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주최하고 노사발전재단이 주관한 ‘2019 신중년 인생 3모작 박람회’가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박람회에는 건설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120개 업체가 참여했다. 그중 65개 기업은 현장채용을 위해 면접을 진행했고, 55개 기업은 구인공고를 냈다. 특히 노사발전재단은 신중년 인생설계를 위해 18명의 전문상담사가 경력 진단 및 이력서·자기소개서 작성, 면접 관련 개인별 맞춤상담을 실시해 시니어 구직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또 5060세대의 재취업 정보뿐만 아니라 귀농·귀촌, 창업 지원에 관한 정보도 나눌 수 있는 부스도 마련됐다.
2017년 편의점을 운영하다 폐업했다는 권모(58) 씨는 “소상공인진흥공단 희망리턴패키지 부스에서 상담 후 그동안 몰랐던 지원과 재기교육 프로그램을 알게 돼 도움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박람회장을 찾은 이모(55) 씨는 “경력 단절된 중년 여성에게 맞는 질 좋은 일자리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양한 민간 기업들이 참여하는 이러한 행사를 통해 보다 많은 중장년이 질 좋은 일자리를 찾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망가진 몸을 고치기 위해 귀농했다. 죽을 길에서 벗어나 살길을 찾기 위해 산골에 들어왔다. 그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결과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시들어가던 그의 구슬픈 신체가 완연히 회생했으니. 산골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아름답고 기묘한 지구별과 이미 작별했을 거란다. 현명한 귀농이었다는 거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도사’라 부른다. 이 사람, 정경교(62) 씨의 삶에는 색다른 게 있다. 누가 뭐래도 제멋대로 산다.
경교 씨는 오랫동안 대양을 누볐다. 바다에서 무슨 신기한 일이 일어나나 골똘히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외항선 항해사. 이게 그의 직업이었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마냥 돌고 도는 일이라는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배를 타고 지구를 36바퀴쯤 돌았다는 게 아닌가. 오만가지 경험을 했을 거다. 생사를 넘나들기를 밥 먹듯이 거듭했단다. 긴 항해 뒤 잠시 정박한 낯선 항구의 주점에서 이마에 총을 들이대는 건달들을 깡으로 해치우기도 했다. 그는 무술에 능란하다. 그러나 몸에 찾아온 병증은 무술로 때려눕힐 수 없다. 정 씨는 자신의 몸이 내지르는 화급한 비명을 듣고 배에서 내렸다.
“어느 날, 술 마시다 혼절했어요. 이러다가 바다 위에서 객사하겠구나, 두려운 생각이 엄습하더라고요. 온몸의 에너지가 모조리 고갈된 상태였던 겁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 됐다는 거. 외항선원 생활이라는 게 원래 건강을 망치기 쉽습니다. 밤낮이 따로 없는 고된 업무, 늘 부족한 잠, 무절제한 음주, 극도의 스트레스 등등이 겹치다 보면 한계 상황에 이르게 마련이거든요.”
“시골에서 살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거죠?”
“귀농을 해서 오가피 농사를 짓자! 그런 결심을 했어요. 여기엔 이유가 있어요. 제가 배를 타면서도 건강 복구를 위해 이 약 저 약, 몸에 좋다는 걸 다양하게 먹었는데요, 오가피 효력이 가장 좋았어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자연환경 살아 있고, 그런 깨끗한 산촌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손수 오가피 농사를 지어 장복한다면 건강해지겠거니, 건강한 심신으로 나의 영원한 관심사이자 길동무인 무예 수련에 전념한다면 인생 자체가 달라지겠거니, 그런 확신과 구상이 있었던 겁니다.”
“계획대로 잘 흘러갔어요? 시련을 피할 수 없는 게 귀농인데. 심지어 고행길인데.”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뭘 하든 미쳐야 도달할 수 있다는 거! 제겐 스스로 선택한 일엔 완전히 미치는 버릇이 있어요. 귀농하자마자 모아뒀던 자금으로 집을 짓고 밭 200평을 사 오미자 농사를 시작했어요. 새벽마다 반드시 두어 시간 무술 수련을 했고요. 처자를 건사하기 위해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외항선 항해사가 배에서 내린 까닭
정 씨가 사는 마을은 진안군 덕태산 백운계곡 아래에 있다. 사시사철 등산객이 바글거리는 길목이다. 해서, 식당은 용케도 성황이었다지. 그러나 접었다. 돈벌이는 될망정 식당일에 발목 잡히기 싫어서였다. 때마침 이웃 마을에 빈집 매물이 나와 그걸 사들였다. 집이라 할 것도 없는 폐가였다. 풀덤불에 묻혀 쓰러져가는 방앗간이었으니까.
“건강이 빠른 속도로 좋아지자 본격적으로 무예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그러기엔 방앗간 자리가 적격이라 본 겁니다. 골격만 남기고 거의 다 털어낸 뒤 다락방이 있는 2층집으로 싹 개축을 했어요. 폐자재나 피죽을 구해 직접 지었어요. 엉성한 집이지만 무려 3년간 혼자 뚝딱거려 완성했지요.”
“어디서든 다시 보기 어려울 재미있는 집이에요. ‘영웅문’이라 쓴 간판도 걸어두셨네?”
“소림사의 무예 영웅들을 기리며 지은 당호입니다. 하하핫! 이전에 살았던 식당집도 홍콩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무사의 집을 본떠 지었어요. 무림 고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경. 어려서부터 제겐 그런 게 있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태권도, 합기도, 검도 등 다양한 무예를 섭렵했죠. 선원생활을 할 때도 틈틈이 중국의 전통무예를 부지런히 배우고 익혔습니다. 귀농 이후에는 드디어 본격 수련에 접어들었고요.”
“무술과 함께하는 삶의 꿈을 귀농으로 비로소 이룬 사람. 그게 정 선생이라는?”
“그렇죠. 비록 아직은 부족하지만 점점 심화되는 무술 수련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제가 무협지를 끼고 살았어요. 흰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도인을 꿈꾸었어요. 동심으로 자라난 몽상이었지만 무예와 함께하는 지금의 생활은 제게 너무도 이상적입니다. 인생을 제법 깊게 바라보는 안목과 에너지도 생겼어요. 삶에는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한 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신비하고 더 고귀한 경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결국 무술 공부가 제게 신세계를 열어준 셈이죠.”
무술과 함께하는 귀농인의 삶
정 씨의 산방 ‘영웅문’은 무협영화 세트장을 닮았다. 오잉! 대번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집 안팎에 온갖 무술 도구와 특이한 장식물과 총천연색 휘장들이 어지러이 혼재해 있어서다. 내 취향대로 이왕이면 재미있게, 이왕이면 익살스럽게 살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집이다. 인생이 어차피 쇼라면, 비극보다는 희극 쪽으로 생활을 몰아가겠다는 지향이 엿보인다.
이 집이 완성된 건 2008년. 이후 10여 년간 그는 농사와 무술 수련, 오직 이 둘을 전공 삼아 정진했다. 몰입하면 성취하는 법. 무술의 진도가 질주처럼 빨라지고, 부실했던 몸은 근육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 옹골찬 몸으로 날고 솟으며 고도의 무술 품새를 수련해왔다. 시들어가던 건강을 복구하고, 단련된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일이 쉬울 리 있겠는가. 그는 어쩌면 독종이다. 들입다 공부만 파는 ‘범생이’를 닮았다. 또 어쩌면 수행자다. 그가 무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건 정신의 산정(山頂)인 것 같다. 이미 ‘신세계’라 일컬을 만한 한 경지를 슬쩍 봤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제가 한때 크리스천이었습니다만 영성이랄까, 영혼의 비밀이랄까, 그런 본질적인 차원을 실감으로 경험한 일이 좀 있었어요. 삶으로만 완료되지 않는 또 다른 세계, 그런 게 있다고 믿게 된 거죠. 그렇기에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됐고요. 무술 수련은 결국 도(道)를 찾는 공부이자 활인(活人)의 길입니다. 나 하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욕심에서 벗어나, 남들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공부이기도 하고요.”
정 씨에겐 따르는 제자들이 있다. ‘영웅문’ 마당에서 자주 함께 수련을 한다. 지역 문화행사에 초대받아 무술 시연도 한다. 방송 출연도 잦았단다. 때로는 ‘오가피 명인’으로, 때로는 ‘산골에 사는 괴짜 도사’ 명색으로. 한 TV 방송에서는 괴력을 과시했다. 한겨울 계곡 암벽에 꽝꽝하게 뒤엉긴 얼음장을 이야압! 하는 외마디 기합 하나로 산산이 부서뜨린 것. 생생한 현장 영상이라 무슨 속임수를 썼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범상치 않은 내공, 정 씨는 그 이색적인 기운이 자신의 내부에 축적되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놀란다. “어라, 이게 뭐지? 나 왜 이러지?” 그렇게 말이다. 아울러, 좋은 에너지를 얻었으니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자는 결론에 닿았다고 한다. 희한한 재주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임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태평농법’이 가능한 오가피 농사
무술이 정 씨의 정신적 동행이라면 오가피 농사는 단 하나뿐인 생계 수단이다. 유행가만 유행을 타지 않는다. 농작물도 유행을 탄다. 흥행에 롱런하는 작물은 없다. 오가피도 그중 하나. 이미 오래전부터 과잉 생산돼 흔히들 파내고 다른 작물로 전환했다. 실정이 그렇건만, 그는 그걸 왜 신주단지 모시듯 붙잡고 살지?
“일찍이 외항선을 탈 때부터 ‘필’이 꽂혀 귀농의 한 계기가 된 게 오가피입니다. 실제 농사를 지어 장복을 하면서부터는 더 신통방통했어요. 제 체질에 잘 맞는 탓일까,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약초는 없다고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에요. ‘본초강목’엔 오가피가 금은보화보다 낫다고 기록됐더라고요.”
“제아무리 유망한 약초라 해도 농부가 생산을 해서 소득을 올리기까진 힘든 과정의 연속이지 않겠어요? 농사 초보자에겐 더욱 가시밭길이었을 테고.”
“영농 교육도 받았어요. 이웃 농부들에게도 배웠고요. 근데 오가피 농사가 원래 타 작물에 비해 수월합니다. 병충해에 워낙 강해 농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이른바 ‘태평농법’이 가능한 작물이라는 거. 풀만 어느 정도 잡아주면 알아서 잘 성장합니다.”
“재배 규모는? 수익성은?”
“현재 2만 평 정도로 규모가 늘었어요. 산지를 사 농장으로 개간하길 거듭했어요. 다른 약초들도 재배하지만 주된 작물은 단연 오가피예요. 오가피 열매를 수확해 진액을 만들어 판매하는데 가공공장도 운영하고 있어요. 소득은 미흡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앞날의 전망은 긍정적이라는 거. 단기간에 떼돈을 벌어 생기는 폐단을 고려한다면, 한동안 좀 궁한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보고요.”
상처도 삶의 또 다른 이름
2만 평짜리 약초농장. 200평으로 시작한 농사가 크게 불었구나. 관에서 주관하는 영농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장기 저리 영농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면 도시에서보다 빨리 일어설 수도 있다는 게 정 씨의 판단이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빚. 뭔가에 적당히 쫓기는 게 없는 인생엔 스릴과 탄력이 없다. 그러나 굶주린 멧돼지처럼 꽁무니를 사납게 들이받는 부채에 허구한 날을 허덕일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마침내 벌렁 나자빠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자빠지자고 참여한 게 인생은 아니겠고 말이다.
“모든 재능을 쏟아 농사를 지어야죠. 당장의 수익구조가 열악하더라도 집요한 공을 들여 미래의 희망이 보인다면 절반은 이미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그러자면 나만의 독창적인 농산물 생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저는 내심 최고의 오가피 생산 농민이라 자부합니다. 가령, 진액을 만들더라도 보통은 대여섯 시간을 달이지만 저는 이틀을 달여 진정한 농축액을 만들어요. 약효가 극대화되는 고품질 가공품을 생산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단골이 붙게 마련이에요.”
“도시에서 유능하게 잘 살았다는 사람이 귀농을 해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더군요. 주변 귀농 농가들의 형편은 어때요?”
“농사란 몸을 최대치로 쓰는 직업이에요. 쉽지 않다는 거. 열심히 일했으나 건강부터 무너지는 경우가 있어요. 가장 불행한 케이스죠. 반면, 농사를 통해 심신이 함께 건강해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과욕을 버리고, 농사일도 일종의 정신수련이라 여기는 게 상책이라 봅니다.”
“정신수련은 고상한 가치를 지니지만 정작 실천을 결여한 채 거룩한 폼만 잡다 끝나기 십상이죠. 어차피 담금질의 연속인 인생 자체가 이미 두말할 것 없는 수련일 테고요. 새삼 정신수련이 왜 필요하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인생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무예에 정진해요. 농사일에도 전념하지만 무예 다음이에요. 무예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라 믿으니까. 생활에 수련이라는 정신활동이 가세할 경우엔 삶의 질이 달라져요. ‘빛의 세계’라 할 만한 영성까지 갈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게 내면에 얼룩진 상처를 줄이는 최상의 처방이겠죠.”
상처. 애초에 삶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상처를 피할 길이 없다. 상처란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무기징역처럼 지겨운 상처를 정 씨는 무술 수련으로 쓱싹 해치우는 것 같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단다. 아내와의 이혼에서 얻은 번뇌가 그것.
“여자들에게 귀농생활은 너무도 힘들 수 있어요. 한평생 동고동락하자 했으나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아내가 떠난 뒤 제가 방황을 했다면 상처가 더 커졌겠죠. 그러나 보란 듯이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부끄러울 게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놈의 상처라는 건 영 사라지질 않아요. 끙.”
이혼도 참신한 해방일 수 있는 걸 왜 그러시나? 난 그리 생각하지만, 그는 먹먹한 표정으로 포옥 한숨을 몰아쉰다.
◇ 정경교 씨가 주는 귀농 Tip ◇
•초기의 과도한 투자는 금물이다. 5년쯤 농사 경험을 쌓아 안목이 트일 때 본격 투자를 해도 늦지 않다.
•집부터 먼저 잘 지으려 노력하지 마라. 처음엔 세를 얻어 살거나 극히 간소한 건축을 하자.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의 취향과 마을 실정에 어울리는 집이 어떤 형태일까를 저절로 깨닫게 되니까.
•독립적인 사생활이 보장되는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 농촌 공동체의 관습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투철히 인식하자. 잘난 척하거나 매사 앞에 나서다가는 소외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신중년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한국고용정보원 직업·진로 정보서 ‘이제는 신중년으로’에 따르면 ‘경제적 수단’, ‘삶의 주요 구성 요소’, ‘심리적 만족과 보상의 수단’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세부적으로는 ‘삶의 활력소이자 원동력’, ‘삶에 규칙을 제공해주는 것’,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 등 단순히 ‘생계형 돈벌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창업이나 창직, 사회 공헌 등의 경우 나름의 가치를 찾아 제2, 제3의 일자리로 삼는 신중년이 늘고 있다.
국민연금공단 연구에서 신중년(50~64세)의 과반수(67.6%)는 향후 근로를 희망하는 모습이었다. 이들 중 절반가량(44.6%)이 ‘생활비에 보탬이 된다’는 이유를 주된 동기로 꼽았지만, ‘경제적으로 충분해도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물음에서도 대부분(84.7%)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고용노동부 등 관계 부처는 신중년 인생 3모작 기반 구축을 위한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2017.8). 계획안에는 ‘주된 일자리→재취업 일자리→사회 공헌 일자리’로 이어지는 인생 3모작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64세까지를 생산가능인구로 한정하던 그간의 제도와 관행에서 벗어나 69세 또는 그 이상의 연령을 적극적인 고용정책의 대상으로 포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 추진 과제에서는 재취업, 창업, 귀농·귀촌·귀어, 사회 공헌 등 크게 네 분야에 집중했는데, 그중 창업과 사회 공헌 일자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
Chapter 1. 창업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신중년들의 경우 대안으로 창업을 선택하곤 한다. 실제 전 연령대에서도 50세 이상의 자영업자 비율이 가장 높은 편. 그러나 국내 창업 기업 중 1년을 버티지 못하는 곳이 37.3%, 5년을 넘기지 못하는 곳이 72.5%로 나타났다(2017.12. 통계청). 즉, 네 곳 중 한 곳만이 5년 넘게 생존이 가능한 셈이다. 늘어난 노후, 5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신중년의 경우 퇴직금 등 노후자금 대부분을 창업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아 실패 시 경제적 타격도 매우 크다. 또 청년 세대에 비해 재기가 어렵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업 실패 후유증도 많이 겪는다.
◇ 신중년 창업 실패 유형과 원인
① 근자감 충만형 중장년은 자신의 경험과 아이디어, 일부 지인의 추천 등으로 소위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찬 상태로 창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무원, 대기업 출신 등 사회적 활동이 왕성했던 이들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강하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부족한 상태에서 실패에 이르곤 한다.
② 경력 맹신형 과거 자신의 업무나 직장 경험을 토대로 그와 관련한 사업 분야와 아이템에 대한 맹목적인 자신감을 갖는 것. 특히 한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이들일수록 자신의 방식을 객관화해 사업에 그대로 인용했다가 오류를 범한다.
③ 안전제일주의형 사업의 위험성만 최소화하면 별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경우로, 대부분 신중년 창업자가 이에 속한다. 상대적으로 실패에 대한 위험이 적은 것은 맞지만,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다 보니 수익성 없는 사업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창업 과정 7단계 ① 창업자 여건 분석 ▶ ② 창업자 역량 분석 ▶ ③ 사업 목표 수립 ▶ ④ 사업 아이템 선정 ▶ ⑤ 사업 타당성 분석 ▶ ⑥ 사업 계획 수립 ▶ ⑦ 사업 개시
◇ 신중년 창업의 올바른 방향
① 창업하는 시점에서는 최소한의 생활 유지를 목표로 삼는 게 좋다. 대부분 ‘대박’을 꿈꾸지만, 이는 잘못된 태도다. 과도한 욕심이나 막연한 낙관론이 아닌 안정적인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수입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고, 이를 위해 현실적인 아이템 선정과 사업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② 오랜 기간 다양한 분야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하자. 주의할 점은 과거의 조직에서 하던 업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다. 같은 아이템이더라도 전문성은 완전히 다름을 직시한다. 특히 창업 아이템이 오랫동안 해왔던 업무라면 그런 착각에 빠지기가 더욱 쉽다.
③ 반짝 아이템보단 장수 아이템을 발굴한다. 신중년 창업은 인생 2막의 마무리와 인생 3막 준비까지 오랜 기간 일정 수익을 내야 한다. 따라서 트렌드에 민감한 아이템이 아닌 적어도 10~15년 정도 지속 가능한 아이템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신중년 주요 창업 지원기관
① 소상공인시장 진흥공단 예비 창업자 및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신사업창업사관학교, 재창업패키지, 소상공인 컨설팅 등의 교육과 서비스 제공
② 창업진흥원 중장년 기술창업센터, 세대융합 창업캠퍼스, 스마트 창작터, 1인 창조기업 비즈니스 센터 등의 수요자 맞춤형 창업 지원 서비스 제공
◇ ‘창직’에 대한 궁금증 이모저모
창업vs창직 무엇이 다를까?
창업은 제품과 기술 중심, 창직은 사람 중심으로 보면 된다. 창업은 자본이 주요소로 작용하고, 동종업계 창업자가 많을수록 불리하다. 반면 창직은 직업적 가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창직자의 지식, 기술, 능력, 적성 등이 강조되며,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관련 시장이 안정화된다. 또 창업은 소비자의 요구와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에 영향을 받지만, 창직은 수행자의 역량을 중심으로 사회적 수요가 강할수록 안정성이 확보된다.
신중년에게 창직이 좋은 이유는?
경력 개발 로드맵을 정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미래 경력 설계에 맞춘 필요 역량을 보완해 경제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창직 준비 기간은?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발굴 및 조사→직무 정의→공유 및 확산’의 프로세스를 따른다. 한국생산성본부의 창직 교육 과정에서는 기본적으로 창직에 대한 이해 40시간, 자신의 아이디어와 사회 수요를 새로운 직업에 반영해 점검하고 직무를 정의하는 데 60시간, 실제 구현된 신직업으로 초기 활동하는 데 100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내가 가진 능력을 활용해 창직을 하려면?
자신의 역량이 실제 노동시장에서 어떤 일을 하면 좋겠는지 본인의 희망 직업을 구체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유 역량이 관심과 흥미에 연결될 수 있어야 지속성 있는 일로 장기간 종사할 수 있으며, 향후 직업인으로서 추가적인 역량을 보완할 때 효율적인 교육과 훈련이 이뤄진다.
참고 및 발췌 한국고용정보원 ‘이제는 신중년으로’(2019)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알아보려 한다. 이번 호에는 ‘조리·식품’ 분야를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세계아동요리협회
조리 분야 자격증 하면, 대부분 국가자격인 ‘한식·양식·중식·일식’ 자격증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공신력 있고 널리 알려진 덕분에 요리사를 꿈꾸는 학생이나 요식업계 취직을 희망하는 청년층이 주로 응시한다. 중장년의 경우엔 그 목적이 좀 더 다양하다. 제대로 요리를 배워보고 싶은 주부, 음식점 창업을 계획하는 은퇴자, 아내 없이 끼니를 해결해보려는 남편 등 나름의 이유로 도전장을 내민다.
PART1. 국가기술자격
요리가 취미인 이들이라면 한 번쯤 조리사 자격증을 염두에 둬봤을 것이다. 그러나 한식·양식·중식·일식 조리기능사 전 분야의 합격률은 33% 내외로(2018년 기준), 개인의 노력과 의지가 없으면 취득이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도 눈에 띄는 것은 50대 응시자의 합격률이다. 전 연령대에서 합격률이 가장 높은 것은 40대이지만, 50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2순위로 합격률이 높게 나타났다(합격자 수도 마찬가지). 오히려 평균 합격률을 깎아내린 건 10~20대였다. 업계 담당자들은 “학생들은 조리 전문학교나 학원 등을 다니며 의례적으로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막연히 응시하기 때문에 그만큼 합격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 연령대에게 인기 있는 분야는 ‘한식’으로, 중장년층의 경우 타 분야에 비해 압도적인 선호도를 나타냈다. 아무래도 입맛에 맞는 게 한식일 테지만, 실제 시험장에서는 위생과 숙련도를 평가하기 위해 조리 과정 중 맛보기를 금지한다. 또 자기만의 레시피가 있더라도 시험에 제시된 요구사항에 맞게 조리해야 점수를 얻는다. 예를 들어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인 애호박을 돌려깎기하여 5cm 길이로 썰라’는 요구사항이 있는데, 마음대로 반달 모양을 낸다거나 길이를 2cm로 줄이거나 하면 감점이다. 즉, 아무리 손맛 좋은 주부라도 시험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요리 실력과 별개로 합격이 어렵다. 더불어 조리기능사 시험을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은 ‘비용’ 문제다. 실습도구와 재료 등을 갖추기 어렵다면 학원이나 기관 등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보통 한 분야 수강비가 30만 원대부터 90만 원대까지 천차만별이다. 보통 60만 원 내외로 보는데, 금액이 부담스럽다면 고용노동부 내일배움카드로 지원을 받는 것이 좋다.
식품 관련 국가공인 자격 중 ‘식품가공기능사’가 있다. 응시 자격에 제한이 없고, 최근 지자체를 중심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해 시니어의 관심이 많아졌다. 식품가공기능사는 농·축·수산물을 원료를 제조 또는 가공 처리한 후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변화를 일으켜 영양가와 저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귀농·귀촌·귀어 등을 계획하는 중장년 중에 자격 취득을 희망하는 이가 많다. 양평군, 임실군, 단양군, 합천군 등 지자체 농업기술센터는 자격취득 과정을 개설해 높은 합격률로 식품가공기능사를 배출하고 있다. 지난해 합격률 평균은 97%, 50대 합격률은 96%로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볼 만하다.
PART2. 민간자격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등록된 조리·식품 분야 민간자격들의 경우 음료 분야의 ‘바리스타’처럼 특별히 선호도가 높은 종목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국가공인 자격증처럼 요리나 조리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음식을 매개로 한 교육이나 서비스 관련 자격증이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 최근 주목받는 민간자격으로 ‘아동요리지도사’, ‘실버인지요리지도사’, ‘사찰음식지도사’ 등이 있다.
푸드테라피 요리심리상담사를 비롯해 아동요리지도사, 실버인지요리지도사, 쿠킹아트지도사 등의 자격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세계아동요리협회 백항선 대표는 “요리 과정을 통해 오감을 활용하고 자극하게 되는데, 이러한 활동이 아동과 어르신들의 인지발달에 도움을 준다”며 최근 협회를 통해 이러한 자격증을 희망하는 중장년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백 대표는 “자격증 취득 후 푸드테라피 관련 분야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시니어도 적지 않다”며 마음만 먹으면 취득뿐만 아니라 수익으로도 충분히 연결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사찰음식’은 건강 요리로 각광받으며 중장년 여성에게 인기가 높다. 관련 기관에서 민간자격증 교육 과정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일정 기간 교육을 이수하면 수료증을 발급해주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도 2017년부터 사찰음식요리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케이터링에 적합한 사찰음식 메뉴를 조리하고 구성해보는 심화과정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김슬기 담당자는 “건강과 채식이 트렌드인 만큼 사찰음식과 연관한 경력개발이나 창업도 가능할 것”이라면서 “주부 수강생들의 경우 배우는 과정에서의 성취감과, 가족에게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주는 보람에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아울러 “심화 과정 수강생들은 사찰도시락을 직접 판매하면서 실제 창업을 하게 되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연습해보는 기회도 가졌다”고 덧붙였다.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사찰음식 요리 과정은 올해 9월경 만 50세 이상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모집할 예정이다.
‘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계상 씨 이것 좀 도와주세요.” 22세 여직원이 건네는 말에 그는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보다도 열 살은 더 어리지 않은가. 평생을 이사, 상무라는 호칭 속에 살던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동료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낯선 환경이 그는 괴롭지 않았다. 마치 새 인생을 막 시작하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이케아에서 변화된 삶을 즐기고 있는 이계상(李桂相·63) 씨 이야기다.
이계상 씨가 근무하던 곳은 영등포에서 실크로 유명했던 섬유회사. 지금은 역사 속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종사자가 4000명이 넘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3만 평 부지가 공장 시설로 차 있었고, 근로자를 위한 사내 학교까지 운영됐었다. 중국이 국제시장에 경쟁자로 등장했을 때 사업다각화를 하지 못한 것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고, 1997년 외환위기 때 결정타를 맞았다.
“회사가 쓰러진 후에도 창업주 곁에 남아 재건을 도모했죠. 나중에는 자동차 관련 생산업체가 설립돼 그곳에서 상무이사로 정년을 맞이했어요. 새로 설립한 회사가 정상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섬유회사가 쓰러진 직후의 삶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죠. 회사를 지키지 못한 것이 낙인처럼 느껴져서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했으니까요. 외환위기 직후에는 월급이 나오지 않아 아내가 칼국수집을 해야 했어요. 테이블도 몇 개 안 되는 작은 가게였는데, 재건 작업 후 퇴근하면 가게로 출근해 아내를 돕곤 했죠.”
그가 창업주 곁을 떠나지 않고 35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1979년 2월 입사해 시작한 회사생활을 2014년 2월에 마감했다. ‘국가부도의 날’도 이후 찾아온 금융위기도 멈추지 못한 직장인으로의 삶이 정리되는 날이었다.
귀농 후 투자한 오미자 농사 실패
사실 그는 퇴직 후에 농부가 될 꿈을 꾸고 있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충주의 논밭을 다시 가꾸겠다는 다짐이었다. 비어 있는 집도 아직 쓸 만했고, 건강에도 자신이 있었다.
“퇴직 전 농협대학교 주말 귀농·귀촌대학을 이수했어요. 퇴직 후에는 중장비를 동원해 묵은 밭도 갈고, 집도 수리해 본격적인 귀농생활을 시작했죠. 농업기술센터를 들락거리며 다양한 정보도 얻으면서 이대로 고향에 정착할 수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회사생활처럼 우직하게 해나가면 다 순조로울 것이라 믿었는데, 초보 농부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주변에서 오미자 농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추천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엔 효소 열풍이 불어 오미자 수요가 늘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에서 시설지원까지 받아가며 1000평이 넘는 땅에 오미자를 가득 심었죠. 오미자는 심은 지 3년이 되어야 수익성이 좋아지는데, 심자마자 오미자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어요. 효소가 설탕뿐인 허상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거든요. 오미자로 손에 쥔 돈은 단돈 300만 원이 전부였고, 두 집 생활비와 교통비를 퇴직금으로 메워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어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2017년, 고민에 휩싸여 있던 귀농 2년 차에 친구의 조언을 듣고 그는 농사를 포기한다. 본전 생각으로 투자금에 미련을 뒀다가는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었다.
이후의 삶은 주변의 중장년 구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워크넷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매일같이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뿌렸다. 하지만 고령자인 그의 손을 잡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많은 회사에 건넸던 말이다. 이력서 내는 것쯤은 자유일 텐데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는 눈치를 봤다.
“안 된다는 곳이 많았죠. 어떤 곳은 단순 안내직이었는데, 나이가 많으면 고객들이 부담스러워하니 이력서 낼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아직까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사는 일산 근처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장. 그곳에서 그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이케아 광명점에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계십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그는 또 물었다. “사무직 출신이라 접객 경력이 없는데 괜찮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채용 후 교육을 받으면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입사지원과 면접을 거쳐 합격 전화를 받게 됐고, 여전히 아내 앞에서 자랑스러운 남편일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수평적 기업문화에 감탄
한국의 경제성장 초창기를 장식했던 섬유산업의 전통적인 기업문화 속에서 평생을 일해온 그가, 난생처음 해보는 일을, 그것도 외국계 기업 소속으로 해내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까? 이 씨는 “유니폼이 가장 어색했다”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확실히 한국의 기업문화와는 거의 모든 것이 달랐어요. 전통적인 연공서열 조직문화에서 간부들은 뒷짐지고 도장만 찍잖아요. 하지만 여기는 파트너십으로 연결된 수평적 구조예요. 주변 부서가 손이 모자라면 다 같이 가서 도와요. 직급의 상하 여부 상관없이 말이죠.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 호칭이에요. 이곳에서는 직함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요. 20대 어린 친구들에게도 저는 ‘계상 씨’예요. 상무님, 이사님으로 불리다가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웃음)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퇴근 후 젊은 직원들과 맥주 한잔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가 놀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직원들에게 자기계발을 늘 독려하는 회사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특히 사내채용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모습은 한국 기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근무처인 고객지원센터에 장애인 직원이 배치된 것도 그에겐 생경하게 보였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반복 훈련을 통해 한 사람의 몫을 당당히 해내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했다. 사실 한국 기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애인 직원을, 그것도 기업의 이미지를 좌우할 수 있는 고객 대면 부서에 배치할 수 있는 기업은 국내에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이케아 인사 담당자는 “고객 대면 부서에서도 근무 방식이 다양해 장애인 직원도 충분히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면서 “이케아에서 ‘다양성과 포용’은 사내 문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성별, 나이, 배경, 장애 유무 등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며, 동네 지인을 마주쳐도 유니폼 차림의 자신이 부끄럽지 않고,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기업문화도 즐거운 경험이다. 과거 노사분규 협상장에서 사측 자리에 앉은 그의 어깨를 눌러대던 부담감도 이제 없다.
“경제적 이득보다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행복이 커요. 삶의 활력도 얻고 건강관리도 돼요. 체력적으로 괜찮다면 가능한 한 오래 일하고 싶어요. 다른 중장년 구직자들에게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꼭 나타나니까, 과거 경력에 매이지 말고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일자리를 찾아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삶이 즐거운 건 살고 싶은 대로 살 때다.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쉽지 않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대충 살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삶이란 위태한 곡예에 가깝다. 곡예 역시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왕지사 한 번 태어난 인생, 심란한 곡예보다는 평온한 활보로 삶을 즐기는 게 낫겠지. 이 사람을 보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 방식대로, 내 지향대로 산다.
사는 것처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좋은 삶이란 뭐지? 나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거지? 김형태 목사(50)는 그런 궁리를 일찍부터 줄기차게 해왔던 모양이다. 뭐시라? 누군들 그런 생각 안 해보겠어? 그리 따질 입들이 많겠지만, 김 목사의 모색은 한결 심각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이미 신 안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해서 잡다한 혼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늘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화두였다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 어떻게 살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인걸, 무슨 거한 포부가 있기에 화두까지 타셨나? 그리 또 따질 입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는 화두를 파 궁구한 나머지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귀농 행(行)! 바로 그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삶과 교육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변에 공동체생활의 이상과 실천을 말씀하시는 스승들도 많아 영향을 받았고요. 도시의 복잡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실천하고 싶다는 거.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합천 땅 황매산 기슭으로 내려온 건 6년 전. 이곳에 오기 이전, 청송과 산청에서도 한두 해 시골살이를 했는데, 그건 워밍업이었단다. 이미 몸을 풀고 링에 올랐기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더란다. 기쁨에 들떠 산골에 입장했다니 행복, 혹은 행복의 조짐을 움켜쥔 셈이었다.
아까 나는 이 집 입구에 도착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근사한걸! 집 뒤편으로 좍 병풍을 친 산경이 기차게 삼삼해서였다. 아울러 그의 거처가 아름다워서였다. 마당 너른 집에 들어앉은 자못 큼직하고 미끈한
2층집이니 말이다. 수려한 산봉들이 우아한 코러스를 공연하는 터전이니 땅값부터 겁나게 나가겠는걸! 난 속물답게 그리 여기며 은근히 부러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아니구나. 김 목사는 이 집에 세 들어 산다. 우리를 자주 속 터지게 하는 ‘쩐’이라는 거, 그 요상한 물건을 그는 거의 지니질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종잣돈이라도 마련한 뒤 귀농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한동안 귀농을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앉아 있을 텐가? 떠나라, 유목민처럼 서슴없이 떠나라!’ 그래 그냥 따랐지요.”
“맨손으로 내려왔다는?”
“별로 손에 쥔 게 없었어요.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준 퇴직금 2000만 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주민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까. 이 집 주인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의 대안적 삶에 관한 포부를 듣고 집을 임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개축까지 거들어줬거든요.”
“‘토기장이의 집’이라는 북 카페를 운영하시는군요. 이 집 쥔 양반은 토기를 굽나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기장이’란 성경의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따왔어요. 아내와 딸이 북 카페를 운영합니다. 저는 농사에 주력하고.”
“목회는?”
“카페 공간을 예배당으로 여기지만, 간혹 신도가 찾아오지만, 여길 와서 제가 목사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땀 흘려 정직한 농사를 짓는 일, 농약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품앗이를 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래하는 삶, 그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영성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이미 목회라 여기며 삽니다.”
자연의 영성 안에서 살기
목회라는 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놨다는 얘기라기보다는 한결 진정한 목회자의 실천적 삶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일 테지. 그가 외로운 떠돌이로 산 바가 없었겠으나, 귀농으로 드디어 조용한 포구에 정박했다는 투의 안심과 자부심이 비친다. 그런 그에게 산골이란, 자연이란, 농사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이상적 조건일 게다. 도시의 빌딩 숲속에선 이상 구현이 어려운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야야, 어디서건 네가 너의 임자로 살면 참인 것이야! 불가에 전해지는 뉴스가 그렇다. 도시에서 그는 무엇에 식상했을까?
“사는 장소가 도시이냐 시골이냐는 물론 중요하지 않지요.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가 있을 뿐이니. 그런데 도시에서는 마음을 돌보며 살기 어렵지 않던가요? 나를 돌아볼 짬조차 없질 않던가요?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한 발이라도 앞설 수 있지 않던가요? 산골에 산다는 건 자연의 영성 안에 사는 건데요, 가령 흙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놓쳤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선 얻을 수 없었던 힘이 생겨요.”
“농사란 여전히 못 믿을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어요. 나오는 것 없이 골병만 든다고들 하죠. 김 목사님 농사는 무난할까?”
“애초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와서 보니 저와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이미 살고 있더라고요. 시인 서정홍 선생님을 비롯해 유기농을 하는 ‘열매지기 공동체’의 아홉 농가 사람들, 이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구상하고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간 거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되죠?”
“초기엔 200평이었으나 현재는 1200평으로 늘었어요. 마을 분들이 빌려준 밭이에요. 여기에다 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수수, 생강, 양파,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수익은 없지만, 기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써 일하기에 조금 고되지만, 그러나 만족합니다.”
“땀 흘려 노력을 했을 텐데 아직 수입이 발생하질 않다니, 이걸 어쩌나?”
“자급자족은 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요. 소출이 적더라도 우선은 땅을 살려놓고 보자는 게 유기농의 정신입니다. 문제는 요즘의 심각한 기후변화에 있어요. 노련한 토박이 농부들조차 대책을 찾지 못해 고심합니다.”
만물만상이 변하는 건 이치이지만 21세기의 날씨 변동은 왜 이 모양인가. 괴상한 게 기후뿐이랴. 나 하나, 내 가족 하나만 잘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일쑤 남을 짓밟기를 장기자랑하듯 해대는 이 시대의 이기적 세태는 또 얼마나 수상한가. 모름지기 학교 교육부터 창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왁자하지만 정작 바뀌는 게 없으니 썰렁한 농담이다. 일찍이 이런 파행에 불신을 느낀 탓일 테지. 김 목사는 자식 셋 모두를 공교육에 맡기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양육했다.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말이다. 폼나는 학력을 걸치지 않고선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취급을 당할 세상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땐 많이 불안했다 하대요. 불안과 마주앉아 자기 고민들을 많이 했다고. 근데 그게 필요한 고민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고민과 함께 내적 성장을 한 것 같아요. 학교나 학원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스스로 배워 찾아냈다고 봅니다. 야생의 어떤 감성으로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나 할까.”
“성적 경쟁의 격투장인 학교에서 심히 시달리며 세상의 명암을 알아가는 건 딱히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고난을 겪고서야 근본이 강해지는 법인데.”
“공교육은 개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다움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제 아이들은 너무도 잘 자랐어요. 각자 자기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어요. 모두 경제적 자립을 했고요. 일테면, 막내인 아들은 올해 스물두 살인데 어엿한 청년 농부입니다. 지적 욕구가 강해 책을 무섭도록 읽어대요. 저희 북 카페가 운영하는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물리학이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도 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 수 있는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야무지게 키우고, 물적 토대 없는 용감한 귀농에 자족하고, 눈앞의 현실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일 수 있는 ‘자연의 영성’이라는 걸 가슴에 담고 사는 조용한 삶. 줏대와 슬기가 아니고선 꾸려내기 어려울 경관이다. 땅에 쏟는 떳떳한 노동과 자연을 향한 겸손한 순응 역시 맑은 생활의 원천이자 길일 테지.
“현실적인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산 속에서 뭘 먹고 사느냐, 신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삽니다. 특히나 귀농으로 맺어진 좋은 인연, ‘열매지기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만족스러워요. 커다란 행운이에요.”
“많은 공동체가 종단엔 실패를 하더군요. 그 가치는 아름답지만, 원초적 이기주의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공동의 틀 안에 모아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필요한 일이죠. 같은 길을 가되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 봅니다. 저는 귀농 후 자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매지기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마음자리를 늘 돌아보는 눈이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용납 못했을 일도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게 마음이 좀 넓어진 덕분이겠죠.”
“모두들 물귀신 같은 물신에 덜미를 잡혀 사는 세상이에요. 소박한 소유로 자족하는 김 목사님에겐, 가령 노후 불안 같은 건 없을까?”
“아무런 대책이 없으나 불안도 없어요. 늙어 병들면 그냥 죽으면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라는 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돈 들어가지 않게 짜여 있어서 더더구나 문제될 게 없지요. 게다가 시골에선 굶어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웃음) 온 산야에 먹을 것 지천이고, 경로당에서 뭔가를 챙겨주고 하니까.”
이루면 더 이루고 싶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욕망이다.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관성이다. 이런 삶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은 게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시늉이 아니라 안팎이 두루 한결같은 실천이자 실력이라면, 그건 내공이겠지.
“자연 속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됩니다. 자연 속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답게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더욱 소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힘을 빼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구를 설득할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자 해요. 죽음이 찾아오면 인디언처럼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겠죠. 자연이 그렇잖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있다가 없어지는 것. 누구나 그 평범한 진리 하나를 몸에 붙이고 산다면 과히 걸릴 게 없겠지. 물신도 귀신도 사신(死神)도 두려울 것 없을 게다.
김형태 목사가 주는 귀농준비 Tip
•귀농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정붙이고 살 수 있다.
•은퇴자 귀농의 실패 확률은 매우 높다. 농사로 몸 건강을 망칠 수 있어서다. 도시와는 다른 시골 풍습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도 낭패를 볼 수 있다.
•귀농 초기엔 찍소리 안 하고 지내는 게 좋다. 원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귀농인들 때문에 시골 땅값이 근거 없이 오르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대안적 삶을 원해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IMF 외환위기 때 귀농·귀촌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아무 준비도 없이 귀농하는 사람이 많아 정부가 ‘귀농·귀촌 종합대책’이라는 제도까지 마련했다. 2013년부터 집계해온 귀농인 통계에 의하면, 2017년 말 귀농 인구는 1만9630명에 이른다. 농촌 공동화(空洞化)를 막고 영농후계인력 확보, 나아가 농업 일자리 창출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정부의 노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40~50대가 귀농 인구의 62%를 차지하는 기현상도 눈여겨봐야 한다. 한 사회학자는 귀농을 ‘사회적 이민’이라고 표현했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이들의 농촌 지역으로의 이동은 ‘이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경기도가 지원하는 귀농교육을 받은 수료생들의 귀농은 10명 중 3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역(逆)귀농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에 언론은 이러한 귀농정책의 실패를 심심찮게 꼬집으며 ‘귀농인턴제’를 도입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실은 2004년부터 10여 년간 착실히 시행되어오다가 2015년 무렵 정책 통합으로 슬그머니 사라진 이른바 ‘농산업 인턴제’가 있었다. 2009년 농림축산식품부는 ‘귀농·귀촌 종합대책’을 내놓으면서 ‘농산업 인턴제’를 대폭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44세로 연령을 제한한 이 제도는 4050세대가 귀농인의 62%를 차지하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농촌 현장에서 귀농 인구의 연령 분포가 실버 세대 위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성공적인 귀농을 도울 수 있는 ‘귀농 인턴제’가 없다는 점은 현 정책의 허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2005년 2월에 방문했던 일본 홋카이도 벳카이초(別海町)에서 30년 가까이 운영하는 ‘낙농연수원목장’ 인턴제도는 매우 체계적이며 정교한 후원 제도까지 갖췄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우선 귀농을 원하는 도시민 중에서 부부 또는 예비부부(부모인증)를 인턴으로 선발해 3년간 훈련을 시킨다. 매년 3~4쌍만 선발하는 인턴은 연수원 목장과 인근 협력 목장에서 동일한 매뉴얼로 교육을 받는다. 선발된 인턴은 지자체 계약직 근로자로 인정되고 주택과 생활비(130만 원/1인당)를 지원받는다. 이들은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해 저녁 6시 30분에 끝나는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주 1회 휴가(농번기 제외)도 있다. 교육 수료자에게는 홋카이도 지방자치단체가 1982년부터 시행해온 ‘홋카이도 농장리스(lease) 제도’ 지원 자금으로 리모델링한 폐업 농장이 주어진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 105호의 취업 농가가 ‘농장리스 제도’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목장 개업 자금은 정부가 절반 지원하고 나머지는 20~25년간 거의 무이자 조건으로 빌려준다.
귀농인 통계는 중요하지 않다. 일본은 지역 단위로 혹독한 귀농 교육을 하고 있다. 귀농인과 농장이 상생하는 제도가 정착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인 귀농인 배출이 가능해질 것이다.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부의 귀농 정책에 귀농 인턴제도는 쏙 빠져 있다. 시급하게 필요한 정책이다.
100세 시대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된 지금, 이제 50대는 청년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은 그 이름대로 서울 시민 50세부터 64세까지인 50플러스 세대의 삶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이다. 2016년에 설립된 이후 재취업, 일자리, 교육, 정책 개발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 50플러스재단은 지난해 10월 김영대 전 국회의원을 대표이사로 임명해 향후 3년 동안의 사업 전개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최대 화두가 된 시대, 김영대 대표이사를 만나 50플러스 세대의 일과 삶에 대한 대안을 들어봤다.
새해 이슈는 일자리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이 기존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고, 그 조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반발로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등 단순 서비스직 업계에서는 사람을 쓰지 않는 대신 자동화 설비, 로봇 도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시니어가 은퇴 후 직업으로 많이 선택하는 택시 업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카풀 논란 또한 자율주행차가 도입될 미래의 택시 산업과 연결되는 사전적 갈등이다. 이처럼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일자리가 4차 산업혁명으로 줄어들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50플러스 세대는 노인 세대도 청년 세대도 아니어서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모든 50플러스 세대가 생산적이고 준비된 노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각 방면에서 지원하는 것이 재단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실 생계형 일자리를 연계해주는 곳은 이미 많습니다.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 등에서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죠. 그래서 재단은 인생 후반 새로운 일의 유형으로 ‘사회공헌일자리’를 발굴하고 확산하고자 합니다. 보통 ‘앙코르커리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지속적인 수입뿐만 아니라 개인적 보람, 사회적 가치 모두를 만족하는 활동, 일거리, 일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50플러스 세대를 위한 일자리 해법
시니어에게 일자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수명이 늘어나고 부양 의무가 계속되면서 현역으로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노력은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정무적 책임을 갖고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도 50플러스재단을 발족해 시대적 화두에 동참했고, 최근 김영대 대표이사가 임명되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민주노총 부위원장 출신으로 시민사회단체, 국회의원, 중소기업 CEO 등의 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남북경제협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임명에서부터 50플러스재단의 방향성에 대한 큰 그림이 느껴졌다.
“재취업, 일자리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는 많은 분이 칠십까지 노동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되는데, 그중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있죠. 그런 부분에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저소득, 취약 계층의 50플러스 세대를 케어하는 노력을 보강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김 대표는 50플러스재단이 시니어 취약 계층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우리나라의 고령자 빈곤율은 OECD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66~75세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2.7%, 76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60.2%에 달한다. 고령화 속도도 가장 빨라서, 높은 노인 빈곤율과 고령화의 쌍끌이 현상은 젊은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더 가중시키는 상황을 불러오고 있다. 시니어의 일자리 확보가 본인 스스로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새로운 틈새시장 공략해나갈 것
일자리를 찾아내는 것도 문제이지만 중장년 일자리와 시니어를 매치시키는 것도 만만찮다. 현장에 가면 정책과 현장의 차이가 크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 50대 이후의 직업 훈련, 생계를 위한 일자리 알선 등은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에서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노동의 가치를 살려 저소득 취약 소외 계층, 그리고 일하고 싶은 분들을 잘 안내해야겠죠. 또한 서비스직, 문화관광, 기타 영업 마케팅 쪽으로 자기 전공을 살릴 수 있도록, 구력과 경험 많은 분을 매칭하고 관련 프로그램과 직업들을 만들고자 합니다.”
김 대표는 최근의 일자리 대책이 세대 융합 일자리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모범적인 사례를 찾아내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만큼 그런 사례를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창업과 관련해서는 당사자가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창업하는 분들 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순식간에 돈을 까먹습니다. 조사해보니 창업자 10명 중 6~7명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수를 줄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창업을 철저히 준비하게 해야 하고, 창업자 수도 줄여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진입장벽을 높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을 하겠다고 하면 사전에 꼼꼼히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실행 전에 미리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재단에서 올해 개발해볼 생각이에요.”
시니어가 대거 투자를 했다가 실패하면 엄청난 손실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잃어서 순식간에 나이 들어버린다는 얘기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들려온다. 청년 때는 아래로 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있지만 나이 들면 어렵다. 따라서 선경험을 해보고 안 맞으면 빨리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된다. 설명을 들으며 김 대표가 말하는 “조사, 증명과 함께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방향”이라는 게 어떤 모양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 관광객 수를 보면 일본의 성장세를 우리나라가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건 관광 서비스하고도 맞물려 있어요. 관광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 중에 50플러스 세대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길들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관광 가이드, 문화관광 해설사, 외국인들을 안내할 수 있는 문화재 해설사 역할 등이 있겠죠.”
은퇴자를 위한 귀촌 일자리 창출
김 대표가 생각하는 대안 중에는 귀농·귀촌도 있다. 귀농·귀촌이라고 하면 무조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농촌에 가서 생활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걸로 하고 귀촌을 하면 생기는 일자리가 있다. 수확기에는 일당 받는 일자리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통, 택배를 도와주는 일도 있다. 그리고 지방에 가면 축제가 많은데 축제에 활용될 인력으로 50플러스 세대가 가장 적합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살려고 하면 힘들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농한다고 부부가 함께 갔다가 몇 달 후 아내 혼자만 올라오는 일도 있고요. 차라리 가벼운 마음으로 일정 시간 귀촌해서 살아보는 것도 좋아요. 예를 들어 일주일 중 월화수목은 도시에, 금토일은 귀촌을 하는 거죠. 경험을 쌓고 그 속에서 익숙해지면 정착하는 걸로 계획을 세우게 해 너무 부담을 갖고 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 분들을 모아 집단으로 공유주택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귀농·귀촌과 일자리 문제 해결이 함께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북경제협력, 돌파구 될 수 있어
김 대표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이 남북경제협력 부분이다. 현재 남과 북 사이에는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분야가 경제협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경제협력 전문가인 김 대표가 50플러스재단 대표로 임명된 것은 남북 간의 경제, 일자리 문제를 위한 장기적인 포석은 아닐까.
“사실 정년에 걸려 배출되는 50플러스 세대가 많잖아요. 서울만 해도 교통공단, 시설관리공단, 교사, 금융인 등등 꽤 많은데 이분들이 제2인생을 설계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50플러스 세대가 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습니다.”
김 대표는 남북 간 교류가 진행되면 당장 철도에 대한 시설관리 점검에 들어가야 하는데 개선, 보수 부분에서 나름대로 시장이 꽤 크게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50플러스 세대의 인력들은 기능직이 많다. 북측의 도로 보수, 여러 가지 인프라 조성 등의 기간산업에서 발생하는 일자리는 50플러스 세대 기능직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50플러스재단이 중추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건강하다면 계속 일할 것
“저 역시 50플러스 세대로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경험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대한민국 50플러스 세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책은 실제 경험해본 사람이 시민들의 피부에 느껴지도록 설계해야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0플러스재단에서 최근 공을 들이고 있는 기획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50플러스보람일자리’다. 은퇴한 50플러스 세대가 학교, 마을, 복지시설 등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경험과 전문성을 살린 사회공헌활동을 하며 인생 2막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다. 2015년 6개 사업 총 442명의 규모로 시작해 지난해는 총 31개 사업에 2236명이 참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신중년 커리어 프로젝트 ‘굿잡5060’이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고용노동부, ㈜상상우리가 재단과 함께 풀어가는 사업으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5060세대 1000명에게 전문 교육을 제공한 후 사회적기업 취업률 50%를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이다.
“저도 칠십 세까지는 일할 계획이 있고 그 이후에는 건강이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건강할 때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일하던 사람이 집에서 쉬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엄청난 여유가 있어서 여행만 다니며 살 조건도 못 돼요. 그래서 칠십까지는 일하고 이후에는 사회봉사형 일자리, 공헌형 일자리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 대표는 인터뷰 내내 담백한 목소리로 불필요한 부분 없이 실제를 말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읽고, 통찰력과 정책으로 다듬어진 김 대표 자신이 무엇보다도 50플러스 세대인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