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 마지막을 보냈던 영월로 여행을 떠난다. 겨울날, 더욱 가슴이 시리도록 다가오는 청령포와 관풍헌, 장릉으로 이어진 단종의 자취를 따라가는 영월여행은 단순히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지, 채 피어나지 못한 젊음과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은 백성을 만나는 여정에 마음은 더욱 단단해진다.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을 모르겠다. 특히 다 자란 어른의 권력욕은 치명적이다. 12세에 왕위에 올라 17세에 숨을 거둔 단종(端宗 1441~1457)의 짧은 생애,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은 지 1년 반 만에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그를 모시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으로 내몰렸다. 어린 소년 왕은 스스로 왕위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456년(세조 2) 수백 명이 죽어 나갔던 사육신 사건이 후 얼마 후에 어린 소년은 제 삼촌인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는다. 1457년 10월의 일이다.
영월 첫 여행지는 이른 아침의 청령포다. 눈은 오지 않으나 스산한 겨울바람이 부는 청령포를 따라 회색빛 옅은 안개가 외진 땅을 감싸고 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어린 단종이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그의 마음을 그대로 전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600년 된 관음송(觀音松)만이 그때를 기억하는 듯 처연하다. 어린 노산군이 이 소나무에 앉아 한을 토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한다. 그것을 보고 듣고 하였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관음송과 소나무, 참나무가 어우러진 숲은 흘러간 세월의 풍상에 아픔을 차곡차곡 갈무리한 듯 무게감이 느껴진다. 뒤로는 넘을 수 없는 절벽 산이, 양옆과 앞으로는 시퍼런 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이곳에서 눈물지었을 어린 임금의 심정은 얼마나 막막하였을까.
단종이 죽음을 맞이한 곳은 영월의 관아인 관풍헌이다. 홍수가 나 청룡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긴 뒤 두 달여 만에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한다. 관풍헌 앞에 있는 누각 자규루에 그가 읊었던 시가 그의 피눈물 나는 애통함을 대변하고 있다.
...자규새 소리 멎고 조각달이 밝은데
피눈물 흐르고 꽃송이 떨어져 붉었구나...
자규새는 신하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한 두우가 죽어 새가 되어 촉나라 땅을 돌아다니며 피를 토하며 울었다는 전설 속 소쩍새를 말한다. 단종의 원혼이 이 땅 어딘가를 날며 울고 있지나 않은지.
현재 관풍헌과 자구류는 공사 중이다. 왕방언이 가져온 사약을 마셔야 했을 소년 왕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의 시신이 묻힌 장릉으로 향한다.
단종은 죽음 뒤에도 편치 않았다.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을 내렸고 후환이 두려운 사람들은 시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의 죽음을 배웅해준 단 한 사람은 엄흥도였다. 향리의 우두머리였던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들쳐 메고 산으로 올라가서 그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한때나마 왕이었던 이의 죽음이 이리도 초라할 수 있을까. 80여 년 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던 그의 묘는 중종 33년(1538) 영월 부사로 부임한 박충헌이 꿈에서 단종을 만난 뒤 노산 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묘호가 단종으로, 능호가 장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숙종 24년(1698)에 이르러서다.
능은 보통의 왕릉과 달리 가파른 능선 위에 있다. 단종의 시신을 몰래 산중에 묻어야만 했던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능하다. 능으로 가는 길에 서있는 소나무는 능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듯하다. 무인석, 병풍석, 난간석은 없고 문인석만 있는 단출한 느낌에 생을 다하지 못한 왕의 모습을 보는 듯 쓸쓸함이 감돈다. 능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홍살문을 지나 90도로 완전히 꺾인 우측 끝에 정자각이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 바로 옆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종친․시종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가 보이고 그 곁으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이 그나마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제사 때 썼던 우물인 ‘영천’을 지나 정자각에 서면 겨우 봉분 위만 슬쩍 보이는 능이 애달프다. 능 주변의 드넓게 자리한 소나무 숲은 호젓하여 걸을 만하다. 장릉을 돌아 나오는 길에 단종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던 엄흥도를 기린 엄홍도정려각을 유심히 바라본다. 싸라기눈이 가볍게 뿌리는 길을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에 새로운 미래를 펼쳐갈 아이를 꼭 잡아주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른을 그려본다.
△가볼 만한 식당
*장릉 보리밥집
장릉 주변 맛집으로 말린 옥수수와 소품을 아기자기하게 놓아두었고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이 갖는 정겨움이 있다. 방에 앉아 보리밥을 주문하면 얄팍하게 부친 메밀부침이 먼저 나오는데 함께 나오는 열무김치와 잘 어울린다. 큼지막한 감자가 들어간 감자밥과 짜지 않은 갖가지 반찬의 조화가 꽤 많은 양의 밥을 싹싹 비우게 한다. 반은 비벼먹고, 반은 반찬을 맛보며 깔끔하게 먹는 것도 좋다. 보리밥 8000원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01-1
*메밀전병과 배추전
메밀전병은 메밀가루를 아주 묽게 반죽해 얇게 펴서 무, 배추, 고기 등을 넣고 말아서 지진 음식이다. 예전에는 좁은 골목길에 이곳저곳 자리했던 전병 집이 영월 중앙시장 건물 안에 쪼르르 모여 있다. 메밀전병이라도 강원도 지역마다 그 맛이 조금씩 다른데 영월은 매콤한 맛이 강하다. 그중에서 미소네맛집을 추천한다. 주인 할머니께서 인터넷을 못해 인터넷 주문은 불가하고 전화 주문 시에는 한 개에 1500원, 직접 가서 사면 한 개에 1000원이다. 살짝 절여 지진 배추전과 함께 먹으면 매콤과 심심함이 어우러져 별미다.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제방안길 16-1
넘어져 부서져도 눈 덮인 산을 그리워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가며 설상 경사로를 질주했다. 수줍은 미소로 시작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시간이 갈수록 반전에 반전을 더했다.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다! 겨울 놀이에 인생을 던진 두 남자를 만났다.
이들은 1994년 처음 만났다. 도봉산에 있는 한국등산학교에서. 전영래(55) 씨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임세훈(51세) 씨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자주 보면서 살게 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체격도 비슷하고 뭔가 풍기는 느낌도 다르지 않다. 한국등산학교 강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정작 본업은 따로 있다. 임세훈 씨는 음향 엔지니어, 전영래 씨는 건설업자다. 겨울 놀이에 빠져 산다는 이 두 남자의 시작은 모두 산(山)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암벽 등반한 임세훈 씨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장교 부인들과 어울리셨는데 절에 자주 갔습니다. 저도 따라다녔어요. 대부분 절은 산에 있잖아요.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됐습니다. 기웃거리면서 ‘저게 뭐하는 것이냐’며 사람들에게 자꾸 물어보니까 알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암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 되니까 선배들이 산에 간다면서 스키를 메고 가더라고요. 겨울 산행을 하려면 스키를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알프스스키장에 가서 처음으로 스키를 접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적설량이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중학교 때만 해도 산에 가면 보통 허리까지 눈이 왔어요. 눈을 그냥 등산화로 헤치고 밟아가며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그걸 ‘러셀’이라고 하는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뭔가 편안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는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다니더라고요. 러셀로 오르면 4~6시간 걸려 올라가는 산을 스키로는 2시간이나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시간도 단축되고 체력 소모도 없어요. 그때부터 산악스키에 빠져든 거죠.”
스키를 계속 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있었다. 눈 쌓인 겨울 산을 보는 게 좋았다.
“아무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에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 경치를 보고 싶어서 자꾸 올라갔습니다. 등산과 스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유럽 스키의 벽을 깨고 겨울을 찾아다니다
임세훈 씨는 스키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빙벽에도 오른다. 어린 시절 태권도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입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특전사로 차출됐다. 군에서 패러글라이딩 팀에 있었고 스키도 좀 타봤다. 7년 넘게 부사관으로 있다가 1991년 3월에 전역했다.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역시나 스키장이었다. 스키장 패트롤(안전요원)로 들어가 일도 하고 원 없이 스키 슬로프를 질주했다.
“스키 시즌이 끝날 무렵 스키 강사와 패트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어요. 지금도 종종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데 강사와 패트롤 중 누가 더 스키를 잘 타냐는 거였어요. 그때 마침 자리에 한국스키협회 이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너희 시합해봐.’”
매력적인 경품도 걸렸다. 10명에게 스위스 스키장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다. 스키장이 폐장할 때쯤 슬로프를 정리하고 스키대회처럼 기문을 설치하고 각각 10명씩 20명이 맞붙었다. 협회 이사장이 연수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10명에는 강사 4명과 패트롤 6명. 그중에는 임세훈 씨도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체르마트 스키장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래도 스키 좀 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연수 첫날 체르마트 스키장의 A급 패트롤과 최정상 슬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 2급에서 같이 스키를 타고 내려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중 가장 늦게 내려온 사람과 20분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저희 실력이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는지 점점 슬로프 경사도가 낮아졌어요. 강사도 패트롤 A급에서 C급으로 내려갔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슬로프 근처에도 못 가고 평지에서 자세만 배웠습니다.”
8일간의 연수를 마친 뒤 임세훈 씨는 함께 갔던 협회 이사장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돈을 끌어모아도 1000프랑(유로 가입 전 프랑스 화폐 단위)이 안 됐다. 한국에서 송금받을 방법도 알아냈다. 스위스 스키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요. 형편없더라고요. 제 실력이요. 한국스키협회 추천을 받아서 일단 스위스 국립스키학교에 등록했어요.”
입교 허락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돈도 없고 영어도 안 되니 학교 측에서 걱정했다.
“한국어로 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사전을 스위스 현지에서 샀습니다. 스스로 교재를 번역해서라도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어차피 내용의 80%는 전문용어이니까요. 제가 영어를 못하니까 강사들이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알선해주고 브랜드 협찬도 연결해주셨어요. 2년 공부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레벨3을 땄습니다. 개인 강습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학업을 마친 후 스키 전문 브랜드의 데몬스트레이터(최고 스키 지도자) 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스키도 열심히 탔고, 동양인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월급 받으면서 세계의 유명 스키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겨울에는 국내에 들어와서 스키도 타고 제가 하던 음향 일도 했습니다. 겨울만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스키의 재미에 빠져 살았다. 브랜드 홍보차 유럽의 한 스키장에서 모굴스키를 타다가 앞서 타던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고 피하려다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미칠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존심 때문에 싫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스키와 등산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재작년에는 남극에도 다녀왔습니다. 스키는 노는 날 탔죠.(웃음)”
2014년, 한국은 남극 대륙 본토인 테라노바 만에 두 번째 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를 건설했다. 임세훈 씨는 이곳에서 연구하는 박사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안전요원으로 파견된 것. 크레바스를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고 블리자드가 부는 극한 상황을 해결하는 등 더 원활하게 연구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돌아왔다.
“사실상 백수입니다. 그래도 군에서 연금도 나오고요. 남극 안전요원으로 활동도 했고, 동호회 형식의 스키 교실, 등산학교 등에서 강연도 합니다. 봉사에 가깝지만 교통비 정도는 주십니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키와 등산은 생활이자 직업입니다.”
신장 투석하면서 해외로 스키 타러 다닌 전영래 씨
“매년 스키장 시즌권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샀어요. 구입하고 나면 누구랑 갈까 생각해요.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요.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가야 하니까 함께 스키 탈 친구들 목록을 정리합니다. 젊었을 때는 스키 시즌 내내 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때 산악인이던 삼촌을 따라서 이 산 저 산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다. 암벽등반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산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차서 결국 교복을 입고 성인들 틈 사이에서 산행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산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성북동 살았는데 우이동에 선배가 하는 산장이 있었어요. 책가방 거기다 가져다 놓고 등반하고 자고 아침에 학교 가고 또 등반하고. 그러다 산악스키에 빠지게 됐어요. 형들이랑 있으면 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눈이 많은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스키를 탄다고요. 그리고 스키를 타야 산을 오르내리는 게 쉽고 빠르다고 했어요. 1985년도에 스키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제대로 타려면 스키도 타야 했어요.”
지금처럼 스키장이 많을 때가 아니라 선배들이 차를 몰고 스키장에 갈 때 따라갔다. 스키 타는 시간보다 선배들 밥 챙기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그런데 정작 산악스키의 매력 포인트는 알고 있어도 산악스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라 정보도 풍부하지 않았다. 혹여 누군가 외국에 나가서 배워오면 그게 정확한 정보라고 믿을 때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알게 된 정도였다.
스키장 가려고 사표 낸 건설사 직원
“직장생활할 때는 퇴근과 동시에 스키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회사가 방배동 쪽이어서 용인 양지에 있는 스키장을 이용했죠.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4~5년 동안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쇼트트랙을 했어요. 이상화 선수를 배출한 은석초등학교의 빙상부원이었습니다. 성북동에서 목동, 방배동으로 출근했다가 양지로 이어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에 피로를 느껴 사표 던지고 나왔습니다.(웃음)”
1997년 직장을 그만둔 그는 회사의 대표가 되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등반하고 스키장가는 일에 더 몰두했다. 정말 원 없이 갔다. 4일, 5일 정도는 스키장에서 혼자 지낸 적도 있다.
“아침에 스케이트장, 저녁에 스키장. 몇 년 하다 보니까 슬로프를 타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산악스키처럼 좀 색다르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2003년에 강원도지사배 강원 산악스키대회가 열렸어요. 그때 출전했습니다. 산악스키대회 장면을 영상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참가하려니 많이 떨렸습니다. 산악용 스키가 원래는 따로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엄홍길 선배에게 빌렸습니다. 스키장의 곤돌라가 돌기 전인 새벽 5시쯤에 대회를 시작해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끝냈어요.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보더군요.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니까요.”
이렇게 신나게 살던 전영래 씨의 인생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2005년 고산에 다녀온 뒤로 신장이 망가졌다. 7년 동안을 자가 투석해야 했다. 성격상 집에서 쉴 수 없었던 전영래 씨는 투석에 필요한 장비와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악착같이 스키를 탔다.
“제가 좀 외향적이에요.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몸이 안 좋아도 삿포로나 나가노에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갔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다니는 약이 꽤 무거운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각자 짐에 나누어 넣고 다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투석하고 열심히 스키 타고, 돌아와서 남들 한잔씩 할 때, 자기 전에도 투석하고 그랬어요.”
스키 타고 등반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신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유럽의 스키장을 다닌다고 했다.
“2012년에 투석기를 꽂고 운전까지 해가면서 새벽에 스키장에 가고 있는데 일산 백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저와 조직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있으니 수술받으려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후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아내가 옆에서 듣고는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더라고요. 바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갔죠. 투석할 때는 어디든 3시간 이내로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환자니까 장시간 비행도 쉽지 않죠. 신장 이식하고 6개월 후에 바로 프랑스의 샤모니몽블랑으로 날아갔습니다.”
매년 못 가면 한 번, 기본 두 번은 해외 스키장으로 나간다. 산 다니고 스키 타는 사람들의 건배사에 ‘백두산’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100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민폐 끼치지 않을 때까지 스키도 타고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겨울 스포츠 즐기는 Tip
1 시즌권은 8월부터 준비한다. 홈페이지를 꾸준히 확인하기 싫으면 애플리케이션 알람 신청을 해놓으면 된다.
2 부상 없이 스키를 안전하게 오래 타고 싶으면 다운힐(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기술)은 최소한 정식 자격을 갖춘 곳에서 강습을 받아야 한다.
3 레벨에 맞는 강사에게 강습받기를 권한다.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이 최고급 지식을 가르치는 데몬스트레이터에게 교육을 받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들은 스키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스키스쿨에서 최소한 3회 이상 교육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4 시니어에게 산악스키를 권한다. 산릉선을 스키를 신고 돌면서 경치도 보고 운동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스키를 타고 올라갔다가, 스키로 내려오기 어려우면 짊어지고 내려와도 된다. 산악스키용 부츠는 등산화와 비슷해 신고 내려올 수 있다. 완만한 경사를 임도 따라서 산행하듯이 스키를 신고 걸으면 된다. 크게 힘들지 않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블리자드 쌓인 눈이 강풍에 휘날려 일어나는 눈보라.
•러셀 등산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길을 뚫는 방법.
어린 시절의 겨울을 떠올려보면 추운 날씨에도 바깥 활동을 참 많이도 했다. 팽이치기, 자치기, 썰매타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얼음땡 등 겨울 놀이가 풍성했다. 요즘은 세상이 변해서 따뜻한 실내에서도 다양한 놀이와 체험을 할 수 있다. 손주 손 잡고 가족과 함께 즐길 만한 핫 플레이스를 찾아봤다.
1. 힐링과 웰빙을 담는 곳 ‘미리내 힐빙클럽’
이 겨울 따뜻한 곳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미리내 힐빙클럽’(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몸과 마음을 함께 보해주는 예방 의학과 ‘마음 챙김’ 철학이 만난 공간으로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50분 거리에 있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상태로 심신을 내려놓고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피곤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곳이다.
스트레스 체크를 시작으로 유산균이 배합된 팩을 얼굴에 바르고 누워서 하는 ‘바디스캔 명상과 디토피팩’은 미리내 힐빙클럽의 특별 프로그램이다. 깊은 휴식을 통한 이완과 재충전도 하고 피부 노폐물도 제거할 수 있다.
‘실내 체험존’에는 ‘풀이 우거진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순우리말 이름의 ‘가든푸실’이 있다. 100여 종에 이르는 초록 식물과 반신욕, 족욕 등 물을 테마로 한 공간으로 조용하고 편안하게 안정을 취할 수 있다. 말초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는 테마별 족욕탕도 곳곳에 있다. 잇꽃 입욕탕, 겨우살이덩굴 입욕탕, 쑥탕 등 생약초 족욕탕, 오감 족욕탕, 게르마늄 족욕탕 등으로 나뉘어 있어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 바이오 세라믹볼 찜질도 방문객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라고. 인체에 유익한 다섯 가지의 광석 물질이 몸속 깊숙이 열을 전달해주는 원적외선을 방출한다. 옛날 아랫목이 있던 구들방을 연상케 하는 ‘구들잠休’는 평소 숙면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다. 잠깐 자고 일어나도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 힐빙체험존에는 간, 비위, 콩팥, 폐, 심장을 중심으로 한 오행 테라피와 향기, 명상, 소리, 색깔을 이용한 오감 테라피 등이 있다.
2. 도시 속 예뻐지는 정원 ‘아모레 성수’
이곳에 가면 예뻐질 수 있다! 건물 안에서 정원도 감상하고 아모레퍼시픽의 다양한 제품들을 직접 써볼 수 있는 공간, 바로 ‘아모레 성수’다.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관대한 이곳은 지난 10월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에 문을 열었다. ‘아모레 성수’는 아모레퍼시픽의 30개 브랜드를 중심으로 이뤄진 만들어진 뷰티 라운지다. 1층에서 3층 옥상까지 총면적은 300평 규모. 어린 시절 엄마의 콜드크림을 얼굴에 조금씩 발라보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마치 그때 그 시절 화장대를 넓은 공간에 예술적으로 표현해놓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아모레 성수 건물 안 중앙에는 ‘성수가든’이라고 이름 붙인 정원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간을 배치해 건물 어디에서나 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정원수로 쓰인 꽃들은 비비추, 앵초 같은 우리 강산에서 나고 자란 식물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매장 입구에서 간단한 웹 체크인을 하고 나면 아모레 성수에서 체험할 수 있는 미니어처 교환권과 오설록 할인권 등을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해 쓸 수 있다. 화장품을 사용하기 전 세안을 할 수 있는 클렌징 룸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뷰티 라이브러리’. 아모레퍼시픽 30여 개 브랜드의 2000여 개 제품을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빼서 보듯 꺼내 쓸 수 있다. 뷰티 라이브러리 맞은편에 있는 가든라운지는 아름다움을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다. 비치된 의자에 앉아 성수가든을 바라보며 다양한 제품을 사용해볼 수 있다. 2층에는 오설록 아모레 성수점이 입점했다. 3층은 옥상으로 연결돼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성수동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3. 기차 안에서 놀자! 크루즈 열차 ‘해랑’
크루즈 여행은 한 장소에서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목적지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탑승과 함께 진행되는 유람선 안 프로그램이 낭만적이다. 아주 멀리 배를 타고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기차 안에서 놀고 즐길 수 있는 해랑을 타고 달려보자. 일명 레일크루즈라 불리는 ‘해랑’은 코레일관광개발에서 운영한 지 11년째 된 관광열차다. 상시 여행 코스는 2박 3일 전국일주(서울-순천-경주-동해-태백), 1박 2일 동부권(서울-단양-경주-서울),
1박 2일 서부권(서울-고창-보성-순천-서울) 3가지가 있다. 오는 12월 30일과 31일에는 해맞이 특별 열차가 운영될 예정이다.
‘해랑’으로 운영되는 열차는 총 2대로, 1대당 8량으로 구성돼 있다. 중심 차량인 4호와 5호는 레스토랑 카페와 이벤트 라운지이고, 나머지 6량은 객실이다. 2인실(스위트·디럭스룸)과 3~4인실(2층 침대) 패밀리 룸과 스탠다드룸 등 4개 타입이 있다. 호텔식을 지향하기 때문에 시설 또한 고급스럽다. 관광 전용 열차에 걸맞게 침대, 소파, 화장실, 헤어드라이기 등 여행과 휴식에 필요한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다. 여행이 시작되면 승객과 승무원들은 이벤트 라운지에 모여 여행 시작을 알리는 작은 파티를 연다. 다양한 이벤트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준비하는데 승무원들의 장기자랑도 이때 볼 수 있다. 승객들은 각자 자기소개를 하면서 새로운 여행 친구들과 인사한다. 보다 친근한 여행을 즐길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해랑 승무원들은 맡은 소임은 물론 각 여행지에서 관광객 인솔과 이벤트 공연, 식음료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해랑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쇼핑을 강요받는다거나, 추가 요금을 내는 일이 없다는 게 큰 장점이다. 시니어들에게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출발하는 전국일주 2박3일 코스가, 어린 자녀가 있는 부부에게는 1박 2일 코스가 인기 있다.
4. 손주들과 함께 가는 실내 동물원 ‘주렁주렁’
주렁주렁은 도심 속에서도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겨울철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동물원 나들이를 하게 된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실내 동물원 ‘주렁주렁’은 동물들과 함께하는 테마파크로 하남, 일산, 경주,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들어서 있다. 시간 여행자와 생명의 나무(타임스퀘어), 잃어버린 기억(하남), 여행자의 추억(일산), 숨겨진 비밀(경주) 등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운영된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간이라 실내 평균온도와 내부 환경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고. 실내는 23℃에 맞춰져 있어 외부 날씨 영향을 받지 않고 사시사철 이용이 가능하다. 춥거나 미세먼지가 많아도, 눈비가 와도 즐길 수 있는 동물원이다.
운영 프로그램도 각 동물원마다 색다른 특색이 있다 ‘하남 주렁주렁’에서는 전 연령 대상으로 앵무새 ‘민트’와 함께하는 토크쇼 ‘모퉁이 상담소’, ‘주렁숲 요정의 산책’이라는 환영 행사를 진행한다. 올해 7월에 문을 연 영등포 타임스퀘어점은 1000평 규모의 실내 동물테마공원으로 대중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복합쇼핑몰 안에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다. 시간 여행자와 생명의 나무 콘셉트에 맞춰 게임을 하듯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면서 동물원을 관람할 수 있다. 미션을 마친 뒤에는 영상 불빛 쇼도 볼 수 있다 하니 이번 겨울에 꼭 한 번 가보시길. 아기자기한 프로그램이 많은 ‘일산 주렁주렁’은 파충류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생생 도슨트 체험 파충류 대사전’과 ‘걱정인형 만들어주기’, 동물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생태체험 주렁쿠키’, 앵무새 비밀 친구(마니토)를 뽑아 특별 간식을 선물하는 ‘생태체험 나의 마니또는?’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경주에서는 동물먹이주기 체험이 주를 이룬다. 상어, 사바나캣, 카피바라에게 먹이를 주고 싶으면 현장에서 신청하면 된다. 방문 전 주렁주렁 사이트에서 가고 싶은 곳 정보를 확인하면 보다 알차게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다.
5. 숲속 맑은 공기와 찜질 스파 ‘테르메덴 풀앤스파’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이천. 복합휴양 공간인 ‘테르메덴 풀앤스파’가 있다. 추운 날씨에도 실내외 온천 사우나와 수영장은 물론 카라반 캠핑 시설과 한옥을 갖추고 있어 유럽에 온 듯한 숲속 정취와 우리 전통의 향취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실내에 마련된 풀앤스파는 각종 질병 예방과 요양,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개발된 건강보양온천 시설이다. 이를 바데풀(Bade Pool)이라고 하는데 독일의 바데하우스(Bade Haus)를 모델로 했다. 유수풀, 유아풀, 테마 이벤트탕, 아로마 사우나 닥터 피시 등이 마련돼 있다.
실내 시설 중 하나인 찜질 스파는 전형적인 온천에 찜질을 더한 것. 온천욕을 즐긴 후 편백나무방, 황토방, 소금방, 맥반석방 등에서 찜질을 할 수 있다. 일본의 편백나무와 히말라야의 암염, 전북 고창의 최고급 황도, 경북 예천의 맥반석을 사용해 최고의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찜질방과 함께 패밀리룸, 가든 커뮤니티, 안마의자룸, 키즈라이브러리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다.
이밖에 건·습식 사우나, 온천탕, 노천 이벤트탕은 일상의 지친 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춥다고 해서 꼭 실내 시설만 이용할 필요는 없다. 노천 이벤트탕은 생각보다 춥지 않다고. 겨울에는 바닥에 살얼음이 낄 수 있어 걸어 다닐 때 조심해야 한다. 추위가 걱정된다면 긴팔로 된 래시 가드를 착용할 것을 권한다. 테르메덴 풀앤스파에서는 수영복 대여가 안 되므로 꼭 챙겨가야 한다.
조선왕릉은 문화유산으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가 남아있다. 이 가운데 능은 42기, 원이 14기, 묘가 64기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한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히 보존된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다. 2019년도 저물어가는 12월 가까이 있는 서오릉을 찾았다. 삶과 죽음, 역사 이야기를 통해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봤다.
홍릉을 통해 본 영조의 삶은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까?
천한 신분인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열등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한계를 지우는 원인이 되었다. 배다른 형을 세자로 둔 왕자였지만 금수저가 아니라 차라리 흙수저에 가까웠다. 성장기도 궐 밖의 사가(私家)에서 지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의 21대 왕이 된 이가 영조다.
그는 어려서 궐 밖에서 지낸 경험으로 인해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많이 알려진 탕평책(비록 실패했지만)과 균역법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그 밖에도 쌀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고, 가혹한 형벌을 없애기도 했다.
영민한 군주였지만 그는 콤플렉스로 인해 개인적으로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먼저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오로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만 집중한 외골수였다. 일례로 경연을 자주 열었다. 왕위에 있는 동안 역대 최고인 3458회를 기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 실력을 자랑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밖으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조선의 왕이라는 신분에 얽매였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왕이라는 신분이 고난을 견디게 하는 자부심이 아니라 권력을 소유하는 기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는 정비인 정성왕후에 대해서도 첫날밤에 소박을 놓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어이없다. 첫날 밤 연잉군(왕이 되기 전 영조의 호칭)이 말하길 “그대는 손이 참으로 곱소”하였다. 이에 대해 정성왕후는 “소첩이 궂은일을 하지 않아 그런 듯하옵니다.” 딱 한 마디 대답했다. 이 말에 그는 궂은일을 많이 했던 자기 어머니 손을 떠올리며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죽는 날까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병 수준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국의 왕비로서 끝까지 체통을 잃지 않았다. 남편에게 평생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비와 자식 간의 관계로 인해 마음의 병까지 얻은 그녀가 죽은 후 자리를 잡은 곳이 서오릉에 있는 ‘홍릉’이다. 홍릉은 조선의 능 중 유일하게 한쪽이 비어있다. 원래 영조는 자신이 사망하면 비워둔 오른쪽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으로 조성하길 원했다. 하지만 정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조는 왜 영조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오렌지빛 주황색을 띤 겨울 햇살이 능과 마주 보고 있는 산 정상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영조의 콤플렉스와 열등의식은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세자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3살 때 글을 쓰고 읽을 정도로 영특한 이 선(사도세자의 이름)은 태어난 다음 해 세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영조는 아들이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이 선은 무예에 관심이 많고 능통했다. 영조는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는 아들에게 점점 더 심하게 압박을 가했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신병까지 생겼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참변에까지 이른다. 사도세자는 홍역을 앓으면서도 사흘 동안 눈 위에 엎드려 영조에게 잘못을 빈 적도 있었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조의 이런 혹독함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그는 자식과 공감, 소통한 것이 아니라 소외, 단절한 것은 아니었나.
홍릉 주변을 걸으며 영조를 생각하니 가까이 있는 가족, 사람들과의 관계와 공감에 대해 반성하며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바라보며 또 다른 나를 통해 지나온 삶에 대해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끊임없이 더 좋은 삶, 더 따뜻한 삶을 향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걷고 싶다.
서오릉은 치유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
서오릉에는 5개의 능과 2개의 원, 1개의 묘가 있다. 서울의 서쪽인 이곳에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세조의 큰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추 존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가 있는 경릉이다. 세조는 그가 지은 죄 때문인지 아들이 두 명이나 20세 때 죽었다.
두 번째 능 역시 세조의 둘째 아들인 제8대 예종과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의 능이다. 세 번째 능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네 번째 능은 제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 이야기한 홍릉이 있다.
이번에 돌아본 서오릉은 단순하게 역사적 가치만을 지닌 공간이 아니었다. 51만여 평에 이르는 서어나무 길과 소나무 길이 있는 녹지대는 사색과 사유의 공간이었다. 소나무 향이 흐르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삶과 죽음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찰나에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경험’임을 깨닫게 되고, 살아있음의 황홀함이 느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행복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서오릉은 치유의 공간이었다.
또 그곳의 자연에서는 봄을 위해 동토에 새싹을 피우는 자연을 만날 수도 있었다. 티 없이 화사한 자연의 미소가 거기에 있었다.
△교통
지하철: 3호선 녹번역 4번 출구 은평구청 방향에서 광역버스(9701),일반 버스(702A,B)
3호선 원당역 3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구산역 1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응암역 2번 출구에서 일반버스 (701A, 702B)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2019년 9월 서오릉 앞길이 정비를 끝내고 6차선 대로로 새롭게 길을 열었다. 전 보다 접근성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다 보니 요즘 서오릉이 서울 근교의 새롭게 떠오르는 먹방의 성지가 되고 있다.
△가볼 만한 식당
⁕ 대가왕 쭈꾸미
대한민국 요리 명장이 요리하는 곳으로 소문난 이곳의 요리와 메뉴는 퓨전이다. 불 주꾸미의 경우 불맛의 향을 살리면서도 숙주의 아삭함과 파향으로 느끼함을 잡아준 별미다. 식사 후 정원에서 커피도 가능하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07-8
⁕경성빵공장
주인이 말하는 비법은 신선한 재료와 당일 생산, 당일 판매뿐이다. 그런데도 빵 마니아들에게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TEL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406-20
△TIP 정보
⁕ 탕평책: 당쟁(영조 때는 노론과 소론)을 막기 위해 정치 세력 간에 균형을 꾀하려 한 정책.
⁕ 균역법: 백성들의 3가지 세금(토지, 특산물, 노동력)중 노동력에 해당하는 군역(군복무) 은 당시 베 2필로 대신할 수 있었는데, 이를 베 1필로 줄이는 대신 지주나 왕족에게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게 한 제도.
⁕ 경연: 왕과 신하가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추구하는 장으로서, 왕이 학문에 애쓰는 것을 드러내는 자리.
춥다고 외출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때로 발걸음을 옮겨 즐길 거리 가득한 실내 놀이터를 찾아보자. 찬바람에도 끄떡없는 테마별 실내 5樂 공간을 소개한다.
1樂 문화를 즐기다
◇ CGV 특별 상영관
국내 최초의 잔디 슬로프 특별관 ‘씨네&포레’는 영화와 숲을 테마로 한 콘셉트로 자연 친화적 스타일로 꾸며졌다. 숲속을 재현한 분위기와 더불어 영화 상영 전 피크닉타임, 캠핑 감성 메뉴, 그리너리 라운지 등을 즐길 수 있다. 또 거실에 대한 로망을 담은 거실형 극장 ‘씨네&리빙룸’은 가죽소파와 칸막이를 설치해 프라이빗한 공간을 연출했다. 각 좌석에는 개인 테이블, 쿠션, 휴대폰 충전기 등을 놓아 편안함을 더했다. 어두운 상영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실제 거실처럼 밝은 조도의 관람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씨네&포레: CGV 강변·광주금난로·천안터미널·부천점, 씨네&리빙룸: CGV 왕십리점.
enjoy + ‘씨네드쉐프’는 고급 레스토랑 식사에 이어 영화 관람까지 가능하다. 상영관은 침대관인 ‘템퍼시네마’와 다양한 소파가 마련된 ‘살롱S’ 중 선택하면 된다. CGV압구정·센텀시티·용산아이파크몰 등에서 즐길 수 있다.
◇ 송파책박물관
책장의 레이어를 본뜬 외벽이 돋보이는 ‘송파책박물관’은 다양한 연령대가 찾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건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널찍한 중앙 계단. 관람객이 쾌적하게 독서를 하거나 각종 문화 행사를 즐기도록 설계했다. ‘책을 통한 소통’을 주제로 꾸며진 1층에는 카페라운지를 비롯해 북키움, 키즈스튜디오 등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 마련됐다. ‘책 속에 들어가 바라보다’라는 콘셉트가 담긴 2층에서는 책과 독서를 소재로 한 상설·기획 전시실과 미디어 라이브러리 등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날씨가 포근할 때는 야외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를 만끽해도 좋다. 서울시 송파대로37길 77, 화~일요일 10:00~18:00
enjoy + 송파책박물관의 특별 공간은 바로 ‘보이는 수장고’다. 대부분의 수장고는 유물처럼 귀한 자료가 많아 접근이 어려운 반면, 이곳에선 유리창을 통해 수장고의 모습과 소장품의 관리·보존 상황을 엿볼 수 있다.
2樂 자연을 즐기다
◇ 서울식물원
지난해 개방한 ‘서울식물원’은 지하철 9호선·공항철도 마곡나루역 3·4번 출구와 연결돼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도 쉽게 방문 가능하다. 지중해 12개 도시 식물을 전시한 온실에서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야외 활동이 괜찮은 날엔 한국 자생식물로 전통정원을 재현한 야외 주제정원을 거닐어보자. 그밖에 식물문화센터, 어린이정원학교, 마곡문화관, 숲문화학교, 수변데크 등을 둘러봐도 좋다.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로 161, 화~일요일 09:30~17:00(동절기)
enjoy + 서울식물원 내 식물문화센터에서는 각종 행사와 전시 등을 통한 다양한 식물문화 체험이 이뤄진다. 온실과 보타닉홀(대강당), 식물전문도서관, 씨앗도서관, 기획·상설 전시관을 비롯해 푸드코트, 카페테리아 등 편의시설도 이용할 수 있다.
◇ 식물관PH
유리온실과 닮아 자칫 식물원으로 보이는 ‘식물관PH’는 ‘식물과 사람이 함께 쉬는 고유한 경험의 공간’을 지향한다. 실제 사람과 식물이 더불어 활동하기 적합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이곳에선 팥배나무, 야자나무 등 100여 종의 나무들과 다육식물을 전시한 재배온실을 볼 수 있다. ‘식물관’은 식물원과 미술관을 합친 이름이다. 입장료 1만 원을 내면 식물원과 3층 미술관을 구경하고 음료 주문까지 가능하다.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34길 24, 화~일요일 11:00 ~20:00(동절기)
enjoy + 식물관PH 3층에서는 12월 15일까지 도예가 한정용 서울대학교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참여한 기획전시 ‘Formation’이 열린다. ‘흙’이라는 집중된 소재 안에서 만듦새의 확장성을 연구하고, 그 쓰임을 바탕으로 형태를 짓는 도예의 작은 시도를 들여다볼 수 있다.
3樂 놀이를 즐기다
◇ 숲, 숨 Gray
‘PLAY=HEALING’ 노는 게 곧 쉼임을 실현하게 해주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평일 1시간 5000원(주말 6000원)의 이용료를 내면 보드게임, 노래방, 오락실, 만화방, 안마의자, 영화 감상 등을 모두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여기에 아메리카노 1잔이 공짜로 제공되고, 3시간 이용 시에는 케이크까지 함께 증정한다. 5층으로 이뤄진 다양한 공간을 체험하다 보면 1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맨 꼭대기 층에는 와인을 곁들일 수 있는 바(bar)도 마련돼 있어 각종 모임 장소로 활용해도 좋다(대관 별도 문의). 서울시 강남구 강남대로156길 45,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제주점: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965)
enjoy + 액션, 어드벤처 등 인기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부터 농구, 다트, 레트로 오락기와 수준별 보드게임, 최신 코인노래방, 고급 안마의자까지 남녀노소 즐길 거리가 풍부해 누구와 함께해도 만족스럽다. 물론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 VR스퀘어
화이트·그린·블루·레드·옐로 등 총 5가지 콘셉트로 나뉜 5층 공간에서 각종 VR 어트랙션(가상현실 체감형 기기)을 체험할 수 있다. 이용요금은 평일 기준 어트랙션 수에 따라 BIG1 8000원, BIG3 2만 원, FREE PASS 2만9000원(3시간 자유이용)으로 나뉜다. VR 체험이 처음이라면 어지럽거나 멀미를 할 수도 있으니 1회권이나 3회권으로 먼저 이용해본 후 횟수를 늘리는 게 좋다. 여럿이 함께 간다면 원하는 시간 동안 인기 콘텐츠 13종을 즐길 수 있는 VR 파티룸(평일 3만6000원)을 이용하는 게 실용적이다. 서울시 마포구 어울마당로 68, 일~금요일 11:00~23:00, 토요일 11:00~24:00
enjoy + 실제 사용자의 행동이 게임에 그대로 반영되는 VR 워킹 어트랙션을 비롯해, 기계에 탑승해 운전이나 비행 등을 즐기는 VR 시뮬레이터, 근래 유행하는 VR 방탈출까지 몰입도 높은 가상현실 기기들이 설치돼 있어 다양한 VR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사진 제공 서울식물원, 식물관PH, 숲, 숨 Gray, VR스퀘어
4樂 여가를 즐기다
◇ 통의동 보안여관(BOAN 1942)
1942년부터 2005년까지 약 60여 년간 수많은 나그네가 머물렀다 간 쉼터 ‘통의동 보안여관’은 2007년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재작년부터는 본래의 기능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숙박시설인 ‘보안스테이’를 새롭게 열었다. 북악산, 경복궁, 서촌 한옥마을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과 더불어 휴식을 극대화하는 객실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빈티지한 분위기의 외관과 실내 디자인뿐만 아니라 보안책방, 아트스페이스보안(전시 공간), 보안클럽 등 볼거리가 많아 이따금 여가를 보내기에 제격인 장소다.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33, 화~일요일 12:00~18:00, 잔술집33 18:00~24:00
enjoy + 통의동 보안여관 1층에 자리 잡은 33마켓은 한국적 정취와 계절의 흐름을 담은 공간이다. 낮에는 차를 우리는 티 카페로 운영하고, 밤에는 크리에이터들이 공예 작가들의 작품 잔에 술을 파는 ‘잔술집33’이 되어 손님을 맞이한다.
◇ 국립현대미술관 X 더 플라자 호텔
국립현대미술관은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이하 ‘광장’)의 개최를 맞아 더 플라자 호텔과 함께 제휴 프로그램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x더플라자’를 진행한다. ‘광장’은 한국 미술 100년을 조명하는 대규모 기획전으로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내년 2월까지 만날 수 있다(과천관은 3월 29일까지). 해당 기간 호텔 클럽층 투숙 고객에게 국립현대미술관 3개관 초대권과 무료 아트셔틀버스를 제공하는 등 편안한 휴식과 함께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더 플라자 호텔 서울시 중구 소공로 119
enjoy + 기본 제휴 프로그램 외에 미식과 예술이 결합된 ‘코리아 모던 아트 패키지’를 운영한다. 프리미어 스위트에서 1박과 함께 미쉐린 가이드가 선정한 한식 레스토랑에서의 식사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투어까지 누릴 수 있다(가격은 53만5000원부터).
5樂 취미를 즐기다
◇ 상생상회
상생상회는 지난해 11월, 서울시가 지역 중·소농을 돕고 판로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1층에는 지역물품 판매장과 카페가, 지하 1층에는 전시 홍보 및 상생공유의 장이 마련돼 있다. 전시 홍보 공간에서는 지역 축제, 특산물, 관광자원 등을 주제로 정기적인 전시를 진행하며, 국내 여행 및 귀농·귀촌 등 유용한 지역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상생공유주방은 상생상회에서 판매하는 식재료를 활용해 요리하는 ‘서로맛남’과 금요일 점심시간 셰프가 만드는 제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금요미식회’를 진행한다. 요리가 취미인 이들이라면 한 번쯤 찾아가 보길 권한다.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39, 1층 매장 11:00~20:00, 자원홍보공간 9:00~18:00
enjoy + ‘서로맛남’과 ‘금요미식회’는 제철 식재료에 따라 매달 프로그램이 달라진다. 일정 확인 및 예약은 홈페이지(sangsaeng.seoul.go.kr)에서 가능하고, 상생상회 SNS나 카카오톡 플러스친구를 통해서도 신청할 수 있다.
◇ 엔젤공방거리
진득하게 자리 잡고 앉아 취미를 즐기기엔 공방만 한 곳이 없다. 서울 강동구에 조성된 엔젤공방거리에는 도자기, 커피, 디저트, 플라워, 캔들, 금속, 목재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공방이 즐비하다. 각 공방에서 판매하는 이색 공예품들은 물론 데일리 클래스나 정기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원하는 공예품을 제작하거나 배울 수 있다. 서울시 강동구 성안로 일대.
enjoy + 강동구 엔젤공방거리에 입점한 공방은 현재 총 18곳이다(2019년 11월 기준). 도자기 공예 수업을 진행하는 ‘베이크 포터리’(성안로 109)를 1호점으로 시작해 18호점인 애견 관련 수공예품점 ‘오늘도 예쁘구나’(성안로 43)까지 각양각색의 공방이 자리하고 있다. 핸드드립 커피와 디저트 등을 즐기고 배우는 ‘커피 플라스크’(성안로 41), ‘알라망’(성안로 75) 등을 비롯해 테라리움 DIY 공방 ‘고니네미’(성안로 47), 젓가락 예절교육을 진행하는 ‘시와저’(성안로 101), 업사이클 금속공예방 ‘메탈룸’(성안로 35) 등 취미에 따라 공방을 선택해 즐길 수 있다.
생활이란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것처럼 멍에가 아니라 사방으로 열린 활공장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향에 있다. 오체투지처럼 궁구하는 삶이 있으며, 경주마처럼 각축하는 삶이 있고, 바람의 사주를 받아 가뿐히 떠도는 삶이 있다. 연극인 최영환(49)은 아마도 바람과 동맹을 맺은 계열에 속할 것이다. 그는 한결 자유로운 삶을 원해 귀촌했다.
누군들 자유로운 삶을 갈구하지 않으랴. 단 한 번 주어진 생을 가급적 자유롭게 쓰고 가고자 하는 갈망. 이는 거의 가당찮은 꿈일망정 고달픈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과 탄력을 가져다준다.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고(苦)라지. 그러나 고통 속에 나뒹굴 때라야 비로소 자유로운 지평을 절박하게 찾아 나서는 게 사람이다. 최영환이 그랬다. 요컨대 그는 삶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간의 삶에 섞인 혼선에 몹시 식상했던 것 같다. ‘괴로운 자각’이라 할 만한 격렬한 회의가 우레처럼 그의 머리를 쳤던 모양이다.
그는 서울에 살며 연극판에서 땀 흘려 뛰었다. 극단 ‘죽죽’에 소속, 연기활동을 해왔다. 일찍이 열일곱 나이 때 연극에 입문했던 그는 1991년, ‘부산연극제’ 최연소 신인연기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배우로 나섰다. 이후 서울의 대학로를 근거로 삼아 20여 년간 연극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대차게 덤벼들어 긴 세월 비지땀을 쏟은 만큼의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한 현실을 발견하고 남몰래 울상을 지었던 것 같다. ‘나, 연극배우 맞아? 이건 뭐 이룬 게 없질 않은가?’ 그는 아마도 그렇게 독백했을 게다. 그간 수없이 무대에 서서 대사를 읊조렸겠지만, 오직 자신에게만 들려준 그 독백의 톤은 연극이 아니라서 한결 절절했을 것이며, 번뇌의 산물이었기에 그 맛은 유감스럽게도 소태처럼 쓰디썼을 테지.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날마다 대학로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극활동을 해왔고, 딴에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점점 퇴행하고 있다는 회의가 몰려들었던 거죠. 딱히 스케줄 없는 날이 늘어났고, 그저 술이나 마시게 되고. 야, 이건 참 무의미한 생활이구나, 타성에 젖어 휩쓸려가고 있구나, 그런 자각으로 괴로웠지요. 연기자다운 활동의 미비와 열악한 생계 상황, 이중고가 있었던 겁니다.”
그는 새로운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황급히 활로를 찾아야 했다. 궁리 끝에 찾은 대안이 시골살이였다. 그즈음 마침 일단의 대학로 연극인들이 단양군의 농촌으로 귀농을 했다. 최영환도 거기에 합류했다. 적적하고 적막한 농촌에 연극판을 펼쳐 고독한 시골 사람들의 삶을 어기영차 북돋우고, 손수 농사까지 지어 생계를 해결함으로써 연극과 농사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 공동체의 모델을 본때 있게 구축하겠다는 취지를 표방한 동아리였다. 독특한 패기에 찬 이 공동체에 동참한 최영환은 서울의 집과 단양을 오가며 지냈다. 즉 절반쯤 귀농한 상태로 3년여를 살아왔다. 그러다 성향이라는 게 맞질 않아 동아리를 탈퇴했단다. 그리곤 팍팍한 서울생활을 아예 싹 청산, 처자를 대동하고 단양군 영춘면 면 소재지로 본격적인 귀촌을 했다.
달랑 3000만 원 들고 귀촌
이후 2년이 흐른 현재, 그는 찻집을 운영하며 낯선 객지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건 언제 어디서건 자유로운 영혼. 해서, 사방팔방으로 자신을 개방하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척척 받아들이기 위해 그간의 반백년 인생에서 쌓은 모든 재능을 쏟아 붓고 있다. 이번 여로의 종착만큼은 근사한 것이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게 귀촌생활이다. 또 그러나 최영환 역시 만만치 않은 인간이 보유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을 터인즉, 이 사람이 펼쳐 보이는 귀촌생활의 양상이란 어쩌면 연극보다 흥미진진할지도.
“이곳에 내려온 지 불과 2년이 지났지만 5년 이상이 지난 것처럼 친숙함을 느낍니다.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 결과죠. 서울은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졌어요. 전화통화량을 가만히 따져봤더니 서울 지인들과는 10%, 이곳 주민들과는 90%. 어느 사이에 그렇게 변해 있더라고요.”
“별안간 대학로를 떠난 당신을 두고서 지인들이 아쉬워하지 않았어요? 연극 동네 특유의 동지 의식이라는 게 있을 텐데.”
“웬 귀촌? 그러면서 다들 놀라는 눈치이던걸요. 아예 인생 포기한 걸로 알더라고요.(웃음) 사실, 연극인들의 이탈은 흔합니다. 대략 60% 정도가 중도에 분야를 바꿔 빠져나가죠. 경제문제 등 여러모로 한계 상황에 봉착해서.”
“연극배우란 배고픈 직업이라고 알려졌죠. 유능한 데다 열정마저 겸비한 인재들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찾아가는 건 참 섭섭한 현실이에요.”
“이름난 배우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겐 난감하기 마련이죠. 대리운전 기사를 하는 식으로 생활비를 벌며 버텼으나, 뭔가 확실한 타개책이 아니면 더 가혹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시골에 가서 소박한 생활을 하자, 그런 작정을 했던 겁니다.”
혼자 살 때엔 그럭저럭 지냈더란다. 혼밥과 혼술도 홀가분한 자유의 증빙으로 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40대 중반, 좀 늦은 나이의 결혼으로 아이까지 얻은 뒤론 사정이 급박해졌다. 아자아자! 시골에서 나를 맘껏 풀어놓고 생활의 야전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그리 자신과 담판을 짓고 귀촌했던 것이다.
연극이야 버릴 수 없는 동행. 미련 이상의 관습으로 삶에 이미 들러붙은 것이라서 이삿짐에 실려 함께 시골에 내려왔다. 연극 행위가 없는 삶은 식물인간처럼 절망적일 지경은 아닐지라도 좌우간 탁 놔버릴 수 없는 애착이 이미 깊었기에, 그는 귀촌의 나날을 연극을 위해서도 사용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어엿이 먹고 살 수 있는 생활 방편을 찾고, 덩달아 연극활동에도 새로운 피를 수혈하자는 것. 최영환의 귀촌 청사진엔 그 두 가지 목표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오자마자 이웃들에게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무얼 하기 위해 귀촌했는가를 기탄없이 밝혔지요. 연극단체를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공연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모두들 귀를 기울이더군요. 물론, 호의적인 반응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아하, 그 무슨 극단을 만들어 지원금이나 빼먹으려는 속셈 아니여? 그런 의심에 찬 소문들이 돌기도 했으니까.”
“낯선 사람 하나가 시골에 등장한다는 건 시골이라는 무대 위에 배우 하나가 올라선 것과 같은 효과를 낳게 마련이죠. 모두가 그의 동태를 예의주시 감상하게 되니까. 감상 평론도 중구난방으로 무성하고요.”
“통과 의례라는 게 있게 마련이죠. 면 소재지 상가 거리 복판에 찻집을 차리자 주변 상인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도 완연했어요.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영세한 상가에 경쟁자 하나가 출현했다고 본 거죠.”
“다양한 자영업 중에 찻집을 선택한 건, 그게 가장 유망하다 판단해서?”
“아내가 바리스타예요. 커피집이 적격이라 봤어요. 소자본으로 오픈할 수 있는 업종이기도 했고요. 저희는 달랑 3000만 원을 가지고 귀촌했는데, 가게를 차리고 셋집 주택을 얻는 데 다 썼지요. 찻집 운영으로 연 1500만 원 정도의 매상을 올립니다. 월세 나가지, 겨울 비수기엔 힘들지,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지만 차차 호전될 거라 봐요.”
찻집엔 ‘꽃피는 커피’라는 상호가 걸려 있다. 아담하고 소박해서 정겹다. 가게 좌우로는 식당, 옷집, 식육점, 주점, 빵집 등속이 있고, 맞은편엔 하나로마트가 있다. 상업이 성행할 리 없는 고즈넉한 시골이지만 그나마 요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더라도 세 식구의 믿을 만한 호구지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서, 최영환 부부는 찻집일 외에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치운다. 가게는 한 사람이 지키면 되기에 나머지 한 사람은 일거리가 생기면 쪼르르 달려간다. 의외로 일거리가 많은 게 시골이란다. 주로 막노동이지만 최영환은 가리지 않고 일을 찾아 전전해왔다. 아로니아 가공공장에 단기 취업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인근 사찰에서 총무 일도 봤다. 생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야만 한다. 그보다 더 절박한 진실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첫발 내딛은 ‘청춘극단’
면 소재지의 하오 풍경은 나른하다. 부스스 마른 볏짚처럼 광택 없는 거리. 별 목적 없어 보이는 한가한 걸음새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저녁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를 드나드는 몇몇 아낙네들. 수족관처럼 조용한 정경이지만 스피커로 외쳐대는 물오징어 판매 차량이 등장하자 별안간 사람들이 북적이며 몰려든다. 최영환도 덩달아 바빠진다. 아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일을 참을 수 없어서다. 2년여 사이에 발휘한 사교성 덕분에 이미 그는 이 동네 사람 다 됐다.
“제가 서울에서보다 더 바쁘게 삽니다.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사는 것이죠. 청년회나 탁구동호회 등 소소한 모임들에 참여하고 있으며 감투를 쓰기도 했어요. 시골의 배타성이나 텃세에 대해 많이 듣고 내려왔지만 여기는 다르더라고요. 상당히 개방적이고 우호적이에요.”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 이건 귀촌 성공 필살기 1칙이라 할 만하죠.”
“제가 원래 가만히 있질 못하는 스타일입니다.(웃음) 체육대회나 축제에서 사회를 보기도 하고 마이클 잭슨 춤을 신나게 추기도 했어요. 이웃과 어울려 살지 않고선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극단을 꾸려 키워나가기 위해서도 주민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 필요해요. 부지런히 눈도장 찍으며 살아왔어요.”
“서울의 연극단체들도 흔히 가시밭길을 걸어요. 도발적인 투지가 아니고선 시골 극단을 착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 아니겠어요? 현재 어떤 연극활동을 하고 있죠?”
“겨우 첫발을 내딛은 단계입니다. 천천히 가되 충실히 기반을 다지고자 해요. 참여 인력은 이 지역 사람들로 영입할 생각이고, 우선은 제가 연기와 연출 등 모든 걸 도맡아 해나갈 참입니다. 구상과 포부는 크지만 재정 문제 등 하나하나 해결해나갈 과제들이 산적해 있어요. 극단 이름은 ‘청춘극장’입니다. 올여름엔 낭독공연물 ‘절대사절’을 선보였지요.”
“단원은 몇 명이나 되죠?”
“저를 포함, 세 명입니다. 당분간은 2인극 정도 공연할 수 있는 상황이에요. 단원 중 한 명은 제 아내이지요. 연극에 대한 아내의 열정이 은근히 대단해요. 작은 동네이지만 열심히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을 거라 굳게 믿으며 함께 노력하고 있지요. 일단은 생활 안정이 화급한 과제이지만, 부부가 공히 추구하는 가치 있는 일과 목표를 가지고 산다는 게 즐겁습니다.”
최영환은 대학로 극장에서 아내 이동순을 만났다. ‘관객모독’이라는 작품에 출연 중 관객으로 찾아온 이동순과 눈이 맞았던 것. 연극 애호가였던 이동순은 ‘관객모독’을 자그마치 100여 회나 관람했더란다. 그 바람에 극단 단원들의 환대를 받았는데, 유독 최영환에게 필이 꽂혔던 거다. 부부 사이엔 어여쁜 유치원생 딸 하나가 있다. 아내의 나이는 올해 33세로 최영환보다 열여섯 살 연하. 남녀의 가슴에 연정이 돋으면 술 취하듯 흥겨운 황홀이 밀려드는 법이니 그걸 사랑이라 한다. 여기엔 경계나 모순이 없어 나이 차 따위는 무의미하다. 세상을 보는 촉에선 세대 차가 있겠지만.
“아내가 워낙 긍정적인 스타일이라서 매사 공감대가 넓은 편입니다. 다소 이견이 있어도 합리적이다 싶으면 곧바로 긍정하지요. 어! 그래? 해보지 뭐! 이게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뭐든 두려움 없이 해보자는 것, 하다하다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것, 그런 낙관을 공유하며 사는 겁니다.”
오랫동안 스타 등극을 소망하며 연극배우로 진력했던 사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흥흥거리며 살아왔으나, 이제야 세상 무서운 걸 알겠노라’고 술회하는 남자. 그, 최영환은 여전한 물적 부실 앞에 서 있으나 훌훌 벗어던져야 할 껍질은 이미 벗어던졌다.
◇ 최영환이 주는 귀촌 Tip ◇
•이민보다 더 힘든 게 귀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목적 설정부터 정확하게 하자. 막연한 낭만이나 도피적 망상에 의한 귀촌은 절대 금물이다.
•경관을 기준 삼아 귀촌 지역을 선택하는 건 위험하다. 충분한 사전답사와 원주민 접촉을 통해 지역의 인심과 풍토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소읍이나 면 소재지에서의 자영업은 그리 이상적이지 않다. 친척이나 동창 등 인맥 중심으로 고객이 형성되는 게 시골의 자영업이기 때문이다.
•원주민과의 융화를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같이 거들어줄 수 있는 정도의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마땅히 사람을 하늘처럼 대해야 한다.' 인간 평등을 담고 있는 동학 이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서로 거친 손을 맞잡고 저항했던 민초들, 그들의 이름은 사람이었고 위대한 백성이었다. 전남 장흥의 겨울바람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마주 보았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녹두꽃'이 있었다. 동학농민을 다룬 드라마가 여간해서 없었는데 근래에 드물게도 이런 드라마가 나와 세태의 흐름과 함께 생각해 보게 했다. 사람다움 없는 기득권자들의 자리싸움은 물론이고 성장하는 아이들에게도 금수저니 놋수저니 숟가락 타령까지 만들어 냈다. 드라마는 영웅 일대기가 아닌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민초들의 삶과 항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람처럼 살다가 사람처럼 죽겠다 이 말여” 배우 조정석이 울부짓던 것처럼 인간 존엄을 연결시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전남 장흥에 가면 이런 이야기를 생생히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적지중의 한 곳이 바로 장흥이다. 공주 우금치, 정읍 황토현, 장성 황룡, 장흥 석대들.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석대들에 소나무를 앞세우고 조용히 앉혀져 있다.
1894년 이 땅에서 동학농민운동 사상 가장 치열한 '석대들 전투'가 있었던 곳, 대규모 농민군이 참여한 최후 최대의 격전지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목숨 바친 항전의 모습을 이곳 전시관에서 찬찬히 돌아볼 수 있다.
그분들의 뜻을 기리는 상징적인 조형물과 깃발 광장, 기획전시실과 체험실, 시간순으로 나뉜 영원의 불, 개벽의 들불, 타오르는 불꽃, 분노의 불씨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넋을 추모하는 불꽃이었다. 혼란의 시대에 변화를 꿈꾼 백성들의 희생에 전율이 느껴진다.
대나무를 항아리처럼 엮어놓은 것이 있다. 그 안에 볏짚을 가득 넣어 굴리며 방어용 공격용 무기로 사용한 장태를 보며 들불처럼 타오른 농민 항거의 모습이 느껴져 숙연해진다. 그리고 영상실에서는 일본군에 쫓긴 동학농민들을 며칠 밤을 새워 완도와 고흥의 섬으로 피신시킨 열여섯 살 소년 뱃사공 윤성도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절박했던 순간에도 의연하던 소년의 모습 멋짐 폭발이다.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 당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 2004년이다. 그분들의 피의 투쟁이 100년이 넘어서야 인정된 것이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전시관 옥상으로 올라가면 드넓은 석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선 동학농민들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세찬 겨울바람이 분다. 나라가 바르게 서지 않을 때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나선 사람들, 부패한 기득권자들이 득세할 때 짓눌리기만 하던 민중들이 손을 맞잡았던 곳, 석대산 자락에 서서 그분들의 열망과 흔적을 좇으며 생각해 본다.
살면서 가끔은 한 번씩 내 삶의 뿌리에 누군가의 노고가 있었는지, 이제는 녹두꽃이 만개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장흥 석대들에 서면 그분들의 소중한 희생으로 꿈꾸던 세상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남외리 16
서울 기준, 서울센트럴시티터미널→장흥시외버스터미널→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평일 7번 주말 8번 운행
간 김에 장흥 둘러보기
-소등섬
고기잡이 나간 가족을 기다리며 섬에 소등(小燈), 즉 호롱불을 밝힌 데서 유래된 섬 이름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촬영지로 더 알려진 소등섬의 남포마을, 배우 안성기와 오정해가 거닐었던 영화 속의 포구가 지금은 찬 겨울 속에 있다. 소등섬 너머로 떠오르는 해돋이가 아름다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맛집
-내저마을 매생이
매생이는 청정한 갯벌의 내해에서만 자라는 건강한 안심 먹거리다. 장흥의 내저 마을엔 현재 매생이 수확이 한창이다. (11월 말부터 그다음 해인 2월 경까지가 수확시기다)
-굴구이
자연산 굴 채취가 쉬운 이곳에 굴구이집이 많다. 석화가 가득 쌓인 입구부터 푸짐하다. 강당처럼 넓은 실내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앞에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석화구이를 즐기는 맛과 풍취가 넘친다. 신선한 굴을 살짝만 익혀 껍질을 열면 짭조름한 굴즙이 흐르고 탱글한 굴을 호로록 입에 넣는다.
남포수산 전남 장흥군 용산면 접정남포로 763-96.
-장흥삼합
장흥의 삼합요리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메뉴가 낙지삼합이다. 생물로, 익혀서, 볶아서 이렇게 삼 단계의 맛을 즐긴다. 낙지 삼합은 오래전 이 집의 주인이 개발한 메뉴로 이제는 타 지역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맛집이다. 장흥의 맛있는 기억은 끝도 없다.
-이 뿐 아니라, 운치있는 힐링의 숲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 장흥의 랜드마크 정남진 전망대, 용도 폐지된 후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난 장흥교도소, 천연기념물 후박나무, 사라져 가는 재래시장을 현대화해서 편리하게 구경할 토요시장 등 가 볼 곳이 지천인 장흥이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긴 시간 야외 사진 촬영할 때가 있다. 설경과 상고대 촬영을 위해서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겨울철 장시간 바깥에서 촬영을 위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전문 작가든 일반 사진가든 알아두어야 할 유의점 두 가지.
첫째, 카메라에 장착된 배터리 외에 여분 배터리를 준비해야 한다. 배터리는 추위에 아주 약해 전기가 생각보다 빨리 닳기 때문이다. 카메라용 배터리는 일반 마켓에서 살 수가 없다. 충전기도 함께 챙겨둘 필요가 있다. 또한, 배터리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쉬는 시간에는 카메라에서 빼내어 호주머니 같은 따뜻한 곳에 보관하는 것도 배터리 수명을 늘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배터리도 같아서 추위에 약하기는 마찬가지. 추운 날 야외에서 촬영하다 보면 전기가 빨리 소진되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충전용 보조 배터리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용량이 큰 것이 좋고 급속충전용이 유용하다. 스마트폰 자체가 추위에 노출되어 극도로 차가워지면 보조 배터리를 장착해도 충전이 되지 않는 상황도 발생한다. 촬영 중간마다 스마트폰을 따뜻하게 해두면 훨씬 낫다.
둘째, 안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길이나 언덕, 바위 등 서 있게 될 곳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끄러움이 있다. 얼어있는 길 위에 떨어진 낙엽도 그렇다. 더 나은 구도를 잡기 위해 뷰파인더나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로 위치를 앞뒤 또는 좌우로 움직일 때가 많아 발아래 쪽을 잘 살필 수 없어 위험에 빠질 때가 많다. 미끄럽지 않은 시기에도 난간 끝에서 사진 촬영을 하다가 큰 변을 겪는 사례도 더러 있다. 겨울철엔 미끄러움이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아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겨울철에만 찍을 수 있는 멋진 풍광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나 취재 등 특별한 목적을 띈 사진 촬영 여행이 좋은 결과를 얻도록 미리 준비하고 예방해야 한다.
파도와 바람을 벗하여 가을을 걷는다. 영덕블루로드B코스
770km를 따라 부산에서 고성까지 동해안을 따라 해파랑길이 나있다. 속이 꽉 찬 가을 대게처럼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한 해파랑길 중 영덕블루로드 B코스를 걸으며 가을바다를 만난다.
영덕블루로드 B코스는 '푸른 대게의 길'이라 불린다. 영덕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해서 경정리, 죽도산전망대, 축산항까지 12.5km의 구간, 3시간 정도 걷는 코스다. 보통은 해맞이공원에서 고성방향으로 위쪽으로 올라가지만 축산항에서 부산방향으로 해안을 왼편에 끼고 걸으려고 한다. 영덕 도착 시간을 고려하여 점심은 축산항의 물가자미 요리로, 저녁은 강구항의 대게로 먹는 즐거움까지 챙기기 위해서다.
영덕 축산항은 물가자미로 유명하다. 매년 5월이면 축산항에서 물가자미축제가 열린다. 물가자미는 흔히들 ‘미주구리, 미주가리’라고 부른다. 일본명이 Mushigarei니 거기서 이름이 왔으리라 짐작하겠지만 순수우리말이다. 경상북도 방언에서 6을 뜻하는 물과 가자미를 뜻하는 ‘가리’ 또는 ‘구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물가자미는 광어와 비슷한 생선으로 크기만 더 작다고 생각하면 된다. 주로 뼈채 회를 뜨는 세꼬시나 살짝 말린 것을 구워서 먹는다. 물가자미로 다양한 요리를 내놓는 전문식당을 추천한다. 물가자미축제가 열리는 축산항에 위치한 김가네식당이다. 조림, 회, 회무침, 매운탕, 식해까지 다양한 물가자미요리가 나온다. 식당 앞에서는 동해의 해풍에 꾸들꾸들 물가자미를 말리고 있다.
축산항 대표 맛을 즐긴 후 블루로드B코스 하행 시작점에 서면 계단 바로 위에서 죽도산전망대와 해안데크길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풍경과 함께하고 싶다면 해안길을, 시원한 전망을 원한다면 전망대 길을 택하면 된다. 2억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눈앞에 드러난 시간의 흔적들이 짧은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게 한다. 파도와 바위에 침식된 바위 사이 늦둥이 해국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걷다가 잠시 멈추어 파도에 생겨난 포말이 부서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쉼의 시간을 갖는다. 블루로드 다리를 건너고 바람이 잦아든 짙푸른 솔숲 길을 걷는다. 해안절벽과 솔숲의 조화에 걷는 묘미를 한껏 즐기게 해주는 코스다.
걷느라 수고하였으니 저녁식사는 영덕하면 떠오르는 대게다. 강구항 수산물직판장에서 대게를 사는 것이 좋다. 크기가 무조건 큰 것보다는 들어봐서 묵직해야 속이 꽉 찬 대게다. 몇 번의 흥정 끝에 구입한 대게를 쪄주는 곳에서 쪄달라고 하여 숙소에 가져가서 먹거나 자릿세를 내면 상차림을 해주는 식당에서 먹는 것을 추천한다. 가장 저렴하게 푸짐하게 대게를 먹는 방법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만난 여행지, 영덕블루로드는 걷는 묘미와 푸짐한 맛이 있는 길이다. 나지막한 산과 지질공원, 파도치는 바다와 바람을 벗하여 걸은 길을 걸으며 동해의 거친 풍경과 바닷가 마을의 정취를 듬뿍 즐긴다. 시간 앞에, 바다 앞에 세상사 시름이 작아졌다가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가벼워졌다.
꿈이 유예되는 날들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부부는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아파트를 팔아 한적한 시골마을로 들어가 난생처음 지은 집은 2층짜리 컨테이너 하우스. 1만여 장의 LP 음반이 놓인 공간은 자연스럽게 ‘음악 카페’가 됐다. 어느 볕 좋은 날, 정성 들여 쓴 ‘프럼나드’ 간판을 걸고 김기호(金基鎬·74) 씨는 스피커 볼륨을 한껏 높인 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들었다. 아내 양정필(楊汀畢·64) 씨는 커피를 내리고 달콤한 과자를 구워냈다. 해가 지면 파주 탄현면 만우리의 노을이 부부의 마음을 자주 물들인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차로 10여 분간 더 달리니 시골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른 논밭의 곡식들이 땀 흘리며 받아내는 가을볕은 꽤나 뜨거웠다. 고운 마을길에 끌려 차바퀴는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고 하마터면 목적지를 지나칠 뻔했다. 김기호, 양정필 부부가 사는 컨테이너 하우스는 마을 안쪽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다.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이어져 있고, 아래쪽으로는 옹기종기 민가가 모여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부부의 철학이 담긴 집
부부가 이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2016년. 무역업을 하던 남편이 도시에서의 삶은 그만 정리하고 시골에 가서 살자는 제의를 했다.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내는 정년이 아직 몇 년 더 남아 있었지만 그 뜻을 따랐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소망해온 삶이었기에 도시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땅을 사고 집 짓는 일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잖아요. 오래 고민한다고 반드시 좋은 결정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희도 맘에 드는 땅을 구하기 위해 김포, 강화, 양평, 가평, 춘천 등지로 많이 돌아다녔지요. 그러다가 문득, 너무 먼 곳에 살면 자식들이나 친구들이 만나러 올 때 사방 막히는 길에서 시간을 다 허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이 아플 때를 대비해 병원과의 접근성도 고려해야 했고요. 파주가 그런 기준들에 가장 적합했어요.”
땅을 매입한 뒤에는 컨테이너 하우스 견적 상담을 받았다. 서울을 떠나면 절대로 집을 마련하는 데 큰돈을 쓰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울 텐데 시골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며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조언을 했지만 계획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내 집 짓다가 10년은 폭삭 늙어버렸다는 얘기도 많이 들려왔고, 무엇보다 20여 년 전 외국에서 본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꼭 살아보고 싶었다.
“사업 차 덴마크에 갔을 때 바이어가 자기네 집에서 자라며 데리고 갔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동이 가능한 컨테이너 집이더라고요. 일반 주택과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건물이었어요. 감탄했지요.”
대지 137평에 지은 부부의 컨테이너 하우스는 토목공사비 7000여 만 원, 총 55평의 건축비 1억5000여 만 원이 들었다. 땅값까지 다 합쳐봐야 4억 원도 안 되는 비용에 2층짜리 집을 번듯하게 세운 것이다. 공사기간도 단축했다. 주방 설치 등의 내부 공사와 함께 상하수도 연결, 마무리 페인트칠까지 2개월여 만에 끝냈다. 아파트 살림에 비하면 관리비도 절반밖에 안 됐다.
“비용이 많이 절약됐어요. 나이 들어 큰 집에 살면 관리하기만 힘들지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우리가 죽은 뒤에는 자식들이 들어와 살 거 아니면 이 집은 고철로 팔아버리면 돼요. 일반 주택은 철거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컨테이너 하우스는 그런 면에서 친환경 건축이라 할 수 있지요. 폐기비용도 거의 안 들고 재활용도 가능하니까요.”
LP 음악 들으며 떠나는 시간 여행
그렇게 부부의 철학이 녹아든 집은 독특한 외관으로 방송과 신문에 종종 소개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LP 음반 위에서 바늘이 치직거리며 불러오는 노래가 좋아 음악 카페에 찾아오는 단골도 생겼다. 대부분 지긋한 나이에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만나면 자기 사연 하나씩은 있는 음악 감상도 하고 레코드 너머로 먼지 쌓인 추억담도 나눈다. 김기호 씨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1만여 장의 LP 음반. 다양한 장르의 명작 DVD도 4000여 장이나 된다. 이 보물들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방법을 찾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서울에 사시는 할머니가 방송을 보고 가족과 함께 여길 찾아왔어요. 나이 드신 분이 오셨으니 이미자 노래를 선곡해 들려드리려 했더니 ‘노’ 하시면서 레이 찰스의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를 틀어달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젊은 시절 팝송깨나 들으신 분 같았어요. 어느 날은 한 분이 조안 바에즈 앨범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길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첫 월급 타서 그 판을 샀다가 엄마한테 제정신이냐며 등짝을 맞았대요. 노래를 듣다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난 거죠.”
프럼나드에 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아파트에 살 때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음악을 실컷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김기호 씨는 요즘 그 바람을 제대로 성취하며 지낸다. 그러나 “시골에 가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겠다”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아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일개미로 표현할 정도로 남편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1년 정도는 게으름을 좀 피우며 지낼 줄 알았는데 3개월 만에 손들고 말았다.
“매일 하는 일 없이 노니까 죽을 날 받아놓고 기다리는 것 같더래요. 어느 날 학교에 김치배달해주는 일을 구하더니 새벽 4시에 일어나 나가더군요.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 했는데 그 힘든 일을 1년 넘게 하더라고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나이 먹어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대요. 요즘은 남편이 사업할 때 하청을 주던 회사에 일자리 하나 만들어 달래서 거길 다녀요. 최근에 연봉을 더 올려줬다는 걸 보니 일을 잘하긴 하나봐요.(웃음) 무리하면 걱정이 되지만 적당히 일하니까 건강해 보이고 좋아요.”
김기호 씨는 은퇴 후에도 체력 유지를 위해서 일은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 시간이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질 수 있고, 경제적 활동을 하면 집 안의 평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퇴직한 지 6개월 된 지인이 얼마 전에 저희 집엘 왔어요. 퇴직금 등 가진 돈이 좀 있기는 하지만 일자리를 찾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찾아보면 일거리 많다. 공장이라도 다녀라. 그동안 해온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 노동은 다 똑같다’라고요.”
기호 씨와 정필 씨가 사랑하는 법
아내 양정필 씨는 남편이 출근하면 그제야 느긋하게 카페 문 열 준비를 한다.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이 많아도 반갑지 않다. 매일 한두 팀 정도만 와서 즐겁게 잘 놀다가 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끔 들르는 손님들도 전직 교장선생님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이 조금은 특별한 공간이라며 편안해한다.
“문은 오전 10시쯤 여는데, 일찍 오는 손님들은 없어서 상황 되는 대로 올라와요. 저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아요. 커피 한 잔 내려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신문을 읽고 있거나 자연과 눈 맞추고 있으면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학생, 선생, 학부모밖에 없었잖아요. 여기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사회 경험을 새로 하는 느낌이에요. 전혀 몰랐던 세계도 알게 되고요. 우리 사회를 그동안 이끌어온 사람들이 이분들이구나 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김기호 씨는 배우자와 뜻을 같이하면서 해로하면 그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부부가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면 다툴 일이 많을 거라고 했지만 아내가 커피도 내려주고 쿠키도 구워주고 또 음식을 이렇게 잘할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면서 “마치 새 여자하고 사는 것 같다”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아내는 제가 외출할 때면 ‘지갑 좀 검사하겠습니다’ 하고 10만 원씩 넣어줍니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이렇게 존중해주니까 저도 아내를 받들어 모시게 됩니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아내 입에 먼저 넣어줍니다. 그러면 얼마나 사랑받는 느낌이 들겠어요. 학교에서 근무할 때도 한 달씩 혹은 보름씩 여행을 간다 하면 ‘당신은 선생이니까 많이 알아야 해, 잘 다녀와’ 하고 응원해줬어요. 황혼 이전에는 그렇게 살다가 여기 와서 또 아내를 겪어보니 제가 알던 마누라가 아니더라고요. 음식도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 모습이 새롭고 예뻐요. 다시 신혼을 사는 기분입니다.”
양정필 씨는 그동안 나이 드는 걸 완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환갑이 넘으면서부터는 주변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끔은 서글픈 마음도 들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건강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는 거니까요. 저는 ‘남편 바보’이기도 하지만 나이 드니까 배우자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래서 사랑보다는 존경을 하며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인터뷰하기 전에 남편에게 ‘당신 삶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예요?’ 하고 물었더니 ‘지금까지 당신이 날 존중해줬으니 당연히 브라보 마이 라이프지’ 하더라고요.(웃음)”
인생 후반전. 더 반짝이는 사랑을 시작한 부부는 요즘 마음의 표현도 자주 한다. 상대에게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않는 것은 도둑 심보라는 것.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고백하듯 아낌없이 말한다.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