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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류’ 기인 예술가의 미치광이 같은 예술혼
- 간혹 그의 목소리는 흡사 파도처럼 올라갔다가 거친 자욱을 남기며 내려오는 듯했다. 스스로 일류를 넘은 ‘특류’라고 말하는 국내 최고의 전각(篆刻) 작가 진공재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에 쏠린 감정을 타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 근저에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날선 도끼가 서려 있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과 부패하지 않는 태도로 평생을 살아오며 실력과 배짱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진짜 예술가, ‘58년 개띠’ 세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진공재(陳空齎)를 만나 그의 거친 예술가 삶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차고 넘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고독하고 단호하다. 국내 최고 전각 장인으로 평가받는 진공재 작가를 만나니 흔히 광기의 예술가라고 하면 연상되는 거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서편제’에서 궁극의 소리를 찾아 끝없이 방랑하던 소리꾼의 모습도 떠올랐다. “남원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죠. 열네 살까지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머니와 함께였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진공재 작가는 어머니가 사망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날이었다. “다른 집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 집은 내가 불을 피워야 연기가 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 집을 떠나보자 하고 1974년에 자전거 팔아 3400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얼마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각박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시절이었던가. 1974년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해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지하에서 파낸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밥벌이로 시작한 도장 파기 소년 진공재는 인쇄소, 중국집, 노점상 등 별의별 일을 다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가 경기도 안양에서 도장을 파기 시작한 것 또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새기는 걸 좋아했죠. 학교에선 서기 일도 했었고. 그런데 길에서 도장을 파다 보니 밥벌이는 되는데, 밥만 먹어선 충족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서예를 배웠죠. 독학자습이었어요. 그렇게 서예를 하다 보니 그림이 나오더군요.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씨가 되듯이….”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와 화는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런데 시절이 1980년대였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부은, 군부독재 시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눈을 뜬 거죠. 그래서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20대 후반이었는데, 사실 대학생도 아니고 학생운동가도 아니고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그저 길거리에서 도장 파서 먹고사는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요.” 스물일곱 살에 우연히 만난 아내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데모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력만으로 오른 최고의 자리 아이는 198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백 일도 안 됐는데 감기, 모세기관지염, 폐렴, 장염까지 온 거예요. 아이들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지하실에서 살았거든요. 의사가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라고 하더군요. 부랴부랴 짐 챙겨서 전라도로 내려갔죠.” 그는 서예 솜씨 덕분에 전북 도청 고용직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아이도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병이 나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예술가 기질, 방랑가 기질이 다시 돋았다. “공무원이 내가 갈 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보따리 싸서 다시 도장을 파기로 했죠. 1990년에 전주를 떠나 인천으로 갔어요. 거기서 서예학원을 개원했는데 3개월 하고 망했어요. 다시 경기도 안양으로 갔어요.” 처음 도장을 파기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91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전각 부문에 작품을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아무런 ‘빽’도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 길에서 그는 전각과 서예, 동양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석도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다 썩었잖아요. 서예계도 마찬가지였죠. 문중끼리 다 해먹고…. 그런데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에게 최고상을 준 분이었어요. 성철 스님과 함께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하셨죠. 2011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로 제가 담배를 끊었어요.” 전각(篆刻)은 심각(心刻) 예술이다 당시 서예계의 부정부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그는 서예계 인사들이 비리로 구속되고 난리가 나자 소위 ‘혁명’을 하러 협회로 들어간다. 한국청년서예가협회 대표였던 그는 “다 나와라,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자” 하고 외쳤다. “아무도 나를 못 건드렸죠. 전부 스승과 제자로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잘못된 거라면 고쳐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일 마치고 나오려 했는데 어떤 분이 ‘네가 지금까지 한 게 있으니 그대로 나오면 안 된다, 도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협회에 들어갔죠.” 이때가 그의 공적인 삶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는 중국서령인사 전각평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수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채근담’ 1만6600여 자를 새기는 대작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도 서예협회 경기도지부장, 서예협회본부 이사, 한국전각학회 감사를 맡아서 활동했다. 그러나 공적으로 화려한 간판들이 과연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그의 성정이 짐작이 된다면 예상 가능하겠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2003년 3월 29일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먹은 빈 껍데기야. 그런데 벼슬하면 뭐 해먹었다고 똑같이 욕먹고…. ‘여기를 떠나자’ 싶어서 맡고 있던 직위들을 한날한시에 다 내려놨어요. 그리고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가기로 하고 보따리 싸서 지리산으로 갔죠.” 그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홀연히 떠났다. 방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끝없는 방랑벽, 다시 떠나다 평생 39번을 이사했다. 지금도 그는 임대사무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정적으로 뭔가 쌓이는 것도 없고 붙잡는 사람도 없고 술맛도 떨어지면 떠나게 되는 거죠.” 어느 곳에서는 202호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를 본 건물주가 야반도주한 스님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마흔아홉 개인데 ‘202호 스님’도 그중 하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스님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지. 어차피 전기세 받을 때만 볼 테니.” 2005년에는 그의 방랑벽이 해외로도 뻗어나갈 기회가 왔다. 정부에서 독일을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그 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을 받아 행사 일환으로 전각 시연을 보여주고 싶으니 그에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어디를 못 가겠냐, 대신 거기서 작품을 팔 수 있으면 가겠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인데 보름 동안 거기 가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받아주더군요.” 독일은 그에게 좋은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그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작업물을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독일 녹색당 당수도 있었고, 독일 방송국에서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정도였다.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멋지게 산다 평생을 강렬하게 살아온 그도 이제 환갑이 됐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그가 느끼는 바가 궁금했다. “내 종교는 세 개예요.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까진 새옹지마교였죠. 인생사 새옹지마다. 서른 살에서 예순 살까진 천지조화은혜교였죠. 천지가 사람을 절대 굶기지는 않더라. 밥은 주더라. 그리고 예순 살 이후는 안빈낙도교나 믿을까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나이 들어도 멋지게 살 수 있으니까요.” 흔히 예순 살이 넘으면 사주팔자도 없다고 한다. 다시 한 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기 전 열네 살까지는 행복하게 살았으니, 일흔네 살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봤다. “앞으로 14년은 황금기예요. 그 이후로는 삶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자신으로 사는 거죠.” 그는 최근 딸 덕분에 아내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갔다 왔다. 거기서 인생 최고의 환희를 맛봤다. 자연 속에서, 안나푸르나의 굽이진 길에서 느낀 것이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있다. 바로 손녀인 하리다. “손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요. 얘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제부터 오직 전각만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여름에는 인사동에서 자신의 학습 단계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총정리해서 집대성하는 전시를 열 계획이다.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 그가 현재 머무르는 곳은 의왕시 청계산 자락. 작업실 이름은 비니루(扉泥陋)다. 사립문 비(扉), 진흙 니(泥), 더러울 루(陋) 자를 쓴다. 한자 음 그대로 비닐하우스로 된 공간이다. 2년여 전 경상북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된 ‘심상서화각의향연’이라는 돌판새김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을 만들고 그동안 28% 이자를 내고 있었던 캐피털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싹 갚고 나니 3000만 원이 남았다고 한다. 그 돈을 전부 이 작업실을 만드는 데 썼다. “나는 평생 석도필묵(石刀筆墨)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에요.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밥을 먹고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벌이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좋아하면서 밥을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형편이 어려워서, 곤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어요. 대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에 있었다고 봐요. 나는 삶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거예요.”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로… 멀고도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온 그가 삶류 작가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밥벌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일류라지만 나는 특류다. 자만심 있는 삶류다”라고 말하는 그는 홀로 이뤄낸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그가 평생 안고 있는 석도륜 스승의 말씀이 있다.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해라. 눈을 사랑하기로 해놓고 따뜻하길 바란다면 눈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품고 있을 만큼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있는 그대로 여겨지고 싶다”고 대답했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섰기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진공재 작가에 대한 설명은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진공재와 그의 작품들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다시 한 살이 된 그가 스스로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앞으로의 14년. 어떤 작품들로 자신을 말하게 될지 기대가 크다.
- 2019-03-0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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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문화캘린더
- 설 명절 연휴가 이어지는 2월, 이달의 추천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뮤지컬) 파가니니 일시 2월 15일~3월 31일 장소 세종M씨어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비운의 대가로 남게 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와 ‘바이올린 협주곡 2번-라 캄파넬라’ 등을 재편곡해 매력적인 ‘록클래식’으로 선보인다. (오페라) 테너 마르첼로 알바레즈 내한공연 일시 2월 19일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전설적인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가 발굴한 천재 아티스트 ‘마르첼로 알바레즈’. 뛰어난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으며 전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 무대를 석권한 그의 첫 내한공연이다. ‘카르멘’, ‘팔리아치’, ‘투란도트’ 등 총 13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100분간 오페라 세계에 흠뻑 빠져보자. (클래식) 알리나 이브라기모바&세드릭 티베르기엥 듀오 일시 2월 21일 장소 LG아트센터 영국의 대표 신문 ‘타임스’가 ‘음악계를 평정할 듀오’라며 극찬한 바이올리니스트 알리나 이브라기모바와 피아니스트 세드릭 티베르기엥. 이들의 합주로 낭만주의 실내악 명곡인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1-3번)’을 들을 수 있다. (연극) 자기 앞의 생 일시 2월 22일~3월 23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출연 양희경, 이수미, 김한, 오정택, 정원조 등 세계 3대 문학상인 ‘프랑스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이 원작이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랍계 소년 ‘모모’와 돈을 받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키우는 유대인 보모 ‘로자 아줌마’의 대화를 통해 사회적 차별과 약자의 현실을 고발하는 수작이다. (콘서트) 미스터션샤인 OST 오케스트라 콘서트 일시 2월 24일 장소 롯데콘서트홀 출연 안두현, 이현진, 송민제, 이신규 20세기 초 조선 의병들의 의와 사랑 이야기로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던 tvN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각종 차트를 휩쓴 미스터션샤인 OST가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재탄생했다. 뮤직비디오 영상과 함께 음악을 감상하며 드라마의 감동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 개봉 2월 27일 장르 다큐멘터리 출연 강금연, 곽두조, 박금분 등 인생 팔십 줄에 한글과 사랑에 빠진 할머니들의 욜로(YOLO) 라이프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경북 칠곡에 사는 ‘평균 86세’ 꽃다운 청춘들이 배움의 즐거움에 빠져 인생을 재밌게 사는 비법을 전수한다.
- 2019-01-3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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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고도 트레킹을 꿈꾸며
- ‘차마고도’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지만 그동안 관심이 없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말라야 트레킹을 같이 다녀온 일행들이 랑탕, 무스탕에 이어 차마고도 얘기를 자주 꺼냈다. 히말라야의 엄청난 대자연 속에서 느낀 감동이 아직 지워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래전 KBS TV에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마지막 마방’ 편과 ‘순례의 길’ 편을 감명 깊게 감상했다. ‘차마고도’는 말 그대로 ‘Tea-Road’, ‘茶馬古道’라 하여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교역로다.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산악 무역로다.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던 길이었는데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차가 다니는 시대가 되자 ‘마지막 마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5000m 이상 되는 눈 덮인 설산의 아찔한 협곡을 잇는 길이다. 이 험준한 산길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냈다. 교역품은 주로 차와 말이었지만 중간 마을과 종착지인 윈난성의 여정에서는 소금, 약재, 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방’에서는 티베트의 송이버섯을 염장해 보관하고 있다가 중국 윈난성에 갖다 파는 여정을 그렸다. 말에 짐을 잔뜩 싣고 산 넘고 물 건너 고생을 한 대가가 1인당 100만 원 정도. 그 정도면 좋은 가격이란다. 말을 운송 수단으로 쓰는 것은 히말라야에서도 자주 보던 광경이다. 트레킹 도중 말이 나타나면 몸을 산 쪽으로 붙이라는 안전수칙을 가이드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다. 절벽 쪽으로 비켜서다가 자칫 말에 밀리기라도 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시체도 못 찾는다고 했다. 차마고도에서도 이런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또 말에 실린 짐이 잘못되어 풀어지거나 말이 발을 헛딛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줄지어 오던 다음 행렬에도 타격을 준단다. 차마고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아내와 형제가 같이 살거나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고 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먼 길을 떠나야 하고 남아 있는 형제는 농사를 지어 그동안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형제공처의 풍습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였다. 두 번째 테마는 ‘순례의 길’. 쓰촨성에서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까지 2400km를 이마, 두 팔, 양 무릎을 땅에 대며 ‘오체투지’로 6개월간을 가는 순례를 소개했다. 3명의 오체투지 순례자와 이들의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끄는 사람 2명이 일행이다. 하루 6km 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순례의 길을 이어갔다. 가다가 죽으면 오히려 영광이라며 시체를 토막 내어 독수리 밥으로 내어 놓는다. 종교의 힘은 무섭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이마에 멍이 들고 무릎 관절이 퉁퉁 부어도 길을 간다. 육포나 옥수수 말린 약간의 곡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노지에서 간단한 이불과 비닐포대를 덮고 잔다. 이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최종 목적지인 라싸의 조캉 사원에서는 10만 배 절을 한다. 우리나라보다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4박 5일 정도의 일정으로 떠나는 차마고도 트레킹 관광 여정을 요즘 자꾸 들여다보고 있다. 비용도 130만 원대로 욕심내볼 만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너무 힘들어 다시는 오지에는 가지 않겠다던 결심이 벌써 흔들린다. “히말라야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겠다.
- 2019-01-3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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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익을수록 인생은 맛있다!
- 아침 식사로 남편에겐 질냄비에 끓인 스트로가노프와 구운 생선 그리고 고기 감자조림에 나무 수저를 준다. ‘감자’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더부룩해지는 아내는 바삭하게 구운 빵에 직접 만든 블루베리 잼을 발라서 먹는다. 그리고 후식으로 뜰에서 딴 과일을 먹는다. 서로의 소소한 차이를 존중하며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노부부의 일상이 화면 가득 잔잔하다. 우리가 일과 삶을 일치시키며 살기란 그저 마음뿐이기 십상이다. 결혼한 지 65년이 된 건축가 츠바타 슈이치와 아내 츠바타 히데코는 각각 90세와 87세. 이 둘의 나이를 합치면 무려 177이다. 노부부는 숲으로 둘러싸인 15평의 삼나무 단층집을 짓고 50년째 살고 있다. 50가지의 과일, 70가지의 채소를 키우고 그것으로 소박하고 정갈한 음식을 매일 만들어 먹는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는 자막과 함께 땀과 노동의 실천으로 차근차근 빚어낸 슈이치와 히데코 부부의 조용한 일상을 보여준다. 과일이 익어가듯, 인생은 오래 익을수록 맛있다고 말하는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다. 이 영화는 백발 노부부의 자연 친화적인 일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KBS ‘인간극장’과 비슷한 형식으로 2년 동안 그들을 촬영한 것인데 일본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이 영화엔 최근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국민 어머니라 불리는 ‘키키 키린’의 진정성 있는 나레이션이 감동을 더한다. 도쿄대 요트 부원이었던 남편 슈이치는 부원들과 아내 히데코의 200년 전통의 양조장에서 잠깐 신세를 지게 되면서 부부의 인연이 시작된다. 건축가인 슈이치는 대학 졸업 이후 일본 주택 공단에 들어가서 나고야의 ‘고조지 뉴타운 계획’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계획했던 숲과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계획이 무산되자 슈이치는 땅을 사서 자연과 공존하는 작은 삼나무 집을 지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슈이치와 히데코의 정원에 매달린 많은 이름표는 그들이 진정 자연과 함께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정원 앞 웅덩이 같은 수반 옆에 `작은 새들의 옹달샘- 와서 마셔요`라는 글이 고맙다. `작약- 미인이려나`, `여름밀감-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푯말은 애교스럽다. 노인을 주제로 한 영화가 이토록 생기 있고 창의적이라니. 오랜 시간 함께한 부부에게서 기복이 심한 희로애락이나 자극적인 에피소드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자연 속 부부의 인생 미학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면서 억지 부리지 않는다. 아내 히데코의 선한 눈빛과 미소는 나쁜 말은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과 어울린다. 담백하게 담아낸 그들의 일상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어떻게 사는 것이 나이를 잘 먹어가는 것인가’ 고령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화두가 되는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주거환경 등 그 방법을 여러모로 생각하게 되었다. 노후대책 중 하나로 쉽사리 귀촌이나 귀농을 떠올리곤 하지만 절대 만만하지 않은 일이다. 자연 속에서 땀과 함께 실천하는 삶이 자리 잡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치 과일이 익어가듯, 맛있게 영글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인생 후르츠’라는 제목이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를 맺는다. 차근차근 천천히…"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한 번 더 볼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 영화 ‘인생 후르츠’였다.
- 2019-01-03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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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장 이홍렬이 말하는 ‘디지털로 전하는 아날로그 감성’
-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됐다. 그 주인공은 코미디언 이홍렬. 대한민국 대표 코미디언 중 한 명인 그는 유튜브에 자신의 채널인 이홍렬TV를 직접 만들어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평생 입으로 살아온 노장 이홍렬(64)은 커피를 마시면서부터 인터뷰, 메이크업, 그리고 표지 촬영을 할 때까지 시종일관 떠들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올드보이 이홍렬에게 입이 살아 있는 그날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들어봤다. 방송가에서 쌓은 그의 업적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나이나 경력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소위 ‘올드보이’인 그는 새로운 무대로 가장 젊은 매체를 선택했고 이 도전은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어느새 구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하는 ‘이홍렬TV’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이홍렬을 만나자마자 물 만난 탈출구 유튜브 얘기부터 꺼냈다. “이제 SNS를 거부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세상이 됐어요. 부부도 마주앉은 상태에서 사진을 보내고 공유하기도 하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제가 기계에 능해서라기보다는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거예요. 너무 즐겁고 재밌어요.” 이제 이홍렬TV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과거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던 코미디언 이홍렬은 자신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걸 SNS 시대에 맞춘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디지털을 잘 받아들여서 쓰면 삶의 윤활유가 된다며 디지털 예찬론을 폈다. “예를 들어 부자지간, 모자지간, 모녀지간, 부녀지간이 싸웠다고 해봐요. 예전 같으면 아침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둘이 화해하려면 다시 보게 되는 시간까지 일단 기다려야 했죠. 그때까지 두 사람 다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문자로 ‘아빠가 미안했다’고 하면서 이모티콘을 사용해보세요. 딸도 같이 답해줄 거예요. 디지털을 잘 받아들이면 이렇게 금방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사실 SNS는 젊은 세대의 주된 소통 수단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내가 사기엔 아까운데 남에게 선물 주기엔 좋은 게 이모티콘이에요. 그래서 이모티콘은 조금 친해지려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쏴요. 상대가 그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덕분에 전 이모티콘 부자예요’ 하는 말도 듣고.” 이홍렬은 시니어 세대가 디지털을 받아들이면 가질 수 있는 장점으로 디지털만 아는 주니어들에게 디지털로 접근해 아날로그 감성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제기차기를 모르고 물수제비도 몰라요. 그걸 알려주면 너무 신나합니다. 디지털로 공유하고 아날로그적 공감으로 이끌어내면 더 큰 울림이 있거든요.” ‘고양이가 일인칭이 된다면?’ 현재 이홍렬TV는 반려묘인 러시안 블루 고양이 풀벌이와의 추억과 강화에서의 일상을 다룬 두 개의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3년에 처음 계정을 만들어두고 그냥 놔뒀어요. 그런데 2년 전에 우리 고양이를 보는데, 털이 하얗게 쌓인 거예요. 털이 왜 저렇게 쌓였지? 하고 생각해보니 얘가 열다섯 살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쟤가 만약 일인칭이 된다면 할 얘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평소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게 취미였던 터라 그동안 얘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찍었어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갖고 제주도에 가서 2박 3일 동안 유튜브에 올릴 에피소드 40편을 정리했어요.” 이홍렬은 툭하면 동영상을 찍는다. 재미있어서다. 그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온 30년 동안의 모습을 담은 아날로그 사진과 VHS를 모두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들은 이홍렬TV의 자원이 되고 있다. “유튜브가 올 시대를 준비했느냐? 아니에요. 다만 이것들이 다 짐이었거든. 보관이 힘들었어요. 사실 기록물을 정리하면 보물이고, 정리 안 하면 쓰레기죠. 그래서 다 정리한 거죠.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에 두 아들 기록, 사진, 동영상을 다 넣었어요.” 재미와 감동을 풀어주자 고양이 풀벌이는 올해 4월에 눈물이 나고 붓고 해서 진단을 하니 구강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여든네 살의 나이.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턱을 잘라내는 것, 두 번째는 방사선 치료, 세 번째는 가족이 호스피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홍렬은 세 번째를 선택했다. 고양이가 아프면 마취주사를 놔주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마시게끔 도와줬다. 얼른 안락사를 시키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리고 마침내 갈 때가 되었고, 풀벌이는 그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록한 풀벌이와의 추억들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다. “풀벌이를 키운 것과 아이들 키운 것을 맞물려서 보여주는 형식이에요. 저 말고 다른 누가 편집을 못해요. 찾는 걸 저밖에 모르니. 죽을 지경이죠. 5분짜리 동영상 만들려면 대여섯 시간이 걸려요. 심하게 본 건 백 번도 봤고.” 이홍렬TV의 목표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감동이라도 보여주자, 안 찾아오면 어떠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무도 안 봐도 괜찮다, 풀벌이와의 추억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얘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유튜브는 독하거든. 타이틀 독한 거 쓰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솔직히 그런 걸 쓰라면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말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걸 하자. 늘 그럴 순 없어도, 재미가 없다 해도 메시지는 갖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입담 좋은 노장 개그맨이 유튜버로 유튜브가 독하다는 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수많은 자극적인 제목과 캡처 사진이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려고 그야말로 ‘난리를 치는’ 느낌이다. 실제 상당수의 인기 채널을 보면 먹방이라며 산더미 같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든지, 시시때때로 괴성을 지른다든지, 자극적인 춤과 억측과 욕설들을 쏟아내는 등 종종 기괴하고 무의미한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날것’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날것’을 찾는 것은 유튜브뿐만이 아니다. 요즘 공중파 방송들도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연예인의 가족을 구경하는 관찰형 예능이 그 증거다. “요즘은 방송국에서 관찰 예능 기안을 올리지 않으면 통과가 안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걸 하면 당사자들은 힘들어져요. 집에 설치한 카메라 50대는 언젠가는 떠나게 되거든요. 그런 예능을 하게 되면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짚어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출연자들은 집 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재밌게 하려면 여자는 잔소리하게 만들고 남자는 무식해 보여야 하니까요. 그게 페이크(Fake) 다큐거든요. 진실 반 거짓 반으로 된.” 그래서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튜브에는 가족에게 허락받은 자료만 올린다. 요즘 올리는 자료는 아이들은 열 살까지, 아내는 옛날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정도다. 얼마 안 남은 시간, 사랑하자 이홍렬에게 디지털은 가족을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스물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란 존재를 알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20여 년밖에 같이 못 지낸 거예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할 날도 그렇게 주구장창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나이로 보면 앞으로 15년만 살아도 여든 살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다. “내일이라도 제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다 나와요. 정말 사랑 많이 베풀어야 하고 집사람에게 잘해야 하죠. 누굴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예요.” 디지털로 남게 된 어머니 목소리 이홍렬은 군대 있을 때 받은 어머니의 편지 다섯 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철자법도 안 맞고 글자도 삐뚤빼뚤 썼다. 그러나 그 편지에선 소리가 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를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카세트테이프로 대화를 녹음했어요. 어머니는 대화 중에 ‘꿋꿋하게 살아야 해. 내가 너희들에게 빚 남긴 건 없으니까’라고 말해요. 지금은 그걸 CD로 구워서 내 동생 하나, 누나 하나, 나 하나 갖고 있어요.” 그는 대학교에서 이벤트 연출학과 겸임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너무나 반응이 좋았다. 그의 과제가 없었으면 어머니와의 추억이 없었을 뻔했다며 정말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게 다큐멘터리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강의를 할 때면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하라고 조언한다. 마침 디지털이 그것을 도울 수 있다. 다들 카메라는 의식해도 핸드폰은 의식하지 않으니, 살짝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어머니와 대화를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쉬워요” “유튜브가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 딱 맞아요. 아이디어 발산할 데가 없었거든요.” 사실 이홍렬 나이가 되면 방송에서의 자리가 달라진다. 골든아워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으레 ‘요새 왜 안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 말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예인이라면 백 퍼센트 듣게 되는 말’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 든 연예인은 ‘송해 선생님도 아직 저렇게 하시는데 왜 안 보이느냐’라는 말도 듣는다. “그렇게 묻는 분들은 제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죠. 좋아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겐 가슴 아픈 말이에요. 처음에는 견뎌요, 뭘 좀 해요, 어쩌구저쩌구하죠.(웃음)” 사실 그의 요즘 스케줄을 보면 놀랄 정도로 바쁘다. CJ헬로TV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강의와 공연, 기부 행사까지 빼곡하게 잡혀 있다. 한 달 평균 10회 정도 강의를 한다. “나눔이란 것이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멈추는 게 어려워져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1998년부터 홍보대사를 해왔는데 20년째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 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이곳에서 활동한 제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게 해놓고 가고 싶은 꿈.(웃음)” 2005년부터 나눔 콘서트 ‘이홍렬의 락락(樂樂) 페스티벌’은 올해로 14회. 2007년부터는 기부 강의 프로그램 ‘이홍렬의 펀펀 도네이션’을 펼치고 있다. 특히 강의는 이홍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현재 128회, 모두 기부 강의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인 그는 2012년 부산 해운대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는 국토종단을 통해 모은 모금액으로 자전거를 마련해 남수단공화국에 전달했다. 자전거를 받은 남수단공화국의 한 아이가 “자전거를 줄 정도면 키가 클 줄 알았어요. 당신은 키가 작지만 마음이 크군요.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이홍렬을 에티오피아로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제가 강의를 하니까 후배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와요.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을 후원해주면 답례 없이 주례를 봐주겠노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혼한 부부가 28쌍이나 된다. 이홍렬은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6307명을 파병했는데 그중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목표가 또 추가됐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121쌍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536명의 후원자를 발굴하는 거예요.”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어느새 9300명에 달했다. ‘열심히 하면 뒤에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그의 지론을 뒷받침해주는 숫자다. “이제 만 명 넘으면 감사인사를 올려야지. 유튜버 선배들이 2년은 되어야 뭐 하나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구력을 쌓다 보면 댓글에 감동하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힘들어도 그렇게 가자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점점 거칠어지는 인터넷 방송 조류를 역행하는 ‘따뜻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이홍렬이어서 가능한 이 실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독하고 무시무시한 것만이 아닌, 따뜻한 희망이 서려 있다는 걸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희소하고 과감한 도전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가 디지털로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의 따뜻한 세계가 독한 세상의 대안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해본다.
- 2018-12-1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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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의 저자 김석중 키퍼스코리아 대표
- 죽음은 생의 마지막이지만, 죽음과 관련해 늘 최초란 수식어가 붙는 사내가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유품정리인으로 활동했고, 최초의 유품정리 회사를 창업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유품정리라는 생소한 분야의 정보 중 상당수는 그의 입과 글을 통해 나왔다. 김석중(金石中·49) 키퍼스코리아 대표의 이야기다. 그가 창업 8년 만에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라는 책을 펴냈다.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유품정리 개념이 도입된 이후 우리 사회 문화는 많이 달라졌는지 김석중 대표에게 물었다. “멍밖에 안 들었어요.” 기대 밖의 대답. 유품정리라는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 대표는 누구나 아는 그 인물이 아닌가? 관련 기사만 검색해도 방송과 신문, 잡지를 막론하고 그와 회사 이름이 오르내린다. “국내의 유품정리 분야는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유품정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유품정리인은 보았다’라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을 때였어요. 당시 이 책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지요. 하지만 미디어의 관심은 고독사 같은 자극적인 주제에만 집중됐어요. 왜 우리가 유품정리를 해야 하는지, 죽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없더라고요. 그 후 국내 유품정리 산업은 ‘청소’의 한 분야가 되어가고 있어요. 유품정리를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죠.” 제일 좋은 것은 직접 하는 것 유품정리는 고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김 대표는 정의한다. 유품은 망자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소유이기 때문에 타인이 정리할 수 없고, 사망 후에는 상속 권한을 가진 유족만이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처분할 수 없는 법적 배경을 갖고 있다. 아울러 유품은 한 사람의 삶이 담긴 기념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는 고인의 유품을 추억이 담긴 기념품으로 소중히 여기고, 이를 친척이나 친지에게 나눠주는 카타미와케(かたみわけ)라는 문화가 있다. 이러한 일본에서 유품정리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유품정리는 결국 유족들이 고인의 물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보니 남은 사람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활동인 종활(終活)의 하나로 생전정리를 일상화하고 있어요. 이에 반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접하는 것을 너무나 금기시해요. 죽은 사람의 물건이라면 다들 찜찜해 하잖아요. 빨리 치워버리려 하고요. 그러면서도 유명인의 유품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죠.” 실제로 국내의 유품정리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 상당수는 중고품 판매업자나 폐기물업자가 많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평당 단가를 매겨 고인의 짐을 쓸어간다. 이후 값나가는 물건을 찾는 ‘보물찾기’를 거친 후 돈 안 되는 것은 모두 버린다. 환가(換價)할 수 없는 것들은 거기 담겨 있는 것이 추억이든, 학술·예술적 가치이든, 중요한 정보이든 상관없이 처분한다. 그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직접 해보라”며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나 생전정리는 필요해요.평소엔 관심조차 없었던 생전정리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버릴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정리하다 보면 삶에서 뭐가 중요한지 알게 되죠. 유족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물건을 남기고 버릴지 직접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인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깨닫게 되지요. 남은 가족을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되고요.” 일본에선 스스로 조금씩 정리를 하다 마지막이 다가온 것을 느끼면 유품정리 회사에 예약하는 경우도 많다. 자식이 있어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 키퍼스코리아에서도 이런 예약을 받는다. 김 대표는 “때가 되면 와 달라는 약속의 의미이지 구체적인 계약의 개념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할수록 돈 까먹는 일 김 대표가 유품정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회사 직원이 사고로 세상을 떠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의 유품정리회사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일본인 지인을 통해 다큐멘터리 주인공이자 일본 최초의 유품정리회사 키퍼스를 설립한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사장을 만나 의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김 대표의 진심을 알게 된 요시다 사장은 지금까지 후견인을 자처하며, 한국 직원의 일본 연수, 소모품 지원과 같은 사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후원했다. 하지만 2010년 시작한 김 대표의 유품정리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현실은 냉정했다. “제대로 유품정리를 하려면 현장에 직접 가서 견적을 내야 해요. 하지만 현장에 가서 견적을 내면 비싸고 번거롭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한 상조회사와 MOU를 맺고 유족의 의뢰를 받았는데, 6년간 실제로 성사된 건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사업을 할수록 손해만 봤어요. 결국 견적을 내기 위해 교통비만 허공에 날린 셈이 됐죠.”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유품정리 과정은 매우 철저하다. 유족에게 의뢰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판단하는 시간이 걸린다. 유언장이나 권리관계 계약서, 귀중품 등뿐만 아니라 후대에 남길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추억이 담긴 물건까지 골라낸다. 이 과정에서 유족과 상담이 이뤄지고 필요할 경우 법적 절차나 세무 처리가 진행되도록 돕는다. 이러다 보니 비용도 올라간다. 일반 이사 비용의 2배 정도다. 하지만 집을 상속받아 내용물을 빨리 비워내고, 신속하게 처분하길 원하는 유족이라면 이러한 과정이 맘에 들 리 없다. 그의 유품정리 사업이 국내에서 번창하지 못한 이유다. 그나마 일이 들어와도 현장에서 천대받기 일쑤다. 자살한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러 갔다가 건물주에게 “죽어 나간 집이라고 소문내는 거냐”며 손가락질에 야유까지 받는 상황은 예사다. 관련 사업 중 그가 손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치매 등으로 인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떠난 부모의 짐을 치워 달라는 의뢰다. “집을 팔아 상속세를 아껴보려는 분들이 연락을 합니다. 이런 경우 성년 후견인 지정이 되어 있어야만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작정 맡기려는 분들이 있죠. 법적 절차 없이 물품을 처분하면 불법입니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유품정리 알리는 일, 계속할 것 결국 2010년 창업 후 키퍼스코리아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었다. 전용 차량도 있었고 일본에서 연수까지 마친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익 창출이 잘되지 않았다. 차량은 매각됐고,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가슴에 멍만 들었다. 김 대표는 키퍼스코리아를 창립하기 전부터 해왔던 항공사용 기내 서비스 물품이나 기업체 식·소모품 등을 납품하는 회사를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수입은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 10년 전쯤엔 사업을 꽤 크게 벌였지만, 유품정리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이 사업마저도 상당히 축소된 실정이다. “키퍼스코리아는 1인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의뢰가 들어오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 과거에 함께 일본 연수를 받았던 경험자를 불러 함께 처리하는 방식이죠. 이제는 견적 의뢰가 오면 먼저 설문 문항을 보내드려요. 직접 가지 않고 비용을 산정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항목이 24개나 되다 보니 설문만 보고 포기하는 유족도 있답니다.(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유품정리에 대해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를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어요. 10년 이상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잖아요. 누군가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밟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생전정리에 대한 마음도 바꿨어요. 업계에 회사들 많은데 꼭 내가 직접 생전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나? 다른 회사들 제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렇게 유품정리인이자 전문유족으로 남고 싶어요. 그래서 책도 썼고 앞으로는 죽음 연계 교육도 해보려고 해요. 몇 분이라도 모아놓고 자서전 쓰기 활동과 더불어 자기성찰을 돕는 키퍼스 노트의 국내 소개도 계획하고 있어요.”
- 2018-09-14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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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세대에게 TV는 ‘바보상자’이기만 할까?
- 한때 TV는 ‘바보상자’라고 불리곤 했다.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들이 드라마나 시리즈 프로그램 등에 빠져 하염없이 TV 앞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또, TV를 보느라 독서 등을 통해 생각하고 상상할 기회를 빼앗겨버려 사고력 발달을 저해한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면 ‘바보상자’라는 말도 구시대적인 용어가 아닐까 싶다. 요즘 초등학생은 TV 이외에도 더 매력적인 영상기기를 많이 접하기 때문에 이미 그들에게 TV는 흥미로운 존재는 아닐 것이다. 두 돌이 채 안 된 외손주도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알아내는가 하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화면을 가로 세로로 밀어 화면을 바꿔 보려고 시도하다가 가끔 성공할 때도 있다. 아이패드를 통해 다양한 아이들의 유튜브 영상을 보기도 한다. 이처럼 TV를 비롯한 다양한 영상 매체는 여러 세대에게 여러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은퇴세대에게도 다양한 TV 프로그램은 많은 정보를 보여주는 유익한 기구로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터넷과 적극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다양한 정보와 세상을 만나며 현대적인 삶을 사는 시니어들도 있지만, 요즘 TV는 사회의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일차적인 정보 전달 매개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60세 가까이 살아왔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관심사와 취미 또는 호불호 정서가 있게 마련이다. 만약 자신의 관심사나 취미에 대해 개념이 흐리다면, 시니어라고 일컫는 세대는 남은 미래의 시간에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정서에 관한 개념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TV 프로그램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TV 편성표를 통해 검색도 가능하고 프로그램 시청을 하며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공부이기도 하고 현대 생활에 대한 적응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정리되면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도 있고 흘러가는 화면 속에서도 자기 관심사를 찾아내는 안목이 생긴다. 더 나아가 드러나는 영상 이면의 진실과 허상까지 바라보고 사고하는 능력이 생긴다. 가입한 인터넷 TV 통신사에 따라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다 다르겠지만 나는 다큐멘터리와 라이프, 세계 테마 기행을 주로 시청한다. 그 외에 미술 건축에 대한 공부, 유명 콘서트도 TV를 통해 즐긴다. 가까운 아시아부터 지구촌 곳곳의 문화기행을 통해 역사, 지리, 먹거리 정보를 전달받고 수준 높은 전문가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는 시간은 또 다른 일상의 힐링이며 취미다. TV는 나에게 더는 ‘바보상자’가 아닌 ‘유익한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TV 시청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오프라인 등으로 2차적인 활동반경이 확장될 수도 있지만, 이미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소득이다. 부모세대가 사셨던 세상을 돌이켜 생각하고, 비교할 때 환경오염과 기약 없는 수명 연장에 비례한 경제문제 등 부정적인 면도 더러 있지만,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은퇴세대들이 누리는 편리한 사회구조와 시설, 상대적인 젊음 등을 느꼈을 때 만족감은 더욱 크다. 여생의 스마트한 삶을 위하여 정보력, 사고력, 소통력을 기르는 꾸준한 훈련은 은퇴세대의 필수과제일 것이다.
- 2018-08-2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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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의 연대기’, 생리는 선택 아닌 자연현상
- 영화 포스터가 밝고 환하다. 언뜻 알록달록 꽃들인 줄 알았는데, 예쁜 면 생리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리컵이라는 낯선 물건들도 함께 놓여 있었다.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포스터부터 대놓고 영화의 주제가 ‘생리’임을 드러내는 영화 ‘피의 연대기’.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에 대한 내용이다. 50플러스서부캠퍼스에서 영화 상영과 함께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했다. 덕분에 영화의 후일담을 들을 수 있어 매력적이라 느꼈다. 그렇다면 ‘피의 연대기’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영화의 출연과 연출을 맡은 김보람 감독은 “여자들이 생리를 처리해 온 역사뿐만 아니라 내 몸에서 일어난 개인이 겪은 생리의 역사, 그리고 생리를 하고 있는 여자들의 연대 모두를 의미한다”라며 야무진 답변을 들려줬다. 우리 사회 담론에서 밀려나 있던 여자들의 은밀한 이야기 ‘생리’. 저소득층 여학생의 깔창 생리대 문제가 사회에 툭 튀어나오고부터 정치권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며, 이제는 완경을 맞은 나의 생리 역사도 떠올랐다. 초경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엄마와 언니가 있었지만 딱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쑥스럽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생리 주기는 정확한 편이었고, 생리통도 심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더운 여름에 생리를 하면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생리통으로 하얗게 얼굴이 변하며 고생하던 친구들도 떠오른다. 영화는 이러한 내용을 무겁지 않게 톡톡 건드리며 쉽고 자연스레 몰입하게 만든다. 여자들 몸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환하게 드러내 놓고 보니 또 자연스럽다. 처음 사용법을 알게 된 생리컵이라는 이상한 물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에 대해 남자들도 관심을 가져야 “남자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면 좋겠어요. 어떤가요?” 감독과의 시간에 내가 던진 질문이다. 이에 김보람 감독은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게다가 주제는 생리, 남자들이 싫어할 만한 3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간혹 여자친구 손에 끌려오는 남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남성 관객이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라며 웃으며 답한다. 여자마다 다양한 생리 증후군이 있다. 나는 여자들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을 남자들이 좀 알았으면 한다. 여성은 그들의 친구, 동료, 애인, 아내, 이웃이 아니던가? 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이해하고 함께 생활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첫걸음은 없으리라. 여성들도 남자들이 저절로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도움과 이해를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 나는 생리 직전 우울감과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 이런 호르몬의 장난을 알고 있던 남편은 긴 연애와 결혼 생활 동안 매달 유난히 까칠해지는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해주었다. 생리대는 필수품, 뉴욕시 공짜 생리대 법안 통과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영화에도 나오듯 2016년 뉴욕시는 공립학교·교도소·노숙자 보호소 등 공공화장실에 생리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영화 제작진은 이 장면을 직접 촬영했다. “모든 여성의 존엄과 보건을 위한 중대한 한 걸음”이라는 뉴욕시의 슬로건이 뭉클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건강이 좋지 않으면 몸의 주기성이 깨져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생리의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많아지리라. 우리나라도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를 지급하는 지자체가 많아지고 있어 반갑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생각의 변화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몇 년 전,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재직할 때 일이다. 보건 선생님은 생리대를 준비해오지 못해 쑥스러워하는 여자친구의 손을 끌고 보건실에 온 남학생들이 가끔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OO을 건드리지 마! 오늘이 그날이래~”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장난처럼 오가는 말에 친구를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자연스런 몸의 현상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일이 좋아 보였다. ‘피의 연대기’ 같은 여자의 몸, 생리에 대한 다큐 영화가 제작되고, 함께 토론해보는 것도 진전의 신호이다. 여혐, 남혐 사회를 뛰어넘어 남녀가 살아가는 동반자로 서로의 특징을 잘 이해하는 것이 평화로운 삶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나저나, 영화가 적자라 고민이 많다던 감독의 말이 머리에 맴돈다···.
- 2018-08-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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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사진에 담긴 진솔함,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주말에 집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꼼꼼히 보려고 되감기를 하면서 본 영화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다. 극장에서 할 때 시간이 잘 안 맞아 못 봤는데 생각보다 빨리 프리미어에 올라왔다. 이 영화는 제이알(Jean René, 1983~)과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1928~)가 공동으로 감독, 각본, 제작, 주연을 한 다큐멘터리 장르다. 2017년 프랑스 개봉에 이어 한국에서는 2018년 6월에 관객과 만났다. 올해 20년을 맞은 서울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작품이다. 영화 속 외벽에 사진 작업하는 장면만 없으면 그저 할머니와 손주가 노닥노닥 여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손주 벌 되는 이 젊은이는 외벽에 흑백사진을 붙이는 것으로 잘 알려진 사진작가 ‘제이알’이고, 작고 귀여운 할머니는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이며 배우이자 사진작가 설치예술가인 ‘아녜스 바르다’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벨바그 운동가이기도 한 아녜스는 현재까지 60년 넘게 작품 활동을 지속해왔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55세. 훤칠한 키의 제이알은 33세로 영화에서 늘 검은 선글라스에 중절모를 쓴다. 88세의 바르다는 흰머리 둘레만 갈색으로 염색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내내 잔잔하다. 예쁜 만화영화 같은 느낌도 있다. 크게 웃을 일도 없고 엉엉 소리 내어 울 일도 없다. 그저 사람들의 삶이 존재할 뿐이다. 두 사람은 외형이 카메라처럼 생긴 포토트럭을 타고 마을을 지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바로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찍은 사진을 크게 출력해 다양한 곳에 붙인다. 농부의 전신사진을 찍어 저장창고에 붙이고 공장이나 부두의 인부들을 찍어 건물이나 화물을 옮기는 컨테이너에 붙인다. 노동자의 아내들을 찾아가 그들의 사진을 찍고 출력하여 운반용 컨테이너에 붙이기도 한다. 흑백사진은 왠지 정직해 보인다.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진 찍는 날이 마지막 근무였다는 야윈 인부가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말할 때는 그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팠다. 철거를 기다리는 폐광촌의 마지막 주민이던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이 집 담벼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사진을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현관을 장식한 할머니의 커다란 얼굴이 마치 집을 지키는 수호신 같이 느껴졌다. 노안이 있는 바르다는 제이알의 눈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제이알은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제이알은 노안으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바르다를 위해 그녀의 눈동자와 발가락을 찍어 프랑스 전역을 다니는 화물기차에 붙여준다. 화물기차에 붙은 커다란 발가락 사진은 재미있었지만 선명한 눈동자가 붙은 화물기차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그렇게 바르다는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작품이 완성된 곳은 올록볼록한 벽돌담이거나 기다란 창고이거나 화물을 옮기는 컨테이너였다. 적당히 주름 잡힌 얼굴이 있는 커다란 흑백사진을 붙이는 순간 평범했던 공간은 특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흑백사진에는 진솔함이 있다. 왠지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였나? 영화를 보는 내내 색이 빠진 검은 눈동자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 2018-07-2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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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을 위한 고독 ‘랜드 오브 베어스’
- ‘랜드 오브 베어스’(2014, 프랑스)는 러시아 극동에 있는 캄차카반도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살아가는 야생 불곰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캄차카반도는 지도(아래 이미지)에서 보다시피 러시아 동쪽에 위치해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가봐야 할 여행지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블라디보스토크와도 멀지 않은 거리다. 영화는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고지대 야생의 땅에서 태어난 새끼 곰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끼 곰은 태어나 3년간은 어미 곰의 보살핌 속에서 생존과 성장을 한다. 자식을 지켜내고 살아남기 위해 자연과의 투쟁을 벌이는 어미 곰의 모습은 처절하다. 캄차카반도의 고지대 굴속에서 겨울을 보낸 불곰들은 본능적인 배고픔이 먼저인지, 봄이 돌아옴을 인지하는 감각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봄이 오면 대지를 뚫고 나오는 풀의 새싹들을 찾아 저지대로 이동을 한다. 잡식성인 불곰은 겨울 동안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풀의 새순과 추위를 이겨낸 열매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 그러다 여름이 오면, 산란을 위해 북태평양 바다에서 비스트라야 강으로 헤엄쳐오는 연어를 만나게 된다. 연어떼 역시 서생지였던 북태평양바다를 두고 종족번식을 위한 산란지 비스트라야 강으로 목숨을 걸고 헤엄쳐 오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굶주린 불곰들과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이 사투에서 살아남은 연어들만이 산란을 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불곰들 또한 연어를 포획하여 겨울을 이겨낼 식량으로 섭취하고 새끼들을 생존시켜야 한다. 이에 불곰 무리 사이에서도 적나라한 생존 경쟁이 처절하게 펼쳐진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철저히 고독해야 한다. 연어를 잡기 쉬운 길목에서는 경쟁자인 형제나 동료와 함께할 수 없다. 오로지 돌보아야할 새끼 곰만이 곁에 있을 뿐이다. 먹이사슬의 투쟁이 끝난 뒤, 가을이 오면 산란에 성공한 연어는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불곰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그들만의 영역인 캄차카반도 고지대로 다시 이동한다. 이렇게 3년을 반복하면 새끼 곰도 성장하여 짝짓기가 가능해진다. 그때가 되면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살아온 어미 곰 앞에서 짝짓기를 한다. 새로운 가족을 이루기 위해 어미 곰을 떠남과 동시에 새끼 곰에게도 역시 어미 곰의 숙명이 시작된다. 독립 생명체가 되면 형제조차도 생존경쟁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기 때문에 지구상 몇몇 동물들과 달리 그들에게 영원히 가족공동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절한 생존투쟁 뒤에 존재하는 것과 영광이란 무엇인지, 어미 곰의 숙명과 그들의 삶의 순환이 처연하기만 하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밤, TV 영화 채널을 돌리다 눈에 들어온 ‘랜드 오브 베어스’. 포스터 속 곰들만 보고는 동화 같은 곰 가족의 이야기이겠거니 하고 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어린 외손주들에게 추천할 요량으로 보았던 영화는 나에게 참 많은 생각을 안겨 줬다.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생각을 떨치고 외손주들 얼굴을 생각하며 잠을 청해 보았다.
- 2018-07-03 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