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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관답사기]김유정 문학관 “김유정의 동백꽃은 ‘노란색’입니다”
- 요즘 사람들은 ‘김유정’ 하면 아역배우에서 여배우로 잘 자란 김유정을 생각하겠지만 시니어 세대는 단연 소설 과 의 작가 김유정(1908~1937)을 떠올린다. 그 김유정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믿겠는가? 경춘선 김유정역에 내려 유정반점과 유정부동산을 지나 오른편에 김유정우체국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김유정문학촌이 나타난다. 여인의 사랑 대신 만인의 사랑을 지금까지도 흠뻑 받고 있는 작가 김유정이 지금 그곳에 살아 있다. 강원도 실레마을에 김유정이 살고 있다 김유정역에 내려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김유정문학촌이 자리하고 있는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은 과거에 ‘실레마을’로 불리던 작은 마을로 김유정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떡시루 같다 해서 강원도 말로 ‘떡시루’를 뜻하는 ‘실레’가 마을 이름으로 불렸다. 8만 평 규모의 문학촌 안에는 복원된 김유정의 생가터는 물론 소설 속 배경이 됐던 장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무엇보다 이 동네가 재밌는 것은 모든 것이 김유정으로 통한다는 점. 전국을 통틀어 사람 이름으로 지어진 역은 김유정역이 유일하다. 또한 ‘봄·봄’, ‘이쁜네’ 등 동네 안의 상점, 음식점, 소소하게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김유정과 연관됐다. 작고 조용했던 실레마을은 김유정과 그의 소설들이 살아 숨 쉬는 풍요의 공간이 됐다. 작가들을 기리는 대부분의 공간은 ‘문학관’이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문학촌’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이곳에 김유정이 남긴 유품은 따로 없다. 휘문고보 시절부터 절친으로 알려진 작가 안회남(1909~?)이 월북하면서 김유정의 유품도 함께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작가의 물건이 없기 때문에 생가터를 복원하고 체험관을 열어 일종의 김유정 테마공원으로 조성했다. 김유정의 동백은 노란색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의 중에서 지금까지 김유정의 소설 에 나오는 동백꽃이 흔히 아는 빨간색이라고 생각했다면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동백꽃 하면 익히 남쪽에 피는 꽃만 연상해왔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색과 형태를 가진 동백꽃이었다. 강원도 사람들은 노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아니면 산동백으로 불렀다. 김유정이 말하는 동백꽃은 노란색 별꽃같이 생긴 것이 촘촘하게 핀 것이다. 언뜻 보면 산수유처럼 생겼는데 꽃 향을 맡아보면 생강 냄새가 난다. 김유정의 동백나무가 궁금하면 동백꽃이 피는 3월과 4월에 꼭 김유정 문학촌에 가보시라. ‘한창 피어 퍼드러진’ 동백꽃의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 2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은 살아생전 두 명의 여자를 짝사랑했다. 인간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명창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박녹주(1904~1979)와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이자 시인인 박봉자(1909~1988)였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윈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해 어머니를 닮은 박녹주를 만난다. 소위 갓 대학에 들어간 남학생이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에게 도를 넘어선 구애를 펼친 것. 2년여에 걸쳐 박녹주에게 사랑을 넘어서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했지만 완강한 박녹주의 거절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인 실레마을로 돌아와 주옥같은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 박봉자가 있다. 1936년 5월호에 ‘그분들의 결혼플랜-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제목으로 김유정과 박봉자가 나란히 글을 올렸다. 일면식도 없던 그녀에게 빠지게 된 것. 30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박봉자는 김유정과 알고 지내던 문화평론가 김환태와 혼인했다. 이후 10개월 후 김유정은 세상을 떠난다. 죽기 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 , 등을 발표하며 창작에 열을 올렸다. 김유정이야기집에 마련된 오래된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까이 대면 김유정의 구애를 거절하는 한 여성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계에서는 김유정이 누구와 사랑을 이루었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연간 100만 명가량이 방문하는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 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행사와 공연을 열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모은다. 특히 5월의 김유정문학제 ‘봄·봄’이 가장 큰 행사라고. ‘봄·봄’, ‘동백꽃’의 점순이 찾기 대회와 ‘실레마을 닭싸움’ 등이 인기 프로그램. 닭싸움은 실제 닭들이 겨루는 행사였으나 동물학대 논란이 있어 올해부터 사람들이 닭싸움을 하는 놀이로 바뀌었다. 매년 3월부터 10월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김유정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호흡하는 ‘김유정문학촌’이다. 이용 정보 주소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0-14 전화 033) 261-4650 관람시간 동절기 9:30~17:00 /하절기 09: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입장료 개인 2000원 / 단체(20인 이상) 1500원
- 2017-06-3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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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양에 휘파람을 부는 시니어
- 100세 장수시대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렸다. 지난 삶길 70년보다 더 귀한, 앞으로 살길 30년이 내 앞에 다가왔다. 시니어가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할 대목이다. 석양에 휘파람을 부는 시니어가 되어야 한다. 시니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건강ㆍ고독ㆍ경제ㆍ일자리ㆍ가정 문제가 녹록치 않다. 노인의 빈곤, 복지의 사각지대, 고독사 등 어느 것이나 우리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는 사회문제다. 시니어에게 30년은 긴 세월처럼 보이지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때다. 수 년 전 사회은퇴 후부터 사회평생교육에 참여하였다. 50~60세대를 대상으로 인문교양을 주제 교육에는 70대도 많이 참가하여 노후의 보람을 찾곤 하였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는 수강자의 나이제한을 두기 시작하였고, 40세부터 취ㆍ창업 교육이 확대되면서 65세 이상은 교육대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취업절벽 시대라고 하지만 시니어가 발붙일 곳은 점차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시니어 절벽’ 앞에 섰다. 봄비가 이슬처럼 내리는 휴일, 경춘선을 타고 산행을 다녀오던 중 일행과 헤어져 지하철로 환승했다. 동년배로 보이는 등산객과 경로석에 나란히 앉았다. “비가 오는 듯 마는 듯 이제는 완연한 봄이네요.”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지요. 세월은 틀림없습니다.” 시큰둥하게 대답이 갔다. “아직 다리는 안 아프지만, 올해부터는 숨이 좀 찹니다.” 동안의 얼굴에 건강하게 보이는 상대에게 “하기야 우리 나이면 그런 현상이 당연하지요.” 하였더니, “60, 70대 때와는 다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자세부터 고쳤다. 동년배 산행 친구가 없어 가끔 한참 후배들과 산행을 한다는 80대 중반의 대 선배이셨다. 스틱을 왜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면 기구나 타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하였다. ‘시니어’는 어르신, 노인, 고령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나이로 구분하기도 일치된 견해가 없다. 55세 이전부터 보통 은퇴가 시작되며, 60세가 되면 법정 정년, 소득세 부양가족공제 대상이 된다. 65세는 고령사회 구분기준이 되며 전철 무임승차, 국민연금 수급자격이 생겨 손에 잡히는 시니어 대우를 받는다. 70세가 되면 소득세 추가공제 대상이 되며 75세까지는 시니어가 일하고 싶은 나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정년ㆍ사업정리ㆍ폐업으로 은퇴준비ㆍ은퇴진행ㆍ은퇴자 등 수입이 감소되고 활동이 축소된 실제 은퇴자가 시니어다. 왕성한 현역생활 때는 수입극대화가 실현가능한 목표였다. 이제는 재산증식만이 능사가 아니다. 언젠가 빈손으로 갈 것 아닌가! ‘현금흐름 수지균형 유지’가 시니어의 진정한 재무 설계목표가 되어야 한다. 수지균형이 플러스인 경우에는 상속ㆍ증여ㆍ사회기부 등 지출을 늘려 재산을 서서히 줄이고, 마이너스인 경우에는 수입을 창출하고 지출을 억제하여 재산을 늘려서 수지균형을 맞추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시니어가 부는 석양의 휘파람, 많은 사랑 부탁합니다.
- 2017-03-2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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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물 머리와 세미원의 만남
-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 즉,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세미원.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의 물 머리가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 두 물 머리. 그 유유하게 흐르는 넓은 강줄기와 화사하게 피어난 연꽃들로 조화롭게 탄생된 물의 정원은 참으로 경이로 왔다. 월요일 아침, 필자는 말로만 듣던 세 미원을 향해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블로그 모임의 화려한 외출이었다. 오랜만에 설레는 경춘선 전철을 타고 호평 역이라는 곳에서 내려 합류를 했다. 처음 맞이하는 호평, 평내라는 도시는 완전한 신도시의 자리매김으로 신선한 호감이었다. 국도를 따라 양평 쪽으로 향해 달리는 길은 멋들어진 카페 촌과 먹거리와 맛 거리의 축제였고, 바람 속으로 달려가는 자전거를 탄 남녀의 합창은 낭만으로 가득 찬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일행은 양수리 시장이라고 커다랗게 써 있는 간판 앞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연꽃 잎으로 꼭꼭 쌓여진 영양찰밥과 각종의 먹거리로 가득한 시골 음식잔치의 진지상이라는 곳으로 갔다. 처음으로 맛보는 각양각색의 전통적 음식들은 필자 부부에게 대만족이었다. 남산만큼 부풀어 오른 무거운 배를 안고 곧바로 세미 원으로 향했다. 주위 사람들이 수시로 올려대는 사진 속의 연꽃 현장을 빨리 눈으로 맛보고 싶어서였다. 월요일의 한가로움에도 주차할 곳은 넉넉지가 않았다. 두 물 머리는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예전에는 상류에서 떠내려온 쓰레기로 가득한 곳이었다고 한다. 척박한 불모지, 수몰지역으로 버려진 하천부지를 개조하면서, 주민과 정부 환경단체가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시킨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주민들은 가장 먼저 두 물 머리에서 냄새나는 각종의 오물들을 수거하고 그곳에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난 연꽃들을 심었다고 한다. 넓은 호수에는 연꽃과 수련, 창포를 심었다. 여기저기 6개의 연못을 만들었고, 그곳을 거쳐 흘러 들어가는 한강물은 자연히 정화가 되었다. 인체에 해로운 중금속이나 부유물질들을 거의 제거시켜 주었고, 그 후에는 깨끗하게 팔당댐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도록 재구성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수생식물을 이용한 수질개선으로 기막히게 만들어진 인공의 자연정화공원이 탄생된 것이다. 두 물 머리와 연꽃 가득한 세미 원을 이어주는 첫 번째 다리는 작은 배로 이어진 배다리였다. 출렁거리는 다리 위로 몸을 흔들어대는 젊은 남녀는 신기함에 웃음이 만발한다. 다리를 건너 곧바로 이어지는 흙 길에도 돌 빨래판들이 길게 나열되어 참으로 이색적이다. 눈에 들어오는 세미 원의 넓은 공원에는 수많은 새색시 같은 연꽃들이 고고한 자태로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불교의 상징이기도 한, 연꽃은 아무리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도 오염에 물들지 않고, 청결하고 고귀하게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다. 이 꽃은 7월에 피어나서 무더운 8월이 되면 고개를 숙이는 한 여름의 꽃이라고도 한다. 연꽃들은 은은하게 뿜어내는 향기마저도 멀어지면 질수록 더욱 향기로워 그야말로 꽃 중의 꽃이라는 말도 있었다. 낮 동안에 활짝 꽃잎을 열었던 연꽃은 오후가 되면 수줍은 듯 살짝 잎을 오므린다. 분홍색 백색 의 꽃봉오리는 단아한 자태로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꽃말도 순결 또는 청아한 마음이라고 하는가 보다. 어떤 유혹에도 물들지 않고 구슬처럼 영롱하게 물방울을 잎에 맺히며, 그 향기로 찌든 중생들은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세미 원을 탄생시킨, 두 물 머리의 일출과 일몰 광경은 사진 작가들에게 아주 유명하다고 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절묘한 만남으로 이어져,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 안개와 연인들의 사랑이 가득 담긴 사진촬영들은 그 진가를 더한다. 옛 영화의 스토리가 얽힌 나루터와 호젓하게 떠있는 황토 돛단배, 늘어진 수양버들의 정취는 강가 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해 내고 있어, 지친 삶의 힐링 장소가 되기에 아주 충만한 시간이었다. 더럽고 쓸모없는, 냄새가 가득했던 곳을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창조물은 참으로 위대한 탄생이었다. 많은 대중들에게 더러워진 마음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혼탁한 세상에서 꽃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창출해주는 인간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요즈음같이 정신없는 세상에 여유롭게 흐르는 두 물 머리의 강물처럼 넉넉하고, 세미 원의 연꽃과 같은 청아한 향기가 묻어나기를 기대해본다. 필자 부부는 보람찬 하루를 남겼다. 진정으로 힐링이 가득 넘치는 시간이었다.
- 2016-07-2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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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vo Life] 이번 주말, 점프 어때?
- 점프를 한다고? 그것도 자전거로? 얼핏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장면이 연상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얘기다. 자전거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서울 외곽으로 나간 후, 역에서 내려 라이딩을 하며 자연을 즐기거나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는 문화를 동호인들 사이에선 ‘점프’라고 부른다. 이 점프를 즐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동호인들 사이에서 점프 문화가 확산된 것은 관련 인프라의 발달이 계기가 됐다. 첫 번째는 자전거 전용도로의 확충이다. 서울만 놓고 보면 경인 아라뱃길을 따라 조성된 아라 자전거길에서, 여주를 지나 충주까지 연결된 남한강 자전거길까지 동서남북으로 자전거를 탈 만한 곳이 늘었다. 두 번째는 자전거에 인색했던 기존 대중교통의 변화다. 최근에는 자전거와 연계해 이동하는 승객들을 위해 정확한 규칙이 정해지고, 자전거를 위한 공간까지 마련되면서 승객과 불필요한 마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 지하철의 경우 1~8호선은 평일에는 자전거 반입은 금지하지만, 주말에는 가능하다. 대신 외곽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경원선, 경춘선, 중앙선은 평일에도 자전거와 함께 탑승할 수 있다. 단, 출퇴근시간대인 오전 7시~10시, 오후 5시~8시는 출입이 제한되어 이 시간은 피해야 하고, 맨 앞 혹은 맨 뒤 칸에 승차해야 한다. 용산에서 춘천을 잇는 ITX-청춘열차는 자전거 전용 탑승 칸이 마련되어 있어 늘 탈 수 있지만, 주말에는 좌석을 예매해야 한다. 신분당선과 9호선은 자전거 탑승이 아직 금지되어 있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 규칙을 피해 탑승하는 방법은 접이식 자전거, 즉 미니벨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미니벨로는 접어서 휴대한다면 평일에도 지하철 이용이 가능하다. 자전거 없으면 대여도 쉬워 만약 자전거가 없다면? 대여소를 통한 점프도 방법이다. 동호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은 남한강 길의 중심 팔당역이다. 역 주변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많으므로 양평 방향으로 나 있는 남한강 자전거길을 손쉽게 달릴 수 있다. 동호인들에게 최근 점프가 사랑받는 이유는 자전거로는 접근이 어려운 먼 곳까지 가서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한강이나 자전거 도로 주변에 자리 잡은 ‘맛집’이나 관광지 탐방과 같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예 자전거 동호인들을 위한 ‘바이크 카페’가 곳곳에 생겨 자전거의 주차를 돕거나 할인 등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전거 선택은 다양한 요소 고려해야 나만의 자전거를 장만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자신의 체력과 경제력, 이용목적, 주변 지인이나 활동하려는 동호회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조언한다. 자전거 매장 ‘싸이클러스’의 신동환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자전거를 선택할 때 현명한 길은 다양한 자전거를 직접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내게 맞는 자전거를 찾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동호회나 전문가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누구와 즐길 것인가가 중요한데, 함께 타는 분들과 비슷한 유형의 자전거를 선택해야 뒤처지지 않는 등 곤란을 겪지 않습니다.” 과거 동호인들 사이에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산악용 MTB가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전거 전용도로의 확충으로 흙 밟을 일이 없어지자, 사이클로 불리는 로드바이크의 보급이 늘고 있다. 여기에 보관이나 대중교통 탑승이 간편한 접이식 미니벨로들도 다양한 옵션을 갖추면서 장거리 여행도 가능해져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자전거 가격은 무게가 좌지우지 자전거 가격은 프레임에서 결정된다. 자전거 프레임은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는데, 가장 저렴한 철에서부터 알루미늄, 카본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티타늄이나 나무, 플라스틱 재질의 제품도 나온다. 흔히 ‘신문 자전거’로 불리는 저가형 자전거는 13kg 이상이 대부분이고, 100만원 전후의 알루미늄 제품은 10kg 내외, 150만원 이상의 카본 제품은 8kg 내외다. 1000만원대 티타늄 제품은 5kg대 제품도 있다. 자전거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몸에 맞는’ 제품을 찾는 것이라고 다혼숍 현기호 대표는 설명한다. “타이어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구성하는 프레임에도 체형에 따라 S, M, L 혹은 47, 49, 52 등으로 사이즈가 나뉩니다. 본인 체형에 맞는 자전거를 찾아 핸들의 위치, 안장의 높이와 각도 등을 내 몸에 맞게 정확히 맞추는 피팅 과정을 거쳐야 부상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체력이 부족한 시니어들은 승차가 편하고 운전이 쉬운 미니벨로로 먼저 감을 익히는 것도 좋습니다.”
- 2016-06-0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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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1만4000봉을 향해 오늘도 산을 오르는 70대 산사나이 문정남
-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 때마다 그는 늘 산, 아니면 제주 오름에 있었다. 매일같이 산에 오르고, 등산했던 기록을 정리하면서 일과를 마무리하는 문정남(文政男·75)씨. 이제 그만 올라도 될 텐데, 70대 산사나이는 아침이 되면 또 새로운 산봉우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선생님, 시내 가까운 산으로 가면 안 될까요?” 한 TV 프로그램에서 전투적으로 등산하는 문정남씨의 모습을 보고 난 후였다. 겨울 산을 오르는데 카메라 감독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혹시 나의 미래 같은 불길함. 인터뷰만 좀 하면 되지 않을까? 힘든 산은 제발 피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여쭸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NO! “나는 갔던 산은 가지 않아요.” 조율을 거듭해 만난 장소는 경기도 남양주의 천마산역(경춘선). 나름 등산복장은 완벽하게 준비해 갔다고 생각했다. 812m 천마산 정상에 올랐을 때. 내 손에는 문정남씨의 스틱이 들려져 있었다. 문정남씨는 매일 산을 오르는 산사나이다. 지원해주는 스폰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이 좋아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1000봉, 4000봉, 1만봉, 1만3000봉을 올랐다. 취재를 위해 만났던 4월 4일에도 마치고개 봉우리 3곳을 올랐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1주일 있으면서 50여 개 오름을 다녀왔다. 제주에 360여 개의 오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오른 오름만 360개. 제주 오름은 다 올라갔다고 해도 된다. 육지에서도 이제 오를 봉우리가 몇 안 된다고 했다. 모두 쉽지 않은 코스만 남았다. 문정남씨는 광신정보상업고등학교에서 화학교사로 30년 가까이 재직하다 2000년 2월에 명예퇴직했다. 사실 퇴직 전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활지도 선생을 했었어요.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은지. 학교 가면 어떤 학생과 싸워야 하나 했어요. 요즘이었으면 제가 아마 학생들한테 많이 맞았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좀 순수했다는데 선생님들을 얼마나 골치 아프게 했는지 몰라요.” 학교를 그만두고 나오니까 완전히 해방된 느낌이었다고 한다. 퇴직 후 문정남씨는 산에만 다녔다. 그런데 1년 뒤 암 증세가 나타났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이런 얘기를 학생들이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생활지도 선생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게 암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문정남씨는 학생지도 교사를 하는 동안 학생들에게 무섭게 보이고 독하게 행동해야 했다고. “처음에는 아프지도 않고 통증도 없었어요.” 한창 산에 열심히 다닐 때였다. 하루에 7~8시간씩 산행을 했는데 체중이 3개월 만에 6kg이 줄었다. 그게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직장암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죽음의 문 앞에 선 문정남씨. 그런데 등산을 중단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죽어도 산에서 죽지 뭐 집안에서 죽냐 생각했어요.” 문정남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받는 6개월 동안에도 계속 산에 올랐다. 병원에는 그저 산책한다는 말만 하고 산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항암치료 후 또 한 번의 수술을 받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직장암이 낫고 3년 후에 병원에서 암이 간으로 전이됐다 하더군요. 정말 그때는 죽는 줄 알았죠. 그런데 간암 수술 날짜를 정해놓고 마지막으로 CT 촬영을 했는데, 암 흔적이 사라지고 없었어요.” 문정남씨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의사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그 뒤 정말 열심히 산에 오르고 또 올랐다.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습니다” 퇴직 후 매일 산을 오르는 아버지. 자식들과는 가깝게 지내왔는지도 궁금했다. 산을 다니면서 별다른 취미도 없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다는데 자식들과 관계는 어떨까? “2남1녀를 뒀는데 다 시집, 장가갔습니다. 나는 그렇게 인기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엄부자모(嚴父慈母) 즉, 아버지는 엄해야 하고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때는 꼭 부모가 그래야 하는지 알았어요. 물론 지금은 편합니다.” 자식들에게 못 다 준 사랑을 손자와 손녀에게 쏟아 붓는다는 문정남씨. 아이들과 잘 노는 모습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느냐”고 물어본다고. 키울 때 사랑을 많이 주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단다. 가족 얘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함께해준 부인에 대한 고마움도 나눌 수 있었다. “병원에서 내 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했잖아요. 의사도 이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 뒤 집안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맡겼고 저 또한 참견하지 않습니다.” 문정남씨는 본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남편이 등산갈 때 도시락 싸주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도와준 아내가 1만3000봉 오른 산사나이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기록의 왕 산행을 하다 문정남씨가 갑자기 마른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1973년도에 만든 국가기준점(삼각점)이었다. 그는 삼각점에 쓰여 있는 내용들을 메모지에 꼼꼼하게 써내려갔다. “산에 다니면서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그냥 왔다만 간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산행을 할 때마다 가는 과정을 전부 기록합니다. 출발 시간부터 어디를 지나왔고 또 몇 시에 도착했는지 삼각점 좌표 등도 적고 말입니다.” 이렇게 메모한 것들은 집으로 가서 컴퓨터에 기록해 놓는다. 문정남씨가 산에 있는 동안 모든 시간이 기록이고 역사였다. 1만4000봉까지는 이젠 슬슬 쉬면서 문정남씨는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60세부터 지금까지 자연경관을 느끼기보다 봉우리 하나하나 정복하는 심정으로 올랐다. 어떤 날은 하루에 봉우리 10개를 오른 때도 있었다. 산 밑에서 아침 7시쯤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줄곤 봉우리만 찾아다녔다. 어떤 때는 아침 7시에 시작해 저녁 7시까지 걷기만 했다. 문정남씨가 똑같은 산을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바로 기록 때문이었다. 똑같은 산을 10번을 가나 20번을 가나 기록에는 한 봉우리로 표시하기 때문에 굳이 갈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지금 공식적으로 어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1만3000여 봉을 오른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올해는 산을 얼마나 탈 것인지 계획을 물었다. 이제는 조금 여유 있게 밀도를 낮출 생각이라고 한다. “이제 오를 산이 거의 없어요. 지금까지는 기록을 위해 산행을 했다면 이제는 좀 즐겼으면 합니다. 갔던 산도 좀 가고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것이냐고 물었다. 연세가 많기에 관절도 걱정됐다. “다행히 타고난 관절 때문에 먹어본 약은 없어요. 아마 산을 오르는 것을 그만두는 날은 무릎에 고장이 왔을 때가 아닐까요? 내 다리가 허락하는 한 다니고 싶어요. 다리가 성하지 않으면 안 하는게 아니라 못 가는거지.” 등산은 곧 인생이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길은 오직 하나였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꺾어질 듯한 절벽을 기어올라가야 했다. 문정남씨와 멀어져 뒷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무조건 걸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또 산을 오르다 보니 812m 정상에 다다랐다. 문정남씨에게 숨을 헐떡이며 “도망칠 곳도 없고, 무조건 올라가야 하니 산을 오르는 게 꼭 인생 같다”는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문정남씨가 TV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강연한 주제라고 했다. “등산은 인생살이랑 똑같아요. 등산할 때 처음은 순탄하게 시작하잖아요. 높은 데 오르다 절벽을 만날 때도 있고, 평탄한 길이 있고 또 좋은 길을 만날 수 있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서히 내리막이 있을 수도 있어요. 아닐 수도 있어요. 언제 교통사고가 날지, 실연을 할지, 나처럼 암에 걸릴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절벽을 만났다고 생각하다 보면 절벽 뒤편에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잖아요.” 잠깐이었지만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동안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넘어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문정남씨와는 하산하는 길목에서 헤어졌다. 안 가본 봉우리가 근처에 있어서 가보고 싶다 했다. 분명 인터뷰 때는 느릿하게 등산하고 싶다더니 아직은 아닌가보다. 언제나 건강하시길 기원하고 1만4000봉 달성은 제발 좀 천천히 이루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 2016-05-23 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