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소설가 요나스 요나손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그 유머러스한 제목에 궁금증을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무대는 저마다 사연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수많은 서랍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창문을 막 넘으려는 100세 노인의 앙상한 다리를 비추고, 제 할 일로 부산한 4명의 배우가 등장하며 시끌벅적하게 막이 올랐다. 길고 긴 100년의 숨 가쁜 세월과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 5명의 배우가 시대를 나눠 주인공 알란을 연기했다. 조실부모하고 배움도 짧지만 알란은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각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는 등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혁혁하게 등장한다.
작품 속 알란은 세상 피곤한 인생 수레를 탄 듯 고단한 일들을 맞닥뜨리게 되지만, 매 순간 지혜의 기근을 겪지 않는 인물이다. 다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월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따끈하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에, 제아무리 장수시대라 하더라도 숱한 고비를 겪은 그가 100세를 누린 비결이 궁금해졌다. 1905년 출생해 2005년까지, 100세를 맞이한 이 현명하고 바쁜 개구쟁이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은 어느 귀퉁이에 숨어 있는 것일까?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어머니가 남긴 이 말을 평생 빼지 않는 반지처럼 간직한 것이 알란의 장수 비결 일등 공신으로 보인다. 웬만한 일에는 불평불만 않고 순응하는 삶이랄까? 명심보감에도 ‘세상 만물이 순리로 찾아오거든 거부하지 말고, 세상 만물이 가버렸으면 아쉬워 뒤좇지 말라’고 나와 있다. 그 이치를 깨달은 것을 보니 어쩜 알란의 어머니도 공자를 공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생각할수록 만사는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뭐든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둬야 하지. 왜냐하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거의 항상 그래.”
비를 막겠다고 술잔에 우산을 씌우는 게 우리네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알란은 자신에게 벌어진 수많은 날벼락 같은 일들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스르르 빠져나갔는지도 모른다.
노년기 알란은 “누울 수 있는 침대, 술 한 잔, 식사 한 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100세 노인이 녹여낸 수수한 인생 철학이다. 듣고 보니 그 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그 외에 더 필요한 게 있을까? 먹을 것과 잘 곳, 거기에 좋은 벗까지 있다면 인생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욕심을 내지 않으니 조바심도 둥지를 틀지 않는다. 장수한 알란에게 너무 많은 것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조급해하지 않는다. 모두가 가버리고 홀로 남았지만 나는 어디론가 다시 떠난다.”
100세 알란의 발걸음은 조금 느려졌지만 도전정신은 여전히 퍼덕인다. 일하는 노인이 장수한다는 건 평범한 이야기지만 마음에 든다. 평생 일하며 도전해온 삶 또한 알란의 장수 비결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정치적인 이유로 거세를 당했지만 사랑까지 끊어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만다와의 결혼 덕분에 거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 나이 때문에 사랑에 뒷걸음질 치는 것은 알란답지 않다. 격동의 세월을 사느라 만나지 못했던 사랑을 이제야 품은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이든 잔잔한 사랑이든 사랑은 꽃그늘이다. 나이를 셈하지 않고 사랑을 꿰찬 것도 그만의 장수 비법인 듯하다.
연극이 끝났다. 배우들이 남기고 간 땀 냄새 끄트머리엔 알란이 달려있었다. 이런저런 방법과 통찰로 건강한 100세를 기록한 알란이 결국 마음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우리는 모두 자라나고 또 늙어 가는 법이지. 어렸을 때는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
유쾌한 알란은 “백 살이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야”라며 밑줄까지 그어준다. 마치 “아직도 사과는 다 익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꿈에 대한 열망 하나로 89세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을 또 입학하는 우제봉(禹濟鳳·89) 씨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도전한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삶의 관록이 묻어난다. 1남 2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어머니로서의 삶을 완성한 그녀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격동기를 지나온 여자의 삶과 그녀가 이루려 하는 꿈에 대해 들어봤다.
“배움에는 때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또박또박 말한다. 89세.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수한 나이다. 우제봉 씨의 나이가 놀라운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향한 뜨거운 열의가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숙명여자대학교 원격대학원 실버비즈니스학과를 졸업하는 그녀는 우수논문상까지 탈 정도로, 젊은 사람들과의 공부 대결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열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겸손하고 순종적인 여자
5년 전 우 씨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그녀는 지금도 죄의식이 느껴진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떠난 것 같아 부끄럽다 말한다. 부끄러움이라고? 젊은 세대라면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죄의식을 느끼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다. 누구 하나 떠나보내면 다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날카로운 자로 잰 듯 나누고 재단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섞이고 묶이던 예(禮)의 시대가 거기에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에도 잉꼬부부니 애처가니 공처가니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로 참 사랑했죠. 남편은 절 존중해주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어요.”
우제봉 씨의 기억은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의 집안은 소위 있는 집안이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가문의 망신이라고 만류하며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 시청 문화과에 이력서를 냈고 취직이 됐다.
그녀가 시청에서 근무하다 상사의 심부름으로 다방을 들렀을 때의 일이다.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그 다방에는 미래에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남편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대시를 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더니 남편이 그녀를 막아서더란다. 그리고 자신과 교제하자고 했다. 요즘 같으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일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에게 구애할 때 무데뽀로 밀어붙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시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복학하기 전까지 만날 그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우제봉 씨는 심부름을 갈 때마다 그를 만났다. 솔직히 그렇게 다짜고짜 행동하는 남편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승낙하면 만나보겠다고 쪽지를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설마 부모님까지 동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짜고짜 시작된 연애, 그리고 결혼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상식을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남편의 고모와 가족들이 우르르 와서 그녀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기질이 화끈한 집안이었다. 다음 날에는 아예 시아버지가 만나자며 찾아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사주를 봐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주부터 보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러운 연애, 더구나 처음 하는 연애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은 것은 그의 인상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이순재를 닮았다는 남편은 이번에는 다짜고짜 그녀의 집까지 따라와서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의외로 남편의 그런 행동을 친정에서는 좋게 봤다. 패기 있고 자신 있는 모습이라는 평가였다. 이 또한 요즘 같으면 무단 침입으로 걸릴 일이었다. 과연 그 시절의 낭만이란 드라마틱한 사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힘이었던 듯싶다.
“제가 살던 시집이 정릉 기와집이었어요. 지금은 성북 구립 유치원이 됐어요. 거기서 남편과 70년을 살았죠.”
남편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성실하고 강인한 여자
“결혼하니 주위에서 쟤 뭣도 모르고 결혼했네, 사흘도 못 살고 달아날 거라고들 얘기했죠.”
그러나 작고 단아한 이미지이지만 그녀의 심지는 굳고 두터웠다. 스스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니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견뎠던 것 같다.
집안일뿐만 아니라 시부모가 낳은 늦둥이인 시동생도 키워야 했다.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녀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그녀를 많이 챙겨줬다. 사실 우 씨는 쌀도 씻을 줄 몰랐다. 요리하는 법도 시집에 와서 배워야 했다. 여느 시부모라면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며 한심해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도 그녀가 마냥 예뻤던 듯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면 밤 열두 시까지 방에 앉지 못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어도 웃으면서 시집살이를 할 수 있었다.
우 씨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인성과 지성이 함께 어우러진 데서 나온 게 아닐까. 그녀는 자주 ‘내가 여기서 행동 잘못하면 타인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명문학교 출신에 덕망 있는 집안의 가풍이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강인한 태도야말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이제야 자신만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꿈, 패션디자이너
“내가 공부하기엔 진짜 고령이지.(웃음) 입학할 때도 시선들이 만만치 않았어. 방송국에서도 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남편을 여의고 평창동 예능교회 봉사활동을 할 때만 가끔씩 밖에 나오던 우 씨를 부추긴 것은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은 “엄마 좋아하는 일은 공부잖아”,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가장 보기 좋다”며 어머니가 늦게라도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꿈, 그것은 바로 패션디자이너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부터 패션디자이너 꿈을 갖고 있었고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것을 남편도 반대했고 시댁 식구들도 반대했다.
“그때 시댁에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어요. 우리 딸들은 학원도 못 다니고 대학교를 갔죠.”
너무나도 이루고 싶었던 꿈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여자. 경력 단절의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벽은 높았고 그녀는 오를 힘이 없었다. TV에서 앙드레 김을 볼 때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미련이 몰려오곤 했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은 필요
자신이 놓친 꿈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숙명여대에 전화를 했을 때 그날이 마침 신청 마감날이었다. 그것조차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졸업을 위해 논문까지 쓰는 단계로까지 흘러갔다.
“학기 중에 교통사고도 나고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이 나이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시험을 봐야겠다 싶어서 김숙응 교수님에게 말했더니 ‘아깝게 왜 시험을 보느냐, 논문을 써야지’ 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논문을 쓰면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재촉했고 교수에게도 재촉했다. 빨리 졸업한 후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후회들을 던져버리고 다시 출발선에 선 그녀에게 공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을 마땅히 써야 하는 당위성 같았다. 평창동 예능교회에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그녀는 패션을 본격적으로 배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노리는 분야는 실버를 위한 패션 사업.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론이 필요했고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집에서 버리는 옷들을 리폼해 선물로 주던 사람이다. 이미 실전을 충분히 익히고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었다. 그녀는 최근 이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으며 운좋게 합격을 했다.
90대 패션디자이너의 꿈
패션디자이너가 되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옷을 만들어서 팔아야죠. 돈을 벌어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돈을 버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촉’을 믿고 패션디자인 길을 걸어갈 의지로 불타고 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의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이 필요해요. 젊은 사람들 것은 이미 많으니까요. 시니어가 젊은 사람 옷 입으면 안 어울리거든요. 나는 그런 옷을 사면 다 고쳐서 입어요. 입으면 제 몸에 안 맞으니까요.”
젊은 취향의 옷만 있지 시니어 몸의 특색을 살린 옷은 없다는 그녀의 진단은 정확하다. 90대 패션디자이너. 듣기만 해도 경이롭다.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게 아직 홍보가 덜 됐어요. 그래서 내가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웃음) 그래도 늦으면 늦는 대로, 내 스타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입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이죠. 나이에 맞는 패션은 없잖아요.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시니어 옷이 아니라 몸매나 취향에 맞게 시니어가 좋아할 만한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야무진 꿈은 어떤 결실을 가져오게 될까?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현실로 만든 그녀이기에, 그 어떤 꿈보다도 젊게 빛나는 그녀의 꿈이 기대가 된다.
2017년도 저물어가는 12월 10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우연히 정미조 콘서트를 관람 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몇 명에게 특별히 연말보너스 처럼 돌아온 선물이었다. 오래된 서재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꺼내 든 책 한 권, 책장을 넘기다 책갈피처럼 끼워진 빛바랜 네잎클로버나 꽃잎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빛바랜 책갈피에 우러나오는 은은한 향기처럼 정미조는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콘서트는 정미조가 1년 반 만에 발표하는 새 앨범을 기념하는 무대다. 그는 45년의 긴 세월 동안 가수에서 화가로, 다시 가수로 돌아오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걸어왔다. 정미조는 작년, 37년 만에 가요계에 극적으로 복귀하며 많은 화제를 만들었다. 컴백 앨범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청취의 환희” “결코 세월이나 명성에 빚지지 않은 앨범” 등의 절찬을 받았다.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사랑의 계절’ 등 주옥같은 히트 곡을 줄줄이 쏟아냈다. 1972년 한국 가요사에 불멸(不滅)로 남은 ‘개여울’을 발표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돌연 가요계 은퇴를 선언한 1979년까지 7년간은 정미조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의 ‘마이 웨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번 공연엔 12살 ‘제주 소년’ 오연준이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오연준은 정미조의 새 앨범에 수록된 ‘바람의 이야기’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 오연준 소년 단독으로 크리마스 캐럴을 불러 많은 갈채와 사랑을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네 명이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18시 공연이라 저녁을 먹지 않고 관람했기에 '오삼불고기'를 시켜 뒤풀이 삼아 막걸리잔을 돌렸다. 건조한 공연장으로 컬컬했던 목을 추기면서 공연에 관한 뒷담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세월만큼 원숙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혔던 ‘개여울’은 김소월 시에 곡을 입혀 부른 노래로 유명하다. 개여울은 어떤 여울일까? 누군가 궁금해 했다. 개여울은 명사로써 개울에 물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물살이 빠른 곳으로 개울의 여울목이란 뜻이기도 하다. 노래 가사 중에 ‘가도’는 ‘가기는 가도’의 줄인 말로 개여울가에 앉아 여울져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연인인 그가 간다는 허전함을 애써 마음 쓰지 않으려는 애틋한 마음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어린시절 여울에서 돌수제비를 날리던 기억도 어렴풋 떠오른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음악을 접고 갑자기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난 정미조의 삶이
과연 성공적이고 좋았던 삶이었을까? 하는 논제를 가지고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도 가졌다. 의견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꽤나 의미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물을 판다’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음악 말고도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선택한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학을 떠나 새로운 배움을 통해 다시 돌아와 대학에서 당당하게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로 자리매김한 삶이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는 고희[古稀] 가까운 나이에 잊고(?) 지내왔던 음악계로 컴백했다. 작년에는 신곡 귀로(歸路)를 발표하면서 앨범도 내고, 이렇듯 콘서트를 통해서 음악적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모습이야말로 경이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귀로(歸路)의 노랫말과 영상은 정미조의 해석처럼 ‘담벼락에 기대 울던 작은 아이’ 같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울컥한다는 의미에 공감이 간다.
중년의 세월을 묵묵히 이고 가는 우리가 그를 보면서 용기를 북돋을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홀짝홀짝 막걸리 네 병을 해치우고 밥 두 공기를 볶아서 마무리 하면서 겨울 밤의 우리들만의 파티는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만 휭 하니 몰려와 취기를 건드린다.
“어린 꿈이 놀던 들판을 지나 아지랑이 피던 동산을 넘어 나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네~”…
수십 년 전 그들은 알았을까? 호롱불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했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말이다. 교육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들을 매일 밤 가르치고 보듬었더니 사회의 귀한 일꾼으로 자라났다. 20대 초반 야학 선생님의 노력은 교육을 넘어선 사랑, 그 자체였다. 이와 더불어 스승을 향한 야학생들의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서둔야학.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현장에 찾아갔다. 짝사랑하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니 새록새록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서둔야학, 서울대 농대생의 열정으로 기억돼
‘야학’이 뭔지 모르는 젊은이도 꽤 될 것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농촌을 비롯해 어려운 지역의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치던 곳이 야학(夜學)이다. 서둔야학도 당연히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이던 1926년,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국어를 지켜내고자 생겨났다. 수원 서둔리에 설립된 서둔야학은 야학 선생님과 야학생 1000여 명을 배출해냈다. 이곳에서의 배움을 계기로 더 높은 실력을 쌓아 업적을 남긴 이들도 여럿이라고. 1980년 당시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교를 결정하면서 공식적인 서둔야학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83년 잠시나마 야학으로서 기운을 내는가 싶더니 금새 사그라졌다. 1990년에는 야학 선생님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서둔야학회를 조직하고 소식지 발간과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홈커밍데이 행사도 명맥이 멈췄다 2011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좀 더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야학당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서울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전 서울대학교 농업대학교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기 청년문화 창작소’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문화 시설로 탈바꿈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 공간, 문화 한마당, 다양한 문화 지식들을 향유하고 체험할 수 있다. 오래전 서울대 농대의 원예학관으로 쓰였기에 옛 강의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서둔야학당으로 가기 전 모임 장소. 하나둘 서둔야학을 빛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여들고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맞이한다. 모두의 얼굴에 만발하는 웃음이 영락없는 야학 시절 모습 그대로다. 그 사이 많이 변했는지 이름을 알고 나서야 ‘그때 그 선생님이지, 그 학생이지’ 하며 기억을 되살려내는 모습이 정겹다.
황건식 서둔야학회 회장이자 전 서둔야학 교장은 인사말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서둔야학이 걸어온 길에 대해 입을 열었다.
“1963년, 제가 서둔야학에 들어왔을 때는 초등학교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문맹자 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해방 후 교육을 못 받아 글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65년에는 중등 과정을 상설했습니다. 서둔야학의 순수한 마음이 정치적 물결에 희생된 것이 사실이죠. 군부독재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죠. 젊은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야학 선생님과 학생들의 소개가 끝난 후 초대가수 3대 뚜아에무아인 김은영씨와 함께 추억의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야학당 시절, 밤 10시쯤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들이 목장길과 나무숲을 지나 매일 집을 바래다줬다고. 그때마다 한국의 가곡이며 미국 민요며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곤 했다. 동년기자 박애란씨도 이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다.
“우리들이 야학에서 공부한 것은 공부보다 사랑과 관심이었어요. 부모들은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죠. 아이들한테 사랑? 관심? 이런 것은 사전에 나오는 것이었죠. 야학에서 선생님들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사랑해주셨어요. 그리고 집으로 갈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데려다주셨어요. 위험하다고요.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금발의 제니’, ‘매기의 추억’이라든가 이런 음악이 나오면 어김없이 눈물이 나요.”
서둔야학교의 홈커밍데이
가을 소풍처럼 나무 밭에 모여앉아 도시락을 까먹은 후, 서둔야학교로 향했다. 1950년대 서울대학교 주위 교회나 기관의 건물에서 야학교를 열다가 1965년 야학 선생님들이 돈을 모아 교내 연습림 근처에 대지를 매입해 스스로 건물을 지었다. 당시 뜻이 있던 교수에게 지원을 받고 일일주점으로 맥주를 팔아 돈을 모았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넘어가면서 인적이 드물어진 서둔야학당 앞에는 ‘서둔야학 유적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잠겨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옛 야학당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해 전, 황건식 회장이 사비를 들여 야학당을 복원한 덕분에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야학당 사람들을 맞이했다. 비록 풀이 높이 자라고 사람이 찾아왔던 흔적은 없지만 말이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니 상량문이 시절을 기억해내듯 적혀 있었다.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교가도 같이 불러보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황건식 회장님에 이어 내년부터 서둔야학회 회장을 맡게 되는 김기옥씨는 서둔야학당에 대해 “우리가 정규 교과과정에 의해서 제대로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성교육 차원에서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졸업생들이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이곳을 나온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돈 걱정 없이 사는 방법은 번만큼만 쓰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시니어의 사회은퇴 전후의 생활은 전혀 딴판입니다. 은퇴 전에는 돈이 부족하더라도 나중에 보충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수입은 줄고 늘리기 매우 어렵습니다. 소비지출은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생활주변에서 지나치기 쉬운 낭비를 줄여야 해답이 나옵니다.
건강관리비
누구든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소망합니다. 건강하면 병원이나 약국을 찾을 필요가 없고 건강식품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건강관리비를 확 줄일 수 있습니다. 건강하려면 섭생도 중요하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바람이 부는 운동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산행·마라톤·수영·골프 등 체력과 취미에 맞는 운동을 하면 됩니다. 운동을 쉬지 않고 하여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마음을 다잡이야 운동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고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걱정하면 운동하러가기 싫어집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비오면 우산을 들고, 눈이 쏟아지면 털모자 하나 머리에 쓰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먼동이 트면 집을 나서 아침 산책을 하면 하루가 상쾌합니다. 아침 산책길은 맑은 날도 이슬이 내려서 평지보다 미끄럽습니다. 산에서 넘어지면 대형 골절사고가 납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동호인을 즐겁게 사귀면 운동을 지속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친구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운동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산악회에 참여하여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봄과 가을에는 지방 원거리를 찾고 가끔 해외원정 산행을 하면 효과는 더욱 높아집니다. 산행이 어려우면 걷기 쉬운 둘레길을 찾고, 더 낮은 자락길을 걸어도 좋습니다. 신체조건에 맞춰 무리하지 않도록 걸으면 건강에 유익합니다. 햇볕 쪼이고 맑은 공기 마시면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으면 됩니다. 누구나 만보를 걷을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에 동참하면 건강유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재산기부·재능기부·노력봉사 중 자기처지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체험을 후세대에 전하는 숭고한 일입니다. 참가자들과 함께 어울려서 마음의 평온을 얻고 나눔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회교육에 참여하여 새로운 배움을 익히고, 남녀노소 세대들과 어울리는 일도 건강유지에 큰 보탬이 됩니다. 자기완성을 위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차량유지비
자동차는 편리한 교통수단입니다. 하지만 차량유지비를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를 구입할 때나 유류가격이 상승할 때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잊고 생활합니다. 사회은퇴자는 차를 사용할 필요가 많이 줄어듭니다. 가끔 운전석에 앉으면 차운전이 낯설게 느껴지고 행동이 굼떠져 사고를 내기 쉽습니다. 차는 주차장에서 먼지만 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전을 그만 둬야하는 이유입니다. 차가 보이면 차를 사용하고 싶고 걷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차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야 대책이 나옵니다.
자원봉사활동과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 굳이 자동차를 이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로혼잡에 고생하지 않고 약속시간을 잘 지킬 수 있는 전철과 버스 대중교통 이용이 최선입니다. ‘건강하려면 불필요한 차를 없애자.’ 차 없애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주위의 눈을 의식하고 차의 편리함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입니다. 차는 편리하게 이용하되 불필요한 경우에는 과감하게 없애야 합니다. 이를 실행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자동차를 없애면 유류비·수리비·세금·보험료 등 차량유지비가 모두 없어집니다. 새 차 구입하는 목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로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없어집니다. 비가 오나 눈이 내리거나 교통사고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이 옵니다. 몸이 건강해지면 건강관리비도 확 줄어듭니다. 한가한 때 전철에 앉아서 책을 읽고, 버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전철역까지 왕복 걷기를 자주 하고 운동량이 부족하면 다음 날 꼭 보충하는 습관을 기르면 더욱 좋습니다.
허망한 투자
세상에 공짜가 없는 줄 알면서도 고수익·고배당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섣불리 투자하였다가 재산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보다 판단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쇠퇴하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하루속히 잊어야 합니다. 자랑해서도 아니 됩니다. 후세대에 자리를 비켜주고 물러나야 합니다. 유능한 후계자를 도우면서 여유를 가져야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환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소비를 희생하면서 장기투자를 헤서도 아니 됩니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관리할 수 없습니다. ‘현금만이 나의 것’ 입니다.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차입금이 있으면 빨리 정리하여야 합니다. 현금수입이 없는 부동산 담보 대출이라면 당장 큰 부담입니다. 이른바 흑자도산입니다. 부동산이 커지면 나중에 자식들의 상속분쟁만 키웁니다. 부동산·장기채권 대신 현금을 확보하여 지기의 소비를 희생하지 않아야 합니다.
후세대 관리
시니어 살림살이는 ‘현금흐름 수지균형’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금이 부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 전반부는 증기기관차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앞만 보고 열심히 살면서 수입을 늘려 재산을 키웠습니다.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선 후반부는 빈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족해서도 아니 되지만 남길 수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신은 알뜰하게 살았으나 자식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주위에 많습니다.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면 자신과 자식 모두에게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이를 거절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먹는 것보다 먹이를 구하는 훈련을 시키라’라고 흔히 말합니다. 자식들에게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무조건 자식을 도와주는 것보다 교훈도 함께 전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기업에서 인사담당 임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이상철(57세)씨는 전 직장 동료들끼리 월 1회 정기적으로 모이는 OB(Old Boys) 모임에 가입했다. 그가 가입한 모임은 매월 특정한 주제에 대해 2시간 정도 강의를 들은 후 저녁을 먹으며 토론하는 학습모임이다. 이번 달 모임의 주제는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서의 생애설계’였다. 이번 강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과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사는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일생을 하루에 비유해 설명했다.
새롭게 생겨난 시간 ‘서드에이지(Third Age)’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인생시계를 4등분하면 오전 6시에 해당하는 나이는 19세다. 오전 6시는 기상시간에 해당하며 19세의 나이는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나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오후 6시가 되면 퇴근시간이다. 인생시계에서 오후 6시, 즉 퇴근시간은 퇴직시기를 의미한다. 조퇴하는 사람도 있고 야근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오후 6시는 공식적인 퇴근시간, 즉 퇴직시기다. 하지만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시간의 상징은 변한다.
오전 6시 기상시간은 25세가 된다. 그리고 낮 12시는 50세에 해당하고 퇴근시간은 57세에서 75세로 바뀐다. 100세 시대의 인생시계에 의하면 이상철씨는 현재 퇴근시간이 아니라 점심시간 직후에 있다. 100세 시대의 장수 보너스로 인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시간이 바로 50세부터 75세까지의 시간이다.
노년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서드에이지(Third Age), 즉 ‘제3의 연령기’라고 부른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 박사는 서드에이지를 ‘창조적 불확실성의 시기’라고 하면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비유했다. 신대륙은 미지의 세계다. 그리고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회가 넘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부모님이나 선배들과는 다른 삶을 원했던 이상철씨는 서드에이지를 제2차 성장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역할에 충실한 삶에서 자아실현의 삶으로
퍼스트에이지(First Age)가 배움의 시기이고 세컨드에이지(Second Age)가 가족을 위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시기라고 한다면 서드에이지(Third Age)는 자아실현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시기다.
이상철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세컨드에이지를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남은 인생은 좀 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삶을 살며 성장해온 시기를 ‘제1차 성장의 시기’라고 하면 자기 중심의 삶을 살면서 성장하는 삶은 ‘제2차 성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로 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작업은 하고 싶은 일들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자료1] 같은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구분해 정리해보았다.
이상철씨는 이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자기 중심의 삶을 위해 ‘꼭 하고 싶은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좋지만 굳이 안 해도 상관없는 ‘하면 좋은 것’의 항목을 다음과 같이([자료2] 참조) 채웠다.
이상철씨는 직장에 있는 동안 인사업무를 하면서 조금씩 공부를 한 심리상담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본인과 상담을 한 후배나 동료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심리상담소를 열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상담사를 인생 2막의 직업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아직은 자녀들이 독립 전이고 국민연금수령 시점도 6년이나 남아 기본소득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지만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히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상담심리학과 교수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심리상담사의 길에 대해 자문했다.
제2차 성장을 위한 재무 포트폴리오 변경
이상철씨가 심리상담소를 개소하기 위한 자격과 경험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략 5년의 시간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포함한 교육비가 약 5000만원 정도 소요된다. 그리고 심리상담을 진행할 사무실이 필요하다. 당장 돈이 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대신 새로운 직업을 위한 공부를 선택한 이상철씨는 가계의 재무구조와 소비구조를 바꿔야만 했다.
그는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를 매각하고 좀 더 외곽의 아파트를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파트를 매각한 잔액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임대를 하기로 했다. 오피스텔의 임대료 수입은 현재의 생활비를 보조하고 향후에는 심리상담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외 자녀독립 지원자금으로 준비해둔 자금의 일부는 본인의 교육비와 창업준비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자녀들에게 미리 뜻을 밝혔다. 그 대신 퇴직 후 건강을 위해 신경 쓰기로 한 운동 증 비용이 많이 드는 골프를 줄이고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또자동차를 통해 하는 여행보다는 자전거를 이용한 여행을 더 많이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50대 퇴직자들이 제1차 성장기의 열매를 어떻게 잘 관리할까를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이상철씨는 100세 인생이 선물한 보너스의 시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다시 한 번 더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1964년 가을이었다. 그때는 서둔야학교가 새 교실을 짓기 전이어서 계사를 빌려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토담에 깜박깜박하는 호롱불을 켜두고 바닥에는 멍석을 깔고 수업을 했으나 그곳은 우리의 유일한 배움의 보금자리였다. 선생님들은 열심히 가르쳐주셨고 학생들은 진지하게 눈과 귀를 모았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날 2교시는 최언호 선생님이 과학 수업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조용했지만 몇몇 남자 선배들이 장난을 치고 잡담을 하는 등 산만했다.
‘아이 시끄러워. 도대체 왜들 저러지? 저럴 거면 학교에는 왜 왔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게. 참 속상해 죽겠네….’
선생님께 민망해서 필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할 뿐 그때만 해도 가장 어린 나이의 필자가 남자 선배들의 태도를 제지할 방법은 없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해요.”라며 몇 번 타이르시던 최 선생님이 어디선가 가져오신 회초리를 오른손에 잡으신 후 당신의 왼쪽 팔목을 사정없이 때렸다.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니 내가 맞아야 한다.”
졸지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우리들은 깜짝 놀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벌떡 일어나 교단으로 달려 나간 학생이 있었다. 선배 민자 언니였다. 언니가 회초리를 빼앗았지만 이미 선생님의 왼쪽 팔뚝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선생님, 이제 제발 그만하셔요.”
회초리를 뺏기지 않으려는 선생님은 우리들이 모두 엉엉 울면서 애원하니까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언니에게 회초리를 내어주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때아닌 소동에 옆 반에서 수업 중이던 김 선생님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셨다. 아마도 최 선생님은 부어오른 팔의 통증으로 며칠 고생하셨을 것이다. 지금도 필자의 기억 창고에는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못 들던 아이들과 선생님의 부풀어 오른 팔뚝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최 선생님을 다시 뵌 것은 필자가 농대 김현욱 교수실에서 근무하던 1977년도였다. 서울여대 식품과학과 교수님으로 계셨던 최 선생님이 김 교수님께 볼일이 있어 방문하셨던 것이다.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필자는 대번에 선생님을 알아봤고 선생님도 필자를 금방 알아보셨다.
“어머! 선생님!”
“너 애란이 아냐?”
선생님은 반가워서 필자를 두 팔로 ‘덥석’ 안아주려고 다가오시다가 새삼스럽게 물으셨다.
“그런데 너 몇 살이지?”
“스물일곱 살이요.”
그러자 선생님은 앞으로 내민 팔을 재빨리 뒤로 가져가셨다. 선생님 마음속에서는 필자가 여전히 열네 살 어린 소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를 반가워서 한번 안아주기로서니 무슨 큰 흉이 될까마는 최 선생님은 그렇게도 마음이 여리신 분이었다.
서둔야학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들판을 지나서 가다 보면 5월의 훈풍이 필자의 볼을 간지럽혔고 넓은 들판의 보리가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보리밭 한가운데서 종달새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려왔다 까불대며 명랑하게 지저귀었고, 멀리서 구슬프게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는 필자의 가슴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그 소리 듣기를 너무 좋아했던 필자는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여 한참 듣다가 다시 발걸음을 떼곤 했다.
논둑길 옆에는 씀바귀와 냉이의 작고 하얀 꽃이 무리 져서 피어 있었다. 토끼풀의 소담스런 하얀 꽃도 귀여운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토끼풀 꽃을 줄기째 따서 꽃반지를 만들어 끼우기도 하며 학교 가는 길은 마냥 즐거웠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가장 위대한 스승, 자연은 필자가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해줬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직 어린 시절의 딸애가 그림을 그리며 동생의 눈은 커다란 쌍꺼풀에 왕방울만하게 그리면서 엄마 눈을 그릴 때는 왜 그렇게도 인색한지 볼펜으로 점만 한 번‘콕’찍어놓으면 그만이었다.
대개는 눈이 큰 사람들이 겁이 많다는데 필자는 작은 눈인데도 겁이 많았다. 일단 도착하면 집보다도 더 포근하고 정다운 야학교였지만 사방이 어둑해질 때는 숲길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 질색이었다. 그래서 매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세상의 온갖 유령과 귀신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필자를 괴롭힐 것 같았다.
‘아유 무서워, 언제 다 가지…’
부지런히 걸어도 야학교 가는 길은 매번 까마득했다. 초긴장이 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무서운 상상을 떨쳐버리려 애를 쓰며 급히 걸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뒤에서 사람이 ‘쓰윽’ 나타났다. 순간 너무 놀랐던 필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황급히 필자를 붙잡으며 “애란아, 나야 나. 괜찮니? 응? 괜찮아?” 하며 누군가 다급히 소리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알고 보니 선배인 옥희 언니였다. 필자가 오는 것을 본 언니가 슬그머니 장난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얼굴이 하얘지며 쓰러지려고 해서 오히려 언니가 더 놀라며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한 글자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금방 뭐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산길을 마구 달려가면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지. 기억나니?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을 켜놓았었지.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놓고….”
최근에 야학교 모임에서 만난 민자 언니의 회상이다.
그랬다. 야학교는 이래저래 뛰어서 가야만 했다. 무서워서 또 빨리 공부가 하고 싶어서(공부에 신물이 난 지금 애들에게 상상이 되는 얘길까?)였다. 그리고 빨리 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더 있었다.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미국 민요 ‘산골짝의 등불’의 가사인데 농대 연습림 끝자락에 있었던 서둔야학교는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면 그 가사 그대로였다. 저 멀리 아련히 등잔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있으면 필자 가슴에 뽀얀 봄 안개 같은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선생님들이 미리 호롱불을 밝혀놓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가방이 없어 넓은 소창보자기에 책과 연필 몇 자루 담긴 필통을 넣고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다녔던 필자는 야학교에 갈 때마다 뛰었다. 선생님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길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어제도 만났고 조금 후면 보게 될 분들인데도 그새를 못 참고 마음이 그렇게 급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허리춤에서는 연필들이 아프다고 ‘달그락달그락’ 소리쳤다.
훗날 알고 보니 필자만 선생님들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우리들이 너무 보고 싶어 방학기간에는 개학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셨단다.
자수성가한 한정현(67세, 남)씨의 돈에 대한 제1원칙은 ‘절약’이다. 평생 근검절약이 몸에 밴 한정현씨의 돈에 대한 태도는 자녀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내 김혜숙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제 아이들도 독립하고 큰돈 들어갈 일도 별로 없으니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여행도 좀 다니면서 ‘적당하게 쓰면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부간에 말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던 중 남편 한정현씨의 생각이 변하는 계기가 있었다. 친구 중에 자수성가한 한 사업가가 있는데 평생 힘들게 돈만 벌다가 얼마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그 친구가 죽은 뒤에 일어났다. 재산을 두고 자녀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씨는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노력하던 친구의 삶이 참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이제 아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적당하게 돈을 잘 쓸 수 있는지 전문가에게 재무상담을 받아봤다.
삶의 가치관 알기
“당신에게 돈이 왜 중요합니까?”
재무상담사에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한정현씨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돈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지 ‘왜’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한씨에게 돈은 왜가 아니라 무조건 중요했다. 돈이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아래 내용은 재무상담을 위해 한정현씨가 상담사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상담사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한정현 아직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상담사 네, 그러시군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드린 질문입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신 후 답을 하셔도 됩니다.
한정현 (3분 정도 침묵 후)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좀 쓰고 싶습니다.
상담사 그 전에 자신을 위해 돈을 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한정현 책임감 때문이죠.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게 마무리되어야….
상담사 책임감… 한정현씨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군요. 그렇다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했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습니까?
한정현 짜릿하겠죠. 성취감도 들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울 것 같네요.
상담을 통해 드러난 한정현·김혜숙씨 삶의 가치는 각각 다음과 같다.
제안
노후실손의료보험
노후실손의료보험은 50세 이상부터 75세까지의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민간보험회사에서 판매하는 보험이다. 보험사에서 정한 건강기준에 적합하면 가입할 수 있으며, 입원과 통원을 합산해 연간 1억원 한도로 실제 발생한 의료비를 보장한다. 일반실손의료보험에 비해 자기부담금비율이 10~20% 높은 대신 보험료가 저렴하다. 자기부담금비율이 높아 치료비가 적게 발생하는 입원이나 통원 시의 혜택보다는, 고액의 치료비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비해 가입을 고려해볼 만한 상품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9억원 이하의 주택 소유자나 배우자가 60세 이상일 때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다. 주택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하면 사망 당시에 주택 매도가격이 연금 총액과 이자 등 비용을 상계하고도 남으면 자녀들이 잔액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연금 총액과 비용이 주택 매도가격보다 더 높으면 자녀들이 주택 상속을 포기하면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의학적으로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전문의의 판단이 있을 때, 추가적인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의견을 미리 작성해둘 수 있다. 우리나라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2018년 2월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유언장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전 유언이 있을 때 그 내용을 우선으로 한다. 유언이 없을 때는 상속인들이 협의분할을 해야 하는데 서로 협의가 되지 않으면 법정상속을 한다. 이런 갈등을 방지하려면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두는 것이 좋다. 다만 유언장은 법이 정해놓은 요식을 준수해야 효력이 발생하므로 법률 전문가와 상담한 후 작성한다.
일시납 연금보험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면 피보험자가 사망하는 시점까지 연금이 지급된다. 피보험자가 55세가 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며 피보험자가 사망 시 연금액이 소멸하는 연금보험은 세법상 이자소득세가 비과세된다. 그러나 확정된 기간 동안 연금을 받거나 피보험자가 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 시 남은 금액이 상속인에게 지급되는 일시납 연금보험은 2017년 4월 이후부터 가입 금액이 1억이 넘으면 수령 시 이자소득세가 과세된다.
여가활동
시니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활동 공간과 영역도 점차 늘고 있다. 시니어들의 여가활동 특징은 배움과 여가를 동시에 고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약간의 수입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각 지역 지방자치단체에 가면 시니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나 여가 프로그램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시 산하의 50+재단(50plus.or.kr)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령자 교통안전교육
만 65세 이상의 운전자가 교통안전교육을 이수하면 자동차보험료의 5%를 할인해준다. 고령운전자 교통안전교육은 도로교통공단 13개 시도 지부에서 실시하며 비용은 무료다. 교육시간은 3시간 정도 이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만 65세 이상 운전자가 교육이수 후 수료증을 보험사에 제출하면 자동차보험 5% 할인특약에 가입할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파스칼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미약한 존재지만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그 어떤 존재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가냘픈 존재이기는 하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우주를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양극을 공유하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존재, 어쩌면 인간은 존재 자체로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2원적인존재인 것 같다. 그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여 순리에 맞춰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용의 삶을 사는 방법인 것 같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방향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결정의 중요성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 할 만큼 때로는 중요한 것일 수가 있다.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사는 내내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학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고 아는 만큼 지혜롭게 의사결정을 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인생2막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은 인생1막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학창시절만큼의 오랜 시간은 아니더라도 인생 2막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학습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교육이 한 인간을 양성하기 시작할 때의 방향이 그의 삶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노후로 가는 여행을 위한 최상의 양식이다” 고 말했다. 굳이 이런 철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교육과 학습의 필요성을 절실히 삶을 통해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인간을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자기 뜻에 따라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워서 행복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요약하여 한 마디로 “배움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준비다”라고 했다.
둘째 인생길을 안내 해주는 멘토가 필요하다.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게도 항해할 때 등대처럼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스승이나 멘토가 필요하다. 훌륭한 멘토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고전과 같은 책이 될 수도 있다. 직접 경험에 의해 지혜를 터득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현명한 사람은 간접경험을 통해서도 삶의 지혜를 깨우칠 수 있다.
가장 훌륭한 멘토는 자신과 코드가 맞는 선지자가 아닐까 싶다. 함께 공감하고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나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서 이를 깨우쳐주고 가이드 해주기 때문이다. 멘토는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마치 나침판이나 등대처럼 배가 옳은 방향으로 바로 항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 사물의 본질을 알고 핵심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리, 배, 코 등 어느 일부분만 확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은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파스칼처럼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다. 삶의 맛을 북돋우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와중에서 어떻게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꽃밭에 있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함께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꽃들은 종류가 다르지만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서로 다른 개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장점을 존중하면서 단점을 보완하여 함께 공존해 나갈 수가 있지 않을까? 만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 옳으니 따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꽃밭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한 약육강식의 자연의 생존법칙에 따라 항상 불안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차이란 서로 다름이지 다르다고 적은 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결코 잘못된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삶은 발전이고 평화로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다른 악기들이 다른 음으로 화를 이루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트럼펫 소리가 아름답기는 하나 혼자 내는 소리는 단조롭다. 서로 다른 악기들이 화음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삶을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공통적인 목적이 있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다른 차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때 미국과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그런 사고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이는 한마디로 중용의 삶과 상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차이의 화합된 순열과 조합은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