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육상 중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인생의 굽이굽이 한평생과 같다는 말로 이해한다. 인생에 있어서 초년, 중년, 말년이 있다면 마라톤에도 초반전 중반전을 거쳐 마지막 골인지점의 최후의 승부처가 있다. 초반이나 중반에 선두에 서지 못해도 힘을 비축하였다가 마지막 승부처에서 다른 선수를 따돌리고 먼저 들어오는 선수가 우승자다.
인생에 있어서도 노년의 삶이 행복해야 ‘세상구경 잘하고 돌아간다’라고 말할 자격이 된다. 부모 잘 만나 잘 먹고 잘살았거나 중년에 떵떵거리며 거들먹거려도 노년에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서 독거노인으로 지내다 세상을 하직한다면 인생을 잘 살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마라톤은 긴 거리지만 결국은 속도경기다. 누가 전체의 거리를 빠른 시간에 주파했느냐가 관건이다.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려면 옆 사람과 이야기 하고 주로의 꽃구경을 하다가는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다.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초를 아껴야 한다. 사람도 살면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어느 길을 가야할지 목표 없이 방황하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지거나 어두운 길로 들어서면 노년의 종착지 부근의 삶은 당연히 비극이 기다린다.
그러나 이제는 100세 시대다. 혼자 만 잘 달려 60세에 일등을 하고 은퇴를 해도 후반전의 40년이 남아있다. 애시 당초부터 죽자 살자 그렇게 빨리 달릴 필요가 없었다. 100년의 거리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즐겁게 좌우를 살피고 남을 도와주며 달렸으면 더 여유로운 삶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100세 시대에 혼자 빨리만 달려서는 외로운 인생이 된다.
마라톤보다 더 먼 거리를 달리는 경기가 울트라 마라톤이다. 마라톤이 속도경기라면 울트라마라톤은 완주경기다. 오직 정해진 거리의 완주에 목적이 있으니 시합이나 경기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올림픽 경기에도 없다. 우리나라 울트라 마라톤 중 최장의 거리는 전라남도 해남의 땅 끝 마을에서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까지 무려 622km를 달리는 종단코스가 있고 강화도에서 강원도 강릉까지 308km를 주파해야하는 횡단코스도 있다. 하지만 하루에 끝을 볼 수 있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이 일반적이다.
속도경기가 아닌 완주경기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 옆에서 함께 달리는 사람이 경쟁자가 아니고 동반자다. 옆 사람이 지치거나 다리에 쥐가 나면 부축해주고 마사지도 해주며 함께 달린다. 긴 시간 달리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도 함께 나눈다. 주로에서 함께 밥도 먹는다. 마라톤경기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휴먼 스토리가 펼쳐진다.
필자는 마라톤 경기에 100여회 출전했다. 멀리 제주도 마라톤 대회도 갔다.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세 번이나 달렸다. “혼자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의 실천 장이 바로 울트라 마라톤이다. 울트라 마라톤은 선수보호를 위해 차량통행이 뜸한 한밤에 열린다. 별이 총총한 밤에 소수의 마라토너가 배낭에 음료수와 약간의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느리게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삶이 보인다.
소년출세가 인생에서 경계해야할 일인 것처럼 빠른 주법은 울트라마라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느리게 그러나 쉼 없이 달려야 한다. 빠른 속도보다는 방향이 우선이다. 방향이 맞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100세 시대에 가야 할 방향이 정해지면 더불어 사는 이웃과 친척친지들과 호흡을 맞춰야 인생이 즐겁다, 서로 도와가며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이야 말로 100세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법이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숨어서 소고기 구어 먹는다고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함께 해야 행복이다.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은퇴한 시니어의 가장 큰 자산은 시간이다. 시간 부자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많아도 일상이 무료하다면 고통의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수도 축복이 아니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여가를 즐기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취미활동을 들 수 있다. 취미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필자는 손쉽게 취미를 계발하는 방법으로 ‘덧칠하기(Micro Adventure)’를 권하고 싶다. ‘덧칠하기’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이나 관심 가진 분야를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등산이 취미였던 분이 산삼을 연구해 산을 즐기면서 산삼을 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수채화를 그렸다. 그 경험을 살려 60세에 사진을 배움으로써 평생 취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과 관련한 영역을 확대해 하루를 25시로 산다. 과거의 경험에 덧칠을 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용돈도 벌고 사회공헌도 하는,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삶을 즐긴다.
사진은 취미라기보다 일상생활로 바뀌어가고 있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취미보다 돈이 적게 들면서 새로운 직업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특히 돈이 드는 취미에서 돈이 되는 취미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시니어에 꼭 맞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 돈이 많이 들기도 한다. 장비 구매와 사진 촬영지 여행 비용 때문이다. 그러나 늘 휴대하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찍을 수 있고 일상에서 사진 소재를 찾을 수도 있어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훌륭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저렴한 카메라(일반인이 손쉽게 살 수 있는 보급기로 렌즈 포함 50만원 주고 산 중고품을 지금도 쓴다)를 사용하고 요즘엔 스마트폰을 주로 이용한다. 전시회용 작품을 만들거나 취미활동용으로 부족함이 없다. 사진 재능기부와 사진 기술을 전수하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장애인 시설이나 양로원 등에서 사진 촬영 봉사를 하고 실버대학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사진 지도를 하며 보람을 느낀다. 사진 촬영이 필요한 곳이면 발걸음을 아끼지 않는다. 혹자는 필자에게 “돈도 안 되는 일 그렇게 힘들여 봉사하느냐?”고 하지만 재능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취미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공인 사진작가가 된 필자는 이제 사진으로 돈을 버는 직업인이 됐다. 또한 취미활동이 바탕이 되어 KBS1
을 비롯한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SBS 라디오에 출연하며 방송인이 되었다. 동년기자 선임과 명예기자도 사진이 근간이었고 글을 쓰면서 원고료도 받는다.
, , 등 사진과 관련한 책 세 권도 출간했다. 또한 사진 취미생활을 통한 여가생활의 본보기가 되면서 여가설계 강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강사료를 받는다. 취미에 머무르기만 하면 성장이 없다. 어떠한 취미를 선택하더라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도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다. 당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더 좋은 사진을 글에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운영되는 사진교실에 참가하게 됐다. 60세의 늦깎이였고 카메라 장비는 소형 카메라 하나였다. 촬영 경험도 많지 않았다. 고급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동호인들을 볼 때 주눅이 들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형편에 맞는 카메라로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듯 공인 사진작가가 되어보자는 욕심이 생겨 사진을 배운 지 3개월 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잘될 리가 없었다. 28번의 도전 중 절반을 낙선하고 15번 수상해 사진작가 인증을 받았다. 그 후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진을 배운 지 3년이 되던 2013년에 대한민국사진대전(국전)에 입선하고 부산일보 전국사진대전에서도 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많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공모전 출품으로 얻어지는 점수가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정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 사진작가 명함도 만들 수 있다. 사진 전문가가 되면 다양한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전시회를 열어 작품 판매도 할 수 있다. 향후 작품에 대한 가치도 높일 수 있다. 사진 갤러리를 중심으로 하거나 프로필 사진과 가족사진을 촬영해주는 카페 운영, 사진관 운영, 사진 여행단 운영을 할 수 있다. 수요가 많은 사진 강사로 데뷔할 수도 있다.
전문가는 자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필자는 사진작가 인증에 그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사진을 배운 지 벌써 8년째에 접어들었고 찍은 사진도 50만 장에 이른다. 사진을 찍다가 파파라치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강화도 군부대 옆에서 석양을 촬영하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선택한 취미생활을 오래 할 수 있고 제2의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남이 권유하는 취미나 유행하는 취미를 선택하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분야에 집착하기보다는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취미가 좋다.
어린 시절에 즐겨 했으나 생업으로 미뤄뒀던 취미를 끄집어내 덧칠하면 평생 취미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모험가 제임스 후퍼가 제안한 ‘덧칠하기’다.
필자는 은퇴 후에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꿈을 덧칠해 사진으로 바꾼 셈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3년 정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몰입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필자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사진 기술과 취미생활 계발을 선도할 ‘청학빛그림학교’를 꿈꾸고 있다.
강화도에 접어들어 관광객이 붐비는 도로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 보면 앳된 군인이 차를 막아선다. 그가 전해준 비표는 이미 많은 이의 손을 거쳐 낡아 있었지만, 잃어버렸을 때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쥐어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때마침 잘 나오던 라디오 음악에 잡음이 끼어들며 괜한 으스스함을 더한다. 그렇게 언덕을 넘으니 교동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 앞에서 다시 군인의 출입통제 시간에 대한 당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이 섬과 마주할 수 있다.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와 말이다.
키가 큰 오동나무[喬桐]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자리 잡은 섬으로 면적으로는 14번째로 꼽힐 만큼 큰 섬이다. 섬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 때는 탈출이 어려운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연산군은 이 섬에 유배돼 생의 마지막을 보냈고 광해군과 임해군, 고종 황제의 조카 이준용도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고려 때는 중국과의 교역 중심지 중 한 곳이었지만, 교동도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부분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집성촌이라는 것이다.
교동도는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탈북자가 있을 정도로 북한 황해도와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위해 교동도로 월남했던 황해도 도민들이 휴전 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집성촌이 형성됐다. 교동도의 대표적 관광지로 꼽히는 대룡시장을 황해도 연백군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의 슬픈 사연도 시간의 흐름에 바래버린 것인지 대룡시장에서 만난 한 실향민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이 시장에서 실향민은 별로 없어요. 다들 일흔이 넘은 나이이니까요. 많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두 인천이나 서울로 떠나 남은 실향민 가족도 거의 없어요.”
실제로 대룡시장의 명물 중 하나였던 시계방도 이곳을 지키던 주인의 죽음으로 멈춰버렸지만, 이어받은 이가 없어 문을 닫았다. 시간이 멈춘 것이 이 때문인가 싶을 정도다.
실향민의 한, 켜켜이 쌓인 곳
이전까지 교동도는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탓에 출입제한이 있었고, 강화도에서 건너오는 뱃삯은 차량 편도가 1만6000원이나 되어 관광지로 환영받지도 못했다. 유동인구도 적었다. 이런 외부와의 단절은 시간이 지나도 그 시절을 붙잡아둔 듯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들었다. 약국이며 양복점이며 시계방, 잡화점 할 것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교동도의 대룡시장이 유명해진 것은 지난 2010년 KBS2 TV 예능 프로그램 을 통해 소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완공되면서 사람들의 높은 관심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이어졌다. 교동도 토박이들은 아직도 이런 관심에 의아해한다. 대체 이곳에 볼 게 뭐가 있다고 몰려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관광객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교동다방이다. 이 마을에 살면서 15년째 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은 섬의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이 중 하나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동네 장사였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섬에 사람이 꽤 많았어요. 다들 쌀농사를 크게 지어 풍족했죠. 술 마시다 흥에 겨워 2차, 3차 오는 모임도 몇 개나 됐으니까요. 그러다 사람들이 서울로 빠져나가면서 한동안 섬이 조용했다가, 다리가 생기면서 관광객이 밀려들었어요. 여기 사방에 붙어 있는 메모도 다리가 생기면서 다녀간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써놓고 간 것들이에요. 장사가 잘될 때는 쌍화탕을 하루에 100잔까지 팔아봤어요. 이후 석모도에 다리가 생기면서 서울 사람들이 그리로 갔고, 요즘은 손님이 좀 줄었어요.”
대룡시장에서 관광객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간식 ‘꽈배기’다. 관광객들의 배를 채울 만한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교동도의 한 주민이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시장의 대표 상품이 됐다. 일부 상인이 놀러온 사람들이 물건은 안 사고 꽈배기만 입에 물고 다닌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최근에는 외지 상인들이 대룡시장의 빈 가게들을 채우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복각해 곳곳에 붙여놓은 군사정권 시대의 포스터들도 시장의 옛 모습 위에 개성을 더하고 있다. 1970년대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일부 가게의 수익은 마을 공동체를 위해 쓰인다.
북한과 맞닿은 땅
키가 낮은 시장 건물의 처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낯선 제비집이다. 교동도 사람들에게 제비는 지켜야 할 귀한 손님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건물 안에 집을 지어도 내쫓는 법이 없다. 바다 건너 고향 연백평야의 흙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 제비를 마치 북한의 가족처럼 대하는 실향민들의 마음 때문이다. 시장 곳곳에는 제비집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은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맘껏 드나드는 제비가 부러워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라며 심지어 이곳 사람들은 간식도 제비콩을 즐겨 먹는다고 말한다.
대룡시장에서 차로 30분 정도 달려가면 망향대를 만날 수 있다. 실향민을 위한 작은 쉼터와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 두 대가 설치되어 있다. 섬에 많지 않은 높은 장소 중에 군사시설을 피해 고른 탓인지 접근도 쉽지 않고 전망도 그리 시원치 않다. 그래도 지척에서 황해도 땅을 볼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북한 땅이 가깝다는 것은 실향민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지만 외지 출신 주민들에게는 공포가 되기도 한다. 2010년 바로 옆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이곳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한 주민은 자다 깨면 눈앞에 간첩이 서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한동안 불안장애로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교동도는 다리가 생긴 지금까지도 일부 통제가 이뤄진다. 교동대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왕래가 완전히 차단된다. 여행지 정보를 미처 챙기지 못한 남녀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갇혀 밤을 지새울 수도 있겠다는 괜한 걱정이 든다. 섬 안에 대형 숙박시설은 아직 없지만 몇몇 민박집이 운영 중이다.
인력으로 만들어진 평야
교동도의 또 다른 이색적인 모습은 벼 이삭으로 가득한 넓은 평야다. 섬에 무슨 평야가 있을까 싶지만 육지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 농기계들을 길에서 쉽게 마주친다. 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미소가 이곳의 쌀농사 규모를 짐작케 한다. 교동도의 쌀은 맛이 좋기로 소문나 섬 주민의 넉넉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섬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교동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곧고 길게 쭉 뻗어 있어 한국전쟁 때 활주로로 사용되었을 정도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넓게 펼쳐진 논이 바다처럼 보이고, 가운데 작은 동산이 황금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교동도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 즉 분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땅이기 때문이다. 3개 섬 사이의 바다였던 이곳은 고려시대 때 대대적인 간척이 이뤄져 평야가 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영 장군이 간척을 주도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섬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구저수지는 가물치와 베스가 잘 잡히는 낚시 명소로 낚시꾼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난정저수지는 농업용 저수지로 지정돼 낚시는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으로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교동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교동향교와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교동향교는 고려시대인 1127년에 창건돼 국내에 남아 있는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초입을 따라 펼쳐진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군락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곳이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
교동도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다면 강화군에서 만든 강화나들길 중 두 개의 교동도 코스를 추천한다. 바로 ‘교동도 다을새길’과 ‘교동도 메르메 가는 길’이다. 한 코스당 소요시간은 6시간. 만만치 않은 거리이지만 그래야 교동도의 멋진 풍광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1636년 인조 14년 청의 수십만 병사가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했지만 정세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자 세자만 보내고 남한산성으로 길을 바꿔 청군에 포위당한 채 47일간을 버텨야했다. 사가들은 이를 병자호란이라 불렀다.
김훈 원작,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상헌(김윤식 분)은 홀로 남한산성으로 가기위해 안내를 받아 얼어붙은 강을 건넌 후 안내를 한 뱃사공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영화에서 척화파를 대변하는 그를 넌지시 악으로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선은 누구일까. 김상헌의 대척점에서 외롭게 주화파를 자처하고 있는 최명길(이병헌 분)이다. 최명길은 “누구를 위한 대의와 명분이냐”고 물으며 “청과 화친하여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이분법적 사고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사를 선과 악으로 나누기는 어렵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 일본을 몰아낸 경험이 있는 신하로서는 명을 위한 의리 즉 대의명분을 중요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민중의 어려움이다. 죽어도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척화파의 주장보다 당장은 자존심 상하지만 살아서 백성을 보듬고 죽는 것이 임금인 위정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청은 여진족의 후손이다. 여진은 사실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들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청은 같은 여진족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에 대해 커다란 적대감도 없었다. 다만 명과의 전쟁 중 후방의 조선 때문에 혼란이 야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인조가 광해군처럼 중립적 외교정책을 썼더라면 병자호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심상치 않았다. 중원의 명나라 동북부, 옛 발해의 진원지에 청이 들어서 중원을 위협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는 명을 증오했다. 여진족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같은 여진족을 정벌하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명의 군사에게 피살당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복수의 칼을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옛 발해지역을 대부분 통일하여 칸의 지위에 오른 누르하치는 후금을 칭하며 호시탐탐 명을 위협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과의 전쟁 중 사망한다. 이후 누르하치의 8남인 청태종 홍타이지가 황제로 등극했으나 여전히 후금은 중원의 위협이었다.
광해군 재위 때 명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라는 요청이 왔었지만 절묘한 중거리 외교로 당시 후금으로부터 적대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명분 때문에 조선은 2대 황제 홍타이지의 눈 밖에 났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을 정벌하여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했다. 홍타이지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까지 왔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갖춰야 했다. 오랑캐라 부르며 그토록 멸시했던 여진족의 수장에게 말이 예이지 이마에 피가 날 만큼 아홉 번이나 땅에 머리를 박았다고 하니 그 참혹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뿐이 아니었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비롯해 50만여명이 인질로 잡혀갔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500여 만이었으니 인구의 10%를 끌고 간 셈이다. 어떻게 더 참혹한 전쟁이 있겠는가. 당연히 김상헌을 악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을 터다.
영화는 소설처럼 차분히 사실의 묘사에 치중했다. 얼어붙은 한강을 비롯해 배경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대비되는 청군과 조선 병사의 생활상은 더 한층 대비되었다. 청군도 조선 병사도 조선의 음식을 먹었다. 점령군인 청군은 조선인이 키운 소와 돼지를 잡아먹었고, 조선병사는 줄어드는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며 먹일 사료가 없어 죽은 말고기를 기다려야 했다. 옷이 없어 가마니를 뒤짚어 쓰고 추위를 이겨야 했고 동상 걸린 손가락 발가락에는 돼지기름을 바르며 견뎌야 했다. 총포는 쏘아도 명중이 되지 않았고 급기야 대장장이 서날쇠의 도움으로 총신을 펼쳐야 했다.
설날 아침. 조선의 왕은 오랑캐에게 술과 함께 고기와 떡을 하사했다. 명절이면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풍습을 오랑캐에게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먹을 음식이 많으니 가지고 가 너희 왕에게나 주라는 말에 분노보다는 차라리 슬픔이 앞선다. 풀 수 없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다. 척화를 주장한 김상헌에게 다시 분노의 화살이 돌아가는 이유이다. 왜 실리를 챙기지 못하는 것일까. 왜 관리들은 자기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 선과 정의를 배척하는가. 부패한 관료상은 서날쇠가 임금의 칙서를 가지고 도원수를 찾아갔을 때 극에 달했다. 죽을 고생을 하고 찾아간 서날쇠가 관리가 아닌 천민이라는 소리에 도원수는 오히려 그를 죽이고자 했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도원수의 군은 청군에게 섬멸 당하고 만다. 악의 척결로 후련해야 했지만 이 또한 풀지 못할 문제를 만났을 때만큼 착잡하기만 했다.
오늘 날 한반도의 운명은 당시만큼 복잡하고 위중하다.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과 북이 모조리 쑥대밭이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어찌 전쟁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 평화로운 방법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의 핵개발도, 한미동맹도 중요한 사실이고 팩트지만 그 어떤 대의나 명분도 우리 민족의 생존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남한산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전해 주었다.
몇 해 전 소설 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개인적으로 소설가 김훈을 좋아한다. 사물의 본질을 캐 들어가는 생각의 집요함에 몸서리가 나지만 그의 언어는 절제되고 담백하여 울림이 크다. 때로 그의 언어가 고답적이고 사변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산문집 을 읽으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본질적으로 그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몸의 언어다. 그가 ‘길’에 천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은 감독(황동혁)의 영화라기보다 작가 김훈의 영화다. 이미 원작을 통해 빽빽이 작가가 세워 놓은 말의 숲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아니 감독은 애초에 그 삼엄한 언어의 포위망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가 전쟁을 배경으로 함에도 창과 칼보다 언어가 주 무기가 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매우 한국적인 ‘말의 전쟁’이 탄생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십 년 전 정묘년에 호란을 겪었으면서도 명나라를 향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정은 아무 대비도 없이 또 한 번의 호란을 맞이한다. 정보는 어두웠고, 군대는 허약했으며, 국가 시스템은 흐트러졌다. 지난번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은 공신들의 이기적 작태와 정보 누설로 막혀 부득이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한겨울 추위와 허기로 가득 찬 47일간의 기록이다.
영화는 소설처럼 장으로 나뉘어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된다. 영화 초반 김상헌이 성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말을 듣지 않은 뱃사공을 죽이고 나중 그의 손녀 나루가 성에 들어오면서 작은 스토리가 만들어지나 영화의 큰 줄기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 최명길(이병헌)의 말싸움으로 구성된다. 미래를 모르니 판단할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식량이 떨어져 간다는 냉혹한 현실뿐이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영의정 김류로 대표되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기득권층과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로 대표되는 민초의 대비다. 자신의 실패를 부하에게 뒤집어씌워 죽이는 김류의 비겁한 행위와 자신의 의무도 아니면서 김상헌의 부탁으로 적지로 뛰어드는 서날쇠의 행동은 비록 상투적이기는 하나 낡고 썩은 권력의 위선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의 백미는 김훈의 현란한 내공이 발휘된 김상헌과 최명길의 언어 대결이다. 둘의 논리는 한 치의 빈틈이 없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둘 모두 ‘길’을 말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각오하여 열리는 진정한 삶의 길도 있고, 비루하지만 삶으로써 얻어지는 내일의 길도 있다. 그리하여 김상헌은 자결로써 죽음을 얻었고, 최명길은 항복이라는 치욕을 통해 삶을 얻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며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보여주는 지리멸렬함과 해묵은 명분 싸움의 뿌리가 이리도 길고 깊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었다. 당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모든 정보를 손바닥 보듯 하는 지금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역사 위에 잠자는 기분이 들어 모골이 송연했다.
영화가 사실과 다른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실 그는 죽지 않고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82세까지 장수했다. 오늘에는 지탄의 대상인 그의 명분론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그의 후손들이 승승장구하는 바탕이 된다. 그로부터 시작된 안동김씨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며 망국의 씨앗이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씁쓸하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동ㆍ서ㆍ남ㆍ북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 북문은 전승문, 서문은 우익문, 남문은 지화문이라고 불렸다. 등산객들은 보통 마천역에서 서문으로 들어가거나 산성역에서 남문을 거쳤다. 어느 문으로 들어갈지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산행은 달랐다. 남쪽 지화문을 이용하였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죄인 조선왕은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 서문으로 나와서 항복하라.’는 청태종의 항복조건을 보고나서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이다. 조선시대 인조 2년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을 다뤘다. 당시 청나라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을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던 인조는 결국 45일 만에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하기로 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함께, 외세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을 몰아냈던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은 가장 처절하고 치욕적인 패배였다.
영화 '남한산성'이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쟁을 크게 다루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기의 주장을 폈다. 최명길은 단순히 주화론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강화도 가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인조 일행이 피신할 때, 홀로 청군의 지휘관 마부대 진영을 찾아가 항의담판을 함으로서 피신할 시간을 벌어준 사람이었다. 최명길은 난세에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균형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현실적으로 약소국인 조선의 생존을 찾는 것이었다.
척화ㆍ주화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백성이 있었다. 얼어 죽는 백성을 살리려고 가마니를 모으고 굶주린 말을 위하여 초가지붕을 걷어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준비 없는 허망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가정이지만 45일 만에 항복하건 결사항전하건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헌데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진흙탕 싸움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국민은 안중에 없다. ‘나 살고 너 죽자’식이다. 아니다. 국민커녕 자기 한 몸 사는 방법도 모른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 같다. 자기 생각 하나 말 못하고 눈치를 보고 줄을 섰다. 감옥 가기 싫어서인지 모르쇠를 자랑한다. 자기 자신은 허깨비였다고 실토하는 추태도 부린다. 나중에 국가를 경영할 수 있겠는가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겠는가.
남한산성, 백성을 생각하였던 선각자를 다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나이가 들수록 조용한 여행이나 고요한 곳을 찾고 싶어진다. 요사이 조심스럽게 시도하는 것이 있다. ‘혼자 여행하며 얼마나 외로운지 반대로 얼마나 자유로운지 체험해보자’는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선망에도 불구하고 시도는 정말 쉽지 않다. 천성이 게을러서 일수도 있고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남들은 아무도 내게 관심 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래서 연습할 겸해서 모르는 사람 사이에 끼어 강화도를 택했다. 외세에 항쟁으로 대적한 곳으로 마치 내가 지금 두려움과 싸우듯 그곳을 택했다.
이전에도 2번정도 강화도에 갔었으나 운전할 때는 내비게이션에 길을 맡기고 가느라 지리를 모르겠고, 얻어 타고 갈 때도 얘기하느라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엔 완전 자유로운 몸과 정신으로 떠나면 다르리라 기대한다.
관광안내소 지도를 따라,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도착하니 바로 초지진 앞이었다.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요새인데 진에는 배 3척과 군관 11명 사병 98명과 돈군 18명이 배속되고 돈대 세 군데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돈대는 지금의 초소와 같이 감시와 공격을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진 아래 돈대가 있는 것이다
이곳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의 격전지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파견한 운요호의 침공은 고종 13년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했다.
초지진의 이끼 낀 성벽을 따라 걷고, 폭격을 몸으로 막아낸 노송의 상처를 눈으로 어루만지며 광성보로 향한다. 보 아래 진이 있고 진 아래 돈대가 있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이때 구식 무기를 갖고 최신 무기와 대적하느라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광성보에는 흰옷의 시신, 조선백성들이 거리에 뒹구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10명의 병사가 전사했으나 우리 군은 전원이 몰살할 정도로 포로가 되느니 죽기로 항쟁했고 그래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 전원이 순국하였다. 51인의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신미순의총’이라 하고 어 장군 형제의 ‘쌍총비각’을 세워 충절을 기리고 있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대가 약탈했다가 2007년 대여 형식으로 반환한 어재연 장군의 수帥 자기 및 각종 무기류가 전시된 강화 전쟁박물관에서 무기와 갑옷을 보며 속이 불편했다.
열악하고 부족한 상황에서 오직 몸으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방법 외에 무엇이 있었을까. 도망치지 않고 숨지 않고 비굴해지지도 않고 용감하게 싸운 그들이 애처로웠다.
이런 비극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똑똑한 지도자를 보내주기를 지금의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싶다.
강화도의 치열했던 전투 현장에 서니 통치자를 잘 못 만나 고통스럽게 죽어야 했던 백성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조용한 여행은 사람을 사색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행동이 자유롭다기 보다 마음이 자유롭다. 그래서 역사를 되짚어 보게 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긴다.
필자는 유달리 더위를 타는 사람이다. 몸속에도 열이 많은지 한겨울에도 냉동실 얼음 칸에 얼음을 가득 채워야 마음이 놓일 정도다. 마시는 물도 미지근한 물이 몸에 좋다는데 필자는 꼭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마시니 주변에서 걱정해주기도 한다. 체온이 1도 오르고 내리는 데 따라 몸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차가운 물을 마셔대냐고 충고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마신다. 또 조금만 기온이 올라가면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필자만 허덕거리고 부채질을 해댄다. 그래서 “너 갱년긴가보다” 하는 말도 듣는데 갱년기가 아니라 이제는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이니 그 증상은 아닐 듯하다.
어떤 분은 필자가 부럽다고 한다. 젊으니까 더운 거라며 본인은 항상 추워서 고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 입장에서 더위는 웬수다. 남보다 더위를 많이 타서 안 좋은 점은 여러 가지다. 단체로 여행을 갈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따뜻한 환경을 선호한다. 추운 겨울에야 뜨끈한 방이 좋지만 봄가을에도 다들 따뜻한 잠자리를 선호한다. 필자는 마룻바닥 베란다 쪽에 바싹 붙어서 잔 적도 있다. 도무지 후끈한 실내 공기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에어컨 좀 켜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들 따뜻한 게 좋다는데 필자 혼자 덥다고 그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저 부채질을 해대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모임에서 강화도 탐방 나들이가 있었다. 전철 5호선 송정역에서 내려 3000번 버스를 타고 1시간 20분쯤 가면 강화도에 도착한다고 했다. 12시에 송정역에 모여 강화도로 가서 서너 시간 유적지를 걸어서 둘러본다는데 땡볕이 내리쬐는 날씨를 필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5시에 있는 식사시간에 맞춰 참석하기로 했다.
혼자 3시간여를 전철과 버스를 타고 가니 어디 먼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송정역에서 갈아탄 3000번 버스는 요금이 2400원이었다. 뒤편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버스에서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버스 안이 너무 더웠다. 옆자리의 아주머니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좌석 위쪽에 있는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필자만 더운 건 아니었나보다. 날씨가 이렇게 무더운 날 승차비를 2400원이나 받는 버스가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건지 급기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기사분에게 에어컨 좀 세게 틀어달라고 말할까 말까 고민만 했다. 속 시원하게 부탁하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 하는 성격에 큰 소리도 못 내고 덥다고 혼잣말을 하며 30여 분간 분을 참고만 있었다.
요즘은 자가용 줄이기 목적으로 대중교통 이용이 보편화됐다. 자가용을 타는 것보다 전철이나 버스가 냉난방이 아주 잘 되어 있어 많이들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버스는 관광지로 가는 차인데도 불구하고 승객을 더위에 지치게 했다. 분통이 터졌다. 목적지에 도착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승객들은 부채질을 해대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기도 했다.
드디어 필자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님께 가서 좌석이 너무 더우니 에어컨 좀 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기사분이 “켰는데요?” 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만지니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역시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부글부글 끓을 필요 없이 진즉에 좋은 말로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필자에게 찜통더위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많은 승객 앞을 지나 앞자리의 운전석까지 부탁하러 가는 일이 부끄러워 망설였지만 역시 소통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용기 내어 한마디하고 시원하게 목적지까지 잘 다녀왔다.
쑥은 들국화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서 ‘모든 풀의 왕초’란 닉네임을 달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식물이지만 좀처럼 자신을 앞세우지도 않고 빈터나 길가 논두렁 밭두렁 산속 아무데서나 낮은 키로 ‘쑥쑥’ 자라나 사람에게 제 몸을 보시한다. ‘쑥’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쑥도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종으로 진화해 산쑥, 들쑥, 덤불쑥, 참쑥, 물쑥 등 40여종이 한반도에 분포해 있다고 한다. 특히 강화 개똥쑥은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하여 몸값도 제법이다.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내 남편도 치료 중 그 쑥을 달여 마시곤했다.
쑥은 한국전쟁 전후 구황식품 중 으뜸이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면 겨우내 웅크렸던 뿌리들이 솜털 보송보송한 쑥잎을 쑥쑥 밀어올린다. 아득한 보릿고개를 넘어야할 때 기다렸다는 듯 언니 엄마들은 논두렁 밭두렁에 파릇파릇 자라난 쑥을 뜯어다가 보릿겨, 밀기울 등과 반죽하여 아무렇게나 반데기를 만들어 쪄서 간식이 아닌 주식으로 연명하던 기억이 내 해마에 ‘보릿고개’란 압축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이 쑥개떡이다. 쑥개떡도 못 먹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보릿고개를 유령처럼 떠돌기도 해서 그 유령을 만날까봐 안채와 떨어져 있던 화장실에 갈 때도 밤이면 어른들을 동행하곤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성한 세상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마치 단군설화 속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쯤으로 여길듯하다.
시간이 흘러 쑥개떡이 각광 받는 웰빙 식품이 되었다. 맵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데다 데쳐서 말려 빻은 쑥을 섞고 달작지근하게 익반죽해서 강낭콩을 켜켜이 박아 쪄 놓으면 쫄깃하고 향이 좋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쑥의 따뜻한 성분과 풍부한 섬유질 때문에 배탈이 나지 않는다. 특히 부인과 병인 만성 허리 어깨 결림, 냉, 대하증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쑥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구정무렵이면 올케언니가 볶은 콩가루와 찹쌀로 만든 쑥떡을 한 넙데기씩 보내 주시곤했다. 출출할 때면 한번 먹을 만큼 렌지에 돌려서 콩가루 묻혀 먹는 맛이란 일품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올케언니가 연로하셔서 그러한 노동이 불가능한 탓에 그 맛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늘 약한 허리 핑계로 엎드린 일을 회피하던 내가 2년 전 여름 한철 보양식을 마련하겠다는 기대감으로 지인들을 따라 쑥을 캐러 갔다. 시누이가 주말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강화도 외포리 뚝방에 해풍 먹고 자란 쑥들이 순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농약이 닿지 않아 쑥 체취의 장소로서 이만한 곳이 없으리라. 북녘땅이 가까운탓에 들려오는 총소리를 삭히느라 그랬는지 고개가 비틀어진 놈도 있어 바로 세워 놓고, 뚝방의 해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 “칠년 묵은 병에서 삼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맹자의 말을 되새김질하면서 경사를 오르락내리락 쑥을 뜯었다. 지인들이 한 웅큼씩 보태주기도 해서 배낭의 배가 불룩해졌다. 어릴 적 동네 언니들 따라 쑥을 캐 본 후로 처음인지라 자뭇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쑥개떡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쌀을 불리고 쑥을 씻었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조언을 받아 생 쑥과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갔더니 쑥 빠는 삯이 두 배가 들어갔다. 생 쑥을 빠러 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방앗간 주인장으로부터 핀잔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생 쑥은 쓴맛이 그대로 남아있어 쑥개떡을 해도 써서 먹기가 거북하단다. 생 쑥만이 떡을 파랗게 할 것이란 고정관념이 나의 첫 작품을 망치게 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쌀가루와 빻은 생 쑥을 익반죽해서 손바닥만 하게 넙데기를 만들어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 놓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 개씩 찜기에 쪄서 먹은 나만의 점심 먹거리, 내 60조의 세포막을 뚫고 쑥쑥 일어서는 쌉쌀한 향기에 당시 개보다 더 잔인하게 한반도를 짓밟던 메르스도 비켜갔다.
*송시월 시인은…
1945년 전남 고흥출생. 1997년 월간 등단.
시집으로 (2015년 문광부 추천 세종 우수도서 선정)이 있다.
제 1회 푸른시학상 수상 계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