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건, 현빈, 장근석, 송승헌, 이영애, 송혜교, 고현정, 전지현, 손예진, 이병헌 등은 드라마 회당 출연료로 5000만~2억 원을 받는 스타들이다. 김태희, 수지, 유재석, 이승기 등은 광고 한 편 출연하는 데 모델료로 10억 원 안팎을 받는 톱스타들이다. 김수현, 이민호는 중국 CF 한 편 출연료로 20억 원 정도를 받는 한류스타다. 송강호, 하정우 등은 영화 한 편 출연료로 6억~7억 원을 받는 스크린 스타다. 엑소는 지난해 10월 11일 서울 고척돔 하루 공연으로 티켓 수입 등 22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스타 아이돌그룹이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스타화의 경로나 연예인으로 발탁되는 유형이 모두 다르다. 이병헌은 KBS 탤런트 공채를 통해 발굴된 스타이고 이영애는 연예기획사 백기획에 의해 발탁돼 스타가 됐다. 고현정은 미스코리아 대회 출전이 계기가 돼 방송사 연기자가 되면서 스타가 됐고 전지현은 정훈탁 싸이더스 대표가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발굴해 스타로 부상했다. 이처럼 이들은 연예인 지망생에서 스타로 부상하기까지 과정은 각각 다르다. 이들이 스타가 되는 과정에 개입한 스타 시스템도 차이가 있다.
이병헌은 “나는 KBS 탤런트 공채가 없었으면 연예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KBS 공채로 연기를 처음 시작했고 이름이 알려져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고 말했고, 이영애를 발굴해 스타로 키운 백기획의 백남수 대표는 “잡지에 실린 이영애의 모습을 보자마자 스타 재목감임을 직감하고 영입했다. 연기 훈련부터 드라마 데뷔까지, 그리고 스타가 된 뒤로도 기획사가 관리했다”고 밝혔다.
이제 재능과 끼, 외모, 노력, 그리고 운이라는 변수에 의존해 우연히 스타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 정교하게 체계화한 체제로 움직이는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으면 스타는 탄생할 수 없는, 스타는 만들어지는 시대다. 수많은 스타 뒤에는 엄청난 투자와 장기간의 교육, 치밀한 데뷔 전략, 주도면밀한 이미지 조형, 막대한 홍보 마케팅이 자리한다.
스타 시스템은 스타와 시스템의 합성어로 신인이나 연예인 지망생 중 일부를 발탁해 연기자나 가수로 키워 스타로 부상시키는 시스템이다. 즉 스타의 생산, 거래, 활용, 관리, 소비의 전체적인 순환 메커니즘을 주관하는 체계를 스타 시스템이라고 한다. 저자 김호석 박사는 “스타 시스템은 신인이나 연예인 지망생을 최단 시간에 최대한 인기를 얻는 스타로 부상시켜 가장 높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체계”라고 설명한다.
문화산업 시장의 규모, 대중매체의 판도, 팬 층의 규모와 구성 분포 등에 따라 스타 시스템의 구조와 주체가 변해왔다.
KBS, MBC 등 방송사가 연기자와 개그맨 등 연예인을 선발해 전속제를 실시하던 1960~1980년대까지는 방송사가 연기자를 발굴, 유통, 관리하며 스타 시스템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스타의 신변이나 스케줄 관리 등 부차적 업무를 수행했던 연예기획사와 매니저는 1990년대 방송사 연기자 공채가 사라지면서 신인을 발굴해 스타로 부상시키고 스타의 이윤창출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스타 시스템의 핵심적인 주체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95년 가수 출신인 이수만 대표가 설립한 SM엔터테인먼트가 CAA(Creative Artist Agency) 등 미국 유명 스타 에이전시와 쟈니스(ジャニ-ズ )프로덕션을 비롯한 일본 프로덕션 등 스타를 양성하고 매니지먼트를 하는 선진 스타 시스템을 일부 도입하면서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이 안착하게 됐다.
이수만 SM 대표는 “미국에 유학하면서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스타를 키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한국에 돌아와서 체계화하고 전문화된 스타 시스템을 도입해 만든 것이 바로 SM엔터테인먼트”라고 SM 설립 배경을 말했다.
SM 설립 이후 DSP미디어,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등 가수와 아이돌그룹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연예기획사가 속속 등장했다. 한편으로 영화배우, 탤런트 등 연기자를 전문적으로 키우는 싸이더스, 에이스타스 등 연기자 전문 연예기획사도 지속해서 생겨났다.
2000년대 들어 한 연예인이 연기, 음악, 예능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이 일반화하면서 스타 시스템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연예기획사들도 가수와 연기자, 예능인 등 다양한 연예인을 양성하는 종합 연예기획사로 변모했다. 연예기획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드라마, 영화, 음반 등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명실상부한 스타 시스템의 핵심으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SM, YG, FNC, JYP, 싸이더스, 키이스트, 나무엑터스, 웰메이드 예당, DSP미디어, BH엔터테인먼트, 스타하우스엔터테인먼트 등 중대형 연예기획사들이 한국 대중문화 판도를 주도하는 스타 시스템의 주역들이다.
나무엑터스 김종도 대표는 “과거에는 영화사나 방송사가 신인을 발굴해 스타를 만드는 역할을 했지만, 최근에는 연예기획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스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연예기획사가 전문적인 스타 양성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며 “우리 대중문화계에서 톱스타로 활동하는 전지현, 김태희, 비, 이민호, 김수현, 수지, 엑소, 빅뱅, 소녀시대 등이 모두 연예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스타들인 것만 봐도 연예기획사의 위력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연예기획사들이 연예인 지망생을 발굴해 스타로 만드는 스타화 경로 역시 근래 들어 전문화하고 체계적으로 변모했다. 오디션, 길거리 캐스팅, 미인대회, 오디션 프로그램, 인터넷 등 매스미디어를 통해 연예인 지망생을 연습생으로 뽑은 뒤 2~6년 동안 연기, 댄스, 노래, 예능 개인기 등을 교육한다. 연습생 생활을 마친 뒤 TV, 광고, 영화, 콘서트, 뮤지컬 등을 통해 신인으로 데뷔시켜 연예인으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알리고 인기를 얻는 사람을 스타로 키운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노력, 시간이 투여된다. 연습생 생활을 마치고 방송무대를 통한 데뷔까지 비용은 엄청나다. 지난해 10월 보고서 ‘스타가 되기까지’를 발표한 흥국증권 최용재 연구원은 “5인 멤버의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는 데 약 10억 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5인이 2~3년간의 연습생 생활을 보내는 데 5억 원 정도 들어가고, 사전 마케팅부터 KBS, MBC 등 지상파 3사 음악방송 활동까지 6주간의 데뷔 활동 기간에 소요되는 비용이 5억 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연예기획사들은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스타들의 위기 관리도 담당한다. 대중의 비난을 불러왔던 스캔들로 추락할 위기에 몰렸던 이병헌 등 수많은 스타가 연예기획사의 뛰어난 관리로 스타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이 중국, 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에 수출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이 한국 연예기획사를 통해 연예인으로 데뷔하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2PM의 닉쿤, 미쓰에이의 지아·페이, 에프엑스의 빅토리아, 엠버, 트와이스의 쯔위 등이 연예기획사 중심의 스타 시스템을 통해 교육받고 국내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들이다. 최고 인기 아이돌그룹 엑소 멤버로 활동하다 탈퇴를 선언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는 크리스, 루한, 타오도 SM엔터테이먼트에서 육성됐다.
JYP엔터테인먼트 정욱 대표는 “스타를 육성하는 체계화된 한국 스타 시스템은 세계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국도 이 정도는 아니다.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은 외국으로까지 수출되고 있는 한류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 국내외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 스타 시스템에도 문제는 적지 않다. ‘노예계약’으로 명명되는 연예기획사와 소속 연예인의 불공정한 계약 관행, 소속 연예인의 사생활과 인권침해, 미성년자 연예인의 학습권 미보장, 소속 연예인과 연습생에 대한 성폭행 등 일부 소속사 관계자의 범죄 등이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이 명실상부한 선진 스타 시스템으로 도약하기 위해 선결돼야 할 과제들이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갑작스레 지휘자의 손끝이 하늘을 향한다. 그러자 실내의 모든 눈동자가 그 끝을 좇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숨과 함께 소리를 내뱉는다.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 사이에 그들의 시선은 정면의 손끝과 청중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소리와 시선 사이엔 날카로운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직접 목격한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예상 이상으로 진지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평균 나이 65세’, ‘KBS ’,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이는 모두 청춘합창단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청춘합창단은 2011년 7월 3일부터 10월 9일까지 방영된 KBS 2TV의 간판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의 을 통해 조직된 시니어 합창단이다. 합창단에는 당시 나이 84세부터 52세까지 대학 교수, 양봉업자 등 다양한 나이와 배경의 중년들이 7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모였다.
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1년 전 유사한 형태인 ‘남격합창단’을 방영하면서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청춘합창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춘합창단은 방영이 거듭될수록 단원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황혼의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장면들로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얻었다.
프로그램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지만, 최근 다시 한 번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지난 6월 15일 미국 뉴욕에 위치한 유엔본부에서의 역사적인 공연을 치렀기 때문이다.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유엔에서 제정한 ‘세계 노인 학대 인식 제고의 날’(6월 15일)을 기념해 열렸다. 이 공연에서 청춘합창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리랑’ 등 12곡을 불렀다. 특히 청춘합창단은 공연 이틀 전 생일(6월 13일)이었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깜짝 선곡하기도 했는데, 공연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반 총장은 무척 기뻐했다고. 이 공연을 위해 청춘합창단은 ‘마이 웨이(My Way)’와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과 같은 팝송 레퍼토리를 일부러 준비했고, 한국어 노래들은 자막을 준비하는 등의 정성을 기울였다.
지난 7월 KBS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유엔 공연 도전기의 주인공이었던 김삼순 단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춘합창단에서의 활동이 제 인생을 모두 바꿔 놓았죠. 그전까지는 딸들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면 지금은 온전히 제 인생을 사는 느낌입니다. 청춘합창단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아마 모두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2011년 방송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본격적인 합창단으로서의 활동을 위해 변신을 꾀했다. 강동구립여성합창단의 김상경 지휘자를 영입해 지금까지 연습과 공연을 함께하고 있다. 앰배서더 호텔의 권대욱 사장이 단장을 맡아 역사적인 유엔 공연의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방송을 통해 간과 신장을 이식 받은 사연이 소개됐던 이만덕 단원은 총무를 맡아 합창단의 모든 살림을 도맡았다. 당시 이만덕 총무는 수술 직후여서 몸과 연결된 의료기기를 휴대하고 오디션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완치돼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청춘합창단이 방송에서 마지막 도전으로 참가해 은상을 수상했던 2011년 국민 합창대축제 대회에서 솔로 파트를 맡아 전 국민을 감동시켰던 최고령의 노강진 단원은 현재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 중이다.
그 밖의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못하게 된 단원들의 빈자리는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채워졌다. 현재 원년 멤버는 약 절반 정도가 남은 상태. 지금은 KBS 오케스트라 하피스트 출신으로 관심을 모았던 배용자 단원이 최고령 왕언니 역할을 맡고 있다.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탓인지 청춘합창단을 찾는 이들의 요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한 달에 두세 차례 공연이 몇 달 전부터 예약될 정도다. 정부부처부터 지자체에 이르기까지 찾는 곳도 다양하다.
왕언니 배용자 단원은 “이제는 무대를 앞두고 심하게 긴장되지 않을 정도로 활동이 익숙해졌습니다”라며 “동료 단원들과 신 나게 무대를 즐기는 것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모이는 탓에 연습장소 마련도 쉽지 않았다. 결국 과천시민회관에 어렵게 터를 잡고 매주 화요일 연습 중에 있다. 힘들게 자리를 잡은 만큼 연습에는 열정적이다. 김상경 지휘자도 연습과정에서 자발적인 연습을 강조했다.
“청춘합창단은 다른 합창단과는 다르게 상대의 실수나 단점을 지적해서는 안됩니다. 특성상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고, 대신 다른 단원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스스로가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현재 청춘합창단은 내년 5월 6일에 있을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통일기금 모금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공연을 위해 새로운 레퍼토리 연습에 한창이고, 새로운 단원도 모집 중이다.
권대욱 단장은 “중년들은 남은 인생 시간을 보내는 데 몰두하기 쉬운데, 그래선 안 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청춘합창단의 단원들처럼 가슴 뛰는 일을 찾아 행동에 옮기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스페인음악은 전형적인 라틴음악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샹송이나 칸초네도 모두 라틴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에서 라틴음악이라고 하면 주로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중남미)음악을 말한다.
라틴음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음악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디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흑인의 음악이 다양하게 섞여 형성된 음악이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원주민이 너무 일찍 멸망했기 때문에 나머지 두 가지 요소만으로 만들어졌다. 룸바 맘보 차차차 볼레로 등의 리듬은 모두 쿠바에서 만들어져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갔으나 막상 쿠바에는 남아 있지 않다. 삼바는 브라질의 흑인계 리듬이다. 이와 같이 라틴음악에는 스페인음악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스페인음악을 좋아하다 보면 라틴음악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고 곡목도 겹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물론 필자 개인의 경우지만) 같은 ‘질투’라는 곡을 스페인음악으로 들으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정열적인 여자가 칼이라도 뽑아들고 달려들 것 같은 느낌이라면, 라틴음악의 경우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 어린 바닷가에서 가냘픈 여인이 훌쩍훌쩍 울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는 △사랑의 역사(Historia De Un Amor), 제비(La Golondrina),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등이 들어 있는 트리오 로스 판초스 △라 쿰파르시타, 달빛 어린 난초(Orchids In The Moonlight), 질투 등이 들어 있는 ‘남미의 허니문’ △맘보 5번, 라 밤바, 엘 콘도 파사, 커피룸바(Moliendo Cafe) 등이 들어 있는 맘보리듬의 창시자 페레츠 프라도 △아마폴라, 씨엘리토 린도(Cielito Lindo), 마리아 엘레나 등이 들어 있는 ‘라틴 칵테일 아우어’라는 판 등 라틴음악 역시 참 많이 들었다.
1982년 7월에 지하철 자료수집차 갔던 첫 번째 파리 방문 때 업무를 마치고 짧은 시간이나마 관광을 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센 강 유람선을 타고 에펠탑을 구경한 후 영화박물관 근처를 지나가는데 어디서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가보니 남미에서 온 듯한 2인조가 라틴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다리도 쉴 겸 돌난간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고 있자니 몸이 저절로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남미에서 온 듯한 한 젊은 여인이 손을 내밀어 춤을 청했고 신 나게 한 곡을 추고 나니 박수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다 박수를 친 것이다.
1984년 10월에서 11월에 걸친 약 3주간 필자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렸던 제10차 국제도로연맹(IRF) 세계도로회의에 한국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우리 일행이 묵던 호텔이 있는 코파카바나 해변의 뒷골목에는 수많은 기념품가게와 술집이 있었다. 그중 한 기념품가게에 들렀다가 괜찮은 술집을 물으니 알베르토(Alberto's) 피아노 바(Bar)를 소개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념품가게 여종업원인 마리 양이 저녁 때는 그 바의 유일한 여종업원이기도 하였다. 아담한 크기에 주인 알베르토의 피아노연주가 일품인 이 바가 마음에 들어 거의 매일 저녁마다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 바의 손님들은 대부분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 처음이었으나 멀리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젊은 사람이 자기들 나라의 노래를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신기해서 쉽게 친해졌고, 또 서로 어우러져 돌아가며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사실 당시 필자의 나이는 만 40이었으니 젊다고 하기에는 좀 그런 나이였지만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 보였는지 절대로 25세 이상으로는 보지 않아 내기를 해서 술도 꽤 많이 얻어마셨다.
하루는 기념품가게 여주인과 마리 양이 아주 괜찮은 극장식 레스토랑이 있으니 가겠다면 자기들이 안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에게 물어보니 12명 정도가 가겠다고 해서 알베르토에게 양해를 구한 여자들과 함께 레스토랑에 갔다. 실내는 꽤 넓었고 여러 테이블에 손님들이 있었으나 우리 테이블이 가장 많았다.
쇼가 시작되자 사회를 보는 여자가 테이블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다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면서 그날 밤은 ‘한국의 날’로 무대를 꾸미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 우리 음악에 맞춰 쇼를 진행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했다.
클라이맥스가 되자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우리 테이블에 손짓을 했고, 모두들 일행 중에 가장 젊었던 필자를 밀어내 타의반 자의반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아름다운 백 댄서들 사이에서 정말 풍만한 반나(半裸)의 두 히로인(heroine)과 평생 잊을 수 없는 즐거운 무대를 가질 수 있었다.
쇼가 끝나자 필자와 함께 춤을 추었던 두 여자가 옷을 갈아입고 우리 테이블에 와 일행과 같이 어울려 맥주를 마셨다. 그때서야 우리들의 의문이 풀릴 수 있었다. 그들은 워커힐 호텔의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6개월간 브라질 댄싱 팀으로 공연을 했고, 귀국 후에는 한국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 무척 반가웠다는 것이다.
한편 포르투갈의 민속음악인 파두(Fado)도 일부 라틴음악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파두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에 방영된 차화연 주연의 TV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아마리아 호드리게스가 부른 ‘검은 돛배(Barco Negro)’가 주제음악으로 사용된 후부터였다.
필자의 ‘버킷리스트 여행지’ 중의 한 곳은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리버풀엔 ‘비틀스’가 있기 때문이다. 통기타로 번안 곡들을 들으며 젊은 시대를 보낸 사람들. 소위 말하는 ‘팝송 세대’들은 여전히 올드 팝을 들으면서 스멀스멀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감성에 젖곤 한다. 젊을 적 추억은 팝송 음률에 남아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명치끝을 아프게 꼭꼭 찌른다. 비틀스 노래를 들으며 ‘지역 맥주’를 마시던 ‘캐번 바’를 내 어찌 잊으리오.
◇ 매튜 골목에서 만나는 비틀스 첫 무대 캐번 클럽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Manchester), 리버풀(liverpool)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축구선수들이 이 도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리버풀은 맨체스터를 거쳐 가게 된다. 리버풀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주변의 대로변 옆으로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열 지어 있다.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을 비롯해 엠파이어 극장, 아트 갤러리, 도서관 등.
특히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 홀의 규모(51m 길이, 22m 넓이)가 커서 눈길을 잡아끈다. 1838년에 초석을 마련해 1854년에야 완공된 최초의 네오클래식 건물은 법정과 콘서트홀이라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물 정면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앨버트 공의 동상과 참전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활황을 기억케 한다. 실내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1871년)과 12개의 동상이 있다. 현재는 각종 전시회, 연회, 축제 등의 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무엇보다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곳은 ‘비틀스(The Beatles)’에 대한 흔적이다. 도심 곳곳에서 비틀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애비 로드와 스트로베리 필드 등 그들 노래에 영감을 준 장소들, ‘비틀스 스토리(www.beatlesstory.com)’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들. 그중에서 여행자들이 ‘비틀스 일번지’로 찾는 곳은 매튜거리(Mathew street)다. 매튜 골목에는 5~6개의 퍼브와 클럽이 뒤섞여 있다.
숨은 그림 찾듯이 비틀스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찾아내면서 걷다 보면 골목 끝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논 동상을 만난다. 비틀스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는 캐번 1클럽(The Cavern Club) 앞이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이 만들어 낸 비틀스.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980),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 등. 비틀스는 이곳에서 근 2년간(1961년~63년) 292회 공연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첫 번째 클럽이 클래식하다면, 동굴 형태로 된 제 2클럽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왁자하다.
◇ 매일 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비틀스 음악
먼저 비틀스가 첫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1클럽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온통 비틀스의 흔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실내에는 작은 무대가 있고 한쪽에는 바 카운터와 초라한 의자들이 놓여 있다. 유행 지난 촌스러움, 칙칙함, 퀴퀴함이 함께 아우러진다. 대낮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가볍게 잔술을 마신다. 신 맛과 정제되지 않은 맛을 내는 지역 생맥주는 마실수록 묘하게 매력적이다. 해가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통기타를 두드리는 무명 가수의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퇴색한 컨트리 가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의 주인공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를 닮은 듯한 무명 가수가 이미 귀에 익숙한 팝송을 부른다. ‘렛 잇 비(Let It Be)’, ‘러브 미 두(Love Me Do)’, ‘이매진(Imagine)’ 등등. 가수는 힘겨운지 간간이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노래를 불러 젖힌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무대에 나가 음률에 맞춰 막춤을 춘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매튜거리의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진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를 남긴 비틀스 멤버 네 사람의 삶을 일일이 조명할 수는 없다. 단 놀라운 것은 이들은 악보를 볼 수 없는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수한 히트곡을 만들어 낸 신화 같은 존재. 그들을 더 이해하려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를 찾으면 된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캐번클럽, 스타클럽 등의 명소들을 재현해 놓았다. 또 비틀스가 출연했던 뮤직 비디오 등의 영상자료를 비디오로 볼 수 있다. 비틀스의 오리지널 무대 의상과 존 레논이 연주했던 피아노,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세기의 뮤지션 비틀스는 리버풀을 늘 빛내고 있다. ‘리버풀의 비틀스’가 아니라, ‘비틀스의 리버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 곳곳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영화 를 보면 좋다. 13명의 배우들이 영화 스토리에 걸맞게 비틀스 음악을 잘 매치해 놓았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전 애인으로도 알려진 짐 스터게스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또 ‘비긴즈-노 웨어 보이(Begins-Nowhere boy, 2009)’에서는 존 레논의 삶을 조명해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비틀스, 오노 요코 등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올해 5월, 73세의 노장 폴 매카트니는 내한공연을 했다. 비록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설은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판타스틱’을 외쳐댔다. 라는 다큐영화를 보면 2년 전의 폴 매카트니가 출연해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틀스라는 그룹은 오래전에 흩어졌지만 단 한 명의 뮤지션이 남아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리버풀 클럽에서 만취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클럽 앞에는 술 취한 사람들을 정리, 통제하는 지킴이들이 있다. 그들은 ‘필자처럼 좋은 사람(?)’만 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 해양 무역도시의 옛 잔상들, 노예 거래
리버풀은 바닷가가 있는 항구 도시다. 오래전부터 해양 무역 도시였고 20세기 초, ‘대영 제국 제2의 도시’로 불렸다. 그러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심히 파괴되었다. 특히 리버풀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 내 다른 어떤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받았으나 전쟁 이후 재건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항구 주변은 휘황한 현대적인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이 건물에는 머시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국제 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등의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 노예박물관이 관심을 끈다.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오래전, 이 항구에는 가나, 자메이카 인 등 무수한 노예들의 거래가 이뤄졌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국제노예박물관을 둘러보면, 죄의식조차 없던 그 시절의 영국민들의 잔인함이 떠올려진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관련된 많은 영화, 다큐들이 있지만 최신작이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면 그때의 잔인성과 몰인간적인 영국 귀족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라는 현재 유명 배우의 출연 계기가 독특하다. ‘컴버배치’라는 성씨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서 노예를 부렸던 조상의 흔적이었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에이브러햄 컴버배치(1726~1785년)가 그의 조상이다. 베네딕트의 어머니인 여배우 완다 벤담은 노예제 보상 피소를 우려해 본명으로 배우활동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속죄하는 의미를 담아 이 영화에 적극 출연했다. 에서는 선량한 백인 윌리엄 포드로 분했다.
또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과 무관치 않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스햄튼(1912년 4월 10일)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항해하다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대형 여객선. 대서양 횡단여행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이 배의 공식항구는 리버풀이었고, 승무원과 승객의 상당수도 리버풀 사람들이었다. 타이타닉호의 탄생과 침몰 및 각종 배의 모형을 전시한 곳이 해양박물관이다. 해질 무렵, 리버풀 대성당(Liverpool Cathedral)을 향한다. 영국 국교회의 성당으로는 세계 최대의 크기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탑 위로 올라가 바라본 리버풀 도심은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건물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리버풀을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을 알기에 그날 바라본 낙조는 유난히 쓸쓸했다.
◇ Travel Tip
- 현지 교통 정보 런던에서 지방 이동은 특급기차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익스프레스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는 예약하지 않으면 버스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싸다.
영국 대표 음식들 영국의 아침 식사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양이나 메뉴가 풍성하다. 영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샌드위치와 피시 앤드 칩스를 들 수 있다. 카드놀이를 좋아했던 샌드위치 백작이 카드놀이를 하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냈다는 샌드위치는 영국인의 일반적인 점심 메뉴다.
시차 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까지는 서머타임으로 8시간 느리다.
전압 다른 유럽권역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꼭 어댑터가 필요하다. 표준전압은 230/240V, 50㎐. 플러그는 발이 3개 달린 BF 타입.
화폐 단위 파운드를 이용한다.
연계 도시 여행 시작을 런던에서 했다면 리버풀을 거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glasgow) ~ 에든버러(Edinburgh)로 가면 된다. 글래스고는 공업도시이고 에든버러는 옛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도(古都)다. 특히 에든버러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주 멋진 도시다.
추천 스코틀랜드 산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 : 스카치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 그중 오직 맥아의 과정을 거친 보리 한 가지로 만들어지며 동일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위스키(Single Malt Whisky)가 최고다. 현지인에게 추천 받은 브랜드로는 Glenfiddich, Jura, Talisker가 있다. 특히 탈리스커는 한국인 술 마니아에게 큰 인기다. 맥주는 이니스 앤 건스(innis & gunns)가 맛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깊다.
“죽기 전에 ‘베토벤의 심포니9’, ‘햄릿’과 ‘맥베스’, ‘라이더 스핀’ 등을 발레로 창작하고 싶어요.”
한 남자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자, 아내의 목소리가 커진다.
“곧 은퇴하신다더니 또 만들어요? 은퇴 못하겠네. 하여튼 이게 문제야. 공연 하나 끝나면 그 다음 작품 이야기가 나온다니까. (웃음)”
못 말리는 부부다.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작품에 대한 욕심을 이야기하는 남편과 그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이해해 주는 아내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칠 때면 핑크빛 긴장감이 감돌다가도, 작품 이야기가 나오면 그 양상은 180도로 변하기도 한다.
묘한 케미스트리다. 집에서는 서로 안 볼 듯이 싸우다가도 일터로 돌아가면 서로 웃으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민간 직업발레단인 서울발레시어터의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 예술 감독 부부다.
1980년대 후반 김 단장은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활동했고, 제임스 전은 그곳의 객원 무용수로 활약했다. 동남아 투어는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계기가 됐다. 같은 호텔과 연습실에서 생활하며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왕래가 많아지면서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은 1989년. 무용수로서 각자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던 그들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 이상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우직하게 그것을 지켜냈다. 발레와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고리가 그들을 단단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 서울발레시어터를 낳은 지 20년
“아마 저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지금의 서울발레시어터는 없었겠죠. 아이를 낳게 되면 여기에 쏟을 수 있는 열정을 분산해야 할 테니까요. 우리가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럴 순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들 부부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아이를 낳을 것인가. 새로운 민간 발레단체를 만들 것인가’하는 고민에 빠져있었던 것. 다른 부부들이었다면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하게 절충하며 인생을 꾸려나가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은 발레단과 아이에게 모두 양립할 수는 없었다. 한 곳에 집중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이 부부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 이 부분에서는 둘의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발레라는 공통분모는 이들의 선택을 더욱 과감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낳는 것 대신 발레시어터를 만들어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식처럼 삼아 살기로 결정했다. 이름은 서울발레시어터. 1995년생으로 올해 20세 성인이 됐다. 20년 동안 단장인 김인희는 발레시어터의 살림을, 상임안무가인 제임스 전은 예술적 책임을 도맡았다. 작은 민간 예술단체이다 보니 재정적으로 적잖게 어려움도 많았다. 예술단체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럼에도 20년 동안 굳건하게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술가·예술단체로서의 책임감과 직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예술을 통해서 사회가 건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예술단체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직원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20년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 홈리스(Homeless)발레와 부부발레
“서울발레시어터를 만들 때 목표가 발레 대중화와 창작 발레 역수출이었어요. 그중에 전자는 발레 시장을 키우자는 뜻이 담겨있었죠. 그렇게 되려면 발레를 직접 체험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했어요. 몸으로 그 희열을 느낀 사람이 우리의 미래 관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다. 이들이 생각하는 발레는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그 자체였다. 서울발레시어터라는 테두리 안에서 ‘귀족의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2011년 빅이슈 잡지 판매원(홈리스가 판매하는 잡지)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발레라는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림과 동시에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일환이었다.
제임스가 이들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뉴욕에서 살 때 홈리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환멸이나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 제임스는 이들을 관찰하면서 ‘Soloist’와 ‘꼬뮤니케’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작품들을 홈리스 발레 프로젝트의 공연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은 홈리스들에게 자립심과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했지만, 제임스와 김 단장에게 더 큰 떨림과 영감으로 돌아왔다. 발레 대중화를 위해 무엇인가 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홈리스 발레에서 자신감을 얻어 장애우 발레단, 과천 시민 발레단을 거쳐 부부 발레단까지 결성했습니다. 특히 3년 전부터 시작한 부부 발레단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어요.”
홈리스 발레에서 이어진 부부 발레 클래스는 제임스와 김씨 부부에게 새로운 보람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특히 클래스를 수강하는 부부들이 변화하는 모습은 보람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발레로 인해 8년 만에 처음으로 대화를 했다는 부부, 발레를 시작한 후 아내가 예뻐 보인다는 남편, 아들과 며느리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시어머니까지. 부부 발레는 분명 발레 대중화 그 이상의 뜨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변화가 기가 막혔죠. 무뚝뚝했던 부부의 표정이 4~5주가 지나자 밝아지기 시작했어요. 발레를 하며 자연스럽게 스킨십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이죠. 주말에 2시간인 이 수업으로 많은 가정이 변화를 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지금 2기를 지나 3기를 뽑고 있는데 이전 부부들은 자체적으로 홍보대사가 됐어요.”
◇ 발레를 창작한다는 것
10월에 열린 스위스 바젤발레단과의 합동공연은 서울발레시어터에게 큰 의미를 안겨줬다. 제임스 전이 만든 ‘보이스 인 더 윈드(Voice In The Wind)’와 ‘달빛 속에 나(Under The Moonlight)’가 끝나자 수많은 외국인 관객들에게서 박수갈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기본 고전 발레의 틀을 넘지 않으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공연에 외국인 관객들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안무를 창작한다는 것은 그만한 고통이 수반됐기에 공연 후 제임스가 느끼는 자부심은 더욱 컸다.
“창작은 힘들지만 결과물이 나오면 성취감을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때문에 바젤발레단과의 공연이 끝났을 때는 힘들었던 것도 잊고 행복하더라고요.”
은퇴를 선언해 놓고도 작품 창작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박수갈채와 희열. 그것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아서 힘든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20년간 만든 크고 작은 작품이 104개나 된다. 1년에 5개의 작품을 만든 셈이다. 제임스 전이 이렇게 쉼 없이 창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작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죠. 저도 작품의 영감을 거기에서 받아요. 세상의 모든 것이 제 영감의 소재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는데도 이 부부의 한숨은 멈추질 않는다. 발레라는 예술 문화를 향유하려는 이들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레의 대중화에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가로서 서울발레시어터를 일정 부분까지 끌어올렸지만, 후배들이 가야 할 예술계의 현실과 미래가 어두운 탓이다.
“제가 봐도 예술계의 앞날이 캄캄한데 자식 같은 후배들은 오죽하겠어요. 지금 시장도 좁고, 은퇴하는 사람들은 설 자리도 없는데 후배들에게는 그것을 물려주지 말아야죠. 발레 대중화가 돼야 후배들이 마음 놓고 공연하겠지요.”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이 이끌어 온 20세의 서울발레시어터는 그야말로 헝그리 정신의 산물 이었다. 이제 그들의 열정은 후배들을 향해 있다. 40년 안무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김 단장과 은퇴를 앞둔 제임스 전은 이제 무대가 아닌 곳에서 서울발레시어터의 살림을 책임 질 계획이다. 이들의 식지 않는 열정으로 서울발레시어터의 미래는 더욱 풍요롭다.
>>>김인희 단장…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유학, 유니버설발레단 단원 및 지도 위원을 거쳐 국립 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냈다. 현재는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 STP발레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발레협회 올해의 발레리나상(1983),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문화예술공로상(2010), 한국발레협회 발레CEO상(2012)을 수상했다.
>>>제임스 전 예술 감독…
줄리어드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모리스베자르 발레단 및 플로리다 발레단 무용수로 활동했다. 이어 유니버설발레단 및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및 예술감독, 한국체육대학교 생활무용학과 교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는 무용월간지 「몸」지 주관, 무용예술상 올해의 안무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4년에도 같은 곳에서 로 무용예술상 작품상을 받았다. 이듬해 도 서울무용제에서 안무상의 영예를 안았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에 걸쳐 방송된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을 모티브로 제작한 뮤지컬 .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시대를 대표하는 가요들을 리메이크해 당시의 감동을 전한다. 6·25전쟁으로 자식을 잃고 슬픔 속에 살아가는 돌산댁 역은 배우 나문희가, 전쟁포로로 끌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양백천 역은 배우 박인환이 연기한다. 뮤지컬의 연출이자 서울시 뮤지컬단을 이끌고 있는 김덕남 단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Interview>>
이번 작품을 연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콘텐츠로 서울시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뮤지컬산업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홍수 속에 일부 연령층의 뮤지컬 마니아가 선호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소위 그들만의 잔치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 뮤지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접근방법으로 작품을 개발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이 빚어낸 질곡의 삶을 조명한 우리의 이야기 을 공연함으로써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겪었던 중·장년 세대들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시니어뮤지컬 시장의 활로를 개척해 보고자 합니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는지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의 마라톤 방송으로 진행됐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세계 최장시간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시청자의 88.8%가 방송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는 한국 갤럽조사연구소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고, 저도 물론 그중의 한 명이었어요. 단 한 명의 가족이라도 더 찾길 간절히 기도하며 방송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신혼 때 헤어져 3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부부가 재회하기도 했는데, 그 사연이 그렇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토록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감동의 시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중·장년 배우들이 공연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연극무대입니다. 이번 작품은 뮤지컬인데요. 젊은 배우들이 장악하는 다른 뮤지컬과 비교해 이 작품이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중년 세대뿐 아니라 젊은 층을 아울러 모든 세대가 잠시 즐기고 끝나 버리는 화려한 재미보다는 오래 마음속에 남을 만한 깊이 있는 감동을 원하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중·장년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까지 공감이 갈 수 있는 배우가 누굴까 고민하다 나문희·박인환씨를 생각했어요. 대본 자체가 희곡을 리메이크하는 작품이라 연극성이 강합니다. 대극장에서 노래보다 대사가 많은 작품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노래보다 연기가 우선시된 캐스팅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웃겨주고 감동을 선사하는 두 배우의 명품연기가 이번 공연의 완성도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영화 처럼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공감대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나요?
시니어뮤지컬인 만큼 중·장년 세대가 많이 관람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연을 관람하며 아프고 어리숙했던 과거를 잠시 돌아다보고, 다시 앞을 내다보면 의미있는 삶을 설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부터 조부모 세대까지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며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이산이라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 동안 헤어져 있어도 변하지 않는 부부, 그리고 가족의 끈끈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길 바랍니다.
△김덕남 연출
세계 25개 도시 공연, 미국 4개 도시 공연. 주요작 , , 등
△ 뮤지컬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일정: 10월 30일~11월 15일 연출 김덕남
출연: 나문희, 박인환, 곽은태, 왕은숙, 권명현 등
서울 신답사거리 명문예식장이 있던 자리에서는 매주 수요일이면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합주가 흘러나온다. 힘 있고 웅장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청년악단이 아닐까 싶고, 짜임새 있는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CD를 틀어놓은 듯 흐트러짐이 없다. 내공이 느껴지는 이 연주의 주인공은 바로 평균나이 75세의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다. 그들에게 있어 음악은 없으면 안 되는 공기와 같고, 손때 묻은 악기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평생친구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우리는 여러 곳에서 나름의 세월을 보내다가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래도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며 왔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각자가 가진 소리는 다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친구가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어서 멋진 하모니가 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모두 행복을 세는 아름다운 신중년의 삶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김주면(金周冕·83) 단장이 9월 20일 열린 공연 ‘신중년의 길을 함께 가는 길벗들의 하모니’에서 단원들을 소개한 말이다. 그가 ‘행복을 세는’이라고 표현한 것은 ‘살아온 햇수를 세지 말고, 친구를 세어가며 살아가라’는 글을 의미 있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년 전 아내와 사별했지만, 50여 명의 단원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행복을 세어가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이 세상을 다하는 그날까지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김주면 단장을 만나 악단의 요모조모에 대해 물어봤다.
시니어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게 된 배경은?
1980년대, 당시 명문예식장 대표 겸 성동문화원장이었던 신동호 회장님이 악단 창단을 준비하고 계셨죠. 1989년에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가 탄생했어요. 처음에는 저와 함께 공군군악대에 있었던 강도희씨가 지휘를 맡았어요. 창단하고 2년 정도 뒤에 제가 현직에서 퇴임하고 악단에 들어갔는데 그땐 유포니움이라는 악기를 연주했죠. 그러다 신 회장의 권유로 단장을 맡게 돼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벌써 25년쯤 됐겠네요.
단원들의 특징
행사마다 참여하는 인원이 다르긴 하지만 50여 명의 단원이 주기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대부분은 학창시절 기악을 전공하고 육·해·공·해병군악대를 거쳐 경찰악대에서 평생 연주를 하다 퇴임하신 분들이에요. 그렇지 않은 분들도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이곳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죠. 나이는 제가 83세로 제일 많고, 드럼을 치는 김하용 단원도 저와 동갑이에요. 평균 나이는 75세 정도죠. 가장 젊은 친구는 지금 총무 겸 무궁화악단 홍보팀장을 맡은 허면회 단원인데 56세예요. 제 아들이랑 동갑이죠. 단원으로 활동한 지는 5년 정도 됐고, 경찰대학소속 국립경찰교향악단 출신인데 확실히 젊은 친구라 악단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덕분에 서울시 재능나눔봉사단으로 활동도 했고, 표창장까지 받게 됐죠.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려면?
대개 시니어 오케스트라라고 하면 은퇴하고 취미로 악기를 배운 아마추어로 아는데 우린 평생 음악을 해온 사람들이죠. 저 역시 악기를 처음 손에 든 지가 70년이 넘어가고, 다른 분들도 수십 년간 악기를 다뤄온 프로예요. 그렇기 때문에 뒤늦게 악기를 배운 초보자들은 단원이 될 수 없는 게 현실이죠. 그런 것을 회칙 등으로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소개로 왔다가도 단원들의 수준 높은 연주를 듣고는 발길을 돌리곤 하니까요.
오케스트라 구성
적게는 40여 명에서 많게는 60여 명까지 합주해요. 클라리넷, 피콜로, 플롯, 혼, 유포니움, 알토색소폰, 테너색소폰, 바리톤색소폰, 튜바, 트롬본, 트럼펫, 베이스기타, 드럼, 아코디언 등 10여 가지 악기가 훌륭한 화음을 이루죠. 클라리넷, 색소폰, 트롬본, 트럼펫 연주자가 과반수를 차지해요. 오케스트라 내에 경음악(스윙밴드)악단, 선교악단, 캄보악단, 탱고악단, 현악5중주악단, 노래자랑운영팀 등 다양한 소규모 악단도 편성돼 있어요.
주요 활동
1년에 40~50회가량 의미 있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요. 각종 연주회를 비롯해 정부나 각 시·구청 의식 행사, 캠페인 행사, 종교 연주 행사 등 다양하죠. 2012년에는 여수엑스포 초청연주회에, 2013년에는 순천 관악제 초청연주회에 나가는 등 먼 지방까지 연주를 가기도 하고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소속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행사에 나갈 때 의미가 있죠. 10월 23일과 30일에도 나주 학생독립기념일 공연에 나갔어요. 행사를 제외하고는 매주 수요일마다 명문예식장 자리에 있는 연습실에 모여 연습도 하고 친목도 다지고 있습니다.
즐거운 점과 힘든 점
무엇보다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훌륭한 단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행복하죠. 우리는 공연을 할 때 잘 다려진 제복을 갖춰 입거든요. 그렇게 입고 무대에 서면 관객이 우릴 보고 멋있다고 환호를 해주는데 그땐 정말 제 나이를 잊을 정도로 즐거워요. 각자의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도 황홀하고, 그 연주를 듣고 박수 치며 감격하는 분들을 볼 때 보람을 느끼죠. 힘든 것은 단원들이 나이도 있고 하다 보니 건강상의 이유나 다른 사정으로 인해서 참여하지 못할 때예요. 함께할 수 없다는 게 아쉽고, 단장으로서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구성원이 빠지게 되니 합주에 지장이 생겨 곤란하기도 하죠. 돈을 받아가며 하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강요하긴 힘들잖아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해주는 단원들을 볼 때 참 뿌듯한 마음이 들죠.
흔히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논어(論語) 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나이 50에 천명(天命), 즉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천명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령이나 원리, 혹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50은 하늘의 뜻을 알고 그에 순응하거나 객관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깨우치는 나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물리적 시간이다. 그렇다면 한 직업을 50년 넘게 했고 그 일을 여전히 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직업에 임할까.
우리 시대 최고 연기자로 꼽히는 이순재(79), 최불암(75), 나문희(74), 김혜자(72). 이들은 50~59년 동안 연기자로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무대와 TV, 그리고 영화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기자라는 직업을 지천명의 세월 동안 행해온 이들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연기라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일까.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연극반 활동을 한 이순재는 1956년 연극 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1년 KBS 개국 드라마 를 통해 TV드라마로 활동영역을 넓힌 뒤, 1965년 영화 로 영화계까지 진출했다. 이후 연극, 드라마, 영화를 오가며 왕성한 연기 활동을 하는 이순재는 요즘에도 SBS 사극 , 연극 에 출연하고 있다. 이순재는 근래 들어 등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또 다른 면모를 보이며 젊은 시청자로부터도 사랑받고 있다.
대학 졸업 후 59년 동안을 연기자로 살아온 이순재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제에선 신인상 부문이 없어요. 왜냐하면, 관객은 배우가 스크린에 나서는 순간 신인인지 아닌지 구분해서 연기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연기자는 신인이든,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든 출연한 작품의 연기로만 평가받아요. 연기력은 연차 순이 아니기에 연기 경력이 오래된 사람도 출연한 작품마다 늘 공부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안 돼요. 연기자는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 연기 경력과 상관없이 백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이순재는 59년이라는 오랜 세월 연기를 해 기교는 늘었을지 모르지만, 매번 임하는 작품마다 캐릭터와 출연 연기자들이 다르므로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경력이 오래된 연기자라고 하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순재는 “단 한 번도 촬영장에서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고 촬영에 늦은 적이 없어요. 드라마나 영화는 수많은 사람의 공동 작업이고 그중 한 사람이라도 잘못하면 작품이 실패할 수 있으니까요. 대사 암기력에 문제가 생겨 NG를 반복적으로 내 다른 연기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때가 은퇴할 시기예요”라고 말한다.
1961년 MBC 문화방송 1기 공채 성우로 방송계에 진출한 나문희는 1975년 TV드라마 등을 통해 드라마 연기자로 전업한 뒤 드라마에 전념하다 영화와 연극 활동을 병행하며 연기 영역을 확장했다.
지난 7~8월 서울 대학로에서 연극 에 출연한 뒤 10월 30일부터 11월 1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뮤지컬 으로 관객과 만난다.
연예계에 데뷔한 이후 단 한 해도 쉬어본 적이 없다는 나문희는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의 연기는 장르는 다르지만 작품마다 오랜 시간 연습을 통해 캐릭터를 체현하고 연기와 동선을 온몸으로 익혀야 하고 호흡도 조절해야 해요. 상대 배우와의 조화도 이뤄야 비로소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지요.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연기에는 왕도도 없고 경력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오랜 시간 연습하며 흘린 땀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때문인지 나문희는 54년 연기경력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나 관객, 시청자가 “연기가 좋아졌다”고 하는 말을 가장 큰 찬사로 받아들인다.
나문희는 “사람들이 물어요. 연기하는 것이 힘들지 않으냐고요. 힘들지요. 무대나 카메라 앞에 서기 위해 오랜 시간 캐릭터 분석, 대사암기부터 출연 연기자와의 연기호흡 조율까지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이에요. 그런데 막상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면 힘이 나고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제 연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저 역시 정말 행복하지요. 제가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설레며 연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해요”라며 웃는다.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최불암은 1967년 KBS 탤런트로 특채됐다가 1969년 MBC 개국과 함께 자리를 옮겨 , 등 수많은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또한, 영화 , 등에 출연하며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도 만나고 있다. 최불암은 ‘국민 아버지’라는 타이틀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요즘 시청자와 만나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 의 진행자로 나서 연기자 이외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 최불암은 “좋은 연기자란 자신의 감성과 이성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끝없는 수련과 날카롭고 냉정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때를 씻고 내가 아닌 그의 인물을 구현, 창조해서 그 인물의 특성과 영혼을 표출해야 하므로 배우에게는 혹독한 훈련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하는 작품마다 스토리와 캐릭터가 다르므로 경력에 상관없이 출연할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1961년 KBS 1기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김혜자는 그동안 드라마 , , , , 영화 , , , 연극 , , 등 수많은 작품으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연극 로 11월 4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 홀에서 관객과 만나는 김혜자는 “‘연기의 달인’, ‘연기력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연기자는 지금 이 순간 관객이나 시청자와 만나는 작품으로만 평가받는 거니까요. 과거의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고 해서 지금 하는 작품에서 똑같은 연기력을 유지할 수 없어요. 지난 50여 년 연기를 했지만 제일 무서운 것은 관객의 눈이에요. 연극의 경우는 매회 연기에 대한 평가가 다르잖아요.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는 50년 경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작품에서 후배가 더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면 전 그 후배에게 많은 것을 배워요”라고 말한다.
김혜자는 “연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와 경력이 아닌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해요.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그때가 은퇴할 시점이라고 봐요”라고 말했다.
최고의 연기자로 평가받는 이순재, 최불암, 나문희, 김혜자 등 네 명의 배우는 연기자로서 50여 년의 한길을 걷는 것이 연기의 기교나 작품 분석에는 도움이 되지만 작품마다 캐릭터와 연기, 출연자가 다르므로 항상 공부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과 시청자에게 외면 받는다고 공통으로 강조한다.
연기 경력과 나이, 그리고 명성에 안주해 공부나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후배 연기자들과의 연기 조화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연기력에 금세 문제가 나타난다고 했다. 네 명의 배우는“연기력은 연차 순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명한 어른이 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고 “늘 책을 읽고 다른 사람 말을 듣는 연습을 해라. 결국은 삶의 태도가 민주적이어야 한다. 나이라는 권력으로 쇠한 것을 메우려고 하면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듣는 연습을 해야 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게 바로 노망든 것이다. 좀 다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기를 그치지 말고 참신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하늘의 명령이나 원리를 깨닫는다는 50여 년 긴 시간을 연기자라는 한길을 걸었으면서도 이순재, 최불암, 나문희, 김혜자 등 네 명의 연기자는 황현산 교수의 말을 드라마, 영화, 연극무대에서 실천하고 있다.
연기할 때 나이와 경력, 명성을 권력화 하는 대신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첫 작품을 하는 신인처럼 노력하고 공부하는 연기자가 바로 이순재, 최불암, 나문희, 김혜자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자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어림 40년 전이다. 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보컬을 싱어로, 기타리스트를 기타맨으로, 콘서트를 리사이틀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4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기타를 치며 싱어로 활동했다. 비틀스는 당시에도 전설이 되어 있었고, ‘딥퍼플’과 ‘시시알’, ‘박스탑스’, ‘산타나’ 등이 빚어낸 선율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1974년 겨울 고향인 작은 읍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낸 선율은 누군가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럼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어깨너머로 배운 ‘슬픈 악기’ 기타
어릴 적, 기타는 슬픈 악기였다. 어른들은 기타로 뽕짝조의 옛노래를 뜯었다.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음 자리를 짚어 흉내를 내자 마을의 (다리가 아파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아픈 형이 한번 배워보라 했다. 주법도 익히지 않고 바로 ‘생일 없는 소년’과 ‘애수의 소야곡’을 따라서 쳤다. 디마이너(Dm)의 슬픈 곡들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에 몇 곡을 익혔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타를 튕기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내 기타 실력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팝송 열풍이 불어왔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니 기타는 더 이상 슬픈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전자기타에서 뿜어 나오는 다양한 음색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기타를 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다시 기타를 쥐었다.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껴안게 된 연유가 있었다. 문학의 밤이 열린 어느 가을날이었다. 저마다 한껏 말[言]에 멋을 부린 시를 낭송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지루했다. 1부가 끝나고 초청손님으로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들고 온 기타를 튕기며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렀다. 모두 ‘타임’ 속으로 우아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개뿔이었다. 한순간에 팝송이 장내를 압도했다. 나는 순간 다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기타교습소에 등록했다. 비로소 디마이너(Dm)의 ‘슬픈 기타’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과 코드를 익혔다. 3개월 정도 학원에서 배운 뒤에는 홀로 음악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찾았다. 나는 작곡하며 노래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4인조 그룹사운드 탄생의 전말
대학 입시에 예상대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사는 게 시시해 보였다. 그때 집에서 튕겼던 기타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갔고, 자연 음악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드럼도 잘 두드렸다. 어느 날 친구가 (혹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룹사운드를 해보자고 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또 한 명의 음악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 밴드부 출신으로 채보(採譜) 능력이 출중했다. 레코드 음반에서 나오는 노래를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비틀스처럼 멤버를 기타(퍼스트, 세컨드)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장발 단속에 걸릴지라도 머리를 결사적으로 기르고, 공연 막판에는 ‘딥퍼플’처럼 드럼과 기타를 부숴버리자며 낄낄댔다. 그룹사운드 이름은 ‘겨울나무’로 정했다. 그러면서 겨울에만 나타나 공연을 하고 홀연 사라지는 신비의 그룹이 되자고 했다. 또 삭풍이 부는 벌판에서도 봄꿈을 장만하는 겨울나무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고 했다.
첫 공연은 연말쯤 하기로 했다. 꿈은 부풀어 올랐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우선 퍼스트를 맡을 만한 기타맨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싱어였으니 당연히 세컨드 기타를 치며 노래해야 했다. 또 퍼스트를 감당하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퍼스트 기타는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간주 또는 후주에 애드리브(즉흥연주)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기타맨을 널리 구했다. 하지만 기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기타맨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희소식을 전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타맨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기타맨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었다. 전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들녘에 우람하게 정미소가 서 있었고, 기타맨은 그 집 아들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그는 기타는 만지지만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형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 겸손이 더 맘에 들었고, 그가 기타맨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 집에서 한 밤을 자며 밤새 설득했다. 그렇게 퍼스트 기타맨을 얻었다. 4인조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1974년 12월 첫 리사이틀
하지만 사람은 있는데 연주할 악기가 없었다. 자신의 악기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기타맨은 형 것을 빌려 쓰기로 했지만 나는 전자기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만그만한 살림에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전자기타를 찾아 읍내를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정작 악기가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누가 전자기타를 빌려준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전자기타를 집에 ‘모셔놓고 있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선배의 집은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초겨울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지나 묻고 물어서 그 집을 찾아갔다. 선배는 집에 없었다. 대뜸 이 집에 기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날 한참 노려보더니 외양간을 가리켰다. 외양간을 살피니 정말 전자기타가 있었다.
그러나 목이 부러진 채 소 여물통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하지 않고 기타나 튕기는 자식이 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부숴 버렸을 것이다. 갈 때는 몰랐는데 읍내로 돌아오는 길이 무지 멀었다. 들녘에서는 삭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이 왔다. 눈물이 났다.
1974년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읍내 우체국 앞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예식장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리사이틀’이 펄럭였다. 하지만 무대 위는 초라했다. 전자기타를 구하지 못한 나는 통기타를 멨고, 역시 베이스기타를 구하지 못한 친구는 색소폰을 들고 무대에 섰다. 나는 통기타로 코드를 짚으며 ‘Have ever seen the rain’, ‘Beautiful brown eye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등 10여 곡을 불렀다. 전자음에 맞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싶었는데, 그날 공연은 너무도 촌스러웠다. 베이스가 없으니 고음이 공중으로 떠다니고 음악은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룹사운드 공연을 처음 본 읍내 젊은이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처음으로 하객 아닌 관객을 맞아들인 예식장 주인아저씨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나는 전기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후기 대학에 응시했다. 나만 아니라 첫 번째 음악 친구도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서울, 그는 이리(익산)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모여 연습을 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공연장소로 읍내 극장을 빌렸다. 원래 멤버에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겨울나무 공연 소식은 별 볼일 없는 읍내의 심심한 겨울철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요즘 말로 ‘빅 이벤트’였다. 연습 장소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티켓을 팔겠다고 나섰다.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별별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함께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나간 남녀 한 쌍은 훗날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여러 말들이 나왔다.
“포스터를 역 앞에 붙이랬더니 으슥한 하천에는 왜 갔을까. 포스터는 안 붙이고 서로 입술만 붙였고만.”
그해 ‘겨울나무 리사이틀’은 극장 좌석이 거의 찰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빌려온 악기와 장비는 제법 섬세하고 육중했다. 우리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얘깃거리가 많지만 당시 일은 이쯤에서 줄인다. 그 후 겨울나무 공연은 멤버가 바뀌면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겨울나무’ 싱어로서의 자존심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며 우리는 흩어졌다. 그러나 겨울이면 겨울나무가 됐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것인가. 어쩌다 멤버들이 만나면 음악 얘기로 술자리가 길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유료 공연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음반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음악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계속 음악을 했으면 오늘날 조용필이나 전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서로의 음악성을 치켜세워주며 언젠가는 꼭 제대로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겨울나무를 세상에 알리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면서는 꼭 이런 말을 했다.
“겨울나무 리사이틀 한번 해야지. 각자 집에서 연습하자고.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모진 세월은 우리를 떼어 놓았다.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어쩌면 극적으로 지난해 다시 모였다. 지금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겨울나무 2기 출신)가 자신들의 동호회 공연에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0월 ‘비바앙상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후배의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기타맨(김홍선)만은 전주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녀석은 정말 가고 싶지만 마누라가 ‘허락’하지 않아 합류가 어렵다고 했다. 약속하면 늘 늦는 또 한 녀석은 연습 날만은 총알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쳤다. 그 옛날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왔다.
‘노래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곡 저곡을 연습하다 사랑과 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와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랑한 후에’는 음이 높았다. 원곡대로 씨마이너(Cm)로 부르면 높은 음이 (‘라’ 음보다 반음 높은) Bb까지 올라갔다. 멤버들이 무리라며 키를 내리자고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반(半)음에 목숨 거는 것이 싱어 아닌가.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어도 나는 겨울나무의 싱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이 나왔다.
40년 만에, 환갑에 올라선 무대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나는 아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끼고, 소주 한 병 하고도 넉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술은 두려움을 쫓고 고음을 지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다고 너무 마시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주 한 병이면 적당했지만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해서 반 병쯤 더 마셔야 했다. ‘사랑한 후에’는 첫 음을 제대로 질러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봤다. 나는 씩 한번 웃어주고 내질렀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우리는 해냈다. 600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속에는 아내도 있었다. 그렇게 별렀던 겨울나무 공연을 실로 40년 만에, 그리고 환갑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럼 겨울나무 멤버를 소개하겠다. 드럼 은희문(익산LED산업단지개발 대표), 건반 김동원(BCP경영기술컨설팅연구소 대표), 알토색소폰 노희천(비바색소폰앙상블 단장), 그리고 싱어 김택근이다. 베이스는 따로 초빙한 정종호 씨가 맡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고향은, 아니 우리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는 정읍시 신태인읍이었다. 한때 4만 명에 육박하던 고향 신태인은 속절없이 쇠락하여 이제 인구가 만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초청공연이 아닌 우리만의 리사이틀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꼭 공연 말미에 기타와 드럼을 부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김택근(金澤根) 언론인·시인
언론인 김택근 필자는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
산문집 , 동화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