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인상주의나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을 처음 본 당대 사람들은 ‘예술이 아니다’, ‘낙서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했다. 시간이 흐른 뒤 대중은 그들을 ‘창시자’라 일컬었고, 작품들을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듯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이들은 저마다 산통을 겪는다. 그리고 여기, 모바일 아트로 미술계에 한 획을 긋겠다는 남자가 있다. 국내 최초 모바일 아티스트 정병길(69) 씨다.
어떠한 창조적 본능이나 이끌림 같았다. 정병길 씨가 그림을 그린 까닭 말이다. 학창 시절 다른 숙제는 거들떠보지 않다가도 그림이나 공작(工作) 과제는 눈을 반짝이며 해냈다. 슥슥 휙휙 그렸다 하면 사생대회 1등은 떼놓은 당상. 뛰어난 실력에 담임선생님이 미대를 권유한 적도 있었다. 물론 뜻이 없진 않았지만, 당시엔 다른 꿈이 더 앞섰다. 우장춘 박사처럼 훌륭한 육종학자가 되어 농촌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것.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꿈으로 끝나버렸다. 아버지의 지병으로 가세가 기운 탓이었다. 원하는 전공보다는 장학금을 주는 농협대학을 택했고, 곧장 밥벌이를 시작했다. 30여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화실까지 마련해가며 붓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이란 목표로 하는 꿈보다는 오래 지니고픈 로망이었기에 쉬이 접지 못했을 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도 여느 직장인처럼 인생 1막을 정리할 때가 다가왔다.
“농협 지점장까지 하다가 2010년에 은퇴했어요. 당시 금융업계에서는 그만두고도 2~3년 더 일할 자리를 마련해줬거든요.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텐데, 당장 몇 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겠더라고요. 눈 한번 질끈 감고 일자리를 사양했습니다. 프리랜서 작가로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써볼 요량이었죠.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저성장 양극화 시대에, 그것도 무명인이 문예활동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여긴 게 큰 착오였죠.”
박수 받은 창직, 현실은 맨땅에 헤딩
정병길 씨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재주도 남달랐다. 당초 그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해 원고료로 생활비를 충당할 계획이었다. 은퇴 후 1년 동안 칩거하며 쓴 글을 ‘내 아이 이웃과 함께 더 큰 세상으로’라는 책으로 내놓았다. 2년 뒤엔 두 번째 책 ‘이젠 아빠를 부탁해’를 펴냈다. 주변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나마 다행히 그림으로는 ‘상하이아트페어’, ‘대한민국미술대전’, ‘행주미술대전’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개인전도 열며 초석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취미를 넘어 직업으로 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유명 작가가 아니니 결국 홍보 문제다 싶더군요. 신문 광고도 몇 번 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죠. SNS를 배워 직접 홍보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관련 강의를 듣다 만난 정은상 맥아더스쿨 교장이 모바일 미술 앱을 소개해줬습니다. 태블릿 PC에 떠듬떠듬 그려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당시 강사에게 매주 새로운 그림을 그려 보여줬더니, 모바일 미술을 업(業)으로 삼아보면 어떻겠냐 하더라고요. 그게 창직의 신호탄이 된 셈이죠.”
‘모바일 미술’(아트)이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의 모바일 기기에 내장된 그림 앱을 이용해 창작한 미술이나 예술을 말한다. 물감, 붓, 캔버스나 이젤 등이 필요 없고, 그 덕분에 별도로 화실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온라인이나 SNS상에 작품을 게시하거나, 출판물에 사용하기도 하고, 캔버스나 종이 등에 출력해 유화나 수채화처럼 전시할 수도 있다. 그런 모바일 미술이 정병길 씨에겐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친김에 정보를 찾아보니 해외에서는 입소문을 탄 장르였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전무했다. “옳거니!” 창조적 본능이 되살아났고, 그렇게 개척자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당시 모바일 미술을 가르치는 학원도, 선생님도 없었어요. 거의 독학으로 기법을 습득하고 펜업(삼성전자 그림 공유 서비스) 도움을 받았죠. 작품을 만들어 뭔가 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이 분야를 알리는 쪽으로 초점을 맞췄어요. 시장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람들의 반응을 보려고 SNS에 강좌 정보를 올렸더니 수요가 꽤 있더군요. ‘그러면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결론이 섰죠.”
그렇게 ‘모바일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탄생시켜 이를 개념화하고, 강좌와 전시를 통해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시대가 발전하며 모바일 미술용 앱과 플랫폼이 더욱 다양해졌고, 관련 툴(Tool)이나 출력 기술이 정교해지며 이 분야는 상승세를 탔다. 혹자는 찰나의 아이디어가 운때 맞았다 여길지라도, 이는 나름의 안목을 갖고 꾸준히 노력했기에 얻은 선물과 같다. 그 성과로 미래창조과학부 주최 ‘시니어 IT 일자리 사례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이라는 결실도 얻었다. 최근까지도 적지 않은 관심과 응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개척자의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에요. 미술계는 기득권의 장벽이 높고 굳건하니까요. 그런데 과거 예술 분야 개척자들을 보면, 대부분 목숨 걸어가며 단초를 마련하잖아요. 저는 아직 모바일 미술 때문에 목숨까지 건 적은 없지만, 돈은 참 많이 까먹었습니다.(웃음) 노후에 도움 되려고 한 일인데 오히려 리스크가 될까봐 걱정할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 말이 와닿더라고요. ‘안전한 길은 위험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안전하긴 해도 뭔가 즐거움이 없잖아요. 그거야말로 노후 리스크죠. 그래서 기왕 시작한 거 최대한 부딪혀보려 합니다.”
‘NFT, 줌’ 신기술과 만나는 모바일 아트
현재로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보단 투자하며 판로를 개척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돈을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다. 장차 모바일 아티스트가 촉망받는 직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 과제인 셈이다. 현재 작품을 판매하거나 저작권료로 얻는 소득은 높지 않다. 그보다는 학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새로운 기술과 직업을 알리는 강의를 통한 수입이 주가 된다. 여타 예술처럼 경매에서 작품의 우수성을 평가받아 높은 금액이 책정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구조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은 생소한 분야인 데다, 작품의 고유성이 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가령 일반적인 경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단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지만, 모바일 미술은 완성된 그림 파일을 종이나 다른 소재에 계속해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바일 미술의 가치 평가는 어떤 기준으로 해야 할까?
“판화 역시 여러 장 찍어낼 수 있잖아요. 대신 한정된 수량을 제작하고, 찍는 순서대로 숫자 표기와 서명을 남기죠. 가령 판화 아래 1/10이라고 표기돼 있다면, 10개 찍은 작품 중 첫 번째 에디션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판화의 개념으로 가치를 판단하면 좋겠습니다. 또 실크스크린 판화는 판면의 구멍에 잉크를 넣어 찍는데, 이 기법으로 여러 작품을 만들 수 있죠. 같은 방법으로 모바일 미술은 완성된 작품이라도 툴을 이용해 색이나 요소를 수정하고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데, 그 과정이 쉽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그는 NFT(Non 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한 토큰)의 개념을 접목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근래 디지털 수집품 거래가 활발해지며, 이러한 자산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도구로 NFT가 사용되고 있다. 미술 시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는 추세다. 모바일 미술 작품의 경우 파일 형태로 저장돼 NFT로의 변환이 용이하다. 정병길 씨 역시 이러한 장점을 살려 수익 창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신기술과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 집중한 아이템은 바로 ‘줌’(Zoom,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이다. 주로 방과후교실이나 사회교육원 등에서 모바일 미술을 가르쳤는데, 코로나19로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며 줌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첩하게 태세 전환을 하고 기술을 익힌 그는 이제 줌에 관해서도 반전문가가 됐다. 최근 2년 사이 ‘줌을 알려줌’, ‘줌 활용을 알려줌’이라는 줌 활용서를 두 권이나 펴냈으니 말이다. 물론 줌 역시 모바일 미술과의 접점을 꾀하고 있는 그다.
“제 목적은 모바일 미술의 매력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건데, 그동안 시공간의 제약이 많았거든요. 특히 섬이나 농어촌에 사시는 어르신처럼, 문화 수혜 격차를 겪는 지역민에게 줌으로 모바일 미술을 전파하려고 해요. 또 그런 분들도 모바일을 통해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줌 전시회도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꼭 전에 없던 무언가를 해야만 창의적인 건 아니에요.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을 어떻게 융합하고 접목하느냐에 따라 창작과 창직이 가능하다고 봐요. 자신의 재능이나 관심 있는 분야를 신기술과 잘 연결 지으면 누구든 저처럼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정병길 씨는 2020년 설립한 모바일아티스트협동조합을 통해 체계적으로 자신의 분야를 넓혀가고 있다. 전문인력 양성도 꾸준히 해나가고 있고, 장차 자격증 발급 절차 등도 논의해볼 방침이다. 그런 그가 모바일 아티스트로서 갖는 최종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모바일 아티스트가 가장 많은 나라 대한민국’을 이루는 것. 어쩌면 자칫 거대한 포부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즘 BTS(방탄소년단)를 비롯해 가수들의 한류 열풍이 대단하잖아요. 사실 우리나라처럼 동네마다 곳곳에 노래방이 즐비한 나라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일상에 스며든 예술이 결국 거대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봐요. 노래방에서 노래하듯 모바일을 통해 손쉽게 미술을 접한다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흔히 말하는 우리 동네 가수처럼, 우리 모두 저마다 작은 예술가가 되는 거죠. 특히 나이가 들수록 가슴속 예술 감수성을 깨우고 자유롭게 표현해야 삶이 풍요로워져요. 많은 중장년이 모바일 아트에 관심을 갖고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중에도 그의 손엔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20초 남짓한 짤막한 순간에도 무언가를 스케치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간을 무위(無爲)로 흘려보낸 기자가 이유를 묻자 그 또한 목표라 답한다. 어딜 가든 획 하나라도 긋고 오는 게 목표라고. 그 말을 들으니 수많은 획이 켜켜이 모여 언젠가 미술계에 큰 획을 긋게 될 정병길 씨의 모습이 더 선명히 그려졌다. 문제는 시간. 하지만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조급함이 없었다. 무언가를 이루기에 아직 인생은 늦지 않았으니까.
“모지스 할머니로 잘 알려진 미국의 국민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곤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놓은 작품만 1600점이 넘는다고 해요. 그중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렸다고 하고요. 그분의 삶은 제게도 큰 영감과 희망을 줍니다. 제가 힘을 얻었던 모지스 할머니의 말을 독자분들께 공유하고 싶네요. 여러분,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전국~ 노래자랑” 약 70년 동안 일요일 아침 시청자와 만나던 ‘국민 MC’ 송해(95·송복희)가 방송계 동료들과 국민들의 추모 속에 영면에 들었다.
고(故) 송해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4시 30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유족과 지인, 연예계 후배들 80여 명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영결식의 사회는 개그맨 김학래가 맡았다. 장례위원장인 엄영수(개명 전 엄용수) 방송코미디언협회장은 조사를. 개그맨 이용식과 이자연 가수협회 회장은 추도사를 각각 낭독했다. 또한, 코미디언 유재석, 강호동, 조세호, 이수근 등과 가수 설운도, 현숙, 문희옥 등이 참석했다.
송해가 각별히 아낀 후배 이용식은 추도사에서 “이곳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을 많은 사람들과 힘차게 외쳤지만 이제 수많은 별들 앞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외쳐달라”면서 "선생님이 다니시던 국밥집, 언제나 앉으시던 의자가 이제 우리 모두의 의자가 됐다. 안녕히 가시라"라고 작별인사를 전했다.
이자연 대한가수협회 회장도 “선생님은 지난 70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스승이었고, 아버지였고, 형, 오빠였다”라면서 “송해 선생님은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결식장에서는 다큐 ‘송해 1927’에서 발췌한 고인의 생전 육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영상에서 송해가 “전국”을 외치자 모든 참석자들은 “노래자랑”을 이어받으며, 마지막 ‘전국노래자랑’을 완성했다. 담담하게 영결식을 지켜보던 가족들은 고인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훔쳤고, 동료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어 이자연, 설운도 외 5명의 대한가수협회 가수들이 송해의 주제곡 ‘나팔꽃 인생’을 열창했다. 송해의 막내딸은 “존재만으로 희망의 상징이었던 아버지의 삶을 기억할 것이고 사랑을 많이 주신 많은 분들의 일상도 행복하길 바란다”라며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이어 임하룡, 전유성, 최양락, 강호동, 유재석, 양상국 여섯 명의 코미디언 후배들이 고인을 운구하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운구차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 송해길과 여의도 KBS 본관을 거쳐 경북 김천시 화장터로 향한다.
고인의 유해는 아내 석옥이씨(1934~2018)가 영면한 대구 달성군의 송해공원에 안장된다. 송해는 생전에 대구 달성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고, 명예군민이었다. 달성군은 송해의 이름을 따 송해공원으로 명칭했다.
앞서 송해는 지난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올해 들어 건강이 악화된 송해는 지난 1월과 5월 병원에 입원했으며, 3월에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또한 최근 KBS 2TV ‘전국노래자랑’의 야외 녹화가 2년 만에 재개됐으나 송해는 연이어 불참했다.
송해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희극인장으로 치러졌다. 애초 5일장을 논의했으나 유족의 요청에 3일장으로 변경됐다. 방송계 인사들은 물론 정부와 정치권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애도를 표했다.
고인의 영정 앞에는 금관문화훈장이 놓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일 송해에게 한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대통령실은 “지난 1955년에 데뷔한 송 희극인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다양한 분야에서 희극인 겸 방송인으로서 활동하며 재치 있는 입담과 편안한 진행으로 국민에게 진솔한 감동과 웃음을 선사해줬다”라고 추서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앞의 송해길에는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 9일 비가 오는 날씨에도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송해의 동상 주변에는 근조 화환과 함께 시민들이 놓고 간 국화꽃이 수북이 놓여있었다. ‘전국노래자랑’으로 시민과 호흡해온 송해였기에 그의 죽음에 많은 국민들이 슬퍼했다.
송해길에는 송해의 개인 사무실과 그가 생전 자주 이용했던 국밥집과 이발소, 사우나 등이 있다. 특히 ‘이천원 국밥집’은 송해의 생전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송해길에 가면 송해를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지역은 오는 15일 송해가 참석하는 ‘송해길 선포 5주년 기념 주민화합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안타까움을 더한다. 종로구의 최재형 의원은 “다음 주 송해길 선포 5주년 행사 때 뵙고, 좋은 말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아프다“면서 “모든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른”이라고 애도했다.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 온 뒤 1955년 창공악극단의 단원으로 무대에 오르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특히 그는 1988년부터 34년간 KBS 1TV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을 맡으며 ‘국민 MC’에 등극했다. 최근 영국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 평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그곳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그곳이 떠오른다. 바로 국립서울현충원이다.
6월을 앞둔 어느 날, 국립서울현충원에는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위로하듯 이팝나무꽃이 흩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슴이 아려지는 그곳에서 김수삼(57) 현충원장을 만났다.
김수삼 원장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행시 40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국방부 군수기획과장, 직무감찰담당관, 기획총괄담당관, 국제군수협력과장, 기획관리관 등을 역임했다.
국립서울현충원도 국방부 소속이다. 김수삼 원장은 지난 1월, 제23대 국립서울현충원장으로 취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별도의 취임식을 치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TV에서 그를 볼 기회가 많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 후와 5월 10일 취임식 때 현충원을 찾아 참배했기 때문. 김 원장은 “TV에서 저를 봤다며 반가워하는 지인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현충원장에 취임해 책임감을 느끼고 걱정도 많았는데요. 무사히 치를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어요.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들이 선거를 치르거나 당선될 때 현충원을 가장 먼저 찾는 것을 보고 정말로 중요한 곳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국민이나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목숨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의 중요성을 느끼고 자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국을 위한 선열들의 장소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 현충탑에 새겨진 글귀
서울 동작구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은 휴전 2년 후인 1955년 설립된 국군묘지가그 뿌리다. 6·25전쟁에서 전사·순직한 군인들을 안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5년 국군묘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됐고, 군인이 아닌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 안장도 가능해졌다. 이어 1996년 국립현충원,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름을 확정했다.
김수삼 원장은 “국립서울현충원은 조국의 독립과 수호, 발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영면해 계시는 민족의 성역이다. 국난을 극복해온 민족의 얼과 호국 의지, 나라 사랑 정신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총면적은 약 44만 평이며, 네 분의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총 18만 7000여 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모시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국립대전현충원은 1985년 건립됐고, 국립연천현충원은 2025년 건립을 목표로 준공 중이다. 김 원장은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연천현충원은 모두 같은 위상을 가진 국립묘지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서울, 대전, 연천현충원에 안장되는 대상자를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속이고, 대전과 연천현충원은 국가보훈처 소속이다.
김수삼 원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갖는 역사적인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의미 있는 곳의 원장으로 반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그의 소감은 어떨까.
“올해 1월 국립서울현충원장에 취임해 현충탑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참배를 드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상반기가 다 지나갔네요. 처음 참배를 드릴 때 현충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한편,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느꼈습니다. 제가 당시 다짐한 것이 있어요. 장례와 추모 행사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와 엄중한 코로나19 상황 등에 맞춰 보다 체계적이고 품격 높은 안장 및 참배·추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유공자 및 유가족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기 위해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좀 더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김수삼 원장은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설 명절 때 유가족을 대신해 직원이 참배드리고 이를 사진 찍어 전송해주는 ‘설맞이 참배 대행 서비스’를 실시했다. 또한 유가족의 편의를 위해 참배용 사다리 및 참배용 원목 의자를 비치했고,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셔틀버스 운행도 시작했다고.
김 원장은 취임 후 가장 뜻깊었던 일로 지난 4월의 ‘제2충혼당 개관’을 꼽았다. 제1충혼당은 영현 2만 468위를 모신 후 2020년 7월 만장됐다. 제2충혼당은 2018년 착공돼 올해 4월 13일 완공됐다. 제2충혼당에는 3만 2952위를 추가로 안장할 수 있다.
“제2충혼당 건립을 통해 유공자분들을 최고의 시설로 모실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나라 사랑 및 호국 정신을 후대에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제2충혼당 개관식에서 배우 신현준 씨가 사회를 봐주셨고, 가수 진미령 씨가 추모시를 낭독해주셨습니다. 두 분 모두 이곳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유공자의 후손입니다. 행사 며칠 전에 갑자기 부탁드렸는데도 기꺼이 다른 일정을 조정하고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유해 발굴 및 확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한 사실은 확인됐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이들의 위패가 10만 3000여 위나 있다. 김수삼 원장은 “현재도 이분들의 유해를 찾기 위한 유해 발굴 사업이 꾸준히 진행 중이지만 발굴된 유해 중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호국용사는 극소수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또한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에도 134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구한말 의병 활동 및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분들 가운데 유해를 찾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선열들의 위패다.
그러나 안장되어 있고 유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음에 따라 유가족이 꾸준히 현충원을 찾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그 원인은 거주 지역이 멀어서 일 수도 있고, 가족이 달라지거나 건강 상태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분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에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때문에 기혼자가 적어 후손이 없거나, 남은 유가족 대부분이 형제나 조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묘역을 찾는 유가족이나 친지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점점 쓸쓸한 묘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선열의 희생에 감사하며 ‘내가 후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쓸쓸한 묘소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죠.”
현충원, 국민 속으로
일반 국민에게 ‘현충원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나?’, ‘실제로 현충원에 가본 적이 있나?’라고 물어보면, 현충원 근처에 사는 서울시민이나 견학을 가본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현충원을 찾아가 봤다고 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보통 TV를 통해 6월 6일 현충일 행사를 보면서 국립서울현충원을 접한 경우가 대부분일 터. 그렇기 때문에 현충원은 정부 관계자나 유공자의 후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원래는 국립묘지였기 때문에 매우 엄숙한 공간이라고 느껴진다.
김수삼 원장 역시 ‘일반인이 현충원에 들어갈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현충원이 무겁고 어려운 이미지가 아닌 국민과 함께하는 열린 호국공원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특히 44만 평의 국립서울현충원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김 원장은 “봄에는 아름다운 수양벚꽃, 여름에는 이팝나무 가로수길, 가을에는 현충원 둘레를 잇는 은행나무길이 아름답다”면서 “이와 더불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슴 깊이 간직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수삼 원장의 말대로 국립서울현충원은 아름답고 뜻깊은 곳이다. 현충원을 걷다 보면 느껴지는 감정도 많을 것.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근무 환경이 좋아서 오래 일하고 싶다”는 김 원장은 현충원의 명소로 현충천과 현충지를 추천했다.
“현충원에 천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이 많지 않은데요. 현충천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사시사철 다양한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고기들도 많고요. 현충지는 조그마한 연못으로 가만히 앉아서 사색하거나 소위 ‘멍때리기’ 좋은 곳입니다. 많은 어르신들이 찾아와 휴식을 취하시기도 하는데요. 심지어 심신을 치유하신 분도 많아 후손들이 감사한 마음에 기증한 의자도 있어요. 저도 점심 식사 후 산책할 때 현충천과 현충지는 거의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김수삼 원장은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온·오프라인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국립서울현충원은 온라인을 통해 ‘기일 : 기억의 날’(당신을 기억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독립유공자가 서거한 달에 맞춰 업적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독립유공자 하면 어떤 분들이 떠오르시나요? 대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님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이분들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이 계십니다. 기일 프로젝트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신 독립유공자들의 업적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고,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기획했습니다. 한분 한분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5월 21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 경내에서 호국 문예 백일장과 그림 그리기 대회를 개최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지난 2년간은 비대면으로 개최됐다. 김 원장은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이들의 현충원 방문을 뿌듯해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제한됐던 행사를 앞으로 적극적으로 개최하고, 시민들의 참여의 장을 넓히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수삼 원장은 재임 기간의 목표에 대해 “국민과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열린 호국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이라면서 “국민들이 언제나 편안히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호국정신을 배우며 후손들에게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수삼 원장에게 현충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목표를 물었다. 그는 “곧 정년을 맞이하기 때문에 퇴직 후를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먼저 퇴직하신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돈, 건강, 취미, 친구들이 있어야 노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근로소득은 정년까지 일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퇴직 이후에는 금융소득을 통해 번다는 목표로 퇴직연금, 리츠, 부동산 펀드 등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요즘 사이버 대학이 많아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공부를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편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며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지금은 한국어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졸업하면 외국인 학습자를 가르칠 수 있는 한국어교원자격증이 부여됩니다.”
‘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 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국민 MC' 송해가 자신의 인생을 담은 트로트 뮤지컬을 통해 대한민국 산역사의 증인임을 입증했다.
지난달 31일 KBS 2TV에서는 설 기획 프로그램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가 방송됐다. 송해의 95년 인생을 트로트 뮤지컬 형식으로 꾸민 헌정 공연으로 웃음과 감동을 전해줬다.
시청률 조사 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방송은 시청률 12.7%를 기록했다. 이는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29%)보다 낮지만, 지난해 추석 특집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11.9%)보다는 높은 수치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는 트로트 가수 정동원, 이찬원, 영탁, 신유 등이 송해를 각 나이별로 연기하면서 송해의 인생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악인 박애리가 송해 어머니 역할을 맡았고 국악인 송소희, 박서진, 김태연, 홍잠언 등도 출연했다. 이들은 모두 KBS 1TV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송해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극의 1막은 청년 송해의 유년기와 그가 실향민이 된 과정을 담았다.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송복희였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1951년 1월, 송해가 사는 마을에는 6·25 전쟁의 여진이 지속됐다. 전세에서 밀린 인민군 3000여 명이 산에 숨어들었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흘에 한 번 꼴로 마을로 내려와 식량 등을 빼앗아갔다. 그때마다 청년들은 집을 떠나야 했다.
인민군에 발각되면 징집됐고 반항하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을 피해 연평도로 몸을 숨긴 송해는 영영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송해는 극에서 어머니를 보지 못한 채 6·25 전쟁 피난길에 오른 청년 송해(이찬원 역)의 연기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송해는 무대에 올라 "제 가슴에는 언제나 어머님이 계신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를 한 곡조 부르려 한다"며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송해의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목소리에 관객들 또한 눈물을 닦았다.
2막에서는 송해가 1955년 '창공악극단'으로 데뷔하며 꿈을 찾아가는 내용을 담았다. 3막에서는 송해가 1988년부터 35년째 진행하고 있는 '전국노래자랑'의 이야기를 다뤘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매년 최소 관객 5000명에서 최대 1만 명까지 만났다. 34년 간 만난 관객수만 1000만 명에 달했다. 이들 중 전국 각지에서 200여 명을 관객으로 초대했다.
마지막으로 송해는 "땡과 딩동댕 중 뭐가 더 소중하냐고 하는데,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 나 역시 '전국노래자랑'에서 내 인생을 딩동댕으로 남기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노래 '내 인생 딩동댕'을 불렀다. 특히 모든 출연진이 노래를 함께 불러 감동을 더했다.
송해의 회고록과도 같은 뮤지컬을 통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속에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녹아있었다. 더불어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송해의 건강한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지난 1월 22일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녹화에 참여하지 못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걱정 어린 반응이 더해졌다.
한편, KBS는 최근 송해를 '최고령 TV 음악 탤런트 쇼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올리기 위해 기네스 협회에 신청했다고 밝혔다. 기네스 협회의 기초적인 검토를 마치고 도전 신청이 공식 확정됐다. 현재는 영국 기네스협회가 제공한 심사 지침에 따라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다.
이주호는 느리고 부드럽다. 맑고 고요하다. 푸근하고 꾸밈없다. 그의 진솔함과 진득함에는 포크계 거장의 이미지보다 웅숭깊은 우물에서 노래를 길어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이 어려 있다. 이성보다 직관으로, 분석보다 느낌으로, 머리보다 가슴으로 우리의 영원한 테마이자 구원인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다. 인생 전체를 사랑바라기, 행복바라기로 영위해온 해바라기 이주호, 그의 참 좋은 시절은 그때고, 지금이고, 앞으로다.
영혼으로
그에게 언어는 마지못해 빌려온 연장 같다. 한 가지를 가지고 이것저것 때우듯 쓰는 것 같은데도 충만한 감성 덕에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가령 그가 말하는 ‘동반자’는 아내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타를 뜻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인 기타라는 친구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그렇게 소리가 좋을 수 없는 거라.” 이런 식이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를 ‘그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모두를 힘들게 했지. 이제는 그 친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언어는 이분법의 도구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로 인해 상처 주고 상처받는 데는 언어만 한 비수가 없다. 말로, 글로 받은 생채기를 싸안고 보듬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이분법의 경계를 지울 수 있다. 내 안에 너를, 네 안의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영혼과 마음의 대화인 셈이다. 그 사랑을 선율에 앉히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나약함을 강함으로 바꾸는 그의 노래는 언어적 이분법을 해체한 자리에 사랑을 흘려보낸다. 어언 50주년을 맞는 이주호 노래 인생의 주 테마는 그렇게 사랑인 것이다.
그는 1956년, 10남매의 일곱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업가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평탄하게 성장했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심적 고생도 이주호만큼은 빗겨갔다. 노래처럼 인생이 술술 풀려나갔다고 할까. 그에게 노래는 인생과 같은 말이니 노래하는 인생 그 자체로 행복했다.
“아버지는 명보당이라고 보석 다루는 일을 하시면서 삼성물산 초기에 이병철 아저씨한테 돈을 대주던 전주였어요. 운수업도 하셨고요. 어머니와 이모들은 성악을 전공하셨지만 십대 때의 저는 음악적 재능이 표출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그냥 취미로 한 게 전부였죠. 형제들도 음악 하는 사람은 없고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음악이 제게 왔어요. 온몸과 온 마음에 세례를 받았다고 할까요? 저절로 곡이 떠오르고 가사가 써졌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영혼이 노래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던 거죠.” 이 또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저 천부적 재능이 주어졌다고 할 수밖에.
그는 곡을 만들 때 감성의 원형인 자연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 자연의 곡선을 따라 선율이 흐른다. 해바라기가 해바라기인 것도 의도함 없이, 인연 따라 무위로 다가온 결과다. “당시 명동가톨릭회관에서 젊은이들이 음악 모임을 하곤 했는데, 그때 방 이름이 들국화, 코스모스, 장미, 해바라기 등이었어요. 제가 주로 이용한 곳이 해바라기룸이라 수녀님이 그룹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대로 따른 거죠.”
인연으로
아는 사람은 알지만 해바라기는 원래 혼성 4인조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호,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 이렇게. 1977년의 일이고, 첫 앨범이 그때 나왔다. 그러다 이정선이 입대하고, 이광조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같은 해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이후 김영미의 해외 유학으로 4인조 해바라기는 해체를 맞게 된다. 이주호는 군 입대로, 이광조, 한영애는 솔로로 나섰다. 제대 후 이주호 또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솔로 데뷔를 한다.
1982년 유익종과 듀엣 해바라기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바라기가 이때 탄생한다. 그러다 유익종이 떠나가고 이광준이 옆지기가 되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가 부상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어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어서 말을 해’ 등이 주목받았다. 3집에서는 다시 유익종과 함께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내 마음의 보석상자’가 히트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명기,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그의 옆을 지켰고, 강성운과는 1999년 이래 10년간 호흡을 맞췄다.
왜 그렇게 자주 파트너를 바꾸냐는 의아한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바람이 오고 가는 것처럼 인연 따라 일어난 일이라 여긴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여 함께하자거나 계획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가는 인연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던 것. 함께 노래하고 싶어 만났고 떠날 때가 되어 떠나갔다. 그러다 바람처럼 또 휘감겨올 때 그 인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와 함께 가장 오래 노래한 강성운은 해바라기의 ‘찐팬’으로 고등학교 때 ‘해보라지’라는 팀을 만들어 고교 축제 무대에 섰다. 애오라지 해바라기 노래만 부르던 그가 해바라기의 정식 일원이 되어 언감생심 이주호 옆자리를 꿰찼을 땐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
최근에는 건반을 맡는 아들 이상 씨가 합류하면서 밴드 해바라기가 탄생했다. 이상은 2000년 그룹 유.피.에스(U.P.S)로 데뷔했다. 래퍼 도끼 등과 그룹 레이원으로도 활동했고, 2005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1집 앨범 ‘올 어바웃 다 러브’(All About Da Love)를 냈다. 미국인 외할아버지를 둔 혼혈 3세로 두드러지게 출중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 덕에 모델로도 활동했다. 아버지 이주호와는 위례신도시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면서 음악인 이전에 자연인으로 부자의 정 또한 돈독하다.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세요. 항상 뒤에서 묵묵히 후원해주시죠. 음악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해보신 적이 없었듯이 저 또한 음악 외의 길을 간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 음악을 하면서 해바라기 밴드로도 활동하는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이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만든 곡은 약 1000곡, 그 가운데 이주호가 가장 마음에 품고 싶은 노래는 1989년에 만든 ‘사랑으로’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애창곡 ‘사랑으로’의 배경에는 사연이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곡과 가사가 동시에 떠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곡이 먼저 진행될 때도 있고 노랫말부터 완성될 때도 있다. ‘사랑으로’는 곡을 만들어놓고 2년이나 흘렀지만 어찌된 게 가사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라 국민의 정서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적 주목과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며 한껏 들떠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잃어버린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신문 기사를 접한다. 김포공항 부근 환경미화원 가정의 네 자매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을 비관하여 농약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중 세 살 막내가 생명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수입은 고작 월 25만 원, 올림픽을 치를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에서 라면값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던 이주호는 눈물을 글썽인 채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를 써 내려갔다. 받아 적는 손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울림 가득한 노랫말이 쏟아졌고, 두 볼과 가슴에는 눈물이 타고 내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오르네 /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사랑으로’가 알려지면서 막내딸을 잃은 환경미화원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낮고 어두운 곳에서 노래로 위로와 행복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랑으로’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공감대의 동심원은 국내의 문턱을 넘어 세계로 번져나가, 2001년 키예프 국립오케스트라와 ‘For the Peace’ 음반을 녹음하고,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는 세계 명곡 음반 ‘Around the world’에 자신이 직접 부른 ‘사랑으로’를 수록했다. 만국어인 사랑이 ‘사랑으로’ 노래가 되어 국제가요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행복으로
내 인생은 행복했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에게도 원초적 아픔은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끝을 만나야 하잖아요.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 모두를 슬프고 아프게 하지요. 아무리 찬란했던 인생도 늦가을 나뭇잎처럼 어느 순간에는 다 놓고 떠나야 하니까요. 바람 같고 낙엽 같은 인생, 그런 것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혼자 슬피 울기도 하고.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원초적 막다름을 마주하나 살펴보려고 시장을 한 바퀴 휙 돌기도 하고. 일부러 이것저것, 여기저기 부딪혀보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그렇게 얻은 내 사유와 정서를 타인들과 공유하고, 내가 하는 고민과 번민을 딴사람도 할 거라고 믿기에 그런 것들을 노랫말에 녹이는 거지요.”
그는 1993년 유럽 순회공연 때 스위스 바젤에서 만든 곡 ‘해지는 강변’(11집에 수록)을 떠올렸다. 각자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날 거라고 하면서. 지난 8월, 스위스 바젤의 한 비영리단체를 통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64세 한국인 폐암 말기 환자를 배웅하고 온 필자에게 위로차 들려준 곡이기도 하다.
해지는 강변에 홀로이 찾아와 물빛에 비치는 금빛 햇살은 / 조약돌 세는 내게 지나간 시간에 아름다웠던 얼굴들을 보이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강변에서 오랜 시간 지나간 후라도 서로가 서로를 찾아보자 했지/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보이네/ 그 후론 우리는 나름대로 길을 갔었지/ 물살이 지우는 그 사람들의 얼굴은 어느덧 세월의 골이 새겨있어 아무도 모를 우리의 시간들
“저의 온 존재가 노래를 통해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저는 지난달 가수 인생 처음으로 제가 만든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배의 곡이죠. 원래는 제게 편곡을 부탁하러 온 건데 나중에 제가 꼭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간청하는 거예요. 받아들였습니다. 이 또한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자 새로운 행복일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버티고 버텨온 내 삶의 끝에서 당신 만나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그리움을 참고 밤하늘을 보면 당신 얼굴이 보여요/ 이렇게 사랑한 내 마음, 당신을 잊어야만 하는데/ 때로는 우는 얼굴, 우는 버릇, 눈물 버릇 언제나 받아주던 당신이기에/ 가라고 가라고 하진 마세요/ 지금은 갈 곳이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떠날 테니까/ 서둘지 말아요, 이미 끝난 사랑 서둘지 마세요
”올 한 해도 그리움과 함께, 코로나와 함께 지냈네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소망 꺾지 않고 헤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 제가 만든 노래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붙잡아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올해 끝자락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가을이면 오시려나’의 노랫말 중에 ‘겨우내 얼었던 가슴들은 서로를 위로하는데’라는 구절이 있어요.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내 아픔이 네 아픔이고, 네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걸 서로 알아주는 것, 그런 게 공감이자 행복이 아닐까요? 이만큼 살아보니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현존하는 최고령의 연예인은? 바로 '국민MC' 송해다. 올해 그는 만으로 94세가 됐고, KBS 1TV '전국노래자랑' MC로 활약한 지도 33년이다.
연예인, 그리고 인간으로서 송해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윤재호 감독)이 오는 18일 개봉한다. 송해와 프로듀서 이기남이 함께 집필한 동명의 에세이집도 17일 출간된다.
'국민MC'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무대 위에서는 항상 밝고 친근한 모습이지만 무대 뒤의 진짜 송해는 그렇지만은 않다. 인간으로서,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아픔을 갖고 있기 때문. 영화는 이처럼 우리가 몰랐던 송해에 대해 조명한다.
송해는 지난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송복희였다. 바닷길을 건너온 데 착안해 '바다 해(海)'자를 예명으로 썼다. 그는 현재도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송해는 "제 꿈은 제 고향 황해도 재령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그는 6·25 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 온 뒤 창공악극단의 단원으로 유랑 극단 무대에 오르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송해는 지난 9일 진행된 언론시사회와 기자간담회에서 당시가 가장 힘들었다면서, "그러다 보니 건강을 해치게 되어서 병원에 6개월 입원했다가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려고 하니깐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또한 그는 당시 극단적인 생각을 하며 남산 팔각정에서 뛰어내렸지만, 소나무 가지에 걸려서 가정으로 돌아간 순간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또 기회를 줬구나 생각이 들었고, 제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온 게 오늘날까지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살아남으려고 애쓴 송해는 이후 가수, 희극인, MC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이순주 등과 함께 무대에 서며 이름을 알렸다. 교통방송 라디오의 시초가 된 동아방송 '가로수를 누비며'를 17년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다시 아픔이 찾아왔다. 지난 1986년 송해의 아들이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 송해는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을 반대했었고, 이는 사무친 한이 됐다. 영화에서는 아들이 남긴 자작곡을 30년이 흐른 뒤에야 뒤고 오열하는 송해의 모습이 담겼다.
송해는 기자간담회에서 "아버지 노릇을 잘했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리더라. 자격을 잃은 아버지로서 후회가 크다"며 "(아들) 사고 이후에는 한남대교를 건너가지도 못했다. 나는 죄인이었고 몹시 마음이 아프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면서 자식을 밀어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족의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겠나.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잘 됐었으면 그런 화는 면하지 않았을까 해서, 솔직하게 아버지로서는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덧붙였다. 송해는 "가족끼리 많이 대화하시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기도.
아들을 떠나 보내고 힘들 때인 1988년,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만났고, 에너지를 얻었다. 그는 "'전국노래자랑'은 여러분과 만나는 기회가 됐다"며 "대화를 통해 고통받은 분들의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송해는 '살아있는 전설', '일요일의 남자' 등 수식어도 많다. 그중에서도 그는 '영원한 오빠'라는 별명이 가장 좋다고 밝혔다. 그 이유에 대해 "'전국노래자랑' 출연자 가운데 최연소자가 만 3세고, 최고령자가 115세 되신 할머니셨는데, 세대를 넘어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해온 만큼 난 '영원한 오빠'기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일종의 구원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모임에 끌려다녔던 시절, 자리에 빈 병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신입생은 순서대로 일어나 노래를 한 곡씩 뽑아야 했다. 흥이 나는 노래는 잘 몰랐지만, 평소 즐기는 노래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당신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인연은 인생의 주요한 길목에서 계속 힘이 되어줬다. 어려서는 이 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가수 이자연을 만나기로 했을 때,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이 되어주었던 이 노래에 대한 감사 표시는 하고 싶었다. 그간의 도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견한 한 가지 특징은 바로 ‘가족’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 애틋한 마음을 오래 품고 살아서인지, 그녀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을 가족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형제애로 다져진 나훈아와의 인연
일본에서 활동할 때 NHK 한국어 프로그램 출연의 계기가 된 재일교포 민단에서 활동하던 언론인을 ‘일본 아버지’라고 부른다. ‘일본 엄마’는 두 분이나 계신다. 4년간이나 이어졌던 일본 생활에 힘이 됐던 사람들이다. 아직 생존해 계신 일본 엄마는 여전히 안부를 챙길 정도다.
또 다른 가족 중에는 가요계의 거목 ‘나훈아’가 있다. 그녀는 “아마 전생에 형제였을 것”이라 표현한다.
“1982년 길옥윤 선생님 소개로 한일친선협회 일본 공연에 합류하게 됐어요. 거기서 나훈아 선배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요. 무명이었던 제가 두 분께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나중엔 선배님과 반반씩 나눠 공연할 정도가 됐으니까요. 나훈아 선배님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많은 빚을 지고 있죠.”
일본 공연이 끝나던 1986년 이자연은 나훈아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온 국민이 손뼉 치며 불렀던 그 노래 ‘당신의 의미’다. 애초에 이 곡은 나훈아가 1969년 발표했던 ‘내 당신’이 원곡이다. 개사를 거치고 제목까지 바뀌었으니 ‘감히 나훈아의 곡을 개사했다’는 오해도 받았다.
“처음엔 신곡인 줄 알았어요. 나훈아 선배님이 주신 곡이라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죠. 이 곡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개사된 곡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죠. 선배님이 여자 노래로 가사를 바꿨다고 설명해주시더라고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나중엔 ‘내가 더 잘 불렀다’고 농을 할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나훈아와의 인연은 그녀가 ‘가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나이 눈물’ 역시 나훈아가 불렀던 곡을 다시 받아 발표한 것이고. ‘서울나그네’는 나훈아가 작곡한 다음 날 이자연에게 곡을 소개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빼앗다시피 졸라 곡을 얻어왔다”고 표현했다. 이자연의 곡 ‘만남과 이별’, ‘백세시대’, ‘친구야’를 만든 작곡가 박성훈도 나훈아를 통해 알게 된 인연이다.
“남들은 선배님 얼굴 한 번 보려고 티켓 구하느라 분주하고 암표도 사는데 저는 옆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 늘 감사해요. 대한가수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협회 발전기금까지 주셨으니까요. 선배님의 제자로 데뷔 때부터 계속 도움만 받으며 살고 있어요. 선배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아요.(웃음)”
잊지 못할 인생의 버팀목, 아버지
그 많은 아빠와 엄마, 오빠와 언니 가운데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주는 기둥이 한 사람 있다. 진짜 가족, 바로 아버지다. 그녀가 중학생 신분으로 1973년과 1974년 지역 MBC와 KBS 노래자랑에서 최고상을 연이어 수상하고, 음반 취입까지 이뤄졌을 때 아버지는 한탄했다. 자신의 딸이 딴따라가 돼서도 아니고, 당신이 희망하는 직업을 갖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식의 재능이 빛나는 분야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맘껏 지원해줄 수도, 맘 편히 응원할 수도 없어서 한스러웠다.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걱정은 어느 날 현실이 됐다. 성인이 된 이자연의 가수 선언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죠. 늘 무대를 꿈꾸던 소녀였으니 제안을 마다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죠. 1년만 하게 해달라고. 그 후에는 진학을 하든 시집을 가든 아버지 뜻에 따르겠다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얻어 야간업소를 시작으로 무대를 찾아다녔죠.”
하지만 그 1년이라는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딸은 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겠다’며 고집스럽게 맹세를 이어갔지만,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이자연은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됐고, 가수 생활로 동생 네 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전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어요. 아버진 소년 시절부터 동네에서 노래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동네의 열성 팬 중에 외할머니도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점찍어놓고 어머니와 결혼시켰어요.(웃음) 아버지는 재능을 펼쳐볼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대신 저를 내보내신 것 같아요. 노래할 때 고음에 다다르면 아버지 목소리가 나와요. 어릴 때 듣던 그 목소리 말이에요.”
꼬마 이자연은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를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그 자리에서 노동요처럼 불렸던 ‘황성옛터’나 ‘번지 없는 주막’을 배웠다. 또 아버지가 좋아하던 ‘새타령’이나 ‘릴리리아’ 같은 민요도 함께 불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들을 사이좋은 부녀는 함께 불렀고, 아버지의 노래가 좋았던 소녀는 가수의 꿈을 키웠다. 이 곡들은 이자연이 자신의 노래가 많지 않던 신인 시절 공연의 레퍼토리로 쓰였다.
“콘서트에서 이 곡들을 부를 때는 기타나 아코디언 하나만 놓고 무대를 꾸며요. 조용한 반주 속에 노래하다 보면 하늘에서 아버지가 들어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러다 보면 자꾸 눈물도 나고요. 요즘엔 공연 전에 아버지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무대에 오르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MZ세대와 동기동창이 되다
“나 학교를 다녀볼까?” 언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동생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라에 연이어 국장이 생기며 설 무대가 사라진 언니가 궁핍해졌나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네 명의 동생은 가수 언니를 후광 삼아 대학도 나오고 출세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늦은 나이지만 배움을 시작하겠다 선언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자매는 쉬지 않고 눈물을 훔쳤다.
늦은 나이에 배움의 한을 풀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학부생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절차를 밟아나가는 이는 찾기 힘들다. 이자연은 정공법을 택했다. EBS 교재를 손에 잡고 방송 수업으로 기초부터 공부했다.
“처음엔 당연히 어려웠죠.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고. 기초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냥 무작정 반복해서 수업을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나중엔 선생님 농담까지 외워지더라고요. 쉰 살이 넘자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이 늘 아버지에게 죄스러웠는데, 학교에 들어가니 맘이 놓이더라고요.”
그렇게 2011년 건국대학교 예술문화대학 예술학부에 합격했다. 이자연의 11학번 동기들은 그 면면이 화려하다. BTS의 진과 배우 이종석이 대표적이다. 선배로는 샤이니의 민호, 배우 고경표가 있다. 이자연은 소속사도 없던 신입생 시절의 모습이 강렬한지 아직도 BTS 진을 ‘석진이’라고 부른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 두 사람이 와서 말을 걸어주었어요. 그때 건네준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친구들은 모를 겁니다. 어딘가에서 제 노래를 실컷 불러놓고는 ‘열창했다’며 너스레를 떨 때는 친동생처럼 귀여워요. 아이들이 제게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제 노래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노래가 새로운 인연을 더 깊게 만들어줄 때마다 노래의 힘을 느껴요.”
이후 이자연은 대학원까지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도 그녀답다.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대중가요의 특성에 관한 연구 : KBS 를 중심으로’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연구는 가요무대에 등장한 곡들을 통해, 시기마다 사랑받은 노래들이 어떤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연구했다. KBS의 도움을 받아 30년이 넘는 기간을 모조리 살폈다.
“우리 대중가요는 역사적 큰 사건을 기점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가 많아요. 일제강점기에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한국전쟁 때는 가족을 찾는 식이죠. 역사 속에서 우리 가요가 어떻게 사랑받았는지 보면서 대중가요의 사회적 역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죠.”
가요계 보살피는 어머니로
최초의 여성 대한가수협회장. 그녀를 장식하는 또 다른 수식어다. 2018년 갑자기 공석이 된 회장직을 선출하기 위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부회장이었던 이자연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당시 비대위의 좌장 격이었던 협회 명예회장 남진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또다시 소녀 가장 생활을 시작하느냐고. 그 얘기를 들으니까 오히려 용기가 생겼어요. 그냥 집에서 내 살림하듯이 꾸려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용기가 나더라고요.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쉬워졌어요. 그래서 겁 없이 정부 기관부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분들을 만나러 다녔죠. 그렇게 움직이다 보니 하나둘씩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살림 실력이 좋았던 덕일까. 대한가수협회는 창립 64년 만에 지정기부단체로 지정받는다. 협회 후원 확보에 날개를 단 셈이다. 코로나19로 설 곳이 없어진 후배들을 위한 예산 마련에도 힘썼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전국민 희망콘서트’, ‘전국 TOP 가요쇼’ 같은 무대를 만들었다. 사라진 무대를 직접 되살린 셈이다.
“‘전국민 희망콘서트’는 드라이브스루 형식으로도 진행됐어요. 코로나19 상황에서 팬과 가수가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었죠. 300여 대의 차량이 제천 활주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신나는 리듬에 차들이 들썩거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어요.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었죠. 무대가 그리웠던 가수만큼이나 팬들 역시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이자연은 지난 9월 대한가수협회 제7대 회장으로 연임이 확정됐다. 그녀의 왕성한 활동이 인정받은 것이다. 이제 그녀의 관심은 협회의 새로운 사업 분야인 역사를 담을 그릇에 집중되어 있다.
“얼마 전 이미자 선생님이 이사하시면서 공간 문제로 개인적인 자료를 한 트럭 가까이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쳤어요. 이런 경우를 흔히 봐요. 스타 선배님이 돌아가시면 남겨진 유품은 모두 개인이 소장해버리고, 나중에 공익적인 목적으로 확보하려고 해도 큰돈이 들죠. 협회 차원의 ‘박물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료들을 확보해놓을 수 있는 자료실 정도는 만들고 싶어요.”
가요계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걱정은 많은 변화를 이뤄낼 것이다. 이렇듯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간 그녀가 인생의 과정에서 보여준 많은 결과와 성과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좋아하는 가족에 빗대 표현하자면, 이제 그녀는 가요계에서 어머니 역할을 해나가는 중이다. 트로트라는 고질적인 명칭 문제에서부터, 협회 회원 자격 기준 정리, 신인 전통가요 가수가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원곡 가수의 권리 보호에 관한 문제까지, 그녀의 관심사는 넓고 깊다. 가요계 구석구석 어머니의 마음이 미치고 있다.
끼는 대물림 된다는 말이 있다. 한 때를 주름잡은 중년 스타들을 보면, 2세도 부모를 따라서 연예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딸'이라는 수식어로 유명해지지만, 이와 함께 그 꼬리표를 넘어서야 대중에게 인정받는다는 숙제를 받는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보면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고 부모보다 더 잘 나가는 2세들이 꽤 있다. 최근 눈에 띄는 다섯 명의 스타를 정리해봤다.
견미리 - 이유비·이다인
배우 견미리와 딸 이유비 이다인, 세 모녀는 유명한 스타 가족으로 꼽힌다(아버지는 탤런트 임영규). 원래 견미리의 딸 하면 이유비로 통했는데, 요즘은 동생이 더 유명하다. 이다인은 1992년생으로 엄마와 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4년 tvN 드라마 '스무살'로 데뷔, KBS2 '화랑', KBS2 '황금빛 내 인생', MBC '이리와 안아줘', KBS2 '닥터 프리즈너', SBS '앨리스' 등에 출연했다. 우월한 유전자와 함께 안정된 연기력으로 이름을 차차 알렸다.
그러한 가운데, 이다인은 특히 올해 주목 받았다. 지난 5월 배우 겸 가수 이승기와 열애 사실을 공식 인정했기 때문. 한 차례 결별설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으며, 두 사람은 예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들이 결혼하길 바라는 반응이 많은 만큼, 스타 가족의 명맥이 계속해서 이어질지 기대를 모은다.
허재 - 허웅·허훈
'예능 대세'로 통하고 있는 농구선수 출신 허재. 요즘은 허재보다 두 아들 허웅과 허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세 사람이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 '코삼부자'는 구독자 16만 명을 넘어섰다. 허재 역시 최근 MBC '라디오스타'에서 두 아들의 인기에 대해 "얹혀가는 기분도 든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허웅과 허훈은 허재의 좋은 유전자만을 물려받았다. 농구 실력은 물론, 외모와 예능감까지. 두 사람은 본업인 농구선수로서 열중하면서, 방송 활동도 겸하고 있다. 허웅과 허훈은 MBC '호적메이트'에 같이 출연해 찐형제의 면모를 드러냈고, 허훈은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허훈은 허재와 함께 SBS '정글의 법칙'에 출연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서정희 - 서동주
과거 서세원과 결혼할 당시에도 청순 미모로 주목 받은 서정희. 그는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운 동안 미모를 과시하고 있다. 특히 발레도 꾸준히 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서정희는 60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미모를 지녔다. 그리고 서정희의 아름다움을 딸 서동주가 그대로 물려받았다.
다른 2세 스타들과 같이 현재는 서동주의 이름과 얼굴이 더 알려진 상태다. 그는 미국 변호사 출신으로 현재 방송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고스펙자이지만 털털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대중의 호감을 얻었다. 특히 그는 현재 SBS '골 때리는 그녀들'에 출연 중으로, 축구 선수로서의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이경실 - 손보승
최근 방송된 TV조선 '국민가수'에 이경실의 아들이자 배우 손보승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2주 만에 10kg을 감량했다"는 그는 훤칠해진 외모를 자랑하면서, 폭풍 가창력으로 올 하트를 받았다. 손보승은 SBS 화제의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출연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경실은 과거 딸 손수아, 아들 손보승과 JTBC '유자식 상팔자'에 출연한 바 있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두 사람은 밝고 귀여운 성격으로 눈길을 끌었고,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배우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엄마 이경실과 과거 '유자식 상팔자'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배동성 - 배수진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개그맨 배동성보다 딸 배수진이 더 유명할 것 같다. 배동성은 지난 2017년 방송된 E채널 '내 딸의 남자들2'에서 배수진을 공개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의 유튜브 크리에이터 배수진은 한효주를 연상케하는 청순 미모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당시 남자친구였던 뮤지컬배우 임현준과 결혼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배수진은 짧은 결혼 생활을 마치고 이혼했고, 올해 방송된 MBN '돌싱글즈'에 출연했다. 26세의 어린 나이로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하는가 하면, 4살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솔직 당당한 모습으로 파격 행보를 보이는 배수진의 다음 활동도 기대를 모은다.
과거 5080음악에서 이제는 대중음악으로 인정받고 있는 트로트. 이와 같은 트로트 열풍은 지난 2019년 TV조선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을 통해 시작됐다. 이어 MBC '놀면 뭐하니?'의 유산슬(유재석)이 불씨를 지폈고,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그 열기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트로트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현재는 우후죽순 늘어난 오디션 프로그램과 사골 수준으로 나오는 오디션 출연자들로 인해 대중의 피로도가 높고 트로트 열풍도 한 풀 꺾인 기세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트로트가 믿고 쓰는 카드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관련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겠지만,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또?'라는 생각이 드는 것. 그렇다면 트로트는 왜 인기를 끌었고, 어떤 반응들이 있었는지 트로트의 성공에 대한 명과 암을 짚어봤다.
트로트의 이유있는 인기 이유
갑자기 트로트는 왜 인기를 끌었던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시발점은 '미스트롯1'이었다. TV조선이 워낙 중장년층, 시니어들에게 인기 있는 채널이었는데, '미스트롯1'을 본 그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 시니어들의 눈에는 우리가 즐겨 듣던 추억의 노래를 젊은 가수들이 부르니 더욱 반갑고 흥을 느낀 것으로 풀이된다.
젊은 세대는 어른들의 노래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트로트를 들어보니 재밌고 중독성이 강해 트로트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의 매력 요인은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직설적이고, 인생의 희로애락이 녹아있어 마음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SBS '나이트라인'에 출연한 하춘화는 "트로트는 전통가요다. 한국의 전통가요를 하는 가수들은 외롭게 비바람을 맞고 그 누구의 관심과 신경을 안 써줄 때도 그것을 꿋꿋이 지켜왔다"면서 "트로트는 어려울 때 더 많이 생각나고 위안을 주는 음악의 한 장르"라고 이유를 짚은 바 있다.
더 나아가 트로트가 오디션 프로의 인기를 넘어 열풍이 된 이유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도 있다. 시니어들은 팬덤을 형성했고, 젊은 세대가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처럼 활동했다. 자신의 스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들을 챙겨보다 보니 TV조선 '사랑의 콜센타', '뽕숭아학당'으로 인기가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쌓이는 피로도…결과는?
그러나 이와 같이 과열된 열풍에 대해 비단 좋은 시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사실 모든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 잘 된 것은 아니다. '미스트롯1'의 인기 이후 따라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양산됐고,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먼저 MBC에서는 '트로트의 민족', KBS2에서는 '트롯전국체전'이 각각 방영됐다. SBS에서는 현 트로트 가수들이 출연하는 '트롯신이 떴다'가 방송됐고, 비슷한 포맷의 MBN '헬로트로트'는 방영을 앞두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트로트의 인기로 시청률은 높았으나, 그 이후에 후광 효과는 이어지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대중의 피로도가 축적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올해 방송된 '미스트롯2' 역시 기대에 부응하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송가인, 임영웅을 잇는 참가자가 나오지 않았고, 공정성으로 인해 잡음이 많았다. 그러면서 더욱 트로트 열풍은 식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는 셈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관찰 예능', '외국인 예능' 등 그때마다 트렌드가 되는 것들이 있다. '트로트 오디션' 또한 그 노선을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시선이 많았다. 사실 앞서 말한대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계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미스-미스터트롯'의 제작진도 최근 K-POP 가수를 뽑는 '내일은 국민가수'를 내놓은 것이 아닐까. 이와 함께 앞으로의 트로트 열풍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가 뽑은 가수들에게 달렸다고 보여진다.
이와 관련 한 트로트 가수는 최근 브라보마이라이프에 "많은 트로트 가수 후배들이 나오고, 트로트곡들도 재조명되어서 좋다. 그런데 현재는 대중들이 많은 프로그램으로 인해 피곤해 하기 때문에 후배들의 인기가 거품이 될까 봐 우려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연에서 자기 노래가 아닌 인기 곡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가수로서 생명력이 오래 유지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들어서 안타깝다"고 우려를 표하면서 "옛날 노래가 히트를 치면 작곡가, 작사가는 저작권을 가져가기 때문에 좋지만, 가수로서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노래 한 곡이 인기를 얻으려면 여러 무대를 직접 돌면서 피 땀 흘려서 결과물을 얻는 것인데, 그 노력이 묻히는 것만 같다"고 솔직한 심경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