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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혼과 애국의 일념 불태웠던 '무성서원'
- ‘정읍’ 할 때 ‘내장산 단풍’만 떠오른다면 올가을엔 무성서원에도 한번 발길을 돌려볼 일이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서원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서원이 발원됐다는 안동 지역 3곳을(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거쳐 전라도로 넘어왔다. 정읍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25년 전, 서울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정읍에 내려 고창을 간 적이 있다. 마중 나온 친구 차를 타고 고창으로 넘어가는 길은 줄곧 산등선을 따라가는 도로였다. 그때 깊은 밤이었는데도 유별나게 환했다. 옆을 보니 환한 달이 빛을 밝히며 열심히 차를 따라왔다. 그 달을 보자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백제 가요 정읍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의 달이 얼마나 밝던지… 그날 우리 차를 따라 달리던 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읍은 내게 이렇게 환한 빛을 밝히는 달의 고장으로 기억돼 있다. 그런데 정읍에 위치한 무성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단다. 서원 취재를 핑계로 정읍을 방문하기로 했다.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앞으로는 천이 흐르고 뒤로는 성황산을 등진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이다. 원촌마을 한가운데에 무성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안동의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병산서원은 마을과 뚝 떨어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에 비해 무성서원은 외양상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언제든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도 될 만큼 친근하고 격의 없어 보인다. 서원을 알리는 홍살문도 주민들이 거주하는 대로변에 떡 버티고 있다. 원촌마을이 곧 무성서원이고 무성서원이 곧 원촌마을인 듯싶다. 이런 마음을 읽었던 걸까? 해설가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성서원의 특징은 특별한 사람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신분 차별 없이 수학의 기회를 제공한 데 있다”며 해설을 이어갔다. 또한 이곳은 항일 의병운동의 첫 시작지였단다. 원촌마을에는 2원5사, 즉 서원 두 곳(무성서원, 용계서원)과 사당 5곳(남천사, 송산사, 필양사, 시산사, 도봉사)이 있는데,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강탈에 맞서 저항한 항일의병운동이 이곳 서원을 중심으로 처음 일어났다고 한다. 항일의병 선봉장으로 알려진 면암 최익현 선생이 무성서원에서 1906년 첫 의병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했다는 해설가의 설명에 새삼 원촌마을의 역사적 유산이 위대해 보였다.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선생은 결국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대마도에 감금됐는데, 단식 투쟁 끝에 1907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무성서원이 기리는 인물 중 대표적인 이는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해 천재로 이름을 떨친 신라시대의 학자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학자와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고향이 그리워 신라로 돌아온다. 하지만 통일신라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결국엔 태산(현 정읍) 지역 향리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깊은 좌절만 한 채, 이곳 정읍에서 학문에 심취하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최치원. 그가 이룩한 학문의 경지는 높았으나 견고한 신분제 사회를 구축한 신라의 권력층은 그의 능력을 시샘하며 지방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표작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도 기리고 있다. 정극인은 최치원 등과 함께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에 위패가 있고 무성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극인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다들 전라도를 예술의 고장이라 부른다. 단순히 근현대사의 예술가들만 배출한 건 아닌 것 같다. 면면한 역사의 흐름 속 문학과 예술의 고장이라는 이름답게 걸출한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역시 남다르다. 마을 한편에는 큰 연못이 있어 연꽃이 한창이다. 안동 지역 서원들이 만든 연못이 서생들의 휴식공간이었다면 이곳 무성서원이 위치한 원촌마을의 연못은 마을 주민들의 휴식공간이다. 연꽃을 즐기며 이곳저곳 산책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을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마을 교육의 현장이 바로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 신라시대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사적 166호).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들이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를 올렸던 생사당(生祠堂), 태산사가 뿌리다. 이후 조선시대 중종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영천 신잠의 생사당이 태산사와 합해져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의 작가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등을 추가로 배향하며 성장했고,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아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증명했다. 무성서원의 입구는 현가루(絃歌樓)로 불리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 3칸, 측면 2칸 기와집이며 안으로 들어가면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강수재(講修齋), 왼쪽에 3칸의 흥학재(興學齋)가 있어 동·서재(東西齋)를 이룬다. 3칸인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우(祠宇)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최치원을 북쪽 벽에, 같이 모신 사람들의 위패(位牌)는 좌우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년(순조 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특히 이곳 무성서원에는 중요한 서원 연구자료가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여행 이야기, 두산백과)
- 2020-08-1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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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도시로 떠난 여행
- 사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구경이 목적인 여행에 비해 훨씬 더 생기를 준다. 생기 있는 ‘삶을 고양하기 위한’ 여행으로 니체는 두 종류의 여행을 말했다. 하나는 과거의 위대함을 숙고함으로써 인간의 삶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정체성이 과거에 의해서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소속감을 확인하는 여행이다. 정읍으로의 여행이 내게는 니체가 말한 영감을 얻게 되고, 자아를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었다. 그곳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재생시키는 자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 9곳’이 한국에서는 1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한 사립교육 시설이다. 서원의 역할, 지역을 중심으로 학파를 만들어가는 기능 등이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번에 등재된 서원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영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돈암서원(충남 논산)과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은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정읍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했다 떠난 후 그의 선정을 기려 주민들이 세운 생사당에서 유래되었다. 무성서원은 앞에 칠보천이라는 개울이 흐르며 뒤에는 성황산을 등지고 자리한 배산임수형 위치이면서 마을의 중심에 있다.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린 학문의 공간이자 소통의 장이었다. 더욱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고,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호남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입구 출입문으로 외삼문이 있다. 무성서원의 경우에는 1891년에 건립한 2층 누각의 현가루가 외삼문 대신에 출입구의 역할을 한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한다’라는 의미이다. 서원은 제례를 지내는 사당인 사우와 강학공간인 강당, 기숙사인 강수재, 서원 관리인이 거주하는 고직사 등의 건축물로 구성되어있다. 주변에는 각종 비석과 비각이 놓여있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들을 돌아보니 과거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시간 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성서원에서 30km 거리에 한국 최고의 단풍을 자랑하는 내장산 국립공원이 있다. 올해는 따뜻하고 건조해서 단풍의 절정기가 예년에 비해 늦어졌다고 한다. 11월 중순을 넘겨야 명성에 맞는 내장산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계절의 변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많은 녹색은 조금씩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에 비친 나뭇잎들도 색의 변화에서 제각각 차이를 드러냈다. 녹색을 띤 황금빛, 붉은색을 띤 황금빛, 온통 시뻘건 붉은색, 레몬 빛 노란색, 녹색과 합쳐진 붉은빛, 체리색 주황빛... 내 영혼을 위해서 오래도록 풍경 속에 있고 싶었다. 노란색, 붉은색 나뭇잎이 떠다니는 호수의 우화정에 자리를 잡았다. 화려하게 변신 중인 숲길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고흐가 생각났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선과 비례의 아름다움을 그렸던 것처럼 그가 내장산 단풍을 그렸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색의 대비로 내장산의 가을을 표현한다면 그는 어떤 색의 대조를 선택했을까? 눈을 감고 잠시 고흐가 되어 상상의 화폭에 가을 내장산을 그려보았다. ▪ 무성서원: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 2019-11-19 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