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전형이라는 큰 산을 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면접이다. 면접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만큼 단 몇 마디로 자신의 강점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돌발 질문에 능숙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트렌드에 발맞춰 ‘줌’(ZOOM) 등을 활용한 비대면 면접 방식도 알아둬야 한다. 재취업의 길로 향하는 최종 관문, 면접관의 시선을 끄는 면접 노하우를 소개한다.
도움 중장년 재취업 전문기업 상상우리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이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일이다. 말 몇 마디로 합격·불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면접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어느 대중가요의 노래 가사처럼 면접관 앞에서는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하고, 동공이 흔들리며, 잘만 나오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하지만 고생 끝에 면접장에 들어선 이상 허무하게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중장년 일자리 시장은 모집 경력이 10년 이상만 넘어가도 30대 후반~40대 초반 지원자들까지 몰리기 때문에 면접보다 서류전형이 더욱 치열하다. 그 말은 서류만 통과해도 합격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뜻이다. 특히 중장년은 면접관과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나이에 따른 편견을 해소하고, 지혜가 돋보이는 발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업의 입장에서 지원자에게 궁금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질문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기만 하면 횡설수설하지 않고 면접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재취업 전문가가 알려준 면접 팁을 알아두었다가 실전에서 멋지게 활용해보자.
[1] 1분 자기소개는 두괄식으로 명료하게
모든 지원자가 피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단연 1분 자기소개다. 1분 자기소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강점을 압축해서 보여줘야 하는 초고난도 미션이다. 첫 질문이라는 점에서 부담감도 크다. 하지만 다른 질문과 달리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다. 또한 흥미를 유발할 경우 추가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꼼꼼하게 연습하면 꽤 유리한 무기가 된다.
일부 중장년은 ‘자기소개’라는 단어 때문에 말 그대로 인생관이나 취미, 생활 방식 등을 소개하는 질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1분 자기소개는 지원자가 회사에 적합한 인재인지 여부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므로 직무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지양해야 한다. 대신 자신이 지원한 직무에 적합한 이유를 한 줄로 정리하고, 두괄식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 좋다.
▶ 기출 질문 자신을 1분 동안 소개해보세요.
▶ 합격 노트 실제 재취업 성공 사례 (공공시장 영업 관리직)
저는 누군가를 제 편으로 만드는 남다른 재주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공공시장 영업에 특화된 사람입니다. 최근 2년간 공공시장 영업 관리와 마케팅으로 연 ○○억의 매출을 올린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중장년이기 때문에 매년 늘고 있는 노령 인구와 장애인 이동권 확보에 관심이 많은데요. 보장구 충전기 분야는 아직 지자체와 공공기관에서 법제화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자체 및 관련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년간의 공공시장 영업 경험을 보장구 분야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 한 줄 정리 강점, 지원 동기, 직무 경험(1~2가지), 입사 후 포부를 매끄럽게 연관 짓는 것이 핵심!
[2] 개방적인 태도로 유연성 어필하기
직무 역량이나 경험 못지않게 중장년에게는 ‘소통 능력’에 대한 질문이 단골로 등장한다. 업무 도중 나이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의견 차를 우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관계 개선에 관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이는 실제 조직 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혼자 결론짓지 않고 다 같이 문제를 살펴보며 장단점을 분석하는 수평적인 의사결정에 익숙해져야 하고, ‘내가 옛날에 해봐서 안다’는 뉘앙스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보다 다양한 시각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적절한 답변으로 유연성을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위 말해 ‘꼰대’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면접 태도 또한 신경 써야 한다. 자세와 표정 등 비언어적 표현은 언어적 표현만큼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고 면접관의 말을 가로채며 답변을 하거나 팔짱을 끼고 상체를 뒤로 젖혀 앉는 등 ‘언행불일치’의 태도를 보인다면 답변에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면접도 기업과 개인 간 소통의 일부라는 점을 기억하며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 기출 질문 젊은 동료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습니까?
▶ 합격 노트 실제 재취업 성공 사례 (서울50+ 인턴십)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말만 한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청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맞장구를 치며 대화에 활기를 더하려 노력합니다. 다만 친밀감을 표현할 목적으로 사적인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지양하는 편입니다. 또 상대방이 했던 말을 요약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내는 것도 저만의 노하우입니다.
[3] 회사의 지향점을 개인의 목표와 연관 짓기
면접이 끝날 무렵에는 입사 후 목표나 계획, 포부 등을 묻는 경우가 많다. 이는 회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지원자의 목표와 일치하는지, 혹은 구체적인 업무 추진 계획이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즉 ‘조직에서’ 이루고 싶은 포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장대한 노후 계획이 있더라도 개인적인 목표보다는 지원 직무와 연관 지어 대답하는 것이 좋다. 특히 직무 관련 최신 동향이나 트렌드를 언급하며 향후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낼 역할을 구체적으로 짚는다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직무 관련 자기계발 계획을 언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속적인 발전을 원하는 기업은 주어진 일만 하려는 사람보다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과 일하길 희망한다.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기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용을 고려하게 된다. 관리직을 지원하는 경우 기업의 비전을 역으로 질문해도 좋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는 시간에 기업의 5년 후 비전을 물어보는 것이다. 중장년의 관록과 경험으로 회사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기업은 지원자의 진취적인 태도를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다.
▶ 기출 질문 입사 후 (조직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계획이 있습니까?
▶ 합격 노트
· 모아둔 돈으로 전원주택을 지어 아내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X)
· 최근 ‘라이브 커머스’ 등 비대면 유통 채널이 코로나19 시대에 새로운 돌파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30년 경력을 보유한 유통 전문가로서 해당 채널의 판로를 뚫고 실질적인 매출 상승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O)
· 그동안 마케팅을 진행했던 사례를 책으로 만들어 젊은 마케터들에게 지식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O)
◇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면접 TIP
장비 점검 후 접속 환경 확인하기 ▶ 화상회의 시스템에 참여하려면 노트북, 태블릿PC, 스마트폰, 데스크톱 중 하나가 필요하다. 이 중 노트북이 제일 이상적이다. 노트북은 대부분 화상캠과 마이크가 기본적으로 탑재돼 있는 반면, 데스크톱은 별도의 설치가 필요하다. 스마트폰으로도 접속이 가능하지만, 연결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좋다. 준비가 끝났다면 끊김을 방지하기 위해 와이파이가 안정적인 환경에서 접속한다.
배경은 깔끔하게, 조명은 밝게 ▶ 비대면 면접은 주변 배경도 인상에 큰 영향을 준다. 단정하게 차려 입어도 주변이 산만하면 효과가 없다. 가급적 흰 벽 등 깔끔한 배경 앞에서 면접을 보는 것이 좋다. 스터디룸이나 세미나룸을 빌려도 된다. 주변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어도 가상 배경은 넣지 않는다. 진지해 보이지 못할뿐더러 인물이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다. 집 안이 어두울 경우 LED 스탠드나 화상회의용 조명을 활용해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것도 좋다.
카메라 렌즈 보고 말하기 ▶ 간혹 화면 속 면접관의 얼굴을 보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트북은 화면 위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화면을 보고 말할 경우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내려다보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노트북에 받침을 대서 높이를 올리고 렌즈를 응시하며 말해야 한다. 또 노트북과 50cm 내외의 거리를 유지해 화면에 상반신 3분의 2 정도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안정적이다.
이어폰으로 음질 보완하기 ▶ 음질은 비대면 면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면접 중에는 목소리가 울리거나 끊기는 등 음질로 인한 다양한 애로 사항이 생긴다. 청력이 좋지 않아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듣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음이 없는 공간을 찾고, 노트북 내장 마이크 대신 무·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어폰 착용 후 사전 테스트는 필수!
음소거 기능 활용하기 ▶ 1:1 면접이 아닌 그룹 면접의 경우 대면 면접과 마찬가지로 다른 지원자의 답변에 경청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비대면 면접은 그 특성상 주변의 잡음이 섞일 수 있어 면접관이나 다른 지원자가 말할 때 ‘음소거’ 기능을 눌러놓는 것이 좋다. 단, 자신의 차례가 오면 해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성공적인 재취업을 위한 마음가짐
모든 도전이 언제나 달콤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도 탈락의 고배를 마실 수 있고,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장년 일자리 공급 과잉 현상은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화와 맞물린 사회적 과제이므로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전에 일자리 시장에 뛰어들려는 이유와 목적을 진단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가령 생계를 위한 소득이 필요한지, 사회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자 하는지, 혹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길 원하는지 분명히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판단하기 어렵다면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진로 적성검사 등을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다음 이에 걸맞은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다 보면 기회는 자연스레 다가오고, 인생 후반전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PLUS+]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중장년을 위한 TO-DO LIST
· 희망 기업 목록 작성 후 관련 정보 업데이트하기
·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경력 상담 및 자가진단 하기
· 국민내일배움카드 등 정부 지원 서비스로 취업 연계 자격증 준비하기
· 서울시50플러스재단 등 또래 집단 커뮤니티 활동으로 인맥 넓히기
· 희망 직무 및 관심 분야 관련 자원봉사 프로그램 참여하기
떡볶이집 주인부터 전단지 아주머니, 진상 고객까지 스쳐 지나가는 드라마 속 찰나의 장면에서도 열연을 펼치는 배우가 있다. 단역 배우 임유란(50) 씨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뒤 주부로 살다 40대 중반에 다시 연기 활동에 발을 들인 임 씨는 5년간 50여 개의 역할을 맡으며 단역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비록 역할에 이름 하나 없고 대사는 길어야 세 마디지만, 촬영장에 갈 때마다 짝사랑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떨린다는 그녀를 만나 단역 배우의 삶을 들어봤다.
단역 배우 임유란을 소개하자면 이 영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이다. 그녀는 영화 시작 단 2분 만에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케 한 장면, 바로 ‘벤츠신’의 주인공이다. 일명 ‘벤츠 아줌마’로 15초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극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임유란은 단역 배우 인생 처음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자칭 천만 배우 임유란입니다. ‘극한직업’에서 경찰에 쫓기는 마약범에게 차를 빼앗겨 넘어졌다가, 찰진 욕을 하며 마약범을 때려잡는 역할이었어요. 영화에서는 짧게 나왔지만, 사실 4시간 동안 촬영한 장면이에요. 40℃ 가까이 되는 더운 여름에 넘어지고 또 넘어졌죠. 그래도 너무 감사해요. ‘극한직업’ 덕분에 천만 배우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게 됐거든요.(웃음)”
잠깐의 대화에서도 유쾌한 에너지와 남다른 끼가 느껴지는 그녀는 보기와 달리 꽤 평범한 삶을 살았다. 대학 시절 마당극 동아리에 들어가 장진 감독과 연극을 함께하고 졸업 작품으로 배우 김나운과 함께 춘향전을 공연했지만, 졸업 후에는 연기의 길을 걷지 않고 비서 일을 하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 결혼했다. 이후 가사와 육아에 충실했던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연기에 다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9년 전쯤, ‘이승연과 100인의 여자’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주부 판정단에게 주는 선물이 너무 좋아 보이는 거예요. 바로 방청 신청을 했죠.(웃음) 그런데 방송국에 주부 모델 캐스팅하는 분들이 오시더라고요. 제가 부끄럼 없이 말을 잘하니까 그분들 눈에 띈 거죠. 자연스레 방송국을 드나들다 보니 단역 배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연기는 내 길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모든 게 물 흐르듯 착착 맞아떨어져서 신기했죠.”
카메라 뒤편 보이지 않는 고충
약 20년 만에 단역 배우로 다시 발을 내디딘 임 씨는 20대의 마음으로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역의 세계는 열정 하나만으로 버티기에는 녹록지 않았다. 대사 없이 스쳐 지나가는 역할 하나를 따내는 데 최소 5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고, 복잡한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어렵사리 역할을 얻어 수 시간씩 촬영을 해도, 정작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은행 인질 역에 캐스팅돼서 추운 겨울날 2박 3일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적이 있어요. 무릎보호대까지 차고 촬영했는데, 본방송에서는 아웃포커스로 나오더라고요. 주변 사람도 저인 줄 몰랐을걸요.”
임 씨는 단역 배우의 또 다른 고충으로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꼽았다. 극에서 비중이 있는 캐릭터가 아닌 만큼, 언제까지 출연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일회성 촬영을 제외하고 임 씨는 자신의 역할이 대본 속에서 사라질까 가슴 졸여야 했다.
“가사도우미 역이 단역 중 안정적인 편이에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웬만하면 계속 출연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유를 물어 보니, 주연 배우가 극 중 가사도우미로 취직을 했대요. 제가 주연을 어떻게 이겨요.(웃음)”
열정의 분량은 단역 아닌 ‘주연급’
배우보다 주부로서의 삶이 더 길었던 그녀지만, 사실 임 씨는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이 컸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이 직장에 나가고 집에 홀로 남으면 친구를 데려와 상황극을 하며 놀았고, 매년 성탄절엔 교회에서 연극을 올리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결혼 후에는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전래 놀이를 가르치며 “여기가 내 무대야” 하고 속으로 되뇌기도 했다.
실제로 임 씨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50여 차례의 단역 활동을 비롯해 홈쇼핑 광고, 중년 의류 브랜드 모델 등을 겸하며 다방면으로 뛰어다녔다. 그녀에게 대단한 연줄 하나 없이 끝없는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자신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배움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작은 역이라도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더 잘 살릴 수 있을지 연구했어요. 미용사 역을 맡았을 땐 얼룩이 묻은 앞치마에 빗 3개를 꽂아 갔고, 전단지 돌리는 아주머니 역을 할 땐 선캡과 장갑을 준비했죠. 자식들한테 전단지 돌리는 연습도 했어요. 노력한 게 보였는지, 촬영 당일 카메라에 잘 나오는 자리로 바꿔주시더라고요.”
임 씨의 ‘열정 행보’는 촬영장 바깥에서도 이어졌다. 그녀는 SNS를 활용해 자신의 이름을 꾸준히 알렸다. 지난 4월 유튜브 채널 ‘주부 배우’를 만들어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 속 장면을 올리며 자기PR을 했고,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서는 협찬과 광고를 받아 일이 들어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 부수입을 올렸다.
“유튜브요? 어려웠죠. 그래서 발품을 팔았어요. 찾다 보니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편집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있더라고요. 저자 분께 ‘선생님, 저 영상 배우고 싶어요’ 하고 다짜고짜 메시지를 보냈어요.(웃음) 어려워도 배우면 돼요. 계속 공부하면서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 향한 순애보의 짝사랑
초점 하나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주연 배우의 곁에서 맴도는 단역 배우에게 카메라는 어느 노래 제목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존재. 임 씨는 연기하는 자신을 떠올리면, 좋아하는 마음도 몰라주고 곁을 내어주지도 않아 야속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소녀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단역 배우는 늘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또 선택받았다고 해서 화면에 다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단역이라고 배우가 아닌 건 아니거든요. 제가 본 영화 중 이런 장면이 있어요. 영화감독 아버지를 둔 주인공의 친구가 주인공을 놀리려고 ‘너네 아빠 작품도 없는데 영화감독 맞냐?’ 하고 빈정대요. 그러자 주인공이 ‘수박 장수가 수박 안 팔린다고 수박 장수 아니냐?’ 하면서 맞받아치거든요. 저는 힘들 때마다 그 대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요.”
지난해 초 임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해는 한 달에 세 번만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며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원을 적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냐고 묻자,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돌아오는 새해 소원은 무엇일까. 2년 전에 비하면 한층 더 커다래진 포부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인지도를 보유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름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얼굴만 보고 ‘저 사람 어디 나왔잖아’ 하고 알아봐주신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언젠가는 꼭 이 짝사랑의 결실을 볼 거예요.”
은퇴 후에도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노년층을 의미하는 액티브 시니어가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다.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액티브 시니어를 우리말로 바꿔 ‘활동적 장년’으로 선정했다. 런던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과정 수업 도중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100년 산다고 가정할 때, 소득의 약 10%를 저금하고, 최종 연봉의 50%를 가지고 은퇴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학생들은 곧바로 계산을 했다. 답은 80대였다. 일순간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80대까지 지금과 같은 업무 강도로 일해야 한다니….
런던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이 함께 쓴 ‘100세 인생- 저주가 아닌 선물’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수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교육-일-퇴직으로 이어지던 전통적인 3단계 삶의 모습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앞으로는 은퇴와 정년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70세 혹은 80세까지 일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의 나이가 몇 살이든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시대를 선도적으로 살아가고 제2의 청춘을 즐기는 액티브 시니어처럼 다가오는 노년의 꿈을 계획하고, 노후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누구인가?
은퇴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100세 시대, 아무 준비 없이 은퇴하기엔 여생이 너무 길다. 은퇴 후 노후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면,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를 롤 모델로 추천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버니스 뉴가튼이 “오늘의 노인은 어제의 노인과 다르다”고 말하며 만들어낸 신조어다. 뉴가튼 교수는 55세 정년을 기점으로 75세까지를 젊은 노인(young old)으로 구분했다. 액티브 시니어들은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세대로 가족 중심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개발과 여가활동, 사회적 관계 맺기 등을 적극적으로 한다. 기존의 시니어가 노년을 인생의 황혼기로 인식했다면, 액티브 시니어는 노년기를 새로운 인생의 시작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5~10년 젊다고 생각하고, 진취적으로 삶을 사는 세대다.
액티브 시니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액티브 시니어의 공통점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한지 알고 노년의 삶을 준비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삶에 대한 자기 기준이 명확하게 정립돼 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길거리 화가가 된 60세 여성, 의상 공부가 하고 싶어 다시 대학을 간 80세 여성, 40세에 사진을 취미로 배워 10년 후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연 50세 남성, 자식을 다 키우고 60세에 요식업을 시작한 남성 등, 이들은 은퇴를 제2의 인생 시작점으로 설정했다. 은퇴 이후의 삶을 자녀 세대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통해 스스로 노후를 대비했다. 이들은 못다 이룬 꿈을 성취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꿈이 반드시 거창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면서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는 이들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 액티브 시니어라 부른다.
시니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액티브 시니어들처럼 노후를 잘 준비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노후를 아직 준비하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지난 5월 ‘하나금융그룹 100년 행복연구센터’에서 발간한 보고서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사는 법’에 따르면, 퇴직자의 평균 생활비는 월 252만 원이다. 또 대부분의 퇴직자들이 경제활동을 못하면 1년 내 형편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했다. 이분들께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현금 흐름을 유지할 것을 권유한다. 재취업이나 소자본 창업, 주택연금 등을 통해 소득을 유지하는 다양한 방법도 있다. 아직 퇴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노후 준비를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다가오는 미래는 먹고만 사는 시대가 아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노후를 위해서는 소득, 취미, 일자리, 관계, 건강 등 행복을 주는 요소들이 골고루 갖추어질수록 좋다. 자신만의 삶의 기준들을 정하고 장기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행복만큼이나 미래의 행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후 준비 Early Design, Self Planning!
고령화가 심각해질수록 사회적으로 노인 문제도 점점 커질 것이다. ‘100세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로 보면 주인공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작가이자 감독인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시니어 당신에게 무엇을 준비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제대로 예측하고 준비한다면, 장수는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고 축복이다. 주체적으로 제2, 제3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노후 준비를 위한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 후원으로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주최하고 ㈜드림업컨설팅이 주관하는 ‘2020 해피에이징 교육캠페인’도 그중 하나다. 노후준비문화 확산을 위해 액티브 시니어를 주제로 진행 중인 ‘해피에이징 교육캠페인’은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올해로 6년째 진행하는 무상교육 프로그램이다. 사회공헌적 취지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초고령사회에 대비할 수 있도록 노후 준비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고령 사회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개인 스스로 노후를 대비해 ‘Early Design, Self Planning’하는 것이다. 노후 준비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 당장 준비해야 늦지 않다. 당신도 액티브 시니어가 될 수 있다.
1972년 선소리 산타령 예능 보유자인 이창배를 사사하면서 국악을 시작해 1974년에 발표한 ‘회심곡’으로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경기민요와 12잡가의 대가 김영임(67). 이후 48년 동안 소리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수많은 공연 경험과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인 ‘김영임의 소리 孝’를 갖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로서 우리의 소리를 전수하는 데도 열중하고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성공과 세대를 뛰어넘은 트로트 붐 등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재, 우리 음악의 대표 주자 국악의 아이콘 중 하나인 김영임을 만나 국악인으로서의 삶, 소리의 존재 이유를 들어봤다.
김영임은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를 갖고 있는 드문 국악인이다. 그녀는 매년 5월이 되면 국내 최초의 국악 뮤지컬인 ‘김영임의 소리 孝’ 공연을 한다. 그러나 벌써 20여 년을 훌쩍 넘겨 계속되며 그녀의 브랜드가 된 ‘김영임의 소리 孝’이지만 올해는 볼 수 없다. 코로나19 때문이다.
“50여 년 동안 국악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공백 기간이 긴 건 처음이에요. 5월을 준비하고 시작하다 보면 1년이 금방 가곤 했는데…. 그런데 반대로 보면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저를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공허함이 좀 사그라지더라고요. 넘어진 김에 쉬었다가 간다고 하잖아요.”
트로트에 이어 국악 대세도 오지 않을까
여전히 그녀의 일상을 지켜주는 것은 다름 아닌 소리다.
“전라도 쪽에 ‘편’ 소리가 있듯 경기 소리에는 경기 잡가가 있어요. 장구 하나를 두고 6박 장단으로 부르는 소리인데, 열두 개를 다 하려면 네 시간 정도 걸려요.”
소리를 하고 싶어지면 혼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장구를 치며 경기 잡가 열두 바탕의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최근 화제인 TV의 트로트 프로그램들이 있다.
“요즘 트로트가 대세인데 제가 트로트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잖아요. 이미자, 은방울 자매, 문주란 씨 등등…. 학교 다닐 때 남진 씨 좋아했던 기억도 나고. ‘미스터 트롯’ 보면서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트로트를 잘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옛날에 KBS1 음악 프로그램 ‘빅 쇼’ 무대에서 이미자 씨의 ‘모정’과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를 불렀던 기억도 나고요.”
그녀는 “트로트가 대세이니 앞으로 국악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며 그런 시간이 조만간에 만들어져서 젊은이들에게 국악도 각광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소리는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김영임과 소리가 만난 것은 꽃다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만류로 못하다가 일 년 후 다시 했죠. 많이 반대했어요. 미국에 있는 오빠가 ‘노래는 조금만 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공부해라. 내가 지원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구렁텅이로 들어가도 헤쳐 나오겠다’고 말하고 소리를 하게 됐죠. 국악이 너무 좋았으니까요.”
민속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고, 스케줄 펑크를 낸 선배 대신 나간 방송 프로그램 PD에게 섭외된 그녀는 국악 드라마 주인공으로도 출연했다. 카메라맨들의 사랑을 받는 미녀 국악인으로서, 지금 시대로 보면 아이돌로서 활동을 하던 그녀는 레코드 회사 섭외를 받아 ‘회심곡’ 음반을 내면서 마침내 대박을 쳤다. 그녀는 그때의 자신을 “행운의 열쇠를 거머쥔 거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무조건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니라 했던가. 그런 삶 속에서 그녀의 상처는 점점 쌓여갔다.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의 상처가 컸어요. 그런 것도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일들이죠.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 배움으로 생각해요. 너무 빨리 이름을 얻어서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닐진대….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운 거죠.”
소리꾼의 삶과 한
소리꾼과 한(恨)을 떼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한은 우리 소리의 절절함과 곡절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단어이며, 소리꾼이 가진 한이 소리에 담김으로써 그 소리는 완성된다고도 한다. 어린 나이의 성공, 그로 인한 인간관계에서의 상처, 그리고 오랜 시집살이를 해야 했던 전통 사회 여성으로서의 한이 김영임에게는 있는 게 아닐까. 그녀의 남편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이상해 씨. 1979년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그들은 어느새 41년을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친정에서 일 년 살다가 큰딸이 두 살일 때 시집과 합쳤어요. 그때부터 시어른들과 지냈죠. 저는 장손의 큰며느리였어요. 그런데다 시집 분위기가 가부장적이어서 어른들은 장손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집안 경조사가 있으면 일을 나누지 않았어요. 무조건 큰아들 몫이었어요. 그런 분위기로 인해 우리 부부는 가족들한테 기대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열심히 개미같이 일해서 자수성가한 케이스가 됐어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한은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김영임 또한 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저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울컥해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텅 빈 것 같아요. 남편과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럴까, 내 마음을 내가 잘 다스리고 추슬러야겠죠. 저에겐 가야 할 길이 아직 있으니까요.”
그녀가 가야 할 길이란 물론 소리꾼의 길이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자신에 대해 ‘아직까지도 도전하며 뛰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인 그녀가 생각하는 다음 단계는 무형문화재로서의 길이다.
“윗세대 선생님들을 보면 여든이 넘어가면 기력이 안 돼서 노래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걸 미리 생각하면 너무 두렵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며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나이 먹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야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의욕이 사그라지지 않더군요.”
그녀가 지키는 부부의 세계
변치 않는 도전의식을 가지기로 결심한 김영임의 나이는 올해 예순일곱 살, 여덟 살 연상인 남편은 칠순 중반이다. 이제 부부 사이에 알콩달콩한 무언가가 있을 나이는 아니다.
“우리는 어른들과 함께 살아서 스킨십도 못하며 살았어요. 표현도 못하다 보니 그게 굳어졌죠. 기본적으로 남편은 나를 정말 끔찍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마음으로 들어와서 편안하게 위로해주는 게 없어요. 나이 먹어서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우습고요.”
그래도 생활의 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부드러워진 걸까. 그녀에게 이혼과 졸혼을 선택하는 황혼 부부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어봤다.
“사실 우리 부부도 이혼할 뻔했어요. 그런데 이혼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자도 여자도 초라해지고…. 그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서로가 좀 절충을 해야 하고, 깨지도록 싸워도 끝까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남편이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래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산 세월이 있잖아요. 해답은 대화에 있다고 봐요. 상대를 존중하는 언행도 굉장히 중요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요. 행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죠. 행복하려면 건강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아침 식사는 꼭 내 손으로 만들어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가며 더해진 깊이
김영임이 특히 건강에 신경 쓰게 된 계기가 있다. 암이었다.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때였으니 40대 후반쯤의 일이었죠. 안면마비가 왔고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고 자궁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일 년에 두 번이나 했어요. 특히 갑상선은 성대 가까이 있어 수술이 여덟 시간이나 걸렸죠.”
어쩌면 소리꾼으로서의 삶을 통째로 잃을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그러나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녀는 되려 수술 후에 너무 감사했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수술 전보다 더 잘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역경, 그리고 굽이굽이 흘려보낸 세월이 그녀의 목소리에 깊이를 더했다.
“20대 때 제가 부른 노래를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예요. 서른 조금 지나면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고… 지금도 20대 시절의 키는 살아 있어요. 그때 불렀던 ‘정선 아리랑’을 그대로 부르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젊은 시절에 대명창들의 노래를 들으면 이해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들의 목소리는 곰삭아서 따라갈 수 없는 소리였다.
“예전에는 못했던 단락 단락 노래의 꾸밈새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되더군요. 이제야 (명창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리는 운명, 노래는 그녀의 멘토
김영임은 살면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첫 번째로 지금까지 놓지 않은 소리를 꼽았다.
“소리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 내 할 탓이다 싶고요. 인간관계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사람도 좋게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두 번째는 가정을 잘 지킨 거죠.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 새끼들은 먹인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거죠.”
그녀는 살면서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두 번이나 어겼다. 소리를 하겠다는 것과 반대한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두 가지 일에서 어머니와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노래하면서 잘못 사는 인생은 안 살겠다고 했죠. 그리고 이 남자와 결혼한 뒤 친정에 보따리 싸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둘 다 지켰죠.”
그녀가 어머니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은 소리의 힘이기도 했다. 50여 년 가까이 만들어진 김영임의 소리는 그녀의 인생과 일맥상통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해왔다. 노래는 그녀의 멘토였고 그녀가 잘못 가려 할 때 붙잡아주는 버팀목이었다. 특히 김영임을 대표하는 노래 ‘회심곡’에 담긴 효에 관한 애절한 가사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그녀를 느끼게 해준다.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애지중지 기른 정을
사람마다 부모 은공 생각하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회심곡’ 가사 중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내가 마음 쓰는 행동이 틀리면 노래를 버려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럴 수만은 없었죠. 부모한테 후회 없이 효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에요.”
김영임의 소리, 존재의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가 될 것
앞으로의 일에 대해 큰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다는 김영임은 공연을 준비하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결실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티 내고 과시하는 게 싫다는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김영임답게 살아가면서 ‘저 여자 지혜롭게 잘 맞춰서 사는 여자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기에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 소리는 인정할 소리다’라는 말을 듣고 싶죠. 최고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걸 남기고 싶어요. 이 소망이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건 아직 제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연극을 보면서 울고 웃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나 이곳에서는 좀 다르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와 나를 알아간다. 배움의 영역에서 연극의 역할을 알차게 사용하는 교육연극협동조합 ‘재미사마’를 찾아갔다.
서울시 마포구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내의 몸짓교실. 교육연극협동조합 재미사마(이하 재미사마)의 신체 및 이미지 훈련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교육연극지도사들이 모이는 날. 신발을 벗고 마루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히토에 가서 몰디브나 한 잔”, “번개파워” 등 다소 우스꽝스러운 말을 하며 서로 악수를 하고, 특이한 신체 표현도 함께 따라해본다. 엉뚱한 말과 행동이지만 진지함이 느껴졌다. 남들에게는 참 이상해 보일지 모르나 연극인들에게는 아주 필요한 훈련 중 하나. 이 워크숍은 3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서하경 대표는 말했다.
“매달 한 번씩 진행해요. 다들 강사이다 보니 본인의 역량이나 수준도 좀 올리고요. 실제로 조합원들 앞에서 시범강연도 해보고 정보를 주고받아요. 교육연극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각자 다양한 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재미사마가 협동조합이 되기 전 50플러스 중부캠퍼스의 공동 사무실에 심사를 거쳐 들어왔습니다. 1년 반 정도 됐어요.”
연극을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재미사마는 2014년 소모임으로 시작해 2018년 11월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조합원 5명에 회원은 40여 명, 전국적으로 재미사마와 함께 협업할 수 있는 교육연극교사는 100명이 넘는다. 초창기에는 교육연극의 미래와 발전을 걱정하며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가졌다. 정작 만나서는 술 마시는 일이 몇 년 동안 반복됐다고 신미정 총괄PM이 말했다.
“교육연극지도사들이 오프라인 워크숍을 한다고 해서 서울에 왔다가 재미사마 구성원들이랑 서하경 대표를 만났어요. 그때는 ‘술 마시는 재미사마’가 있었습니다.(웃음) 술을 한동안 마셨던 것에 대해 우리는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왜냐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서로 친해지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는 의미로 보거든요.”
5년 정도 워크숍하면서 전국에서 모인 회원들이 술 한잔씩 하면서 얘기를 하다가 “그만 놀자!”라고 결론냈다.
“놀고 친해지는데 엄청 많은 시간을 할애했어요. 그러다가 이제는 사람과 가치에 대해 표현하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설립한 것이 재미사마입니다.”
재미난 인생을 꿈꾼다
조합원 대부분은 50대로 구성돼 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들 열심히 하나 할 정도로 교육연극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작년 말 50플러스 축제에서 만났던 재미사마 사람들을 생각하면 열정과 기운이 솟는다.
수학강사로 꽤 큰돈을 모아 고급 취미에 빠져 살 수도 있었던 서하경 대표. 연극을 좋아해 용돈이 모이면 숨을 쉬듯 연극을 제작하고 연출하며 살아왔다.
“30여 년간 수학강사로 살면서 극장주를 꿈꾸며 틈틈이 연극을 만들었습니다. 잘나가던 강사 자리를 박치고 나와서 본격적으로 교육연극과 인연을 맺었죠.”
현재 재미사마의 대표이고 별빛도서관도 운영한다. 사회적 관계 확장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과 축제/문화기획, 연극 등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편집디자이너였던 신미정 총괄PM은 대치동에서 논술강사를 하다 결혼을 하면서 경력이 단절된 주부였다. 춘천에서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며 아이와 학부모가 함께하는 ‘알음알음 책 수업’을 진행했다. 교육연극을 만나 지금의 동료들과 단체까지 만들었다. 역사·환경·문화 등을 접목한 교육콘텐츠, 문화기획 프로그램 등을 기획한다고. 교육연극협동조합 재미사마의 총괄PM이자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커뮤니티 학교 멘토다. 희곡을 쓰고, 영상도 찍는 만능재주꾼이다.
“저는 재미사마의 꽃입니다.(웃음) 총괄PM(프로젝트매니저)이라는 직책으로 저를 부르는데 JB로 바꿔야 맞을 거 같습니다. 잡부요. 대부분의 프로그램 기획이나, 기관을 비롯해 저희를 원하는 곳에서 요청을 하면 그것들을 정리해요.”
취재 당일 얼굴을 비치지는 않았지만 3명의 조합원이 더 있다. 재활 관련 전공을 한 이미정 이사는 주부로 살아오다 어느 날 자연 체험을 하고 숲을 만나면서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지금은 경기환경네트워크 사무처장으로 있으며, 경기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필환경 탈플라스틱 활동을 하고 있다. 김정연 이사는 미쓰비시도쿄UFJ은행에서 정년퇴직한 후 서울시50플러스 인생학교에서 재미사마와 인연을 맺었다. HP Korea에서 20여 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현길용 감사도 인생학교를 통해 재미사마와 인연이 닿아 조합원이 됐다.
교육연극은 나이 든 이들에게 필요
교육연극이 중년과 시니어 세대에게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시점은 신미정 총괄PM을 제외한 4명의 조합원이 50플러스 인생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교육연극은 우리나라 중년들에게 필요한 수업 형태라고 서 대표는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세대는 더 이상 밑줄 치고, 외우고, 필기해가며 공부할 필요가 없는 세대들이잖아요. 시험 봐서 인생의 관문을 넘어야 할 일은 끝났죠. 예를 들어 교육연극은 연극을 통해서 직접 역사 속에도 들어가 볼 수 있어요. 환경을 배울 때는 맹꽁이를 연기하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고요. 즉흥극을 통해 현재의 나를 연기하고 서로 공감도 합니다. 그게 교육연극의 매력입니다.”
재미사마를 통해 교육연극을 체험한 후 삶이 달라진 여성도 있다.
“원주청소년문화의집에서 ‘딴짓주부’를 공연할 때 만난 경력단절 주부들이었어요. ‘주부들의 자존감 여행’이 주제였는데 그림책 서점 운영을 꿈꾸던 분과, 결혼하면서 무용 활동을 접은 여성이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한 분은 내레이션으로 연기했고, 다른 분은 무대에서 춤으로 표현하셨어요. 그 후 무용하셨던 분은 다시 꿈을 찾아 무용 강사를 하게 되셨고요 한 분은 그 공연이 계기가 되어 도서관 등을 다니며 다양한 활동을 하시더라고요.”
세대를 연결하는 통로는 연극
재미사마가 공연했던 작품 중 ‘멋진 하루’는 1인 가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미정 총괄PM이 한 달 반 동안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해 공들여 쓴 창작극이다. 이후 마포문화재단 후원을 받은 서울50플러스 중부캠퍼스의 커뮤니티 ‘햅번’이 이 작품을 ‘빨래방 소동’이라는 제목으로 각색해 재공연했다.
“이후에 평균 나이 75세인 서초구서리풀스마트시니어학교 수료생들이 연기했습니다. 중년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청년들 애환도 들어 있어요. 시니어가 후배 세대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죠. 가서 봤는데 관객들의 호응이 굉장히 좋더군요.”
이렇듯 교육연극이라고 해서 교실 안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는 것은 아니다. 자축의 형태가 됐건 어떤 형태로든 공연을 한다.
“무대에 서는 경험을 참가한 모든 분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연극을 하고 싶었던 분들을 모아 정식극단은 아니더라도 임의단체 수준의 조직을 만들어보려고요.”
올해는 작년에 했던 사업들이 이어져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부평5060인생학교’, ‘남양주 인생多모작학교-모두의 학교’, ‘서초구서리풀스마트시니어학교’ 등이 예정돼 있다. 특히 지금까지 계절학기로 진행했던 ‘50플러스 우리들의 연극교실’은 정규수업으로 편성됐다.
재미사마의 특징은 모두가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함께한다는 점이다. 일을 같이한다는 건 서로 견뎌주는 사이가 됐다는 거라고 서 대표는 말했다.
“주고받는 과정을 지나 걱정해주는 사이가 되면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거 같아요. 재미사마는 앞으로도 서로의 믿음으로 함께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연극지도사 취득 과정
교육연극지도사 취득준비과정 1, 2, 3 까지 모두 수료하면 한국국공립대학평생 교육협의회 ‘교육연극지도사’ 자격취득시험 응시자격이 된다.
모집대상 교육연극에 관심이 있는 누구나
모집인원 200명
수강료 9만4500원
- 방송대 및 프라임칼리지 학위과정 2019년2학기 등록생과 졸업생 7만6500원
- 국가유공자 본인 및 배우자, 자녀는 수강료 면제
신청기간 2019년 12월 23일~ 2020년 1월 10일
신청방법 프라임칼리지 평생교육과정 홈페이지(prime.knou.ac.kr)
‘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는 버킷리스트. 그러나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애써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도 어떻게 이뤄가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주제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을 담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앞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4위를 차지한 ‘외국어 배우기’에 대해 알아봤다.
도움말 박현영 수퍼맘북스·지니앤토비 대표
학생, 직장인 시절 외국어는 시험이나 취직을 위한 통과 의례였을 것이다. 그러나 입시와 취업 경쟁에서 벗어난 중장년의 경우, 취미 또는 도전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이가 많다. 외국어 교육 전문가 박현영 수퍼맘북스·지니앤토비 대표는 “시니어가 젊은 시절 외국어를 배울 때는 주로 문법 위주였다. 때문에 중년 이후에는 생활 영어를 취미 삼아 하거나, 해외여행을 위한 실용 회화를 공부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또는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준비하거나 학창 시절 배우지 못한 것에 한을 느끼시는 분들도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고 설명한다. 배우고 싶은 이유가 다양한 만큼, 그 실천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저마다 수준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어려움을 느끼고 있을 영어 초보자들을 위한 조언을 담아봤다.
독학보다는 맨투맨 회화가 효과적
박 대표는 “시대가 바뀌면서 인터넷 강의나 스마트폰 앱 등 외국어를 배우는 방법도 다양해졌지만, 아무래도 시니어는 아날로그 세대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대로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외국어를 배우기 전 스마트폰 앱 사용에 능숙해져야 하고, 컴퓨터나 휴대폰 화면을 오래 보면 눈과 몸이 쉽게 피로해져 시니어에게는 무리가 있다는 것. 아울러 문법보다는 회화를 목표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아 소싯적 달달 외우듯 독학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덧붙인다. 박 대표가 적극 추천하는 것은 주민센터나 복지관 등 시니어만을 대상으로 한 강좌다. 일반 학원 강좌는 입시생이나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진도도 빠르고 공부량도 버거울 뿐더러 다른 학생과 수준 차이가 나면 위축되기도 한다. 반면 주민센터나 복지관 수업 등의 경우 가격도 저렴하고, 시니어의 패턴에 맞춰 수업 스케줄과 목표를 잡아 차근차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
외국어 초급 딱지 떼기 단계
[step1] 필수단어 100개 익히기
아이들이 처음 말을 배울 때 그림 카드에 적힌 이미지를 보고 단어를 말하듯,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100개를 그림과 함께 익혀보자. 이때 발음이나 스펠링 등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음식, 가족, 동물 등등 장르별 6~7개 정도 단어이면 충분하다. 먼저 100개의 단어가 친숙해졌다면 수준에 따라 200개, 300개까지 늘려간다. 너무 쉽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쉬운 것부터 즐겁게, 꾸준히 그리고 익숙해지는 것을 외국어 배움의 목표로 여겨야 한다.
step2] 필수표현 50개 익히기
박 대표는 다수의 외국어 관련 서적을 집필한 경험으로 볼 때 ‘안녕’, ‘고맙습니다’, ‘잘 가요’ 등 유용한 필수 표현은 50개 남짓으로 정리된다고 말한다. 앞서 기초 단어를 익히듯 글자나 발음보다는 표현 자체에 익숙해지는 것에 중점을 두고 공부한다. 한두 단어로 이뤄진 짧은 문장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라면, 막상 써야 하는 순간에 잘 생각나지 않는다. ‘thank you’, ‘sorry’처럼 굳이 머리로 생각해내지 않고도 곧바로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올 정도로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step3] 글자 익히기
아이들이 먼저 ‘엄마’라고 말하고, 나중에 ‘엄마’라는 글자를 배우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입에서 익숙해진 단어와 표현을 글로 배웠을 때 더 재미있고 가속도가 붙는다. 영어라면 알파벳, 일어라면 히라가나 등을 익히는 게 이번 단계의 목표다. 앞서 두 단계가 없이 바로 글자 쓰는 법을 배우면 철자와 단어의 뜻을 한꺼번에 익혀야 한다. 먼저 단어와 표현이 익숙해지면,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글자를 익힐 때도 효율적이다.
step4] 문장의 뼈대 익히기
마지막 단계는 문장의 패턴을 외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I want it’(나는 그것을 원한다), ‘I want coffee’(나는 커피를 원한다), ‘I want love’(나는 사랑을 원한다) 등 ‘I want ~’(나는 ~를 원한다)라는 기본적인 패턴을 외우고 그동안 외운 단어를 접목하는 단계다. 반복해서 응용하고 그것이 익숙해지면 말로 문장을 내뱉는 힘을 키울 수 있다. 여기까지가 초보자가 목표로 할 수 있는 단계이고, 약 1년 정도 시간을 두면 좋다.
영어가 아니라면? 일본어에 도전!
대부분 외국어를 배운다 하면 1순위로 영어를 떠올린다. 이미 영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라면 또 다른 언어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중장년의 학창 시절에 남자는 독일어, 여자는 프랑스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익히는 것도 좋겠지만, 40~50년 전 이후로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면 새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언어는 익힌 뒤 자주 활용해야 입에 붙고 수준이 올라가는데, 아무래도 독일이나 프랑스 등은 여행하거나 언어를 접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 이에 박 대표는 비교적 활용도가 높은 일본어나 중국어를 추천한다. 특히 일본어의 경우 발음이나 어순, 문법 등이 비슷해 공부하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라고. 물론 일본어를 포함한 다른 외국어 역시 말부터 익히고 글로 쓰는 과정을 따를 것을 권한다.
[Tip] 소리의 바다에 빠져라
외국어에 익숙해지려면 자주 그 나라 언어를 소리로 접하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팝송을 듣거나 미국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며 공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팝송의 경우 시적인 표현이나 슬랭(slang: 비속어, 은어)이 많고, 드라마와 영화 대사는 줄임말이나 유행어 등이 많아 초·중급 단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영어 동요를 불러보면 좋다. 따라 부르기도 쉽고, 거의 직역으로 뜻이 전달돼 노래를 통해 단어와 표현을 익히기에도 효과적이다. 어린 손주와 놀아주며 함께 영어 동요를 익혀보는 건 어떨까?
“엄마, 기타 치는 모습 너무 귀여워.”
휴대폰으로 찾은 동영상을 보면서 기타를 이리도 잡아 보고 저리도 잡아 보는 나를 향해 딸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기타를 잘 치냐 하면 반대로 왕초보다. 이제 막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시작은 늦었지만 어려서부터 늘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기타를 치는 모습, 가수들이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사실 누구라도 따라 하고 싶은 폼나는 모습 아닌가?
악기상점이 모여 있는 종로의 낙원상가는 물론이거니와 지나다 우연히 기타가 세워져있는 상점이라도 발견하면 진열장 앞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나뿐만 아니었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기타가 바로 보이는 진열장 앞에는 늘 나와 같은 아이들이 두 서넛은 기웃거렸다. 왜 하필 기타였을까?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끌림이 가는 것들이 있는데 기타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통기타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가수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기타를 치던 시대였다. 특히 종로의 ‘쎄시봉’ 하면 떠오르는 가수 김세환이나 팝송을 번안해서 부르던 트윈폴리오의 윤형주와 송창식, 특유의 목소리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양희은 등등의 인기는 지금의 빅뱅이나 방탄소년단 못지않았다. 종일 음악이 흐르는 다방에는 DJ가 있어서 신청곡을 즉석에서 틀어주기도 했고 여름만 되면 기타를 메거나 라디오를 손에 든 청춘들이 삼삼오오 기차를 올라타고 서울을 벗어나던 시대였다. 지금쯤 중년이 되었을 그 시대 청춘들.
첫 수업에서 A 코드와 E 코드를 배우고 동요 ‘비행기’를 쳤다. 단 두 개로 치는 거라 쉬워 보였는데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 세 개가 나란히 있는 코드 A에서 자연스레 코드 E로 넘어가는 것은 나에겐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었다. 잘도 넘어가는 다른 분들을 보면서 자괴감보다는 ‘아마 예전에 하던 사람일 거야’ 하고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을 발동시켰다. 두 번째 수업에서도 나의 비행기는 바닥을 설설 기어갈 뿐 높이 뜨지 못했다. 함께 시작한 분들의 비행기는 대부분 높이 날아올라 강의실이 좁다고 허공을 뱅뱅 날아다니는데 가여운 나의 비행기는 슬쩍 뜨려다 멈칫멈칫 주저앉았다. 이유는 있다. 연습을 거의 못 했다. 못 뜨는 것이 당연하다.
“기타를 가방에 모셔두지 말고 꺼내놓고 자주 만져주세요. 그냥 한 번씩 안아주기만 해도 좋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기타를 안아주지만 더 시간이 지나면 기타가 여러분들을 위로해주는 날이 옵니다.”
두 번쯤 수업을 들었을 때 강사님이 말했다. 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기타가 나를 위로해 주다니! 더 신기한 건 그 말을 내가 이해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수업까지도 아리송한 상태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만져 주리라 하고는 거실에 기타를 꺼내두었다. 주말에 손녀가 오더니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는 장난감이 되었다. 띵 똥 거리며 소리가 나는 물건이 어린 눈에도 신기했나 보다. 기타를 처음 시작할 때 입문용으로 하다가 교체하는 게 좋다는 조언도 있었지만 물려 줄 꼬맹이를 염두에 둔 것도 있다. 비행기를 쳐 주니 전혀 엉뚱한 소음이 들린다. 음이 맞지 않았다. 튜닝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네 번째 수업이다. 강사님이 세 번째 수업 즈음 7월 말경 ‘김광석 따라 부르기’가 있다면서 “우리도 한 곡 참여하죠?” 하더니 이내 “우리도 한 곡 하기로 했어요”로 바뀌었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코드 두세 개로만 하는 거라 연습하면 가능해요.”
‘물론... 연습만 열심히 하면, 물론 그렇겠죠.’ 모두 입을 쩍 벌리곤 고개를 절레절레(나와 같은)하거나, 깔깔대고 웃거나(틀림없이 예전에 좀 하던 분들이다) 했다. 실력을 떠나서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이라 일단은 좋다.
벌써 일곱 번째 수업이 진행되었다. 연습 부족인지 수업이 진행될수록 다른 분들과 격차가 생기는 느낌이다. 강사님이 말했다. “여러분! 연습 잘되고 있는 거죠?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절대 연습 안 되고 있어요!!’라고 속으로만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잘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 여러분 아주 잘하는데요! 이대로만 하면 되겠어요!” 합주를 하고 난 후 강사님이 말했다. 나도 잘한 것은 맞다. 오직 G 코드 하나만 누르고 그 순간에만 오른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합주를 하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이 더 있는지 그 부분에서 유독 소리가 커졌다가 코드가 바뀌면 소리가 확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합주를 마친 후 강사님은 “어 이상한데?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네요”라고 말했다. 모두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강사님은 수강생들의 편법 연주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를 기타를 치며 부르고 싶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타를 집어 든다. 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기타를 잘 치기엔 내 손은 너무나 작았다. 물론 다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동영상에서 가르쳐 주는 그 손동작이 나는 안 된다. 엄지손가락을 6번 줄 위에 멋지게 걸칠 수가 없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피아노에서만 유리한 줄 알았더니 기타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한 것도 있었다. 내 손가락은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가늘기도 했다. 남들보다 다른 줄을 건드릴 확률이 낮다. 역시 신은 공평하시다.
코드를 잡아 본다. C 코드, D 코드, E 코드. 비행기도 열심히 친다. 코드를 정확히 익히니 연결도 전보다 편하다. ‘하긴, 코드를 잘 모르는데 연결이 부드럽게 되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지’하고 스스로 반성도 한다. 어설프게 알다가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의 기쁨은 배움의 과정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깜박이던 형광등에 반짝하고 불이 켜지면서 환해지는 느낌과 같다.
오늘도 밤늦도록 기타 코드를 잡는다. 비행기가 자연스레 되나 쳐보고 “오! 제대로 들린다!” 혼자 뿌듯해한다. 몸으로 하는 것은 자세를 바로잡으면 반은 성공이라는 생각에 동영상을 검색한다. ‘기타 칠 때 바른 자세’, ‘왕초보 기타 코드 배우기’, ‘자연스럽게 기타 코드 연결하기’ 등등. 신기하게도 인터넷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동영상을 보면서 열심히 따라 해본다. 손가락 끝이 얼얼하다. 많이 연습한 증거라 그마저도 싫지 않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보다가 비행기를 다시 친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전보다 좋다.
“이게 비행기로 들리니?” 거실에 나온 딸에게 비행기를 물었더니 “ 그럼, 그럼. 비행기로 들려! 엄마 이제 잘하네!” 하고는 웃는다. 어설프게나마 비행기 코드를 연결하게 된 내가 자랑스럽다. 진도를 높여 본다. 수업 중에 G 코드 하나만으로 껑충 연주를 했던 김광석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악보를 펼친다. 처음엔 역시 G 코드다. 거북이처럼 목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이어지는 Em코드를 시도해 본다. 된다. 알고 보니 연결이 쉬운 코드였다. 엄청난 발전이다. 시간은 자정이 훌쩍 넘었다.
이러다 언젠가는 정말 기타에게 위로받는 날이 올 것만 같다. 기타를 배우노라고, 배워서 홍대 버스킹을 하는 게 꿈이라고 했더니 “에이, 버스킹은 힘들 걸요” 하던 젊은 선생님의 얼굴도 떠오른다. 꿈은 이루지 못하면 꿈에 머물지만 이루고 나면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첫 수업에서 난생처음 기타 코드를 잡았지만 이제는 비행기를 공중에 띄웠다. 가능성은 늘 열어두어야 한다. 혹시 아나? 앞으로 5년쯤 지나 혹은 그 이후에 어떤 머리카락 희끗한 할머니가 최고령 홍대 버스킹으로 신문에 날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내 손으로 기타를 치며 비행기를 부르게 될지 몰랐으니까.
“떠~어~따 떠~어따 비~행~기~날~아~라~날~아~라~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우리 속담의 하나로 새겨 볼 만하다. 선무당은 '서툴고 미숙하여 굿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당'을 뜻한다. 의술에 서투른 사람이 치료해 준다고 하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게 되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 생각하기엔 다 잘 아는 것 같아도 실제 능력이 모자라 제구실을 할 수 없음을 모른다. 함부로 나서다가 오히려 큰일을 저지르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설픈 선무당이 작두를 타다가 발을 베었다’, ‘경제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그가 경제에 대해 아는 척을 하니 선무당이 따로 없다’ 등으로 쓰인다. 실제 우리 생활 주변에서 선무당을 종종 만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대체로 나서기를 좋아하고 때로는 노파심이란 변명을 전제로 깔기도 한다. 그런 탓에 젊은이에게 잔소리 많은 ‘꼰대’라는 비칭을 듣는다. 장기판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 중에 뺨을 맞으면서도 훈수꾼이 나서는 이유다. 골프연습장에 가면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신입 회원이 나타나면 엊그제 배우기 시작한 사람도 한 수를 거들고 싶어 안달한다. 넓게 생각하면 관심일 수 있으나 훈수를 듣는 초보자에게는 간단하지만 않다. 배움의 시작점에서 제대로 익혀야 기술을 빨리 연마할 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듯 최초에 잘못 배우거나 알게 되면 이를 다시 고치기가 쉽지 않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큰일은 아니어도 상대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남을 가르치거나 조언해줄 땐 신중히 해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해도 초보자는 진실을 알 수 없고 가르치는 사람의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기에 이야기를 경청한다.
최근에 필자는 어느 취미활동 연극단이 공연 준비하는 창극단에 배우로 캐스팅되어 연습하고 있다. 한 배역을 맡은 여인이 나름의 지식으로 다른 배우들에게 훈수를 자주 한다. 예를 들면 극 중에 대사를 할 때 함께 무대에 오른 대화 상대인 배우보다 관객을 보고 말을 하라고 수차례 조언한다. 순수 아마추어인 다른 배우들은 그 말에 따라 연습을 해왔다. 한 달 정도의 연습 기간이 지났으니 그런 태도가 몸에 뱄다. 필자는 연극을 한 경험이 몇 번 있어 관객을 보기도 하야야 하나 대화 내용에 따라 달라져야 함을 잘 안다. 무대에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를 보기보다 관객 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사를 하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더 좋은 공연을 위하여 연극 전문 교수를 초빙하여 연습을 지켜보게 하고 조언을 듣는 기회를 얻었다. 교수의 첫 번째 지적은 관객을 주로 향하여 대화하는 배우들의 시선 처리였다. 극 중 대화의 가장 바람직한 시선 처리는 앙상블이라 했다. 평소 대화하듯 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듯 서투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지도함으로써 다시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준 사례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좋은 재능기부다. 섣부른 지식을 바탕으로 하게 되면 이중 삼중의 시간 낭비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다시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준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남을 가르칠 땐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올바른지, 맞는 기법인지를 정확히 한 후에 알려주어야 한다. 제2 인생을 살아가는 시니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은 다시 되뇌어 볼 필요가 있지 싶다.
올 3월에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서둔 야학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과락 하는 게 몇 과목이나 되려나? 과락을 해도 2학기 등록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뭘 바라?' 시험결과를 앞둔 밤,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두려움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새벽 1시에 살그머니 컴퓨터를 켰다. 1학기 기말고사 성적을 확인해 보았다. 한국방송통신대 홈페이지를 열고 성적확인 경로를 타고 들어가서 눈은 컴퓨터 화면에 고정하고 숨은 멈추고 확인해봤다. 조심조심 중간 과제물 성적을 합산해봤다. 이럴 수가! 과락이 없었다. 야호! 좋아도 너무 좋았다.
예상했던 대로 어려운 과목인 '그래픽커뮤니케이션'과 중간고사 성적이 제일 좋지 않은 '뉴미디어론' 성적이 간신히 턱걸이했다. 특히 뉴미디어론은 60점이 나왔다. 1점만 모자랐어도 재수강해야 했는데, 86점 나온 '현대광고와 카피전략' 점수보다도 1점이 모자라지 않아서 간신히 통과한‘뉴미디어론’과목 60점이 더 반갑고 기쁘고 고마웠다. 아침에 일본에 사는 딸에게 보이스톡으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울고 말았다.
"딸아, 엄마 과락 없이 다 통과했어."
'엄마 이번에는 꼭 마쳐야 해'라며 그동안 격려해주던 딸애는 엄마를 마음껏 축하해주었다. 이게 제대로 된 상황인가? 엄마와 딸의 역할이 바뀐 듯한 이 상황이.
여섯 과목을 통과해야 하는데 1학기 내내 수요일 하루 스터디그룹에 끼어서 공부한 거 외에는 특별히 따로 공부 하지 않았다. 그러다 1학기 기말 고사 일인 6월 24일을 1주일 앞두고 벼락치기로 공부를 시작했다. 일단 공부는 엉덩이 힘으로 하는 거니까 일체 외출 금지 후 만만할 것 같은 '미디어와 스토리텔링'부터 방송을 들었다. 그런 후 교과서에 있는 연습문제를 차근차근 풀었다. 다음에는 흥미진진한 과목 '현대광고와 카피전략'을 같은 방법으로 차근차근 진도를 나갔다. 방송 들으랴 교과서 보랴, 문제 풀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섯 과목을 한꺼번에 머리에 넣으려니 참으로 바빴다. 여러 과목을 욕심내다 보면 모든 과목에서 F가 나오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두, 세 과목만이라도 건지려면 걔들만 집중적으로 하는 게 나은 게 아닐까?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허둥지둥하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6월 24일 시험 날이었다. 용어조차도 헷갈렸지만 문제를 풀어야 했다. 답이 확실하지 아니면 OMR 마킹을 하지 않고 확실한 문제만 마킹해 나갔다. 다른 학우들은 차츰차츰 다 나가고 드디어 나 혼자만 남아서 시험을 보고 있었다. 3교시 내내 이 상황이 반복되었다. 꽤 긴 시간을 시험감독 둘이서 수험생 하나를 놓고 감독하고 있었다. 끝까지 시험지를 붙잡고 있었다. 마킹이 빠진 것은 없나? 밀려서 마킹한 것은 없나? 차근차근 확인한 후 제출했다.
'가르치는 자는 배움을 게을리하면 아니 된다' 평택여고 시절 방학이 되면 공부할 계획부터 세웠다. 게으르면 안 되는 것이 컴퓨터, 영어, 과학교사이다. 자고 나면 어제의 정보는 구닥다리가 되니 쉬지 않고 업데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컴퓨터 연수를 600시간 이상 받게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젊은 남자들인 자기들도 계속 앉아있으려면 좀이 쑤시는데 나이 든 여교사가 늘 꿋꿋이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듣는 것을 보고 젊은 남교사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란다. 뒤에서 내 뒷담화 하는 줄 모르고 있다가 세월이 꽤 지난 후 듣게 되니 여간 재밌는 게 아니었다.
평택여고에서 워드 프로세서와 인터넷을 가르쳤고 1973년도에 최초로 컴퓨터를 배운 이후 2000년도에 워드 프로세서 1급 자격증을 땄고' 2002년도에는 컴퓨터 활용능력 2급 자격증을 땄다. 미디어 영상학과는 컴퓨터 접목학과이기 때문에 이번 시험에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슨 공부든지 해놓으면 언젠가는 나를 견인해주는 힘이 될 수 있음을 1학기 기말고사를 치른 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컴퓨터에 대한 기본소양이 없었으면 벼락치기로 1주일 공부해서 과락 없이 평균 C 학점 나오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방송대 미디어영상학과는 뉴미디어론, 그래픽커뮤니케이션, 현대광고와 카피전략, 영상제작입문, 미디어와 스토리텔링, 문화산업과 문화기획, 등의 수업이 진행된다. '1인 영상시대'인 요즘 트렌드에 잘 맞는 학과가 바로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이다. 구성된 학과목이 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여 다른 시니어 분들께도 공부하기를 권장하고 싶은 학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