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자도 울고 싶을 때가 있다
- 어렵든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나이가 들면 눈물샘이 쪼그라들고 말라버리는지 알았다. 그래서 어지간한 슬픈 일을 당해도 스쳐가는 바람 대하듯 무덤덤해 지는 방관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아니다. 조금만 소외되어도 잘 삐지게 되고 서러움의 눈물이 이슬처럼 맺힌 후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감성적으로 그냥 슬프고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아내가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식구들 데리고 제주도 놀러갔단다. 우리보고 같이 가자고 했어도 같이 갈 형편도 못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생각과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확 오면서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따로 살고 있으니 부모에게 말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며칠 다녀오는 것은 당연하다. 머릿속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이유 모를 황량한 찬바람이 분다. 어머니는 저녁 할 때쯤이면 할머니의 의사를 꼭 물었다. ‘어머님 오늘저녁 뭘 할까요?’하고 묻는다. 농촌의 저녁메뉴는 언제나 특별한 것이 없으니 뻔하다. 밥, 국수, 죽이다. 할머니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네가 알아서 해라!’이다 매일저녁 되풀이되는 이 질문과 대답을 왜 하는지 어려서는 몰랐다. 필자가 나이를 들어보니 이런 몇 마디 말에 부모는 자신의 권위가 살아 있다는 위안을 받는다. 영화를 보러갔다. 슬픈 장면이 있다. 눈물이 핑 돈다. 주위의 반응이 너무 무덤덤하여 눈물 닦기가 조심스럽다, 나이든 사람이 눈물 찔끔거린다고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비비는 척 하면서 슬쩍 눈물을 훔친다. 양쪽 눈을 다 닦으면 저사람 울고 있네 하는 모습이 들킬까봐 한쪽 눈만 닦고 시차를 두고 다른 쪽 눈을 닦는다. 남들을 의식하면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 나이든 남자다. 집에서 TV를 보는데 다른 식구들은 무덤덤하게 잘도 보고 있는데 혼자 눈물이 흐를 때 참 민망하다. 슬그머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들어온다. 남자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한다. K는 대학의 시간강사다.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머슴 같은 노력을 계속하지만 점점 더 절벽을 느낀다. 정교수와 시간강사의 의미를 통 모르는 시골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인 아들 자랑이 대단하다.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은 맞지만 수입도 형편없는 시간강사라는 말을 차마하지 못한다. 더구나 대학교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버지에게 쪼들리는 경제사정은 더더욱 말 못한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도 한다. 밤에는 대리운전도 해보지만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지하 동굴이 있다면 몰래 찾아 가서 목이 터져라 ‘이 더러운 세상아!’하고 외쳐 보고 싶다. 그러나 통곡할 장소가 없다. 어디를 가도 인파의 행렬에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마음 편히 울어볼 곳조차 없다. 화장실에 가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하고 이것이라고 적혀있다. 왜! 남자는 울면 안 되는가! 남자는 농경사회에서는 근육질의 몸만 필요했지만 지금은 감성이 필요한 시대고 생존경쟁의 다양한 변수가 많은 세상이다. 한마디로 울 일이 많은 세상이다. 남자도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고 싶을 때가 있다.
- 2017-11-15 21:16
-
- 한국인의 비위 지키는 천연 소화제 ‘발효 식품’
- 발효 식품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발효 식품의 종주국이라고 할 만큼 예로부터 발효 식품을 많이 먹었고, 한의학에서도 발효 약재를 많이 사용해왔다. 식품을 발효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일까? ‘비위가 안 좋다, 비위가 약하다’는 말에서 비위(脾胃)는 한의학 용어로 소화기관이다. 위(胃)는 음식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고, 비(脾)는 음식을 삭혀서 소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삭혀서 소화된 것은 소장에서 흡수된다.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은 음식을 받아들이고 삭히는 기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발효 식품은 삭힌 음식이기 때문에 비위가 해야 할 기능, 즉 소화를 도와준다. 또 위장이 다 삭히지 못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덩어리, 종양, 근종 같은 것도 발효 식품이 삭혀준다. 이러한 이유로 김치, 된장, 청국장 등을 항암 식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술은 사람의 침으로 발효시키기도 한다. 침 속의 아밀라아제는 전분을 당분으로 분해한다. 결국 소화효소와 발효는 같은 개념이며, 발효는 소화를 돕는다. 단식 후 위장이 가장 약할 때 묽은 된장국이나 일본식 전통 된장국인 미소시루부터 복용한다. 비위의 소화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다. 박테리아, 곰팡이에 의해 발효가 진행되면 몸에 좋은 성분이 새로 만들어지고 몸에 흡수되기 좋도록 변한다. 우유를 발효시킨 요구르트도 우유보다 소화가 잘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발효 식품으로 알고 먹는 것은 전통 천연 발효 식품과는 다르다. 캐나다 퀘벡 출신의 제빵 장인인 리처드 부르동(Richard Bourd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연 발효는 박테리아와 이스트(yeast, 酵母)의 복합체로 이루어진다. 박테리아는 반죽 속의 탄수화물과 질긴 글루텐을 완전히 분해하고, 곡물 속의 좋은 무기물을 추출해 우리 몸이 흡수하기 좋게 만들어준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의존해온 천연 발효 식품에서는 소화 문제나 건강 문제가 별로 없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도입된 이스트 속성 발효는 단기간에 많은 소화 문제, 건강 문제를 야기했다. 이스트로 속성 발효시켜 만든 빵은 소화하기 힘들고 침이 나오지 않아서 콜라나 우유 같은 마실 것을 찾게 된다. 하지만 천연 발효로 잘 구워진 빵은 씹을수록 단맛이 나고 입에 침이 고인다.” 프랑스 제빵 장인인 미셸 이자르(Michel Izard)는 “천연 발효 빵은 미생물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발효 물질이 생성돼 향이 특히 깊다. 약간 시큼한 듯한 냄새도 난다. 빵 속은 희지만 약간 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했다. 그래서 천연 발효 빵을 주식으로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발효 식품이 발달한 나라다. 술, 식초, 청국장,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젓갈 등 다양한 발효 식품이 있다. 콩 발효 식품이 특히 발달해서 메주, 된장, 간장, 청국장이 개발되었다. 술은 뜨겁고 향이 강하다. 약 기운을 전신에 운행시켜 온갖 사기(邪氣)와 나쁘고 독한 기운을 없애 혈맥을 통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도우며, 피부를 윤기 있게 만든다. 술은 소화를 도와주기에 술 없이 먹으면 한 끼밖에 못 먹을 음식을 술과 함께 먹으면 1차, 2차, 3차, 4차까지도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식초는 따뜻하고 시큼하다. 시큼한 맛이 강해서 염산, 황산처럼 뭉친 것, 종양 등을 뚫고 녹인다. 산후에 피를 많이 흘려서 생긴 빈혈을 치료하고 목 아픈 것을 치료한다. 물고기, 고기, 채소의 독도 풀어준다. 정기신혈(精·氣·神·血)을 수렴해 장수하게 한다. 그러나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콜라가 그렇듯 식초도 살과 오장, 뼈를 손상시킨다. 그렇다고 모든 식초의 신맛이 강한 것은 아니다. 발사믹식초, 흑초, 홍초는 강한 신맛이 아니고 오히려 끝 맛이 달며 입에 침이 고이고 한다. 청국장은 콩을 짧은 기간(며칠)에 발효시킨 음식이다. 향이 강하고 차갑다. 땀을 내어 관절을 편안하게 해주고 독에 중독된 것을 풀어준다. 청국장은 비위와 콩팥 기능을 강화하는 효능이 있다. 가슴이 뭉쳐서 답답하고 열이 나는 것을 풀어주고 변비와 설사에도 좋다. 콩을 피부에 문지르면 열을 내려준다. 우리나라의 청국장은 일본의 낫토(納豆) 같은 식품이다. 된장은 오랜 기간(몇 달 또는 몇 년)에 걸쳐 발효된 식품이다. 콩의 기본 성질은 해독력에 있다. 한약의 성분까지 해독해버리기 때문에 한약을 복용할 때는 콩 섭취를 조심하는 것이 좋다. 발효된 콩은 소화를 돕기 때문에 오장(五臟)을 안정시킨다. 간장은 된장을 담글 때 만들어지는 장이다. 소금이 들어가서 매우 짜다. 벌레에 물렸을 때 간장을 피부에 바르면 해독이 된다. 해독력이 있는 콩이 재료로 쓰였기 때문이다. 변비가 있을 때 간장으로 관장을 하면 도움이 된다. 김치는 종류가 무척 많아서 그 효능을 한 가지로 말하기 힘들다. 에는 “배추를 시큼하게 발효시키면 위장의 담연(痰延)을 토하게 할 수 있고 비위를 보하며, 술이나 국수의 독을 풀어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소화를 잘되게 해서 몸에 독소가 쌓이는 것을 막아준다는 의미다. 천연 발효를 시킨 김치는 유산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끝 맛이 달아 침을 잘 나오게 해줘 소화를 도와준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 2017-10-27 14:41
-
- 바다 향 물씬 풍기는 멍게, 그 매력 속으로
- 입안 가득 퍼지는 바다의 향과 달큼하면서도 짭짤한 맛, 마지막에 느껴지는 쌉싸래한 여운까지. 멍게는 노화를 방지하는 타우린을 함유하고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켜주기 때문에 당뇨병에도 좋다. 특유의 비린내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멍게의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아직 잘 모르겠다면 11년째 멍게 요리를 하며 이름을 알린 ‘목포명가’에서 그 진수를 확인해보자. 강남구 삼성동, 도심공항터미널 앞으로 쭉 펼쳐진 왕복 6차선 도로를 건너면 크고 작은 음식점이 모여 있는 먹자골목을 만난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피니 파란색 간판이 인상적인 ‘목포명가’ 건물이 눈에 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한 ‘인증샷’ 액자가 맛집임을 증명하듯 벽에 걸려 있다. 이곳에서 음식을 시키면 본 메뉴가 나오기 전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밑반찬들이 제공된다. 멸치볶음, 어리굴젓, 홍어무침 등에서 목포가 고향인 주인의 손맛이 진하게 느껴진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멍게 껍질과 함께 끓여져 나온 미역국 또한 시원하고 맛이 깊다. ‘목포명가’에서 가장 사랑받는 메뉴는 멍게비빔밥(1만원)과 물회(1만5000원). 두 메뉴의 공통점은 멍게가 들어간다는 데 있다. ‘목포명가’는 멍게 맛이 가장 좋다는 5월에 살이 잘 오른 3년산 통영 멍게만 받아 사용한다. 잘게 다진 멍게 살에 된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멍게소스’는 이 집만의 특별한 요리 비법이다. 신선한 야채에 아낌없이 올린 멍게소스가 멍게비빔밥의 맛을 한층 풍부하게 만든다. 최정임 사장은 “비빔밥에 초장을 많이 넣으면 단맛만 강해져요. 저는 초장은 살짝 넣고 멍게소스만으로 감칠맛을 내지요. 돌김에 싸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라며 자신 있게 멍게비빔밥을 추천한다. 물회는 바지락과 야채로 기본 육수를 내고 초장, 식초, 설탕을 가미한다. 마지막으로 멍게소스를 한 숟가락 넣어주면 ‘목포명가’만의 멍게 향이 은은하게 나는 물회 육수가 완성된다. 여기에 싱싱한 활어회, 문어, 해삼 등 각종 해산물과 함께 메밀국수가 들어가니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가을 바다의 주인공 전어의 귀환 제법 선선해진 가을바람과 함께 바다에서 군침 도는 풍어의 소식이 들려온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 ‘가을 전어 머리에는 참깨가 서 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어는 가을에 꼭 먹어봐야 할 별미다. 뼈째 먹으면 칼슘을 다량 섭취할 수 있고 DHA와 EPA 등 불포화지방산이 혈액을 맑게 해줘 성인병 예방에도 좋다. ‘목포명가’도 가을을 맞이해 계절 메뉴로 전어세트(5만5000원)를 판매한다. 매일 아침 가락수산시장에서 공수해온 전어만 사용하기 때문에 신선한 전어요리를 맛볼 수 있다. 주소 서울 강남구 삼성로100길 23-22 예약 및 문의 02-558-9412 운영시간 11:30~22:00
- 2017-10-08 12:13
-
- 외식에 대한 추억
- 올해 77세로 미수를 맞는 남편과 필자는 다섯 살 차이다. 남편은 6․25전쟁 때 아버지가 납치된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가끔 아버지가 납치되기 전 자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었다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즐겁게 하곤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장면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필자는 남편이 6.25전쟁 전에 자장면을 먹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전화도 없고 또 오토바이도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 배달을 시켰으며, 중국집이 있기나 했냐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지방에서 개인 병원을 하신 필자의 아버지는 주말에나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의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살았다. 당시에는 순진해서 다른 집 아버지들도 주말에만 집에 오는 걸로 알았을 정도다. 어쨌든 그 당시 음식을 배달시켜 먹은 기억이 전혀 없다. 필자의 외식에 대한 추억은 대학교 입학 후 영어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동생들과 사먹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고 시절에도 빵집이나 광화문 근처 국수집에서 외식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에는 연애를 했던 남편과 함께 OB`s Cabin’ 같은 명동의 레스토랑에서 햄버그스테이크도 사먹었다. 다진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특별한 맛이었다. 그 당시 남편 사준 메밀국수를 먹다가 고추냉이(와사비)에 혼이 난 기억도 있다. 요즘은 아들네 식구가 주말에 오면 일하기가 싫어 외식을 하곤 한다. 메뉴는 주로 손주 입맛에 따라 결정한다. 손주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주로 숯불에 구운 고기를 된장에 찍어 먹는다. 피자나 자장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아이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전히 토종 식성이다. 밖에서 식사를 한 후 커피는 집에 와서 마신다. 일요일인 어제는 스파게티 소스가 있어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손주에게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어줬다. 겨자를 얹어주었더니 그건 안 먹고 김치만 먹는다. 이 다음에 연애할 때 겨자 못 먹으면 그 옛날 할머니처럼 쑥스러울 거라며 겁을 주며 먹어보라고 해도 손주는 먹어볼 시도도 안 한다. 제 엄마인 며느리의 토종 식성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이다. 요즘 식당이나 커피 집은 거의 프랜차이즈다. 외국엔 몇백 년 된 식당이 많다. 몇 대에 걸쳐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인정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특별한 브랜드의 음식들을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하다. 그래서 누가 별다방(스타벅스) 커피를 먹으면 따라서 먹는 경우가 많다. 핀란드에는 각 가정마다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르다고 한다. 커피콩도 다르고 커피 내리는 방법도 달라서 당연히 획일화된 맛의 프랜차이즈 커피 집이 잘될 리 없다. 우리나라도 그 도시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으러 여행도 하고 관광사업으로도 연계되어 지방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2017-08-23 10:39
-
- LA 무명가수 케니 김의 ‘나의 인생, 나의 노래’
- ‘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 2017-07-31 11:03
-
- 톡톡 튀는 탄산수 활용 Tip!
- 언제부터인가 탄산수를 마시는 사람이 늘더니, 그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정수기 회사마다 스파클링(탄산수 제조) 정수기 모델도 내놓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 탄산수깨나 마시는 듯하다. 그러나 마치 달지 않은 사이다(?)를 마시는 것처럼 별맛 없이 따끔따끔 목을 찌르는 그 맛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마시는 음료로 탄산수가 부담스럽다면, 색다르게 활용해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 하나, 커피 얼룩 제거 커피 얼룩이 있는 부분에 탄산수를 적셔 비비거나, 탄산수를 묻힌 수건으로 닦은 후 물에 헹군다. 따뜻한 물에 커피가 묻은 옷을 담가두었다가 탄산수로 닦아내고 세탁하면 더 확실하게 얼룩을 지울 수 있다. 둘, 바삭한 튀김옷&쫄깃한 면발 튀김 요리의 밀가루 반죽에 탄산수를 넣으면 기름에 튀겼을 때 더 바삭한 식감을 낼 수 있다. 국수를 삶을 때도 탄산수를 넣으면 물만 넣고 삶을 때보다 면발이 더 쫄깃해진다. 셋, 조개 해감 & 육류·해산물 손질 탄산 기포가 조개를 해감할 때 유용하게 작용한다. 해산물 손질 마지막 단계에서 탄산수를 사용하면 비린내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다. 닭고기나 돼지고기 등 육류도 탄산수에 담갔다 사용하면 잡내가 사라지고 육질은 더 부드러워진다. 넷, 밥을 지을 때 탄산수에는 물보다 미네랄과 무기질 성분이 많아, 밥을 지을 때 활용하면 더 부드럽고 차지게 만들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성분 때문에 자칫 밥이 질어질 수 있으니 평상시보다 밥물을 조금 적게 잡아야 한다. 다섯, 피부에 양보하기 탄산수와 물을 1:1 또는 1:2 비율로 섞어 세수할 때 사용하면 모공의 노폐물과 각질을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다. 차가운 탄산수에 녹차를 우려 토너처럼 사용해도 좋은데, 이때 레몬·라임 향 등 착향료가 들어간 경우 피부에 자극을 줄 수 있으니 피하는 게 좋다. 여섯, 채소·과일 세척&생화 유지 쌈 채소나 과일 등을 씻을 때 탄산수에 담가 뒀다가 씻으면 미세먼지나 잔류 농약을 더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탄산수와 생수를 3:7 정도의 비율로 섞어 꽃병에 넣어주면 생화를 싱싱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 2017-06-29 10:23
-
- 엄마의 세월
- 사방이 끝도 보이지 않는 황톳물이었다. 홍수가 나서 영등포 일대가 물로 뒤덮였다. 커다란 가로수 밑둥도 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길인지 논인지 분간이 잘되지 않는 길을 아저씨들을 따라서 철길을 건너던 필자가 그만 웅덩이에 풍덩 빠져서 가라앉을 찰나였다. “동생 묻으러 가다가 니가 먼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구나.” 하시며 내 왼쪽 팔을 잡아서 건져낸 아저씨는 동생 연숙이를 묻어주러 가던 이웃집 아저씨였다. 하얀 바탕에 파란색 꽃무늬원피스에서 온통 뻘건 황톳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정철의 장진주사 가사처럼 지게 우에 거적 덮여 동생 연숙이가 북망산을 넘어가던 날이었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언니와 세살 터울인 필자가 이웃집 아저씨들 뒤를 타박타박 따라가던 중이었다. 귀엽고 예쁘게 생긴 셋째 동생 연숙이는 언니들이 자기 국수를 빼앗아 먹는 시늉을 하면 앉은자리에서 국수가 담긴 양은양재기를 들고서 뱅글뱅글 돌던 앙증맞은 아이였다. 잘 먹고 기운차게 놀던 세 살배기 연숙이가 별안간 병이 났는데 돈이 없던 엄마는 병원 문턱 한 번 넘어 보지 못하고. “어떡하니 연숙아, 어떡하니 아가야.” 안타깝게 소리쳤다, 보리차도 먹여 보고 미음도 쑤어 주는 등 경황없는 눈빛과 타는 입술의 엄마는 온종일을 서성대고 있었다. 그러던 엄마가 지쳐서 깜박 잠이 든 새 연숙이는 영원히 고통이 없는 나라로 가 버렸다. 얼핏 잠이 깨자마자 소스라쳐 놀라서 연숙이를 살피던 엄마 입에서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가! 연숙아! 눈 좀 떠 봐라. 얘, 아가.” 애타게 울부짖는 엄마에게 이미 하늘나라 천사가 된 연숙이는 끝내 ‘엄마’ 소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죽음이 뭔지 이별이 뭔지 알 만한 나이가 안 되었던지 필자가 운 기억은 별로 없는 듯하다. 다만 아저씨를 따라가서 어디다 묻었는지 잘 알아 가지고 오라고 이르던 엄마 말이 기억에 남아있다. 엄마의 비통하고도 초췌한 모습과 함께. 한번 나간 남편은 어느 때는 보름 만에 한 번, 한 달 만에 한 번 들어왔다 나가면 끝이었고 어디 계신지 연락처도 모르던 엄마였다. 당시에 필자는 아버지들은 으레 그렇게 집에 오랜 만에 들어오시는 건 줄 알고 있었다. 부모 가슴에 묻히는 것이 자식이라는데 엄연히 남편이 살아 있건만 혼자서 아이의 죽음을 감당하고 그 아이를 땅에 묻어야 했던 엄마의 가슴에 쌓인 한은 도대체 어느 만큼의 두께일까?
- 2017-06-21 15:07
-
- 한의사가 말하는 더운 체질, 찬 체질
- 한의학에서는 약재와 사람에 대해 차갑다, 뜨겁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한의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체질이 더운지 찬지 어림짐작은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더운 체질, 찬 체질은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덥다는 것과 춥다는 것은 활동성의 차이다. 더워지면 빨리 움직이고, 차가워지면 천천히 움직인다. 일종의 운동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살펴보자. 더워지면, 봄여름이 되거나 낮이 되면 만물은 땅 위로 솟구쳐 자란다. 잎과 꽃을 틔우고 피우며 움직이며 에너지를 발산한다. 추워지면, 즉 가을겨울이 되거나 밤이 되면 만물은 땅속 또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잎과 꽃을 오므리고 움츠리며 활동을 최소화시키고 잠이 든다. 여름에는 음식물이 빨리 부패하지만 겨울에는 잘 상하지 않는다. 동물은 크게 변온동물과 항온동물로 구분한다. 변온동물은 계절과 낮밤의 변화에 그대로 순응한다. 하지만 사람은 항온동물이라 계절 변화에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즉 36.5℃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한다. 여름에 덥거나 운동해서 열이 나면 인체는 열을 식히기 위해 땀을 흘린다. 겨울에 춥거나 몸이 차가워지면 인체는 추위를 극복하려고 몸을 떨거나 이를 부딪친다. 인간의 체온은 36.5℃ 근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체온은 늘 변한다. 화가 나도 올라가고 술을 마셔도 올라가며 밥을 많이 먹어도 올라간다. 반대로 굶으면 내려가고 마음이 안정되어도 내려간다. 한의학에서 사람의 체질에 대해 ‘뜨겁다, 차갑다’고 표현하는 것은 체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체온이 올라가려는 성향인지, 내려가려는 성향인지를 두고 표현하는 말이다. 즉 체질이라는 것은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속도를 말하는 것이다. 더운 체질의 사람의 체온은 36.5℃보다 높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몸은 땀을 흘리거나 소변과 대변을 보거나 가래, 탈모, 눈꼽 등으로 열을 밖으로 배출하거나 찬물을 찾는다. 일종의 자가 수랭식으로 열을 식혀 36.5℃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는 피를 체표면으로 보내 얼굴이나 손바닥, 피부가 붉어지는데, 일종의 공랭식으로 체온을 조절하는 것이다. 더 심하면 피부병, 염증으로 열을 내보내 몸을 식히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36.5℃의 항상성을 늘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더운 체질의 사람은 기운이 충만해 목소리도 크고, 활동량도 많으며, 식욕도 좋다. 찬 체질의 사람의 체온은 36.5℃보다 낮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주 오한을 느껴 옷을 껴입거나 움츠리거나 따뜻한 물을 찾는다. 또 핫팩을 껴안고 살거나 밤에 소변을 자주 본다. 이런 식으로 36.5℃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찬 체질의 사람은 기운이 약해 목소리도 작고, 활동량도 부족하고, 식욕도 좋지 않다. 이처럼 더운 체질, 찬 체질이라는 표현은 36.5℃라는 수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려는 경향성, 즉 벡터(vector)를 말하는 것이다. 약재의 성질이 뜨겁다, 차갑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는 환경에서 더워지려는 노력을 하는지, 차가워지려는 노력을 하는지 그 경향성을 보는 것이다. 바나나, 야자는 무더운 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증산작용으로 땀을 흘려 차가워지려고 노력한다. 두리안도 열대에 살지만 자신의 몸을 뜨겁게 해서 외부 열기가 열기로 느껴지지 않도록 적응했다. 그래서 그 약성도 뜨겁다. 사막의 선인장은 고온건조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진액을 머금고 스스로 서늘해지기를 선택했다. 가평의 잣나무와 소나무는 잎을 침엽수로 만들어 열을 보존한다. 그래서 겨울에 잣을 먹고 송편에 솔잎을 넣고 쪄서 추위를 이기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약재의 노력을 몸에 재현시키는 것이 한약이다. 시베리아에 사는 근골이 단단한 사람에게 제주도의 잣을 먹이면 열 보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에 사는 허약한 사람에게 시베리아의 잣을 먹인다면 열과 에너지 보존에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물의 선택이 한열로 나타난다. 따라서 같은 종이라도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한열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더운 체질은 식욕이 좋아 많이 먹는 경향이 있다. 또 몸에 찌꺼기가 남아 피가 탁하고 성인병이 생기기 쉽다. 이런 사람은 열대의 서늘한 열매나 넓은 잎채소를 먹어 피부를 통해 열이 쉽게 발산되도록 해줘야 한다. 쌀은 안남미나 묵힌 쌀, 통곡을 먹는 것이 좋다. 그리고 수생식물과 해조류 섭취를 통해 피를 맑게 해주는 것이 좋다. 여름에 더위가 심하면 미숫가루나 콩국수를 자주 먹는데, 더운 체질에게는 평소에도 적합한 음식이다. 찬 체질의 사람은 식욕이 없는 편이고 기운도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음식이 좋다. 둥글둥글하고 속이 꽉 찬 씨앗류, 열매류(밤, 복분자, 오미자)가 좋다. 밥에는 좁쌀, 찹쌀을 섞어 먹는 것이 좋다. 구운 마늘, 부추, 보신탕, 사골국도 좋다. 몸이 찬 체질의 사람은 너무 싱겁게 먹지 말아야 한다. 염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죽염이나 토판염을 쓰는 것이 좋다. 겨울에 추위가 심하면 면, 떡, 빵, 묵을 먹는데 찬 체질에 좋은 음식들이다. 다만 소화가 잘되도록 반찬이나 양념을 곁들여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음식의 한열은 조금씩 달라야 한다. 뜨거운 체질이라고 해서 겨울에도 차가운 음식이 좋은 것은 아니고, 찬 체질이라고 해서 여름에도 뜨거운 음식만 먹을 수는 없다. 체온을 잘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관건이다. 에서는 봄에는 서늘하게, 여름에는 차게, 가을에는 따뜻하게, 겨울에는 뜨겁게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개괄적인 조언일 뿐이다. 여름에도 가끔씩은 뜨겁게 먹어줘야 하고, 겨울이라도 차갑게 먹어줘야 할 때가 있다. 즉 여름에 수박을 자주 먹다가도 보신탕, 삼계탕을 한 번씩은 먹어주라는 말이다. 여름에는 겉은 뜨거워지고 속은 차가워지기 쉽기 때문에 보신탕, 삼계탕을 한 번씩 먹어 속을 데워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면, 떡, 빵, 만두, 고기를 자주 먹다가 가끔씩 냉면, 메밀국수를 먹어주면 좋다. 겨울에는 겉이 차가워지고 속이 뜨거워지기 때문에, 냉면, 메밀국수, 동치미 등의 음식으로 속을 식혀주면 좋다는 의미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2017-06-13 09:00
-
- 돌려드리지 못한 엄마의 사랑
- “여기가 수원인가? 어디니?” “엄마, 이천이야.” 휠체어에 앉아 바람과 소통하고 계시던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을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집으로 모셔가라는 서울 S병원의 통보를 받고, 막내는 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어머니를 이천 D병원으로 모셔갔다. 밖에서 마지막 식사로 평소 좋아하시던 우리밀국수를 드셨다. 엄마는 세상과의 이별을 그렇게 시작하셨다. 자식들이 오는 날이면 푸짐히 음식을 준비하셔서는 자식들 트렁크에 가득 채워 보내시곤 했던 엄마, 겨울철이면 손수 지으신 채소로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워주셨던 엄마는 어느 날 병이라는 악마 앞에 무너져 침대 위에 누워버리시고 말았다. 힘드니까 농사 그만 짓고 편히 쉬시라는 자식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난 너희들 챙겨주는 재미로 산다. 농사를 안 지으면 무슨 재미가 있나?” 하시던 울 엄마. 울 엄마만큼은 안 아프시고 건강하실 거라 믿었는데 더 말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고 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현실은 가르쳐주고 있었다. “엄마! 운전면허증 따면 내가 차 사드릴게.” 운전을 하시고 싶어 하시던 엄마의 말씀에 여동생은 한글도 잘 모르시고 농사만 지으시던 엄마가 설마 면허증을 따실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속에 약속을 했다. 하시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아버진 운전학원에 등록을 해주셨고 엄마는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설마 엄마가 필기를 통과하실 수 있을까?’ 자식들은 엄마의 인지가 한 장을 채워 넘기는 것을 보고 애처로운 마음에, 최선을 다하셨으니 이제 그만하시고 관광이나 다니시며 즐겁게 사시라고 말씀드렸다.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하시던 엄마는 인지 한 장 반을 붙이신 어느 날 합격했다는 전화를 주셨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쏟아졌던 감격의 눈물. 68세가 되어 받으신 면허증을 우리 가족은 크게 확대해서 코팅을 한 뒤 대대손손 자식들에게 조상의 영광을 알려야 한다며 한바탕 눈물파티를 했다. 그리고 동생의 축하 선물로 자동차 시승식을 하시는 엄마를 감격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후 엄마는 이건 아무개 친구가 병원에 데려가줬더니 준 선물이구, 이건 울 곗날 친구들 태우고 바람 쐬게 해줬더니 준거라며 콩에 들기름에 과자에 선물이 가득하셨다. 동생이 “엄마! 친구분들 모시고 다니다 사고 나면 큰일 나. 그니까 다른 사람 태우고 다니지 마” 하니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파하는데 어찌 보고만 있냐.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셨다. 삶의 팍팍함에 지치고 힘들다가도 엄마가 해내신 노력의 결실을 생각하며 ‘나도 할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를 되새기며 나를 희망의 마술 속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그렇게 우리 자식들의 롤 모델이셨는데 엄마가 큰 병 앞에 갑자기 쓰러져버리셨다. 씽씽 달리던 시골 할머니의 자가용도 그렇게 멈춰버렸다. 그리고 누우신 뒤에는 오히려 자식들 마음 기둥이 흔들리실까봐 안타까워하셨다. 누워 계시는 내내 필자는 무력함으로 엄마를 바라만 봐야 했고, 엄마는 서서히 삶을 정리하며 가파른 호흡을 기계에 의지하시다가 미국 출장 간 큰아들을 보시고서야 눈을 감으셨다. 늘 사랑과 열정을 우리에게 심어주신 엄마. 아직 돌려드리지 못한 사랑이 너무나 많은데 울 엄마는 어느 날 우리 곁을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셨다. “엄마! 죄송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2017-05-18 09:23
-
-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진한 삶을 보다
-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을 들추며 비 내리는 날의 외출이 신나고 즐거울 시기는 지났지만 때론 예외일 때도 있다. 빗속을 뚫고 혜화동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날씨에는 아랑곳없는 청춘들이 삼삼오오 손잡고 오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마로니에 공원이지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한때 젊은이들의 문화를 꽃피웠던 이곳에서 봄날의 파릇함, 낙엽 지던 가을의 스산함을 느끼며 보냈던 한때의 시간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런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마로니에 공원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화마을과 낙산공원 산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화마을의 복잡한 골목과 계단을 거쳐야만 하는데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걸어가는 재미도 있다. 조금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들이 조금 전 지나왔던 대학로의 첨단거리들과 대조된다. 해발 124미터 높이의 낙산 낙산을 오르다 보면 옛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화마을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골목이나 담벼락 풍경에서 푸근함을 얻는다. 아무리 그래도 유의할 점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의 산책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겐 편안한 산책길이고 또는 행복한 데이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길과 낡은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어찌 보면 비좁은 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길 옆 풀숲이나 비 맞은 꽃과 나무들이 정겹기만 하다. 비 오는 날의 정취가 풍경들을 더 아늑하게 그려낸다. 쭉 걷다 보면 길목마다 친절한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일도 없으며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 있다. 이화마을 텃밭, 이화동 대장간,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벽화들과 놀이광장, 쉼터 등 지루할 틈 없는 산책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이럴 땐 골목 옆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바 하나 사 먹으며 숨을 고르거나 등나무 아래 정자에서 땀을 식히면 된다.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쁜 카페도 있고 가락국수이나 초밥을 파는 작고 멋진 음식점뿐 아니라 예술 갤러리도 있다. 먹으며 놀고 즐길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낙산공원이다. 중턱 이상 올라오니 성곽이 보인다. 성곽 길을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길이 나 있다. 성곽 밖으로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보인다. 낙산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에는 성곽 길에 불을 켜는데 이 불빛이 성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낙산의 야경이 인기가 많아 촬영 명소가 되었다. 어느덧 전망대에 올랐다. 비에 젖은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땀 흘리면서 올라온 이화마을과 낙산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낙타 모양의 산이어서 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이후 평민이 되어 살았던 한 서린 곳이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던 정순왕후가 궁 밖으로 나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이다. 온통 도시화되어가던 서울의 한 공간이 이렇게 복원되어 휴식하며 즐길 수 있음은 고마운 일 아닌가. 낙산공원 산책을 마치고 대학로 문화거리로 나가 연극 한 편 보고 맛집을 들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동대문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낙산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대문의 DDP로 향해보는 것도 좋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가 나오고 최첨단 현대 복합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있다. 모든 건물들의 겉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밤이면 휘황한 조명으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3차원 첨단 설계기법 BIM을 도입했다.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즐길거리가 아주 많다. 특히 우주선을 보는 듯한 눈부신 야경이 일품이다. 쇼핑천국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의 눈요기와 먹거리 동대문은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인 동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이 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방산시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식료품이나 제과제빵 재료, 포장재와 인테리어 용품들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으로 점포 수가 5000개가 넘는 대규모 의류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농수산품을 비롯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먹자골목의 녹두전이나 겨자 장에 찍어먹는 마약김밥은 먹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저렴하고 푸짐한 최고의 메뉴다. 맛있게 잘 먹은 후 그 옆의 시원한 청계천을 바람 쐬며 거닐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다. 이렇게 한나절을 보낸다면 서울의 역사 유적을 감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치열한 삶의 현장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내내 비가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낙산의 여름이 비에 젖어 녹음의 짙푸름이 더했다. 비 오는 날의 외출도 보람 있고 즐거울 수 있음을 확인한 날이다. 동대문 DDP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고,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활기 찬 풍경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 2017-05-16 1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