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우짜우짜우짜짜’라는 ‘우스개 표현’이 있었다. ‘웃기는 짬뽕, 날으는(나는) 골뱅이’라는 표현도 있다. 1980년대 후반,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영화감독 이규형 씨다. 중식, 그중에서도 자장면, 짬뽕이 널리 퍼졌던 시기다.
자장면은 역사가 길다. 중국 서민의 음식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 한반도로 건너온 가난한 이들, 화교들의 길거리에서 한 끼 때우는 간단한 음식이었다. 한반도에서 새롭게 만든 음식도 아니다. 원래부터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우리로 치자면 된장찌개, 김치찌개 정도의 음식이다. 이것이 식당의 정식 메뉴가 되었다.
자장면은 한반도의 한식을 잘 보여준다. “자장면이 무슨 한식의 특징?”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도 많겠다.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중국의 원형 자장면과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 원본은 중국의 것이지만 우리의 ‘웃기는 짬뽕’이나 ‘우짜우짜’는 한반도의 음식이 되었다.
‘우짜’는 우동과 자장면(짜장면)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무실에서 야근을 할 때면 “난 우동, 난 짜장”이라고 외쳤다.
“우동이 웬 중식?” 하며 의심할 필요는 없다. 짬뽕의 원형은 우동이다. 짬뽕은 오랫동안 ‘중화(中華)우동’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는 지금도 ‘중화우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주카우동’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중화우동 메뉴를 없앴다. 대신 가락국수, 일본식 우동 그리고 짬뽕을 남겼다. 한반도의 짬뽕은 요란하다. 종류가 많아졌다. 해물짬뽕이 있는가 하면, 매운 짬뽕도 등장한다. 채소짬뽕, 김치짬뽕도 있다. 일부 지방에는 돼지고기를 얹은 돼지짬뽕이라는 메뉴도 있다. 그야말로 짬뽕 천지다.
자장면도 마찬가지. 중국에도 없는 간자장에 느닷없는 삼선자장까지 생겼다. 삼선은 ‘삼선(三鮮)’이다. 신선한 해물 세 가지라는데, 물론 엉터리 조어다. 원래 중식당에서 사용했던 ‘해선(海鮮)’과 ‘삼(三)’을 더한 한국식 조어다.
한반도는 ‘음식의 용광로’다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이다. 중국식 발음으로 ‘자장미엔’쯤 된다. 자장미엔이 한반도에서 자장면으로 바뀌었다. 작장면(炸醬麵)의 ‘작(炸)’은 ‘터지다’, ‘튀기다’라는 뜻이 다. ‘튀기거나 터트린 장을 면에 얹은 음식’이 자장면이다. 기름을 두른 웍(wok)에 장을 볶으면 마치 기름에 장을 튀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열 상태에서는 장이 마치 작은 폭죽처럼 터지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웍에 장을 볶아보면 ‘자장[炸醬]’이란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중국 자장미엔의 핵심은 장(醬)이다. 장 중에서도 중국식 ‘첨면장(甛麵醬)’이다. ‘첨(甛)’은 ‘달 감(甘)’과 ‘혀 설(舌)’이 어우러진 글자다. ‘혀에 달다’는 뜻이다. 첨면장은 면을 달게 만드는 장이다. 국수를 먹는데 그 국수를 달게 만들어, 잘 먹게 만든다는 뜻이다.
국수에 볶은 첨면장을 얹어서 먹는 음식은 된장찌개에 밥을 비빈 우리 음식과 비슷하다. 가장 기본적인 서민의 음식이다. 중국 산동성 등에서 널리 먹었다.
흔히 ‘북경 자장면’이라고 하는데 북경 자장면도 유래는 산동성 언저리다. 중국 역시 1950~60년대에 ‘국민 건강을 위해’ 돼지고기 등을 널리 보급했다. 국수[麵, 면]에 장(醬)을 더한, 가난한 이들의 음식에 영양분이 많은 돼지고기를 더한 것이다. 중국 첨면장을 넣고 잘게 썬 돼지고기를 볶는다. 볶은 장을 국수에 얹어서 비벼서 먹는다. 현대적인 중국 자장면이다. 돼지고기와 기름이 장과 어우러져 맛을 더한다.
첨면장은 밀가루와 콩을 이용해 만든다. 콩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산동성 등지에서는 ‘밀가루+콩’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들도 첨면장을 만들었다. 오늘날 ‘춘장’이라고 부르는 장이다. 중국 첨면장의 변화는 한반도 자장면의 변화다. 첨면장이 바뀌면서 ‘중국 작장면’이 한반도의 자장면으로 바뀐다.
자장면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무렵이다. 많은 중국 병사가 한반도로 건너왔다. 군대가 움직이면 군인, 상인, 가난한 서민들이 따라 움직인다. 중국 대륙 역시 기근, 홍수,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가난한 이들이 군대를 따라 대거 인천으로 몰려들어 중국인 거주 지역에 모여 살았다.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항구는 교통의 요지다. 사람과 물자가 움직이고,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 용역을 공급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이다.
자장면은 이들의 일상적인 식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릇 하나에 면과 볶은 첨면장을 더한 다음 비벼 먹었다. 이 음식이 당시의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중화요릿집 메뉴로 등재되었다.
당시 유명 식당 중 하나였던 ‘공화춘’의 후손이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신승반점’을 운영하고 있다. ‘신승반점’에는 유니자장이 있다. ‘유니[肉泥]자장’은 돼지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진 다음 첨면장에 볶아서 만든다. 일반적인 자장면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자장면이다.
중식당의 원래 이름은 청요릿집이었다. ‘청’은 청나라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후까지 중식당은 청요릿집으로 불렸다. 음식 가격은 비쌌다. 서민들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소. 음식점도 아니고 요릿집이었다. 팔보채, 난자완스, 탕수육, 양장피 등 고급 안주, 요리를 내놓던 곳이었다. 자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가격이 싼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고급 청요릿집에 ‘주인공’으로 끼어들기는 힘들었다. 유니자장 같이 비교적 고급스러운 음식은 청요릿집 코스 중 하나였다.
첨면장의 진화, ‘자장면’
공식적으로 1955~65년까지 11년 동안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가 한반도에 대량 공급되었다. 1955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밀가루 대량 공급은 끼니가 힘들었던 가난한 한반도의 식량난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 국수 공장이 대거 들어서고 수제비가 가난한 이들의 끼니가 되었다. 중식당에서는 밀가루를 이용한 그들 스타일의 ‘자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수+첨면장’으로 만드는 자장면. 밀가루가 해결되고 나니, 이번엔 첨면장이 문제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까지 화교 중식당들은 인근 화교 가정에서 만든 첨면장을 사용했다. 일상적으로 먹고 남은 첨면장을 화교 식당에 공급했다. 자장면이 급속히 확대, 공급되었다. 문제는 역시 첨면장이었다. 화교 민가에서 모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만들어도 공급은 한계가 있었다. 외식을 할 만한 식당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식당의 자장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공장에서 대량으로 첨면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깔이 검지 않다. 오래 묵은 첨면장은 색깔이 검다. 검은 색깔? 캐러멜 색소로 해결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한반도의 자장면, 첨면장은 진화한다.
원형 첨면장은 농도가 짙다. 뻑뻑하다. 잘 비벼지지 않는다. 지금도 북경 등에서 만나는 자장면은 뻑뻑해서 비비기가 힘들다. 그래서 자장 소스를 묽게 만들었다. 전분을 풀고 양파나 감자, 당근, 대파, 호박 등을 썰어 넣었다. 한국인들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느끼한 음식은 반드시 채소와 더불어 먹는다. 그래서 자장 소스에 각종 채소, 캐러멜색소, 각종 감미제, 조미료를 넣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자장면 소스다. 중국 첨면장에서 출발했지만 한반도 방식으로 대거 바뀌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자장면은 심하게 변화, 왜곡되었다. 원형 자장면은 돼지기름을 사용했다. 어느 순간 “동물성 기름보다는 식물성 기름이 건강에 좋다”는 엉뚱한 오해가 널리 퍼졌다. 전 세계의 중식당들은 대부분 ‘라드(rard)’라고 부르는 돼지비계를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돼지고기 기름을 콩기름으로 바꿨다.
“중국에 자장면이 있다? 없다?”를 묻는 질문은 얼마 전까지도 상당히 어려운 퀴즈였다. 중국에는 자장면이 있기도 하지만 없다고 해도 옳다. 이도저도 아닌 대답인데, 이게 정답이다. 한반도의 자장면은 변형이다. 비비기 좋고, 튀기거나 볶는 것보다는 채소를 많이 넣고 끓이는 방법을 택했다. 중국 자장면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우리 자장면을 ‘한청자장미엔[漢城炸醬麵]’이라고 부른다. 한성, 서울식, 한국식 자장면이라는 뜻이다. 좋든 싫든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47년 전통 ‘봉산찜갈비’
대구광역시청 인근 ‘동인동 찜갈비골목’은 지역민을 비롯한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대표 먹자골목이다. 달달한 간장양념 갈비찜이 아닌, 매콤한 마늘양념 ‘찜갈비’를 맛볼 수 있다. 그중 터줏대감으로 알려진 가게가 바로 ‘봉산찜갈비’다. 원래는 인근 건설 노동자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던 국숫집이었는데, 고기를 찾는 손님들이 생기며 현재의 찜갈비가 탄생하게 됐다.
육체노동이 심한 이들의 몸보신을 위해 소갈비를 주재료로, 무더운 대구 날씨에 잃은 입맛을 찾아줄 매콤짭짤한 양념을 더했다. 여기에 다진 마늘도 듬뿍 넣는다. 별다른 고명이나 꾸밈새 없이 양푼냄비에 담아내는데, 과거 국수를 말아내던 그릇을 그대로 사용한다. 올록볼록 양푼냄비에 새겨진 세월의 주름만큼이나,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나눈 단골이 많다고. 창업주인 어머니 이순남 여사의 아들인 2대 주인장 최병열(50) 씨가 가업을 잇게 된 것도 바로 그 ‘추억’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학과 직장을 서울에서 다녔어요. 마흔이 되니 이제 내려와 가게를 물려받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거절하고 싶었지만, 외아들이라 의무감으로 일단 1년은 서울에서 오가며 손님을 맞이했는데 그러면서 마음이 달라졌죠. 우리 가게를 사랑하고, 추억을 안고 찾아오시는 분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봉산찜갈비가 사라진다면 그들의 추억도 사라진다 생각하니 책임감과 사명감이 움트더군요. 결국 이듬해에 대구로 내려와 일을 제대로 시작했죠.”
그때의 마음을 되새기며 최 씨는 ‘추억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가게의 명맥을 잇고자 한다. 더불어 ‘음식은 소통’이라는 생각으로 함께 오는 손님들 간 기분 좋은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요즘은 외식하러 와도 휴대폰만 보느라 서로 대화가 없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그나마 술자리에서 대화가 잘 오가기 때문에 저희는 어떤 술을 가져오시든 코르크 차지를 받지 않아요. 즐거운 추억을 만드셨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인생 성공의 척도는 ‘돈보다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최근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요즘 카페에서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을 하듯, 비오는 날 비닐 대신 바람으로 우산 물기를 제거하는 기계를 놓는 등 작은 실천을 해보고 있어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안 먹는 반찬을 돌려주는 손님에게 그만큼의 다른 보상을 드리는 등 새로운 방법도 계속 고민하고요. 지금의 환경은 미래 후손들에게 빌려 쓰는 거잖아요. 훗날 자녀들에게 봉산찜갈비와 함께 좋은 환경까지 물려주고 싶습니다.”
대구1호선 칠성시장역 3번 출구 도보 9분
주소 대구시 중구 동덕로36길 9-18
영업시간 10:00~22:00 (명절 휴무)
대표메뉴 찜갈비, 갈비살 찌개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카레는 요리 솜씨가 없는 사람도 맛을 내기 좋은 음식이다. 감자, 양파, 당근을 썰어넣고 카레 가루와 함께 끓이기만 하면 된다. 간을 맞출 필요도 없으니 이보다 쉬운 요리는 없다. 아이들이 외출했다 돌아와 “엄마, 오늘 카레 했어?” 하고 반기는 것은 온 집 안에 진동하는 카레 향 때문이다. 나는 카레 냄새가 참 좋다.
어렸을 때, 학교 수업이 끝나면 총알처럼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를 따라가면 엄마는 언제나 음식을 만들고 계셨다. 엄마 요리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카레였다. 대문 밖까지 카레 냄새가 나는 날에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들었다.
카레 요리를 하는 날 엄마는 그릇장에서 화려한 양식기를 꺼냈다. 작은 꽃들이 촘촘하게 그려진 접시의 가장자리는 은빛 테가 반짝였다. 엄마는 이 접시에 갓 지은 하얀 쌀밥을 담고 큼직하게 썬 감자가 들어 있는 카레 소스를 듬뿍 얹어주셨다. 그러면 카레 소스에 비빈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잘 익은 깍두기와 함께 먹곤 했다. 입이 짧은 나도 한 공기 뚝딱 비우곤 했던 아주 맛난 음식이었다. 특히 엄마가 애지중지 아끼는 접시에 카레 소스를 담으면 마치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돼서도 카레 향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근사한 음식을 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아이들에게 카레 요리를 자주 해주는 것은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내 기억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박찬일 셰프가 쓴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책을 보면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음식 이야기가 나온다. 가령 운동회 때 엄마가 싸주셨던 삼단도시락, 중국집에서 먹었던 자장면, 시장통 좌판 아낙네가 등에 업힌 아이에게 우물우물 씹어 먹여주던 국수 등은 지나간 시간들을 아름다운 장면으로 되돌려준다고 말한다.
박찬일 셰프에게 과거를 추억하게 만드는 것이 음식이라면 내게는 음식 냄새다. 온 집 안에 강렬하게 퍼지던 카레 향. 그 향을 맡으면 과거의 장면들이 순식간에 떠오른다. 살아오면서 맛있고 멋진 요리를 많이 먹어봤지만 아직도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카레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은 카레 향이 퍼질 때마다 소환하는 행복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저무는 놀빛 앞에선 허허롭다. 서산 너머로 사라진 해는 이제 어느 숙소를 찾아가는가. 인생 황혼에 접어든 사람은 어디로 가나. 만족은 없고 갈증은 자글거린다. 요즘 말로 ‘심쿵’은 멀고, 딱딱한 가슴에 먼지만 폴폴 날린다. 이건 겁나게 먹은 나이에 보답하는 정경이 아니다. 어이하나. ‘나, 물처럼 살래! 흐르는 물이 돌부리에 걸리거나 진땀 빼는 법이 있던가, 물이 답이자 선생이다!’ 문순우(73) 화백은 그리 생각한다. “너, 나를 물로 보니?”라 할 때의 그 물이다. 옳다구나, 가급적 만만하게 살자는 얘기일 게다. 그게 잘 사는 길이라는 소식이다. 노자가 설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이니 문순우 기자, 아니 문순우 도사가 취재한 ‘도(道) 뉴스’일 수 있다.
못 믿을 게 도인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러하니 문순우를 도사로 읽는 건 결례이거니와, 그는 ‘도’라는 거룩한 단어 자체를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물이 좋아 물을 닮고자 한다.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는 노경(老境)을 선망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물로 봐야 한다. 그게 예의에 맞다. 이 물은 오늘 숲속의 잠잠한 초록호수처럼 평온하다.
“나 요즘 편안하거든. 만족스럽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고. 여기에서 더 바랄 게 없는 것이에요.”
문순우의 올해 나이 일흔셋.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연치(年齒). 이젠 귀신조차 바라보일 시절이다. 그러나 그가 요새 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캔버스다. 죽자사자 그리는 것 같다. 창작이란 방울방울 피를 뿜는 일. 흔히 산고(産苦)에 견준다. 이 힘든 일을 왜 용을 쓰고 하나, 싶지만 문순우는 힘 안 들이고 대꾸한다.
“힘은 무슨 힘? 영감(靈感)이 나를 데려가는 것을.”
‘영감’이라는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후루룩 내려오는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매사를 힘들이지 않고 시원하게 해치우는 문순우의 내공이랄까, 그런 게 영감님을 모셔다주는 모양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문순우는 그림만 그리진 않는다. 그는 사진으로 예술에 입문했다. 도예도 주 종목이다. 목수이자 오디오 평론가이기도 하다. 와인과 재즈에 통달한 전문가다. 아마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남몰래 눈물을 훔칠 요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이 기똥찬 다재를 일컬어 ‘전방위 예술가’라 한다. 어찌 보자면 이도 저도 아니다.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하나를 들입다 파더라도 도로아미타불에 그치기 쉬운 게 예술이다. 하나에 쉬 질리거나 옹골차게 돋우지 못해 여럿을 동시에 신나게 파 젖히는가? 딴엔 그게 자연스럽다. 물에 무슨 경계가 있던가. 열에 열 골 물이 하나로 통하고 모이는 게 물의 생태 아니던가.
나부터 사랑하기
문순우가 점심 요리를 한다. 아내 박미광(64)이 조수로 나서 묵은 김치를 물에 헹궈 숭숭 잘게 썬다. 그 사이 그는 양파와 토마토 등 갖가지 재료를 올리브유에 지지고 볶아 소스를 만들고 국수를 삶는다. 이름은 묵은지 파스타. 작은 꽃송이와 향신채소 잎 두어 개를 파스타 위에 살짝 얹고 요리 끝! 그러나 진정한 마무리는 아니다. 촛불을 켜고 글라스에 레드와인을 채우고서야 식사가 시작되니까. 나는 한낮의 식탁에서 제 몸을 사르는 촛불에 황송하다. 생일 밥상을 받은 기분이다. 촛불 보시를 한 이여, 복되도다.
“웬 촛불이냐고? 이게 격(格)이라는 것이지. 우린 항상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해요. 라면을 먹더라도 초를 켠다고. 하하핫. 이왕이면 소소한 일상이더라도 축제처럼 사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내가 나를 기쁘게 하기, 내가 나를 소중하게 대하기, 내가 나부터 사랑하기, 그런 게 돼야 남을 즐겁게 할 수 있지 않겠어? 그게 생활의 격이라 보는 것이지.”
“요리는 언제 배우셨지?”
“마흔 살 넘어 사진 공부를 위해 파리에서 유학했는데, 그때 요리를 배웠어요. 내겐 특이한 성향이 하나 있어요. 왕성한 호기심, 그거! 중학생 땐 전축에 호기심이 불붙어 진공관식 앰프를 직접 만들었다고. 남들은 어떻게 사나, 그런 호기심을 누를 길 없어 유목민처럼 평생 곳곳을 떠돌기도 했어요. 파리 유학 시절엔 프랑스 요리에 호기심이 들끓더라고. 그 무엇보다 파리의 살롱 문화에 반해버렸고.”
“궁정과 귀족의 저택을 무대로 성행한 프랑스의 사교 모임, 그게 살롱의 유래죠? 사르트르나 피카소가 즐겨 드나들었던 몽마르트의 카페들이 그 후신일 테고.”
“한마디로 문화 사랑방이라 해야겠지. 프랑스 문화의 기저, 단순히 예술가들의 집합소가 아니라 논쟁과 소통이 다반사로 벌어져 당대 문화와 예술을 주도해나간 공간, 다종다양한 보헤미안들이 몰려들어 생을 즐긴 아지트. 꼭 필요한 그게 한국엔 드물다는 걸 알고 귀국하자마자 살롱을 차렸어요. 재즈 클럽 ‘라 끌레’라고 삼청동에 있었다고. 너무도 빨리 망하고 말았지만.(웃음)”
나에겐 삼사 년 전 문순우의 거처에서 한나절을 놀았던 추억이 있다. 당시 그의 집은 시골 숲속에 있었다. 그의 집이랄 것도 없다. 그는 돈이라는 게 당최 없다. 남의 헌털뱅이 대형 창고를 빌려 집으로 개조해 부부가 살았다. 그게 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만가지 진기한 사물들이 절묘한 미학으로 어울린 예술적 파빌리온. 작업실과 와인 바와 집채만 한 오디오 장비가 혼융된 그 창고 건물은 그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살롱 용도로 쓰였다. 수많은 예술 동네 종족들이 물방개처럼 부산히 드나들었다.
현재 그의 거처는 안성시 외곽 대로변에 있다. 큼직한 신축 건물에 산다. ‘제네시스 미술관’이라 쓴 손바닥만 한 팻말이 붙어 있다. 이 집도 그의 것이 아니다. 갸륵한 후배들이 지어 내준 건물이다. 내부는 전에 살았던 창고 건물 풍경과 거의 이하 동문이다. 고스란히 옮겨 적절히 반죽해 치장했다. 별개의 사물과 사물들이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져 공감각적 코러스를 자아낸다. 오디오를 켜면 그의 귀는 칡넝쿨처럼 뻗어 선율을 빨아들일 게다. 와인 병이 즐비하니 취하고 싶을 때 취할 테지. 이 집의 모티브 역시 살롱이다. 사적으로는 미술 작업실이고 공적으로는 재즈 클럽이다. 그는 재즈에 홀려 산다. 재즈의 무엇에 심취하지?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 얘길 해볼까. 그녀의 대표곡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은 백인 인종주의자들에게 살해된 흑인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노래했어요. 자유와 해방, 그걸 노래로 외쳤다고. 그게 재즈 정신이에요. 재즈를 듣다가 인생이 변한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재즈란 고도의 매혹적 예술이겠고.”
“이곳에서 매월 한 차례씩 재즈 공연이 펼쳐진다죠? 재즈 전도사로 나선 거예요?”
“한국의 암 발생률이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이라더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난 문화의 열악함에도 원인이 있다고 봐. 예술이란 어디에 쓰이느냐, 남들에게 이바지하는 거, 즉 사회적 공헌에 목적이 있다고 난 봐요. 내 그림도, 재즈 공연 기획도 문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데에 일조하길 바라며 하는 짓들이지. 공연 때 놀러오라고. 1세대 재즈 밴드를 비롯해 국내 최고 수준의 재즈 뮤지션들이 오거든.”
“비쌀 텐데, 개런티!”
“기름값밖에 못 주지만 부르면 다들 기꺼이 달려와요. 자유로운 영혼들이거든. 게다가 내가 일찍이 한국 재즈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어서.”
집문서 없어도 잘 산다
인생이란 희로애락을 다탄두로 매단 럭비공을 닮았다. 문순우의 삶이 그걸 알게 한다. 젊은 날의 그는 날품팔이나 구두닦이로 밥을 벌며 세상이라는 정글을 배웠다. 공수부대원으로 3년간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가진 거라곤 돈뿐이던 시절도 있었다지. 디자인 분야 사업을 해 17명의 직원들을 거느렸고, 스포츠카를 몰았더란다. 그러다 회의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돈에 덜미 잡힌 삶이 원숭이를 껴안고 블루스를 추는 것처럼 요상하고 우스웠던 모양이다. 해서, 사업을 접었다. 돈벌이의 노예로 사느니 천성인 방랑벽을 고이 살려 유목민으로 살자, 늦깎이로나마 예술과 한판 붙어보자, 그런 작심을 야무지게 하고 프랑스 유학에 나섰던 것. 이후 오늘날까지 예술이라는 참호 속에 들어앉아 세상을 겨눈다.
돌아다닌 세상, 겪은 세사가 많아 일화도 숱하다. 누적된 연기(緣起) 속에서 명멸한 기억들…. 아프기론 월남전에서 목도한 참상이다. 곱살하기론 걸레스님 중광의 해맑은 심혼이 남긴 잔상으로, 일테면 그건 문순우가 보유한 정신적 체력을 북돋운 한 가지 양분이었던 것 같다. 들어볼까.
“언젠가 용산역 앞에서 어느 스님이 건달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더라고. 그걸 내가 뛰어들어 수습했어요. 알고 보니 중광 스님이더라고. 묘한 인연이었지만 이후 가족처럼 지냈지. 내 삶으로 육박해온 가장 청명한 성좌였다 할까. 때로 파격의 괴물이었으나 근본은 순진무구의 화신이었어요.”
“사람이 새벽이슬도 아닌 것을, 순진무구를 유지하며 이 난잡한 속세를 견딜 수 있을까요? 때 묻히고 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지 않나?”
“그렇기에 용케도 순수한 사람들이 그립고 좋고 사랑스러운 게 아니겠어? 이 순수란 증류수와도 같은 무균 상태가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품성과 실천을 말하는 것이라고.”
“당신 역시 봄바람처럼 따사로워 인간적이지만, 일면 자학적이기도 해요. 그 독한 파이프담배 아니면 시가만을 피우다니, 그거 자학 아닌가?(웃음)”
“애연가 등소평은 아흔네 살까지 살다 간 것을.(웃음) 그가 말했지. 흡연은 젊은이에겐 낭만을, 늙은이에겐 위엄을 부여한다고. 와인은 또 얼마나 좋은가. 내가 아
술타령으로 죽을 쑨 인생이 많지만, 술이 건진 고통과, 술이 익힌 시와 노래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는 와인과 노닐어 멋과 낭만을, 작업의 효율을 구가하는 것 같다. 버선목이 아니라서 문순우의 속을 뒤집어볼 순 없지만, 그의 내부에도 고독과 불안이 고여 있을 테지. 그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우수를 술과 음악으로, 또는 창작으로 청소하길 능란하게 하는 사람. 해서, 태연하고 평온하게 노년을 영위하는 사람. 그게 문순우이며, 이런 그에게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전혀 없는 건 돈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모두 그 앞에서 절을 하는 물신(物神)의 가호를 받지 못한 채로 영일(寧日)을 누리다니. 늙어서도,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돈이라는 감옥에 갇히기 십상인 게 삶이지만, 그는 감옥 밖에서 말짱하다. 비결이 뭘까? 그를 물로 보면 답이 나온다. 어디든 흘러가 채워주는 물! 목마른 자에게 흘러들어 한 잔의 샘물이 되는 삶! 그는 그런 지향으로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 결과 집문서는 없으나 사람문서를 쥐게 됐다.
“나를 부르주아라 오해하기 십상이지. 시가에 와인에, 고급 음악에, 모든 호사를 누리는 걸로 보일 테니까. 그러나 난 가진 게 없어요. 옷가지도 30년째 입는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작품 재료도 모두 폐품을 활용한다고. 전화기도 오래된 폴더 폰이야. 식재료도 텃밭에서 손수 길러 쓰고 말이지. 딱히 잡기라는 것도 없어요. 돈 들어갈 게 뭐란 말인가.”
“날마다 한두 병씩 마시는 와인은 어디서 오죠?”
“작품이 팔리면 와인부터 비축하지만, 작품이 팔리는 일은 드물지. 그걸 잘 아는 제자나 후배들이 와인이며 시가며, 심지어 거처까지 마련해주더라고. 차후 ‘문순우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하더군. 아아, 내가 헛되이 살진 않았구나. 그런 생각 자주하는 것이여.”
“반대급부 없는 도네이션은 없는 법.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그토록 받으시지?”
“좌우명을 말해볼까? ‘남을 대하기를 나를 대하듯이 하자.’ 이기심을 버리는 게 자유롭게 사는 지름길이라 여기며 살았어요. 주변과 타인을 채우는 샘물로 살아야겠다, 언제 어디서든 남을 소중하게 아끼면 그게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게 나를 채우는 길이다, 그런 신념을 잊지 않고 실천했어. 사실, 우리는 모두 빚쟁이 아닐까? 남들에게, 세상에게 신세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던가? 그렇다면 날마다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사는 게 옳지 않나?”
이 악물고 살 거 없다, 계산 없는 물로 돌아가 세상 빚을 갚으면 빛난다! 그게 문순우의 비결이다. 윽! 난 오늘 한 방 맞았다. 허울 좋은 처신과는 격이 다른 고수(高手)의 이타(利他), 그 실천적 뉴스에.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냉면이 뜨겁다. 2018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날, 서울의 냉면집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북한 ‘옥류관’ 냉면 때문에 평양냉면 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평양냉면은 음식, 맛집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이 여러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떠돌아다녔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정체를 알기 힘들다. 의견도 분분하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면스플레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면(麵)’+‘익스플레인(explain)’이다. 면, 냉면, 평양냉면에 대해 아는 체하며, 맛집 순위를 매기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이른 표현이다. ‘맨스플레인(man′s +explain)’에서 시작된 조어다.
이 글도 ‘면스플레인’의 일종이다. 냉면에 관해서 설명한다. ‘면스플레인’인지 냉면에 대한 올바른 지적질인지는 읽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국수, 냉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냉면도 ‘차가운 면’ 국수다.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메[山]’+‘밀[小麥]’이라고 여긴다. 모가 났다고 해서 모난 밀, 모밀, 메밀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는 대맥, 밀은 소맥,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교맥, 메밀을 흔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부른다. 구황작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 대체 작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라기보다 상용작물(常用作物)이었다. 초여름 무렵 비가 부족해도 메밀을 대파했다. 다행히 메밀은 짧은 생육기간, 6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었다. 지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처음부터 메밀을 심었다. “곡식이 부족하니 메밀을 먹어라”가 아니다. 애당초 벼농사, 곡물 농사 짓기 힘든 땅에는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주요 상용작물이었다.
메밀이 좋아서 메밀로 국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메밀국수+동치미’의 조합은 좋아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조합이 아니다. 비교적 편하고 쉬워서 등 떠밀려서 선택한 조합이다.
깊은 밤, 배가 출출하다. 입 다실 게 있으면 좋겠다. 메밀국수를 내린다. 한민족은 탕반(湯飯) 음식을 즐긴다. 국물 없는 밥상은 목이 멘다. 국물을 만들기 힘든 시간, 동치미 한 사발이면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강원도 출신들 중 결혼식 때 막국수를 먹었다는 이가 많다. 경조사에만 사용했던 귀한 음식, 국수. 국수의 대중화 역사는 길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냉면과 국수, 막국수는 모두 국수다.
메밀 함량 묻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메밀 함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컨대, 50%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분기술이 낮아 디딜방아, 절구질, 물레방아를 이용해 제분했다. 절구질한 후, 고운 천 혹은 체 등으로 메밀가루를 내린다. 고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깨진 껍질, 나머지 거친 입자는 그대로 남는다. 찌꺼기와 거친 입자를 다시 빻는다. 같은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내린다. 이 힘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운 메밀가루를 모은다.
가루 입자가 고우면 국수 만들기 좋다. 거친 입자는 국수 만들기 힘들다. 만들어도 면발이 고르지 않고 잘 끊어진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불행히도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국수 만들기가 간단치 않다. 점도가 약한 거친 입자. 기껏 국수를 만들어도 툭툭 끊어진다. 방법은 전분(澱粉)을 넣어 반죽하는 것이다. 전분은 녹말가루다. 전분을 넣으면 점도가 높아진다. 그나마 낫다.
막국수 노포에서는 대부분 ‘여름철에는 메밀 40%, 겨울에는 메밀 60%’를 고집한다. 나머지는 밀가루 혹은 전분이다. 전분이 많으면 국수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같다.
국수의 검은 점은 메밀껍질이다. 요즘은 메밀껍질이나 보리 태운 가루 혹은 색소로 검은 색깔을 낸다. 메밀껍질이 남아 있던 예전의 거친 냉면, 막국수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가장 좋은 냉면 혹은 막국수일까? 우문(愚問)이다. 시쳇말로 ‘개취(개인의 취향)’다. 어느 정도의 메밀 함량이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각자 개성에 맞춰서 고를 일이다. 메밀 함량이 낮고 높은 것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다는 표현은 틀렸다.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냉면, 막국수를 내렸다.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시기를 화가로 살았던 기산(箕山) 김준근(생몰년 미상)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사내가 벽의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온몸으로 국수를 내리고 있다. 유압식 제면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수 뽑는 사람치고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었다.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국수나 한 그릇”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메밀 함량을 따지기 힘들었다. 귀한 음식, 국수, 냉면, 막국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맛봤던 음식이었고 주방,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는 집에서나 먹었던 음식이다. 해방 후, 깊은 산골에서 잔치 때 나왔던 음식이 대중화했다. 메밀 함량을 따질 일이 없었다. 함량? 중요치 않았다. 그저 ‘국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원하는 면을 고르면 될 일이다.
계곡 장유의 ‘자장냉면’
언제부터 냉면, 막국수를 먹었을까? 막국수도 냉면과 다르지 않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생겼다. 강원도의 메밀국수를 상업화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막국수와 달리 냉면은 뚜렷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냉면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른바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계곡은 이 시에서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표현했다. 제목이 이미 ‘냉면’이다. 냉면에 대해 처음 언급한 문장으로 친다. 계곡이 ‘처음’ 냉면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냉면은 있었다.
계곡이 먹었던 냉면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인지, 눈꽃처럼 내린 옥가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계곡은 광해군, 인조 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다.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다. 계곡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지체 높은 집안이었으니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 냉면이 다시 문헌에 등장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냉면을 언급한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 이 시에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나온다. “가지런히 당겨 만든 냉면이며, 배추김치는 푸르다.” 냉면과 배추김치[菘菹, 숭저]가 등장한다. 냉면 육수는 배추김치 국물이다. 이 시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냉면과 노루고기 등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다산은 벼슬살이를 할 때 이 시를 남겼다. 냉면을 먹었던 곳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로 대도시였다. ‘임성운’ 집안도 쟁쟁하다. 큰 도시의 행정관리 책임자, 권력자와 같이 냉면을 먹었다.
18세기를 넘기면서 냉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먹는 이들도 다양하다. 서민들도 먹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순조 즉위 초기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했다는 내용이 있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왔던 순조가 냉면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는 돼지고기도 등장한다. 냉면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었다.
순조의 냉면은 궁궐 밖 가게에서 구해온 것이다. 19세기 초반, 한양 도성에는 늦은 밤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냉면은 히트 메뉴였다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년)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 나오는 냉면도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냉면이다. 영재는 음력 4월의 평양 거리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찐 돼지고기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고 표현했다. 음력 4월이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고 냉면 값이 오른다. 냉면은 길거리 주막 등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신 이인행(1758~ 1833년)도 냉면에 대해 기록했다.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동치미(?)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葅, 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이미 냉면은 민간의 풍습이 되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다. 오늘날의 평양냉면이다.
계곡 장유(한양 혹은 경기도 안산/자줏빛 육수), 다산 정약용(황해도 서흥도호부/김칫국물), 순조의 냉면(한양/돼지고기), 영재 유득공(평양/돼지고기), 이인행(평안도 위원/김칫국물)의 냉면은 장소와 내용물이 모두 다르다. 메밀 함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 1930년대 소설가 이무영이 남긴 기록에는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소는 머나먼 경남이다. 메밀 함량은커녕 어떤 색깔의 냉면인지도 불확실하다.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냉면, 막국수, 평양냉면 요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불확실하다. 메밀 함량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전통, 정통 냉면, 평양냉면’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함부로 ‘면스플레인’ 할 일이 아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공주의 젖줄인 제민천을 따라 걸으면서 도심을 여행했다. 골목골목 걷는 내내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문장이 공주를 표현한 듯 느껴졌다. 공주는 풀꽃처럼 소박하고 소탈한 도시였다. 풍경도, 사람도, 음식마저도. 그래서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었다.
걷기 코스
공주시외버스 산성정류소(구터미널)▶ 공산성▶ 산성시장▶ 공주역사영상관(구읍사무소)▶ 풀꽃문학관▶ 충청감영 터(현 공주사 대부고)▶ 카페 ‘반죽동247’과 이미정갤러리▶ 하숙마을▶ 반죽동 당간지주(대통사 터)▶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 루치아의뜰▶ 산성정류소 또는 공주역
금강 변 공산성과 산성 아래 산성시장
공주 산성정류소에 하차하면 공주의 자랑인 공산성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터미널에서 5분 정도 걸으니 공산성 매표소에 닿는다. 공산성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을 때 금강 변 야산에 지은 산성이다. 산 능선에 조성한 성곽이 물결처럼 울렁울렁 춤춘다. 성곽의 등을 타고 공산성을 한 바퀴 돌 수 있으며, 90분 남짓 걸린다. 성곽길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를 통과해 성곽에 오르자마자 시원한 강바람이 반긴다. 바람을 얼싸안고, 발아래로 흘러내리는 성곽과 반짝이는 금강, 나지막한 공주 시가지를 여유롭게 굽어본다. 오랜만에 탁 트인 풍광을 마주하니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산성을 일주한 뒤, 다시 터미널 앞을 지나 산성시장으로 향한다. 공산성 아래에 있어 산성시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82년 역사를 지닌 공주 대표 시장이다. 그만큼 규모가 크다. 5개 구획마다 갖가지 생필품과 식자재, 식당들이 즐비하다. 특히 요기할 만한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맛 좋기로 전국에 소문난 ‘부자떡집’의 쫄깃한 떡, 줄 서서 먹는 ‘대박난찹쌀호떡’의 달달한 호떡, 가끔 생각나는 ‘단골닭강정’의 매콤달콤한 닭강정, ‘청양분식’의 잔치국수, ‘간식집’의 잡채만두 등이 있다. 대부분 소박한 음식이다. 맛도 그렇다. 공주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궁금하다면 하나씩 맛보는 것도 좋겠다.
풀꽃 시인 나태주와 풀꽃문학관
시장통을 벗어나면 이내 공주역사영상관(등록문화재 제443호)에 닿는다. 1923년에 지어진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 건물로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섞어 쌓아 올린 근대건축물이다. 백제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공주 역사를 담은 디지털 영상기록물을 전시해두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목조 건물 한 채가 보인다. 1930년대에 지은 적산가옥을 개조해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으로 조성한 곳이다. 야생화가 오종종히 피어 있는 뜰과 오래된 목조 건물의 조화가 멋스럽다.
나태주 시인은 금요일에만 문학관을 방문한다. 문학관 앞에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세워놓아 문학관에 있음을 알린다. 문학관 내부는 다실과 강연 공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모두 다다미방 형태다. 벽면 곳곳에 나태주 시인이 쓰고 그린 시화가 걸려 있다. 마침 나태주 시인이 다실에서 방문객들이 가져온 시집과 엽서에 정성껏 시를 써주고, 덕담을 건네는 중이다. 다실에서 웃음소리가 끓이지 않는다.
풀꽃문학관을 내려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 정문이자 옛 충청감영의 정문이었던 포정사 문루 앞을 지난다. 으리으리한 문루를 통과해 등교하는 학생들의 기분은 어떨지 궁금하다. 제민천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지인이 추천한 카페 ‘반죽동247’에 들른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꽤 많다. 소문대로 커피 맛이 좋다. 시원한 카페라테 한 잔을 홀짝 비우고, 카페 2층에 있는 이미정갤러리 구경에 나선다. 공주 출신 서양화가 이미정 대표가 지역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종종 기획전을 여는 공간이다. 방문할 때마다 수준 높은 작품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유학생들의 제2의 고향, 제민천 변 하숙마을
제민천 대통교 앞에 이르자 ‘하숙마을’이 보인다. ‘하숙마을’은 옛 약국과 옆 건물 4채를 개조해 한옥 숙박시설 및 마을 안내센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공주와 하숙마을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공주는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명문으로 알려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과 공주사대 부속 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공주로 유학을 왔다고 한다. 자연스레 학교 주변에 하숙집이 많이 생겨났다.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하숙집 주인은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숙집을 물려주거나 같은 하숙집에 산 인연으로 부부가 되어 부부 교사가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단발머리 여고생과 까까머리 남고생들이 수없이 거쳐갔을 비좁은 하숙집 골목길을 거닐며 당시 풍경을 상상해본다.
하숙마을 옆, 사대부고 학생들이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는 중앙분식을 지나 반죽동 당간지주를 만나러 간다. 동네 한복판 작은 쉼터에 527년(백제 성왕 5년) 백제 최초로 지어진 대통사의 당간지주(보물 제150호)가 홀로 서 있다. 당간지주 옆에는 1903년에 설립된 공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곳으로 유명하다. 유관순 열사와 조병욱 박사가 이 교회에 다녔다. 지금은 기독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후미진 뒷골목을 밝히는 등불들
다시 제민천으로 돌아와 대통교를 건넌다. ‘백성을 구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제민천은 공주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유유히 흐른다. 주민들이 대통교 그늘에 앉아 다리를 담그고 더위를 식힐 만큼 수질이 좋다. 제민천 변 건물 담벼락에는 옛 하숙마을 풍경 사진과 나태주 시인의 시, 하숙집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벽화가 전시돼 있다. 담벼락을 구경하며 한옥 찻집 ‘루치아의뜰’로 향한다. ‘맛깔’식당과 ‘이안게스트하우스’ 사이의 터널 같은 골목 안으로 쑥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다. 파란 대문 너머로 야생화가 만발한 뜰과 한옥 한 채가 반긴다. ‘루치아의뜰’은 차 문화 전문 사범인 아내 루치아와 쇼콜라티에인 남편 요한이 운영하는 찻집이다. 보이차, 홍차, 커피, 디저트를 판다. 폐허나 다름없던 집과 골목을 부부가 살뜰히 가꾼 덕에 공주 명소로 거듭났다. 도시 재생 성공 사례로도 손꼽힌다. 공간 못지않게 루치아가 차려내는 찻상 또한 작품처럼 아름답다. 찻상을 바라보고, 차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공주에서 루치아와 요한 부부처럼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를 많이 만났다. 공주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조연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서울에 사는 그는 공주 사랑이 대단하다. “공주는 관광객들을 끌거나 관광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 치장하지 않아서 좋아요.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옛날 시골 동네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어 맘이 편안해져요. 이게 공주 원도심의 매력이죠.”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보면 그처럼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말 것 같다.
주변 명소 & 맛집
단골들이 추천하는 ‘중앙분식’
제민천 대통교 앞에 있는 중앙분식은 즉석떡볶이, 쫄면, 비빔만두 등을 판다. 떡볶이 1인분을 주문해도 커다란 냄비에 2인분은 됨직한 양을 내놓는다. 쌀떡, 쫄면과 당면사리, 양배추, 어묵을 듬뿍 넣어준다.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졸여 먹어야 제맛이 난다. 맛의 비결은 안주인장이 만든 특제 소스에 있다고. 학생 때부터 즐겨 찾던 단골, 소문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올 8월 중순 공주우체국 옆으로 이전한다.
공주시 제민천1길 67, 041-856-1497, 10:30~19:00, 월요일 휴무
전국에서 소문난 ‘부자떡집’
1982년 산성시장 안에 창업한 떡집이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당일 생산·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삼는다. 작업장이 공개돼 있어 제작 공정에 대한 신뢰감을 준다. 영양떡인 부자떡이 대표 메뉴이며, 헤이즐넛 호두설기는 이곳에서만 파는 제품이다. 공주의 특산품인 밤을 넣어 만든 알밤찹쌀떡 세트가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쫀득한 찹쌀떡 안에 밤이 통째로 들어 있다. 부자떡집의 떡은 달지 않아 부담 없다.
공주시 용당길 11, 041-854-5454, 08:00~19:00, 연중무휴
추억을 부르는 잡채만두집 ‘간식집’
산성시장 내 분식집이다. 잡채만두, 김밥, 떡볶이를 판다. 대표 메뉴는 잡채만두. 통통한 만두 안에 당면이 가득 들어 있다. 대구 납작만두의 통통만두 버전 같다. 만두피와 당면만으로 이루어진 만두가 특별히 맛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공주 사람들이 한 봉지씩 사간다. 간장 대신 초장을 찍어 먹는 것이 독특하다. 만두 맛보다 만두를 구울 때 나는 자글자글 소리가 정겹다.
공주시 산성시장1길 46, 041-852-4812, 화요일 휴무(1, 6일 장날 제외)
담백한 육수가 일품 ‘고가네칼국수’
공주는 예로부터 면 요리가 발달해 칼국수집이 많다. 고가네칼국수는 칼국수를 상에서 끓여 먹는 방식이다. 한우 사골, 양파, 무, 파, 닭발 등을 넣어 담백하게 끓인 육수에 각종 채소와 우리 밀 면을 넣어 익힌다. 직원이 우리 밀 면은 더디 익는다고 알려준다. 고가네칼국수는 저염식 식단을 추구해 칼국수 맛이 심심한 편이다. 배추겉절이와 섞박지로 간을 맞춰 먹는다. 1인분도 주문할 수 있다.
공주시 제민천3길 56, 041-856-6476, 10:00~21:30, 일요일 휴무
걷기 Tip
❶ 4월 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주 금·토요일에 산성시장에서 공주 밤마실 야시장이 열린다.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한다.
❷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주말에 공산성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한다.
바다 위에 길게 선을 그은 새만금방조제의 시작점, 새만금홍보관부터 줄포의 자연생태공원까지 66km, 8개의 구간으로 이루어진 변산마실길. 서해바다의 넉넉함과 소박한 멋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구간은 썰물 때 진면목을 드러내는 구간으로 물때를 맞춰 걷기에 좋다. 물이 빠져나간 뒤 드러나는 갯벌과 모래사장은 단단하여 걷기에 적당하다. 5km 거리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지만 더 천천히 2~3시간을 걸어도 볼거리 느낄거리가 꽤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붉은 바위 절벽에 패류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갯내음이 진한 바다가 펼쳐진다. 갯바위 구간을 넘고 질척거리는 갯벌 위를 지나기도 한다. 바람에 꽃잎을 떨어뜨린 산벚나무가 절벽에 뿌리를 내린 채 위태롭게 서있는 풍경도 이채롭다.
밀물일 때는 해안 윗길을 따라 걷는다. 숲길이었다가 바다 전경이 훤히 내다보이는 구간이 나타나곤 한다. 해안선에 따라 구불 구불해 바닷길보다 길게 느껴진다. 이정표가 드문드문 세워져 있어 제대로 가고 있나 슬며시 걱정이 들 즈음에야 길이 나타난다. 너무 이정표에 연연하지 말고 해안 가까이 난 길 자욱을 따라간다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 좋다.
새만금홍보관에서 시작되는 길 초입에는 고무신 조형물과 야생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니 바닷길로 내려가게 되더라도 한번쯤 둘러보는 것이 좋다. 마지막 지점인 송포 선착장에서 시원한 물회나 소면으로 끓인 바지락국수로 먹는 점심이 별미다.
시니어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젊은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때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처럼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며 젊은이들과 소통하기도 하고 새로운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솔직한 느낌을 털어놓는다. 최근 화제가 된 시니어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소개한다.
‘시니어 유튜버’ 대표주자, 박막례(73) 씨
채널명: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구독자: 약 80만 명
박막례 씨 채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다채로움에 있다. ‘트러플오일 쏟아부은 감자튀김 먹어보기’, ‘지옥의 냄새 과일 두리안 먹어보기’ 등 먹방(먹는 방송)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른 메이크업, 여행, 드라마 리뷰 등 다양한 영상을 올린다. 여기에 그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채널 개설 2년여 만에 8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엔 한국 시니어 유튜버 대표로 미국의 IT 기업 구글 본사에 초청되기도 했다.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인기 동영상 3
1 막 대충 만드는 비빔국수 레시피
2 욕했던 연예인을 눈 앞에서 만났을 때
3 치과 들렸다 시장 갈 때 메이크업
야무진 먹방이 일품! 김영원(82) 씨
채널명: 영원씨01seeTV
구독자: 약 18만 명
한국의 최고령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꼽으라면 올해 82세가 된 김영원 씨가 있다. 그가 주로 선보이는 콘텐츠는 바로 먹방. 비록 젊은이들처럼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지구젤리’, ‘눈알젤리’ 등 최근 이슈가 된 음식은 물론 얼굴 크기만 한 닭다리, 랍스터 등을 두 손으로 잡고 야무지게 먹는다. 신 음식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찌푸려지는 표정과 맛있게 먹는 모습에 미소가 번진다.
‘영원씨01seeTV’ 인기 동영상 3
1 영원씨의 자메이카 통다리 먹방
2 영원씨의 불량식품 먹방
3 영원씨의 신전떡볶이 먹방
이젠 유튜브에 미치다, ‘할담비’ 지병수(77) 씨
채널명: 할담비 지병수 Korean Grandpa's crazy k-pop
구독자: 약 1만 명
KBS1 ‘전국노래자랑’이 낳은 화제의 스타 ‘할담비(할아버지와 손담비의 합성어)’ 지병수 씨도 인기의 기세를 몰아 시니어 유튜버로 변신했다. 그는 영상을 통해 박진영의 ‘허니’,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등 노래에 맞춘 안무를 선보였다. 지 씨는 채널을 통해 “다음에는 집 말고 노래방으로 가서 제대로 춤을 보여주겠다”라고 전했다. 그의 영상을 본 구독자의 반응도 뜨겁다. 개설한 지 3일 만에 구독자 수 1만 명을 돌파했다. 앞으로 ‘할담비’ 지병수 씨의 활약이 기대된다.
‘할담비 지병수 Korean Grandpa's crazy k-pop’ 인기 동영상 3
1 세로직캠 '허니''인디언 인형처럼''미쳤어'
2 지병수할아버지의 채널오픈 미공개 춤 공개
3 손담비와 춤을, 연예가중계 후기 그리고 최초 집공개
재단사 간접 체험, 여용기(67) 씨
채널명: 꽃할배TV
구독자: 약 1000명
‘부산의 닉 우스터’, ‘남포동 꽃할배’라고 불리는 재단사 여용기 씨도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만큼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는 패턴 뜨기, 재단 등 그의 직업과 관련된 영상을 주로 올린다. 이외에도 ‘유튜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먹방, 체험 등의 영상도 있다.
‘꽃할배TV’ 인기 동영상 3
1 '슈퍼셀피 찍고 마산곱창 먹고'
2 About EREDITO
3 남포동 꾸르맛 50년 전통 JMT #백화양곱창
소금 섭취량이 많으면 뇌졸중과 관상동맥질환, 뇌심혈관질환을 일으키며 고혈압의 원인이 된다. 우리나라 국민의 1일 나트륨 섭취량은 4719mg(소금으로 12g)으로 이는 WHO(세계보건기구)의 나트륨 섭취 권고량인 2000mg(소금 5g)의 2.4배이며 일본 4280mg,영국 3440mg 미국 3426mg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우리의 주 음식인 국ㆍ찌개ㆍ면류에서 나트륨을 가장 많이 섭취한다. 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 간장ㆍ고추장ㆍ된장은 물론 발효음식인 김치에도 나트륨 함유량이 많다. 최근 소금에서 간수를 빼서 단맛이 나오는 저염도 소금도 선보이고 된장, 간장과 김치나 젓갈류에도 저염도의 제품 생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짜게 먹지 않으려고 숙성된 김치를 안 먹거나 물에 씻어먹고 채소는 날걸로 된장에 찍어 먹는다는 사람도 있다. 나아가 나트륨 배설을 위해 칼륨이 많이 함유된 고구마와 감자를 자주 먹으라고도 한다. 사실 혀의 맛 때문에 간을 하는 것이지 음식이 목을 타고 식도로 넘어가면 맛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근무하는 산업체 식당에서는 ‘저나트륨 날’을 정해 평소 국의 염도 0.7%를 0.6%로 낮춰 제공한다. 사실 0.1% 차이는 내가 맛으로는 잘 느끼지 못하는 걸로 보아 훈련이 되면 지금보다 0.1%를 낮춘 저염도 음식을 먹어도 충분히 견딜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 나트륨 섭취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1. 국, 찌개, 국수 등의 국물 적게 먹기
2. 탕류 음식을 먹을 때 소금 대신 후추, 파, 등 다른 양념 먼저 넣기
3. 고기나 생선은 소금을 뿌리지 않고 구워 먹기
4. 가공식품 구입 시 저염 제품 선택하기
5. 외식 시 음식을 싱겁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
6. 하루 한 끼는 김치 대신 생야채 먹기
7. 나트륨 배설을 도와주는 채소, 과일 먹기
나이가 들수록 신체의 노화는 물론 혈관의 노화도 진행되므로 자연히 혈압은 올라간다. 고혈압, 뇌졸중, 심혈관계 질환의 발발 개연성도 점점 더 높아진다. 과연 우리 집 음식의 염도는 얼마나 될까? 이러한 궁금증도 풀어주고 저염도 식단 홍보를 위해 보건소에서 무료로 국을 담아가면 염도 측정을 해준다고 한다. 구청의 직원식당에서 국 대신 숭늉을 제공하는 것을 보고 참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짜게 먹는 것도 습관이다. 나이가 들면 맛을 느끼는 감각기능도 저하되므로 점점 더 짜게 먹게 된다. 할머니가 만드는 음식이 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즐겨 먹는 음식의 염도는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저염도 식단에 점점 적응해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