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냉면이 뜨겁다. 2018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날, 서울의 냉면집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북한 ‘옥류관’ 냉면 때문에 평양냉면 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평양냉면은 음식, 맛집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이 여러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떠돌아다녔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정체를 알기 힘들다. 의견도 분분하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면스플레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면(麵)’+‘익스플레인(explain)’이다. 면, 냉면, 평양냉면에 대해 아는 체하며, 맛집 순위를 매기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이른 표현이다. ‘맨스플레인(man′s +explain)’에서 시작된 조어다.
이 글도 ‘면스플레인’의 일종이다. 냉면에 관해서 설명한다. ‘면스플레인’인지 냉면에 대한 올바른 지적질인지는 읽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국수, 냉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냉면도 ‘차가운 면’ 국수다.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메[山]’+‘밀[小麥]’이라고 여긴다. 모가 났다고 해서 모난 밀, 모밀, 메밀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는 대맥, 밀은 소맥,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교맥, 메밀을 흔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부른다. 구황작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 대체 작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라기보다 상용작물(常用作物)이었다. 초여름 무렵 비가 부족해도 메밀을 대파했다. 다행히 메밀은 짧은 생육기간, 6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었다. 지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처음부터 메밀을 심었다. “곡식이 부족하니 메밀을 먹어라”가 아니다. 애당초 벼농사, 곡물 농사 짓기 힘든 땅에는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주요 상용작물이었다.
메밀이 좋아서 메밀로 국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메밀국수+동치미’의 조합은 좋아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조합이 아니다. 비교적 편하고 쉬워서 등 떠밀려서 선택한 조합이다.
깊은 밤, 배가 출출하다. 입 다실 게 있으면 좋겠다. 메밀국수를 내린다. 한민족은 탕반(湯飯) 음식을 즐긴다. 국물 없는 밥상은 목이 멘다. 국물을 만들기 힘든 시간, 동치미 한 사발이면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강원도 출신들 중 결혼식 때 막국수를 먹었다는 이가 많다. 경조사에만 사용했던 귀한 음식, 국수. 국수의 대중화 역사는 길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냉면과 국수, 막국수는 모두 국수다.
메밀 함량 묻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메밀 함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컨대, 50%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분기술이 낮아 디딜방아, 절구질, 물레방아를 이용해 제분했다. 절구질한 후, 고운 천 혹은 체 등으로 메밀가루를 내린다. 고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깨진 껍질, 나머지 거친 입자는 그대로 남는다. 찌꺼기와 거친 입자를 다시 빻는다. 같은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내린다. 이 힘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운 메밀가루를 모은다.
가루 입자가 고우면 국수 만들기 좋다. 거친 입자는 국수 만들기 힘들다. 만들어도 면발이 고르지 않고 잘 끊어진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불행히도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국수 만들기가 간단치 않다. 점도가 약한 거친 입자. 기껏 국수를 만들어도 툭툭 끊어진다. 방법은 전분(澱粉)을 넣어 반죽하는 것이다. 전분은 녹말가루다. 전분을 넣으면 점도가 높아진다. 그나마 낫다.
막국수 노포에서는 대부분 ‘여름철에는 메밀 40%, 겨울에는 메밀 60%’를 고집한다. 나머지는 밀가루 혹은 전분이다. 전분이 많으면 국수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같다.
국수의 검은 점은 메밀껍질이다. 요즘은 메밀껍질이나 보리 태운 가루 혹은 색소로 검은 색깔을 낸다. 메밀껍질이 남아 있던 예전의 거친 냉면, 막국수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가장 좋은 냉면 혹은 막국수일까? 우문(愚問)이다. 시쳇말로 ‘개취(개인의 취향)’다. 어느 정도의 메밀 함량이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각자 개성에 맞춰서 고를 일이다. 메밀 함량이 낮고 높은 것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다는 표현은 틀렸다.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냉면, 막국수를 내렸다.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시기를 화가로 살았던 기산(箕山) 김준근(생몰년 미상)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사내가 벽의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온몸으로 국수를 내리고 있다. 유압식 제면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수 뽑는 사람치고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었다.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국수나 한 그릇”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메밀 함량을 따지기 힘들었다. 귀한 음식, 국수, 냉면, 막국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맛봤던 음식이었고 주방,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는 집에서나 먹었던 음식이다. 해방 후, 깊은 산골에서 잔치 때 나왔던 음식이 대중화했다. 메밀 함량을 따질 일이 없었다. 함량? 중요치 않았다. 그저 ‘국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원하는 면을 고르면 될 일이다.
계곡 장유의 ‘자장냉면’
언제부터 냉면, 막국수를 먹었을까? 막국수도 냉면과 다르지 않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생겼다. 강원도의 메밀국수를 상업화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막국수와 달리 냉면은 뚜렷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냉면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른바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계곡은 이 시에서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표현했다. 제목이 이미 ‘냉면’이다. 냉면에 대해 처음 언급한 문장으로 친다. 계곡이 ‘처음’ 냉면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냉면은 있었다.
계곡이 먹었던 냉면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인지, 눈꽃처럼 내린 옥가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계곡은 광해군, 인조 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다.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다. 계곡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지체 높은 집안이었으니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 냉면이 다시 문헌에 등장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냉면을 언급한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 이 시에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나온다. “가지런히 당겨 만든 냉면이며, 배추김치는 푸르다.” 냉면과 배추김치[菘菹, 숭저]가 등장한다. 냉면 육수는 배추김치 국물이다. 이 시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냉면과 노루고기 등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다산은 벼슬살이를 할 때 이 시를 남겼다. 냉면을 먹었던 곳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로 대도시였다. ‘임성운’ 집안도 쟁쟁하다. 큰 도시의 행정관리 책임자, 권력자와 같이 냉면을 먹었다.
18세기를 넘기면서 냉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먹는 이들도 다양하다. 서민들도 먹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순조 즉위 초기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했다는 내용이 있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왔던 순조가 냉면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는 돼지고기도 등장한다. 냉면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었다.
순조의 냉면은 궁궐 밖 가게에서 구해온 것이다. 19세기 초반, 한양 도성에는 늦은 밤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냉면은 히트 메뉴였다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년)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 나오는 냉면도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냉면이다. 영재는 음력 4월의 평양 거리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찐 돼지고기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고 표현했다. 음력 4월이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고 냉면 값이 오른다. 냉면은 길거리 주막 등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신 이인행(1758~ 1833년)도 냉면에 대해 기록했다.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동치미(?)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葅, 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이미 냉면은 민간의 풍습이 되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다. 오늘날의 평양냉면이다.
계곡 장유(한양 혹은 경기도 안산/자줏빛 육수), 다산 정약용(황해도 서흥도호부/김칫국물), 순조의 냉면(한양/돼지고기), 영재 유득공(평양/돼지고기), 이인행(평안도 위원/김칫국물)의 냉면은 장소와 내용물이 모두 다르다. 메밀 함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 1930년대 소설가 이무영이 남긴 기록에는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소는 머나먼 경남이다. 메밀 함량은커녕 어떤 색깔의 냉면인지도 불확실하다.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냉면, 막국수, 평양냉면 요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불확실하다. 메밀 함량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전통, 정통 냉면, 평양냉면’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함부로 ‘면스플레인’ 할 일이 아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저는 아침이 좋습니다. 그래서 늦잠을 자지 못합니다. 아예 밤의 끝자락에서 깨어 눈을 바짝 뜨고 새벽을, 아침을, 기다립니다. 때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대체로 남보다 더 많이 자는 셈인데 일어나는 시각은 늘 새벽 4시쯤입니다.
이러한 저를 보고 기가 차서 말을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아니, 꽤 많습니다. 가까이에는 제 아내가 그러하고, 멀리에는 이제 ‘남’이 되어 자기네 식구 거느리고 사는 자식들이 그러합니다. 자식들은 제 그러한 모습을 ‘문화사적’으로 단정합니다. 농경시대의 마지막을 사시던 분이니 산업사회 이후의 ‘밤이 있는 문화’를 제대로 짐작하실 까닭이 있느냐는 것이 저에 대한 자기네 이해의 변(辯)입니다. 아내의 반응은 이보다 훨씬 ‘실존적’입니다. 자정이 지나면서 비로소 마음도 몸도 차분해지면서 바야흐로 삶이 삶다워진다는 그녀의 삶의 리듬에서 보면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기를 지나 그지없는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아이처럼 어둠을 무서워하고, 그윽함을 낯설어하며, 깊은 고요를 견디지 못하고,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을 눈부셔하는 모자란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소음이 침묵하면서 겨우 들리는 바늘귀 꿰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어둠의 아련하고 아득한 정경에서 비로소 이룰 수 있는 뮤즈[詩神]와의 만남을 스스로 차단해버린 딱한 사람, 그래서 연민조차 넘어 이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침을 좋아하는 저에게 가해지는 양쪽 모두의 묘사를 저는 조금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밤이 있는 문화’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아내가 누리는, 제가 미처 다가가지 못한, 뿌듯한 행복을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침을 좋아하는 것은 문화가 결정한 것만도 아니고 사람됨이 그러해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저는 저 스스로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삶을 꾸려 나아간다는 자의식을 지니고 아침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면 저는 무엇보다 세상이 밝아지는 과정이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동트는 무렵이면 해를 등지고 서쪽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것이 보입니다. 사물이 자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는 어두워 더듬거리던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면서 어떤 질서의 정연함을 확인합니다. 사물에 대한 앎이 다듬어지고, 그것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도 뚜렷해집니다. 당연히 그러한 것들과의 만남에서 제 판단도 어둠에서와는 달리 밝음에서 차분하게 이루어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이 차츰차츰 밝아지면서 마침내 저는 온누리를 한꺼번에 안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새벽은 그러합니다. 새벽은 저로 하여금 세상을 품에 안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품은 세상은 어제의 세상이 아닙니다. 비록 어제저녁 어둠에 잠기는 것을 보면서 제가 스스로 잠들며 닫아버린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라졌거나 달라졌을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침은 어제를 ‘잇는’ 마디가 아닙니다. 어제를 ‘지운’ 마디입니다. 그래서 아침입니다. 아침은 저에게 “내가 보여주는 세상은 어제의 세상이 아냐! 그러니 너는 지금 이 아침에 어제가 없었듯 그렇게 네 하루를 시작해야 해! 그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아침의 선물이야!” 하고 말합니다. 저는 그 선언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듣습니다. 아침에는 세상을 그렇게 만나야 하는 거라고 저는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래서 아침이면 저는 언제나 ‘미지의 세상’과 만납니다. 그 세상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그림책 같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내가 커다랗게 품는 때가 아침입니다.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래서 아침이 좋습니다. 서둘러 아침을 맞으려 일찍 일어납니다. 결국 아침은 새로운 탄생이니까요.
하지만 저녁이 없으면 아침은 없습니다. 미지의 가능성을 채우면서 이렇게 저렇게 뛰며 사느라 조금은 피곤해 쉬고 싶은 하루가 저녁의 붉은 노을에 서서히 잠길 때면 그 노을이 아침의 신비와 겹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나 자신을 토닥거리며 ‘잘 지냈다. 하루 종일. 이제 푹 쉬거라!’ 하고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면 아침은 오지 않습니다. 불면의 밤은 밤만을 상처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침도 산산이 조각나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해가 뜨는 아침만이 아침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만이 아침을 좋아하는 모습도 아니고, 저녁을 지새우는 것만이 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맞는 새날을 내 삶이 새롭게 펼쳐지는 뚝 떨어진 천복(天福)으로 여기는 감격, 그리고 그에서 솟는 고마움을 하루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잘 펼쳐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낮을 낮답게 밤을 밤답게 누리며 살 수만 있게 된다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일찍 자든 늦게 자든, 일찍 일어나든 늦게 일어나든 무슨 상관이 있을는지요. 아침의 좋고 그름, 저녁의 좋고 그름을 이야기할 까닭이 있을는지요.
그런데 문득 아침을 맞지 못할 밤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저녁을 맞지 못할 낮도 있을 겁니다. “아직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저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침이 펼쳐주는 미지의 가능성 속에는 그 사실조차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나잇값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리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지 않을 아침 때문에라도 저는 한껏 오늘 아침을 겸손하게 그리고 황홀하게 맞고 싶습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왕자님께 말을 걸어봅니다. 저는 왕자님의 성(姓)이 고(高) 씨인지, 양(梁) 씨 또는 부(夫) 씨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니까요. 천년을 거슬러 이렇게 말을 건네니 좀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가족에게든 연인에게든, 부치지 않은 편지를 써놓은 기억이 없어서 뭘 써야 하나, 고심하던 중 오늘 아침 일어날 즈음 꿈결에서 왕자님이 떠올랐어요. 서귀포 하원동을 지나면서 ‘탐라국 왕자의 묘’라는 안내표지를 자주 봐서 그랬나봅니다.
왕자님은 탐라국 땅이 바다 밑 화산 폭발로 생긴 지가 160만 년이 된다는 건 모르셨을 겁니다. 한반도에서 제일 늦게 생성된 젊은 땅으로, 서울 크기의 3배나 된답니다. 섬 전체가 하나의 산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한라산이 곧 제주도요, 탐라국이었던 셈이지요. 하나의 산이라지만 370여 개의 ‘오름’이 여기저기 솟아 있어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리 능선이 결코 밋밋하거나 단순하지 않답니다.
어떤 건축가는 이 오름들이 퍼져 있는 모양을 단면도로 그렸을 때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래 주로 바닷가를 도는 올레길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 늦게 조성된 한라산 둘레길은 한번 들어가면 산의 속살을 마음껏 보고 누리면서 걸을 수 있어 좋답니다. 어딜 가나 여러 개의 오름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가와 친근감과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왕자님도 탐라국 시절에 산속을 더러 유람하셨을 테니 제 말을 잘 이해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의 수려함도 그렇지만 요즘 제주도는 문화와 예술 활동이 돋보인답니다. 온갖 예술인이 여기저기 많이 모여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일 찾아 제주로 왔다가 그 매력에 반해서 아주 눌러앉아 살기로 한 저도 예술이나 예술가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한번은 유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제주도는 인구에 비해 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보입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이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 그건 제주의 자연이 아름다워서 그럴 겁니다”라고 답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첨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만큼 살면서 보니 그 말이 갈수록 실감이 납니다. 탐라국이었던 제주도는 어딜 가나 산이요, 숲이요, 바다입니다. 바람 따라 움직이는 구름의 모양이 시시각각 변해 하늘 자체가 장관인 데다 여명(黎明)이나 석양(夕陽) 공히 형형색색으로 지는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감동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예술적인 영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탐라국 시절의 예술로서 남아 있는 걸 본 게 별로 없어서 이에 대해 제가 여기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왕자님은 그런 것도 다 알고 계시겠지요.
나라 잃은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을 왕자님에게 이런 얘기가 그리 재미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요즘 제주에는 제주어로만 노래를 부르는 멋진 밴드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또 제주어로만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있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어로만 말하는 연극단도 있고 무엇보다 ‘제주어(濟州語)’를 다시 교육과 생활에 들여오겠다는 운동이 만만찮게 일고 있답니다.
제주어란 결국 탐라국 말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본토의 말과 완전히 다른 건 아니지만 저 같은 사람이 들으면 30%도 이해하기 어렵답니다. 옛말을 다시 찾는 건 좋지만 인구의 반도 넘을 이주민들은 소외감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왕자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잠시라도 미소 지을 거라 생각하면 저도 흐뭇하기는 합니다.
왕자님이야 더 잘 아시겠지만 탐라국은 신화가 풍부하지 않습니까. 1만8000의 신이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창조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조성돼온 제주돌문화공원은 100만여 평(휴양림 70만 평 포함)에 세운 엄청난 규모의 시설인데 모아놓은 기기묘묘한 돌들이 어쩌면 다 신을 형상화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 공원은 탐라국 신화를 테마로 세계인의 관심을 모아가면서 세계 명상의 중심지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답니다. 매년 5월에 지내는 설문대할망제를 통해 탐라 시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았던 제주인의 본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잘되도록 왕자님께서도 영력(靈力)을 발휘해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오는 5월 설문대할망축제에 가서 어딘가로 부치면 혹 왕자님께 전달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해봅니다.
정달호 전 이집트대사관 대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지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저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돌문화공원 운영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라산 자락의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는 등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
이상적인 병원 터는 어디일까. 아랍 의학의 아버지 라제스는 도시 곳곳에 신선한 고깃덩이를 걸어두고 장소를 물색했다. 가장 부패가 덜 된 고기가 걸린 곳에 병원을 세웠던 것. 한의사 김두섭 원장(62, 세종한방힐링센터)은 조용한 자연 속에 병원을 꾸리는 게 옳다고 봤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해서, 자못 후미진 산속으로 귀촌했다. 굳이 외진 산골까지 찾아들 환자가 몇이나 될까마는, 그는 즐겁다. 자신의 지향과 실천에 만족하기에.
준비기간은 길었다. 귀촌을 내심에 담고 이미 십수 년 전에 터를 장만해뒀다. 젊으나 늙으나 사람의 대망(大望)은 주로 서울로 쏠린다. 하지만 일찌감치 산골살이를 숙원으로 삼은 김두섭 원장에겐 오직 귀촌이 소망스런 답이었던 거다. 공들여 낫을 갈고 나서야 땔나무를 벨 수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 귀촌 준비를 해왔기에 본격적인 시동은 한결 가뿐했다. 드디어 산골에 들어가 시작한 건 4년여 전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군생활을 마치고서였다.
육사 37기 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흐른 세월은 37년. 군에서 인생의 절반쯤을 살았구나. 애당초 군에도 의업(醫業)에도 청운의 꿈을 묻은 바가 없었다지. 우연이 그의 길잡이였던 모양이다. 소싯적에 부풀린 청운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로 살고 싶다는 것, 그 하나였더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성장기의 시골생활에 넌더리가 났기에.
“가난이라는 게 너무도 싫었어요.
9남매를 건사하느라 부모님은 모진 수고를 하셨지만 다들 늘 배를 곯았어요. 아, 나는 이다음에 농고를 나와 새마을지도자가 돼 돈을 벌 거야! 꿈이랬자 겨우 그쯤이었죠.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그러니까 고3 땐 그 가당찮은 꿈을 버리고 해양대학을 가기로 맘먹었어요. 외항선을 1년만 타면 1억을 번다는 얘기를 듣고서였죠.”
“해양대학에서 육사로 목표를 바꾸었군요.”
“해양대학 입시 준비 중에 연습 삼아, 실력 테스트 삼아 육사 시험을 봤는데 묘하게도 덜커덕 붙었어요. 뜻을 두지 않았음에도 우연히 엉겁결에 육사 생도가 돼버린 겁니다. 그러나 곧 방향을 잃었어요. 육사 나와서 뭐하나? 농사 기술을 배울 곳도 아니고, 돈을 맘껏 벌 일도 못되고,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1학년 말에 그런 심각한 회의에 빠졌어요. 그러던 차 과외활동으로 참여한 동양철학반에서 침술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한의사로 변신한 우연한 계기?”
“바늘 하나로 환자를 다루는 침술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어요. 침을 잘만 배우면 돈을 모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열심히 침술을 익혔어요. 그러자 점차 한의학 전반으로 관심이 확장됩디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장교 임관 뒤 우여곡절을 거쳐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육본에서 운영하는 위탁교육생 자격으로 5년간 공부하고 졸업했죠.”
육사 생도와 운명처럼 만난 한의학
한의사 자격증을 받은 김 원장은 이후 줄곧 한방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전역 시의 직책은 국군수도병원 건강증진센터장. 건강증진! 그게 김 원장의 평생 소임이자 방향이다. 즐겁게 살지 않고서 건강할 수 없다. 건강하지 않고서 즐거울 수 없다. 생의 모든 명암은 어쩌면 몸 건강 문제에서 파생하거나 귀결된다. 불가의 통신에 따르면, 이 세계의 근본은 고(苦). 죽음 앞에 서 있는 게 생이지 않던가. 불친절한 죽음이 우리를 방문하는 날까지 가급적 건강을 지속하고자 용을 쓸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숙명이다. 늘그막에도 삶은 때로 슬프도록 아름답다. 눈부신 노을빛처럼. 하나 몸은 부질없이 낡고 닳고 시들어간다.
머잖아 조락할 수밖에 없는 건강에 관한 쓸쓸한 사념은 낯선 게 아니다. 그러나 김두섭 원장의 생각은 영 다르다. 어허! 그게 아니오! 늙어서도 청년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이치가 여기에 있는 것을! 그는 그리 탕탕 외치고 싶은 것 같다. 들어볼까. 경청해 모실 만한 대책이 흘러나올 수도 있으니.
“제가 내심 장담하는 게 뭐냐면, 난 얼마든지 장수할 자신이 있다, 칠팔십 살이 되더라도 청년처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겁니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고 관찰했는데요, 늘 궁금했던 건, 일단 병 치료를 잘 마쳤더라도 일상생활로 복귀하면 다시금 병증이 도지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어요. 이게 왜 이러지? 무엇이 원인이지?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나쁜 생활습관이 근본 병인이라는 거였어요. 타성에서 벗어나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게 무병장수의 첩경이라는 얘기.”
“매사 습관의 노예로 살다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게 사람이죠. 그걸 알면서도 쉬 고치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는 희비극일 테고.”
“무엇보다 식습관부터 바꿔야 해요. 저의 식생활을 들어보실래요? 부디 따라 해보시길. 아침엔 잡곡밥을 지어 말린 뒤 프라이팬에 볶은 튀밥 형태의 밥 한 공기를 아주 천천히 먹습니다. 아주 천천히! 이게 핵심이에요. 천천히 먹기 위해 오래 씹어야만 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좀 딱딱한 밥을 일부러 만드는 겁니다. 천천히 오래 씹을 경우 밥알에 침이 충분히 섞여 위장으로 내려갑니다. 입안의 침! 이거 놀라운 보약이에요. 침에 함유된 효소(酵素)와 프티알린(ptyalin). 이게 음식물이 위로 내려가기도 전에 입안에서부터 벌써 소화 작용을 해내는 겁니다.”
“침이 입안에서 소화 작업을 왕성히 하도록 음식물에 침을 충분히 섞어줘라? 그게 결국 위장기능을 극대화한다?”
“위장은 내장기관이라는 공장 시스템에서 중추 역할을 합니다. 위라는 장비가 부드럽게 가동할 경우, 위장이 튼튼할 경우, 오장육부가 평화로워져 온갖 병을 예방하거나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점심도 저녁도 딱딱한 밥을 먹는 거예요?”
“지나친 음식 금욕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법. 점심은 몸이 원하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최대한 잘 먹습니다. 밥상 가득 다양한 찬을 차려 식구들과 둘러앉아 천천히 즐겨요. 저녁엔 금식을 합니다. 밤엔 콩팥과 간이 하루치 독소를 거르기 위한 맹활약을 하거든요. 이럴 때 음식을 집어넣어 훼방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정 출출하면 과일즙 한 잔을 마시면 되고.”
좋은 습관이 무병장수의 첩경
인생은 육십부터라지? 이젠 백세 시대라지? 성난 수말처럼 부지런히 뛰어 세상의 정글을 괴롭게 통과한 뒤의 노후란 실로 진정한 낙원의 삶을 누릴 찬스일 수 있다. 그러자면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무병장수를 선망한다. 어떤 신들은 인간이라는 별난 종족이 오래 사는 걸 싫어할 수도 있다. 인간의 세력이 커지면 지상의 소음과 잡음도 그만큼 커지니까. 인간들 때문에 도대체 시끄러워 편히 낮잠을 잘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툴툴거리는 신도 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거북이보다 목숨이 짧고 플라스틱 바가지보다도 빨리 썩는 게 인간 몸뚱이임을 명석하게 알아 저승사자가 호명하는 대로 겸손히 응하는 게 순리일 성싶다. 하지만 욕망의 공식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던가. 내남없이 한사코 병 없이 오래 살기를 숙원사업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 숙원사업을 성취하고 싶걸랑 아침밥만이라도 침을 담뿍 섞어 드소서! 김 원장의 훈수가 그렇다.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돌아다니는 건각이 있다. 굳이 양말을 꿰신지 않아도 발이 이미 따뜻해서다. 이 사람은 벌목장에서 얻어온, 절집 대웅전 기둥만 한 통나무를 둘러메고 사뿐사뿐 행진한다. 절구통처럼 굵다랗게 토막 낸 통나무를 퍽퍽 도끼로 패 순식간에 장작을 만든다. 힘 좋기로 인근에 소문났다지? 이 중뿔난 장정이 바로 김두섭 원장이다. 난 아직 청년이오! 늘 그리 외치는 모양이다.
건강상태가 유난하니 귀촌의 나날이 영일(寧日)이다. 자연 속에 살고자 자원한 산골살이에 별다른 시름이 없다. 이게 거저 주어진 게 아니란다. 지난날 오랫동안 시난고난 지병에 시달렸단다. 의사라도 병을 달고 살 수 있는 일이지만, 여하튼 스타일 심히 구겼겠다. 그러나 그는 병을 털어냈다. 지병에서 해방되고서야 안심과 자족이 있는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일찌감치 위장에 이상이 왔어요. 소위 시절부터 근 30년, 그 긴 세월을 위장병에 부대끼며 지냈어요. 그 덕분에 술이라는 걸 거의 마시질 못하고 군생활을 했어요. 위장이 비정상적으로 축 처져서 오는 소화 장애, 즉 심한 위하수증이었어요. 만성피로에 늘 시달렸죠. 원인은 과식에 있었는데 침, 뜸, 부황, 보약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30년 된 병증을 결국 무엇으로, 어떻게 다스렸죠?”
“침이나 보약 같은 치료 수단은 결국 보조제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즉, 나쁜 생활습관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거죠. 간소하고 절제 있는 생활, 지나친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 자연을 마음에 담는 태도, 그런 게 좋은 건강과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겁니다. 식습관의 개선은 물론, 규칙적인 운동도 그 무엇에 앞서 중요해요. 귀촌 초기에 철저하게 식습관을 변화시키고 좀 격한 스트레칭을 하자 몸이 대번에 달라집디다. 현재 저의 몸 상태나 체력은 20대 시절보다 한결 낫습니다.”
고통이 엄습해도 얻어 채울 게 있다
이미 속세에 물든 범인으로선 모범적인 생활을 고수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자기 억압적인 절제는 자칫 인생을 따분하게 만들 수도 있겠고. 조선의 거목 추사 선생은 사람이 마땅히 즐겨야 할 세 가지 일을 꼽았다. 첫째는 독서, 둘째는 음주, 셋째는 호색. 독서를 첫째로 친 걸 보면, 야야 놀더라도 공부는 하고 놀아라, 뭐 그런 뉴스가 아닐까 싶지만, 일테면 하늘과 땅의 결합을 지상의 인간들이 재연하는 신성한 의식이 성(性)이지 않겠는가. 김 원장의 생각을 들어볼까.
“노년에 이르러서도 주색을 참답게 사용하는 게 현명하겠죠. 그게 무질서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사랑의 범주에 들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도 건강하게 살자는 겁니다. 비아그라 없이도 행복하게 살자는 겁니다. 몸 건강이라는 기초공사를 충실하게 하자는 거, 가급적 자연 가까이로 귀촌해 온유한 품성을 기르자는 거, 저 숲속에서 상생하는 생명들처럼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잘 사는 노후를 즐기자는 거, 이런 것들을 생각의 중심에 놓고 삽니다.”
생활습관을 바꾸라! 산속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는 남자의 입에 붙은 소리가 그렇다. 귀촌으로 모호한 낭만을 구가할 게 아니라, 몸을 남김없이 쓰는 노동으로 심신의 건강부터 복구하라는 얘기에도 뼈가 들어 있다. 편리 대신 불편을 추구해 기른 야성으로 자연을 닮으라는 권장 역시 대안이겠지.
“이런 생각 곧잘 합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부족하기에 태어났겠지. 완벽했다면 이미 전생에 해탈했겠지. 그런 생각으로 불편과 고통마저 긍정하며 살고 있어요. 불편과 고통이 엄습했을 때, 내가 깨졌을 때, 그때 오히려 얻어 채울 걸 발견하게 되니까.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이니까.”
김두섭 원장이 주는 귀농준비 Tip
•검소한 생활을 작정하고 귀촌하자. 그게 자연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가급적 모든 일들을 손수 처리하자. 인건비를 들여가며 남의 손 빌릴 것 없이 몸 단련 삼아 직접 노동을 하자. 젊게 사는 방법이다.
•감상적인 생각을 앞세운 귀촌은 실패의 첩경이다.
•처음부터 큰돈 들여 집 살 필요 없다. 일단은 세를 얻어 살며 차근차근 적응하는 게 옳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겨울 철새들이 제철을 만났다. 우리나라에도 철새도래지가 몇 군데 있어서 일몰 무렵이면 새들의 화려한 군무를 보기 위해서 찾아가는 탐조객들이 많아졌다. 불그스레 빛나는 석양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엄청난 철새들이 산하를 휘젓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경남 창원의 주남저수지는 남쪽 지역의 특성대로 겨울에도 따뜻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서 겨울 무렵이면 철새들이 이동해오고 있다. 또한, 지자체에서도 겨울 철새들의 서식환경을 보호하고 조성하느라 시책을 준비한다.
어둠이 풀리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도착한 12월의 주남저수지는 생각만큼 춥지는 않다. 저수지 주변과 둘레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새벽 공기의 싸늘함이 기분 좋다. 길가의 채소밭과 풀잎에는 빳빳한 서릿발이 새하얗다. 서리꽃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멋을 볼 수 있는 겨울 아침은 상쾌함 그 이상이다.
물 논에 큰기러기들이 먹이를 쪼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간간이 두루미가 살짝 날갯짓한다. 큰 고니의 도움닫기도 구경하고 휴식을 취하던 쇠기러기는 가끔 고개 숙여 물속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이다. 노을 무렵 떼 지어 날아가는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은 볼 수 없으나 군데군데 다정하게 무리 지어 있는 아침 풍경이 평화롭다.
건너편 산등성이 너머로 하늘에 조금씩 붉은빛이 번진다. 그리고 빠르게 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붉은 하늘에 무리 지어 나는 철새들의 비행이 여유롭다. 물 논에서 노닐던 원앙과 백로가 아침 해를 받아 붉은 반영 속에 잠겨있다. 온 산하가 일출의 붉은 기운을 받아 설렘을 준다. 한바탕 일출의 잔치를 즐기고 나면 행복해진다.
몽골 북부와 시베리아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온 철새는 월동한 뒤 다음 해 3월이면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면 해마다 3만여 마리가 찾아와 겨울을 난다. 철새들이 월동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다.
이제는 주남저수지 탐방 둘레길을 따라 억새를 보며 걸어볼 수 있다. 둘레길은 전체 7.5km 코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척박한 땅에 소박하게 피어나 가을을 멋지게 보내고 겨울 길을 지키는 억새 길은 지루하지 않다. 요즘 걷기 열풍에 힘입어 주남저수지 탐방 둘레길이 10월의 추천 길로 선정되기도 한 걷기 좋은 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면 주남 돌다리가 나온다. 800여 년 전 강 양쪽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돌다리인데 자연 속에 그대로 스며드는 아련한 풍경이다.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225호다.
주남저수지는 철새들이 연출하는 날갯짓과 군무뿐 아니라 돌아볼 것들이 많다. 입구의 람사르 문화관과 주남 생태관이 있어서 습지 보전의 중요성과 주변 생태 환경을 자세히 이해할 기회다. 자전거 대여도 하고 마라톤 코스도 있어서 골라서 즐겨볼 만하다.
새벽부터 주남저수지의 아침 공기 속에서 사진 촬영도 하고 둘레길 걷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은 일상을 벗어나 여유를 누리게 해 주었다. 일출과 일몰 속에서 화려하게 비상하는 철새들의 군무는 겨울에 더욱 즐길만한 풍경이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이 디지털 카메라나 DSLR 못지않게 발달하고 있다. 특히 카메라의 핵심인 렌즈에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많은 투자를 하며 트리플(3개), 쿼드(4개), 펜타(5개) 렌즈까지 출시되고 있다. 일반 카메라보다 휴대가 편리하고, 작동도 어렵지 않을 뿐더러 다양한 앱과 기술까지 접목 가능한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제2직업으로 ‘스마트폰 사진작가’를 꿈꾸고 있다면 김유석 사진작가의 조언에 귀기울여보자.
도움말 김유석 사진작가·결정적순간 대표·페이스북 사진에 관하여 총괄운영자
“스마트폰으로도 사진작가에 도전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유석 사진작가는 “이미 그 벽이 허물어진 지는 오래다”라고 일축했다. 그의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스마트폰의 장점이 무수히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카메라의 단점은 무엇일까? 김 작가는 “렌즈가 너무 작고 조리개가 없다는 게 전문가로서 느끼는 최대 단점”이라며 “조리개가 없어 좁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하기 때문에 빛이 풍부하지 않거나 어두운 곳에서 촬영했을 때는 결과물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물론 다양한 앱을 사용하면 개선 효과를 볼 수 있지만, 화질이 저하되거나 파일 크기가 작아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배터리 소모가 크고 셔터 음이 크게 나는 것도 불편한 점이다. 이에 무음촬영 앱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자칫 초상권 및 사생활 침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구형 스마트폰으로도 작품사진 문제없다
김 작가는 현재 촬영용으로 ‘아이폰6S+’를 사용 중이다. 2015년에 출시된 제품이지만 성능이 우수해 제법 쓸 만하다고. 최근에 나온 ‘아이폰XS’에는 앞서 언급한 조리개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촬영 후 조리개 심도를 조절하는 기능이 추가됐다. 촬영 전 조절이 되는 건 아니지만 후반 작업으로라도 조리개 조절이 되는, 제대로 된 스마트폰이 나온 것은 스마트폰 촬영가들에겐 최고의 희소식이라고. 결국 웬만한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면 촬영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사진작가’가 되려면 뭘 준비해야 할까? 김 작가는 “특별한 과정이나 코스는 필요 없고, 노력과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은 소셜미디어가 최고의 배움터이자 선생님이다. 유튜브를 비롯해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500px 등에 올라오는 다양한 사진 관련 자료와 영상을 익히고, 일상의 매 순간을 사진에 접목하려 노력한다면 누구나 훌륭한 사진작가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하면서 “가끔 사진작가는 큰 카메라를 사용해야 한다는 오해를 하고 계신 분들을 만난다. 큰 카메라를 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스마트폰으로도 당당하게 세상을 담고 소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유석 작가의 스마트폰 사진 촬영 노하우
① 기술적 방법
아주 단순하다. 촬영 전 렌즈를 꼭 확인하라고 강조하고 싶다. 먼지와 지문이 묻어 있으면 사진이 흐리거나 탁하게 나온다. 렌즈를 항상 깨끗이 유지하는 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잘 찍는 첫 번째 방법이다. 렌즈에 스크래치가 생기지 않도록 면봉이나 안경 닦는 융 등을 이용해 살살 닦아주면 된다.
② 애플리케이션 활용
인물사진은 ‘SNOW’와 ‘B612’, 풍경사진은 ‘Analog’ 시리즈와 ‘PICA’, 음식사진은 ‘Foodie’ 앱이 유명하다. ‘Pixlr’, ‘snapseed’, ‘Quickshot’도 추천한다. 그러나 오히려 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노하우라고 생각한다. 좋은 원본을 찍고 그다음에 앱을 이용해 원하는 사진으로 만들면 좋다. 처음부터 앱에 의존하면 당장은 보기 좋지만 추후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 불편을 겪을 수 있다. 가급적 스마트폰에 내장된 기본 카메라를 사용하길 권한다.
③ 기타 장비 구입
스마트폰 촬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스마트폰 삼각대’, ‘OTG케이블’ 등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장비 구입 시에는, 업그레이드가 된 지 오래된 앱 관련 제품은 펌웨어가 맞지 않아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자신의 스마트폰에 적용이 되는 제품인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스마트폰 촬영 시 겪는 시니어 3대 애로사항
① 손떨림: 짐벌(gimbal, 수평유지 장치)을 사용하면 바로 해결된다. 단, 비용이 부담스럽고, 장치도 무거워 체력이 약할 경우 사용이 어려울 수도 있다.
② 노안: 일반적인 카메라 파인더엔 시력 조절기가 달려 있으나 스마트폰엔 없다. 줌인 기능을 이용해 확대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줌인으로 촬영하면 사진이 흔들리는 단점이 있다. 요즘엔 자동초점, 자동노출 기능이 뛰어나니 어느 정도 구도만 맞는다면, 스마트폰을 믿고 바로 촬영하는 게 좋다.
③ 체력: 스마트폰은 가볍다. 하지만 오래 들고 있으면 힘이 들 수 있다. 장시간 촬영을 하게 된다면 삼각대를 활용하자.
새해맞이 일출 사진, 잘 찍으려면?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일출과 일몰을 촬영하기에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꼭 바다가 아니더라도 도심 또는 산에 해가 떠오르거나 지는 아름다운 순간을 스마트폰에 담아보면 좋겠다. 이미 촬영해본 이들은 공감하겠지만 찍다 보면 일출과 일몰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따라서 충분히 연습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카메라 모드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면 자동으로 초점과 노출이 맞춰진다. 본인 마음에 드는 구도와 노출을 잡고 슈팅하면 된다. 때론 커다란 태양을 담고 싶을 것이다. 줌 기능을 활용했는데 흔들리거나 심한 노이즈가 발생하면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담기 어렵다. 이럴 땐 태양만 찍으려 하지 말고 태양 반대편 하늘로 시선을 돌려보자. 조금 전 보고 있던 노을빛 하늘이 아닌 아주 파란 하늘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숲으로 들어서자 솔 그늘이 짙다. 부소(扶蘇)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을 일컫는 백제 말이란다. 부소에 산성을 쌓았으니 부소산성이다. 백제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산의 높이는 겨우 106m. 낮고 평평하나, 이 야산에 서린 역사가 애달파 수수롭다. 부소산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의 도성(都城). 백제 최후의 비운과 아비규환이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현장. 숲길은 참신하지만 106m 높이로 퇴적된 한(限)과 비애가 비쳐 서글프다.
8월의 지독한 폭염 아래서도 숲은 싱그럽다. 잎잎이 푸른 여름 나무들. 열정처럼, 정념처럼, 눈부시게 환히 너울거리는 저 초록 불꽃들. 매혹될 수밖에.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초록의 사태는 어디까지나 고요해 평화롭다. 지친 마음을 숲길에 부려놓기 적격이다. 번잡하게 날뛰는 마음의 날치를 평온하게 길들여볼 만한 시간이다. 하지만 평온한 시간은 짧게 지난다. 평화로운 시국도 그리 길지 않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했던 백제의 국력은 강성했다. 강성해서 평화로웠다. 하지만 종단엔 추락했다.
뭐 볼 게 있다고 부여를 여행하나? 흔히들 하는 야박한 소리가 그렇다. ‘백제문화제’가 열렬히 펼쳐지고, 백제 문화유산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가 웅장한 규모로 조성됐지만 백제 당시의 유적은 놀랍게도 소소하다. 정림사지와 능산리 고분, 궁남지, 테뫼식과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부소산성의 흔적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문화강국 백제의 다채롭게 빛났을 유적들을 옹골차게 접할 길이 아예 없다. 참혹한 전화(戰禍)에 스러지고, 점령군의 횡포에 찢겨서다. 시절의 평화도, 문화의 정채(精彩)도 이렇게 한순간에 산산조각 난다. 오호 통재라, 망국이란 실로 완전한 소진이다. 숲의 저 천진한 생동과 우수에 찬 역사의 배치(背馳)라니.
백제의 융성한 문화는 일찍이 일본으로 흘러 일본 고대 문화의 끌텅을 이루었다. 신라 왕경 경주의 랜드마크였던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의 명장 아비지의 작품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을 평하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던’ 백제의 정신과 백제인의 마음을 헤아리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찬사와 조의를 함께 표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숲의 초록 사이로 어둑한 소로가 거듭 이어진다. 뙤약볕이 간간이 스며들어 흰 강아지처럼 길에 드러눕는다. 가파를 게 없는 숲길이니 더위에 절여진 몸으로도 헐떡일 일은 없다. 길섶엔 백제를 상기시키는 건조물들이 들어서 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삼충사를 비롯해 군창지, 궁녀사,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등이 있다. 모두 백제 이후에 발굴되거나 복원되거나 현대에 이르러 신축됐다.
부소산성은 도성의 방어 기지이면서 왕궁의 후원 역할도 겸한 걸로 추정된다. 왕족들의 소풍과 산책이 숲에서 숲길에서 다반사로 펼쳐졌을 게다. 질박한 흙길로 자못 심원한 정취를 자아내는 태자골 숲길은 왕자들의 산책로였다지. 철부지 어린 왕자들이 간혹 참새처럼 조잘대며 이 숲에서 뛰놀았을까?
숲이 무성하니 고목도 숱하다. 상흔으로 겨우 선 나무도, 썩어가며 곰팡이에 몸통을 내주는 나무도 많다. 재난과 수난을 피할 길 없는 게 생태계이지만 생명은 이어진다. 한 줌 거름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의 밥이 되는 나무의 순환은 고고하다. 삶 안에 죽음이 있듯이 죽음 안에도 삶이 있다. 오직 사람만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낙화암 벼랑에서 꽃처럼 분분히 떨어져 죽었다는 삼천궁녀들은 언제 다시 오려나.
궁녀들뿐이었겠는가. 망국과 함께 노을처럼 시든 수많은 부녀와 노약과 군병들이 백마강의 고혼으로 떠돌겠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된 인물이었다. ‘과단성 있고 침착하며 사려가 깊어 명성이 홀로 높았다’는 기록 역시 의자왕이 준재였음을 웅변한다. 하지만 승자의 각색 속에 나오는 의자왕은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과 향락에 취한 얼간이. 해서, 고인 물처럼 썩어 무너진 게 백제였다는 투의 오진이 활개를 쳤다. 낙화암 ‘삼천궁녀 전설’ 역시 승자들이 부풀린 조작일 뿐이다. 패자의 봉욕이란 슬픈 과보란 말인가. 백마강 수면에 물살이 어린다. 쏴아,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허공에 일어 숲을 흔든다.
탐방 Tip
부소산성 숲길 탐방엔 한두 시간이 걸린다. 산을 끼고 도는 백마강 나루에서 황포돛배 유람선을 탈 수도 있다. 인근 부여읍내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을 함께 탐방해 백제 문화를 살펴본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도 둘러보자.
인천공항에서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는 비행기로 네 시간 남짓. 비행기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마음먹어볼 수 있는 피서지 몽골! 그 낯선 땅에 발을 딛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툭 치며 환영 인사를 던진 건 사람도 동물도 아닌 바람이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해봤지만 몽골의 바람은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다. 초원의 상큼함 같기도 하고 동물의 썩은 가죽 냄새 같기도 한, 뭐라 한마디로 형용하기 힘든 태초의 냄새 같은 것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지구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머물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을 그런 바람이 지니고 있는 냄새. 그제야 난 깨달았다. 불과 네 시간 만에 와 닿은 곳은 대륙의 이편저편이 아니라 내가 살던 삶의 방식과 정반대의 삶이 있는 땅임을.
한여름 최적의 피서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몽골은 평균고도 1580m에 위치하며 5분의 1이 고비사막이다. 넓게 퍼져 있는 사막의 영향으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에 속한다. 이르면 9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4월까지 겨울이 계속되고 매우 춥기 때문에 7월과 8월 한여름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다. 여름 한낮의 평균기온은 16℃이고 밤엔 살짝 한기가 느껴질 정도.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쾌적한 휴양지를 찾고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비라도 내리면 파카를 꺼내 입고 밤새도록 불을 지펴도 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 7.5배의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인구는 고작 서울의 한 구에도 못 미치는 280만 명이 사는 곳.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바다라 불리는 호수 홉스굴까지 한 바퀴 돌아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2499km의 길고 험한 여정이다. 피서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지만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에겐 맞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몽골 여행은 바람에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난다. 초원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구릉의 바람으로, 구릉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호수의 바람으로. 러시아,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초원과 구릉 외에 4000개에 달하는 호수와 강이 있는 대자연이 몽골이다. 그렇다고 대자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를 품은 에르덴조(Erdene Zuu) 사원, 간단(Gandan) 사원 같은 불교 사원, 칭기즈칸 기념관, 자이승 전망대, 이태준 공원 등 역사적 건물들과 화산, 협곡까지 다채로운 자연을 품고 있다. 지구상에 아직 이런 땅과 이런 유형의 삶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원시적이다.
실크로드와 칭기즈칸의 나라
기원전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건설한 몽골 대제국은 ‘용감함’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나와 있듯 러시아와 중국, 동남아와 유럽, 중동 국가에 이르기까지 동서 문물교류에 큰 영향을 끼치며 실크로드를 열었다.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던 이 야생의 유목제국도 결국 막을 내리고 내륙 중앙부가 1688년 중국 청나라에 복속되어 ‘외몽골’로 불리다가 1911년 제1차 혁명과 1921년 제2차 혁명을 통해 독립을 이루게 된다. 고비사막을 주변으로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며 내몽골은 아직도 중국에 속해 있다. 몽골 여행 하면 대부분 울란바토르와 테를지를 중심으로 한 옛 몽골 제국으로의 여행을 말한다. 지금도 도시 한가운데서 전통 복장에 무공훈장을 단 노인을 볼 수 있는데 현대식 마트 앞 벤치에 앉아 먼 과거로 시선을 둔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자아낸다.
한국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마트
울란바토르 마트에는 한국 음식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 집 건너 한국 음식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에만 머무른다면 먹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몽골의 대표적 휴양지인 테를지에는 전통 가옥 게르를 호화롭게 개조한 호텔부터 유럽식 리조트까지 편리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말을 타며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기에 좋다. 그러나 몽골까지 와서 이런 편리함만 만끽하고 간다면 진정 몽골을 여행했다 할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수만 마리의 양떼와 말떼들을 호령하는 거친 유목민의 삶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몽골의 옛 수도 하르호린(Kharkhorin)을 지나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호숫가 차강노르와 푸른 진주라 불리는 홉스굴까지 적어도 열흘간의 유목생활을 체험해보길 권한다. 유목민 전통 천막 게르에서 잠들고, 삶은 양고기 허르헉을 먹고, 30도의 독한 칭기즈 보드카에 취해보는 것. 그리고 새벽에 깨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대자연에 온몸과 마음을 맡겨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몽골 여행이다.
스타렉스와 초원 화장실
몽골 여행은 눈뜨면 4륜 구동차를 타고 온종일 초원 사이로 난 울퉁불퉁한 오프로드를 달리다가 아무 데서나 철퍼덕 앉아 도시락을 먹고 볼일도 수풀 사이로 찾아들어가 보는 일이다(아프리카에선 이를 ‘부시 토일렛’이라 표현하는데 몽골에선 초원 화장실쯤 되겠다). 처음엔 우산이나 옷으로 가리면서 불편해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익숙해지면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간혹 길 한가운데 간이화장실처럼 보이는 곳도 있는데 재밌는 것은 앞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얼마나 귀한 대자연과의 교감인데 문으로 풍경을 굳이 가릴 필요가 있을까.
말과 양 외에 초원을 달리는 차는 딱 두 종류, 한국 차 스타렉스와 러시아 차 푸르공뿐이다. 편한 아스팔트길은 없고 대부분 협곡과 구릉을 번갈아 넘어가는 롤러코스터 같은 길이다. 그중에서도 차강노르에서 홉스굴까지 12시간이나 달려야 했던 비포장도로는 내 생애 가장 고단한 여정으로 기록될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답답했던 가슴속을 한방에 뻥 뚫어줬다. 도로 곳곳엔 ‘어워’라는 이름의 파란색 천을 두른 돌무덤이 있었다. 샤머니즘의 강한 전통을 보여주는 어워의 돌 사이사이에는 음식과 돈이 놓여 있었는데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도 이 어워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며 기도를 드렸다. 거친 비포장 길을 달리다 차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차를 타고 가지만 말을 타고 가는 것처럼 끝없이 요동치던 길. 어이쿠, 어이쿠 비명을 지르다 나중엔 그마저 체념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어쩌면 이 길을 가장 잘 만끽하는 방법은 칭기즈칸을 떠올리며 말 타고 달리는 상상을 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옛 수도 하르호린에서 만난 에르덴조 사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은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모든 종교를 허락하고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옛 수도 하르호린의 폐허 위엔 1585년에 세워진 몽골 최초의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다. 바로 에르덴조 사원. 108개의 불탑으로 성벽과 같은 벽을 이루고 있어 한참을 걸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광활하다. 사원 주변에서는 9세기경 투르크 기념비와 8세기경 위구르 왕국 수도의 폐허 등 역사적 유적도 만날 수 있다. 대륙 횡단용 캠핑카를 타고 이동하는 유럽의 단체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다. 어떻게 저들이 몽골 한 귀퉁이까지 왔을까 신기했지만 칭기즈칸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홉스굴의 비 내리던 밤과 차탄족 소녀
‘푸른 진주’라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 홉수굴 근처 타이가 숲에서 진정한 노마드로 불리는 차탄족을 만났다. 전 세계에 약 2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차탄족은 순록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영하 40℃의 날씨에도 순록의 등에서 잠을 잘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부동산이 부의 상징이지만 이들 유목민들에겐 순록의 숫자가 부의 상징이다. 오르츠라 불리는 천막은 게르와 다르게 생겼는데 에스키모족의 원추형 천막 티피와 닮았다. 여름엔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거나, 손수 만든 전통 장신구와 사탕, 꿀, 옷을 팔기도 한다. 전통 복장을 다소곳이 차려입은 차탄족 소녀의 수줍은 미소가 오랜 여운으로 남아 있다.
단순한 삶을 보여주는 땅
전통 음식 허르헉을 끓이는 강인한 인상의 몽골 여인. 밤새도록 난롯불이 꺼지지 않도록 두세 시간 간격으로 야크 똥을 넣어주던 무뚝뚝한 아들. 평생 번 돈을 주고 산 스타렉스를 애지중지 닦으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하던 무뚝뚝한 아트레 아저씨. 그들의 웃음은 요란하지 않았고 그만큼 귀한 감동을 주었다.
노을이 지고 칠흑 같은 밤이 오자 별이 쏟아지더니 어느새 여명이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몇 곳이나 될까? 짜릿한 볼거리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몽골 여행이 허무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하루 종일 초원과 구릉을 달려 게르에 도착한 뒤 작은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일, 게르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일, 바람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못해본 경험을 하면 그만큼 인생이 레벨업되는 것”이라던 어느 일본 영화의 대사처럼 한 번쯤은 복잡한 삶의 시간을 멈추고 단순한 야생의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한 여행지로서 몽골은 최고의 땅이 아닐 수 없다.
도보여행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면, 지방마다 조성된 걷기 코스까지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황안나 도보여행가가 추천하는 지방 도보여행 코스를 소개한다.
코스 추천 및 사진 제공 도보여행가 황안나
◇ 도보여행가 황안나의 지방 걷기 코스 추천 코멘트
경기도 남양주 다산길 “다산길은 한강과 팔당나루터, 소재나루를 보면서 운길산까지 걷는 ‘한강나루길’(1코스) 구간을 가장 추천할 만하다. 무엇보다 길이 평탄해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고, 강가와 호숫가를 둘러싼 경치가 으뜸이다. 걷다 보면 중앙선 옛 철로가 나오는데, 어릴 적 추억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다산 생가 부근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피어 절경을 이룬다.”
충청도 태안 해변길 “태안 해변길 하면 ‘노을길’(5코스)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길의 끝에 다다르면 꽃지해변이 나오는데, 시간을 잘 맞춰 일몰 때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해안을 물들이는 석양이 장관을 이뤄 셔터만 누르면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다. 홀로 걷다 보면 해 질 무렵에 이따금 마음이 쓸쓸해지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정취와 아름다운 노을이 버무려져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전라도 변산반도 마실길“새만금을 따라 방조제를 걷는 코스로는 넉넉잡아 8~9시간 정도 걸린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 내소사를 탐방하고, 광활한 갯벌을 바라보며 곰소항까지 거닐어도 좋다. 곰소 젓갈 축제가 열리는 때에 맞춰 방문해 행사도 즐기고, 곰소젓갈시장에 들러 구경해보는 것도 괜찮다. 곰소항, 격포항 인근 맛집이 많아 식도락 도보여행가에게도 안성맞춤이다.”
강원도 강릉 바우길“바우길 하면 선명하게 겨울의 끝자락 하얗게 눈이 쌓인 선자령 풍차길에 피어 있던 노란 복수초가 생각난다. 머리에 덮인 차디찬 눈을 털어내고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여린 꽃망울이 어찌나 아름답고 또 기특한지. 복수초 외에도 사시사철 피는 아름다운 야생화를 보기 위해 이 길을 걷는 여행가가 많다.”
경상도 상주 MRF 이야기길“낙동강 줄기를 끼고 걸을 수 있는 ‘낙동강길’(1코스)의 끝자락 경천교 인근에 상주 자전거 박물관이 있다. 다양한 자전거 조형물을 구경한 뒤 자전거를 빌려 즐길 수 있다. 개인적인 추억이지만, 이곳을 걸으며 아이들이 어릴 적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자전거를 보물처럼 다뤘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손주나 자녀와 함께 가도 좋겠다.”
부산 부산 갈맷길 “갈맷길의 백미는 해안 절경이 아름다운 ‘이기대’다. 광안리 해수욕장과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이 가까워 관광 삼아 거닐어도 좋은 길이다. KTX를 타고 당일치기 도보여행으로 즐겨도 손색없다. 드넓은 바다와 기이한 암석, 귀여운 쑥부쟁이, 울창한 소나무 숲 등 걷는 내내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다.”
경상도-전라도 지리산 둘레길 “발걸음이 닿는 길마다 맛 좋은 음식과 넉넉한 인심이 넘쳐난다. 어느 가을날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농사짓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마침 수확한 감을 나눠주시며 정겹게 말을 건네시던 기억이 난다. 특히 5일장 등이 서는 날 맞춰 가면 이곳만의 정취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 태안 해변길
서해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으며, 갯벌과 사구 등 해안 생태계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내에서 유일하게 해안 자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전망이 뛰어나고 걷기 좋은 해변길이 7개 코스로 조성되어 있다. 그중 백미는 5코스인 안면도 노을길이다. 안면도 초입에 자리한 백사항에서 꽃지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노을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길과 멋진 해안 풍경이 절경을 이룬다. 여기에 서해안 3대 낙조로 꼽는 꽃지해변 노을길은 도보여행자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 변산반도 마실길
아름다운 해변과 포구가 있고 유서 깊은 절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변산반도는 숱한 세월이 켜켜이 쌓인 채석강, 그윽한 아름다움이 깃든 내소사, 맛깔스러운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 등이 주요 명소다. 이 모든 곳을 아우르는 코스가 바로 ‘변산 마실길’이다. 1~8코스 66km와 해안누리길 18km로 나뉜다. ‘바다와 대화하고, 갯벌과 벗하며 마실간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해안 길을 걸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코스다. 단, 썰물 때는 해안이 길게 드러나 길이 생기지만, 밀물 때는 바닷물이 해안으로 들어와 길이 없어지거나 걷기 어려워지므로 시간에 유의해 여행 계획을 짜야 한다.
◇ 상주 MRF 이야기길
곶감의 고장 상주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배경으로 산(Mountain), 강(River), 들(Field)을 뜻하는 걷기 좋은 ‘MRF 이야기길’이 있다. MRF란 산길, 강길, 들길을 걷거나 달리는 신종 레포츠를 뜻하기도 하는데, 원점 회귀가 가능하면서 낮은 산길(해발 200~300m) 구간이라야 한다. 총 13개 코스로,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길은 제1코스 낙동강길이다. 비봉산을 거쳐 경천대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청룡사와 자전거 박물관, 상도 드라마 세트장 등 볼거리가 많다.
◇ 남양주 다산길
‘다산길’은 한강과 북한강, 국립수목원, 운길산, 축령산 등 남양주시의 둘레길을 통틀어 말한다. 코스를 모두 합한 거리는 170km 남짓, 총 14개 코스로 저마다 볼거리와 분위기가 있지만 가장 인기 있는 길은 1코스인 한강 나루길과 2코스인 다산길, 3코스인 새소리 명당길이 겹쳐진 팔당역~능내역~운길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이 길을 다산길의 으뜸으로 꼽는 것은 시원한 강줄기를 따라 걷다가 옛 기찻길을 걷는 낭만도 있고, 무엇보다 그 중심에 다산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다산 유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 강릉 바우길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연장 약 400km의 장거리 코스다. 강릉바우길 17개 구간, 대관령바우길 2개 구간, 울트라바우길, 계곡마우길, 아리바우길로 이뤄져 있다. 강원도의 자랑인 금강소나무 숲이 70% 이상 펼쳐져 있는 바우길의 매력은 트레킹과 삼림욕을 동시에 즐긴다는 데 있다. 도보여행에 자신 있는 이라면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울트라바우길’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4박 5일 동안 총 72km를 걷는 코스로, 고난도 트레킹과 야영이 혼합된 바우길 특별 구간이다.
◇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 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등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95km의 장거리 코스다. 구간 대부분이 중·상급 난이도로 도보여행 초보자가 걷기에는 다소 버거울 수 있다. 2004년 ‘생명 평화’를 위해 길을 나선 이들이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지리산 순례길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 바로 지리산 둘레길이다. 매년 5월 약 보름 동안 참가자를 모집해 지리산 둘레길을 한 바퀴 걷는 ‘이음단’을 창단하고, 다양한 걷기 축제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부산 갈맷길
갈맷길은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로 ‘갈매기의 길’이란 의미를 지닌다. 총 9개 코스로, 길이는 268.8km다. 이 코스를 다 걸으면 부산을 한 바퀴 도는 셈이다. 갈맷길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부산 해변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제2코스다. 특히 바다와 기묘한 바위들이 어우러진 ‘이기대’를 품은 2-2코스는 해안 산책로의 백미 구간으로 도보여행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갈맷길을 걸으며 구간별 시작점, 중간점, 종점에 마련된 인증대 38개소에서 도보인증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완주인증 및 기념품 수령이 가능하다.
>>황안나 도보여행가
국토종단 800km, 국내해안일주 4200km, 24시간 울트라 걷기 등 젊은이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을 65세 이후 이뤄냈다. 국내는 물론 산티아고, 네팔, 홍콩, 부탄, 아이슬란드 등 세계 50개국 걷기코스를 섭렵하며 도보여행에 푹 빠져 살고 있다.
50여 년간 장미를 그려온 화가의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도 화병에 꽂은 정물이 대부분일 때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장미의 화가라면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이나 황염수(黃廉秀, 1917~2008) 화백이 떠오르지만, 성백주(成百冑, 1927~) 화백만큼 긴 세월 ‘장미’라는 주제에 천착해오지는 않았다.
성백주 화백은 화필이 무르익은 중년을 지나는 1960년대 말부터 장미만 그려왔다. 물론 바닷가 풍경이나 누드화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성 화백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해 초·중등학교 교사, 지방 방송국 편성부 등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산 권역을 벗어나지 않고 동아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에도 출강했다. 1955년 부산에서 ‘민주신보 창간 10주년 기념 초대전’이 열린 것을 보면, 1948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한 이래 그림에 정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1975년 서울 명동화랑과 공간화랑의 전시가 중앙 화단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여의도 정송갤러리 초대전이 전국적으로 자신의 그림 세계를 각인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장미 그림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두어 점의 풍경이나 누드화가 겻들여지기도 했으나 장미만큼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미는 꽃병에 꽂힌, 그래서 식탁이나 서재 책상 위에 무심코 놓인 정물화다. 청화백자 항아리나 유리단지에 성기게 꽂힌 몇 송이 혹은 꽉 찬 아름진 장미 다발이 언제나 맑은 향을 뿜는다.
“그는 꽃의 실제적 형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파상적 율동에 의해 창출되어 나온 선과 터치에 의한 궤적이다. 꽃을 응시하고 연후에 그것을 화면 형상으로 바꿀 때 표현은 부드럽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하다. 담채와 농채가 적절히 배분된 화면은 활기차 보이며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라고 평자는 말한다.
주로 정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만나보면 “꽃, 그것도 장미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장미는 그 종류만 수백 종에 색깔도 가지각색일 뿐만 아니라, 꽃잎이 수십 장 포개져 있어 입체감의 표현과 꽃잎마다 빛의 반사가 다채로워 평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 화백의 장미는 극사실의 요염한 자태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장미를 많이 그렸지만, 한 번도 장미라는 물질적 속성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화폭에 어떻게 조형성을 심어가느냐의 문제였다. 항상 그랬듯이 남에게 보이기보다 내 작업을 연출된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느 전시회를 앞두고 그가 한 말이다.
이 그림[사진1]은 1992년, 서울 여의도 정송갤러리에 전시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꽃송이와 줄기가 얼비추어 푸르른 그림자를 만들고 속도감 있게 처리된 배경과 꽃잎 끝에 건듯 묻어나는 옅은 색깔, 꽃송이와 봉오리에 깊은 마티에르가 하모니를 이룬 회심작이라 생각한다. 식탁에 걸어놓고 맑은 향을 맡는다.
한때 나팔꽃을 좋아해서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나팔꽃 덩굴을 만나면, 씨가 여물 때를 기다려 몇 알씩 따두었다가 이른 봄, 마당 창가나 담장 아래 씨앗을 틔워 줄기가 늘어뜨린 끈을 감고 공중에 꽃 피우는 신선함을 즐겼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가요의 가사처럼 짧은 꽃피움이 애잔했다. 나팔꽃 기르기를 좋아하던 서예가와 경기도 여주의 도예촌을 동행하며, ‘백제도예연구소’의 정지현(1958~) 도예가를 찾았다. 몇 차례의 방문이라 익숙하게 후원을 빙 돌며 작약이며 들꽃 틈에 깨뜨려버린 도자기를 휘감은 나팔꽃 덩굴의 진분홍 꽃을 감상했다.
“어느 날 새벽 도자기 작품 구상이 안 떠올라 이곳을 거닐다가 무심코 도자 파편 위 저 나팔꽃이 이슬을 머금고 활짝 핀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팔꽃 이미지를 도자로 빚어보았지요.”
작업실 안에는 철화와 진사채로 완성된 나팔꽃 이미지의 아름드리 대형 도자기와 초벌구이한 도자기가 나란히 있었다. 정지현 도예가는 뒤늦게 도예에 입문해 예술자기와 생활자기 사이에서 많은 고뇌를 했다. 현실적 생활고도 체감했다. 이제는 일본이나 유럽으로 생활자기를 수출하며 경제적 안정을 얻었지만, 문득 일상의 쓰임을 벗어난 도자에 예술혼을 굽고 있다 고백했다.
이 대형 푼주[사진2]는 몇 달 후 그날 동행했던 서예가가 우리 집까지 날라준 크나큰 선물이다. 혼자 들기도 버거워 아내와 거실 탁자 위에 놓고 마음 깊게 감상했다. 겉은 정지현이 개발한 특유의 연록빛 유약이 자연스레 흘러넘쳐서 나팔꽃 줄기와 잎의 싱싱함을 나타내었다. 입술부터 안쪽으로는 붉은 진사의 유약을 두텁게 발라 고상함을 더해주고 있다. 도자기 속에다 속삭이면 그 잔잔한 울림이 좋았다. 이 푼주의 쓰임을 놓고 가족회의도 열어보았다. 겉과 속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낮은 탁자 위가 제자리다 싶으면, 찻잔을 나르거나 과일을 나르다 부딪힐까봐 조바심되었다. 마침내 거실 큰 유리문 앞 튼튼하고 낮은 탁자를 따로 마련해 옆에 백자 달항아리를 나란히 두어, 사계절 남향 타고 스미는 햇빛이 부서지는 반사광까지 즐기고 있다.
“가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고 첫닭이 우는 새벽, 부끄럽고 두려움에 떨면서 죄를 짓고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꺼내죠. 무슨 항아리가,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몰라요. 반은 내가 만들고 반은 불이 만들거든요. 꿈꾸던 작품을 얻었을 때의 감동과 희열, 그건 맛본 사람들만 알아요. 도예가들의 삶의 원천이죠.”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정 도예가가 한 말이다.
꽃은 인류가 문명세계를 열기 이전부터 생명의 원천이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꽃은 기쁨의 표상이고 추모의 상징이다. 구순 넘긴 노 화백의 여린 붓끝에서 피어나는 장미에서 인생의 환희를 느끼고 연륜 깊은 향을 맡는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린 푼주에서도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을 듣는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