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 중 하나. 특히 산으로 둘러싸여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시니어가 은퇴 후 원하는 새로운 직업이나 취미를 꼽을 때 단골로 선택되는 분야가 바로 목공예다. 뚝딱뚝딱 제품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완성된 제품을 보며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배우자나 가족이 만들어진 가구를 반겨준다면 이보다 즐거울 순 없을 것. 또 솜씨가 좋다면 팔아 생활비에 보태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다.
목수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 긴 역사로 인해 현대에 들어와서 목수가 담당하는 영역은 방대해지고 기능도 세분화됐다. 국내에는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형틀을 담당하는 형틀목수와 목조주택을 짓는 목골조목수, 한국의 전통가옥을 만드는 한옥목수 등으로 구분하고,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내장목수와 선박목수, 가구목수 등도 있다.
목공 혹은 목공예는 정의에 따라 나무로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에서 건축까지 그 분야가 방대하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나 소품을 제작하는 분야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육기관, 시간, 비용 천차만별
목공예가 시니어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다양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연이나 귀농, 귀촌의 대체제 역할도 한다. 나무를 직접 만들고 다듬으며 자연을 손으로 느끼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귀촌 시 반드시 알아야 할 기술로도 꼽힌다.
당장 생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 중 하나. 간단한 식기에서 쟁반, 식탁에 이르기까지 만들지 못하는 것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상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숙련이 되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실제로 목공예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수업에 참여하는 시니어가 의외로 많다.
한 교육기관 관계자는 “시니어의 경우 당장 직업으로 연결짓기보다 노후생활을 위한 준비나 취미활동을 겸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하며 “절박함 대신 느긋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젊은 수강생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솜씨도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목공예 학원부터, 지자체, 목공방, 기술교육원, 프랜차이즈까지 활동 중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 근처 목공방을 찾는 것. 상당수 목공방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자체 교육과정을 운영 중에 있다. 또 일부 협회나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목공방의 경우 자격증반을 운영하기도 한다.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운영되는 목공방에서도 배울 수 있다. 상품 제작을 겸한 목공방에선 수업료 겸 시설 이용료를 합한 금액을 지불하면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정 기간 동안 목공방 장비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기술교육원 교육과정은 일반 학원 프로그램과 동일하다. 교육시간은 기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간단한 소품이나 책꽂이를 만드는 과정은 하루나 이틀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자격증 취득과정은 최소 이수 교육시간이 40시간정도다. 기간에 따른 교육비용도 천차만별이다. 하루짜리 체험학습은 1만원 내외이지만 창업반이나 자격증 과정은 수백만원 이상인 경우도 있다.
목공예 관련 자격증은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국가자격증인 목공예기능사가 있고, 민간자격증으로는 목공지도사, 목공DIY교육사 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목공소나 판매용 제품을 제작하는 목공방에 취업하려면 자격증 취득이 필수적이지만, 취미나 여가생활이 목적이라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고 귀띔한다.
창업 쉽지만 제품 판로가 문제
목공예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이다 보니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편. 그래서 목공예 시장에서는 구인보다는 구직 인력이 훨씬 많은 편이다. 한때는 목공방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저렴한 가구를 구매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저가의 중국산 가구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이 위축되어버렸다. 여기에 이케아 같은 다국적 기업까지 가구시장에 참여하면서 목공방들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장 취업을 목적으로 목공예를 배우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든 시니어의 경우 목공소나 목공방들이 채용을 기피하는 대상이다. 급여도 적은 편. 그래서 아예 목공방을 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는 사업의 의미보다는 작업실 개념으로 목공방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 사람이 뭉쳐 공방을 내는 경우도 있다. 메리우드협동조합이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이곳은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목공예를 배운 동기 6명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목공방으로 경력 단절 여성이나 시니어를 대상으로 목공예를 지도하고 있다. 나무사랑협동조합도 이와 비슷한 사례. 송파구 시니어복합문화공간 실벗뜨락에서 목공예 수업을 함께 들었던 수강생들이 모여 공방을 만들었다.
목공방 창업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비다. 목공용 장비를 기본적으로 갖추려면 2000만원 내외로도 충분하지만, 제대로 가구를 만들려면 7000만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이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 것은 예산이 아닌 영업력이다.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창업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장 위축으로 한때 난립했던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최근 확 줄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헤펠레목공방이 대표적이다. 전국에 70여 개 목공방을 가맹점으로 두고 있다.
요즘 목공예 분야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업사이클링(up-cycling). 폐품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용어다. 재활용할 재료에 가치를 더해 더욱 쓸모 있는 제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다.
목공 분야의 경우 상품적재용 깔판인 파렛트나 와인상자와 같은 폐목재를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많다. 폐목재는 단가가 낮아 수익성이 좋은 편이다. 최근 많은 목공방들이 폐목 리사이클링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자연친화적 나무라는 소재에 스토리와 공익성이 더해지면서 소비자 반응도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목공예를 하는 시니어들 사이에선 방과 후 학습이나 목공예 체험교육 강사활동도 인기가 높다. 제품 제작보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보람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경북 김천시 구성면 우두령(해발 650m) 기슭에 사는 정현선(58)씨 내외. 이 부부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안락하게, 그러나 따분하게 살았던 것 같다. 모두가 성난 말처럼 냅다 달리며 지지고 볶는 도회의 풍속을 견디어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일종의 허기나 갈증 같은 게 따개비처럼 들러붙었던 모양이다. 그게 귀촌이라는 거사를 도모하게 했다.
정씨의 남편 김보홍(63)씨는 축구선수 출신으로 체육 분야 직종에 종사했다고 한다. 정현선씨 역시 농협 직원으로 일하며 서울이라는 정글을 섭렵했다. 부부가 밖의 일로 분주했던 나머지 안에서는 정작 얼굴을 마주할 짬이 드물었다지. 부부란 전우와 같아서, 또는 난적과 같아서 단합에도 능하지만 분쟁 역시 빈발하기 마련이다. 이 부부는 전우애나 전투정신을 고취할 여가 자체가 없었단다. 애정 표현도, 부부 싸움도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고서야 가능한 게 아니겠는가.
그들에겐 오래 묵은 숙원이었다. 귀촌 말이다. 도시가 오직 탁류일 리 있을까마는, 시골이라고 다만 청류일 리 있을까마는, 마음은 자꾸만 촌으로 향했더란다. 해서, 근 10여 년간 전국 도처의 산간을 순례하며 정처를 물색했다. 부부 둘 다 태어나 성장기 한때에 놀았던 물이 시골이었기에 향수라는 것, 그 못 말릴 본능이 가슴으로 들솟기도 했다. 정현선씨의 얘기는 이렇다.
“틈이 나면 주먹밥을 싸들고 전국 산천을 돌아다녔어요. 강원도 화천에서 지리산 자락 구례까지, 일삼아 여행삼아 많이도 누볐어요. 그러나 마음에 딱 드는 곳을 찾기 어렵더라고요. 좋다 싶은 땅은 값이 비싸고, 저렴한 땅은 길이 없거나 하는 식으로 여건이 열악했어요. 그러던 중에 우연히 급매물을 소개받았는데, 가격이나 위치나 괜찮다는 판단이 섰어요. 지금 저희가 사는 이 집과 그렇게 인연이 됐죠.”
시골생활에 넌더리를 내고 역(逆)귀촌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살던 집을 헐값으로라도 서둘러 처분하고 시골을 탈출한다. 매력적인 급매물은 순식간에 임자를 만나게 마련이다. 정씨 부부가 사들인 급매물은 임야 포함 2만여 평 부지 위에 지어진 2층집. 산 중턱에 자리한 집이라서 조망이 기차게 후련하다. 우두령 일대는 고험한 산악지구다. 기세 등등, 하늘을 찌르며 솟구친 백두대간 고봉들이 저마다 똘똘하고 출중하다. 산이 거구라 골도 웅숭깊다. 골짜기 푸른 물살은 은어 떼처럼 반짝이며 솰솰 굽이쳐 흐른다. 촌 가운에서도 후미진 산촌을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탁 치며 쾌재를 부를 경관이다.
원주민과의 융화에 실패하다
우두령 자락으로는 절기 따라 봄비가 내리고, 가을 단풍이 물감을 흘려 내리고, 겨울엔 수북이 눈이 내려 설경이 흐른다. 산꾼들도 우두령 산간을 오르거나 내리기를 무시로 한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으나, 정씨 내외는 귀촌 직후 민박집 쥔장으로 변했다. 대간을 타는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대간을 타는 분들이, 이곳에 잠잘 집이 없어 불편하다, 산꾼들을 상대로 민박집을 하는 게 어떠냐, 그런 권유들을 해왔어요. 그래 2층 방에 등산객들만을 상대로 민박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그들에게 서울 얘기, 세상 얘기, 산 얘기를 듣는 게 참 즐거웠어요. 적막한 산중에서 뜻밖에도 사교를 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술이며 음식이며 이것저것 퍼주는 바람에 소득은 신통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작심하고 식초 생산에 나섰어요.”
“산촌에서 나오는 온갖 재료로 식초를 만드는 거예요? 그건 초심자도 가능한 업종인가요?”
“산골에서 마냥 놀기만 하면 무슨 재미겠어요? 흔히 자연을 즐기고자 귀촌을 하지만 시골에서 지내다 보면 욕심이 생겨 귀농의 형태로 양상이 변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가 그런 케이스죠. 사실, 서울에서 귀촌 교육을 받으며 식초 공부도 미리 해두었어요.”
“이른바 천연식초라는 걸 생산하는 농가가 많아요. 이 집만의 특별한 식초 제조법이라도 있나요?”
“저희는 일반 설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진정한 전통 발효식초를 만들어요. 제가 산골에 와 살며 이젠 정말이지 착하게 살자는 생각을 신념처럼 갖게 되었어요. 소득을 위해서만 식초에 도전한 건 아니에요. ‘착한 음식’으로서의 식초 만들기로 신념을 실천하고 싶은 거예요.”
착하게 살자! 산골 자연이 들려준 뉴스였던 모양이다. 자연은 소리 없이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라고. 그런 자연의 질문을 받은 뒤엔 마침내 내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여! 너는 누구인가?’ 월든 숲에 살았던 소로우처럼 자연에 관한 무한한 영감과 감수성을 지니긴 어렵지만, 산촌 자연 속에 사노라면 자못 성찰적인 눈매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비로소 내 삶의 굴곡과 상처가 아프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회심(回心)이 돋아 자연을 닮은 삶의 생태를 꿈꾸기도 한다. 귀촌의 재미는 이 대목에서도 짭짤하게 우러난다.
귀촌한 이들이 흔히 토로하듯이, 정현선씨 역시 내면을 스스로 살피는 삶을 사노라 말하고 있다. 도시에서보다 한결 느긋해지고 수굿해졌단다. 화통하게 잘 웃고, 잘 표현하고, 뭐든 앞장서 차돌처럼 당차게 행동하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이는 이 여자는 산촌의 나날들이 흐뭇하다. 식초 분야의 실력자로 소문이 나 곳곳의 귀촌·귀농센터에 강사로 출장을 가기도 한다. 요즘은 가양주를 만들어 상품화를 모색하고 있다. 귀촌 성공 사례로 알려져 견학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 들입다 몰입한 덕에 얻은 근사한 성과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귀촌 5년 세월 중 4년간은 심히 괴로웠다지? 왜지? 정씨 내외는 마을 원주민들과 오붓하게 어울려 사는 일에 유난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귀촌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타향살이다. 이 타향살이에 차질이 생기면 이젠 귀양살이 입문이다.
“저희는 말이죠, 귀촌 교육을 통해 마을 원주민들과의 융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내려왔어요. 융화에 실패하면 지속할 수 없다,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 그런 걸 염두에 두었죠. 그러나 막상 부딪혀보니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고통스러웠어요. 귀촌이라는 게 자칫하면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어떤 식의 불화가 벌어졌죠?”
“시골에선 남자들의 술자리가 잦습니다. 서로 거들어야 할 농사일도 많아요. 저의 남편은 이런 자리 저런 자리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동참했어요. 집안일은 뒤로 밀어두고 이웃의 농사일을 거둔다거나, 봉사할 일은 기꺼이 봉사했어요. 하루 종일 남의 농사를 돕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린 밤들이 참 많았어요.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건 갈등, 소외, 뒷담화, 그런 것들이더라고요. 이 집을 도와주면 저 집에서 불만을 품고, 저 집을 도우면 이 집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재미나 보람은커녕 하루하루가 고역스러웠어요.”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마찰이나 갈등은 양념처럼 섞여드는 거 아녜요? 산간벽지 특유의 배타성 같은 걸 염두에 두진 않았나요?”
“저희 부부가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어 행동하는 일에 인색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이 시골에 정착하기 위해 마음을 열고 안간힘을 다했어요. 그럼에도 벽을 허물기 어려웠어요. 맞아요, 벽촌의 풍습이라는 거, 도시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곳만의 풍토라는 게 엄연하구나, 그걸 넘어서기 정말 어렵네?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는 게 답이겠네? 막판엔 그런 판단이 서더라고요.”
‘신비주의 처세’로 바꾼 뒤 비로소 찾은 평화
이른바 역귀촌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원주민과의 갈등이다. 주민들의 심리와 정서를 내 것처럼 헤아려 보듬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귀촌을 해서 단숨에 인기를 끌 묘한 비결이라는 게 있겠는가. 더 통 크게 마음을 여는 수밖에 없다. 똑똑한 티를 내기보다는 얼간이인 양 어설프고 만만하게 처신하는 것도 썩 괜찮은 쇼일 수 있다. 민첩하게 생각을 굴릴 줄 아는 인물에 속할 정씨가 이를 모를 리 없을 테지만, 정작 그녀는 고민과 고독 속에서 끙끙거렸던 것 같다.
“주민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부부싸움도 늘어나더라고요. 어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였죠. 급기야 마을 사람 하나가 저희 집 진입로를 철망으로 막아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어요. 진입로 땅을 사들이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정말 뿔이 나더라고요. 이게 뭔가? 이러려고 시골에 왔나? 회의가 마구 몰려들었고, 마침내 남편 입에서 서울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나 제가 반대했죠. 실패하고 돌아가다니, 그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날 이후 생각을 완전히 바꿔먹는 것으로 살 길을 찾아냈어요.”
“뭐죠, 그게?”
“신비주의! 이제 나 신비주의로 산다! 그런 거요. 하하하.”
“마음을 여느라 공연히 힘만 빼기보다는 차라리 빗장을 거는 쪽으로? 은둔처럼?”
“해탈이죠. 비닐이고 뭐고 마구잡이로 노천에서 소각하는 모습을 참지 못해 그러지 말라 권유할 경우, ‘뭐야? 너나 잘해!’ 하는 투로 반응하는 사람들과는 싹 등 돌리고 사는 게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어요. 그건 적중한 처세였어요. 비로소 속 편하게 살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정씨는 고등어처럼 싱싱한 언사로, 말끔한 표정으로 ‘신비주의 처세’ 이후의 만족과 안심을 토로한다. 기다리고 참고 끌어안으면 상처가 아물 수 있다. 고통이라는 씨앗을 발아시켜 멀리 가는 향을 뿜는 꽃을 피울 수도 있다. 산골 벽촌이라는 쓸쓸한 공동체를, 텃세를, 폐쇄적 문화를 하나의 상처로 가늠해 나의 행보를 인내 속에서 조절하고 조화하는 처신은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것일 수 있다. 군인이 돼 별을 달고 싶은 꿈을 먹고 자랐다는 정씨는 전혀 다른 방책으로 곤경을 벗어났다. 굴종에 가까운 나약한 타협 대신, 나의 길 내가 간다는 식의 투지로 고뇌를 해결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고서야 산골짝에서 무슨 재미를 볼 수 있을꼬 싶지만, 내가 가는 길이 바로 지름길이라는 것도 여지없는 진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한갓진 시골이다. 도시의 소음과 야단법석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산골이다. 눈이 내리면 고스란히 쌓여 눈부신 설경이 펼쳐진다. 솔바람이 술렁이며 지나거나 밤하늘에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외엔 마냥 적막강산이다. 이 참신하고도 쓸쓸한 시골마을에 서점이 있다. 도시에서도 고전을 면하기 어렵다는 서점을 후미진 산골에 차리다니…. 의외성으로 보자면 이색이며, 관습의 틀을 깬 파격으로 보자면 다분히 진보적이다. 순항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변이렷다.
서점 이름은 ‘숲속 작은 도서관’. 쥔장은 6년여 전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괴산군 칠성면 산골로 귀촌한 김병록(53)씨 내외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제목에 이런 게 있다. . 사실 머리 굴려 논리를 따져 진로와 셈평을 도모하는 게 한결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김병록씨는 세세한 논리로 인생을 측량하지 않았다. 논리 대신 충동을 앞세웠다. 서울에서의 어느 날, 김씨의 내부에서 어떤 간절한 음향이 번져 나왔다. 아아, 나 시골에서 살고 싶어! 그게 귀촌의 단초였다. 그는 내면의 소리에 후다닥 부응했다. 얘기를 들어볼까.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었어요. 깊은 오지로 갈까, 교외의 전원마을로 갈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역시나 중요한 건 호구지책이었어요. 제아무리 산 좋고 물 좋은 시골로 이주한다 해도 손가락만 빨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지속가능한 게 무엇일까, 가족을 무엇으로 먹여 살릴까, 그런 생각에 불안감이 밀려들었으나 이미 귀촌 욕구는 팽배해 있었죠. 내가 기왕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로 뭘 좀 해봐야지, 하는 막연한 구상이 있었으나 또렷한 답은 나오질 않았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시골에 눌러앉아 살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하는 작심으로 귀촌을 결행했던 겁니다.”
머리를 싸맨 숙고나 장고 대신 가차 없는 결단으로 귀촌을 서둘렀던 셈이다. 신속하게 정처를 물색해 장만했고, 다니던 회사를 미련 없이 그만뒀으며, 마침내 이삿짐을 싸 시골로 내려왔다. 이른바 친환경마을을 표방하는 집단촌의 집 하나를 분양받아 이주했는데, 미처 건축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내외는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그 안에서 한동안 살림을 살았더란다.
옹색한 컨테이너 생활은 필시 뒤숭숭했을 게다. 그러나 산골 자연의 풍광이 수려하고 다채로워 견디기에 따분할 게 없었다. 자연만 한 섬려한 벗이 다시 있던가. 소리 없이 다가와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산천의 모성이란 인류가 두고두고 예찬한 조물주의 선물이지 않던가. 하지만 느긋한 유유자적은 뒀다가 나중에 해야 했으니 우선은 생계를 모색하는 게 화급했던 거다. 김병록씨는 책을 재료로 밥을 벌 궁리를 본격적으로 하고 나섰다. 김씨 부부는 원래 책과 인연이 많았다. 경기도 일산에 살 때 사립도서관을 운영한 경험이 있으며, 서울 마포에서 아내 백창화(52)씨가 공공 도서관 네 곳을 오픈하기도 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옳다구나, 책방을 차리자! 부부는 찰떡처럼 의기투합했다. 라는 책을 보고 필이 꽂혀 유럽 몇몇 나라의 시골 서점을 답사하기도 했다.
2년 만에 단단히 다진 기반
“저희가 답사한 유럽의 시골들도 우리나라처럼 이농현상으로 젊은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곳들이었어요. 그럼에도 책방이 활성화돼 있더라고요. 그게 굉장한 설렘을 줬어요. 다녀와서는 부부 공저로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후 북 스테이, 즉 책과 함께하는 민박을 운영하는 것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게 3년 전의 일이고, 2년 전부터는 민박과 책 판매를 겸한 책방으로 전환했습니다.”
“매우 독특한 발상이에요. 전에 도서관을 운영했던 경험이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었겠죠?”
“물론입니다. 부부가 공히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낸 셈이죠. 저희의 책 공간은 도서관과 책방, 민박을 결합한 형태입니다. 경제를 해결하고 문화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냈다고 자부합니다.”
“산골에서 책방을 만난다는 일, 마치 폭염에 소낙비를 만난 것처럼 신선해요. 문제는 운영이 제대로 되겠느냐, 그 점일 텐데, 이 산골까지 책을 사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걸요.”
“순풍에 돛을 달고 내달리는 중입니다. 요즘은 너무 많은 방문자들이 들이닥쳐 고심할 정도예요. 처음엔 최소 5년은 지나야 기반이 잡힐 것으로 예상했으나 2년 안짝에 자리가 잡혔어요.”
“저런! 비결이 뭐죠?”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덕분입니다. 게다가 저희 부부 공저로 2015년에 낸 가 꽤 많이 팔려나가면서 바람직한 홍보 효과를 거두었어요. 한 가지 부연한다면, 우리 책방에 오신 분들은 반드시 책 한 권은 사가야 한다는 수칙을 마련했는데, 그 역시 성과를 거두게 했죠.”
“무조건 책을 사야 한다? 그토록 도도한 비즈니스가 탈 없이 먹혀든 거예요?”
“아시다시피 오프라인 서점들은 대체로 고전합니다. 책이 안 팔려요. 왜지? 왜 안 팔리지? 제가 고민과 분석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책을 사고 싶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관건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저희는 많은 책 관련 정보와 프로그램을 운용하거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북 콘서트를 열거나, 도서관처럼 종일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그러자 자신감이 붙었어요. 식당에 일단 들어가면 누구나 음식을 시켜먹어야 하듯이, 서점 역시 그런 식의 관습을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와 같은 신념으로, 서점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욕을 좀 먹더라도 무조건 책을 구입하도록 했죠.”
김씨 내외는 머리를 주로 쓰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남달리 기발하고도 날렵한 두뇌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김씨는 미디어 분야를 전공했다. 아내는 국문과에서 배운 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한 바 있다.
실내의 표정이 책이 있는 카페풍이라면, 마당은 명랑만화 속에 나올 법한 놀이터 분위기다. 어린 자녀들을 대동하고 방문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구색이다. 김씨 부부는 비지땀을 비처럼 쏟으며 집 안팎의 목조 구조물들을 손수 만들었다. 손에 손을 잡고 등장하는 가족들에게, 연인들에게, 부부들에게, ‘숲속 작은 도서관’은 색다른 체험을 제공하며, 추억을 새기도록 하며, 책이라는 골치 아픈 물건이 삼겹살보다도 향기로운 풍미를 야기할 수 있다는 실감을 하도록 이바지한다. 게다가 산골 특유의 정적과 나무숲과 온기에 찬 에테르는 또 얼마나 값진 보너스인가. 너희는 해변에서 회를 먹으며 놀았니? 우린 숲속 책방에서 우아한 한나절을 노닐었다! 아마도 방문자 중엔 그리 토설하는 이가 드물지 않을 게다. 진심으로 구하면 적중하게 마련이다. 줏대에 찬 정신이 깃들면 장사도 문화에 도달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이미 행운
김병록씨의 책방은 기세 돋운 활보로 늠름하다. 따라서 의식주에 궁할 게 없다. 시련과 고생을 피하기 어려운 게 귀촌이라지만, 그는 끄떡없다. 애초에 선망했던 시골살이의 낙을 짬짬이 누리는 일도 흐뭇하다. 자연의 조화와 경이를 일깨워주는 산골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평온하게 건사하는 일은 도시에선 얻을 수 없는 진품.
“제가 귀촌을 통해 비로소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의 적막 덕분에 잠다운 잠을 자게 된 것 같아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쓰는 일이 얼마나 좋은가를 깨닫기도 했어요. 예컨대 목공일을 원 없이 해봤는데요, 심신이 맑게 깨어나더라고요. 나무와 화초를 심어 정원을 가꾸는 일, 텃밭을 일구는 일도 참 좋았어요. 건방진 얘기이지만, 이제는 자연의 순환이랄까, 낳고 자라고 커서 마침내 죽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 죽음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고 말이죠.”
“선생의 책방은 산골 책방으로 기반을 다진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싶네요.”
“제가 시골에 내려온 뒤 남들에게서 들은 가장 흔한 질문이 ‘그 외진 산골에서 뭘 먹고 사느냐, 생활이 되느냐?’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의문들은 제게 기우에 불과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건데요, 막상 하고 싶은 일을 했으나 돈과 연결이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할지라도 무방하다 생각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행운이지 않겠어요?”
산골에서 자신의 일을 찾은 사람의 자부심이 오롯하다. 진부하거나 쓸쓸할 수 있는 삶에 일로써 빛을 끌어들인 사람 고유의 자족감이 완연하다. 산골 책방이 건재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세상을 건너는 옹골찬 비결 한 자락을 들여다본 듯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귀로의 산경(山景)이 환하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글 박원식 소설가
항구에 닻을 내린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러자고 배를 만든 게 아니다. 항해에 나선 배라야 배답다. 거친 파랑을 헤치고, 멀거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배는 인생을 닮았다. 모험이나 도발이 없는 삶이란 수족관처럼 진부하지 않던가.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던 이기순(52)씨가 남편 이병철(57)씨의 손을 잡아끌어 시골로 들어간 건 모험적 항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다. 이기순씨의 시골살이는 암초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대해를 표류 중이다. 취재 섭외를 위해 통화를 할 때, 이기순씨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겸사(謙辭)였다.
“남들은 그럴싸하게 바라보지만, 사실 속사정은 그게 아니에요. 아마도 저희 부부의 현실은 실패 사례로 더 어울릴 거예요. 그냥 차나 한 잔 드시고 간다는 기분으로 오세요.”
이기순씨는 오랫동안 암벽 등반을 즐겼다. 휴일이면 쪼르르 산으로 달려가 잔나비처럼 바위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추락사고를 당해 온몸에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 진통제를 달고 산다. 이 불행한 사고는 용케도 시골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건강을 돋우자는 착상을 했던 거다. 그즈음 중소기업 상무이사였던 남편 이기철씨는 명퇴의 강박감에 시달리며 전전긍긍 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이 역시 도시 탈출의 배경이 되었다. 말하자면 부부가 의기투합했던 것. 까짓것, 우리 시골로 가서 새로 시작합시다! 이기순씨가 앞장서 선창을 했다. 그래그래, 그러세! 남편이 후렴을 읊으며 선선히 뒤를 받쳤다. 그게 4년 전의 일이었다지.
시골 살림을 결단하며 꿈꾸고 그린 게 많았을 게다. 우선은 볕이 잘 드는 남향 터를 잡아야 할 테고, 폼 나게 수려한 전원주택을 지어야 하고, 철따라 꽃이 피어 요요하게 속삭일 정원을 꾸며야 하며, 달빛과 별빛이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밤에 부부 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일 만한 정자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생활이라는 게 흔히 돈이라는 요물의 농간에 휘둘리게 마련인데, 이들 부부도 자금이 넉넉하질 않아 두통을 앓았다. 그래서 소득을 흐벅지게 올릴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그 결과로 시작한 게 오이농사였다. 이들이 사는 천안시 병천면은 오이의 최대 주산지. 재배 기술도, 유통 루트도 탄탄한 지역이다. 부부는 2000평에 달하는 농지에 오이를 재배하는 것으로 시골생활의 시동을 걸었다. 농토는 임대를 했다. 그 위에 설치된 시설 하우스는 매입을 했다. 거창한 시발이었다. ‘가브리엘 농장’이라는 팻말도 새겨 걸었다. 하지만 업무에 바쁜 행운의 여신은 그들에게 사소한 윙크조차 보내주질 않았다. 첫해는 물론 둘째 해, 셋째 해까지 내리 실패를 보고 말았다. 이기순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농사라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안간힘을 다해 노력해도 매년 결과는 참담했어요. 기술력 부족으로 생산량이 저조해 낭패를 보기도 했고, 풍작일 경우에도 가격폭락으로 적자가 크게 났어요. 칼자루를 쥔 중도매인들의 횡포에 당하기도 했고요. 갖고 있던 돈을 모두 까먹었고, 빚이 늘어 파산지경에 몰렸어요. 그래도 쌀독에 쌀은 떨어지진 않았어요(웃음). 예산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친정엄마가 쌀을 보내주셔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게 원예농업이죠. 미리 사전 교육을 받진 않았나요? 남의 농장에서 일단 실력을 길렀다거나….”
“별다른 준비 없이 무작정 뛰어들다시피 했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뭐 잘되겠지, 하는 기분으로.”
“저런! 환상적인 귀농이었던 거예요?”
“다분히 그런 면이 있었죠.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분들에게 요즘 제가 강조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낭만적인 생각으로 시골에 들어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산이 좋다고 무작정 산골로 가고, 바다가 좋다고 해변으로 귀촌하는 식의 출발은 극히 위험해서죠. 사실 저희 부부가 단순한 환상으로 귀농을 할 만큼의 바보들은 아니에요. 충분치는 않았을망정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게 농촌 현실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와 악재들이 들이닥치더라고요.”
“차라리 초기에 발을 빼는 게 현명했을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기에 포기 같은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내년엔 좋아지겠지, 차차 타산을 맞출 수 있겠지, 그런 희망으로 더욱 공을 들이고 땀을 쏟았어요. 농사에 어느 정도 물정이 트이면서 우환 중에도 희망이 솟구치곤 했죠. 내 손길을 통해 건강하게 잘 커가는 작물들을 바라보는 경이로움도 견딜 수 있는 힘이었어요. 폭염에 시들시들 말라가는 오이를 볼 때는, 마치 어린 자식이 병상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것 같아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런 경험조차 농사에 애착을 갖게 하는 긍정적 체험이었어요. 정작 후회는 다른 문제에서 왔어요. 마을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일이 참 힘들었거든요. 이른바 텃세라는 것 말예요.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지만 한동안 이방인 취급을 받았어요.”
마을 원주민들의 텃세를 견뎌내는 일이 농사보다 더 어려워
전통적으로 유목사회와 달리 농경사회 구성원들은 내 땅, 내 영토에 대한 질긴 집착을 가지고 살아왔다. 공동체 의식도 발달했다. 외지인들이 끼어드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지만, 토박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원생활자들의 무신경하고 비사교적인 위세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무례를 범하지만 않으면 텃세에 걸려들 일이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기순씨 내외가 겪은 텃세는 워낙 자심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시골 인심이 예전과 다르다는 항간의 논평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확인한 모양이다. 삶이라는 생존의 들판치고 어딘들 전장(戰場) 아닌 곳이 있을까. 코피 터지는 경쟁의 난리 블루스, 그게 세태이지 않던가. 이기순씨는 시골의 텃세라는 걸, 허공에 미만한 공기처럼, 세상살이에 당연히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기본 조건으로 치부하기로 한 것 같다.
“차라리 마을을 떠날까, 그런 궁리를 할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에 부대꼈지만 그냥 감수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원주민들과 저희의 정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로 살갑게 어울려 지내는 게 힘들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흙이나 작물들은 텃세를 부리는 법이 없죠?”
“저나 남편이나 농사라는 건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흙이 지닌 생명력과 식물들의 정직한 성장에 곧바로 매료됐어요. 아아, 흙 냄새, 작물들의 숨결은 또 얼마나 좋은지…. 해마다 농사에 연패를 해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땅을 상대로 한 농사라는 게 신성한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이상해요. 당신은 지난해 천안시가 선정한 우수농민이지만 사실은 곤경에 처했다는 거!”
“농촌의 현실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흔해요. 수억대 소득을 올리는 농가들이 매스컴에 등장하지만, 매출과 실소득은 크게 다르죠. 저희도 연간 매출이 1억쯤 되지만 갖가지 투자비용을 제하면 오히려 적자가 나더라고요. 적자가 해마다 거듭되다 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빚을 내서 빚을 갚아야 하고, 이런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예요.”
“어이하나?”
“혹독한 공부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좌절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어느덧 단련이 되고 나름의 내공도 생긴 거 같아요. 이젠 비로소 길이 보여요. 저비용 고효율 농업으로 가야 하는데, 대안이 보이고 있어요. 일단은 작물을 다양화할 예정이에요.”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이기순씨 내외는 오이 하우스 안에서 산다. 7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살림을 한다. 이 옹색한 정경을 목도한 친정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이 쯧쯧 혀를 차지만, 그녀는 이마저도 오히려 복되지 아니한가, 하는 투로 담담하다. 애당초 근사한 집을 짓기 위해 대지 150평을 장만해두었으나 빚잔치 통에 순간에 날아갔다. 그 바람에 컨테이너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이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냉큼 받아들이기를 이미 오래전에 했다. 싱긋 웃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시라.
“‘난 말이야, 2000평 정원에 7평짜리 원룸에 살아. 이 정도면 나쁜 건 아니지 않니?’ 제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그래요. 남들에겐 철딱서니 없는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컨테이너에 산다고 해서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그렇게 제가 저에게 들려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요. 지금의 형편에서 방바닥에 등 붙이고 부부가 함께 따뜻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도 큰 다행 아니겠어요?”
“왜 아니겠어요? 참새는 옷 한 벌 입은 게 없이 나뭇가지 한 줌을 움켜쥐고 엄동의 밤을 무사히 지내죠. 최소한의 의식주만으로도 기꺼이 견딘다는 건 일종의 절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에 살 땐 제가 돈을 펑펑 썼어요. 해외여행이며 쇼핑이며,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해봤어요. 그래서 지금의 어려운 형편에 정신까지 약해지진 않아요. 남편 역시 강인하고 똑똑한 사람이라 끄떡없어요. 돈 때문에 허둥지둥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안쓰럽지만, 우리 부지런히 뛰어 멋지게 농장을 살려내자고 등 두들겨 격려하죠. 남편은 원래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는데요, 요즘도 잠들기 전에 꼭 외국어 공부를 해요. 나중에 외국인들이 우리 농장에 견학 올 것을 대비해서죠.”
“산에서 당한 사고로 온몸을 다쳤다 했죠? 지금은 매우 건강해보여요. 그건 귀농 덕분일까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걸음새조차 나사 풀린 바퀴처럼 휘청거렸어요. 그러다가 농사일에 매달리는 사이 건강이 크게 좋아졌죠. 농사를 노동이 아니라 운동으로 여긴 덕분이겠죠. 정신은 더욱 건강하게 깨어난 것 같아요. 경제 면에서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감성이나 정서는 더 밝고 풍부하게 성숙하는 기분? 그런 걸 느껴요. 하우스 안의 작물들, 바깥으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이 자주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저의 어릴 적 꿈은 문학이었답니다. 요즘도 좋은 글을 찾아 읽거나, 뭔가 느낌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장을 꺼내 글을 써요. 주로 시골생활에 관한 단상이지만, 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죠. 이 역시 귀농이 준 행복이라 여겨요. 이쯤이면 괜찮게 사는 거 아녜요(웃음)?”
“사람이 농사를 통해 작물을 기르지만, 동시에 농사가 사람을 키우기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흔히들 돈에 사로잡혀 살지만, 남에게 돈 빌리지 않을 정도만 되면 잘사는 것일 테고,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만족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텐데, 저는 농사에 만족해요. 흙에 뜨거운 애정을 느껴요. 비록 아직은 고전하고 있지만,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크는 나무가 있겠어요?”
가시밭길을 거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꽃길이 있나? 파도를 타넘지 않고서 바다를 건널 수 있던가? 이기순이라는 이름의 선박은 암초를 만나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잠정적인 조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산수 풍광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요지(要地)에 터를 잡은 셈이렷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인 조동진씨(58)가 동갑내기 아내 고미선씨를 대동하고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한 건 9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을 애호한다. 지리산의 너그러운 품에 병아리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갈 꿈을 꾸기도 한다. 조동진씨가 그랬다. 서울에서, 분당에서, 증권맨으로 뛰었던 그는 휴가철이면 매번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지리산과 교제를 하는 사이 담뿍 정이 들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정 들어 사무치게 그리우면 투신하게 마련이다. 나, 퇴직하면 지리산에 살래! 그는 그렇게 안으로 다지고 밖으로는 광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인생의 항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이다. 대양의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오지만 돛의 향방에 따라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간다. 조동진은 의지의 돛, 지향의 눈을 돋워 지리산 산골을 겨누었던 것이다. 사연의 보따리를 헤쳐 볼까.
“악양의 산자락에 있는 감나무 과수원 3306㎡(1000평)를 미리 사들이는 것으로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대충 다 컸겠다, 아내만 끌고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집사람이 원래 도회적 성향이라서 시골살이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질 못했던 겁니다. 세뇌교육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던 중 아내가 원인 미상의 중한 폐질환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이 말하길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걸 어떡하나. 그래, 자연요법으로 고쳐보자. 이왕지사 땅도 사놨으니까 산골로 가자. 그렇게 아내와 합의를 보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지리산의 그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제가 실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리산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는데요, 그 웅장한 풍경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에 가면 힘이 쭉 빠지는 반면, 산에 가면, 특히나 지리산에 가면 힘이 난다는 걸 자주 느꼈어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잘 맞는 거겠죠.”
“한옥이 매우 근사해요. 저토록 야무진 한옥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아내의 폐질환을 다스리기엔 한옥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황토와 목재를 재료로 한 한옥은 숨 쉬는 집이라 하죠. 그러나 남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기(工期)도 길고, 관리도 힘드니까.”
“저는 말이죠, 이왕에 산골의 자연과 야생을 벗 삼아 살 거라면 작고 소박한 집을 짓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아니랴. 동감입니다. 그저 값싸고 편리한 현대식 집을 짓는 게 좋을 겁니다. 다만, 사랑채 정도는 제법 운치를 풍기는 작은 흙집을 짓는 것도 재미날 거예요.”
조동진씨의 거처 한편엔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지은 사랑채가 있다. 누각이 딸려 있는 소담한 별채로 조씨가 손수 설계해 지었다. 여자로 치면 음전하면서도 은근히 요염한 멋을 풍기는 가인을 닮은 집이다. 부부가 수시로 눈을 맞추며 단란하게 속닥이는 데에 사랑채의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드는 벗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쓸모가 많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노동이 아니라 축제
조씨의 섬세한 조력과 자연의 협찬 덕분일 테지.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병증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시골 생활이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한다. 감 농사도 순항이다. 한적한 산골에 입장했으니 그저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자연을 즐기면 그만일 성 싶지만, 조동진씨는 농사일이 오히려 구미에 맞다. 애초에 사들인 땅이 감 과수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감 농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
“노후의 직업으로 농사처럼 이상적인 게 없습니다. 정년퇴직 없지, 누가 간섭하지를 않지, 적당한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지,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사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축제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들 해요. 벌이가 되질 않는다는 거죠.”
“저도 경제적인 면에 관한 두려움이 많았지만 적절히 극복해 왔어요. 2314㎡(700평) 규모의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이나 감식초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연간 12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립니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시골에선 말이죠, 골프 할 일 없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부를 일 없지, 수입이 적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생각보다는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습니다.”
흔히 귀촌과 귀농을 구분해서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한다. 조동진씨는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농사에 목을 걸다시피 들입다 땅을 파는 인물은 아니다. 농사에 생활의 한 자락을 걸침으로써 한결 뿌듯한 실속과 실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을 뿐이다. 그의 시골살이 촉이 이렇게 살아 있다.
“제 경우는 귀농을 가장한 귀촌인이라 봐야 정확할 겁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거두는 귀촌 생활도 즐겁겠지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남자는 퇴직을 했더라도 명함이 있어야 해요. 992㎡(300평) 이상의 농사를 지을 경우엔 누구나 명함을 만들 수 있어요. 일테면 ‘지리산 농원 대표이사’라거나, 그런 식으로 떠억 명함을 새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992㎡(300평) 정도의 농사만 지으면 농업인 등록을 할 수가 있으며, 온갖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할까? 가급적 농업인 자격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루만 일해도 폼 잡을 수 있는 게 농사에요. 시골에선 말이죠, 하는 일 없이 늘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면 욕먹습니다. 그러나 농업인으로서 일을 할 경우엔 술을 퍼마셔도 욕먹을 일이 없어져요.”
“사전에 열심히 귀농교육을 받고 입촌한 사람들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 아녜요?”
“도시 인구를 분산하고, 실업을 해소하고, 도농격차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사실 허점이 아주 많습니다. 귀농교육이랍시고 억대 수입이니, 특작물이나 유기농을 운운하며 과도하게 분위기를 띄우지만 사실 허황한 얘기들에 불과해요. 가령,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유기농에 도전하는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이나 어렵고 위험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죠. 특수작물이나 유기농을 요란하게 하려 하지 말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하라는 것! 그래야 생산이나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으며, 원주민들과의 소통도 빨라져요.”
“빈손으로 귀촌할 경우엔 어떤 재주를 발휘해야 하죠?”
“도시에서는 움직이면 돈이 나가지만 시골에선 움직일수록 돈이 들어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양육할 자녀가 없이 부부만 귀농할 경우, 빈손으로 시작해도 무방해요. 퇴직을 한 시니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건강만 있다면, 자세를 낮출 수 있다면,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일당 10만원짜리 일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한 달에 열흘만 날품을 팔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겸손한 마음, 열린 태도이겠죠. 퇴직을 뜻하는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은퇴 뒤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 자체를 싹 바꿔야 합니다. 돈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는 쪽으로 삶의 잣대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골에서 오히려 진정한 문화생활 누려
사람들은 흔히 시골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믿는다. 갖가지 공연과 전시회 따위가 펼쳐지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살다 보면, 그저 주야간에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칫 우울증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조동진씨에 따르면 이는 미신에 가깝다.
“서울에서 공연 구경을 가는 건 어쩌다 한번 아닐까? 공연물이 많다지만 막상 향유하긴 어려운 게 도시살이에요. 요즘의 시골엔 지역축제나 산사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가 잦습니다. 아이돌 가수에 밀린 7080 가수들까지 대거 참여해요. 저는 이곳 공연장에서 소찬휘라거나 김재동 같은 연예인들을 처음 봤어요. 게다가 관람료는 전적으로 무료에요. 뒤풀이엔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오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면 산야 자체가 뮤지엄이겠죠.”
“제가 도시에 살며 열네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이사 때마다 고려한 게 창밖으로 달을 볼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여기 산골의 달밤은 얼마나 좋은지요. 사랑채 정자에 앉아 달빛 흥건한 마당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하는 일은 최상의 낙입니다. 달 없는 밤엔 별들이 허공에 모이죠. 때로 반딧불이가 공연을 하고, 빗소리가 악곡을 연주하고, 사시사철 모든 풍경이 장관입니다. 뒷산의 야생화들이 뿜는 향기의 잔치는 또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다양한 자연 현상들이 명약이자 보약입니다. 시골엔 의료시설이 빈약하다는 소리들이 있지만, 제 아내가 병을 다스린 걸 보면, 저 산야 자체가 하나의 병원이라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앗! 시골 예찬이 극에 달하셨다(웃음). 도대체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시장에서 전을 벌리고 옷을 팔기도 했어요. 박수를 치며, 싸요, 싸요! 외치면서요. 그런 고통의 시절을 겪은 게 인생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나름 깨달았어요. 그러하니, 제가 원해서 들어온 산골에서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는데요,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해서, 최근 지리산웰빙귀농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대차게 밀어붙일 참입니다(웃음).”
10년 가까이 흐른 시골 생활을 통해 조씨는 어언 선수에 이르렀나? 귀촌에 관한 낙관과 긍정에 경계가 없구나.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일본에 소츠콘(卒婚)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졸업과 결혼의 합성어로 결혼을 졸업하다.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혼은 법적으로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것이지만 졸혼은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실제는 부부의 관계는 청산한 사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2014년 스기야마 유미코가 쓴 ‘졸혼을 권함’이라는 책이 화재가 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별거는 이혼의 전단계로 상대와의 관계를 정리하기위한 거리를 두는 시기라면 졸혼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준 비단계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은퇴를 하고 귀촌생활을 원하지만 아내는 익숙한 도시생활과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한발작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럴 때 졸혼을 선언 하면서 각자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내게는 부부동반으로 세 가족이 만나는 조촐한 모임이 있습니다. 30년도 더 넘어 젊은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끼리 정분을 이어오다가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먼 거리는 아닙니다. 질기고 질긴 인연으로 매월 한 번씩 만납니다. 밥값은 돌아가면서 쏘는 식으로 처리합니다. 이중에 한집이 앞에서 예를 든 일본의 졸혼과 비슷한 생활을 합니다.
남편이 생활비로 일정금액을 아내에게 주고 잠도 집에 들어와서 자지만 별거하는 형식으로 다른 방을 각자 쓴다고 합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남편은 밖에서 밥을 사먹고 집안에서는 일절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 부부인데 속으로 보면 남과 다를 봐가 없습니다. 어찌 대화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나 같으면 속터져 죽을 것 같은데 잘도 견디며 생글생글 웃습니다.
일본식 졸혼의 태동배경이 아내가 퇴직한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의 수발 등 아내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황혼이혼이 생겨났고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이혼을 하면 남편의 연금의 상당액을 아내가 받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불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내들이 구속받지 않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고 황혼이혼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부인이 황혼이혼을 요구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졸혼의 장점이라고 합니다. 반면 단점은 두 집 살림을 하니까 생활비가 많이 들고 혼자 있을 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해도 119에 전화를 해주거나 간병 등 직접적인 도움을 배우자로부터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늘어나는 황혼이혼을 줄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졸혼 사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국형 졸혼으로 한집에 별거 하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황혼이혼도 막고 서로 도움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집에 살면서 남남처럼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눈에 안 보이면 모를까 같이 있으면서 투명인간처럼 서로 행동한다는 것이 속에서 천불이 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혼보다는 시간을 바탕으로 화해를 모색한다고 봅니다. 앞에서 예를 든 내가 아는 부부처럼 실제 졸혼 가정을 영위하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맞벌이 부부는 연금도 따로 받으니 경제력으로도 짱짱하여 아내는 남편의 잔소리를 듣고 살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나라도 통계에 잡히지 않는 졸혼 부부가 자꾸 늘어날까봐 걱정을 합니다. 나이 들어 ‘부부함께 하기’ 등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예전의 가부장만 고집하다가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박원식 소설가
귀촌이란 단순히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라는,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꿈과 양상, 지향까지 덩달아 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했던 거주지에서 전혀 다른 장소로 주저 없이 옮겨 간다는 점에서는, 귀촌이란 안주하지 않는 정신의 소산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산골에 사는 박미향(58)·엄팔수(61)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제2막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7월의 성성한 초록 숲이 바람에 술렁거린다. 숲 사이 오솔길을 걸으니 나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향훈이 상큼하다. 저 멀리 칠칠하게 늘어선 산봉우리들은 비안개의 희롱에 취해 아련하다. 계곡에선 솰솰 냇물이 흐르며, 머잖은 곳엔 호수가 있다. 사방팔방으로 멋들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박미향 부부의 시골집은 이 모든 수려한 자연경관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계곡 쪽 둔덕에 자리 잡았다. 터를 잡은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구나.
박미향 부부가 산골에 둥지를 튼 건 13년 전의 일. 원래는 청주 시내 아파트에서 살았다. 도회의 아파트생활은 나름대로 안전하고 쾌적했기에 딱히 불만이랄 건 없었단다. 그러나 사람에겐 못 말릴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 중년 나이에 접어들던 즈음, 박미향씨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글거리는 어떤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유심히 자신을 관찰한 끝에 소녀기 때 경험한 시골살이에 관한 향수가 강렬하게 들끓는 걸 알아차렸다. 산골에서 꽃과 나무, 새소리와 물소리를 벗 삼아 사는 게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귀촌이라는 사건의 단초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올드 뉴스가 있지만, 그건 진부한 소식에 불과하다. 아내는 동쪽으로 냅다 뛰는데, 남편은 서쪽으로 쌔앵 돌아서기도 하는 게 부부관계이지 않던가. 귀촌의 경우에도, 부부가 의기투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산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마누라들은 십중팔구 단박에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영리하고 영악한 고등생물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답답해질 가능성이 높은 시골살이라는 걸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귀촌에 의기투합
그러나 박미향 부부는 달랐다. 박미향이 먼저 말을 타고 귀촌의 깃발을 드높이 들었고, 수더분하고 너그러운 남편 엄팔수는 뒤따라오는 수레처럼 선선히 따랐다. 빈틈없는 의기투합과 일심동체의 힘으로 산골살림을 착수하였으니, 그 시발도 과정도 결산도 자못 오붓한 것이었다. 박미향의 얘기를 들어볼까?
“일단 귀촌하기로 합의를 본 뒤로는 일사천리로 추진했어요. 남편은 직업군인이었어요, 정년을 채우고 전역한 다음 귀촌을 하기로 했으나, 굳이 뜸들일 게 뭐 있겠나 싶어 서둘렀어요. 정년 5년을 남긴 시점에 후다닥 이 산골로 들어온 거예요.”
“남편에게 감사패라도 드리진 않았나요?(웃음)”
“어쩌면 매우 공정한 합의였죠. 결혼 뒤 긴 세월 동안 저는 오직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공들여 기르는 일에 전념하며 살았거든요. 그건 좀 억울한 거 아니에요?(웃음) 이제는 남편인 당신이 나를 외조해주소서, 제가 그런 요청을 했어요. 그러자 남편이 조용히 수긍해줬어요. 고맙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대목이죠.”
“부부가 튼튼한 유대감을 갖고 귀촌을 했을 경우에도, 막상 실제로 촌살림을 시작하고 나서는 예상치 못했던 애환을 겪는 걸 흔히 봅니다. 매우 단기간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이혼을 하고 갈라서는 부부도 있더군요.”
“맞아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은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례를 저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저는요, 귀촌 초기부터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귀촌을 로망으로 삼은 분들이 많을 텐데,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과연 내가, 우리 부부가, 생소한 산골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정서가 맞는지,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그런 걸 우선적으로 점검해야 해요.”
“마을 원주민들과 융화하는 일도 쉽진 않았겠죠?”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이라서 주민과 교류할 일도 없었지만, 사실 초기엔 심한 소외감을 느꼈어요. 그러나 이젠 살갑게 사촌처럼 지냅니다. 도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저도 처음엔 시골 인심이 사나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혀 사실과 달라요. 문제를 일으키는 건 늘 도시인들 쪽이죠.”
마음을 활짝 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가 없다. 반면에,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마음을 탁 열어 헤칠 수 없다. 소소한 애환과 갈등이 왜 없었으랴마는, 박미향 부부는 산골 생활에 매우 적극적으로 적응했으며, 그럴 수 있었던 기반은 산촌살이의 즐거움이라는 명품을 신속하게 얻었다는 데에 있다.
자연의 제전에 늘 감동과 갈채를
그렇다면 귀촌의 무엇이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우선은 도시의 메마른 풍경과는 다른 산골의 자연 풍치가 주는 심미적 만족감과 정서적 위안이 이 부부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숲, 황홀하게 피었다가 상처처럼 시드는 온갖 들꽃들이 전하는 철학의 표정, 사람이 곤충이나 풀꽃과 하등에 다를 게 없다는 벅찬 상념들, 조화롭게 저 알아서 흘러가는 생태계가 전하는 유유함…. 박미향은 자연이 펼치는 제전에 매번 갈채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무엇보다 막대한 즐거움은 박미향이 귀촌의 나날들을 통해 꽃차 전문가로 변신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산골에서 풀이나 뽑고 살 수는 없었던 그녀는, 평소에 좋아하던 꽃들로 꽃차를 만드는 취미생활을 일삼아 거듭했다. 그러다가 노하우가 쌓이고, 이름이 알려지고, ‘꽃차연구소’라는 것 까지를 차리게 되었다. 아마추어적 취미를 밀어붙여 프로의 대열에 올라선 것. 요즘의 그녀는 꽃차 강의를 다니느라 부산하다.
“아이들 키우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 알았는데, 이제 저는 더 진정한 행복을 찾았어요. 산과 들에 가득한 들꽃들로 꽃차를 만들어 도시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취미생활이, 꽃차 전문가로 성장할 계기가 될 줄은 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근래에 꽃차 붐이 분 것도 행운이었겠어요?”
“맞아요. 인생이란 정말 오묘한 것이에요. 제가 원래 꽃을 좋아해서 청주에 살 때에도 미장원이나 옷가게를 가기보다는 틈나면 꽃집을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귀촌을 계기로 꽃차 전문가로 거듭 태어난 셈이에요.”
“그걸 제2의 인생이라 하겠죠?”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해온 일이었을 뿐인데, 이젠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거나 멀리 외지에서 강의 요청도 많아요. 물론 수입도 쏠쏠합니다. 남편의 연금보다는 많으려나?(웃음) 요즘은 세상살이가 참 재미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산다는 것, 그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꽃차의 매력은 뭐라 생각하시는지?”
“우선 시각적으로 아주 예뻐요. 덖어진 꽃차가, 찻잔 속 뜨거운 물에서 풀어지며,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걸 바라보면서 향과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 그게 사람들을 매료하는 거 같아요.”
산골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채로 한가하게 노는 것도 행복이자 도락이다. 텃밭 농사건 약초 채집이건, 소규모로나마 몸을 쓰는 일을 찾아내 귀촌생활의 생기를 불러 넣는 것도 현명하다. 또는, 내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을 드디어 찾아내 몸과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 있다면 그건 최상의 복락이겠지. 매우 신중하거나 내향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박미향의 안면에 정착한 미소를 보노라면, 귀촌을 통한 자기 변신과, 그에 따른 만족의 크기가 자못 오롯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면민들과 함께 밴드를 만든 남편
귀촌 직후 한동안, 박미향의 도시 친구들은 후미진 산골에 박혀 사는 박미향을 걱정하고 염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산골의 자연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우정, 또는 일을 찾아 투신하는 열정은 고독하기 십상인 인생을 보완하는 질료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의 태도는 이제 싹 바뀌었다. 오히려 박미향을 선망한다는 게 아닌가.
“친구들은 처음엔, 미향이가 산골에서 얼마나 견디겠는가 하며, 너 언제 나올 거니? 산골에 살아보니 무섭고 외롭지? 그렇게들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들이 쑥 들어갔어요.(웃음) 오히려 저를 부러워해요.”
“시골 생활의 단순한 패턴은 자칫 귀차니즘을 불러올 수도 있을 거예요. 부부가 날마다 24시간 같이 붙어산다는 게 때로 지겹진 않나요?(웃음)”
“왜 안 지겹겠어요?(웃음) 때로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묵언수행이나 해야지, 하고선 아예 입을 봉합니다. 그게 제가 자제하는 방식이며 최선책에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참. 남편은요, 드럼을 쳐서 스트레스를 신나게 날려 버립니다. 면민 12명과 어울려 밴드도 만들었는데, 경로잔치 같은 곳에 위문공연을 다니곤 해요.”
“귀촌을 원하는 시니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귀촌은 실패할 확률도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현실은 녹록지않으니까.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해요. 요즘은 ‘귀촌교육’을 행하는 기관이 많아요. 미리 수강을 해두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본인의 성향이 산골과 조화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 이웃 원주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그쯤이면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공자나 맹자를 길잡이로 삼은 인생도 근사할 수 있지만, ‘웃자’나 ‘놀자’와 동행하는 삶은 한결 경쾌하고 유쾌하다. 박미향은 귀촌을 계기로 매우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린다. 꽃차를 통해 평온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안락하게 노는 일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를 쾌거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으리라. 인생의 쓸쓸한 황혼녘에, 오히려 환하게 생동하며 밝아오는 아침을 다시 맞이한 셈이니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 지난달 통계청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밝힌 귀농·귀촌인 통계를 보면,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는 3만2424가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2년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것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앞으로 귀농·귀촌인구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도시의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시골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낙후된 의료시설과 허술한 치안 속에서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경제적으로 덜 풍족한 생활은 필연적이다. 원주민의 텃세도 결코 우습게 넘길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시보다 더욱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시골인지도 모른다.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전국의 귀농귀촌 현장을 돌아보며 성공적인 귀농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 그 방안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본다.
“장흥은 기후가 온화하고 산이 좋고 강이 흐르는 등 자연환경이 좋습니다. 해산물과 표고버섯 등 먹거리도 풍부합니다. 인구보다 사육하는 소가 더 많지요. 토요시장에는 주말이면 8000명의 관광객이 다녀갑니다. 다른 농촌지역에서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장흥은 살기가 좋아 인구가 4년 연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김영윤 장흥군청 계장은 장흥이 귀농지역으로 선호받는 이유를 묻자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같이 답했다. 장흥에 내려가 보면 김 계장의 발언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 ‘정남진’으로도 불리는 장흥이 귀농의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남도가 지난해 발표한 귀농가구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귀농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1990년부터 2012년 10월까지 756가구가 귀농해 장흥이 전남도 22개 시·군 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지역으로 집계됐다.
장흥의 저렴한 땅값과 따뜻한 기후조건이 장점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여기에 산과 들, 바다와 호수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연환경과 장흥군의 적극적인 귀농지원 정책도 많은 도시민을 끌어들인 요인이다.
◆귀농어업인 창업자금 및 주택수리비 지원
장흥군은 귀농어업 희망자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창업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농림축산식품부가 각 지자체와 공통으로 진행하고 있는 융자방식의 귀농어업 창업 및 주택구입 지원사업과는 다르다.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구별 최대 1000만원의 한도 내에서 귀농어업인(이하 귀농자)과 장흥군이 반반씩 부담하는 방식이다.
지원자격은 도시지역에서 1년 이상 농어업 이외의 다른 산업에 종사하다가 2011년 1월1일 이후 장흥군으로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하는 65세 이하의 귀농자이다. 농식품부, 농촌진흥청 및 지자체 주관의 귀농교육을 3주 이상(또는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한다. 귀농자 중 영농종사 기간이 3월 이상인 자, 농업계 학교 출신자, 후계농업인으로 선정되었던 자, 농산업인턴 이수자(3월 이상)는 귀농교육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세대주가 가족과 함께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해야 하며 장흥군에서 직장, 자녀교육 등을 위해 일시적으로 도시로 이주헀다가 3년 이내 다시 장흥군으로 전입한 경우는 지원받을 수 없다. 보조금을 지급받고 5년 이내 타 지역 전출 및 영농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 즉시 보조금은 회수 조치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장흥군은 귀농자의 주택수리비도 지원하고 있다. 귀농자가 주택 내외부 수리, 보일러, 화장실, 부속시설 개보수를 한 경우 가구당 500만원 이내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상속, 증여를 포함해 주택을 구입하거나 5년 이상 임차한 귀농자가 해당된다. 또 장흥군에서는 귀농자이 귀농학교 수료 시 1인당 30만원 한도에서 수강료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농식품부와 공통으로 진행하는 귀농자 창업 및 주택구입 지원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농지구입이나 비닐하우스 설치, 축사 신축, 농기계 구입 등 농어업 창업자금은 가구당 2억원까지 지원한다. 이자는 연 3%이며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조건이다.
장흥이 귀농지로 인기를 끌면서 귀농 성공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블루베리로 연간 2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승화 귀농인 연합회장이 있다. 서울에서 나름대로 잘나가던 건축업을 접고 귀농한 이씨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농업을 고집하면서 블루베리로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써내려가고 있다. 이씨는 장흥을 전국 최고의 블루베리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장흥군은 전국 첫 ‘은퇴자 도시’ 조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랜드러버스코리아, 대우산업개발 등이 지난해 9월 3600억원 규모의 투자협약을 체결하면서 장흥 정남진 로하스 타운 개발이 본격 진행 중에 있다. 계획에 따르면 오는 2019년까지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비동리 일대 233만㎡가 1500가구 규모의 주택과 골프, 승마 등 체육시설, 의료‧교육 등의 시설이 갖춰진 복합 주거단지로 조성된다. 현재 1차로 43가구에 대한 분양이 시작됐다.
로하스타운이 조성되면 은퇴자를 비롯한 귀농자의 유입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해당리 일원에 조성되는 장흥 바이오식품산업단지도 2014년 최종 준공을 목표로 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다. 장흥읍 억불산 일원에는 100여만㎡의 편백숲에 전통 한옥, 편백 노천탕, 목재문화체험관 등을 갖춘 휴양시설인 장흥 우드랜드가 2009년 개장됐다.
장흥군청 관계자는 “대도시인 광주광역시의 인접도시도 아니면서 전남도에서 장흥이 귀농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산, 바다, 강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귀농지라는 것이 매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통계청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밝힌 귀농·귀촌인 통계를 보면,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는 3만2424가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2년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것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앞으로 귀농·귀촌인구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도시의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시골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낙후된 의료시설과 허술한 치안 속에서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경제적으로 덜 풍족한 생활은 필연적이다. 원주민의 텃세도 결코 우습게 넘길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시보다 더욱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시골인지도 모른다.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전국의 귀농귀촌 현장을 돌아보며 성공적인 귀농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 그 방안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본다.
한 집 걸러 한 집 꼴로 거리마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즐비한 서울. 이에 반해 지방의 경우 이같은 커피전문점들은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지방하면 다방이나 옛날식 커피숍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인식을 기분 좋게 깨부순 이들이 있다. 바로 전남 장흥에 위치한 카페 ‘원앤식스’의 이영중(32) 바리스타(Mr.One)와 이정원(40) 쇼콜라이티에다.
2009년 장흥군 건산리에 문을 연 ‘원앤식스’는 5년여 만에 장흥군 주민들을 감미로운 커피 향으로 매료시켰다. 직접 볶은 원두를 사용하고 초콜릿과 와플 등을 손수 만들어 판매하는 등 일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과 풍미가 이곳만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처음엔 생소하게 느꼈던 주민들도 점차 커피를 알아가고 즐기기 시작하면서 ‘원앤식스’는 장흥군에 없어서는 안 될 커피문화의 사랑방이 됐다.
‘원앤식스’의 성공은 비단 커피문화의 전파뿐만 아닌,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사례를 만들었다.
은퇴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것만이 귀농·귀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에게 이들 젊은이의 새로운 시도는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커피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전략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원앤식스’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들었다. ‘원앤식스’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부탁한다.
A. 이영중
"요즘은 대부분 손님들이 입소문으로 먼저 듣고 확인 차 물으시죠. '원앤식스가 무슨 뜻이에요?' 매번 듣는 질문이지만, 항상 웃음이 먼저 납니다. 저희 형제가 1남(ONE) 6녀(SIX)거든요. 그래서 원앤식스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지만, 가용 로스팅 포인트(시나몬 로스팅~프렌치 로스팅)에 따라 다양한 커피 향미가 느껴지듯 다채로운 카페의 형태를 지향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단 먼저 말씀드린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이제는 단골손님들이 홍보해 주시죠. 원앤식스는 2009년 장흥을 시작으로 서울 성수동, 전남 강진군·영암군에도 포진하고 있습니다. 2년여 간 직영으로 운영하던 서울 성수동 매장을 제외한 강진점과 영암점은 커피 추출 테크닉과 다양한 메뉴 개발을 공동으로 진행·운영하고 있습니다.“
Q. 카페나 커피 문화가 생소할 수 있는 장흥에 내려오게 된 이유와 당시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A. 이영중
"2009년 당시만 해도 장흥군의 커피문화라는 것은 다방이라는 곳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해에만 해도 15곳 이상 되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커피전문점을 연다는 것은 '저 집 언제 문 닫나 내기할래?',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 마시지 누가 3000~4000원 주고 커피를 마셔?'라며 비웃음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절대 망하진 않을 거야!'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전에 서울 강남권의 대형 프랜차이즈에서 매니저를 했던 경력과 개인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도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로스팅분야나 라떼아트, 핸드드립까지 다방면으로 이름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학했고, 장흥군에 처음부터 로스터리 카페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말 수제 와플까지 시작하면 강진군·보성군 등 인근 지역에까지 입소문이 돌았고, 우격다짐 식이었던 저희들을 좋게 봐주시고 찾아주신 손님들께 5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 감사해 하며 지냅니다. 커피에 대해서는 새하얀 백지상태였던 이곳에 커피로 한 방울 한 방울 물들이다 보니 이 작은 동네에 이젠 커피집이 10여 곳이 넘습니다.”
Q. 귀농·귀촌하면 나이 드신 분들이 지방에 내려가 농사짓는 모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원앤식스’의 경우엔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귀농·귀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A. 이정원
"장흥에서 그런 게 될까? 라고들 하면서 시도조차 하지도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수요가 도시만큼은 많지는 않지만 꾸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귀농했으니 난 농사를 지어야지’만 생각하지 마시고, 대도시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곳에서 구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Q. 원두를 볶는 일부터 초콜릿·아이스크림·브라우니 등을 손수 만든다고 들었다. 메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한 노력은?
A. 이영중
"‘학교 다닐 때 카페의 열정을 쏟았다면 아마 서울대학교에 가지 않았을까?‘하며 웃곤 합니다. 커피나 초콜릿 등 카페의 식음료는 생각보다 트렌디 합니다. 그래서 Cafe Show나 Salond de Chocolat 같은 커피나 초콜릿 관련 박람회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그때마다 서울과 지방간의 문화 차이를 고려해 접목할 아이템을 취사선택하기도 하거나 조금 비틀어 적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수제 초콜릿은 국내에서 이제 시작 단계인 아이템입니다. 운 좋게도 작년 말 스위스 펠클린사의 세미나에 초청돼 스위기 현지에서도 초콜릿을 공부하고, 전국의 쇼콜라티에들과 교류도 활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보면 만 5년을 카페에만 불태웠는데도 아직도 저희의 열정은 들끓고 있나 봅니다."
Q. ‘원앤식스는 OOO이다’라고 표현했을 때,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가? 또, 원앤식스가 추구하는 방향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A. 이정원
"‘원앤식스는 가족이다’라고 하고 싶네요. 나도 마시고, 우리 가족도 마신다는 생각으로 좋은 식재료 사용을 기본이자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원앤식스는 ‘가족이다’가 가장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저희가 5년간 카페 관련 내공을 꽤 많이 쌓았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이제는 그 내공을 표출해보려고 합니다. 조만간 장흥 매장 확장 계획에 있고, 그 이후에는 대도시를 섭렵하고 나가야겠죠? 아직은 100% 논의 중이기만 합니다."
Q. 요즘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있다. 아직 젊지만 카페 이외에 인생2막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A. 이영중
"저는 개인적으로 건축을 공부하다 커피에 빠져 건축을 그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성수점이나 강진점·영암점 모두 제가 손수 작업했습니다. 현재 제가 꿈꾸는 미래는 카페 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 관련 일을 하는 것입니다. 카페 컨설팅부터 인테리어까지 하는 그런 일을 꿈꾸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A. 이정원
"‘무언가에 미치면 결국엔 미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열정으로 카페 일과 초콜릿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도 저희의 노력이 쌓여 커피 분야에서도 초콜릿 분야에서도 장인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