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벨기에로 열흘간 여행 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곳에서 그렇게 볼 게 많아?” 하면서. 결론부터 말하면, 미술 작품 순례만으로도 볼 것이 차고 넘쳐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누가 여전히 같은 질문을 또 한다면 자신 있게 대답해줄 것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라고. 고흐, 렘브란트, 루벤스, 페르메이르, 마그리트 등 스탕달신드롬(뛰어난 예술작품을 접했을 때, 그 충격과 감흥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적·육체적 이상 반응)까진 아니어도 명작을 코앞에서 감상하면서 작가들의 삶의 편린도 함께 접할 수 있는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대표 작가 Big3와 미술관을 소개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작품을 포함, 15~19세기 네덜란드 유명 화가 작품 5000점, 조각품 3000여 점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반 고흐의 자화상, 얀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17세기 네덜란드 상류층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보여주는 가구 미니어처 ‘인형의 집’도 볼 만하다. ‘인형의 집’은 ‘집과 가구 모형을 실제와 똑같이 정교하게 만든 미니어처’다. 호화롭기 그지없는데 당대에는 서민 주택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야경’
뭐니 뭐니 해도 이 미술관의 대표작은 렘브란트의 ‘야경(夜警)’이다. 이곳에서 일부러 이 그림을 찾지 않아도 관람객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따라가면 ‘야경’ 앞에 이른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2층 명예의 전당 전면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렘브란트의 인생처럼 팔자가 센 작품이다. 전시 중 황산 세례와 칼로 그어지는 등 두 차례 수난을 당했다. ‘야경’을 완성한 해에는 첫 번째 부인 사스키아와 사별을 했고, 이후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당하는 등 사회적 명성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파산 등 경제적 문제도 몰아닥친다. 또 고객들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 불만을 사면서 화가로서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평이 있다.
‘렘브란트의 모든 것’
올해는 렘브란트 서거 350주년. 기념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6월까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7월부터 연말까지는 대표작 ‘야경’의 복원 과정을 보여주는 행사가 열린다. 우리가 갔을 때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22개의 작품, 60점의 드로잉, 300점의 판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도 40여 점 그렸는데 연대별로 주요 자화상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게 큰 수확이었다. 자부심을 넘어 야망과 당당함을 보여주는 청년기 모습, 기름기와 욕망이 적당히 반죽된 중년기의 모습, 특히 쓸쓸한 눈빛을 한 노년기의 자화상에서는 ‘나 아직 살아 있어’ 하고 외치는 듯한 내면의 모습이 느껴졌다.
렘브란트 하우스
인간 렘브란트를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 성공의 상징이자 몰락의 원인이 된 호화저택이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인 요덴브레이스트라트에 위치한다. 1639년부터 20년간 살면서 작업을 했던 지역이다. 그 시절의 살림, 미술 도구, 호사스런 수집품들(코뿔소 뼈 등)이 층별로 전시돼 있다.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수집가, 사업가, 거장으로서의 면목도 감상할 수 있다.
반 고흐 미술관
본관 상설전시관과 신관 기획전시관 건물이 유리 현관으로 연결돼 있다. 유화 200여 점, 소묘 500여 점, 편지 700여 통과 함께 고흐가 수집한 우키요에(일본 판화)와 회화를 포함한 컬렉션이 전시돼 있다. 규모는 세계 최대. ‘꽃피는 아몬드 나무’,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자화상’, ‘노란 집’ 등 전시 작품들이 다 걸작이다. 이곳에서는 하이라이트 중심의 감상보다는 전시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천천히 작품을 느끼는 게 좋다.
“열흘 내내 딱딱한 빵 조각을 유일한 음식으로 삼았지만, 이 그림 앞에 앉아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10년은 행복할 것이다.”
고흐가 렘브란트의 작품 ‘유대인 신부’를 보고 외친 말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옆 자신의 이름이 걸린 전용 미술관이 세계 명소가 된 것을 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크뢸러 뮐러 미술관
고흐 미술관이 도심 속 미술관이라면, 이곳은 공원 속 미술관이다. 한적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뮐러의 부인 헬레나가 수집한 작품들을 기증받은 네덜란드 정부가 작품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1938년 개관했다.
고흐의 유화 작품 90여 점, 드로잉 170점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규모는 세계에서 두 번째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밤의 카페테라스’.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중략)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고흐가 프랑스 아를에 머무르던 시절, 이 작품을 그리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밤하늘에 별을 하나씩 찍어가며 열정에 차 작업하는 고흐의 모습, 이 시절을 함께한 우체부 조제프 룰랭, 의사 가셰, 카페 마담 지누, 화가 고갱 등이 함께 어우러져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미술관이 위치한 호게 벨뤼베 공원은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이다. 서울 여의도의 7배 면적인 70만 평 규모. 매표소에서 미술관까지는 2.4km나 되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도 30여 분이나 걸린다. 매표소 입구에는 무료로 대여해주는 자전거가 진열돼 있다. 숲길의 나무와 반짝이는 나뭇잎 등이 고흐의 작품 ‘사이프러스 나무’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얀 페르메이르와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마우리츠호이스라는 이름은 이 집의 첫 번째 소유주였던 요한 마우리츠에서 따왔다. ‘마우리츠의 집’이란 의미를 갖는다. 네덜란드의 16~17세기 작품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렘브란트를 일약 유명 화가로 만들어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파울루스 포테르의 ‘어린 황소’ 등이 하이라이트. 색깔이 다른 벽지로 전시장을 구분하고 창가엔 커튼도 달려 있어 얼핏 보면 가정집 같은 분위기다. 창 너머로는 호프페이베르 연못이 보인다. 백조들이 떼 지어 떠다니는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창가엔 의자도 있어 중간중간 쉴 수도 있다. 창밖의 호수 풍경, 전시장의 작품 중 어느 것부터 볼지는 관람객 마음에 달려 있다. 편안하고 폭 감겨오는 미술관을 고르라면 단연 이곳을 꼽고 싶다.
우리는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 위해 직행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의 작품을 감상했지만 이 작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원화를 보자마자 모두에게서 터져 나온 말은 “생각보다 작네?!”였다. 그림 크기는 44.5×39cm. 이러한 사이즈는 당시 네덜란드의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그림을 걸어놓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일반 시민의 미술품 수요가 컸다. 작품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붙였다 떼었다 하기 편한 그림이 판매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 링’ 베이커리와 페르메이르
페르메이르의 흔적은 헤이그 인근의 델프트 시에 많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이 지역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델프트 시에는 ‘다이아몬드 링’이라는 빵집이 있다. 1796년부터 운영해온 유서 깊은 점포다. 프랑스인 발타자르 드 몽코니가 일기에 기록해놓았다는, 빵집과 페르메이르의 인연 한 토막이 특별하게 들려온다. 몽코니가 명성을 듣고 페르메이르의 집을 방문했는데 작품이 한 점도 없었더란다. 근처 빵집 주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니 600길드를 주고 산 작품이 있었다. 또 페르메이르가 빚을 갚기 위해 담보로 제빵업자에게 그림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그 얘기를 듣고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보니 우유병 앞에 놓인 바구니 속 푸짐한 빵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다이아몬드 링’에서 팔던 빵들과 닮아 있다. 시 광장 주변에서는 네덜란드의 전통 나막신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델프트 거리에는 앤티크 숍이 많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유명해진 푸른색 터번, 델프트 블루 타일, 클래식풍 스탠드에 이르기까지 제품이 다양하다. 심지어 한국 탈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박경옥 저ㆍ나무옆의자)
대기업 임원으로 일했던 남편을 내조하며 25년간 전업주부로 살아온 저자의 인생2막을 그렸다. 그동안 은퇴자 입장에서 쓰인 책은 많았지만, 그런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의 입장을 대변하는 서적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 책은 퇴직이 비단 당사자에게만 닥친 문제가 아닌 그를 둘러싼 아내, 자녀, 그리고 노부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때문에 저자는 가정을 위해 부부가 함께 경제 공동체로서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퇴직한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부터, 퇴직 이후 아내가 경제의 주체로 움직이는 법, 지혜롭게 살림을 줄여나가는 법 등 현실적인 솔루션을 내놓았다. 저자 부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변 퇴직 부부의 풍부한 사례를 덧붙이며 행복한 노후를 위한 실질적인 비법들을 제시한다. 책 말미에는 퇴직 후 재무상태와 자신을 깨닫고 돌아볼 수 있는 프로젝트표, 부부가 함께 쓰는 건강 점검표를 부록으로 제공한다.
◇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저ㆍ위즈덤하우스)
제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군인과 가정폭력을 행사한 남편을 거침없이 총살한 102세 할머니의 자백을 그린 소설이다. 유머러스한 분위기 속 여성에 대한 억압과 횡포, 비하라는 주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메리 마이퍼 저ㆍ티라미수 더북)
일흔이 된 임상심리학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여성의 노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세월의 도도한 흐름 속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불행한 상황도 그동안의 연륜과 내적 성숙을 발휘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조언한다.
◇ 전국 책방 여행기 (석류 저ㆍ동아시아)
서점에서 근무했던 저자는 일을 그만두고 전국 책방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단순히 좋은 책방을 소개하는 가이드 역할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만난 책방지기의 일상과 진솔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태로 보여준다.
◇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김선영 저ㆍ라이킷)
암 환자의 딸이었던 저자는 훗날 암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어린 시절 떠나보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매일 누군가에게 시한부 삶을 선고하는 상황 속,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어떻게 죽음을 인정하고 견뎌낼 것인지를 모색한다.
지난 4월 엄청난 산불로 피해가 컸던 강원도 고성, 속초, 강릉이 서서히 회복돼가고 있다. 길 옆 소나무는 여전히 검게 그을은 모습이지만 땅엔 초록색 풀이 새롭게 자라고 있다.
다시 살아나고 있는 그 곳, 고성의 깊은 시골길에 멋진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바우지움’ 조각미술관이다.
강원도의 산 속에 나지막한 높이로, 그러나 5000평 규모의 넉넉한 면적에 앉아있다. 바우지움이란 이름은 바위의 강원도 방언인 ‘바우’와 ‘뮤지엄’의 합성어다. 치과의사 안정모씨와 그의 아내인 조각가 김명숙 관장이 설립했다. 산과 하늘이 미술관에 제대로 어울리는 배경 역할을 하고있다.
먼저 근현대 미술 조각관을 들어가 보자. 유리벽으로 밖이 훤히 보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볼 수 있다. 창 밖엔 '물의 정원'이 자리잡고 있다. 밖으로 나오면 '돌의 정원'이 보이고 그 매끄럽지 않은 돌담 앞에 야외 전시가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소나무 정원'의 나무 그늘에서 잠깐 쉴 수 있다.
'잔디 정원'의 거친 담벼락에 조화를 이룬 작품들, 이 담벼락에 설악산 울산바위의 높새바람과 동해의 해풍이 만나 자연과 건축과 조각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김인철 건축가가 설계했다. 그 앞에 오롯하게 놓인 작품들, 잘 가꾸어진 잔디밭에 자리 잡은 작품들이 바람을 맞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받고 있다.
실내와 야외의 작품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는 '테라코타 정원'이 있다. 길 옆에 쪼그리고 앉은 소년의 모습이나 나무 아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요한 모습의 작품들이 정겹다. 담 아래엔 아직도 수국이 탐스럽고 옥수수밭 옆엔 해바라기가 8월의 하늘을 향해 있다.
나가는 길에 기획전시실과 아트숍이 있고 그 옆으로 카페 바우가 있다. 입장료에 커피 한잔이 포함되었기에 냉방이 잘 된 카페에 앉아 땀을 식히며 편안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돌과 바람과 물이 조화로운 바우지움 조각미술관, 매일 달라지는 자연이 예술작품을 날마다 달리 보이게 하는 곳.
고성에 가면 설악과 동해의 바람이 넘나드는 바우지움 미술관이 있다.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 온천 3길 37
*영업시간 화~일 10:00~18:00
깊고, 넓고, 짙고, 푸른 강 같은 느낌이었다. 휘몰아침 없이 잔잔해 보이지만 물속 안은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느린 속도로 쉬기도 하다 소용돌이를 만들어 새롭게 정리한다. 그리고 또다시 흐르는 강물 말이다. 인생을 두고 큰 그림 그릴 생각은 없었을 게다. 그저 걷다 보니 길이 만들어졌고 어딘 가에 서 있었다. 인생 속에서 받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호응하며 살아온 방송인이자 역사학자 정재환(丁在奐·58)을 만났다.
장소 제공 숲숨
훤칠한 키에 중절모를 쓴 신사가 대나무 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교수님 소리가 좀 더 자연스러워진, 우리 세대에게는 미남 개그맨으로 기억되는 정재환이다. 현재 그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이 잘생긴 교수님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나이 든 교수라고 생각하겠죠. 육십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학생들이 볼 땐 ‘진짜 할아버지 교수가 들어왔구나’ 할 겁니다.”
역사학 교수로서 강단에 서고,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각종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사회자 자리를 맡아왔던 그. 정재환은 마음에 꽂혔다 싶으면 간만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갈 데까지 가보는 강한 의지로 산다. 마흔에 대학에 들어가더니 박사가 됐고, 한글 역사 연구를 위해 일본어를 배웠다.
잘나가는 개그맨, 역사학자 되다
정재환은 긴 세월 연예인으로서 대중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이경규, 이주일, 이용식 등 한눈에 봐도 성격 강한 개그맨들 사이에서 재치 있는 언변과 입담이 필수인 스탠딩 코미디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조곤조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엉뚱한 말을 쏟아내면서 가랑비가 옷 적시듯 관객에게 장난을 걸었다. 이게 제대로 먹히면 청중들은 크게 환호하며 웃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농담을 좋아했어요. 오락부장도 했고 친구들 만나서 웃기기도 하고요.”
방송이 우리말로 하는 활동이다 보니 한글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한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됐다. 하나만 잘하는 것도 힘든데 너무나 다른 분야들에 찾아들어 지독하게 몰두하며 살아왔다. 마치 럭비공이 지구 반대편을 찍으며 크게 지나다닌 삶 같다고 말을 건넸다.
“럭비공이죠. 아마 다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면전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은 처음 봤네요.(웃음) 젊었을 때는 뭘 좀 하다가 다른 게 하고 싶어지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반드시 했습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고나 할까요. 20대 중반 넘어서면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쉽사리 포기하는 일 없이 뭔가를 꾸준히 했습니다.”
안정적으로 방송 생활을 하던 정재환은 제대로 된 공부를 하겠다며 마흔의 나이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뜻밖의 선택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방송 관련 학과가 아닌 사학과로 진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제가 살면서 관심사 중 큰 것 세 가지만을 말씀드리자면 첫 번째는 방송이죠. 또 하나는 한글이었고, 마지막은 역사였어요. 전공 선택 때 이 세 가지를 놓고 고민했어요. 연기예술은 방송 열심히 하면 될 거야. 스스로 공부하자. 국어국문학은 한글운동 열심히 하면서 필요한 책을 열심히 보자. 그렇게 정리하니 남은 게 역사였어요. 그렇다면 한글과 국어 문제를 역사적으로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은 거죠. 일반적인 선택을 했다면 연기예술이나 국문학이었겠죠. 제가 역사를 택했기 때문에 튀어보인 거 같아요.”
학사과정을 3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석사에 이어 박사학위까지 마친 정재환. 사람들은 그가 방송계로 돌아올 생각이 없나보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방송일에 대한 더 큰 열망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인기라는 건 파도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 인기 있는 사회자로 살겠다는 생각은 헛된 꿈입니다. 단, 좋은 진행자가 되겠다. 이건 가능하다고 본 거죠. 두루두루 공부해놓으면 프로그램에 조금씩이라도 반영될 것이고 좀 더 나은 프로그램을 시청자가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들이 가지 말라는 길은 알아서 잘도 찾아갔다. 앞뒤 안 보고 그냥 자신만을 믿고 끝까지 파내려갔다. 특히 박사과정을 앞둔 정재환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학자도 있었다. 박사과정만큼은 편하고 유리한 길을 택하길 권유받았다.
“혹시나 제가 연기예술 쪽을 택했더라면 전임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분이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만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비현실적인 선택이었던 셈이죠. 저는 진짜 현실감각이 없어요. 실리가 있다 없다를 판단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역사 공부를 끝까지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선택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학문에 관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는, 요즘 보기 드문 학자의 선택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그가 방송에서 사회를 보는 것과 강단 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형식상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예전에는 대중이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학생들이 있는 대학 강단으로 주 무대를 옮긴 것뿐. 슬랩스틱 코미디가 대세이던 시절 그는 늘 꼿꼿하게 마이크 앞에 섰다. 지금도 여전히 강연을 통해 학생뿐만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인 모든 신분을 다 떠나서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제가 개그를 하던 시절에요,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방청객이 막 웃더라고요. 그럼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웃겼구나. 다들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웃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처음에는 뭘로 사람들을 웃기지? 스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고민을 했겠죠. 그런데 일하면서 보니까 내가 사람을 웃기는 건 그들을 잠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더라고요. 지금은 이제 뭐 그 무대에서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지만요. 가끔 요즘 젊은 개그맨 후배들을 보면, 다 예뻐 보여요. 그들의 개그를 보면서 사람들이 힘든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웃고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길 없는 길에 매력을 느끼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신의 생활신조라고 말하는 정재환.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살았고 할 수 없는 일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도 물론 욕심 있겠죠. 버려지지 않는다면 줄이기라도 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40대부터는 철저히 버리고 줄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해서 좋더라고요. 욕심을 내려놓으면 크게 걱정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뭔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시간이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실행에 옮기며 살아왔다. 일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보였지만 정재환이기에 가능했다.
“‘정 선생은 길 없는 길을 가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30대 때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을 인상 깊게 읽기는 했죠. 그래요. 저는 ‘길 없는 길’에 대한 매력을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몰라요. 성인이 되어서 더 남들이 안 가는 곳, 안 하는 것에 대해 재미를 느꼈다고나 할까요. 제가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끝장을 보는 성격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제 마음에 드는 일을 해요. 재미없는 일은 안 하는 게 맞고요.”
변한 세상에는 영어가 필요하다
세상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 나이 50이 넘어 영어 공부에 흠뻑 빠져버렸다. 작년 10월에는 영어 공부와 관련한 경험담을 엮은 책 ‘나는 오십에 영어를 시작했다’를 출간했다고.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지금까지 영어와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20대 때 영어 공부를 좀 해보려고 학원도 등록해서 다녔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그때는 포기한 거죠. 한글문화연대에서 한글운동을 하면서 영어건 다른 외국어건 부차적인 것으로 봤어요.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세상이 변한 거예요. 과거에는 직업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외국어를 구사하면 됐는데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를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어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학생들의 영어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이 되어 영어를 못해도 되나 싶었다고 했다.
“영어 공부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제가 교수가 된 2013년 첫 학기 때였습니다. 한 학기 마치자마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1년 예정하고 갔다가 1년 5개월 있었습니다. 쉰셋 되던 해였는데 스트레스 엄청 받았죠.”
영어는 활용도가 높은 언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어를 할 줄 알면 다양한 영역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리고 시니어에게 고스톱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학 공부라는 얘기를 접했다.
“어학 공부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건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나덕렬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저도 오십이 넘어서 어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언어는 말하고 듣고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잖아요. 집중해서 단어와 표현 등을 외워야 하죠. 그것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말이죠.”
정재환도 영어 공부를 시작한 이후 쉬지 않고 말하고 듣고 읽기를 반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미국 드라마를 틀어놓고 대사도 따라 해본다. 중·고등학생용 영어 역사책을 보거나 SNS으로 외국인과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또 어학연수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필리핀 영어 선생과도 꾸준하게 화상 통화를 한다.
할아버지 교사를 꿈꾸는 교수
공부가 일종의 직업이 된 삶을 사는 정재환. 그는 이미 준비하고 있는 미래의 직업이 있다고 했다. 완숙한 노년기에 접어들면 동네 할아버지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왔다.
“60대 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사회활동을 하겠죠. 물론 70대에도요. 책을 쓴다든가 가끔 어디서 불러주면 가서 특강을 한다든가 이런 거는 할 수 있겠죠. 몇 살까지 살지 모르지만 더 나이가 들면 제가 사는 동네에서 할아버지 교사를 하려고요.”
요즘 지역에 도서관이라든가 평생학습관이 잘되어 있으니 기관과 협의를 해서 공간 하나를 구하거나 혹은 직접 얻어서 60대 중후반 이후의 삶을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의사도 변호사도 훌륭하지만 그분들도 결국 선생님이 키워내는 거잖아요. 제가 좋은 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학교에서 강의는 계속할 것 같고요. 그 뒤에는 동네에서 한국사 강의도 하고, 아직 영어가 시원찮지만 그때가 되면 가르칠 만한 수준은 되지 않겠어요?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쳐주면서, 동네에서 그렇게 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시간. 악수를 하고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멀뚱히 검정색 스쿠터 옆에 서는 정재환. 알고 보니 자동차도 아니고 수원에서 서울 강남까지 스쿠터로 달려왔다는 것. 다음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설까. 정재환의 반전 매력은 끝이 없을 것 같다.
정재환
역사학자 겸 방송인. 1979년에 친구 유성찬과 개그듀엣 ‘동시상영’을 결성해 MBC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로 방송계에 데뷔했다. 1989년 MBC 코미디 프로그램 ‘청춘행진곡’ 진행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2000년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해 석·박사를 취득했다. 한글 역사를 깊이 공부하기 위해 배운 일본어는 유창한 정도이고, 현재는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져 있다. 저서로 ‘나는 오십에 영어를 시작했다’, ‘큐우슈우 역사기행’, ‘우리말은 우리의 밥이다’ 등이 있다.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알아보려 한다. 이번 호에는 ‘산림’ 분야를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산림복지진흥원, 한국분재조합
최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면서 환경오염이 심각해지자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숲을 찾는 도시인이 많아졌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숲해설가, 산림치유지도사 등에 대한 수요가 늘며 관련 자격증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특히 깨끗한 자연을 벗 삼아 유년 시절을 보낸 중장년의 경우 산림 분야에서 제2직업을 찾아 종사하기를 희망하는 이가 적지 않다. 싱그러운 숲에서 자연의 신비를 만끽하면서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PART1. 국가전문자격
‘숲’과 관련해 가장 익히 들어본 자격이 바로 ‘숲해설가’일 것이다. 숲해설가를 비롯해 유아숲지도사, 숲길등산지도사 등을 ‘산림교육전문가’라고 하는데, 이는 국가전문자격으로 관련 양성기관에서 일정 시간 산림교육 전문 과정을 이수해야 취득이 가능하다. 산림교육전문가 양성기관은 전국적으로 숲해설가 31곳, 유아숲지도사 15곳, 숲길등산지도사 7곳으로 산림청 또는 한국산림복지진흥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육기간은 양성기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숲해설가 4~5개월, 유아숲지도사 5~6개월, 숲길등산지도사 2~3개월 정도 소요된다.
대부분 산림교육전문가 취득자가 그다음 단계로 준비하는 자격증이 바로 ‘산림치유지도사’다. 산림치유지도사는 앞서 숲해설가, 유아숲지도사, 숲길체험지도사 자격증을 딴 후 해당 분야에서 3년 이상 종사한 경력이 있거나, 의료·보건·간호·산림 관련학과 학위를 보유해야 한다. 더불어 산림치유지도사 양성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산림복지진흥원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양성기관에서 교육을 이수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시험 평균 합격률이 1급 33.3%, 2급 53.6%인 것을 감안하면 쉬운 도전은 아니다.
산림교육전문가와 산림치유지도사의 연령별 취득 현황을 살펴보면 중장년 세대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모든 자격에서 50대 취득자 수가 가장 많았고, 60대 역시 타 연령대보다 취득자가 많은 편이다. 관련 종사자들은 “산림치유지도사의 경우 평가시험이 만만치 않은데도 중장년층의 학구열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며 “산림교육전문가 취득 후 실무 경험을 쌓았다면 도전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6월 28일부터 산림보호법 개정으로 나무의사가 병든 나무를 진단하고 농약을 처방하거나 치료하는 ‘나무의사 제도’가 시행됐다. 그동안 비전문가가 부적절한 농약으로 병든 나무를 치료하는 사례가 잦아 나무는 물론 사람의 안전까지 위협받았다. 이번 제도 도입으로 본인 소유의 수목을 직접 진료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무의사나 수목치료기술자가 있는 나무병원을 통해서만 수목진료가 가능해졌다. 이에 국가전문자격인 ‘나무의사’와 ‘수목치료기술자’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나무의사의 경우 올해 3월 제1회 나무의사 자격시험을 시행했는데, 시험이 까다롭고 난이도가 꽤 높다는 반응이다. 시험도 어렵지만 수목진료 관련 전공 이력 등 자격기준을 충족하고, 지정된 양성기관에서 150시간 이상의 교육을 이수하는 등 요건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나무병원을 직접 차리거나 취업하려는 계획이 아니라면, 별도의 요건 없이 양성기관 교육 이수를 통해 취득 가능한 수목치료기술자 자격을 준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PART2. 국가기술자격
일반적인 국가기술자격과 마찬가지로 ‘산림기능사→산림산업기사→산림기사→산림기술사’ 등의 순서를 거치게 된다. 상위 자격으로 갈수록 석사, 박사 등 전문 전공자와 종사자들이 주로 응시하기 때문에 관련 학위나 경험이 없다면 취득 과정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따라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목표를 갖고 산림 분야의 국가기술자격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먼저 산림기능사 과정부터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
산림기능사의 경우, 자격증 취득 후 관련 실무에 종사한 연수에 따라 산업기사(1년 이상), 기사(3년 이상), 기술사(7년 이상)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산림기능사 연령대별 시험 합격 현황에서 50대와 60대 이상의 합격자 수가 높게 나타났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50~60대의 시험 합격률은 60%대를 웃도는 수준으로, 합격 인원이 많다고 해서 시험 자체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진로와 적성, 직무에 대해 꼼꼼히 검토한 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PART3. 국가공인 민간자격
‘수목보호기술자’는 나무의사의 처방에 따라 수목의 병충해 방제, 상처 치료, 영양제 살포 등을 수행한다. 2001년 첫 자격검정시험 시행 후 지난해까지 총 476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한국수목보호협회 홈페이지 기준). ‘분재관리사’ 역시 국가공인 민간자격에 속한다. 2017년 기준 취득자의 77.8%가 50대 이상으로 나타나는 등 중장년 선호도가 높은 자격증이다.
솔향기길 1코스는 충남 태안군 이원면 만대항에서 꾸지나무골 해수욕장까지 약 10km 구간에서 전개된다. 숲길을 거닐며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명품 둘레길. 구간의 일부만을 탐방해도 뿌듯하다. 어느 구간이건 차량 접근도 쉽다.
뭍의 끝자락에, 작은 포구 만대항. 포구에선 들뜬다. 드나드는 고깃배들의 생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낮부터 술 마시는 어부들의 파안대소 때문이다. 한나절을 머물러도 무료하지 않은 게 포구다. 정들기도 정 두기도 쉬운 게 어항이다. 쏠리는 마음을 거두고 산길로 접어든다. 만대항은 솔향기길 1코스의 기점이다.
이 둘레길은 바다로 가는 산길이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산과 바다가 동행하는 해안길이다. 산이 있어 푸르고 바다가 또한 푸르러 천지가 통째 푸르고 푸르다. 잿빛 도시에 발목 잡힐쏘냐, 한달음에 내달아 닿은 게 감옥 밖이다. 철창 없는 철창. 비정한 성시(成市)를 그리 이르는 게 아니다. 감옥이 마음 안에 있지 어디 밖에 있더냐. 좀스러운 자는 자주 마음의 해방을 갈구한다. 그런 나에게 산과 바다는, 자연은 특별사면을 허한다. 자연이라는 유토피아 외 믿을 만한 의지처가 다시 있던가.
해송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펼쳐진다. 뇌수까지 건드리는 솔바람, 콧등을 치는 솔향기에 심취한다. 창고에 처박힌 오감이 훌훌 먼지를 털고 깨어나는 순간이다. 감관이 잠 깨면 눈앞의 사물이 자못 새롭게 느껴진다. 모처럼 공정한 눈으로 풍경의 진실을 살핀다. 나는 지금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그러나 오르막을 오르막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보는 방향에 따라 오르막은 내리막이며, 내리막은 오르막이다. 숲 덤불에선 이 꽃이 피고 저 꽃이 진다. 이게 단지 꽃만의 일이겠는가.
숲길 저 너머로, 저 아래로 자주 바다가 보인다. 쪽빛? 코발트블루? 울트라마린? 바다색은 찬연히 푸르다. 반할 게 색뿐이랴. 광활해서 장엄하고, 잔잔해서 은은하고, 쾌청해서 요요한 저 바다. 이 모든 미덕의 총합을 ‘그지없는 아름다움’이라 해두자. 아련한 수평선 위로는 하늘이 피어오른다. 해는 중천에 떠 활을 겨누듯 바다를 겨냥해 햇살을 쏜다. 그러자 수면에 어리는 수천수만의 물비늘들. 찰나에 반짝이다 찰나에 스러지는 저 시리도록 눈부신 빛의 알갱이들. 윤슬이라고 하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건 이슬이지만, 윤슬은 순간에 명멸한다. 저건 어쩌면 잡아둘 수 없는 시간의 허무한 잔상이다. 야야, 덧없다, 생성과 소멸이 한 몸이다, 그런 뉴스를 전하며 황홀하게 떠난다, 윤슬.
산은 낮고, 숲은 무성하다. 길은 거칠 게 없으니 구미에 맞다. 다정도 하여라. 나무들은 그 따뜻한 손을 내밀어 숲길로 인도한다. 내 몸을 어루만진 해풍은 산을 넘어 어느 꿈의 교각 아래에 나를 눕힐 것인가. 딱딱한 바위 벼랑에 뿌리 내린 나무들은 어떤 마법의 묘약을 마셨기에 저토록 굳센가. 보매 의연한 초목이며 사람만 갈피없이 설렌다. 수려하기로는 또한 산경(山景)이며 경이롭기로는 바다다. 보라, 솔향기길의 명소를, 미모를, 쾌활을…. 당봉, 가마봉, 여섬, 칼바위, 용난굴 등 빼어난 조망과 신비를 자랑하는 경승이 즐비하다.
솔향길에는 ‘보은의 길’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지난 2007년, 이른바 ‘태안 기름 유출사건’ 당시 전국에서 사람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불철주야 해안에 들러붙은 기름을 닦아냈다. 당시의 자원봉사자 123만 명이 작업하기 편하도록 지역민들이 황급히 길을 닦고 밧줄을 매단 게 솔향기길의 시발이었다지.
흔쾌히 발 벗고 나섰던 사람들의 선의는 실로 고귀하다. 일왕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열정에 맞먹을 장쾌한 행장이었다. 지옥으로 통하는 길조차 선의로 분장된 세태라지만, 계산이 없는 선의는 얼마나 위력적인가. 봉사자들의 선의에 찬 연대는 결국 자연을 살렸고, 사람의 마을을 데웠다.
홀연히 날개를 펼친 선의로 세상과 만나는 자, 그는 사랑을 아는 자다. 자연에 기생하길 습으로 삼은 게 인간사이지만, 그들은 공생의 도리를 알아 사랑을 실천했으니 매혹의 행장이지 아니한가. 솔향기길에 감도는 솔향에 살포시 포개진 저 선의의 향. 두 겹 향이 가슴을 채운다. 일몰의 수평선엔 어느덧 놀빛 너울거리고.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지난 6일 세종문화회관으로 뮤지컬 ‘영웅 안중근’을 보러 갔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는 떠올리면 가슴 아프고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다.
공연을 보기도 전부터 마음이 경건해지고 아려왔다.
‘1909년 서른 살 청년 안중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았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울컥하고 가슴이 저리다.
뮤지컬은 러시아 자작나무숲에서 조선 청년들이 모여 ‘단지 동맹’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작나무숲에 모인 청년들의 애국심과 그들의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군무와 합창이 가슴을 울렸다.
안중근 의사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첫마디를 자르고 대한독립이라 혈서를 쓰는 순간부터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고 감옥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독립운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잘 표현하였다.
화려한 군무와 특수효과로 웅장한 무대가 살아났고 아크로바트처럼 무대 전면에 세워진 기둥을 타고 이쪽저쪽 아래위로 활약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긴박감을 느끼게 했다.
높은 무대 위까지도 날렵하게 이동하는 모습은 그들의 연습이 치열했음을 알게 해준다.
더블 캐스팅으로 두 명의 배우가 안중근을 연기했다.
내가 관람한 날은 정성화 안중근이었다. 예전에 개그맨으로 또는 드라마의 조연으로 보았던 정성화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당당하고 멋지게 안중근 의사를 연기했다. 목소리도 어찌나 멋있는지 합창과 독창 모두 감동적이었다.
단아한 한복차림의 안중근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수의를 전하며 부르는 절절한 아들 사랑과 신념을 지켜주려는 마음, 아들을 위해 끝까지 힘을 북돋워 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슴을 후벼 파듯 나를 울게 했다.
일본 법정의 재판하는 장면에서 안중근 의사는 ‘누가 죄인인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외친다.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대한의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이고 조선을 말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쏴 죽인 나는 사형이라니 대체 일본 법은 어찌 이리도 엉망이냐”고 호통을 친다.
마지막 장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처형대에 선 안중근 의사, 그리고 1945년 그가 그렇게 바라던 독립이 되었는데도 일본이 감추어 그의 시신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에필로그가 뜬다.
공연이 끝난 시간에도 여전히 꽃샘추위가 나를 웅크리게 했고 한동안 가슴은 먹먹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술을 뽑아야 한다면 ‘압생트(absinthe)’가 아닐까. 고흐가 마시고 귀를 자른 술, 마시면 환각 증세를 일으키는 술 등의 누명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압생트를 소개한다.
영화 ‘물랑 루즈’는 ‘로미오와 줄리엣’, ‘위대한 개츠비’ 등을 제작한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감독의 2001년 작품으로 뮤지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영화로 평가받는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환락가 물랭 루주를 배경으로, 시인인 크리스티앙이 뮤지컬 가수인 샤틴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영화는 화려한 의상과 무대 등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그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소품이 있다. 바로 작은 잔에 든 초록색 술, 압생트다. 이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내는 압생트는 영화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크리스티앙이 압생트를 마시자 눈앞에 ‘녹색 요정’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은 ‘녹색 요정’이라고도 불리는 압생트의 특징을 잘 표현해낸 장면이다. 이뿐만 아니라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압생트 포스터와 압생트 이름을 내건 술집 간판은 압생트가 19세기 말 프랑스의 문화와 낭만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수많은 예술가가 예찬한 술
실제로 19세기의 프랑스에선 압생트가 큰 인기를 끌었다. 흔하지 않은 초록빛 술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유럽의 포도나무를 강타했던 필록세라 해충 사태가 큰 몫을 했다. 이 재앙으로 와인의 종주국인 프랑스의 와인 산업이 휘청거렸고 이 틈을 타 값싼 압생트가 대량 생산되면서 프랑스의 주류 산업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러한 저렴한 압생트의 주 소비계층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파리로 몰려든 가난한 화가, 작가 등의 예술가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 아르튀르 랭보, 에드가 드가, 오스카 와일드 등이 있는데 이들은 그림과 글을 통해 압생트를 예찬하기도 했다.
“압생트를 마시면 튤립이 내 다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오스카 와일드
그러나 영원할 줄만 알았던 압생트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말 한 정신과 의사가 압생트를 만들 때 사용되는 쓴쑥(wormwood)에 환각과 발작을 일으키는 투우존(thujone)이란 성분이 들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차례 타격을 입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05년 스위스에서 발생한 한 살인사건은 ‘압생트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석연치 않은 점은 살인자였던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잔의 와인을 먹는 알코올 중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원인을 그날 두 잔밖에 먹지 않은 압생트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이후 압생트는 1906년 벨기에를 시작으로 1907년 스위스, 1909년 네덜란드, 1912년 미국, 1915년 프랑스 순으로 판매가 금지됐다.
억울한 누명 ‘악마의 술’
제물이 된 압생트가 누명을 벗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시작된 압생트에 대한 연구는 투우존이라는 성분이 신경에 영향을 주는 물질은 맞지만, 압생트에 포함된 투우존의 양은 아주 극소량이기 때문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물론 70kg의 성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앉은자리에서 압생트를 420ℓ 마시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결과도 나왔다. 다시 말하면, 압생트 420ℓ를 마시고 환각 증세를 보일 확률보다 그전에 알코올 쇼크로 세상과 작별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의미다. 이러한 연구 덕분에 압생트는 비로소 누명을 벗고 2000년 이후부터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에서 다시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젠 우리나라 바에서도 쉽게 마실 수 있다. 비록 녹색 요정은 나타나지 않겠지만 19세기의 예술가로 빙의해 압생트의 매력에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외손자가 태어났다. 딸은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했다. 제왕절개는 독일어 ‘카이저슈니트(kaisershnitt)’를 직역한 말이다. 즉 ‘황제’의 의미를 가진 ‘카이저’와 ‘자르다’는 의미를 가진 ‘슈니트’가 결합된 용어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Caesar)가 수술로 태어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몸이 약한 딸이 첫째는 자연분만으로 낳았는데 그때 너무 힘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제왕절개를 선택했다.
사람은 태어난 시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는 사주팔자가 있다. 제왕절개는 수술로 아이를 꺼내는 방법이니 출생시간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좋은 날, 좋은 시에 태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유명 철학관에 가서 출생시간을 받아왔다. 하지만 선택된 시간에는 담당의사가 바쁘다 해서 결국 의사 편리한 시간대에 수술하게 되었으니 괜히 돈만 날린 셈이 되었다.
실망한 딸을 위로하기 위해 지금 출생한 시간이 오히려 좋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우뚝 솟은 나무는 강한 바람을 홀로 이겨내다가 죽기도 한다. 운명적으로 가장 좋은 시간에 태어나 사람들의 질투를 받고 사는 것보다는 한 단계 낮은 괜찮은 시간대에 태어나 겸손하게 살면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설명하고 이해를 시켰다. 세상사를 좋게 보고 믿으면 그 결과도 좋다.
예전에는 아기를 낳으려면 '삼신할매의 점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산과 삼신할매의 관계가 깊다. 아기가 커서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삼신할매의 배려는 절대적이었다. 전염병으로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기도 했던 시절, 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삼신할매에게 의지하면서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요즘은 의사가 삼신할매다.
혼자 살다가 아내와 결혼한 후 아들과 딸을 낳고 식구가 네 명으로 불어났다. 아들을 품에 안고 병원에서 퇴원할 때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기뻤다. 둘째인 딸을 안고 나올 때는 아빠에게 재잘대며 앙증맞은 손으로 어깨를 두드려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냥 행복했다. 어린 자식은 무슨 짓을 해도 귀여웠다. 심지어 밥 먹을 때 똥을 싸도 하나도 더럽지 않았다.
이렇게 키운 자식들이 부모 품을 떠나 제짝을 찾아가더니 손주들이 태어났다. 친손자 하나에 친손녀 둘, 그리고 외손자도 둘이나 태어났으니 합이 다섯이다. 나를 포함해 식구가 이제 열한 명이 됐다. 축구 한 팀의 숫자를 채웠다. 하나에서 출발해 세월이 열하나를 만들어줬다. 친손자이든 외손자이든 하나같이 사랑스럽다. 아이를 들여다보면서 눈매는 아빠 닮았다고 하다가 어느 날은 외할아버지를 꼭 빼 닮았다고 수다를 떨며 가족들이 즐겁게 웃는다. 아이는 가정을 건강하게 해주는 비타민이다.
‘브라보! 2018 헬스콘서트’가 지난 8일 서울 팔래스 강남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오후 2시부터 열렸다. 요즘 한창 인기 높은 TV조선 토크쇼 ‘인생감정쇼, 얼마예요?’에서 자주 보던 이윤철씨가 사회자로 나왔다. 특유의 친근감 넘치는 멘트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우려와는 달리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오후에 콘서트장은 만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사회자의 소개와 멘트로 첫 번째, 명사 초청강의는 99세의 석학이신 김형석 교수님의 강제(講題) ‘백세로 산다는 것’으로 첫 강의가 이루어졌다. 작년도 헬스콘서트에서도 뵈었는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신 정정하고 건강하신 모습으로 단상에 오르시는 교수님을 뵈면서 존경의 마음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60세가 될 때까지는 학문에 대한 걱정으로 살았지만 60세가 넘으면서는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교수로써 살아야 끝까지 학교에 남을 수 있다. 나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결국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삶은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기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것은 보람이 있다. 나이 먹어서도 건강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것이 좋다. 정년퇴직을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계기를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수님의 연세 99세이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좋아 보인다.
이어서 건강강의가 시작되었다. 자생한방병원 원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이돌 가수처럼 미끈하게 잘 생긴 한창 원장의 강의는 유머와 위트로 즐겁게 해준다. 겨울철 관절건강관리에 대해서 뻔 한 이야기지만 머리속에 콕콕 박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건강을 위해서 지켜야 한 6가지를 풀어준다.
① 담배를 끊어라. 흡연은 치매관계질환에 노출시킨다.
② 술을 줄여라. 지속적인 과음은 뇌건강 질환에 절대 좋지 않다.
③ 체중을 줄여라. 5~15%의 체중을 감량하면 50%의 성인병을 줄일 수 있다.
④ 잘 먹어라. 단백질 섭취와 적절한 운동이 근육을 만들어준다.
⑤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
겨울철 운동은 가급적이면 새벽에 하지 말고 낮시간이나 실내운동을 하라.
⑥ 잠을 잘 자야 한다. 하루에 6~8시간은 자는 것이 좋다.
불행은 남하고 비교하는 순간 생기게 된다. 자주 웃고 주변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라.
두 번째 건강강사로 나선 분은 예풍한의원 백태선 원장이다.
백태선 원장은 등장할 때부터 눈길을 끌었다. 의사라고 보기에는 비교적 살집이 풍부하고 남자답게 생긴 비주얼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에 시원시원하게 쏟아내는 ‘겨울철 혈관 건강관리’에 대한 강의는 시니어들이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혈관 건강의 테마는 세 가지로 암, 심근경색, 중풍이었다.
모든 병이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일찍 찾아내어 치료하면 완치율도 높고 치료효과가 좋다. 그러나 혈관 건강은 전조증상이 없다. 혈관이 막혔을 때나 온 것을 안다. 그러니 주기적인 혈관검사를 통해서 예방이 중요하다.
겨울철은 혈관계통의 질환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어떻게 조심할 것인가?
① 겨울철에는 운동을 하지마라.
새벽에 일어나 운동할 때 사고가 많이 난다. 하려거든 낮 시간대 운동하라.
② 과격한 운동을 삼가하라. 혈압이 상승한다.
조절이 가능한 운동, 즉 걷기, 자전거 타기 물속에서 걷기등 규칙적으로
30~40분정도 하는 것이 적당하다.
③ 음식을 골고루 먹어라. 고기도 많이 먹어라.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의사들은 동물성 지방에 대한 경고차원에서 고기를 꼽는다. 기름을 제거하고 가급적 태우거나 굽지 말고 삶아서 먹되, 많은 량을 먹지 말라는 등의 권고를 한다. 그런데, 백교수님의 강의는 특이했다. 삼겹살도 가리지 말고 많이 먹으란다. 우리는 주식이 고기가 아니기에 가끔씩 먹는 육류는 괜찮다는 말에 모두들 박수로 환호한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오후, 헬스콘서트도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실버치어리더들의 깜찍한 율동과 우리 동요 ‘나비야’를 관람하면서 많이 유쾌했다. 촉촉하게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가수 신계행의 ‘가을사랑’이 물씬 가을을 음미하게 해주었다. 가수 김목경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콘서트를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아직도 가을비는 단풍나무위에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가라앉지 않은 헬스콘서트의 잔상이 잔잔하게 머릿속에 맴돈다. 멀어져 가는 가을이 왠지 모르게 아쉬웠는데, 이번 콘서트를 통해서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은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하다. 브라보! 헬스콘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