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하루살이와 비슷하다지만, 하루라도 온전한 기쁨으로 두근거리며 살기가 쉽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생활도 욕망도 가벼워지면 좋겠지만, 실상은 달라 정반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흔하다. 이럴 때 들솟는 게 변화에의 욕구이며, 시골살이를 하나의 활로로 모색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광주광역시에서 학원 강사로 살았던 강승호(60, ‘지리산과 하나 되기 농원’)의 귀농 역시 활로 찾기의 방편으로 결행되었다.
강승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로 귀농했다. 귀농의 직접적인 동기는 건강 문제였다고 한다. 그는 대입학원의 유능한 수학강사였다. 입시학원 강사란 피 말리는 직업이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혹처럼 붙이고 산다. 그럼에도 과속질주를 습으로 삼았고, 마침내 몸에 이상이 온 것이다.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동안 주력한 건 등산이었다. 백두대간 산행에 몰두하기도 했다. 산이 주는 좋은 에너지와 자연 생태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더라. 긍정적인 가치를 산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아예 산에서 살고 싶더군. 결국 아내의 동의를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처음의 구상은 간결했다. 조용한 산자락에 작은 집 하나 짓고 텃밭이나 일구며 한가하게 살 계획이었으니까. 일에 덜미 잡히지 않아도 좋을, 덜 벌고 덜 소비하는 산골 생활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 북돋아 진정한 만족을 누리고 싶었다. 단순 소박한 삶이 주는 행복을 원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딱히 일 없이 술렁술렁 텃밭이나 가꾸는 생활은 그의 적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단순한 생활이 어디 쉽던가. 채우기보다 어려운 게 비우기다. 일벌레로 살기보다 어려운 게 별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다. 게다가 강승호는 일을 거침없이 벌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적막한 산촌에 들어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백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강승호는 일을 도모하기로 작심하고 약초 농사에 뛰어들었다. 한결 야심만만하게 덤벼든 건 토종벌 농사였다. 하지만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치사율 90%에 달하는 전염병인 ‘낭충봉아부패병’의 기습으로 벌들이 대부분 괴사했던 것. 이렇게 초장부터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밤잠을 설치며 궁리하고 연구해 찾은 대안이 펜션 운영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최상의 무기에 속할 추진력을 발동했다. 초봄이면 와글와글 피어나는 산수유 노랑꽃 화신(花信)으로 세상의 겨울잠을 깨우는 산수유 마을 중에서도 가장 높고 수려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터를 사들여 펜션을 짓고 이사했다.
“펜션에 어울릴 땅을 마련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뒤져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하고 지주를 찾아 매입한 뒤엔 건축 허가 문제를 해결하느라 뛰어다닌 곳이 많았다. 길을 내기 위해 마을 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아낸다든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더라고.”
귀농해서 민박이나 펜션을 차리는 이들이 많지만 실패 사례가 흔하다. 당신의 펜션은 어떤가? 기대치가 있었을 텐데.
“순조롭게 돌아간다. 입지의 자연환경이 좋은 덕분이다. 보다시피 산 중턱에 자리해 조망부터 뛰어나다. 지리산의 풍치를 한눈에 만끽할 수 있는 자리로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얘기를 흔히 듣거든. 미디어에도 수차례 소개되면서 꽤 알려졌다.”
펜션 투숙객에게 인생을 배워
펜션의 성공 관건은 입지 여건에 달려 있다. 강승호는 썩 이상적인 자리를 잡았다. 터전의 저 아래로 높고 낮은 산들이 펼쳐지고, 골짜기로는 농가들이 올망졸망 들어앉아 정겹다. 그는 조경에도 공을 들였다. 널찍한 잔디 뜰과 정원수를 적절히 조합해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물도 있다. 하나는 벼락을 맞고 무 토막처럼 통째로 절묘하게 갈라진 벼락바위. 산 너머 어느 집에서 구해왔다는 이 바위 두 덩어리를 그는 열린 문처럼 배치해 펜션의 상징물로 삼았다. 지하수와 약수, 계곡물 세 가지 식수를 세 개의 수도꼭지를 통해 동시에 비교하며 맛볼 수 있는 샘터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강승호의 재주와 수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어떻게든 펜션 손님들의 흥미와 호감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고객의 뒤치다꺼리로 피곤해지기 쉬운 게 숙박업이다. 강승호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접근했다. 손님들과 요령껏 어울려 산중 생활의 무료감을 달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거다.
“도시와 달라 시골에선 사람들과 교유할 기회가 드물다.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투숙객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귀농 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숙박업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단지 수익 목적으로만 차린 펜션이 아니라는 얘기다.”
민박집을 하다 평생의 벗을 얻는 경우도 있더라.
“손님들의 요구와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는 않다. 주말 밤마다 술 시중꾼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웃음) 그러나 포용해서 함께 어울리다 보면 누구나 마음을 연다. 감동적인 사연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럴 때면 나는 인생을 배운다.”
이를테면 어떤 사연을?
“꽉 찬 예약으로 공실이 없던 어느 날, 어떤 이가 방을 하나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 예약 손님의 양해를 구해 방을 마련해줬다. 알고 보니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더군. 그날이 아내의 환갑날이라며 ‘오늘을 위해 2년 전부터 색소폰을 배웠다’는 게 아닌가. 색소폰을 연주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날 밤 그는 가수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연주했다.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토록 뜨거운 부부애라니! 수십 년을 함께 살아도 부부 사이에 빙하가 흐를 수 있다.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서는 부부간의 유대가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무조건 아내 말을 따르면 탈 날 게 없다. 남자보다 매사에 현명한 게 여자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강승호는 지역에서 잘 알려진 귀농인이다. 이름 있는 기관이 주는 상도 받았다. 유기농으로 지은 산수유를 가공해 현대백화점 명인명촌관에 납품도 한다. 물정도 기술도 모르는 초심자로 귀농했지만 거둔 성과가 한둘이 아니다. 아내 이경영(54)의 조력이 있어 가능했던 성적이다. 처음 귀농 제안을 했을 때 아내는 망설였다. 그러나 긴 고민 없이 동의하더란다. ‘그토록 원하는 귀농이라면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그 한마디 던지며.
‘분산 전략’을 구사하다
강승호에겐 할 일이 많고 많다. 벌여놓은 일이 여러 개라 몸이 닳도록 뛰어야 한다. 펜션에 쏟아부은 땀과 정성도 수북할 테지만, 갖가지 약용작물을 기르고, 찻집을 운영하고, 산수유마을학교를 이끌며, 산촌 유학을 테마로 한 마을사업까지 주도한다. 일복이 터졌다. 열심히 몸 놀려 일하는 것만이 유일한 비법이라는 듯 동으로 뛰고 서로 달린다. 여하튼 그의 귀농은 탕탕 순항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단다.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다. 순탄하게 흘러온 게 아니다. 농산물을 생산해 그대로 파는 1차 농업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가공 판매와 체험 교육까지 접목한 6차 농업을 지향해야 한다. 이게 만만한 일이겠나? 가공 농가가 타산을 맞출 확률은 10% 미만이다.”
귀농 전에 농업 교육은 받았나?
“아니다. 귀농을 하고 나서야 사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거든. 뒤늦게 부지런히 기관을 쫓아다니며 배웠다. 숲 해설사, 문화 해설사 등 자격증도 여섯 가지나 땄다. 이렇게 나름대로 분발해 자리를 잡은 편이지만 경제적 애환도 있었다. 그로 인해 아내와 자식들을 고생시켰다. 이건 귀농 이후 내 삶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일의 규모와 방향을 과도하게 설정한 걸까?
“농촌에 와서 안타까운 건 주민들의 열악한 현실이었다. 나만 편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뭔가 작으나마 주민들에게도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거다. 귀촌이나 귀농을 해서 이웃들이야 어떻든 나만 즐겁게 살면 된다는 생각, 살다가 정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지만 이는 무모하다. 외지인들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지는 건 원주민 농부들일 뿐이다.”
똑똑하고 이타적인 귀농인이 나서서 마을 공동사업을 추진하더라도 벽에 부닥쳐 좌초하는 사례가 많다. 아예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라 조언하는 이들도 있더군.
“그 대목이 참 어렵다. 원주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가 만만치 않아서다. 합리성과 효용성이 명백한 경우에도 색안경부터 쓰는 이들이 있다. 나는 현재 산촌 유학 관련 사회적 기업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으로부터 이미 승인도 받았다. 그러나 부지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주민들이 반대해서지. 귀농인이 선의를 가지고 앞장서도 외지인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이랄까, 원주민들에겐 그런 게 있어 난처하다. 차라리 나서지 않는 게 현명한 처신이라는 견해는 어쩌면 탁견이다.”
귀농을 고려하는 사람들 중엔 ‘아주 작은 농사’로 ‘소확행’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소규모 농사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어 쓸 수 있을까?
“흠, 가능하다. 작물을 길러 가족이 먹고 남는 걸 수시로 로컬 매장에 가져가 손수 팔면 된다. SNS를 통한 직거래도 유망하다. 이 문제엔 관이 나서야 한다. 소규모 귀농 농가 지원을 위한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
강승호는 10여 종의 명함을 지니고 산다. 햐, 그는 문어발식 농업의 선수? 그게 아니란다. 분산 전략이 아니고선 가망성이 낮아 다종다양한 일을 펼쳤다. 지독한 승부욕이 그를 몰아치는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표는 조신하다. “결론은 비우고 살기다!” 무욕으로 진정한 행복을 맛보겠다는 얘기다.
강승호 씨가 주는 귀촌 Tip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함께 귀농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민보다 정착하기 ㅁ더 힘든 게 귀농임을 명심하자.
•원주민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극구 피하라.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게 상책이다.
•작물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자.
•종묘상이나 묘목 상인의 얄팍한 상술에 현혹되지 마라.
•농업기관이 주관하는 농업 교육이나 영농 상담 창구를 적극 활용하자.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디지털 뉴딜’ 시행으로 IT, 인공지능, IoT 등을 접목한 다양한 신직업이 주목받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친환경 이슈가 떠오르며 ‘그린 뉴딜’ 관련 일자리도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중장년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숙련된 경험을 살린다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일자리 시장 대전망’을 주제로 펼친 ‘50+일자리 특별포럼’의 두 번째 세션 토론 내용을 Q&A로 정리해봤다.
토론자
김태은 고용노동부 고령사회인력정책과 서기관(이하 ‘김’)
남경아 서울시50플러스재단 일자리사업본부장(이하 ‘남’)
박가열 한국고용정보원 미래직업연구팀 부연구위원(이하 ‘박’)
Q1. 디지털·탈탄소 사회, 중장년 일자리의 미래는?
(남) 디지털 뉴딜 분야에서도 틈새나 사각지대를 찾으면 중장년의 일자리는 충분하다. 지난 10년은 노동절약형을 강조한 기술혁신하에 일자리를 줄여왔다. 그러나 대전환 시대에는 그 반대여야 한다. 더 노동집약적이고 자원이 절감되는 방식의 혁신이 필요하다. 아울러 한국판 뉴딜의 핵심은 주민의 삶이 중심이 되는 ‘로컬 뉴딜’과 병행돼야 한다. 최근 로컬 모빌리티의 한 사례로 전국 지자체의 공유 자전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가령 서울시의 ‘따릉이’ 누적 회원은 171만 명이 넘고, 대여도 300만 건에 이른다. 이에 따라 공유 자전거 수리공이나 거치대 설치·관리자, 마을 단위 자전거 교육 강사나 수송 인력도 확대될 것이다. 이렇듯 공공의료 분야나 마을 돌봄, 그린 리모델링, 재생에너지 설치·관리, 건강한 먹거리 산업 등의 영역에서 50+세대의 일자리가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박) 디지털 시대에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이 사라진다. 일찍이 육체노동은 자동화 로봇이 대체했고, 최근에는 인지 업무도 인공지능을 활용한다. 이를 일자리의 위협으로 볼 필요는 없다. 역설적으로 새로운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큰 오해는 이러한 디지털 시대에 일하려면 데이터 분석가나 코딩 전문가 등이 돼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이 해오던 일을 어떻게 디지털화할 수 있는지, 또는 얼마나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일로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최근 MIT에서 인공지능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을 발표했다. 그 내용에는 우리가 꺼리고 불편했던 일들을 신기술이 대체하고, 인간은 그 기술을 활용해 더 창의적이고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자리로 확대해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들어 있다. 결국 새로운 일자리는 자신의 현업에서 출발하되, 그에 대해 중장년이 창의적으로 고민할 기회를 주는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Q2. 한국판 뉴딜, 정부 및 기관의 50+ 일자리 계획은?
(김) 고용 관련 한국판 뉴딜의 주요 안은 ‘고용안전망의 확대’와 ‘사람 투자’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인구구조 변화 등에 대응해 신중년 적합직무 고용장려금 지원대상 확대 및 미래적응형 직업훈련 개편, 재취업지원서비스 내실화, 전국민고용보험·국민취업제도 시행 등 고용안전망을 강화할 방침이다. 아울러 50+세대 지원을 위해 디지털 리터러시 해소, 돌봄 능력 강화, 기본 소득 도입 및 중장년 연금 확대, 공동체 일자리 제안 등을 계획 중이다. 사람 투자 측면에서는 자신의 분야에 숙련된 신중년이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하는 동시에 디지털 역량을 학습해 이를 활용하도록 교육과 지원이 이뤄질 예정이다.
(남)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도 그린 뉴딜이 본격화되면 도시재생이나 그린스마트 분야 일자리가 많아질 것이라 예견하고, 이에 발맞춰나갈 계획이다. 2020년에는 스마트시티와 관련해 파일럿 사업을 진행했다. 40명의 참여자를 17개의 스마트시티 관련 기업에 파견했고, 공공 스마트시티의 기획과 운영, 에너지 절감 컨설팅 영역 등에 50+세대의 경험과 역량을 투입했다. 2021년에는 그 규모를 확장할 예정이다. 또 플랫폼 일자리와 관련해 ‘중소기업 공유고용 모델’을 실험했는데, 성과가 좋았다. 중소기업은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는 있으나 막상 채용하려면 인건비 부담이 크다. 이에 같은 고민을 가진 중소기업이 모여 전문가 1인의 인건비를 나누는 방식을 시도해봤다. 50+세대 20명과 협력 기업 5곳이 참여했고, 이후 약 70%가 실제 고용으로 연결됐다. 이를 체계적으로 보완해 질 높은 새로운 노동 모델을 모색할 계획이다. 이 밖에 전국 지자체와 협력해 유휴지를 활용하는 ‘세대 융합 귀촌 모델’이나, 산업안전·돌봄 분야의 ‘50+건설안전감시단’, 취약계층 노인 대상의 ‘HF행복돌보미’ 등도 더욱 확대할 방침이다.
Q3. 50+의 활약이 기대되는 일자리 분야는?
(남) 최근 지표들을 보면, 50+세대는 디지털 시대 전환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 중이다. 지난해 시니어 1인 미디어 생태계 창출을 위해 ‘50+ 유튜버 스쿨’을 열었다. 10팀을 선발해 집중적인 실습과 교육을 해보니 그중 40%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두 달간 구독자가 4배 증가했고, 수익은 10배를 창출했다. 이는 관련 전문가들도 놀라움을 표할 만큼, 50+세대의 디지털 잠재력을 보여준 사례다. 아울러 청년과 노년을 잇는 세대로서 노노케어, 멘토링 등의 분야에도 적극적인 참여가 기대된다. 퇴직 후 5~10년 정도 지역에 내려가 ‘세대융합 귀촌모델’을 만들거나 지방 정부와 연계한 ‘귀촌 인턴십’ 참여도 가능하다. 나아가 국제무대에도 중장년이 활동할 기회는 충분하다. 가령 코이카(KOICA)가 가진 개도국 경제성장을 위한 조달기금은 연간 약 1조8000억 원이다. 이러한 자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나누고 지원하느냐에 따라 50+세대가 진입할 통로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박) 디지털 기술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 생태 환경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모색해볼 수 있다. 먼저 저출산·고령사회로의 인구구조 변화와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로 질 높은 돌봄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확대될 전망이다. 디지털 기술을 업종별 비즈니스 요구에 맞춰 개발하는 과정에서 경력을 겸비한 50+세대의 조율자 역할에 대한 기대도 높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뿐만 아니라 세대 간 융합을 도모하는 사회·문화적 포용력이 요구된다. 더불어 저탄소·친환경 사회로의 변화 속 도시재생 사업, 스마트팜 구축, 신재생 관련 제품 서비스 개발에도 도전해볼 수 있다. 또한 앞서 언급된 바처럼 1980~90년대의 경제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과 상호 호혜적으로 발전 가능한 국제무대에서의 일자리 창출도 꾀할 수 있다.
“야야, 이제 인생을 즐길 나이에 어쩌자고 고생길을 자청하니?” 이해숙(55, 괴산애플랜드 대표) 씨가 처음 귀농을 결심했을 때 친구들이 했던 말이 이랬다. 이후 9년 세월이 흘렀다. 해숙 씨는 그간 농원을 가꾸고 키우는 일에 모든 열성을 쏟았다. 잠자는 시간 외엔 오로지 일에 폭 파묻혀 살아왔다. 덕분에 이제 어지간히 기반이 잡혔다. 그러나 친구들의 촌평엔 여전히 개탄이 실려 있다. “아이고야 나 못살아, 언제까지 이 고생을 계속하며 살 거야?”
친구들이 보기에 해숙 씨의 전공은 과수 농사라기보다 ‘고생’이다. 고생의 정체를 궁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마침내 고생의 끝에 이르러 득도에 맞먹을 성취감을 맛보고자 하는 인간 유형의 본보기. 남들이 읽는 해숙 씨의 양상이 그쯤? 고생에 치여 나동그라지기는커녕 묵묵한 인내와 투지로 노동의 나날을 견디는 걸 바라보며, 뭔가 이색적인 운명의 농간에 빠진 자의 짠한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해숙 씨는 주변의 감상평에 무심하다. 그녀의 과도한 고생살이가 현재진행형임은 자명한 진실이거니와, 문밖에서 기다리는 일감이 첩첩해 서푼어치 가치도 없는 잡념에 사로잡힐 시간이 없다는 게 아닌가. ‘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게 그녀의 슬로건인가보다. 일하고 또 일하는 노역의 순환으로 점철되는 나날에서 무슨 오붓한 재미를 보랴. 그러나 고생스러운 일을 통한 전진의 실감과 삶의 생동감에 안도하며 그녀는 오늘도 농장에서 동분서주, 날다람쥐처럼 바지런히 내달린다.
애초 귀농을 먼저 제안한 건 동갑내기 남편 심명수 씨였단다. 명수 씨는 서울에 있는 유명 광고기획회사에서 근속했던 인물. 그는 머잖아 닥쳐올 은퇴 이후의 인생 2막을 귀농으로 열어젖히길 결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내의 의사를 타진했고 해숙 씨는 즉각 찬동했다. 세상의 아내들은 대체로 귀촌과 달리 귀농엔 호의적이지 않다. 질색팔색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남정네들은 아내를 구워삶기 위한 설득과 회유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부부 동행의 귀농을 간신히 실현한다. 그러나 해숙 씨는 선뜻 공감했다. 귀농의 어떤 매력을 봤기에?
“내가 시골 출신이다. 시골생활에 충분히 익숙하며 좋은 기억들도 많았지. 결혼 이후 죽 서울에서 살았으나 자주 시골생활이 그립더라. 귀농을 해 된장, 고추장 같은 걸 만들어 팔며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노후를 상상하자 호감과 용기가 생기더라고. 귀농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농원 규모가 엄청나다. 이 너른 언덕배기 토지를 어떻게 확보했지?
“시부모님이 남편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전답과 임야로 이루어진 1만8000평짜리 터로 이 가운데 1만 평을 과수원으로 개간해 운영한다. 복숭아도 꽤 많이 심었지만 사과 재배에 주력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농원 일대의 풍광이 아름답다고 팔짝팔짝 뛰더라. 정작 나는 풍경을 즐길 시간 여유조차 없는데.(웃음) 귀농, 이거 정말 장난 아니다.”
사과 농사를 선택한 이유는?
“사과 농사에 관심이 없었지만 남편이 주장해 정했다. 난 원래 장류(醬類) 사업을 하고 싶었거든. 그래, 당신은 그럼 사과를 생산하시오, 난 장을 담그겠소, 그리 절충을 하고 일을 시작했으나 사과 쪽 일이 압도적으로 커지면서 장 담그기를 포기했다.”
처음부터 모든 작업을 손수 처리해왔다고 들었다. 아마도 숲과 묵정밭 일색이었을 터를 이렇게 근사한 과수원으로 바꿔놓다니. 수완이 대단하다.
“최대한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건비를 아껴야 했으니까.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사과나무 전지를 남들에게 맡길 경우 대충 1200만 원쯤의 인건비가 나간다. 이걸 아끼기 위해 자력으로 전지하는 거다. 아이고, 오직 일에 붙들려 산 세월이었다.”
단숨에 도약할 수 없는 게 농사
전지뿐이랴. 초기의 토목공사부터 애환의 연속이었다. 사과나무 묘목 식재부터 적뢰(꽃봉오리 솎아내기), 적화(꽃 따주기), 적과(열매 솎아내기), 거름주기 등등 수확을 보기까지의 모든 과정 어느 하나도 초심자에게 쉬운 게 없었다. 농사 요령을 배우기 위해 농업기술센터 등을 찾아가 배운 곳도 많았고, 쫓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한 사람도 많았다. 귀농 이전에 책자를 통해 농사 이론을 섭렵했으나 현장의 실제는 이론과 사뭇 다르더란다. 해서 시행착오를 거듭한 바람에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귀농 선배의 조언에 다시 맞붙을 용기를 회복하기도 했다고.
“사과 농사로 성공한 선배의 체험담에서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농사라는 게 단숨에 도약할 수 없는 직종이라는 것, 초기의 시행착오가 많으면 많을수록 얻어지는 경험이 많아 결국은 성장 자산이 된다는 것, 이처럼 평범한 충고가 절절하게 가슴을 치며 힘을 주더라. 귀농해서 참혹한 실패를 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도 있다는 걸 알고 새삼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귀농인들의 현실에 밝을 것 같다. 고전한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가?
“대체로 다들 시행착오를 겪는 것 같다. 오랫동안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고비에서 견디지 못하고 추락한다. 작물 선택을 잘못해 갈아엎으며 막대한 손실을 입기도 하고, 판로 측면에서도 흔히들 고뇌한다. 가장 위험한 건 적자 누적으로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는 상황이지. 이래저래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게 농업이라고 본다.”
그러한 농업의 실태를 귀농 이전에 미리 파악해둔 게 있었나?
“만만치 않은 도전일 거라는 짐작은 했지.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충분히 예상했던 거다. 그런데 귀농을 해 실제로 겪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더군. 한마디로 겁 없이 뛰어들었던 셈이다.”
후회한다는 뜻?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며 살지? 이런 회의는 아직도 가끔 찾아오지만 이건 후회와는 다른 감정이다. 후회가 있었다면 견디지 못했겠지. 자청해서 시작한 귀농이니 모든 시련을 기꺼이 감수하자는 의지만큼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끈질긴 근성, 나에게 그런 건 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몸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 그리고 자금난이었다. 자금 문제는 특히나 버거웠다. 농장의 규모가 있어 초기 투자자금이 많이 들어갔거든. 집을 짓는 데에도 큰돈을 썼다. 이 모든 자금을 서울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 충당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빠듯해 남편이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농장 유지를 위해 그의 월급이 필요했으니까.”
전략적인 귀농? 스마트한 협업? 해숙 씨 부부는 자금 조달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미리 방책을 강구하고서 귀농에 착수했던 것이다. 아내가 먼저 산골로 들어가 농장을 개척하고, 남편은 서울에 남아 돈벌이를 해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 조직적인 분업 시스템은 길게 이어지다가 작년에 이르러서야 종료됐다. 즉 이 부부는 귀농 9년의 세월 중 8년을 주말부부로 지낸 뒤 합류했다. 다시 말하자면 귀농 8년간은 해숙 씨가 사실상 농장을 주도적으로 도맡아 끌어온 셈. 그러하니 그간의 행장이 비범하다 할 수밖에. 그녀의 맹활약엔 경계가 없었을 터이며, 허리가 휠 근로의 양은 상식을 초월할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고, 당나귀 같은 우직한 뚝심으로 넘어선 시련의 수효가 많고 많았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부부싸움할 시간조차 없어
돋보이긴 남편 명수 씨 역시 마찬가지. 그는 서울의 직장에서 일하다가 금요일 밤이면 부리나케 내려왔다. 그리고 토·일요일 양일간 어두워질 때까지 맹렬히 농장일을 하고선, 월요일 새벽에 다시 직장으로 달려가길 8년간 반복했다는 게 아닌가. 무언의 상호충성 동맹이라도 맺었던가. 부부는 레이스를 펼치듯 경쟁적으로 각자의 일에 매진해온 것 같다. 이를 하나의 절경으로 본들 무슨 무리가 있을까. 명수 씨는 요즘도 일하고 또 일하는 게 비법이라는 양 쉼 없이 열일을 한다. 가혹한 근로에 허리디스크를 안고 사는 신세가 됐으나 아랑곳없다. 해숙 씨도 류머티즘 관절염을 갖고 있으니 이 역시 노동의 강도를 반증한다. 농장이 요구하는 노동량의 극대치를 완수하며 살았으니 하늘 아래 부끄럽지 않을 부부가 여기에 있구나. 그렇다면 그 결과는?
“아직 멀었다. 그러나 이젠 궤도에 올라섰다고 판단한다. 과수원의 기틀이 완성됐고, 기술력이 늘어 사과 품질도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골 소비자가 증가하는 추세이고, 사과 체험 프로그램도 활성화되었다. 해마다 매출이 점진적으로 늘더니 올해는 드디어 흑자 국면에 접어들었다.”
작년까지는 죽 적자를 봤다?
“그렇다. 일반 작물과 다르게 과수 농사는 묘목 식재 뒤 최소 3년 뒤에야 과일을 딸 수 있다. 그간의 부진한 채산성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단순히 적자를 기록했다기보다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투자를 거듭해 기반을 다져온 기간이었으니 이는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본다.”
농사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아무리 그렇더라도 근 10년이 지나고서야 첫 흑자가 나다니 말이다.
“그동안 불안감에 자주 사로잡히곤 했다. 정확한 통계인지는 몰라도 전체 사과 농가의 단 5%만 안정적인 흑자 구조를 누린다는 얘기엔 아찔하더라. 그런데 이거 아시나? 가만히 쪼그려 앉아 고민하고 있을 짬조차 없는 게 농장일이라는 거. 심지어 부부싸움으로 으르렁거릴 시간조차 없더라고.(웃음) 종일 일하고 밤엔 곯아떨어져 잠자느라 여유도 여념도 없이 살았던 거다. 어휴, 주저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내일 하루 당신에게 완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지?
“농장을 비워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마음 편히 벗어나겠나. 비가 내리기만 해도 불안해지더라. 일을 멈춰야 하니까. 일을 못하거나 일에 대한 성과가 없으면 난 허탈해 풀이 죽는다.”
마르크스였던가, 일에만 붙들려 사는 인생은 노예와 다름없다고 말한 이. 그러나 이와 같은 ‘썰’을 해숙 씨에게 적용하기엔 좀 무기력하다. 비록 고역스러울망정 그녀는 일이 싫지는 않은 자발적 일벌레이지 않은가. 일 속에 묻혀 있을 때라야 안심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런 심리가 이해되는 게 그녀의 목적이 일 자체가 아니라 일로 거둘 수 있는 ‘성과’에 있기 때문이다. 성과가 누적되면 비상할 수 있는 것. 해숙 씨는 비상하고 싶다. 도달하고 싶다. 어디에? 튼실한 기업형 관광농원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숙원. 그녀는 이를 기어이 성취하고 싶은 것이다.
“나에겐 성취욕이라는 게 있다. 원하는 걸 반드시 이루어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다는 거. 바라건대 농원을 열심히 가꿔 자식 놈들까지 합세한 복합관광농원으로 성장시키고 싶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간 사과 농사 외에 다른 일들에도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어떤 일들?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배울 만한 기술은 거의 다 배웠거든. 수제맥주, 퓨전 떡, 빵, 천연식초, 전통주 등등 필요하다 싶은 제조기술은 모두 습득했다. 최근 캠핑장을 조성하고 있으며, 페스티벌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목표를 향해 나름 질주하고 있는 거다.”
당신의 열렬한 노동과 공부에 경이를 느끼지만 굳이 그렇게 자신을 혹사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궁금하다. 복합농원을 일궈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부(富)를 쌓고 싶나?
“돈의 노예로 사는 인생처럼 초라한 게 다시 있을까? 복합농원을 일구려는 이유? 말했지 않나. 난 성취욕이 강한 여자라고.(웃음)”
단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이루고 싶은 건 여하튼 이루고 가겠다는 얘기이겠다. 그러자면 투쟁과도 같은 투신이 필수. 목표 성취를 위해 그녀는 일단 노동을 삶에 입장시킨 대신 종래의 안이한 관습들을 추방했다. 귀농 고생살이도 이쯤이면 내공 쌓기 수업?
이해숙 씨가 주는 귀농 Tip
•사전 계획과 준비에 철저해야 한다.
•귀촌이든 귀농이든 목적을 분명히 정한 뒤 그게 합리적인지를 다시 점검하라.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게 시골생활이니까.
•투자 여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섣불리 대규모 과수 농사에 뛰어들지 말자. 부부가 경작할 수 있는 과수원의 적정 규모는 약 3000평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시골 텃세에 미리 겁먹을 것 없다. 오며가며 인사만 잘해도 교류 물꼬가 트이니까.
•일단 귀농을 했다면 쉽게 포기하지 말자. 어떤 식으로든 고비는 오게 마련이고, 시행착오도 결국은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걸 유념하라.
시골에 내려가 민박집이나 펜션을 운영하는 이가 많지만 뜻대로 순항하는 사례가 드물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이정형(60, 희양산토담펜션 대표) 씨는 불운한 운명이 도래한 걸 깨달은 사람처럼 심오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기어이 펜션을 짓겠다고 기세를 돋우는 남편 강인구(66) 씨를 보기 좋게 꺾을 묘한 수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형 씨는 실패했다. 그녀가 아는 인구 씨는 좀 과장하자면 지구인 77억여 명 가운데 가장 끔찍한 옹고집쟁이. 결국은 남편이 이겼다. 정형 씨는 실의와 불안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잉, 이게 웬일? 펜션 사업이 썩 순조롭게 돌아가는 게 아닌가.
정형 씨가 반기를 든 건 펜션 문제에서만은 아니었다. 인구 씨가 귀농을 제안했을 때부터 열렬한 반대운동에 나섰으니까. “혼자 내려가시옵소서!” 처음엔 그리 심드렁히 답하는 걸로 기선 제압을 도모했다. 하지만 애당초 한 번 먹은 뜻을 쉬 굽힐 남편이 아니었다. 지구별에 존재하는 동종 옹고집들의 빛나는 자존심이 걸려 있다는 투로, 인구 씨는 불퇴전의 고집을 부려 마침내 아내를 대동하고 귀농을 실현하는 혁혁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포성이 지축을 흔드는 전쟁은 아닐망정, 나름 지능적이고 조직적인 전략이 아니고선 승리할 수 없는 게 부부싸움이다. 인구 씨는 그간 축적한 투쟁 자산 혹은 고집의 막강 위세를 총동원해 성공, 어쩌면 가족사에 길이 남을 치적(?)을 세운 건지도 모른다.
물론 인구 씨 입장에선 누구에게나 지지받기 어려운 서푼짜리 생고집을 부린 게 아니었다. 어엿한 합리에 기반을 두고 귀농을 선창했으니까. 반평생 근무했던 주방기구회사에서 은퇴한 그는 ‘어서 오라!’ 속삭이는 시골의 유혹을 물리칠 길이 없었다. 은퇴자의 쓸쓸한 삶의 오후를 견디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편의점 삼각김밥과 저지방우유를 사들고 서울의 여기저기 공원이나 야산을 배회하다 해 저물면 털레털레 귀가하는 나날들. 그는 자신의 모습이 늙은 거북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한심했으며, 마침내 영혼까지를 다한 고뇌와 모색을 하다 고향으로의 귀농을 발상했던 것이다. 외로이 홀로 계신 고향집의 노모님도 모시고, 놀려둔 농토로 일감을 만들고, 아내와 둘이 전원의 낭만도 즐기고, 이래저래 귀농보다 더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노후 대책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니, 여기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아내 정형 씨는 왜 귀농에 반기를 번쩍 들었나. 보나마나 생고생할 게 빤해서였다. 날마다 풀이나 뽑다가 손가락 관절염에 걸릴 테고,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어쩌다 한두 번이지 허구한 날 올려다보자면 뒷목만 뻐근할 테고, 마트나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대신 죄 지은 것 없이 시골집에 얽매이는 옥살이를 해야 할 게 아닌가. 게다가 모기나 파리 따위 해충은 또 어떻고? 최악의 경우, 집 안으로 스며든 뱀이 소파에 똬리를 틀고 앉아 TV 시청을 하는 엽기적 정경을 목도할 수도 있는 게 시골생활이다. 이래저래 정형 씨는 귀농하자는 소리를 듣는 순간 오만정이 떨어졌던가보다.
“남편에겐 어머님을 모실 수 있는 낙향이자 귀농이라는 좋은 뜻에 의한 결심이었겠지만 나는 절대적으로 반대를 했다. 그러나 도저히 이길 수 없더라. 결국은 꾹 참고 져줬다. 이런 내가 시골생활 대비 차원에서 준비한 건 운전면허증을 따둔 거 하나였다. 운전을 할 줄 알아야 답답할 때 바람이라도 쏘일 수 있을 거라서.”
사생결단의 각오로 펜션 사업 반대
정형 씨 내외가 여기 문경시 가은읍 산골로 귀농한 건 2016년 초. 내려오자마자 남편은 벼농사를 시작하더란다. 벼농사에 덤벼든 속도보다 더 신속하게 착수한 건 펜션 짓기였다. “우리 펜션이나 해보더라고!” 그렇게 툭 던져놓고 산 아래 논의 일부를 터로 다져 건축에 나섰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초고속 질주였다. 이쯤이면 인구 씨의 특기가 고집부리기 맞나? 그게 아니라, 가령 필요하다면 뒷산도 헤딩으로 부수고 나설 슈퍼 울트라급(級) 박력의 보유자라 봐야 하지 않을까. 여하튼 파랗게 질린 정형 씨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금 투쟁 전선에 나섰다.
“이번엔 사생결단을 하고 반대를 했다. 펜션은 무슨? 기어이 저지하고 말리라! 꽤나 독을 품었던 거다. 그러나 또 졌다. 원통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웃음)”
펜션을 왜 반대했지? 잘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잘될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나? 아무리 날고뛰더라도 자리 잡히기까진 고전할 게 분명해보였던 거다. 게다가 자금 사정도 변변치 않았거든. 건축비 외에 운영비도 많이 들어갈 텐데, 그러고 나면 밥은 뭐로 먹고? 근심과 불안이 아주 많았다.”
부군의 펜션 사업 착수가 충동적인 건 아니었겠지?
“나 몰래 충분히 구상해온 것 같았다. 건축의 초벌 설계까지 직접 해서 설계사무소에 맡긴 걸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펜션에 꽂혔다는 걸 알겠더라. 남편이 뭐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무슨 일을 해서든 가족들 밥은 굶기지 않을 남자다.”
봄에 펜션 건축을 시작해 여름에 오픈했다지? 일사천리로 진도를 뺐구나.
“양가 형제들이 많이 도와줘 일이 순조로웠다. 남편이 건축을 주도하는 사이에 나는 부지 곳곳에 꽃을 부지런히 심었다. 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전에 아파트에 살면서는 꽃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귀농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라곤 개울에 나가 다슬기를 줍거나 꽃을 심는 방법밖엔 없었거든.”
드디어 펜션을 오픈한 뒤엔 어땠나? 손님이 얼마나 오던가?
“처음엔 지인들만 간간이 왔다. 그러다가 차츰 문경 지역을 여행하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주말에 좀 들어오더라. 이듬해 3, 4월에도 비슷한 추세였다. 5, 6월엔 거의 찾는 이가 없어 객실이 늘 비었다. 그런데 7월 말쯤부터 2주 동안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방 여덟 개가 다 찼다. 아하, 이게 성수기라는 거구나! 여름 한철 장사로 1년을 먹고사는 게 펜션이라는 얘기가 실감으로 다가오더군. 이후 손님이 꾸준히 늘어 초기의 불안감에서 성큼 벗어날 수 있었다. 상당히 빠른 성장 속도로 자리가 잡혀나간 셈이다.”
예상보다 빠르게, 기대보다 흡족하게 안도할 만한 상황이 펼쳐졌다는 얘기다. 매우 따분한 날들이 오래 이어질 수 있다는 걱정이 많았으나 정반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걸 보며 정형 씨는 비로소 재미와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처음의 격렬했던 반대 시위의 기억을 내심 멋쩍어하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 비수기를 제외하고는 무자비한 불황에 진저리를 칠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닌가. 펜션 개업 만 4년이 지난 현재, 해마다 점증한 손님의 수효로 이미 궤도에 올라섰다. 재방(再訪) 비율은 무려 90%. 한 번 찾아왔던 고객 대부분이 다시금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미 탄탄한 단골층을 형성했으니 귀농 성공사례라 쳐도 무방하겠다.
고객들 위해 심은 배추 500포기
이와 같은 일련의 성취는 거저 굴러들어온 행운의 산물이 아니다. 비결이 무엇일까. 우선 정형 씨네 펜션이 들어앉은 자리의 경관부터가 빼어나다. 낮에는 물론 달빛 부서지는 오밤중에도 장엄한 암봉을 허옇게 드러내는 명산 희양산이 지척에 있어 상서로운 느낌을 주는 곳이다. 반딧불과 가재가 서식하는 맑은 개울이 펜션 앞을 흐르니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물에 들어가 놀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야산들이 주는 싱그러움과 적당한 적막감 역시 도시에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보듬어준다.
그러나 이 모든 수려한 자연 경관보다 펜션의 쾌조에 더욱 기여한 건 정형 씨 부부의 노력과 수완이다. 인간사의 인과(因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엔 막막했다. 그저 청결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객실 청소를 비롯한 미화 작업에 만전을 기했다. 특히 내가 꽃을 많이 심었다. 부지가 넓은 편이라 꽃밭, 꽃길 외에 텃밭 공간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 유용했다. 거기에 온갖 야채를 심기 시작한 건 손님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마케팅 전략으로?
“그저 우리 집을 찾아준 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뜻으로 고객들에게 야채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내놓고 보니 그 소소한 선의의 표시가 고객의 환심을 자연스럽게 유발하는 효과를 나타냈다는 걸 알겠더라. 누구나 필요한 만큼 야채를 채취해 가져가도록 했다. 아침이면 방방마다 옥수수나 감자를 쪄 돌리기도 했다. 얼마 전엔 배추 500포기를 심었다. 모두 손님들을 위한 물량이다.”
이 펜션은 작은 놀이동산 같은 구색을 갖추었다. 왜 이렇게 꾸몄지?
“영업을 시작하고 얼마쯤 지나 고객층의 경향에 특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린 자녀를 대동한 30, 40대 부부들이 주로 투숙했으니까. 그래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공간과 시설을 보강했다. 작은 수영장을 만드는 식으로. 텃밭 체험에도 아이들은 신나했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장치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아이들에게 안성맞춤의 공간으로 입소문이 난 모양이다. 도시의 한정된 공간으로부터 아이들을 해방해 한때나마 자연 속에 풀어놓고 싶은 젊은 부모들. 정형 씨는 그들의 니즈에 적극 부응했으며, 그게 펜션의 안정세를 북돋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면 줄수록, 마음을 쓰면 쓸수록 돌아오는 것도 많은 게 인간관계다. 그러다 보면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잘나가던 영업집들이 도중에 망가지는 게 그 욕심 때문이지 않던가.
“초심을 유지하게 위해 자제한다. 돈 냄새 풍기지 않는 영업집을 지향하면서. 우리 부부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일이 고되지만 그저 즐기자. 무리할 거 없다, 그냥 먹고사는 정도에서 만족하자!’ 지금 무난하다고 앞으로도 잘될 거라 방심하지도 않는다.”
어려운 점도 많을 테지?
“좋은 접객을 위해서는 친밀감을 자아내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내겐 그게 쉽지 않았다. 서비스가 지나쳐 오히려 손님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닐지 고민도 많이 했다. 컴맹이었던 내가 뒤늦게 블로그를 배워 펜션 이야기를 올리는 일도 만만치 않아 진땀을 뺐다.”
시골에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가?
“펜션 사업이란 게 쉽지 않다. 이곳 주변의 펜션들 대부분이 부진하거나 사실상 휴업 상태에 놓여 있다. 권장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수월했지만 투자비도 많이 들고 부대비용도 수시로 발생해 고난에 빠질 수 있다. 오직 돈벌이를 목적으로 뛰어들 경우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당신은 처음엔 귀농을 결사반대했다. 이젠 귀농에 호의적일까?
“내가 귀농으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마음의 여유다. 도시에서와 달리 느긋하고 편안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좀은 변했거든. 그러나 여자의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시골이 도시보다 좋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손발 걷어붙이고 진흙탕에도 뛰어들어야 하는 게 귀농생활이다.”
이왕지사 시작한 일, 죽이 될지 밥이 될지 몰라도 일단 최선을 다해 한번 가보자. 정형 씨는 그런 심정으로 진력했다.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고 진지하게 관여했다. 정형 씨 내외가 그간 쏟은 땀의 총량이 몇 톤에 달할지는 저 고매한 희양산 바위봉이 알려나. 그런데 정형 씨의 펜션이 궤도에 오른 가장 큰 비결은 스스로 선의를 끌어내는 힘에 있는 게 아닐까.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기 이전에 나의 선의로 먼저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능력의 진실. 이는 단지 펜션 운영에만 적용될 공리이랴. 타인을 찍어 누르고서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미신마저 횡행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기법일 수 있다. 그나저나 정형 씨는 아직도 단단히 벼르고 있단다. 남편의 고질적인 옹고집을 단 한 번이라도 와지끈 무너뜨리기 위해.
“어휴, 단 20분만 같이 있어도 혈압이 오른다. 선의도 통하지 않더라. 남편 성질이 불이거든. 늘 내가 패하고 마는 거다. 언젠가는 한 번쯤 이기고 말겠다는 결의를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하하하.”
정형 씨가 주는 귀농 Tip
•무작정 내려왔다가 시행착오로 고통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 미리 귀농·귀촌 교육을 받는 등 충분한 사전 준비를 하자.
•마을과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거처를 마련하자. 그게 차라리 원주민들과 더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방법이다.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펜션을 구상한다면 무엇보다 위치 선정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일단은 경관이 좋은 곳이어야 승산이 있다.
•인근의 귀촌·귀농인들과 긴밀히 사귀자. 단 한 사람하고라도 우정을 나눌 경우 시골생활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크게 덜 수 있다.
안녕, 시골아, 드디어 내가 너에게 왔노라! 그에겐 그렇게 흐뭇한 인사말을 읊을 겨를이 없었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사업을 하다 귀농한 김열홍(60) 씨. 그의 귀는 얇은 귀였나? 그는 “농지며 집이며 거저 쓸 수 있으니 몸만 오라”는 지인의 달짝지근한 권유를 받고 설레어 달려 내려간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상황이 영 달랐단다.
믿었던 사람에게 된통 당한 셈이다. 그러나 열홍 씨는 부아를 가라앉히고 얌전히 눌러앉기로 작정했다. 속인 건 지인이지만 홀린 건 나 자신이지 않은가, 내가 나에게 속은 꼴이지 않은가, 남 탓할 것 없다! 그냥 그렇게 여기고 후루룩 상황을 넘어서기로 했던 모양이다.
약간 요상한 귀농 시발이었다. 진즉부터 시골살이에 뜻을 두었기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왕 내친김에 한바탕 열심히 뛰어보기로 다짐하자 새삼 흥미가 동했던가보다. 한 방 얻어맞고서야 귀농에 본격적인 발동이 걸렸던 거다. 이렇게 뒤늦게 엄청 진지해진 열홍 씨, 일단 도시에 있는 부동산을 싹 처분해 7억 원쯤의 귀농자금을 만들었다. 그건 그가 믿을 만한 가장 유력한 ‘실탄’이었다.
돈을 일컬어 ‘요물’이라고도 하고 ‘웬수’라고도 하지만, 그는 비장하게도 ‘실탄’이라 부른다. 내가 쥔 자금이 떨어지면 성벽을 넘어 거침없이 돌진해오는 세파의 기총소사에 대응할 길이 없다는 인식에서다. 그래 실없이 실탄을 낭비하지 않고 가급적 효율적이고도 참신한 전투에 임하기로 결심한 병정처럼, 열홍 씨는 최대치의 슬기를 발휘해 자금을 잘 운용하기로 하고 귀농열차를 집어탔던 것이다.
그 결과는? 귀농 10여 년이 흘렀으나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건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에 따져볼 사안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귀농생활에 인생의 모든 것을 쏟기로 결정했으며, 실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다고 자부하기 전에 도출되는 대차대조표는 잠정적인 결과물에 해당하거나 무의미한 문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이란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3도 화상을 입으며, 또는 자주 뒤집어지며 익어가는 빈대떡과 이웃사촌. 용을 쓰더라도 엎치락뒤치락, 삶이란 굴곡과 파란으로 점철되는 꽤나 허무맹랑한 레이스라는 걸 그도 잘 알지 않겠는가. 일희일비하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리라! 이게 열홍 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의 추세라는 게 있을 텐데, 한마디로 오랫동안 주로 죽을 쑤었다.
“귀농에 만족하느냐고 내게 묻지 마라. 그 답을 나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웃음) 때론 만족스럽다가도 때론 힘겨워 불만스럽다. 이곳에 자리 잡은 게 11년 전인데 5~6년 동안은 수익이 아예 나질 않더라고. 해마다 적자였지. 그럼에도 투자를 계속해왔다. 규모를 키우는 게 난관을 돌파할 길이라 판단하고서였다. 그러면서 ‘실탄’을 꽤나 허비했다. 다행스럽게도 4~5년 전부터는 ‘똔똔’이거나 약간의 흑자가 나고 있다.”
그는 처음 한동안 고추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를 보고 2000평 규모의 사과농장을 조성해 공을 쏟기 시작했다. 10여 마리에 불과했던 한우도 70여 마리로 늘려 사육하고 있다. 실로 모처럼 쏠쏠한 흑자를 본 작년의 경우, 사과로 올린 매출액이 5000만 원 정도. 이 가운데 60%쯤이 순수익이란다. 한우 사육에서도 비로소 자금회전이 시작되고 있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자칫 적자를 보는 일에 도통하기 십상인 게 농업이다. 그렇다고 꼭 그러라는 법이 있겠나. 매사가 썩 이상하게 돌아갔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성난 얼굴로 현실을 돌아보길 거듭했으며, 활로를 찾기 위해 몸과 머리를 아낌없이 써왔던 것 같다. 염소 털처럼 허옇게 쇤 그의 턱수염은 분투의 소산일 게다. 그 결과 서광이 들이쳤나?
“이제 웬만히 자리가 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간 애환이 많았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나날들이었지. 공연히 거액의 자금만 날리기도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귀농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내려왔다는 데에 있다.”
준비한 건 오직 자금뿐이었나?
“그렇다. 호밋자루 한 번 손에 쥔 경험이 없는 문외한이 겁 없이 농사에 덤벼든 꼴이었다. 뭐든 잘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거든. 이게 오산이었다. 기술 없이 농사에 뛰어들었으니 노력을 해본들 쉽게 풀릴 일이 아니더라. 뒤늦게 농업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1년 과정의 한우대학도 수료했다.”
귀농은 왜 했지? 목적이 뚜렷했다면 사전 준비도 부실하지 않았을 거 같아 묻는 얘기다.
“조용한 시골에 나만의 작은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낭만적인 꿈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 원하는 집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농사 노동으로 떳떳한 시간을 보내고, 가끔 하루 이틀쯤 자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뭐 그런 소박한 기대가 있었으나 아직 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사실 인간사에 낙원이 어디 있겠나. 감상적으로 살 일이 아니더라.”
농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돈벌이가 목적이라면 도시를 떠나지 않았겠지. 사업이 괜찮게 돼 가만 있어도 통장에 돈이 늘어나는 상황이었거든. 그런데 인생에는 돈벌이보다 중한 게 있지 않던가? 내 마음이 흘러가는 곳에 살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이게 좋은 인생이지 않을까. 난 귀농을 통해 한결 나은 삶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귀농보다 귀촌이 이상적이지 않았을까? 텃밭 농사 정도나 하며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귀촌 말이다. 당신은 독신이다. 7억 자금이면 놀면서 슬슬 까먹어도 평생을 살 수 있을 게 아닌가.
“아하.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내는 무위도식은 내 적성에 맞지 않다. 일과 맞부딪쳐 뭔가 보람을 끌어낼 게 없는 생활에 무슨 활기가 있겠나, 무슨 재미가 있겠나.”
비록 고행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농업이 지닌 매력과 흥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더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에겐 피땀 흘려 생산한 사과가 팔리지 않아 숭숭 썰어 소 사료로 주는 식의 환장할 만한 혼선이 잦았다. 그러나 농사는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자유 직종이라는 것, 이상과 자질을 마음껏 실험하고 교정할 수 있는 인생교실이라는 것, 게다가 정년이 없어 무기력한 노년을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등, 열홍 씨는 농사가 지닌 긍정적 속성에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가령 농산물이 안 팔리더라도 남 탓을 할 게 없다. 모든 게 나의 능력, 기술, 전문성의 여부에 따른 결과물이기 때문이지. 그러고 보면 농사란 가장 자립적인 형태의 직업이다.”
그는 ‘모든 게 나의 문제’라는 걸 자주 자신에게 세뇌하며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자기학습의 효과는 커 그를 좀체 실의에 잠기게 하지 않는다. 농사로 맞닥뜨리는 난관이 이를테면 어떤 외부의 흉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한숨과 낙담에서 신속하게 벗어날 수 있는 힘과 깡을 끌어내는 것 같다. 저 잘난 농업정책의 협찬이나 선한 이웃의 과도한 헌신을 기대하는 따위도 그의 본성에 맞지 않아 남세스럽게 여길 따름이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
그런데 열홍 씨가 직면한 넘어야 할 산은 농사만은 아니라는 점을 얘기해야겠다. 그의 콩팥은 좀 서러운 콩팥이다. 기능을 상실한 탓에 그는 1주일에 사흘은 신장 투석을 한다. 월, 수, 금, 3일간은 거의 종일 병원에 누워 혈액을 걸러낸다.
“나이 들면 누구나 한두 가지 질병은 다 가지고 산다. 그저 내 복대로, 내 팔자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병원에선 의사에게 맘 편히 투석을 맡기고, 집에선 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일에 묻혀 산다.”
동네 이웃들은 당신을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라 칭찬한다.
“무슨 그런 과한 얘기를.(웃음) 남들은 수백 마리의 소도 기르고, 수만 평 규모의 사과밭을 경영하기도 한다. 난 그 반의반도 못 따라가고 있잖은가. 농사일에도 아직 서툴러 사실 그냥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콩팥에 문제가 생긴 건 언제부터?
“40대 초반에 이상이 왔다. 플라스틱을 다루는 공장을 운영한 게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 한동안 일을 놓고 쉬었으나 결국은 신장이식을 받게 되었지.”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중한 병을 고친 이들도 있다.
“귀농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과도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식받은 콩팥을 달고 산 지 12년 만에 완전히 망가지더군. 투석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게 형제 하나가 콩팥을 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했다. 나 좋다고 형제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시골에 들어와 병을 고친 사례는 나도 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병은 좋아질 병이 아니거든. 계속 끝까지 투석해야 하고 식이요법도 충실해야 한다.”
그런 건강 상태로 열심히 농사를 한다는 게 어디 쉬운가. ‘강철 인간’이라 불러도 무방하겠군.
“난 어릴 때 지금보다 훨씬 지독한 고난을 겪었다. 먹을 게 없어 사나흘씩 굶기를 자주 했고, 심지어 20일간 물만 마시며 견디기도 했지. 아마 그런 경험들이 나를 꽤나 강하게 만들고 독립적인 근성을 길러준 게 아닐까. 난 지금도 알몸으로 어디에 던져져도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웃음)”
자신을 완벽하게 통치하는 인간 유형? 열홍 씨는 차돌처럼 야무지다. 불편한 몸 상태에 희한하게도 거의 무심하거나 태연하다. 간혹 표정이 딱딱해지기도 하지만, 그건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사람의 버릇일망정 병세에 상심하는 징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피로, 두통, 요통 등 신장투석에 따르는 불편이 자심할 터이지만, “난 그런 거 몰라!” 하는 투로 유유한 게 아닌가.
그는 신장 투석을 시작하며 유능한 일손 하나를 고용했다. 축사며 과수원을 혼자 건사하기엔 역부족이라 동원한 인력이다. 도시에서 내려온 이 일손은 귀농 지망생으로 향후의 귀농을 위한 예행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셈이다. 열홍 씨로선 신통치 않은 재무구조에 월급이 나가 부담이야 되겠지만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게다. 이렇게 그는 동갑내기 직원과 둘이 5년째 동거하며 일을 한다. 오직 끔벅거리는 눈으로 언어를 발하는 소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사과나무들이 간혹 청원하는 민원을 접수해 해결해준다. 그 와중에 그가 남몰래 해온 일이 또 하나 있다. 과수 농가들에게 쓸모가 많을 그 뭔가 새로운 도구들의 개발에 열을 내왔던 것인데 2017년, 마침내 ‘가지 유인(誘引) 철 클립’을 발명해 특허를 받았다.
“과수 농사에서 가지 유인 작업은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다. 가지들을 적절히 늘어뜨리거나 구부려줘야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지. 그동안 흔히들 콘크리트로 만든 추(錐)나 플라스틱 물병을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아 유인을 해줬다. 내가 만든 ‘철 클립’은 획기적으로 간소하고 효율적이다. 현재 농가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창의(創意)의 산물이구나.
“도시에서의 오랜 전공이 기계설비였다. 농사를 짓더라도 전공을 살려 만든 장비나 기구를 도입하자는 생각이었지. 내겐 다종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으며 나름 연구를 해왔다. ‘가지 유인 철 클립’은 개발이 실현된 한 가지일 뿐이다.”
‘철 클립’ 매출액은 어느 정도?
“출시 이후 약 3000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이제 막 알려지고 있는 과정이라 차후의 매출 상승을 예감한다. 소비자들과 만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특허를 내고 홍보를 하는 등 그간 1억 정도를 투자했지만 충분히 회수가 가능할 거라 본다.”
당신의 귀농 역시 결국은 안정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방편이겠지?
“소들의 순한 눈망울, 새벽이슬을 매단 사과나무, 눈부신 아침 햇살, 이런 것들이 주는 짜릿한 전율이 행복의 감정일까. 한 사람의 월급을 주고, 나 먹고살 형편은 되고, 이 역시 행복이겠지. 그러나 행복은 순간에 왔다가 순간에 사라진다는 걸 안다. 과욕 없이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싶다. 몸 아픈 사람들에겐 시간이 한결 귀하다.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난 그쯤의 인간이길 바란다.”
비록 시련이 많지만, 지금 살아가는 방식,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홍 씨는 별 유감이 없다. 아까운 시간을 선용해 현재보다 더 나아가고자 하는 갈증. 이건 뜨거운 목마름이다. 그렇기에 건강상의 한계나 노동의 과중함마저 그는 곧잘 무시하는 것 같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처럼.
김열홍 씨가 주는 Tip
•귀농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자. 기술 습득 없이 농업에 나섰다간 십중팔구 실패하기 때문이다. 시골 농가에 일꾼으로 1~2년쯤 취직해 살며 농사를 익힌 뒤 귀농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똑똑한 인재다.
•집부터 먼저 잘 지을 거 없다. 자금을 아껴 써야 살아남는다. 근사한 집을 지었더라도 나중에 팔 일이 생겼을 경우엔 낭패를 볼 수 있다. 좀체 팔리지 않는 게 전원주택이니까.
•깊은 산골의 집성촌으로 귀농하면 텃세에 시달릴 수 있다.
•귀농을 하면 일단 베풀며 어수룩하게 처신하라. 술자리, 회의자리 등에 적극 동참해 사교를 하라. 잘만 사귀면 원주민들이 결국엔 귀농인의 조력자가 된다.
절친한 친구 사이, 우애 좋은 형제자매의 로망.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사는 일이다. 꼭 그리 살아보자 약속을 했어도 지내다 보면 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멀리 떠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꿈만 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 있다. 경기도 여주에 모여든 세 친구, 서울시 은평구 한옥마을에 둥지를 튼 삼남매. 이들의 집을 설계한 건축사 대표를 만나 집 짓기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제공 요앞건축사 사무소, 삼공사건축사사무소
◇ 세 친구, 럭셔리하면서도 소박하게
요앞건축사사무소 김도란·류인근 대표
남한강이 잔잔히 흐르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내양리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세 사람이 지은 집이 있다. 418㎡의 땅에 이들 부부가 사는 집 세 채와 공동생활을 위해 지은 커뮤니티 돔 한 채가 길게 들어서 있다.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던 이들은 종종 귀촌해서 함께 살자고 했다.
김도란 대표 세 분이 오랜 친구이고 지금 60대 중반입니다. 공무원 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곧바로 집을 지었어요. 친구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귀촌한 케이스죠. 여주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어요. 10여 년 전에 남한강에 놀러갔다가 풍광에 반해서 매물로 나온 땅을 즉시 매입했답니다. 세 분이 3필지를 샀어요. 공동소유입니다.
2015년 설계를 시작해 2016년에 완공된 세 친구가 사는 집. 건축주 3명과 그들의 아내까지 총 6명. 서로 의견을 조율하다 보면 작은 잡음이 생기곤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을까.
김 대표 없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같이 살자! 처음에는 건물 한 채 지어 함께 살겠다는 생각만 있었죠.
류인근 대표 미팅하러 여섯 분이 함께 오셔도 남편들은 빠지셨어요. “나는 뭐만 있으면 돼!” 이러고 세 분이서 당구 치러 갔다가 한두 시간 후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집에 가자” 그러기도 했어요.(웃음) 아내들이 대부분 아이디어와 의견을 냈습니다.
디자인이 나오기까지는 크게 세 번 정도 방향을 틀었다. 집을 길게 붙여도 보고, 특히 집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방향이 잡히고 난 뒤에는 세부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류 대표 집 방향이 사실 좀 문제였습니다. 남한강이 북쪽이거든요. 거실에서 강을 바라보느냐. 방에서 강을 바라보느냐가 관건이 됐습니다. 결국 거실에서 북쪽의 강을 보는 걸로 결정을 내렸어요. 대신 천장에 큰 창을 달아 직광이 들어올 수 있게 설계를 했습니다. 천장을 그렇게 처리하니 남쪽의 빛이 꽤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침실에서 보는 풍경도 좋아요. 논이 보이는데 사시사철 바뀌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세 친구가 구상했던 집은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공간이었다. 자연스레 시니어가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는 집을 건축하게 되었다.
김 대표 노년을 위한 집이기 때문에 100㎡ 규모의 단층으로 설계했어요. 다락도 있는데 주로 자녀가 방문할 때 사용합니다. 기본적인 공간은 1층에 다 있어요. 동선을 긴밀하게 연결했고 구성도 콤팩트하게 처리했어요. 사실 이 집은 더 먼 훗날 노년의 삶을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지금은 아직 젊잖아요. 손주들이 자주 놀러 오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이 오면 공간이 좁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북적거리고 좋다 하더라고요.(웃음)
세 채의 집 형태는 모두 같다. 똑같이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도 했다. 같은 액수의 돈을 투자해서 진행을 했기 때문에 개인의 의견이 반영되면 공사비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어 미리 합의한 사항이었다.
류 대표 실내 건축에 대한 의견은 별다른 게 없었는데 바깥 환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텃밭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이었어요. 커뮤니티 돔 뒤에는 부뚜막과 장독대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옆에는 황토방을 만들고, 손주들이 와서 놀 수 있게 수돗가에 수영장 기능을 할 만한 공간을 넣어 달라는 주문도 받았어요.
김 대표 커뮤니티 돔도 만들었어요. 남편들은 여기에 전용 당구장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아내들은 밥 같이 먹는 공간이 되길 바랐고요. 그런데 당구대 설치는 사실 아내들이 더 원했어요. 남편들이 밖으로 나갈까봐요.(웃음) 나가서 술 먹으면 운전해서 오기도 어렵고, 걱정이 되잖아요.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오픈형으로 만들었어요. 손님이 오면 잘 수도 있어요. 폴딩 도어를 설치해 날씨 좋은 날은 활짝 열어놓아요.
◇ 삼남매의 집 Privately, But Together
삼공사건축사 사무소 김덕호·윤효중 소장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을 간직한 삼남매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지었다. 북한산 국립공원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들어선 그들의 집. 완공한 지는 올해로 1년을 갓 넘겼다. 진한 회색 벽돌로 지어진, 현대적인 감각의 건물이 보인다면? 바로 삼남매의 집이다.
김덕호 소장 모두 50대이시고 1남 2녀 삼남매입니다. 이분들 중 둘째가 학교 선생님인데 방학기간을 활용해 저희와 의견 조율을 했습니다. 위로는 오빠, 밑으로는 아직 결혼 안 한 여동생이 있다고 했어요. 삼남매가 같이 산다고 해서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하고 노래방도 같이 가고 정말 가깝게 지낸답니다. 우애가 깊어 보였습니다.
2017년도에 시작해 설계 6개월, 시공 후 완공까지 9개월이 소요됐다. 430㎡ 규모의 땅에 지은 2층짜리 건물 내부에는 방 8개, 주방 3개, 화장실 6개가 들어섰다. 첫째와 둘째가 함께 쓰는 공용 대문이 있고, 미혼인 막내 동생은 대문을 따로 냈다. 특별한 공간은 오빠의 집 욕실에 마련된 건·습식 사우나. 집에서 사우나도 하고 찜질도 즐길 수 있는 공간 마련은 내가 살 집을 직접 짓는 거라 가능했다.
김 소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 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시니어라도 집 지어본 분이 드물어요. 처음 지어보는 것이니 당연히 선호하는 스타일도 없죠. 그래서 설계할 때 정말 여러 가지 수를 제시합니다. 대문을 다 따로 만들어보기도 하고요. 집 형태보다는 밀도를 높여 사용하기 편하게 해주는 걸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그려볼 수 있는 도면이란 도면은 다 그렸다. 앞마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원하는 방향에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삼남매의 의견을 반영해 지금의 집이 탄생했다. 삼남매의 추억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각각의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출장이 잦아 자주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오빠, 오빠의 아들 또한 직장일로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고, 둘째의 아들도 유학 중이다. 그래서 남은 가족이라도 가깝게 모여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누가 집을 비우면 서로의 집을 돌봐줄 수도 있고, 돌아왔을 때는 가족이 기다리는 푸근한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삼남매의 집은 앞의 세 친구 사례와는 다른 점이 있다. 투자 비율도 다르고,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해, 함께하는 커뮤니티 공간은 만들지 않았다.
윤효중 소장 이 집은 누가 얼마만큼 투자했느냐에 따라 각각 평수도 다르게 잡았어요. 가장 많이 투자한 오빠는 2층과 다락과 옥상테라스를, 둘째는 1층과 함께 이어진 중정마당을, 막내는 독채를 쓰면서 나머지 귀퉁이 땅을 선택했어요. 오빠와 둘째는 공용 대문을 사용하지만 각자의 현관 스마트키가 따로 있죠.
투자비에 따라 공간을 정확하게 나눴지만 오빠 집에 모여 자주 밥도 먹고 돈독함을 자랑한다.
윤 소장 이 집의 콘셉트가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함께 살자’이거든요. 내 공간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니 공동 주거의 개념은 아니죠. 둘째도 중정 조경을 따로 했으니까요. 설계 혹은 건축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면 추진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어요. 둘째 분이 중간에서 상황 정리를 계속했습니다. 형제의 우애가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모여 살기는 쉽지 않은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친구와 삼남매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다. 첫째, 친하다는 개념 그 이상으로 서로를 존중한다. 둘째, 투자나 재산의 목적이 아닌 노후까지 생각하며 오래 살 집을 지었다. 셋째, 집을 지으면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마음과 달리 누구든 살면서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 집을 짓기도 전에 의견이 맞지 않아 갈등이 생긴다면 함께 사는 걸 포기하는 편이 낫다. 같이 거주할 집을 꿈꾼다면 각자의 생활 패턴에 대한 디테일한 이해와 존중이 우선 있어야 하겠다.
지리산 근처 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에 첩첩하다. 그렇지만 궁벽할 게 없다. 좌청룡 우백호로 어우러진 전면의 산세가 빼어나서다. 우람하면서도 부드럽다. 운무 한자락 눈썹처럼 걸려 그윽하다. 한유창(60) 씨가 이곳으로 귀촌한 건 산야초 때문이다. 지리산 권역에 자생하는 야생초에, 그는 깊은 신뢰를 품고 산다. 한때 그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말기 암 환자였으니까. 단 한 번 주어진 목숨. 그는 그 희귀하고도 소중한 걸 야생초로 살려냈다.
“이봐! 그대는 도적이야! 절이 들어설 자리를 훔친 게 아닌가!”
집터를 둘러본 해인사 노스님의 얘기가 그랬더란다. 명당을 선점했다는 뜻이다. 정작 한유창 씨는 굳이 명당을 찾은 바가 없었다. 풍수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정붙이면 그게 좋은 자리려니, 그뿐이었다. 그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사들인 집터였다. 집이야 어떻든,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야에 사는 자체로 귀촌의 목적을 이룬 걸로 친다. 지리산의 입김을 마시고 자라는 산야초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 남원시 인월면에 둥지를 튼 건 2015년. 그 이전엔 함양 산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지리산 천왕봉 곁 산중턱에서였다. 산야에 삶을 두기로 작정하며 과욕은 이미 눌러놓았을 테지. 그래 그 첫 산중살림도 두루두루 원만했단다. 딱 하나, 겨울철 눈 내려 미끄러운 비탈길이 문제였다. 그래 이곳으로 옮겼다.
귀촌 이전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뜻한 길로, 혹은 뜻밖의 길로 좌충우돌, 서울이라는 생존의 들판을 격렬하게 뛰었던 모양이다. 암 진단을 받은 건 마흔다섯 살 때였다지. 설마 중증이랴, 대수롭지 않은 복통이라 여기고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란 예상보다 더 잔인한 것. 예고 없이 방문한 불행의 전령이 사람을 폭풍 속으로 내던진다.
“왜 이제야 왔냐, 이미 늦었다, 의사의 말이 그랬어요. 절망적인 진단이었죠.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남은 생존기간은 3개월 정도라며. 실감나지 않았어요. 마치 남의 일처럼. 병원을 나온 뒤에야 혼란이 엄습하더라고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죠.”
죽음이 돌연 현관을 노크할 걸 예감이나 했겠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라는 이주 통고. 그 황당한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고독이 극한에 달했겠지.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엔 생존본능이 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해볼 건 다 해보는 게 본성이다. 그는 자연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구조하기로 했다.
“약초로 살길을 찾기로 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죽을 작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풀만 뜯어먹었더니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었지만, 절박한 상황에 몰리자 기대를 갖게 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마련이죠. 제 주변에도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을 산골에 들어가 고친 사람들이 있어요. 야생초 섭취 외에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안정도 효과적이었던 같아요.”
“한 줄기 희망, 거기에서 나오는 안간힘. 그마저 상실하면 이젠 죽음이겠죠. 산야초로 고칠 수도 있겠다는, 아니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겠다는 신념을 품었어요.”
결국 산야초가 그를 살렸다. 약초 요법을 극진히 실천한 지 7개월 만에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병원 판정을 받은 게 아닌가. 의사가 두 손 든 말기 암을 기어이 물리쳤으니 놀랍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기적적 이변이 일어나기도 해서다.
몸소 거듭한 산야초 실험
뭐든 하나에 간절히 전념하면 통달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한다. 암이라는 사나운 놈을 밀쳐내느라 온갖 약초를 다루는 사이 그의 안목과 요령에 힘이 붙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명 약초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조차 약리 작용을 합니다. 제가 실로 많은 무명초에게 신세를 졌어요. 자연스레 산야초의 고귀함에 외경을 갖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이로울 약초를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도래했다!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암을 완치한 그는 또 하나의 허준이 되겠다는 양 남모를 야심을 품고 약재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산야초의 치유력에 관한 확신. 그간의 공부와 체험을 살리면 충분히 독보적인 약재를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 양자가 그를 추동했던 것 같다. 처음엔 고혈압, 당뇨, 탈모증 등에 탁월한 약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아토피를 정복할 산야초 발굴에 전념했다.
이후 결과물로 나온 게 ‘야초(野草)’다. ‘야초’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열광한다. 치유 효과가 명백해서다.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환자마저 있다. 너무도 슬픈 질환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약이 없다. 그 와중에 ‘야초’가 위력을 과시하며 등장한 것. 이 기발한 약재는 단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자그마치 7년을 진력해 얻은 성과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의 거처는 서울이었으나 산야초를 찾아 7년간 전국 오지 산야를 누볐던 거다.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피부질환의 고통은 일단 가려움증에서 옵니다. 가려움증을 잡아줄 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죠. 피부병에 좋다고 이미 알려진 산야초부터 갖가지 잡초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효험을 테스트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테면, 제가 모기 소굴에 들어가 온몸을 모기에 뜯긴 뒤 채집한 산야초 즙을 발라보는 겁니다. 어느 풀이 가장 탁월한가,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연속 실험을 해 드디어 한 가지 약초를 정립하게 되는 거죠. 그다음으로는 피부 염증을 해결할 풀을, 또 그다음엔 피부 재생에 뛰어난 풀을 찾았고요. 7년간의 이런 과정을 거쳐 다섯 가지 산야초를 최종 정선했어요. 그 다섯을 조합한 게 ‘야초’예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수두룩해요. 당신의 ‘야초’도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처음엔 코웃음들을 쳤어요. 이미 속아본 환자가 많으니까. 그러나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무료로 ‘야초’를 공급받은 중증 환자들이 완치에 이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환자와 만나기 위해 현재 두 곳의 한의원 한의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 사례들은 투명하게 공개되고요.”
‘야초’를 개발하기까지 7년여 동안 그는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단다. 생업이 없는 채로 미치광이처럼 야생초에 빠져 살았던 것. 이 우직하거나 용맹한 사내의 삶은 이제 완연히 변했다. ‘야초’의 성공이 물심양면의 안정을 가져온 거다. 산야를 연구실 삼아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다. 그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에 응분의 관심도 쇄도했다. 국내 유수의 모 제약사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았으며, 유럽이나 중국의 신약 기업들도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는 거대 자본과 제휴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악어 같은 자본력에 먹히기 십상이니까. 현재 강진군과 손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아토피 환자들을 유치할 세계적 수준의 아토피 치료 센터를 건립할 목적으로.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
한유창 씨의 집은 해발 470m 산기슭에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해발고도다. 모기가 없으며 열대야도 비켜간다. 그가 귀촌한 건 양질의 ‘야초’ 재료를 조달하고, 실험도 계속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요양 차원의 귀촌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이 웃자랐다는 게 아닌가. 정적인 성향의 아내 역시 산골을 동경했다지. 마침내 부부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기반을 잡은 셈이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상은 야무지지만 알고 보면 순진남인가? 그는 맹지를 속아 사는 식의 땅 사기를 세 번이나 당했다.
“군청에 가서 서류 몇 장 확인하면 속을 일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이 집의 터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묵혀둔 논을 산 건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토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엄청난 양의 흙을 사다 퍼붓고 성형 작업을 했지요. 땅값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웃음)”
너른 마당엔 뽐낸 게 없다.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를 좀 심었을 뿐이다. 뒤뜰엔 연못을 파 잉어를 넣었다. 그러나 멋부린 태없이 농수용 웅덩이처럼 수수하다. 자연스레 뭐든 내버려두는 게 구미에 맞아서겠지. 그래도 집짓기엔 공을 들였다.
“단순하나 견고한 구조, 그게 좋아 노출 콘크리트 집을 지었습니다. 회색 외벽이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울릴 거라 봤고요. 설계부터 제 취향을 반영했지요. 계획한 건축 형태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도 직영했어요.”
“산중의 외딴집이에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았어요?”
“산야초와 동행하는 사람이니 산속에 살아야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외딴집의 장점이 많지요. 우선 원주민과의 갈등 소지가 적다는 게 이점입니다.”
“대부분의 귀촌인들이 원주민과의 관계 문제를 최대 이슈로 꼽죠.”
“불화를 야기하면 배겨날 수 없으니까요. 외딴집에 살 경우엔 주민 접촉 기회가 적어 홀가분한 편입니다. 물론 적당한 교류마저 회피할 일은 아니에요. 시골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쉽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정들 수도 있어요. 어쩌다 농사일을 잠깐만 거들어줘도 진심으로 고마워들 해요. 그 역시 귀촌생활의 재미로 삼아야죠.”
“자연을 벗삼아 재미와 평온을 맛보고 싶다는 것. 이는 귀촌인들이 공통으로 밝히는 귀촌 동기예요. 자연과의 만남을, 무심히 방치했던 자아를 돌볼 기회로 삼는 거죠.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찾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변화를 꾀하기 어렵죠.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늘 변화 없는 잿빛이고요. 그에 비해 귀촌생활은 신선합니다. 사계절 따라 확연하게 변모하는 자연이 긍정적 자극을 주니까요. 어딜 가거나 어딜 보거나 항상 변화하는 풍경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죠. 그러면서 너그러워지고요.”
그는 성경 전체 필사를 세 번이나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기구(祈求)를 담은 필사였겠지. 나긋하고 싹싹한 언사. 곧잘 번지는 미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서려 있다. 서울에 살 땐 달랐다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때로 통제가 어려웠다. 술 체질이 아니라 들입다 마셔 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울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여과 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암으로 고난을 경험한 데다 귀촌까지 한 뒤엔 변화가 왔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에도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는 아홉 마리의 개를 기른다. 두 마리는 데려온 유기견이다. 개가 많아 즐거움이 많지만 불편도 많다. 일테면 부부 여행조차 엄두내기 힘들다. 아내는 그게 억울하다. 제발 더 이상은 늘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자주 호소하는 것 같다. 아내의 환심을 사려면 오나가나 진돗개처럼 충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양보할 생각이 거의 없다. 개 역시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다.
“원래 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요즘은 애착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암 투병으로 생사 갈림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느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기분을. 제 경우엔 피부질환자들의 처절한 고통마저 일상으로 접하며 살지요. 연민의 감정이 커질 수밖에요. 과거엔 모든 걸 ‘나’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이젠 남을 중심에 둡니다.”
그의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에 있다. 머잖아 유기견들을 위한 대규모 치유 시설도 만들 계획이고.
◇ 한유창 씨가 주는 귀촌 Tip ◇
•맘에 드는 땅이라도, 자금력이 넘치더라도, 시세를 너무 상회하는 매물 구입을 자제하자. 두고두고 욕먹을 수 있어서다. 마을 땅값을 올려놓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농부가 농지를 매입하고 싶어도 비싸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지을 대지 크기는 300평 미만이 적당하다. 그 이상 되면 관리가 어렵다. 특히 풀이 문제다. 비 온 뒤에는 밀림처럼 풀밭이 우거진다.
•이왕 시골에 사는 김에 산야초에 관심을 가지라. 이름난 약초만을 찾을 거 없다. 그저 흔한 들풀들의 약성도 탁월하니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마을 뒤로는 신록이 사태처럼 일렁거리는 큰 산. 앞쪽엔 물고기들 떼 지어 노니는 냇물. 보기 드문 길지(吉地)다. 동구엔 수백 살 나이를 자신 노송 숲이 있어 오래된 마을의 듬직한 기풍을 대변한다. 겨우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였으니 한눈에 살갑다. 마을 여기저기로 휘며 돌며 이어지는 돌담길은 야트막해 정겹다. 이 아늑한 산촌에 심히 고생을 하는 농부가 있다.
경기도 일산에 살았던 그는 특별한 준비 없이 귀농했다. 귀농을 좀은 만만하게 봤을까? 혹은, 매사 서둘러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배짱의 소유자일까?
물론 그가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건 아니다. 내려오라! 연로한 부모님께서 먼저 사인을 보내왔더란다. 그럴 즈음 그의 건강도 좋지가 않았다. 해서, 으라차차, 가자, 고향으로 내려가자! 그렇게 결연히 부르짖으며 아내와 함께 귀향을 했던 모양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은 산촌의 포실한 경관과 공기를 일용한 양식처럼 취하며 살아온 지 어언 5년. 박병각 씨(63, 영농조합법인 알토팜 대표)의 낯빛은 들판에서 타 구릿빛이다. 몸엔 땀내가 배었으니 그의 일상적인 근로의 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직감할 수 있다.
도시에선 갖가지 직업을 편력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 씨는 한때 교수생활을 했다. 기업체 중견간부로도 일했다. 돈을 실컷 벌겠다고 맘먹고 통신장비 관련 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지. 비록 꽃을 피우진 못했지만. 귀농 직전까진 번역 사업을 했다. 박병각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재에 밝지 못한 사람이다. 몇 번의 기회가 왔으나 어여삐 머물러주지 않았단다. 그러나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니 갖가지 노하우가 실하게 쌓였을 것이다. 빛은 빛대로, 그늘은 그늘대로 질주의 돛대 역할을 하는 법. 때로는 순항으로, 때로는 난항으로 건넌 세상이 그에게 응분의 기량을 증정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와 몸에 축적된 실력을 다 끌어올려 농사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아직 방문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저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은 탓일까? 농사는 제자리걸음이다.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테지. 애초 “거의 빈털터리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귀농 5년 사이에 뭐 별반 늘거나 불어난 게 없는 모양이다. 싱글벙글 낙천적인 미소가 얼굴에 피부처럼 붙어 있지만, 5년간 들판에 쏟은 땀방울을 생각하면 내심 긴장감이 들솟을 게다.
“귀농할 때 별다른 준비 없이 내려왔어요. 우선은 건강부터 챙기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그럼에도 첫해부터 농사를 지은 건 부모님께서 경작하시던 농토가 있어서였어요. 밭 2000평에다 참깨를 심었어요. 기대치만큼의 수확이 나오질 않더라고. 현재는 규모가 늘어 1만 평입니다. 콩을 주 작물로 하고, 찰수수와 레드비트도 재배합니다. 양봉도 하고요. 그러나 타산을 맞추기는 여전히 힘들어요.”
“적자를 보는 거예요?”
“당연하죠. 초보 농부의 자세로 그저 열심히 노력하지만 농사라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실감합니다. 사실, 귀농 5년 차인데도 적자를 본다면 얼른 떠나는 게 현명해요. 하지만 저에겐 희망이라는 게 있어요. 나름 최선을 다해 농사를 하기에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낙관, 그런 거.”
“부진한 농사, 그건 사전 준비를 소홀히 한 사필귀정 아녜요?”
“그런 측면도 있죠. 시행착오가 없지는 않아요. 그래서 요즘 제가 남들에겐 준비를 철저히 해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농사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봉착하게 되더군요. 그 무엇보다 기후 조건에서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농부의 능력보다 하늘과 땅의 조력이 더 중요한 변수라는 거. 농부가 직접 유통에 나서야만 하는 구조도 벽으로 다가와요.”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
대지를 일구는 농부란 시를 쓰는 시인과 다를 바 없다. 방울방울 진땀 뿜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무심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영감을 짜내느라 머리칼을 쥐어뜯는 시인처럼, 농부 역시 비와 바람을 주재하는 하늘의 협찬을 간절히 기도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농부의 하늘은 더 절대적이다. 더위와 추위와 서리, 가뭄과 홍수와 태풍, 이 모든 자연의 순환과 횡포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게 농사이지 아니한가.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고 봅니다. 처음엔 몰랐으나 농사를 지으며 그걸 알았어요. 시골 사람들이 아는 게 농사뿐이라 그냥저냥 농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투철한 가치관이 아니고선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어르신들도 기후의 혼란과 변덕 앞에선 속수무책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제 겨우 5년. 정착까지는 아직 멀었어요. 아마도 10년은 흘러야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끙.”
“건강은 좋아지셨고?”
“농사일이 워낙 많아서 건강이고 뭐고 돌볼 틈이 없는 것을.(웃음)”
“농림축산식품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귀농 5년 차 농가의 평균소득이 3898만 원이라고 해요. 이거 믿을 만한 소식일까? 제가 만난 귀농인들은 흔히들 고전하고 있었어요.”
“정부의 공식 통계이니까 그러려니 해야겠죠. 그러나 가처분 소득이 아니고 매출액 기준의 산정이라 봅니다.”
“선생의 농사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예요. 만약에 말이죠, 누군가 귀농을 하려 한다면 뜯어말리시려나?”
“흠. 텃밭농사 정도가 이상적이죠. 농사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사실 위험합니다. 전적으로 농사 하나에 생계를 걸 경우엔 더 어려워질 수 있어요. 시행착오의 연속일 수 있으니.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워할 일도 아녜요. 귀농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연의 방식에 부합하는 신념으로 산다면 만족을 누릴 수도 있죠.”
“자연의 방식이라는 건 순응의 태도? 있는 그대로 자족하는 거?”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귀농했지만 한 가지는 가슴에 새기고 내려왔어요. 비우자! 이제부턴 비우고 살자! 그런 마음가짐 말이죠. 도시에서 가졌던 과욕이나 비즈니스 마인드 대신 빈 마음으로 살자는 거. 한마디로, 돈벌이 목적보다는 비우려고 귀농한 겁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밥그릇을 뚝딱 비우는 일과 달라 내공이 필요하다. 흔히들 마음 비우기에 관심을 두지만 비울수록 마음은 허기로 보챈다. 매사 비우려는 건 어엿한 지향이지만, 진정 비우기도 전에 고프고 슬퍼 떨리는 게 삶이지 않던가. 먹고사는 일의 고역과 경쟁은 거의 항구적인 숙명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진한 농사는 이 비우기를 쉬 구현하게 하는 기묘한 견인차란 말인가? 박 씨는 농사 부진에 그다지 조바심치지 않는 것 같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굳이 채울 것도 없으며, 따라서 비우고 살고자 하는 신념을 관철하기가 오히려 용이하다는 투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치레가 없어 푸근한 농가주택
귀촌이든 귀농이든, 그게 종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모두들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생판 낯선 객지보다는 가급적 연고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농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귀농자의 53%, 귀촌자의 37%가 고향, 또는 사소하나마 연고 있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연고 덕분에 적응과 정착이 더 수월할 거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연고지로 이주하더라도 크고 작은 애환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박 씨는 이웃들에게 그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예 밝히질 않았다. 자칫 오해와 편견을 심어줄 수 있어서.
“고향이라는 단 하나의 근거를 앞세워 귀농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중요한 건 어디로 내려가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충분히,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이에요. 만약 돈벌이에 목적을 둔 귀농이라면 더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죠. 일테면 선택한 작물의 재배조건, 생산한 농산물의 유통 환경 등을 심도 있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모저모 의지대로 살기 쉽지 않은 게 시골이라 보면 됩니다. 이건 제 경험에서 우러난 얘기들이에요.”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말씀?”
“바로 그거! 저는 도시가 싫었어요. 힘겨웠어요. 그렇다면 도피성 낙향일까? 그렇게 물으실지 모르지만, 기꺼이 내려왔으니 탈출이라 해두죠. 충분한 준비보다는 도시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생각이 쏠려 있었어요.”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두 가지에 놀랐어요. 하나는 수려한 마을 풍치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께서 농약을 쓰지 않는 농사를 처음부터 고수해왔다는 점이에요. 일반 관행농법보다 몇 곱절 더 어려울 무농약 농사에 어떻게 착안하셨죠?”
“아하. 당연하고도 간단한 이유가 있어요. 내 가족들이 먹을 음식에 농약 성분이 섞인다면? 그런 자문을 하면 답이 빤할 수밖에. 남의 가족들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작물이 병들어갈 때 약은 필요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화학적 농약 대신 자연에서 얻어온 재료들로 만든 농약이나 퇴비를 사용해요. 공장 농약 외 대안이 없다면 이미 농사를 포기했을 겁니다.”
“괴산군 귀농귀촌인 협의회장을 맡으셨죠? 귀농귀촌 실태에 환하겠어요. 실패 사례엔 어떤 게 있죠?”
“대체로 귀농이 아닌 귀촌 케이스가 만족도가 높습니다. 실패자엔 두 부류가 있어요. 첫째는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덜커덕 귀농했다 망치고 돌아가는 경우, 둘째는 적막한 시골에서 우울증을 얻고 쓸쓸히 떠나는 경우.”
대책 없는 전원 판타지를 꿈꾸는 그대여, 그냥 도시에 사시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귀농귀촌의 실상이 꽤나 알려진 요즘엔 얼간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맹목적이거나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냅다 시골로 들이닥치는 우행은 생고생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니까. 문제는, 인류를 구원할 듯한 기세로 머리를 싸맨 준비와 연구를 선행하더라도 허무한 귀결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일 테지. 특히나 어려운 건 역시나 주민과의 융화 문제.
“시골의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듯 인심도 변했어요. 합리성이 결여된 시골 분들이 많다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합리나 법리보다는 마을의 관습적 불문율을 중시해요.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죠. 그러나 그걸 불편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텃세를 메시지로, 우리의 규율 안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로 읽어야 해요. 이건 불변의 풍습이에요. 일단 불문율을 존중, 선선히 마을에 녹아들어간 뒤 바꿀 걸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게 순서이지 않겠어요?”
그의 거처는 오래되고 소박한 농가주택이다. 꾸밈이 없어 담백하다. 치레가 없어 푸근하다. 앞뜰과 뒤란엔 향이 번진다.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둬서다. 항아리들은 불룩한 배통을 두드리며 저희들만의 밀어를 속닥거린다. 지붕 위를 가로지르며 노래하는 가수는 박새구나.
아무런 결함이 없는 평화. 집 안팎에 그런 기운이 남실거린다. 밤이면 창으로 들이친 별들이 부부의 침실을 염탐하려나? 박 씨에 따르면 부부가 각방을 쓰는 행위는 죄악에 가깝다. 그는 농사에 시달린 나머지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아내의 손가락 열 개에 송구스럽다. 농사엔 여자들이 해치워야 할 일들이 많다. 그는 그게 또 미안하다. 아마도 그는 다정다감으로 아내를 자주 살살 녹일 것 같다. 하지만 아니란다. 밖에서만 다정한 처신을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 최선희 씨(63)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기와는 다른 남편이에요. 도무지 제 말을 들어주질 않아요. 양봉을 만류했으나 기어이 시작하는 식으로요. 이젠 아예 단념하고 삽니다.(웃음) 귀농 얘기 좀 할까요? 농사 경험 없이 덤벼들어 참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지요. 한마디로 아직은 답이 없어요. 그러나 이젠 도시에서 다시 살기 싫어졌어요. 시골에만 있는 맑은 공기와 순수한 자연, 손수 기른 깨끗한 먹거리들.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이미 개선된 걸 느껴요. 게다가 부부가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연풍성지가 가까이에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쩌면 모든 게 축복이죠.”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그 사소한 축복들. 고달픈 일상의 굽이에서 축복을 느낀다면 그건 잘 산다는 증빙이겠지. 삶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지. 귀농은 아찔한 모험일 수 있지만, 삶은 단 한 번 주어진 복주머니이겠고.
박병각 씨가 주는 귀농 준비 Tip
•귀촌인이야 집 사서 취미생활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귀농엔 고난이 많다. 사전 준비를 단단히 하자. 돈만을 목적으로 삼기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급자족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가치관을 확고히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활자금은 미리 비축하고 귀농하자. 아울러 극도로 지출을 자제하자. 자금 회전이 안 될 경우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봉착하기 쉬운 게 귀농이다.
•굳이 집 사지 말라. 컨테이너 하나로 시작하는 게 좋다. 농토도 사지 말라. 묵은 전답을 빌리면 된다. 비싼 농기계도 살 필요 없다. 임대하면 된다.
•반드시 부부 합의로 함께 내려오는 게 옳다. 만에 하나, 가족공동체가 깨진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100세 시대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된 지금, 이제 50대는 청년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은 그 이름대로 서울 시민 50세부터 64세까지인 50플러스 세대의 삶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이다. 2016년에 설립된 이후 재취업, 일자리, 교육, 정책 개발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 50플러스재단은 지난해 10월 김영대 전 국회의원을 대표이사로 임명해 향후 3년 동안의 사업 전개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최대 화두가 된 시대, 김영대 대표이사를 만나 50플러스 세대의 일과 삶에 대한 대안을 들어봤다.
새해 이슈는 일자리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이 기존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고, 그 조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반발로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등 단순 서비스직 업계에서는 사람을 쓰지 않는 대신 자동화 설비, 로봇 도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시니어가 은퇴 후 직업으로 많이 선택하는 택시 업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카풀 논란 또한 자율주행차가 도입될 미래의 택시 산업과 연결되는 사전적 갈등이다. 이처럼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일자리가 4차 산업혁명으로 줄어들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50플러스 세대는 노인 세대도 청년 세대도 아니어서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모든 50플러스 세대가 생산적이고 준비된 노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각 방면에서 지원하는 것이 재단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실 생계형 일자리를 연계해주는 곳은 이미 많습니다.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 등에서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죠. 그래서 재단은 인생 후반 새로운 일의 유형으로 ‘사회공헌일자리’를 발굴하고 확산하고자 합니다. 보통 ‘앙코르커리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지속적인 수입뿐만 아니라 개인적 보람, 사회적 가치 모두를 만족하는 활동, 일거리, 일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50플러스 세대를 위한 일자리 해법
시니어에게 일자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수명이 늘어나고 부양 의무가 계속되면서 현역으로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노력은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정무적 책임을 갖고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도 50플러스재단을 발족해 시대적 화두에 동참했고, 최근 김영대 대표이사가 임명되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민주노총 부위원장 출신으로 시민사회단체, 국회의원, 중소기업 CEO 등의 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남북경제협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임명에서부터 50플러스재단의 방향성에 대한 큰 그림이 느껴졌다.
“재취업, 일자리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는 많은 분이 칠십까지 노동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되는데, 그중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있죠. 그런 부분에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저소득, 취약 계층의 50플러스 세대를 케어하는 노력을 보강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김 대표는 50플러스재단이 시니어 취약 계층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우리나라의 고령자 빈곤율은 OECD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66~75세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2.7%, 76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60.2%에 달한다. 고령화 속도도 가장 빨라서, 높은 노인 빈곤율과 고령화의 쌍끌이 현상은 젊은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더 가중시키는 상황을 불러오고 있다. 시니어의 일자리 확보가 본인 스스로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새로운 틈새시장 공략해나갈 것
일자리를 찾아내는 것도 문제이지만 중장년 일자리와 시니어를 매치시키는 것도 만만찮다. 현장에 가면 정책과 현장의 차이가 크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 50대 이후의 직업 훈련, 생계를 위한 일자리 알선 등은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에서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노동의 가치를 살려 저소득 취약 소외 계층, 그리고 일하고 싶은 분들을 잘 안내해야겠죠. 또한 서비스직, 문화관광, 기타 영업 마케팅 쪽으로 자기 전공을 살릴 수 있도록, 구력과 경험 많은 분을 매칭하고 관련 프로그램과 직업들을 만들고자 합니다.”
김 대표는 최근의 일자리 대책이 세대 융합 일자리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모범적인 사례를 찾아내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만큼 그런 사례를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창업과 관련해서는 당사자가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창업하는 분들 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순식간에 돈을 까먹습니다. 조사해보니 창업자 10명 중 6~7명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수를 줄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창업을 철저히 준비하게 해야 하고, 창업자 수도 줄여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진입장벽을 높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을 하겠다고 하면 사전에 꼼꼼히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실행 전에 미리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재단에서 올해 개발해볼 생각이에요.”
시니어가 대거 투자를 했다가 실패하면 엄청난 손실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잃어서 순식간에 나이 들어버린다는 얘기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들려온다. 청년 때는 아래로 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있지만 나이 들면 어렵다. 따라서 선경험을 해보고 안 맞으면 빨리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된다. 설명을 들으며 김 대표가 말하는 “조사, 증명과 함께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방향”이라는 게 어떤 모양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 관광객 수를 보면 일본의 성장세를 우리나라가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건 관광 서비스하고도 맞물려 있어요. 관광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 중에 50플러스 세대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길들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관광 가이드, 문화관광 해설사, 외국인들을 안내할 수 있는 문화재 해설사 역할 등이 있겠죠.”
은퇴자를 위한 귀촌 일자리 창출
김 대표가 생각하는 대안 중에는 귀농·귀촌도 있다. 귀농·귀촌이라고 하면 무조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농촌에 가서 생활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걸로 하고 귀촌을 하면 생기는 일자리가 있다. 수확기에는 일당 받는 일자리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통, 택배를 도와주는 일도 있다. 그리고 지방에 가면 축제가 많은데 축제에 활용될 인력으로 50플러스 세대가 가장 적합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살려고 하면 힘들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농한다고 부부가 함께 갔다가 몇 달 후 아내 혼자만 올라오는 일도 있고요. 차라리 가벼운 마음으로 일정 시간 귀촌해서 살아보는 것도 좋아요. 예를 들어 일주일 중 월화수목은 도시에, 금토일은 귀촌을 하는 거죠. 경험을 쌓고 그 속에서 익숙해지면 정착하는 걸로 계획을 세우게 해 너무 부담을 갖고 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 분들을 모아 집단으로 공유주택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귀농·귀촌과 일자리 문제 해결이 함께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북경제협력, 돌파구 될 수 있어
김 대표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이 남북경제협력 부분이다. 현재 남과 북 사이에는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분야가 경제협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경제협력 전문가인 김 대표가 50플러스재단 대표로 임명된 것은 남북 간의 경제, 일자리 문제를 위한 장기적인 포석은 아닐까.
“사실 정년에 걸려 배출되는 50플러스 세대가 많잖아요. 서울만 해도 교통공단, 시설관리공단, 교사, 금융인 등등 꽤 많은데 이분들이 제2인생을 설계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50플러스 세대가 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습니다.”
김 대표는 남북 간 교류가 진행되면 당장 철도에 대한 시설관리 점검에 들어가야 하는데 개선, 보수 부분에서 나름대로 시장이 꽤 크게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50플러스 세대의 인력들은 기능직이 많다. 북측의 도로 보수, 여러 가지 인프라 조성 등의 기간산업에서 발생하는 일자리는 50플러스 세대 기능직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50플러스재단이 중추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건강하다면 계속 일할 것
“저 역시 50플러스 세대로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경험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대한민국 50플러스 세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책은 실제 경험해본 사람이 시민들의 피부에 느껴지도록 설계해야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0플러스재단에서 최근 공을 들이고 있는 기획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50플러스보람일자리’다. 은퇴한 50플러스 세대가 학교, 마을, 복지시설 등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경험과 전문성을 살린 사회공헌활동을 하며 인생 2막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다. 2015년 6개 사업 총 442명의 규모로 시작해 지난해는 총 31개 사업에 2236명이 참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신중년 커리어 프로젝트 ‘굿잡5060’이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고용노동부, ㈜상상우리가 재단과 함께 풀어가는 사업으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5060세대 1000명에게 전문 교육을 제공한 후 사회적기업 취업률 50%를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이다.
“저도 칠십 세까지는 일할 계획이 있고 그 이후에는 건강이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건강할 때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일하던 사람이 집에서 쉬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엄청난 여유가 있어서 여행만 다니며 살 조건도 못 돼요. 그래서 칠십까지는 일하고 이후에는 사회봉사형 일자리, 공헌형 일자리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 대표는 인터뷰 내내 담백한 목소리로 불필요한 부분 없이 실제를 말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읽고, 통찰력과 정책으로 다듬어진 김 대표 자신이 무엇보다도 50플러스 세대인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