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전통 ‘경기떡집’
최근 ‘망리단길’이라 불리며 망원동 일대에 젊은이와 해외 관광객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새로운 감성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생겨나는 이 골목에서 오랜 명맥을 이어온 가게가 있다. 바로 ‘경기떡집’이다.
1958년 흥인제분소를 설립한 김장섭 선생의 제자였던 최길선(66) 명장이 전통을 이어받아 경기떡집이 탄생했고, 다시 그 손길을 네 아들이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렀다. 이들 가족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에서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현대인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건강한 디저트로 떡을 연구하고 있다. 2대를 넘어서 3대, 4대까지 이어갈 떡집을 만들고 싶다는 장남 최대로(37) 씨는 장수비결로 ‘신뢰’를 꼽았다.
“고객이 믿고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쓰는 걸 최우선으로 합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원산지를 다니시며 그때그때 좋은 쌀이나 곡물 등을 선별하셔요. 맛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재료는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셈이죠. 가령 99% 맛을 내는 재료가 100원이고, 100% 맛을 내는 재료가 200원이라면, 저희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절대 오래되고 모난 재료는 쓰지 않아요. 또 떡은 좋은 날을 기념하려고 예약 주문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시간 엄수가 철칙입니다. 전에 아버지께서 동생이 아픈데도 가지 못하고 엉엉 울며 떡을 만드시는 걸 봤어요. 누군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할지 몰라도, 전통을 이으려면 그러한 사명감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명장의 손에서 탄생한 최장수 떡은 ‘흑임자인절미’이지만, 가장 인기 있는 건 ‘이티떡’이다. 이 떡을 내놓은 지도 벌서 20여 년이 흘렀다. 오래된 메뉴이기에 간혹 “한자로 어떤 의미냐”라고 묻는 이들도 있지만, 고전 영화 속 주인공인 ‘이티(ET)’에서 따온 이름이다. 엄지손가락만 한 찰떡 양옆에 비슷한 크기로 거피 팥소를 빚어 붙이는데, 그 모양이 이티 얼굴을 닮아 그리 부르게 됐단다. 주력하는 또 다른 메뉴 중에는 ‘꿀떡’도 있다. 남녀노소는 물론 외국인들도 ‘허니볼’이라 부르며 즐겨 찾는다.
떡은 아무래도 먹다 보면 목이 막히기 때문에 식혜와 수정과 등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최대로 씨 형제는 차후 떡과 미숫가루 음료 등을 곁들일 수 있는 디저트 카페도 선보일 계획이다.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떡에 대한 관심도 늘었어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티라미수 떡, 크림치즈 떡 같은 퓨전 디저트가 등장했는데, 우리 떡의 미래를 그런 방향으로 풀어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형제들끼리 힘을 모아 우리다운 것을 지키면서 현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메뉴를 연구 중입니다.”
지하철 6호선 망원역 2번 출구 도보 2분 거리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9길 24
영업시간 월~토 08:00~18:00
대표메뉴 이티떡, 꿀떡, 흑임자인절미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52년 전통 ‘김용안 과자점’
일제강점기 때부터 즐겨 먹던 일본식 과자 ‘센베이’. 본래는 물 건너온 것이지만, ‘김용안 과자점’은 오래도록 우리 땅에서 뿌리내리려 그 이름부터 우리말로 바꿔보기로 했다. 센베이 대신 ‘생과자’라 하고, 각각 네모, 땅콩, 파래 등 모양과 재료에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김용안(본명 김용철) 씨가 개업해 수십 년 과자를 굽다가 10여 년 전부터는 아들 김형중(49) 씨와 사위 임완식(40) 씨가 함께 명맥을 잇고 있다. 과자 한 종류를 만드는 데만 8시간 남짓이 걸린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 아닌 하나하나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다. 정성이 더해져 맛은 좋지만, 육체적으로 힘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계속 수제 방식을 고수해온 그 뚝심이 오늘을 있게 했다고 말하는 임완식 씨다.
“요즘처럼 간식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는 생과자를 파는 가게가 많았어요. 그런데 과자를 만드는 과정이 워낙 힘들고 사람들도 공장에서 나온 과자를 즐겨 찾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죠. 한 집 두 집 문을 닫기 시작했는데, 아버님께서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오셨어요.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니 이제는 그 흔했던 생과자가 희소가치가 있는 간식이 된 거예요. 실제 매장에서 직접 과자를 구워 파는 곳은 전국에 몇 곳 없는 것으로 알아요.”
오히려 옛날에는 젤리나 사탕 등을 수제 생과자와 함께 팔았지만, 현재는 돌강정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매장에서 직접 만들어낸다. 파래, 들깨, 생강 등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재료로 맛을 낸 과자가 대부분인데, 외국인 손님도 적지 않다.
“일본 지역 관광 가이드북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덕분에 일본 관광객이 꽤 많이 왔어요. 용산에 미군부대가 있던 시절에는 군인들도 자주 사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뒤 가끔 한국에 오면 ‘아직 그대로라 반갑다’며 들르는 분들도 있죠.”
전국적으로는 물론이고 해외에까지 단골이 있는 김용안 과자점. 더 많은 이가 손쉽게 즐길 수 있도록 택배 주문 시스템을 운영하실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주인장은 손사래를 친다.
“시도를 해본 적은 있는데, 이제는 안 하려고 해요. 과자가 연약하다 보니까 잘 부서지고, 여름엔 눅눅해지기도 해요. 기대하고 드실 텐데 손님도 저희도 속상하더라고요. 오시는 분들은 좀 힘드시겠지만, 제가 직접 확인해서 검증된 과자만 드리는 게 마음이 놓입니다.”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4번 출구 도보 1분 거리
주소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155
영업시간 월~금 10:00~21:00 토 10:00~20:30
대표메뉴 네모, 생강, 땅콩, 파래 등의 생과자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땅 한가운데’에 바다가 있다는 의미를 지닌 지중해.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한가운데 라임스톤 보석이 박힌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몰타(Malta)’다. 코발트빛과 에메랄드빛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들면 부드러운 라임스톤의 세계가 펼쳐진다. 복잡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니멀리즘의 미학! 지중해는 수없이 들어본 이름이지만 몰타는 생소하다. 고작해야 제주도의 6분의 1 크기, 인구도 45만 명밖에 안 되는 나라. 이 작은 섬나라에 발을 딛는 순간, “이곳을 모른 채 살았다면 참으로 억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 섬인 몰타와 고조, 아프리카와 가장 가까운 어촌 마을 마샬슬록까지, 지중해의 진수를 만나고 싶다면 몰타로 떠나보자.
164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독특한 역사
시칠리아 섬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고요히 앉은 몰타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떠있는 탓에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될 줄은 생각 못했던 것 같다. 1800년부터 무려 164년 동안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4년에 독립한 몰타에는 정치·문화적으로 영국의 전통과 시스템이 많이 남아 있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쓰기 때문에 여행할 때 어려움이 없으며, 한국의 어학 연수생들이 많이 찾는 나라이기도 하다. ‘월드워Z’나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유명한 몰타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 나라만 찾는 여행자보다는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을 여행할 때 거처 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몰타의 국민 96%는 가톨릭 신자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성당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지인들의 여유로움 가득한 미소는 여행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하다. 몰타가 바다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는 탓일까? 국민들이 보수적 성향이 강하며 가족 간 유대도 끈끈해 이혼율이 낮다고 한다. 치안과 위생도 잘되어 있다. 정직하고 깨끗한 국민성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을 정도다. 복지도 확실해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눈만 마주쳐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 노부부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해가 지는 쪽을 말없이 바라보는 평화로운 모습은 몰타가 어떤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의 영화도 있지만 몰타는 이 세상에 노인을 위한 나라도 있으니 한번 와서 살아보지 않겠냐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중세로 떠나는 시간여행, 발레타와 음디나
몰타의 수도이자 7000년 역사를 지닌 요새도시 발레타는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역사지구인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수도다. 도시 전체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몰타’라는 국가명은 6개 섬 중 대표 섬인 몰타에서 따왔다. 몰타는 수도 발레타가 있는 가장 큰 섬 몰타와 고조 섬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 섬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발레타는 행정과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성 요한 대성당과 몰타 기사단장 궁전,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유명하다. 아름다운 건축물들 사이에선 아방가르드 예술에서부터 전통적인 교회 연회에 이르기까지 연일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보석가게들, 로맨틱한 카페와 레스토랑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옛 수도인 음디나는 중세시대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노블시티(novel city)로 불리는데, 오늘날에는 몰타의 최고 부유층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중세와 바로크시대의 건축물이 독특하게 조화를 이루는 골목길들은 작은 자동차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이런 도시 구조는 적들이 쏜 화살이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말도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상 어느 것 하나에도 이유 없는 것이 없다. 밤이면 정적에 가까울 만큼 조용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겨 ‘침묵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고즈넉한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좋다.
블루와 라임스톤이 조화된 미니멀리즘 도시
몰타는 크게 두 가지 색깔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블루와 에메랄드빛 바다이며, 또 하나는 구시가지를 기억나게 하는 부드러운 라임스톤색이다. 두 가지 컬러로 세상을 보여주는 몰타는 단조롭다기보다 정갈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미로 가득한 고조 섬에 비해 몰타 섬은 좀 더 현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인공미 가득한 세상에서 온 여행자의 눈엔 고조 섬도 몰타 섬도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몰타의 풍경. 산타클로스 인형이 건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그 모습만으로도 이 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낙천적인지를 알겠다. 매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진지하고 투쟁적인 나라에서 온 여행자는 벽에 매달린 산타클로스 인형을 보며 삶이 매사 그렇게 진지하고 투쟁적일 필요가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몰타의 과거 흔적이 남아 있는 고조 섬
고조 섬은 ‘칼립소의 섬’으로도 불린다. ‘칼립소’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인데, 오디세우스가 아름다운 그녀와 함께 7년을 머물렀던 동굴이 고조 섬 북쪽에 있다 한다. 몰타 섬에서 40분이면 닿는 고조 섬. 그곳으로 가는 페리 안에서 만난 아이들의 쾌활한 웃음은 여행자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맑고 눈부셨다. 그 순간 여행자의 나라에 사는 아이들의 그늘지고 지친 표정이 떠올라 한없이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고조선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고조 섬에는 이름과 어울리게도(어울리는) 선사시대 유적지 간티야 거석사원이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7세기 고조 섬의 주도(主都)였던 빅토리아 요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작은 성당과 성채(城砦), 아기자기한 카페와 와이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몰타 섬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고조 섬 북쪽에 있는 간티야 거석사원은 기원전 3600년에서 3000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라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얼마나 강대국 우선으로 순위를 매기며 살고 세계 곳곳에 있는지 깨닫게 됐다. 그동안 원조로 알려진 것이 사실은 원조가 아니었다. 알고 보면 역사가 더 깊고 가치 있는 진짜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몰타도 그중 하나다.
현지인들의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마샤슬록 어촌 마을
몰타 최대의 어촌 마을 마샤슬록은 15~16세기에 터키군과 나폴리군이 격전을 벌인 곳이라한다. 알록달록한 무지갯빛의 몰타 전통 배 ‘루츠(Luzz)’가 코발트빛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예쁜 그림엽서를 보는 듯하다. 건물 사이의 네모난 틈새로 보이는 바다가 액자 속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매주 일요일에 최대 수산시장인 선데이마켓이 열린다. 앤티크 상품을 파는 벼룩시장도 인기다.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고조 섬 사람들이 만든 와인에 취해본다. 떠나기 하루 전날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부둣가로 나갔다. 몇 시간이나 우두커니 앉아 사람들이 낚시그물을 걷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 ‘저들은 원래 어부이지 않았는가? 이곳이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이 나라 어부들의 모습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다시 바다로 눈길을 돌린다. 바다 속이 훤히 보일 만큼 맑게 출렁이는 바다가 어느새 여행자의 마음을 보석처럼 반짝이게 한다.
Travel Tip
몰타로 가는 직항은 없다. 보통 두바이를 경유해서 가는데 중간에 키프로스를 경유하기도 한다. 이때 대기시간은 대략 한 시간이다.
접하는 순간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최백호(崔白虎·68) 가 부르는 노래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 소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수만 가지 감각들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예술품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흔치 않은 예술가의 자리를 갖게 된 그가 이제 영화감독이라는 오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종합적인 예술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해가고 있는 최백호를 만나 미래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해봤다.
청년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라이브 카페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에 첫 앨범을 낸 이후 어언 40년,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두터운 세월의 결이 느껴진다. 그러나 1950년에 태어나서 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살아오면서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는 지금 ‘은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가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적, 아이유, 박주원 등 젊은 실력파 후배들과의 협업과 월드 뮤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도전 등 최백호는 새로운 피로 자신의 감수성을 뜨겁게 채우고 있는 중이다.
계획하며 살지 않는 사람
그뿐만이 아니다. 최백호의 예술적 취향은 일찌감치 화가 쪽으로도 뻗어서 다수의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8년 4월에 열릴 다섯 번째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스무 점 정도 올릴 예정이에요. 테마는 나무고요. 제가 나무밖에 못 그리기도 하고.(웃음)”
그는 자신이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의 ‘그때그때 대충대충 살아왔다’는 말은 ‘먼 계획을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그때그때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주변 사람만 피곤하죠.(웃음) 41주년이 되는 올해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영화감독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갑작스런 일이 아니고 사실 오래 준비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썼고 홍보 계획도 세웠고.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없어서 못 만들고 있었죠.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영화 제목은 ‘미사리’. 그는 남자 주인공으로 가수를 생각하고 있다 했다. 영상과 음악 위주의 영화가 될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선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의 새로운 도전
기왕 미사리 얘기가 나왔으니 미사리와 음악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시니어에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미사리에서는 4~5년 정도 공연을 한 적 있어요. 지금은 미사리 카페가 두세 군데 남았나.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조금 있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뭐든 잘된다고 하면 다 달려들어서 하려다가 힘이 더 드는 지경이 되고 말아요.”
미사리가 쇠퇴한 이유는 가수 출연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기를 끌자 라이브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출연 가수들 출연료가 치솟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가수 출연료가 오르면 음식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음식 맛이 없으면 누가 찾겠는가.
“그래서 가수들이 모여서 출연료를 올리지 말자고 얘기했어요. 출연료 기준은 송창식 선배에게 두자고 했죠. 그런데 그게 안 지켜지더군요. 그래서 시장이 흐려졌고…. 우리나라는 참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밀려가요.”
혹시 미사리 같은 음악의 대안공간을 다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러한 궁금증에 선유도가 좋은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선유도 안에 공연장이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고, 코너마다 버스킹을 할 수 있게 한 다음 입장료는 3000~5000원 정도 받으면 좋은 이벤트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홍대와도 연결돼서 다리에서 버스킹도 가능할 테고, 좋은 관광코스로도 활용할 수 있죠.”
과거에는 자연주의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요즘은 도로가 나고 식당이 난립해서 이제 변해버린 미사리의 운명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배어나왔다. 그러한 느낌이 그가 만들 영화에도 담기게 될까 궁금했다.
“영화감독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어요. 원래는 미대를 가고 싶어 그림 공부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갔죠. 그런데 군대에서 몸이 안 좋아서 나오게 됐고, 생활 때문에 노래를 시작했죠. 영화는 머릿속에 계속 갖고 있던 생각인데, 아마 이번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웃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요.”
최백호의 고민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 대표, 그리고 문화관광부와 마포구가 협약해 만든 음악 창작공간인 뮤지스땅스 대장으로도 일하고 있는 최백호는 어찌 생각하면 가수 일 이상으로 행정적인 영역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는 현장에서 부딪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현실감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한국음악발전소는 무소속 프로젝트라 하여 소속사 없는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서 경연대회를 하고 있다. 413개 팀들 중 8팀을 뽑아서 앨범을 만들었고 지난 연말 12월 15일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공연을 했다. 연령, 장르 제한은 없다. 덕분에 힙합부터 국악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독립음악가들을 발굴하는 콘테스트로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올해가 4회째인데, 예산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단다. 지원해주던 단체에서 지원을 끊은 것이다. 다행히 3회는 CJ에서 지원해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에게 행정가로서 겪어야 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음악창작소 프로젝트가 있는데 정부에서 전체 운영자금으로 10억 원 규모를 책정했어요. 원래 시작은 전국 세 군데에서 했어요. 그래서 세 곳으로 자금이 나뉘어 지원됐죠. 그런데 지방에서도 참여하기 시작해서 지원해야 할 곳이 여덟 군데로 늘어난 거예요. 문제는 인디밴드가 없을 것 같은 지역에도 지원금이 들어간다는 거죠. 인디밴드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 서울로 오는 게 현실인데, 여덟 곳으로 늘어났어도 세 군데일 때의 예산으로 계속 쓰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15억 원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죠.”
뮤지스땅스 대장으로서 속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자체 운영이 잘되고 있으며 후배들이 좋아한다는 게 보람이다.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무효가 되는 세상
단체의 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만나는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악 작업 차원에서도 인디밴드부터 아이돌 등 10대부터 노년까지 남녀노소를 다 만나며 사는 것이 최백호의 요즘 삶이다. 그렇게 많이 만나다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특별히 사람을 평가해서 만나는 건 아니에요. 거리를 어떻게 두느냐의 차이죠. 그런데 오랜 경험으로 처음 보고 대화를 한 번 해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더 멋있어 보인다고 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날렸다.
“젊었을 적에 워낙 별로여서 나이 드니 조금 나아진 거지.(웃음) 나이 들수록 조심해야 될 게 많아요. 사람을 사귈 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래요. 가장 중요한 게 말이죠.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말이 거칠고 극단적이어서 잘 써야 하거든요. 아주 품위 있는 말도 가능하고 정말 천박한 말도 가능하고. 외국어에 비해 그 폭이 훨씬 크니 상처를 주게 되는 게 우리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는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 진행을 맡고 있다. 대중과 소통하는 중심에 있으니 당연히 말에 대해 더욱 민감한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 10년이 되죠. 라디오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리셋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말을 조심하려면 되도록 사람 만나는 걸 줄여야 해요.(웃음)”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처럼, 그도 사람들이 SNS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연예인들이 SNS에서 서로 모여 왜 자기 생각을 그리 밝혀야 하는가 싶죠. 책임을 지려면 사회적 활동을 하든지…. 저는 모르겠어요. 자기 일만 열심히 해도 될 텐데.”
최백호의 희로애락
최백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고 회고했다.
“재수할 때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노래를 한다고 3~4년 고생했죠. 결핵을 앓았어요. 생활은 안 되고. 그 시절 너무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어지간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아버지는 고 최원봉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이었으며 스물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당선됐지만 최백호가 태어난 지 5개월 되던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무한한 존경심이 있어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 존재는 계속 제 곁에 있었고,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딸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그녀가 시집갔을 때를 꼽았다.
“딸아이는 사정 때문에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갔어요. 처가가 미국에 있거든요. 그때부터 딸을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면서 살았죠. 딸이 사춘기를 겪었을 때 아내는 옆에 있었지만 나는 없었어요. 그 아이가 스무 살에 한국으로 잠시 왔는데, 그때만 해도 저와 거리가 있었고 자주 싸웠죠.”
그 시기 이후 딸은 다시 공부를 하러 외국을 가게 됐고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그렇게 멀리했나를 이해하면서 굉장히 친해졌어요. 이젠 뭐 친구처럼 모든 걸 알고 지내요. 결혼식도 예식장에서 하지 말고 바닷가에서 하라고 했더니 정말 바닷가에서 했고. 저도 딸을 이해하게 됐죠. 딸아이도 저에 대해선 이제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구나 싶어요. 정말 큰 행복이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능력에 비해 많이 성공했다 싶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림도, 음악도 따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어요.”
시간은 그를 성장시켰고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는 옛날에는 곡을 써도 남을 안 줬다고 한다. 자신이 불러야 하는 노래다 싶어서 욕심이 나서 계속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탐이 나는 곡이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준다. 히트곡을 더 만들고 싶은 욕심은 없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 그는 좀 더 세심해졌다. 그가 현재 부산에서 진행하고 있는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도 과거 같으면 벌써 끝났어야 할 일이다.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는 과거 조선소가 있었던 마을을 문화마을로 키우려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다. 이 작업에 그는 두 달간 매달려 있는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져도 그만큼 결과물이 좋아지니까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을 때 성격이 급했고 지금도 급한 편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변화된 모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있다.
“새해 소망은 올가을부터 만들기 시작할 영화를 잘 완성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큰일이 되겠죠.”
원로임에도 고고하지 않고 일가를 이뤘음에도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가 가진 그러한 소탈함이 단단한 철학으로 다듬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는 영원히 예술가이며 계속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안정감을 주는 것 아닐까. 최백호의 새로운 도전인 영화가 어떤 미학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이유다.
자작나무는 예로부터 쓸모가 많은 나무 중 하나로 꼽혀왔다. 신랑 신부의 두근거리는 첫날밤을 밝혔던 화촉(樺燭)이 자작나무로 만들어졌고,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수피 위에 그려졌다. 그래도 왜 인기 있는지 묻는다면 수많은 쓸모보다 자작나무의 매력은 역시 외형이 아닐까. 흰옷을 차려입고 굽힘 없이 쭉 뻗은 모습은 마치 고고한 선비를 연상시킨다. 흰 눈이라도 자작나무 숲에 내리면 몽환적인 풍경이 압도적이다. 자작나무 숲 여행은 겨울에 하라고 추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참나무목의 큰키나무로 다 자라면 20m가 넘는 높이를 자랑한다. 시베리아나 북유럽, 캐나다 같은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다 보니 국내에선 강원도에서도 평균기온이 낮은 일부 지역에 생식한다.
국내 최대의 자작나무 숲으로 꼽히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다. 1974년부터 1995년까지 자작나무 69만 그루가 심어졌다. 이 중 일부 지역만 개방되어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새 고속도로로 관광객 늘어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남로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은 최근 서울서 한층 가까워졌다. 얼마 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거리를 줄여주는 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서울 잠실쯤에서 출발하면 도착하는 데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동홍천 IC에서 빠져나와 4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인제 38대교 앞 남전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자작나무 숲 입구가 보인다.
실제로 자작나무 숲을 찾는 관광객은 고속도로 개통 이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귀촌했다는 인근 가게 주인장은 “주말이면 수천 명이 찾아요. 관광객이 말도 못하게 많아요. 주변 주차장이 꽉 차서 모자랄 정도니까요”라고 말한다.
자작나무 숲이 유명세를 타는 데에는 방송도 한몫했다. KBS 2TV ‘1박2일’에 소개돼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고, SBS 드라마 ‘용팔이’의 촬영지로도 알려졌다.
방문을 위한 채비는 필수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여정은 ‘원대리 산림감시초소’에서 시작된다. 방문자 명부에 이름을 적고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를 따라 걸으면 된다. 초소를 지나 마침 내려오는 관광객 일행과 마주쳐 숲까지 얼마나 걸으면 되는지 묻자 대뜸 아래쪽을 훑어본다.
“그 등산화로는 무리예요. 저 밑에서 아이젠을 대여해주니까 그걸 차고 가세요. 저도 빌려왔어요.”
겨울철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에선 아이젠이 필수다.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빙판을 만들기 때문이다. 등산로 수준은 아니어도 경사가 꽤 심하다. 가능하다면 낙상 예방을 위해 등산스틱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인대리 자작나무 숲까지의 거리는 초소에서 약 3.2km 정도. 산림자원을 위해 개발된 임도라 구불구불한 모습이지만, 2012년 개장 이후 관광객이 늘면서 정비는 잘되어 있다. 도착지까지 두 번의 ‘깔딱고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입구에서 1.5km 지점까지 오르막이 이어져 방문자들의 숨이 거칠어진다. 두 번째 오르막은 도착 직전에 있다.
늘 손꼽히는 아름다운 숲
차가운 공기를 잔뜩 마시면서 걷다 보면 어느 새 자작나무 숲에 도착한다. 커다란 표지판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준다.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라서 그런지 다른 수종은 섞여 있지 않다. 자작나무로만 가득 찬 새하얀 숲을 볼 수 있다. 쉽게 상상하지 못할 풍광이다. 만약 주변에 다른 관광객이 없다면 쉽사리 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큼 나무 사이를 적막이 메우고 있다.
숲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이 숲은 지난해 11월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움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인 공존상을 받았다. 또 8월에는 국유림 명품숲으로도 뽑혔다.
이곳 숲은 4개 산책로로 구성되어 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자작나무 코스는 둘러보는 데만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치유 코스는 1시간 반, 탐험 코스는 40분 정도 걸린다. 힐링 코스는 최장거리인 2.4km. 두 시간을 꼬박 걸어야 한다.
흙빛과 갈색이 어우러진 겨울 숲에 익숙한 우리에게 온통 흰색으로 장식된 자작나무 숲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겨울은 집 앞도 나서기 어려운 계절이지만, 용기를 조금만 내어 이 특별한 자작나무 숲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리쬐는 태양이 뜨겁다. 입추의 절기가 지났는데 폭염은 식을 줄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워진다. 군중을 향한 집단테러를 비롯하여 상상을 초월한 일련의 사건들이 혼돈에 빠뜨리게 한다. 간혹 조물주는 느슨해지는 인간에게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지 모른다. 현세는 각박한 삶의 연속이라 말하는 사람도 많다. 얼핏 보기에 그런가 싶지만, 눈을 지긋이 감으며 다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다. 폭염 아래에서 여름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서다. 자연과 사람이 아름답다. 백사장 모래톱에 두 발을 나란히 담그고 바라보는 자정이 넘나드는 밤하늘의 별은 신비하기조차 하다. 서산에 걸린 상현달은 그림이다. 볶고 지지며 사는 세상이라 하여도 요모조모 살펴보면 정겹다. 살맛이 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현자(賢者)들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 설파했다. 마음먹기에 달렸고 보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를 좋아한다. 일상의 분주한 생활에서 카메라를 들면 세상이 네모 상자 안에 아름답게 자리한다. 눈에 보이는 생명체가 모두 정겹고 기쁨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번잡함을 잊는다. 요즘 철에는 숲 속 부엽토를 비집고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버섯이 눈길을 끈다. 먹을 수 있는 버섯과 먹을 수 없는 독버섯이 제철을 맞는다. 대부분의 버섯이 독을 지녔지만, 나는 그 색감과 자태에 매료된다. 좋은 피사체다. 망태버섯이 그 대표격이다. 노란 색깔과 벌집 모양의 패턴 구조가 신비스럽다. 지고 피는 시간도 짧아 행운의 수간과 만나야 담을 수 있다. 산속에서 만나는 버섯의 아름다움에 아침마다 빠져든다. 저녁노을에 붉게 반짝이는 모래사장의 눈부신 빛깔이 있다. 해변가를 거니는 아가씨의 농익은 각선미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땀방울이 맺힌 농부의 구릿빛도 얼굴도 좋다. 초봄의 여린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짙게 바뀌는 산야의 녹음방초가 그렇다.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었던 흐드러지게 핀 철쭉이 그랬고 한두 송이 피어나는 오뉴월의 여왕 장미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일반인이 눈여겨 보지 않는 들녘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들꽃에 더 정감을 갖는다. 살지 못할 것만 같은 바위 틈새에서 생명력을 보여주는 한 떨기 갓난아기 손톱만 한 꽃송이에도 매료된다.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쇠뜨기 군락도 장관으로 보이고 메마른 돌부리 많은 언덕에 안쓰럽게 피어난 하얀, 분홍, 샛노란 씀바귀도 주변에 자라는 가느다란 줄기와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카메라 화면에 들어 앉는 이러한 모습은 환상이다. 고색창연한 돌담 곁에 작지만, 고고하게 꽃대를 올리는 개망초는 여지없는 동양화다. 봄철엔 산과 들의 습한 구석에 떼지어 노랗게 핀 애기똥풀도 있었다. 이름 자체가 귀엽고 이른 아침 해가 나무 사이로 비추면 군락으로 핀 그 모습은 더욱 환상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구석이 있음을 발견한다. 개미를 위하여 꿀샘을 줄기에 뿜어내어 놓는 애기똥풀의 나눔 정신도 배워 볼만한 교훈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가슴을 활짝 열면 여유롭게 흔들리며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가는 자연의 섭리가 다가온다. 산새들과 풀벌레의 노래도 배경음악이 되어 어울린다. 참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고 정겨운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보잘것없는 그들에게도 놀랄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초대받은 귀한 손님이 되어 어우러져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런 모습을 발견한 나는 큰 기쁨을 얻는다. 감동이다. 작은 관심으로 얻는 기쁨이다. 그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 하는 이유다. 유명한 사진 촬영지 여행보다 주변의 돌담길이나 들판, 산언저리, 강가나 실개천 가를 거닐기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동네의 사람 냄새가 나는 이웃들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를 좋아한다. 공원 나무 그늘의 벤치에 줄지어 앉아 세상살이를 이웃처럼 얘기하는 동네 할머니들의 모습도 즐겨본다. 문 닫힌 가게 앞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모습도 즐겨 찍는 사진 소재다. 수양 버드나무가 휘늘어진 둑길을 드물게 지나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를 기다리면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사진은 기다림이라고 했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렌즈에 담아 고운 모습으로 승화하려 한다. 곱게 보면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생활의 진리다.
카메라로 담아내는 행복한 세상의 이야기다. 글도 글이지만 한 장의 사진으로 그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기를 좋아한다. 사진으로 써 내려가는 무언의 글이다. 이웃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가까운 사람들과 공유하기도 즐겨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좋아한다. 렌즈로 본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말이다. 아름답게 보니 아름답다.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 기부라지만, 주는 것이 있는데 받는 것까지 있다면 훨씬 더 좋은 법이다. 이제는 기부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100점 만점에 35점. 전 세계 145개 조사 대상국 중 64위.
11월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이 발표한 ‘세계 기부 지수 2015’에 드러난 대한민국의 기부활동 성적표다. 기부 액수가 아닌 기부활동에 중점을 둔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기부에 참여했다’는 응답 비율이 15만 명 중 34%인 것으로 조사됐다. 빼어난 성적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2010년 동일한 조사에서 ‘기부에 참여했다’는 응답 비율이 27%로, 153개국 중 81위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7%포인트 오른 수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기부활동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 기부는 소외된 사람을 위해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직 우리나라의 움직임은 그에 비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기부활동에 대한 욕구가 조금씩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매스 미디어와 통신의 발달은 기부의 문화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돈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기부가 이제는 통신의 발달과 함께 일상생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부는 ‘특별함’이 아닌 ‘일상 또는 습관’으로 다가오고 있다.
과거에 누군가가 좋은 마음으로 기부를 하더라도 ‘이미지 관리를 위해’, ‘미래의 비즈니스를 위해’라는 시선으로 기부를 인식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남’이 아닌 ‘내’가, ‘돈’이 아닌 ‘실천’으로 손쉽게 기부를 하고 있다. 2015년, 기부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기부&테이크(Take)’로 진화하는 기부 문화
기부 문화에도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기부의 형태와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 스마트한 시대답게 소셜 기부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이용한 기부가 늘고 있다. 또한 기부를 한 만큼 원하는 물품을 받을 수 있는 이른바 ‘기부&테이크(Take)’ 형태의 기부가 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부자의 경제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가 지난해 10월 제14회 기부문화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부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36.4%·2013년 기준)’였다. 또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 연구센터가 올해 발표한 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개인 기부 참여는 전반적으로 30%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경제 여파로 인해 여전히 높지 않은 수준이며, 심지어 감소하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로 소셜 기부는 경제적인 부담이 덜하고, 참여하기 쉬운 형태의 기부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소셜 기부는 SNS상에서 댓글을 달거나 공유를 하면 기부에 참여하게 되는 간단한 방식부터, 특별한 플랫폼이나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등을 이용하는 방식까지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소셜 기부는 다양한 캠페인을 홍보하는 데 용이하고, 1원부터 100원까지 소액으로 시작할 수 있어 적은 돈으로도 기부를 실천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는 데 한몫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한 기부는 대부분 어떠한 물품을 구매했을 때, 그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구매자인 동시에 기부자가 되는 셈. 기부에 대한 합당한 보상품을 받고 선행도 할 수 있는 1석 2조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비프렌드, 마리몬드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온정을 전하고 있다.
앱을 이용한 방식도 있다. 앱만 설치하고 실행만 해도, 기부자는 자신의 돈을 전혀 쓰지 않고 기부에 참여할 수 있다. ‘빅워크’라는 앱은 자신이 걸어 다닌 만큼 기부가 된다. 앱을 설치하면 GPS를 이용해 사용자의 걸음 거리 10미터당 1원이 기부된다.
이런 소셜 기부와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한 기부가 사랑을 받는 것은 경제적인 부담이 덜하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다. 기부금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상황에 놓인 수혜자에게 돌아가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방식의 기부가 증가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2014년 위키트리 설문조사 결과, ‘기부를 했을 때 자신이 낸 기부금의 사용 경로와 과정을 알고 싶다’고 말한 응답자는 68%에 달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의 기부는 후원단체에 기부를 하면 그뿐, 기부를 한 금액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몰라 기부에 대한 보람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금이 쓰이는 ‘마리몬드’와 하반신 장애 아동을 위해 기부를 하는 ‘빅워크’와 같은 방식은 그 쓰임이 분명해 기부자로 하여금 그 결과물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은 2008년부터 시작돼 공익적 모금에 성공하고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아주는 대신 3~5%의 수수료를 받는다. 이후에도 세계적으로 200여 개 소셜 펀딩 업체가 나타나 성공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디고고’와 ‘킥 스타터’가 있다. ‘인디고고’는 2008년 세워진 회사로 전 세계 누구나 모든 분야에 대해 제안을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2만70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바 있다. 2009년 설립된 킥스타터는 7만5000달러의 모금을 해 많은 이들의 꿈을 이뤄주기도 했다. 이들은 매년 모금액이 4배 이상 성장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심영훈 서울시복지재단 자원개발팀장은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와 결합한 소셜 기부가 발전의 궤적을 그려 나간다면 새로운 기부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라며 “쌍방향 소통과 실시간 정보 공유 등 소셜 미디어의 특징과 한국 네티즌들의 적극성, 보상을 통한 참여유도 측면 등을 고려할 때, 소셜 기부는 향후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기부 문화 트렌드로 주목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부 문화 변화의 중심에 신중년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문화적 욕구가 충만한 신중년들이 기부 문화의 중심에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 연구센터가 올해 발표한 에 따르면, 2011년에 비해 2013년에 전반적으로 기부 참여 비율이 감소했지만, 유일하게 60세 이상의 참여율이 24%에서 25.4%로 약 1.4%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기부나 봉사의 현장에 신중년들의 발길이 늘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곳이 있다. 사람들의 기증품을 팔아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아름다운가게’다. ‘아름다운가게’의 전승희 간사는 “시간기부나 재능기부의 형태로 자원 활동을 하시는 신중년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분들은 장기적이고 정기적으로 참여와 기부를 한다”고 말했다. 신중년의 기부 참여가 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전 간사는 “사회 참여에 대한 순수한 욕구가 있고, 기증·기부 문화 등의 공익 문화와 가치를 전파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아름다운가게의 정기 활동자 중 45%가 40~60대 이상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젊은 층에 비해 삶의 변동이 적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신중년이 기부 문화 선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셈이다. 전 간사는 “신중년층은 재능기부나 참여의 형태로 지역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지역 커뮤니티 발전에 대한 의견을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