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믿으세요.” 배우 이한위(61)가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그는 답이 정해져 있거나 유도하는 질문을 날카롭게 알아봤다. 특히 이한위가 지양한 것은 어떠한 단어 혹은 수식어에 갇히고 규정되는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명품 조연’, ‘잉꼬 부부’ 같은. 그는 꾸며지고 포장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한위의 인생 자체가 그랬다. 1983년 KBS 공채 탤런트 10기로 데뷔, 연기자로 산 지 약 40년. 그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한위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했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배우의 길이 계속 이어졌고,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그는 중후하고 단단한 사람이 됐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한위. 그가 털어놓은 인생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쓰려고 노력했다. 그게 배우 이한위가 원하는 모습이고,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삶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성격 개조하다, 어느새 배우
학창 시절 이한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떤가? 조잘조잘 떠들면서 반 친구들을 이끄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과거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한위는 중학생 때까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4남 4녀 중 일곱째인 이한위. 그의 어머니조차 “가장 통제가 쉬웠던 자식”이라고 표현했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속 썩이지 않는 아들이었던 것.
“별거 아닌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두근두근거렸죠. 크면서 이런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겠다고 스스로 인식했어요. 그래서 점점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용기 내는 일을 많이 했고, 고등학생 때는 전혀 성격에 맞지 않는 반장까지 해봤어요. 응원 같은 것도 하고, 노래도 부를 기회가 있으면 하고요.”
그렇게 성격을 개조해나간 이한위는 조선대학교 정밀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당시 인기였던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었으나 쉽지 않은 현실을 깨달았고, 때마침 기적적으로 연극반 공고를 보게 됐다. 성격 개조의 방점을 찍고 싶어 동아리에 들어간 이한위. 그와 함께 ‘성실 한위’의 서막이 올랐다.
“연극을 하면 성격이 많이 고쳐지겠구나 싶어서 연극반에 들어가서 매달리다시피 한 거죠. 절대 잘할 수 없었고 잘하지 못했지만 진짜 열심히 했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기회가 많이 주어지더라고요. 주연의 기회도 찾아오고, 연출도 하고, 선배들이 만장일치로 회장도 시켜주셨죠.”
그러느라 공부는 등한시했다는 이한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때가 되어서는 때마침 KBS 공채 탤런트 공고를 보게 됐다. ‘저게 나한테 취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한위는 시험에 응시했고, 단번에 1983년 KBS 10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다. 그렇게 연기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 우연이 이어지면서 필연이 됐다.
“처음부터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에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이제 평생 배우로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나는 KBS가 공인한, KBS에 의해 발탁된, 직업이 배우구나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철부지 생각이죠. 배우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는 배우를 지속할 수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족한 게 많았던 때죠.”
39년 차 배우로 사는 법
이한위는 1985년 방영된 KBS 드라마 ‘별을 쫓는 야생마’를 통해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첫 영화는 1998년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다. 이후 그는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학교’ 시리즈, ‘태조 왕건’, ‘가을동화’, ‘왕꽃선녀님’, ‘불멸의 이순신’, ‘쾌걸춘향’, ‘베토벤 바이러스’, ‘추노’, ‘제빵왕 김탁구’ 등과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미녀는 괴로워’, ‘울학교 이티’, ‘국가대표’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캐릭터도 다양했다. 이한위는 맡는 역할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됐다. 깡패, 사채업자 같은 특색 있는 캐릭터를 맡을 때도 있고, 직업이 의사, 교사, 시장이어도 어딘가 허술한 경우가 많았다. 나이 들면서는 점점 누군가의 아빠가 됐고, 서민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악역을 해도 사람들이 웃는다. 장점이자 단점이다”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이한위는 오랜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 ‘성실함’을 꼽는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자평했다. KBS 공채 탤런트가 된 후 매일 KBS로 출근하면서 감독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열심히 하고 한결같고 건강하게 하니까 감독들이 저를 많이 써줬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우리 때는 오디션을 본 것이 아니라 공채 탤런트가 되면 기용해주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트레이닝해주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시대에 배우가 됐다면, 4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어요. 오디션 제도가 있었다면 배우 생활이 녹록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도 적응이 된 거지, 내성적이에요. 근본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죠.”
이한위의 말대로 그와 작업해본 감독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았다. 이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한위는 계절드라마 시리즈 ‘윤석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하고 있고, ‘또 오해영’의 송현욱 감독하고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한위는 이를 두고 자신은 ‘운이 좋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배우는 운이 좋아야 해요. 감독이 봤을 때 이 배우가 살아남을지 어떨지 모르듯이, 배우가 봤을 때도 이 감독이 어떤 감독이 될지 모르잖아요. 저도 열심히 했지만, 저를 써주신 분들도 꾸준하게 감독일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감독들이 저를 꾸준히 기용해주고, 낯선 감독들이 저를 또 캐스팅해줘서 계속 일하고…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이한위는 사실 무명 시절이 길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은 2006년 개봉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다. 엽기 성형외과 의사 역을 맛깔나게 소화해내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무명 시절은 누구나 다 힘들다”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무명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우로 생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세계에 적응하는 맷집이 길러졌다고 생각해요. 맷집과 실력이 없으면 스스로 안심이 안 되고, 시켜주는 사람도 불안하죠. 저는 인생의 여러 가지 비극 중에 소년출세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대동소이하게 유약하기 때문에 어려서 출세하면 그만큼 위험한 거예요. 제가 무명 기간이 길어서 합리화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단계를 잘 밟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가 하면 이한위는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 인생작을 뽑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연기를 해왔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답. 그는 지난해 KBS 2TV 드라마스페셜 ‘그곳에 두고 온 라일락’을 통해 첫 드라마 주연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그 작품이 그의 인생작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주인공을 해야 인생작인가? 스코어가 좋다고 인생작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드라마가 트로트 모창 가수 이야기예요. 작년에 ‘보이스트롯’에 출연했는데, 그 방송을 할 즈음 감독님이 단막극 주인공을 누구로 할까 고민하다 불현듯 저를 방송에서 보고 ‘저분이다’ 생각해서 캐스팅한 거죠. 그동안 했던 서민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인데 그것이 길게 나온 단막극이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하고, 1인 2역 연기도 하고, 단막극상 수상도 하고. 좋은 경험이었고 고마운 기억인 거죠.”
기세를 몰아 가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묻자 “어휴~ 없어요”라면서 손사래를 친다. 다만, 광주 출신으로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곡을 부를 기회가 오면 부르고 싶단다. 즉 좋은 기회라면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가수가 될 생각은 없는 것.
예능감이 뛰어난 그는 예능 출연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예능도 전략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기회가 생겨 나가면 열심히 할 뿐이라고. “저는 연극, 영화, TV 다 해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넘나드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예능 출연이 곤욕스러운데 나갈 필요는 없죠. 할 수 있으면 나가고, 나갔으면 뭔가 하고. 나가기만 할 거면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 그리고 끝까지 배우
이한위는 배우로서 연기 말고도 화제가 된 부분이 있다. 바로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이다. 그는 2008년 49세의 나이에 19세 연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배우와 스타일리스트로 만났다. 당시에는 우려의 반응도 많았지만, 현재 부부는 누구보다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이한위는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몇 번 얘기했지만, 아내는 저를 따진다든지, 뒤진다든지, 캐묻는다든지 그런 것 없이 순종적이에요. 제가 뭔가를 번복하더라도 아내는 이해하는 편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면 참 좋지만 이해가 안 될 때는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오해가 없고 갈등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일이라는 게 정해진 루틴이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불규칙한 것이 루틴이잖아요. 제 연기 생활 근 40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규칙적으로 불규칙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생활을 이해할 필요 없이 잘 받아준다는 거죠. 제 아내는 방송인의 아내로 베스트예요. 항상 고맙죠.”
올해는 배우 생활을 한 이후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한위.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다둥이 아빠이기도 하다. 슬하에 열네 살 딸, 열두 살 딸, 열 살 아들이 있다. 한 방송에서 이한위는 2년마다 애를 낳았다면서 ‘비엔날레 스타일’이라고 농을 쳤다.
“제게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 애가 서른 살이 넘었어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저는 늙은 아버지에 속하죠. 아이들하고 잘 살려면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죠. 가족과 시간을 잘 보내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대로 재밌더라고요. 올해는 식구들하고 여행도 몇 번 했는데 의미 있고 재밌었어요. 우리 애들은, 특히 열 살짜리 막내는 지나치게 건강해서 가끔 등산을 같이 가죠. 제가 부암동 쪽에 사니까 가까이 북한산도 있고, 인왕산도 있으니까 능력껏, 형편껏 가죠. ‘무조건 정상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데까지 가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면 아주 좋아해요. 늙은 아버지로서 노력하는 거죠. 고맙게도 애들은 아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배우는 루틴이 없다’는 어록을 남긴 이한위. 그래서 그는 당장 2022년 자신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 현재 정해져 있는 스케줄은 이달부터 광주방송 라디오 ‘이한위의 그리운가요’의 DJ를 맡게 됐다는 점이다. 이한위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 외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온 것처럼 뭔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한위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날 길어지는 촬영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소한 부분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약속을 잘 지키려고 한다. 배우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였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이한위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삼 4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저는 그냥 수식어가 없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수식어를 굳이 단다고 하면, ‘재밌는 배우’, ‘신뢰받는 배우’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명품 조연 배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명품한테 실례되는 말이에요. 명품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이 정하는 거예요. 만약 저를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하죠. 저는 단지 배우로서 끝까지 소용되는 것, 그것이 제 바람이죠.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제가 정할 수 없지만, 배우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이순재 선생님이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하신 것처럼요.”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오늘은 남편의 1주기, 그와 함께 남편에게 왔다. 그와 함께 찾아온 내가 남편한테 어떻게 비칠까. 옆에 선 그에게는 어떤 마음일까. 서운하고 괘씸할까? 분노하고 절망할까? 체념하며 인정할까? 거짓 없는 마음을 듣고 싶지만 유골함 옆 사진 속 남편은 여전히 속없는 웃음을 보일 뿐 아무런 말이 없다.
그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죽은 자의 방 앞에 목례한 후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내 뒷모습을 응시하고 섰을 것이다. 내가 추모를 마칠 때까지. 나도 역시 말이 없다. 그를 의식해서도 그렇지만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올 때마다 매번 말을 잃게 된다. 미안함, 사실 그것으론 미진하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정체 모를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차라리 혼자 올걸. 그와의 동행이 남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뒤미처 든다. 그를 의식하지 않고 남편과만 있고 싶다. 남편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 그러나 불편한 감정이 휘저어지기 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봉안당 마당을 걸어 나오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말이 없다.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빛바랜 낙엽만이 둘 사이에서 수런댔다. 나도 그도 세상 떠난 남편에게 면목이 없어서일까. 그에게 죽은 남편은 어떤 마음, 어떤 존재인지, 나는 죽은 남편과 관련하여 그를 어떤 마음,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지금껏 한 번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환갑이 되던 지난해 11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 판정 3개월 만에.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와 나를 더 가깝게 끌어당긴 건 아니다. 남편을 잃은 나를 그는 세심하게 위로하며 다정한 의지처가 되어주었지만 내 마음은 되레 그에게서 멀어졌다. 남편과 함께 만날 때의 그와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보는 그가 내게는 달리 비쳤기 때문이다. 처절히 슬프고 공허했지만 왠지 그에게 기대고 싶진 않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오히려 그를 멀리하고 싶어졌다.
남편은 세상 뜨기 3일 전, 그에게 나를 부탁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보살펴달라며. 그렇게 해준다면 편안히 눈을 감겠다면서. 죽어가는 사람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남편의 진의, 속내가 궁금하다. ‘나 죽으면 너희 두 사람 어차피 함께 살 거니까 차라리 내가 선수를 치마. 그래야 두 사람도 맘 편히 살 거 아니냐’는 식의 자포자기적 선의였을까. 아니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정말 함께 살게 되었을 때 흐릿하나마 그와 나의 가슴에 죄책감의 주홍글씨를 새기고 싶었던 걸까.
그와 나는 잘 지내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마님, 그는 돌쇠로. 그에게 나는 얼마간의 환상적 존재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남편이 가고 나니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그렇게 굳어지고 있다. 그는 이혼남이다. 5년 전 아내의 외도로 갈라섰다. 그가 이혼하기 전 우리는 부부가 함께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나만 남았다. 내 남편은 죽고, 그의 아내는 떠나고.
우리는 대학 선후배 사이로 그는 남편의 후배고, 그의 아내는 내 후배다. 지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우연히 합석한 후 서로 마음이 맞아 자주 만났다. 관계가 어색해진 것은 그가 나를 좋아하면서부터였다. 선배의 아내를 연모하는 후배,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나에 대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의 아내와 내 남편을 불쾌하게 했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어느 날 과음한 그가 술잔의 술을 흘리듯 나에 대한 마음을 흘렸을 뿐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저도 좋아해요”라고 농담조로 대꾸하며 어색해진 자리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ΟΟ 씨를 사랑한다고요. 왜 제 마음을 몰라주시는 거예요. 저 정말 슬퍼요”라며 이번에는 내 이름까지 넣어가며 속내를 드러냈다. 아무리 술기운이라 해도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가 늘어놓는 고백 아닌 고백에 남편은 나를 흘기며 마뜩잖은 눈길을 보냈고, 그의 아내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혔다.
나중에 들었는데 당시 그의 아내에게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외도로 인해 괴롭고 외롭던 그가 시나브로 내게 끌린 것이리라. 그걸 빌미로 그의 아내가 상황을 제대로 이용했다. 그 일을 꼬투리 삼아 적반하장으로 자기 연애를 합리화하며 냉큼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가눌 수 없이 무너진 그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고, 그렇게 혼자가 된 그를 우리 부부는 보듬을 수밖에 없어 셋이 만남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후 우리 부부와 그,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나는 동안 전과 같은 민망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깍듯했고 과묵했다. 남편은 별다른 내색 없이 선배로서 혼자 된 후배를 묵묵히 챙겼고, 나는 나대로 어떤 틈도 보이지 않고 남편 옆에서 깔끔히 처신했다. 남편이 원하지 않았다면 그 만남은 진즉 깨졌을 테지만, 그렇게 갑자기 훌쩍 떠날 예감이 있었던 걸까. 결과적으로 나를 그의 곁에 둔 것이다.
게다가 그 무렵 남편이 하던 일이 잘되지 않았던 것도 그를 떨쳐내지 못한 현실적 이유였을 거라 짐작한다. 남편은 자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고, 워낙 성실한 사람이라 빠듯하나마 자력으로 꾸려가고 있으려니 했다. 그에게 빌린 자금이 윤활유가 되고 있었던 것을 나만 몰랐다. 물론 그가 돈으로 남편을 조종하거나 심리적 압박을 가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입장은 또 달랐을 것이다. 자기 아내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는 얼씬도 못 하게 단속하지 못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심 불쾌했다. 남편이 나보다 사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이용해 나를 볼모로 모종의 거래를 한 것 같아 원망 어린 마음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그가 희생을 하고 있었을지도. 나에 대한 호감 하나로 본인 또한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선배에게 돈을 빌려줘야 했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라도 해서 내 언저리에 있고 싶었을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더구나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상황에서 내가 그에게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는 한 가족으로 지냈다. 그는 정서적으로, 우리는 그에게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그랬는데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에게 나를 돌봐달라는 부탁까지 남긴 채. 처음엔 네 사람이 세 사람으로, 세 사람이 두 사람으로 만남을 달리하는 동안 마음 또한 상황 따라 변했을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멤버가 하나둘 떠나도 만남은 이어져왔다는 것이니,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언제까지 이 만남을 이어가게 될까. 그리하여 그와 나 둘 중 하나가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함께하게 될까. 그는 여전히 내 마음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문고리가 안으로만 있어서 자신은 감히 당겨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이….
취업난과 고용 불안, 급등하는 집값, 육아 문제 등 청년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중장년층의 근심과 고통도 함께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11일 발표된 라이나전성기재단 ‘전성기 웰에이징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거주 만 55세~74세 남녀 1068명 중 현재 자녀를 돌보고 있는 비율이 14.5%에 달해 손주나 노부모를 돌보는 비율보다 많았다. 보고서는 늦어지는 결혼과 취업으로 인해 자립하지 않고 부모와 동거하고 있는 자녀가 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캥거루족’은 학교를 졸업해 자립할 나이가 됐는데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 사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용어다. 과거 캥거루족은 학업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대가 거의 다수였지만 최근에는 30대와 40대 캥거루족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일 기준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부모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캥거루족은 314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의 비율이 20.7%에 달한다. 캥거루족 5명 중 1명이 3040인 셈이다. 30대 미혼 인구 비중은 10명 중 4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문가들은 캥거루족의 증가 원인으로 취업난과 늘어나는 주거비를 꼽는다. 김진영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벌주의와 고학력 일자리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함에도 그에 걸맞는 기업의 일자리는 여의치 않아 취업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다”라며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하니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발간한 ‘KOSTAT 통계플러스 2021년 봄호’에 실린 ‘저(低) 혼인 시대, 미혼남녀 해석하기’에 따르면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 인구의 주거형태를 보면, 자가가 70.7%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은 월세(14.8%), 전세(12.1%) 순이었다. 캥거루족은 대체로 부모가 소유한 집에서 살기에 별도로 주거비를 낼 필요가 없는 반면 미혼 청년 1인 가구는 59.3%가 월세이고, 자가는 11.6%에 불과했다. 청년 1인 가구는 대체로 남의 집을 월세로 빌려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야 하기에 수입의 상당액을 주거비로 쓰는 경우가 많다.
청년 1인 가구는 주거비 부담은 크지만, 주거 형태는 더욱 열악했다. 부모와 같이 사는 미혼의 주거 형태는 아파트(56.8%)가 많았지만, 미혼 1인 가구는 51.2%가 단독주택에 살았다. 대체로 캥거루족은 부모의 아파트에서 살고, 나 홀로 가구는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떨어진 빌라 등에서 셋방살이를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박시내 통계개발원 서기관은 “청년층 고용 불황이 지속되고 주거비용이 상승하는 가운데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세대에게서 경제적·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캥거루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캥거루족이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면 그 부모도 경제적 자립능력이 취약해진다. 미혼 자녀를 부양하는 기간이 늘어나면 부모가 은퇴 시기까지 노후준비를 하지 못하고 경제력과 노동력을 쏟아붓는 현실이다. 지난해 60세 이상 고령자 중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한 사람의 비중은 57.7%로 직전 조사인 2015년(49.7%)과 비교해 8%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김 교수는 “캥거루족은 부모세대의 노후준비를 방해하여 경제적 부담을 주고 돈을 벌어야 할 기간을 늘릴 뿐 아니라, 가사업무 부담까지 증가시킨다”라며 “성인 자녀도 식사 준비나 청소 등 집안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데 부모님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청년 문제는 한 가구 내에서 윗세대로까지 전이되는 문제를 낳고 있다. 하지만 청년 주택, 청년 전세대출 등 청년을 위한 정책은 쏟아지는 반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부모세대의 설움은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다. 가난한 청년세대를 봉양해야 하는 부모세대의 소득감소·빈곤 등 이들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 교수 역시 “기초연금 등 부모세대에 대한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세대에 대한 지원에 비해 충분하지 않다”라며 “청년세대가 빨리 자립할 수 있는 지원과 함께 저소득층 부모세대에 대한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1인 가구가 꾸준히 증가하는 등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이 흐름에 맞춰 법무부는 가족관계 제도 정비에 나섰다.
독신주의자인 80세의 A 씨는 지병에 걸렸으나 돌봐줄 자식이 없어, 알고 지내던 청년 B 씨의 간병을 받았다. 극진히 간병해준 B 씨에게 고마움을 느낀 A 씨는 그를 친양자로 삼고 전 재산을 상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A 씨는 친양자 입양을 할 수 없을뿐더러, 생전 교류가 없던 친동생인 C 씨에게 유류분이 있어 전 재산을 상속해줄 수도 없었다.
법무부는 지난 9일 미혼 독신자의 친양자 입양을 허용하고, 형제‧자매에 대한 유류분 제도 폐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민법개정안을 입법 예고한다고 밝혔다. 개정안에 따르면 친동생 C 씨는 친형인 A 씨의 유산에 유류분을 주장할 권리가 없어지고, 독신자인 A 씨는 B 씨를 친양자로 입양해 전 재산을 상속할 수 있게 된다.
입양은 일반 입양과 친양자 입양,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 입양은 입양아와 그를 낳은 부모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반면에, 친양자 입양은 양부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법적으로 친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상속도 양부모로부터만 받을 수 있다. 현행 민법은 결혼한 부부만 친양자를 입양할 수 있었다. 미혼 독신자는 친양자를 키울 의사와 능력이 있더라도 일반 입양만 가능했다. 독신자 친인척이 조카를 친양자로 입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법무부는 앞으로 결혼 상태가 아닌 사람도 친양자 입양이 가능하게끔 법을 바꾸기로 했다. 다만 입양 허가 절차를 강화해 아이를 정말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을 갖췄는지 따져보고, 또 경제력도 고려해 25세 이상 독신자만 친양자 입양이 가능하도록 단서를 달았다.
상속 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인의 뜻과 무관하게 유족들에게 일정 몫을 상속해야 하는 ‘유류분’ 제도에 대해 법무부가 손질에 나섰다.
현행 민법상 직계비속(자녀·손자녀)과 배우자는 법정 상속분의 2분의 1을, 직계존속(부모·조부모)과 형제자매는 법정상속분의 3분의 1을 유류분 권리로 인정받는다. 법무부는 이 가운데 형제자매를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상속이 주로 장남에게만 이뤄진 시대엔 여성을 포함한 다른 자녀에게 상속분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은 형제자매가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등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1인 가구나 독신자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 새로운 시대적 환경에 맞춰 가족제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법 개정의 취지를 밝혔다.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친 뒤 내년 상반기 국회 제출을 목표로 개선안을 정비해 나갈 예정이다.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
배우 연규진이 KBS 2TV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를 통해 32년 만에 예능 나들이에 나서 화제다. 브라운관 출연도 지난 2014년 방송된 KBS 1TV '산 넘어 남촌에는2' 이후로 7년 만이다.
특히 연규진은 방송에서 아들 연정훈과 며느리 한가인을 언급해 더욱 화제를 모았다. 현재 연규진은 '연정훈 아버지', '한가인 시아버지'로 통하지만, 그도 유명한 배우였다. 원래는 연정훈이 '연규진 아들'로 불렸다. 그렇다면 연규진은 누구일까, 좀 더 자세히 알아봤다.
연규진은 1945년생으로 만 75세이며, 1969년 TBC 공채 8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5년 간의 무명 생활 끝에 1974년 TBC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1990년 MBC에서 방송된 드라마 '똠방각하'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김영애 등과 식품회사 오뚜기의 전속 모델이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잘나갔다는 의미이다.
그 외에 연규진은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코리아게이트', '남자 셋 여자 셋', 'LA 아리랑'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앞서 말했듯 '산너머 남촌에는 2' 이후로는 특별한 작품 활동이 없다.
연규진은 배우 활동 뿐만 아니라 스타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서울대 무용과 출신인 아내와 방송사에서 우연히 만나 1972년 결혼했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들이 바로 연정훈이다. 연정훈은 KBS 1TV '노란 손수건'에서 한가인을 만나 지난 2005년 결혼했다. 연정훈과 한가인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또한 연규진의 재산 규모는 준재벌급 정도로 알려졌다. 동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업 수완이 남다르고, 원래 집안 자체도 좋다고 한다. 과거 TV조선 '호박씨'에서 "연규진 씨 부모님이 약사였다더라. 부모님이 모은 재산으로 연규진 씨가 연흥극장을 운영했고 그 재산으로 부동산 재테크를 했다고 전해진다"는 얘기가 나온 바 있다.
원래 연규진은 연정훈 한가인 부부와 판교에서 같이 살았다. 그곳은 250평 정도의 부지에 50평 정도의 2층 건물로 60억에 달하는 고급타운하우스로 알려졌다. 이후 2010년 연정훈 한가인 부부는 남산에 위치한 고급 빌라로 이사했다.
연규진은 지난 10일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서 극장 소유 루머에 대해서 "그건 소설을 써 놓은 거다. 족보 상의 먼 친척들이 운영할 뿐, 나와는 관계 없다"고 해명했다. 다만, 자신이 재테크를 잘 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와 함께 연규진은 '한가인이 재벌가라서 시집 갔다'라는 루머도 언급하며 "우리 며느리가 '뭐 때문에 저 집에 시집을 갔을까'부터 퀘스천이 된 거다. 나는 방송에서 본인 신상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앞서도 연규진은 연정훈과 한가인이 드라마에서 눈이 맞아 결혼했다고 강조했다.
연규진의 며느리 사랑 또한 유명하다. 그는 지난 방송에서도 "한가인이 아직도 그렇게 예쁘냐"는 질문에 "보고만 있어도 예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일 못해도 괜찮다. 내가 예쁜 여자한테 약하다"며 "손주는 두 명이다. 위에가 딸, 밑에가 아들. 6살, 3살이다"고 애정을 표했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온 이 절망에 나는 또 쓰려져 혼자 남아 있네.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괜찮다 말해줄게. 다 잘 될 거라고. 넌 빛날 거라고. 넌 나에게 소중하다고. 모두 끝난 것 같은 날에 내 목소릴 기억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일상적 언어로 담담하게 위로를 건네는 이 노래는 가수 커피소년의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다. 커피소년은 201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디 가수인데, 위 곡은 그의 대표곡 중 하나다. 특히 이 노래는 삶에 지친 청춘들의 맘을 달래는 곡으로 당시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드라마와 라디오 등에서 자주 BGM으로 등장한다. 곡을 쓴 커피소년은 한 인터뷰에서 “단순한 말이지만 가사를 통해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노래는 듣는 이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전달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의 위로나 격려보다 음악이 더 큰 위로가 된다고 한다. 가수인 나 역시 내 노래를 듣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참 고맙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선 걱정이 앞선다. 진심 어린 위로를 나눌 이가 적은 것은 아닌지,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쌓이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노래에 의지하게 된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다.
물론 위로는 쉽지 않다. 좋은 일을 축하하는 것은 익숙하고 쉽지만, 나쁜 일을 겪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고 참 복잡하다. 서투른 위로는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나 부담을 주거나, 좋은 의도와 달리 본인이 상처받을 수도 있다. 고심해서 상대방의 상황에 적절한 위로가 되는 언행을 한다고 해도 원했던 결과를 얻기는 힘들고, 얻는다 해도 시간이 걸린다.
위로는 단순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 감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따뜻하고 친절한 감정을 통해서 상대의 부정적 감정을 ‘완화’하는 행위다. 어떤 감정 상태로 향하는 논리적 행위가 아니라, 견딜 힘이 더 커졌다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감정적 행위다. 이를 통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위로의 궁극적인 목표는 위로받은 이가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주어진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까? 위로의 첫 단계는 능동적인 청취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다시 일어서기 전에 울며 상처를 핥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로의 첫 단계는 먼저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집중해서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하려 노력해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고, 이해받고 있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고통의 수렁에 빠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잠시나마 마음을 기댈 어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보다 비언어적 표현과 행동이 더 중요하다. 친밀감, 따뜻함, 신뢰감 등을 비언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눈을 마주 보고 다정한 표정을 보여주며 신체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중요하다. 들어주며 상황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단계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솔직하고 간결한 말로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한 상황을 정리해서 들려주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말하면 된다.
시니어는 갑작스러운 은퇴와 부모의 죽음, 배우자와의 사별 등 말 못 할 아픔이 많다. 삶에서 축적된 상처의 상흔도 저마다 다르고, 원하는 위로 방식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의 위로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이도 있다. 이럴 때는 섣부른 조언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곁에 머물면서 네 편이라는 연결감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라는 엉거주춤한 도움보다는 가끔씩 안부와 마음의 안녕을 묻거나, 상대가 혼자 하기 힘든 일을 먼저 나서서 도와주면 좋다. 홀로 살아가는 인생에 내 편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든든한 일이 있을까? 매몰찬 현실에서 뜨끈한 손난로처럼 필요한 것이 위로가 아닐까?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 커피소년
커피소년이란 이름은 짝사랑하던 여인이 좋아하던 아메리카노에서 모티프를 가져왔고, 사춘기 소년의 감수성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 ‘커피소년’이라 작명했다. 실제로 첫 번째 곡의 제목은 ‘아메리카노에게’다. 짝사랑하던 여인이 결혼하면서 가수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KBS 2FM ‘유인나의 볼륨을 높여요’ 등 라디오와 방송에 그의 노래가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하게 된다. 소년과 같은 목소리와 단순하지만 따뜻한 노랫말 덕분에 삶에 지친 2030세대에게 특히 큰 인기를 얻었다. 커피소년은 이제 40대 중년으로 들어섰지만, 여전히 특유의 감성을 잃지 않고 활동 중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0'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 지속 기간이 20년 이상인 황혼이혼 건수는 3만8446건으로 전체 이혼 가운데 34.7%를 차지했다. 이혼한 부부 3쌍 중 1쌍은 황혼이혼인 셈이다. 이혼 연령도 높아졌다. 남성의 평균 이혼 연령은 1990년 36.8세에서 지난해 48.7세로 올라갔고, 여성도 32.7세에서 45.3세로 높아졌다.
이처럼 늦은 나이에 이혼을 결심하는 부부가 많아지는 데에 전문가들은 기대 수명이 80대가 넘는 장수 시대가 한몫했다고 말한다. 현재 50~60대에겐 ‘늙어서 이혼해 뭐하나’보다는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인생 20~30년이 있다’라는 논리가 더 통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 한승미 법무법인 승원 이혼 전문 변호사는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여생이라도 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황혼이혼이 많아졌다”라고 설명했다.
여성의 경제적 능력 향상과 사회 분위기의 변화 역시 황혼이혼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과거에는 혼자 살아갈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여성 또는 이혼을 치부처럼 여겼던 사람들이 많아 불행한 결혼을 참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약해짐과 동시에 이혼의 이미지가 개선되어 이혼을 자연스러운 개인의 선택으로 여기는 사회적 풍조가 형성됐다.
젊은 세대의 결혼율 감소, 고령화와 맞물려 황혼 이혼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급격히 늘어날 전망이다. 한승미 법무법인 승원 이혼 전문 변호사는 “결혼을 하지 않는 청년층이 증가하고 베이비붐 세대의 이혼율이 증가하면서 황혼 이혼 비중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라며 “실제로 과거에 비해 이혼 상담을 의뢰하는 황혼부부가 훨씬 많아진 추세다”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부부로 지내온 만큼 서로 합의에 따른 협의이혼을 진행하면 좋겠지만, 이혼 여부 자체나 재산분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재판상 이혼이 불가피한 경우가 많다. 재판상 이혼은 조정 이혼 절차와 이혼소송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유책 배우자 위자료 청구, 제소 기간 잘 따져야
재판상 이혼은 부부 당사자 중 한 사람이 이혼을 반대할 때에도 법률상 이혼 사유가 인정된다면 이혼을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혼인 파탄에 대해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 유책 배우자에게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금인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으므로 상대방의 유책 배우자 여부를 면밀히 판단해야 한다. 다만 설령 상대방의 잘못으로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유책 사유가 발생한 시점이 지나치게 오래전이라면 이혼 청구가 불가능할 수 있어 이혼사유별 제소 기간을 확인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외도를 사유로 이혼소송을 할 때에는 외도를 안 날로부터 6개월 또는 외도가 있던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용서를 한 부정행위를 근거로는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재산분할’이 주요 쟁점... ‘기여도’ 중요해
사실 황혼이혼을 다루는 재판상 이혼에서는 유책 배우자의 위자료보다는 부부의 공동재산을 나누는 재산분할이 가장 큰 쟁점 된다. 한 변호사는 “위자료의 경우 아무리 명백한 유책 사유가 있어도 액수가 크지 않다”라며 “황혼의 재산분할은 길었던 혼인 기간만큼 함께 축적해온 재산도 많아 액수도 크고 분쟁의 소지도 많다”라고 설명했다.
재산분할은 유책 사유보다는 혼인 기간 동안 재산을 형성하고 유지·증가시키는데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재산에 대한 자신의 기여도가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 필요한데, 기여도는 외부 경제활동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즉, 전업주부라고 해도 가사 노동과 육아에 기여한 바가 인정되므로 50%에 가까운 재산 기여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혼재산분할 대상이 되는 재산은 부부가 혼인 기간 가운데 공동으로 쌓은 재산에 한한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재산, 또는 혼인 전부터 갖고 있던 특유재산의 경우는 재산분할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해당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하는 데 배우자가 기여한 바가 있으면 기여도만큼의 분할 요구를 할 수는 있다.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재산은 현금, 부동산뿐만 아니라 주식, 연금 등 거의 모든 자산이 포함된다. 다만 일반 자산 외에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채무 역시 재산분할에 포함되니 주의해야 한다.
아직 수령하기 전인 배우자의 퇴직금이나 연금에 대해서도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있다. 분할연금은 전 배우자의 노령연금(수급연령이 됐을 때 받는 국민연금)을 나눠 받도록 한 연금제도다. 분할연금을 수령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한 변호사는 “이혼한 배우자와의 혼인 유지 기간이 5년 이상이어야 하며, 분할연금 신청자 본인과 이혼한 배우자가 모두 노령연금 수급 연령에 도달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라고 말했다.
재산 명의가 공동명의가 아닌 일방 배우자로만 되어 있다면 이혼소송 과정에서 재산 처분이나 은닉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한 변호사는 “부부관계가 틀어진 후에 배우자에게 공동명의를 요구하면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라며 “부부 사이가 안 좋아지거나 이혼의 조짐이 보인다면 상대방 명의로 된 재산의 가압류 또는 가처분 신청을 미리 해 두는 것이 좋다”라고 조언했다.
우리는 사업을 하는 연예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사업을 할 때 장점이 많기 때문일 것. 자본도 어느 정도 모아졌고, TV에 사업에 대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노출돼 홍보를 하기 용이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고운 시선만이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우려를 넘어서 자신의 사업에서 성공한 중년 연예인들이 있다. 누군가는 꿈을 쫓아서,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서 등, 그 이유 또한 다양하다.
정보석, 빛나는 빵집 사장님
지난 1986년 데뷔한 연기 35년차의 배우 정보석. 그는 극 중 맡는 역할 때문에 '명품 악역 배우'로 통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성이 좋기로 유명한 배우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푸근한 인상의 빵집 사장님으로 변신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정보석은 지난 6월 서울 성북구에 빵집 '우주제빵소'를 오픈했다. 18년 전에 지은 자신의 집을 개조한 것. 원래는 카페를 하려고 했는데, 빵이 맛있다고 난리가 나서 빵집이 됐다. 특히 둘째 아들이 제빵사, 아내가 바리스타의 역할을 각각 맡아서 하고 있다. 정보석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스스로 "빵 만드는 일 외에는 다 한다", "허드렛일 담당이다"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정보석은 최근 빵집 사장님으로 변신한 것에 대해서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알리고, SNS인 인스타그램도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빵집에서의 일상 사진을 게재하며 호기심을 자극하고 방문으로 이어지도록 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정보석은 연기 활동을 지속하면서 가맹점, 프랜차이즈 빵집을 내는 것이 목표다.
임채무, 빚 내면서까지 두리랜드 운영
배우 임채무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그 이름 '두리랜드'. 예전부터 아이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놀이공원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두리랜드 사장님이 됐고, 빚을 지면서까지 운영하고 있어 귀감을 사고 있다.
임채무는 지난 1989년 사비 130억 원을 들여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약 3000평에 달하는 테마파크 두리랜드를 오픈했다.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 위주로 구성됐고, 임채무는 30년 동안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부가 돈이 없어 주저하는 모습을 본 뒤로 입장료를 없애버렸다.
이로 인해 수년 간 적자 상태로 경영난이 일어 2006년부터 약 3년 간은 휴업했다. 그리고 2009년 30억 원을 들여 구조를 바꾼 후 재개장했다. 2017년 10월에는 미세먼지 등 환경적인 문제로 두리랜드를 휴장했고, 2년 6개월 만인 2020년 4월 24일 콘텐츠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뉴얼한 뒤 다시 문을 열었다. 인건비와 전기세를 감당할 수 없어 입장료도 받기 시작했다.
임채무는 놀이공원 리뉴얼 전 아내와 두리랜드 화장실에서 1년 간 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더불어 그는 지난 9월에도 "앞으로도 갚아야 할 돈이 140억, 150억이 된다"고 밝혀 이목을 사로잡은 바 있다. 이와 같이 임채무는 자신이 빚을 감당하면서까지 두리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하지만, 동심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진심은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이무송, 결혼정보업체 대표 우뚝
가수 이무송은 노사연의 남편 혹은 결혼정보업체 대표로 더 유명하다. 이무송은 지난 2010년 결혼정보업체 '바로연'을 론칭했고, 업계에서 손에 꼽히는 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이무송은 론칭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결혼정보업체 사업 구상은 10년 전부터 해왔다"며 오랜 시간 고심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나이나 주변 상황에 못 이겨 결혼한 경우가 많았다. 서로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결혼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 부부는 많이 싸웠다. 싸움도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어 부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결혼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바로연이 잘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무송과 노사연이 스타 부부라는 데 있다. 이무송과 노사연은 각각 회사의 대표이사, 홍보이사를 맡고 있다. 그들은 각종 방송에 출연하면서 바로연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알렸는데, 이는 바로연을 이용하면 두 사람처럼 알콩달콩 살 수 있다는 왠지 모를 믿음을 갖게 했다. 여기에 실제로 이용해본 고객들의 만족스러운 후기가 더해져 현재의 위치에 이른 것으로 해석된다.
인터넷 초창기 ‘-_-;’ ‘*^^*’ 등 기호를 이용한 감정 표현에서 시작한 이모티콘은 이제 다양한 그림체와 움직임을 통해 이용자들의 감정뿐만 아니라 취향까지 드러낼 수 있다. 카카오·라인 등 여러 메신저 플랫폼에서는 이미 주요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은 모양새다. 이에 이모티콘 관련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캐릭터를 개발하고 일러스트를 그리는 ‘이모티콘 작가’가 주목받고 있다. 전문 작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도전할 수 있고, 수익 창출도 가능해 부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연정(45) 작가는 결혼, 출산 후 직장 경력이 단절된 상태였다. 아이 셋을 키우며 생활비가 부족해 구직 활동을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던 탓이다. 생활비가 절실했던 때,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다 발견한 현수막이 그를 이모티콘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모티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전공했고 영상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이걸 살리면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생활비는 부족한데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만 이어지더군요. 일단 뭐든 해서 가정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했죠.”
그러나 교육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면접을 통해 왜 이모티콘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 목표 금액은 얼마인지 등 여러 질문에 답해야 했다.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위축되기도 했지만 결국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교육을 받은 후 당당히 이모티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모티콘 심사 기준이 6개 정도 되는데, 꽤 까다로워요. 자꾸 심사에서 탈락하게 되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게임을 좋아하는 중학생 아들에게 이모티콘을 구성한 후 ‘이거 네 이야기야’라며 보여줬더니 ‘엄마 이거는 이런 느낌이 아니야’ 하면서 자기가 쓱쓱 다시 그려주더라고요. 그걸 다시 보충해 심사 요청을 했더니 승인이 됐어요. 그게 지금 카카오톡에 올라가 있는 ‘게임덕 장돌이의 일상’이에요. 장돌이는 제 아들의 별명인데, 덕분에 이모티콘 작가로 데뷔할 수 있게 됐죠.”
장돌이 이모티콘 이후 자신감을 얻었지만, 중년의 나이에 10대, 20대 감성의 그림을 그리기란 쉽지 않았다. “장돌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그림은 아무래도 공부가 더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제일 잘하는 걸 하는 게 맞겠다’ 싶었죠. 평소 아버지가 카카오톡으로 좋은 이미지나 좋은 말들을 보내주시는데, 답변으로 어떤 걸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직접 쓸 만한 것으로 이모티콘을 구성했어요. 결과는 성공이었죠. 그게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이모티콘이에요.”
오 작가는 인사말 이모티콘을 구성할 당시 40대 이상의 연령층을 타깃으로 삼았다. 확실한 메시지 전달이나 의사 표현을 목적으로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중장년층은 ‘메시지형 이모티콘’에 높은 수요를 보일 거라 예상했다고. 20대들이 놀이 문화로서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특성과는 상반된다.
“이모티콘 작가는 본인이 하기 나름이에요. 시간이나 장소에 매여 있는 직업이 아니다 보니 어떤 식으로 마케팅을 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시간을 충분히 쪼개서 활용할 수 있죠. 제일 좋은 건 전공도,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점 아닐까요. 특히 저 같은 주부들에게 괜찮은 직업 같아요.”
이모티콘이 네이버OGQ, 라인, 밴드 등에도 입점하며 승승장구한 덕에 작가 지망생 시절 수업을 듣던 경기도 여성일자리재단 경기IT새일센터의 강사가 됐다. “저처럼 경력이 단절된 여성, 빠듯한 생활비 탓에 부업을 하려는 직장인, 그림 전공자 등 다양한 수강생들이 있어요. 특히 40대 이상인 분들은 ‘강사님 보니까 희망이 생긴다’며 용기를 얻어 가시는데, 제가 더 뿌듯하죠.”
그는 초반 목표였던 300만 원 수익을 넘어 얼마 전 1000만 원을 달성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3000만 원. 10억대의 유명 이모티콘 작가들의 이야기가 남 일만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 실력과 상관없이 간단하게 선 몇 개만으로 그린 캐릭터로도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매력 있는 이모티콘이 될 거라고 봐요. 망설이시는 분들도 걱정을 거두시고 힘껏 도전해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