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한 유명 백화점에서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만든 롱 패딩은 없어서 못 팔았다. 이 상품을 사려고 고객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등 그야말로 광풍이었다. 대부분의 스포츠 의류 업체에서는 롱 패딩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겨울은 그야말로 롱 패딩이 거리를 휩쓸었다. 그런데 롱 패딩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는 보도가 들려왔다. 살 만한 사람은 대부분 샀을 테고 올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은 탓도 있다는 분석도 따랐다.
내가 한때 일하던 회사에서 1996년 ‘UMBRO’라는 영국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국내에 처음 들여왔다. 달러 환율이 800대 1까지 가던 시절이었으니 수입해서 팔 만했다. 그때 상품 품목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롱 패딩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클럽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 옷을 입고 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추리닝 정도가 주종이던 스포츠 패션에서도 멋스러웠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패션이라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나는 그 무렵 이 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했는데 롱 패딩 가격을 놓고 사장과 갈등을 빚었다. 수입 원가 1만5000원 상당의 품목이었으니 9만 원 정도로 팔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요즘처럼 오리털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인조 솜으로 만든 패딩이었다. 그런데 사장은 비싸게 정가를 매겨야 팔릴 품목이라며 판매가를 놓고 고집을 피웠다. 더 올리면 안 팔린다고 강하게 조언했는데도 사장이 내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12만 원, 15만 원, 18만 원으로 가격을 순차적으로 올렸다. 롱 패딩이 유행하던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판매는 부진했다. 결국 1997년 1월이 돼서야 사장은 내게 가격 책정을 맡겼다. 하지만 이미 판매 기회를 놓친 상황이었다. 이런 상품은 추운 겨울에 잘 팔리고 첫 추위 때가 적기다. 11월이 적기이고 날씨에 따라 12월까지도 판매가 이어질 수 있지만, 1월에 겨울 상품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년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패딩이 100만 원을 훌쩍 넘었는데도 날개 돋친 듯 팔린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롱 패딩 가격으로 사장이 책정한 가격은 너무 비쌌다.
롱 패딩의 유행이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난 작년에서야 시작된 셈이다. 나나 사장 모두 너무 앞선 시기에 롱 패딩에 큰 기대를 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유행에 민감한 편이고 유행 주기도 짧다. 롱 패딩 하나를 사면 더 이상은 사지 않는다.
롱 패딩을 입어보니 과연 따뜻했다. 무릎까지 덮어주니 당연하다. 그러나 걸을 때마다 무릎에 옷이 닿아 걸리적거렸다. 이를테면 멋을 포기한 패션이다. 마치 이불을 두르고 다니는 형상이다. 패딩 옷에 붙은 모자에 털이 달린 것도 있다.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보온 효과는 거의 없다. 털이 붙었다는 이유로 비싸기만 하다. 따로 따뜻한 모자를 사서 쓰는 편이 더 실용적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롱 패딩을 가져가려 했다. 고산에 올라가면 기온이 급강하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부피 때문에 포기했다. 숙소에서는 입을 수 있으나 트레킹 때는 입을 수 없다는 조언도 작용했다.
어딘가 처박아뒀던 먼지 쌓인 앨범 속 장면이 총천연색 화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 같다. 통바지에 브랜드 이름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풋풋한 젊은이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먹거리가 편의점 한편에 자리 잡았다. 돌고 돈다는 유행은 조금씩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그 시대를 대변해왔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유행과 흡사하지만 뭔가 새롭다. ‘복고(復古)’라는 말 대신 ‘레트로(retro·복고)’란 용어로 바꿔 부른 지도 오래다. 친숙한 듯 아닌 듯 우리 시대 레트로 열풍. 뭔가 달라진 옷[衣], 먹거리[食] 그리고 생활공간 [宙]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패션계는 한마디로 힙트로·뉴트로·영트로
“맨 처음 옷을 이렇게 입을 때 복고 패션이라기보다는 유행하는 와이드 팬츠(통바지)나 데님재킷 정도를 따라서 사서 입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요즘 입는 옷을 아빠가 보시더니 본인이 어릴 때 입었던 옷이랑 똑같다고 예전에 입으셨던 것을 주셨어요. 진짜 요즘 유행하는 거랑 너무 비슷해요. 그런데 1990년대 패션이랑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요! 예전에는 통나무처럼 바지가 컸다면, 지금은 슬림하고 길어 보이게 입는 추세랄까요?”
은평문화재단에서 시민연극 연습이 한창인 한규열(21) 군은 요즘 스타일대로 깔맞춤(?)을 하고 다닌다. 통이 살짝 큰 바지에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바지는 허리춤까지 올려 단정하게 허리띠를 두르고 티셔츠는 바지 안에 넣어 입는다. 가끔은 티셔츠 앞부분만 바지 안에 넣은 뒤 살짝 옷을 밖으로 잡아당겨 느낌을 살린다. 말해놓고 보니 1990년대에 즐기던 스타일 아닌가. 199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 보기에 그저 신기한 젊은이 패션이 아닐 수 없다. 예전과 엇비슷한 모습에 웃음이 나지만 정작 선뜻 선택하지는 않는다.
패션계야말로 작년 초부터 시작된 레트로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분야다. 특히 1990년대 유행했던 패션이 1980년대에서 2000년 초반 사이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혹은 1995년 이후 태어난 ‘Z세대’에게 사랑받고 있다. 부모 세대가 20대에 향유했던 패션을 지금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활용하는 움직임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다 보니 레트로 패션을 의미하는 다양한 신조어도 탄생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코듀로이, 체크 그리고 호피
폐기처분한 줄 알았더니 전설의 코듀로이가 레트로 바람을 타고 돌아왔다. 일명 ‘골덴’으로 불리는 코듀로이가 포근한 느낌과 함께 내구성이 뛰어나 최고의 한파가 예고된 올겨울 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코듀로이는 물론 벨벳과 스웨이드, 트위드(두꺼운 실로 직조해 무게감이 느껴지는 원단), 플란넬(부드럽고 가벼운 모직원단) 등 편안한 캐주얼 분위기에 어울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원단도 이번 겨울을 대표하는 소재다. LF의 김현진, 김은정 디자인 실장은 남녀 인기 색상과 관련해 “뚜렷한 구분 없이 밤색과 빨강, 노랑 계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강렬하고 도발적인 빨간색 계통을 의외의 인기 색상으로 꼽았다. 남성의 경우 붉은 계열에 벨트가 있는 트렌치코트처럼 레드로 포인트를 준 스타일이 인기를 끌 전망이다. 여성의 경우 레트로 여파로 ‘웨스턴 스타일’이 뜰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카우보이 복장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1980년대에도 큰 인기였다. 술 장식 조끼, 부츠컷 청바지 등이 대표 아이템으로 사랑받을 전망이다. 올겨울 남성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체크무늬다. 체크는 유행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늘 인기가 있지만 이번 시즌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클래식한 느낌의 체크부터 다채로운 컬러가 섞인 개성 있는 체크까지 다양하다. 패션 포인트로 체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옷 전체를 체크로 맞춘 슈트 패션도 곧 거리에서 볼 수 있을 예정.
여성 패션은 더욱더 과감하고 재미있는 무늬가 거리를 수놓을 전망이다. 특히 호피무늬의 인기가 눈에 띈다. 인터넷 쇼핑몰 ‘11번가’ 분석에 따르면 호피 패션이 올 하반기 패션 트렌드를 대표하는 패턴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최근 11번가 사이트 내 ‘호피’ 아이템 검색 횟수는 무려 15배 이상 급증했다. 11번가 하원지 MD는 “예전에는 다소 과한 패션으로 여겨졌던 호피무늬 패션이 요즘에는 한층 밝은 색상의 패턴이나 실크, 시폰 소재에 더해지면서 색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며 “호피무늬는 스카프나 가방, 구두 등 한 가지 아이템만으로도 강렬한 포인트를 줄 수 있어 남녀 모두에게 인기”라고 말했다.
레트로를 입다
숏패딩과 빅로고 재등판
평창동계올림픽 영향으로 발목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을 감싸는 롱패딩이 지난겨울 유행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허리에서 마무리되는 짧은 점퍼가 대세다.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의 ‘레트로 두두느 다운 다운재킷’이 옛 인기 상품 소환 패션 중 하나다. 1980년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다운재킷 ‘듀벳’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제작한 의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덕다운 점퍼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강렬한 색감의 짧은 기장의 점퍼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스톰, 겟유스트, 닉스, 잠뱅이 등 데님 브랜드가 성장하면서 세련된 느낌의 무채색 구스다운 점퍼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가 끝나갈 무렵 퇴물 취급받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구스다운 점퍼가 20년 만에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되어 숏패딩으로 돌아왔다.
이와 함께 대놓고 “나는 누구요!”라고 말하듯 브랜드 이름이 제품에 크게 박힌 이른바 빅로고 패션도 레트로 바람을 타고 있다. 브랜드 이름을 옷이나 가방, 모자 등에 크게 새기거나 예전에 비해 사이즈가 적당히 작아진 것이 특징이다. 199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랑받았던 스포츠 브랜드 휠라(FILA)도 옛 느낌을 살려 빅로고 패션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다. 굳이 빅로고를 새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명품 브랜드도 빅로고 패션 대열에 합류해 레트로 열풍에 동참하고 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레트로를 먹다
곁에 있었지만 레트로였다!
패션을 넘어 옛 먹거리에 대한 향수 또한 레트로 열풍으로 번졌다. 인기의 일등공신은 단연
2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이다. 시청자들은 매회 쏟아진 음료, 초콜릿, 과자 등을 보면서 옛 감성을 느끼고 맛에 대한 기억도 제대로 자극받았다. 드라마 방영 당시 ‘저거 한번 다시 먹어보고 싶다’ 했던 것들이 실제로 상품 출시로 이어져 레트로 호황을 반짝 누린 바 있다. 추억 속 먹거리가 슈퍼와 편의점에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74년 첫 출시돼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빙그레의 ‘바나나맛우유’가 드라마 인기와 함께 ‘1988에디션’으로 등장했다. 추억의 빙그레 로고와 서체가 부착된 것만으로도 너도나도 열광했다. 인기에 구애받지 않던 스테디셀러인 바나나맛우유가 다시 사랑을 받고 회자된 계기였다.
갈배사이다 그리고 따봉!
해태htd의 ‘갈아만든 배(이하 갈배)’의 경우 숙취 해소 효과가 입증되면서 눈에 띄는 레트로 전략 상품이 됐다. ‘갈배’가 숙취에 좋다는 입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2015년 ‘호주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실험을 통해 ‘갈배’가 두통 완화에 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갈배’는 작년 말 숙취해소제로 등장하는가 하면, 올 3월에는 탄산이 추가된 ‘갈배 사이다’로 재탄생했다. 진일보하는 레트로 상품의 전형이 1996년 등장한 ‘갈아만든 배’라 할 수 있다.
롯데칠성음료 사상 최고로 인정받는 광고가 있다. 오렌지를 따는 브라질 농장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따봉(Esta bom)’이라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흥에 겨워 춤을 추던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다. 델몬트라는 이름보다 따봉이 강렬했던 나머지 1989년 따봉주스가 출시되기도 했다. CU편의점에 등장한 롯데의 ‘따봉 제주감귤’이다. 복고 느낌에 친근감이 더해져 자꾸 손이 가는 음료다. CU 상품기획 관계자는 “복고가 촌스러움에서 벗어나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1980~90년대 감성을 즐기는 젊은 세대와 어릴 적 향수에 젖어 있는 40~50대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10월에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선샤인’(tvN)에 등장한 ‘불란셔 제빵소’의 빵은 파리바게트 PPL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아울러 ‘#불란셔제빵’과 관련한 ㅍ단순 검색만 SNS상에서 4000건이 훨씬 넘었다.
레트로를 살다
옛날옛적풍 요즘 냉장고
1980년대 안방에 모셨던 190ℓ 냉장고를 1990년대에 500ℓ 냉장고로 바꿨을 때 진짜 크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900ℓ 양문형 냉장고도 부족하다. 전자레인지 또한 오븐기능을 비롯해 눌러야 할 버튼이 너무 많다. 갈수록 대형화되고 복잡해지는 가전제품 시장에도 레트로 바람이 불고 있다. 대우전자가 선보인 레트로 디자인 ‘더 클래식’ 시리즈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가전제품의 초기 모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1인 가구의 증가와 욜로, 미니멀리즘을 삶의 주제로 받아들이는 세대에게 ‘가치소비’에 대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작지만 고급스러움은 유지하고 유행에도 뒤지지 않는 스타일로 틈새시장에서 주목받는 상품으로 떠오른 것이다. 더 클래식 시리즈는 120ℓ, 80ℓ급 소형 인테리어 냉장고다. 크림화이트, 민트그린 두 가지 색상으로 라운드형 도어와 프레임을 통해 ‘레트로’ 느낌을 살렸다. 동급 대비 약 30% 비싼 가격에도 독보적 디자인으로 올해 월평균 판매량 1500대 이상을 유지하며 레트로의 인기를 증명했다. 전자레인지 또한 크림화이트 색상에 은색 손잡이와 조그 다이얼, 라운드형 디스플레이로 소비자의 마음을 녹였다. 레트로를 표방한 ‘더 클래식’ 시리즈 대우전자 관계자는 “경기불황에도 자기만족과 개념 소비를 원하는 이들이 급증하면서 레트로 디자인 미니 가전들이 인기”라며 “레트로 디자인에 프리미엄 기능을 추가한 제품개발을 주도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시대보다 옛 감성 공유
큰 가구에서부터 작은 소품 하나까지 매일 사용하는 리빙 제품들은 질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야 하고 실용성까지 겸비해야 하기에 꽤 까다로운 선택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앤티크’란 이름으로 레트로 감성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매번 대세 상품은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구점에는 도시적인 느낌의 가죽소파 등이 즐비했다. 최근에는 레트로 인기 덕에 따뜻한 감성의 패브릭과 나뭇결이 적절히 살아 조화된 가구가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창고에 쌓여 찾기 힘들었던 레트로 가구가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유행은 유행이다. 인테리어 전문 브랜드 ‘까사미아’의 쇼핑몰 사이트도 요 몇 년 사이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로운 감성의 리빙 상품으로 대체됐다.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의 헤링본 패턴을 이용한 침대 시트와 카펫 등이 눈에 띄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북유럽 등지에서 전해져온 스타일이다. 나라마다 복고 스타일이 다르지만 유독 가구나 인테리어에서 북유럽 혹은 스칸디나비아의 오래된 스타일이 레트로 기본이 됐다.
이는 나무가 많은 북유럽 일대에서 유명 가구 디자이너가 등장해 다양한 스타일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양질의 원목이 수입되고 있어 적당한 가격에 레트로 감성을 즐길 수 있다. 레트로 가구 하면 ‘북유럽 스타일’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꼭 이 스타일만이 레트로라 할 수는 없다. 만약 한국의 레트로 가구가 인기였다면 고가의 자개장, 저가의 비키니장, 실용적인 철제가구,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등나무 가구가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레트로 유행에서 있어 가구만큼은 20년 전의 한국 스타일이 소환되지 않았다. 패션이나 음료, 가전 등에서 이전 세대 제품들이 다시 불려나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까사미아 개발 팀장은 “골동품 느낌보다는 앤티크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잃지 않는 디자인이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레트로 놀이가 쉬웠어요!
옷만큼이나 패션에 민감한 주방식기도 레트로 열풍이다. 물방울무늬와 나뭇가지 형태의 접시 등 1980년대 후반 우리네 식탁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이 다시 등장했다. 까사미아는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의 웅장함과 섬세한 패턴을 담아낸 ‘알함브라 양식기’ 6종을 내놓았다. 제품별로 화이트, 진한 남색, 연한 하늘색이 고급스러운 무늬와 함께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중고시장도 부쩍 바쁜 눈치다. 각 가정 찬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법한 디자인의 컵과 식기 등이 중고시장에서 인기다. SNS상에는 ‘할머니 찬장에서 찾은 컵’이라며 사진이 올라오기도 한다.
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소장은 레트로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에 대해, 앞에서도 언급했듯 “핵심 축에는 20대 밀레니얼 세대가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처음부터 경험치에 대한 소비욕구가 굉장히 커서 흔하고 비싼 물건보다 희소한 물건을 갈망했다. 기업도 업계 불황 혹은 새로운 답을 찾지 못할 때 증명된 과거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레트로를 활용해왔는데 잠재적 소비층인 밀레니얼 세대 소비욕구와 맞물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겨울 들어 롱 코트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인다. 일종의 유행이다. 백화점 한정 수량 판매로 밤을 새며 난리를 피웠던 평창롱 패딩이 유행의 불씨가 된 것 같다. 평소 잘 보이지도 않던 흰색 롱 코트가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렇다. 롱 패딩이라고 하는데 사실 평창롱 코트는 구즈 다운이 들어 있어 패딩 코트가 아니다. 패딩이란 인조 솜을 말한다. 보온력이 다운만큼 높지 않아 값이 그리 비싸지 않다. 그런데 내용물에 관계없이 패딩 코트라고 하는데 내용물에 따라 패딩 코트 또는 구즈다운 롱 코트라고 해야 맞다. 평창 구즈 다운 롱 코트를 15만원대에 팔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성비가 높아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물론 평창 동계 올림픽 홍보에 일조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필자가 대표이사로 해외 유명 스포츠 브랜드 사업을 전개할 때 롱 패딩 코트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입고 있던 롱 패딩인데 그 당시 롱 패딩은 국내에 거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카탈로그에 실린 퍼거슨 감독의 롱 코트를 보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긴 했다. 같이 갔던 회장은 이 롱패딩이 한국에 수입되어 들어오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 것이라며 흥분했다. 그 브랜드가 아직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라서 필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문을 1000개를 했다. 그것도 신규 런칭 품목으로 도박이었다. 그런데 돈을 대는 회장은 주문을 늘려 3000장으로 했다. 들여오기만 하면 없어서 못 팔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롱 패딩 코트의 원가는 출발지 가격으로 1만 5000원대였다. 거기에 운임, 관세, 기타 유통비용을 계산하니 9만 원 대가 나왔다. 회장은 가격이 싸다고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싸야 잘 팔린다며 판매가를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 없다며 올릴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필자가 해외 출장을 다녀 오니 12만원으로 가격을 올려 놓고 팔고 있었다. 여전히 판매는 부진했다. 필자가 한 번 더 출장을 다녀 오니 가격이 18만원으로 올라 있었다. 필자가 없는 사이에 회장이 지시하여 가격을 올린 것이다. 잘 팔렸다면 좋았겠지만, 판매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매 부진의 이유를 가격이 너무 높아서라고 설명했더니 그러면 가격을 다시 내려서 팔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월에 접어 들어 겨울 상품이 팔릴 시기가 지났다. IMF 금융위기를 겪고 재고 상품을 원가 처분할 때 이 롱 패딩 코트를 1만 5000원으로 가격을 매겨 놓았으나 역시 판매가 부진했다. 그 당시만 해도 유행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롱 코트가 잘 팔리는 이유를 분석해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신장이 상당히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년전 롱 패딩을 내놓았을 때는 키도 안 큰 사람이 롱 코트를 입으면 더 작아 보였기 때문에 안 팔렸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신장에 관한 한 콤플렉스가 없다. 웬만한 서양 외국인보다 작지 않다. 그 당시는 높은 굽의 구두가 유행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인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뒷 굽 없는 플랫 슈즈가 유행이었다.
롱 패딩 코트는 사실 입으면 불편하다. 다리 쪽이 두툼해서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린다. 전철 안에서 자리에 앉을 때 벗지 못하므로 깔고 앉아야 한다. 흰색 롱 코트는 깔고 앉으면서 때가 탈 수 있다. 롱 코트에 달려 있는 모자도 불편하다. 모자가 필요한 경우는 아주 추운 날 얼굴을 감싸는 경우인데 그런 정도의 추위는 많지 않다. 모자 앞 쪽에 털이 달린 경우는 더 불편하다. 모양은 좋을지 몰라도 사실 보온 효과는 별 차이 없다. 입고 있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 위주이다. 양 옆이 잘 안 보이므로 길을 건너거나 할 때 위험하기도 하다. 롱 코트의 용도는 추위에 많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나 맞는다. 주차장 요원, 지하철 봉사요원, 스키장 요원 등 한자리에 고정적으로 외근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입는 옷이다. 그런 옷을 유행이라고 너도나도 입고 다닌다. 패션 면에서 볼 때에도 그리 모양이 좋은 편은 아니다. 바디라인이 다 감춰진다. 무릎 아래까지 오니 아무래도 다른 옷보다 보온 효과가 좋겠지만, 발목은 유행이라고 맨 살로 내놓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발목이 노출되면 더 춥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행이니까 입는 것 같다. 중고등학생들까지 롱 코트가 유행이니 부모들 주머니 사정이 더 팍팍할 것 같다.
일전에 평창 동계올림픽 기념 패딩 구매 파동이 일어났다. 일명 ‘평창롱패딩’으로 불리기도 하는 물건인데 이를 사기 위해 전날부터 길바닥에서 자는 소동까지 벌어진 것이다. 물론 한정판이고 일종의 기념품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고 싶은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도시에 롱패딩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평창롱패딩이 새로운 유행을 선도한 셈이다.
우리는 유독 유행에 민감하고 명품에 약하다. 하긴 어느 나라나 시기별로 유행하는 패션이 있는데 그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정도가 심해 남의 눈치를 보는 수준까지 되었다. 자신의 입성에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남의 눈을 의식해 어느 정도 맞춰 입어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다. 주말 가까운 근교 산 입구에 가면 거의 제복 수준으로 등산복을 차려입고 줄을 서 있다.
비단 입는 것만이 아니다. 많은 이가 주도적인 소비보다는 남들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 대표적인 것이 ‘후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요즘은 식당 하나를 찾아도 일단 그 집에 대한 후기를 찾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가 심해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기보다 후기가 좋은 식당을 찾게 된다는 게 문제다. 그렇게 낚이고 낭패를 경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가 소문에 민감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산악이 많은 지형의 나라에서 정착성이 강한 농업을 주업으로 하며 살다 보니 다른 지역과 교류가 적은 환경이 고립성을 강화하고 그 결과 공동체 안의 정보가 삶의 중요한 무기와 자산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적 유전인자가 최근의 IT 기술 발달에 힘입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런 우리의 성향을 증폭시키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소위 ‘인증샷’은 남들과 같아지려는 눈물겨운 몸짓이다. 남들이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소외되고 잊힐까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패거리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슷한 성향끼리 한데 모여 안도하고 그렇지 않은 다른 부류를 왕따시키고 나아가서 그들을 비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패거리 정치도 따지고 보면 개성이나 주관 없이 한데 모인 부류끼리 진영을 형성하고 진실과 관계없이 무조건 한 목소리를 내는 나약한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선진 민주주의가 남들 눈치 안 보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가 갈수록 전체주의로 퇴행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남들 눈치 보는 문화의 이면에 남에게 강요하기가 있다. 이는 동전의 양면으로 소위 ‘정’이란 말로 포장된 우격다짐이다. 상대가 좋아하는지는 관계없이 내가 좋으면 강요한다. 외국인이 한국에 여행하는 TV 프로그램에 보면 수산시장 아주머니가 막무가내로 좋은 것이라며 여행객의 입에 산 낙지를 쑤셔 넣는다. 이런 문화적인 심리적 폭력은 '남도 나와 같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라는 착각의 산물이다.
끈끈한 정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성이라고 대부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이 ‘정’이 우리 사회 선진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깊은 밤 스마트폰 단톡방에 왜 가족 행사 사진을 올리나요? “전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지금 아는 사람도 정리 중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