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비는 감정의 농도와 온도를 높여준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억눌렸던 감정을 해방시킨다. 그렇다면 비 내리는 날에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라.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에 장맛비가 내린다. 그래 사람이 거의 없어 적적하다. 비는 쉼 없이 내려 풍경을 변주한다. 미인은 주렴 사이로 보라 했던가. 그래야 운치가 돋는다 했다. 미인뿐이랴. 주렴처럼 드리워지는 빗발 사이로 보이는 광한루원의 풍경 역시 맑은 날과 달라 오히려 이색 정취를 자아낸다. 비에 흥건히 젖은 누정과 수목의 표정을 주시할 만하다. 육안보다 심안으로 봐야 할 것만 같은 내향성이 서려 있다.
광한루원은 남원시의 자랑거리이자 관광명소다.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렇게 유명해진 건 광한루원이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등장해서다. 사람들은 흔히 광한루원과 ‘춘향전’을 동격쯤으로 여긴다. 그래 광한루원에 와서 춘향과 이몽룡이 남긴 열애의 행적을 더듬는다. 그러나 광한루원의 본질은 ‘춘향전’과 무관하다. ‘춘향전’의 한 배경 장소로 쓰였을 뿐, 본래 조선 중기에 지어진 원림(園林)의 귀감이라는 데에 광한루원의 정체성이 있다.
사실관계가 그러하지만 흔히 간과한다. 광한루원에 와서 원림에 꾹 방점을 찍고 답사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대부분 춘향의 상열지사를 염두에 두고 풍경을 바라본다. 유심히 살펴보고 감흥을 즐길 만한 조선 원림이 엄연히 이곳에 있으나 ‘춘향전’을 표상하는 구조물들이 혼재해 정작 또렷이 인식하지 못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관점의 조절이 필요할 텐데, 관광 소재로 들어앉은 시설물들을 시야에서 걷어낸 셈치고 원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겠다. 그게 광한루원을 담뿍 마음에 담는 방법일 테다.
광한루원은 관아가 주도해 지은 관아 원림이다. 관아 원림이란 고을의 관원이나 시인 묵객들이 연회와 풍류를 즐긴 야외 정원이다. 광한루원은 중심 누각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그 일원에 조영된 원림을 통틀어 지칭하는 이름이다. 광한루의 스케일은 매우 웅장하다. 위엄이 넘친다. 상징과 지향을 담은 사물들의 디테일로 아름답기도 하다. 정원과 연못 역시 호방하고 수려하다.
광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 형태의 누각이다. 남쪽에서는 간결한 구조로 보이지만, 북쪽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장식적인 외관에 눈길이 쏠린다. 거기에 세 겹의 작은 지붕 아래로 층계를 설치한 회랑이 있어서다. 월랑(月廊)이라 부르는 묘한 구조물이다. 이걸 조성한 이유가 있다. 광한루는 초창 이후 중수를 거듭했다. 그 와중에 정자의 총량이 너무 과중해 북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는데, 이 난처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계단이 있는 회랑을 덧대어 지지대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여느 정자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형태미와 기능성을 확보하게 됐다. 이와 같은 건축적 개성과 위트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광한루엔 당대 문호들이 쓴 시문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멋들어진 정자가 있으니 드나든 시인이 한둘이었으랴. 여기에서 붓에 먹을 적신 묵객이 한둘이었으랴. 호남을 지나는 선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렀다고 한다. 지리산 솔바람이 드나드는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이 자주 오갔으리라. 끽다와 음풍영월이 있는 풍류도 다반사였을 테고. 조선의 문인 임제가 광한루에 올랐을 때엔 매화라도 피었나? 매화 가지에 달이라도 걸렸나?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깬 채 밤이 깊어졌다고, 함께 노닌 사람과 헤어질 땐 꽃이 지더라고, 임제는 그렇게 시로 노래했다.
광한루는 세종의 총예를 받았던 명재상 황희가 남원에서 유배를 살 때 지은 작은 누각 광통루에서 유래했다. 광한루라는 이름은 1444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아하, 여기가 바로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산다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로다!”라고 찬탄한 데에서 비롯됐다. 정인지가 괜히 달나라 운운한 게 아니다. 광한루가 애초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지어졌으니까. 즉 광한루는 천상의 궁궐인 셈이다. 옛사람들은 상상력을 발동해 결국 천상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천상에 모래알처럼 무수히 뿌려진 것은 별인데, 광한루 전면의 넓고 유려한 연못이 바로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 가운데엔 섬 세 개를 만들어 삼신산을 표상했다. 광한루원의 기저엔 이렇게 신선 사상이 깔려 있다. 도교, 유교, 음양론, 풍수지리 등이 추구하는 이상향의 상징 구조들로 어우러져 있다. 안팎이 두루 광활한 세계관으로 상통하는 원림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앞줄에 설 조선 정원이다.
신선을 마음에 들여놓고
다시 빗속을 운전해 정자를 찾아간다. 지리산 기슭,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 있는 퇴수정(退修亭)이다.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 1825~1907)가 1870년에 지은 누정이다. 그는 토목건축을 관장하는 벼슬살이를 하다 은퇴하고 여기 후미진 산골짝에 은거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결국 자연으로 흘러가는가? 퇴직 뒤엔 정해진 순서처럼 산림에 여생을 의탁했던 선인들의 유전자가 후세까지 이어지나? 박치기의 고향은 함양군 안의면이다. 그러나 퇴직 후엔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박치기가 지은 퇴수정의 모습이 그의 선조 박명부가 안의면 화림동 계곡에 지은 농월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닮아 흥미롭다. 경치 좋은 냇가에 지은 정자라는 점에서도 퇴수정과 농월정은 유사하다. 경관을 보는 취향과 정자를 짓는 경향에 집안 내림이라는 게 있지 않았나 싶다.
박치기는 널리 이름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근사한 정자를 지어 한몫 단단히 했다. 그의 전공이 건축이었으니 퇴수정에서 구현된 건축 미학의 완성도를 보지 않고도 가늠할 만하지만, 실제 이 정자는 빼어나 인상적이다. 당대 누정 건축의 첨단 기술력으로 빚어낸 작품일 수도 있다. 명품 정자라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정자의 규모는 작아서 소박미가 물씬하고, 흠결 없는 비례로 조화롭다. 은근한 세련미로 우아하기까지 하다.
퇴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주목할 만한 요소가 많은 정자다. 가령 배흘림기둥을 구사해 시각적 안정감을 부여했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이었던 막돌 초석 대신 사각 다듬돌을 놓은 것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건축 공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뚜렷한 특징을 꼽자면 훤칠한 냇물과 동행하는 정자라는 점이다. 지리산에서 굴러 나온 계류가 정자의 코앞을 흘러가는 게 아닌가. 기기묘묘한 물가의 암반들과 물속의 바위들까지 퇴수정의 동아리로 삼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숲과 물 사이에 들어앉은 정자다. 자연과 긴밀하게 얽힌 집이다. 박치기의 생리는 초야를 닮아 거친 나물밥만으로도 자족했다. 퇴수정 마루에 올라서는 곧잘 객과 더불어 술과 거문고를 즐겼다지. 그는 신선을 닮고 싶어 산수에 묻혀 산 인물이다. 속세의 질서와 규율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 신선을 들여놓고 자연에서 노닐 경우엔 경지가 달라진다. 신선을 흠모한다는 건 이미 도(道)에 밝다는 뜻일 테니까.
김주완 남원문화원장
“남원 문화의 성장 지리산의 영향력 덕분”
예로부터 남원을 일컬어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의 고을’이라 했다. 하늘이 내린 땅이며, 비옥한 들판이 펼쳐지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저 옛날의 농경사회 시절,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이 풍부해 의식주가 넉넉할 경우엔 문화마저 덩달아 융성했다. 남원이 딱 그랬다. 농업이 발달한 덕분에 향토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현대에까지 상속된 유형・무형의 문화자산이 수두룩한데, 이를 견인차로 삼아 남원은 문화 관광도시로 부상했다. 이에 대한 김주완 남원문화원장의 얘기는 이렇다.
“농업경제의 힘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먹고사는 게 무난해 예술이 발흥한 거다. 삼국시대부터 남원이 교통의 요충이었다는 점도 문화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교통로를 통한 인적・물적 교류는 물론, 외부의 다양한 문화 유입이 활발했으니까.”
남원은 지리산 자락에 있다. 지리산이 남원 문화에 미친 영향도 클 것 같다.
“남원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어머니 산’이다. 삶의 희망과 안식을 지리산을 통해 얻으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원의 문화예술 역시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성장했다고 본다. 남성적인 판소리 동편제를 완성한 가왕 송흥록의 성취는 지리산이 주는 정신적 영향력에 의해 가능하기도 했다. 남원은 문학의 요람이다. 고전소설 ‘춘향전’과 ‘흥부전’의 무대이자 발상지이며,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남원 사람이다. 이 모든 문학적 성장의 뿌리 역시 지리산에 있다고 생각한다.”
6년째 남원문화원을 이끌고 있다. 그간에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큰 성과 하나를 소개하겠다. 과거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베 짜는 소녀가 있었는데, 우리 문화원은 이 소녀의 스토리를 전해 듣고 전말기를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조사단을 꾸려 일본 현지를 찾아가 여러 기록을 뒤지는 등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마침내 영상 다큐에 모든 걸 담을 수 있었다.”
매우 뜻깊은 발굴 사업을 성공시킨 셈이다. 소녀는 포로로 끌려갔으나 좌절하지 않고 굳세게 일어섰던 것 같다. 자신이 지닌 직조(織造) 재능을 일본 지역민들에게 전수해 직조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게 아닌가. 소녀의 사후, 일본인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내어 추모비를 세웠다 한다.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소녀의 명민한 자질에 감동할 수밖에.
소녀 관련 발굴 자료들을 향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다큐 상영은 물론, 그림책으로 만들어 널리 보급할 계획이다. 연극이나 창극, 혹은 소설로 가공할 수 있는 콘텐츠도 개발할 것이다.”
문화원마다 지역민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문화원의 사업과 프로그램에 동참할 수 있는 방안 개발에 고심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엔 어떤 기법이 필요하다 보나?
“외부에서는 문화원이 주민들의 참여나 관심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이미 가까이에 있다고 본다. 미진한 부분은 지속적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열린 문화원’을 지향한다.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 문화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보성 사람이 잘라 말한다. “보성군이야말로 남도 여행 1번지이지!” 볼 것도 즐길 것도 먹을 것도 기억에 남을 것도 숱하다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이야 캐묻지 않아도 알겠다. 주마간산식으로나마 예전에 보성 땅을 훑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풍경도 풍물도 역사도 문화도 개성이 있어 오래가는 여운을 남겨준 게 아닌가. 하오의 해변에 앉아 멍 때리며 바라본 바다에 일렁이던 붉은 윤슬을 잊을 수 없다. 찰나의 잔물결에 불과한 삶의 눈부신 슬픔을 환기시켜 죽비처럼 가슴을 쳤으니. 해서 내겐 그날의 윤슬이 보성 최고의 명장면으로 새겨졌지만, 여행자의 눈과 감성을 일깨우는 이 고장의 명소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기가 부족할 지경으로 즐비하다. 오늘은 건축문화유산을 답사할 참이다.
보성여관을 찾아간다. 벌교읍 다운타운 중심지에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그 시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형 여관이었다. 건물 7채에 방이 13개나 됐다. 요즘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이렇게 화려한 여관이 어떤 연유로 남도 끝자락 포구 벌교에 들어서게 됐을까?
당시 벌교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이었다. 전남의 4대 도시에 들었다고 하니 기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벌교의 번성은 일본인들의 거주와 왕래가 잦은 데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접점인 벌교의 지리적 이점을 영리하게 간파했다. 전남 내륙의 곡창에서 긁어모은 양곡을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했다. 즉 식민지 수탈기지의 한 전형이었다. 하루 20여 차례 화물선이 드나들 정도였으니 가혹한 정황이 훤히 비친다. 여하튼 벌교는 인파가 북적이는 도시였다. ‘본정통’이라 부른 신시가지가 형성됐다. 보성여관이 들어선 시대적 배경이 완연하다.
소설 ‘태백산맥’의 남도여관 그곳
보성여관은 건축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 2012년 복원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일본식 건물의 특징인가? 전체적으로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 전면을 가득 채운 유리문들과, 2층에 줄느런한 창문들이 외부의 햇빛과 거리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덕분에 오밀조밀해서 갑갑해 보일 수 있는 내부 구조에 생기가 돋는다. 주로 직선과 사각의 연쇄로 이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우리의 전통 건축과 다른 걸 알 만하다. 가늘고 날렵하게 깎아 세운 사각기둥, 널빤지로 마무리한 벽면과 천장, 다다미방, 중정에 조성한 작은 정원…. 곳곳에서 일본식 작풍이 느껴진다. 독특하기론 원래의 용도대로 지금도 여전히 여관과 찻집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관람만 할 수 있는 여느 근대 건축유산과 달리 보성여관은 실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정래는 성장기 한때를 벌교에서 살았다. 벌교의 변천사와 벌교 사람의 희로애락에 밝다. 그래 ‘태백산맥’에 벌교의 지형지물과 풍속과 인물을 끌어들여 리얼하게 묘사하곤 했는데, 보성여관은 그중 한 곳이다. 거장의 소설에 출연한 보성여관의 운세는 별안간 환하게 열려 드라마틱한 상승을 하기에 이르렀다. ‘글 감옥에 갇혀 살면서도 황홀하다’는 조정래의 치열한 문학정신까지 더듬어보게 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까. 보성여관만이 아니다. 벌교읍이 통째 ‘태백산맥’의 아우라에 힘입어 활기를 띠게 됐다. 답사객들이 밀려들면서였다. 조정래의 문학 장정과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이 건립되고, 덩달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도 마련되면서 문예적 공기마저 감도는 곳으로 변했다. 소설 한 편이,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이, 고즈넉했던 지방 소읍을 생동감 넘치는 문화지구로 바꿔놓은 셈이다.
참 아름다운 숲속의 정자, 열화정
이제 조선 고택을 만나기 위해 강골마을로 접어든다.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다. 강골마을은 원래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들이 펼쳐지고, 자연이 연주하는 원초적 선율에 다름 아닌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저 멀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강골마을은 여전히 수려하다.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그러니 눈 밝은 옛사람들의 정주가 필연이었겠지. 이곳엔 ‘이진래 고택’과 ‘이정래 고택’이 있다. ‘이준회 고택’도 있다. 보성 지역 사대부 가문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구현한 셋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을 뒷산 초록 풀숲엔 살포시 감춰진 듯 조붓한 길이 하나 있다. 섬려한 발길을 기다리는 오솔길인가? 바닥에 희고 미끈한 박석들이 깔려 있다. 이윽고 길 끝에서 열화정(悅話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숲속에 묻혀 사는 은자처럼 평온한 정자다. 아름다워 첫눈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작은 집이다. 협착한 산골짝에 걸맞은 크기라서 조화롭다. 조선 후기 문신 이진만이 지은 정자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정자다. 덤벙 주춧돌 위에 세운 둥근기둥, 누마루와 쪽마루와 툇마루, 기능성을 고려해 배치한 방들, 방과 아궁이를 연결하는 작은 쪽문 등 고수의 배합 솜씨가 능란하다.
숲은 초록 일색이다.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이 토하는 저 초록빛 아우성이라니. 실바람 한 뭉텅이에도 서슴없이 설레어 몸을 흔드는 꽃들, 잎사귀들. 식물들의 희열과 자유를 이해할 만하다. 열화정 주인은 이 청산에 묻혀 나무처럼 살고 싶었나? 속세의 탐욕과 광기를 밀어내며?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심정일 때 의지할 곳은 자연이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
‘막걸리 페스티벌’로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
보성은 예로부터 산·바다·호수를 일컫는 3경(三景)과 의향·예향·다향을 뜻하는 3보향(三寶鄕)의 고장이라 불렸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에게 보성의 문화에 관해 이모저모 얘기를 청해 들었다.
“먼저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에 관해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인데, 보성 땅 벌교가 마치 주먹으로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많은 고장인 양 엉뚱한 오해를 초래했다. 팩트는 그게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가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안규홍 의병장이 일본 순사를 한주먹으로 때려눕힌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보성은 항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펼친 고장이다. 보성군은 의병장 안규홍의 동상과 ‘황금주먹’ 조형물을 만들어 설치했다. 사실관계를 외부에 알려야 할 필요를 느껴서인 것 같다.
흔히 가치 있는 근대 건축유산들이 속절없이 사라지거나 망가졌다. 반면 보성여관은 원형 훼손 없이 잘 보존됐다. 그 배경이 있다면?
“보성 사람들은 일찍부터 보성여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개발 바람이 거셌던 새마을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관리에 나섬으로써 안전한 보존 조건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자체마다 문화원의 역할도 그만큼 커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화원의 존재감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 그렇다고 보나?
“아쉬운 대목이다. 문화원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단체지만 혁신에 소홀하다. 침체를 털어내고 이미지를 제고해야 하는데 잘 구현되지 않고 있다. 문화원은 지역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그릇을 채워야 하는데 여전히 구습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7년째 보성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그간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새롭게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내심 전국 최고의 문화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러자 성과가 나오더라. 다양한 문화 테마를 설정, 내실 있는 운영을 하자 주민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줬다. 보성문화원은 이미 주민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셈이다. 보성문화원을 통해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청년층의 동참도 적극적이다.”
보성군은 ‘서편제보성소리축제’로 2022년부터 2년 연속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을 받았다. 김 원장은 내년에 흥미로운 축제 하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전국의 모든 막걸리와 국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막걸리 페스티벌’을 열어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는 것.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에 근거를 둔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들이 발복하고 번창한다고 믿어왔습니다. 공주 마곡사에 있는 군왕대(君王垈)는 지기(地氣)가 너무 좋아 몰래 암매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할 정도죠. 그만큼 우리에게 장지를 선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현재는 풍수지리에 따른 명당보다는 교통 접근성, 시설 편의성 등이 명당의 기준이 되고 있는데요. 화장률이 90%를 넘어가고 있는 현시대에 장지는 어떤 곳이 좋고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법은 크게 화장과 매장으로 나뉩니다. 먼저 매장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매장이란 시신이나 유골을 땅에 묻는 방법으로 가장 전통적인 장례법입니다. 매장은 공설묘지(지방자치단체가 설치·관리)와 사설묘지(개인묘지, 가족묘지, 종중·문중묘지, 법인묘지)가 있습니다. 현재 공설묘지는 아주 적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설묘지에 매장하는 비용에 대해서만 알아보겠습니다. 사설묘지중 개인묘지, 가족묘지, 종중·문중묘지는 선산(先山)에 매장하는 방식이며, 법인묘지는 공원묘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선산 매장 비용
선산에 매장할 때 들어가는 비용은 크게 기본 작업비와 석물(石物)비로 구분됩니다. 기본 작업비에 장비(포클레인), 인력, 잔디, 석회 등이 포함되며 석물은 비석, 상석, 둘레석을 비롯해 망주석, 석등, 병풍석 등 다양합니다.
지역이나 매장지의 환경에 따라 비용에 차이가 있는데, 기본 작업비 발주 금액은 대략 110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소비자가격은 여기에 상조회사와 장례지도사의 중간 마진이 붙어서 보통 150만 원 정도에서 시작합니다. 석물 비용은 돌의 종류, 크기 등에 따라 금액 변동이 큽니다. 평균 금액을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소비자가의 20~30% 정도가 상조회사와 장례지도사의 중간 마진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선산에 매장하는 경우 제일 어려운 것이 마을 주민과의 협의입니다. 보통 해당 마을에서 주민이(또는 마을에서 알선한 업체) 직접 산역을 진행하고 비싼 비용을 책정하거나 마을 발전기금을 별도로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협의를 잘 진행하지 못할 경우 마을 사람이 장의차량을 가로막거나 불필요한 신고를 하는 등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공원묘지 매장 비용
공원묘지의 매장 비용은 토지 비용과 석물 비용, 작업 비용 등으로 구분해서 계약을 진행합니다. ‘한시적매장제도’(15년에 한 번씩 분묘 설치기간을 연장, 최대 60년까지 가능)로 2001년 이후에는 대부분의 공원묘지에서 일괄 묘지사용료로 통합하여 계약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공원묘지의 경우 보통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단장으로 모시는 구역, 합장 구역, 일반 구역, 고급 구역 등으로 비용은 1500만 원에서 6000만 원 정도입니다. 요즘은 공원묘지에 매장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많은 공원묘지가 봉안묘 사업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장 비용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 호는 장례 비용 마지막 편으로, 봉안당과 수목장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으레 관심은 새 정부의 기조나 내각의 구성 등에 쏠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 대중의 관심은 ‘풍수’에 쏠렸다. 윤석열 당선인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 선언하면서, 집무실을 용산의 국방부 자리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지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흉터 논란’이 윤심을 움직인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다. 50년 넘게 동양철학에 몸담은 연구가는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말한다.
“크게 경을 칠 것이야.” 1969년 천안의 한 주택가. 한 청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방 안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젊은 청년이었다. 마주 앉은 초로의 노인은 고개를 연신 숙일 뿐 말 한마디 제대로 섞지도 못하고 있었다. 청년의 입에서는 마치 직접 보고 온 것처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청년은 이제 74세가 되어 “당시엔 겁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50년 넘도록 역학 발전에 힘쓰고 있는 청송학 노승우 선생의 이야기다.
“그땐 마치 쾌도난마 같았습니다. 확신에 차서 함부로 말을 쏟아냈죠. 조금 아는 것 가지고 겁 없이 덤볐던 시절이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명당서 밤이슬 맞다 간첩 오해도
그가 동양철학에 몸담게 된 것은 가족의 영향이 컸다. 외조부였던 ‘간산’ 선생은 평생을 연구하며 천일기도를 두 번이나 성공한 도인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임진강 이남으로 가야 살 수 있다”며 평양북도 영변군에 살던 가족을 영월을 거쳐 계룡산으로까지 이끌었다. 그의 외숙부 역시 역학에 몸담았다. 외숙부인 ‘동호’ 선생은 그의 실질적인 스승이 되어 평생을 이끌었다. 명리학과 성명학을 공부하며 ‘이기’를 익혔고, 풍수학과 관상학을 통해 ‘형기’를 깨우쳤다.
젊은 치기에 철학원을 차렸다가 그만두었지만, 군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도 한동안 다시 개원하지는 않았다. 과연 그가 공부한 것들이 실제로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운명이 실제로 작동했는지 검증해야 했다.
“2년 넘도록 전국의 땅만 보러 다녔어요. 전국의 지역문화원을 다니면서 배출된 역사적 인물을 확인하고, 실제로 태어난 생가를 찾아 터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죠. 지역민들에게 후손들은 잘 지내는지 물어보기도 했고요. 또 좋은 명당을 만나면 실제로 그곳에 누워 밤을 지새면서 좋은 기가 있는지 느껴보려고 했죠. 덕분에 새벽이슬 맞으며 산을 내려오다 간첩으로 오해받기도 했어요.(웃음)”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의 성격은 많은 스승들에게 그를 이끌었다. 국한문으로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역학서 ‘팔자대전’의 저자 김우재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우재 선생은 국내에서 구전되던 역학 이론을 집대성해 책으로 엮었지만, 출판사들이 받아주지 않자 자비로 ‘팔자대전’을 출간했다.
“책을 보고 반해서 무작정 찾아갔죠. 용산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찾아갔는데, 계단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나 신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세상 물정 제대로 몰랐던 시절이죠.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제대로 여쭙지도 못했지만, 청빈한 학자의 모습이었던 선생의 첫인상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 청송학은 두 명의 스승을 더 만난다. 일붕 서경보 스님과 청오 지창룡 선생이다. 특히 청오와는 한국역술인협회의 회장과 부회장 사이로 8년간 호흡을 맞췄다. 청오는 조선 시대부터 8대에 걸쳐 관상감을 배출했던 가문 출신으로, 현재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자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를 잡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인천의 조용한 주택가 가운데 자리 잡은 것은 1976년의 일이다. 이후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청송학은 “서울과 거리를 두고 술사가 아닌 학사로 산 것은 평생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재벌이나 정치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죠. 특히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더더욱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역학을 하는 사람은 보통 학문적인 연구에 집중하는 학사와 많은 이들의 환심을 사는 술사로 나뉘는데, 술사로 살았다면 돈 몇 푼에 소주잔이나 기울이다 지금의 성과는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큰돈은 만지지 못했지만,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보람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일 중 하나는 역학을 ‘음지’에서 ‘양지’로, 그러니까 제도권 안으로 합류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일이다. 역학을 공식 교육기관에서 가르친 건 2006년 서울교대 평생교육원의 관상학 강좌가 최초였다. 청송학이 전임강사를 맡았다. 이어 서라벌대학교 풍수지리학과,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풍수지리학 최고위과정, 용인대학교 풍수지리 고위과정 등을 통해 강단에 섰다.
“특히 서라벌대학교의 경우 정식 학부과정이 생겨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부터 78세 넘은 할아버지까지 함께 가르치기도 했죠. 없던 교육과정이 처음 생긴 것이니까 어떻게 강의를 할 것인지, 교재는 무엇을 쓸 것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다양한 그의 교육 이력 중에 흥미로운 부분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과 관련한 것이다. 의료법학연구소에서 의사와 병원행정 담당자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근무자 등을 대상으로 두개골의 형상으로 인간의 성격과 심리적 특성 및 운명 등을 추정하는 골상학을 강의했다.
역학이라는 분야의 특성상 공개하지 못하는 교육도 많았다. 재벌그룹 계열사 인사담당자 수십 명을 앉혀놓고 관상학을 교육하기도 했다. 우수한 사원을 뽑겠다는 회사 측의 요청 때문이었다.
방송 출연도 고사하지 않는 편인데, 이 부분도 제도권 안에서 역학이 인정받기를 바라는 또 다른 노력 중 하나다. 역학이 무속과 구분되어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한국동양운명철학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간자격 시험 개발 등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대통령 관저 이전 올해가 적기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죠.” 풍수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자 청송학은 서양 정치인의 어록을 언급했다.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이다.
“집은 사람이 짓는 것이지만, 사람은 집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공간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동서양이 같은 철학을 공유한 셈이죠. 실제로 풍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나라의 국운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남산터널이 개통된 것도 중요한 사건이죠. 서울의 안산인 남산에 터널이 개통되면서 속살이 드러나자, 지창룡 선생님은 ‘나라의 인재들이 해외로 뻗어나가 활약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셨죠. 결국 그렇게 되었고요.”
풍수적으로 뚜렷한 공과가 있는 정치인으로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꼽았다. 복원사업을 통해 복개된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안심했다고 한다.
“베이징을 흐르는 장강이나 워싱턴DC를 가로지르는 포토맥강 등 융성한 대도시에는 반드시 강이 있고 ‘서출동래’(西出東來)의 원칙을 가져요. 청계천 역시 수량이 부족해 아쉽지만 물이 다시 흐르게 한 덕분에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드넓은 한강 때문에 물이 풍부하다 생각하기 쉽지만, 풍수적으로 보면 사대문 안쪽은 물이 부족해 서울의 단점으로 작용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경복궁에 경회루를 조성한 것도 물이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裨補)로 봐야 한다고.
청계천 복원사업이 공이었다면 과도 있다. 바로 아라뱃길 사업이다. 그는 “아라뱃길이 나면서 결과적으로 한강물이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게 된 셈이 됐다”며 “물자가 도망가고, 서울의 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청와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는 정말 나쁜 자리일까. 청송학은 “풍수학자 입장에서 경복궁이나 청와대의 위치는 납득이 가지 않는 자리는 아니다”고 이야기했다.
“풍수학의 관점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기는 하죠. 청룡의 역할을 하는 낙산이 백호에 비해 짧은 형세예요. 흥인문이라고 불렸던 동대문이 세조 1년(1455년)에 흥인지문으로 바뀐 기록이 나와요. 주변 지대가 다른 곳에 비해 낮아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한 지명 비보를 한 것이죠. 풍수학에서 부족한 자연적 요소를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하죠.”
청와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청와대의 단점으로 대통령 숙소인 관저의 위치가 골짜기에 가까워 경사가 심하고, 물이 부족한 점을 꼽았다. 재물로 사람이 치사해지기 쉬운 공간이라는 해석이다. 또 북악산의 몇몇 바위들이 종기처럼 흉하게 자리 잡은 것도 단점이라고 했다. 그는 “이 부분 역시 나무를 조성하고, 청계천의 수량을 늘리는 등 비보를 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석열 당선인이 고집한 국방부 청사 자리는 어떨까? 청송학은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자리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국방부 자리는 남산에서 둔지산으로 내려와 혈이 모이는 자리고, 완전한 남향인 점이 좋죠. 또 남쪽으로는 물이 모이는 자리여서 물자가 쌓이는 곳입니다. 훌륭한 터가 좋은 주인을 만나면 나라의 국운이 융성해질 수 있는 이상적인 자리 중 하나죠.”
그는 자리만큼이나 시기도 중요한데 임인년인 올해가 새로운 터에 자리 잡는 적기라고 설명했다.
“십이지로 해석하면 자(子)시에 하늘이 열리고, 축(丑)시에 땅이 열리고, 인(寅)시에 사람이 열리죠. 임인년인 올해가 새로운 12년 인년의 시작인 만큼, 청와대를 이전해야 한다면 좋은 시기임에는 분명합니다.”
국도를 벗어나 냇물 따라 이어지는 소로로 접어들자 풍경이 환하다. 물은 맑고, 물가 바위는 훤칠하다. 마을 동구, 냇가의 느티나무들은 또 어떻고? 늙었으나 우람하고 당당하다. 느티나무 아래로 흐르는 냇물은 연둣빛으로 순정하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마을이다. 마을의 집들은 검정 기와를 올린 개량한옥 일색이어서 차분하다. 서석지(瑞石池)는 마을 한복판에 있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정과 함께 ‘조선의 3대 원림’이라 소문나면서 서석지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엄청 늘어났다.
나직한 대문을 통해 서석지로 들어서자 이제 조선이다. 조선 시대의 건축과 연못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다. 보수가 잦았으나 원형을 훼손하진 않았다. 조선 광해군 때의 선비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조성했다.
서석지는 이곳의 연못 이름이지만, 담장 내부의 별서 공간을 통틀어 서석지라 부른다. 자연을 바라보는 산림선비들의 눈엔 경계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치를 내 것으로 삼았다. 정영방이 그랬다. 그는 서석지를 내원으로, 주변 일대의 산천경개를 외원으로 간주했다. 자연을 무한풍류의 대상으로 관조한 선비들이었으니 하늘의 달과 별빛인들 나의 것이 아닐 리 있으랴. 또 그들에겐 자연이 경전(輕典)이었다. 수신(修身) 교과서였다. 담벼락으로 내·외부를 가를 일이 아니었다.
정영방은 매우 신중한 캐릭터의 소유자? 그는 10여 년에 걸쳐 서석지를 구상했다. 이후 완성까지는 다시 17년이 걸렸다지? 풍수지리에 밝았던 그는 주변 산수의 형국을 면밀히 고려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경정(敬亭)이다. 경(敬)! ‘섬김’이다. 매사 예를 다해 삼가고 섬기는 게 성리학자의 본분이자 이상이었다. 정영방은 퇴계학파의 문인. 정자를 짓더라도 분수에 넘쳐 도학자의 체통을 스스로 구기는 일을 할 리 없는 인물이었다. 정자보다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를 먼저 지은 데에서 그의 됨됨이가 읽힌다. 음풍영월을 즐길 정자를 지을지라도 일단 공부부터 해두자! 그런 뜻으로 공부방부터 지었던 게 아닐까.
정영방이 한층 심혈을 기울인 건 연못이다. 터의 대부분을 연못 공간으로 활용했다. 조선의 연못은 네모꼴이 일반적이다. 서석지 역시 네모 모양이다. 괜히 네모가 아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로 본 성리학적 자연관을 적용했다. 연못의 물은 동북쪽 귀퉁이에서 들어와 서남쪽으로 나간다. 이 수로의 방위 역시 조선 연못들이 공통으로 지닌 특징이다. 풍수를 중시했던 옛사람들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을 역수(逆水)로 봐 배제했던 거다. 이래저래 서석지는 전형적인 조선 연못이다.
그런데 서석지엔 특별한 게 있다. 연못에 있는 90여 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그렇다. 정영방은 못을 팔 때 나온 이 바윗돌들 일부에 이름을 붙였다. 생김새에 맞춰 물상의 이름을 주기도 했고, 도학의 이상세계를 표현해 명명하기도 했다. 이 명명보다 흥미로운 건 돌들과 못물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미감이다. 정영방은 ‘돌엔 문기(文氣)가 있다’고 했다. ‘숨어 사는 군자를 닮았다’고도 했다. 돌을 동행할 만한 벗으로 삼았던 셈이다.
경정은 규모가 꽤 큰 정자다. 6칸 대청마루에 올라 내려다보는 연못 경관이 압권이다. 연꽃들 소담히 피어오르는 계절엔 아찔하리라. 꽃에 마음을 두고 은거의 고독과 허기를 달랬으리라. 그런데 성리학자의 유토피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게 원림이요 연못이라지만, 오직 은둔을 일삼노라면 삶이 맨송맨송해지니 유토피아고 뭐고 별 의미 없어진다. 허세꾼의 여흥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럼 무엇으로 허기진 마음을 채우나? 정영방에겐 공부가 처방이었다. 서재 주일재에 틀어박히는 날이 많았다. 서재 앞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등 고상한 것들을 심어 족집게 레슨 교사로 삼았다. 아예 연꽃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들로 못을 가린 건 독공(獨工)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을 테다.
정영방은 진사시에 붙었으나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렇다 할 취직한 적 없이 살았다. 조선 양반들이야말로 ‘금수저’의 레전드였으니 요상할 거 없다. 밥벌이 걱정 없이 그저 무욕을 길잡이로 삼아 노닐 것 다 노닐되 공부에도 부끄럽지 않게끔 열을 내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생 최고봉에 오른 게 아닐까. 백수도 이쯤이면 진흙을 딛고 올라온 연꽃에 뒤지지 않는다.
답사 Tip
서석지가 있는 연당마을은 운치 있는 전통 마을이다. 돌담길 따라 한 바퀴 돌아볼 만하다. 아랫마을엔 정영방의 후손이 지은 양반 가옥 태화고택이 있다. 서석지 들머리에 있는 천변의 바위벼랑 석문(石門)도 빼어나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이노우에 가즈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50대부터 덧셈과 뺄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안 쓰는 물건이나 지나간 관계에 대한 집착은 빼고, 비운 공간을 필요한 것들로 채워나갈 때 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빼고, 잘 더할 수 있을까?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브라보 독자를 위해 인생에 필요한 여러 정리법을 3회에 걸쳐 안내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우리가 사는 집, 주거 공간이다.
추억의 물건에 집착하지 말자
나이가 들면 지나간 세월만큼 추억도 많아진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흘러가버리기 마련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건으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 간만에 대청소를 하기 위해 집을 한바탕 뒤집었다가도 결혼할 때 입었던 예복, 10년 전에 사용한 휴대폰, 연애 시절 주고받았던 편지 등 빛바랜 물건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 보관함으로 집어넣는다. 자녀들을 위해 사둔 이런저런 철지난 혼수품도 아까워서 끼고 사는 중장년층 부모도 많다.
소중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이해도 되지만, 사소한 추억까지 다 안고 살면 오히려 현재의 삶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청소할 때마다 일일이 쓸고 닦을 생각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은 물론이고, 체력적으로도 모든 물건을 관리하는 건 무리다. 무엇보다 오래되고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이 공간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으면 그 집은 현재의 내가 사는 공간이 아니라 과거를 사는 곳이 된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을 원한다면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물건만 남기라는 얘기다. 당장 필요한 물건을 정하고,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해 통제할 수 있는 만큼만 소유해야 한다. 특히 중장년층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집 안의 물건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체력을 고려해 가벼운 물건 위주로 써야 한다. 그릇이나 컵 하나를 고를 때도 예전과는 다른 기준과 시선으로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거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처럼 큰 변화가 있을 때 물건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리는 언제든 해도 된다. 특히 요즘같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을 땐 집 안을 간단하게라도 정리해보는 게 좋다. 기분이 산뜻해지면서 답답함도 해소된다. 큰맘 먹고 대청소 한번 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면, 정희숙 정리컨설턴트가 제안하는 공간별 정리 팁을 참고하자.
아늑한 침실의 비결은 ‘옷장 정리’
침실을 정리할 때 가장 처리하기 힘든 ‘빌런’(악당)은 다름 아닌 옷장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구매하는 옷들이 생기지만, 옷장 공간이 한정돼 있어 걸어둘 데가 없다. 이런 상황에는 침대나 의자 위에 어수선하게 옷과 물건을 쌓아두게 되고, 침실은 자연스레 난장판이 된다. 따라서 아늑한 침실을 만들려면 옷장 정리부터 해야 한다. 정리 방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먼저 침실의 구조부터 살핀다. 별도의 드레스룸이 있는지, 옷장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다. 그다음 어디에 무엇을 넣을지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본다. 평소 입을 일이 없는 한복이나 민방위복 같은 옷들의 자리도 정해두면 좋다.
그다음 옷장에서 옷을 전부 꺼내 입을 옷과 입지 않을 옷을 가려낸다. 10년 전에 유행하던 원피스, 사이즈가 맞지 않는 바지 등 자주 입지 않는 옷들은 모두 버린다. 아깝더라도 오늘의 나를 돋보이게 해줄 옷으로 옷장을 채워나가는 게 중요하다.
남겨진 옷들은 종류별로 나눈다. 우선 상의, 하의, 세트복(등산복·운동복 등), 원피스로 분류하고 계절별로 나눈다. 그리고 현재 입는 옷 위주로 옷장에 건다. 지금은 겨울철이므로 두툼한 옷을 앞에 배치한다. 옷을 걸 때는 두꺼운 옷걸이를 피하는게 좋다. 옷장의 공간이 금세 줄어들기 때문이다. 니트는 세로로 반을 접어 겨드랑이 부분에 옷걸이를 놓고 양팔 및 몸통 부분을 옷걸이 안쪽에 넣어 고정하면 늘어나지 않게 보관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얇은 옷걸이를 사용하자.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
거실은 가족의 소통 공간으로
이상적인 거실의 기능은 가족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의 일을 공유하는 데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거나 말없이 TV를 보는 공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또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아 마치 창고처럼 보일 때도 있다.
어떤 공간이든 잡동사니로 어수선해지면 본래의 기능을 잃는다. 거실을 소통의 장으로 되돌려놓으려면 먼저 잡다하게 널려 있는 물건들을 정리해야 한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도 품목에 따라 분류해 제자리에 갖다놓는다.
어린 손주와 함께 사는 집이라면 거실이 매일 장난감으로 어질러져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럴 땐 TV 서랍장 한 칸을 손주 장난감 등을 넣어두는 수납장으로 쓰면 좋다. 평소 아이가 자주 갖고 노는 장난감과 적정량의 책만 두고 나머지 물건은 손주 방에 보관한다. 손주 방이 없다면 학습 관련 물품이나 장난감을 수납하는 장소를 따로 지정해두고 쓴다.
책이 많은 집은 거실 여기저기에 읽다 만 책을 쌓아두는 경우가 많다. 책 놓을 공간이 부족하면 책장을 가로로 눕힌 뒤 책을 꽂고 그 위에 수납함을 올려보자. 공간 분할 효과가 생긴다. 이런 방법들로 비좁은 거실을 정리해 사용 범위를 넓혀나가면 가족들이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주방은 청결이 핵심
주방은 식생활을 하는 공간이므로 어떤 곳보다 청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주방 정리의 핵심은 청소인데, 요리 도구와 주방 물건들이 잘 정리돼 있어야 청소가 쉽다. 주방은 크게 싱크대, 조리대, 가스대로 구성돼 있다. 요리가 펼쳐지는 이 세 곳을 중심에 두고 정리를 하면 깨끗하면서도 효율적인 주방을 만들 수 있다.
우선 싱크대 옆 조리대에 펼쳐져 있는 잡다한 물건부터 정리한다. 주방 가전 필수품인 밥통과 전자레인지 정도만 놔두고 조리 공간을 넉넉하게 확보한다. 비타민 같은 건강보조식품은 정수기 가까운 곳에 두면 매일 잊지 않고 챙겨 먹을 수 있다.
상부장과 하부장으로 나눠져 있는 수납부도 정리할 물건이 꽤 많다. 개수대 바로 위 상부장은 설거지한 그릇이 물기가 마르면 넣고 다시 꺼내 쓸 수 있도록 가급적 비워둔다. 상부장에 그릇이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와이어 랙(철사 선반)에 그릇이 가득 쌓여 싱크대 주변이 혼잡해진다. 따라서 이곳엔 식사를 할 때 사용하는 그릇들만 놔두고 나머지는 상부장에 올린다.
하부장은 미어터지는 주방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마법의 공간이다. 개수대 아래 파이프가 지나가는 경우는 선반을 만들기 어렵지만, 파이프가 없다면 선반을 설치해 냄비, 프라이팬 등을 보관하면 좋다. 단, 개수대 쪽은 물을 많이 사용해 습하므로 양념 종류는 놓지 않는다.
신발은 구성원별로, 눈높이에 맞춰
현관은 집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곳이다. 또 풍수지리학적으로 외부와 내부의 기운이 만나는 곳이므로 가급적 깔끔한 게 좋다. 현관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신발장만 잘 정리해도 넓고 쾌적한 현관을 조성할 수 있다.
신발도 옷과 마찬가지로 계절에 따라 분류한 뒤 가족 구성원별로 나누고, 종류별로 정리한다. 크게 운동화, 단화, 하이힐, 등산화로 구분하면 된다. 이때 치수가 맞지 않거나 잘 신지 않는 신발들은 버린다. 이렇게 과감하게 정리해야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신지 않는 신발은 따로 보관하거나 세트로 정리해둔다.
관리가 가장 까다로운 신발은 부츠다.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모양도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지 않을 때는 작은 생수통이나 신문지를 넣어둔다. 투명 케이스 등 사이즈가 맞는 수납공간이 있으면 그곳에 보관한다. 장소가 마땅치 않으면 부츠 살 때 받은 박스에 보관해도 된다. 신발장은 가득 채우기보다 손님이 방문할 때를 대비해 한 칸 정도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게 좋다. 쇼핑백이나 상자, 우유팩, 커피 캐리어 등 소품을 활용하면 도움이 된다.
도움말 정희숙 정리컨설턴트
자료 및 정보 제공 가나출판사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
지리산 중턱 해발 926m 회남재 숲길 10km를 걸었다. 내 고향 청학동 삼성궁을 출발점으로 하동군 악양면 등촌 마을까지. 단풍 소식이 남녘을 향하는 이맘때쯤이면 더욱 고향이 그리워진다. 마을마다 잎 다 떨어진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이 정겨운 계절이다.
남쪽이지만 높은 지대여서 지금쯤 단풍이 곱게 물들지 않았을까? 고향을 찾는 기쁨과 함께 단풍 구경 기대감으로 들뜨기도 했다.
10월 26일 열린 ‘하동군 지리산 회남재 숲길 걷기 행사’에 참여한 많은 이들과 함께 했다. 청학동 삼성궁 주변에는 아직 단풍이 제 모습을 찾지 못했으나 먼발치로 올려다본 산등성이는 단풍으로 울긋불긋했다. 가을 하늘의 파란색과 보색 되어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또렷이 다가왔다. 머지않아 청학골까지 곱게 물들지 싶다.
이 숲길은 회남(回南)재 정상에 있는 회남정을 중간 지점으로 지리산 중턱을 돌고 오르내리며 하동군 청암면과 악양면을 잇는다. 청학동의 신비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무대, 평사리 최참판 댁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회남정 위로는 지리산의 시루봉과 삼신봉, 아래로는 남해로 뻗은 산줄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한 폭의 산수화다.
지리산 삼신봉 줄기를 타고 청학동 삼성궁에서 토지 마을 최참판 댁이 있는 악양면 등촌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10km 고갯길이다.
삼성궁에서 회남재 정상까지는 흙길이나 승용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너비다. 산 중턱을 도는 평지를 걷는 듯한 6km 둘레길이다. 중간에 톱밥을 펼쳐놓은 길은 발걸음을 더 편하게 했다.
회남정에서 등촌 마을까지는 승합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4km 포장도로다. 걷기엔 다소 힘든 코스지만 아름드리나무로 둘러쳐진 숲길이어서 힘들지 않게 느껴진다.
세 갈래 코스가 있고 모두 회남재 정상을 중간거점으로 한다. 첫 번째 길은 삼성궁에서 악양면 등촌까지의 편도 10km. 두 번째는 삼성궁에서 청학동 초입에 있는 묵계초등학교까지의 편도 10km. 또 하나의 코스는 삼성궁에서 회남재까지 왕복하는 12km다.
첫 번째 코스를 걸었다. 일행들의 사진 촬영도 맡아 더 많은 걸음을 했다. 걷기뿐만 아니라 고갯길을 도는 짜릿함으로 산악자전거 트래킹 코스로도 유명하단다.
'회남재’는 조선의 대표적 선비 남명 조식 선생으로부터 유래했다.
산청군 덕산에 살던 선생은 청암을 거쳐 살기 좋다는 악양을 찾아 나섰다. 두 지역의 경계지점 산등성이에 올라 내려다본 악양골이 너무 깊었고 섬진강 흐르는 모습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한 곳이 아니라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갔다. 남명 선생이 되돌아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회남재를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서울 등지에서 이용하기 쉬운 길은 대진 고속도로 단성IC에서 나와 지리산 중산리 방향으로 가다가 산청양수발전소 인근에서 삼신봉 터널을 지나면 청학동이다.
또 하나는 남해고속도로 하동IC를 나와 아름다운 길 섬진강 변을 따라가다가 악양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진주시와 하동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청학동행 버스를 탈 수도 있다.
어느 해인가 추석 즈음 닭실마을에 간 적이 있다. 푸른 논 너머로 기와집들이 보였다. 기와지붕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봉긋 솟았다. 마을 앞에는 계곡이 흘렀다. 풍수지리를 몰라도 이곳이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부녀회관에 모여 추석 한과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한 할머니가 손에 쥐여준 한과를 맛봤다. 500년 전통을 이어온 닭실한과였다. 그 뒤로 이맘때면 닭실마을이 생각난다.
걷기 코스
봉화공용터미널에서 택시 탑승▶ 석천계곡 입구 하차▶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솔숲길▶ 징검다리▶ 닭실마을 충재박물관▶ 청암정▶ 충재고택▶ 닭실마을 부녀회관▶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버스 탑승▶ 봉화공용터미널 하차
전통마을인 닭실마을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세운 마을이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 때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안동 권 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이 지금까지 전통을 지키며 대대로 살고 있다. 마을에 충재 종택, 청암정, 석천정사, 삼계서원 등의 충재 선생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어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살기 좋고, 풍광이 뛰어난 마을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했다.
닭실마을은 ‘닭 모양의 마을’이란 뜻이다. 한자로는 닭 酉(유), 골짜기 谷(곡), 마을 里(리)를 쓴다. 닭을 닮은 산이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어서 옛날부터 길지로 알려졌다. 경상도에서는 닭을 ‘달’로 발음해 마을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 부른다.
닭실마을을 구석구석 여행하려면 삼계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석천계곡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코스가 좋다. 닭실마을의 옛 입구인 석천계곡으로 가기 전에 왼쪽 길로 빠져 삼계서원에 잠시 들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이정표 삼아 시골길을 걷는다. 5분쯤 걸으면 은행나무 앞에 있는 삼계서원에 닿는다. 이곳은 충재 선생의 장남인 권동보(1518~1592)가 안동 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충재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원을 둘러보고 석천계곡으로 향한다. 삼계서원에서 석천계곡 입구까지는 코 닿을 거리다.
석천정사를 품은 석천계곡
석천계곡은 폭이 넓고 골이 깊지 않다. 여름철에는 봉화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놀이와 견지낚시를 하며 피서를 즐긴다. 석천계곡 입구의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조붓한 솔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에 들어서자 ‘청하동천(靑霞洞天)’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섰다. 청하동천은 ‘하늘 아래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다. 옛날 기암괴석이 많은 석천계곡에 밤마다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선비들 공부에 방해가 되자 충재 선생의 5대손인 명필 권두웅(1656~1732)이 바위에,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오지 말라’는 뜻을 품은 청하동천을 새기고 붉은 칠을 했다. 그 뒤로 도깨비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하동천 바위를 지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콸콸” 경쾌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계곡 입구에서 400m 정도 걸으면 소나무 사이로 석천정사가 보인다. 석천정사는 권동보가 봉화의 곰솔인 춘양목으로 지은 건물이다. 기암괴석과 금강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풍경이 병풍에서 튀어나온 듯 운치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석천정사를 바라보고 섰는데 그 모습에 반해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석천정사로 가기 위해 계곡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석천정사에 관리인이 있으면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석천정사 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석천계곡이 앞마당이 된다. 계곡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난간에 앉아 있으니 마치 신선이 된 것 같다. 고요한 밤에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가 도깨비 떠드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문득 선비들이 도깨비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는 건 핑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계가 눈앞에 있는데 글이 눈에 들어왔을까.
거북바위에 올라앉은 청암정
석천정사를 지나자 시야가 트인다. 기품 넘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멀리 닭실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란 소나무들이 마을로 인도한다. 이 길 왼쪽에는 개울이 흐른다. 간밤에 비가 내려 개울물이 제법 불었다. 꼴깍꼴깍 자맥질하는 징검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뒤 왼쪽 찻길로 접어든다. 1차선 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닭실마을 초입에 있는 충재박물관에 도착한다. 박물관 옆에 닭실마을의 대표 명소인 청암정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청암정은 충재 선생이 집 안에 지은 정자다. 충재고택의 솟을대문 쪽으로 들어가면 집 안 깊숙한 곳에 안방마님처럼 자리했다. 단풍나무, 소나무, 느티나무가 둘러선 연못 한가운데에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가 솟아 있다. 바위 위에 丁자 모습을 한 청암정이 올라앉아 있다. 마치 연못에 사는 커다란 거북이 등에 청암정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북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청암정의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절해 균형을 맞추는 등 자연미를 한껏 살렸다. 연못가에는 ‘충재’라 이름 붙인 서재가 있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보다 먼저 지은 건물이다.
연못 안에 있는 청암정에 오르려면 각목처럼 생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을 신의 영역이라 여겨 돌다리 폭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을 떼며 돌다리를 건너 신선의 세계로 든다. 청암정 난간 앞에 서면 풍요로운 논과 석천정사가 자리한 남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청암정 천장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번암 채재공과 같은 대학자들이 쓴 편액이 상장처럼 걸려 있다.
500년 전통의 닭실한과
청암정 쪽문으로 나와 마을 앞 큰길로 나선다. 솟을대문을 갖춘 큰 고택이 충재고택이다. 종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사유지이므로 문이 닫혀 있을 때가 많다. 돌담 아래 핀 꽃을 구경하며 마을 끝에 있는 부녀회관까지 걷는다. 부녀회관에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닭실한과를 만든다. 아낙네들은 대부분 70~80대 고령이다. 닭실마을이 안동 권 씨 집성촌이므로 모두 한집안 식구다. 이들이 충재 선생 불천위 제사에 올리는 오색 한과의 500년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닭실한과는 화려하다. 흑임자, 자하초 등의 천연재료로 물들이고, 쌀 튀밥으로 꽃 모양 고명을 올린다. 분홍색 유과는 아기 꽃신처럼 예쁘다. 달지 않고 바삭하며 입안에 들러붙지 않게 만드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 유과를 만들지 않고 약과만 만든다.
제사상에 올리던 닭실한과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팔린다. 작업장 선반에 발송 대기 중인 한과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명절을 앞두면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더 바빠진다. 찹쌀 반죽을 온돌에 48시간 말리고, 반죽을 늘려 튀기고 조청을 발라 튀밥 옷을 입혀 완성한다. 꼬박 사흘이 걸린다.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하는 한과 세트는 서른 박스 정도다. 명절용 한과는 일찌감치 예약 마감된다. 어느 댁 혼례에 쓰일 한과인지 할머니들이 바구니에 오색한과를 색깔 맞춰 담고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포장한다. 곁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 할머니가 맛보라며 유과를 건넨다. 바삭하면서도 폭신한 유과가 깨물자마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닭실마을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963.
주변 명소 & 맛집
봉화 송이돌솥밥
봉화는 전국 송이 생산량의 15%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송이 산지다. 송이는 살아 있는 소나무 뿌리에서 자란다. 봉화의 금강소나무숲에서 자란 봉화송이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어 최고 품질로 손꼽힌다. 봉화에 송이로 돌솥밥을 짓는 이름난 식당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솔봉이식당, 용두식당, 인하원이 송이버섯돌솥밥과 능이전골로 유명하다. 올해 봉화송이버섯축제는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충재박물관
충재박물관은 충재 선생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보물 482점과 고서 및 고문서, 서첩 총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물 중에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상당하다. 재산 분배에 관해 적어놓은 분재기, 양자 입양과 관련한 예조입안,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과거시험 답안지, 서원에서 제사지낼 때 쓰던 제기, 닭실마을 종부들이 온종일 만들었던 동고떡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30, 개방 10:00~17:00(동절기 10:00~16:00) 매주 월요일 휴무.
바래미전통문화마을
바래미마을은 봉화읍 해저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의성 김 씨 집성촌이며 마을이 생긴 이래 200년 동안 과거 급제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50여 가구에서 독립운동가가 14명이나 배출됐다. 토향고택, 만회고택, 남호고택, 개암종택, 김건영가옥, 소강고택 등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한옥도 많다. 만회고택, 남호고택, 소강고택은 여행자를 위한 고택 체험 및 한옥스테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여행 정보 걷기 Tip
•봉화공용버스터미널이나 봉화역에서 21번, 23번 버스를 타고 삼계정류장에 하차하면 된다. 택시로 5분 거리이며 도보로는 15분 걸린다. 닭실마을에서 나올 때는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53번, 50번, 51번, 25번, 16번 버스를 타고 봉화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약 15분 소요.
•봉화공용버스터미널 앞에 봉화장터가 있다. 2, 7일마다 오일장이 선다.
•석천계곡 입구에서 닭실마을까지는 도보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금당실 소나무 숲은 인공림이다. 저 옛날,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꾸민 숲이다. 파란도 재앙도 많은 세사(世事). 거센 홍수가 때로 마을을 휩쓸었을 게다. 차가운 북풍이 봉창을 후려치는 세한(歲寒)을 견디기 힘들었을 게다. 해서, 소나무를 즐비하게 심었다. 그 소나무들 쑥쑥 자라 백 살 혹은 이백 살의 나이를 자셨으니 고명한 노구들이다. 늙어 오히려 굳센 솔들이 떼 지어 동거하니 그지없이 푸르러 둥두렷한 숲이다. 물살아, 바람아, 썩 물렀거라! 숲은 그렇게 소리 없는 소리를 내며 마을을 외호해왔다.
비보(裨補)의 목적도 있었겠지. 비보란 지기(地氣)가 센 곳은 눌러주고, 허한 곳은 채워주는 풍수지리의 방책. 숲을 조성하거나 돌탑을 쌓거나 선돌을 세워 기세의 조화를 꾀했다. 조화로운 지세가 사람의 삶을 북돋울 거라 믿어서였다. 그러한들 수시로 찾아드는 삶의 애환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까마는, 비보를 통해 자연의 가호와 힘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궁리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심정마저 실려 갸륵하다.
인디언들은 자연을 어버이라 부르며 진심을 다해 섬겼다지. 금당실 솔숲도 마을 사람들에겐 모성의 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람들이 숲에 안겨 피한 게 단지 물난리뿐이었겠는가. 억누르기 힘든 슬픔과 그리움과 아픔마저 솔숲에서 헹구었겠지. 죄지은 것 없이 억울하게 소박맞은 아낙은 이 숲에서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사무치게 울었을 것이다. 뼈가 빠지도록 고생해 지은 한 해 농사를 망친 가난한 가장은, 술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꺼이꺼이 울어 간신히 울분을 털어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솔숲을 거닐며 저 헌걸찬 소나무처럼 잘 자라달라고 당부했을 것이며, 어떤 이는 밤의 솔숲으로 들이치는 별빛을 바라보며 일기장에 쓸 감흥을 건져 올렸을 것이다. 숲은 이렇게 깊은 위안을 준다. 삶을 일깨워 세상의 홍진을 견딜 용기를 준다.
숲 바깥엔 찬바람이 아우성을 친다.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는 한겨울이다. 그러나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온기가 훅 끼쳐온다. 석주처럼 우람한 지체를 허공으로 벋은 소나무들이 뿜는 훈기와 향에 추위를 잊는다. 말갈기처럼 성성한 침엽의 빛과, 일체를 보듬은 신성한 침묵에 그저 동화된다. 모든 풍경이 유정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아무 일 없는 채로 즐거워진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난 시간이니 솔숲의 마술이 완연하다.
금당실 마을 안통으로 접어들자 사방팔방, 미로처럼 펼쳐지는 돌담길이 객을 맞이해준다. 솔숲을 에두른 이 마을은 알아보는 눈들이 많은 동리. 일찍이 ‘정감록’은 이곳을 유난한 길지로 쳤다.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았던 거다. 조선의 걸출한 예언가 남사고는 한강을 닮은 장강이 없는 걸 빼고는 한양과 맞먹을 지세라 논했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 터전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는 풍설도 전해진다. 돌담장을 두른 고가와 고택, 서원과 사당의 수효와 격조로 금당실의 유서 깊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대부들도 많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지? 하지만 터가 상서로워 사람도 덩달아 출세한다는 믿음은 실사구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의 소산이 아닐까? 터가, 땅이, 자연의 영혼이 사람을 차별할 리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무는 우리의 형제이고, 참새도 고라니도 모두 우리와 같은 부족이다.
발길은 다시 솔숲으로 끌린다. 숲의 외부엔 센 바람에 뒤엉겨 허공으로 나부끼는 눈 알갱이들. 냉랭한 저 눈보라. 그러나 내부는 다사로워 설렌다. 온기에 찬 숲의 서정에 겨워서. 숲의 정령이 스멀거리는 것만 같은 환(幻)으로.
탐방 Tip
볼 것도 머물 곳도 많다. 금당실 솔숲은 마을 숲의 전형이며, 금당실 마을은 돌담길과 고건축의 전시장이다. 주로 복원된 구조물들이지만, 오래된 마을의 유서와 미학과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인근에 초간정, 초간종택, 병암정 등 명소가 많다.
사람과 공간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풍수학이다. 그런 면에서 풍수는 집을 살 때뿐만이 아니라 집을 단장할 때도 유용하다. 물론 누군가는 풍수를 ‘미신’이라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현대적 삶과 맞지 않는 비합리적 이론’이라 할 수도 있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분명 귀 기울일 내용이 없지 않다.
원래 풍수라는 말의 어원은 ‘장풍득수(藏風得水)’다.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의미로 농사짓기 좋은 최적의 터를 찾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란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풍수가 적용된 사례가 많다. 이미 알려진 사례를 보더라도, 홍콩의 47층 건물인 홍콩상하이빌딩을 짓는 데 풍수사가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풍수를 고려해 백악관 집무실을 개조했다. 또 축구선수였던 데이비드 베컴 부부도 딸 하퍼의 방을 풍수지리학자에게 보여준 뒤 자문을 해서 꾸몄다. 우리나라도 대기업 총수의 집과 사옥은 처음부터 풍수를 고려해 입지를 선정하고, 그 대지에 맞는 건물을 풍수를 따져 디자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기업가처럼 큰돈을 만지거나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풍수에 관심이 많다.
풍수의 적용
풍수학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쌓아온 경험의 통계자료다. 집의 건축 요소, 가구, 가전제품 등을 자연의 원리와 닮게 배치해 기의 흐름을 순조롭게 만들어줌으로써 편안하고 건강한 생활은 물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인생의 큰 줄기를 올바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바로잡아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물론 대지 계획부터 평면 계획까지 풍수를 고려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우리는 아파트, 오피스텔에 사는 게 일반적이고, 공간이 주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가구나 소품을 바꾸고 그 위치를 바꾸는 식의 풍수가 더 현실적이다. 가령, 예전의 집들은 현관을 열면 바로 욕실이 보이는 구조가 많았다. 그런데 이는 돈이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럴 때 현관에 중문을 설치해주거나 가벽을 설치해 돌아가는 방식으로 구성을 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집 안 특정 공간의 컬러를 바꾸거나 벽지 등을 바꾸는 식으로 크게 돈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풍수를 적용할 수 있다.
시작은 ‘비우기’부터
집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우선 공간에 여력이 있어야 한다. 일단 빈 공간이 있어야 디자인을 할 수 있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만인 사람이 근육이 탐스러운 몸을 만들 때 우선 살을 빼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풍수나 인테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우기’다. 풍수 인테리어의 기본은 쓰지 않는 물건은 버리고, 남아 있는 물건의 정리정돈을 잘하면서 정갈한 상태를 유지하고 채광, 통풍, 환기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먼저 집이나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불필요한 물건이나 잘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자.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면 과감히 버리자. 그리고 방이든 거실이든 너른 시선으로 한 번 둘러보자. 그런 다음 구입했을 때의 가격을 떠나 왠지 싫거나 불편한 물건이 있는지 체크하자. 그런 물건이 있다면 그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띄지 않게 버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한다.
마음의 평안이 기준
돈의 개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마음의 안정과 심리적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생활 공간을 만든다는 데 중점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버리는 게 익숙해지면 삶은 놀랄 만큼 단순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집 안의 운수를 끌어올리는 풍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고 남은 물건들은 사용 빈도, 계절에 맞게 잘 수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납할 때도 빈틈없이 채우기보다는 조금 여유 있는 공간을 만들어 수납해야 좋은 기운이 통한다.
진정한 ‘집’의 의미
집이라는 공간은 딱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보편적일 수 없다는 의미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후, 풍토, 토질, 문화와 역사 등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 자신이 가장 편하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개성을 입혔을 때 비로소 자신의 집이 만들어진다.
또 집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준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오랜 시간을 통해 만들어낸 공간이야말로 ‘집’이고 자신의 공간이 된다.
그러니 집은 순식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인테리어 업체에 맡겨서 다른 사람이 사는 집과 비슷하게 몇 주 만에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통찰력과 창의력을 기대할 수 없다. 천천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갈 때 그곳은 어느새 편안하고 행복한 ‘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게 될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인 ‘하우스(house)’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정감이 있는 자신과 가족의 공간인 ‘홈(home)’을 만들어야 할 때다.
>글 : 박성준 건축가·역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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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으며 집과 건물을 짓는 건축가. 사람과 땅의 기운을 함께 보는 풍수 컨설턴트이면서, 또 한 사람의 생년월일시 기운과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을 읽어내는 젊은 역술가이기도 하다. 풍수와 인테리어를 접목시킨 풍수 인테리어를 제안하고 있으며, 풍수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기업의 사옥과 주거공간의 콘셉트 디자인 및 설계를 하는 등 풍수에 맞는 공간을 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