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선소리 산타령 예능 보유자인 이창배를 사사하면서 국악을 시작해 1974년에 발표한 ‘회심곡’으로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경기민요와 12잡가의 대가 김영임(67). 이후 48년 동안 소리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수많은 공연 경험과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인 ‘김영임의 소리 孝’를 갖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로서 우리의 소리를 전수하는 데도 열중하고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성공과 세대를 뛰어넘은 트로트 붐 등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재, 우리 음악의 대표 주자 국악의 아이콘 중 하나인 김영임을 만나 국악인으로서의 삶, 소리의 존재 이유를 들어봤다.
김영임은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를 갖고 있는 드문 국악인이다. 그녀는 매년 5월이 되면 국내 최초의 국악 뮤지컬인 ‘김영임의 소리 孝’ 공연을 한다. 그러나 벌써 20여 년을 훌쩍 넘겨 계속되며 그녀의 브랜드가 된 ‘김영임의 소리 孝’이지만 올해는 볼 수 없다. 코로나19 때문이다.
“50여 년 동안 국악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공백 기간이 긴 건 처음이에요. 5월을 준비하고 시작하다 보면 1년이 금방 가곤 했는데…. 그런데 반대로 보면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저를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공허함이 좀 사그라지더라고요. 넘어진 김에 쉬었다가 간다고 하잖아요.”
트로트에 이어 국악 대세도 오지 않을까
여전히 그녀의 일상을 지켜주는 것은 다름 아닌 소리다.
“전라도 쪽에 ‘편’ 소리가 있듯 경기 소리에는 경기 잡가가 있어요. 장구 하나를 두고 6박 장단으로 부르는 소리인데, 열두 개를 다 하려면 네 시간 정도 걸려요.”
소리를 하고 싶어지면 혼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장구를 치며 경기 잡가 열두 바탕의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최근 화제인 TV의 트로트 프로그램들이 있다.
“요즘 트로트가 대세인데 제가 트로트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잖아요. 이미자, 은방울 자매, 문주란 씨 등등…. 학교 다닐 때 남진 씨 좋아했던 기억도 나고. ‘미스터 트롯’ 보면서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트로트를 잘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옛날에 KBS1 음악 프로그램 ‘빅 쇼’ 무대에서 이미자 씨의 ‘모정’과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를 불렀던 기억도 나고요.”
그녀는 “트로트가 대세이니 앞으로 국악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며 그런 시간이 조만간에 만들어져서 젊은이들에게 국악도 각광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소리는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김영임과 소리가 만난 것은 꽃다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만류로 못하다가 일 년 후 다시 했죠. 많이 반대했어요. 미국에 있는 오빠가 ‘노래는 조금만 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공부해라. 내가 지원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구렁텅이로 들어가도 헤쳐 나오겠다’고 말하고 소리를 하게 됐죠. 국악이 너무 좋았으니까요.”
민속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고, 스케줄 펑크를 낸 선배 대신 나간 방송 프로그램 PD에게 섭외된 그녀는 국악 드라마 주인공으로도 출연했다. 카메라맨들의 사랑을 받는 미녀 국악인으로서, 지금 시대로 보면 아이돌로서 활동을 하던 그녀는 레코드 회사 섭외를 받아 ‘회심곡’ 음반을 내면서 마침내 대박을 쳤다. 그녀는 그때의 자신을 “행운의 열쇠를 거머쥔 거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무조건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니라 했던가. 그런 삶 속에서 그녀의 상처는 점점 쌓여갔다.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의 상처가 컸어요. 그런 것도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일들이죠.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 배움으로 생각해요. 너무 빨리 이름을 얻어서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닐진대….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운 거죠.”
소리꾼의 삶과 한
소리꾼과 한(恨)을 떼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한은 우리 소리의 절절함과 곡절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단어이며, 소리꾼이 가진 한이 소리에 담김으로써 그 소리는 완성된다고도 한다. 어린 나이의 성공, 그로 인한 인간관계에서의 상처, 그리고 오랜 시집살이를 해야 했던 전통 사회 여성으로서의 한이 김영임에게는 있는 게 아닐까. 그녀의 남편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이상해 씨. 1979년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그들은 어느새 41년을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친정에서 일 년 살다가 큰딸이 두 살일 때 시집과 합쳤어요. 그때부터 시어른들과 지냈죠. 저는 장손의 큰며느리였어요. 그런데다 시집 분위기가 가부장적이어서 어른들은 장손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집안 경조사가 있으면 일을 나누지 않았어요. 무조건 큰아들 몫이었어요. 그런 분위기로 인해 우리 부부는 가족들한테 기대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열심히 개미같이 일해서 자수성가한 케이스가 됐어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한은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김영임 또한 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저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울컥해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텅 빈 것 같아요. 남편과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럴까, 내 마음을 내가 잘 다스리고 추슬러야겠죠. 저에겐 가야 할 길이 아직 있으니까요.”
그녀가 가야 할 길이란 물론 소리꾼의 길이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자신에 대해 ‘아직까지도 도전하며 뛰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인 그녀가 생각하는 다음 단계는 무형문화재로서의 길이다.
“윗세대 선생님들을 보면 여든이 넘어가면 기력이 안 돼서 노래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걸 미리 생각하면 너무 두렵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며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나이 먹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야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의욕이 사그라지지 않더군요.”
그녀가 지키는 부부의 세계
변치 않는 도전의식을 가지기로 결심한 김영임의 나이는 올해 예순일곱 살, 여덟 살 연상인 남편은 칠순 중반이다. 이제 부부 사이에 알콩달콩한 무언가가 있을 나이는 아니다.
“우리는 어른들과 함께 살아서 스킨십도 못하며 살았어요. 표현도 못하다 보니 그게 굳어졌죠. 기본적으로 남편은 나를 정말 끔찍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마음으로 들어와서 편안하게 위로해주는 게 없어요. 나이 먹어서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우습고요.”
그래도 생활의 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부드러워진 걸까. 그녀에게 이혼과 졸혼을 선택하는 황혼 부부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어봤다.
“사실 우리 부부도 이혼할 뻔했어요. 그런데 이혼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자도 여자도 초라해지고…. 그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서로가 좀 절충을 해야 하고, 깨지도록 싸워도 끝까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남편이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래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산 세월이 있잖아요. 해답은 대화에 있다고 봐요. 상대를 존중하는 언행도 굉장히 중요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요. 행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죠. 행복하려면 건강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아침 식사는 꼭 내 손으로 만들어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가며 더해진 깊이
김영임이 특히 건강에 신경 쓰게 된 계기가 있다. 암이었다.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때였으니 40대 후반쯤의 일이었죠. 안면마비가 왔고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고 자궁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일 년에 두 번이나 했어요. 특히 갑상선은 성대 가까이 있어 수술이 여덟 시간이나 걸렸죠.”
어쩌면 소리꾼으로서의 삶을 통째로 잃을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그러나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녀는 되려 수술 후에 너무 감사했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수술 전보다 더 잘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역경, 그리고 굽이굽이 흘려보낸 세월이 그녀의 목소리에 깊이를 더했다.
“20대 때 제가 부른 노래를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예요. 서른 조금 지나면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고… 지금도 20대 시절의 키는 살아 있어요. 그때 불렀던 ‘정선 아리랑’을 그대로 부르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젊은 시절에 대명창들의 노래를 들으면 이해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들의 목소리는 곰삭아서 따라갈 수 없는 소리였다.
“예전에는 못했던 단락 단락 노래의 꾸밈새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되더군요. 이제야 (명창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리는 운명, 노래는 그녀의 멘토
김영임은 살면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첫 번째로 지금까지 놓지 않은 소리를 꼽았다.
“소리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 내 할 탓이다 싶고요. 인간관계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사람도 좋게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두 번째는 가정을 잘 지킨 거죠.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 새끼들은 먹인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거죠.”
그녀는 살면서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두 번이나 어겼다. 소리를 하겠다는 것과 반대한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두 가지 일에서 어머니와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노래하면서 잘못 사는 인생은 안 살겠다고 했죠. 그리고 이 남자와 결혼한 뒤 친정에 보따리 싸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둘 다 지켰죠.”
그녀가 어머니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은 소리의 힘이기도 했다. 50여 년 가까이 만들어진 김영임의 소리는 그녀의 인생과 일맥상통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해왔다. 노래는 그녀의 멘토였고 그녀가 잘못 가려 할 때 붙잡아주는 버팀목이었다. 특히 김영임을 대표하는 노래 ‘회심곡’에 담긴 효에 관한 애절한 가사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그녀를 느끼게 해준다.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애지중지 기른 정을
사람마다 부모 은공 생각하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회심곡’ 가사 중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내가 마음 쓰는 행동이 틀리면 노래를 버려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럴 수만은 없었죠. 부모한테 후회 없이 효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에요.”
김영임의 소리, 존재의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가 될 것
앞으로의 일에 대해 큰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다는 김영임은 공연을 준비하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결실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티 내고 과시하는 게 싫다는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김영임답게 살아가면서 ‘저 여자 지혜롭게 잘 맞춰서 사는 여자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기에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 소리는 인정할 소리다’라는 말을 듣고 싶죠. 최고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걸 남기고 싶어요. 이 소망이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건 아직 제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