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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남성의 고된 다이어트, 방법은?
- 생물학적 수명과 함께 사회활동 기간이 길어지면서 액티브 시니어에게 또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바로 외모다. 모임이나 대인관계가 계속 유지되다 보니 여성 못지않게 외모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 그러나 중장년 남성의 경우 성형이나 미용시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자연스레 그 관심이 ‘다이어트’로 쏠리고 있다. “뱃살만 빼도 더 젊어 보일 텐데”라고 입을 모으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하지만 전문의들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들의 뱃살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일까. 비만치료에만 집중하는 365mc의 노원점 채규희(蔡圭希·42) 원장을 통해 그 이유를 들어봤다. “나이 들면 살이 잘 안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뭔가 손쉬운 해결책이 있을 것을 기대했는데, 각오하라는 경고로 시작된다. 다이어트는 역시 쉽게 볼 일이 아닌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성장호르몬이 줄면서 체내 근육량이 감소해요. 또 젊을 때보다 활동량이 줄면서 근육량 유지도 어렵게 되고요. 근육이 줄어드면 기초대사량이 줄어 섭취한 음식이 가진 열량을 모두 소비하지 못하고 지방의 형태로 체내에 저장하게 돼요.” 다이어트 약 거부감 되레 병 키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을 빼고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을까? 역시 기대했던 마법은 없다. 채 원장은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음식으로 발생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기초대사량이 70% 정도를 차지하고, 10%는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소모됩니다.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밖에 안 돼요.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결국 음식을 적게 먹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셈이죠.” 의사들이 비만도를 측정하는 방법은 이렇다. 비만도의 지표인 체질량 지수는 BMI(Body Mass Index) 지수라고도 부르는데, 체중(kg)을 키(cm가 아닌 m를 기준)의 제곱으로 나눈 숫자다. 만약 키가 170cm이면서 몸무게가 70kg인 사람이 있다면 체질량 지수는 70/1.72, 즉 24.2가 된다. 채 원장은 이 지수가 치료 계획을 세울 때 기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체질량 지수가 30을 넘으면 비만으로 보고 약 처방을 합니다. 만약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 있다면 27 이상일 때 처방을 시작하고요. 물론 혈압이나 당뇨 수치가 약으로 조절이 안 된 상태라면 그것을 먼저 안정화시킨 다음에 체중을 줄일 수 있는 계획을 세워요.” “또 약을 먹으라고?” 처방 제안을 받으면 아마 많은 중장년들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흔히 4종 세트라고 말하는 혈압약과 당뇨약, 고지혈약, 통풍약까지 챙겨 먹어야 하는 시니어가 적지 않다. 여기에 약 하나를 더하라니. 하지만 채 원장은 성인병 치료를 위해서도 체중조절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혈압이나 혈당 조절을 할 때 체중 감량이 중요합니다. 저희가 적극적으로 치료를 권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요즘 나오는 약들은 장기간 복용했을 때 문제가 생겼던 약과는 다릅니다. 임상실험을 통해 장기간 복용해도 문제가 없음이 증명됐어요.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체중감량을 위해 처방되는 약은 크게 3가지다. 식욕을 억제하는 약과 체지방분해를 촉진하는 약, 음식물의 흡수를 억제하는 약으로 나뉜다. 안전하지만 넘어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최소 3개월 이상 복용을 해야 효과가 나고, 끊게 되면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약값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다이어트에 치명적인 술자리 사실 남성들에게 가장 큰 다이어트의 적은 바로 술과 외식이다. 다이어트 식단으로 식사를 해보려고 해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식당밥’을 먹는 경우가 대다수라 지키기 어렵고, 잦은 술자리는 뱃살을 더욱 두둑하게 만든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중장년 남성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죠. 늘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니 다이어트 식단 같은 것은 꿈도 못 꿔요. 게다가 생맥주 3잔 혹은 소주 1병이면 밥 두 공기만큼의 칼로리와 맞먹어요. 여기에 안주까지 더하면 한 끼에 1만kcal에 육박할 수도 있어요.” 성인 남성의 하루 권장 섭취 열량은 2500kcal. 한 번의 술자리가 미치는 여파가 가늠이 된다. 그래서 채 원장이 권하는 것은 ‘야채 도시락’이다. 방울토마토나 오이 같은 야채를 도시락으로 갖고 다니다가 식사 때 꺼내어 밥과 함께 먹는 것이다. 포만감을 주기 때문에 식사량을 줄여주고, 염분섭취도 낮춰준다. 이것이 곤란하다면 식사마다 밥을 3분의 1가량 덜고 조금만 식사하는 것이 최소한의 대책이다. 특히 시니어에게는 과일이나 떡과 같은 간식도 치명적이다. 송편 3개만 먹어도 열량이 밥 한 공기와 맞먹는다. 과일은 건강에 좋으니 맘껏 먹어도 된다 생각하기 쉽지만 오해다. 과일 속 과당도 엄연한 당분이다. 먹으면 살로 간다. 해야 하는 운동, 몸이 따르지 않는다면 “무릎이 나가 우리는!” 지난해 방영된 모 소화제 광고에서 소화가 되지 않으면 걸으면 그만이라는 젊은이에게 이경규는 이렇게 일갈해 화제를 모았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 시니어 입장에선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릎이나 어깨, 허리 등 주요 관절에 크고 작은 질환이 있는 경우가 많다. “관절에 문제가 있다면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수중운동을 권합니다. 수영이나 아쿠아로빅 같은 운동이 대표적이죠.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고, 심폐기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돼요. 복부지방을 빼고 싶다면 빨리걷기도 효과가 좋습니다. 이런 운동들이 익숙해지고 근력운동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죠.” 뽈록한 배, 지방흡입 효과 있을까 중장년 남성의 다이어트 지향점은 날씬한 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배만 좀 날씬해진다면 다른 부위에 살이 좀 붙은 것쯤은 신경 쓸 거리도 안 된다. 그러니 길거리에 붙은 지방흡입 광고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운동도 싫고 약도 곤란하다면 확 들어내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채 원장은 “지방흡입도 만능은 아니다”고 말한다. “복부는 윗배와 아랫배로 나눌 수 있는데, 윗배는 내장지방의 비중이 높고, 아랫배는 피하지방이 대부분이에요. 문제는 지방흡입 수술과 같은 방식이 효과적인 부분은 피하지방이라는 것이죠. 내장지방은 지방흡입으로 빼는 것보다는 운동이나 식이조절을 통한 체중감량이 더 효과적이에요. 결국 또 제자리인 셈이죠.(웃음) 지방흡입 수술은 내장지방을 직접적으로 감소시켜주는 건 아니지만, 체형 변화에 따른 동기부여 효과로 체중감량에 도움닫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남성들이 지방흡입을 주목하는 것이지요. 남성들은 시술에 대한 거부감도 여성에 비해 크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도 최근에 지방흡입 수술에 비해 간단하게 주사로 지방을 추출하는 시술이 개발되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합니다.” 채 원장은 마지막으로 효과적인 다이어트를 위해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환자들이 대부분 본인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 있어요. 말씀 나누다 보면 살찌는 원인을 파악하고 거꾸로 제게 알려줍니다. 갑자기 여러 가지를 뜯어 고치려 하기보다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한 두 가지 정도의 간단한 대책을 만들어 생활에 변화를 줘보시는 것이 지키기 좋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날씬해진 자신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 2018-11-0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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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 라트비아 ‘리가’
-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
- 2018-11-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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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고향 툴라의 행복
- 톨스토이만큼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러시아 작가가 있을까?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해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리바이벌되고 있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통해 젊은이들도 잘 아는 세계의 대문호다. 그가 태어나고 말년에 살았던 곳이 툴라 근처의 마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다.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두 시간 남짓한 193km 지점. 툴라에서 10분이면 닿는 곳에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한 툴라 톨스토이 고향을 가려면 툴라(Tula)로 가야 한다. 툴라는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한 ‘황금고리 도시’ 중 한 지역. 황금고리 도시란 모스크바 근교의 역사적인 도시들을 일컫는 말로 도시들의 연결 형태가 반지 모양의 원형과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지칭이다.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Kursk) 역을 통한다. 툴라 기차표를 살 때는 물론 기차를 탈 때도 짐과 ‘여권’을 검사한다. 툴라 기차 안에서 약간의 해프닝을 겪는다. 러시아에서 처음 해보는 기차 이동인 데다 매표소 직원이 영어를 전혀 못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더니 침대칸을 발권해준 것. 4인용 도미토리 침대칸 중에서 2층으로 배정되었는데 침대를 이용하려면 시트가 필수다. 시트가 없어 결국 툴라까지 가는 동안 올라보지도, 누워보지도 못한 채 보조의자에 앉아 간다. 어느 새 툴라 역에 하차. 사람들이 다 사라진 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다가 경찰관에게 부탁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간다.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는 시내에서 약간 비껴 있지만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분위기의 마당에서는 막 깎아낸 듯한 풀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친다. 오래된 사과나무 한 그루와 앙칼진 러시안 고양이가 있는 가정집 숙소가 참 매력적이다. 툴라 중심부 크렘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 숙소에서 툴라 중심부까지는 천천히 걸어 3분에서 5분 거리. 오래된 나무 가옥을 따라 호젓한 길을 걸으면 어느새 툴라 시내가 보인다. 러시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레닌 동상이 서 있고 돔 형식의 러시아 정교회 두 개 그리고 바로 크렘린(kremlin)이다. 크렘린이란 원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성채, 성벽을 뜻한다. 러시아 각 주(州)에는 꼭 있어 ‘크렘린’이라는 단어 하나만 알면 길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툴라의 크렘린은 1540년에 완공되었는데 튼튼한 벽돌식이다. 성벽 모서리에는 나무 방어탑 아홉 개가 고깔 형태로 1km 정도 간격으로 뾰족하게 솟아 올라와 있다. 성채 내부는 크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정교하다. 중앙에 대성당(1764)을 중심으로 전시관, 특산품 코너와 부속 건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필자가 툴라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축제가 열렸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만난 세르게이 툴라를 찾은 이유는 19세기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의 고향을 찾기 위함이다. 툴라에서 남쪽 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 없는 10분 거리다. 택시 기사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을 더 치러야 했지만 여행객이라면 늘 감수해야 할 일이다. 톨스토이 고향 입구의 두어 개 난전에서 지역 특산품인 당밀과자를 팔고 있다. 나름 관광지라고 물 값이 시내의 두 배 이상이다. 포기하고 그냥 매표소로 간다.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표를 사면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언어로 들어야 하는 상황.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으니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아도 될 법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톨스토이 하우스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만나게 된 세르게이(72). 젊은 층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 대부분이 단 한마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는 영어를 잘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물리학자 세르게이는 부인과 조카가 동행인이다. 영어는 못하지만 한눈에 봐도 성격이 밝고 유머러스한 부인 타냐, 그리고 조카 표토르. 낯선 그들과 함께 톨스토이 고향 투어를 시작한다. 사과 농장이 있는 톨스토이의 고향 자작나무숲이 길게 이어지는 길 옆으로 톨스토이가 농노들을 위해 직접 심었다는 사과 농장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집필했던 ‘톨스토이의 집’은 본채와는 달리 작고 초라하다. 꼭 들여다봐야 할 공간이다. 지독하게 꼼꼼한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 투어다. 박물관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소장품들의 인테리어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톨스토이가 입던 옷, 식탁, 서재 등 그의 삶이 톨스토이 하우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질곡한 삶을 잠시 살았지만 대부분을 이 영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소설 ‘부활’, ‘어둠의 힘’ 등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80세 되던 해,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를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7일 만에 모스크바 남부 톨스토이 역(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문득 그의 말년 인생을 그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이 떠오른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1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에서 그의 숨결과 흔적을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인간미 넘치는 러시아 사람들 툴라와 톨스토이 고향이 특히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사로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 고향에서 만난 세르게이는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에서 물리학자로 살았고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했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는 흔한 이름 중 하나인데 그에게 ‘세르게이 예세닌’이라는 시인 이름을 말했더니 금세 ‘자작나무숲’이라는 시를 읊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해주던 그. “툴라의 당밀과자는 이곳 아니면 살 수 없다”면서 생판 처음 만난 한국 여행객에서 선물로 안긴다. 또 조카 표토르는 기념품을 선물한다. 툴라까지 차를 태워주고 차를 세워 시원한 물까지 사준다. 관광지 앞이라 물 값이 비싸다고 했던 필자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과분한 선물을 받은 필자가 한 일은 고작 찍은 사진을 보내준 것뿐. 필자가 한국에 여행 오는 외국인들에게 이런 따사로운 애정을 베풀 수 있을까? 톨스토이 고향이 떠오를 때마다 ‘세르게이’ 가족이 필자에게 베풀어준 친절을 기억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광 안내소 스테프는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난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지만 맛있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친절히 알려줬다. 크렘린 앞에서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크(kbac)를 파는 아주머니가 시음해보라며 돈은 안 받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툴라에서뿐만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정 많고 인심 좋은 고령의 한국인을 닮은 러시아인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여행이 참으로 행복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 공항에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지 직항. 9~10시간 소요. 현지 교통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 역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음식 정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음식은 약간 짠 편이다. 툴라에서는 고층 건물을 이용하면 저렴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인터넷 평점을 보고 예약하면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3만 원 선이면 중상급 숙소에 머무를 수 있다. 도미토리 룸은 1만 원 이하다. 치안 정보 생각보다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찰이 있기 때문. 유의사항 모스크바 외에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은 나라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심카드를 구입하거나 한국에서 사서 교체해야 한다. 기타 정보 러시아는 거주지 등록이 필수다. 숙소에 말하면 바로 처리해준다. 무비자 여행 기간은 60일까지. 러시아 여행 중 가장 큰 난고는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승차표를 보여주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 2018-10-0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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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영어, 매일 딱 10분만 공부해보세요
- 오전 9시, 가양5종합사회복지관 지하 1층 팬지배움방. 영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시니어 중에서 유독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 여인, 바로 김정숙 씨다. 노트 대신 이면지를 엮어 만든 연습장에 꼼꼼히 수업 내용을 받아 적는다. 선생님 질문에 큰 소리로 대답도 척척 하며 수업을 즐기는 모습. 대학생 손녀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 같다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그이지만, 처음엔 ‘ABC’부터 시작했단다. 60년 넘게 영어를 몰랐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영어를 알고 난 뒤 세상이 더 즐거워졌다는 김 씨다. “5~6년 전에 남편이 아파서 집에 누워 있었어요. 낮에는 간호 도우미가 와서 봐주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으려니 그 시간이 참 무료하더라고요. 평생교육 시대라고 하는데, 나도 뭔가를 배워야겠다 싶었죠. 학창 시절에는 아버지가 위암을 앓으셔서 철없이 공부 욕심을 낼 수가 없었거든요. 그때 못 배워 아쉬웠던 마음도 채울 겸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됐죠.” 처음 도전했을 때, 젊은 강사가 가르치는 수업을 듣고 실망만 하고 돌아왔다. 시니어의 눈높이에 맞춘 강의가 아니었기 때문. 다행히 그 후 현재의 선생님(박미령 강사)을 만났고, 한 걸음 한 걸음 영어를 배워온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수업시간 외에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카카오톡으로 선생님에게 질문하는데, 늘 친절히 대답해주는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영어를 배워나갈 수 있었다. “나이 들어 공부하려니 간단한 것도 자꾸 잊어버리게 돼요. 그때마다 선생님이 괜찮다며 이해해주시고, 반복해서 가르쳐주셔서 고마웠죠. 요즘에는 길거리를 다녀도 곳곳에 영어가 널려 있잖아요. 가게 이름, 음식 메뉴 등등. 이런 것들을 하나씩 읽을 수 있고 그 뜻을 알게 되니 일상이 더 즐거워졌어요. 완벽히는 몰라도 딸이랑 같이 자막 없는 미국 드라마도 볼 수 있고요. 아직 해외에 나가 실력 발휘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가서 멋지게 영어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해요.” 지금보다 더 실력이 늘면 외국인 친구에게 편지도 써보고, 자신처럼 영어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도움도 주고 싶다고 한다. 김 씨에게 언제쯤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겠느냐 묻자 손사래를 치며 소박한 바람을 드러냈다. “나에게 마스터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죠.(웃음) 어디까지나 ‘앎’의 과정 아닐까요? 내 체력이 뒷받침되는 한 무한대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그 끝은 없지만, 하나라도 했으니 여기까지 왔잖아요. 저도 육십 넘어 시작했어요. 너무 늦었다고 도전을 망설이지 마세요. I can do it, You can do it!” Q&A로 보는 '시니어 외국어 배우기' 도움말 박미령 등촌ㆍ가양종합사회복지관 시니어 영어회화 강사(본지 동년기자 3기) Q. 시니어 영어 수업에 찾아오는 분들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A. 대개 해외여행 가서 의사소통하기 위해 배우려 합니다. 학창 시절 배우지 못한 한을 풀려고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아예 처음 배우는 분들만 있는 건 아녜요. 언어는 습관인데, 한때 영어를 열심히 배웠어도 그동안 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다시 처음부터 공부하면서 영어 세포를 되살리시곤 하죠. Q. 수업은 주로 어떻게 진행되나요? 문법보다는 회화 위주이기 때문에, 먼저 입에서 익숙해지게끔 반복해서 말하도록 하고 있어요. ‘thank you’처럼 간단하고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thank you very much’ 이렇게 부사나 형용사 등을 하나씩 더해가죠. 나이 드신 분들은 한국식 영어 발음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아 잘못된 발음도 교정해드리고요. 영어 간판이나 뉴스나 TV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일상 영어도 알려드리면 참 좋아하십니다. Q. 일반 학생들과 시니어들을 가르칠 때 차이점이 있다면요? 젊은 사람들은 살짝 자극을 주면 더 하려고 하지만, 시니어들은 오히려 그런 자극에 마음을 다칠 수 있어요. 열심히 배우려고 왔다가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죠. 그래서 최대한 편안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해드리는 편이에요. 가끔 지각하거나 숙제를 못했다고 미안스러워서 수업시간에 안 오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결석하셔도 괜찮다. 지각하면서도 오시는 건 더 훌륭한 거다”라고 말씀드리고, 숙제도 부담되니 최대한 적게 드리려고 해요. Q. 늦깎이 학생들은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나요? 젊은이들처럼 ‘공부가 하기 싫어서’ 포기하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다만, 연세가 있는 분들은 갑자기 편찮으시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수업을 중단하시죠. 또, 자꾸 강의실 문만 나서면 까먹는다고 걱정하시는데 “제가 반복해서 가르쳐 드릴 거다. 그러면 크리스마스 때는 꼭 하실 수 있다”라고 응원해드리곤 해요. 젊은 사람도 영어는 계속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려요. 하루 하나씩이라도 꾸준히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시는 게 좋습니다. Q. 시니어에게 추천하는 공부 방법은 무엇인가요? 10분씩만 공부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공부하다가 재미있어서 더 하고 싶어도 절대로 더 하시지 말고, 10분 하시고 나면 책을 덮으세요. 대신 매일 하셔야 해요. 일주일에 1시간 몰아서 하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하는 게 영어 실력을 늘리는 데 효과적입니다. 드라마들 많이 보시잖아요. 잠깐 광고하는 틈에 10분 공부하셔요. 좀 더 하고 싶으시면 EBS 영어 방송을 보는 것도 추천해요. 유아부터 초등, 중등, 성인 등 단계별 프로그램이 잘 돼 있어요. 스마트폰에 익숙한 분이라면 팟캐스트 무료 영어 강의도 보시면 좋아요. 그중에서는 ‘일빵빵 입에 달고 사는 기초영어’를 권합니다. 영어 초급 단계의 분들에게 도움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 2018-08-2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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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의 노래하는 예술가, 버스커 한복희
- 작은 체구에 은빛 단발을 한 여자가 바람 부는 거리에 나타난다. 아직 조금은 쌀쌀한 날씨. 길 위에 선 여자는 뭔가 투덕거리더니 마이크를 집어 들고 청중 앞에 선다. 잔잔하게 선율이 흐르면 그녀의 인생이 담긴 목소리가 터져 안기다 마음속에 녹아든다. 바삐 가던 이의 속도가 느려지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귀 기울인다. 그녀의 마법에 하나, 둘 빠져들더니 멈춰서는 발걸음, 또 발걸음. 길 위의 예술가 한복희(韓福姬·58) 씨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모두가 판타지 속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장소협조 보수동 정.[점] 저기 저 분 노래 되게 잘 불러요! 부산의 남포동 밤거리를 거닐던 어느 날. 사람들이 몰려든 곳을 향해 누군가 소리쳤다. 음악이 들리는 곳은 이미 인산인해. 길거리 공연을 많이 봐왔지만 노래 부르는 이가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는 건 드문 일이다. 그때 딱 스치는 사람이 바로 중년의 버스커(거리 예술가) 한복희 씨였다. 언젠가 SNS 영상을 통해 그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봤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부르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언젠가 우리 지면을 통해 꼭 소개하겠노라 사진까지 저장해놓았었다. 그런 그녀가 앞에 나타났으니 머뭇거릴 틈이 있겠는가. 노래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 한복희 씨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는 부산시 보수동 책방 골목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환하게 반겨 웃는 모습에 포근함이 느껴진다. 50대 끝자락. 그녀는 왜 부산 길거리 귀퉁이에서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 대인공포증을 이기려고 대중 앞에 섰어요 누가 믿겠는가.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길거리는 콘서트 현장이 된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서서 그녀를 응원하는 팬 또한 상당수다. 대중 앞의 그녀가 사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니! “전문 버스커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전까지는 섬유공예를 했어요. 광목 위에 매일 그림을 그리고 빨래하고 염색하고 다림질도 하고요. 그 세계에서 충분히 바쁘고 즐겁고 행복했어요. 누구를 만날 시간도 음악을 집중해서 들을 여유도 없었어요. 그 일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인간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자신이 꾸며놓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았다. 친구들도 그 안에 오게 해서 함께 놀았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 새로운 삶이 열렸다. “지금은 돌아다니며 살고 있죠. 처음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어요. 내가 부산에 와 있는 건 예전이라면 상상 못할 일이죠.” 관객들 중에는 한복희 씨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공연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끼면서도 남자에 대한 경계는 여전하다. 중년 남자들이 와서 악수라도 하자고 하면 정중히 거절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쭉 싱글인 것 같다고 멋쩍게 웃는다. “물론 정말 노래가 좋아서 다가오는 사람도 있지만 가끔은 술 냄새 나고 비릿한 냄새 풍기는 남성분이 있어요. 정성스럽게 노래를 불러드렸으면 됐지 뭘 손까지 잡아줘요.(웃음)” 영국 노처녀의 모습에서 본 희망 그녀에게 단비 같은 용기를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가수 수잔 보일(Susan Boyle, 1961~)이다. “그분이 저에게 절대적인 용기를 줬어요. 예술가처럼 보이지도 않고 시골에서 올라온 푸짐한 시골 노처녀가 뮤지컬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아이 드림드 어 드림(I dreamed a dream)’을 부르는데… 관객 모두의 입이 떡 벌어지잖아요. 내 안에 노래를 향한 불씨가 있는지 몰랐는데 수잔 보일을 보고 난 뒤에 힘이 났어요. 며칠 동안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 사람이 나오는 영상을 보는데 너무 떨리는 거야.” 한복희 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반인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는 tvN ‘코리아 갓 탤런트(Korean got talent)’를 통해서였다. 생업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심하던 상황이었다. 그녀 나이 53세. 대단한 도전이 시작됐다. “섬유공예를 하면서 줄곧 써오던 염료 때문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천식이 발병했어요. 이제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을 때 마침 그 프로그램이 생긴 거죠. 나는 정말 악보도 볼 줄 몰랐어요. 음악을 좋아하고 꾸준히 들은 것 말고는 뭐가 없었어요. 막연한 자신감이었어요.” 무대에 서서 에디트 피아프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를 부르는 순간 관객들은 환호했고, 심판단의 극찬이 뒤를 이었다. 몇 년 후 ‘아시아 갓 탤런트’에도 초청됐다. “‘코리아 갓 탤런트’가 끝나고 노래 연습도 안 하고 있을 때였는데 ‘아시아 갓 탤런트’가 노래를 향한 두 번째 불을 지펴줬어요. 역시 나는 노래를 할 때 굉장히 행복하구나, 건강 때문에 힘들 때였는데 노래는 굉장한 기쁨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줬어요. 불 속에 뛰어드는 마음이었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 하다 죽자!” 한복희 씨는 인터뷰 내내 숨을 깊게 내쉬고 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노래하며 사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웃음이 넘치고 생기가 솟았다. 그녀에게 노래는 수많은 의미를 담은 보약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부산 남포동까지 길바닥에 누워 자는 한이 있어도 노래하는 삶을 택하겠노라 굳은 다짐을 했다. 언제 올지도, 내 앞에 설지도 모르는 관객을 만나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2015년 11월, 서울 인사동에 작은 스피커와 마이크를 들고 섰다. 당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보느라 추워진 날씨가 돼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때는 뭐 진짜 노숙자 같았어요. 노래를 부르고 싶은 절박함도 있었어요. 부랑자가 되더라도 나는 음악을 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어요. 그래야만 내가 충격을 덜 받으니까요. 산발한 긴 백발에 군용 잠바를 입고 그렇게 나섰어요.” 개업(?) 첫날. 빛이 점점 잦아드는 오후 5시. 조그마한 박스 하나 놓고 준비한 노래를 불렀다. 삽시간에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며 수군대는 사람들.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고 난 뒤 눈을 떴을 때! “비현실적이었어요. 꽃 선물에 돈은 물론이고요. 이렇게 계속된다면 달리 노래를 부르기 위해 직업을 찾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신호가 굉장히 좋았죠.” 알고 보니 인사동은 버스커들이 좋아하는 장소였다. 동창 모임이나 출판기념회 등을 하고 나온 중년들이 쉬이 지갑을 열어 팁 박스 두둑하게 돈을 넣는다. “인사동 거리에는 내 나잇대의 기억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서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팁도 후하고 앞에서 춤도 추고 그러죠.” 비현실적인 인사동 거리는 반할 만했지만 다른 블루오션을 찾기로 했다. 젊은 버스커들과 소위 자리 경쟁 같은 건 하기 싫었다. 인사동에서 이태원으로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러다 2016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글로벌 스타가 되어 브로드웨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싶어요. 제 목표죠. 그래서 가요보다 외국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외국 문화계 인사들이 많이 오잖아요. 그래서 갔어요. 기대를 했는데 태풍이 몰려와서 영화제가 거의 폐점 상태였어요. 제가 지방마다 팬이 좀 있는데 부산 팬이 며칠 동안 가이드를 해줬어요. 그때 찾은 곳이 바로 남포동입니다.” 부산 하면 꼭 남포동이 생각났다. 서울로 가기 전에 남포동에 좀 데려다 달라고 팬에게 부탁했다. “차에서 딱 내리자마자 느꼈어요. 남포동이 나를 환영하더라고요. 활짝 팔을 벌려서요. ‘어서 오세요’라고요.” 곧바로 노래를 한 곡 했더니 관객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비로소 부산 팬하고 축포를 터뜨렸다. “부산에서 재밌는 일이 많아요. 노래하는 친구들이 저한테 ‘너무 감동받았습니다. 우리는 가짭니다!’ 이러기도 하고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모두들 표현이 강렬했어요.” 자기 세상 속에 살던 엄지 공주 한복희 씨는 매력적인 남포동 기운에 이끌려 부산행을 결심했다. “부산 생활은 1년 좀 넘었어요. 친근하고요. 부모님 두 분 다 함경도 출신이세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던 지식인이셨고요. 제가 사는 보수동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대요. 우연이라기보다 DNA의 이끌림? 정서적으로 이물감이 없고 자연스러워요. 서울 생각 잘 안 나요.” 욕망과 집념으로 인생을 그려가다 “제가 그림을 그리고 천식이란 병을 얻게 되는 과정은 욕망이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표현의 차이겠지만 나는 뭘 하든지 욕망 강한 사람이에요. 노래를 하면서도 굉장히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요. 반드시 정점에 올라야 하는 승부사 기질이 있는 거예요. 지나치게 올인하죠.” 강원도 원주에 작업실을 꾸며 2년여 섬유공예를 할 때 밥 먹는 시간을 잊어버릴 정도로 천과 색에 매료돼 있었다. 작은 결과물이라도 손에 쥐어지면 황홀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쉼 없이 몰두하던 어느 날 숨소리에 이상이 왔고 더 이상 염료들과 마주할 수 없게 됐다. 그때 빛처럼 다가온 것이 노래, 노래였다. “그림을 그릴 때도 프랑스 노래 좀 배워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파니핑크’에 삽입됐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이 노래가 극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러곤 나도 멋지고 강렬한 노래 한번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웃음) 너무 어렵더라고요.” 한복희 씨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디트 피아프의 대표곡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사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 대부분은 한복희 씨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다. “명절에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노래를 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지만 감동이 없잖아요. 제가 원어민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최대한 원어에 가깝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어는 정말 할 줄 몰라요.”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기 위해 천 번 이상 듣고 공부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일도 없다. 동영상 속 에디트 피아프 선생님(?)을 모시고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정열을 쏟아 얻어낸 결과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면서 공연이 다 끝나면 장비를 챙긴 후 내가 나한테 얘기해요. ‘오늘 노래 참 괜찮았다, 그렇지? 오늘 괜찮은데?’ 이런 기쁨, 자긍심이 생겼어요.” 인생의 아름다움은 비현실에 있다 최근 천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한복희 씨. 그럼에 불구하고 노래만 부를 수 있다면 어디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물론 꿈은 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극장이 있으면 좋겠다. “나만의 공연장이 있으면 꼭 하고 싶은 것이 모노드라마예요. 내가 부르는 노래는 제가 성장하면서 알게 된 곡들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 이야기도 하고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한복희 씨.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어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음식도 만들어 먹고 싶단다. “내 삶의 가치는 행복에 있어요. 경제력은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는 선만 지키면 될 거 같아요. 약간 비루하고 불편해도 상관없어요. 노래를 선택하면서 저는 그 대가를 지불했고 잘했다고 봐요.” 인생의 맛을 이제 알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진다고. 그래도 노래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녀는 순간순간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 2018-03-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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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한 개가 필요한데 묶음으로 사야
- 아침에 눈을 뜨니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움직여야 할 탁상시계가 죽어있다. 가까이 가서 귀 기우려보고 손바닥으로 탁탁 쳐봐도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모양이다. 시계 뒤 뚜껑을 열고 배터리를 확인해보니 1.5V AA타입 1개가 들어있다. 방전된 배터리를 빨리 꺼내지 않으면 배터리 액이 흘러나와 전기접점에 녹이 나게 한다. 길게는 기계내부 소자(素子)에 흘러들어가 기기를 망가뜨린다. 먼저 배터리를 뽑아내야 했다. 집에는 이 배터리가 없다. 집 가까이 있는 천 원짜리 물건을 주로 파는 ‘다이소’에 갔다. 배터리 4개를 소포장해서 천원에 팔고 있다. 우선 값이 싸다. 메이커를 보니 중국제다. 역시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이 있어 물건 값이 싸다. 배터리는 제조일자가 중요하다 오래되면 분극작용에 의해 배터리가 서서히 방전되어 사용 할 수 없다. 제조일자가 표시되어있지 않다. 재고를 걱정한 생산자의 꼼수다. 길거리에서 값싸게 파는 배터리는 제조 된 날자가 오래된 것들이 많다. 당연히 잔존수명이 짧다. 배터리는 딱 1개가 필요한데 4개를 사야했다. 두고두고 쓰면 된다고 하지만 보관도 어렵고 자연방전 되어 낭비다. 요즘 판매방식이 1+1이 많다. 하나 사면 하나를 더 주는 것이다. 형광등도 딱 1개가 필요한데 최소 2개정도 묶어서 판다. 다음에 쓰기위해 나머지 한 개를 장롱 뒤에 숨겨 놓았다. 하지만 진정 필요할 때는 장롱 뒤에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또 새로 산다. 나중에 이사할 때 발견하고 아차차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형광등은 나중에 쓰면 될 것이라고 말 하지만 이미 시대의 변천에 따라 LED등으로 교체되어 대부분 형광등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식당에 가면 밥을 반공기정도 먹고 남기는 사람이 많다. 이미 고기를 먹어서 밥이 들어갈 틈이 없다. 다이어트의 목적으로 적게 먹고 남긴다. 혹자는 쌀이 과잉 생산되어 남아돌아가는데 뭐 어떠냐고 말한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추켜세우기 까지 한다. 쌀은 남아도 사료용 곡물 수입은 엄청나다. 남는 쌀이 있다면 생산한지 오래된 쌀부터 사료용으로 돌리면 수입 사료를 그만큼 줄일 수가 있어 무역수지가 좋아진다.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국가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이중 곡가제(생산자에 비싸게 사서 소비자에게는 싸게 파는)의 부활도 이제는 필요하다. 밥을 많이 하면 해외 수입연료를 더 많이 써야하고 음식물쓰레기 처리에 돈이 든다. 아예 반공기의 밥을 반값에 파는 메뉴판이 있어야 한다. 배추 반포기, 무 반개, 감자2개와 같이 소포장 판매가 늘고 있다. 핵가족 사회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많으니 이를 적극 권장해야 한다. 일부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카페테리아 판매방식으로 김치 한 접시 300원, 꽁치 한 마리 천원과 같이 필요한 것만 사 먹을 수가 있다. 손님의 식성도 모르고 양도 알 필요도 없이 식당주인의 밀어내기식의 가득 차린 밥상은 개선이 필요하다. 지구가 환경오염으로 병들어가고 있는데 주된 원인이 에너지의 과다소비다. 먹다가 남기고 버린다. 입다가 싫증난다고 버리고 새로 산다. 잔존수명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 진다. 딱 1개가 필요한데 묶어서 4개를 사라는 것은 지나치다.
- 2018-01-2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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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이 있는 길]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동기생의 청춘 스케치
- “거기 선배님들, 저 배고픈데 밥 좀 사주세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구대열과 이인재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은 학교 정문을 나와 미라보다리를 막 벗어나려던 차였다. “늦게 일어났는데 하숙집 아줌마가 반찬이고 뭐고 치워버려서 밥도 못 먹고 나왔어요. 네?” 처음 만난 여자가 후배 행세를 한다. 난감한 두 남자. 그런데 대답을 듣기도 전에 행동에 들어가는 여자.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팔짱을 꽉 끼고는 목적 달성(?)을 위해 앞으로 전진한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가자, 진아춘(進雅春)으로! 학림에서 만나자더니 진아춘으로 직행하다 혜화동(서울시 종로구)에서 낭만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동기인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이인재 동보항공 회장과 함께 길을 나섰다. 혜화동 일대는 1946년부터 1975년까지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의 본관과 문리대, 법대 등이 있었던 대학 캠퍼스였다. 이후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옮겨가면서 서울대 혜화동 캠퍼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문리대학이다. 우리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전설 속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출신들과의 데이트라서 그런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첫 번째 만남 장소였던 학림다방 의자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옛날 우리 식대로 하자”며 중화요리집인 진아춘으로 향한다. 진아춘에 들어서 앉자마자 시키는 것은 군만두와 배갈. 추억의 음식이라며 그때 느낌을 재연하는 것이란다. 구대열 옛날에 학생이 중국집에 들어온다는 것은 좀 과한 거였어. 겨울에 차가운 도시락 들고 진아춘에 가서 100원인가 주면 뜨끈한 국물을 줬잖아. 거기에 밥 말아 먹고 했지. 성북동 근처에서 하숙을 했던 이인재 회장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던 구 교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학생이었다고 입을 열었다. 이인재 그때 1인당 GDP가 100달러 안팎이었거든. 도시락 가지고 와서 데워 먹은 사람은 형편이 나은 사람이었어요. 나는 하숙집으로 밥 먹으러 다녔다고. 주문을 하면 딱 배갈이랑 군만두였지. 옛 진아춘은 지금보다 많이 작았다. 방과 방 사이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놓고 하나의 전구로 빛을 나눠 쓰며 전기를 아끼던 시절이었다. 개구진 친구 한 녀석은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구경을 해보겠다며 틈 사이로 고개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메뉴판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오로지 군만두 아니면 자장면을 시켜 먹던 시절 메뉴판에서 그나마 특별한 요리는 탕수육이었다. 이인재 우리 마누라하고 연애할 때 어쩌다 와서 하나 시키는 게 탕수육이었어요. 술은 한 10병은 더 마실 수 있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진아춘은 당시 서울대생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중식당이다. 송형국 사장은 춥고 배고픈 학생들에게 매번 아량을 베푸는 것이 일이었다. 외상도 많았다. 돈 없는 학생들이 뭘 좀 먹겠다며 신분증이며 시계며 열심히 맡겼다. 1996년, 결국 주인을 찾지 못한 시계를 모아 서울대학교 기록관에 기증했다. 지금까지 서울대와의 인연 때문일까. 군만두를 먹고 지불한 돈은 서울대학병원 암센터로 기부된다. 그 시절 시위는 학점 없는 교양과목 당시 서울대학 문리대는 거의 모든 시위의 발원지였다. 64학번과 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한일협정 반대 시위였다. 구대열 우리가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초년병에다가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어요. 이인재 그 당시의 ‘시위’는 교양과목 같은 것이었어요. 서울대나 고려대, 연세대도 마찬가지고. 다들 거리로 나갔어요. 근데 학점은 없었죠. 출발할 때는 3, 4학년들이 맨 앞에 서서 갔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제일 앞장서서 걷더라고요. 다들 어디 가고 없었어요(웃음). 경찰서로 끌려가 곤봉으로 얻어맞기도 했어요. 척추가 원래부터 안 좋았는데 그 후 시위를 위해 길거리 나가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서울법대 학장 출신이던 유기천 총장 퇴진운동도 문리대학에서 크게 있었다. 구대열 그때는 정치 문제로 시위를 한 게 아니고 그 ‘쌍권총 총장’이라고 유기천 총장 있잖아. 군 정부에서 올려놓은 사람 물러나라고 그땐 그랬지. 1, 2학년 때는 한일협정 반대했고 그다음엔 총장…. 자유와 낭만의 이름으로 남다 사라진 지 꽤 오래된 그 이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세상 많은 학교의 학부와 학과가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서울대학교의 문리대학만큼만은 아련한 향수 속에 회자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구대열 문리대학에는 각 과마다 학생이 10명에서 20명이었어요. 이곳이 좋았던 게 학과 개념이 거의 없었어요. 듣고 싶은 과목은 다 들었어요. 내가 2학년인데 4학년 강의를 들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다른 과 수업도 마찬가지였고 문리대학 자체가 전인교육장이었던 거죠.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란 자부심이 강했어요. 대신 학점이 형편없었어(웃음). 이인재 머리는 좋은데 가난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 문리대였어요. 먼 길을 돌아서 우리처럼 부산에서 광주에서 많이들 몰려들어 왔어요. 전국에서 별놈들이 다 왔는데 이과와 문과가 갈리지 않아서 그런지 문리대 학생들이 특별한 면이 있었어요. 구대열 학교 정문 미라보다리 앞에서 들어오는 친구들한테 100원만 달라고 해서 300원, 400원 모이면 밥 먹으러 가는 친구도 있었다니까.
- 2017-10-0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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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바꾼 도시,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끼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유럽의 배꼽’이라 불리는 슬로바키아는 한국인에게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유명세는 적지만 매력이 폴폴 넘치는 곳. 사람들은 흥이 많고 무엇보다 물가가 싸니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다. 한국 기업들이 속속 자리를 튼 이유일 것이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다. 시내라고 해야 차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11세기의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다뉴브 강 조망 한국의 많은 이가 아직도 슬로바키아를 ‘체코 슬로바키아’로 안다. 현지인들에게 나라 명을 잘못 말하면 발끈하면서 다시 일러줄 것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월 1일,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시내는 걸어서 여행해도 충분하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호조로 광장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1760년에 건축된 그라살코비크 궁전을 현재 관저로 이용하고 있다.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브라티슬라바 성이 보인다.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해서 ‘테이블 캐슬’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납작한 사각형 상이 뒤엎어져 상다리 4개가 솟아오른 듯하다. 11세기에 지어진 후 1800년대 헝가리의 지배 때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성이다. 성안에 스바토플룩 1세와 모라비아인 동상이 있는 것은 당시 모라비아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가장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성 내부는 갤러리로 이용하고, 외부에는 성녀 엘리자베스의 동상과 부서진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성 니콜라이 교회의 첨탑 밑으로 보이는 구시가지의 지붕들, 다뉴브 강을 잇는 노비 모스트(Novy′ Most, 새로운 다리란 뜻), 성곽 옆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변 풍치가 아름답다. 간헐적으로 운행되는 도심 투어용 빨간 꼬마 열차도 예쁘다. 중세의 물결 일렁대는 올드 타운에 남은 교회와 건물들 성곽을 비껴 조약돌이 박힌 옛 골목길을 걸어 성벽 샛길로 들어서면 올드 타운이다. 성벽 앞에는 십자군 중세 군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카피툴스카 좁은 골목에서 만난 바는 와인이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포도 줄기를 넝쿨 채 치장했다. 해묵은 골목 바에 앉은 연인들의 속닥임이 잘 숙성된 포도주 향처럼 진하게 번진다. 회색빛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르틴 대성당(2002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이 가득하다. 무려 230여 년(1221~1452)에 걸쳐 완성된 성당에서는 합스부르크 왕 11명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베토벤(1770~1827)이 4년 동안 매달려 만든 ‘장엄미사(1823년 완성)’가 초연되었다. 이 도시를 사랑한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1801년 작곡)’를 만들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살아생전 15번이나 방문했다. 특히 브라티슬라바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리스트는 사망하기 1년 전(1885년)에도 이 성당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곤 했다고 한다. 또 성 프란시스칸 교회와 성녀 엘리자베스를 봉헌한 성 엘리자베스 교회도 유명하다. 특히 성 엘리자베스 교회는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건물 내·외부가 모두 푸른색이라 ‘블루처치’라고도 불린다. 헝가리 왕 앤드류 2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14세에 독일 튜링가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20세에 미망인이 된다. 이후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쳤다. 골목 속에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 찾기 올드 타운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골목은 더 규칙 없는 미로다. 국민 시인, 파볼 오르사그 흐비에즈도슬라브(1849~1921)의 이름을 붙인 광장에는 1572년,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분수대(롤랑드)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주변에는 구시청사, 국립미술관 등을 비롯해 온통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다. 특히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메인 광장 벤치에서 ‘대화를 엿듣는 나폴레옹’, ‘추밀(Cumil)’은 맨홀 뚜껑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 추밀의 동상 머리가 반질반질한 것은 만지면 행복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또 벽 뒤에 숨은 파파라치, 중절모를 벗고 인사하는 노신사 등. 모두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볼거리들이다. 길거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과 쉽게 구분되지 않아 동상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구시청사에서는 수시로 축제가 열린다. 때마침 중세 복장을 한 까마귀 무술단원들이 공연시간을 알리면서 손님몰이를 한다. 펜싱과 총을 들고 싸우는 전통극의 스토리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현지의 속살을 들여다본 듯 흐뭇하다. 타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14세기의 미하엘 성문이 있는 벤투르스카 거리에 이른다. 옛 도시 성벽의 4개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성문 주변은 중세 분위기다. 오래된 약국은 박물관이 되었고 연륜 깊은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길거리에서는 ‘섹시한 여성’이 와인 시음판을 펼치고 있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브라티슬라바. 경제 발전이 되지 않아 그대로 간직된 유적들이 여행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가른 도시 벤투르스카 골목의 데 파울리(De Pauli, 11번지) 궁 외벽에는 세기적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를 기념하는 명판이 새겨져 있다. “9세에 이 연주회를 발판으로 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당시 헝가리 땅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의 라이딩)에서 태어난 리스트.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의 토지 관리인이면서 궁정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리스트는 9세(1820년 11월 26일) 때 이 궁전에서 첫 연주회를 갖는다. 당시 이 도시의 귀족은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리스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고 그다음에는 즉흥 연주를 했다. 몇몇 귀족이 내민 악보의 난해한 곡도 거침없이 연주해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음악교육을 시킬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그를 6년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후원자 중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의 니콜라우스 후작도 있었다. 예술을 대대적으로 사랑하는 이 가문은 당시 궁정음악가로 하이든을 두었다. 이후 리스트는 19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리스트가 이 도시를 잊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올드 타운의 관광안내소 건물은 음악가 요한 네포묵 후멜(1778~1837)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피아노 교본을 써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유럽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거장이다. 당시 베토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사후에는 거의 잊히고 말았다. 또 이 도시가 음악의 도시임을 알려주는 멋진 국립극장도 있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체코 프라하나 오스트리아 빈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빈의 수드반호프 역에서는 평균 한 시간 단위로 열차가 다닌다. 1시간(50㎞ 정도) 정도 소요된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물가 정보 오스트리아, 체코 프라하보다 저렴하다. 맛집과 숙박정보 올드 타운의 레스토랑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또 도시에서 가장 큰 즐라테 피에스키 호수 옆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역피라미드 모양의 시내 라디오 방송국의 송전탑 위의 회전 레스토랑에서는 브라티슬라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류로는 와인은 물론 자두 증류주인 슬리보비츠가 괜찮다. 숙박은 올드 타운이나 시내 중심가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슬로바키아 북서부의 트르나바 주에 있는 피에스타니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스파 도시다. 수질과 효능이 좋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단지다. 숙박시설 등을 잘 갖추고 있어 휴양지로 아주 좋다. 또 폴란드의 슐레지엔(Schlesien,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체코어로는 슬레스코, 영어로는 실레지아) 산간 지역에도 수많은 온천이 있다. 슬로바키아 하면 떠오르는 ‘의적’ 유라이 야노식(Juraj Ja′nos˘k, 1688~1713)이 태어난 테르초바에서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전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 3개월 이상도 모자랄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겨도 경제적 부담이 적은 나라, 기억해둬야 할 곳이다.
- 2017-07-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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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에 열리는 문화 장터 ‘서울밤도깨비야시장’
- 한밤중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도깨비처럼, 비밀스러운 거래가 일어나던 도떼기시장을 이른바 ‘도깨비시장’이라 부르곤 했다. 이처럼 특정한 날과 시간이 되면 열리는 장이 있다. 바로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다. 청계천과 한강공원 등 물가 인근에서 열려 밤공기가 선선한 6월이면 산책 삼아 거닐기 제격이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하 야시장)은 서울시에서 출범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행사다. 3월부터 10월까지 금·토요일(청계천은 토·일요일) 저녁마다 여의도·반포 한강공원과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에서 열린다. 청년 상인들이 운영하는 각양각색 푸드트럭과 핸드메이드 숍, 다채로운 공연 무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월드나이트마켓’이라 부르는 여의도 야시장은 한강의 유람선과 마포대교, 쌍둥이빌딩 등에서 비추는 조명이 별처럼 반짝이는 야경을 자랑한다. 잔잔한 강 물결과 어울리는 버스킹(길거리 연주) 공연과 더불어 아시아·유럽·남미의 전통 공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한강공원의 너른 잔디밭에는 텐트와 돗자리를 펴고 야시장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인근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다니다가 반짝이는 야시장의 불빛을 보고 발걸음하기도 한다. 한여름에는 열대야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는 방문객이 주를 이룬다. 돗자리만 챙겨간다면 도시락을 싸가지 않고도 여름밤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동대문디자인프라자 ‘청춘런웨이마켓’에서는 신나는 DJ공연과 함께 패션쇼가 열린다. 다른 야시장보다 젊은 층의 비율이 높아 신선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다. 패션의 거리인 만큼 신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와 더불어 개성 넘치는 아이디어 상품과 디자인 소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패션 트렌드와 젊은 세대 문화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도심의 야경과 분수, 빛과 음악이 흐르는 반포 야시장 ‘낭만달빛마켓’에서는 로맨틱한 재즈, 팝페라, 어쿠스틱 음악 공연이 열린다. 해질 무렵 찾아가면, 붉게 물든 석양 아래 무지갯빛 물줄기가 쏟아지는 낭만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인근 반포대교와 한남대교 등 도심의 야경을 배경으로 이색적인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는 이가 많다. 청계천을 따라 펼쳐지는 ‘타임슬립마켓’은 사랑의 자물쇠와 소원의 나무, 도깨비 퍼레이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운영한다. 평소에는 광통교 일대에서 열리지만, 시즌별로 특정한 날에는 청계광장에서도 야시장을 만날 수 있다(여름 시즌 8월 18~20일). 도심 속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은 청계천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각 지역 야시장 종합 안내소 겸 상황실에는 의료지원 본부가 마련돼 있어 응급상황 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푸드트럭, 점포 정보 및 공연 안내는 서울밤도깨비야시장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 2017-05-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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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에서 본 천국, 이탈리아 아시시
- “아시시에 살고 싶어요. 거긴 천국 같아요. 아시시나 토디 근처에 새집을 장만할까 합니다.” 영국의 글램 록 가수의 대명사인 데이비드 보위가 한 말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 한 이탈리아 신문을 통해 “자신이 지상에서 본 천국은 아시시”라고 말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도시를 찾았을 때의 첫 느낌은 분명코 데이비드 보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 아시시 아시시(Assisi) 여행은 혼자가 아니다. 시에나(Sienna) 숙소에서 만난 남미계 미국인 신디아(38세)와 동행한다. 그녀는 3개월간 혼자 여행 중이다. 시에나에서 아시시까지는 매우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버스, 기차를 여러 번 바꿔 타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느낌을 주는 아시시 간이역(1866년 개통)에 내린다. 메인 타운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타원형의 고풍스러운 타운. 스바지오 산 언덕 위에 오롯이 모여 있는 아시시를 보고 서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리, 너무 아름답다. 시에나보다 나은걸.” 표정이 풍부한 신디아는 아시시의 첫 느낌을 한껏 표출하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로 버스가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정류장에서 성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숙소가 서로 다른 신디아와는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주 북부의 아펜니노(Appennino, 켈트어로 ‘산봉우리’라는 뜻) 산맥의 남서쪽 기슭 위에 있다. BC 1000년경, 움브리아인들이 처음 정착했고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BC 295년, 로마인들이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도시명 ‘아시시’가 됐다. 2000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오래된 가옥, 울퉁불퉁한 골목길마다 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었다. 성 프란치스코 출생지, 코무네 광장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난 신디아와 함께 도심을 걷는다. 클라라 성당을 비껴 키에사 누오바 교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1615년,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이 교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 위에 세워졌다. 교회가 생기기 두 해 전(1613년), 프란치스코의 생가는 부서질 위기에 처했다. 이걸 본 스페인인 ‘비카’는 자국의 펠리페 3세(1578~1621) 왕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교회를 지었다. 성당 앞쪽에는 성인의 부모님 동상이 있고 성당 안쪽에는 성인이 갇히게 된 감옥이 있다. 성인은 이곳에 갇혀 신의 부름에 답하고 고행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고 전해온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코무네 광장이다. 로마의 흔적들이 남은 곳으로 사자상 분수대가 눈길을 끈다. 미네르바 신전 위에는 산타마리아 성당이 있고 그 옆에 포로 로마노 박물관이 있다. 포로 로마노 박물관에서는 부서진 로마의 유적과 함께 폼페이에서 본 똑같은 스타일의 벽화를 봤다. 1997년에 발견된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리라. ‘빈자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남쪽 끝에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있다. 수도복 입은 수도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거리를 누빈다. 수도사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유럽 전역에서 ‘아시시’ 하면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1182~1226)를 떠올린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린다. 부유한 직물 장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군대에 입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살기도 했다. 두 번째 군 입대 후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스스로 ‘빈자의 성자’ 삶을 선택한다. 이때부터 최소한의 먹거리를 직접 구하며 청빈한 초막생활, 영성적 삶을 시작한다. 무수한 일을 해냈고 여러 번의 기적을 보여줬다. 그러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고 심한 병까지 얻어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의 작은 오두막에서 84세로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다. 대성당에서는 프레스코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눈길을 끌었고, 1230년부터 수사들이 기거해온 대성당 수도원이 특별하다. 프란치스코 대성당 앞 정원 쪽으로 올라오면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페루지아 전쟁터에 나갔던 23세의 청년 프란치스코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아시시로 귀환하던 날을 표현해낸 동상이다. 말 위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군 모습은 해질 무렵이라서 그런지 더 처량하게 느껴진다.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성 클라라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해걸음을 벗 삼아 신디아와 저녁을 먹는다. 무척 배가 고팠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는 신디아. 그녀가 “수도자의 삶을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길래, 난 일언지하에 “싫어. 평생 싱글로 사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말했더니, 한국어로 숫총각은 뭐라 말하느냐고 묻는다. ‘동정남’이라고 말해줬더니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흉내를 낸다. “그러면 너넨 뭐라고 말하니?”라고 물었더니 남녀 상관없이 ‘버진(virgin)’이란다. 그녀는 아시시에서 단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고 이른 아침, 로마로 가서 포르투갈로 가야 한다. 그녀를 위해 시간을 더 할애해준다. 길을 거슬러 처음 만났던 산타 키아라 성당(1257~1265년에 건축) 앞에 선다. 멋진 건축물이다. 이 성당엔 성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클라라(Clara, 1193~1253)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떠나기 전에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로카 마조레는 꼭 가보고 싶다는 신디아의 뒤를 따른다. 가는 길목에 루피노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과 종탑 앞 아치형 건물 사이에 클라라 생가가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곳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제자가 됐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만 기도하며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산 다미아노 수도원은 처음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다. 그녀는 매일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 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고까지 불렀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60세)에 죽음을 맞았다. 클라라의 삶을 되새기면서 ‘조선의 테레사’로 불리는 서서평(1880~1934) 미국 출신 여성 선교사가 떠올라 자꾸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아시시 ‘뷰포인트’ 로카 마조레 요새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는 아시시의 북동쪽,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골목과 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신디아는 “운동을 해서 살을 빼야 해” 하면서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도, 가로등 불빛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발코니에 걸린 꽃 화분을 보며 감탄을 연발한다. 성곽 일부에만 서치 조명이 아름다운 요새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신디아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다음 날, 일찍 요새에 올라 박물관이 오픈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아시시 마을과 움브리아 전원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넓은 평원에 감탄하고 아름다운 아시시의 전경에 넋을 놓는다. 더 작은 요새인 미노레 성채의 남은 흔적도 찾아낸다. 성곽 안에는 유명 인물의 연보와 중세의 물건들, 음악회, 연극이 열렸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시시를 떠나 역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을 찾아가 포르치운콜라 예배당을 본다.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한 여행객일 뿐인데도, 이 도시는 발길을 부여잡는다. “아직 넌 볼 것도 할 것도 많아”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Travel Data 현지 교통 정보 로마에서 열차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테르미니 역에서 하루 네 번(토요일 3회) 직행 열차가 운행된다. 약 2시간이 소요되며 환승을 하면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또 로마 티부르티나 역 광장에도 버스(7시, 10시 30분)가 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1회(8시 15분) 운행된다. 아시시 박물관 카드 로카 마조레 외에 두 군데의 박물관을 더 볼 수 있는 ‘아시시 티켓’이 있다. 맛집 정보 타운에는 수많은 레스토랑이 있고 매일매일 색다른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 많다. 빵 위에 다양한 재료를 얹어 먹는 애피타이저 브루스케타가 깔끔하다. 호텔 추천 레스토랑은 할인이 가능하다. 길거리 음식인 파니니 등도 맛있다. 숙박 정보 아시시에는 호텔, B&B, 게스트하우스가 부지기수로 많다. 개개인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또 가톨릭 신도가 아니더라도 델 질리오 수녀원을 이용할 수 있다. 어탭터 정보 다른 지역과 달리 3핀 어탭터가 꼭 필요하다. 미리 준비 못했다면 타운 숍에서 구입 가능하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아시시 시내만 보게 된다면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천천히 순례지(Eremo della Carceri, San Damiano) 등을 찾아 트레킹을 즐기면 된다. 또 아시시 주변의 페루지아(Perugia), 아멜리아(Amelia), 나미(Nami), 토디(Todi), 오르비에토(Orvieto), 구알도타디노(Gualdo Tadino), 구비오(Gubbio),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와 시에나를 거쳐 토스카나까지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탈리아는 한 달 여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 2017-04-26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