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덧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겨울 차디찬 공기와 그 풍경 속으로 데려다주는 대청호의 새벽을 찾아간다. 자동차로 어두운 새벽길을 두 시간여 달려 쨍한 추위 속에 호수의 새벽 공기를 맞는 일, 신선하다.
엄동설한의 캄캄한 새벽길은 생각처럼 어렵진 않다. 달려갈수록 조금씩 걷혀가는 어둠을 확인하는 일도, 중간에 잠깐 들른 휴게소의 적막함도 어두운 길을 달리는 사람들만의 즐거움이다. 서울이나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새벽길을 달리면 시골길 드문드문 몇 채의 농가와 들판이 내다보이고 대청호를 향한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청호 오백리길 제4구간 출발점인 윗말뫼 주차장은 한적하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총 21개 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간 안에 대전, 청주, 충북 옥천군과 보은군이 경유한다. 그 속에 마을과 산과 들과 강과 호수가 오백리길을 이어준다. 원래는 대덕군과 청원군 사이에 있다고 하여 대청호라 이름 붙였다. 이 지역에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80년 대청댐 완공과 함께 지역 마을 담수화가 시작되면서 생겨난 인공 호수가 대청호다. 이때 수몰 지역은 86개 마을로 4000세대가 넘었고, 주민은 2만 6000여 명이나 되었다.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생긴 대청호로 인해 어릴 적 따뜻했던 추억 속 아름다운 시골 마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대청호는 인공 저수지로는 저수량 기준으로 소양호와 충주호에 이어 국내 세 번째다. 스무 개가 넘는 대청호 오백리길 구간을 편안히 즐기는 방법은 호수 둘레길을 산책하듯 걷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4코스 호반 낭만길은 대청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습지공원과 자연생태관 등이 걷는 길마다 이어지며, 총길이는 약 12.5㎞이고 5~6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지금도 호반길을 걷기 위해 찾아드는 이들에게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2023년 열린관광지 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대청호 일대는 장애인, 노약자 등 이동 약자들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무장애 관광 환경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이제는 이동 약자의 문턱이 더욱 낮아진 대청호 오백리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정보취약계층이 불편 없이 관련 홈페이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도 개선한다.
취향에 따른 구간별 길을 걷다가 갈대숲이나 호숫가에 멈춰서 조용히 대청호를 즐길 수도 있고, 또는 드라이브만으로도 좋다. 굳이 걷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발걸음에 따라 또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일부를 걷거나 쉼을 택하면 된다. 걷는 속도나 그 길을 모두 걸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일인가. 단 한두 시간을 걸었어도 그저 자연 속에서 음미하는 시간이 의미 있다.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다독이는 그 순간만으로도 충만하다.
동이 트기 전 호수에 도착하는 이들에겐 새벽 물안개에 대한 기대가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마냥 맑고 쾌청한 호수를 보게 된다. 일교차가 큰 봄과 가을에 주로 발생하는 물안개가 이날따라 피어오르지 않았다고 글렀구나 생각할 일은 아니다. 새벽의 거대한 호숫가에 서보았는가. 온몸이 떨리고 시리도록 쨍한 상쾌함으로 간단하게 마음의 평안을 던져준다. 이렇게 겨울과 마주한다.
호수 주변에 들면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공기 맛이 다르다. 건너편의 산과 능선이 호수 안으로 잠겨 흔들림 없는 반영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호반 둘레길에 깊숙하게 들어가면 질퍽한 습지 위로 풍성한 억새가 숲을 이루었다. 가끔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가 나곤 한다.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철새가 푸드덕 날고 먹잇감을 찾는 백로의 날갯짓을 보게 된다. 계절에 따라 개구리는 물론이고 메뚜기나 거북도 볼 수 있다. 자연환경이 청정해 구간 안에 자연생태관도 운영한다.
수변탐방로에서 한없이 호수에 취했다가 명상정원 방향으로 향하면 무엇이 기다릴까. 호수와 숲이 함께하는 곳이다 보니 발밑에는 여전히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10분여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숲길의 자연스러움에 젖어든다. 호수와 정원 사이 언덕처럼 완만한 등성이에 ‘대청호 오백리길’ 표지판이 보인다. 쉼을 제공하는 벤치와 정자가 호수를 앞두고 나무 아래 고즈넉하다. 이곳에서 호수를 빙 돌아보며 각자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명상정원은 물속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건네주는 공간인 듯싶다. 한 번쯤 들러서 간단하게라도 그리움을 풀어보도록 전통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옛 마을길의 한옥 담장, 장독대, 널찍한 평상 등으로 그들의 깊은 그리움이 해소될까마는 수몰민들을 위로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마을 어귀에서 자라던 나무였는지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나무는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어 언제까지나 물속에 잠겨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물속의 작은 섬들이 이루는 반영의 멋과 함께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상정원에는 드라마 ‘슬픈 연가’, 영화 ‘역린’, ‘창궐’, ‘7년의 밤’ 등의 촬영지였다는 안내가 줄을 잇는다. 이런 이유 말고도 이곳에 서면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아련한 마음이 생겨난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가는 현장과 그들의 어제와 오늘, 그뿐 아니라 이 모습을 대하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힐링의 장소로 이곳을 찾는다. 포토존에서 셔터를 누르고 나무 그네에 앉아 눈앞의 호수를 마냥 누리며 새벽의 호수를 만끽한다.
4구간 호반 낭만길은 계속 이어지는데, 명상공원에서 조붓한 길을 따라 1km쯤 거리에 자연생태공원과 추동 취수탑이 자리 잡고 있다. 상수원 취수구역이다. 가래울 마을과 황새바위와 연꽃마을에 이어진 오리골 제방이 시원하다. 철 지난 논과 밭을 끼고 걷는 길에 몇 가구 안 되는 작은 마을도 지나고, 데크로 연결되는 길도 나온다.
감나무에 넉넉히 남겨둔 까치밥의 푸근함을 올려다보면서 마을 옆 데크를 걷다가 예닐곱 단쯤 되어 보이는 알타리 무더기를 보았다.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라는 인심이었다. 이런 인정 넘치는 구경은 여행의 덤이다. 도로 옆으로 나오니 자전거 부대들이 씽씽 달린다. 시골길을 달리는 라이딩족들의 활기찬 질주가 상쾌함을 듬뿍 얹어준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을 찾는 이들이 들르는 곳이 또 있다. 3구간 종착지인 윗말뫼의 더리스. 호수를 앞에 두고 탁 트인 풍경이 압도한다. 더리스&테라베오는 슈하스코 브라질 바비큐 전통요리 레스토랑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청호 오백리길 산책로와 호숫가의 전경을 보려고 찾아온다. 더리스 정원 아래로 계단을 내려가면 프라이빗한 장소가 나타난다. 커플 의자에 앉아 마음껏 물멍에 빠져들면 된다. 때가 맞으면 거위 떼가 찾아와 물속에서 노니는 모습도 볼 수 있는 평온한 시간이다. 혹시나 비가 많이 내린 후라면 벤치와 나무가 물속에 잠긴 그림 같은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추운 겨울날 그리움 속 마을을 찾아 떠난 여행지에서 문득 유년의 시간을 발견한다. 그 길 위에서 기억 저편의 할머니와 내 부모 형제들을 만난 듯 뭉클함도 얻는다. 소박한 자연 속에서 비로소 들여다보는 내면 깊숙이에 위로 한 줌 들여놓았다. 떠돌던 마음은 차분히 잦아들고 한없이 따뜻하다. 세상 소음 따윈 잊고 호숫가를 걷는 내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전부였던 하루가 한동안 몇 알의 비타민이 되어줄 것이다.
여행 정보
자동차로 서울 기준 두 시간 정도 소요. 특히 청주에서 출발해 근교 문의문화재단지와 대청호를 함께 둘러보는 코스도 좋다. 전통문화와 호수의 멋을 제대로 느껴볼 만한 곳이다. 대청호 코스 대전역발 시티투어 순환버스가 토·일 주말에 있다.(2시간 반 정도 소요)
가을 억새꽃 군락과 습지의 이색적 경관을 즐기기 좋은 호반 둘레길이다. 대전시 동구 추동에 위치한 대청호자연생태관에 주차, 대청호자연수변습지와 억새꽃 군락이 있는 추동습지를 탐방한다. 호수 수위가 높을 때엔 둘레길 일부가 물에 잠긴다. 도보만이 아니라 차로 대충 둘러보기에도 적당한 곳이 대청호 오백리길이다.
해 기울어 노을빛 어릴 때, 호수는 비로소 생기를 띤다. 불그레한 잔광을 받은 수면에, 직격탄처럼 쏟아지는 한낮 햇살 아래에선 보이지 않던 색감과 물무늬가 아롱진다. 현(絃)의 진동처럼 섬세하게. 수묵화처럼 농담(濃淡)마저 입은 채. 호수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호수의 내향성에 감흥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도 대개 이 시각쯤이다. 거기에 더 순수하고 더 고혹적인 풍경이 있다고 믿어서다.
물은 인간의 재주에 놀랄 것이다. 필요와 이용을 위해서라면 밀반죽 주무르듯 물길을 맘껏 가공하기를 서슴지 않으니. 대청호는 금강을 댐으로 막아 조성한 인공호수다. 물의 감옥이라 할 수밖에. 그러나 신생 호수는 불화하는 법 없이 순리를 좇았다. 인위의 사슬을 풀고 호수의 호수다운 본연을 생성했다. 타율에서 벗어나 어느덧 자율로 풍경과 생태를 펼쳐놓는 저 장엄한 물의 도가니. 이 호수 앞에서 사람의 삶은 옹색하다. 옷 하나 입는 일조차 남의 눈과 유행을 고려하는, 우리는 타율의 노예이지 않던가.
‘호반낭만길’은 25개 구간으로 이루어진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으로 호수와 습지와 억새밭, 숲과 오솔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둘레길이다. 추동습지의 가을 억새꽃이 특히나 유명하다. 물가에 자라기에 물억새라고 한다. 꽃향 한 오라기 뿜을 줄 모르고, 그 무슨 곱디고운 형용을 지니지 않았으면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모은다. 군락의 장관, 그 은빛 억새꽃 물결에 사람들은 찬탄하는 것이다. 저만치 저 홀로 사는 억새를 본 적이 있는가. 서로 뺨을 비비고 서로 껴안아 촌락을 이루는 게 억새의 생리다. 무릇 모든 공생은 미덥다.
소나무꽃, 벼꽃, 오이꽃, 그리고 억새꽃의 공통점을 아시는가. 모두 ‘안갖춘꽃’으로 분류되는 꽃들이다. 대부분의 꽃은 암술, 수술, 꽃잎, 꽃받침, 이렇게 네 가지 요소를 구비한 ‘갖춘꽃’이다. 억새꽃은 꽃잎을 갖추지 않아 ‘안갖춘꽃’이다. 그렇다면 억새꽃의 섬약한 아름다움을 결핍의 미학이라 읽어도 무방하겠지. 꽃잎을 두르지 않고 피어난, 제정신 아닌 저 억새꽃들의 아우성을 일탈의 합창이라 봐도 좋겠지. 허공에선 자주 바람이 몰려와 가녀린 억새를 흔들어대지만, 끄떡없다, 억새꽃은 겨울을 지나서까지 시들망정 꺾이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몇 가닥 남은 백발로 퍼석퍼석 말라가면서 세상을 천천히 지나간다.
호숫가 오솔길에도 놀빛이 들이친다. 야트막한 야산을 에돌아 펼쳐지는 숲길이다. 나무를 만나면 구면처럼 늘 반갑다. 다정한 눈짓을 해오는 나무들의 품에 안겨 천천히 걸어드는 적막한 산길. 산길 밖으로는 연달아 호수가 보이고, 물 위에 뜬 수생식물과 물속에 반쯤 잠긴 버드나무들, 그리고 터무니없이 환상적인 작은 섬 두세 개가 보인다. 때 묻지 않은 순수와 단조롭지 않은 겹겹의 풍색으로 미묘하다. 여기에선 그 무엇도 모독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당신의 아름다운 연인을 이곳으로 초대하는 게 좋겠다. 방금 치른 부부싸움의 화해를 바라는 당신이라면, 짝과 함께 이곳의 순정한 풍경에 취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가곡 ‘내마음’은 호수를 닮은 마음이면 얻지 못할 사랑이 없다고 노래하는 것 같다. 사랑이 괴로워지는 건 애욕에 휘둘린 마음 사이즈가 간장종지로 쪼그라들 때다. 호수는 크넓은 그릇이다. 수평으로 평등한 호수의 얼굴은 관용의 표정으로 빛난다. 물 깊어 좀체 방정맞게 요동칠 줄 모르는 수면은 엉뚱한 파란을 야기하지 않는다. 사랑이건 인생이건 노를 저어 도달하기 힘겨운 운항이지만, 호수처럼 안전한 행로라면 선혈을 흘릴 일이 없으리라.
다시 억새를 만난 건 호숫가에 숱한 게 억새여서다. 호수로 달려가는 세찬 바람을 따라 억새꽃들도 덩달아 일제히 고개를 튼다. 이 순간 억새는 따귀를 올려붙이는 힘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를 부수고 깨뜨리려는 것들과 조우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이란 세상에 없다. 서럽게 떨지 않고 존재하는 생명도 없다. 온몸으로 슬픔을 녹이는 춤은, 그래서 대안이다. 바람 많은 가을날, 호숫가 억새들의 출렁거림. 그마저 나의 망막엔 춤으로 각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