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사모는 오는 23일부터 24일 그리고 30일 3일간 강원도 고성군 GRA 강원귀농아카데미에서 ‘내손으로 황토집짓기’ 워크숍을 진행한다.
이번 프로그램은 업무로 인해 평일에 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운 직장인들을 위해 특별히 주말 반으로 편성됐다. 내손으로 황토집을 직접 지을 수 있는 실습중심의 프로그램으로서 소나무원목과 황토벽돌을 이용해 3평정도의 집을 직접 지으며 초보자나 여성도 참여 가능하다.
워크숍 기간동안 참가자들은 엔진톱을 이용해 나무를 다듬어 전통방식의 한옥형태로 목구조를 짓는 법을 배우게 된다. 원목을 직접 가공해 장부맞춤 방식과 기둥과 보(post&beam)의 목구조 방식, 자연방사능 물질인 라돈이 실내에 노출되지 않는 궁중구들 적용 방식 등에 대해 소개한다.
전 교육과정을 마친 참가자들은 황토농막 원두막 통나무집 황토벽돌 너와집을 직접 지을 수 있으며, 품앗이로 건축현장에거 경험을 쌓아 내 집도 짓고 생태건축의 전문가로서 창업하거나 전업 할 수 있다.
참가신청은 개강전일 오후 6시까지 참가비 입금을 통해 이뤄지며, 귀농사모 준회원 이상(귀농사모 카페회원이 아니면 참가 불가능)인 경우에만 참여할 수 있다.
농촌에서 태어난 한국의 중·장년층들은 시골생활의 삶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지고 있다. 최근 수도권에 은퇴자들을 위한 전원마을이 많이 만들어지고, 도시인들의 귀농(歸農)과 귀촌(歸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그런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귀농과 귀촌을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지만, 내용 면에서 귀농과 귀촌은 상당히 다르다.
귀농은 도시민들이 도시생활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러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정부는 공식으로 도시에서 거주하다가 농촌의 읍·면으로 이사한 사람 중에서 각종 농업이나 축산업에 관련된 명부에 등록된 사람을 귀농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반면 귀촌은 그냥 시골로 돌아가 생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귀촌은 시골로 돌아와서 농사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은퇴생활을 하면서 노는지 알 수 없는 개념이다. 가장 흔히 사용하는 전원생활이라는 말은 농촌으로 돌아가는 귀촌과 달리 꼭 농촌이 아니라 도시 주변에서도 전원을 가꾸면서 사는 생활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은퇴 후에 도시를 떠나 사는 생활은 크게 귀농과 전원생활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 빠르게 늘어나는 귀농·귀촌 인구
농림축산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귀농 가구는 1만 923가구(1만 8825명)로 3년 연속으로 1만가구 이상이 귀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년 전만 해도 귀농 가구는 연간 5000∼7000가구 수준에 머물렀으나, 2011년부터 연간 1만가구를 웃돌 정도로 큰 붐을 이루고 있다. 2013년 귀농 인구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을 살펴보면 경북이 2087가구로 가장 많았고, 전남과 경남, 전북, 충남도 1000가구를 넘어섰다.
또 귀농하는 가구주들의 나이는 평균 53.1세로 나타나 결국 40대와 50대가 귀농 인구의 주력 부대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최근 들어 베이비붐 세대의 귀농이 활발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과거에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든 없든 간에 노후생활 장소로 농촌을 선택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트렌드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귀농은 앞에서 농사라는 비즈니스를 함께 하는 전원생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일거리를 겸해서 농사를 짓는 가구들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귀농 인구의 작물재배 면적을 보면 0.5ha(1513평) 미만 경작이 전체의 72%를 차지하고 있다. 귀농 인구 10명 가운데 7명이 대략 1000∼1500평 정도의 땅을 경작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농사를 짓지 않고 농촌에서 생활만 하는 귀촌 가구도 귀농 가구 못지않게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3년의 경우 귀촌한 가구수는 2만 1501가구(2만 7665명)에 달해 처음으로 연간 3만명을 넘어섰다. 귀촌 인구가 많이 몰려 간 지역은 경기도가 8499가구(40%)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충북, 강원, 전북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수도권에 인접한 지방자치 단체와 전원생활 여건이 좋은 지역으로 귀촌 가구가 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귀촌 가구주는 40~50대가 대부분이다. 50대가 가장 많이 차지해서 전체의 28.5%를 차지하며, 다음으로는 40대가 22.1%, 30대 이하가 17.7%를 차지한다고 한다. 귀농가구에 비해 귀촌가구의 연령대가 다소 젊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직장에서 퇴직하고, 농사 경험이 있든 없든 노후생활을 위해 농촌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농촌의 생활비는 도시지역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후 자금이 부족한 서민과 중산층에게 새로운 은퇴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들이 간단한 농업기술을 배워 실패 확률이 낮은 농작물들을 재배함으로써 소일거리도 찾고 생활비도 일부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귀농·귀촌은 젊은이들의 이탈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우리 농촌을 되살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으로 풀이되고 있다.
귀농·귀촌은 ‘사회적 이민social immigration’이라고 할 만큼 개인적인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큰 사건이다. 거주지를 옮기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생활양식과 일터, 환경면에서 큰 변화를 동반하는 중요한 결정이라는 뜻이다. 성공적인 귀농과 귀촌을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농사를 겸하는 귀농을 할 때에는 사전 교육을 충실히 받는 등 세심한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영농기술과 영농기반 없이 무작정 귀농하거나 귀농 후 마을 주민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한 언론은 귀농에서 성공할 확률은 20∼30%밖에 되지 않는다고 분석하면서, 가능하면 40대 이전에 귀농하는 것이 실패 확률을 줄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만큼 귀농이 어렵고 힘든 결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귀농을 추진할 때에는 농사를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소득규모와 자녀교육에 대한 고려도 해야 한다. 시골생활은 도시생활과 교육여건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귀농 후에 농사를 지어 얻는 소득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특히 무엇보다 올바른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귀농의 목표는 무엇인가? 농업에 정말로 관심이 있나? 이런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해야 농촌생활의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성공하기가 힘들다. 노후소득의 대부분을 농사로 조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최근 귀농자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귀농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진행하는 귀농·귀촌 교육은 무료로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하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시농업기술센터(agro.seoul.go.kr), 경기도농업기술원(www.nongup.gyeonggi.kr), 경기농림진흥재단(www.ggaf.or.kr), 각 지자체 산하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여러 민간·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귀농·귀촌 교육 과정은 그 선택의 폭이 넓다. 특히 농림축산식품부가 공모를 통해 지원하는 민간 오프라인 교육과정은 내용이 충실하다. 이 과정은 교육비의 70∼80% 를 국고에서 지원받는다는 점이 장점이다. 교육 참여가 아닌, 정보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농어업인력포털(www.agriedu.net), 농진청 농촌인적자원개발센터(hrd.rda.go.kr), 농식품교육문화정보원(edu.okdab.com), 귀농·귀촌종합센터(www.returnfarm.com) 등을 이용하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투데이PNC가 운영하는 시니어 전문 미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 (www.bravo-mylife.co.kr)는 회원수 16만명인 귀농사모와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오는 7월 18일부터 8월 17일까지 강원도 고성군 삼포2리 해변에서 열리는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 행사를 공식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또 장기적으로 귀농사모 회원들의 유기농산물 직거래사업도 공동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행사 개요
1. 개최일시 : 2014년 07월 18일(토) ∼ 08월 17(일)
2. 장 소 : 삼포2리해변
3. 주 최 : 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조직위원회
4. 후 원 : 강원도/고성군/속초경실연/양양귀농지원센터/고성군번영회/삼포2리해변어촌계/설악헬스케어귀농귀어타운/영농법인한백/국립한경대학교 평생교육원/강원관광대학/강원귀농인협회
5. 주 제 :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삼포2리해변 오토캠핑 귀농귀촌창업학교
6. 강 사 : 첨부서류 참조
7. 참가 예상 인원 : 연 6만명
◇ 행사 소개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운영 계획
1. 목 적
◦ 귀농사모회원 16만명에게 귀농귀어체험 기회 제공.
◦ 강원출신 출향인인 지역 공동체로서의 연착륙 할 수 있게 일체감과 자긍심을 고취.
◦ 강원도와 고성의 문화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귀농 귀어 창업체험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귀농인구 유치 및 지역경제 활성화.
2. 방 침
◦ 전국 및 도내 예비 귀농 귀촌 귀어인 및 도민을 대상으로 16만 회원의 Daum우수카페 귀농사모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아 선정.
◦ 30일간의 가족이 동행하는 귀농 귀촌 귀어 체험 워크숍활동 중심 프로그램 운영.
◦ 건강하고 화목한 귀농과 지역민과 융화하는 행복한 귀농 만들기 프로그램 운영.
3. 세부 운영계획
◦ 일시 : 2014. 7. 19.(토) ∼ 8. 17.(일) 30일간.
◦ 장소 : 삼포2리해변
◦ 대상 : 귀농사모 회원 및 전국민
◦ 인원 : 30일간 연 6만명
◦ 숙식 : 오토캠핑 및 삼포2리해변 주변 팬션/민박/식당
◦ 프로그램 : 속초고성양양지역귀농체험워크숍/수산물 이용 치유식품개발 워크숍/힐링쿠킹쉐프전문과정/어린이귀농학교/애견해수욕리조트/소상공인해수욕장/여성귀농인워크숍/싱글귀농인워크숍/귀농귀촌아이디어클럽워크숍/귀농복덕방워크숍/지붕개량워크숍/DIY CCTV/귀농인의3D프린터워크숍/경원대학교총동문회워크숍/한경대학교귀농귀촌특화과정동문회워크숍/귀농귀촌인무료오토캠핑장/황토건축워크숍/목조주택워크숍/조입식주택워크숍/농막워크숍/원두막워크숍/원목구워크숍/용접워크숍/비닐하우스워크숍/칡소사육자워크숍/MBC예비귀농인워크숍/한국일보귀농동호회워크숍/KBS귀농동호회워크숍/한국노총귀농동호회워크숍/국방부귀농동호회워크숍/농협중앙회귀농동호회워크숍
◦ 숙박은 자부담 입장료 및 사용료는 유료
4. 운영 일정표
운영 일정표는 참가농가들 일정 조율 중으로 6월 30일 확정.
*프로그램은 기상변화 또는 일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음
5. 준비사항
가. 행사장확보(삼포2리해변 일대)
나. 행사 사무국: 강원귀농귀촌학교내
사무총장 : 조재근(박사)
고문 : 최진규(약초전문가)
자문 : 정성근(한경대학교 교수)
다. 착안사항
• 안전중심의 안락 한 캠프
• 귀농사모+고성군민+전국민+지역경제 상생 프로그램
• 이 문건과 관련 문의사항은 010-7345-3344(정성근교수)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인생2막을 시골에서 마무리하려는 귀농·귀촌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준비된 귀농’이 아니면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높은 게 현실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장기화로 인해 경기가 좋지 않으면 귀농인구가 늘어난다. 더불어 인터넷 귀농카페의 회원들도 급증한다. 다음 우수카페 귀농사모(cafe.daum.net/refarm)의 경우 최근 몇 년 사이에 회원수가 급증하여 16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요즘의 큰 특징은 50-60대의 귀농·귀촌이 늘고 있다. 최근 은퇴하는 베이비부머들의 영향이다.
필자가 귀농할 1997년 당시엔 귀농정보가 없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귀농’이란 단어로 검색하면 아예 검색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귀농정보가 넘쳐난다. 아니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검증 안 된 잘못된 정보도 많다. 당시의 ‘도피’성 또는 ‘낭만적’인 귀농형태가 지금은 ‘준비된’ 귀농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있었다. 귀농 교육도 다양화되어 가고 있어 무작정 귀농 하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귀농교육을 받아 귀농현장을 체험한 후 귀농하는 추세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귀농하는 이유는 연령대에 따라 다소 다르다. 3040세대는 대체로 아이들 건강과 교육을 위해서이거나 농사를 위해서이고, 5060세대는 여생을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 여유 있게 보내기 위해서이다. 즉 농촌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계형 귀농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자연환경이 주는 생태적인 ‘무형의 가치’를 추구하는 귀농도 최근 늘어나고 있다.
1020세대는 관심은 있으나 실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농어촌이 차세대사업의 유망한 블루오션으로 판단한다면 깊게 고민하여 귀농하는 걸 권하고 싶다. 그들이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차세대사회에서는 주류가 될 가능성이 많다.
‘패스트’라이프에서 ‘슬로우’라이프가 가능한 시대. 조금 여유 있는 삶 그게 매력인 것이다. 또한 ‘도시형 창업’은 포화 상태지만 ‘시골창업’은 아직도 미개척지이다. 요즘 TV방송의 예능프로그램이 거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향후 농어촌이 젊은층의 창업대상이 되길 기대한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위한 귀농은 단순한 전원생활보다는 농촌창업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도시에서 김밥집을 해도 교육받고 하듯이 귀농창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충분한 사전준비를 통해 귀농현장에 연착륙할 수 있는 나만의 귀농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영농기반이 없는 사람은 민관학계에서 하는 귀농관련 교육을 이수하여 도시의 경력과 연관 있는 분야의 창업을 추천한다. 귀농사모와 같은 온라인 카페에서 귀농창업선배들의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 멘토로 삼고 귀농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농사지어서 돈 벌겠다’, ‘무작정 시골가면 먹고 살 수 있겠지’, ‘에라 모르겠다. 시골에나 가자’ 등의 무작정 대안 없는 귀농은 위험하다. 시골경제도도 도시경제만큼 어렵다. 시골창업시장이 블루오션이긴 하지만 3년간 철저한 준비 없이 귀농하면 3년 후 다시 도시로 갈 가능성이 많다.
심사숙고한 끝에 귀농을 결정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귀농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고 보고 경험한 후 가족동의를 구한다. 그런 후 ‘내가 왜 귀농하는가?’ 그리고 ‘난 귀농 안 하면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되면 그때 귀농해야 한다. 그런 의지가 없으면 농어촌에서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극복하기가 어렵다.
귀농준비 시 농업·축산·어업·식품가공 등에 대한 사전지식을 충분히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양한 농림수산 축산 식품 산업 분야를 체험해 보고 ‘머리보다는 손으로 경험해야’ 한다. 귀농 귀촌 장소 선정이나 토지구입, 주택 마련 방법과 관련해선 동호회를 통한 검증된 멘토를 통해 공개적으로 구입하는 게 좋다. 가끔 잘못된 멘토가 있긴 하지만 그런 건 동호회 내에서 걸러진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귀농자본을 설정해야 한다. 귀농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따라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
철저한 준비 속에 귀농을 했더라도 실제 농촌생활에서 닥치게 되는 변수가 많다.
제일 큰 변수는 날씨. 농사는 하늘과의 동업이라고 한다. 천재지변 때문에 의외의 어려움을 많이들 겪는다. 이웃과의 소통도 문제가 된다. 이건 순전히 귀농인들 잘못이다. 그래서 시골교육을 받고 가야 한다. 귀농운전자금도 신경 써야 한다. ‘귀농 전 자금’보다 ‘귀농 후 운전자금’을 준비해 둬야 한다.
귀농인 에게는 기존 농산물 유통망보다는 소비자 직거래가 대세이다 보니 인터넷을 통한 판매가 유리하다. 인터넷동호회를 통한 소비자와 소통 그리고 그들과의 연대가 중요하다. 별도 사이트 구축보다는 큰 연간 비용이 안 드는 온라인 카페에서 판로를 개척하는 게 유리하다.
도심형 창업은 100명이 창업하면 3명이 성공한다고 한다. 그러나 귀농사모 카페 회원들을 보면 60%는 성공한다. 이런 창업시장이 있을까? 그러나 귀농을 ‘창업’이라고 보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도시형 창업만큼 만 준비하여 귀농하면 성공한다.
인생 2막을 농촌에서 보내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나 후손을 위한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주저 마시고 귀농해 보시라! 당신의 마음 속 고향으로.
귀농사모 대표 정성근
50대 이상 신(新)중년층을 타깃으로 한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은퇴가 본격화되는 베이비 붐 세대가 펼칠 인생 2막의 모습은 우리 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의 활력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큰 변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중년층의 당당하고 행복한 노후 생활을 지향하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창간을 더욱 뜻 깊게 생각합니다.
최근 수년간 귀농・귀촌 인구는 증가 일로에 있고, 특히 지난해에는 50대 귀농귀촌 가구수가 1만가구를 처음으로 넘어서며 귀농귀촌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중년층을 포함한 우리 국민들에게 농업・농촌이 기회의 공간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정부는 이들 귀농・귀촌자가 농촌 활력의 주체로 안착할 수 있도록 농지·주택 구입 및 임차, 영농교육, 6차산업화 창업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이 함께 거주하며 영농체험을 하면서 귀농의 시행착오를 줄여갈 수 있도록 「체류형 농업창업지원센터」를 조성하여 내년부터 운영할 계획입니다. 그밖에도 귀농귀촌종합센터를 운영하여 귀농・귀촌에 관심있는 누구나 철저한 사전준비를 통해 농업・농촌에서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꾸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에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함께 해주길 당부드립니다. 귀농귀촌 뿐만 아니라 농촌재능나눔, 농촌 관광, 우리 농산물 애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정부와 신중년층 간의 소통을 돕고 농업·농촌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에도 적극 동참해 주기를 당부 드립니다.
끝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신중년층의 당당하고 행복한 노후 준비를 돕는 중심 매체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산림조합중앙회(회장 장일환) 특화품목기술지원센터는 지난 5월 27일 전북 군산산림조합에서 표고버섯 생산자들의 기술 증진을 통한 소득향상을 위해 표고버섯 재배자와 귀농·귀촌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이날 교육에는 군산산림조합 고석빈 조합장을 비롯해 기존 표고버섯 재배자, 신규 재배자, 귀농·귀촌자 등 관계자 70여명이 참석하여 표고버섯 재배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알 수 있었다.
이번 교육은 귀농·귀촌자 등 표고버섯 생산 초보자를 위한 기초교육을 실시함과 동시에 기존 재배자에게는 새로운 관리법을 전수하는 실무교육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산림조합중앙회 관계자는 “앞으로도 표고버섯 생산자들을 위한 지속적인 기술교육과 현장지도를 실시하고, 표고버섯의 판로 확보와 유통지원 등 표고버섯 생산자의 실질적인 소득증대에 앞장설 수 있도록 특화품목기술지원센터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문의 : 산림조합중앙회 전북지역본부 특화품목지원센터(☎ 063-904-5572
지리산이 좋아 귀농을 마음먹은 젊은 부부. 어렵게 마련한 생활 터전이 산사태에 쓸려 나갔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서 얻게 된 새로운 행복. 해야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아서 행복하다.
◇지리산 여름휴가 왔다가 마음먹게 된 귀농
2012년 9월 17일 새벽3시, ‘뚜뚜, 뚜뚜, 뚜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어…. 아직도 비가 오네?” 부스스 일어나 어두운 작업장에 불을 켠 후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시작하려는 순간. 왜일까? 오늘따라 얼굴과 몸 주위로 정전기가 일듯 기분 나쁜 전율이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내 몸을 맴도는 정전기들을 날리고서 제빵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계량을 하고, 반죽기를 돌리고, 1차 발효…. 성형을 한 후, 다시금 2차 발효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후, 커피를 준비한다. 요 며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이순간이 저녁인지, 아니 새벽이던가? 가끔 헷갈릴 정도다. 뭐 어찌됐던, 지리산에서 느끼는,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2011년 4월 남편과 지리산으로 휴가를 왔다가 휴양림에 텐트를 치고 2박3일 야영을 하며, 둘레길을 돌았다.
“와, 이런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이 한마디가 발단이 되어 3개월간 산청, 하동, 유림, 함양, 남원, 산내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모든 조건이 적당히 들어맞는 빈집을 찾아 나섰고, 우연한 인연으로 ‘동네 대소사는 나를 통해 움직인다’라며 스스로를 ‘할매이장’이라고 칭하시던 할머니 한분을 뵙게 되었다.
그분이 소개해준 허허벌판 그리고 싸리나무밭. “아뇨, 할머니 저런 벌판 말고, 기왕이면 빈집에 조그마한 마당도 있었으면 하는데요. 그런 곳 없을까요?
순간, 화색이 만연한 할머니에 미소를 보았다. “오호라, 그런데~ 있어, 있어. 난 또 집 짓는 줄 알았지. 이리와 봐, 여기” 이렇게 소개받은 이곳. 흡사 폐가를 연상시키는 첫인상에 과연 이집을 고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빈집 수리는 10여개월여의 공사기간 동안 1주일에 3일씩 공을 들였다.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 왕복 4시간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열정을 쏟았다.
먼저, 쥐가 뛰어다니던 천장을 빠루(지렛대)와 삽으로 뜯어내고, 콘크리트 드릴로 벽에 구멍을 촘촘히 뚫어 벽 하나를 허물어냈다. 고무대야와 삽만으로 시멘트 50포를 반죽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열 겹짜리 벽지를 떼어내고, 스크레퍼로 벽면을 고른 후 얼룩진 벽에 퍼티를 발랐다. 파벽으로 포인트도 주고, 자꾸만 떨어지는 천장지를 붙잡으려 겹치는 부분마다 얇은 몰딩을 대어주니 마치 일본 다다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사에 연속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낼 곳도, 피곤한 몸뚱이를 잠시나마 누울 한 평 공간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추억이 된다더니,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 지나고 2012년 2월 10일 완전 전입과 함께 ‘경축, 귀농생활’을 시작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산사태로 쓸려간 보금자리 보고 ‘헛웃음만’
2012년 9월 17일 오전 7시. 빵 굽기 완료. 남편이 빵 배달을 간다. 우산을 쓰고, 한손엔 빵 바구니를 들었다.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측은해 보인다. 여전히 몸 전체에 정전기가 맴돌고 있다. “왜 이러지?” 아마도 비 때문일 거야 하고 넘겼다.
이후 시간이 지나 오후 12시 10분. 점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주방에 들어가기가 싫다. 계속 졸리고 춥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거실에서 인터넷 서핑 중인 남편 옆에 누웠다.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하는데, 오늘따라 물소리가 참 크다. ‘안방에 들어가서 잘까?’ 생각하는 순간 “우르릉 쾅…….와지직 우당탕, 쿵쿵. 와장창.”
일순간 유리파편이 얼굴로 날아들고, 차가운 빗물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그랬다 바위가 벽을 치고 거실 안까지 들어왔다. 아니다. 이미 우리 집 창고와 안방, 화장실은 쓸려가고 없었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벽과 지붕도 없어졌다. 우리가 누워있던 거실 빼곤 모든 곳이 산에서 흘러내린 바위, 나무와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1초, 2초, 3초…. 흙탕물이 밀려들어온다. 이건분명 현실이다. 거실 창문으로 간신히 빠져나오는 그 순간에 느낀 공포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집 앞 도로는 이미 계곡으로 변해있었고, 산에 박혀있던 중대형 사이즈의 바위들이 도로를 점령했으며, 우리 집은 앞 틀만 남고 옆과 뒤쪽은 모두 쓸려간 후였다. 떨리는 손을 꼭 잡고, 남편과 몸만 빠져나왔다. 그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살았다. 남편과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 집 뒷산의 자랑이었던 30년 된 호두나무와 밤나무가 시뻘건 흙탕물에 엉켜 있었다. 눈물은 커녕 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게 밀려들었다.
“거의 1년을 고치고, 딱 6개월 살았는데…….”
“화목보일러에(기름겸용) 기름 200리터 채워놨는데…….”
현실을 무시한 바보 같은 미련들만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산사태가 나고 2시간 정도 지나니 비가 그쳤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분들 모두 우리 집 앞에 모여 걱정이 많으시다.
“어떻게 저산에서 산사태가 나지?”
“산사태가 날 산이 아닌데….”
“사람 몸 안 상한 게 어디냐, 젊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된다”하시며 모두 응원에 말씀을 해주신다. 그래, 생각하면 할수록 당혹스러우나 그래 젊지 않은가!
“역시 이래서 귀농할 거면 젊을 때 해야 해!! 그치?”
“응, 응, 그러네요.….”
처음 빈집을 찾아 돌아다닐 때 소개받았던 그 허허벌판 땅에 재해협회(수재민 구호단체)에서 빌린 임시주택과 작은 컨테이너에서 2012년 9월 17일 낮 12시 10분, 3번째 태풍 ‘산바’로 인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산사태 1주일 후 제빵용 오븐과 소모품을 다시 사 모았고, 전기도 물도 없는 곳에서 50여 일을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수도가 들어왔다. 두달 후 전기가 들어오면서, 2012년 겨울 컨테이너에서 다시 빵을 굽기 시작했다.
한겨울 밖과 안에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그 서늘한 공간에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가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빵을 만들었다. 한 달 수입 단돈 3만1000원.
“이런 시골에서 빵집이라니 그것도 우리 밀빵?”
“유기농 설탕? 100% 우유버터는 뭐야? 뭐가 다른데?”
“국산이나 중국산이나 먹어보면 차이도 모르겠는데 비싸기만 하고 에이, 장사가 되겠어?”
처음 빵집을 하겠다고 하니 모든 귀농인과 주민들에게 우려에 소리를 많이도 들었다. 역시나 쉬운 일도 없고 세상에 공짜도 없었다.
◇단조롭지 않고 할 일 많아서 즐거운 인생
새벽 3시에 일어나 반죽을 하고 빵을 굽고 포장까지 하려면 6∼7시간이 걸린다. 시장 빵과 프렌차이즈 빵집과의 차별화를 위해 매일 반죽을 하고 굽고, 정확한 시간에 배달했다. 그렇게 3개월쯤이 지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반품이 줄어들었다. 비록 10평 남짓한 작은 북카페이고, 1억5000만원이 넘는 빛을 안고, 매달 내야하는 이자에 허덕이며 살지라도 우린 힘들지 않았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허무한 요행과 단조로운 일상보다는 매일매일 새로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이런 현실을 즐길 수 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린 웃을 수 있었다.
산사태가 나기 전, 운영하고 있던 북카페. 그곳에 들렸던 대다수에 손님들은 자신들도 귀농을 꿈꾼다 했다. 하지만 막연히 시골생활은 평화롭고 안락하리라는 동경 속에서 환상과 헛된 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련 속에서 견뎌낼 수 있을 지부터 상상해 보라고, 우선 온갖 벌레(지네, 나방, 거미, 개미 등)들과 집안에서
함께 생활 할 수 있는지, 한여름 뙤약볕에 썬크림 없이 서있을 수는 있을까? 그로인해 주근깨와 얇아진 표피층에 자외선이 닿아 검은 점들을 만든다면? 내가 산사태를 겪게 된다면 어떨까?
그 상황 안에서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넘친다면 귀농생활 성공확률 50%이다. 남은 50%는 근면, 성실함 등이 채워줄 것이다. 시골은 부지런해야 살 수 있고, 부지런하면 행복할 수 있는 곳이다. 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다.
이른 봄. 눈 녹기가 무섭게 산을 오르면서 산나물(다래순, 취나물, 곰취 등)을 뜯어 발효액도 만들고, 고로쇠 수액도 받는다. 여름엔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농사일로 바빠진다. 낮엔 더위를 피해 계곡에서 다슬기도 따고,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가을엔 호두, 밤, 감 등을 따고, 곶감, 고추도 말리고, 버섯, 오미자, 산머루 등 여러 약초들을 캐러 다니며, 그것으로 수입을 창출한다. 겨울엔 겨우살이 채취 또는 메주, 된장, 고추장, 김장김치(절임배추)를 담아 판매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귀농에 있어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자연과의 동화인 듯싶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확실히 부족하나 풀, 벌레, 새, 나무 등 자체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또 즐긴다면 시골살이가 단지 고단함과 무료함의 연속이진 않을 것이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서울, 창원(주말부부)
·귀농 전 직업: 직장생활
·귀농 결심동기: 시골생활에 대한 꿈
·귀농 선택작목: 지역 특산품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11년
·귀농 시 나이: 39세
·귀농지 선택사유: 지리산을 좋아해서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2억 2000여만원
·현재 영농규모 : 고사리 1000평
·연간 수익: 아직 없음(유기농 빵 판매로 연간 2500만원 정도)
·향후 계획: 다양한 많은 일들을 도전하고 싶다
나는 면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선택한 도시생활이었지만 50이 넘으면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아직도 어려웠다. 직장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며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이제 표고재배 등 새로운 희망을 품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 겪으면서 귀향 결심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농촌의 중농가정에서 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요즘이야 논농사, 밭농사 모두 기계화되고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는 기피하면서 단위 노동력당 경영하는 면적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60~70년대에는 논농사만 하더라도 두엄내기, 논갈이, 써레질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거나 일부 축력에 의존했다. 간혹 기계를 사용했지만 아주 초보적인 기계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농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퇴비장, 토끼사육장 같은 시설에서 토마토 같은 밭농사나 토끼사육 등 농사 체험을 배우고 익혔다. 이후 가까운 지역의 지명도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의 소망에 따라 농업관련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때 체계적이고 학문화된 각 부문의 농업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등 과정을 이수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부모님은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용해 면 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농촌생활의 갖가지 어려움, 각종 편의시설의 부족, 2세 교육을 위한 교육환경의 열악함 등을 이유로 대도시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이 보유한 농지는 두 분이 충분하게 경작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80년대 말 변환기에 나와 중소기업에 몸담게 됐다. 그러면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회사가 중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10여년 간의 중국생활을 했다. 한 때 거침없는 성장으로 코스닥에 상장했던 회사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영업이익이 공장손실을 메꾸지 못하는 등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공장을 통폐합하고 조직을 축소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돼 사직했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주식에 투자했던 여유자금마저 상장 폐지되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실업자가 됐다.
실업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취업이야 되겠지’하는 기대 속에서 인크루트를 비롯한 취업포털을 통해 수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업에 실패했다. 50을 넘긴 나이가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작은 아이가 대학졸업을 3년이나 남겨두고 있어 하루라도 소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가정주부라는 틀을 벗어난 적이 없던 안식구가 참다못해 월 100만 원 정도 급여를 주는 직장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팔순이 넘은 어머님 농사를 도우며 작은 농가 소득이라도 올리고자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계산해 본 예상농업소득만으로는 아이 대학 교육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직장에 다니는 동네 친구를 따라 월 130만원 정도의 보수를 받으며 출근을 시작했다. 출근해서 8시간 내내 예초기를 메고 도로 가장자리에 늘어지고 제멋대로 우거진 잡초와 작은 나무를 베는 일을 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제설작업을 하면서 고된 2년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고용노동부 취업포털인 워크넷(worknet)에 올린 내 이력서를 보고 주유소 소장을 제의해 온 주유소가 있어 일을 시작했지만 전 소장은 퇴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며 계산원, 주유원 등으로 월 130만원의 보수를 주고 일만 시켰다.
회사에 불만이 많은 가운데 계속적인 취업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지역 중소기업으로부터 입사제의를 받고 연 3300만원의 보수로 출하관리 업무로 출근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해 나갔다. 농사를 지으며 모르는 부분은 경험 많은 어머님이나 친구한테 자문을 구하며 또 남들이 하는 상황을 보거나 과거에 봐왔던 기억을 살려 해나가고 있다.
논에는 벼농사를, 밭에는 고추농사는 단모작, 감자농사는 후작으로 무를, 마늘 심은 후작으로 메주콩을 심고 논둑이나 유휴지에는 검은 콩, 들깨, 호박, 가지, 상추, 고구마, 쪽파, 시금치, 오이, 참외, 토마토 등 채소나 잡곡을 심어 자급하고 있다. 요즘엔 고라니가 많아져서 콩, 옥수수 등은 수확을 못 할 정도로 피해가 많고 논에도 수확기에는 적지 않은 피해를 준다. 하지만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지인의 표고농장을 보고 온 뒤 기대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시작한 농사가 표고재배다.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엔진 톱을 구해 산에 있는 참나무나 밤나무를 베어 1m 전후의 길이로 토막을 내고, 표고종균을 넣을 수 있는 가는 나무는 나무보일러에 들어갈 정도의 길이로 잘라두었다가 화목으로 쓴다.
1월말에 군 산림조합에 표고종균을 신청하고 3월말 종균이 도착하면 모아 놓은 참나무에 5cm 폭에, 길이 10cm 전후의 간격으로 천공기로 구멍을 뚫고 성형종균을 넣고 물 주기 좋게 쌓아두고 15일 간격으로 물을 주고 차양 막을 설치해 주는 등의 관리를 한다.
◇바쁜 일 없는 시기 수입 짭짤한 표고농사
관리를 잘 하면 종균을 넣은 당년 가을에 표고를 수확할 수 있다고 교재에 나와있지만 내 경우에는 다음해 가을에 표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확된 생표고는 거래처가 없어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다듬어서 햇볕에 말려 저장했다가 구매자가 나타나면 시중가인 1kg에 5만 원에 팔고 있다.
표고재배는 중장비 도움 없이 하려면 통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세우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중노동이지만 표고수확이나 물주기 등이 비교적 수월한 일이다. 어느 곳에서나 중국산 표고가 넘쳐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 일이 힘든 것에 비해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온성 표고를 선택하면 3~4, 10~11월에 수확되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부족한 지식을 메우고자 산림조합에서 출간한 ‘표고재배기술’이라는 책자로 공부하고 의심나는 부분은 찾아 읽으며 다른 고수익 버섯품종도 찾아보았다. 표고 전업농이 되기 위해서는 3만본 정도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원목을 살 수 있는 거래처를 확보하고 급수 설비 등 시설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는 토지 비용 제외하고 연 5000만원 정도 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실험적으로 재배하는 표고는 한 해에 200본씩 확보하여 5년 정도 지나면 1000본정도 되고 그 중 800본 정도가 수확된다. 연차적으로 농사에 필요한 40m×8m 규모의 못자리용 비닐하우스를 보조금 제외한 420만 원에 설치하고 백미 및 현미가공이 가능한 가정용정미기를 140만 원에, 비닐 피복 및 소규모 로터리 및 두둑 만들기가 가능한 아세아 관리기를 120만 원에 구입하는 등 최소 규모의 투자도 진행 중이다.
◇직장과 농사를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 들어 남의 밑에 가서 거슬리는 말 참아가며 직장 다니지 말고 농사에 올인 하면서 편히 살라고. 그러나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직장생활과 농사를 병행할 생각이다. 또 관심 있는 금송, 장뇌삼, 블루베리, 복숭아 등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꾸면서 가능성도 따져보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낙원이라는데 직장을 정년퇴직하면 젖 짜는 산양도 두세 마리 키워서 산양유를 짜서 마시고 남으면 치즈 등 제품 개발도 해보고 싶다. 또는 벌통을 두세 통 사서 남향 따뜻한 곳에 놓고 주위의 아카시아나 밤꽃 등의 꿀도 따고 작물의 수분도 좋게 하는 일들도 좋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러 곳에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도 정리하고 내가 흙으로 돌아갈 준비도 착실하게 해 놔서 후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작은 바램이다.
* 귀농 전 거주 지역: 중국 대련에서 10년 거주
* 귀농 전 직업: 생산관리
*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 귀농 선택작목: 벼, 무, 배추, 감자, 표고버섯
*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 귀농연도: 2008년
* 귀농 시 나이: 52세
*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마을
* 귀농시 영농기반: 논 4000평, 밭 1000평
* 귀농 초기자금: 없음
* 재 영농규모 : 귀농시와 동일
* 연간 수익: 논 농사 800만원, 밭 농사 450만원(감자 100만원, 무·배추 100만원, 고추 100만원, 표고버섯 150만원)합 1250만원
사관학교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전투적이고 의욕적인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윤경숙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 이사장이 젊은 날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전공 선택 기준을 오직‘여자가 거의 없는 학과로 가자’라고 생각했다는 건 나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80학번인 윤 이사장은 ‘여자라면 가정학과’란 도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건 축산학과였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이끄는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는 국내 최초로 특급호텔 인턴십 프로그램을 가진 최고의 조리 특성화 학교로 자리 잡았다.
정부의 일자리 창출과 국민의 건강한 먹거리 제공에 기여하는 전문 직종으로서 유기농관련 인재 양성이 국가적으로 시급한 실정이다.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는 최근 도시 공간 텃밭이나 영농기술을 사전에 충분히 익힌 후 신중히 판단하여 귀농 귀촌하는 것을 돕고자 한다. 최근 성지 융복합 교육원을 훈련원으로 하여 사전 교육 제안서를 관할 정부기관에 냈으나 결국 채택이 되지 않았다.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크게 ‘농식품 종합전문가 과정’과 ‘유기농식품 지도사 과정’ 이었다.
윤경숙 이사장은 “농식품 종합전문가 훈련과정은 6차 산업 모델의 융복합 과정으로 농·식품의 생산, 가공, 유통, 관광을 통합하는 관련 공인자격증은 없는 상태입니다. 농업의 6차 산업화 쪽으로 가야 단순 지역 농산물이나 특산물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개념을 뛰어넘어 외래 관광객을 끌어들여 먹거리를 만들어 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아는 것이 힘이고,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귀농·귀촌을 결행하기 전에 관련 교육을 받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좋은 방법이죠.” 무작정 막연한 기대만으로 귀농 귀촌하다보니 실패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시농업 6차 산업화를 위한 사전 교육을 받고 가게 해야 한다.
사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고 전원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귀농귀촌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지만 농사를 지으려는 귀농인들의 정착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윤경숙 이사장 또한 중장년 일자리 창출과 건강한 식품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뜻으로 ‘농식품 종합전문가 훈련과정’은 진심이 통할 날이 올 때까지 추진할 생각이다.
윤경숙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이하 한조사) 이사장은 강인한 추진력으로 식문화 전문가 육성의 최전선에 서서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4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공을 살려 정부 산하단체에 취직한 그녀는 결혼식과 출산 전날까지 야근했고 출산 뒤 보름 만에 복직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일은 녹록치 않았고 결국 1989년에 퇴직서를 제출하고 전업주부가 됐다.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맞춤형 교육 시작
그런데 그 시점에서부터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전업주부로서도 철저하게 살고자 했던 그녀는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기술조차 일하듯 익혔고, 2년간 한식, 일식, 중식, 제과·제빵, 복어조리, 칵테일 수업을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같은 반 학생들이 강사 대신 그녀에게 질문하는 상황까지 되자, 요리학원을 직접 해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요리를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확신이 들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40세였던 1992년, 한 가전기업의 요리학원 원장으로 재취업한 그녀는 2년간 해당 기업에 속한 전국의 요리학원들 중 가장 많은 수강생을 모았다. 하지만 조리 매뉴얼에 맞춘 요리 지도에 제약을 느낀 윤 이사장은 1999년 경기도 수원에 현재 한조사의 전신인 ‘동양요리학원’을 차렸다.
학원을 열자 비행청소년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공부 대신 요리에서 살길을 찾으라’며 부모나 교사에게 등 떠밀려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윤 이사장에게 있어선 첫 제자들이고 성공시켜야 할 제자들이었다. 그녀는 가정과 학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아이들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지도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아이들도 해낼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각종 요리대회와 자격증 시험 대비에 집중하여 교육을 진행했다. 수상 실적을 관리해 아이들의 대입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위기 때마다 기회가 찾아 와
교육 지도의 효율성을 위해 혁신을 도입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윤 이사장은 기존 사업을 확장할 계획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전혀 예측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임차해 있던 수원의 학원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이었다. 갑작스럽고도 불가항력적인 사고에 울며 겨자 먹기로 부지를 찾던 윤 이사장은 2006년 서울 금천구의 한 아파트형 공장을 소개받았다. 300평 규모의 건물은 그녀가 가진 자산에 비해 턱없이 비쌌다. 그런데 포기하려는 차에 계약 담당자는 윤 이사장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을 제시했다. 이렇듯 한조사가 서울에 정착하게 된 일은 하늘의 도움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아이들 교육에 대한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실기로 대학교 입시에 성공했다고 하여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대학생 제자들은 대학에서의 공부를 따라가기 버거워했기 때문이다. 이론 수업 위주인 대학에서 공부하다 실무능력이 녹슬어 졸업 후에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것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재능이 탁월한 아이들의 ‘손’을 썩히지 않기 위해서 윤 이사장은 기술과 학력을 동시에 완성하는 학점은행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학점은행제 도입 후 학생 수의 급속한 증가가 이뤄졌고 이내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다. 이번에도 비용이 꽤 많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새로운 건물의 주인은 그녀와 계약했다. 위기 속에서 매번 도움과 구원을 얻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는 윤 이사장은 새로이 들어가게 된 건물 앞 머릿돌에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겼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귀농 인구를 위한 체계적 교육 시스템 구축 꿈꾼다
지금 윤 이사장은 보다 큰 그림을 꿈꾸고 있다. 식문화의 근본, 바로 농업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농업인구는 1970년대는 50%였던 것이 지금은 7%대에 머물고 있다. 수출은 세계 12위권에 진입하였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농업은 상대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베이비부머 세대를 중심으로 전원생활을 통해 삶의 가치를 새로이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귀농과 귀촌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보자면, 시설 운영을 통해 소득을 조달하는 ‘귀촌’은 활발한 편이지만 영농을 통해 소득을 조달하는 ‘귀농’은 실패 사례가 워낙 많고 관련하여 제대로 된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다.
농업 인프라가 허약하기에 제대로 된 귀농이 이뤄지지 않고, 이는 농업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 것이며, 농업의 미래가 암울해지면 한국 식문화의 미래 또한 암울해진다. 윤 이사장은 그래서 농식품 종합전문가 과정과 유기농식품 지도사 과정을 구축하여 농업전문가를 육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음식으로 시작하여 보다 깊은 근본으로 들어가는 윤 이사장의 결단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 지난달 통계청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밝힌 귀농·귀촌인 통계를 보면,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는 3만2424가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2년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것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앞으로 귀농·귀촌인구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도시의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시골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낙후된 의료시설과 허술한 치안 속에서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경제적으로 덜 풍족한 생활은 필연적이다. 원주민의 텃세도 결코 우습게 넘길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시보다 더욱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시골인지도 모른다.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전국의 귀농귀촌 현장을 돌아보며 성공적인 귀농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 그 방안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본다.
“장흥은 기후가 온화하고 산이 좋고 강이 흐르는 등 자연환경이 좋습니다. 해산물과 표고버섯 등 먹거리도 풍부합니다. 인구보다 사육하는 소가 더 많지요. 토요시장에는 주말이면 8000명의 관광객이 다녀갑니다. 다른 농촌지역에서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장흥은 살기가 좋아 인구가 4년 연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김영윤 장흥군청 계장은 장흥이 귀농지역으로 선호받는 이유를 묻자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같이 답했다. 장흥에 내려가 보면 김 계장의 발언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 ‘정남진’으로도 불리는 장흥이 귀농의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남도가 지난해 발표한 귀농가구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귀농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1990년부터 2012년 10월까지 756가구가 귀농해 장흥이 전남도 22개 시·군 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지역으로 집계됐다.
장흥의 저렴한 땅값과 따뜻한 기후조건이 장점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여기에 산과 들, 바다와 호수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연환경과 장흥군의 적극적인 귀농지원 정책도 많은 도시민을 끌어들인 요인이다.
◆귀농어업인 창업자금 및 주택수리비 지원
장흥군은 귀농어업 희망자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창업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농림축산식품부가 각 지자체와 공통으로 진행하고 있는 융자방식의 귀농어업 창업 및 주택구입 지원사업과는 다르다.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구별 최대 1000만원의 한도 내에서 귀농어업인(이하 귀농자)과 장흥군이 반반씩 부담하는 방식이다.
지원자격은 도시지역에서 1년 이상 농어업 이외의 다른 산업에 종사하다가 2011년 1월1일 이후 장흥군으로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하는 65세 이하의 귀농자이다. 농식품부, 농촌진흥청 및 지자체 주관의 귀농교육을 3주 이상(또는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한다. 귀농자 중 영농종사 기간이 3월 이상인 자, 농업계 학교 출신자, 후계농업인으로 선정되었던 자, 농산업인턴 이수자(3월 이상)는 귀농교육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세대주가 가족과 함께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해야 하며 장흥군에서 직장, 자녀교육 등을 위해 일시적으로 도시로 이주헀다가 3년 이내 다시 장흥군으로 전입한 경우는 지원받을 수 없다. 보조금을 지급받고 5년 이내 타 지역 전출 및 영농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 즉시 보조금은 회수 조치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장흥군은 귀농자의 주택수리비도 지원하고 있다. 귀농자가 주택 내외부 수리, 보일러, 화장실, 부속시설 개보수를 한 경우 가구당 500만원 이내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상속, 증여를 포함해 주택을 구입하거나 5년 이상 임차한 귀농자가 해당된다. 또 장흥군에서는 귀농자이 귀농학교 수료 시 1인당 30만원 한도에서 수강료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농식품부와 공통으로 진행하는 귀농자 창업 및 주택구입 지원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농지구입이나 비닐하우스 설치, 축사 신축, 농기계 구입 등 농어업 창업자금은 가구당 2억원까지 지원한다. 이자는 연 3%이며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조건이다.
장흥이 귀농지로 인기를 끌면서 귀농 성공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블루베리로 연간 2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승화 귀농인 연합회장이 있다. 서울에서 나름대로 잘나가던 건축업을 접고 귀농한 이씨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농업을 고집하면서 블루베리로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써내려가고 있다. 이씨는 장흥을 전국 최고의 블루베리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장흥군은 전국 첫 ‘은퇴자 도시’ 조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랜드러버스코리아, 대우산업개발 등이 지난해 9월 3600억원 규모의 투자협약을 체결하면서 장흥 정남진 로하스 타운 개발이 본격 진행 중에 있다. 계획에 따르면 오는 2019년까지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비동리 일대 233만㎡가 1500가구 규모의 주택과 골프, 승마 등 체육시설, 의료‧교육 등의 시설이 갖춰진 복합 주거단지로 조성된다. 현재 1차로 43가구에 대한 분양이 시작됐다.
로하스타운이 조성되면 은퇴자를 비롯한 귀농자의 유입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해당리 일원에 조성되는 장흥 바이오식품산업단지도 2014년 최종 준공을 목표로 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다. 장흥읍 억불산 일원에는 100여만㎡의 편백숲에 전통 한옥, 편백 노천탕, 목재문화체험관 등을 갖춘 휴양시설인 장흥 우드랜드가 2009년 개장됐다.
장흥군청 관계자는 “대도시인 광주광역시의 인접도시도 아니면서 전남도에서 장흥이 귀농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산, 바다, 강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귀농지라는 것이 매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