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잘 모르는 왕자님께 말을 걸어봅니다. 저는 왕자님의 성(姓)이 고(高) 씨인지, 양(梁) 씨 또는 부(夫) 씨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니까요. 천년을 거슬러 이렇게 말을 건네니 좀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가족에게든 연인에게든, 부치지 않은 편지를 써놓은 기억이 없어서 뭘 써야 하나, 고심하던 중 오늘 아침 일어날 즈음 꿈결에서 왕자님이 떠올랐어요. 서귀포 하원동을 지나면서 ‘탐라국 왕자의 묘’라는 안내표지를 자주 봐서 그랬나봅니다.
왕자님은 탐라국 땅이 바다 밑 화산 폭발로 생긴 지가 160만 년이 된다는 건 모르셨을 겁니다. 한반도에서 제일 늦게 생성된 젊은 땅으로, 서울 크기의 3배나 된답니다. 섬 전체가 하나의 산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한라산이 곧 제주도요, 탐라국이었던 셈이지요. 하나의 산이라지만 370여 개의 ‘오름’이 여기저기 솟아 있어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리 능선이 결코 밋밋하거나 단순하지 않답니다.
어떤 건축가는 이 오름들이 퍼져 있는 모양을 단면도로 그렸을 때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래 주로 바닷가를 도는 올레길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 늦게 조성된 한라산 둘레길은 한번 들어가면 산의 속살을 마음껏 보고 누리면서 걸을 수 있어 좋답니다. 어딜 가나 여러 개의 오름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가와 친근감과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왕자님도 탐라국 시절에 산속을 더러 유람하셨을 테니 제 말을 잘 이해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의 수려함도 그렇지만 요즘 제주도는 문화와 예술 활동이 돋보인답니다. 온갖 예술인이 여기저기 많이 모여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일 찾아 제주로 왔다가 그 매력에 반해서 아주 눌러앉아 살기로 한 저도 예술이나 예술가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한번은 유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제주도는 인구에 비해 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보입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이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 그건 제주의 자연이 아름다워서 그럴 겁니다”라고 답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첨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만큼 살면서 보니 그 말이 갈수록 실감이 납니다. 탐라국이었던 제주도는 어딜 가나 산이요, 숲이요, 바다입니다. 바람 따라 움직이는 구름의 모양이 시시각각 변해 하늘 자체가 장관인 데다 여명(黎明)이나 석양(夕陽) 공히 형형색색으로 지는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감동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예술적인 영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탐라국 시절의 예술로서 남아 있는 걸 본 게 별로 없어서 이에 대해 제가 여기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왕자님은 그런 것도 다 알고 계시겠지요.
나라 잃은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을 왕자님에게 이런 얘기가 그리 재미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요즘 제주에는 제주어로만 노래를 부르는 멋진 밴드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또 제주어로만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있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어로만 말하는 연극단도 있고 무엇보다 ‘제주어(濟州語)’를 다시 교육과 생활에 들여오겠다는 운동이 만만찮게 일고 있답니다.
제주어란 결국 탐라국 말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본토의 말과 완전히 다른 건 아니지만 저 같은 사람이 들으면 30%도 이해하기 어렵답니다. 옛말을 다시 찾는 건 좋지만 인구의 반도 넘을 이주민들은 소외감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왕자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잠시라도 미소 지을 거라 생각하면 저도 흐뭇하기는 합니다.
왕자님이야 더 잘 아시겠지만 탐라국은 신화가 풍부하지 않습니까. 1만8000의 신이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창조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조성돼온 제주돌문화공원은 100만여 평(휴양림 70만 평 포함)에 세운 엄청난 규모의 시설인데 모아놓은 기기묘묘한 돌들이 어쩌면 다 신을 형상화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 공원은 탐라국 신화를 테마로 세계인의 관심을 모아가면서 세계 명상의 중심지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답니다. 매년 5월에 지내는 설문대할망제를 통해 탐라 시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았던 제주인의 본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잘되도록 왕자님께서도 영력(靈力)을 발휘해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오는 5월 설문대할망축제에 가서 어딘가로 부치면 혹 왕자님께 전달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해봅니다.
정달호 전 이집트대사관 대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지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저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돌문화공원 운영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라산 자락의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는 등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