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집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꼼꼼히 보려고 되감기를 하면서 본 영화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다. 극장에서 할 때 시간이 잘 안 맞아 못 봤는데 생각보다 빨리 프리미어에 올라왔다. 이 영화는 제이알(Jean René, 1983~)과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1928~)가 공동으로 감독, 각본, 제작, 주연을 한 다큐멘터리 장르다. 2017년 프랑스 개봉에 이어 한국에서는 2018년 6월에 관객과 만났다. 올해 20년을 맞은 서울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작품이다.
영화 속 외벽에 사진 작업하는 장면만 없으면 그저 할머니와 손주가 노닥노닥 여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손주 벌 되는 이 젊은이는 외벽에 흑백사진을 붙이는 것으로 잘 알려진 사진작가 ‘제이알’이고, 작고 귀여운 할머니는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이며 배우이자 사진작가 설치예술가인 ‘아녜스 바르다’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벨바그 운동가이기도 한 아녜스는 현재까지 60년 넘게 작품 활동을 지속해왔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55세. 훤칠한 키의 제이알은 33세로 영화에서 늘 검은 선글라스에 중절모를 쓴다. 88세의 바르다는 흰머리 둘레만 갈색으로 염색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내내 잔잔하다. 예쁜 만화영화 같은 느낌도 있다. 크게 웃을 일도 없고 엉엉 소리 내어 울 일도 없다. 그저 사람들의 삶이 존재할 뿐이다. 두 사람은 외형이 카메라처럼 생긴 포토트럭을 타고 마을을 지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바로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찍은 사진을 크게 출력해 다양한 곳에 붙인다. 농부의 전신사진을 찍어 저장창고에 붙이고 공장이나 부두의 인부들을 찍어 건물이나 화물을 옮기는 컨테이너에 붙인다. 노동자의 아내들을 찾아가 그들의 사진을 찍고 출력하여 운반용 컨테이너에 붙이기도 한다.
흑백사진은 왠지 정직해 보인다.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진 찍는 날이 마지막 근무였다는 야윈 인부가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말할 때는 그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팠다. 철거를 기다리는 폐광촌의 마지막 주민이던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이 집 담벼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사진을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현관을 장식한 할머니의 커다란 얼굴이 마치 집을 지키는 수호신 같이 느껴졌다.
노안이 있는 바르다는 제이알의 눈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제이알은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제이알은 노안으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바르다를 위해 그녀의 눈동자와 발가락을 찍어 프랑스 전역을 다니는 화물기차에 붙여준다. 화물기차에 붙은 커다란 발가락 사진은 재미있었지만 선명한 눈동자가 붙은 화물기차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그렇게 바르다는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작품이 완성된 곳은 올록볼록한 벽돌담이거나 기다란 창고이거나 화물을 옮기는 컨테이너였다. 적당히 주름 잡힌 얼굴이 있는 커다란 흑백사진을 붙이는 순간 평범했던 공간은 특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흑백사진에는 진솔함이 있다. 왠지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였나? 영화를 보는 내내 색이 빠진 검은 눈동자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