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에 보도 된 바에 의하면 성수동에 있는 서울 공기 오염의 원인이라고 말이 많은 삼표 레미콘 공장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 곳에 현재 있는 서울의 숲이 확장 되어 들어선다고 한다.
서울의 숲은 필자가 살고 있는 청구동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이다.
필자는 결혼 후 강남의 반포에서 30년 가까이 살다가 아들을 결혼 시키고, 수 년 전에 우연히 강북의 약수역 근처인 청구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항공 회사에서 근무하는 아들의 직장이 김포 공항 근처라 공항 가까운 목동에 집을 마련 해주고 우린 옛날 어릴 때 살던 장충동과 가까운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보니 우선 서울의 중심인 중구이기 때문에 국립극장이나, 덕수궁, 경복궁 등의 문화재가 집과 아주 가까워서 만약의 경우 택시를 타게 되어도 돈 만원 정도면 해결이 된다. 또 광화문이 가까워 세종 문화회관의 공연도 가기가 편해서, 교통의 불편으로 악마의 장소로 불리는 예술의 전당의 공연보다 훨씬 쉽게 즐길 수 있다. 또 남산 공원이나 장충단 공원도 가까워 답답한 날에는 drive를 즐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건 값이 싸다는 것이다.. 동대문 의류 시장이 가까워 옷 값이 싸고, 과일 야채도 재래 시장이 멀지 않고 저소득 층 상대라 강남에 비해 너무 싸고, 물건도 아주 싱싱하고 좋다.
또 의류 시장에 납품하는 의류 수선 점이 많아 수선비가 싸서 몸이 불어서 못 입는 옷을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수선할 수 있다. 또 최근에 젊은이들의 뜨거운 장소로 뜨고 있는 이태원의 경리단 길이나 서울의 Central park 라고 불리는 연남동의 ‘연트랄 파크’의 이름난 중국 요리 집도 자동차로 가면 멀지 않아 어렵지 않게 가서 외식도 즐길 수 있다.
또 날씨 좋은 가을 날에는 가끔 뚝섬 역 가까이에 있는 서울 숲에 가서 산책을 즐기는데 너무 넓어서 한 바퀴 돌려면 휠체어를 타야만 한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장애인이 되었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몸의 한쪽이 불편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먼 거리는 혼자서 걷지 못하고 올해 77세인 남편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 물론 집안 살림은 거의 남편이 맡아서 하고 또 하루에 3시간 씩 오는 도우미 아줌마에게도 많은 의지를 한다.
필자 지인들은 은퇴 후에도 어울려 재미있게 지낸다. 몇 달에 한 번씩 모였던 동창들도 더 자주 모임을 갖고 우정을 다진다. 하지만 일원 중에 허풍쟁이가 있으면 화기애애한 모임 분위기가 가끔씩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요즘은 모이면 막걸리 한 사발씩 돌리기보다는 건강 음식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둘레길 산책·문화유적지 탐방·영화 감상 등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야 모임이 활발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꽃향기가 진하게 풍기던 지난 봄, 고등학교 동창 몇십 명이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서 만나 호젓한 성곽 길을 걸어 남산에 올랐다.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친구들과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날은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대화 소재였다. 대부분 손주를 거느린 할아버지이지만, 손주를 안아보기는커녕 아직 결혼도 안 한 자녀와 함께 사는 친구도 있었다.
그날도 딸만 있어서 서운하다는, 평소 말을 많이 하는 친구의 딸 자랑이 여느 때처럼 뻥뻥 터졌다. “딸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한다”면서 하나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상식선을 넘고 있었다. “말 같은 소리를 해라.” 듣다 못해 한 친구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필자 기억으로도 얼마 전에 하던 얘기보다 허풍이 더 심한 것 같았다. 물론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 내용이 점점 더 믿기 어려웠다.
이 친구의 딸 자랑은 이전에도 있었다. 처음에는 두 딸의 효도 이야기에 모두들 감동하며 부러워했다. 친구들은 “딸이 효녀네~ 행복하겠어~”라며 칭찬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더 부풀려진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도 친구들은 열심히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얼마나 딸 자랑을 하고 싶으면 저러는가 싶어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듣는 사람이 추임새라도 넣어주면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산더미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이번에는 딸 자랑이 좀 위험하게 들려왔다.
그렇다! 듣는 사람 중에 아직 결혼도 안 한 자녀 때문에 속이 새까맣게 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망각한 것이다. ‘이야기를 할 때는 듣는 사람 입장도 생각하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실감했다. 결국 이번에는 필자가 못 참고 터지고 말았다. “한 번쯤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항상 그럴 수는 없을 거야!”라며 허풍쟁이 친구를 쏘아붙였다.
남산타워가 우뚝 솟은 262m 높이의 나지막한 남산. 광장에 가 보니 붐비는 여행객만큼 수많은 사연이 담긴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나온 세월이 문득 그리워졌다. 젊은 시절에는 케이블카 좀 타보려고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렸다. 중년에는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던 길, 이제는 건강을 위해 그 길을 다시 걷는 나이가 되었다. 빌딩이 가득한 시가지 모습이 눈에 가득 담겼다. 고층 건물이 몇 개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에는 삼일고가도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았다.
친구와 함께 걸으며 아름답게 추억할 일도 많은데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허풍을 떨면서 딸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맞춰 걸어본다. “그 친구 말은 거의 허풍이야.”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짓는다. 그 미소를 보니 끓어올랐던 화가 슬며시 가라앉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던 옥상이 요즘은 간단한 주류나 음식을 파는 ‘루프톱 바’ 또는 ‘루프톱 카페’로 변신했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경치와 도시의 야경은 루프톱의 인기 비결이다. 올여름, 에어컨 바람이 지긋지긋하다면 루프톱에서 야경과 시원한 자연바람을 벗 삼아 한여름 밤을 지내보는 건 어떨까?
스카이야드(SKYARD)
서울 광진구를 지나다 보면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이 눈에 쑥 들어온다. 바로 아차산 위에 자리한 비스타 워커힐 서울(구 W 호텔)이다. 나무와 식물이 공존하는 ‘스카이야드(SKYARD)’는 그 이름처럼 하늘 위의 마당 같은 느낌의 루프톱 바다. 저녁 8시부터 켜지는 조명과 잔잔한 클래식은 선베드, 그네 의자, 테라스 등 각종 휴식시설과 어울리며 이국적인 느낌을 연출한다. 한눈에 들어오는 한강과 녹색 빛으로 물든 광진교,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롯데월드타워는 루프톱에서 볼 수 있는 야경의 멋을 한층 더해준다. 피로를 풀어줄 풋스파는 덤. 루프톱 이용객은 석양에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료로 족욕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스카이야드에서는 음료와 간단한 안주를 판매한다. 얼음통에 담긴 캔맥주와 주스는 여름밤의 무더위를 날려준다. 안주로는 견과류, 치즈스낵, 쿠키가 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가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는 스카이야드에서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177 (비스타 워커힐 서울 4층)
버티고 (VVertigo)
여의도 고층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아름다운 야경과 라이브 밴드 음악에 취해보자. 더운 날씨와 지친 일상에 청량감을 더해줄 시원한 칵테일과 호텔 셰프가 준비한 다양한 그릴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위치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로 10 (콘래드 서울 9층)
파노라마 라운지 (Panorama Lounge&Bar)
이번엔 숭례문이다. 서울의 정문, 국보 1호인 숭례문은 16층에 위치한 파노라마 라운지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최근 새롭게 준비한 프로모션 ‘썸머 바비큐 패키지’를 통해 최상층 루프톱에서 셰프가 직접 구워주는 바비큐 플래터와 무제한 생맥주를 즐길 수 있다.
위치 서울 중구 세종대로 58 (프레이저 플레이스 남대문 호텔 16층)
더 그리핀 (The Griffin)
11층에 마련된 루프톱 테라스에선 흥인지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보이는 서울성곽길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동대문의 멋진 파노라마 뷰를 완성한다. 근사한 야경을 배경으로 코리아컵 우승자인 바텐더가 제공하는 맛있는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279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11층)
호텔 카푸치노 루프톱 바
낮은 주택가에서 높이 솟은 강남의 빌딩이 도심의 밤을 환하게 비춘다. 호텔 카푸치노 루프톱만의 자랑인 20여 종의 가니쉬와 다양한 칵테일. 남산이 바라다보이는 멋진 야경을 안주 삼아 한잔 기울이기 좋다.
위치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155 (호텔 카푸치노 17층)
사회에서 은퇴하고 재미있는 제2 인생설계를 위하여 많은 평생교육에 참여하였다. 한두 달 동안의 단기 교육동기들은 학창시절 동창과 전혀 다르게 20년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새 친구 사귀기도 전에 교육을 마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육 중 수업이 끝나면 막걸리 잔을 나누면서 지속가능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한다.
몇 년 전, KDB 시니어브리지센터 제8기 사회공헌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면서 교육동기 친목모임 ‘두레월회’를 결성하였다. 매달 둘째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친목을 도모한다. 봄과 가을에는 둘레길 도보여행ㆍ문화유적 탐방 등 야외활동을 주로하고, 여름과 겨울에는 영화감상ㆍ소양강좌ㆍ독서토론 등 실내모임을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보여행을 많이 하였다. 첫 행사는 젊은 시절 즐겨 걸었던 단풍이 곱게 물든 남산에서 시작하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즐거웠던 그때가 그리워졌다. 둘레길을 돌아 장충동 족발골목에서 걷기를 마무리하였다. 막걸리잔 높이 들고 메아리를 남산으로 날렸다. 고양시 한북누리길, 사당역에서 양재역에 이르는 우면산 둘레길 새해맞이 도보여행을 하였고, 원당역에서 왕복 행주누리길 산책을 하였다.
회원 간의 교양강좌도 보람이 있었다. 사진전문가 조영대 회원의 강의와 SNS 전문가 오경순 회원의 지도로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기법 강좌를 진행하였다. 동영상의 기능부터 촬영, 저장, 편집과 보내기까지 전반에 걸쳐 강의가 진행되었다. 전문지식과 체험을 갖춘 강사의 열강으로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서 회원끼리 공유하는 실습까지 완료하였다.
문화해설이 곁들인 창덕궁, 덕수궁 고궁산책은 소양을 기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한 바퀴 휙 돌아보는 구경이 아닌 살아있는 보물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을 하였다. 저명한 산악인의 실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숭고한 도전을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알려졌던 히말라야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올해는 양평 물소리길, 삼남길 걷기로 친목을 도모하고 체력을 증진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둘째 월요일에 전철을 타고 양수역에 갔다. 나지막한 부용산은 걷기 좋은 호젓한 산길이다. 한강변 신원역으로 내려가면 서울로 가는 길이다. 복잡한 전철은 오후 4시가 넘으면 썰물 빠지듯 매우 여유가 있다.
친구모임은 재미가 있어야 활성화 된다. 수십 년 학교동창 모임도 주제가 있어야 한다. 막걸리 사발 돌리는 음식점 회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사회에서 늦게 만난 친구일수록 재미있게 사귀는 방법을 더 생각하여야 한다.
서울역 고가공원 ‘서울로 7017’이 지난 달 20일 개장하였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폐쇄되고 1년 반 만에 완공하였다. 우리나라 첫 고가공원이어서인지 기존 공원과는 다르다. 새 명물 탄생을 축하할 일이다.
6월 첫 주말 친구 몇 명과 회현역에서 공원으로 걸었다. 하늘은 맑고 서울타워가 더 높게 보였다. 고가공원에서 오랜만에 내려다본 서울역이 새롭게 보였다. 서울의 모든 길이 서울역으로 통한다던 옛 영화가 그리워지는 대목이다. 처음 보는 ‘창작품’ 감상까지는 보람이 있었다. 친구들과 여기저기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은 놀이시설에서 뛰어놀기 바쁘다.
‘서울로 7017‘ 이름에서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문필가인 한 친구가 “서울로는 도로명 주소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였다. 때마침 외국관광객이 YTN 남산타워를 가리키면서 '서울타워 맞느냐?'고 물어왔다. 고맙다고 하면서 “이곳 이름은 무엇이냐?”고 또 물었다. ‘서울로 7017‘라고 하였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서울타워를 향하여 휙 가버렸다.
고가공원에 붙은 ‘서울로’ 의미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7017’에 이르러서는 옛 고가도로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 것 같았다. 1970년에 개통하였던 서울역고가도로는 정밀안전진단에서 붕괴 등 심각한 사고의 우려가 있었다. 공원화에 착수하여 2017년에 고가공원으로 완공한 것이다. 이것이 ‘서울로 7017’의 역사다. 지금 이미 사라진 고가도로의 역사까지 알고자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대는 글로벌시대다. 이름은 지금 누구나 부르기 좋고 명쾌하여야 한다. 옛 역사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인 서울타위를 보자. 소유주 YTN은 매 시간마다 ‘YTN 남산타워’라고 방송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심지어 외국관광객까지 부르기 쉬운,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서울타워’라고 부른다.
이름을 지을 때 사주ㆍ음양오행 따지던 시대도 지났다. 외국을 자주 왕래하거나 외국인과 교류가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부르기 쉽고, 다른 사람이 기억하기 좋은 ‘외국인명’을 따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서울로 7017’은 서울의 공중공원이다. 서울공원ㆍ서울고가공원ㆍ서울공중공원ㆍ서울파크ㆍ서울하이파크 등 많은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서울시민의 창의력을 물어보자. ‘서울로 7017, 좋은 이름 찾기’ 대대적인 공모전을 제안한다.
가뭄에 농민의 가슴이 타들어가는 초여름이다. 친구 몇 명과 성곽길을 따라서 남산에 올랐다. 하늘은 맑고 서울타워가 더 높게 보인다. 남산광장 북쪽에는 도심 쪽으로 평소 별 관심 없이 지나쳤던 남산봉수대가 있다. 때마침 근무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봉수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이다. 높은 산봉우리에서 봉화나 연기를 이용해 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위급한 소식을 전달하던 곳이다. 밤에는 횃불인 봉화, 낮에는 연기를 피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한양으로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전국의 봉수대는 남산에 있는 5개소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었다. 남산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무악ㆍ봉화ㆍ아차산 봉수대는 한 개이고 이곳은 왜 5개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의 제1봉부터 서쪽 방향으로 제5봉에 이르는 다섯 개의 봉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도-> 강원도-> 광진구 아차산에 닿은 신호를 받았고, 제2봉은 경상도 해안ㆍ경상도 내륙-> 충청도 내륙-> 경기도 광주로 이어진 봉화를 받았다. 제3봉의 봉수대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내륙-> 한성의 무악 동봉에 전해진 신호를 받았고, 제4봉은 평안도ㆍ황해도의 바닷길-> 경기도 육로-> 한성의 무악 서봉에 연결된 봉화를 받았으며, 제5봉은 전라도 해안->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 강서구의 개화산으로 전달된 봉수를 받았다.
신호는 횃불이나 연기의 수를 조정하여 위급함의 정도를 나타냈다. 한 번 드는 것을 일거라 하여 평상시에는 일거, 해상이나 국경 부근에 적이 나타나면 이거, 변경이나 해안 가까이에 적이 나타나면 삼거, 적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병선과 접전을 하면 사거,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한 적과 접전을 하면 오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옛 적 봉수제도를 생각하였다. 우선 위급한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었다. 특정인을 위하여 기밀이라는 이유로 숨기거나 해킹할 수단도 없다. “안개ㆍ비ㆍ바람으로 기후가 나빠 봉수가 불가능해지면, 포성과 뿔 소리로 인근의 주민과 수비군에게 상황을 전달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 봉수대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는 해설에서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을 잠시 멈췄다. 통신수단 발달사가 한 곳에 있다.
“그 당시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상상의 날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요즈음 미세먼지ㆍ오존 재난경보가 수시로 전파되었다가 해제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시급한 지진이나 대형사고 전파는 너무 늦는 일이 잦아서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스마트폰 속 사진으로 남겨진 남산봉수대를 다시 생각하였다.
우연히 ‘보보담’이란 잡지를 알게 되었다. 프로스펙스나 몽벨 등 아웃도어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로 잘 알려진 LS네트웍스에서 발행하는 사외보로, 한국의 인문풍경과 정서를 담은 격조 높은 계간지라고 들었다.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무료로 보내준다는 말에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했더니 2017년 봄 호가 손 안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사보와는 달리 매 호마다, 한 지역을 집중 탐구한 글과 사진으로 가득 채운다. 이번호는 경주 남산이었다. 제법 두툼한 책 안에는 경주 남산에 대한 글과 사진이 가득 들어있었다. 신라 천 년의 역사를 불교와 함께 했던 흔적이 경주 남산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경주엘 여러번 가보았고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경주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책 속에는 110여 구가 넘는 석불상과 마애불이 있고, 탑을 세웠던 곳도 40군데가 넘게 남아있는 남산의 모습이 다양하게 소개 되었다. 아름다운 석양으로 물든 남산의 석탑 사진들도 참 좋았다.
특히나 남산 폐사지에 관한 글이 마음을 끌었다. 절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터만 남은 폐사지에, 본래 입상이었으나 앞으로 꼬꾸라져 엎드린 자세로 파묻혀 있다가 발견된 마애불이나, 오랜 세월 속에 머리를 잃어버린 부처를 묘사한 부분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실제로 가보면 조각난 돌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있는 황량한 폐사지겠지만, 그곳 풍경을 낭만적이고 철학적으로 그려놓은 글에 매혹되었다.
3000번도 넘게 남산에 올랐다는 김구석 씨는, 평생을 쏟아 부을 만큼 남산이 가진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신라나 조선시대 사람들도 그러했죠. 선조들은 남산에 자신들의 마음을 담아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우고, 돌탑을 쌓았어요. 이 땅을 살아간 선조들의 얼, 지혜와 소망이 모두 녹아 있는 곳이 남산입니다. 남산에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시공을 넘어서는 인간의 간절한 바람들을 느끼고, 행복감이나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힘을 얻을 수도 있지요.”
이 책을 읽고 나니 경주 남산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깊숙한 곳에 서려있는 천 년의 세월과 선조들의 마음이다.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공력과 애정이 느껴지는 글과 사진들을 마주하고 보니 공짜로 받아보기 미안할 정도다. 정성들여 만든 책인데 아무 댓가 없이 받았으니 정성껏 읽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경주 남산의 깊은 매력을 소개한 ‘보보담’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멋진 잡지였다. 함께 걸으며 나누는 이아기란 뜻의 보보담은 내용도 진중하지만, LS그룹 총수인 구자열 회장이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대학 다닐 때 매달 빼놓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를 보았다는 그는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아이패드 안에 넣어두고 틈 날 때 마다 볼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잡지가 보여준 한국의 얼을 ‘보보담’으로 이어가고 싶은 그의 열정은 직접 쓴 편집노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손목이 아프다. 병원에 갔더니, 갑자기 너무 과도하게 사용해서 엄지로 이어지는 힘줄에 염증이 생겼단다. 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에도 불편함이 몰려왔다. 세안을 하거나 머리를 감는 일조차 수월치가 않으니 짜증이 나고 우울했다. 다 나을 때까지 그저 손을 쉬게 해야 한다는 처방전, 손끝 하나 까딱 안 하고 우아하게 살 방법 없을까.
그러는 필자에게 그는 무언의 일침을 가했다. 웬 엄살이더냐고!
엊그제 그를 만났다. 연초록 나뭇잎이 눈부시던 남산자락의 국립극장, KB하늘 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휠체어합창단 정기연주회’에서 지휘봉을 힘차게 휘젓고 있던 정상일씨는 더욱 밝아진 표정에 유머도 늘었다. “장애인이 되니 좋은 게 참 많더라구요, 대통령이나 그 어떤 높은 사람이 와도 앉아 있을 수 있잖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어 좌중을 웃음 짓게 했다.
현재 세한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5년 전 11층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당시 담당의사는 살아 난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며칠째 사경을 헤매고 의식불명일 때 내 손을 놓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눈을 떴고, 세상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중증이어서 앉을 가능성도 희박했었죠. 모두가 이제 정상일은 회생불가라고 했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남에 감사하며 일 년에 걸쳐 열 번 이상의 대수술을 받은 후에 기적적으로 휠체어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필자가 처음 병문안을 했을 때가 사고 후 일 년이 지났을 즈음이다. 그는 폐활량이 일반인의 40% 밖에 안 되어 호흡이 가쁜 상태였고, 대화가 단답식처럼 짧게 끊어가며 힘겹게 이어갔다. 생리적 현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에는 특수 장치가 달려있어 일정 시간이 되면 간병인이 인위적으로 처리를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과 삶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
이후 ‘휠체어 탄 기적의 지휘자’로 불리며 2014년에 자신의 이름인 ‘정상일‘의 이니셜로 CSI퓨전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이어 2016년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대한민국 휠체어 합창단’을 창단해 벌써 오스트리아와 로마까지 공연을 다녀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30여명의 휠체어단원을 이끌고 첫 번째 해외 공연을 다녀왔는데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있었습니다. 아주 심했지요. 귀국하자 바로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지금은 기립형휠체어로 바꾸어 몸놀림이 훨씬 자유로워져서 욕창도 재발되지 않는다고 한다. 올 여름에는 모스크바로 공연을 떠날 예정이고, 가을에는 미국의 카네기홀까지 진출할 예정이라니 그의 용기와 거침없는 추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연주회 준비를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100여명의 합창단원을 이끌고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연습을 해오고 있다. 단원 중에는 멀리 광주광역시, 경남 양산, 심지어 미국 뉴욕에서 오는 명예회원도 있다고 하니 그들의 열정 또한 대단하다.
이번 연주회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노래를 불러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다. 바로 이남현씨다. 사고로 목신경이 끊어져 전신마비 장애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해 ‘기적을 노래하는 바퀴달린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남현씨처럼 하반신 마비 중증 장애인들로 구성된 단원들은 호흡하기도 힘들다는데, 그들이 이뤄내는 하모니가 너무 아름다워 듣는 내내 감동이 밀려왔다. 일반인들보다 몇십 배 더 노력했을 시간들이 짐작이 미루어 되고도 남았다.
마지막 앵콜 곡으로 대중가요인 ‘무조건’을 부르며 이번 음악회의 화려한 막을 내렸다. 이곡을 선곡한 것은 대한민국 어디든, 세계 어느 곳이든 휠체어 합창단을 불러주면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란다.
“ 제가 장애인이 되고서야 장애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문턱하나 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제 남은 생, 그들을 위해 이 한 몸 아낌없이 봉사하고 싶습니다.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정부단체에서 우리 합창단에게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공연이나 국내 무료공연을 다닐 때 모두 자비로 진행해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휠체어합창단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익에도 한 몫 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 다음 목표는 평창동계올림픽이란다. 올림픽 개막식 때 100명의 휠체어합창단원이 무대에 올라 당당히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꿈이라고. 그럼으로써 전 세계 모든 장애인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그의 행보는 오늘도 거침이 없어 보인다.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산악회원들은 매달 둘째 주말 산행을 즐긴다. 5월 두 번째 토요일 10시 독립공원에서 9명이 모여 안산자락길 산행을 하였다.
안산은 서울 시내 중심에서 홍제동으로 향하는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높이 295.9m 나지막한 도심의 산이다. 독립문역에서 바로 연계되는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곳이다.
조선시대 인조 때인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잘 정비된 주장애길 오르는 길에는 5월의 여왕 아카시아 천국이다. 향기에 취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담을 나누면서 걷고 보면 안산의 정상 봉수대에 다다른다.
나무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정성껏 준비한 간식이 뷔페식당을 만들었다. 아카시아 그윽한 향기에 싸여 정상주 한 잔 높이 들고 재능기부 자원활동을 서로 격려하였다. 학창시절 소풍 날, 선생님을 피하여 친구들과 돌려가며 마셨던 ‘첫 소주’가 생각났다. 그 첫맛을 못 잊어 소주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봉수제는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과 해당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통신체계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모두 남산의 5봉수대에 집결되었다. 평안도 강계-> 황해도-> 경기도-> 서울 무악 동봉수대-> 남산 제3 봉수대로 전달되었다.
안산의 백미는 메타세콰이어 숲길! 독립공원에서 출발하여 한 바퀴 도는 거리는 7㎞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무장애 길로 조성된 이 산책로는 메타세스콰이어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졌다. 메타세스콰이어(Metasequoia)는 중국이 원산지로 35m까지 자라고 수피는 회색빛을 띤 갈색이고 세로로 벗겨진다.
저 건너편 인왕산을 조망하고 독립공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비를 머금은 찬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하산을 서둘렀다. 영천시장 골목 족발집으로 빠져들었다. 만원의 행복 차례다. 막걸리 잔이 돌고 소주잔이 비워졌다. 음식이 푸짐하고 맛이 좋고 값이 싸다. 처음으로 회비에서 거스름돈을 받았다.
‘만원의 남는 행복!’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반세기 전 떠나간 여자 친구 이야기를 황경춘 전 외신기자 클럽 회장이 보내주셨습니다.
황경춘 언론인
엽(葉)아, 이렇게 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네가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지 반세기가 지났구나. 차량 왕래가 드문 시골길에서 일어난 너의 사고 소식을 뒤늦게 알았을 때, 마흔도 못 채운 너의 짧은 인생이 한없이 나를 슬프게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네가 살던 도시의 중학교에 입학한 내가 하숙을 구하지 못하자 아버지가 너의 집을 임시 거처로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집 문간방에서 네 남동생과 함께 한 학기를 지낼 때 너는 단발머리의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지.
만사에 엄격한 너의 어머니는 내가 있는 문간방에 나보다 한 살 위인 너의 언니를 비롯한 세 자매가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어. 그러나 어머니가 교회에 가는 일요일이면 너희들은 내 방에서 깔깔대며 놀 때가 많았지. 세 자매는 객지에서 하숙하는 나의 쓸쓸함을 잘 달래주었어.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대학으로 유학 간 내가 다시 너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5~6년 뒤의 여름방학 때였다. 지리산에 가까운 어느 초등학교 교사였던 너는 우리 동네에 있는 너의 큰집에 다니러 온 길이었어. 젊은 처녀로서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뚱뚱해졌지만 너는 쾌활하고 꿈 많은 문학소녀였지. 상냥한 미소와 맑은 목소리는 어릴 적 그대로였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만 자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의 큰집은 빈촌인 우리 마을에서도 가난한 부류에 속하는 소작농이었다. 너의 사촌오빠는 한때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너의 큰아버지도 우리가 일본에 있을 때 우리 집에서 일했지. 어린 내가 어른들을 따라 좀 거리가 있는 이웃 마을 극장에 갔다가 잠들어 너의 큰아버지 등에 업혀 귀가한 적도 몇 번 있었어. 이런 배경 때문인지, 광복 얼마 전 네가 고향 학교로 전근해온 뒤에도 우리 부모님은 가깝게 지내는 우리 사이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셨지. 일본군 징집영장을 집에서 기다리던 전쟁 말기의 어수선했던 시절,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나를 너는 따뜻하게 위로해주었고, 내가 읽던 책을 빌려가기도 했어.
다시 몇 년이 흐르고, 결혼한 네 언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뒤, 얼마 있다가 네 남동생과 여동생도 연달아 세상을 떠났지. 다시 지리산 근처의 학교로 전근해간 네가 서른을 넘은 노처녀로 지낸다는 소식이 들리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나는 서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처음으로 너의 편지를 받았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서로 상대 이름을 불렀고 글도 옛날처럼 친구지간에 쓰는 말투 그대로였다. 이때부터 1년에 한두 번 오는 너의 편지는 언제나 “경춘아…”로 시작되었고, 차츰 편지 내용은 세상을 등진 문학소녀 같은 허무주의 냄새를 풍기곤 했지.
너는 여름방학에는 교원 강습이나 출장으로 서울에 자주 왔지. 강습이 끝난 뒤 함께 남산공원을 산책한 적도 있다. “경춘아…” 하는 너의 말투는 여전했어. 우리는 어디까지나 친구였지. 일제강점기 때 내가 빌려준 책 속의 일본 허무주의 시인의 시, “동해 작은 섬 바닷가 하얀 백사장에서/나는 눈물이 쏟아져 게와 장난질하다”를 네 신세를 한탄하는 편지 속에서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어떤 편지에서는 결혼 안 한다고 심하게 꾸짖는 네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지.
나는 이런 편지에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았으나 너는 탓하지도 않았어. 다만 가끔 내가 너무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항상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비아냥대듯 말했는데, 너는 그저 씩 웃기만 했지.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사는 누님이 네가 사십 줄의 노총각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상대가 그냥 노총각이 아니라 아이가 하나 있는 상처한 동료 교사라고 알려주었어. 너의 교통사고 이야기는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들었기에 더욱 슬펐다.
엽아, 네 마음의 아픔은 충분히 알 것 같구나. 그러나 우리는 끝내 좋은 친구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저세상에서 서로 좋은 친구로 다시 만나자. 부디 주소 없이 보내는 이 편지를 읽고, 평소에 답장 한 통 보내지 않은 나를 용서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