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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1] 책에서, 그리고 책 읽기에서 놓여나기
-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mute93@daum.net ‘책의 역사에 대한 현학적인 진술’은 삼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형편에서 보면 책은 아무 데나 있습니다. 너한테도 있고 나한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은 낯설지 않습니다. 지천으로 아주 흔한 것이 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대체로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벼운 발언입니다. 하지만 드물지 않은 것이 책이라는 뜻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책의 품격이 다른 사물들보다 당연히 높게 평가되어야 할 까닭이 별로 없다는 뜻에서도 그러합니다. 필요하면 찾고, 더 이상 간직할 까닭이 없게 되면 언제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책입니다. 아무튼 아무 데나 있고 아주 많은 것이 책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책이 없으면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일컫는 대학 도서관에서 ‘철 지난 책’들을 버리는 ‘작업’을 본 일이 있습니다.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파기’되는 책들을 보면서 “책이 많았구나. 아니 정말 많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찍이 책에 관해 익힌 것들은 이렇게 묘사하는 ‘풍경’과는 전혀 다릅니다. 책은 귀한 것, 드물게 귀한 것, 아주 귀한 것이라는 거의 ‘절대적인 선언’이 책과 관련하여 하나의 풍경을 이룹니다. 책에 관한 이러한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아득한 때부터 그래 왔습니다. 이 주장만큼은 변하지 않는 이른바 ‘규범적 당위’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 당위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성숙을 기해야 합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잘못 안 것을 고치게 되고,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상상하게 되면 삶이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지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책에 대한 규범적 당위는 ‘독서의 필연성’을 절대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책-풍경은 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책은 책이되 모든 책이 책은 아니다’라는 데서부터 그 당위는 심한 소용돌이를 짓습니다. 읽어야 할 책과 읽어서는 안 될 책들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판단 준거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실천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힘’이 행세를 합니다. 금서목록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필독도서목록도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목록은 힘의 바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을 읽고 이런 감동을 경험하지 못한다면’이라든지 ‘여기 기술된 분노에 공감하지 않는다면’이라든지 하는 규범조차 그 힘은 당위로 요구합니다. 책읽기는 때로 힘에의 ‘예속’과 다르지 않다는 묘사를 하게 합니다. 이런 ‘커다란 풍경’ 아니고도 자디잔 모습들에 대한 묘사도 곁들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쓰여 있나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을 저자가 썼을까를 알기 위해 행간을 읽어야 그것이 책을 읽는 것이다”하는 ‘잔 말씀’에는 아직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꼼꼼하게 읽어야’라든지 ‘듬성듬성 읽어도’라든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이라든지 ‘흥미조차 없어도 읽어 마땅한 것이라면’이라든지 ‘재미가 있는 것을 읽어야’라든지 ‘무릇 쉽고 단순해야 그것이 좋은 것’이라든지 ‘삼매경에 이르지 못하면’이라든지 하는 데 이르면 이어 겸손하기가 꽤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새벽독서를 하는 것이’라든지 ‘여행 가방에 책 몇 권 넣는 것이야말로’라든지 ‘한 달에 도서 구매비가 얼마는 되어야’라든지 ‘국민 1인당 독서가 연간 몇 권도 안 되는 우리는’ 하는 데 닿으면 ‘폭발하는 질식’을 묘사할 수도 있게 될지 모르는 풍경이 그려집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위한 책 간직하기’에서 비롯하여 ‘책을 위한 책 읽기’에 이르는 책-풍경조차 묘사할 수 있습니다. 책을 기리는 책에 대한 당위적 규범은 마침내 ‘책-종교’를 낳고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득한 때부터 이렇듯 책-종교의 신도로 책을 만나고 읽고 간직해 왔습니다. 종교인들이 경전을 모시듯 그렇게 책을 모셔 온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아주 못된 전제라고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책은 지천입니다. 책이 아니고도 책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다양해졌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책을 안 읽어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책 없으면 더 쉽고 편하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조차 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책을 다 버릴 필요도 없고, 책을 가볍게 볼 까닭도 없습니다. 여전히 책은 책다움을 지니고 지금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하지만 책-종교의 신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 삶을 위해 아무런 ‘적합성’을 갖지 못합니다. 허황한 환상을 좇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사람들은 ‘책으로부터 벗어나 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 책이나 책 읽기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마구 말씀드린다면 이 일에 누구의 어떤 조언도 거절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내 책과 책 읽기의 태도에 책임 주체가 되어 기존의 책-문화에서 놓여나기를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책을 집어 읽기 시작하면 됩니다. 읽으면 알게 되고, 읽으면 스스로 책과 책 읽음의 주인이 됩니다. 이보다 더 쉬울 수가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한 책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단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터득한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책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이를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거창한 주제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기를 아울러 다짐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책 없이도 살 수 있는 책 많은 세상’인데 조금만 겸손해도 그것이 훌륭한 미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정진홍(鄭鎭弘) 서울대 명예교수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국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명지대. 서울대. 한림대. 이화여대 교수.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역임.
- 2016-09-2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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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올해 ‘0’세가 된 현경 교수와 결코 ‘가볍지 않은 우문현답’
-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 2016-08-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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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피센트
- 누구나 어린 시절 동화책을 많이 읽고 자란다.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백설 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나 전래동화로는 해님 달님, 콩쥐 팥쥐, 장화홍련전, 흥부 놀부 등이 있다. 재미있는 건 서로 다른 나라임에도 동화의 내용이 비슷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나쁜 새엄마와 의붓언니에게서 구박받으면서도 씩씩하게 견디어 드디어 왕자님과 결혼까지 하게 되는 신데렐라도 우리나라의 콩쥐 팥쥐와 같은 내용이어서 흥미롭다. 나라가 달라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월트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말레피센트’를 보게 되었다. 매우 섹시하고 예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맡았다. 월트 디즈니에서 각색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만들어낸 작품으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야기가 펼쳐졌다. 필자가 어린 날 읽었던 내용으로는 왕국에 공주가 태어나고 축하받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나쁜 마녀가 아기 공주에게 16살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히 잠들고 깨어나지 못한다는 저주를 내리면서 다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으면 깨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심술 맞은 마녀가 말레피센트였는데 영화는 필자가 알고 있던 내용과 좀 달랐다. 말레피센트는 그렇게 나쁜 마녀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왕국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요정 나라가 있었다. 요정 나라의 어린 요정 말레피센트는 우아한 날개를 가진 어여쁜 소녀였다. 어느 날 그곳에 인간 세상 사람인 어린 소년 스테판이 찾아온다. 둘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해진다. 이들은 점점 멋진 청년과 아름다운 요정으로 자라며 우정을 키웠다. 어느 날 스테판은 말레피센트에게 키스를 하고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인간 세상의 왕은 요정 세계를 지배하려고 요정 나라 숲을 침략했다. 그러나 말레피센트의 지휘로 숲 속 요정들이 힘을 합쳐 대항해 왕은 참패를 당한다. 왕은 죽기 전에 요정인 말레피센트의 힘을 없애는 자에게 왕국을 물려주고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한다 했다. 이에 신하였던 스테판은 왕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요정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자르기로 하고 그녀를 찾아간다. 출세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도 돌아보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 안타깝고 슬프다. 오랜만의 만남에 즐거워하는 말레피센트에게 약을 탄 음료를 마시게 한 후 잠든 그녀의 날개를 잘랐으니 추악한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에 분통이 터졌다. 잠에서 깨어난 요정은 날개가 없어진 걸 알고 절망을 느낀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스테판이었기에 배신과 절망은 더욱 컸다.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가져온 스테판은 왕위를 이어받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예쁜 공주 오로라를 낳았다. 오로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에 많은 사람이 초대되고 작은 요정 삼총사도 찾아와 행운을 빌어준다. 그때 날개는 없지만 막강한 힘을 가진 숲의 지배자 말레피센트가 나타나 공주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16세가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질 거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에 스테판은 공포를 느껴 세 요정에게 16세 되는 다음 날 왕궁으로 데려오라며 공주를 맡아 키워 달라고 부탁하고 깊은 숲 속으로 보낸다. 그리고는 나라에 있는 모든 물레를 창고에 모아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게 했다. 아기는 무럭무럭 귀엽고 예쁘게 자라났다. 어느 날 숲으로 놀러 간 오로라는 말레피센트와 만난다. 말레피센트는 미워할 수 없는 아기 공주의 수호천사가 되어 돌보고 위험에서 지켜준다. 오로라를 사랑하게 된 마녀는 그가 곧 16세가 될 시기에 공주의 저주를 풀려고 노력하지만, 영원히 라고 했기 때문에 풀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숲에 있던 공주는 길을 지나던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웃 나라 왕자였다. 그들은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한다. 이 왕자가 후에 잠든 공주를 키스로 깨울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한편 말레피센트가 자신에게 그런 저주를 내렸다는 걸 알게 된 공주는 16세가 되던 날 왕국으로 간다. 왕은 16세 되는 다음날 데려오려고 했는데 하루 일찍 도착한 오로라를 감금하라 명령하고 공주는 궁을 헤매다 결국 물레 바늘에 찔려 잠이 들고 만다. 숲에서 만났던 왕자가 해법일 줄 알았는데 왕자의 키스에도 일어나지 않던 공주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입맞춤 한 말레피센트의 키스에 눈을 뜬다. 진정으로 공주를 사랑한 건 말레피센트였다. 스테판 왕은 병사를 동원해 말레피센트를 죽이려 하고 말레피센트는 위기에 빠진다. 그때 아버지가 잘라 온 마녀의 날개를 발견한 공주가 벽에서 떼어내자 날개는 주인을 찾아 날아가 말레피센트는 막강한 힘을 되찾게 되고 왕은 성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후 인간 세상과 요정 나라가 화합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동화 속 이야기지만 출세에 눈이 멀어 사랑과 우정을 배반한 추악한 인간의 욕망에 화가 났고, 복수심에 불탔지만 어린 공주를 사랑하게 되는 마녀의 애틋한 마음이 훈훈했던 영화이다. 말레피센트를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과 풋풋한 오로라 공주역의 엘르 패닝의 연기가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멋진 한편의 영화가 어린 날 감동으로 읽었던 동화책처럼 잔잔하게 필자 마음을 적셔주었다. (PS-오로라 공주 어린 시절 역을 맡은 귀여운 아기가 안젤리나 졸리의 친딸이었다는데 캐스팅된 이유가 재미있다. 오디션 보던 모든 아기들이 마녀로 분장한 안젤리나 졸리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는데 친딸인 비비안 졸리 피트만이 엄마를 알아보고 울지 않아서 뽑혔다고 한다.)
- 2016-08-1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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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92세 현역 법무사 이종태, 풍파 이겨 내고 100세 인생 향해 오늘도 일합니다
- 이종태(李鍾台·92) 법무사를 만나기 전 단서는 딱 두 가지였다. 90대 현역 법무사이고 봉사단체인 ‘망월원’의 이사장이라는 것. 90대 현역이라니. 고령의 노인이 여전히 일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고 놀라운 일 아닌가. 달리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년 가까운 시간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이종태 법무사가 입을 여는 순간,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뜨거운 7월의 어느 날, 목동 3단지 아파트 상가 건물 이종태 법무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20년간의 법원 생활을 접고 1979년 법무사로 일을 시작해 서소문, 여의도 사무실을 거쳐 1987년 이곳으로 와 일하고 있다. 우선 우리 잡지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뒤 취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 같은 사람 뭐 볼 게 있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전 사람인데 왜정(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 와서 광복 직후부터 14년 동안 국어 선생을 했어. 그리고 서울로 와서 법원 생활 20년을 마치고 법무사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라며 92년 인생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잘 짜여진 영화 로그라인(영화 투자를 위해 감독이 한두 마디로 영화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정확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공부하고 싶던 어린 이종태, 삶이 꼬이다 그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들어가는 시점에서 시작했다. “당시 충청남도에는 중학교가 대전과 공주에 하나씩 있었어요. 대전에 있는 중학교는 일본 사람이나 총독부 직원의 자식들이 다니는 곳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없었어요. 그때 마침 큰 형님의 친구가 일본 도쿄의 메이지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그분 옆에서 고학(苦學)할 생각으로 일본행을 준비했습니다.” 내선일체라 했지만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 일본으로 가려면 관할 경찰서의 승인을 받은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일본의 사립학교 지원서를 만들어서 경찰서에 제출을 했는데 며칠을 계속 미루는 거예요. 얼마 안 있다 도항증명서가 아닌 일본군 지원병 훈련서를 순사들이 가지고 와서는 도장 찍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동아전쟁이 한창이고 군인이 너무나 부족한데 젊은 사람이 애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요. 지금은 쓸데없이 공부할 때가 아니다, 천황폐하(일왕)를 위해 싸우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가 아주 엄격하셨어요. 세수하실 때 수건 들고 서 있어도 봤고, 아버지 명령을 어긴 적도, 말대꾸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아버지에게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순사가 ‘아버지가 일왕보다 더 중요하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원서를 쓴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기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1924년 갑자생의 비애, 첫 징병 대상자로 기억되다 결과는 뻔했다. 빵점을 맞기 싫어 필기시험은 한두 개 정도 맞혔다. 이 정도면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신체검사에 합격했고 결국 징집 대상이 됐다. 그 다음 해인 1941년 6월 14일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있던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 전투 훈련을 받았다. “1942년 1월에 용산 제23부대에서 입영통지서가 왔어요. 이제 진짜 전쟁에 나가는 거였죠. 제가 1924년생인데 우리 나이서부터 징병 실시를 했습니다. 나보다 윗사람들은 탄광으로 징용 끌려가 고생했고, 우리 때부터는 징병돼 전투에 나가게 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자대인 제42사단으로 가기 전 중국 칭타오(靑島)로 가 일본에서 징집된 일본인 훈련병들과 또 한 번 6개월의 전투 훈련을 받았다. 전투에 곧바로 투입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저는 전투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뉴기니에 있는 제42사단에 배치를 받았는데 떠나기 바로 직전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보균자로 판명이 난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후 이 법무사는 중국에서 4개월여 병원 생활 후 히로시마 병원을 거쳐 우쓰노미아(宇都宮)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약이 없었어요. 오전, 오후 한 시간만 입원실에 누워 있거나 안정을 취하고 있으면 됐습니다. 그 외 시간은 공부하는 데 썼어요. 특히 우쓰노미아 육군 병원 도서관이 참 좋았어요. 그게 얼마나 좋아요. 어렵고 힘들 때는 소설보고 과학, 철학책을 많이 봐서 스스로 깨쳤습니다. 정식으로 공부한 것은 보통학교 과정이 전부였는데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독학을 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1944년 11월 말 경에 퇴원해 이듬해 광복을 맞았다. 교직생활 14년, 그리고 법원 생활 20년 광복이 되자마자 이 법무사는 교사의 길을 14년 동안 걸었다. 미 군정 당시 초등 공민학교, 고등 공민학교, 호서민중대학의 설립에 동참했다. 또한 학교 경영부서의 책임자로 일을 하면서도 초등 공민학교와 고등 공민학교의 국어 교사로 일했다. 호서중학교, 대전상고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면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부하들과 함께 남하하다 옥천 근처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대전 시내를 불태웠고 이때 이종태 법무사가 살던 집도 학교도 다 타버렸다. “학교라도 빨리 복구하고 싶어 돈 있는 사람을 끌어 모았다가 그만 학교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참 그땐 많이 힘들었어요.” 평생 직업이 된 법무사, 우연히 시작된 봉사 이 일이 있은 뒤 대전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갔다. 대법원에서 판사를 하고 있던 장인 덕에 법원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임시 서기보로 들어갔다가 서기로 일했습니다. 법원에서 오래 일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죠. 그런데 또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법원에 눌러앉았다 결국 20년을 일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법무사로 37년간 살다보니 90이 넘었네요.” 법무사 일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바로 봉사활동이다. 그의 인생에서 교사와 법무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의 이사장직일 것이다. 서울가정법원에서 2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서소문에 법무사 사무실을 개소하고 일주일도 안 돼 한 일본 여자가 이종태 법무사를 찾아왔다. “모치즈키 카즈(望月カズ)라는 여자였어요.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100여 명을 키우고 있던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의 호적 정리가 필요해 도움을 청하러 왔더라고요. 일본 고아 남자 아이 4명을 함경도에서 월남한 분들에게 부탁해 입적을 시켰다고 했습니다. 징병 통지서가 날아와 호적에서 거둬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더라고요. 그 아이들은 일본 사람으로 호적을 다시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도움준 것을 계기로 법률관계 관련해서 내가 돕기로 했어요.” 이후에 모치즈키 여사를 돕는 후원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법률문제와 관련해 뭐든 무상으로 봉사하기로 했다. 일을 좀 도왔나 싶었는데 1984년 모치즈키 여사는 60세가 채 안 돼 숨을 거뒀다. 10년 후, 일본과 한국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세웠던 모치즈키 여사의 유일한 재산인 서울 낙원동 상가 건물을 바탕으로 한국 아이들을 돕자고 법인을 만든 것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이다. “사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이사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에 봉사상을 탄 적도 있고요.” 오랫동안 운동 마니아로 사시길 바라며… 사실 이종태 법무사는 운동 마니아다. 88세까지는 등산도 잘 다녔다. 작년까지 마라톤 대회에도 나갔다. 어딜 가든 늘 최고령자. “참 다행인 게 머리숱이 많아요. 검게 염색도 했으니 내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더라고요.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영을 했는데 이제 체력이 떨어지는지 좀 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온몸이 쑤시고 아픈 데는 수영만한 것이 없어요. 90이 넘으면서 2층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서 요즘에는 간단히 체조하고 걷는 것 정도만 합니다.” 사실 요즘 이종태 법무사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해 10월 아내 송광섭(宋光燮)씨와 사별하면서부터다. “신혼생활 때부터 자식들 키우느라 뭘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병이 들고서 얼마 안 돼 떠났어요. 지병을 알고 약 먹고 준비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종태 법무사는 어디를 가든 꼭 버선발로 나와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집 사람은 옛날 조선 시대 여자처럼 살다 갔습니다. 여보, 당신 해본 적도 없고 존댓말도 꼭 극존칭을 썼어요. 나는 그저 예사 높임 정도로 얘기했었고 대드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많이 위해줬죠.” 작년 10월에 떠났기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이종태 법무사. 꿈에 좀 나왔으면 하는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꿈에서라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미안했다,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안 나타나요.” 요즘 이종태 법무사는 5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무장으로 일하는 큰아들이 올해 예순 여섯인데 좀 더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 촬영을 하는 이종태 법무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주름 사이로, 순탄치 않았던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숱한 날들을 이긴 그의 이야기.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닌 우리 역사였다.
- 2016-08-1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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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14)첫 디즈니랜드의 추억
- 미 서부에는 유명한 여행지가 참 많았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가보고 싶은 곳으로 전 세계인의 가족공원이자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를 가기로 했다. 그곳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적 역사 유적지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먹을 것과 음료수를 챙겼다. 미국은 물값도 비쌌기 때문에 간단한 것들은 배당안에 챙겨 준비를 했다. 너무 무거우면 힘이 드니 꼭 필요한 것만 넣었다. 더구나 온 가족의 화려한 외출 경비는 한 달 치 생활비에 가까웠으나 큰맘을 먹고 한탕 쏘기로 했다. 가족들은 파란 하늘 아래 달려가는 모처럼의 나들이에 온통 마음이 들떠있었다. 미키 마우스로 유명한 디즈니랜드까지는 씨미 벨리에서 약 1시간 20분 가량 걸려 달려야 했다. 오렌지 카운티의 에너지임이라는 곳에 위치한 그곳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대 공원이었다. 넓은 주차장에는 이른 오전 시간에도 불구하고 미리 온 차들로 북적거렸다. 온통 여러 나라 언어로 떠들어대는 셔틀을 타고 입구 매표소로 향했다. 입장료도 매년 올라 네 식구 가격은 만만치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궁전 같은 시설의 어마어마한 광경이 시선을 제압해왔다. 전 세계 사람들로 가득한 매표소는 이미 길다랗게 줄을 서야만 했다. 큰딸은 하루 안에 모든 것들을 다 볼 수가 없다며 머리를 짜며 연구를 했다. 공원 안에는 입구에서부터 1890년대의 미국 마을의 멋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보통 한 가지만 체험하는데도 2시간 남짓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인기가 있는 곳은 줄 서는 시간만도 대략 4~50분은 기다려야 하니 짜증이 난단다. 인내와 함께 한 군데를 신나게 보고 나면 누군가 한 사람이 미리 뛰어가서 다음 코스 줄을 서있어야만 했다. 필자 가족은 가장 먼저 열대 정글과 무시무시한 고대 신전 및 타잔, 스릴 넘치는 체험을 할 수 있는 모험의 나라로 가기로 했다. '인디아나 존스 어드벤처'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무시시한 동굴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 인간들을 만나면 사람들은 깜짝깜짝 놀란다. 그 옛날의 탄광용 기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동굴 속의 더 깊은 곳으로 구불구불한 모험의 길을 달리면 그 이상 실감 나는 체험이 따로 없다. 아주 자세하게 만들어져 실감 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거대함에 관광객들은 탄성과 함께 입이 벌어져 닫을 줄을 모른다. 다음으로, 개척의 나라로 들어서면, 서부극의 복장 및 증기선, 골드러시 현장 등을 깊이 체험할 수가 있었다. 시원하고 울창한 정글 크루즈에서는 실제같이 만들어진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열대의 맹수들과 눈싸움을 벌린다. 더구나 통나무로 만들어진 배를 타고 언덕 위에서부터 굽이치는 강물을 타고 순식간에 떨어져 내려온다. 스릴 만점이고 입고 있는 옷들은 온통 물로 다 젖어지지만 기분은 짱으로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기자기한 동화의 나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인형들이 사람들을 소녀의 감성으로 만들어준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있는 성의 성문을 지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피터 팬 등이 반갑게 맞이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간들이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나라에서는 공상과학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미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볼거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세계 최고의 미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싼 입장료가 결코 아깝지 않았다. 하루를 구경거리로 만끽하고 저녁 9시쯤이 지나자 온 가족은 얼굴에 피로가 몰려왔다. 지친 발걸음도 무겁다며 모두가 그만 집으로 가기를 원했다. 하기야 집 떠나온 지 12시간이 넘었다. 서둘러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다시 셔틀을 타고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차 앞으로 왔을 때,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남편은 열쇠가 몽땅 사라졌다는 것이다. 앞이 캄캄해왔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땅바닥에 덥석 주저앉았다. 겨우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남편은 안절부절 뛰어다니며 방법을 궁리했다. 도대체 그 넓은 땅 어디로 가서 찾는단 말인 가. 얼마 만에 공원을 순찰하는 경찰을 만났다. 달려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니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린다.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열쇠 공을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다려 보라고 사라져버리더니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 밤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앉아 몸을 차에 기대고 눈을 껌뻑 거리니 필자는 가슴이 답답했다. 1시간쯤이나 지나 열쇠 공 연락처를 알았으나 쉽게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두어 군데 몇 차례에 걸쳐 겨우 연결이 되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거의 1시가 될 즘에야 열쇠 공에 의해 드디어 새 열쇠를 넘겨받을 수가 있었다. 졸지에 가난한 이민 살림에 거금 200달러가 나갔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생각만으로 겨우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후리 웨이를 탔다. 기가 막혀 탈진한 필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흘끔거리며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정글 크루즈에서 신나게 배를 타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빠진 것 같네.’라고 했다. 웃을 수도 없는 어이없는 모습에 그저 무거워진 눈을 감았다. 깊은 밤, 집으로 달려가는 후리 웨이의 캄캄한 LA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있었다. 낯선 땅에서의 첫나들이가 또 하나의 얼룩진 추억으로 밤하늘에 수를 놓고 있었다.
- 2016-08-0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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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량공주 모모코 (下妻物語)'
- '불량공주 모모코 (下妻物語)'. 일f본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 원제는 ‘가마가제 소녀’인데 가미가제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고려해서 ‘불량공주’로 바꾼 것 같다. 감독은 나카시마 테츠야, 주연은 모모코 역에 후카다 쿄코, 폭주족 이치코 역에 츠치야 안나가 나온다. 네티즌 평점이 8.3으로 꽤 높다. 이 영화를 보면 일본은 과연 만화 공화국이고 사람들도 만화에 취해 사는 것 같다.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보고 성인들도 만화를 많이 보는 일본은 만화처럼 사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만화 같은 삶을 나쁘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코미디 물이므로 가볍게 보면 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베르사체 짝퉁 의류를 만들어 팔면서 재미를 좀 보았으나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시모츠마라는 시골로 잠수 차 이사 간다. 이 동네 사람들은 촌이라 편한 추리닝을 선호하여 늘 추리닝 바람이다. 어지간한 옷도 동네에 유일한 마트인 자스코에서 사 입는다. 그러나 모모코는 다르다. 고등학교 2학년이다. 유럽 중세 로코코 풍의 드레스를 좋아해서 언제나 양산을 쓰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런 옷을 사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짓말도 해가며 용돈을 타내고 동경까지 가서 그런 옷을 구입해 입는다. 아버지가 짝퉁 판매하다가 재고로 남은 옷들을 모모코가 인터넷에 내 놓는다. 인터넷 광고를 보고 찾아 온 여인은 여자 스쿠터 폭주족의 일원인 이치코이다. 거친 말투와 외모까지 모모코와는 정 반대의 여자이다. 불량배들처럼 침을 칙칙 내 뱉고, 박치기 공격을 하지 않나, 자수를 곁들인 특공복 패션을 하고 다닌다. 이치코는 폭주족의 리더가 결혼한다며 송별폭주 행사에 참가하려는데 리더를 위해 특공복에 전설의 자수명인 자수를 놓겠다며 자수 명인을 찾아다닌다. 돈이 필요하니 빠찡코에 갔는데 엉뚱하게도 모모코가 대박을 터뜨린다. 주인이 속임수를 썼을 거라며 트집을 잡자 앞머리를 길게 한 이상한 모습의 남자가 나타나 모모코 편을 들어준다. 이치코는 이 남자를 첫사랑의 대상자로 찜한다. 모모코는 동경에 간 김에 수제 로코코 드레스 점에 자주 간다. 한번은 벌레 먹어 모자에 구멍이 여러 군데 생겨 손수 자수로 구멍을 활용했다. 그걸 본 점원이 사장에게 얘기하고 사장은 모모코의 재주를 알아본다. 그래서 샘플로 제작한 하얀 드레스에 장미 자수를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전설의 자수 명인을 찾아 다니던 모모코와 이치코는 전설의 명인은 가상 인물일 거라며 찾기를 포기한다. 그 대신 어릴 때부터 자수에 소질을 보인 모모코에게 특공복 자수를 부탁한다. 로코코 드레스의 장미 자수가 다 되어갈 무렵, 이치코에게 위기가 생겼다. 빠찡코에서 자기네들 편을 들어준 앞 머리 긴 남자가 폭주족 두목의 남자로 결혼한다고 발표하자 좌절하며 탈퇴를 선언한다. 동료 폭주족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려는 순간에 모모코가 스쿠터를 몰고 나타난다. 야구배트를 하나씩 든 집단 폭행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모모코는 자신이 전설의 자수 명인 딸로서 기법을 전수 받아 이치코의 특공복에 자수를 놓아준 것이라며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 덕분에 이치코와 모모코는 스쿠터로 그 현장을 빠져 나온다. 이치코는 그 후 모델로 성공하고 모모코는 로코코 드레스 회사와 손잡고 일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짝퉁 옷을 만들어 팔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다. 술집 골목에서 좌절하여 신세타령을 할 때 술집에서 튀어나와 토하던 모모코의 어머니가 눈이 맞아 바로 결혼한다. 모모코를 임신하여 출산 후 얼마 안 가 가출하고 이혼장을 보낸다. 미모가 출중하여 미인대회에도 나간다. 모모코는 치매 초기의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다. 학교에서도 왕따이고 동네에서도 별난 드레스 때문에 손가락질 당한다. 이 영화는 만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이 보기에 유치하지 않고 재미가 있다. 일본의 정서를 읽는 것 같다. 폭주족 문화는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우리나라 폭주족들도 그런 인식에서 보면 이해할만 하다. 모모코는 별난 드레스 때문에 왕따이지만 자기 세계를 고집한다. 그런 점이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타는 자원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 2016-08-0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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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본 오페라 ‘투란도트’
- 필자의 문화 수준을 높여보시라며 아들이 푸치니의 ‘투란도트’ 티켓을 보내왔다. 그런데 흔히 보던 뮤지컬이나 영화, 연극이 아니고 극장에서 영화로 보는 오페라라고 했다.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가끔 오페라를 관람했지만, 영화로 보는 오페라는 어떨지 호기심이 들면서 혹시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에 좀 걱정되었다. 주세페 푸치니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아름답고 유명한 오페라 작품을 많이 남긴 작곡가이다. 그를 생각하면 ‘나비부인’의 기모노 입은 가련한 여주인공 모습이 애틋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토스카에서의 ‘별은 빛나건만‘이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어떤 갠 날‘의 주옥같은 아리아가 귓가를 맴돌기도 한다. 독특한 점은 푸치니가 동양의 이국적인 소재를 즐겨 썼던 것 같다. 나비부인도 일본 여성이 주인공이고 오늘 본 투란도트도 중국 북경이 무대이다. 우리나라도 풍부한 소재가 있는데 작품이 되었다면 좋았을 걸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장소는 메가박스로 여러 곳의 극장 중에서 필자는 집에서 버스 한 번으로 갈 수 있는 센트럴 점으로 인터넷 좌석예약을 했다. 요 며칠 뜨거운 날씨로 무더웠는데 강남의 센트럴시티는 별천지처럼 시원하고 쾌적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했기 때문에 길게 줄 서지 않고 입장할 수 있어 좋았다. 재미있는 영화도 많을 텐데 영화로 보는 오페라에 사람들이 올까 의아했지만, 가격이 3만 원인데도 입장하는 줄이 길었고 대부분 좌석이 찰 정도로 많은 사람이 관람하러 왔다. 좌석도 넓고 안락했으며 팔걸이 부분이 선반처럼 넓어 많은 사람이 음식이나 음료 준비해 와서 먹고 있었다. 필자도 다음에 올 땐 커피와 샌드위치 정도 준비해 와야겠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푸치니가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작품이다. 거의 완성되었지만 끝내지 못하고 3막 마지막 장면은 제자 프란코 알파노가 마무리해서 공연했다고 한다. 초연하던 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작곡한 3막 ‘류의 죽음’까지 지휘한 후 지휘봉을 놓고 관객에게 돌아서서 “마에스트로가 작곡한 것은 이 부분까지 입니다.” 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시간이 되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직접 오페라에 온 것처럼 극장 무대가 보였고 수많은 관중이 3층, 4층까지 꽉 찬 공연장이 나왔다. 여성 해설자가 나와 이 오페라에 관해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많은 인원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소개되고 드디어 영화 속에서 막이 올랐다. 직접 공연한 무대를 찍은 작품으로 오페라의 규모가 엄청났다. 중국이 배경이라 동양의 기와를 얹은 크고 높은 문이 무대로 웅장함과 화려함이 돋보였다. 투란도트는 중국의 공주 이름이다. 별명으로 얼음공주라 불리는 투란도트는 예전에 궁전에 쳐들어온 타르타르국 젊은이에게 어머니가 능욕당하고 죽은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복수심으로 남성을 혐오하고 결혼을 기피한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투란도트에게 구혼하는 왕자들이 줄을 잇자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어 답을 맞히면 결혼하겠지만 못 맞추면 죽이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많은 남자가 도전했다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페르시아 왕자가 사형당하는 날 인파가 뒤덮이고 그 곳에 나라도 잃고 눈까지 먼 쫓기는 신세인 타르타르 왕을 이끌고 노예 ‘류‘가 나타나는데 또한 헤어졌던 타르타르 왕자 ’칼라프‘와 만나게 된다. 노예 ‘류’는 왕자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자의 사형장에 나타난 투란도트 공주를 본 왕자 ‘칼라프’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아버지와 ‘류’의 반대에도 수수께끼에 도전하겠다고 한다. 칼라프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모두 풀었다. 첫 번째 문제는 어둠을 비추고 다음 날 없어지는 것은? 희망. 두 번째는 태어날 때는 뜨겁다가 죽을 때는 차가워지는 것은? 피. 세 번째 그대에게 불을 붙이는 얼음은? 투란도트였다. 칼라프가 세 문제를 다 맞혔음에도 공주는 아버지에게 이방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네가 한 약속이니 지키라 하고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동이 트기 전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결혼을 취소하겠지만 못 알아내면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투란도트는 노예 ‘류‘를 고문하며 이름을 알아내려 하지만 칼라프를 사모하는 ‘류’는 왕자를 위해 자결하고 만다. 칼라프는 류의 죽음을 애도하며 투란도트의 냉정함을 탓하고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힌다. 투란도트는 류의 죽음으로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걸 깨닫고 얼어버린 마음이 풀린다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인터미션시간에 우리 관객에게도 중간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독특한 방식이다. 오페라는 3시간 넘게 3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시간 동안 혼신의 노래를 펼치는 배우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고 그들의 음악 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무대 인사가 나오니 영화관 관객석 여기저기서 실제 오페라에 온 것처럼 박수가 터졌다. 필자도 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박수를 보냈다. 영화로 본 오페라도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며칠 후에는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를 볼 예정이다.
- 2016-08-0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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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동의 100세 장수다이어트] 다이어트 식이요법 5가지 조건
- 경희대한방병원 이재동 척추관절센터장은 비만이 관절염을 유발하는 원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오랜 기간 연구를 해왔다. 살 찐 형태에 따라 상체 비만, 하체 비만, 전신 비만 등 세 가지로 구분해 각 체질에 맞는 다이어트법을 알아보자. 한의학적 관점에서의 체형별 비만관리 핵심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중년 다이어트의 중요성 2. 체형별 다이어트 생활습관 3. 체형별 다이어트 식이요법 4. 체형별 다이어트 운동요법 1 소식(少食)과 다작서식(多嚼徐食) ‘一無二少三多...’ 라는 말이 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첫째, 금연이 중요하며 둘째, 식탐과 술을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다이어트도 식욕을 줄여 소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비만은 소모되는 에너지보다 섭취한 에너지가 더 많을 때 생기기 때문이다. 이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천천히 많이 씹는 방법이다. 음식을 먹고 배부른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최소 15~20분 정도가 걸리는데 저작 운동 시 뇌의 포만중추를 자극하여 포만감을 더 일찍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위와 십이지장의 경계인 유문은 1mm 이하로 분해되어야 넘어갈 수 있는데 만약 충분히 씹는 과정 없이 위만 이 분해 과정을 담당하면 위염 등의 질병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30번 이상 꼭꼭 씹어 천천히 먹게 되면 위염을 예방할 수 있고 적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될 수 있다. < Tip 천천히 먹는 것 (多嚼徐食)-30번 이상 꼭꼭 씹어 먹기 > 음식을 먹어 위가 가득 찬 것만으로는 배가 부르다고 느끼지 못한다. 배가 부르다고 느끼려면 먹은 음식물이 포도당으로 분해되고 소장에서 흡수되어 혈액 속을 돌아다녀야 한다. 혈액 속에 포도당이 흡수되어 혈당이 상승해야 뇌는 위가 “나 이제 꽉 찼어 배불러”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음식을 먹고 배부른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최소 15~20분 정도가 걸린다. 따라서 빨리 먹으면 배가 부른데도 배부름을 느끼지 못하여 실제로 더 많이 먹게 되어 복부 비만의 적이 된다. 단물이 나올 때까지 천천히 30번 이상 꼭꼭 씹어 먹으면 소화도 잘되고,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니 적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2 고단백 식이(食餌) 소식은 하되 먹지 않고 굶어 살을 빼는 다이어트를 할 경우 다이어트 후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살이 찌는 ‘요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식사량을 줄이면서도 특히 탄수화물 섭취를 최대한 줄이고 고단백 식이를 하였을 때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닭 가슴살, 콩, 흰 살 생선과 같은 고단백 식단을 하는 것이 좋다. 같은 열량이라도 고단백 식사를 한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체중이 두 배나 많이 빠졌다는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3 아침은 여왕처럼, 점심은 공주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아침은 바쁘므로 간단하게 먹거나 건너뛰고 저녁은 한 상 가득 푸짐하게 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침을 먹지 않게 되면 점심시간 전까지의 공복감으로 간식을 먹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간식은 보통 식사 열량의 몇 배나 될 수 있으며 트랜스지방이 많이 든 식품이 대부분이라 곧바로 비만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또한 저녁때 과식을 하게 되면 식후 에너지 소모가 적어 쉽게 살이 찔 뿐 아니라 바로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수분 대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몸이 붓는 원인이 된다. 특히 야식 습관을 가진 경우 인슐린 저항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인슐린이 많이 분비되어도 혈당조절이 힘들어 내장과 간 등에 지방으로 쌓여 비만이 되기 쉽다. 이는 또 고지혈증을 비롯해 고혈압, 당뇨병, 관상동맥 질환까지도 야기시킬 수 있다. 이밖에 야식은 신체 전체에도 이상을 부른다. 잠자리 시 위와 식도의 괄약근이 열리면서 위안의 음식이 식도로 역류해 식도염이 발병하기도 하고, 수면 시간이 미뤄져 만성피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최근 미국에서는 비만환자의 42%가량이 야식 습관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저녁은 최대한 거지처럼 먹고, 약간 배가 고픈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고, 대신 다음날 아침을 든든하게 먹자. 아침, 점심, 저녁의 식사량은 3:2:1 정도가 적당하다. 4 비타민, 미네랄, 견과류 3단콤보 비타민과 미네랄은 비록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수백만 가지 화학반응의 촉매 역할을 하여 에너지 대사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쉽게 말해 지방, 단백질, 탄수화물이 수많은 화학반응 과정을 거치면서 에너지로 사용되어야 살이 빠지는데 비타민과 미네랄이 부족하면 에너지로 바뀌지 못하므로 살이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토마토, 당근, 버섯과 같은 과일과 채소를 통해 칼슘, 비타민 등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과일과 채소는 다양한 비타민과 미네랄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수분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몸의 신진대사가 원활해지고 몸속 노폐물이 잘 배출되게 한다. 식이섬유도 함유하고 있어 장 기능을 개선시켜 변비에도 효과가 좋다. 또한 잣, 호두, 해바라기씨, 홍화씨, 아몬드, 땅콩 등 견과류를 매일 꾸준히 먹는 것도 좋다. 이 식품들에는 내장과 내장 사이에 끼어서 좀처럼 빼기 힘든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녹여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리놀레산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공복 시에 매일 10~20알 정도 꾸준히 먹는 것이 좋다. < Tip 비만에 좋은 물 마시기 > 물은 몸무게의 60%를 차지하고 인체 내 순환 기능, 배설 기능, 체온 유지를 통한 항상성 유지 등 많은 생리적 역할을 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보통 성인은 하루 평균 1∼2ℓ(8∼10잔)의 물을 별도로 보충해 주는 게 적당하다. 수분 섭취량이 적으면 대변이 굳어져 변비가 될 수 있으며, 피로 누적과 비만을 부를 수 있다. 피로 해소를 위해서는 몸 안에 있는 노폐물이 원활하게 배설돼야 하는데, 소변, 땀, 대변의 주원료인 물이 부족해 배설이 잘 이뤄지지 않아 체내에 독소가 쌓여 부종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하루에 8~10잔씩 물만 잘 마셔도 건강을 지키고 살을 뺄 수 있다. 다만 식사 중에 마시는 물은 혈당 수치를 급격하게 상승시키기 때문에 비만을 촉진시킬 수 있으므로 삼가는 것이 좋다. 단 커피와 탄산음료는 이뇨작용이 강해 상당량의 수분을 배출할 수 있고, 음료수에 첨가된 설탕, 카페인, 나트륨, 산성 성분 등의 첨가물은 열량이 높아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생수로 마시는 것이 좋다. 5 체형별 다이어트 식이요법 상체 비만 : 상체 비만은 비뇨생식기의 문제로 몸에 음의 에너지가 부족해서 기운이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어깨나 팔뚝이 굵어지는 체형으로 기운을 끌어내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음기를 보강해줄 수 있는 찬 성질의 음식이 좋다. 대표적으로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은 성질이 차기 때문에 대부분 좋고 또한 마른반찬보다는 물기가 많은 탕 종류의 음식이 좋다. 좋은차로는 산수유차 구기자차 보리차등이다. 하체 비만 : 하체 비만은 소화기의 문제로 우리가 음식을 100이라는 양을 먹으면 70%는 소화되고 나머지 복부에 그냥 쌓이기 때문에 하체 비만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런 체형은 속을 따뜻하게 해주며 소화가 잘되는 음식이 좋다. 대표적으로 찹쌀로 된 음식은 대부분 좋으며 밀가루 음식은 성질이 차기 때문에 좋지 않고 차로는 인삼차, 생강차, 계피차 등이 좋으며 특히 탄산음료는 피하는 것이 좋다. 전신 비만 : 전신 비만은 전신에 에너지를 보내주는 순환기능의 문제로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음식량을 줄여 소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순환장애로 몸에 노폐물이 쌓이기 때문에 음식은 이뇨작용이 많은 호박이나 율무가 들어가는 음식이 좋고 특히 율무는 밥이나 선식이나 차로 마셔도 좋다. 이외 녹차나 박하차 등도 전신 비만 예방에 도움이 된다.
- 2016-07-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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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어빵 모녀
- 참으로 신기하다. 피는 못 속인다고 세월이 갈수록 자신을 닮아가고 성장하는 자식을 바라보며 웃고 울기도 한다. 어쩌면 나쁜 것은 그리도 부모를 똑 닮아 가는 걸까? 필자도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의 지나온 날을 보는 것 같아 반성과 함께 성숙함이 녹 익어간다. 필자에게는 두 딸이 있다. 예전 같으면 딸 딸이 엄마라 시부모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며느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 딸이 둘이면 금메달이란다. 오히려 아들 아들이면 똥 메달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아들이 둘에 더구나 큰아들 같은 남편을 키우는 엄마는 등골이 휘어질 텐데, 현실은 그렇다 하니 차라리 돈 메달이라도 목에 걸어 위안을 주고 싶다. 이른 새벽 4시쯤이나 되었나 보다. 화장실로 향하는 길에 환한 불빛이 방문 밑으로 새어 들어온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누군가 하고 궁금했지만 일단은 볼일부터 보기로 했다. 두려움에 방문을 살짝 열고 거실 쪽을 바라다본다. 큰딸아이가 식탁에 앉아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 필자를 닮아 개성 강한 큰딸이 조심스러워 살그머니 문을 닫았다. 영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어쩌다 보니 잠깐 눈을 붙였다. 다시 눈을 떠보니 동이 터오기 시작한다. 큰아이가 궁금해 다시 방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아이가 없다. 궁금한 참에 일단은 살금살금 식탁으로 향한다. 잠도 안 자고 새벽까지 무슨 짓을 한 건지 몰라 필자는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두 통의 편지였다. 한 장은 ‘사랑하는 엄마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사랑하는 아빠에게’라고 쓰인 예쁜 편지지였다. 순간 손이 떨려왔다. 어떤 내용인지 빨리 보고 싶지만 당장은 참기로 했다. 걸렸다 하면 난리가 나기에 태연하게 물 한 컵을 마시고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큰딸이라는 대견스러움에 가슴이 촉촉이 젖어왔다. 작은 딸은 겉모습이 공주처럼 곱고 예쁘지만, 아빠를 많이 닮아 조금은 냉정하고 담담한 성격이다. 본인에게 불필요하고 소소한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호랑이띠의 호탕한 대범함을 소유했다. 결국 2살 연하 남을 만나, 언니보다 먼저 결혼해서 가정을 이끌어갔다. 반면에 큰딸아이는 겉보기에 키는 작아도 여자 대장감으로 리더십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넘쳤으나, 엄마를 닮아 아기자기하고 속마음이 여리며 눈물이 많았다. 지금도 예쁜 인형들을 좋아하고 소박하지만 화려함을 몸에 달고 산다. 어쩌면 그렇게 커갈수록 부모를 닮아가며 단점들은 모두 배워가는지 모르겠다. 필자의 참지 못하는 성격과 남편의 멍청한 순수함은 꼭 빼어서 골고루 갖고 있었다. 큰딸은 잠깐 다니러 온 부모 집을 떠나면서도, 밤새 써 내려간 편지에 관한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다시 부모와 헤어져야 하는 아픔이 대화를 단절시킨 것 같았다. 필자도 무어라 말을 건넬 수가 없어 눈치만 보았다. 이상하다는 생각과 편지를 건네주지 않은 것이 영 답답했지만 묻지도 않았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집에 돌아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가지런히 두 개의 예쁜 봉투가 나란히 놓여 필자의 마음을 파고 들어왔다. 그것은 필자가 자식들에게 늘 하던 방식 그대로 였다. 필자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큰딸은 깊은 마음을 담고 있었다. 장녀라는 책임감으로 써 내려간 부모를 향한 마음은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것이었다. 필자가 애써서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놓은 대가는 충분히 넘쳐흘렀다. 더구나 정성 어린 선물도 함께 있었다. 빳빳하게 은행에서 갓 구워낸 몇 장의 지폐가 각각 따로 들어있었다. 필자는 마음에 감동을 오래 간직하고자 서랍 밑 깊숙이 보관해 두었다. 딸의 마음 선물은 하늘만큼 땅만큼 진하게 눈물로 고여 왔다. 애써 자식 키운 보람이 있었다. 엊그제 큰딸은 또 해외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집안을 난리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홀랑 자취를 감췄다. 마지못해, 텅빈 큰아이 방을 치우려 들어가 보니 침대 위에 금빛을 띠우는 예쁜 봉투 하나가 미소를 짓고 있다. 유혹에 걸려들어 내친김에 얼른 열어본다. 백화점 상품권 몇 장이 필자를 기다리며 엄마를 향한 큰딸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봉투를 두 손에 들고 눈을 감고 소파에 앉았다. 깊어가는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에 필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처럼 남편과 백화점으로 나갔다. 몇 십만 원하는 고가의 옷을 사려니 사치스러움에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필자부부는 수영을 좋아하니 마침 세일하는 수영복을 샀다. 꼭 필요한 소소한 물품들을 이것저것 구입했다. 남편은 꼭대기 식당코너로 가서 특별히 근사하고 맛난 것을 먹자고 했다. 큰 딸자식의 따뜻한 마음으로 필자 부부는 또 호강을 했다. 자식의 부모사랑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결국, 가족이란 살면서 부딪치고 또 상처받지만,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 회복되며 사랑해 가는 것이었다. 집 떠난 큰딸은 며칠 후면 또 돌아온다. 시집 안 간 처녀 의사의 히스테리는 수준급이다. 필자를 닮아 유별난 성격은 가끔씩 집안을 뒤집어엎는다. 그러나 아직은 함께 데리고 살면서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 모습은 영락없는 필자의 붕어빵 모습이었고, 나쁜 것은 부모를 꼭 닮아가며 가슴에 못을 박았다. 다만 부모가 그 감당을 하기 위해서는 여유 있고 넉넉한 충전을 필요로 할 뿐이다. 오늘도 제일 영양가 있는 음식과 글쓰기로 필자는 마음에 양식을 쌓으며 부모는 딸자식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려본다.
- 2016-07-1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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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의 산책] 여름 하면 빙수, 빙수 하면 단팥!
- 드르륵 간 얼음에 깡통 단팥과 연유를 뿌려 만든 옛날식 팥빙수는 최고의 여름 간식이었다. 근래엔 망고나 멜론, 딸기 등을 넣은 과일빙수도 인기지만, 단팥이 주는 담백한 달달함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공산품이 아닌, 매장에서 직접 삶은 팥을 사용하는 곳이 빙수 맛집으로 뜨고 있다. ◇ 장꼬방: 달지 않고 부드러운 가마솥 단팥빙수 전라도 사투리로 ‘장독’을 뜻하는 ‘장꼬방’은 팥빙수(7000원), 단팥죽(7000원), 찹쌀떡(1500원)만을 판매하고 있다. 팥을 이용한 세 가지 메뉴에만 집중해 단순하지만 깊은 맛을 낸다는 점에서 장꼬방을 찾는 손님들은 ‘믿음직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국내산 팥(강원도 홍천), 밤(충남 공주), 찹쌀(경기도)을 사용하고, 방부제나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는다. 매장 한쪽에서는 팥을 삶는 가마솥 두 개와 주재료로 쓰이는 팥과 찹쌀이 놓여 있어 먹는 음식의 재료와 조리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팥빙수에 들어가는 팥은 매장에서 직접 정성껏 삶는데 단맛이 덜하고 부드럽다. 우유 얼음을 사용하고 고명은 팥과 채를 썬 생밤을 올린다. 투박하게 맛을 낸 팥빙수는 놋그릇에 담겨 놋수저와 함께 나온다.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대로61길 27 영업시간 09:00~22:00 연중무휴 문의 02-597-5511 ◇ 소적두(小赤豆): 건강한 팥 디저트를 다양하게 즐기다 ‘작은 빨간 콩’이라는 뜻의 소적두(小赤豆)는 팥을 이르는 옛말이다. 가게 이름처럼 팥을 주재료로 내세운 곳이기 때문에 팥빙수(소 7000원/대 1만3000원)를 비롯한 단팥죽(7000원), 수수부꾸미(2500원), 단팥묵(2500원) 등 다양한 팥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기본 팥빙수에는 팥과 떡 외에는 다른 고명을 얹지 않아 팥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고명 재료에 따라 유자팥빙수, 흑임자팥빙수, 홍삼팥빙수 등이 있고, 단팥죽은 옹심이를 넣거나(1000원 추가) 무가당(無加糖)으로 즐길 수 있다. 강원도산 팥을 열이 골고루 전달되는 가마솥에 천천히 삶고, 보온·냉 효과가 좋은 방짜유기에 담아 제공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로46길 5-2 영업시간 11:00~23:00 문의 02-3443-4433 ◇ 통의동단팥: 정성 가득한 손길로 만든 깊고 진한 팥 맛이 일품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통의동단팥’은 매일 매장에서 삶아낸 국산 팥을 맛볼 수 있다. 주인장이 일일이 손으로 정성껏 선별한 달달한 팥과 물을 전혀 섞지 않은 고소한 우유 얼음이 어우러져 만든 진한 팥빙수(6000원) 맛이 일품이다. 곁들여 먹는 찹쌀떡(1200원) 역시 국산 찹쌀가루로 직접 빚어 만들고, 단팥죽(6000원)은 전분이나 찹쌀가루로 농도를 조절하지 않고 팥만 그대로 갈아 만든다. 그밖에 콩빙수(7000원), 인절미(1200원), 약과(1200원)도 즐겨 찾는 메뉴다. 100% 자가제조만을 원칙으로 한다는 주인장의 고집처럼, 믿음과 정성이 담긴 팥빙수 맛으로 서촌(서울 종로구) 인기 맛집 중 한 곳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67-3 영업시간 12:00~21:30(매주 일요일 휴무) 문의 02-722-0044
- 2016-07-08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