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할 것 없이 제 이야기 하고 싶어 야단인 세상이다. 들어보면 제각기 대단한 구석도 있고, 웃음 나는 구절도 있으며, 눈물 훔치게 하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재미난 이야기 들어줄 사람 없이 혼자 떠들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성화 관악FM DJ는 ‘듣는’ 아나운서다. 누구보다 말할 기회가 많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듣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고 듣는, 현역 최장수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른다. 잘 듣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지 않은가.
이성화 DJ는 1959년 부산 MBC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한 상업방송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다. 이후 서울 MBC, RSB 라디오 서울(동양방송의 전신), TBC 동양방송까지 다양한 방송국의 개국 아나운서로 자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초대 DJ를 1964년부터 1972년까지 8년 동안 맡기도 했다.
아나운서, 현대사 한복판에 서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그가 아나운서로 한창 이름 날리던 때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이 많던 시기였다. 부산 MBC 아나운서로 일하던 때였다. 그는 우연히 들어선 다방 창가에 앉아 있는 엄순영 씨를 발견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에 감탄한 이성화 아나운서는 엄 씨를 미스코리아 경남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를 설득해 심사 3일 전에 아슬아슬하게 후보 등록을 마쳤는데, 부산 미스코리아에 선발되면서 엄 씨는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할 자격까지 얻었다.
당시 한국일보사에서 실시했던 미스코리아 본선 대회는 경복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대회 전날 엄 씨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그는 당시 김지태 서울 MBC 사장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사모님이 그를 깨우며 하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 리, 쿠데타가 일어났대요’ 하시는데,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멍한 채로 대문을 열었더니 집 앞으로 탱크가 지나가지 뭐예요.” 그때가 1961년 5월 16일 아침이었다. 2년 차 사회 초년생이 5·16 군사정변의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아나운서 자리에 앉아 3·15 부정선거, 4·19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보도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치인부터 유명 가수, 배우 등 명사를 만날 일이 많았다. 만났던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 역사적 인물이 된 경우도 있다. 그가 부회장을 맡았던 여류방송인클럽이 한 군부대를 위문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안내받으며 사단 내부를 둘러보고 사단장을 비롯한 장성들과 기념 촬영을 했죠. 굉장히 대접받으며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죠.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던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역사적 인물이 될 거라고는 말예요.” 그는 지금도 김재규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면 권력이 다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한다.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와 배짱
인생무상,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전성기는 빛나기 마련이다. 그는 업계 안팎으로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은 1세대 커리어우먼이었다. 재치 있고 순발력이 좋다고 소문 난 덕분에 당시 생방송 스케줄이 잡힌 PD들에게는 섭외 1순위 아나운서였다. 게다가 당시 발간되던 잡지 ‘아리랑’에서 진행한 아나운서 인기 순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동양방송에서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처럼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남녀 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택시 기사와 전화 연결을 할 때 제가 ‘기사님 밤늦게 운전하고 들어가도 부인께서 식사 정성껏 챙겨주시면 덕분에 기운 나시죠? 그러면 기사님도 부인께 친절을 베풀어야지요’ 하면 바로 알아듣고 상대편에서 ‘그럼요. 다음 날 아침상에 달걀프라이가 올라온답니다’ 하고 대답하거든요. 듣는 사람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그의 인기에는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듣기 좋은 음성이 한몫 단단히 했다. 연극 연출가 오사량은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며 그의 목소리를 극찬했다. 목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 목 관리를 모르고 살았으니 천직이나 다름없다.
이성화 DJ의 방송 인생을 논할 때는 당찬 성격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 MBC의 방송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해 방송 인생이 시작된 것, 예상 못한 순간에 순발력을 발하는 기지도 그의 당찬 성격에서 비롯됐다.
전국체육대회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던 시절, 육영수 여사가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전국체육대회 중계방송의 진행석에서 방송 준비를 하던 그는 마이크를 쥐고 대뜸 육 여사가 앉은 단상으로 올랐다. 단상 밑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둘이 막아섰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양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잠깐 인터뷰만 할게요’ 하고서 그 둘이 망설이는 틈을 타 단상에 올라섰어요. 올라가는 동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한 다음 육영수 여사한테 ‘안녕하십니까. 이따 방송 시작하거든 날씨가 어떤지만 여쭤볼게요. 오늘 날씨가 좋지요? 하고 물으면 ‘네’ 하는 대답이랑 선수들 잘 뛰라는 말씀만 해주세요’ 그랬어요. 돌이켜 생각해도 보통 배짱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계획에 없던 영부인의 인터뷰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쾌지나 청춘에서 제2의 청춘을 열다
이후 1980년 신군부의 주도로 언론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당시 몸담고 있던 TBC 방송이 문을 닫았다. 이때 그의 활약상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 밖에서 그만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남편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후 방송에 대한 욕심, 재능, 외부의 인정을 모두 던져두고 30년을 주부로 살았던 그는 9년 전 뜻하지 않게 아쉬움을 풀 기회를 얻었다. TBC 방송국 막내 PD였던 동료의 소개를 받아 비영리 라디오 방송국 관악FM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서울 관악구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발음이 정확해 한국어 선생님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못했고, 방송을 맡은 그 역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 제작진과 함께 고민한 끝에 폐지됐던 ‘쾌지나 청춘’ 방송을 되살리는 카드를 선택했고, 그는 현재 9년째 ‘쾌지나 청춘’의 월요일 DJ를 맡고 있다.
‘쾌지나 청춘’은 국내 최초 어르신 방송단이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쾌지나 청춘’은 고정 코너 ‘생활의 지혜’, ‘생활 건강’과 요일마다 다른 여섯 가지 단독 코너로 이뤄진다. 이성화 DJ와 함께하는 월요일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인터뷰 코너가 진행된다. 코너의 아이템 기획부터 게스트 섭외, 인물에 대한 사전 취재와 원고 작성은 모두 그의 몫이다. 녹음을 진행해보고 더 끌어낼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판단하면 회차를 늘려 추가 녹음을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 및 진행자만으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없다. 관악FM 내의 오랜 파트너인 김우신 PD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베테랑 DJ로서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기에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방송 제작에 힘써준 그가 고맙기만 하다. “지금까지 기획진행 이성화, 기술편집 김우신 프로듀서였습니다.” 매 방송마다 빠짐없이 넣는 멘트만큼이나 그를 향한 애정이 빼곡하다.
한창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방송했던 베테랑 방송인에게, 30년이란 기나긴 공백기를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청취자에게 신청곡을 주문받으면 막내 작가가 서고로 뛰어올라가 CD를 찾는 동안 즉흥에서 멘트를 지어내던 시절과는 사뭇 딴판이지만, 라디오 DJ 일은 그에게 여전히 즐겁기만 한 분야다. 그는 매 방송이 끝난 뒤 직접 준비한 원고를 일일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곤 한다. 젊을 때부터 습관처럼 하던 기록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방송과 게스트를 홍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성·드라마, 그가 전할 새로운 이야기
평생을 진행자로 살았지만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꿈도 꾼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제작하는 일 말이다. 만약 PD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중장년 여성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라떼’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로만 살아오며 나이 들어버린 이들의 세월을 조명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모르게 겪은 고통과 고난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가부장 사회의 제도와 법률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거든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는데 각자의 가정에 자양분으로 쓰이고 만 거예요. 그래서 유능한 여자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많아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할 곳도 없으니 친구들이랑 만날 때나 털어놓고 말죠.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데 정말 가슴이 아파요.”
그만 해도 그랬다. 일에 욕심이 있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남편의 반대를 거스르지 못해 끝내 집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은행에 입사할 때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여자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바깥일을 하면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당대 여성들에게 선망받는 방송인이었던 그도 방송을 마치면 아내이자 엄마로서 일할 줄만 알았지 자기 계발에 시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로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30년의 시간이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쉬운 만큼 그는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에 열중하다 보니 새로운 목표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는 80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야 도전할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어엿한 스토리텔러로 활약하고픈 열정이 샘솟아 4년 전에는 전문 학원까지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쾌지나 청춘 기획하고 진행하랴, 집에 가면 블로그 글도 올리랴. 게다가 남편 밥도 챙겨줘야 해요. 쉴 새 없이 바쁜데도 드라마가 너무 쓰고 싶어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대본을 썼어요. 드라마라는 게 제각기 다른 갈래의 사람들이 한데 얽혀 진행되는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렇게 멋진 예술의 한 줄기로 끼고 싶은 거죠.”
‘옛날 사람’인 그는 그가 실제로 보고 들은 ‘옛날이야기’를 50분짜리 대본 한 편에 풀어냈다. 요즘 사람들의 AI, 우주 공간 같은 요즘 이야기 말고 욕심쟁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명예를 탐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담았다고 했다. 그 대본으로 당장 드라마를 제작할 수 없고, 촬영 현장에서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꾸준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처음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던 그 당찬 성격과 배짱을 무기로 내세우면서.
1세대 아나운서인 그는 아나운서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친화력을 꼽았다. 친화력이 있으려면 배려와 친절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처음 보는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며, 이를 이끌어내는 능력까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친화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관악FM에서만 4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400개의 이야기를 듣고 400개의 아름다움을 뽑아낼 줄 아는 그는 친화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야기가 익숙하거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좋고, 몰랐던 세월의 이야기라면 새로워 좋다. 들을 줄 아는 아나운서, 한결같은 그의 인생이 아름답다.
#1 입관을 앞두고 가족들이 고인과 마지막 만나는 시간이다. 저마다 슬픔을 추스르며 고인에게 작별인사를 올린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난 것 같아 남은 절차들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잠깐 기다려달라고 한다.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고인의 귀로 가져다 댄 후 녹음된 음성을 틀어준다.
휴대전화에서는 코로나19로 입국하지 못한, 브라질에 거주하는 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엄마, 못 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마지막 가는 길마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고마워 엄마.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 엄마. 이제 편히 쉬어.” 딸은 흐느끼느라 말을 맺지 못했다. 사랑하는 엄마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2 아들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임종을 지키러 입국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들어올 수 없었다. 직계가족의 상이 발생할 경우 입국 시 코로나19 음성 판정이 나면 자가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운명하지 않은 시점에서 들어올 경우에는 15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3 일정이 맞지 않으면 장례식에 참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들은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대신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기 위해 임종 후 입국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입국한 상주를 받아주는 장례식장은 흔치 않았다. 우리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발 벗고 나서 겨우 장례식장을 섭외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고인 사망 후 상주가 입국해 자가격리 면제를 받은 후 4일 만에야 겨우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릴 수 있었다.
유족들은 코로나19 때문에 빈소를 차리지 않는 무빈소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
“상주님~ 빈소를 차리지 않으면 아쉽지 않으시겠어요?”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할 수 없지요. 빈소를 차리면 저희들이 조문을 받지 않겠다고 해도 직장 동료나 지인들이 참석해야 할지 말지 고민할 텐데…. 애초에 빈소를 차리지 않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결국 빈소를 차리지 않았다. 참관식에서는 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이 함께 발인예배를 진행하며 어머니의 천국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코로나19가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꾸고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사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종식된 이후에도 전과 같은 장례식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장례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애도’에 있다.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통해 가족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위로받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이전 장례식에서는 이런 애도의 과정이 실종되었다. 운명한 직후부터 유족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빈소가 차려지면 조문받기 바쁘다. 발인하는 날은 장례식장에 비용을 정산하고, 화장장을 예약하고, 장지 계약하는 등 3일 동안 장례는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나마 온전히 고인을 추도할 수 있는 시간은 염습을 참관하는 한 시간 남짓이 전부였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 시대의 장례는 규모가 축소되었을지언정 그로 인해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늘어났다. 부고를 하고 정신없이 조문을 받던 시간이 오롯이 가족들끼리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깊이 있는 애도와 가족 간의 애틋한 추모를 위해서는 가족 추모식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추모식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도 없고 형식을 따질 필요도 없다. 고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고인의 사진을 함께 보고, 메모리얼 포스트(고인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작성해 나누면 된다.
내가 근무하는 협동조합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추모와 애도가 중심이 되는 장례식을 준비해왔고 ‘채비’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채비’는 추모식이 중심이 되는 혁신형 장례식이다. 우리 조합은 가족들이 추모식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기획, 연출, 진행을 돕는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의례가 사라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채비장례’를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죽음과 의례의 본질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은 양면이 있다. 죽음 또한 그렇다.
홀로서기는 인간이 사는 동안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마치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가 번데기의 변태 과정을 거치는 것과 유사하다. 가장 안정적인 홀로서기는 오랜 기간 개체의 성장을 기반으로 이뤄지는데, 예를 들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20년 가까이 준비한다. 부모의 품 안에서 경험을 쌓고, 신체적·심리적·사회적으로 자신을 확장시켜 결국 부모로부터 독립을 이뤄낸다. 그러나 노년기의 홀로서기는 좀 다르다. 체력과 건강을 잃고, 퇴직 후 직업과 수입원을 잃거나, 언젠가는 배우자·친구들을 떠나보낸다. 노년의 홀로서기는 ‘성장’이 아닌 갑작스런 ‘상실’을 기반으로 하기에 액티브 시니어라는 역동적인 단어를 붙인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히 노년기의 홀로서기를 준비할 때 자신의 마음속에 바라는 ‘결과’를 먼저 떠올린다.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고, 신체적 건강을 통해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 등을 말이다. 이를 위해 재정적으로 철저하게 은퇴 설계도 하고, 자신에게 맞는 취미 생활도 찾으며, 여러 질병이 보장되는 보험도 마련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런 것들을 철저히 준비했다 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괴롭고, 자식들 문제, 돈 문제,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오히려 건강에 더욱 집착하고, 경제적으로 부족한 자신을 한탄하거나 질투에 휩싸여 결핍을 경험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제2의 인생을 찾아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내면의 상실과 결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런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우리가 노년의 홀로서기에 앞서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와 동일한 문제다.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도 바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다.
평생을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66세에 정년퇴직을 맞이한 슈미트. 아내는 이제 주름 가득한 할머니가 되어 사사건건 자신을 간섭하고, 딸과의 관계는 냉랭하다. 하루에 77센트를 후원하는 탄자니아 꼬마 엔두구에게 편지 보내는 것 이외에는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던 슈미트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과 이후 알게 된 그녀의 외도를 맞닥뜨린다. 설상가상 딸은 물침대 외판원인 ‘놈팡이 같은 녀석’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내도, 딸도, 친구도, 직장도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버린 슈미트는 마지막 남은 희망인 딸의 결혼식을 방해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좌충우돌 부딪치는 그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결국 딸은 놈팡이와 행복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그동안 당연한 듯 슈미트의 삶에 자리 잡고 있던 결과물들이 은퇴 이후 노년기의 문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어쩔 수 없이 결혼식 축사 후 화장실에서 홀로 터뜨리는 그의 울음은 그렇기에 더욱 애잔하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되돌릴 수 없는 노년의 상실이라는 단단한 벽 앞에 무릎 꿇고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눈물에는 좌절과 고통, 깊은 외로움만 담겨 있지 않다. 만약 이런 것들만 남았다면, 그는 축사는커녕 결혼식을 박차고 나가 딸의 비극적인 미래를 냉소적으로 곱씹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동안 살아왔던 슈미트의 방식대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울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삶에서 노년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요, 그렇기에 자신을 위한 애도의 눈물이기도 하다. 비록 스스로를 실패자라 생각하지만, 그는 상실에 대한 애도 과정을 거쳤기에 이제 홀로서기를 할 준비를 마쳤다. 그 증거로 슈미트는 엔두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난 무엇을 달라지게 한 거지? 나 때문에 이 세상이 무엇이 더 좋아진 거지?”
슈미트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노년의 홀로서기는 상실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기 전에, 나이 듦에 따라 잃게 되는 것들을 ‘어떻게’ 떠나보낼지에 대한 애도(Breavement)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된다. 상실로 시작되는 노년기를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통합(Ego Integrity)을 이뤄내지 못하면 현상 유지도 아닌 절망(Despair)이 일어나는 시기라 설명했다. 그가 이야기한 통합이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생에 그래야만 했던 것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이나 실수했던 것들을 받아들이고 수용, 통합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잘 살아냈다는 느낌으로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기회를 얻게 된다.
노년의 홀로서기는 과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살거나 고독한 삶이었다면 슈미트처럼 좀 더 시행착오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년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나 마땅히 이 통과의례를 거치는 동안 떠나보내야 할 것들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 맞이할 것들에 대한 채비를 할 것이다. 노년기가 삶의 종점이 아닌 또 다른 제2의 인생을 위한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과정임을 이해한다면, 상실의 고통을 겸허히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는 사춘기에서 경험하는 혼란과 방황처럼 또 다른 의미의 ‘늦깎이 성장통’인 셈이다. 이제 슈미트처럼 좌충우돌 부딪쳐갈 당신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엄마는 암을 두 번이나 겪었지만 퇴근하면 여전히 밥을 하고 빨래를 했다. 아내는 밥하는 것도, 설거지도, 빨래도 싫어하는데 말이다. 교사는 밥하다 말고 문득 생각했다. ‘이러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싫어하는 일만 하겠구나.’ 그래서 33년 차 엄마이자 아내, 교사 김희숙(62)은 직장부터 때려치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작가 김희숙은 독립하기 이전 성실한 시민이었다. 사회에선 좋은 선생님, 가정에서는 좋은 아내이자 엄마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지나치게 애쓰다가 지치곤 했다. 교장이라는 지위까지 가기 위해 세웠던 계획은 다른 사람 눈에 보기 좋은 계획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특히나 ‘밥’이란 그가 맡은 의무이자 사는 내내 따라붙은 고정관념 그 자체였다. 밥 한 번 지어본 적 없었지만 보수적인 남편 만나 매끼 밥상을 차려냈다. 아이들이 생긴 뒤엔 엄마로서, 선생님으로서 학생들 끼니를 챙겨야 했다.
그러다 암 판정을 받은 그는 2018년 교단에서 내려와 항암 치료에 집중했다. 2019년부터는 암 환자들끼리 모이는 글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모임에서는 글을 한 편씩 써서 내야 했다. 직장도 그만두고 항암 치료까지 끝난 당시, 그는 거대한 시간 덩어리가 다가오는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고민한 결과 독립선언서가 탄생했다.
“제가 제일 단단하게 얽매여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어요. 그래야 독립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게는 그게 밥이었어요. 밥으로부터 벗어난 뒤로는 저만의 시간을 많이 확보해냈죠.”
밥으로부터 벗어나 가족에게서 독립하다
33년 동안 밥을 했던 그에게 ‘이제는 밥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독립선언이나 다름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아예 밥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밥을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을 땐 밥을 하지 않고 여행을 훌쩍 떠나버린다. 그는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며 원하는 삶을 사는 독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가족들은 그가 집에 없으면 자연스럽게 ‘어디 여행 갔나 보다’ 생각한다. 여행을 다녀오면 오히려 깨끗해져 있는 집을 보며 그는 깨달았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우리 가족은 나 없이도 잘 굴러갈 수 있구나. 어쩌면 집을 가장 어지르는 사람은 나였을지도 몰라.’ 그리고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건 그지만 서로가 서로에게서 독립했다는 것도.
독립선언 후 ‘날라리 자유인’ 신분이 된 지금은 그저 마음이 편안하다. 가족이나 친척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도 많이 벗어났다. “부탁을 받으면 ‘내가 할 수 있을까?’ 부터 생각해요.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거절하죠. 죄책감도 그만 느끼려고 해요. 내가 좋아야 남도 좋을 테니까.”
하지만 자식으로부터의 독립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당장 오늘도 ‘엄마 이 목걸이 할까, 저 목걸이 할까’ 골라달라고 했어요. 엄마 입장에서는 딸이 너무 친밀하니까 사소한 것까지 공유하게 되는데 자식 입장에선 부담될 수도 있잖아요. 자제하려고 하는데 제일 지키기 어려워요.”
그럼에도 아이들과 남편, 나아가 세상과의 적절한 온도를 찾는 일은 계속할 생각이다. 너무 뜨거운 것 같으면 조금 멀어져서 온도를 낮추고, 너무 멀어진 것 같으면 조금 다가서서 온도를 높이는 일 말이다.
여행과 책상, 그리고 적당한 관계
대신 자신과의 온도는 꾸준히 올리고 있다. 방에 책상도 새로 들였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그는 책상에서 매일 저녁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필사를 하거나 그림을 그린다. 요즘은 교사 생활하며 있었던 재밌는 일화를 짤막한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어느 정도 개수가 차면 세 번째 책을 낼 생각이다.
좋아하는 것도 마음껏 한다. 노는 데 진심인지라, 더 열심히 놀기 위한 것들만 골라 담아 배우는 중인데 그 종류가 자그마치 10개다. 당구도 배우고, 필라테스, 라인 댄스도 배운다. 여행도 열심히 다닌다. 코로나19 때문에 해외로 떠날 수는 없지만 국내에도 다닐 곳은 많다. 가장 좋았던 여행지는 인천의 굴업도다.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에서 사슴들과 함께 원 없이 하늘 바라보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단다.
가족과 직장. 기존의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그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상대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암에 걸리든 멀쩡하든, 사람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 수 있잖아요. 언젠가 누군가 떠나가도 적당히 슬퍼하되 나의 삶을 온전히 잘 살 수 있는 정도의 사이를 유지하려고 해요. 그 사람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너무 힘들어하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까요.”
독립선언 후 스스로를 우선시했더니 삶의 반경이 오히려 넓어졌다. 그는 암 환우들과의 글, 그림, 독서, 필사 모임에서, 아미북스를 통해 책을 내려는 예비 작가에게 선배로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내가 필요할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가족, 직장에서 만난 인간관계를 넘어 제3자에게까지 영향력이 닿게 된 것.
빨리 할수록 좋으니 지금 시작하라
독립하고 싶지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지금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각자의 상황이 다르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덧씌워지는 의무들이 더욱더 굳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고민하는 김에 한 발이라도 내딛어보는 게 중요하다. 그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 엄마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걸 인식시키고,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61세의 독립선언도 너무 늦어 아쉽기만 하다. 독립 선배로서 추천하는 ‘독립 적령기’는 50세다. 자기 자신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삶과 일을 확장시켜나갈 것인지. 기대수명 백 세의 절반인 50대에는 적어도 독립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 직장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시기이기 때문이다.
“제가 50세일 때는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어요. 그저 교사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서, 살던 대로 살기 바빴죠. 이제 와 생각해보니 너무 아까워요. 더 빨리 결심했어야 했는데.”
조금 늦은 시기, 생각지 못한 질병으로 말미암은 독립이지만 덕분에 모든 순간에 더욱 진하게 몰입할 수 있게 됐다. “죽음을 생각하며 산다는 건, 삶이 더 진해진다는 말과 같아요. 아프지 않을 때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암을 겪고 난 이후에는 확실히 달라요.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순간이 소중해져서 열심히 살게 되거든요.”
그가 암 환우들을 위한 프로그램, 모임에서 만난 이들 모두가 그랬다. 무언가 하고 싶다면 바로 해버리고, 그 순간 그 일을 아주 만끽하며 최선을 다한다. 그 역시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이 하루가 되었든, 100년이 되었든 시간에 굴하지 않고.
[김희숙의 독립선언서]
하나, 나는 선언한다.
지금부터 난, 내 의지대로 선택, 결정하고 살아간다.
둘, 자식은 놓는다.
내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집착하던 아이들, 잠시 내 곁에 머무르다 가는 사랑이었거니 생각한다.
셋, 남편은 바라본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치게 의미를 두고 굴레를 씌운 우리! 서로의 발목을 묶고 있던 짧게 맨 끈을 느슨하고 길게 풀어 멀리서 편안하게 바라보자.
넷, 사람과 더불어 산다.
어울림이 아름답기도, 타인의 시선이 감옥 같기도 하다. 때론 뜨겁게 때론 무심하게, 늘었다 줄었다 하는 고무줄처럼 조절하며 살자.
다섯, 나의 무지를 인정한다.
어느덧 가족 중에서 가장 아는 게 없고, 새로운 것들이 낯설기만 한 나. 하지만 못하겠다고 타인에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거북이처럼 스스로 느릿느릿 깨우쳐보자.
여섯, 지나친 의무감과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해왔던 것들. 그 틀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불안해하거나 죄책감을 갖지 말자.
일곱, 세상을 걷는다.
산과 들, 강가와 골목, 사람들 사이를! 바람 냄새가 그때그때 곳곳이 다름을 느껴보자. 넓고 깊이 볼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곳을 걷는다.
국내에 프로스포츠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여러 가지 전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런 영웅담 중에서도 최고의 전설을 꼽자면 아마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두껍게 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흑색과 적색의 유니폼을 입은 그들이 나타나면 상대 팀 선수들은 기가 죽고, 상대 팀 팬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상대의 전의마저 상실케 했던 해태 타이거즈 군단의 맨 앞에는 1번 타자 이순철(60)이 있었다.
“당시엔 사실 잘 몰랐어요. 해태 타이거즈에게 상대 팀들이 그렇게 기가 죽었는지를요. 그 공포의 유니폼은 우리에게는 그냥 촌스럽고 덥기만 한 존재였는데.(웃음) 현역 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됐죠. 술자리 같은 사석에서 다른 팀 출신 동료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유니폼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말이죠.”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 공식은 아주 단순했다. 타자들이 상대 팀보다 앞서 점수를 내면, 투수들이 막아 승리를 지킨다. 1번 타자 이순철이 시작하면 마무리투수 선동열이 지키는 공식이다.
홈런이 귀했던 시대에 1번 타자가 10개 이상 홈런을 치고 50개 이상 도루를 밥 먹듯 하니, 상대 팀 입장에선 맞설 수도, 내보낼 수도 없는 골치 아픈 타자, 그가 이순철이었다.
“상대는 경기를 시작하면 무조건 선취점을 내려고 했죠. 선동열이 못 나오도록 해야 하니까. 그렇게 무리하다 보면 게임은 꼬이게 되죠.”
함께 흘렸던 목포의 눈물
1980년대 호남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억눌린 울분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들이 겪었던 상처는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승수를 쌓아갈 때마다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래서 팬들은 관중석에 앉아 ‘목포의 눈물’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런 감정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이순철 위원은 이야기한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선수들도 대부분 호남 출신이었죠. 팀 내에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말은 아끼는 편이었지만, 그 응어리나 한이 없을 수 없죠.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경기 일정부터 달랐어요. 해태 타이거즈는 한동안 5월 18일이 다가오면 전후 일주일 정도는 원정경기만 잡혔어요. 기념일에 광주 구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하지만 원정을 가도 전라도 분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계속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셨죠.”
1980년대에만 해태 타이거즈는 5번의 시리즈 우승을 이뤘다. 전체 우승컵의 절반을 가져온 셈이다. 대체 어떤 부분이 해태 타이거즈를 그렇게 강하게 만든 것일까? 이순철 위원은 그 비결로 3가지를 꼽았다. 강한 위계질서와 헝그리 정신 그리고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다.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이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위계질서가 있었죠. 선배들이 짓누르니까 후배들은 압박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추억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 프로야구 구단 중에서 OB(구단 출신 은퇴선수) 모임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해태 타이거즈일 거예요. 그만큼 서로 사이가 좋아요. 또 구단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릴 수밖에 없었어요. 보너스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말이죠.(웃음)”
사실 강한 위계질서는 후에 그가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거즈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응용 감독에 대한 항명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후 비슷한 사건을 겪는다. 43세 젊은 감독으로 LG 트윈스에 부임하자마자 팀의 고참 선수였던 이상훈과 갈등을 빚었고, 에이스인 그를 당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를 보내게 된 사건이다. 한 번은 선수 입장에서, 한 번은 감독 입장에서 항명 사건과 맞닥뜨린 셈이다. 이 위원은 “철이 없었다”고 정리했다.
“철없던 짓이죠. 김응용 감독과의 갈등은 제가 철이 없었어요. 또 이상훈 선수와의 갈등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선배로서 더 아우를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죠. 이상훈 선수하고는 나중에 한잔하면서 갈등을 풀었어요. 직접 소통했어야 하는데, 가운데 누군가를 거쳐 말이 전해지다 보니 생긴 오해였더라고요. 김 감독님하고도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 감독님 팔순 잔치도 제가 주도해서 준비했을 만큼 지금은 모두와 잘 지내고 있어요.”
숙명의 라이벌과 한 팀으로
사실 이순철 위원이 처음 시작한 운동은 야구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들어가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다른 인생이 펼쳐졌다.
“축구부 다음으로 육상부에 들어갔죠. 그러다 핸드볼을 잠깐 하고 나서 야구로 전향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응원은 받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시절은 아니었으니까요. 공부하기를 원하셨지만, 먹고살기 바쁘니까 적극적으로 막진 않으셨죠. 저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좋았으니까 계속 열심히 했고요. 운동부에서도 쉽진 않았어요. 당시 운동부는 지금 기준으론 범죄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체벌이 심했으니까요. 운동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체벌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고 감추기도 하고, 상처 때문에 엎드려 자야 하는 날도 많았어요. 자식이 학교에서 맞고 다닌다면 누가 운동을 시키려 하겠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진가는 빛났다. 광주상고의 에이스로 발전해 광주일고 선동열과 맞서는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관계는 대학 때까지 이어져 연세대학교 81학번으로 같은 학번의 고려대학교 선동열과 계속 맞서야 했다.
대학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을 때 세간의 관심은 1985년 신인왕을 어느 팀이 배출하느냐가 아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누가 가져가느냐였다. 결국 신인왕은 0.304의 타율과 12홈런, 31도루를 기록한 이순철의 것이었다. 이 기록은 지난 시즌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한 이의리 선수가 신인상을 받을 때까지 36년간 이어졌다.
10시간의 비행이 만든 프러포즈
1989년 어느 날, 이미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이순철은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이었지만 생경했던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허락할까?’
야구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스위스로 향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연인 이미경 씨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은 부인 이미경 씨를 연세대학교 학창 시절 처음 만났다. 그가 대학 시절 이미경 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골인한 것은 야구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아내 키가 170cm가 넘어요. 제가 좀 작은 편이라 키 큰 여자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미인인 아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만나서 계속 구애를 했죠. 그리고 연애를 10년이나 했어요. 아내가 승마 선수로 스위스에 유학을 가 있을 때 프러포즈를 했어요. 그전까지는 전화카드를 잔뜩 쌓아놓고 공중전화로 장거리 연애를 했죠. 그러다 저도 혼기가 돼서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더라고요.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라서 어떤 말을 할지, 과연 승낙을 해줄지 이런저런 생각에 긴장이 돼서 기내식도 제대로 소화가 안 될 정도였어요. 걱정과 달리 순순히 허락을 해줘서 기뻤죠. 그리고 다음 해 바로 결혼했어요. 저 때문에 승마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아직도 가끔 불평을 해요.”
‘모두까기’의 야구 사랑
야구 골수팬들에게 이순철이란 이름 석 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엄청난 기록의 선수였지만 말년의 기복 있던 모습이나 감독으로서는 좋지 않았던 성적, 방송이라도 입바른 소리는 뱉고 말아야 하는 성격 탓에 ‘모두까기’란 별명까지 얻은 해설위원으로서의 모습. 그러나 불만을 가진 팬들도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야구에 대한 그의 사랑이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 그는 단 1년도 야구계를 떠나본 적이 없다. 프로팀 코치나 감독 혹은 대표팀의 코치를 맡기도 했고,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이런 모습을 팬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다.
“제 인생에는 야구밖에 없어요. 인생의 다른 기술이 없어요. 다른 것을 할 용기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까 야구에 몰두하는 것뿐이죠. 어릴 때부터 야구에 매달려 살았고, 야구를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워요. 편하고요. 그래서 인생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야구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는 인터뷰를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어색해하다가 소품으로 준비한 배트를 손에 쥐자 표정이 달라졌다. 타격 자세를 취하고는 “이제야 좀 편해진다”며 웃었다.
이제 그에게는 선수 혹은 감독이라는 호칭보다 해설위원이라는 직함이 더 편안하게 들릴 정도가 됐다. 2007년 MBC를 시작으로 활동을 해오다 지금은 SBS 스포츠에서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실 선수 출신 해설위원은 대표적인 ‘파리목숨’으로 불리는 자리다. 방송사에서는 매년 스타 출신의 선수가 은퇴하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 위해 해설위원으로 스카우트하지만, 시청자들 반응이 좋지 않거나 약간의 구설이 발생하면 바로 계약을 해지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 만한 레전드들이 2~3년을 채우지 못하고 방송을 떠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방송국을 옮겨가며 장수하고 있는 이순철 해설위원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스타 해설가’인 셈이다.
“어릴 때부터 종이신문을 읽는 습관을 들였어요. 특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신문 사설을 많이 읽었죠. 당시 신문들마다 한자 사용이 많았던 탓에 웬만한 한자는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니까요. 프로선수가 되고 나서도 이 습관은 바꾸지 않았어요. 팀 매니저들에게 중앙 일간지는 꼭 로커 룸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니까요. 덕분에 해설위원이 되고 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지식도 많이 쌓고요.”
그가 해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MBC의 제안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야구 해설의 전설 하일성 선배에게 사석에서 해설에 대한 이야기를 묻기도 했다고. 그래서 첫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 없이 “하겠다”고 답할 수 있었다. 물론 해설은 평생 운동만 한 선수 출신에게는 쉬운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이 위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제가 처음 해설을 시작할 때는 일본 용어가 많이 사용됐어요. 시합, 계투, 데드볼 같은 용어들이요. 일본도 미국에서 야구를 받아들이면서 본인들 쓰기 편하게 바꾼 것이 많아요.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된 스포츠니까 외래어를 쓰려면 미국식 용어를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하나씩 고쳐나갔죠. 많이 변화시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요.”
이 위원의 중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단짝 정우영 캐스터를 빼놓을 수 없다.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함께 중계하다 SBS 스포츠에서 재회한 특별한 케이스. 이 위원은 “정우영이라는 좋은 캐스터 덕분에 해설위원이 빛나는 것 같다”며, “까칠한 성격도 이해하며 잘 받아주고, 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해 좋은 방송을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순철의 것이 아닌 이성곤의 야구
그가 야구에 대한 사랑을 쉽게 놓을 수 없게 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아들 이성곤 선수다. 이제는 프로 9년 차의 베테랑 선수가 된 이성곤은 지난해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됐고, 현재는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위원과 이성곤 선수는 야구계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이성곤이 1군 첫 홈런을 기록했을 때는 ‘비번’의 여유를 즐기다 방송국으로 호출당해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생방송에 출연해야 했다. 당시 선수 이성곤에게 늘 엄격한 해설을 날리던 이 위원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됐다.
그는 아들 이성곤 선수가 “야구 실력에 비해 방송 출연이 잦다”며 투덜거리지만 동반 출연도 꽤 즐기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이순철 해설위원의 개인 유튜브 채널 ‘순Fe’(순페이)에 이성곤이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우리는 야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는 부자 사이는 아니에요. 본인이 물어보면 그때 대답해주는 정도죠.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가 야구에 관해 깊숙하게 관여했으면 그것은 이순철의 야구지 나의 야구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만큼 야구를 사랑하고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바라보다 정 답답할 때만 문자 정도 주고받아요. 아직 대전에 마련한 집도 못 가봤는데, 올 시즌 대전에 내려가게 되면 어떻게 사는지 들러보려고요.(웃음)”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2021년 12월,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 폐암 진단을 받고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그렇게 떠났다. 그와 내가 사귄 지 10년째 되던 해이기도 했다. 나의 지난 한 해는 벽두부터 그의 병간호로 시작됐고, 소생과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떠나며 한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해가 희망 없이 밝았다.
장례를 치른 후, 간호를 하느라 1년 동안 함께 지냈던 그의 대전 집을 나와 다시 서울 내 집으로 돌아왔다. 환자를 돌보는 도중 간간이 들러 옷가지 등 필요한 것들을 챙겨가곤 했지만 그가 떠나고 나니 내 집 풍경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칫솔이나 면도기 등 내 집에 두었던 그의 소소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이제는 영원히 주인 잃은 것들, 그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 아프니까….
그와 나는 20년 전 어느 기업인 모임에서 만났다. 나도 그도 나름 단단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이혼한 상태였지만 10년을 서로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10년 동안 썸을 탔냐고? 그건 아니고 좋은 사람이니까, 좋아 보이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사귀는 사람이 있겠거니 서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12월 중순의 첫눈 내리던 날, 첫눈치고는 늦었고 첫눈치고는 제법 눈송이가 실했다. 모임이 끝난 후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연히도 그와 나의 차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것도 10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천년의 사랑이 시작되고
다소 어색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고개를 기울여 그가 먼저 나가도록 손짓을 해 보였다. 그는 또 그대로 내게 먼저 차를 빼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서로 그렇게 배려의 몸짓을 하다가 내가 먼저 차를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시선까지 느껴져 더 당황스러웠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내게, 무슨 일인지 잠시 지켜보던 그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별수 있나. 고장의 원인을 찾지 못한 데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니 내 차는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그가 나를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깜깜한 밤하늘에 흰 눈이 별처럼 쏟아졌다. 우리 만남의 서곡이자 팡파르처럼. 나란히 함께 차를 타고 오던 시간이 의외로 편안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천생연분이란 촌스럽고 진부한 표현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 이혼 후 10년 만에 본격적으로 만난 그 사람, 이제야말로 하늘이 점지해준 짝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와는 모든 것이 잘 통했고 모든 것이 좋았으니까. 가치관, 취미, 식성, 관심사, 대화는 물론,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몸까지 잘 맞았다고 솔직히 고백하리라. 국내는 물론이고 코로나 이전에는 자유로이 해외여행을 다녔고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섭렵했다. 전시, 공연, 독서 등 문화생활도 알뜰히 했다. 우리는 성인이 된 자녀들이 각자 둘씩 있었지만 모두 독립해서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녀 문제로 신경 쓸 일도 없이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관계였다. 느긋하게 나이 들어갔고 다가올 노후를 함께 설계하며 행복한 노년을 꿈꿨다.
사랑의 보험이 깨지고
그러던 그와의 화려했던 세상이 불과 10년 만에 흑백의 암전을 맞았고 그는 영원히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랑은 떠나도 삶은 지속되는 거라지만, 환갑도 한참 지난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가 없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우두망찰 길을 잃었다. 그가 없는 하늘 아래 나는 어떤 생을 살아야 할까. 혼자 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와 나는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성혼 선언문의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견고한 우리 사랑 한가운데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젊지 않은 나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미 노년의 문턱에 들어섰다. 그가 없는 나의 노년, 그 막막한 길을 홀로 걸어갈 수 있을까. 나는 요즘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다. 지난 1년간 그의 병간호로 쇠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사랑을 잃은 슬픔과 삶의 막막함 때문이리라. 홀로 늙어감,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이 든 여자의 사랑은 사랑을 하는 중에도 버겁다. 더구나 우리는 동갑이 아니었나. 여자로서, 그것도 젊지 않은 여자로서 같은 나이의 남자에게 위축되지 않는다면 약간은 거짓이리라. 내 경우 역시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관하게 문득문득 내 나이를 의식하곤 했다. 아니다,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젊은 여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와 나의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그와 만나는 동안엔 오히려 내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가 가고 나니 내 나이가 갑자기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 나는 혼자 남겨진 ‘나이 든 여자’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사랑은 보험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할 상대를 찾는다는 뜻이란다. 더는 다른 상대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성실한 보험 납세자처럼 꼬박꼬박 애정을 쏟고, 서로를 챙기다 보면 보험의 만기가 도래하듯 안온한 노후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들린다. 노년의 원만한 부부가 전형적인 그 모습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정성스레 부어가던 보험이 중간에 깨져버린 것 아닌가. 새로 들 가능성, 새로 들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없다. 탈 수 있는 보험금 없이 홀로 노후를 맞는 대열에 내가 동참한 것이다.
만날 사람을 다 만났다면
어느 종교계 방송에서 환갑이 지나면 인생에서 만날 사람은 다 만난 거라는 말을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산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이라 할 때 소위 반환점을 도는 나이가 되면 사람과의 새로운 인연은 더 이상 별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배우자가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미 맺어져 있는 인연을 일부러 끊어낼 필요는 없겠지만 혹여 기존 관계에서 자리가 비어 새 인연을 들인다 한들, 관계 맺기를 통한 성장판은 이미 닫혔다는 의미다. 마치 빠진 치아 자리에 임플란트나 틀니를 해 박는다 해도 치아 본연의 성질과는 무관하듯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성장하고 누리고 진화할 수 없다면 더는 살아도 산 게 아니란 의미일까. 물론 그건 아닐 테지. 이제 저 너머의 존재, 신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겠지.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는 알지 못했던, 알아도 제약적이며 한계가 있었던 관계의 장막을 거둬내고 영성에 눈을 떠야 한다는 의미겠지. 그래야만 성장을 지속할 수 있고, 실상은 그러한 성장이 참 성장이라는 의미일 테지. 세속적 희로애락 속에서 울고 웃던 나를 관찰자, 주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교정하고 회복되도록 하는 과정일 테지.
내 경우라면 그의 빈자리를 하나님 혹은 부처님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일 테니 교회나 성당, 절에 나가 위로를 구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그 얼마나 진부하고 맥 빠지는 소린가. 나는 지금 그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간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외로움에 애간장이 녹아내릴 지경인데, 눈에 그 존재가 보이지도 않고 귀에 그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 신을 통해 위로를 구하라는 말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공기를 뻐끔거리며 배를 채우라는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린다. 위로받기는 고사하고 왜 그를 내게서 빼앗아갔냐고, 이제 겨우 64세, 아직 죽음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나이의 그를, 자기 분야에서 드물게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를, 무엇보다 나와의 변함없는 애정으로 행복의 절정기를 누리던 그를 무슨 이유로 데려가야 했냐고 따지고 대들고 싶은 심정이다. 신도 질투를 하냐고, 그렇다면 신도 아니지 않냐고.
차라리 그와 혼인을 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그의 아내였다면 세상 떠난 그를 대신해 현실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가족 내의 위치에서 자리를 지키며 감당할 역할들로 사별의 아픔을 추스를 여지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껏’ 그의 연인이 아닌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그 상실감과 무력감만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전부다.
다시 빛을 찾아서
슬픔에 겨워 탈진하는 하루하루 중에도 간간이 빛을 느낄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평안과 내적 안온함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실은 나는 그가 떠난 이후 성당에 다닌다. 매주 수요일마다 교리 공부도 한다. 신앙심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고 그저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신앙이 없었지만 왠지 성당에 가면 영혼이나마 그가 내 옆에 앉아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지곤 한다.
올해로 나는 65세가 되었다. 10년 전 55세에 만난 그가 떠나고, 2022년의 출발선에 혼자 오도카니 섰다. 혼자라고 하지만 어쩌면 내 옆에는 신이 서 계실지도 모른다. 신은 무언의 침묵을 통해 나와 동행할 채비를 하고 계시는 걸까. 왜 신은 굳이 내 옆자리에 서려고 하시는지. 나는 그 사람 하나로 행복했건만. 하긴 연일 눈물로 어룽져 시야가 흐려진 내 눈엔 생의 완주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신의 손길에 의지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인도가 절실하다. 그러나 앞서 방송 내용처럼 나 또한 이제 더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반자를 구하고 싶지 않다. ‘사람 대신 신’이란 결단에서가 아니라 또다시 그 존재를 잃고 슬픔의 늪에 빠져 허둥대거나 흐느적거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생 한 번으로 족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과 그리움, 그것은 너무나 혹독하기에.
사람은 죽고 나면 살아 있었을 때 입었던 옷을 벗고 ‘수의’(壽衣)라 불리는 옷을 입는다. 부자의 수의나 가난한 사람의 수의나 수의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주머니가 없다’는 것이다. 주머니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넣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방, 우리 집, 내 업무 공간을 한번 살펴보자. 나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 이제 정리가 필요한 때다. 공간과 물건의 균형이 맞아야 삶의 질서가 잡힌다.
못 버리는 것도 병이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물건을 구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넘쳐나는 그 물건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물건에 부딪혀 다치고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보면서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 필요해서 구입한 물건은 어느새 잡동사니가 되고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지만 갖고 있던 물건을 버리기는 그리 쉽지 않다. ‘정리정돈 좀 해라.’ 누구나 자랄 때 많이 들었던 말이다. 정리와 정돈은 어떻게 다를까? ‘정리’는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이고, ‘정돈’은 필요한 물건을 사용하기 편리하게 제자리를 만들어주고 사용 후 그 자리에 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정리와 정돈 중 어느 것을 더 어려워할까? 물론 둘 다 어렵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정리수납 전문가라는 직업을 창직했고 약 12만 명의 정리수납 전문가를 양성했다.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못 버리는 사람의 유형도 다양하다. 바빠서 정리할 시간이 없는 현실도피형, 옛 추억에 얽매여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과거집착형, 버리면 꼭 쓸 것 같은 미래불안형. 이유도 많고 핑계도 많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과정에서 시기별로 많은 물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지고 있던 물건 중 그 쓰임이 다 된 것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더 필요한 물건도 있다. 이제 이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버림, 버림의 자유!
가지고 있는 물건과는 추억이라는 단단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 쉽게 끊어내기 어렵다. 하지만 음식을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으면 변비에 걸리듯, 우리 집도 물건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는다면 악취가 나고 썩는 공간이 생길 것이다. 옷장, 신발장, 냉동실 등 모든 공간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버리고 건강한 공간을 만들어보자.
운동을 하기 전에 준비가 필요한 것처럼, 물건을 정리하는 것도 준비가 필요하다. 이것을 ‘노전 정리’라고 한다. 하루아침에 정리하는 습관이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일 조금씩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듯 정리 습관을 키워야 한다. 정리 습관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맞는, 실천할 수 있는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실천해보자.
버리는 것도 전략과 습관이 필요하다
❶ 실천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 정하기 3년 동안 안 입은 옷 버리기, 사용하는 그릇의 양 정하기, 맞지 않는 신발(큰 것, 작은 것, 낡은 것), 소장 가치가 없거나 3년 동안 읽지 않은 책 버리기
❷ 가지고 있을 물건의 양 정하기 같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2~3장만 남긴다. 비슷한 티셔츠는 5~6장으로 줄인다. 먹지 않는 음식과 식재료 나누기
❸ 매일 하나씩 버리기 비움 상자 만들기, 매일 하나씩 비움 상자에 넣기, 일주일 동안 사용하지 않은 비움 상자의 물건 버리기
채움, 바르게 채움!
아침에 일어나 칫솔을 찾지 못해 양치질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휴대폰이나 차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찾기 일쑤다. 잠결에도 칫솔은 찾는데 휴대폰이나 차키를 못 찾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놓는 장소가 정해져 있고 없고의 차이다. 이사를 가고 여행을 가고, 하물며 외국을 가도 우리는 칫솔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이제 물건을 어디에 놓았는지 기억하려 하지 말고 지정된 장소를 정해주면 된다. 그리고 정해진 장소에 이름표를 붙여줘 누구나 찾기 쉽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옷장 서랍, 주방 서랍, 냉동실 등 모든 공간은 채워져 있다. 너무 많이 채워 간혹 서랍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모든 공간을 그냥 채우지 말고 바르게 채워보자.
나눔, 나눔의 행복!
읽지 않는 책과 입지 않는 옷은 결국 쓰레기와 같다. 하지만 그것을 집 밖으로 내놓기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물건이 되고 공유경제가 발생한다. 나에게는 가치 없는 물건이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면 그 가치는 높아진다. 나에게 가치 있는 물건인지 아니면 필요한 사람에게 더 가치 있는 물건인지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아깝고, 다시 쓸 것 같고, 이런 생각보다 이 물건의 새로운 주인을 찾아줌으로써 물건에게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는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 빈 몸으로 태어나 수의 한 벌이면 우리 인생 족하지 않을까 싶다.
장소를 정하고 바르게 채우기
❶ 같거나 비슷한 것끼리 모아 장소를 정한다 손톱깎이 세트는 가족 모두가 사용하기 쉽게 거실 첫 번째 서랍
❷ 서랍에 이름표를 붙인다 건전지/구급약품 상자 등
❸ 서랍은 구획을 나누어 사용한다 큰 서랍은 통으로 사용하면 물건이 섞이기 쉽다. 바구니, 종이상자, 칸막이 등을 활용해 구획을 나눠 사용한다.
❹ 세로 수납하기 티셔츠와 같이 색깔, 크기, 디자인이 다른 경우 쌓지 말고 세로로 수납한다. 수건처럼 용도가 같은 것은 쌓기 수납을 해도 좋다. 크기와 디자인이 다른 접시는 접시꽂이를 이용해 세로로 수납한다.
❺ 수납의 기본 원칙 •원터치의 법칙 : 한 번에 꺼내고 넣을 수 있게 한다. •총량 규제의 법칙 : 보관하는 물건의 양이 80%를 넘지 않아야 한다. •라벨링의 원칙 : 이름표를 붙여 보관된 물건을 찾기 쉽게 한다.
배우 문희경(56)은 유난히 빨간색이 잘 어울린다. 그녀에게서는 나이를 잊은 사랑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당차고 열정적이다. 문희경의 에너지는 강철 추위도 꺾지 못할 정도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동백꽃이 떠올랐다. 문희경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이맘때쯤 활짝 피는 꽃. 지난해 ‘대세’로 떠오른 그녀는 올해도 기지개를 활짝 켰다.
문희경의 2021년은 찬란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에 이어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이하 ‘쇼윈도’)에 출연했고, 티빙(TVING) 웹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도 특별출연했다. 연이은 화제작 출연으로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녀는 2월에는 앨범을 발매하며 가수로서 못 다 이룬 꿈도 이뤘다. 문희경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행복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재작년에도 바빴지만, 작년에도 정신없이 일들이 휘몰아쳤죠. 올해 더 많은 일을 할 것 같아요. 한마디로 2021년은 올해 더 열심히 하라고 준비한 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체력은 늘 유지하고 있고, 즐기면서 일을 하는 편이거든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너지를 받는 게 좋아요. 현장 체질인가 봐요. 집에 있는 것보다 편안해요.”
‘쇼윈도’로 새로운 배역의 갈증 해소
회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시청률도 상승 중인 드라마 ‘쇼윈도’. 문희경은 주요 역할로 출연 중이다. 그녀가 맡은 김강임은 패션 기업의 회장이다. 한선주(송윤아 분)의 엄마이기도 하다. 즉 문희경은 여성 회장이자 엄마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쇼윈도’와 김강임에 대해 “하고 싶었던 작품, 역할”이라고 강조하며 “그래서 굉장히 즐겁게 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쇼윈도’ 제작진은 문희경의 캐스팅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녀가 송윤아의 엄마로 보일지 우려했다. 다행히도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제작사에서 제가 송윤아 엄마를 하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해서 망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과감히 전화했어요. ‘나 김강임 역할 하고 싶다, 나를 대체할 배우 없을 것이다’라고 어필했죠. 제작진분들이 저를 직접 만나본 후 고민을 떨치고 저를 과감히 캐스팅했죠. 연기를 해보니까 저하고 송윤아는 진짜 엄마하고 딸이 되더라고요. 저는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어필하는 편이에요.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처럼 문희경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는다. ‘쇼윈도’에 앞서 출연한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랬다. 석형(김대명 분)의 엄마로 출연한 문희경은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나왔다 하면 통통 튀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화려한 스타일링도 한몫했다.
“모든 배우가 신원호 감독님, 이우정 작가님 작품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어느 날 작가님이 저를 원하신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진짜 소리 지를 정도로 좋았어요. 그래서 덥석 물었죠.(웃음) 저나 김갑수 선배님, 김해숙 선배님은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좋은 배우들, 스태프들과 같이 작업하는 것을 즐거워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좋은 기억이고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문희경은 부유한 상류층 역할을 많이 맡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사모님이었고, ‘쇼윈도’에서는 회장님이었다. 그녀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사모님이지만 아들만 바라보는 평범한 엄마였고, ‘쇼윈도’는 재벌 회장 역할이다”라고 차이점을 짚었다. 문희경은 그동안 사모님 역을 많이 맡은 것보다 ‘누군가의 엄마’에 그친 것에 아쉬움이 더 커 보였다.
“늘 배우로서 갈증이 있었죠. 살림하고 누군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쇼윈도’의 김강임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룹 회장이고 여성 경연인이잖아요. 그동안 부잣집 사모님은 많이 연기했지만 경영인은 처음이었어요. 엄마보다는 일하는 여성이죠. 그래서 스트레스가 좀 풀려요.”
사모님 역할을 주로 맡다 보니 캐릭터가 철부지거나 얄미운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인생작으로 꼽는 2010년 SBS 드라마 ‘자이언트’ 때부터 이어져온 이미지 같다. 극 중 계모 오남숙 역을 맡은 문희경은 악녀 연기로 큰 사랑을 받았다. 카카오TV 웹드라마 ‘며느라기’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평범한 시어머니로 분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더 얄미웠다.
“사실 저도 착한 역할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못된 역할, 카리스마 있는 역할만 기억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며느라기’ 역할은 악역도 아니고 가정밖에 모르는 현실적인 시어머니죠. 착하고 좋은 것 같으면서도 며느리들에게 시킬 것은 다 시키니까 욕을 먹더라고요. 이게 욕 먹을 일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문희경은 “포스 있고, 예민할 것 같고, 못될 것 같다”는 오해를 받는다. 때문에 실제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정반대 이미지에 깜짝 놀란다고. 귀엽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는 그냥 역할에 충실할 뿐이에요. 배우는 맡은 역할을 100% 해내야 하는 게 숙명이죠. 배우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요. 빨간색, 검은색 등 다양한 컬러를 입힐 수 있어야죠.”
출연작
드라마 SBS ‘자이언트’, KBS2 ‘감격시대’, JTBC ‘귀부인’, JTBC ‘품위있는 그녀’, MBC ‘슬플 때 사랑한다’, MBN ‘우아한 가’,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카카오TV ‘며느라기’,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 등
영화 ‘좋지 아니한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간신’, ‘글로리데이’, ‘인어전설’, ‘어멍’ 등
가족, 그리고 제주
실제 엄마로서의 문희경은 어떨까. 그녀는 슬하에 작곡 공부를 하는 딸이 있다. 문희경에게 딸은 제일 친한 친구고, 둘도 없는 존재다. 딸 얘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 그녀. 그러다가 이내 언젠가 딸이 시집 갈 때를 떠올리고는 “어떻게 보내야 하나”며 울컥하기도 했다.
“딸은 제 인생의 원동력이에요.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경각심을 줘요. 엄마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더 느끼고 열심히 하려고 하죠. 딸을 낳은 것은 축복이고,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에요. 딸은 소통이 잘되고 친구 같아요. 걔가 더 언니 같아요. 저를 막 혼내요.(웃음) 결혼은 안 하겠대요. 친구들과 같이 실버타운 들어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너한테서 해방되고 싶다고 하고요. 그런데 막상 걔를 보내면 눈물 날 것 같아요.”
도시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녀의 고향은 제주도다.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문희경을 포함한 여덟 남매는 아옹다옹 살았다. 중산층이었지만 가족이 워낙 많다 보니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제주도는 남아 선호사상이 심했어요. 아들 두 명을 낳으려다 보니 딸 여섯 명을 낳게 된 거예요. 그래서 8남매가 됐죠. 저는 다섯째고요. 부모님은 과수원도 팔며 자식들을 공부시킨, 자식들을 위해 사신 분들이죠. 형제들이 공부는 잘했어요. 선생님, 대학교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공부를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공부 잘하면 시키고, 못하면 안 시킨다고 하셨거든요.”
문희경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남몰래 가수라는 꿈을 키웠기 때문. 어린 시절부터 친척들 앞에서 빼지 않고 노래를 부르던 소녀는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봤다. 나이 들면서 가수에 대한 꿈은 확고해졌고, 꿈의 실현을 위해서는 제주도를 벗어나 서울로 가야만 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님이 서울행을 반대하셨어요. 당시 집안이 좀 어려웠기 때문에 제주교대에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저는 서울에 가야만 했어요. 그래야 대학가요제든지 강변가요제든지 나갈 수 있으니까요. 서울 안 보내주면 죽어버리겠다고 데모도 하고 그랬죠. 결국 대학에 합격하니까 보내주시더라고요.”
마침내 문희경은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고,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렸다. 1986년 ‘제1회 샹송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쇼86’에 출연했다. 이어 1987년 ‘강변가요제’에서는 ‘그리움은 빗물처럼’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대학에 가고 상도 받으면서 제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것 같았어요. TV에도 나오니까 부모님도 ‘어릴 때부터 노래 좋아하더니 하네, 가수 할 수 있으면 해라’라고 응원해주셨죠.”
그렇게 벗어난 제주도지만, 고향은 고향인가 보다. 문희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도, 애정도 커졌다.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인어전설’, ‘어멍’에 출연하기도. 배우로 제주를 찾아 해녀 연기를 하기까지, 감회가 남달랐을 듯싶다.
“내 고향 제주는 정신적 지주죠. 내게 배우로서 가수로서 감성적인 부분을 줬다고 할까요.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기도 하죠. ‘내가 어떻게 고향을 떠나왔는데,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그런 마음이 강했어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그렇게 벗어나고만 싶었는데, 나이 들면서는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귀향 본능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에는 내려가서 살 거예요. 촬영이 있을 때만 서울로 올라오고, 귤 농사도 하고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25년 만에 다시 가수
앞서 얘기했듯이 문희경은 1987년 강변가요제 대상 출신이다. 가수가 되는 지름길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가수 인생은 잘 풀리지 못했다. 문희경은 1989년에 1집 ‘갈 곳 잃은 연정’, 1994년에 2집 ‘예전 같지 않은 너’를 발표하며 발라드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고 결국 뮤지컬 배우로 전향했다. 첫 작품은 1996년 ‘노트르담의 꼽추’ 에스메랄다 역으로 기록된다.
“문희경이라는 사람도 점점 잊혀갔죠. 가수는 내 길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서 서울에 왔는데 아닌 길을 억지로 갈 수는 없잖아요. 과감히 포기하고 뮤지컬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는 뮤지컬이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미래도 안 보이고, 암흑 같은 시기였죠. 하루하루 버티면서 그날그날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마침내 문희경은 2007년 어둠을 벗어나게 됐다. 연극 무대에 선 그녀를 보고 정윤철 감독이 러브콜을 보내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 출연했다. 문희경은 제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녀는 정윤철 감독을 ‘은인’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린 문희경. 오히려 가수의 꿈에 가까워지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2015년 문희경은 MBC ‘복면가왕’ 출연으로 노래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후 2016년에는 JTBC ‘힙합의 민족’에 출연했다. 딕션이 좋은 그녀는 놀라운 랩 실력을 보여주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2020년에는 MBN ‘보이스트롯’에 출연해 트로트 실력을 뽐냈다. 아름다운 음색으로 최종 5위를 거머쥐었다.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문희경은 결국 다시 가수가 됐다. 지난해 2월 트로트 정규 앨범 ‘금사빠 은사빠’를 발매한 것. 가수를 포기하고 배우가 된 지 꼭 25년 만이다. 그리고 지난 12월에는 ‘보령에 가자’, ‘서해랑길에서’, ‘대천에 가자’ 총 3곡을 발매했다.
“제가 ‘보이스트롯’을 하면서 정의송 선생님 노래를 세 곡이나 했어요. 그 인연으로 선생님께서 고맙다고 곡을 선물로 주시면서 앨범을 내게 됐죠. 제가 다시 가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생각도 없었어요. 악착같이 가수를 열망할 때는 정말 안 됐잖아요. 다 내려놓고 노래를 즐기면서 했더니 가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예요. 지금은 인사할 때 ‘배우 겸 가수 문희경’이라고 해요.”
정리해보면 문희경은 ‘가수→뮤지컬배우→배우→가수 겸 배우’의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노래 부를 때보다 연기할 때가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연기를 할수록 깊이와 재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노래 잘하는 배우’로 봐주기를 바랐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제주도 꼬마는 50여 년이 흐른 뒤, 자신이 배우 겸 가수가 될 줄 알았을까.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그녀의 메시지가 더욱 특별하게 와 닿는다.
“결국 돌고 돌아 가수도 하고, 뿌듯하고 만족한 삶이죠.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람 일은 몰라요. 그러니까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지금은 백세인생 시대이기 때문에 나이가 있다고 망설이거나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꿈이 있다면, 꿈을 꾸라고 하고 싶어요.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잖아요.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면, 삶에 긴장감이 생기고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꿈을 꾸고, 도전하세요!”
[브라보 마이 러브]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30년 만에 그를 만났다. 나는 새내기, 그는 대학 3학년이었으니. 이렇다 할 로맨스는 없었다. 손 정도는 잡았을 테지만 입맞춤을 해본 기억은 없다. 하기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고, 헤어지기 전 어느 가을 춘천에 한 번 같이 간 게 전부다. 이 말도 우습다. 만난 적이 있어야 헤어질 거 아닌가. 끌어모아 봤댔자 주머니 속 동전 몇 푼처럼 그와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궁색하기만 할 뿐.
그럼에도 나는 그를 대상으로 ‘만약에’ 게임을 해볼 때가 있다. 만약에 그와 사귐을 이어갔더라면, 그래서 만약에 둘이 맺어졌더라면, 만약에 그와 함께 황혼을 맞았더라면…. 밋밋하나마 평범한 결혼생활을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지금 나는 이혼녀가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근거 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섬세한 꽃봉오리를 터치할 때처럼 여린 여심을 건드릴 줄 아는 남자는 아니었기에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엔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소위 ‘나쁜 남자’와 대칭점에 서 있는 전형적인 ‘착한 남자’였다. 착한 여자, 착한 남자의 치명적인 결함은 조미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영양식처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니. 더구나 그는 대화거리 없는 공대생이었으니.
2013년, 이른바 황혼이혼과 함께 호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 나이는 딱 50세. 그는 52세가 되었을 테지. 그해 11월 말경, 대학 후배로부터 크리스마스와 송구영신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전공이 달라 잘 아는 후배는 아니었지만, 어느 모임이든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소위 총대를 메게 마련인지라 그 후배의 역할도 그랬던 것이다. 게다가 본인 소유의 장소까지 있다니 날짜만 정해지면 되는 일이라 모두들 ‘알았다, 가겠다’란 응답을 했으리라.
우리 모임은 서울의 같은 지역, 같은 이름의 Y고교와 Y여고를 나온 사람 중에서 남자는 S대, 여자는 E여대 출신으로 구성된 모임이다. 그래서 이름도 ‘Y써클’이었다. 듣기에 따라 자발적이며 노골적인 짝짓기 모임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아닌 게 아니라 몇 쌍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고 지금까지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 그건 지금 시각이고 시국 논쟁과 독서 토론 등 설익으면 설익은 대로 우리는 나름 진지했고 또한 그 나이 그대로 풋풋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 따라, 인연 따라 만남은 지지부진해졌고, 그날 연말 모임에 나온 멤버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기수라 할 수 있겠다.
오랜만의 해후라 서먹하기는 다들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이혼을 한 데다 외국 생활의 이물감까지 겹쳐 어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와 호기심에 마음이 들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어둑한 실내에 적응이 되어 잠시 후 입구로 들어서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키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몸피, 머리도 벗어지지 않았고, 배도 나오지 않은 그, 젊었을 때 그대로 웃는 인상의 그는 30년이 아닌, 3년도 아닌, 3개월 만에, 아니 고작 3일 만에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한두 번밖에 입지 않고 옷장에 걸어둔 옷처럼 시간의 고운 먼지만 앉은 사람 같아 보였다. 순한 성품대로, 좋은 머리대로, 얽힘 없는 폭신한 실뭉치처럼 인생이 순탄하게 풀려나가면 저런 모습일까.
그럼 나는? 대학 졸업 후 미팅으로 만난 남편과 1년을 사귀는 동안 고양이 발톱처럼 얌전히 감추고 있던 폭력성이 결혼 일주일 만에 정체를 드러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사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아이가 들어섰고, 결혼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이민길에 올랐다. 홍수에 떠밀리듯 주변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는 와중에 남편의 폭력은 일상이 되어갔다. 그렇게 내가 롤러코스터에 올라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그는 유유자적 회전목마를 타고 있었던가 싶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모임의 남녀 선후배들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썸 정도를 탄 것인데, 둘이 뜨거운 사이였고 그와 헤어진 후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해괴한 소문까지 났었다. 그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렸을 때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사실이 아닐 땐 따따부따 따지기보다 그저 웃어넘기는 버릇 그대로.
물론 그런 입방아에 오를 만한 ‘혐의’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 나는 20대 특유의 실존적 번민에 휩싸여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지 등 근원적 물음의 답을 찾아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간이역처럼 나타났고, 지독한 정체성 상실의 시절을 통과하며 그와의 만남이 그렇게 와전되었던 것이다.
돌아가며 간단히 각자의 근황을 말한 뒤엔 얕은 물웅덩이처럼 이리 움푹, 저리 움푹 대화의 웅덩이를 만들며 20여 명이 앉은 자리의 연을 따라 시간을 보냈고, 분위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자정 무렵까지 이어졌다. 귀갓길에 나섰을 땐 얼음 박힌 것 같진 않았지만 12월 중순의 찬 공기가 오싹 끼쳐오며 와인 한잔의 취기마저 몰아냈다. 집 방향에 따라 그 자리에서, 혹은 길을 건너서, 아예 한두 블록 멀찍이 떨어져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택시를 잡아 타고 꼬리등을 인사처럼 깜박이며 제각기 사라져갔다.
공교롭게도 그와 나의 방향은 같았기에 그가 함께 택시를 타자고 했고, 어쩌다 보니 그와 나, 둘만 끝까지 택시를 잡지 못한 채 덩그러니 길 한가운데 남게 되었다. 묘한 느낌이 든 것은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가는 시추에이션이라니!
마침내 빈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섰고, 그가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내가 나중에 탔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남짓 남겨두고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남녀가 30년 만에 해후를 한 후, 조붓한 공간에서 그것도 몸이 닿을락 말락 서로가 서로를 옆에 두고 앉아 있다. 지나친 상투성만 뺀다면 로맨틱한 설정이 아닌가. 더구나 택시 운전사는 오늘 만남의 의미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우리 시대의 발라드로 분위기를 잡아주고 있으니.
그런데 정작 그와 나는 어쩌다 우연히 합석한 사람들처럼, “그간 잘 지냈니?” “네… 잘 지내셨어요?” “응, 나야 뭐. 고생 많았겠구나. 잘 살아야 한다. 내가 도울 일이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럼 잘 가라.” 우리 동네 큰길가에 나를 내려놓기 전 20여 분간 이런 의례적인 말만 나누었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그게 다가 아니면? 가정을 가진 그와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와 나는 두 번 더 만났다. 역시 같은 모임을 통해서였다. 이후 모임의 발동이 꺼져 버렸고 더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8년 전 그날의 모임이 떠오른다. 롤러코스터에 오르지 않고 그와 회전목마를 탔더라면 스릴과 재미는 없었겠지만 이따금 마주 웃으며 생의 무난한 동반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내 사람이 될 이유가 딱히 없었듯이 되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 그 따분하고 ‘안전빵’인 회전목마에 기꺼이 올랐을까. 그때의 나는 회전목마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지 않았나. 평생을 함께 돌고 있을 그의 ‘회전목마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가급적 정직하게!’ 귀농 농부 박인성(48, ‘준삼이네 작은농장’ 운영)의 모토다. 아귀다툼과 꿍꿍이로 소란한 속세에서 삶을 통째 정직성으로 채우긴 어렵다. 그의 뜻인즉 농사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짓고 싶다는 것이다. 과욕과 과속을 자제해서.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다시피 농사란 믿기 어려운 사업이다. 변수와 장벽이 많아서다. 난다 긴다 하는 재간꾼들도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초보 농부에겐 더 버겁다. 희한한 방식으로 치르는 고행에 가깝다.
올해로 귀농 5년 차. 큰 산은 몰라도 나직한 산정쯤엔 올랐을 법한 이력이다. 그러나 박인성은 아직 산 중턱에서 비지땀을 쏟는다. 이마저 장족의 발전이다. 초기엔 산 아래를 맴돌며 물에 빠진 듯 허우적거렸다. 이는 귀농 준비가 부족한 탓? 아니다. 그는 준비 자체가 성공인 양 면밀하게 준비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귀농 교육을 받았으며, 농사 실습도 해뒀다. 천안에 있는 회사를 퇴직하기 2년 전부터 치밀한 대비를 했던 것. 그럼에도 뭐 하나 술술 풀리는 게 없더란다. 귀농, 이건 참 호락호락하지 않다. 만만하게 보고 덤볐다가는 큰코다친다.
박인성은 고추농사를 한다. 관행 농업에 비해 한층 난해한 유기농법으로. 유기농이야말로 정직한 농사의 첩경이라고 그는 믿는다. 농약으로 칵테일을 하다시피 한 생산물을 팔아먹는 건 도리와 사리에 어긋난다고 본다. 유기농을 하더라도 딱 부러지게 하고 싶다. 대충 술렁술렁 할 경우엔 신농씨(神農氏, 농사의 신)의 저주를 면치 못할 거라는 신념을 가진 양 충실을 기해온 것 같다. 그런데 1500평 고추밭으로 거둔 5년간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처음 두 해 동안은 매출이 제로였다. 기술력도 부족했지만 판로가 막막했다. 3년 차엔 500만 원, 4년 차엔 25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5년 차인 올해엔 1000만 원을 넘어서 이제야 서광이 비치는가 싶다.”
통과 의례적 수련기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저조한 실적 같다. 원인이 무엇에 있다고 보나?
“생산과 마케팅 면에서 부족했던 나의 책임이 우선 크다. 유기농산물을 불신하는 시장의 경향도 요인이다. 이는 과거 한때 일부 유기농 농가들이 장난을 친 탓이다. 품질의 차별화는 별로이면서 비싼 가격을 받았기 때문이지. 요즘은 일반 농산물과 가격 차가 크지 않다. 그러나 외면한다. 1000~2000원 차이에도 민감한 게 소비자더라.”
많고 많은 작물 가운데 고추를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대표적인 환금성 작물이기 때문에 호감을 가졌다. 고추농사가 괜찮다는 귀농 교육기관의 홍보를 고려한 선택이기도 했다.”
기관의 홍보와 실상이 일치하지 않은 셈인가?
“1000평 규모 고추농사면 대략 5000근의 건고추가 나온다고 했다. 근당 2만 원을 친다면 연간 매출 1억 원이 된다고, 충분히 먹고살 만하다고 가르쳤다. 이는 상당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나친 과장에 불과했다. 관의 홍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일 아니다. 냉엄한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결국 작목 선택의 오류?
“후회가 없지 않았지만 다 지나간 일이다. 고추든 뭐든 농사치고 어렵지 않은 게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주변 농가들의 실상을 통해서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성공 사례에서 배우는 게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매체에 등장하는 이른바 성공 사례 중 과연 몇이나 진실일까? 팩트를 담은 정보에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 본다. 게다가 남의 성공 사례를 내게 적용한다고 승산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얘기 들어봤나? ‘농민이 백 명이면 농법도 백 가지다.’ 농민 개개인의 실력은 물론이고, 지역의 기후와 토질 등 환경 조건에 따라 최적화된 방식을 구사해야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고추보다 매운 근성으로
농사에 정답이 없다는 것. 농사라는 바다에 순탄한 항로는 없다는 것. 귀농 5년간 그가 배운 게 이렇다. 딴엔 사력을 다해 몸과 마음을 쏟아 고추농사와 맞붙어 얻은 결론치고는 다소 허무하다. 하지만 고진감래가 인생의 속성인 바에야 과히 낙심할 게 없다. 그는 그리 여기는 것 같다. 오히려 농업의 현실을 또렷이 인식할 수 있게 돼 값진 경험으로 삼는다. 이제 관점을 쇄신하면 되는 거다.
그렇다면 무엇을 쇄신할 것인가. 일단은 SNS를 통한 마케팅 활동을 강화할 방침이다. 더 중요한 건 지난 5년간 흠뻑 두들겨 맞은 듯 얼얼한 정신과 구겨진 자존심을 부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뚝심과 고집으로 밀고 온 5년간의 근면과 근로의 행진을 여기서 멈추지 않는 데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다시 말해 박인성은 농사로 끝내 성공하고 싶다. 고추보다 매운 근성을 발동해 고추농사에 가일층 피땀을 쏟을 참이다. 그럴 만한 자신감도 얻었단다.
“농사에 서툴렀던 초기엔 고추 품질에 문제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5년 차인 올가을엔 기대치 이상의 품질을 보유한 고추를 생산했다. 이쯤이면 됐다는 판단을 내리고 만족스러웠다. 여느 해와 다른 방법을 동원한 덕분이다.”
어떤 방법이지?
“퇴비를 직접 만들어 농약 대신 투입하는 게 유기농인데 이를 심화했다. 바닷물엔 유익한 미량원소가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여기에 착안, 이를테면 아미노산을 보충해주기 위해 생선 국물이나 새우가루 등을 투입했다. 그러자 생육과 맛, 결실이 좋아지더라.”
남들의 객관적 평가는 어떤가?
“유기농 고추를 한다고 쓴웃음을 짓던 마을분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얼마 전엔 우리 농장의 건고추를 사간 어르신도 있었다. 그분 역시 팔기 위한 고추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식구들에겐 우리 농장의 고추를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
햐! 놀라운 ‘인증’이다. 그런데 당신의 블로그가 썰렁하더라. SNS의 다이내믹한 힘을 아직 모르시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귀농인은 농사에 5할, 블로그에 5할, 이렇게 에너지를 배분하는 전략적 실천으로 판매에 날개를 달았던데….
“그 문제를 요즘에야 고민한다. 그간 농사일에 정신 팔려 블로그에 신경 쓰지 못했다. 채워 넣을 콘텐츠도 막연했고. 블로그 마케팅의 효과를 알면서도 방치했던 거다. 쇄신할 참이다.”
그의 농장은 충북 보은군 외진 산속에 있다. 2년여 동안 고르고 골라 마련한 터전이다. 임야 1만 평을 사들여 깎고 밀고 다듬어 만들어낸 농장이다. 산 절반, 하늘 절반인 산골짝이다. 풍경은 순수하고 분위기는 아늑하다. 야생의 나무들과 골짜기와 능선이 보기 좋게 어우러졌다. 오두막 하나 짓고 새소리, 바람 소리, 피고 지는 꽃들, 그 덧없는 것들을 벗 삼아 살기 딱 좋은 산중이다.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을까?
“충북권에 나온 임야 매물 거의 전부를 2년간 섭렵했다. 떼어본 매물의 등기부등본이 박스로 두 개였다. 자동차 기름값으로 2000만 원쯤 썼고.(웃음) 임야 매입이 쉽지 않은 거다. 좋다고 해 확인해보면 토지 이용률이 현저하게 낮거나 개발제한에 묶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도로에 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맹지인 산도 흔했고. 이래저래 열심히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 땅을 용케 만난 셈이다.”
귀농 목적 달성한 것과 다름없어
박인성은 농장의 적막 속에서 혼자 산다. 아내와 자녀 둘은 청주에 있다. 이래서야 무슨 재미? 그러나 그는 고독이나 불편에 아랑곳할 겨를이 없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말이다. 농사 수익은 저조하고, 매달 갚아야 할 대출이자 부담에도 폭폭 한숨이 나오지만 여하튼 질주해야만 하는 거다. 비유컨대 그는 폭풍의 난바다를 항해 중이다. 당장 멈춰라, 아무리 명령해도 멈추지 않는 거친 파도 너울거리는 바다를. 눈물인들 아니 흘렀으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엉엉 목 놓아 울곤 했다. 여긴 맘 놓고 울 수 있는 산속이지 않은가?(웃음) 이마저 나쁜 기억은 아니다. 나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이건 귀농으로 얻은 선물에 가까운 것 같다.”
농사의 애환이 내면을 북돋우는 선한 기회였다? 그렇더라도 5년 내내 부부가 떨어져 살다니. 이게 왜 이런가?
“아내는 애초 귀농을 격하게 반대했다. 좀 더 나중에 귀농해도 늦지 않다는 게 아내의 의견이었다. 그걸 묵살하고 내가 밀어붙였다.”
세상의 아내 대부분이 귀농엔 일단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머리를 쥐어짠 회유와 설득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겨우 남편의 뜻이 관철되는 경우가 흔하더라.
“부부가 함께 귀농하는 게 두말할 것 없이 이상적이다. 나는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조용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농장을 성실하게 꾸려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고 공감하겠지, 그 생각 하나를 품고 농장에 홀로 묻혀 살았다. 아내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1년쯤 지나서야 처음 농장을 방문한 아내에게서 반응이 왔다. 막막하고 캄캄했던 임야를 번듯한 농장으로 변모시켰다며 몹시 놀라더라고. 존경스럽다는 말까지 해 감격스러웠다.”
비로소 아내의 마음을 사게 된 셈이었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떨어져 사는 건 왜지?
“아이들이 아직 미성년이다. 아내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부부가 동행하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을 더 가져야 한다. 하지만 간간이 농장에 와서 일손을 거드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귀농의 목적을 이미 달성한 것과 다름없기에.”
귀농 목적이 아내와의 동행이라는 건가?
“내가 아내를 사랑해 결혼했다. 그런데 중년에 이르러 부부 사이에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더라고. 이걸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귀농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부부가 자연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오순도순 해로하는 삶. 이게 내게는 간절한 꿈이자 유토피아다. 아직은 농사 상황이 열악하지만 꿈의 절반은 이미 이룬 셈이다.”
농사로 고생하는 그의 손은 두꺼비 등딱지처럼 울퉁불퉁하다. 잠자리조차 편치 않다. 창고에 텐트를 치고 집 삼아 사니까. 그러나 끄떡없다. 농사에선 코피를 쏟았을망정 ‘간절한 꿈’이 이루어지고 있어서다.
박인성 씨가 주는 귀촌 Tip
•귀농은 실로 가시밭길이다. 충분히 숙고한 뒤 결정하자.
•지자체마다 귀농정책이나 정착지원금 규모가 다르다. 미리 세밀하게 파악하자.
•가급적 귀농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는 게 유리하다. 재배 기술과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어서다.
•귀농 전에, 또는 귀농 초기에 남의 농장에서 미리 농사 경험을 쌓아라. 물정을 모르고 농사에 돌입하면 시행착오가 더 많다.
•집이나 농토 마련에 무리한 자금 동원은 금물이다. 자금을 비축하지 않으면 차후 곤경에 빠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