사가 난단다. 런닝셔츠도 면이다. 화학 섬유로 만든 옷을 자주 입지만 특별히 피부 트러블이 생기지는 않았다. 90년도 말쯤에 전남드래곤즈 프로 축구단에 옷을 납품한 적이 있다. 경기복도 면으로 만든 옷을 입을 때였다. 필자가 납품한 경기복은 폴리에스터 제품인데 땀을 흡수하면 바로 마르는 속건성 기능을 가진 소재였다. 그 당시 선수들이 처음에는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피부에는 면 제품이 좋다며 거부했었다. 그러나 입어 보더니 면 제품은 땀을 흡수하면 무거워지는데 폴리에스터 제품은 가볍다며 그때부터 유니폼에 일대 변화가 생겼다. 폭염에도 자주 걷기 운동을 한다. 극세사로 만들어 속건 기능이 있는 스포츠 타월을 이마, 목, 허리에도 찬다. 목에 두른 타월은 그야말로 땀투성이라 짜면 물이 흐를 정도이다. 그 정도면 육수 소리를 들을 만하다. 스포츠 타월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얇은 것이 좋다. 열대야가 계속되니 밤에도 에어컨을 마음껏 틀어 놓고 잔다. 가정용 전기 요금이 누진제로 되어 있어 요금 폭탄을 맞는다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봐야 한 철이다. 몇 푼 아낀다고 에어컨을 끄고 잤다가 더워서 깨면 수면 부족으로 고생한다. 어루러기라고 피부병도 가끔 생긴다. 피부에 있던 곰팡이 균이 피부 산도나 면역력이 떨어질 때 생기는 흔한 피부병이라고 한다. 다행히 집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아무 피부 연고나 바르면 얼마 안가 낫곤 한다. 대부분 광범위 피부연고라서 어지간한 피부병에는 다 듣는 모양이다. 의사 친구가 있어 물어 보니 세레스톤G나 카네스텐 연고를 교차해서 바르면 둘 중에 하나는 효험을 본다고 했다. 그걸 모르고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시절 동대문 근처 유명하다는 피부약국에 갔다가 몇 십만 원 바가지를 쓴 적이 있다. 팬티도 문제이다. 왈츠, 탱고 같은 댄스를 하는 날은 몸에 착 붙는 드로즈 팬티를 입어야 한다. 파트너와 갈비뼈 부분을 붙이고 다리 사이로 다리를 넣어 회전하는 경우가 많아 최대한 남성 돌출 부위를 잡아줘야 하는 것이다. 삼각팬티는 고무줄이 너무 타이트해서 접촉면에 피부 트러블이 생긴다. 트렁크 팬티를 입으면 바람이 잘 통해 좋다. 그러나 너무 헐렁하다보니 제 기능을 못한다. 장거리 걷기를 해보면 사타구니 좌우 피부 접촉 때 피부끼리 마찰이 생기면 아프고 쓰라리다. 그럴 때도 드로즈 팬티가 좋다. 별일 없는 날은 아예 팬티는 안 입는 시도도 해봤다. 겨울철에는 내의를 입을 경우 내의가 팬티 역할을 하므로 굳이 팬티를 입을 필요는 없단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바로 바지와 닿으므로 바지 안쪽의 접어 넣은 불규칙한 원단과 피부가 접촉하게 되어 피부염이 생길 수 있다. 팬티는 그날의 스케줄에 따라 용도 별로 입을 필요가 있다.
- 2016-08-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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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한국 농구 ‘슈터의 전설’ 신동파
-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쓴이는 초등학교 시절,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스포츠 기자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정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시골 중에 서도 시골인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경기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 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는 해마다 단골로 듣는 대회였다. 그 무렵 일본의 릿쿄대학교와 야하다제철, 미국의 빅토리농구단 등이 한국에 와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특정 대학교는 연전연승이었다. 일본팀들을 물리칠 때 시골 아이의 가슴은 벅차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동파(申東坡)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고 10여년 뒤 특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봄에 열린 농구 OB전에서 신동파가 뛰는 경기를 라디오 중계가 아닌, 실제 경기로 보게 된다. 일본팀은 물론 국내 실업팀들을 손쉽게 물리친, 특정 대학교는 연세대이며 당시 멤버는 김영일 방열 김인건 하의건 신동파 등이었다. 1990년대 중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이 2세대 ‘독수리 오형제’라면 이들은 1세대 ‘독수리 오형제’라고 할 수 있고 중심 인물이 신동파였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데뷔하기 전까지 아시아 남자 농구의 절대 강자는 필리핀이었다. 1951년 제1회 뉴델리 대회부터 1962년 자카르타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서 4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0년 마닐라에서 제1회 대회를 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1973년 마닐라 대회까지 7차례 대회에서 4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이 사이 아시안게임에서는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1969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반 아시아 지역 스포츠 단체인 AGF(아시아경기연맹)가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밀려나 이제는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필리핀이었기에 196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홈 코트의 한국을 83-80으로 꺾는 등 9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절대 강자 필리핀이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86-95로 지고, 일본에도 77-78로 져 3위에 그친 건 필리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이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최근 아시아 남자 농구 판도에서 그나마 명함을 내밀고 있는 1950~60년대 강자는 필리핀뿐이다. 필리핀은 2013년 마닐라 대회와 2015년 중국 창사(長沙) 대회에서 잇따라 준우승했다. 한국은 두 대회에서 3위와 6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2002년 부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 우승, 2010년 광저우(廣州) 대회 준우승 등 아시안게임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경우 중국은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하고 201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위 필리핀은 6월에 열리는 세계 예선에 참가한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필리핀이 농구에서 아시아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필리핀이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진 건 충격을 넘어 ‘사건’이었다. 1969년 11월 29일 밤 TV 앞에 모여 있던 필리핀 농구 팬들은 던지는 대로 쏙쏙 들어가는 한국의 한 슈터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일부 매체에는 한국-필리핀의 이 경기가 결승전으로 소개돼 있는데 이 대회는 9개 나라가 돌려 붙기를 했기 때문에 결승전이 없고 대회 마지막 날 7승의 한국과 6승1패의 필리핀이 맞붙은 경기여서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장년 팬들은 아마도 이날 신동파의 슛이 100%의 성공률을 보인 것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개인 득점 50점, 한국이 기록한 95점의 절반 이상이 신동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신동파는 슛 거리가 꽤 길었기 때문에 그때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그의 득점은 70점대 이상이었을 것이고 한국의 팀 득점은 세 자릿수였을 수 있다. 이 경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돼 신동파는 1970년대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필리핀에서는 어떤 일이 잘되면 ‘sindongpa’, 잘 안되면 ‘no sindongpa’란 말이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동파의 신들린 듯한 슛을 막기 위해 악착같이 수비하던 필리핀 선수 3명이 5반칙으로 물러났다. 경기 막판에는 포워드인 신동파를 센터가 수비하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골 밑에 있어야 할 센터가 외곽으로 나오니 한국의 공격은 그만큼 수월해질 수밖에. 1960년대 초반 장충체육관을 지을 때 기술 지원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한국은 이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했지만 필리핀에서는 TV로 생중계됐다. 대회가 끝난 뒤 필리핀에서는 한국-필리핀 경기가 수십 번이나 재방송됐고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가 됐다. 신동파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 가게들이 줄을 지어 생겼다는, 조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1970년대 필리핀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신동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7관왕 마크 스피츠와 프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 등에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신동파의 소속 팀인 기업은행은 1970년부터 그가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필리핀 초청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8차례의 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0점이 넘게 넣었고 최고 54점까지 기록했다. 필리핀 관중은 자국 선수의 파울로 신동파가 쓰러지면 필리핀 벤치를 향해 종이 뭉치와 부채 등을 던졌다. 필리핀에서 신동파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신동파가 PBA(필리핀농구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관전하러 가면 하프타임에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의 전설이 왔다”라고 소개하고 1만 여 관중은 기립 박수를 친다고 한다. 신동파는 이후 한국 남자 농구 역사에 새로운 일들을 계속 남기게 된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해 13개국 가운데 11위를 기록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다. 한국보다 키가 훨씬 큰 캐나다를 조별 리그에서 97-88로 잡았고 순위 결정전에서는 호주를 92-79로 꺾는 등 대회 전체 성적이 4승4패였다. 준우승국인 브라질과 조별 리그에서 겨뤄 77-82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회 부문별 기록을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득점자 순위다. 신동파는 8경기에서 평균 32.6점을 넣어 파나마의 데이비스 페랄타(20.0점),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리 지데크(19.3점)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슈팅 성공률이 80.4%였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던지는 대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해 12월 방콕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신동파를 앞세워 조별 리그에서 필리핀을 77-75로 다시 한 번 잡았다.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졌으나 전 대회 우승국인 이스라엘을 81-67로 제치고 축구와 함께 동반 금메달을 획득하는 ‘역사’를 완성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과 1승1패를 기록한 필리핀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에 64-75로 지는 등 2승3패로 부진해 5위에 그쳤다. 신동파는 김영기로부터 시작해 이충희 문경은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남자 농구 슈터 계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수리 5형제’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뒤 한반도에서 체육활동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인기가 많은 축구의 대회 개최를 통제하려 하기도 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1940년대 초반에는 조선체육회를 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통합해 스포츠 주권마저 빼앗았다. 또 하나 일제는 조선인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최대한 억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경우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은 워낙 선발전 성적이 좋아 뽑지 않을 수 없었지만 축구의 경우 경성축구단이 1935년 6월 열린 베를린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전을 겸한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 벌어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쯤 되는 대회) 축구 종목 일반부에서도 정상에 올랐지만 정작 올림픽 대표팀에는 한반도에서 김용식 선생, 단 한 명만 뽑았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기본인데도 이런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김용식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의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의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도 김용식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농구는 좀 달랐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을 선발했다. 농구 엔트리 12명 중 4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학교(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연장 접전 끝에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40년 1월 대회에서 도쿄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종목은 마라톤과 축구만이 아니었다. 농구도 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4-19 0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