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많은 미술가들이 배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즐겨 그리거나 조형물 또는 설치미술로 남겨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쳐 있고 강도 많아서 유년기, 성장기, 노년기 중 한때를 바다나 강 곁에서 살아 온 우리들에게 배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배는 물을 건너는 교통수단일 뿐 아니라 어업을 생계로 하는 이들에게 곧 삶의 터전이었다. 문학을 비롯해 여러 예술 장르로 배에 얽힌 주제는 독자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키워 주기도 하고, 질박한 서민 애환에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했다.
화가들은 마음 속 정서를 점, 선, 면으로 분할한 구도 속에 색채로 표출해 낸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시각을 통하여 화가의 깊은 정서에 접근하게 된다. 그 접점이 화가가 의도하는 사유에 근접하든 아니든, 그림을 보고 속뜻을 풀어 가는 과정이 보는 이들에게 때론 안온한 열락을, 혹은 거친 갈등의 아픔을 가져 온다.
그림 속의 배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그 배는 물 위로 흘러갈 것이란 우리들의 인식이 잠재되어 있어, 배는 머무르되 물은 흐르고, 물은 잠시 머무르되 배는 흐른다.
박석호(1919~1994) 화가의 배 그림 ‘고선(古船)’을 처음 보았던 순간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사동 어느 화랑의 유리 진열대에 덩그러니 혼자 걸려 있던 거칠게 짙은 청회색의 배 한 척이 두 눈 가득 다가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꿈을 꾸듯 하염없이 배를 바라보았다. 짙은 납빛 하늘에, 유려한 필선의 흐름이 돛과 배의 몸통을 슬며시 구분 지어서 그렇지, ‘저런 배도 있을까?’ 그렇게 며칠을 유리 밖에서 살피며 그림이 눈에 익을 때까지 천천히 의식을 작품 속에 이입해 보기도 했다. 초겨울 찬비가 내리는 저녁, 그림 중앙 작은 사각의 조타실과 선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에 시선이 빨려 들어가면서, 다소의 조급함이 풀리기 시작했다. 거친 마티에르에 여리게 스미고 번져 나오는 그 불빛, 거센 풍파에 깨지고 부서진, 아픈 여정을 이제 막 돌아온 고선(古船)에서, 그래도 내일의 새 항해를 꿈꾸는 화가의 자화상이리라 깨닫는 찰나, 그것은 환희이며 동시에 아픔이었다. 내가 소장하는 첫 번째 배 그림이 되었다.
홍익대학교 미대 1회 졸업생인 박석호는 이미 남관(1911~1990) 선생의 화실에서 미술의 기초 실력을 닦고, 김환기(1913~1974) 선생의 빛나는 제자로 인정받으며, 졸업 후 바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박석호는 1966년 학교의 부조리한 인사에 강하게 저항하다 동료 교수 4명과 함께 주저 없이 강단을 뛰쳐나오게 된다.
신산한 삶 속에서도 산과 들, 사찰, 바닷가로 자유롭게 다니며 민초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과 주변의 보잘것없는 스산한 풍경까지 농밀한 화필로, 밀도 높은 작품을 이루어 간다. 1980년대에서 생의 말년까지 십 수 년은 배 그림을 유난히 많이 그렸다. 어시장, 이름 없는 작은 포구에 옹기종기 정박하는 어선, 이제는 배의 기능을 마친 앙상한 용골의 폐선, 비를 머금은 어부의 귀항 등을 유채, 수채, 파스텔의 재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그렸다. 1994년 운명할 때 화실에 걸려 있던 유작이라 칭하는 ‘한촌(寒村)’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4호 사이즈의 작은 화폭이 수평으로 양분되고 하늘은 온통 노을과 구름으로 뒤덮였다. 먹청빛 짙은 바다 가운데 작은 배 한 척이 무심히 머물러 있다. 두세 번의 거친 붓질만으로도 작은 배는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붉은 노을빛이 바다에 어리고, 배 그림자도 파도의 흔들림 없이 잔잔한 바닷물에 번져 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구의 한 화랑에서 다른 화가의 배 그림 ‘새벽어촌’을 구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를 접안할 시설조차 마땅치 않은 남도 어느 포구에 작은 어선 위로 두 사람의 어부가 짐(물고기)을 들어 다른 한 사람의 등목에 얹고 있다. 배 위 어부의 등으로 하얗게 서리가 덮였다. 짐을 나르려는 어부는 발목이 젖은 모래에 박히고, 목에서 어깨까지 짐의 무게에 짓눌려, 목과 얼굴은 짐 상자에 녹아 붙어 버렸다. 손에 낀 장갑도 허연 성에에 뻣뻣하다.
어쩌면 평범한 어촌 일상이 보는 이를 잔뜩 긴장시킨다. 신선하게 느끼던 바다의 푸른 빛깔도 한 조각 얼음 되어 가슴에 박힌다. 침도 삼킬 수 없는 그 막막하고 아픈 고단함이 나를 깨운다. 크게 꾸짖는다.
‘너는 게으르지 않은가’
손장섭(1941~)은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한 세대를 살아가는 올연한 거목 같은 화가이다. 우리나라 질곡의 긴 역사를 회화로 펼쳐 왔다. 해방, 남북분단, 민주화의 투쟁에 거침없는 화필로 포효해 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그림 기저에는 우리네 이웃 서민들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있다. 특히 그가 자라온 어촌의 아낙들과 고깃배의 그림들은 하얀 물감을 덧바르는 특이한 채색으로 경직된 선의 분할이 서정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외포리의 저녁’이라는 표제가 붙은 그림은 내가 세 번째 소장한 배 그림인데, 미술품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구입한 작품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 머무르고 있는 배를 실경으로 담담히 그린 서경적인 작품이다. 석양의 하늘은 이미 붉은 노을로 질펀하다. 바다 건너 낮은 산들이 띠를 이루며, 모래톱에 배 너덧 척이 머물러 있다. 왼편 가까이 거의 부서진 하나는 배로서의 소임을 다 마친 채, 서서히 해체 되어 가는 폐선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다에 녹아든 노을의 긴 그림자가 이 배를 포근히 휘감고 있다. 바닷물 가까이 우뚝한 큰 배는 당당한 위용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서너 개의 돛대가 노을을 수직으로 가른다. 뱃머리 돛대 위 푸른 깃발은 바람에 나부낀다. 범상치 않은 구도에, 잔잔하며 거친 붓질이 황혼녘의 포구를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그림을 한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 초·장·노년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음은 나만의 감성일까?
이 그림의 화가 김태(1931~)는 함경남도 홍원의 해변마을에서 출생하여 월남, 서울대 미대를 졸업, 모교 교수로 정년을 한 사람이다. 비교적 과작(寡作)인 편인 이 화가는 특이한 구도, 과감한 붓터치, 원색의 광휘가 보는 이들을 그윽한 그림의 세계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특히 한적한 어촌이나 해변마을의 배가 있는 실경들은 우리에게 고향의 어린 시절 향수를 담뿍 느끼게 한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고 읽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림이란 표면을 통하여, 화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진지한 자세가, 그 예술혼에 근접하려는 깊은 사색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살피는 과정이, 좋은 그림을 만나고 소장하고, 그 그림을 대할 때 깊은 마음 속 정화를 체험할 수 있다.
달빛이 유리창으로 고여 오는 늦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노처와 나란히 배 그림 앞에 앉아, 마른 뱃전을 적시는 바람 사이로 아련히 유년(幼年)의 바다를 떠올리고, 아직도 그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빈 배 위에 흰 세월 너울만 얹고.....
>> 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주변국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개항 이후 구한말 시대가 대표적이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기뻐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시기에 일본과 러시아는 3번의 협정으로 한반도 문제를 입맛대로 요리했다. 이 시대를 러시아-일본에 의한 ‘공동관리(condominium)’시대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해 있을 때 명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을 배제한 채 휴전은 물론 조선을 분할하는 문제까지 논의했다. 6·25전쟁 휴전협정도 우리의 입장은 무시된 채 체결된 것이다.
이렇게 잘 알려진 사건들과 달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약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게 느껴지는 사건도 많다. 개항의 직접적 계기가 된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한 사례이다.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기 위해 1875년 9월 억지로 만든 것이다. 군함 운요호가 주로 서양 열강의 상품을 만주로 수출하는 항구인 요동반도 북쪽의 우장(牛莊)에서 황해를 측량하며 남하하다가 강화해협으로 들어온 것이다. 인천과 맞닿은 강화해협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연결되는 길목으로, 조선의 국방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요지 중 하나이다.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이 개항기 프랑스와 미국 함대, 운요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도 침략군의 서울 진입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도 부근은 섬이 많고 수로가 한강과 임진강으로 나뉘는 등 복잡하게 엉켜 있어 뱃길을 잃기 일쑤였다. 황석영의 소설 에 나오듯 과거엔 경강(京江) 수적(해적)들이 활개 치던 곳이다.
이 뱃길이 외부에 노출되고, 특히 외국 군함이 탐사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당연히 강화포대는 조선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진입한 운요호에 대해 발포했다. 근대적 장비로 무장한 일본 ‘군함’은 이에 응사하여 포대를 파괴하고 영종도를 점령, 관아 민가를 불사르고 포 수십 개를 노획, 9월 28일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 일본 측은 2명의 경상자만 낸 반면 조선군 사망자는 35명, 포로 16명을 기록했다.
조선은 이 사건을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선박’이 강화해협에 침투하여 일으킨 소요 정도로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 프랑스는 선교사와 기독교 박해로, 미국은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이미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인 바 있다. 더욱이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비등하여 그 압력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열강은 단순히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개항을 강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위상이었다. 조선이 열강과 수교조약을 맺어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면 국제정치적으로 무주공산(無主空山, no man’s land)으로 남아 먼저 점령하는 국가의 소유가 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영국과 러시아 간의 갈등/경쟁이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국제정치를 지배하던 주요한 축이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1852~1856)과 농노해방(1861) 후 팽창/남진을 시작하는데, 그 대상이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이거나 상업적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이에 해당한다. 영국은 중국이 상업적 이해를 방해할 정도로 강력해지는 것을 원치 않지만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장사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소위 ‘not strong but stable’이다. 얼마나 교활한 정책인가?
러시아가 한반도에 진출하면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북경-천진을 위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황해를 통해 올라오는 영국 등 해상세력도 저지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영국은 조선을 개항시켜 열강과 수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선이 국가로 ‘승인’되면 한 강대국이 다른 열강의 동의 없이 점령/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영국 문서는 영국이 중국에게 조선의 개항을 ‘백 번’ 이상 요청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과의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러시아의 개입을 유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남진은 일본에도 안보위협이 된다. 그런데 일본의 추론에 의하면, 전쟁이 시작되면 초기에 일본군이 승리해 서울을 점령할 것이며 조선정부와 국왕은 내지로 피신할 것이며, 중국은 조선을 지원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 이것은 임진왜란의 재판(再版)이며 일본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전쟁의 장기화를 의미한다.
일본의 전략은 중국의 개입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동경 주재 영국 공사는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보조를 취하는 방안에 양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듣고 경악한다. 러시아가 개입하면 그 대가로 최소한 영흥만을 요구할 것이며 부산까지 진출할 가능성이 있다. 15년 전인 1860년 영국-프랑스와 중국의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러시아는 연해주와 북위 42도 선인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남진하지 않았던가!
러시아는 운요호 사건 전 해에 극동함대 소속 전함 한 척을 영흥만에 보내 겨울을 나게 한 바 있다. 영흥만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곳이다. 반면 부산은 영국의 상업적 이권이 집결된 상해나 양자강까지 2일간의 항해거리이며 동해까지는 12시간 거리여서 중국, 일본, 황해의 해상로를 지배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이었다.
영국으로서는 한-일간의 분쟁에 러시아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먼 ‘극동’에서 군사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동해에 파견된 함대에 ‘조선영해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대기하며 제 3국(러시아)의 관여 여부를 관찰토록 하고, 북경의 공사관에는 운요호사건의 경과를 추적할 것을 지시한다. 다음해 1876년 1월 조-일 강화도조약이 평화적으로 체결되자 ‘다행히 전쟁으로까지 발전되지 않은 데 만족’을 표시하며 사건을 종결짓는다.
전쟁으로 비화되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과 중국, 일본이 싸운 임진왜란의 재판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 열강이 상륙하여 전쟁이 한반도에만 한정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를 점령하거나, 러-만주 접경지역에 파병하거나, 함경도를 점령할 수도 있다. 기회만 보이면 팽창을 서슴지 않는 러시아의 행태로 보아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면 영국은? 10년 후인 1885년 거문도 사건 때와 같이 대한해협을 봉쇄하여 러시아 함대의 남진을 저지하고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요동반도까지 진출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과 일본이 임진왜란 때와 같이 평양을 두고 대결한다면 영국은 화해를 주선할 것이다. 양측 모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데 잠재적인 동맹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의 운명은? 아마도 이들 열강 간에 흥정 대상으로 전락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이상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연재를 시작하며
의 창간을 축하하며 글 쓸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 삶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 음악, 등산, 여행, 운동 및 수련 등과, 직업과 직결된 서울의 교통, 교육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에피소드들을 곁들여 펼쳐볼까 합니다.
그러나 잡지나 신문 등에 글을 써 본 적이 별로 없어 서투른 점도 많으리라 생각되니 여러분의 격의 없는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글 임성빈 명대 명예 교수
내가 만난 영화, 그 첫 번째 이야기
2012년도 다 저물어가던 10월 하순의 어느 날, 필자가 수천 개의 영화 DVD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면서도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던, 필자를 잘 따르는 후배 C씨가 “혹시 이라는 영화 가지고 계세요?”라고 물어왔다. 그 영화는 본 적은 없지만 주제가는 기억이 나서 집에 와 확인해 보니 역시 영화는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유행했던 영화음악을 모아놓은 LP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영화여서 친근감을 가지고 있던 영화였다.
이런 경우 필자는 일반적으로 그냥 없다고 해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 해서 그 영화를 구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검색해 보니 이 영화가 국내에서는 출시된 적이 없는데도 국내의 어떤 인터넷 카페와 연결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올드시네(Oldcine)’라고 하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수년 전부터 이곳에서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희귀영화의 원본을 구해 여기에 한글자막을 올려서 상영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3년 2월의 상영 예정작이 이라고 예고되어 있어 필자에게 검색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사실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나 근년에는 극장 가기가 번거로워 거의 안 가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DVD나 인터넷에서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카페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극장에서는 물론, DVD로도 볼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그래서 바로 그 카페에 가입하였고 그 해 12월에는 라는 주제가가 너무나 유명했던, 라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상영 장소는 지하철 3, 4호선이 교차하는 충무로 역 안에 있는 ‘오재미동’이라는 소극장이었는데, 지하철 역 안에 그런 소극장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즉 2013년 2월에는 물론 후배 C씨와 함께 도 감상하였고 그 다음 달인 3월에는 정기상영이 아닌 번개상영으로 필자가 무척 좋아했던 알랭 들롱의 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많은 희귀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2014년 10월에는 압구정동의 ‘무지크 바움’이라는 소극장에서 이라는 외국영화와 함께 국산영화 를 이장호 감독과 이 감독의 친동생이자 주인공의 한 사람이었던 이영호 씨와 같이 감상하고 뒤풀이도 함께 하는 이벤트도 있었다. 이 카페 몇몇 회원들의 영화에 대한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여 그들이 카페에 올린 글들을 읽어가며 필자의 영화에 대한 안목을 몇 단계 높여가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보유한 영화 중에는 국내에서 출시되지 않아 해외에서 구입한 것이 약 200 여 개 된다. 또 10여 년 전에는 수년간 TV에서 방영하는 영화 중 집에 없는 것은 거의 다 녹화한 적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것들로서 그런 것들만도 400 여 개가 된다. ‘Oldcine’의 회원 중에 꽤 잘 알려진 영화감독 Y씨는 자신의 소극장을 마련하여 상영할 꿈을 가지고 희귀영화를 열심히 모으고 있었다. 그가 필자의 집을 방문하더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수 년 동안 그렇게 애를 써도 구할 수 없었던 희귀영화들이, 그것도 수백 개가 한꺼번에 눈앞에 있으니 그야말로 노다지였던 것이다.
필자 역시 모처럼 소장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뻐 아무 조건 없이 그가 원하는 모든 영화를 빌려 주었고 필자도 그동안 구하지 못했던 , , , 와 같은 영화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어 2013년 11월, 강화도 동감도에 DRFA 365 예술극장을 완공하여 운영하고 있다.
우리 나이또래들이 대개 비슷했겠지만 필자가 영화를 본 것은 아마 국민학교 때 동네 주차장에서 본 무성영화 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던 것도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학교 강당이나 단성사에서 심심찮게 단체관람을 시켜 주었는데 , , (나중에 이라는 제목으로 DVD가 나왔다), , , , , , , , 등과 같은 영화들이 떠오르지만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 같은 영화들을 대한극장에서 70㎜로 보았던 것 외에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기는 4·19와 5·16의 북새통에 단체 관람할 여유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들 영화는 모두 다 어렸을 때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아 있으며 특히 가 많이 좋았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재즈 코르넷 연주자이자 경음악단 화이브 페니스의 단장인 레드 니콜즈의 역할을 맡은 다니 케이는 시골뜨기 음악가 역할을 호들갑스럽게 잘 해 내고 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즈 음악가로 평가되고 있는 사치모(Satchmo; 입이 큰 사람이라는 뜻의 별명) 루이 암스트롱이 트럼펫 연주와 함께 그의 특이하게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여기에 당대 빅 밴드의 상징이었던 밥 크로스비, 레이 앤서니, 쉘리 맨 등이 합류하여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또 뒤에 미국의 인기 TV 연속극 ‘달라스’의 여주인공으로 인기 절정에 오른 바바라 벨 게즈와 뒤에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에 출연한 튜스데이 웰드가 10대로 데뷔하여 열연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20곡 이상의 재즈 명곡이 연주된다. 그중에서도 전설적인 스캣창법과 함께 루이 암스트롱과 다니 케이가 듀엣으로 연주하는 ‘성자들의 행진’은 잊지 못할 감흥을 준다. 이 영화는 또 정겹고 애틋한 부정(父情)을 그린 가족드라마이기도 한데 비디오로 다시 보아도 그때의 즐거움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 조디가 부모 잃은 아기사슴 플랙을 기르다가 사슴이 다 자라서 농작물을 훼손하게 되자 아버지가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사살하게 되는 이라는 영화는 당시에는 굉장한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다시 보니 나이 탓인지 그때와 같은 감명은 느낄 수 없었다.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
강화도 초지대교 지나 해안대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작은 섬 하나가 연결되어 있다. 5000만평의 세계 3대 갯벌이 신비롭게 펼쳐져 있는 ‘동검도’란 섬이다.
조용했던 동검도가 최근 ‘영화의 섬’으로 불리우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갯벌 앞 섬마을에서 희귀 영화를볼 수 있는 특별함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흔히 접하기 힘든 세계고전,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를 365일 상영하는 예술극장이 오픈했다. 도시에서도 사라지고 있는 예술극장을 섬에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그를 만나기 위해 동검도로 영화여행을 떠나보자.
글 김미숙 객원기자 mebranding@naver.com 사진 이형용 MeBranding 이사
얼굴을 들면 탁트인 갯벌과 하늘, 내려다 보면 구불구불 시골길… 섬 풍경 가운데 현대적인 건축물이 한 프레임에 담긴 조화가 인상적이다. ‘DRFA 365 예술극장 & 조나단의 커피’ 감각적인 하얀 입간판에 먼저 눈길이 간다. 건물에 들어서면 벽에 걸린 걸작영화 포스터, 세계 유명 감독들의 흑백사진들, 진한 커피향과 잔잔한 음악까지. 마치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간 기분이다.
서너명의 중년남성들이 편안한 웃음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도시의 일반극장에선 보기 힘든 스태프 구성이다. 그리고 한 남자가 친절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덥수룩한 수염, 순수하고 털털한 인상이 섬 촌장님 같다. 그가 바로 DRFA 365 예술극장의 조나단 유(본명 유상욱, 51세) 대표다.
“누구신가요?” 첫 질문에, 0.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라이터이자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 대표인 조나단 유입니다. ” 당당히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은 외모와 전혀 다른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극장 안 카페에서 동검도에 극장을 지은 이유부터 오직 영화 한 길을 걸어온 삶, 그리고 新청춘(중년)들과 나누고픈 영화 & 힐링문화에 대한 생각까지 그와의 담론이 시작됐다.
#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다
이 극장이 생긴 취지는 소중한 세계 고전영화, 제3세계, 예술영화의 복원과 상영을 위해서라 했다. 1999년 DRFA(Digital Remastering Film Archive)란 동호회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보여줄 좋은 작품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조나단 유 시나리오 스쿨과 DRFA 회원들은 영화 복원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유할 극장 마련에 힘썼다 . 그리고 마침내 2년여 준비 끝에 접근성 좋고, 천혜자연의 동검도에 DRFA 365 예술극장을 설립하게 됐다.
유 감독은 시나리오 스쿨을 함께 운영 중이다. 젊은 작가들은 물론 작가를 꿈꿨던 시니어들에게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고, 작품과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계속해서 작가들을 발굴하고, 좋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해외 희귀 작품을 번역하고, 본인 스스로도 30년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뼛속까지 영화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장될 뻔한 훌륭한 고전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상에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한다. 우리는 그로 인해 좋은 영화를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됐다. 영화 저작권을 15000편이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익이 생길 때마다 또다시 영화 번역과 디지털 복원, 저작권 구입 등 재투
자하는 그의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중년의 청춘 감성 일깨워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의 주 관객층은 50~60대 중년여성층이다. 최근 들어 10대 학생들부터 70대 장년까지 남녀노소 관객층이 다양해졌다. 그래도 이곳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꽃누나 언니들’이다. 그 이유는 중년 감성을 깨워주는 유 감독만의 섬세함과 배려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영화 전문가로 영화와 시나리오 외에도 재주가 참 많다.
하루 두 번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다. 영화 OST나 상영될 영화와 관련 음악을 선곡해 연주하고, 영화배경과 감독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가 시작 전부터 이미 중년 여성관객들로 하여금 젊은 날의 추억과 로맨스로 빠져들게 한다.
피아노 선율은 영화에 몰입도를 높여주고, 닫혔던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의 묘약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 감독은 영화와 음악 외에도 음식학-사상체질학 등에도 조예가 깊다. 관객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살피고, 각 개인에 체질에 맞는 차나 음식을 권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본 이후 영화 주제 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커피,영화, 소통을 즐기면 저절로 행복한 표정이 된다.
1. 김미숙 객원기자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나단 유 감독
2. 갯벌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극장 2층의 카페 공간 내부
3. 1층 벽면, ‘피아노 치는 조나단 유’ 감독의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4. 1층 ‘조나단의 커피’ 내부.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영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5. ‘DRFA 365 예술극장 &조나단의 커피’ 입간판 및 극장 건물 외관 밤 풍경
6. 1층 벽 한 켠에 걸려 있는 조나단 유 감독의 환영 인사말
7. 조나단 유 감독이 영화 상영 전에 작품 배경, 감독성향, 제작 배경 등 영화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인간의 삶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51번 읽었는데 매번 새롭더라구요.”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다양한 삶의 모습에 관심이 많다. 자신의 콘텐츠와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 서비스하는 모습 역시 그의 또 다른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동검도에서 그의 섬세한 배려와 서비스 정신이 영화의 감동과 함께 깊은 인간적인 여운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동검도를 다시 찾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될 정도로 말이다.
# 영화와 공유로 새로운 문화 창조
오후 3시. 오후 6시 하루 두 번 영화가 상영된다. 해질녁 동검도 갯벌의 노을 빛에 젖어 있노라면, 피아노 연주가 들리고, 영화 시작을 알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60~70대 여성관객들이 많았던 날. 노년이지만 여전히 청춘인 두 자매의 로맨스를 그린 ‘라벤더의 여인들(영국,2004)’이 상영됐다. 누가봐도 관객들의 취향, 스타일을 고려한 영화다.
영화가 끝난 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는 사람, 잃었던 감성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며 유 감독에게 감사를 전하는 사람, 다섯 번 봐도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람 등 어느 대형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목격됐다. 모두가 영화 주인공들처럼 소녀 감성으로 돌아간 청춘들의 모습이었다.
유 감독은 DRFA 365 예술극장은 35개 좌석의 소극장이지만, 최고의 사운드 시설을 설치했다고 했다. 영화를 최상의 컨티션으로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하고 프로그래밍한다며. ‘영화’를 매개체로 공감할 수 있는 소통공간이 영화인으로써 늘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제 이 공간은 더 이상 제가 주인이 아닙니다. 관객이 6000원을 내고 6000원의 가치를 함께 소유하고 있는 공유 공간이 됐습니다.”
개관 후 꾸준히 관객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종교, 여성, 다문화가정 단체 등 관객층도 다양해졌다. 관객 다양화는 극장의 활용도 마저 바꿔놓았다고 한다. 심야영화제, 여성영화제, 이달의 감독전 등 유감독이 기획하는 프로그램 외에도 관객 스스로 영화를 매개로 하는 힐링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안한다. 극장 이상의 놀이터,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 ‘아이디어 창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시의 기업형 예술극장도 경영상 어려움으로 사라지는 이때, 문화 소외지인 섬에 있는 예술극장 관객수와 프로그램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 꿈과 낭만이 흐르는 섬, 동검도
마지막으로, 그에게 꿈을 물었다. “동검도에 제2예술극장과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처럼 영화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며 살고싶은 게 개인적인 비전입니다.”
이것은 유 감독만의 꿈은 아닐 게다. 요즘처럼 몇 백만이 들었는가가 우선시되는 시대. 극장을 나오면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상업영화 홍수 속에서 우직하게 영화의 작품성과 순기능을 지키는 DRFA 365예술극장의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순수 관객 모두의 꿈일 것이다.
동검도에는 꿈이 흐른다.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영화는 물론 5000만평의 갯벌, 억새풀밭, 하와이안 코나 커피, 백만불짜리 산소를 선물 받는다. 잊혀질 예술영화를 살리고, 잃었던 청춘의 낭만이 되살아나 더욱 행복하다.
아름다운 영화의 섬 동검도로 좋은 사람들과 시네마기행을 떠나보자. 동검도 영화 인생, 조나단 유 감독이 당신의 영화여행의 매력적인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영화감독·시나리오 작가 조나단 유
MBC 문학상 수상
,
가 2년 연속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 수상
대종상
시나리오상 수상
◆김미숙/브라보 마이 라이프 객원기자-퍼스널 브랜딩 큐레이터
-미브랜딩(MeBranding) 대표
-브랜딩 컨설턴트, 강사, 카피라이터, 커리어 코치
-www.misukkim.com
소위 로얄 패밀리, 연봉 2억원 이상, 기업 오너, 자산가와 전문 경영인, 스포츠 스타와 문학인 들이 와서 쉬는 곳. 그러나 오로지 한 손님, 한 가족만을 위한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곳. 강화에 위치한 담담각(淡淡閣)은 조용한 자신만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20년 동안 준비된 공간이다. 그동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알려져 왔던 담담각의 특별한 모습을 담백하게 담았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bravo-mylife.co.kr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담담각(淡淡閣)의 도우미와 집사들이 바쁘다. 디테일한 취향에 따라 저녁 식사를 위해 더덕구이, 바비큐 숯과 그릴 장비를 준비하고 어디선가 테이블을 가져와 정원에 가지런히 셋팅한다. 바지런히 패 둔 장작을 가져와 벽난로를 피우니 거실이 금방 따뜻하게 데워진다. 손님들을 위해 호박죽, 전복죽으로 건강한 아침이 차려졌다. 게다가 직접 재배한 상추, 딸기, 고구마, 건강한 오골닭이 매일 낳는 담담각표 유정란을 삶아 강화순무김치와 함께 얌전히 차린 아침 테이블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정갈하고 예의 바르게 손님들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 집사ㆍ 도우미들은 다른 어떤 숙소에서도 느껴 보기 힘든 한국식 명품 서비스를 보여줬다.
그들만을 위한 새로운 문화공간, 현대판 아방궁
한국을 방문한 글로벌 기업들이 전통문화를 경험하고자 숙소로 임대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일반에 문을 열게 됐다. 집 전체를 대여하는 조건으로 임대료는 하루 150만원 선. 회의룸과 리셉션 장소도로 적합한 영빈관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한 가족이나 한 팀에게 통째로 빌려준다.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이 재방문하기 때문에 굳이 홍보나 광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도 10월까지 예약이 차 있는 상황이다.
“짬짬이 시간 내서 조금씩, 계속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담담각의 규모가 크다는데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한 저로서는 규모가 큰지 작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3개의 정원과 2채의 한옥(본채, 행랑채), 3개의 침실과 욕실, 2개의 거실, 별도의 쉼채로 구성된 5000평 규모의 담담각은 완공까지 무려 20년이 걸렸다. 소유주인 지동훈 강화한옥문화연구소 소장이 긴 시간만큼이나 공을 들인 건 소수의 그들만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로서의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걸 증명하듯 내부 곳곳에서는 진품 골동품과 미술품이 놓여 있어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격조 높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분들은 가족 여행을 이곳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어른들은 한옥이 정서에 맞는 편이지만 아이들은 불편해 할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하고 즐거워 하더군요.”
지 소장은 “불면증인 분들도 여기 와서는 잠도 푹 주무시고 하루 머물다 가면 생명이 연장된다는 생각이 든다고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실 때 가장 보람이 있다”며 웃는다.
VVIP만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를 만들다
한옥의 공간이라 빛과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볕 몇 조각이 어우러지는 방마다 그의 수집 작품에 터를 잡는다. 저마다 삶과 체취를 품은 작품들은 독특한 예술적 분위기를 뿜어낸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밀려온다. 특별한 프라이빗 공간을 나름 재해석하고 연출함으로써 담담각은 럭셔리하게 정취가 물씬 익어가고 있다.
5000평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돌담은 지 소장의 수집 인생의 대표 작품이다. 강화도 자연석으로 돌담을 쌓고 한옥 바깥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내부는 현대인이 생활할 때 불편하지 않게 재배치했다, 새 둥지도 지방에 내려가서 입수하는 등 꼭두 소품 하나 하나 애정을 갖고 배치하고 천천히 뜯어 고친 결과 우물이 있던 마당이 부엌으로, 거실로 바뀌며 집이 커졌다.
각 방과 거실, 주방 곳곳에 좋은 컬렉터와 좋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고 있는 지 소장은 추억과 취향을 작품 하나 하나에 깃들게 하고 싶어했다.
계단의 장대석은 서울 상왕십리 공사 현장에서 가져왔다. 연개소문 생가에 가서 소나무를 어렵게 모셔와 정원에 심었다. 고재상을 거치지 않고 20년간 직접 발품 팔며 사 모으니 이제 전국에서 고귀한 물건들이 있다 싶으면 지 소장에게 먼저 연락이 온다.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산하 유럽·코리아재단의 이사장으로도 있는 지 소장은 “월급 타서 아파트·상가 같은데 투자하지 않고 한옥 가꾸는 일에 돈을 쓰니까 사람들은 저 보고 미쳤다며, 시간이며 노동력까지 버리느냐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왔다”고 말했다.
1인용 침대와 쇼파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북유럽풍 스타일 가구와 뱅앤올룹슨 오디오를 설치한 쉼채는 원래 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그만 절의 본당이었다. 도시개발로 철거될 절을 옮겨놓은 것. 지 소장이 담담각에 쏟는 스케일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빈관 앞 입구 마당도 현재는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물관을 꾸밀 생각이다. 또한 이미 논밭을 일구고 있는 담담각 마을 입구 터에도 조만간 카페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이광만의 나무 이야기 - 진달래
진달래는 봄이 되면 우리 산하의 도처에 지천으로 피어 우리 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나타내주는 꽃이자, 우리와 가장 낯익은 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북쪽 지방에서는 잘 살지 못하는 무궁화보다는 차라리 전국 어느 곳에서도 잘 사는 진달래로 국화를 삼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른 봄이면 여수 영취산, 완주 모악산, 창원 천주산, 밀양 종남산, 대구 비슬산, 부천 원미산, 강화도 고려산 등에서는 진달래 축제가 벌어진다. 한라산의 철쭉제는 진달래꽃의 축제이다.
중부지방에서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하는데, 이는 봄에 꽃을 따서 그대로 먹거나 전(煎)을 붙여 먹기 때문에 ‘참(眞)꽃나무’라 하고, 이에 비해 철쭉꽃은 유독성이어서 먹을 수 없으므로 ‘개(狗)꽃나무’라고 한다. 화전은 꽃전이라고도 하며 진달래꽃을 따서 꽃술을 제거하고, 찹쌀가루를 묻혀서 참기름에 띄워 지져 먹는 떡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지 에도 ‘삼월 삼짇날에 진달래꽃을 따서 찹쌀가루에 묻혀 떡을 만들어 참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또 진달래술은 두견주(杜鵑酒)라 한다. 진달래 꽃의 꽃술을 제거하고 꽃잎만 사용해서 만드는데 청주를 빚을 때 찹쌀 고두밥과 진달래 꽃을 층으로 쌓아 빚거나, 청주 항아리 속에 진달래 꽃을 명주 주머니에 넣어 한 달쯤 담궈두어 숙성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남도지방의 은어에 어린 처녀를 일컬어 연달래라 하고, 성숙한 처녀는 진달래, 그리고 과년한 노처녀는 난달래라 한다. 이규태 칼럼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진달래는 꽃 빛깔이 달래꽃보다 진하다 하여 진달래란 이름을 얻고 있다. 진달래꽃의 빛깔이 달래의 그것보다 연한 것은 ‘연달래’라 하며, 숙성한 처녀를 ‘진달래’, 그리고 시드는 장년 여인을 ‘난(蘭)달래’라 불렀는데 그것은 바로 그 나이 무렵의 젖꼭지 빛깔을 연달래, 진달래, 난달래의 꽃 빛깔로 비유한 것이니 아름다운 외설이 아닐 수 없다”
진달래의 중국이름은 두견화(杜鵑花)이다. 이는 두견새, 즉 소쩍새가 울기 시작할 무렵에 꽃이 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두견화에는 슬픈 전설이 전한다. 촉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위나라에 망한 후, 다시 나라를 찾으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다고 한다. 한 맺힌 두견새는 피를 토하며 울었는데, 그 피가 진달래 꽃잎에 떨어져 꽃잎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또 두우가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귀촉(歸蜀)귀촉하며 피를 토하듯 운다고도 전한다. 두견새는 봄이 되면 더욱 슬프게 밤낮으로 울어 한번 우는 소리에 진달래꽃이 한 송이씩 떨어진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진달래꽃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시는 님이 고이 돌아오시도록 걸음걸음에 뿌리는 아름답고도 슬픈 우리 민족의 꽃이다.
3월 넷째 일요일인 23일 포근한 날씨 속에 봄꽃이 만개하면서 전국의 유원지는 나들이 인파로 북적거렸다.
원동매화축제가 열린 경남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일대에는 가족과 연인 수만 명이 찾아 활짝 핀 매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며 봄 추억을 만들었다.
매화와 산수유 등 봄꽃이 활짝 핀 하동 섬진강변과 거제 외도, 통영 장사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에도 봄꽃 정취를 느끼려는 관광객의 발길이 잇따랐다.
'미선나무 꽃 전시회'가 열리는 충북 청원군 미동산수목원에는 많은 가족 단위 행락객이 찾아 꽃향기에 취했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희귀식물로, 이번 전시회에는 200여점의 분화가 전시되고 있다.
이미 진달래와 개나리 등 봄꽃이 만개한 제주도에도 주요 관광지마다 봄꽃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경기도 과천 서울랜드에 2만여명, 용인 한국민속촌에 4천여명이 찾아오는 등 전국의 유원지에도 봄기운을 느끼려는 시민의 발길이 크게 늘었다.
3ㆍ15 마라톤대회가 열린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각지공원에서는 3천여 명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참가해 건강을 다졌다.
산악자전거대회와 족구대회가 열린 경남 사천시 삼천포대교공원과 김해 가야대 운동장에도 각각 1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산행으로 봄맞이하는 등산객도 많았다.
강원도 설악산국립공원에는 6천여명의 등산객이 찾아 산행을 즐겼고 평창 오대산과 원주 치악산에도 7천여명이 몰렸다.
전북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과 무주 덕유산, 정읍 내장산 등에는 1만여명의 행락객이 찾았고 인천의 대표적 산인 강화도 마니산에는 평소 주말보다 1천여명이 많은 4천여명이 몰렸다.
농촌 들녘에서는 농민들이 복분자 가지를 치고 밭갈이를 하는 등 한 해 농사 준비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은 800km에 이르는 기나긴 순례길이다. 프랑스 생 장 피에드 포르에서 시작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한 달여 가량이 소요되는 종교인의 고된 순례길. 하지만 현재는 피레네 산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여행객들의 발자국으로 채워지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은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은 제주 올레길을 직접 일구며 국내에 ‘걷기 여행’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제주 올레길에서 촉발된 ‘걷기 여행’ 열풍은 지리산 둘레길, 전라북도 순례길 등으로 이어지며 속도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다시금 느림, 걷기의 미학을 되새겨 주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도 ‘뚜벅이’라는 걷기 동호회가 있다. 지난해 12월 정식으로 출범했지만 어느새 가장 ‘핫’한 사내 동호회로 주목받고 있다.
정해진 인원은 없다. 한 달에 한 번 동호회 운영자들이 사내 게시판에 공지를 띄우고 그때 그때 신청자를 받는다. 걷기 동호회인 만큼 특별한 장비를 갖추거나 기술을 익힐 필요도 없다. 때문에 여행 공지를 띄울때마다 평균 20여명의 참가자가 몰리곤 한다. 간편함이 ‘뚜벅이’ 인기의 비결인 셈이다.
‘뚜벅이’는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 꼴로 강화도 옛사랑길, 계족산 황톳길, 문경새재, 청계산 둘레길 등 지역의 좋은 길을 찾아 걸었다. 직원 가족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지만 예산 제약이 있어 신청자가 몰릴 경우 직원 위주로 참가자를 선정하기도 한다.
부담없이 걷는 도보 여행인 만큼 참가자의 연령과 직급도 다채롭다. 함께 길을 걸으며 다른 부서, 다른 직급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뚜벅이’의 큰 장점. 증권 예탁, 증권 보호예수, 금융상품 결제 등 숫자와 씨름해야 하는 예탁원 업무의 특성상 걸으며 혼자만의 사색에 빠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다른 부서의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걸으면서 사색에 잠길 수 있어 복잡했던 머릿속도 정리되는 기분입니다. 다이어트에도 좋으니 금상첨화죠.”
쉬면서 가면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잠시 삶의 속도를 느리게 하기. 예탁원 ‘뚜벅이’가 직원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