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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유감(有感) : 환갑에 다시 시작하는 청춘
- “저는 환갑이 지났는데도 귀에 거슬리는 게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네요, 허 참. 나와 생각이 달라도 그렇고, 옷차림도 말투도 여전히 거슬리는 것투성입니다. 공자님은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회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간 철남 씨가 주문한 순댓국이 나오기 전에 툭 내뱉습니다. 공자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산전수전 다 겪고 70세가 넘은 공자(孔子)가 자신의 삶을 회고합니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30세에 스스로 섰고(三十而立), 40세에 미혹되지 않았으며(四十而不惑), 50세에 천명을 알았고(五十而知天命), 60세에는 귀가 순해졌고(六十而耳順), 70세에는 하고 싶은 바를 따르더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나이가 육십갑자(六十甲子) 한 바퀴 돌면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이 될까요? 공자 나이 60세가 되어 천지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하게 된 데서 나온 말이 ‘이순’이라고 합니다.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고, 남이 하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고도 해석되는 ‘이순’. 필자도 앞으로 4년이 지나면 예순이 될 텐데 ‘이순’ 경지에는 감히 이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디쯤 속하는지 떠올리면서 같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열다섯에 왜 공부해야 하는지 도통 몰랐고, 서른에 등 떠밀리듯 결혼했고, 마흔에는 유혹에 빠져 미친 듯이 방황했고, 쉰에 겨우 정신 차릴 즈음 가족이 흩어졌고, 육십엔 여차하면 시비에 휘말리는 꼰대가 되더니, 이제 칠십 바라보며 노망날까 두렵기 짝이 없네요.” 그날 저녁 자리에 함께 있던 순욱 씨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쉽니다. 60·70·80대 1000만 시대 올해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가 950만 명(전체 인구의 18.4%, 통계청 발표)에 이르면서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추세라면 2025년에는 고령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중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됩니다. 환갑을 넘어 칠순, 팔순, 구순에 이르는 인구가 불과 2년 뒤엔 10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귀도 순해져야 하고(60, 耳順), 하고픈 대로 해도 민폐가 되지 않아야 하고(70, 從心), 정말 나이별로 숙제가 태산입니다. 반면 유엔(UN)은 2015년에 이미 체질과 평균수명, 사회적 역할과 역량의 변화를 고려해 인간 생애주기에 따른 새로운 연령 기준을 정의했습니다. 태어나서 17세까지가 ‘미성년’(Underage), 18~65세 장장 50년 가까이 ‘청년’(Youth or Young People), 66~79세가 ‘중년’(Middle Aged)이랍니다. 80세 넘어서야 겨우 ‘노인’(Elderly or Senior) 축에 들고, 100세를 넘겨야 ‘장수 노인’(Long-lived Elderly) 대접을 받습니다. 8년 전에 나온 새로운 연령 기준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웃고 말았습니다. 당시 필자는 40대였기 때문에 5060 세대랑 한 집단으로 묶이는 게 매우 불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세월 무서운 줄 모르는 철부지였으니까요. 2023년 만으로 쉰다섯 살 먹은 필자는 이제야 유엔이 정한 나이 기준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백세시대, 환갑에 다시 시작하는 청춘 유엔 연령 기준대로 생생히 살아내신 분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1920년 4월 23일생으로 현재 103세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입니다. 지팡이 없이 꼿꼿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청중을 만나는 김 교수는 책과 강연, 방송 인터뷰를 통해 “인생에서 제일 좋고 행복한 나이는 60에서 75세까지이고,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65세에 정년 퇴임한 뒤 할 일이 더 많았다는 그.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내기 시작했고, 이후 정부기관, 기업체, 사회단체 등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대학에서 강의할 때보다 훨씬 많이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전 누굴 만나든지 90세 전엔 늙지 마라, 늙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30, 60, 90세까지 세 단계를 살게 됐으니까요.” 30세까지는 내가 나를 키워가는 단계이고, 65세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단계이며, 90세까지는 그동안 받은 것을 나누며 사회를 위해 일하는 단계라고 구분합니다. 김 교수는 60세쯤 되니까 조금 철이 드는 것 같고, 75세쯤까지는 성장을 하는 것 같다며, 76세 즈음에 제일 좋은 책들이 나왔다고 자평합니다. 그는 99세가 되어서야 일간지 두 곳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연간 100회 넘는 강연과 글쓰기로 일상을 보내는 그는 늙지 않는 정신력으로 신체와 균형을 유지하는 중입니다. 95세쯤 되니 정신력이 쇠락한 신체를 업고 가더라며, 50대가 되면 기억력은 떨어지기 시작하지만 창조하는 능력인 사고력은 오히려 그때부터 올라간다며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나이에 주눅 들지 않기 그렇다면 필자처럼 코앞에 닥친 예순, 이순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103세 김형석 교수가 60대에게 준 말씀을 다시 새깁니다. “인생에서 열매를 맺은 기간은 60대였던 것 같다. 그래서 60대엔 제2의 출발을 해야 한다. 독서로 대변되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놀지 말고 일하라. 과거에 못 했던 취미 활동도 시작하라.” 올해 구순인 필자의 시어머니, 87세 친정아버지, 82세 친정어머니 세 분 모두 60대에도 현역이었고, 지금도 일터에서, 밭에서 일손을 놓지 않고 계십니다. 친정어머니 김초자 여사는 최고령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1020 손주 세대와 얘기하는 게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오늘 점심에 전화했더니 어제 노인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부석사로 졸업여행 중이라고 자랑하시네요. 친정아버지 박성옥 선생은 젊어서부터 보던 ‘명심보감’(明心寶鑑)이며 일본어 교과서를 몇 번이고 필사하며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엄살을 부리십니다. 겉절이 담근 이야기를 하다 어떤 낱말이 맴돌기만 하고 퍼뜩 떠올리지 못하는 제게 ‘우거지 아니냐’며 보란 듯이 건재함을 증명해내시는 분이 바로 시어머니 조진실 여사입니다. 귀가 순해지기 위한 방법을 한참 궁리하던 차에 김형석 교수부터 필자의 양쪽 부모님까지 이야기하다 보니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총명’(聰明)이 그것입니다. 귀 밝을 총(聰)과 눈 밝을 명(明)이 합쳐진 총명은 남의 소리를 잘 듣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남의 입장과 처지도 밝게 살피는 지혜를 뜻합니다. 때로는 같이 사는 강아지나 길에서 만난 고양이, 시들어 말라가는 관음죽이 내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것이 총명입니다. 비단 밖의 소리뿐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줄 줄 알아야 총명과 이순이라는 경지를 맞이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물어볼 줄 아는 마음 : 공자의 구슬 공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어떤 사람한테 귀한 구슬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뿐인 구멍에 실을 꿰려는데 구슬 구멍이 아홉 구비나 구부러져 있어 아무리 해도 꿰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공자는 마침 뽕잎을 따고 있는 아낙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낙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꿀을 이용하면 가능할 것이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공자는 시키는 대로 곰곰이 생각하다 그 말뜻을 깨닫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개미 한 마리를 붙잡아 허리에 실을 잡아맨 다음 개미를 구슬 한쪽 구멍으로 밀어 넣고 다른 편 구멍에는 꿀을 발라놓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꿀 냄새를 좇아 반대편 구멍으로 나온 개미 덕분에 실을 꿰는 데 성공했다는 이 고사는 ‘공자천주’(孔子穿珠)라고 합니다. 송(宋)나라의 목암선경(睦菴善卿)이란 선사(禪師)가 편찬한 ‘조정사원’(朝廷事苑)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공자님 일화로 가르쳐줍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신분이 높든 낮든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든 묻고 스승으로 삼으려는 공자의 마음을 우리도 배운다면, 나이 먹는 두려움과 서러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위로해봅니다. 청춘 제대로 즐기는 법 : 여여여 인생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나이에 구애됨 없이 멋지게 청춘을 즐기려면 여백과 여유, 여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백(餘白) - 글씨나 그림이 꽉 들어차면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히고 답답해집니다. 빈자리나 행간이 적당히 있어야 숨통이 트이고,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말만, 그것도 일제강점기부터 피난 시절까지 고생한 얘기 수백 번 한다고 알아주는 자식 드뭅니다. 대화에도 여백을 주어야 쌍방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여유(餘裕) -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차분하게 생각하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실수를 줄여서 시간을 벌 때가 많습니다. 나이 들수록 조급증이 생겨서 젊은이들이 늦다고 재촉하고, 더디다고 성화를 낼 게 아니라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를 부려봅시다. ▶여지(餘地) - 평소에 “난 한번 한다고 하면 여지없이 확실한 사람이야”라고 자부하다가 큰코다친 경험이 있다면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일말의 틈이나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고 상대방을 가차 없이 몰아세우지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지가 있어야 그 사이로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오르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 서로가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남이 하는 말이나 내 마음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귀도 순해지고, 우리 삶이 순풍에 돛 단 듯 멋진 항해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환갑 만세! 청춘 만만세!
- 2023-11-3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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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의 자격, ‘꼰대’와 ‘깐부’의 차이
- 요즘 서로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인간의 품격을 훼손하는 크고 작은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더욱이 ‘어른다움’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아버지가 부재(不在)한 세상, 존경할 어른이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정말 안녕하십니까? ‘꼰대’와 ‘깐부’ 오래전 특정 세대에서만 통했던 은어이자 속어 두 가지가 우리 삶에 어느 날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그 첫 주자가 ‘꼰대’라면 최근 들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유행어가 바로 ‘깐부’입니다. ‘꼰대’라는 말은 아버지나 학교 선생님처럼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어린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습니다. 요즘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일명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속어로 쓰입니다. 꼰대가 주는 어감과 부정적 의미 탓에 너나 할 것 없이 기성세대라면 꼰대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내가 과연 꼰대일까, 밖에 나가면 나를 꼰대로 보지는 않을까 자문하고 젊은이들 눈치를 보기까지 하니까요. 이를 반영하듯 2020년 MBC에서 ‘꼰대인턴’이라는 드라마를 선보였습니다. “나 때는 그러지 않았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타령 덕에 드라마 주제가(OST) ‘꼰대라떼’가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제발 그만 그만 그만해 오늘도 시작되는 꼰대라떼 (중략) 뻔뻔하게 뻔하게 반복되는 하루가 지나간다 왕년에 내가 말하신다면 오늘도 시작이구나 니까짓 게 뭘 알아 궁금하시면 라떼를 한잔 드세요 라떼라떼라떼라떼 라떼는 말이야 라떼라떼라떼라떼 라떼는 말이야 아침부터 시작되는 꼰대라떼 적나라한 노랫말처럼 온갖 진부하고 부정적인 수식어가 어울리는 늙은 사람, 나이만 많이 먹은 선생질만 일삼는 사람이 ‘꼰대’라면, 그 반대편에 ‘깐부’가 있습니다. 꼰대 소리 듣기 싫다면 진정한 내 편, 내 맘을 알아주는 ‘찐친’, 깐부가 되고 싶다면 함께하실까요. 어른이 없고 아버지가 부재하다고 세상 탓을 하기 전에 찬찬히 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 세계 언론에서 극찬과 호평 일색인 ‘오징어 게임’이란 드라마 시리즈에 등장한 ‘오일남’(오영수 분)이란 배역이었습니다. 9개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좋은 평가와 감동을 안긴 편이 바로 ‘깐부’라고 합니다. 극 중 ‘오일남’이 ‘깐부’가 뭔지 알려줍니다. 지는 즉시 게임에서 탈락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내줄 구슬치기에서 짝꿍이 된 두 사람-오일남과 성기훈(이정재 분). “우리 깐부부터 맺어야지. 구슬이랑 딱지랑 같이 쓰는 친구.” 어린 시절 놀이 자산의 전부였던 형형색색 구슬과 크기도 두께도 모양도 달랐던 딱지를 함께 쓰고 관리하던 제일 친한 친구를 일컫는 남자아이들의 은어가 ‘깐부’입니다. “기억 안 나? 우리 손가락 걸고 깐부 맺은 거. 깐부끼리는 네 거, 내 거가 없는 거야.” 그가 맡은 역할보다는 대사가 주는 울림이 국경을 넘어 세계적 신드롬이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라는 갈림길에서 결정적 순간 ‘내 편’이 되어주는 어릴 적 놀이 속 ‘깐부’라는 말이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호스트인 ‘오일남’이라는 극 중 인물보다 오히려 저는 그를 연기한 ‘오영수’라는 배우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들려주고 보여준 그의 이야기가 우리가 바라 마지않던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하던 평행봉으로 체력을 유지하며 200편 넘는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 오영수. 60년 가까이 평행봉이야말로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그는 이사할 동네에 평행봉이 있는지가 우선순위라고 말합니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에게도 사악함이 있고, 단지 그 차이가 얼마냐일 뿐이지. 드라마 속 인물과 저는 비슷합니다.” 수백 편 극 속에서 수백 가지 인물을 연기해온 그에게 인간처럼 복잡다양하고 다중다층적인 역할이 있을까 싶습니다. 선함과 악함, 추함과 아름다움을 버무린 인간 군상을 무대에 올리다 보니 인간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남다른 데서 나온 말로 여겨집니다.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가족끼리 같이 앉아 식사하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이야기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자기 이야기해가면서 그렇게 사는 가정이 가장 행복한 게 아닐까 해요, 얼마 안 되는 식구지만 같이”라고 답하는 그에게서 한 끼 밥을 같이 나누는 일상의 소중함을 엿보게 됩니다. 때문에 그가 가진 염려라면 그저 가족과 문제 없이 잘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말에서도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오로지 1등만 기억하는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2등은 패자가 아니라 3등한테 이긴 승자가 아니냐고 되물으며 우리는 모두가 승자라고 얘기하는 오영수. 진정한 승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과 세상에 위로를 건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이에게 제 인생 드라마 순위를 바꾼 JTBC의 ‘인간실격’. 여기서 주인공 아버지 이창숙(박인환 분)이란 인물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또 하나의 어른입니다. 알츠하이머 초기로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하나뿐인 딸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폐지를 주우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아버지. 세상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남기지 않고 딱 선물 같은 때론 기적 같은 사람. 아버지 없는 세상에선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그렇지만 어리지 않은 마흔이 다 된 딸 부정(전도연 분)은 죽기로 결심하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보다 더 가난하게 살 것 같아요. 길에서 고생하며 키워준 아버지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하려 했는데,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못 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 됐어요.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요, 아버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좌절과 상처, 배신을 겪으며 울부짖던 주인공 부정은 자살 카페에서도, 아버지가 살던 오피스텔 옥상에서도 결국 죽지 못합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마음을 읽어주는, 조심스레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 닫히고 다친 마음을 꺼내 보이고 온기를 채우면서 아버지한테 다시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를 안고, 아버지 마음을 품으면서 비로소 살기로 결심합니다. 살아내기로 마음먹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나는 이제야 아버지가 제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지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이미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왔었다는 걸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어요.” 아버지 마음속에 법도, 문학도, 철학도 다 들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아버지한테 차곡차곡 쌓여 있던 삶의 지혜와 내공은 시집이 됩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집입니다. 수많은 생각 가운데 아끼며 꺼내는 아버지 말이, 고르고 고른 몇 개 말이 시가 되어 나온다는 걸 깨달은 딸은 편안히 작별인사를 나누고 아버지를 보내드립니다. 왜 마음 미장공인가? 어른의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이자 아니 사실 처음부터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제 아버지입니다. 박성옥 선생이 제 아버지입니다. 젊었을 땐 경북 왜관 등지를 누비며 숱한 병자를 치료해주셨지요. 면허가 없는 탓에 어머니 김초자 여사를 만나 저를 낳은 뒤론 의업을 접고 미장일을 배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의사 가운에 반해서 결혼하셨는데 새하얀 가운 대신 흙떡이 되곤 하는 작업복만 연신 빨아대셨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어린 저는 아버지 일하시는 데 따라다니거나 종종 새참을 갖다드렸습니다. 거친 사면 벽을 아버지 흙손으로 매끄럽게 만드는 마술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울 아버지 정말 멋지다!” 봄에서 가을까지 공사가 한창이던 때라 분주하시던 아버지는 겨울이면 온돌방 틈새로 이산화탄소 샐까 봐 연탄보일러 수리하며 또 생계를 꾸려가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과학자요 만능 ‘맥가이버’셨지요. 그런 아버지 마음 따라가려 저도 배운 재주 모아서 마음치유, 분노조절, 감정관리 강의하면서 낯선 분들 마음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미장일을 부끄러워하셨지만 저는 그때도 지금도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보고 있어도 그립고 애달픈 못난 딸내미입니다. 아버지한테 배운 붓글씨로 글씨깨나 쓰는 재주를 가진 저는 용돈봉투 드릴 때 짧은 손 편지를 쓰곤 했는데 아버지 역시 제 아이들, 당신 손주에게 용돈봉투마다 손 편지를 써주십니다. “위대한 사람보다 참된 사람이 되어라. 잘 커줘서 기쁘다. 할아버지가.” “우리 ○○이도 안아보니 품 밖에 나는 구나. 부모 말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이제는 그 두 아들이 성인이 되어 취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나는 젊을 때 체면 따지다가 좋은 기회도 놓치고 잘 살지 못했던 것 같다. 너희 애들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밥 벌어먹고 일했으면 좋겠다.” 취업 앞둔 아니 취업이 절벽인 손주들한테는 차마 말 못 하시고 저희 부부한테 넋두리처럼 해주신 울 아버지 말씀이 귓전에 자꾸 울립니다. 아, 울 아버지! 최근에는 ‘젊은 꼰대’, ‘역꼰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꼰대는 이제 더 이상 나이를 기준으로 불리는 호칭이 아니라 삶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에서 대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다운 어른, 닮고 싶은 사람, 함께 얘기하고 싶은 사람, 나아가서는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 그런 어른이 우리 서로에게 되어주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 없다고 투덜대고 원망만 할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고, 귀 기울여주는 새 맘, 새 삶, 새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크든 작든 혜택을 무척 많이 받아왔습니다. 하늘, 햇볕, 바람, 비 같은 천지가 베푼 은혜뿐 아니라 부모님과 선생님, 세상 사람들한테 신세를 지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인데, 이제는 돌려주고 좋은 것은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우 오영수가 방송에서 했던 얘기처럼 말입니다. “산속에 꽃이 피어 있으면, 젊었을 적엔 그 꽃을 꺾어왔다면 이 나이쯤 되면 그냥 그대로 놓고 오죠. 그리고 다시 가서 보죠. 뭐 그게 인생이죠. 그냥 있는 그 자체로 놔두는 것. 그게 쉽지가 않죠.”
- 2022-01-0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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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그녀의 이름은 김순자입니다
- 영화표를 받아든 김 씨는 빠른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표를 사려는 오십대 여자 셋이 보였다. 카드를 꺼내고 지갑을 뒤적이며 네가 사네, 내가 내네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웬 젊은이들이’ 김 씨는 여자들을 보자 이 공간의 냄새가 달라지고 자신의 연령대가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고 혹여 영감들 가슴에 바람이 들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요건 몰랐지 하는 기분으로 중년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당 삼천 원이고, 쿠폰에 도장을 다 받으면 나중에 공짜로 한 편 더 볼 수 있다우.” 김 씨는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쿠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호호, 이제 뭐…… 오 년 전이면 모를까.” 김 씨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모르며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르신’이란 호칭 대신에 ‘할머니’라고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왜 호칭에 민감한지. ‘할머니, 할아버지’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인데 사람의 심리가 요상하여 ‘나이가 들어’ 라는 앞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는 ‘늙은 사람’이란 뒤의 말에 민감해진다. 앞에 붙여진 ‘나이가 들어’라는 다섯 글자에는 사람들 제각각의 얼마나 많은 의미와 사연이 담겨 있던가? 김 씨는 아등바등하지 않고 탐욕스럽거나 심술궂지 않게 나이 들기를 원하면서도 할머니란 호칭이 꺼려지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뜨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요의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간 김에 거울 한 번 들여다보고 하나뿐인 꽃분홍 립스틱으로 입술도 덧칠하고 나왔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좀 전에 만난 여자들이 상영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공책만 한 인쇄물은 멀리서 보기엔 힘들었다.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된 영화관이다 보니 상영작 포스터도 없고 상영관은 하나뿐이고 테이블이 세 개 놓인 대기실 한쪽엔 천 원짜리 믹스 커피를 파는 간이매점이 고작이었다. 그 중 한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용지에 코가 닿도록 얼굴을 내밀었고 김 씨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노안 수술을 한 김 씨 눈엔 웬만한 글씨는 잘 보이고 고가의 보청기 덕분에 청력도 좋지만, 좋아서 오히려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것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고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는 것이라지만,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는 이유로 젊은이들로부터 괄시받고 싶진 않았다. 오메가 쓰리와 은행잎 제제를 매일 챙겨 먹고 영어 공부도 30분씩 했다. 휴대폰을 켜면 바로 영어 단어 앱이 떴고, 건강 보조 식품 챙겨 먹는 시간도 휴대폰의 알람이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한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땐 신인류의 일원이 된 것처럼 기뻤다. 설레는 김 씨를 위해 처음에는 휴대폰 사용법을 부드러운 말씨로 설명해 주던 아들이 반복적으로 물었더니 나중엔 짜증을 냈다. 아들의 구박을 감수한 덕분에 이젠 인터넷을 통한 물건 구입과 영화 예매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 한때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동영상이며 좋은 글귀를 친구들한테 퍼 나르기도 했으나 글대로 실천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강요하듯 보내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그만두었다. 망측한 사진을 받고 놀라서 휴대폰을 던져버린 적은 있지만, 적어도 김 씨가 자식한테 잘못 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노인들 사이에 떠다니는 가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고 흥분하기도 했다. 태극기 부대에 참석한 경험도 있는데 정치적 신념이 확실해서라기보다는 군중 심리와 함께 이 나이에도 정치에 관심이 있는 깨인 노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상영할 건 이거예요.” 김 씨가 손가락으로 용지를 짚으며 말하기가 무섭게 일행 중 한 명이 톡 튀어들었다. “아닌데…… 요거네요.” 김 씨 얼굴이 붉어졌다. “나 좀 봐, 참.” 계면쩍은 김 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람들이 들고나느라 문 주변이 번잡했다. 상영관 입구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김 씨는 오지랖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간 김 씨는 실내 전체를 훑어보다가 특정 위치에 잠시 시선을 던지곤 미소를 지었다. 등받이를 손으로 잡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G7 자리를 향해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뉴스에서 G7이란 단어를 가끔 들어서 익숙한 탓도 있고 근사해 보이기도 해서 그 자리를 고집하는 김 씨를 위해 카운터에서는 표를 따로 빼서 보관해두곤 했다. 전에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른 영감이 있었다. 김 씨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들도 내가 넘어지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민망해하겠지.’ G7 바로 앞자리엔 박 씨가 앉아 있었다. 김 씨는 박 씨를 실버 영화 카페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소위 M.C커플이다. 산행을 같이 다니는 연인들도 M.C커플이라고 부르고 콜라텍에서 만난 인연들은 C.C커플로, 복지관에서 만난 연인들은 B.C커플로 불린다. 박 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영화 얘기만 나오면 술술 말을 잘 이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웬만한 영화 제목과 주인공 이름들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김 씨는 영화 얘기를 들을수록 박 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젊어서부터 영화는 혼자 본다는 말 때문에 그가 더욱 근사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김 씨는 알은 체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부러 큰 소리로 음, 음 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박 씨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김 씨는 답례를 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박 씨가 야속했다. ‘어서 오시게, 라고 한마디 하면 입술이 부르트나.’ 김 씨는 입을 샐쭉거렸다. 아직 영화 상영 전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김 씨가 고개를 돌렸다. 통로 건너편에서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 있는 여자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노인은 굳이 빈자리도 많은데 여기에 앉아야겠냐며 버텼다. ‘저러니까 젊은이들이 질색하지.’ 김 씨는 중얼댔고 주변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뒷자리로 갔고, 카운터에 말해서 쫓아내세요, 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소란을 잠재우듯 실내가 어두워지자마자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제목과 함께 1936년 작품이란 숫자가 떴다. “어머, 이상하다. 2008년에 만든 줄 알았는데.” “게다가 흑백이야. 웬 구닥다리?” “86년 전 영화네. 우리 아버지가 저 때 태어나셨거든.” “말도 안 돼. 같은 제목의 영화가 또 있었나? 그냥 갈까? 냄새도 퀴퀴하고……” 김 씨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자 여자들의 수다가 잦아들었다. 좀 전에 보았던 일행들이 막 들어와 앉은 참이다. 오래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했을 김 씨였다. ‘니들도 실수할 때가 있지.’ 김 씨는 미소를 지었다. 화면이 바뀌었고, 여자들은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래. 그냥 보자.” “그래, 감독도 유명한 사람이네.” “쉬, 쉬.” 영화의 첫 장면은 미국의 어느 대저택의 거실이었다. 보석으로 치장한 젊어 보이는 여자가 등장했다. 김 씨 눈에는 여주인공의 나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얼굴 구분도 힘들지만, 나이 추측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나이는 김 씨가 추측한 숫자에 10 정도를 더해야 했다. 여주인공은 파티장도 아닌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김 씨 평생에 입어본 적은 고사하고 사진에서만 보았던 옷이다. 부러우면서도 이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뒤이어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이어졌다. 남자는 거실로 들어와서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종일 남편을 기다리느라 수고했다고. 김 씨는 정해진 팔자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씨 남편은 며칠씩 집을 비우다 돌아와도 첫마디가 개밥 줬어? 였다. 김 씨는 아내가 아니라 밥솥이었고 세탁기였고 청소기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 김 씨는 긴장이 되었다. 자막이 서 너 줄일 땐 마지막 문장의 꼬리를 놓치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읽는 중에 화면이 넘어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왜 그리 이름이 길고 호칭 방법도 가지가지인지. 여주인공은 남자의 뺨에 입술을 비벼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김 씨의 눈에 남자는 아버지뻘로 보였지만 여자의 행동이나 자막으로 미루어보아서는 남편 같았다. ‘아니, 저런 도둑놈이 있나, 곱빼기 띠동갑도 넘겠네.’ 예나 지금이나 지팡이 토막을 가운데 달고 다니는 인간들이 젊은이를 밝히는 건 변함없지만, 김 씨가 보기에도 못생기고 잘생긴 걸 떠나서 싱싱하다는 점만으로도 모두 예뻐 보였다. 심지어 다섯 살 아래인 여자도 김 씨 눈엔 젊어 보였다. 흥분했던 김 씨는 이내 인정 모드로 태도를 바꾸었다. 변덕을 부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면서 김 씨는 혀를 찼다. ‘젊고 얼굴 반반하면 저렇다니까.’ 김 씨는 며느리를 떠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인데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 해도 콕 박힌 미운털이 빠지지 않는 애였다. 좀 산다는 집에서 자란 며느리는 액세서리 수집이 취미였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시댁에 올 때마다 몸에 치장하고 있는 액세서리가 바뀌었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볼 정도로 색상이며 디자인이 확확 달라졌다. 며느리를 떠보느라 나도 네가 한 것 좀 차 보자, 고 했더니 어머, 사람들이 웃어요, 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며느리가 미워 보이는 이유가 말을 얄밉게 하는 탓도 있지만 자신의 삐딱한 시선도 섞여 있다는 걸 김 씨는 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자기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사는 행위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주인공과 비교해 보니 며느리가 그다지 변덕 부리는 애도 아니고, 딱히 지 남편이건 시댁에 못 하는 편도 아니었다. 김 씨는 며느리의 미운털이 다름 아닌 질투라는 생각에 새삼 부끄러웠다. 그것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며느리는 여자의 촉으로 벌써 눈치 챘을 게다. ‘앞으로 며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크린의 영상이 유럽을 항해하는 크루즈 내부로 바뀌었다. 은퇴한 남편이 아내와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한국 여자들은 보리죽 한 숟갈도 자식 입에 넣어주느라 배곯고 쪼그라져 있을 때 서양 여자들은 양장을 빼입고 삐딱 구두 신고 파티에 가거나 세계 일주를 했다니.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날에도 김 씨는 고작 빌려 입은 단색의 한복에 면사포만 쓰고 혼례를 치렀다. 김 씨는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서양 여자들에 비해 고루하게 살았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면서 장기 여행을 하는 사이에 여주인공은 서 너 명의 남자들과 사랑 행각에 빠졌다. 여자는 쉽게 남자를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길 반복했다. ‘지 멋대로군, 착한 남편이 딱하네, 결혼 전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지.’ 흥분지수가 높아진 김 씨는 자세를 바꾸다가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하긴, 선봐서 한 달 만에 식을 올린 나는 어떻고.’ 그러고 보니 그런 도박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어이없는 일들이 다반사였는데 죄다 그러려니로 통했다. 어쩜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몇 십 년 후엔 또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김 씨가 젊어서 여주인공처럼 했다면 돌팔매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김 씨가 영화에 집중할 만하면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뒷좌석의 한 여자가 또 말을 꺼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가자.” “나갈까?” “그래, 질 떨어진다.” “아냐, 노벨상 받은 작품이라잖아, 뭔가 있을 거야.” 한 여자가 일행을 달랬다. 김 씨 뒤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카톡 소리, 사부작사부작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 따위가 영화 중반이 넘어가도록 줄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벨 소리도 울렸다. 늴리리아 늴리리…… 맨 앞줄에 있던,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쥔 휴대폰을 끊거나 벨소리를 줄일 생각은 안 하고 느그적 느그적 걸어 나갔다. 남자를 따라서 사람들 고개도 돌아갔다. “걷지 말고 좀 뛰요.” 영화 시작 전에 큰 소리로 면박을 주었던 동일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속이 후련해진 김 씨는 중얼거렸다. ‘어여 가야 해, 어여.’ 김 씨는 다시 영화에 몰두하면서 좀 전과는 다른 생각도 했다. ‘하기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뭘 따져, 몸뚱이 아꼈다 뭐 하게, 못 노는 것들이 바보지.’ 여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어느새 주인공 편이 되어있었다. 뭐랄까, 김 씨는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양가적 감정이 늘어났다. 어떤 상황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 애매할 때가 있다. 편 가르는 행위가 불편해지면서 교집합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기억력은 물론 얼굴도, 몸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서운한 감정과 소외감도 자주 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긋해졌다고 할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하겠지만, 신체 중에서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부위가 신성한 부분이자 최고의 성감대인 인간 자체가 모순덩어리 아닌가.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외도한 상대는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상대를 이혼녀이고 연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둘을 강제로 갈라놓는 장면이었다. ‘딱, 나구먼.’ 김 씨는 아들이 자신보다 연상인 여자를 데려왔던 적을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것도 없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져도 연애 상대는 어릴수록 좋다는 영감들이 김 씨 눈에는 철없어 보였다. 박 씨 속을 떠보기 위해 왜 두 살 연상인 자신을 만나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거기서 거기라고, 나이만 적다고 젊은 거고, 나이가 많다고 늙은 거냐고 반문하던 박 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이들이 상대를 고를 때 이혼, 사별, 동거, 비혼 따위를 따지는 일이 별 의미가 없어보였고, 잘 생긴 사람보다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이는 박 씨가 끌린 이유이기도 한데 김 씨 눈엔 박 씨의 딱딱한 말투마저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역사물을 주로 보던 김 씨에게 로맨스 영화는 피로를 씻어주는 꿀물 같았다. 일부러 로맨스물을 외면해오던 김 씨의 마음을 열게 한 계기는 박 씨다.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 내용을 들려줄 때 소도둑처럼 생긴 박 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아는 듯 보였다. 김 씨는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새로 만난 애인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탄 보트가 애인이 사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다가올 장면을 앞질러 상상하면서 잘했다, 잘했어, 란 말을 연발했다. 한 사람과 애정도 없이 의무적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남편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명령하고 김 씨는 복종하고 따르는 식이었다. 김 씨는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재떨이를 남편의 턱밑에 갖다 대고, 남편이 밥을 먹는 내내 생선 가시만 발라야 했다. 남편은 다리에 깁스를 한 김 씨에게 2충에 올라가서 부채를 가져오라고 호통 친 적도 있었다. 혼자면 외롭기나 하지, 둘이면 외로우면서도 괴롭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채워가고 싶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서 안겼다. 남편과 사는 동안 포옹은 언감생심이었다. 지 기분 내키면 아무 때나 김 씨를 자빠뜨렸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손끝조차 스치지 않고도 20년을 더 살아냈다. 김 씨는 남편이 매일 만지는 문고리나 수저만도 못했다. 김 씨는 남자의 품이 얼마나 따뜻할지에 대해 상상했다. 어릴 적 포근한 엄마의 품이나 듬직한 아들의 품과는 다른 느낌일 게다. 박 씨의 품에 안겨 지난날을 위로받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기 위해 이성을 만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같이 사그라들기 위해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반찬이 김치 하나일망정 마주 앉아 식사하고, 약 먹을 때 물이라도 떠다 주고, 피곤한 발을 얹고 잠들 수 있는 사이를 원했다. 노년의 로맨스를 망측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죽어야만 성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박 씨가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상상을 했다. 저…… 순자 씨, 김 씨는 맘 가는 대로 달려가는 자신의 생각이 주책이라고 느꼈다. 거의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는 박 씨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가 고개를 홱 돌릴 것만 같았다. 머리숱이 인제의 자작나무숲처럼 듬성하지만 박 씨의 뒤태는 늘 정갈했다. ‘저 영감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나.’ 김 씨는 그뿐 아니라 영화관 내의 모든 노인들 감상평이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뒷좌석의 여자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내용이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김 씨는 영화를 보면서 주변 사람을 떠올리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연애 감정의 불씨를 키우는 계기도 되었건만 중년 여자들은 빤하다고 했다. 김 씨의 귀에는 이 영화를 끝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들 수준이 빤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게,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얼른 가자.” “예의 지키다가는 어느 세월에 나갈지 몰라.” 중년 여성 셋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김 씨가 영화의 여운을 즐길 겨를도 없이 불이 켜졌고 사람들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면은 일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거의 가려졌다. ‘모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와서 서둘러 가는 게지.’ 김 씨는 중얼거리며 박 씨가 일어날 때까지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다. 박 씨가 일어나더니 김 씨를 보며 말했다. “안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러죠.” 김 씨는 순순히 박 씨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나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둘은 데면데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김 씨는 박 씨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요?” 박 씨가 타박하듯 답했다. “뭘, 어색하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정류장이 있었지만 김 씨는 길이 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멀게 느껴졌다. 박 씨를 만날 때만 신는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김 씨가 가지고 있는 두 켤레의 구두 중 동절기용이었다. 평소엔 운동화를 주로 신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박 씨는 김 씨를 재촉하지 않고 보조를 맞춰 걸었다. 김 씨가 영화 본 소감을 물었더니 박 씨는 그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겠다고,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답했다. 주인공에 관한 얘기 끝에 ‘나이 듦’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김 씨가 박 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두려워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않겠소. 늙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추하게 늙는 걸 경계해야지.” 김 씨는 늘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박 씨가 야속하면서도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럼 아름답게 늙는 게 뭔데요?” “내가 정답도 아니고 뭘 묻소?” “그래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뭐 별거 있소? 그냥 다 덜어내는 거지. 감정도 덜어내고 그런 거 아니겠소?” “덜어낸다는 말은 줄인다는 말과 어감이 다르네요. 뭔가 내가 덜 쓴 만큼 남이 쓸 기회를 주는 느낌이 드네요. 여하튼 자신이 가진 것이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자는 거지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는 얘기죠, 태봉씨?” 김 씨가 슬쩍 박 씨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도 덜어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 있지.” 김 씨가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거요?” 박 씨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내와 아들이 죽기 전에 사랑한단 표현을 많이 해주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걸까.’ 겉으로는 담담해보이지만, 평온한 얼굴 아래 숨겨져 있을 부단한 노고에 대해 김 씨는 생각했다. 젊어서 한 성질 했다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버스는 금방 왔다. 박 씨가 손을 내밀어 김 씨 먼저 타라는 신호를 했다. 차에 오르는 김 씨는 뒤따라오는 박 씨에게 힘들어하는 동작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부지런히 발을 놀려서 계단을 다 올라왔으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에구, 소리로 허사가 되어버렸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나 질투의 감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여전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내부의 앞쪽 노약자 좌석은 젊은이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지만 김 씨는 못 들은 척하고 뒤로 갔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고 속력이 나면서 덜컹대기 시작했다. 운전까지 과격한 탓에 엉덩이가 공중으로 떴다가 내려앉았다. 김 씨는 워메, 하면서 박 씨의 손을 잡았다. 꼬리뼈에 충격이 느껴졌다. 박 씨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거 운전 좀 살살 하소.” 덕분에 둘은 착 달라붙게 되었고 김 씨가 손을 놓으려 하자 박 씨가 더 세게 쥐었다. 박 씨의 손이 야들야들하고 따뜻했다. 빼려던 손을 박 씨의 손에 맡긴 채 김 씨는 얼굴을 창으로 돌렸다. 박 씨가 물었다. “뭐 볼 거 있소?” “나뭇잎들이 제법 물들었네요.” 김 씨는 생각했다. 나뭇잎 색이 변하는 걸 앞으로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를. “같이 좀 봅시다.” 박 씨가 고개를 돌리면서 김 씨의 머리카락에 뺨이 닿도록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김 씨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박 씨의 행동에 의도가 있기를 바랐다. 네댓 정류장을 지나서 내릴 때가 된 두 사람은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박 씨가 왼쪽 기계에, 김 씨는 오른쪽 기계에 카드를 태그 한 후 출입구를 막은 채 서 있었다. 여학생이 박 씨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 사이로 손목을 내밀어 태그를 시도했다. 연이어서 실패한 학생을 보고 김 씨는 카드를 가운데로 대요, 라고 말했지만 학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또 손목을 갖다 댔다. 기계음이 들렸고 그제야 김 씨는 학생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물건이 요즘 광고에 나오는 뭐시기란 걸 알았다. ‘또 오지랖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김 씨는 자신이 하루살이만도 못한 3초의 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영화관으로 오던 버스 안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 씨의 앞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시선이 갔다. 큼직한 흰색 라벨이 옷의 바깥쪽에 붙어있었다. 김 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옷을 뒤집어 입었네요, 라고 속삭이듯 말했고 청년은 아, 이거요, 요즘 유행이에요, 라며 목 뒤의 라벨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 앞을 지나쳐서 쏜살같이 내리는 여학생의 귀에 무선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두 사람도 손잡이를 잡고 발 앞을 살피면서 내렸다. 여학생이 내리는 속도의 다섯 배는 족히 걸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왠지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니들도 답답하지. 당사자는 오죽하겠냐.’ 김 씨는 버스 기사가 야속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한 줄기의 센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몇 점 떨어졌다. 김 씨가 옷깃을 여미자 박 씨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목에 걸어주려고 박 씨가 손을 뻗자 김 씨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맛에 데이트하는 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김 씨는 머플러를 목에 늘어뜨린 채 눈을 내리떴다. “갑시다, 순자씨.” 박 씨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김 씨는 뒤따라가며 웃음이 나왔고, 목덜미가 자꾸 간지러웠다. 박 씨가 몇 미터도 안 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코너의 편의점을 끼고 꺾어 들어서자마자 생선구이집이 보였다. 김 씨는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박 씨에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구부터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홀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김 씨는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행복감에 폭 빠졌다. 빈자리는 입구 근처밖에 없었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안쪽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물도 따라주었다. 수저도 놓아주려고 하자 김 씨가 손을 저으며 막았다. “아, 제가 하지요.” “선심을 쓰면 좀 받으세요.” 박 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황송해서 그렇죠.” 대접받는 게 어색한 김 씨가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자는 주고 싶고 여자는 받고 싶은 게 연애의 재미 아닙니까?” “그래도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래요.”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메뉴라고 해봐야 갈치구이와 갈치조림 두 가지였다. 정갈한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김 씨는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다 박 씨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봉씨, 여긴 자주 오셨던 곳인가요?” “오긴 누가 와요.” 박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받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박 씨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막상 잘 안 되네요.”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기름이 차르르 흐르는 갈치구이가 나왔다. 박 씨는 왼손으로 갈치 토막을 잡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으로 잔가시가 있는 양쪽 끝을 바깥으로 당겼다. 가운데 뼈 위에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살을 들어 올렸다. 살덩어리가 부서지지 않고 네모로 분리되었다. 김 씨는 능숙한 손놀림을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박 씨가 발라 준 생선살을 수없이 먹었을 과거의 여인에 대해 생각했다.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손만 쳐다보고 있자 박 씨가 한마디 했다. “가시 바르는 거 처음 봅니까? 밥 좀 떠보세요, 순자 씨.” 김 씨는 얼떨결에 수저로 밥을 떴다. 박 씨가 뽀얀 쌀밥 위에 생선살을 얹었다. 김 씨가 당황하여 수저를 빼려다가 주춤했다. “또 그러시네.” “남의 밥에 반찬을 얹어주기만 하고 받아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럽니다.” 말하는 도중에 삼십여 년 전 한정식 식당에서 며느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불쑥 떠오를 게 뭐람, 시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음식에 젓가락을 댈 엄두도 못 내는 며느리를 위해 아들이 갈비 한 점을 옮겨 주던 모습이 박 씨의 행동을 보자 떠올랐다. 그때의 섭섭함이 지금에서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박 씨가 김 씨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감동 먹은 거요?” “네. 제대로 먹었지요.” “밥도 많이 먹어요, 순자 씨.” 김 씨는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박 씨의 자상함과 배려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또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으로부터 흔들림이 적어 보였다. 팔십 가까이 살아온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남편은 김 씨를 백 번도 더 울렸다. 김 씨는 밥을 먹는 중간에 국이나 물을 자주 마셨고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당황했다. 그리 맵지도 않은 도라지 초무침을 먹으면서 기침도 더러 했다. 박 씨가 김 씨에게 티슈를 내밀기도 하고 직원에게 따뜻한 물도 달라고 했다. 김 씨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따뜻한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태껏 먹어본 밥 중에 제일 달았다. 박 씨는 김 씨를 보며 흐뭇해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네 번째인 김 씨의 눈에 박 씨의 모든 점이 좋아 보였다. 김 씨는 나중에 콩깍지가 벗어지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이 들어서 이성을 만날 때는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어도 한 가지 맘에 드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박 씨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왔다. 김 씨는 박 씨가 자신의 어깨에 오도카니 앉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웃음이 났다. 옷도 벗지 않고 며느리에게 전화부터 했다. “너 좋아하는 약식하고 식혜 해 놓을 테니 내일 와서 가져가거라.” “꺄악.” 김 씨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괴성 때문에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김 씨는 자신이 얼마나 박한 시어머니인가를 생각하다가 바빠서 글피에 갈게요, 라고 이어진 며느리의 말 때문에 좋다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전화를 끊고 개운치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어머니 행세, 연장자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박 씨에게 되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 며느리도 나름의 스케줄이 있는 건데. 박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엔 상념에 잠기게 된다. 김 씨는 아무리 잘 살았어도 마무리가 부실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느낌이 들고 잘 못살아왔어도 끝이 좋으면 지나온 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리라. 인생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간절함의 가운데 박 씨가 있었다. 왜냐하면 김 씨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박 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긴 있었다. 내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간호사들이 불러 주는 이름은 달갑지 않았다. * 영화 제목은 ‘공작부인’이며, 원제는 남자 주인공 이름인 ‘Dorthworth’다. •수상소감 - 우수상 단편소설 박상희 “저의 허당끼가 소설을 쓰는 모티프가 되기도”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가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절에 대한 호기심과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자세를 고민하면서 써 놓았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이번 공모전의 주제와 어울리는 한 편을 골라서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저의 허당끼로 인해 소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꼼꼼하지 못해서 영화감독이나 제작년도를 확인하지 않고 영화관에 간 실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공작부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만 1936년에 제작된, 같은 타이틀의 다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수상까지 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의 허당끼는 소설을 쓰는데 모티프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저명한 작가들은 글 쓰는 작업을 습관처럼 매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따라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던 터에 선배가 제안을 해왔습니다. 하루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읽든가, 필사를 하든가, 소설 한 장 분량을 쓰든가, 써 놓은 소설을 수정하든가, 매일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내기로. 지키지 못할 경우는 밥을 사기로 했습니다. 올해 초부터 선배는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을 지켜왔는데 저는 밥 사러 몇 번을 선배 동네로 가야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사의 밑그림이나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쓰는데 만 급급했습니다. 부모님 댁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가면서도 노트북을 들고 갔습니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설의 중간 토막부터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구성을 해놓고 소설을 써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소설의 줄거리, 캐릭터, 작가의도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소설은 시작도 못 한 상태에서 두세 달이 그냥 가버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첫 문장을 쓰다가, 중간 중간에 몇 줄씩 쓰기도 하고 결론의 한 문장부터 쓰기도 하는 등 규칙 없이 쓰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은 듯해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설을 놓아버릴까 말까 고민을 반복할 때도 선배는 꾸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는 하루라도 소설과 관계된 읽기나 쓰기나 수정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배와의 다짐이 이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합니다. 목표를 거창하게 잡으면 얼마 가기도 전에 지쳐버리지만,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하니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가기는 합니다. 다이어트 할 때 일주일에 1킬로그램 또는 한 달에 4킬로그램 감량을 목표로 하지 않고, 매일 200그램씩 빼겠다는 덜 부담스러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같은 저만의 방식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글이 안 써지면 딴 짓을 합니다. 제 취향이 아닌 영화도 보고, 딸을 앞세워 젊은이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과 조카들까지 모아 놓고 마음 알아채기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막힌 골목이나 민예품이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펜션 주인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기절할 각오하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도 해봤습니다. TV를 보거나 버스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폰에 단어 나열식으로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기록 당시에는 이해되었던 내용들을 한참 후에 찾아보면 어떤 의도로 저장해 두었는지 암호 해독 수준이 되기도 하고, 메모해 둔 제 글씨체를 읽을 수 없는 어이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는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태껏 보편타당하다고 여겼던 점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글이 쓸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으로 인해 격려가 되었습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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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치’ 한 번으로 받아보는 맞춤형 화장품
- 주기마다 일정 금액을 지불하며 제품이나 서비스, 콘텐츠 등을 이용하는 ‘구독경제’의 몸집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제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뿐 아니라 의식주부터 취미와 여가 등 삶의 전반에 다양한 방식으로 침투하고 있다. 심심할 때 TV 대신 넷플릭스를 보고, 유튜브 구독자 수로 인기를 가늠하는 구독 전성시대, 시니어가 알아두면 좋을 이색 서비스를 소개한다. 나이가 들면 주름, 기미, 탄력 등 깊어지는 피부 고민에 사용하는 화장품 개수가 점점 늘어난다. 스킨, 에센스, 로션, 아이크림, 수분크림, 영양크림 등 일일이 세기도 숨차다. 하지만 각종 기능을 보완하는 화장품을 써봐도 피부는 나아질 기미 없이 또 다른 골칫거리를 만들어낸다. 시니어라면 공감할 이야기다. 화장품 구독 서비스 톤28의 정마리아 대표는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이 ‘비싸고 좋은 화장품’이 아닌 ‘맞춤형 화장품’이라고 말한다. 화장품 구독 서비스 ‘톤28’ “처음에는 불가능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어요. 하지만 화장품이야말로 ‘1인 1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2017년 선보인 톤28은 개인의 피부 상태와 절기의 특성을 반영해 28일 주기로 맞춤형 화장품을 정기 배송한다. 구독을 신청하면 전문 뷰티 컨설턴트가 신청자 거주 지역을 방문해 기계로 피부 상태를 측정하고, 이를 토대로 개인에게 필요한 성분만 담아 매월 하나뿐인 화장품을 만든다. 단순히 연령이나 피부 타입 등 타깃에 맞는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전담 피부관리사처럼 개인별로 관리를 해주는 식이다. 정 대표는 “개개인의 피부 측정값과 기후 정보 등 수년간 모아온 데이터로 제조 과정을 단순화할 수 있었다”며 “개발팀이 전체 인력의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데이터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톤28은 계절과 기후 등 외부 환경에 따라 변하는 피부 상태에 주목해 화장품의 내용물을 설계한다. 이를테면 자외선 지수가 높아지는 6월은 높아진 피부 온도를 낮추고 자외선 반응에 대한 진정 기능을 더한다. 정 대표는 “겨울에 쓰던 크림을 여름에 바르면 무겁게 느껴져 버리게 되지 않냐”며 “‘피부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피부는 유전적 요인이 30%에 불과하고 70%는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피부 상태를 수시로 진단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성분을 채워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구독자가 받아보는 화장품의 성분 함량이 매월 미세하게 달라지는 이유다. 피부 부위별로 화장품을 제조하는 것도 톤28만의 차별 전략이다. 가령 이마와 코(T존)가 기름지고 하관(U존)이 건조한 구독자는 두 부위에 바르는 화장품이 다르다. 또 주름이 생기기 쉬운 눈(O존)과 입가(N존)는 그에 걸맞은 성분을 담는다. 여러 제품을 덧바를 필요 없이 최대 4개의 화장품만으로 관리가 가능한 셈이다. 정 대표는 “스킨케어 단계가 지나치게 많아 영양 과다로 트러블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처음에는 제품을 부위별로 사용하다 피부의 균형이 맞춰지면서 ‘원 타입’을 쓰게 된 고객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와의 대면 상담으로 처방이 이뤄지는 만큼 서비스의 가격대는 만만치 않다. 1부위 기준 ‘스탠다드’는 월 3만9000원, 고가의 성분이 추가된 ‘프리미엄’은 월 10만 원이다. 얼굴 네 군데를 모두 프리미엄으로 관리받으려면 매달 40만 원씩 지출해야 한다. 서비스 특성상 시니어의 접근성이 낮다는 한계도 있다. 정 대표는 “자녀 추천 등으로 구독한 중장년층은 만족도가 높은 편인데, 신청 방식이 복잡하다 보니 신규 시니어 고객의 유입률은 낮다”며 “비용과 방식의 한계를 보완한 비대면 서비스를 올해 안에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개개인이 앱을 통해 피부 상태를 측정하면,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결과를 진단하고 맞춤형 성분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정 대표는 “집에서 터치 한 번으로 매일 아침 먹을거리를 주문하듯 화장품도 신선하고 저렴하게 구독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나가고 싶다”며 “비대면 서비스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비건’을 택한 이유 톤28은 영국의 비건소사이어티 인증을 받은 비건 화장품 브랜드다.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 원료로만 화장품을 만든다. 또 화장품 용기의 플라스틱 비중을 줄이기 위해 자체 개발한 종이 패키지에 담아 배송한다. 화장품을 종이에 담는다는 것은 꽤 과감한 도전인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행동에 나선 이유를 물었다. Q. 천연 성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창업 전에 화장품 성분을 개발하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각종 화장품을 테스트하다 보니 화학물질에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났다. ‘화장품을 건강하게 사용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 친환경 성분에 주목하게 됐다. Q. 종이 패키지 개발 계기? 친환경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용기만 녹색으로 물들이고 도색된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기업을 보며 안타까웠다. 용기에 치중하기보다는 내용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톤28 내에서 화장품을 ‘바를 거리’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렇게 떠오른 아이디어가 우유팩이었다. 종이에 담긴 우유처럼 화장품도 신선하게 배송해보자는 취지에서 패키지를 개발하게 됐다. Q. 개발 과정에서 힘든 점? 스타트업이다 보니 비용 면에서 쉽지 않았다. 또 내용물이 터질 경우 불량률, 로스율을 제조업체에서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응해주는 거래처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현 거래처가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준 덕분에 500번의 테스트를 거쳐 개발을 진행했고, 한국환경공단의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4년간 내용물이 터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Q. 친환경을 지향하는 이유? 개개인의 외모만 가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환경까지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미(美)를 지향하는 화장품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톤28이 추구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 2021-06-2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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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뿐인 내편’ 정재순, 인생 연기를 남기다
- 주말 저녁,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배우가 엄청 즐기고 있구나! 한참 나이 어린 배역에게 ‘아버지’나 ‘오빠’를 연발했다. 심심하면 욕설에 머리채를 끄잡는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명희야, 원혁이 번호 땄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106부작의 마지막 대사도 그녀 몫이었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에서 무던하게 녹아 있던 그녀.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 3월 종영한 KBS2 주말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귀여운(?) 치매 환자 박금병 역으로 사랑받은 배우 정재순(鄭在順·72)을 두고 하는 소리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녀를 마주보는 순간 멈칫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가 나른하면서도 우아하게 무대로 걸어오는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면서 명희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박병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는 배우 정재순. 캐릭터 변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남다른 연기를 보여줬던 ‘하나뿐인 내편’이 그녀 인생에 있어 대단한 도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배역과 관련해 얘기를 들었을 때 극중에서 치매가 그렇게 큰 소재는 아니었어요. 그냥 약간 병세가 있다 하는 정도였죠. 그동안 치매 앓는 역은 안 해봤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이 나이 먹어서 한 번쯤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모르겠다! 해보자! 그랬던 거죠.”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 늘 하던 대로 마음먹었을 뿐인데 시청자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 극중 손주며느리 도란(유이 역)을 친구 ‘명희’로, 그의 아버지(최수종 역)를 ‘강기사 오빠’로 부르면 부를수록, 며느리(차화연 역)와 둘째 손주며느리(윤진이 역)에게 욕을 하면 할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제가 극중에서 욕할 때 사람들이 참 찰지다고 그러대요? 제가 나쁜 년, 첩년 하고 말할 때요. 저도 상상 못했고 작가님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야기 전개를 하다 보니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그런데 자꾸 촬영 분량이 많아지더라고요.(웃음)” 말 그대로 배우 정재순의 재발견이었다. 올해로 데뷔 51년 차. 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목과도 같은 중견배우였다. 긴 세월 각인되어온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해냈으니 박금병이 더욱 사랑받았던 것은 아닐까. 정재순은 딴생각 안 하고 배역을 즐겼다고 했다.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치매 환자라는 배역 설정 때문에 오만 가지를 다 해봤거든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도 해보고요. 배우로서도 찾기 힘든 캐릭터였어요. 카타르시스도 느꼈고요. 특히 머리끄덩이를 있는 대로 낚아채잖아요.(웃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기더군요. 치매 증세가 나올 때 특히 나쁜 사람들에게 바른 소리도 마음껏 하고 말이죠.” 극중 박금병의 인기는 인터넷을 치면 확인된다. 정재순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드라마에서 착장한 귀걸이며 사용한 안경테, 옷 등의 브랜드를 알 수 있을 정도.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젊은 시절을 주로 기억하는 치매이다 보니 빨간 립스틱에 화려한 색감의 옷도 입고, 짧은 점퍼에 토끼 머리띠는 물론 시니어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미니크로스백도 수차례 바꿔 멨다.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후배 연기자들에게 애교 부리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나뿐인 내편’에 출연하면서 귀엽다, 예쁘다는 말을 평생 들어도 차고 넘칠 만큼 들었어요. 귀엽대요. 제가요. 저는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데요.(웃음)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순간순간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렇다고 그녀가 박금병 같은 강한 캐릭터 연기를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KBS1 드라마 ‘하늘만큼 땅만큼’에서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새엄마 역할을 했고,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에서는 배우 송승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연기한 적 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 박금병이 인기나 화제성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녀는 최근 드라마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KBS2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살면서 처음 나가봤어요. 우리 집안에 예능 PD가 있는데 출연 제의가 와도 안 나간다고 했거든요. 매니저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나갔네요. 유재석 씨가 능력자더라고요.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 앉혀놓고 잘 이끌더군요. 그날 ‘해피투게더’가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하더라고요.” 데뷔 51년 차, 나를 돌아보다 스타 탄생 비화에 종종 등장하는 스토리. 정재순도 친구 따라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얼떨결에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TBC 8기 공채 탤런트로 합격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미술대학교 지원도 못하게 했는데 탤런트를 하겠다니, 부모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지원군이 정재순 옆에 있었다. “저는 그때 대학 재수를 하면서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대가 심해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제 남편의 부모님이 제가 탤런트 된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밀어줬다기보다는 ‘괜찮다’ 이 정도요? 그때 시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시댁에서 바람날 여자는 안방에 앉혀놔도 막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힘과 용기를 내 방송사에 갔는데 세상에 아유…. 막상 닥쳐보니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끼도 없더라고요.” 간단히 말해 얼굴이 예뻐서 합격한 케이스였다. “괜찮은 여자 탤런트가 들어왔다고 방송사에 소문은 났는데 연기를 시켜도 뭘 할 줄도 모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거든요. 야외 촬영은 너무 싫었어요. 스튜디오 촬영은 얼마든지 했고요. 사람들이 와서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박금병이 같은 역할도 하고. 약간 뻔뻔해졌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연기자는 생각도 안 해본 직업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뭘 잘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냥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방송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거죠. 51년 동안 인정받을 만한 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너무 아쉬워요. 이번에 ‘하나뿐인 내편’은 기억에 남겠죠.” 기다림이 만들어 준 또 다른 이름 화가 남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많은 것보다 오랜 시간 기복 없이 꾸준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온 것 자체가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까? “그렇죠.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연기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매년 꾸준하게 몇 작품씩 들어와야 하는데 들쭉날쭉했어요. 그래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아왔지만 부모님 반대로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물감을 사 모으기도 했다. “집에서 혼자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은사를 찾아가서 배웠는데 체계적으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책도 찾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미술공모전이 있으면 열심히 작품을 냈습니다. 미술계 유명한 공모전에는 거의 다 출품했던 것 같아요. 1991년에 첫 개인전을 할 때까지 응모했죠.” 그녀의 첫 개인전은 당대 히트작이었던 MBC 주말연속극 ‘배반의 장미’의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 “극중에서 제 배역은 속 썩이는 남편을 둔 재벌가 며느리였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캐릭터였는데 ‘배반의 장미’를 집필하신 김수현 선생님이 제가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극이 끝날 때쯤, 전시회가 있다는 걸 아시고 전시회 신(scene)을 만들어주셨어요. 그 드라마에 나왔던 전시회 장면은 제 개인전 모습이었어요. 정말 감사했죠. 어느 연기자가 그런 배려를 받을 수 있겠어요.” 화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느새 그녀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자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은 그 성격이 판이했다. “저는 연기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림은 혼자서 작업해도 되지만 드라마는 40~50명이 같이 어우러져서 일하잖아요. 1996년도에 네 번째 전시회를 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어요. 그때 한꺼번에 세 작품을 소화하는 중에 전시 스케줄까지 잡혔었거든요. 그 뒤 5년간은 드라마에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다시 개인전을 연건 12년 만이었죠.” 요즘은 그림 활동을 안 하다시피 하니 화가 정재순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색하다. 그래도 마음이 힘들던 시절에 자신을 위로해줬던 것은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시니어도 시간이 많다고 무료하게 지낼 게 아니라 취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좋더라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힘든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 힘든 세월 동안 그림이 있었으니까 많이 위로를 받은 거죠. 그리고 또 드라마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도 보여드리고 있잖아요.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림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있지만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자꾸 소홀해지는 것을 느낀다. 긴장감도 떨어지고 말이다. “옛날같이 체력이 안 따라줘요. 예전에는 드라마와 그림을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쉽지 않아요. 저는 비구상화를 그려요. 마음이 캔버스에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담아낼지 고민이 없으면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뭘 그릴까 계속해서 고민을 해도 작품이 나올까 말까예요. 누구도 함께할 수 없죠.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건 굉장히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거예요.” 박금병이 때문에 김장도 못했다 한참을 드라마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흘러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나긋하게 깔리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작년 말에 박금병이 역 하느라고 처음으로 김장을 못했어요. 살면서 거른 적이 없거든요. 매년 수산시장에서 젓갈이며 생선이며 사서 온 정성을 다해 담갔는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별미인데 참 아쉽네. 이번에 대사도 많고 스케줄도 빡빡했거든요. 그런데 김장을 안 하니까 여기저기서 주셔서 김치가 되게 많아요. 그래도 박금병이도 잘되고 드라마도 잘돼서 좋습니다.” 인터뷰 초반에는 몰랐는데 살림이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에게서 발랄한 목소리의 박금병이 느껴졌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으니 다시 정재순으로 돌아올 시간. 가발을 벗고 단장을 했는데 영 어색하다며 머리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할머니 역할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엄마였다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되는 역은 많았는데. 거기다가 치매 환자 연기까지 했잖아요.” 매일이 새로운 연기자 제대로 연기했다는 만족감을 준 배역을 묻자 주저 없이 “이거. 박금병!”이라고 대답하는 정재순. “저는 연기자를 그냥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자로서 다른 삶을 연기할 때 충실하게 살려내려고 노력했어요. 직업 정신으로요.(웃음) 부족함도 많고 잘 모르니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새로웠던 거죠.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좀 부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우선 성격 강한 박금병이랑 헤어졌으니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주어진 역할은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원칙이니까 또 열심히 해야겠죠.” 앞으로 배우로서 바람이 있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100세 시대잖아요. 시니어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치매 연기 같은 거 말고. 힘과 용기와 아름다움과 즐거운 취미활동 같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가로서 시간이 허락되면 내년쯤 전시회를 가져볼까 해요. 전시회 열면 초대할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재순이 곧바로 향한 곳은 ‘하나뿐인 내편’의 종방연 현장이었다. 플래시 세례 속을 ‘강기사 오빠’인 최수종 팔짱을 끼고 걷는 정재순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데뷔 51년 만에 인생 배역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힘, 주어진 일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었다.
- 2019-04-1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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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상자’- ‘난곡동 수호천사’ 주사랑공동체 이종락 목사
- “우리 모두 위험에 처한 아기들과 이웃을 위해 기도합시다.” 영화가 끝나고 한 관객의 말에 극장은 어느새 예배당이 되었고, 관객들은 한참동안 그곳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낙태를 결심했던 한 여성은 눈물로 참회하며 아기를 낳겠다고 마음먹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는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살 것을 다짐했다. 영화 가 불러온 변화였다. 엄밀히 말하면, 주사랑공동체 이종락(李鐘洛·62) 목사가 만든 ‘베이비박스’가 일으킨 기적과도 같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7년 12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새벽, 대문 앞에 정체 모를 굴비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비릿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그 냄새를 맡은 길고양이들이 상자 주변을 서성거렸다. 뚜껑을 열어 본 이종락 목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상자 속에 든 것은 바로 갓난아기였기 때문. 하마터면 추위에 동사하거나 길고양이들의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어쩌면 더 많은 생명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길거리에 방치된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 목사는 체코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들었고, 2009년 12월 가로 70cm, 세로 45cm, 높이 60cm의 베이비박스를 직접 만들어 서울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외벽에 설치했다. 보온효과가 있는 따뜻하고 푹신한 베이비박스에 아기가 들어오는 순간 교회 내부의 벨이 울리도록 설계했다. 막상 그렇게 마련해 놓고도 그 벨이 울리지 않길 바랐던 이 목사다. “제발 어린 생명이 버려지지 않길, 그러나 버려질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이곳에 넣어 주길 기도했어요. 호기심에 사람들이 박스 문을 열어 벨이 울리곤 했는데 처음 아기가 들어온 것은 3개월 만이었어요.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탯줄을 달고 있었는데… 그 심정은 말로 표현 못 해요. 그래도 길 가에 버려지지 않고 베이비박스 문을 열고 우리에게 와준 것에 감사했죠.” 아이를 낳은 우리 아이들, 손가락질보다는 따뜻한 손길로 한국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접한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영화예술학교 학생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는 2013년 미국에서 먼저 개봉했다. 50개 주 870개 극장에서 500만 관객과 만나며 제9회 샌 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 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 영화상을 받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이 영화를 계기로 애틀랜타주에 베이비박스가 만들어졌고, 인디애나주에서는 병원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에 베이비박스를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한 법안이 나오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올해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개막작으로 첫선을 보였고, 최근까지 몇몇 소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종락 목사의 헌신에 감탄하고 대단한 일을 했다며 박수를 치지만, 그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베이비박스 사역은 목사 개인의 계획이나 목적으로 이만큼 온 것이 아니에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불이 난 것을 보면 신고하는 게 맞잖아요. 길 가에 버려진 아기들을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어요. 당연히 보호하고 구해야죠.” 단 한 명의 아기라도 더 살리기 위해 만든 베이비박스이지만 처음 이 사실이 매스컴을 탔을 때만 해도 곱지 않은 시선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미혼모들이 무책임하게 아기를 유기하게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100개가 넘는 베이비박스가 있지만 1년에 겨우 한두 명의 아이밖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면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2012년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는 입양특례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베이비박스를 통해 들어온 아기가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입양특례법이 실행되기 전 2년 7개월 동안은 76명의 아기가 들어왔는데, 그 이후에는 1년 5개월 동안 305명이 베이비박스에 남겨졌어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를 낳고 출생신고를 하는 게 별거 아니지만, 미혼모나 특히 미성년자들에겐 큰 부담이죠. 그래서 산부인과를 가지 못하고 몰래 출산을 하게 되고,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맡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아기를 두고 가는 미혼모 중 60% 이상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가슴 아픈 이 목사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린 미혼모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세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성교육을 하는 경우가 드물죠. 자신이 가진 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면 아이들도 그러한 행동을 잘 절제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일이 벌어졌다면 그땐 그들을 보호하고 이야기를 들어줘야죠. 우리 아이들이잖아요. 하지만 대부분 어른들은 학생이 임신했다고 하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며 손가락질하죠. 그게 다 우리 사회의 ‘체면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미성년자가 아이를 가지면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숨어버리게 되죠. 그러다 우울증을 겪거나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요.” 이 목사는 미혼모들이 찾아오면 “열 달 동안 아기를 지키느라 고생 많았다.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기와 함께 자살하려고 결심했던 엄마들도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돌려 자신을 찾아와 귀한 두 생명을 살릴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이 목사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아기를 키우겠다고 데리고 간 미혼모도 150여 명이다. 그런 미혼모들을 위해 분유, 기저귀,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고 주사랑공동체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며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목사는 어린 엄마들을 향한 따뜻한 손길이 그들의 부모세대로부터 뻗어 나왔을 때 진정한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인생 후반전에 행복 더하기 ‘입양’ 그동안 베이비박스 문을 통해 세상의 품에 안긴 아기는 올해 900명을 넘어서 이제 1000명에 가까워졌다(2016년 7월 8일 기준 979명). 이 목사는 모든 아기의 베이비박스 일지를 쓰고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키울 수는 없지만 애정을 담은 엄마의 손편지도 함께 보관한다. 이는 부모가 다시 아기를 찾고자 할 때 귀중한 자료가 된다.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 목사도 그중 9명의 아이를 입양해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 그가 입양한 아이들은 장애가 있거나 전신마비, 다운증후군 등을 앓고 있다. 아이 한 명을 양육하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30여 년 전,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 둘째 아들 ‘은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보배 은만이 덕분에 생명의 거룩함, 소중함을 깨닫고 배웠어요. 몸을 움직이거나 말은 못하지만 그 아이는 눈빛으로 이야기하죠. 그 눈을 바라보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사는 게 아니라는 것, 하루를 만족하고 현재를 감사히 여기고 이웃을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지금 9명의 아이를 입양했지만, 몇 명 더 입양하고 싶어요. 그만큼 삶의 보람과 행복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입양 절차가 복잡하고 기준이 까다로운 국내에서는 입양 의사가 있던 이들도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 목사는 자녀들을 장성시킨 중·장년에게 입양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이 삶에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입양은 자신의 무언가를 할애하는 것이 아닌 인생에 행복을 더하는 일이라고 한다. “어제 다섯 명의 아이를 입양한 70대 중반의 교수님이 다녀가셨어요. 그분 말씀이 입양을 하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다 크고 출가하면 부모들은 외롭고 쓸쓸해지는데 그럴 틈이 없는 거죠. 나도 우리 첫째 딸이 자랄 땐 모르는 것도 많고 정신없이 지냈어요. 이제는 더 능숙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키울 수 있어 좋더라고요. 특히 갱년기 주부들은 우울증을 앓기도 하는데, 입양을 계기로 다시 사랑으로 아기를 키우다 보면 그 아이가 주는 기쁨으로 삶이 더 행복하고 즐거워질 거예요.” 1000명의 부모, 하나뿐인 부부 를 본 관객이라면 이종락 목사의 아내 정병옥 여사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이 목사를 내조하느라 힘들고 고단할 텐데, 영화 속 그녀는 늘 명랑한 목소리로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는 그런 아내가 있었기에 수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목사에게 아내는 늘 고맙고도 가장 미안한 존재다. “밤낮 안 가리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키우느라 서로 대화할 정신이 없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해오던 일들에 담당자도 따로 두고 아이들도 많이 커서 조금 여유가 생긴 편이에요. 나는 그전에 참고 인내했던 마음이 많이 다독여졌지만 아내는 오히려 그런 점들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죠. 가끔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낼 때도 있는데, 그만큼 내가 이 사람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하기도 해요.” 10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의 부모이자 수호천사 역할을 해온 부부이지만, 정작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했던 시간은 적었다고 한다. 무심하고 소홀했던 지난날은 묻어두고, 매주 목요일을 휴일로 정해 단둘이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낯간지러워 못했던 애정 표현도 이제는 자주 하려고 노력한다는 이 목사다. “아내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큰 위로를 받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 외에 지금까지 내가 남편으로서 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력하고 고마움을 표현해야죠.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었는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아내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마지막엔 내가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죠. 처음엔 서투르고 어색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버릇이 되면 괜찮더라고요. 물론 서로 잔소리도 하고 툭툭거리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그게 바로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의 두터운 사랑이고 정이죠.”
- 2016-07-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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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어머니를 속여 죄송합니다”
-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 2015-06-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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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빠삐따용’을 아시나요?-박동현 더 클래식 500 대표
- ‘상위 1%.’ 우리나라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수치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상위 1%에 들면 서울대·고려대·연세대(SKY) 등 명문대학에 진학이 가능하다. 운동선수라면 상위 1%에는 속해야 직업선수로 밥을 먹고 살 수 있다. 일반 직장에 들어가면 상위 1%가량만 임원으로 승진한다. 때문에 1% 안에 드는 것은 한국인의 끊이지 않는 과제이자 목표다. 상위 1% 안에 드는 사람이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시니어의 상위 1%에 드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광진구 자양동에 위치한 실버타운 ‘더 클래식 500’은 상위 1%의 시니어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 상위 1%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최고급 실버타운인 만큼 회사의 대표는 까다로운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예상은 더 클래식 500의 박동현 대표를 만난 지 몇 분 만에 빗나간 것으로 확정됐다. ◇근육질의 호텔리어 출신 사장님 “제가 여기 대표로 온지 1년 만에 머리색깔이 변했습니다. 대한민국 재계, 법조계, 의료계, 학계 등등 상위 1% 시니어 분들만 모여 계십니다. 요구 조건이 보통 까다로우신 게 아니죠.” 더 클래식 500은 183.76㎡의 단일평수지만 보증금이 가장 싼 룸이 8억8000만원, 한달 공동관리비만 198만원(식대, 개별관리비 별도)에 달하는 최고급 실버타운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시니어들이 모인만큼 상대적으로 그들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터. 박 대표는 어르신 고객들에 팔씨름을 일부러 져주기도 하는 등 최상위 시니어 입주민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의외로 여유로운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박 대표의 여유는 서비스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다. 신라호텔과 조선호텔에서 30년 넘게 호텔리어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비스 정신이 몸에 밴 탓이다. 신라호텔 시절에는 삼성그룹 계열사 간부들의 교육을 담당할 정도로 서비스에는 일가견이 있는 그다. “제 서비스 철학은 SAS(Speedy, Accurately, Safely)입니다. 서비스는 빠르고 정확하고 안전해야 합니다.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더 클래식 500은 입주민들과 호텔 투숙객들이 ‘가족’같은 느낌을 받도록 하고 싶습니다.” 박 대표가 취업할 당시에는 삼성물산 등 종합상사가 선망의 대상인 시절이었다.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외국에 나갈 기회가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젊은이들을 설레게 만들 수 있었던 것. 그러나 박 대표는 모두가 지망하는 삼성물산 대신 당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다른 삼성계열사에 비해 월급이 50만원 더 많았던 호텔신라를 선택했다. 입사동기 중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사람은 박 대표가 유일했다. 월급을 조금 더 받기 위해 호텔업계에 입문했지만 평생의 자산인 서비스 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평생을 호텔에서 보내다시피 해 서비스정신이 몸에 익은 박 대표지만 마냥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다. “제가 건장한 편 아닙니까. 예전에 지하철에서 고등학생들이 말 타기를 하면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주위에 아주머니, 할머니 분들만 계셔 아무도 말을 하지 않더라고요. 제가 그때 몸에 딱 붙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얘들아 공공장소에서 부모님들도 계신데 떠들면 되냐. 앉아라’고 했더니 조용히 앉더라고요.” 박 대표는 건강을 위해 꾸준히 보디빌딩을 해왔다. 취미로 해왔지만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호텔에서 근무할 시절에는 보디빌딩 대회에도 나갔다. 60일간 준비해서 ‘2011년 미스터 화성시장배 보디빌딩 선발대회’ 장년부에 출전해 당당히 입상했다. “체지방을 빼기위해 60일 동안 매일 달걀을 60개, 고구마 4박스, 토마토 3박스를 먹었죠. 물은 많이 마시고 소금은 전혀 먹지 않았고요. 체지방이 19%에서 6%까지 내려가니 몸도 가벼워지더라고요.” “노화는 엉덩이부터 시작됩니다. 엉덩이가 약해지면 걷기가 힘들어지고 결국은 호흡기도 함께 약해지는 거죠. 엉덩이가 평평한 사람은 절대 오래살 수 없다고 봐야 해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시니어 분들이 고객인데 대표가 늙어 보이면 안 되죠. 지금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호텔 아닌 시니어 사업을 해야” 더 클래식 500에는 호텔 팬타즈가 운영되고 있어 박 대표는 완전히 호텔업계를 떠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클래식 500에서 일한지 1년 반 만에 시니어 산업을 이끌어나가겠다는 의지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니어 산업의 삼성전자가 되고 싶습니다. 직원들에 시니어 업계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가 되자고 독려합니다. 시니어 산업에서 일해 보니 정부에서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는 우리사회의 빠른 고령화 속도에 비해 한국의 대기업이 시니어 산업에 관심이 부족하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국은 세계의 유례없이 고령화 속도가 빠른 나라입니다. 이미 2000년 고령화 사회에 들어섰고 2018년에는 고령사회, 2026년에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일본보다도 빠른 속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기초연금 문제를 비롯해 고령화에 대비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이미 호텔시장은 포화상태입니다. 게다가 역사적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줄고 있어요. 중국 사람들은 한국호텔에 올만한 여유 있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기업이 너도나도 호텔산업에 뛰어들게 아니라 시니어 관련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합니다. 그러면 기업의 이미지도 좋아질 것입니다.” 박 대표가 이처럼 다른 대기업의 참여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고령화는 전 국가가 나서서 다뤄야할 문제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국가경쟁력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고령화와 이념 갈등이라는 지적이다. 정부의 고령화 정책도 수박 겉핥기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참여로 경쟁이 심해지겠지만 고령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 있다. “대기업이 시니어 산업에 참여해서 경쟁이 심해지면 좋은 겁니다. 서비스 업체는 경쟁이 심해져야 합니다. 경쟁 속에서 태어나는 서비스와 재화는 더 좋아지기 마련이죠. 땅도 좁은 나라에서 호텔만 지어서는 안 됩니다.” 시니어 사업에 대한 애정으로 더 클래식 500을 전국 체인으로 확대하고 싶은 야망도 있다. “전국에 노인 관련 시설이 많지만 고급 유료 주거 시설은 별로 없어요. 이 정도의 규모와 시설은 아니더라도 150~200실 정도의 보다 저렴한 시설을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에 만들고 싶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마음가짐이 필요” 더 클래식 500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분명히 존재한다. 보증금과 생활비가 지나치게 높아 부자 시니어만을 위한 시설이라는 불만이 나온다. 이번 달부터 시작된 공동관리비 인상에 일부 주민이 반발하기도 했다. “도심형 시니어 거주 시설의 초창기 단계라 보증금이 비싸게 느껴 질 수도 있지만 현재 서울 강남 아파트 전세가격과 비교했을 때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편입니다.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쟁 시니어 주택에 비해서도 관리비가 저렴합니다. 일본에서는 노인들이 남은 재산을 모두 시설에 맡기고 여생을 책임져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증금을 나갈 때 돌려준다고 하니 일본인 입주자가 깜짝 놀라더군요.” 하지만 박 대표도 이곳에 모인 입주자가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노년에 여기까지 오실 정도면 성공한 인생임에 틀림없죠. 그러나 그건 과거의 삶일 뿐입니다.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다는 데 감사해야 합니다. 입주자 중에 불평불만에 차 있는 분도 계십니다만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즐겁고 감사하게 생활하고 있죠.”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더 클래식 500의 입주민들은 광진구 내 독거노인에 생활용품을 전달하는 등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 대표 자신이 자원봉사단의 단장을 맡아 입주민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봉사에 참여하지 않으시려는 분도 계시죠. 그러면 제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죽을 때 다 가져가실 겁니까’라고 말씀드립니다.” 입주민과 소탈하게 어울리는 박 대표는 직원들에게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대개 사장을 지낸 사람들이 나중에 외롭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지켜야할 건 지켜야겠지만 너무 권위에 기대있다 보면 말년이 외로워요. 저는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입주민과의 모임에서는 박 대표가 건배사를 알려주고 복습도 시킨다. “‘빠·삐·따’가 전에 제가 만든 건배사에요. ‘빠지거나 삐지거나 따지지 말자’는 뜻이죠. 다음 모임에서는 ‘빠·삐·따·용’으로 발전시켰죠. ‘빠지거나 삐지거나 따지면 용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니어 업계에 몸담은 이후 박 대표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부쩍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봉사를 강조한다. “이 땅에서 호흡이 멈추는 날까지 사명에 충실하라고 하죠. 대단한 것 같아도 나이 들면 쇠약해 지는 게 인간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1957년생 △청주고, 중앙대 신방과 학사·석사 수료, 서울대학교 웰에이징 시니어산업 최고위과정 수료 △호텔신라 마케팅 팀장 △조선호텔 상무 △더 클래식 500ㆍ호텔 펜타즈 대표이사사장
- 2014-04-08 1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