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시인(老詩人)은 우이동 솔밭공원을 거닐며 청여장(靑黎杖, 지팡이)을 한 손에 꼭 부여잡고, 시 한 수를 낭송했다.
시공 속에 있으면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 물방울
너 황홀히 존재하고 있음이여
소멸 직전에 아슬아슬함을 지니고 있건만
거뜬히 너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하나로 꿰뚫린 빛과 그림자
소멸과 생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번갈아 이어지는
유무상통의 존재의 비의(秘儀)
그것을 투시하는 눈이 있는 한
너의 아름다움은 늘 영롱하고
신선할 수밖에 없다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시인 댁을 자주 왕래하던 2011년 초봄 최근 습작한 시라며 ‘팔순을 넘긴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소묘’ 두 장의 습작 노트를 보여준 일이 있는데 위의 시는 ‘물방울 소묘’다.
박 시인은 1990년에 발간한 수상집 ‘투명한 기쁨’의 표지도 김창열(金昌烈, 1929~) 화백의 물방울 그림으로 장식한 바 있다.
“1972년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 살 때, 작업하다 뒤집어놓은 캔버스 위에 튄 물방울,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져 햇빛에 반사되는 순간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었어요. 나는 그걸로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으로 평생을 살아왔어요. 가끔 그 물방울이 영혼과 닿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했지요.”
노 화백은 술회하고 있다. 물방울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의 화업 50여 년은 영롱한 물방울 태어남과 스러짐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유년기부터 익혀온 한학과 접목하여 캔버스나 한지에 한자를 쓰고 그 위에 물방울을 얹은 ‘회귀(回歸)’ 시리즈로 작품의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주옥같은 작품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을 제주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착공, 2016년 9월 개관했다.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물방울 그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10호 이내의 소품이 아주 귀해서 그 희귀성이 작품가를 올려놨다. 최근 경매에서 1975년에 그린 3호 작품이 무려 47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 작품[사진]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700만 원에 낙찰받았다. 13개의 크고 작은 물방울이 X자로 배열되어 긴장감과 역동성을 주고 있다. 얼룩진 물 자국 위에 맺힌 방울방울에 빛이 부서져 아련한 그림자를 만들고, 가슴 가득 푸르른 영혼이 일렁이게 한다.
형진식(邢鎭植, 1950~) 화백은 일반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나, 예술인들과는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분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후 모교인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1976년부터 2006년 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길러냈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즘에 반대해 무심사 미술전람회로 통칭되는 ‘앙데팡당(independent)’ 전에 출품함으로써 정형화된 그룹 활동을 벗어나 자유로운 추상의 세계를 지향했다.
“호흡하는 공간 속에서 자연을 자연답게 인식하는 일, 순수함에 환원되어지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작업이 아닐까, 얼음은 투명하고 맑아야만 얼음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불투명한 대상을 세척 정화하는 순수함만이 남기 위한 인식인 것이다. 뭉친 가운데서 흐트러짐, 널려져 있는 가운데서의 일관성, 입체에서의 평면적 접촉, 평면 속에서의 입체적 구조의식, 이러한 것은 서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애매한 속성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열려진 상황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체의 지향성만 표상화되는 것이다.”
이 작가는 보여주거나 알려주는 작가가 아니라 제시하는 작가란 생각이 든다. 몇 회의 개인전에서 종이 위에 연필, 크레용 등으로 손 가는 대로 그려 낸 드로잉을 보면, 활기찬 생기(生氣)의 리듬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선 하나하나가 마치 충전(充電)된 것처럼 공(空)을 가로지르며 또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며 그 공을 긋는 행위의 궤적을 흰 종이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이일(李逸, 1932~1997) 선생이 개인전 머리말에 쓴 글이다.
이 그림[사진]은 13년 전 ‘아름다운 가게 미술품 경매’에서 낙찰받은 작품인데, 같은 크기의 네 작품이 한 세트로 나와 바로 구입했다. 장방형의 캔버스 중앙에 파란 유화 물감을 떨어트리고, 자연스런 반동으로 물감이 튄 상태에서 최소한의 드로잉으로 마무리했다. 마치 만년필에서 푸른 잉크가 흩뿌려진 것처럼 자연스런 무늬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네 작품을 한데 모으거나 종횡(縱橫)으로 늘어놓아도 그 또한 아름답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선생의 마지막 글씨 ‘판전(板殿)’은 기교나 힘을 뺀 아이들의 붓장난 같아서 순진함이 배어나왔다고 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말년 작품들도 ‘아이들의 손짓 같다’고 한다. 순수로 회귀하려는 마음이 저절로 예술로 승화된 것이리라.
물방울처럼 금방 소멸되어도, 찰나의 순수가 영혼을 빛나게 한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필자는 그저 구엘공원을 가는 이 생소한 골목길이 좋았다.
그리고 공원에 도착하도록 그 길고도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보는 것으로 끝내도 상관없다. 스페인의 한 도시에 내가 와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가능하면 한 점 디테일도 놓치지 않아야 하고 느껴야만 하는 생각은 발걸음을 가볍지 않게 할 수 있다. 그저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을 여유롭게 누리고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는 여행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일지. 함께하는 남편의 철저함은 가끔씩 불편하거나 고맙거나 한다. 하긴 동행자의 그런 치밀함 덕분에 편한 여행을 하는 것을 모르진 않다.
암튼 숙소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발카르카역에서 내렸다.
반가운 쌍용자동차 전시장을 지나고 스페인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골목을 한참 걸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구엘공원에 올랐다. 갈수록 오르막 길은 반갑지 않은데 그 길을 오르지 않으면 가우디의 구엘공원을 느낄 수 없으니 열심히 걸어야 했다.
그 언덕에 오르니 한눈에 바르셀로나가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거기 오른 뿌듯함과 즐거움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환호에 찬 몸짓과 예술적 건축물을 향한 시선만으로도 숨차게 구엘공원에 오른 보람을 갖게 한다. 시내 한 복판으로는 아직도 공사 중인 파밀리에 성당이 눈에 들어오고 흐린 날이었지만 멀리 지중해가 아득하다.
구엘 백작의 믿음과 재력을 바탕으로 가우디의 독창성과 예술혼이 담긴 구엘공원이 만들어졌고 오늘날 전 세계인이 찾아가는 건축물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들에게 축적된 재산이 일가족에게만 분배하기에 급급한 부자들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다가 이런 부질없는 비교를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Antoni Gaudi)에게 능력껏 재능 꺼 마음껏 만들어보라고 하는 멋진 후원자 구엘 남작(Eusebi Guel)이 있었기에 14년간의 작업이 이루어졌고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바르셀로나 시에서 사들여 구엘과 가우디의 뜻을 이어 멋진 행정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예술혼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산 위에 올라 높은 전망대에서 바르셀로나의 파노라마를 즐겨본다.
그리고 그 언덕을 내려오면서 동화 속 보물섬처럼 만들어진 가우디의 건축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가우디의 기념관을 살피고 지나니 놀라운 디자인의 건축물이 눈앞에 이어진다. 가우디 건축은 자연을 모티브로 했기에 자연스러운 곡선미는 단연 압도적인 볼거리다. 순수를 추구하는 자연인다운 독창성이다.
모자이크 타일로 뒤덮인 특이한 외관의 독창성은 너무나 독특해서 얼핏 보기엔 이게 과연 칭송받아 마땅한 건축인가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만으로 만 그칠 수 있는 동화적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는 가우디의 천재성을 믿어준 구엘의 절대적인 신임과 무조건적인 투자가 부럽고 멋지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의 집을 도입하고 파도와 도마뱀 등의 자연을 그대로 끌어들인 가우디의 작품 속으로 수많은 여행객들이 빠져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시민들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흐린 날의 저녁노을을 기다리며 걸터앉아 있고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여행자들이 탄성을 지르고 연인들이 입맞춤을 하고 있다. 가우디의 예술을 공유하는 이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의미 있다. 이 또한 가우디가 바라보던 자연의 일부가 아닐지.
"나는 꽃,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닭울음소리, 새들의 지저귐, 곤충들의 날개소리를 들으며 프라데스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스승인 자연의 순수함을 통해 상쾌한 이미지를 얻는다." - Antoni Gaudi
한때 갯벌 살리기를 운동이 한창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갯벌을 막아 새로운 땅을 만드는 일이 나라와 지역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 하에 계속 진행되었고 정부와 대기업을 향해 힘겨루기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던 시민단체나 종교단체의 갯벌 살리기를 염원하는 목소리를 국민들은 흘려듣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갯벌 간척사업이 영토확장이라 여겼던 정부도 갯벌 살리기를 지원하고 지자체에서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연과 환경을 살리려는 사람들의 희생을 무릅쓴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북 고창에 가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 갯벌이 잘 지켜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필자가 그곳을 갔을 때는 기온이 뚝 떨어지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고창은 고즈넉한 사찰인 선운사나 메밀꽃과 해바라기 그리고 청보리밭으로 많이 알려진 학원농장으로 사진 찍으러 여러 번 갔었지만 갯벌을 찾아서 온 적은 없었다.
마침 좋은 기회를 얻어 직접 갯벌에 다가가 이해하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져보았다. 갯벌에 나가기 전에 지역 주민들이 마련한 교육프로그램을 관람하고 함께 즐기는 시간이 있어서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람사르 고창 갯벌센터에서 보여준 고창의 갯벌을 위한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은 가히 감동적이다. 갯벌생태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 교육자료나 동화 구연과 해산물 쿠기 만들기와 같은 체험과 실습을 위한 섬세한 준비까지 모두 직접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모두 함께 먹었던 점심식사도 고창 만돌마을에서 생산된 굴과 바지락을 넣은 떡국과, 갯벌에서 채취한 김을 인심좋게 넉넉히 넣어 만든 김전은 고창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고창갯벌에서는 갯벌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갯벌 전용 차량으로 15분 정도 달리면 갯벌에 내릴 수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만끽하며 바지락을 캐고 바닷바람에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화를 신고 갯벌을 걸으며 주름진 물결무늬의 신비함을 생생히 들여다보며 저무는 바다에 서 보는 경험은 풍요롭고 짜릿하다.
바다만큼이나 드넓은 고창갯벌은 람사르 습지로 지정 등록된 곳이다. 람사르는 생태나 환경 등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습지를 보전하고 인류와 환경을 위해서 체계적으로 보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협약이다. 그야말로 세계가 인정한 청정 갯벌인 것이다.
갯벌의 보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직접 광활한 갯벌에 들어와 보니 스스로 조용한 다짐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일상에서 오염물질을 무심히 방출하지 말아야겠고 생명체를 간직한 이 땅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말이다.
붉게 노을이 내리는 갯벌 한쪽엔 김 포자를 붙여 키우는 그물인 김 발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어민의 손길이 바쁘다. 바지락과 백합 등의 생물들이 지천이던 고창갯벌에 희귀종의 염생식물과 검은 머리 물떼새가 날고 있던 갯벌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바이칼호수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호수임은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끄는 호수들 중에 하나 일 것이다. 필자는 지난여름 연해주 고려인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국제한민족재단에서 주관한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 회상열차’의 일원으로 희망 대장정을 다녀왔다. 극동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을 출발하여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 6,500여 km를 열차로 이어가는 긴 여정 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했다. 아나콘다 구렁이 같은 커다란 몸체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달려 나간다. 잠시 후 부터 하늘과 벌판만이 펼쳐져 있는 시베리아벌판에 가르마를 내며간다. 가슴은 열차 지붕 위에 올라앉았고 시선은 막힐 것 없는 지평선 위를 나른다. 저토록 청맑은 하늘과 이토록 넓은 벌판은 희뿌연 미세먼지가 아닌 해 저문 어둠만이 덮어 가릴 수 있을 것이다. 4인실 2층 침대 열차안의 일행 네 명이 준비해온 보드카로 궁색하지 않은 술상이 차려진다. 시베리아 벌판이 어둠에 진하게 물들 듯 우리들도, 열차도 보드카에 취한 듯 흔들리며 간다. 어릴 적 시골집 어두운 종이천장 안에서 타닥대며 뛰어 다니던 생쥐들의 달그락거림이 열차 바퀴 덜컹거림으로 울려져 온다.
밤새 쉬지 않고 달려온 열차 차창에 아침이 밝는다. 어둠을 벗어 던진 대륙의 한 기차역에 내려 선선한 공기를 마셔본다. 경쾌하다, 시원하다. 인공양념 섞이지 않은 담백한 초두부 맛이라 할까 삼삼하게 우러난 맑은 동치미 국물 맛이라 할까. 벌판의 풋내 담겨오는 아침공기를 허파꽈리 잔뜩 끌어들이니 허기가 느껴져 온다. 갑자기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고 놀란 내장을 매콤한 국물로 중화시켜주고 싶다. 컵라면을 뜯어 뜨거운 물을 채워온다. 밤새 흔들리며 선잠에 웅크렸던 육신을 매콤한 노크로 잠 깨워 본다. 서서히 한반도 토종의 몸 말초신경에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이틀을 달려온 열차는 아직도 갈길 먼 나그네 이다. 뉘엿뉘엿 햇살이 낮게 지평선위에 걸터앉는다. 차창을 바삐 스치는 늘씬한 소나무 줄기 불그레한 넓적다리가 황홀하다. 취하지 않고는 잠들 수 없어 너 댓 잔 들이키는 보드카 술기운에 젖은 시선이 여전히 흔들거린다. 저녁노을 문지른 적송 줄기의 쭉쭉빵빵 각선미가 몽롱하게 다가왔다가 멀어져 간다.
내 어릴 적 엄마의 흔들리는 무릎위에서 새근새근 잠들던 때처럼 침대열차도 쉼 없이 덜컹거리며 달린다. 내 코고는 소리를 감추어 주며 달린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가 중요치 않다. 몇 시 인지도 알 필요 없다. 열차 복도 창에 햇살이 들면 아침이고 침대칸 차창에 석양이 깔리면 저녁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의 새하얀 피부를 닮아 들안개도 뽀얗게 물들어 깔린 벌판에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차창 밖 저 멀리 녹색 벌판이 끝나는 선에 파란 하늘이 이어져 있다. 다만 내 시력이 초록에서 하늘공간으로 건너지 못할 뿐이다. 수십km 밖 아니 수백km 밖까지 펼쳐지는 대지에 내 시선이 이르지 못할 뿐이다.
밤새 흔들던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열차 중간의 샤워장에 갔다. 우리 돈 3천 원 쯤을 내고 생전 처음 달리는 열차 안에서 샤워를 해봤다. 비눗물은 곧 바로 철길 위로 빠져 나갔다. 내 육신의 비늘 조각과 머리카락 몇 오라기를 시베리아 벌판에 뿌려 놓고 가는 것이다. 3일 전 부터 열차는 쉼 없이 서쪽으로 달려왔다. 기울어가는 해를 따라 꿈틀대며 간다.
사흘 반나절을 옆에서 같이 달려온 벌판과 소나무와 자작나무와 언덕과 야생화가 일시에 사라졌다. 검푸른 바다 같은 물결이 차창 옆까지 들이 닥친다. 우와! 바이칼 호수! 그림으로만 보던 말로만 듣던 바이칼! 자작나무의 희멀건 가랑이 사이로 바이칼의 푸른 영혼이 가득 차 쏟아져 들어온다. 어찌할꼬? 저 푸른 호수에 풀쩍 안기고픈 충동은? 내 어릴 적 북한강변에서 첨벙대며 멱 감던 시절아. 열차야 잠시 멈추어 다오. 걸쳤던 옷 훌러덩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알몸으로 부둥켜안고 으스러지고 싶소. 저 호수 건너편 까마득한 수평선까지 물수제비 던져보고 싶소. 바이칼호수도 반갑다고 물결 잠재우고 수 백 수 천 개의 물수제비 받아들고 품에 안고 있는 2600여 종의 동식물들에게 나눠 줄 것이요.
광활한 대자연. 인류가 20년 동안 마셔도 마르지 않는다는 바이칼. 3,000만 년을 얼고, 녹은 바다 같은 호수. 천지의 어머니 바이칼. 우주 밖에서도 보인다는 바이칼. 나는 잠시 두 발을 적시고 갈 뿐이요. 나는 H2O가 70%인 작은 물방울일 뿐이요. 나의 머릿속에서 평생 출렁이고 있을 것이요. 나는 먼지처럼 작아질 뿐이다.
바이칼호수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호수임은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끄는 호수들 중에 하나 일 것이다. 필자는 지난여름 연해주 고려인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국제한민족재단에서 주관한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 회상열차’의 일원으로 희망 대장정을 다녀왔다. 극동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을 출발하여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 6,500여 km를 열차로 이어가는 긴 여정 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했다. 아나콘다 구렁이 같은 커다란 몸체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달려 나간다. 잠시 후 부터 하늘과 벌판만이 펼쳐져 있는 시베리아벌판에 가르마를 내며간다. 가슴은 열차 지붕 위에 올라앉았고 시선은 막힐 것 없는 지평선 위를 나른다. 저토록 청맑은 하늘과 이토록 넓은 벌판은 희뿌연 미세먼지가 아닌 해 저문 어둠만이 덮어 가릴 수 있을 것이다. 4인실 2층 침대 열차안의 일행 네 명이 준비해온 보드카로 궁색하지 않은 술상이 차려진다. 시베리아 벌판이 어둠에 진하게 물들 듯 우리들도, 열차도 보드카에 취한 듯 흔들리며 간다. 어릴 적 시골집 어두운 종이천장 안에서 타닥대며 뛰어 다니던 생쥐들의 달그락거림이 열차 바퀴 덜컹거림으로 울려져 온다.
밤새 쉬지 않고 달려온 열차 차창에 아침이 밝는다. 어둠을 벗어 던진 대륙의 한 기차역에 내려 선선한 공기를 마셔본다. 경쾌하다, 시원하다. 인공양념 섞이지 않은 담백한 초두부 맛이라 할까 삼삼하게 우러난 맑은 동치미 국물 맛이라 할까. 벌판의 풋내 담겨오는 아침공기를 허파꽈리 잔뜩 끌어들이니 허기가 느껴져 온다. 갑자기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고 놀란 내장을 매콤한 국물로 중화시켜주고 싶다. 컵라면을 뜯어 뜨거운 물을 채워온다. 밤새 흔들리며 선잠에 웅크렸던 육신을 매콤한 노크로 잠 깨워 본다. 서서히 한반도 토종의 몸 말초신경에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이틀을 달려온 열차는 아직도 갈길 먼 나그네 이다. 뉘엿뉘엿 햇살이 낮게 지평선위에 걸터앉는다. 차창을 바삐 스치는 늘씬한 소나무 줄기 불그레한 넓적다리가 황홀하다. 취하지 않고는 잠들 수 없어 너 댓 잔 들이키는 보드카 술기운에 젖은 시선이 여전히 흔들거린다. 저녁노을 문지른 적송 줄기의 쭉쭉빵빵 각선미가 몽롱하게 다가왔다가 멀어져 간다.
내 어릴 적 엄마의 흔들리는 무릎위에서 새근새근 잠들던 때처럼 침대열차도 쉼 없이 덜컹거리며 달린다. 내 코고는 소리를 감추어 주며 달린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가 중요치 않다. 몇 시 인지도 알 필요 없다. 열차 복도 창에 햇살이 들면 아침이고 침대칸 차창에 석양이 깔리면 저녁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의 새하얀 피부를 닮아 들안개도 뽀얗게 물들어 깔린 벌판에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차창 밖 저 멀리 녹색 벌판이 끝나는 선에 파란 하늘이 이어져 있다. 다만 내 시력이 초록에서 하늘공간으로 건너지 못할 뿐이다. 수십km 밖 아니 수백km 밖까지 펼쳐지는 대지에 내 시선이 이르지 못할 뿐이다.
밤새 흔들던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열차 중간의 샤워장에 갔다. 우리 돈 3천 원 쯤을 내고 생전 처음 달리는 열차 안에서 샤워를 해봤다. 비눗물은 곧 바로 철길 위로 빠져 나갔다. 내 육신의 비늘 조각과 머리카락 몇 오라기를 시베리아 벌판에 뿌려 놓고 가는 것이다. 3일 전 부터 열차는 쉼 없이 서쪽으로 달려왔다. 기울어가는 해를 따라 꿈틀대며 간다.
사흘 반나절을 옆에서 같이 달려온 벌판과 소나무와 자작나무와 언덕과 야생화가 일시에 사라졌다. 검푸른 바다 같은 물결이 차창 옆까지 들이 닥친다. 우와! 바이칼 호수! 그림으로만 보던 말로만 듣던 바이칼! 자작나무의 희멀건 가랑이 사이로 바이칼의 푸른 영혼이 가득 차 쏟아져 들어온다. 어찌할꼬? 저 푸른 호수에 풀쩍 안기고픈 충동은? 내 어릴 적 북한강변에서 첨벙대며 멱 감던 시절아. 열차야 잠시 멈추어 다오. 걸쳤던 옷 훌러덩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알몸으로 부둥켜안고 으스러지고 싶소. 저 호수 건너편 까마득한 수평선까지 물수제비 던져보고 싶소. 바이칼호수도 반갑다고 물결 잠재우고 수 백 수 천 개의 물수제비 받아들고 품에 안고 있는 2600여 종의 동식물들에게 나눠 줄 것이요.
광활한 대자연. 인류가 20년 동안 마셔도 마르지 않는다는 바이칼. 3,000만 년을 얼고, 녹은 바다 같은 호수. 천지의 어머니 바이칼. 우주 밖에서도 보인다는 바이칼. 나는 잠시 두 발을 적시고 갈 뿐이요. 나는 H2O가 70%인 작은 물방울일 뿐이요. 나의 머릿속에서 평생 출렁이고 있을 것이요. 나는 먼지처럼 작아질 뿐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우리나라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시발(始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관념의 이입(移入)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자’는 화풍은 특히 중국의 관념적이고 과장된 그것에 비해 스케일이 적고 다소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풍광을 소박한 그대로, 진솔하게 그림으로 남기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화폭에 정지시켜야 하는 속성상, 실제의 입체 공간을 평면화하자면 화가의 고민이 깊어진다.
평론가나 미술기자들은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이래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해진 인상파풍의 과학적 특성을 철저히 연구, 우리나라 언덕길의 전형적 각도, 전형적 시야, 경상 지방의 낯익은 한국의 땅이 그 살가죽을 부끄럼 없이 다 드러내놓는 겨울을 많이 그리는 작가’로 이원희(李源熙, 1956~)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의 구도는 웅혼하여 일체의 장식이나 꾸밈이 없다. 거칠고 척박한 산비탈 뙈기밭을 그대로 그려낸다. 봄부터 씨앗을 뿌리고, 김매고, 물 주고 가꾼 농작물들이 나름대로 결실을 맺고, 농부의 손길로 추수되고 난, 빈 밭에 서리가 희끗하다. 이제 이 황토의 밭들은 겨우 내내 찬바람 눈서리에 뒤척이다, 다음 봄 새 씨앗을 심을 때까지 아픈 몸부림을 할 것이다.
이원희 화가는 경북 의성 안평리의, 궁벽한 마을 산비탈에 서서 내려다본 풍경을 눈에 가득 담는다. 야트막한 왼편 언덕을 따라 이어진 황톳길이 작은 밭을 나누어 가며 구릉을 지나 야산으로 이어진다. 계곡이 깊지 못하니 물이 흐를 리 없고 땅 모습이 평평하지 못하니 경사 따라 밭둑을 이루며 대여섯 곳의 밭 자리를 구분 짓는다. 길섶 소나무의 모습을 보니 이곳은 바람받이임에 틀림없다. 가시나무 떨기 몇 그루만 자라는 척박한 곳이지만 농부는 한 삽, 한 삽, 돌을 골라내고 풀뿌리도 솎아내며, 오랜 날들 뙈기밭을 일구었을 터다.
화가는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라며 노상 접했던 풍경이기에 원숙한 필치로 이 현장을 실경으로 그려냈다. 이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도 추수 후의 황량한 논밭은 대표적 주제가 되었다. 모교인 계명대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되 데생 과정을 혹독하게 검증해 ‘계명대 출신은 스케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인물화도 마음까지 그려낸다는 중평이다. 섬세한 극사실의 화필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표준 초상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고, 역대 대법원장 두 분, 국회의장 다섯 분의 초상화 또한 이 화백의 작품이다. 대기업 총수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도 밀려 있어, 내 아내의 초상을 그려주겠다는 약속은 언제나 지켜지려는지….
이 그림 는 최근 온라인 옥션에서 270만원을 주고 낙찰받았다. 고향의 선산(先山) 가는 길과 얼마나 흡사하던지, 거실 벽 중앙에 바다 그림과 바꾸어 걸고, 해지도록 뙈기밭에서 뛰놀던 유년을 회억하는 달콤한 향수에 젖는다.
김승연(金承淵, 1955~)은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 뉴욕 주립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로 석사학위 취득 후 모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서울의 야경’, ‘거리의 낮 풍경’을 리얼하게 판화로 표현하고 있다. 1970~1980년대의 채색 판화에서 1990년 초부터는 흑색 단색의 동판화 , 시리즈를 제작 발표해왔다. 서울의 야경은 불빛에 갇힌 거리에, 건물들과 차량의 그림자들을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해 보는 이들에게 블랙홀에 빠지는 듯, 꿈꾸는 듯, 환상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한다.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심사평과 함께 1993년 ‘루블리아나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서 ‘차석상’을 수상하고, 2011년 ‘국제메조틴트 페스티벌’에서도 ‘전통판화상’을 수상하면서 서울 야경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영박물관에서도 작품을 소장하는 영예를 안았다.
“밤 풍경이 낮의 풍경보다 사실적이고 감성적 느낌이 풍부하고, 불빛 하나하나가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는 아우성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보통 한 달이 걸리는 고행(?)을 작가는 계속해오고 있다.
는 벌써 15년 전에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6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판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작품의 복제성 때문에 다른 미술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작가는 한 작품당 대개 10~30여 점씩 판화로 찍는다고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서도 판매되는 작품이 4~5점에 불과해 작품 구상에서 완성까지 두어 달, 틀과 유리를 맞추고 10여 점을 판매해도 500여 만원의 수입이 안 되니 허무한 일이다.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작품들이 같은 것이란 사실이 발견되면, 예술성에 대해 만족하거나 행복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예술 작품을 향한 환상 속에서 판화의 인식과 보편성이 무시되고 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란 작품은 뉴욕의 예스런 건물의 계단에서 기둥과 추녀, 그리고 건물 앞에 선 나무의 그림자까지 한낮의 풍경을 정밀하게 찍어내어 현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가는 우리 일상에 너무나 접하기 쉬운 풍경들을, 그러나 깊은 관찰과 섬세한 손길로 예술성 높은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하염없이 작품에 눈길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작가의 의식 너머 고요한 심연(深淵)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준(李載俊) >>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요즘 나이를 불문하고 유행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중견가수 김연자가 부르는 폴카 풍의 노래로 신나는 곡이라 젊은 층이 주류를 이루는 클럽 등에서도 인기라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에서 '아모르(Amore)'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파티’는 ‘파티(Party)'로 오해 할 수 있는데 파티는 ’Fate‘ 즉 운명을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했다고 한다. 아모르 파티는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즉, 운명이란 타고 난 것이므로 운명을 바꾸려고 애써 봐야 소용없으니 운명대로 살면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건우, 신철이라는 사람이 작사했고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윤일상씨 작곡으로 되어 있다. 가사를 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대중가요의 히트 요소를 고루 갖춘 노래인 것이다.
가사 중에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들을 살펴보면 ‘인생은 지금이야’,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는 요즘 한창 화두인 ‘카르페 디엠’과도 맞닿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에서 소개했듯이 ‘오늘을 즐겨라’는 뜻이다.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가사는 요즘 역시 화두인 ‘YOLO(You Only Live Once)’ 즉, 한 번뿐인 인생이니 현재를 즐기며 살자는 의미가 있다. 카르페 디엠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자신에게 실망 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는 오늘의 청년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위로가 되는 말이다. ‘노오력’이 노력해봐야 안되더라는 자조적인 말로 쓰이는 것을 보면 운명에 대해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는 요즘 젊은이들의 풍조를 그대로 나타낸 가사이다. 이러니 결혼 안하는 사람이 많고 저 출산으로 이어진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사는 시니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요즘 취업은 안 되고 따라서 결혼도 못하고 있는데 나이만 먹어간다고 푸념하는 젊은이들도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몸은 늙었으나 마음만은 아직 청춘이라는 시니어들이 많다. 오승근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가 히트한 것도 같은 배경일 것이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라며 거울에 비친 늙은 모습에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인생’은 사랑, 이별과 함께 대중가요 3대 단골 주제이다. ‘인생’이라는 같은 제목만으로도 여러 가수가 부른 서로 다른 노래가 많다. 안치환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 주지 않았다’처럼 ‘인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 제목까지 확대해보면 인생 주제의 노래가 정말 많다. 인순이의 ‘인생’이라는 노래에서는 ‘인생이란 잠시 쉬어 가는 우리 여행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태어나서 한번뿐인 인생이라며 열심히 살았다. 이제 인순이의 ‘인생’ 가사에서 ‘황혼 빛에 물드는 노을처럼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거죠. 그게 바로 인생이란 걸’에서 이제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온 것 같다. 다시 아모르 파티 가사에서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에 지나간 추억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세미원의 풍경. 언제 가도 계절 특유의 정취를 느낄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이 으뜸이다. 특히 6~8월은 야간 개장 기간으로, 시간을 잘 맞추면 세미원의 낮과 밤, 그리고 해질녘 광경까지 모두 만날 수 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세미원은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아 나들이를 즐기는 이가 많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花美心]는 뜻이 담긴 그 이름처럼 자연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하기 좋다.
인근에 무료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대개 자가용을 이용하지만, 최근에는 경의중앙선 양수역이 개통하며 대중교통 방문객도 늘었다(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연꽃밭으로 워낙 유명해 안 가본 이가 드물겠지만, 이곳의 야간 정취를 만끽해본 이 또한 드물 것이다. 여름 특정 기간에만 밤 10시까지 세미원을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낮에 세미원에 가본 적이 있다면, 다음 나들이는 오후 6시께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여름에는 저녁 8시가 다 돼야 해가 지고 어둑해진다. 세미원 내 조명 점등 시간은 7시, 입장 후 1시간 정도는 낮과 비슷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백련지, 홍련지, 열대수련연못, 빅토리아연못 등을 둘러보다 보면 새큼 쌉싸래한 연잎 향이 온몸을 휘감는다.
세미원 하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입장 무료)를 빼놓을 수 없다. 보통 두 곳을 짝꿍처럼 함께 구경한다. 세미원에서 두물머리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인데, 연꽃들과 눈을 맞추다 보면 1시간이 뚝딱 흐른다. 천천히 둘러보다가 7시 전후로 두 곳을 잇는 배다리에 도착하면 알맞다. 다리 아래 나룻배가 놓여 물살에 따라 출렁인다. 얕은 문턱이 많고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걸음이 불편한 이라면 유의해 걸을 필요가 있다.
두물머리를 둘러보다 출출할 때 즐기는 연잎핫도그(3000원)도 별미다. 이제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서 세미원을 멀찍이 바라보며 때를 기다린다. 카메라 셔터를 자극하는 노을이 물들 때쯤이면 다시 배다리 인근으로 향한다. 배다리 조명과 함께 세미원의 해질녘 풍경을 한 컷에 담을 수 있다. 다시 세미원에 돌아오면, 은은한 빛을 내는 작은 연꽃 조명들과 화려한 연꽃 모양 조형물들을 만나게 된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잔잔히 들리는 풀벌레와 개구리 울음, 연못의 물소리가 여름밤의 정취를 더한다.
>>세미원 연꽃 문화제 주요 프로그램
기간 8월 20일까지 개장 시간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전시마당 밤에 보는 연꽃 ‘달빛 내린 연꽃’, 연꽃문화 사료展 ‘정화와 안정’, 권성녀 민화展
•체험마당 연꽃문화체험교실, 사랑의 편지쓰기, 전통놀이한마당, 연잎밥체험
•예술마당 연꽃음악회(매주 토요일)
성긴 마대로 캔버스를 만들고 물감을 뒷면에서 앞으로 밀어내어, 마대 올 사이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뒤, 앞면에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용하는 물감도 회색이나 검정, 청회색 등 단색으로 단조로우나, 보는 이들에게 고요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
화가 하종현(河鍾賢, 1935~)은 1960년대 우리나라 앵포르멜(informal, 비정형) 추상화에서 출발해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연작을 그렸고 2010년부터는 연작을 그리며 독창적인 창작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모교 회화과 교수로 40여 년간 재직했으며 2001~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는 미술 행정가로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69년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자’는 모토 아래 전위미술가 단체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74년 해체)를 결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3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연작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의 언저리를 느긋이 눌러놓았을 때,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르고 칠하는 것이 회화라는 관념을 깨고 대항이라도 하듯,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반란(?)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회화의 틀과 양상의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게 문화의 보편적 추세다. 그러나 회화에 입문한 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정형의 추상화를 견지하는 것은 작가의 깊은 철학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 현대 서양화의 선도자인 작가가 ‘비인기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화가’라는 세간의 입방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절제된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녹여낸 당당함이야말로 미술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4~5년 전부터 세계미술 시장에 모노크롬(mono chrome, 단색화)의 바람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기존의 구상이나 추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상자, 즉 소비자의 욕구가 반영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하종현 작가의 연작은 캔버스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을 나이프나 손을 이용해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겼는데 마치 담벼락에 진흙을 바르던 소박함이 연상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그림 은 10여 년 전에 인사동 화랑에서 4개월 할부로 구입한 작품이다. 큰 작품은 부담이 되어 이 소품을 수집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30~40호의 대작을 구입했다면 4~5배의 수익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투자는 어렵다. 그의 작품을 서재에 놓고 수시로 눈 맞추며 명상에 잠기곤 한다. 청회색 물감의 흘러내림도 유연하고, 붓으로 가다듬은 질박한 모양이 상형문자와도 같아서, 단조로움 속 정중동(靜中動)의 리듬이 활력을 주곤 한다.
“전혀 무관한 일상의 사물들을 모아본다.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켰다. 낯설다.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정서가 교차하면서 현실도 이상도 아닌 낯선 세계에서 현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화가 한만영(韓萬榮, 1946~)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백의 일단이다. 1970년대 말에는 정밀묘사 기법의 연작이 대표작이고, 1980년대 초에는 포스터나 인쇄물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부터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차용해 일상의 오브제(objet, 물체·객체)와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정년퇴임 후 현재까지 어떤 무리에도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오브제는 불상, 막대자, 도로표지판, 깃털, 핀, 새, 석고상, 병마도용, 토우, 악기 등 무척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오브제에 앵그르(Dominique Ingres, 1780~1867),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 정선(鄭歚, 1676~1759) 등 “동서양의 거장 화가들의 낯익은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의 겹침을 시각화한 것이 한만영의 작품이다”라고 평론가는 말한다.
는 2009년 봄 인사동 ‘노화랑’에서 전시회 오픈 날에 20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화랑의 문턱을 낮추되 역량 있는 작가들의 밀도 높은 작품을 소개한 야심찬 기획전시는 1999년과 2000년에열렸다가 몇 해 쉬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왔으나, 작품가의 상승 등 여러 요인으로 올해로 그친다는 서운한 소식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돈을 마련해 작품을 고르고, 아내와 밤늦도록 감상하던 작품이 어언 10여 점에 이르니, 5월의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
그해 한만영 작가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핵심 오브제로 삼은 작품 10점을 내놓았는데, 나는 주저 없이 이 첼로 오브제의 작품을 선택했다. 첼로를 완벽한 비례로 축소한 오브제에는 중세 서양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 첼로를 꺼내어 연주하면 그림의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림을 거실에 놓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714~1788)의 무반주 첼로 조곡 중에서도 내가 제일 즐기는 제5번 G장조의 선율을 이탈리아 첼리스트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0~1976)’의 느린 연주로 듣는다. 중세 프랑스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느릿한 춤곡이 바흐를 통해 되살아나고,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마이나르디 연주가 음반을 통해 부활한다. 그리고 이렇듯 흘러간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이면, 역사의 뒤안길을 순례하는 기꺼운 상상에 잠기게 된다.
이재준(李載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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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가끔 느닷없이 훌쩍 나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오전이거나 오후 잠깐 시간이 생겼을 때, 서너 시간 반나절 정도 산책 삼아 다녀올만한 곳, 짧은 시간으로 탁 트인 풍경 속에서 머리도 식히며 사진도 담고 조금 더 기다려 멋진 일몰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정서진(正西津)은 경인 아라뱃길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한양(漢陽)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마을이 정동진이라면 그 대칭으로 서쪽에 있는 지역이 바로 정서진이다.
서울에서 오후 3시쯤에 정서진을 향해 출발하면 도로 정체 없이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먼저 25층 높이의 전망대에 올라본다. 아라타워 전망대에 오르면 넓은 갯벌이 한눈에 들어오고, 돌아보면 풍력발전기가 눈 앞에서 거대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전망대 아래 인공호수 위로 청춘들이 노를 저으며 물 위를 미끄러져 간다. 5월~9월까지 운영하는 카약과 고무보트 체험장이 있으니 즐겨볼 만하다.
멀리 영종대교 위로 비행기가 홀연히 날아가고,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갯벌은 노을을 맞이하느라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일몰이 뜨겁게 온 누리를 장악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정서진의 노을은 갯벌이나 저 편 산 능선과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노을 무렵 꼭 한 번 들여다볼 조형물이 있다. 노을 종이라고 했다. 온누리에 해넘이의 풍경이 번지면서 붉은 노을이 조형물과 맞닿을때 마음속으로 종소리를 내며 멈추는 순간을 놓치지 말일이다.
옛날 옛날에 저 아랫녘에서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하루 묵어가는 길목이 정서진이었다. 그리하여 전라도 양반댁 총각이 이곳에서 하루 묵으며 주인집 딸과 서로 눈이 맞아 사랑을 약속한 곳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정서진을 거니는 짝을 이룬 몇몇 연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사랑의 맹세도 노을 지는 정서진의 기운을 받아 아름다울 것임을 믿어본다.
드디어 붉은 노을은 뜨겁게 타올라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더니 차츰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하며 한참을 마젠타의 색감으로 차분히 머문다. 한층 운치 있는 온 세상이 하루의 마감을 알린다. 영종대교 위의 가로등이 길게 일열로 불 밝히고 갯벌엔 점점 물이 차오르고 어둠은 더욱더 짙어지고 있다.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검암역까지 공항철도, 검암역에서는 순환버스가 있다.
*공항철도 청라국제도시 역 기준
아라(인천) 여객터미널 방면➔버스 77-1(배차간격 30~40분) 승차➔아라(인천) 여객터미널 종점 도착(경인항통합운영센터).
*서울에서 자동차로는 출발지에 따라 30분~1시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