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위세가 대단하다. 바다를 찾으려는 여름휴가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래도 집에서 방콕만 하면서 휴가를 보내기에는 가는 여름이 너무 아깝다. 집에서 멀지 않아 숙박은 필요 없지만 생각할 테마가 있으면서 한적한 곳을 물색하던 중 천진암이 떠올랐다.
천진암은 천주교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발상지란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일이나 현상이 처음 나타난 장소를 말하는데 천주교란 서양 종교인 서교다. 우리나라 그것도 깊고 깊은 산골이 발상지라는 데 의문을 평소 갖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소상하게 알아보고 싶었다. 거기에 100년에 걸쳐 3만 명을 수용할 대성당을 건립한다는 사실도 방문의 구미를 당겼다.
천진암은 이름이 말해주듯 원래 불교 사찰이 있던 곳이다. 주소로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다. 우산리는 좁은 계곡 탓으로 논밭이 거의 없다. 지금은 이런 계곡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펜션이나 음식점이 성행하지만 과거 농경시대에는 아주 드물게 집들이 있었던 곳이다. 사람이 살아야 길이 넓어지고 교통이 발전한다. 이런 후미지고 한적한 곳에 하루는 족히 걸어야 당도할 천진암에 사람들이 모여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강학을 했다는 것은 놀랍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주목해야 한다.
천주교 박해가 심하던 시절이라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지만 사찰에서 왕명을 어기는 위험한 천주교 강학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소를 제공한 스님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좋게 말하면 종교간 우애라고 하지만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위험한 행동을 할 때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문헌을 찾아보니 조선 정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사찰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찾아내고 수긍을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 때 천진암 스님들도 처형당하고 천진암도 불태워졌다. 안타까움은 순교한 분들은 이름이 남아 후세에 추앙을 받고 있으나 장소 제공으로 목숨을 잃은 스님들은 아무 기록조차 없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불태워진 천진암 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농경지로 개발되어갔다. 1960년대에 와서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 회장이 다산의 기록에서 천진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불교 사찰 목록을 조사하고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천진암 터를 찾았다. 그 뒤 토지를 매입하여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천진암 성지 유인물에서 밝히고 있다.
천진암 성역화를 위해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다섯 분의 시신을 이장하여 이곳에 모셨는데 천진암 강학을 주도한 이벽,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를 당한 이승훈,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고 신해박해에 순교한 권일신, ‘유한당 언행실록’의 저자이며 신유박해에 순교한 권철신,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알려진 정약종, 이렇게 5분의 시신이 각기 다른 곳에서 이장되어 모셔져 있다.
한민족 100년 계획으로 30만 평 부지에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을 짓고 있다. 100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79년에 완공되면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1985년부터 시작된 공사가 아직도 기초 터를 단단히 다지는 중이라고 한다. 지금 터 다지기 공사를 하는 사람은 완공된 성당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완공된 성당을 보는 사람은 기초 터 닦는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못 볼 건물을 짓고 있다. 나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단기완성에서 벗어나 후손에게 완공하도록 배턴 터치를 하는 모습은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사실 건축 공사에서 100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보통의 건설 회사라면 이렇게 느리게 공사하다가는 다 망하고 만다. 고층 아파트를 지을 때의 공사기간은, 1개 층을 짓는 소요 일수를 1개월로 본다. 30층이라면 30개월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천진암을 가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도대체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눈으로 봐서 진전이 없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느린 변화는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온다.
천진암 계곡으로 들어가면 그 끝은 천진암 성지다. 관통하는 길이 없으니 들어갔던 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단순히 지나가는 목적으로 가는 차량이 없으니 길은 복잡하지 않다. 10여 km에 달하는 계곡이 깊어서 늘 맑은 물이 흐른다. 계곡이 좁아 농토가 별로 없으니 계곡물은 언제나 깨끗하다. 이 물은 팔당댐으로 흘러들어가 서울 시민의 식수로 사용된다. 천주교 신자라면 성지순례 차원에서 찾아가 보길 권한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역사 공부를 더 한다면 방문의 의미는 더 커질 것이다.
수년째 폭염이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더위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 안에서 에어컨 바람 쐬는 것도 좋지만 전국 각 지역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축제에서 가는 세월을 즐겨보면 어떨까? 더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핫(?)한 여름을 책임질 전국 방방곡곡의 축제를 찾아봤다.
연재순서 ① 축제? 먹고 즐기자! ②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③ 시원하게 솨악! 물놀이
사진 제공 각 지자체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한여름 살얼음 낀 잔에 따라 마시는 맥주 한 잔이면 독일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가 부럽지 않다. 더위가 시작되는 6월부터 늦더위가 남아 있는 9월, 10월까지도 맥주 축제가 이어진다. 성인들에게 가볍게 한 잔 마시고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맥주의 장점. 푸드트럭은 물론 버스킹 공연과 신나는 한판 놀이장이 되는 곳이 바로 맥주 축제 현장이다. 게다가 몇 년 사이 수제 맥주 제조는 물론 다양한 세계 맥주가 유입되면서 오로지 취하기 위해 마시던 맥주가 맛과 향을 즐기는 문화의 주인공이 됐다. 6월 말에서 8월 사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질러 제주도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한 맥주 축제를 소개한다. 단, 더운 날의 과음은 금물이라는 걸 잊지 마시라!
비어페스트 광주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기간에 맞춰 문화수도 광주의 랜드마크인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비어페스트 광주 마셔BREWER’가 열린다. 전라도 방언 ‘~브러’를 사용해 진한 사투리의 가락을 축제에 녹였다. 마셔브러, 즐겨브러, 놀아브러! 시원한 맥주와 신나는 음악이 함께하는 맥주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외 다양한 맥주를 마실 수 있고 푸드트럭존과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매할 수 있는 플리마켓존이 운영된다.
기간 7월 11~20일 장소 전남 광주 서구 상무누리로 김대중컨벤션센터 야외광장
비어고을 광주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하는 광주의 맥주 축제 ‘비어고을 광주’는 ‘술 한 잔이 주는 진심, 진심들이 모여 만드는 축제’라는 주제로 1913 송정역 시장 근처에서 개최된다. 소맥 제조 최고의 경지를 보여줄 주인공을 뽑는 소맥 제조 자격시험, 시장에서 준비된 안주 중 최고의 안주 찾기 대회인 안주대첩, 음주와 관련한 3행시 실력을 증명해줄 음주 인재 찾기인 ‘비어고을 신춘문예’ 등이 펼쳐진다. 광주 지역 청년들이 침체된 상권을 살려보겠다는 일환으로 시작돼 맥주를 즐길 줄 아는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기간 6월 28~29일 장소 전남 광주시 광산구 1913 송정역 시장 일대
제주 짠 페스티벌
제주 최대 맥주 축제인 ‘짠 페스티벌’이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서귀포시 성산읍 플레이스 캠프 제주에서 진행된다. ‘짠’은 술잔을 마주칠 때 하는 소리다. 올해 3회째를 맞은 ‘짠 페스티벌’은 매회 50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축제로 제주도민과 제주 여행객들의 필수 여름 코스로 불린다. 올해는 제주를 대표하는 맥주와 약 50여 종의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맥주 빨리 마시기, 맥주 많이 마시기, 맥믈리에,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도 축제 참가자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짠 페스티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플레이스 캠프 제주 공식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확인하면 된다.
기간 7월 26~28일 장소 제주 서귀포시 플레이스 캠프 제주
대구 치맥페스티벌
치맥의 인기 덕에 매년 열리는 페스티벌이 있으니 바로 대구 치맥페스티벌이다. 대구와 아프리카의 합성어인 ‘대프리카’로 불릴 만큼 폭염이 심한 대구. 긴 세월의 오명을 씻어내고 여름을 즐기는 도시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수중 아이스 카페, 아이스 테이블 등 이색적인 공간을 즐길 수 있다. 축제의 인기에 힘입어 축제 종료시간을 기존보다 연장해서 운영한다고. 축제 마스코트를 활용한 손선풍기와 캐릭터 모자, 꼬꼬머리띠 등 20여 종의 기념품이 준비되어 있다.
기간 7월 17~21일 장소 경북 대구시 달서구 두류공원 일원
자생한방병원은 지난 24일부터 오는 26일까지 3일간 전국 각지에서 사회공헌활동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며 국민 건강증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25일 밝혔다.
강남·분당·대전·광주자생한방병원이 참여하는 이번 의료봉사에는 총 40여 명의 의료진과 임직원이 300여 명의 고령 근골격계 질환자들의 척추·관절 건강을 돌봤다.
이번 봉사활동은 지난 24일 광주자생한방병원의 광주시 서구 소재 광천사랑숲경로당, 진성아파트경로당 방문으로 시작됐다. 25일에는 강남자생한방병원과 분당자생한방병원이 서울시 강남구 방죽1시니어센터와 성남시 수정구 수정노인종합복지관을 각각 찾았다. 오는 26일에는 대전자생한방병원이 대전시 중구 서대전농협 본점에서 모내기 철을 앞둔 고령 농업인과 독거노인들을 돌볼 예정이다.
지난해 9월 개원한 청주자생한방병원 역시 봉사활동을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청주자생한방병원은 25일 ‘청주자생봉사단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조직된 청주자생봉사단은 앞으로 청주자생한방병원, 자생의료재단 사회공헌실과 함께 한방 의료봉사, 무료급식, 자선 바자회, 김장 담그기 등 다양한 공헌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자생한방병원은 이러한 한방 의료봉사 활동들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환자들의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2017년 자생의료재단의 한방 의료봉사 횟수는 총 30회로 평균적으로 매월 2.5회의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그 수혜 인원만 5048명에 달한다.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은 “전국 자생한방병원들이 국민 복지증진을 위해 마치 릴레이를 펼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에 임하고 있다”라며 “따스한 봄을 맞이해 많은 분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돼 매우 기쁘다”라고 말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동ㆍ서ㆍ남ㆍ북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 북문은 전승문, 서문은 우익문, 남문은 지화문이라고 불렸다. 등산객들은 보통 마천역에서 서문으로 들어가거나 산성역에서 남문을 거쳤다. 어느 문으로 들어갈지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산행은 달랐다. 남쪽 지화문을 이용하였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죄인 조선왕은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 서문으로 나와서 항복하라.’는 청태종의 항복조건을 보고나서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이다. 조선시대 인조 2년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을 다뤘다. 당시 청나라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을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던 인조는 결국 45일 만에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하기로 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함께, 외세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을 몰아냈던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은 가장 처절하고 치욕적인 패배였다.
영화 '남한산성'이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쟁을 크게 다루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기의 주장을 폈다. 최명길은 단순히 주화론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강화도 가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인조 일행이 피신할 때, 홀로 청군의 지휘관 마부대 진영을 찾아가 항의담판을 함으로서 피신할 시간을 벌어준 사람이었다. 최명길은 난세에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균형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현실적으로 약소국인 조선의 생존을 찾는 것이었다.
척화ㆍ주화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백성이 있었다. 얼어 죽는 백성을 살리려고 가마니를 모으고 굶주린 말을 위하여 초가지붕을 걷어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준비 없는 허망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가정이지만 45일 만에 항복하건 결사항전하건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헌데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진흙탕 싸움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국민은 안중에 없다. ‘나 살고 너 죽자’식이다. 아니다. 국민커녕 자기 한 몸 사는 방법도 모른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 같다. 자기 생각 하나 말 못하고 눈치를 보고 줄을 섰다. 감옥 가기 싫어서인지 모르쇠를 자랑한다. 자기 자신은 허깨비였다고 실토하는 추태도 부린다. 나중에 국가를 경영할 수 있겠는가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겠는가.
남한산성, 백성을 생각하였던 선각자를 다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1915년 5월 27일생이신 아버지와 1922년 11월 1일생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1946년 1월 4일 8시께 1942년 8월 13일 누님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다. 2년 뒤 여동생, 4년 뒤 또 여동생이 태어났고 막내 남동생과는 9살 터울이다
어릴 적 기억은 4세 때 한국은행 돌계단을 오르면서 엄마 손 잡고 명동 가던 것뿐이다. 누나는 공부를 잘해 늘 전교 1등이었는데 그 동생은 말썽꾸러기라서 늘 창피하다며 야단을 쳤었다. 학교에서 누나에 거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필자는 야단을 적게 맞고 반대로 장난은 늘어만 갔다.
드디어 누나가 50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경기여중을 들어갔다. 누나 졸업과 동시에 필자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무엇 조금만 잘못해도 엄청 꾸중을 들었다. 아마도 그동안 적립해 놓은 야단을 한꺼번에 듣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학교 주변은 피난민이 많이 살았는데 대개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자제였다. 학교 끝나고 오는 길에 그들 몇이 모여 한 아이를 끌고 가 여럿이 골목에서 때리는 것을 보았다. 말썽부리고 공부는 잘못 해도 남을 해치고 약자를 괴롭히지는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뛰어들었고 우릴 아는 애들이 뒤따라 들어와 패싸움이 되어 일이 엄청 커졌다.
다음날 부모가 들어왔는데 그악스런 이북말씨에 네 일도 아닌데 싸움판에 끼었다는 요즘 말로 하면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계를 먹었다. 다행히 초등학교여서 퇴학이 없어 전학으로 결정됐다.
5학년 후반 남대문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과를 끝내고 집에 오려는데 왠지 많은 아이가 빨리빨리 교실을 빠져나가고 열 두어 명이 남더니 뒤에서 양동이를 머리에 씌우고 몰매를 놓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 서울역 양동이라는 사창가가 있었는데 그곳 아이들이 뭉친 게 한패, 남대문 시장 뒤 고아원 아이들이 한패로 그들만의 리그가 볼만했다. 전학생이 왔는데 패싸움 때문에 전학 왔다니까 기선을 잡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망치를 하나 들고 갔다. 노는 시간에 하면 여러 명에게 당할 것 같아 공부시간 중간에 뒤에서부터 한 명씩 깼다. 당연히 학교가 난리 났다. 결국 3개월 만에 멀고도 먼 교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이곳은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실감 나는 곳이었다.
한반이 72명인데 왜 이렇게 조용히 공부만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필자도 할 일이 없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두 달 후 6학년이 되었다. 72명이 어깨 맞대고 촘촘히 앉아 시험을 봤다. 그래도 두 달 공부 열심히 했다고 아는 문제가 많아 정말 신나게 시험 봤다. 일요일이 주일 후 시험성적표가 성적순으로 나와 뒷벽에 붙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시험도 잘 봤는데 팔저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 이름은 없는데요?” “그래? 번호는 몇 번까지 있니?” 72번이요.” “그럼 맞는데 어디 보자.” 갑자기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야 임마 여기 있잖아. 너는 네 이름도 못 읽냐.” 아차 필자 번호 67번에 필자 이름이 있는 것이다
필자 생전 그렇게 재미있게 시험 본 경험이 없을 정도로 재밌게 봤는데 이상했다. 시험지 확인을 해보니 평균 82점인데 67등이었다. 그렇다면 점수 18점 안에 66명이 있다는 것 아닌가. 6년 내내 최고 점수 평균 91점 받아봤지만 등수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해 공부 좀 하려는데 집에 큰일 생겼으니 빨리 가보라는 담임교사 말에 어리둥절해 가보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다. 5남매 장남으로 7식구 돌보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신문 배달뿐이었다. 대학도 안 가려는데 어머니가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 없으면 행세를 못 하니 앞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오더라도 졸업장은 반드시 가지라고 말했다.
공부 잘하는 누나 한 사람 대학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필자 덜컥 시험을 봐 경희대에 턱걸이로 합격하니 어머니는 얼마나 심란했을까. 그 시절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기도 했고 불안의 나날이기도 해다.
필자는 누나가 결혼한 뒤 군대에 갔다. 훈련을 마쳐 각자 본대로 가는데 그 많은 훈련병 다 호명해 갔으나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다. 알고 보니 육군본부였다. 군대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필자 복에 육군본부라니 말도 안 됐지만 사실이었다.
근무 중 월남파병 백마부대에 차출되어 강원 화천 오음리서 훈련받았다. 만기 제대를 하고 도저히 경희대 주간을 다닐 형편이 되질 않아 건국대 야간대학으로 옮겨 낯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경희대 다니며 친구들과 만든 “포도원”이란 모임은 지금도 50년 넘게 만나고 있는데 이혼, 상처, 상부, 본인 사망한 친구가 없는 모임이다.
건국대 야간은 낙원동에 위치한 96%가 직장을 다니며 주경야독하는 백전용사들이다. 지금도 매월 첫 수요일 저녁은 그들과 함께하는데 시멘트에서도 싹 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지독한 독서광들인 친구들이다. 건국대 야간 경제과를 졸업하고 학사가 되었다. 어머니 말대로 앞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그해 10월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1973, 75, 78년 생 딸 2, 아들 하나 아이 셋을 낳았다. 그리고 큰애가 아들과 딸, 작은애가 딸 둘을 낳았다.
1998년 소마라는 개인회사를 만들었다. 특수방식의 사료 첨가제였다. IMF가 왔지만 사료비를 아끼려는 농가가 많아져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크기를 키워 주식회사로 만들고 상호도 (주)지니 바이오로 변경했다.
이후 회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사옥도 사고 직원도 늘리고 거의 수직 상승곡선이 그려졌다. 하루 운행 거리가 최고 762km. 평균 500km가 넘을 정도로 영업하고 다녔다.
그리고 영업을 위해 삼성 SM5를 샀다. 이 차는 세상에 차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내게 알려준 최초의 차였다. 차 뺀 지 2년 만에 35만km를 달렸지만 잔 고장 하나 없이 잘도 달려주었다.
그런데 2000년 구제역이 왔다, 매출이 100%에서 3%로 떨어졌다. 1년 후 재기를 노려 농가를 다니길 약 20일. 그러나 다시 구제역이 왔다. 사옥도 팔아가며 버티고 버티며 2011년까지 왔지만 역부족 결국 남에게 넘겼다.
그러는 사이 나라에서 지하철 공짜카드가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이가 벌써? 대한노인회에 이모작 준비에 관해 문의했다, 그런데 답이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하라”라고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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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버들 경로당에 가서 한 달을 버텼다. 경로당은 구립이라 지원금이 일 년에 360만원이 전부였다. 그래서 근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다니며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께 점심 기부를 해 달라’며 다녔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적인 필자 일도 아닌 금전적인 것을 부탁하러 다니다 보니 얼굴만 벌게 지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40여년을 오로지 스피치 교육만 하고 있다는 ’한국언어문화원’을 찾아갔다. “지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일대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낚시법이라 한다면 저희는 일대 다중을 설득하는 투망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는 원장 말에 뿅 가서 그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발성 연습을 하며 우리말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6개월 하고 나니 발성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얼마나 배웠는지, 남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는지 알아보려 2012년 11월 3일 전남 광주시에서 열리는 제38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에 그 당시 한참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는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웅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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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특등.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연단 공포증을 단숨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매주 월요일이면 스피치 공부하러 다니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언어문화원에서 교수진에 등록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특등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2015년 11월 7일 광주에서 열리는 제41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 주제는 그해 대단히 가물어 식수마저 끊기는 지역까지 있어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원고로 참가해 마침내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1년 후 조선에듀케이션과 유어스테이지(주) 시니어파트너즈에서 강사 과정이 있다기에 응시해 생애 재설계를 배웠다.건강, 인식, 관계, 경제, 직업, 주거, 여가, 계획과 실천, 교수법을 배웠다. 그렇게 죽을 만큼 공부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결과는 합격. 필자가 강사가 되다니 꿈만 같았고 그 길을 계속 가고 싶었다. 2013년 3월 11일 강사자격인증서를 받았고 3월 21일 드디어 강사위촉장을 받으며 강사생활이 시작됐다.
필자는 무엇이든 빠르지 않고, 재주부릴 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절대 뒤로 가지는 않는다. 필자는 강사 과정을 함께 공부했던 사람 중에 대단히 해박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공부해 보니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회 각당복지재단에서 웰다잉을 공부하라 지도해 주셔 죽음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는 로고테라피 강의는 그 중에도 백미였다.
다모작포럼협동조합에서 “한(정수) 이사”의 준말인 ‘하니’란 애칭으로 교장 선생 일도 보람 있게 하고 있다.
필자에게 강사라는 꿈이 있었을까? 연단에서 누굴 가르친다는 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돈만으로 격을 따지는 세상에서 인성의 사각지대에 있는 그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동안 배운 모든 과정을 녹이고 녹여 재미있는 강의를 하다 보니 지금은 공무원연금공단 변화관리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직접 겪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전환 과정'을 중장년에게 전수해주려 하고 있다.
아울러 '다가치포럼 협동조합' 전무이사로 '중장년 미래전략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정부 지도자 과정도 다음 달에 개설할 예정이다. 교육이 대세라는 생각은 팔저를 생각하면 당연한 길이다.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이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초록빛 자연의 싱그러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6월이다. 계절마다 제철 과일이나 해산물을 맛보는 것이 좋은데, 이맘때면 푸른 생기로 가득한 채소를 먹는 것이 제격이겠다. 익히거나 양념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라면 더욱 좋다. 유기농 쌈 채소와 구수한 보리밥, 숯불장작구이까지 즐길 수 있는 ‘산촌보리밥’을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자연을 보고, 먹고, 즐기다
높은 빌딩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까만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면 흙과 나무, 파란 하늘이 조화를 이룬 ‘산촌보리밥’을 만날 수 있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거진 나무와 형형색색 꽃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맛집이라 해서 찾아갔지만 꽃 사진을 찍거나 나무 그늘에서 쉬는 이들이 더 눈에 띈다. 맛있는 밥을 먹으며 배도 채우고 자연을 벗 삼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이곳만의 매력이다.
자연과 더불어 있는 만큼 유기농 쌈 채소 제공은 물론, 음식에 간을 할 때도 인공조미료나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 상추를 비롯해 케일, 로메인, 적겨자, 청겨자, 치커리, 적근대 등이 쌈용으로 나오는데 경기도 광주시 서하리의 자연농원에서 유기농으로 기른 채소라고 한다. 계절이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는 쌈의 종류가 조금씩 바뀐다. 반찬은 제철 식재료를 활용하는데, 건강을 위해 저염으로 준비한다. 핵심 재료인 된장은 공산품이 아닌 해마다 직접 담근 것을 사용한다. 가게 뒤뜰에 가면 구수한 장을 숙성하는 장독들을 볼 수 있다.
장독을 모아놓은 곳 앞에서는 그윽한 숯 연기가 피어오른다. 참나무 장작 바비큐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주인장이 자부하는 구이용 숯은 향이 좋은 오대산 참나무를 사용한다. 국내산 생삽겹살과 오리에 신안 천일염을 뿌려 먹기 좋게 구워 낸다. 낮에는 쌈 채소와 함께 숯불구이 정식으로 맛보고, 저녁에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단품(삼겹살 바비큐 400g-2만5000원, 오리 바비큐 한 마리 4만5000원/반 마리 2만5000원)으로 즐기기 좋다.
쌈 채소와 보리밥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정식 메뉴를 찾는 이가 많다. 곁들여 먹는 고기 메뉴에 따라 훈연제육정식(1인 1만3000원), 숯불구이정식(1인 1만5000원), 떡갈비정식(1인 1만8000원)으로 나뉜다. 선택한 고기메뉴와 함께 유기농 모둠 쌈, 보리밥, 무청시래기, 굴비, 각종 밑반찬을 제공한다. 직접 만든 된장으로 맛을 낸 무청시래기는 산촌보리밥만의 별미다. 굴비는 영광 법성포 현지에서 배송한 것을 사용해 담백하게 쪄서 조리한다. 그 외 제철 식재료로 간간하게 양념한 밑반찬은 깔끔한 맛으로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정식 이외 메뉴도 다양하다. 몽글이 순두부(강릉심층수 두부 5000원), 더덕냉채(8000원), 미나리전(7000원), 해물파전(1만2000원), 도토리묵(1만원), 두부김치(1만5000원) 등이다. 얼핏 등산 후 즐겨 먹는 음식들과 겹치는데, 가게 인근 경치를 바라보며 곁들이면 비슷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정식에 나오는 숯불구이, 제육구이, 떡갈비도 따로 주문 가능하다.
식사 후에는 앞마당에 마련된 전통차(매실차, 대추차 등)와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가게 입구 건너편에는 벤치와 테이블 등이 있는 야외 공간이 있는데, 우거진 나무 그늘 안에서 여유롭게 쉬었다 가기 좋다. 꽃을 좋아한다면, 주인장이 직접 꾸며놓은 야생화 화단을 천천히 구경하는 것도 괜찮다. 꽃을 찾아온 벌, 나비, 산새를 만난다면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175-7
문의 031-721-6909
영업시간 11:00~21:30 연중무휴
(대중교통보다 자가용으로 찾아갈 것을 추천. 분당선 서현역에서 자동차로 10분 소요)
매일 똑같은 삶이 흐르다 보면 사람들은 익숙했던 공간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거나 혹은 스트레스가 닥쳐오면 탈출 욕구는 더욱더 솟구친다. 최대한 먼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당신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서울 인근 여유가 흐르는 집을 온라인 숙박 예약 사이트 에어비앤비(www.airbnb.co.kr)와 함께 다녀왔다. 지금 당신, 멀리 갈 수 없다면 바로 이곳으로 떠나보라.
대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모두 친구
파주시 헤이리 마을 모티프원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모티프원은 전직 기자이자 ‘철없이 사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이안수(李安洙, 59)씨가 손님들에게 내주는 공간이다. 백발수염 휘날리며 밝은 웃음으로 맞이하는 이씨를 보면 기분 안 좋던 사람들도 같이 웃을 수 있다. 집주인의 인도를 받아 서재로 들어가면 온 벽면을 가득 메운 책들과 방문객들이 그린 그림,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이 집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자유와 뭐든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다. 서재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책을 봐도 되고 위층 옥상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아도 된다. 단 바비큐는 할 수 없다. 그 시간에 사람들과 더 얘기하는 것이 낫다는 게 집주인 생각이다.
에어비앤비 숙소로도 이용되지만, 처음에는 전 세계 예술가들을 위한 아티스트 레지던스(예술인 숙소)로 문을 열었던 곳이다. 세계의 예술가들이 이곳에 묵으면서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드라마작가 송지나씨를 비롯해 여행작가 박준씨도 다녀갔다. 작년 말에는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의 촬영 공간으로 서재를 내어 주었다.
1분 거리의 방이 4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서재에 내려왔다가 말이 맞는 옆방 손님이나 아랫방 손님들이 만나 토론도 하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고 만다. 특히 집주인을 만나게 되면 취조(?)당할 각오는 해야 한다. 그는 숙박업을 하면서 매일 살아가는 이유가 손님들로부터 문화충격을 받는 것이란다. 전직 기자라는 것을 잊지 마라. 모든 것을 얘기하게 될 것이다.
빌딩 사막 너머에서 찾아낸 조용한 낙원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레몬하우스
숙소 소개 하는 데 너무 거창한가? 진심이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화가 유영희(柳英熙·69)씨와 남편 한동욱(韓東郁·71)씨가 사는 ‘레몬하우스’는 말 그대로 놀랄 만한 반전을 숨기고 있는 집이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분당 신도시 아파트 골목을 지나다 문득 ‘한적하고 고즈넉한 집이 있기나 한 걸까?’란 생각이 들 때쯤 콘크리트 뚝뚝 잘라놓은 듯 투박한 레몬하우스가 정체를 드러낸다. 집주인 유씨가 대문을 열어 반겨줄 때도 ‘뭘 믿고 이렇게 여유롭게 반기나?’ 싶다. 신발을 벗고 집주인을 따라 나무계단 위를 오른다.
몸을 돌려 집안 풍경을 눈에 담는 순간! 머릿속에 똬리 틀었던 불만이 사라지는 데 단 0.1초도 걸리지 않는다. 단정하게 벽면을 채운 그림들, 따뜻한 표정의 조각상들, 넓은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낙엽들, 실내를 따뜻하게 해주는 벽난로가 조금 전 일상과 완벽하게 분리해주는 묘한 작용을 한다. 조심스레 집안 구석구석 오르내리면서 둘러볼수록 아주 먼 곳을 이동해 여행 온 듯 마음 놓게 해준다.
이 집은 유씨의 오랜 친구이자 美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일본인 건축가 쿠도 쿠니오씨가 직접 디자인하고 집을 지었다. 전적으로 쿠도씨의 생각에 모든 것을 맡겼다. 이 집의 매력은 더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한 공간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따뜻한 서비스를 요구한다면 이 집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다. 산이 보이는 곳에서 코끝 시린 느낌도 좋다. 벽난로 앞에 앉아 만화책을 읽거나 소설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이 집에서는 음식을 해 먹는 것은 할 수 없다. 쉬러 왔으니 음식도 해먹지 말라는 집주인의 깊은 생각이다. 대신 집주인이 추천하는 맛집에서 청국장과 코다리찜 혹은 오리고기를 사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