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뒤로는 신록이 사태처럼 일렁거리는 큰 산. 앞쪽엔 물고기들 떼 지어 노니는 냇물. 보기 드문 길지(吉地)다. 동구엔 수백 살 나이를 자신 노송 숲이 있어 오래된 마을의 듬직한 기풍을 대변한다. 겨우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였으니 한눈에 살갑다. 마을 여기저기로 휘며 돌며 이어지는 돌담길은 야트막해 정겹다. 이 아늑한 산촌에 심히 고생을 하는 농부가 있다.
경기도 일산에 살았던 그는 특별한 준비 없이 귀농했다. 귀농을 좀은 만만하게 봤을까? 혹은, 매사 서둘러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배짱의 소유자일까?
물론 그가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건 아니다. 내려오라! 연로한 부모님께서 먼저 사인을 보내왔더란다. 그럴 즈음 그의 건강도 좋지가 않았다. 해서, 으라차차, 가자, 고향으로 내려가자! 그렇게 결연히 부르짖으며 아내와 함께 귀향을 했던 모양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은 산촌의 포실한 경관과 공기를 일용한 양식처럼 취하며 살아온 지 어언 5년. 박병각 씨(63, 영농조합법인 알토팜 대표)의 낯빛은 들판에서 타 구릿빛이다. 몸엔 땀내가 배었으니 그의 일상적인 근로의 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직감할 수 있다.
도시에선 갖가지 직업을 편력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 씨는 한때 교수생활을 했다. 기업체 중견간부로도 일했다. 돈을 실컷 벌겠다고 맘먹고 통신장비 관련 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지. 비록 꽃을 피우진 못했지만. 귀농 직전까진 번역 사업을 했다. 박병각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재에 밝지 못한 사람이다. 몇 번의 기회가 왔으나 어여삐 머물러주지 않았단다. 그러나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니 갖가지 노하우가 실하게 쌓였을 것이다. 빛은 빛대로, 그늘은 그늘대로 질주의 돛대 역할을 하는 법. 때로는 순항으로, 때로는 난항으로 건넌 세상이 그에게 응분의 기량을 증정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와 몸에 축적된 실력을 다 끌어올려 농사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아직 방문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저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은 탓일까? 농사는 제자리걸음이다.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테지. 애초 “거의 빈털터리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귀농 5년 사이에 뭐 별반 늘거나 불어난 게 없는 모양이다. 싱글벙글 낙천적인 미소가 얼굴에 피부처럼 붙어 있지만, 5년간 들판에 쏟은 땀방울을 생각하면 내심 긴장감이 들솟을 게다.
“귀농할 때 별다른 준비 없이 내려왔어요. 우선은 건강부터 챙기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그럼에도 첫해부터 농사를 지은 건 부모님께서 경작하시던 농토가 있어서였어요. 밭 2000평에다 참깨를 심었어요. 기대치만큼의 수확이 나오질 않더라고. 현재는 규모가 늘어 1만 평입니다. 콩을 주 작물로 하고, 찰수수와 레드비트도 재배합니다. 양봉도 하고요. 그러나 타산을 맞추기는 여전히 힘들어요.”
“적자를 보는 거예요?”
“당연하죠. 초보 농부의 자세로 그저 열심히 노력하지만 농사라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실감합니다. 사실, 귀농 5년 차인데도 적자를 본다면 얼른 떠나는 게 현명해요. 하지만 저에겐 희망이라는 게 있어요. 나름 최선을 다해 농사를 하기에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낙관, 그런 거.”
“부진한 농사, 그건 사전 준비를 소홀히 한 사필귀정 아녜요?”
“그런 측면도 있죠. 시행착오가 없지는 않아요. 그래서 요즘 제가 남들에겐 준비를 철저히 해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농사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봉착하게 되더군요. 그 무엇보다 기후 조건에서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농부의 능력보다 하늘과 땅의 조력이 더 중요한 변수라는 거. 농부가 직접 유통에 나서야만 하는 구조도 벽으로 다가와요.”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
대지를 일구는 농부란 시를 쓰는 시인과 다를 바 없다. 방울방울 진땀 뿜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무심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영감을 짜내느라 머리칼을 쥐어뜯는 시인처럼, 농부 역시 비와 바람을 주재하는 하늘의 협찬을 간절히 기도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농부의 하늘은 더 절대적이다. 더위와 추위와 서리, 가뭄과 홍수와 태풍, 이 모든 자연의 순환과 횡포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게 농사이지 아니한가.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고 봅니다. 처음엔 몰랐으나 농사를 지으며 그걸 알았어요. 시골 사람들이 아는 게 농사뿐이라 그냥저냥 농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투철한 가치관이 아니고선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어르신들도 기후의 혼란과 변덕 앞에선 속수무책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제 겨우 5년. 정착까지는 아직 멀었어요. 아마도 10년은 흘러야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끙.”
“건강은 좋아지셨고?”
“농사일이 워낙 많아서 건강이고 뭐고 돌볼 틈이 없는 것을.(웃음)”
“농림축산식품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귀농 5년 차 농가의 평균소득이 3898만 원이라고 해요. 이거 믿을 만한 소식일까? 제가 만난 귀농인들은 흔히들 고전하고 있었어요.”
“정부의 공식 통계이니까 그러려니 해야겠죠. 그러나 가처분 소득이 아니고 매출액 기준의 산정이라 봅니다.”
“선생의 농사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예요. 만약에 말이죠, 누군가 귀농을 하려 한다면 뜯어말리시려나?”
“흠. 텃밭농사 정도가 이상적이죠. 농사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사실 위험합니다. 전적으로 농사 하나에 생계를 걸 경우엔 더 어려워질 수 있어요. 시행착오의 연속일 수 있으니.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워할 일도 아녜요. 귀농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연의 방식에 부합하는 신념으로 산다면 만족을 누릴 수도 있죠.”
“자연의 방식이라는 건 순응의 태도? 있는 그대로 자족하는 거?”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귀농했지만 한 가지는 가슴에 새기고 내려왔어요. 비우자! 이제부턴 비우고 살자! 그런 마음가짐 말이죠. 도시에서 가졌던 과욕이나 비즈니스 마인드 대신 빈 마음으로 살자는 거. 한마디로, 돈벌이 목적보다는 비우려고 귀농한 겁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밥그릇을 뚝딱 비우는 일과 달라 내공이 필요하다. 흔히들 마음 비우기에 관심을 두지만 비울수록 마음은 허기로 보챈다. 매사 비우려는 건 어엿한 지향이지만, 진정 비우기도 전에 고프고 슬퍼 떨리는 게 삶이지 않던가. 먹고사는 일의 고역과 경쟁은 거의 항구적인 숙명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진한 농사는 이 비우기를 쉬 구현하게 하는 기묘한 견인차란 말인가? 박 씨는 농사 부진에 그다지 조바심치지 않는 것 같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굳이 채울 것도 없으며, 따라서 비우고 살고자 하는 신념을 관철하기가 오히려 용이하다는 투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치레가 없어 푸근한 농가주택
귀촌이든 귀농이든, 그게 종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모두들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생판 낯선 객지보다는 가급적 연고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농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귀농자의 53%, 귀촌자의 37%가 고향, 또는 사소하나마 연고 있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연고 덕분에 적응과 정착이 더 수월할 거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연고지로 이주하더라도 크고 작은 애환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박 씨는 이웃들에게 그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예 밝히질 않았다. 자칫 오해와 편견을 심어줄 수 있어서.
“고향이라는 단 하나의 근거를 앞세워 귀농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중요한 건 어디로 내려가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충분히,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이에요. 만약 돈벌이에 목적을 둔 귀농이라면 더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죠. 일테면 선택한 작물의 재배조건, 생산한 농산물의 유통 환경 등을 심도 있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모저모 의지대로 살기 쉽지 않은 게 시골이라 보면 됩니다. 이건 제 경험에서 우러난 얘기들이에요.”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말씀?”
“바로 그거! 저는 도시가 싫었어요. 힘겨웠어요. 그렇다면 도피성 낙향일까? 그렇게 물으실지 모르지만, 기꺼이 내려왔으니 탈출이라 해두죠. 충분한 준비보다는 도시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생각이 쏠려 있었어요.”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두 가지에 놀랐어요. 하나는 수려한 마을 풍치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께서 농약을 쓰지 않는 농사를 처음부터 고수해왔다는 점이에요. 일반 관행농법보다 몇 곱절 더 어려울 무농약 농사에 어떻게 착안하셨죠?”
“아하. 당연하고도 간단한 이유가 있어요. 내 가족들이 먹을 음식에 농약 성분이 섞인다면? 그런 자문을 하면 답이 빤할 수밖에. 남의 가족들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작물이 병들어갈 때 약은 필요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화학적 농약 대신 자연에서 얻어온 재료들로 만든 농약이나 퇴비를 사용해요. 공장 농약 외 대안이 없다면 이미 농사를 포기했을 겁니다.”
“괴산군 귀농귀촌인 협의회장을 맡으셨죠? 귀농귀촌 실태에 환하겠어요. 실패 사례엔 어떤 게 있죠?”
“대체로 귀농이 아닌 귀촌 케이스가 만족도가 높습니다. 실패자엔 두 부류가 있어요. 첫째는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덜커덕 귀농했다 망치고 돌아가는 경우, 둘째는 적막한 시골에서 우울증을 얻고 쓸쓸히 떠나는 경우.”
대책 없는 전원 판타지를 꿈꾸는 그대여, 그냥 도시에 사시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귀농귀촌의 실상이 꽤나 알려진 요즘엔 얼간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맹목적이거나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냅다 시골로 들이닥치는 우행은 생고생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니까. 문제는, 인류를 구원할 듯한 기세로 머리를 싸맨 준비와 연구를 선행하더라도 허무한 귀결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일 테지. 특히나 어려운 건 역시나 주민과의 융화 문제.
“시골의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듯 인심도 변했어요. 합리성이 결여된 시골 분들이 많다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합리나 법리보다는 마을의 관습적 불문율을 중시해요.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죠. 그러나 그걸 불편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텃세를 메시지로, 우리의 규율 안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로 읽어야 해요. 이건 불변의 풍습이에요. 일단 불문율을 존중, 선선히 마을에 녹아들어간 뒤 바꿀 걸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게 순서이지 않겠어요?”
그의 거처는 오래되고 소박한 농가주택이다. 꾸밈이 없어 담백하다. 치레가 없어 푸근하다. 앞뜰과 뒤란엔 향이 번진다.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둬서다. 항아리들은 불룩한 배통을 두드리며 저희들만의 밀어를 속닥거린다. 지붕 위를 가로지르며 노래하는 가수는 박새구나.
아무런 결함이 없는 평화. 집 안팎에 그런 기운이 남실거린다. 밤이면 창으로 들이친 별들이 부부의 침실을 염탐하려나? 박 씨에 따르면 부부가 각방을 쓰는 행위는 죄악에 가깝다. 그는 농사에 시달린 나머지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아내의 손가락 열 개에 송구스럽다. 농사엔 여자들이 해치워야 할 일들이 많다. 그는 그게 또 미안하다. 아마도 그는 다정다감으로 아내를 자주 살살 녹일 것 같다. 하지만 아니란다. 밖에서만 다정한 처신을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 최선희 씨(63)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기와는 다른 남편이에요. 도무지 제 말을 들어주질 않아요. 양봉을 만류했으나 기어이 시작하는 식으로요. 이젠 아예 단념하고 삽니다.(웃음) 귀농 얘기 좀 할까요? 농사 경험 없이 덤벼들어 참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지요. 한마디로 아직은 답이 없어요. 그러나 이젠 도시에서 다시 살기 싫어졌어요. 시골에만 있는 맑은 공기와 순수한 자연, 손수 기른 깨끗한 먹거리들.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이미 개선된 걸 느껴요. 게다가 부부가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연풍성지가 가까이에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쩌면 모든 게 축복이죠.”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그 사소한 축복들. 고달픈 일상의 굽이에서 축복을 느낀다면 그건 잘 산다는 증빙이겠지. 삶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지. 귀농은 아찔한 모험일 수 있지만, 삶은 단 한 번 주어진 복주머니이겠고.
박병각 씨가 주는 귀농 준비 Tip
•귀촌인이야 집 사서 취미생활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귀농엔 고난이 많다. 사전 준비를 단단히 하자. 돈만을 목적으로 삼기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급자족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가치관을 확고히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활자금은 미리 비축하고 귀농하자. 아울러 극도로 지출을 자제하자. 자금 회전이 안 될 경우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봉착하기 쉬운 게 귀농이다.
•굳이 집 사지 말라. 컨테이너 하나로 시작하는 게 좋다. 농토도 사지 말라. 묵은 전답을 빌리면 된다. 비싼 농기계도 살 필요 없다. 임대하면 된다.
•반드시 부부 합의로 함께 내려오는 게 옳다. 만에 하나, 가족공동체가 깨진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향수(鄕愁)가 귀촌을 촉발했더란다. 영주시 이산면 산기슭에 사는 심원복(57) 씨의 얘기다. 어릴 때 경험한 시골 풍정이 일쑤 아릿한 그리움을 불러오더라는 거다. 일테면, 소 잔등에 쏟아지는 석양녘의 붉은 햇살처럼 목가적인 풍경들이. 배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도 밥을 나눠주었던 도타운 인정이. 타향을 사는 자에게 향수란 근원을 향한 갈증 같은 것. 그렇다고 사무친 그리움은 아니라 굳이 억지로 누르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삶이란 어차피 부평초처럼 객지를 떠도는 일이지 않던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향수가 깊어졌던 모양.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질 즈음, 심 씨는 서울생활을 후다닥 접었다.
“새가 제 둥지에 깃들여 살듯이!” 심원복 씨는 귀촌생활을 그리 비유한다. 도시에선 좀체 느끼기 어려웠던 안심과 평온을 비로소 누린다는 뜻일 테지. 물론 도시에서라고 불안이나 불만을 옆구리에 달고 살았던 건 아니었단다.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의 수레바퀴 속에서 적당히 착실하고 조신하게, 적당히 눈치보고 적당히 머리 굴리고 적당히 처세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소시민들의 절박하고도 쩨쩨한 현실. 그 역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발칙한 일탈 따위는 그의 종목이 아니었으며, 과한 출세욕이나 물욕에 허덕이며 살지도 않았을 게다. 심 씨의 유순해 보이는 인상에 이미 쓰여 있다. 별다른 폭풍과 이변과 무용담이 없었을 얌전한 인생 드라마의 표징이라는 게.
심 씨가 아늑하게 옴팡진 여기 산기슭에 집을 짓고 귀촌한 건 10년 전. 땅은 이미 그전에 사두었다. 소백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무심코 들른 산촌에서 만난 싼 매물이었다. 길도 없는 농지 1200평을 우발적으로 사들였던 것. 오우, 나중 여기에 허름한 흙집이라도 하나 짓고 살면 되겠는걸! 그런 생각으로 말이다. 땅을 미리 잡아놓은 덕에 귀촌 행보는 빨랐다. 애초 생각했던 간소한 흙집 대신 번듯한 목조주택을 지었다. 바지런히 직장생활을 했기에, 좀 모아둔 게 있었기에, 귀촌해서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력은 됐다. 그렇게 사뿐한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시골에 가서 무슨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를 딱히 의도하거나 꿈꾸진 않았습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서 마음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 싶었거든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인생사 희로애락이야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냥 순순히 적응하며 살면 될 거라 봤지요. 흔히들 귀촌 초기의 갖가지 고생담을 토로하는 것 같은데 저희 부부에겐 그런 게 거의 없었어요.”
“낯설고 물설은 산골에 잠시 놀러온 것도 아니고, 아예 새 살림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전혀 곡절이 없었던 거예요?”
“아마도 아내는 초기에 이모저모 고생이 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직장을 정리하기까지 아내 먼저 이곳에 내려와 잠시 혼자 살았으니까. 보시다시피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에요. 일단은 밤이 엄청 무서웠다 하더라고요. 근데, 외딴집의 장점도 많아요. 오붓하고 조용하고, 게다가 어느 정도 이웃들의 관심권 밖에 있으니까.”
“귀촌 정착은 의자를 만드는 일이나 뒷산 꼭대기에 오르는 일과 달리 만만치 않은 공력을 쏟아야만 할 겁니다. 그래서들 미리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내려가라 하죠.”
“제가 보기보다는 꽤나 태평한 사람입니다. 매사 준비나 계획 같은 걸 하고 살질 않았어요.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땐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호통도 내질렀지만 타고난 천성은 느긋하고 무계획적이에요. 귀촌 준비, 그런 거 전혀 없이 내려왔어요.”
“계획 대신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는 게 상책이라는? 흐르는 물처럼?”
“사전 귀촌 계획이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더라도 시골의 현실적 형편과 어긋나는 수가 많으니까. 제게 있었던 계획이라면 나를 내세우지 않겠다, ‘틀’ 안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 정도였죠. 이건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착을 가능케 했습니다. 목에 힘을 빼고, 긴장할 것 없이, 예컨대 소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게 더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잊을 수 없는 귀촌 첫날의 별빛
소풍처럼! 지독한 게 삶이라 하지만 지독하게 애만 쓰다가 허무맹랑한 파장을 보기 쉬운 게 또한 인생이다. 그러하니 억지로 애쓰지 말자, 귀촌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자, 김밥 싸 들고 소풍 가듯이 가볍게 운신하자, 심 씨의 내심엔 그런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구체적인 구상이나 기어이 이루고 싶은 그 무슨 목표를 정하지 않은 채 산골살이를 시작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나 어디 두고보자, 하는 투로.
“산골 자연 경관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귀촌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은퇴한 분들에게 어서들 내려오십쇼,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권장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어요. 제가 낭만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나무와 달, 별을 즐기게 되었는데요, 그 순수한 자연 풍경들이 마음을 하염없이 평온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뭐니 뭐니 해도 마음 편히 사는 게 행복이지 않겠어요? 귀촌 첫날 밤, 침실 창밖 허공으로 쏟아지던 별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도 별도 날마다 바라보다 보면 심드렁해지지 않던가요? 낭만주의자들의 음풍농월조차도 반복되면 싱거워지는 거라서.”
“초반엔 권태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딱히 할 일을 만들진 않았지만 텃밭 농사하랴, 산나물 뜯으러 다니랴, 산책하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으로 아내와 함께 즐겼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두 해가 지나자 슬슬 심심해지더라고요. 친구들의 방문도 서서히 줄어들다 끊어지고, 시간이 무료해지고. 그래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죠.”
“어떤 작물들을?”
“1000평 농토에 고추, 생강, 도라지, 호박 등 이 마을에서 흔히들 하는 작물을 재배했어요. 인건비를 아끼려고 모든 일을 아내와 둘이서 해냈지요. 양봉도 해봤고, 된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요. 한 해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어느 해엔 기상 악화로 망치기도 했어요. 농사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심 씨의 집 풍경을 볼까? 포옹처럼 터를 에워싼 야산 중턱에 들어앉은 남향집이니 밝고 따사롭다. 집도 마당도 널찍하다. 꼬끼오! 닭장에선 수탉이 관악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청을 돋워 산중 적막을 비틀어댄다. 집 모서리엔 한때 꿀을 얻었던 폐 벌통 스무 개쯤이 쌓여 있다. 뒤뜰 장독대엔 후덕하게 생긴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나무나 화초 가꾸기엔 별 취미가 없는지 이렇다 하게 공들여 운치 있게 꾸민 기색이 없다.
너른 발코니나 마당에 의자라거나 앉을 만한 자리 하나 마련해두지 않은 걸 보면 주로 서서 움직이는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다. 집 둘레 곳곳에 널브러진 폐물들에서도 이 집에 사는 부부가 미화작업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근로에 시간을 아껴 쓴다는 걸 짐작할 만하다.
마당 한편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선 심 씨의 아내가 쇠스랑으로 텃밭을 고르고 있다. 어디 딴 데 눈 한 번 돌리는 법 없이 열심히, 혹은 고독하게.
이분은 한때 병을 얻어 고생을 했다. 그게 귀촌을 서두른 요인이기도 했다지. 산골의 어디에 사람의 몸을 고치는 미약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귀촌을 통해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는 걸 나는 간혹 봤다. 심 씨의 아내 역시 귀촌 이후 건강을 완연하게 회복했다는 게 아닌가.
“저희 부부는 외식을 안 합니다. 농약 친 식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을 싫어해서죠. 직접 온갖 채소들을 깨끗하게 가꿔 찬을 만들어 먹기, 이 역시 산골에 사는 행복 중 하나입니다. 그게 건강비결이라고 봐요. 요양을 위해서라면 가급적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농약을 엄청 뿌려대는 과수 단지나 유해 가스를 배출하는 축사 지구를 피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곳은 도시보다 공기의 질이 더 나쁠 수도 있으니까.”
“도시에서와 달리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어쩌면 불운한 여건에 처한 부부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질도 중요하겠죠? 귀촌한 부부들이 대화단절이라거나, 도시에서보다 갈등을 더 겪는 경우도 드물지 않더군요. 부인은 산골생활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할 리가요. 여자에게 시골은 아무래도 불편이 많으니까요. 체념하고 사는 것 같아요. 부부싸움도 하지만 그때마다 화해를 하죠. 친구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삽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더라고. 뭐 그래도 밥은 얻어먹고 삽니다.(웃음) 다툼이 있더라도 그게 다 내 탓이거니, 그리 여기고요.”
“‘내 탓’이라는 건 뭐죠?”
“흠, 제 약점이랄까, 제가 느려터진 면이 있어요. 게으름과는 좀 다른 건데요, 옆에서 볼 땐 당치 않은 여유나 허세를 부린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릴 때부터의 천성이라 어쩔 수 없더라고요. 좀 더 느린 숨결로 여유롭게 살자! 귀촌 때 그런 다짐도 했고요.”
“마을 이장을 맡으셨죠? 주민들의 신임을 얻지 않고선 그거 어려운 거 아녜요?”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를 내세우지 않고 배운다는 자세로 어울렸어요. 술자리도 함께하고 오락 화투도 같이 치며 섞여들었어요. 시골에선 사생활이라는 게 어렵습니다. 뭐든 묻거든요. 답을 안 해주면 오해를 살 수 있고요. 그런 풍토를 긍정하고 잘 적응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정착할 수 있어요.”
마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사람의 마음은 새장에 달린 문과 같아서 활짝 열어젖힐 때 비상할 수 있다. 시골에 살며 아는 척, 잘난 척, 멋있는 척을 하다 보면 새장에 갇힌 신세를 자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세를 낮춘 갸륵한 선의마저 곧이곧대로 믿어주질 않는 경우가 많은 게 세상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게 인간이라는 종이다. 시골인들 혼선이 없으랴.
“험한 꼴을 당한 적은 없으셨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은 상황이라든가.”
“텃세라는 건 주로 집성촌에서 벌어집니다. 60여 명의 각성바지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 주민들은 다들 점잖아요. 귀촌하고서 집들이를 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오셨더라고요. 이 마을에 이주한 최초의 외지인이라며 반겨줬어요. 그 분위기를 죽 유지한 셈이죠.”
이장 일을 보면서부터 심 씨의 양상이 급변했다. 마을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굵직굵직한 마을 사업들을 펼쳐 성과를 거둬서다. 자칫 먹은 것 없이도 바가지로 욕먹을 수 있는 게 마을 사업 선도자다. 그는 공생 공영을 열심히 추구한 나머지 흠집 난 게 없는 것 같다.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임을 아는 이의 활보라 할 수 있겠다.
“귀촌하려는 분들에게 꼭 귀띔하고 싶어요. 재능과 역량을 마을에 쏟는다면 반드시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요즘 정부나 지자체가 시행하는 마을지원사업의 규모나 종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에 착안하시길 바랍니다. 마을의 공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개인의 이익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심 씨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큰 소리로 자주 웃어젖혔다. 우스울 게 없는 대목에서도 마구 웃으니 난 그게 우스워 덩달아 웃길 거듭했다. 적극적인 사교의 기술일 테지. 몸에 밴 겸양의 꽃으로 터져나온 홍소(哄笑)일 수도.
심원복 씨가 주는 귀촌·귀농 준비 Tip
•최소한의 생활비(월 100만 원 정도)를 조달할 수 없는 재정 형편이라면 귀촌하지 않는 게 좋다. 비참해질 수 있으니까.
•농사로 돈을 모으기는 정말 어렵다. 노동 강도도 세다. 섣불리 농토에 투자하지 말자. 일단 맨몸으로 들어와 빈집과 묵은 전답을 빌려 수련기를 갖는 게 좋다.
•시골생활을 하다 보면 무료해진다. 변화가 없는 일상에 지칠 수 있다. 그럴 때 자연과의 교감이 필요하다. 산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감성도 길러진다. 열렬한 취미 한두 가지를 가지고 내려온다면 한결 바람직하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삶이 즐거운 건 살고 싶은 대로 살 때다.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쉽지 않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대충 살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삶이란 위태한 곡예에 가깝다. 곡예 역시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왕지사 한 번 태어난 인생, 심란한 곡예보다는 평온한 활보로 삶을 즐기는 게 낫겠지. 이 사람을 보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 방식대로, 내 지향대로 산다.
사는 것처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좋은 삶이란 뭐지? 나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거지? 김형태 목사(50)는 그런 궁리를 일찍부터 줄기차게 해왔던 모양이다. 뭐시라? 누군들 그런 생각 안 해보겠어? 그리 따질 입들이 많겠지만, 김 목사의 모색은 한결 심각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이미 신 안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해서 잡다한 혼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늘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화두였다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 어떻게 살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인걸, 무슨 거한 포부가 있기에 화두까지 타셨나? 그리 또 따질 입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는 화두를 파 궁구한 나머지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귀농 행(行)! 바로 그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삶과 교육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변에 공동체생활의 이상과 실천을 말씀하시는 스승들도 많아 영향을 받았고요. 도시의 복잡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실천하고 싶다는 거.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합천 땅 황매산 기슭으로 내려온 건 6년 전. 이곳에 오기 이전, 청송과 산청에서도 한두 해 시골살이를 했는데, 그건 워밍업이었단다. 이미 몸을 풀고 링에 올랐기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더란다. 기쁨에 들떠 산골에 입장했다니 행복, 혹은 행복의 조짐을 움켜쥔 셈이었다.
아까 나는 이 집 입구에 도착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근사한걸! 집 뒤편으로 좍 병풍을 친 산경이 기차게 삼삼해서였다. 아울러 그의 거처가 아름다워서였다. 마당 너른 집에 들어앉은 자못 큼직하고 미끈한
2층집이니 말이다. 수려한 산봉들이 우아한 코러스를 공연하는 터전이니 땅값부터 겁나게 나가겠는걸! 난 속물답게 그리 여기며 은근히 부러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아니구나. 김 목사는 이 집에 세 들어 산다. 우리를 자주 속 터지게 하는 ‘쩐’이라는 거, 그 요상한 물건을 그는 거의 지니질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종잣돈이라도 마련한 뒤 귀농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한동안 귀농을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앉아 있을 텐가? 떠나라, 유목민처럼 서슴없이 떠나라!’ 그래 그냥 따랐지요.”
“맨손으로 내려왔다는?”
“별로 손에 쥔 게 없었어요.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준 퇴직금 2000만 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주민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까. 이 집 주인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의 대안적 삶에 관한 포부를 듣고 집을 임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개축까지 거들어줬거든요.”
“‘토기장이의 집’이라는 북 카페를 운영하시는군요. 이 집 쥔 양반은 토기를 굽나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기장이’란 성경의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따왔어요. 아내와 딸이 북 카페를 운영합니다. 저는 농사에 주력하고.”
“목회는?”
“카페 공간을 예배당으로 여기지만, 간혹 신도가 찾아오지만, 여길 와서 제가 목사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땀 흘려 정직한 농사를 짓는 일, 농약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품앗이를 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래하는 삶, 그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영성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이미 목회라 여기며 삽니다.”
자연의 영성 안에서 살기
목회라는 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놨다는 얘기라기보다는 한결 진정한 목회자의 실천적 삶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일 테지. 그가 외로운 떠돌이로 산 바가 없었겠으나, 귀농으로 드디어 조용한 포구에 정박했다는 투의 안심과 자부심이 비친다. 그런 그에게 산골이란, 자연이란, 농사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이상적 조건일 게다. 도시의 빌딩 숲속에선 이상 구현이 어려운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야야, 어디서건 네가 너의 임자로 살면 참인 것이야! 불가에 전해지는 뉴스가 그렇다. 도시에서 그는 무엇에 식상했을까?
“사는 장소가 도시이냐 시골이냐는 물론 중요하지 않지요.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가 있을 뿐이니. 그런데 도시에서는 마음을 돌보며 살기 어렵지 않던가요? 나를 돌아볼 짬조차 없질 않던가요?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한 발이라도 앞설 수 있지 않던가요? 산골에 산다는 건 자연의 영성 안에 사는 건데요, 가령 흙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놓쳤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선 얻을 수 없었던 힘이 생겨요.”
“농사란 여전히 못 믿을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어요. 나오는 것 없이 골병만 든다고들 하죠. 김 목사님 농사는 무난할까?”
“애초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와서 보니 저와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이미 살고 있더라고요. 시인 서정홍 선생님을 비롯해 유기농을 하는 ‘열매지기 공동체’의 아홉 농가 사람들, 이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구상하고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간 거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되죠?”
“초기엔 200평이었으나 현재는 1200평으로 늘었어요. 마을 분들이 빌려준 밭이에요. 여기에다 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수수, 생강, 양파,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수익은 없지만, 기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써 일하기에 조금 고되지만, 그러나 만족합니다.”
“땀 흘려 노력을 했을 텐데 아직 수입이 발생하질 않다니, 이걸 어쩌나?”
“자급자족은 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요. 소출이 적더라도 우선은 땅을 살려놓고 보자는 게 유기농의 정신입니다. 문제는 요즘의 심각한 기후변화에 있어요. 노련한 토박이 농부들조차 대책을 찾지 못해 고심합니다.”
만물만상이 변하는 건 이치이지만 21세기의 날씨 변동은 왜 이 모양인가. 괴상한 게 기후뿐이랴. 나 하나, 내 가족 하나만 잘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일쑤 남을 짓밟기를 장기자랑하듯 해대는 이 시대의 이기적 세태는 또 얼마나 수상한가. 모름지기 학교 교육부터 창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왁자하지만 정작 바뀌는 게 없으니 썰렁한 농담이다. 일찍이 이런 파행에 불신을 느낀 탓일 테지. 김 목사는 자식 셋 모두를 공교육에 맡기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양육했다.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말이다. 폼나는 학력을 걸치지 않고선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취급을 당할 세상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땐 많이 불안했다 하대요. 불안과 마주앉아 자기 고민들을 많이 했다고. 근데 그게 필요한 고민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고민과 함께 내적 성장을 한 것 같아요. 학교나 학원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스스로 배워 찾아냈다고 봅니다. 야생의 어떤 감성으로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나 할까.”
“성적 경쟁의 격투장인 학교에서 심히 시달리며 세상의 명암을 알아가는 건 딱히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고난을 겪고서야 근본이 강해지는 법인데.”
“공교육은 개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다움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제 아이들은 너무도 잘 자랐어요. 각자 자기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어요. 모두 경제적 자립을 했고요. 일테면, 막내인 아들은 올해 스물두 살인데 어엿한 청년 농부입니다. 지적 욕구가 강해 책을 무섭도록 읽어대요. 저희 북 카페가 운영하는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물리학이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도 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 수 있는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야무지게 키우고, 물적 토대 없는 용감한 귀농에 자족하고, 눈앞의 현실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일 수 있는 ‘자연의 영성’이라는 걸 가슴에 담고 사는 조용한 삶. 줏대와 슬기가 아니고선 꾸려내기 어려울 경관이다. 땅에 쏟는 떳떳한 노동과 자연을 향한 겸손한 순응 역시 맑은 생활의 원천이자 길일 테지.
“현실적인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산 속에서 뭘 먹고 사느냐, 신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삽니다. 특히나 귀농으로 맺어진 좋은 인연, ‘열매지기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만족스러워요. 커다란 행운이에요.”
“많은 공동체가 종단엔 실패를 하더군요. 그 가치는 아름답지만, 원초적 이기주의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공동의 틀 안에 모아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필요한 일이죠. 같은 길을 가되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 봅니다. 저는 귀농 후 자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매지기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마음자리를 늘 돌아보는 눈이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용납 못했을 일도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게 마음이 좀 넓어진 덕분이겠죠.”
“모두들 물귀신 같은 물신에 덜미를 잡혀 사는 세상이에요. 소박한 소유로 자족하는 김 목사님에겐, 가령 노후 불안 같은 건 없을까?”
“아무런 대책이 없으나 불안도 없어요. 늙어 병들면 그냥 죽으면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라는 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돈 들어가지 않게 짜여 있어서 더더구나 문제될 게 없지요. 게다가 시골에선 굶어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웃음) 온 산야에 먹을 것 지천이고, 경로당에서 뭔가를 챙겨주고 하니까.”
이루면 더 이루고 싶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욕망이다.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관성이다. 이런 삶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은 게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시늉이 아니라 안팎이 두루 한결같은 실천이자 실력이라면, 그건 내공이겠지.
“자연 속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됩니다. 자연 속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답게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더욱 소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힘을 빼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구를 설득할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자 해요. 죽음이 찾아오면 인디언처럼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겠죠. 자연이 그렇잖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있다가 없어지는 것. 누구나 그 평범한 진리 하나를 몸에 붙이고 산다면 과히 걸릴 게 없겠지. 물신도 귀신도 사신(死神)도 두려울 것 없을 게다.
김형태 목사가 주는 귀농준비 Tip
•귀농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정붙이고 살 수 있다.
•은퇴자 귀농의 실패 확률은 매우 높다. 농사로 몸 건강을 망칠 수 있어서다. 도시와는 다른 시골 풍습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도 낭패를 볼 수 있다.
•귀농 초기엔 찍소리 안 하고 지내는 게 좋다. 원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귀농인들 때문에 시골 땅값이 근거 없이 오르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대안적 삶을 원해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깊고 외진 산골에 마녀들이 산다. 오순도순 친자매들처럼 정겹게 지낸다. 산골짝 여기저기, 멀거나 가까이에 떨어져서들 살지만 여차하면 만나고 모이고 뭉친다. 모임 전갈이 떨어지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처럼 모두들 득달같이 달려와 자리를 함께한다. ‘마녀들’이라지만 위험하거나 수상할 게 없는 아줌마들이다. ‘마음씨 예쁜 여자들’, 그걸 줄인 게 ‘마녀들’이라지.
‘마녀들’ 여섯 명은 모두 귀농인이다. 산골에서 산 세월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다들 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린다. 모임을 제안해 만든 건 된장사업을 하는 임미숙(60) 씨.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녀는 귀농 동기인 강성대(70, 명박골 표고버섯) 씨를 왕언니로 해 동아리를 꾸렸다. 임미숙 씨는 도시에서 사업상의 부침을 거듭하다 활로를 찾아 7년 전에 이 산골로 귀농을 했다. 나 이제 욕심을 싹 비우고 살래! 그런 다짐을 하며 어버이처럼 푸근한 시골의 자연 속으로 거침없이 이주했다. 이후 용케도 그녀는 발랄한 또래 아줌마들을 만나 사교를 했다. 마침내 죽이 맞아 단단한 우애를 쌓게 되었다. ‘마녀들’이라는 모임 이름은 그녀의 작명.
“귀농으로 맺어진 우연한 인연이지만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지내니 큰 행운이죠. 귀농 직후 저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무엇보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힘도 부족했어요. 혼자 끙끙거리며 남들 몰래 공부를 하고 실습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던 중 인근 마을의 또래 아줌마들이 드나들며 일을 도와주었지요. 모두들 귀농 선배들이라 일 외에도 여러모로 배울 게 많았어요. 게다가 살가운 여자들이라 순식간에 정도 들었고요. 그게 ‘마녀들’ 모임의 배경이에요.”
우정이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주는 보약. 소소한 사교 이상의 결속력으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마녀들’ 모임은 시골살이를 한결 생동하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이들이 모이면 일이 벌어진다. 또는 일이 생길 때면 재까닥 모인다. 생일 같은 축일엔 파티를 펼친다. 김천농업기술센터가 개설한 음식연구회에 참여해 함께 요리를 배운다. 귀농 교육생들이 찾아들면 모두 발 벗고 나서 일을 거들거나 팜파티를 펼친다. 농번기엔 일손이 딸려 애를 먹는 곳이 농촌이지만 이들은 끄떡없다. 우르르 자매들의 농장으로 번갈아 달려가 일을 해치운다는 게 아닌가. 품앗이의 귀감이다.
“마녀들 또 뭉쳤네!”
때로 외롭거나 따분할 수 있는 게 산골살림이다. 뒷산 소나무 외엔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더 이상은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게 귀농생활이다. 하지만 ‘마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한다. 끝없는 수다와 깔깔대는 웃음이 꽃처럼 피어 내부에 웅크렸던 그늘을 헹궈낸다. 멀리 대구로 나가 뮤지컬이나 영화를 즐기기도 하고, 더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른다지. “어라? 마녀들이 또 뭉쳤네!”
농사란 어쩌면 희한한 방식의 고행. 난다 긴다 하는 고수가 아니고선 실패하기 십상이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마녀들은 모두 순항하고 있다. 다들 김천 관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으로 알려졌다. 면면을 볼까? 마녀들 가운데 유일한 독신인 임미숙 씨는 된장사업에 야무지게 매달려 기반을 잡았다. 조현숙(60) 씨는 보리떡을 만들어 기세를 돋운다. 구나윤(58, 삼도봉 천마농장) 씨는 천마 재배로 5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전경정(58, 새송이 청암농장) 씨는 고품질 유기농 새송이버섯을 생산하는 유력 농군으로 부상했다. 양봉으로 꿀을 생산하는 이선화(57, 도마네 꿀집) 씨도 억대농.
화려한 이력들이다. 모든 귀농인들이 사력을 다해 성공을 추구하지만 숫제 물거품이 되는 경우마저 숱하다. 마녀들은 하늘의 자비로운 협찬을 유달리 옹골차게 누렸을까? 그럴 리가. 그들은 남들보다 더 분발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고서도 참담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바닥을 친 그 좌절의 힘으로 다시 튀어 올랐다. 인생이란 실로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얘길 들어볼까.
구나윤 “천마 재배 이전에 다른 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했어요. 하지만 실패만 거듭했죠. 가지고 있던 자금을 다 털어먹고 빚만 잔뜩 남았을 때 실의 속에서 착안한 게 천마 재배였어요. 그러나 이마저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복잡한 재배와 생산 과정을 숙달하고서도 판로가 여의치 않더라고요. 게다가 값싼 중국산마저 마구 밀려들었고요. 그러나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초기엔 한 해 빚만 1억 원에 달할 정도로 큰 실패를 봤지만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으로 실의를 털고 다시 일어서야만 했어요.”
전경정 “저는 귀농 1세대에 속해요. 원래 시골을 좋아했기에, 시골에 사는 게 꿈이었기에, 귀농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농업이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에 나선 게 10년 전이었는데 처음엔 고전의 연속이었죠. 모든 재산이 경매로 사라지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어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셈이죠.”
구나윤 “저희 농장의 문제는 판로에 있었지요. 제아무리 고품질 천마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판로를 구축하지 못하면 헛수고에 그치고 말아요. 그래서 인터넷 마케팅에 주력했고, 그건 매우 정확한 타깃이었어요. 현재 인터넷 단골 고객만 600여 명에 달해요.”
전경정 “한순간에 부도가 나자 주변 사람들이 말도 안 걸더라고요. 배척하는 그 분위기, 참 서글펐어요. 급기야 제가 간암 판정을 받는 상황까지 맞이했어요. 제대로 잘 살아보기 위해 귀농을 했는데 죽을병에 걸리다니…. 금전적 압박이 중병을 가져온 것인데 의지로 떨쳐야만 했어요. 암 치료 중에 부단히 운동을 하고,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 순응을 하고 긍정심을 키우고…. 그런 노력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버섯 재배에도 더 각별한 공을 들였어요. 남편과 함께 새벽까지 농장에서 불을 밝히고 일했어요. 그 결과 5년 전부터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요. 저 들에 핀 꿋꿋한 풀꽃처럼.”
고진(苦盡)의 짝꿍은 감래(甘來)
하늘엔 때로 느닷없는 비구름이 엉기고, 인간사엔 자주 우환이 끼어든다. 하지만 지구상의 가장 강인한 생물에 속할 인간은 때로 무적함대처럼 용맹하다. 운세를 경영하는 촉이 살아 있을 경우 우환이라는 놈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귀농으로 고진감래의 여정을 연수한 두 ‘마녀’의 술회엔 가슴을 파고드는 감명이 서려 있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어떤 상황에서고 할 일을 능히 찾아 치열히 행하고 볼 일이렷다.
농사 혹은 돈벌이만이 마녀들의 본분사는 아니다. 심혼을 촉촉이 적시는 정서적 만족감이 있어야 생이 즐거울 게 아닌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간에 이른 이 아줌마들이 갈구하는 건 즐거운 나날들의 지속일 테지. 그 어엿한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귀농을 택했고, 시골은 그녀들에게 응분의 선물을 주었다.
임미숙 “여자 혼자 사는 제 입장에선 일 자체가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시골생활이에요. 마녀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지내는 일에서도 커다란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흔히들 시골엔 문화 여건이 열악한 걸로 알지만 사실과 달라요. 가령 김천농업센터만 해도 다양한 문화강좌가 개설돼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우쿨렐레와 천연염색을 배웠어요. 제과제빵 기술도 배웠고, 한식요리사 자격증도 땄어요.”
이선화 “시골생활 초기엔 모든 게 힘들었어요. 그러나 원래 허약 체질이었던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건강해졌는데요, 우선은 거짓말 없는 자연에 마음을 두고 산 덕분이라 봐요. 잔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하늘과 구름과 달과도 대화가 되는 기분이에요. 저희 부부는 이동 양봉을 합니다. 철 따라 꽃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실은 현대판 집시여인이에요.(웃음) 꽃이 좋아 꽃을 따라 늘 여행하는 여자라는 거.”
구나윤 “처음엔 시골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어요.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수많은 일들을 해야 했으니까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죠. 몸은 망가지고, 부채만 쌓이고, 화병이 생기고, 참 문제가 많았던 시절이 길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누군가 귀농을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시련기가 지나고선 서서히 안도와 행복을 느꼈어요. 판로를 구축해 천마 판매에 탄력을 붙이면서였어요. 나름의 부를 일굴 수 있었던 덕이죠. 이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삽니다.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거의 맨날 붙어 지내는 남편과는 충돌이 많지만, 그동안 꾹 참고 살았지만 이젠 눌려 살진 않을 거예요. 밥을 찾아 먹거나 말거나.(웃음)”
전경정 “시골이 싫다는 여성이 많지만 저는 참 좋아요. 그래서 촌스럽게 생겼을까?(웃음) 마음도 촌스러워요. 주변 산과 꽃의 경이로움을 사진에 담는 일이 참 즐거워요. 그보다 좋은 건 ‘마녀’ 언니들과 어울리는 일이에요. 제겐 원래 언니가 없어서 이 언니들에게 더 기대는지도 몰라요. 음, 농사란 좋은 직업이라 봅니다. 생명공학도라 할까? 농부는 항상 자기개발을 하는 사람이라 봐야 할 거 같아요.”
인사만 잘해도 탈날 일 없어
수많은 인구가 넘실거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골똘히 주시하지 않는다. 피차 피곤할 수 있는 간섭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시골에선 다르다. 마을 인구가 워낙 적기에 이웃에게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마을 나름의 질서와 풍습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누군가가 귀촌을 했다면, 그는 이삿짐을 푸는 첫날부터 무대에 오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입길에 오른다. 야무지고도 건실한 마녀들, 이들은 원주민과의 융화에 애로를 느끼진 않았을까. 들어보자.
구나윤 “시골분들이 합리적이진 않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물들며 살아왔어요. 가령, 모처럼 치장 좀 하고 외출할 경우,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느냐는 투의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참견이죠. 하지만 귀농인들이 조심하며 지내는 게 상책이라 봐요.”
임미숙 “간섭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들을 간섭으로 듣지 않으면 돼요. 그냥 하는 소리니까요.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게 필요하고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만 잘해도 탈날 게 없어요.”
전경정 “시골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었어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적극 노력을 했어요. 저희 남편은 마을의 초상집을 찾아다니며 시신까지 만졌어요.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죠.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면, 결국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주민 모두를 내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실패할 일이 없겠지. 그게 쉽겠냐마는 마을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선 설 길이 없다. ‘마녀들’처럼, 우정과 공감에 찬 동아리를 만든다면 한결 든든할 테고.
소설가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나의 위대한 생태텃밭 (샐리 진 커닝햄 저ㆍ들녘)
들녘의 59번째 귀농총서. 유기농 텃밭 농부이자 원예 전문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샐리 진 커닝햄이 수십 년간 경험한 텃밭 가꾸기 노하우를 담았다. 방대한 이론을 섭렵하며 수많은 실험을 거듭한 저자는 “텃밭 농부가 할 일은 자연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화학물질 제로’를 달성해낸 ‘생태텃밭 농법’을 소개한다. 책에는 자연과 함께 텃밭을 가꾸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나와 있다. 올해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동반식물 재배법’과 같이, 함께 심으면 더 잘 자라는 이웃 식물들을 소개한다. 나아가 텃밭 대표 작물 32종의 가족 식물, 이웃 식물 목록을 정리하고, 자세한 재배법과 흔히 발생하는 문제와 해결책까지 다뤘다. 텃밭에 도움이 되는 익충 31종의 생김새와 생활주기, 발견 장소, 유익성, 소환 방법 등을 소개한 것이 특징이다. 더불어 조심해야 할 해충 12종도 방제법과 함께 보여준다. 초보 농부에게 도움이 되는 단계별, 시기별 텃밭 농사 비법도 전수한다. 가장 기초적인 흙 돌보기 단계부터 수확 방법, 다음 농사 준비 단계까지 자세히 담았다. 저자가 직접 자신의 텃밭에서 촬영한 사진들과 그림 자료를 활용해 이해를 돕는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저ㆍ양철북)
강원도 양양 송천 마을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 중 151편을 골라 엮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농가의 사계절과 저자의 일상이 정겹게 그려진다. 30년 넘게 현재까지 이어오는 일기 속 평범하고도 소박한 이야기가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유홍준 저ㆍ창비)
올해 6월 우리 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에 실렸던 남한의 산사 20여 곳과 북한의 산사 2곳을 꼽아 소개한다. 가을을 맞아 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우리 산사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노년에 대하여 (윌 듀런트 저ㆍ민음사)
‘철학 이야기’, ‘문명 이야기’ 등으로 이름을 알리며 퓰리처상을 받은 역사가 윌 듀런트의 마지막 원고다.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신과 도덕, 전쟁과 정치 등 인생에서 마주하는 20여 가지 문제를 다룬다.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동시에 정제된 저자의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실용치즈전서 (배인휴 저ㆍ유한문화사)
배인휴 국립순천대학교 명예교수가 1982년부터 유가공학연구실을 운영하며 모은 치즈 관련 자료와 치즈 산업 현장 경험이 640여 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에 담겼다. 다양한 치즈 제조 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해 낙농가 농민들과 치즈 입문자들에게도 유용하다.
“여러분의 성공적인 귀농·귀촌을 응원합니다”
2018 지방선거에서 초박빙의 승부를 보인 지역, 바로 강원도 평창군이다. 한왕기 평창군수는 선거에서 현직 군수였던 심재국 후보를 단 24표 차로 이기고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쥐면서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평창에서 태어나 일생을 보낸 평창 토박이인 한왕기 군수는 요즘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한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평창의 미래를 미리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왕기 평창군수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요즘 바쁘게 움직이며 여론과 행정력을 끌어모으고 있다. 올림픽 후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서울올림픽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이란 재단을 설립해 유산사업을 현재까지 하고 있어요. 평창동계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사업에는 신경을 안 썼더군요. 그래서 평창올림픽법을 국회 문체위 상임위원장인 안민석 의원님께 요청했습니다. 이 법에 근거를 두고 평창올림픽에 대한 재단법인을 만들어서 일관성 있는 올림픽 유산관리와 발굴을 할 예정입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의 가장 큰 유산인 평화를 지역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 평화의 시대를 평창이 주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평화특례시 추진과 평화 관련 기관 유치, 세계평화포럼 개최를 실현해간다는 방침이다.
해발고도 700m의 쾌적함
평창군은 평균 해발고도가 700m인 지역이다. 이는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장 좋은 고도라는 슬로건으로 ‘HAPPY700’ 브랜드를 론칭하는 계기가 됐다. 브랜드를 선포한 게 1998년이니 벌써 20년 전 일이다. 한 군수는 “이제 평창 하면 HAPPY700을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고 자평했다.
“매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불볕더위에 700고지의 쾌적한 공간을 찾아 평창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었습니다. 지난 8월 5일에 막을 내린 평창더위사냥축제는 지난해보다 1만2000여 명이 더 많은 8만7000여 명의 방문객이 몰렸어요. 지금도 대관령 고원지대는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줄어드는 인구, 깊어지는 고민
이처럼 살기 쾌적한 도시로서의 평창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창의 설질(雪質)이 좋다는 사실은 동계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공인된 얘기다.
그러나 평창은 휴양도시로서의 딜레마 또한 분명히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수도권 외 대부분의 지역들이 앓고 있는 문제, 바로 지역 정착민이 적고,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창군 인구는 7월 말 현재 2만1071세대 4만2808명으로, 지난 1995년 5만 명 붕괴 이후 2005년 4만5033명, 2015년 4만3500명 등 점차 감소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구감소의 주요 원인은 2001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많은 현상인 데드크로스와 타 지역 전출로 확인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평창군은 2016년 10월 기술지원과 귀농·귀촌 부서, 2017년 10월 기획감사실 지역인구정책부서 등 전담부서를 신설 후 체계적인 정책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귀농·귀촌은 평창으로
한 군수는 평창이 귀농·귀촌에 강점을 가진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평창은 기후변화에 가장 유연하게 대처 가능한 이상적인 온도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평창의 농산물은 특유의 기후 덕분에 식물 세포가 오밀조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져 시장에서 고가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한 시간대 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강점도 있습니다.”
한 군수는 귀농·귀촌 현상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외지인과 평창인의 갈등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외지인이 평창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평창군 귀농·귀촌 페스티벌’을 시행하고 있다.
“무작정 외지인더러 들어오라고만 하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높습니다. 그래서 귀농·귀촌 페스티벌을 통해 귀농·귀촌에 관심 있는 도시민에게 우리 군의 귀농·귀촌 정책을 소개하고, 귀농·귀촌 선배들을 만나 생생한 정착기를 듣게 해줍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직접 농촌의 삶을 체험해보고 멘토 농가를 연결해 도움을 받게 합니다. 그래야 정착 성공률이 높아지니까요. 이외에도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 창업 및 정착 지원, 집수리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휴양도시로서의 강점 극대화
한 군수는 최근 국민적 트렌드인 귀농·귀촌을 활성화하기 위한 지원 대책을 강화하는 한편,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더욱 강화된 관광휴양도시로서의 강점도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올림픽 기간 중 시범운영을 거쳐 현재 본격 운영 중인 ‘HAPPY700 평창시티투어버스’다. 시티투어버스는 코스를 나누어, 올림픽 개최 현장과 시설을 보며 올림픽의 열기와 영광을 느껴보는 올림픽 로드, 평창 지역의 시골장을 돌며 ‘진짜 촌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전통시장 로드, 문화와 축제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페스티벌 로드 등 시기와 테마별로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최우수 축제인 평창효석문화제는 9월 1일부터 9일까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이자, 가산 이효석의 고향 평창군 봉평면 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는 ‘인연, 사랑, 그리고 추억’이라는 주제로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을 전하는 추억 만들기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넓은 메밀밭에서 펼쳐지는 축제는 문학과 체험을 아우르는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한다. 평창백일홍축제는 평창읍 평창강 둔치에서 오는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펼쳐진다. 시원한 평창강을 배경으로 백일홍 천만 송이가 장관을 이루는 낭만적인 축제다. 해마다 꽃밭 한가운데에 있는 포토존이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평창의 감자, 옥수수, 메밀로 만든 토속 먹거리와 낮과 밤에 끊이지 않고 펼쳐지는 문화예술공연도 운치를 더한다고 자랑했다.
농림축산업 고도화의 발판 마련
최근 평창군에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2018 농촌 신활력 플러스 사업’에 선정돼 70억 원을 지원받게 된 것이다. 전국에서 10개 지자체만 선정된 이 사업에서 평창군은 ‘평창 프리미엄 농식품 플랫폼 사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는 서울대학교 허철성 교수를 단장으로 선임해 ‘평창 프리미엄 농식품 플랫폼 추진단’을 꾸리고, 서울대학교의 기술을 활용해 지역의 우수 특용·약용 작물을 고부가가치의 기능성 농식품으로 개발한 후, 지역 내 가공업체로 기술 이전, 해외시장 개척 등 산업 고도화를 이룬다는 계획이다.
“평창은 농림축산업이 경제의 근간입니다. 올해부터 4년 동안 체계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해, 평창의 우수한 특용·약용작물로 프리미엄급 농식품을 개발·생산하고, 이와 접목한 체험·관광을 통합 마케팅할 것입니다. 농업인 소득증대와 일자리 창출, 농촌관광 활성화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시작으로 향후 서울대학교와 연계한 고령친화식품단지를 조성해, 평창군 농식품 산업 혁신을 앞당기고자 합니다.”
평창의 주산업인 농업·농촌의 소득 안정을 위해 청년농·여성농·고령농을 지원하고 농산물 판로 확보와 가공유통시설 기반 구축, 산림농업 육성 등 농축산업 경쟁력 강화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한다. 한 군수는 농업 예산을 전체 예산의 20%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평창에 귀농·귀촌인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갖추고 부족한 농촌 인력을 해결하기 위한 농업인력 지원센터도 마련할 계획입니다. 또 군 전체 면적의 83%를 차지하는 산림을 기반으로 산악관광, 산악스포츠, 산림 복합영농 등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 집중 투자해 경쟁력을 갖춘 자립적인 농촌기반을 조성해나가는 데 힘써보겠습니다.”
아울러 평화올림픽 개최를 통해 남북 화해와 세계 평화의 출발점이 된 평창을 평화의 중심지로 부각시키기 위해 평창 평화특례시를 추진하고, 남북 교류협력과 평화의 산실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민생 현장을 돌면서 잘살게 해달라는 평창군민들의 희망을 듣고 1%의 가능성이 평창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평화의 시작 평창과 함께, 사람이 행복한 문화관광, 더불어 잘사는 지역경제, 소득이 안정된 농촌, 모두가 행복한 복지 등을 군정 5대 목표로 정한 한왕기 군수는 농촌 가치 살리는 평창건설을 위해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평창의 변화와 도약을 이끌어내겠다고 말했다.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딜 가도 꽃잔치가 한창이다. 희거나 붉거나 노란 꽃송이들 우르르 일으켜 세우는 봄의 힘. 그걸 청춘이라 부른다. 자연의 청춘은 연거푸 돌아온다. 인간의 청춘은 한 번 가면 끝이다. 조물주의 디자인이 애초에 그렇다. 청춘은 전생처럼 이미 아득하게 저물었다. 바야흐로 생애의 가을에 접어든 사람에겐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을 절정으로 가늠하는 사람에겐 여전한 봄. 싱싱한 태도와 관점이 청춘의 사촌인 회춘(回春)을 데려다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생이란 흥미진진한 극장!
신을 발견했다. 새파랗던 청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어느새 어중간한 중늙은이로 변해버린 게 아닌가. 흉포한 세월의 간계에 부질없는 삿대질을 해대는 대신, 그는 올 것이 왔다는 투로 태연히 응하기로 했다. 과학교사였던 그에겐 매사 과학적 사고를 하는 버릇이 있다지. 어차피 거역할 수 없는 숙명엔 대번에 순응하자는 게 그의 과학적 인생관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인색한 조물주가 주입한 숙명에 짓눌리지 않는 길이라는 지론 또한 그의 과학이렷다. 윤 씨는 교장을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모종의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 모종의 일이란 반전 평화운동이나 조국의 통일운동 같은 웅장한 사업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내밀한 영혼과 관련됐을 수도 있을 그 모종의 일이란 귀촌이었다. 귀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더란다. 사실 그건 오크통에 숙성시킨 와인처럼 그가 오랫동안 무르익힌 숙원이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시골에 들어가 살겠다는 포부. 귀촌으로 인생 가을을 회춘의 계절로 누리겠노라는 열망. 그는 포부와 열망 자체가 믿을 만한 길잡이인 걸 알아차리고 귀촌을 단행했다. 미련도 불안도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치 담 밖에서 부르는 연인의 음성에 이끌려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스윽 도시를 벗어났다. “남들이 뜯어말리더라고요. 그 어중간한 나이에 시골 가서 무슨 재미를 보겠느냐, 웬 생고생을 자청하느냐, 그런 소리들을 했어요. 그러나 은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왔던 저에겐 귀촌이 움직일 수 없는 답이자 길이었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귀촌에 매력을 느끼고 모색해왔으니까. 다만 타이밍을 기다렸을 뿐인데,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이제 때가 왔다, 더 미룰 수 없다, 그런 판단을 했죠.” “평생 생활고에 쫓기다 옥살이까지 했던 세르반테스. 그가 ‘돈키호테’를 써 성공한 게 예순 무렵이었죠.” “저의 꿈은 소박해요. 일테면,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싶다, 그런 거….” “선생께서 미리 간파한 귀촌의 매력 요소란 어떤 것들이죠?” “일단은 제 취향과 잘 맞을 거라 봤어요. 딱히 도시에 환멸 같은 걸 느끼진 않았지만, 마음은 자주 시골로 흘러갔어요. 텃밭을 가꾸고, 나무를 기르고, 앞산 뒷산을 산책하고, 그런 한적한 생활에 대한 선망이 많았어요. 생활비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점에도 호감을 느꼈어요. 시골의 싼 땅값도 매력 요소라 봤고요. 이래저래 귀촌으로 은퇴 이후 노년의 삶을 한결 생동감 넘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요.” “살터를 잡는 일부터 착수했겠죠?” “광주 인근 나주나 담양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많이 돌아다녔지만 마땅치 않았어요. 우연히 이곳 이 마을을 발견한 건 행운입니다. 땅값도 쌌어요. 광주의 아파트 한 채 값이면 땅 사고 집짓고, 그럭저럭 충분하리라는 예상대로,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었죠.”
원주민보다 귀촌 가구가 더 많은 마을
귀촌을 작심한 이후 불과 반년 안짝 만에 집짓기까지 마치고 이사를 했다. 윤태홍 씨의 아내 이숙연(57) 씨가 동지애를 발휘해 한껏 조력한 성과였다지. 이 씨 역시 교사 출신이다. 영어를 가르쳤었다. 부부 교사였으니 연금을 합산하면 쏠쏠하리라. 부부가 보유한 나름의 물적 토대는 귀촌의 돛을 미는 순풍 역할을 했을 테다. 500여 평 부지를 사 번듯한 2층집을 짓는 데엔 처음의 예상대로 아파트 한 채 값이 들어갔단다. 이후 집 뒤편 산자락에 있는 묵정밭을 추가로 사들였다. 날 보러 와요, 라고 어여삐 노래한다. 윤 씨네 집 둘레에 피어난 봄꽃들이 말이다. 봄 아니고 꽃 아니더라도 헌칠한 마을이다. 높고 낮은 산들이 어깨를 겯고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한바탕 춤을 추어대는 그 복판에, 혹은 꽃잎들 환하게 벌어진 그 안통 화심(花心) 부위에 마을이 들어앉았다. 저 아래 초록빛 호수 위로는 아지랑이 아롱거린다. 전쟁이 터지더라도 감쪽같이 무사할 듯 외진 맛이 있는 반면, 볕 바른 양달 일색이라 으슥한 구석 없이 포근하다. 대를 이은 농투성이로 살았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로 흩어져 나갔다. 바야흐로 귀촌·귀농 전성시대라 해야 하나. 지금 이 마을을 이룬 24가구 중 70%가 도시에서 유입된 귀촌 가구들이라는 게 아닌가. 어떤 이들이지? “저와 같은 퇴직자들, 자영업을 하다 들어온 사람, 예술인, 광주로 출퇴근하는 건설업자 등 다양합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더 많아 텃세, 그런 건 없어요. 원주민들 자체가 순후하지만, 다들 편하게 어울려 지냅니다.” “이사 뒤 가장 먼저 공들여 한 일은 무엇이었죠?” “제가 소나무를 무척 좋아합니다. 광주 아파트에 살 때도 화분에 소나무를 길렀어요. 소나무를 바라보면 왜 즐거움이 샘솟을까, 그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그놈들을 애호했어요. 정원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가꾸고 싶다는 염원은 사실 귀촌 동기에 속합니다. 해서, 공들여 소나무부터 심기 시작했어요.” “소나무로 뜰을 둘렀으니 솔향이 은은할 테고, 달빛이 솔가지를 타고 흐를 테고, 수시로 운치를 즐기시겠다.” “소나무뿐일까. 모든 자연 환경이 아름답죠. 그러나 제가 풍경을 즐기는 일에 능하진 못합니다. 낭만적인 성향의 인물은 전혀 아니라서.(웃음)” “그럼 어떤 성향?” “흠. 원만한 성품이랄까? 눈앞에 주어진 일에 단순하게 매달리는 기질이고요, 부지런히 내가 할 일을 찾아 나서는 성격이기도 하죠. 딱히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찾아 열심히 매달리곤 했어요. 귀촌 이후 아로니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죠.” 윤 씨는 800평 규모의 아로니아 농사를 짓는다. 이왕에 사들인 널따란 묵정밭을 그냥 놀리기란 대지의 여신에게 결례되는 일이거니와, 시골의 적막 속에 찻물이나 마시며 도 닦는 사람처럼 고요하게 눌러앉아 지내기란 고문처럼 고역스러워서였겠지. “농원을 보여주실래요?”라고 부탁하자 나른하던 그의 표정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맘껏 즐기는 일상
4월의 아로니아나무들은 미처 깨어나지 못해 둔하다. 윤 씨 홀로 살뜰한 눈매로 나무의 싹눈을 이리 쳐다보고 저리 들여다보고, 마치 현미경으로 박테리아균의 신비한 동향을 살피듯 진지하다. 귀촌 1년 만에 농부로 변신한 그는 3년여가 더 흐른 현재는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텃밭농사도 그렇고 농사라는 거 진짜 재미있습디다. 아로니아 농사에 관한 한 별로 어려울 것도 없더라고요. 워낙 강한 작물이라서요. 병충해에 강하거든요. 극단적으로 농약 살포를 자제하더라도 농사를 망치진 않아요.” “수익성은?” “하향세가 뚜렷해요. 재배 농가가 급증해서죠. 재작년엔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지만 작년엔 반 토막 났어요. 작물 전환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체리나 굵은 대추로 바꿀까 해요.” “선생은 과학을 전공했어요. 농사에도 과학을 적용하시나?” “농사도 응용과학이지 않겠어요? 그 점에서 제겐 농사가 유리하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고집스럽게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없는 처신, 그리고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런 쓸모없는 것들을 경계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따른 주도면밀함과 준비성으로 살아가는 게 좋다고 봐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게 몸에 밴 과학적 실천은 있다고 봅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다탁에 마주앉는다. 그의 아내가 주방에서 다과를 가져와 탁자에 놓고 원래의 자리였던 저편 의자에 다시 앉는다. 말수가 드물다. 그림자처럼 조용한 거동. 묵언수행을 하는 도류처럼, 식물처럼, 시종을 일관해서 고요하다. 말보다 내밀한 침묵의 웅변이란 게 있겠지. 세상에서 할 말을 이미 다해버렸거나, 말이 아닌 은근한 눈빛으로 부부애를 나누기에 숙달됐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부부간에 언쟁이라도 있었나? 흔하디흔한 게 부부싸움이지 않던가. 그러나 윤 씨 말하길, “우리에겐 그 흔한 부부싸움이 아예 없다”고 한다. “부부싸움이 되질 않아요. 왜냐? 집사람이 전혀 대꾸를 안 하거든요.(웃음)” “저런! 남편을 숫제 포기하셨을까?”
“대꾸를 하거나 제동을 걸어봤자 먹히지 않아서겠죠. 때로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섭섭한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천성이 그래요. 소리 없이 남편을 도와주고 믿어주고 챙겨주고, 숨 쉬는 공기처럼 제겐 고마운 존재죠. 제가 그걸 모를 정도의 멍청이는 아닙니다.(웃음)” “귀촌이라는 급격히 바뀐 환경에 남편은 빠르게 적응하는 반면, 아내는 적응이 더딘 경우가 드물지 않죠.” “배려가 필요하겠죠. 상대의 성향을 존중하는 자세 말이죠. 저는 제법 활달한 편입니다. 외부 활동이 잦아요. 반면 아내는 이웃의 단짝 친구와 어울리거나, 집에서 혼자 조용히 머무는 걸 즐겨요. 그런 아내를 위해 도서관엘 자주 들러 소설책들을 빌려다 줍니다.” 배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메마른 공유지를 적시는 단비. 윤 씨의 성정은 담백함이 넘쳐 무색무취에 가깝다. 그러나 아내에게 쓰는 마음은 나긋하거나 촉촉하겠지. 부부가 불화하고서도, 아내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시골생활을 무사히 누릴 묘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귀촌 4년 차. 윤 씨는 더 바빠졌다.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다. 그는 이걸 생동하는 삶의 징표로 본다. “제가 일찌감치 서예와 사진에 열을 냈어요. 이젠 꽤 조예가 생기고 동호인 모임들에도 빠지질 않아요. 귀촌 공부도 여전합니다. 이미 예전에 집짓기 학교나 각종 귀촌 교육 프로그램을 섭렵했지만 지금도 열심히 찾아다녀요. 한문 고전 강독 모임에도 참여해요. 때론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에요. 귀촌에 만족합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비로소 맘껏 즐기며 사니까. 이보다 나은 삶이 어디 있을꼬.” 귀촌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얘기다. 상처가 없는 지평, 자유를.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