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사라지는 말이 더러 있다. ‘환갑잔치’라는 말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없어진 전화교환원, 버스안내원, 물장수, 은행에서 돈을 세던 정사원, 굴뚝 청소부 등의 직업 이름처럼 말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최근에 거의 쓰지 않고 있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조금씩 쌓으면 나중에 큰 덩어리가 된다. 돈이나 재산을 불리는 지혜로 삼았던 말이다. 적은 금액의 돈을 귀중히 여겼다. 비슷한 말로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도 있다.
필자가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아파트를 살 때 주택채권을 사야 했고 대체로 채권은 보관하지 않고 바로 되팔아 아파트를 사는데 보탰다. 필자 역시 채권을 팔았다. 채권을 사려던 할머니 한 분은 한 주당 5백 원을 더 주겠다 했다. 5백 원 정도에 시큰둥했는데 그 할머니는 “5백 원이면 얼마나 큰 데”라 하였다. 재산을 많이 키운 할머니였다. 적은 돈을 귀중하게 여기는 모습이다. 주위엔 큰돈을 번 사람들이 많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부유하게 살기도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도 많다. 그들은 적은 금액의 돈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힘들여 돈을 모았기에 신중하게 사용한다. 남다른 고생을 하면서 이룬 재산이어서 헛되게 쓰지 않는다. 공돈처럼 쉽게 얻은 재물은 그 쓰임새도 헤퍼져 오래가지 않는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대부분 사람의 생활이 결국 더 궁핍해지는 것을 본다. 같은 이유다.
손주에게 쥐여주던 돈도 1,000원 한 장이면 환영받았으나 지금은 최저 5,000원에서 1만 원짜리를 주어야 한다. 특히 아파트 가격이 높아져 신입 직장인이 월급을 모아서는 아파트 구매를 엄두 내지 못한다. 그런 환경에 놓이다 보니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환경이 됐다. 이런 현상이 또 다른 삶의 피폐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보면 물가 오름의 요인으로 작용해 인건비를 끌어 올렸지 싶다. 일확천금, 한탕주의를 부추겼다. 정상적 방법보다는 비정상적 방법을 동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 공직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쟁점으로 반복되는 일도 같다. 사회지도층이라 자처하는 그들도 태연하게 위장전입, 매매가격 낮춰 적기(속칭 ‘다운계약서’ 작성), 세금 안 내기, 논문 표절 등을 예사롭게 생각했다. 사회 전반에서 또 필자를 포함한 국민 대다수가 같은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부동산 투자로 웃돈을 챙기기 위해 위장전입은 물론이고 위장 결혼도 서슴지 않았다. 밝혀진 건수도 엄청나다. 반면에 자녀의 대학등록금 마련이 되지 않아 모녀가 동반자살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사회의 어두운 일면이다. 기업체 회장뿐만 아니라 대학재단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뉴스거리로 불거져 나오는 “갑질 논란”의 바탕에도 작은 것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려는 생활 태도가 다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아주 작은 일지만, 사회를 정상으로 돌리는 소중한 대책이지 싶다.
필자의 여고 시절 제2 외국어를 선택할 때 영어 선생님께서 문학이나 웅변을 하려면 독일어를 택하고, 사랑을 하려면 불어를 택하고, 돈을 벌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 하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친정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정치를 부업으로 하셨다. 비록 정치에 실패를 하셔서 많은 돈을 날리셨지만, 본업인 의사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워낙 욕심이 많으셔서 우리 집 6남매 중 아들 셋 중 둘은 의사로 하나는 약사로, 딸도 셋 중 둘은 간호학과를 입학 시켜서 작은 병원을 하나 운영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우스개 소리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친정 6남매 중 필자만 유일하게 문과인 영문과를 전공으로 택하였다. 사실은 필자까지도 아버지가 의대를 가라고 했으나 아버지가 대한 이유 없는 반항으로(?) 영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입학하자 마자 교수님들이 소개로 소위 재벌 가 자제의 영어 과외를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 대기업 사원보다 수입이 많아, 일반 사립대보다 훨씬 싼 서울대 학비는 벌고도 남았다.
등록금을 내고도 남은 돈으로는 우리 집 가전제품도 새로 구입하고 또 동생 두명의 취미 생활에 필요한 것도 사줄 수 있었다. 당시에 텔레리비젼이 처음으로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려 지금의 일가구일주택 정책처럼 한 가족당 한 대만 살 수 있었다.
동생들의 취미를 위해서는 스케이트나 정구 라켓은 물론 Made in Italy 자전거까지 남동생에게 사 주었다. 그 때 산 배드민턴 장비도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아무나 못 사고 또 뭔지도 몰라서 동네 길 바닥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놀면 친구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대학을 졸업 후 홍콩에서 외국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근무를 했는데, 봉급이 여자로서는 다른 직종보다 많은 편이었다. 그 때는 워낙 우리나라가 못 살던 1970년도 시절이라, 항공사에서 함께 일하던 ‘홍콩 차이니즈’라 불리는 중국 아이들도 우리가 영어를 못한다고 깔보고 뒤에서 수군거리곤 했다.
그 때 중국 애들은 얼굴은 중국인이지만 당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여권을 갖고 다니며 우리 나라를 우습게 보았다. 또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화폐 가치가 형편 없고 너무 낮아서 월급으로 받은 달러를 서울의 부모님에게 보내면 남대문 시장에서 야미(?)로 바꾸면 은행의 거의 두배가 되어서, 홍콩의 비싼 주거비와 생활비를 제외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졸 임금의 두배 가량을 저축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출신의 동남아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을 어려워하듯이, 필자도 부모 형제들과 떨어져서 생활 해야했기 때문에 외로움과 또 낯 선 외국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일 년 반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도망치듯이 귀국하여, 그 후로 결혼도 하였다. 결혼 후에도 남들과 달리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 것은 현지에서 배운 영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영어는 기본이고 제2.3 외국어까지 잘하는 젊은 사람이 많아도 직업 선택이 쉽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3년 전에 대기업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거주 중인 손병수(58세)씨가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손병수씨가 재무상담을 통해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은 매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 확보 방안이다.
1. 현재 상황
손병수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출가한 딸(33세)과 작년에 취업을 하고 회사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29세)이 있다. 퇴직 후 2년 동안 손병수씨는 재직 당시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며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두 번째 퇴직을 한 이후 지금까지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첫 번째 퇴직으로 인해 발생했던 퇴직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해 딸 결혼자금과 아들 대학등록금으로 대부분 썼기 때문에 퇴직연금은 없는 상태다. 매월 200만원 전후로 소요되는 생활비는 1년 전부터는 실업급여와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충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아들 결혼자금으로 1억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있다.
2. 재무진단
3. 제안
손병수씨가 의뢰한 매월 200만원 전후의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5층 연금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5층 연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1958년생인 손병수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4년 뒤인 62세부터다. 연금액은 현재 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손병수씨는 조기노령연금수급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여유자금이 있기 때문에 완전노령연금에 비해 12%까지 연금수령액이 삭감되는 조기노령연금을 미리 받은 받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손병수씨는 퇴직연금이 없다.
개인연금 현재 가입 중인 개인연금도 없다. 정기예금 중 1억원을 배우자 명의로 하여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손병수씨의 부인은 본인 명의의 국민연금이 없다. 남편인 손병수씨가 사망한 후에는 유족연금 명목으로 손병수씨 명의로 받던 노령연금액의 60%를 수령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의료비가 생활비가 될 정도로 의료비 지출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약 12년 정도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범수씨가 부인을 피보험자로 한 연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시납연금보험을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입 즉시 연금을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지급 시기를 충분히 여유 있게 설정해두고 그 이전에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현재 56세 여성이 1억원의 연금보험에 가입해 10년 뒤인 66세부터 연금을 개시한다면 매월 60만원 정도의 연금수령을 기대할 수 있다. 단 연금이 개시된 후 피보험자가 사망하게 되면 최초 가입금액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 연금총액을 차감한 금액만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조건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주택 소유자나 그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일 때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손병수씨는 만 58세이기 때문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7억원의 주택을 종신연금 수령조건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60세 기준으로 매월 146만원 정도의 금액이 지급된다.
손병수씨 부부는 주택연금 가입이 가능한 2년 후까지 현재 거주 주택을 보증금 1억원에 매월 120만원의 월세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 1억원과 현금 1억원을 합해 집의 규모를 줄여 서울 외곽 지역에 2년간 전세를 임차해서 살기로 했다.
직업 중장년층이 퇴직 후에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명함이 나를 설명하던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손병수씨는 우선 자신의 경력을 살려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는 사회공헌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매월 30만원 정도의 소득을 기대한다. 동시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요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4. 실행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손병수씨는 최근에 와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손병수씨는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는 정부지원사업 중심의 일자리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매월 100만원의 근로소득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나오는 시기에서 부인 명의의 개인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근로시간을 줄여 매월 50만원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일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지난해 연말 편집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열어보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간의 끝이 없는 탐욕의 수렁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승의 혼탁함 속에서도, 평생 맑게 살다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난 대학 과동기인 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어느 지방대학 교수이면서 북한학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국제정치학 교수였는데, 그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오퍼를 받았지만 끝까지 강단과 연구실을 지켜온 천생 학자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어머니께서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로 몸이 약했는데 평생 담배를 염소같이 많이 피더니 결국 60대 중반에 폐암을 얻었고, 힘들게 치료를 해 몇 년 지나 완치가 되었나 했더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몇 달 있다가 한 열흘 전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와 몇 명 안 되는 과동기들은 천안의 공원묘지에 가서 그 친구를 전별했고 공원 입구에서 산 자들은 맛대가리 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씩 훌훌 먹고 그를 남겨둔 채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카톡을 통해 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우들에게
먼저 갑니다.
아직 책을 더 써야 하고 그 밖에도 못다 한 일들이 남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지만
게으른 천성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자족해야 하겠습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우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그 마음씨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보다 조용하고 겸허해지고 싶습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도연명)에서 도연명은 국화꽃 피고 술 익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갔다지요.
저는 아지랑이 피는 봄날,
장다리꽃 위로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드는
어릴 때 뛰어놀던 서울 근교의 밭길을 걷습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보입니다.
그 너머로 모든 미련이나 원망, 죄의식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을 지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곳으로 표표히 떠납니다.
인생이 한 조각 뜬구름이라 했거니와, 제게는 또한
한 가닥 미풍과 같습니다.
- ○○○ 드림
날짜는 없었습니다. 사후 발송 같습니다. 아마 떠나기 며칠 전 혼수상태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든지 또는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가족이 적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간 후에 발송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발송 경위를 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울컥 먹먹해지며, 그 친구가 떠나면서 봤을 것 같은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 배역)이 로마의 사악한 왕에게 비겁한 공격을 받고 죽어가면서 그가 보는 장면입니다. 어떤 좁은 문을 지나 고향의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족들을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이지요. 아마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늘로 떠나는 사람은 고향, 특히 어릴 적 놀던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했습니다.
자네 말마따나 게으르고 느려터진 친구가 갈 때는 왜 그렇게 성미 급하게 떠났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나도 암수술 후 6개월 정기검진 때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자네가 마침 이런 문자를 보낸 것 기억하나?
“조 사장! 수술 후 회복 잘되고 있으리라 믿소.
나는 지난달에 신우암이 또 생겨 좌측 신장 절제를 했는데
3년 전 수술한 폐암과는 다른 종류인데 모두 담배가 유력한 원인이라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번쯤 평생 담배 핀 것을 후회해볼까 생각하네.
우리 중고차 잘 유지 보수하며 삽시다.”
이런 내용을 보냈어. 내게 말이야….
그 후 9월까지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9월 이후 그렇게 급격히 악화될 줄 몰랐네.
그 성미에 아픈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나는 자네 병문안도 못 가지 않았나? 어차피 우리들도 하나둘 자네 뒤를 따라갈 것이니 자리 잘 잡아놓게.
그때 가서 너무 고참 행세 하지 말고.
그는 천재였습니다. 제가 1969년에 서울대 문리대(지금은 사회대, 인문대, 이과대를 합친 단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이 친구가 하필이면 같은 과에서 전체 단과대 수석 합격을 해서 나는 결국 수석도 못했고 등록금 면제 대상도 안 되게 만든 악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세대였던 우리는 극렬한 학생운동 대열에 들어가거나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민간기업에 취직할 기회도 적었지만 말썽꾸러기 데모꾼 정치학도를 받아줄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3의 길, 즉 드물게 학문을 하는 먼 길이 있었는데 그 천재는 그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없어서 박사학위도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늘 유쾌했고 잡학박사였고 잡담(농아리)의 대가로 이상파와 현실파가 다 좋아하는 뼈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늘 우리의 아지트였지요. 밥도 제일 많이 얻어먹었는데 어머니는 늦둥이 아들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그는 어떤 허세나 재주도 부리지 않고 올곧게 학자로만 일생을 살았고, 도대체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했고 담배만 열심히 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가 속한 학회의 회장으로서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는데 한전에서 조금만 협찬을 해달랬는데, 명분이 약하다고 못 해준 것이 지금 저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비슷하겠지만, 저는 매우 우울합니다. 어차피 티끌 같고 미풍 같은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절제 없는 욕망의 화차를 맹목적으로 몰다 온 나라의 전복을 걱정할 정도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야 할 신뢰가 더욱 아쉬운 이때에,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오후에, 주변머리 없이 제 가치를 지키다 맑고 아름답게 간
친구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직도 담배 피시는 분들, 이 글 읽고 한 번쯤 금연 시도해보시지요.
설날 음식을 위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명절 며칠 전부터 만나서 준비하는 것은 이젠 그만 해야 하지 않나 싶다. 며느리를 맞이하고 첫 설날, 시어머니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어려운 음식을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냥 편하게 보내자 하는 두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즈음 외부에서 할 일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명절 음식은 대부분 백화점에서 사고 몇 가지의 요리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동태전, 버섯전, 동그랑땡 등을 구색 맞춰 구입한다. 나물도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등 삶은 것으로 구입한다. 필자가 직접 만든 것은 갈비찜을 비롯해 몇 가지뿐이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명절날 오라고 하니 매우 좋아하는 눈치다. 드디어 명절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도착하기 전에 필자는 음식을 모두 데우고 볶고 플레이팅한다. 이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새삼스럽게 친정어머니와 올케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친정어머니는 며느리가 사용할 깨끗한 그릇과 이불과 요를 준비하고 집 안의 청결함까지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릇을 다 꺼내어 닦고, 이불과 요 커버도 시침질하고 대청소까지 하셨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며느리를 맞이하고 보니 알겠다. 필자도 신경이 쓰인다. 며느리만 신경 쓰이는 명절이 아니다. 시어머니도 예민해지는 명절이다.
냄비를 닦다가 힘들어서 같은 브랜드로 아예 새로 구입했다. 명절날 온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심지어 며느리가 “어머니 맛있어요~” 한다. 양만 많으면 포장해서 보내고 싶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솔직히 고백한다. “엄마가 한 요리는 세 가지뿐이야. 그 외에는 모두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구입한 것이니 오늘 맛있게 먹고 가면 대만족이야. 포장을 해달라거나 어떻게 만든 거냐고 자세히 묻지 마.” 유머 있게 한마디 했더니 웃으며 이미 눈치 챘다고 한다.
며느리도 누구네 집 딸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시댁에만 충실할 필요 없다. 시누이나 친척이 오면 꼼짝 못하고 수발 들다 친정도 못 가 뒤늦게 형제자매들이 다 가버린 썰렁한 친정집에 잠깐 들러 친정어머니 얼굴만 겨우 보고 온다는 불평을 이미 동네 분들에게 들었기에 필자는 명절 음식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수고를 덜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필자도 아들 내외 보내고 친정에 계신 오빠들 내외와 함께 놀기 위해 달려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맞춤 커피는 한 잔 마셔야지~~.”
아들의 말에 행복해져서 바리스타 엄마의 커피 제대로 만들어서 과일과 함께 내어준다.
친구들과 맘껏 즐길 시간이 없었던 학창 시절
학창 시절 필자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인생을 살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인 집 과외 선생을 했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출판사 사업을 하다가 몇 차례 실패하면서 퇴직금은 물론 집까지 없어져 단칸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집주인의 아이들은 네 명이었는데 숙제만 봐줘도 감사하게도 성적이 올라가니 아예 자신의 집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의 성적관리, 생활관리를 해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공부는 물론 잘 때는 입던 옷을 개어 머리맡에 놓고 자는 바른생활 습관도 함께 가르쳤다. 둘째였던 큰아들이 필자가 잘 가르쳐줘서 공부에 재미가 생겼고 그 덕에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고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한 주인댁 아저씨가 한 말씀 하시더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용돈도 받아가면서, 가정 형편이 좋은 댁에서 과일도 먹고 나이가 어려도 선생님 대접을 해준 게 필자는 고맙다.
그 시절 친구들은 함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여기저기 몰려다녔다. 그러나 필자는 학교 수업만 끝나면 합창반 연습시간 외에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고 집으로 달려왔던 기억이 난다. 주인댁 아저씨가 아이들 데리고 신림동에 새로 생긴 신림극장에서 영화를 보라며 종종 돈을 줘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도 난다. 새로 오픈한 극장이라 들어오는 손님을 무조건 받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몇 세 이하 입장 불가도 없었다. 그때 국내외 고전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필자는 네이버 고전영화카페에 가입해 10년 이상 활동 중이다. 중요한 모임이 있어도 웬만하면 정기 상영회는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보고 싶은 영화는 개봉일을 기다렸다가 개봉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서 본다. 학창 시절부터 영화를 자주 보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주인집에서 이사한 뒤로는 집 근처에서 다른 집 남매에게 또 과외를 했다. 그 집 남편은 이란으로 돈 벌러 갔다 했다. 남매의 어머니는 일단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게 최고의 소원이었다. 고등학교 합격이 걱정일 정도로 공부를 못했던 터라 필자는 맘이 급했고 급기야 스스로 짐을 싸서 그 집으로 입주했다. 아예 지키고 앉아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필자도 공부하며 밤을 새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어디선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겠지만 순수하고 착했던 그 아이들이 오늘따라 기억이 많이 난다. 고등학교 합격 소식이 있던 날, 아이들 어머니는 필자에게 고맙다며 겨울 외투를 사주었다. 그 댁 아이들과 아주머니의 안부가 가끔씩 궁금하다.
그 뒤로 필자는 대학 두 곳을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잘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해온 개인과외, 그룹과외, 입주과외는 필자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면서 필자 자신도 많은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오빠들은 혼자서 잘 살아가는 필자가 기특하고 안쓰러워 보였는지 등록금을 마련해줬다. 대학 졸업식 때는 여러 가지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날 오빠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 필자는 울고 있었다. 다시 학창 시절이 돌아오면 남들 공부 봐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 나이에 맞게 친구들과 발랄하게 웃고 떠들면서 시간도 보내고 내 공부를 더 충실히 하고 싶다.
경계의 떨림이 느껴지는 눈빛이 입을 열었다. 머리에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며 가벼운 질문에도 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도, 맞서는 것도 이제는 ‘정신 사납다’고 표현하는 이 사람,
코디 최(최현주 崔玄周·55).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대나무 위 무림고수를 만나고 온 기분이 바로 이런 느낌인가 보다.
코디 최란 이름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그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 세 가지가 생겼다. 어려운 문화이론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강의실력자. 현재 유럽에서 회고전을 열 정도로 유명한 미술 작가. 마지막으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는 점이다. 문화이론을 가르치는 미술 작가. 이론과 실기를 엄연히 다른 분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그런 게 가능한 능력자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외적으로 직업이 두 가지입니다. 미술 작가 겸 문화이론가 아니면 교수.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과 강의를 거의 동시에 시작했어요. 학교에서는 이론 강의를 주로 하고 밖에서는 미술 작품 활동과 전시회 하면서요. 작가로 한 30년, 강의는 27년째 하고 있어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대학교(NYU)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줄곧 미술대학 교수였던 코디 최. 한국에서는 문화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언론정보대학이나 언론학부, 건축디자인학과, 공대, 국제대학 등에서 강의 요청이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곳에서 재능을 발견하다
코디 최는 미술 세계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20대 초반까지 한국인이던 코디 최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때 저는 80학번 어린 대학생이었습니다. 모든 게 불안한 시대였죠. 광주민주항쟁, 학교도 오랫동안 휴교하고요. 1학년 내내 서너 달 수업했을까요. 2학년에 올라갔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어요. 한국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미국에 가는 것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가자마자 막노동 같은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코디 최. 그러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 다녔는데(웃음) 미국에서는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야간대학에 다녔어요. 한 학기 등록금 몇 십만 원만 내면 수업이 거의 무료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학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이었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 그때 조금이라도 피곤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일반교양으로 듣게 된 미술 과목이었다.
“전공과목 외에 일반교양수업 중에서 미술 과목 하나를 들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숨 좀 쉬려고요.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낭만을 좀 느끼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관심 갖고 바라봐 주는 교수들이 생겨났다. 제대로 된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졌을 때 코디 최를 유심히 봐 왔던 상담 교수가 미술대학을 권유했다. 한국에서 붓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미술이라니.
“미술이요? 저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버는 전공을 선택하고 싶다고 교수에게 말했더니 요즘 디자인 분야가 돈을 많이 번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러면서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LA 아트센터 칼리지(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에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국제무대가 주목하다
입학 초기 디자인을 전공한 코티 최는 점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불편했어요. 잘 안 맞고 힘들었어요. 우선 언어가 자유롭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리고 또 내 나라가 아니니까. 모르는 곳에 가 있으면 불안하잖아요. 눈치도 보게 되고요.”
그 불편함은 위장병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인 불안과 불편함, 한국과 미국의 음식 차이 등 여러 가지가 요인이 합쳐지면서 먹기만 하면 체했다.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먹던 분홍색의 현탁액 소화제 펩토비스몰을 이용해 문화 정체성의 혼동과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됐고 그 신선한 충격은 국제무대에 코디 최를 알리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90년대는 초 뉴욕에서 꽤 많이 주목받는 작가였고, 한국에도 이름을 좀 알리던 시기였어요. 한국의 국제화랑 전속 작가로 10년 동안 활동했어요. 2, 3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서 전시했습니다.”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1990년대 초 NYU에서 강의 제의가 왔다. 강의에 대한 학생들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보니 ‘Adjunct professor’ 즉, 강의만 전문으로 하는 교수로 10년 넘게 있었다.
“2002년 이화여대에서 NYU 미술대 학과장한테 한 학기 초빙교수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한국 출신이니까 가 보지 않겠냐며 권유하더군요.”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됐다. 뉴욕과 유럽을 돌며 활동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뭔가 복잡해졌다. 개인사정이 생겼고, 50대를 바라보던 상황에 미국생활이 외롭고 모든 게 지루해진 시점이었다.
“2002년에 이화여대에 초빙교수로 와서 한 한기 동안 외국인 교수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뉴욕으로 돌아갔어요. 그때 내가 더 늙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강의를 하며 사는 것도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04년 한국에 들어온 코디 최는 2년 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20년여 고생했는데 또 다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했다.
“미국과 한국의 대학 시스템이 달라서 힘들었어요. 저도 어렵고 한국의 대학도 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요. 문화 차이였던 거죠. 제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충돌이 한국에 오니까 다시 또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해가 돼요.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30대도 아니고 50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학과장이나 주임교수쯤 할 나이에 강의만 하는 교수를 하겠다고 온 거죠. 근데 이제는 괜찮아요. 마음은 자유로워졌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그 부분이 좀 억울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세상에 바랄 것도 없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 온 거 같아요.”
코디 최, 유럽 회고전은 순항 중
현재 그의 작품은 유럽 각지를 돌며 ‘코디 최 컬처 컷(CODY CHOI Culture Cuts)’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작년 5월부터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할레(미술관)에서 시작해 프랑스 마르세유현대미술관 전시도 8월에 끝났다.
“올해 12월에는 스페인 렉토레이트 대학 미술관과 살라 모레노 빌라 전시관 두 곳에서 동시에 회고전이 있을 거예요. 내년 4월엔 독일 켐니츠 국립 미술관으로 가요. 제가 1986년부터 했던 작품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90점 정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 동안 변신 안 한 슈퍼맨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이런 저런 편견 때문에 피곤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타고 저 멀리에 가면 화려한 망토 두른 코디 최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나이 들어서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한 3~4년 전 쯤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이 다른 일로 한국에 왔다가 미술계에 수소문했다더군요. 최근 서구 미술 시장에 동양 작가, 특히 중국 작가의 활동이 활발한데 그런 관점에서 쭉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부터 뉴욕에서 활동하던 아시아 작가 코디 최라는 사람이 있었고 재조명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고마운 마음으로만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와 함께 작업하던 마이크 켈리 파운데이션의 평론가 존 워시맨과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마리드 부르졸라가 합세했습니다. 그렇게 2,3년 준비해서 유럽 순회 회고전이 기획된 것이죠.”
현재 그의 순회 회고전은 미국과 중국에서도 전시 일정을 조율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100% 안 될 거라 믿었다
코디 최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대표 작가가 됐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대형이라는 큐레이터가 저에게 차 한 잔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만나 보니 20년 전쯤 제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라더군요.”
이대형씨는 ‘2017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발탁돼 한창 작가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대형씨가 나에게 와서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에 원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면 어떻겠느냐고 묻더군요.”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하면서도 100%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국제 행사에 나가기엔 이완씨가 어렸고 무엇보다 한국 미술계에서 코디 최 자신에게 손들어 줄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됐다는 겁니다. 안 될 줄 알고 주위에 알리지도 않았어요.”
최근에 와서 이대형씨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작가 선정 작업을 하면서 젊은 작가와 함께할 연배 있는 작가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영국까지 날아가 사람을 만났다고 말이다.
“본인 생각에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밀려서 한 번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코디 최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10명 중 6명은 말리더라는 거죠. 그럼에도 본인 의지를 믿었다는 말에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코디 최가 베니스 비엔날레 대표 작가가 됐다는 소식에 유럽 미술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원래 내년 4월로 잡혀 있던 독일의 한 미술관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딱 끝나기 일주일 전에 전시를 시작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또 다른 독일 화랑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 시작하고 한 달 후인 6월 24일 코디 최의 전시를 열겠다고 날짜까지 못을 박았다. 사실 코디 최의 작은 바람이라면 아내와 함께 평화롭고 조용히 사는 것. 그런데 베니스 비엔날레 덕(?)에 당분간 그 바람은 잠시 묻어두어야 할 것 같다.
미술은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이다. 그것이 코디 최의 직업 중 큰 영역을 차지한다면 피곤하지만 즐기는 것이 순리 아닐까?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이들에게 시원하게 뭔가 보여주시길. 부탁해요, 코디 최!
‘펩토비스몰(소화제)’ 수만 통으로 적신 화장지를 뭉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 세계가 코디 최를 주목하게 된 대표작 중 하나다.
>>코디 최(최현주)
LA 아트센터 칼리지 학사,
1994~2004년 뉴욕대학교
Adjunct professor
(강의전문교수), 2002년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前문화창조아카데미 지식융합 감독, 연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
2017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
저서
택시를 타보면 대부분 젊은 나이의 운전자보다는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다.
똑같이 운전을 하여 돈을 버는 입장이지만 어떤 분은 할 일없어서
마지못해 하는 거라면서 언제든 그만둬야 할 일이라고 하시면서 이동하는 내내 불만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일이 있음을 감사하면서 아주 좋은 직업이라고 한다.
그 이유도 다양하게 말씀하신다.
첫째 운전대를 잡고 차를 갖고 나오면 개인택시가 아닌 회사택시소속이라고
해도 내가 오늘하루를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좋다.
둘째 나가면 돈이 생기니 경제적으로 도움 되니 좋다.
하루 입금할 돈이 걱정도 되지만 어쨌든 월급이 나오니 아내에게 떳떳하고 손자에게 용돈도 줄수 있다고 좋아하신다.
셋째 수많은 승객의 인생지혜를 들을 수 있어서 넓은 지혜가 생기는 것 같다고 하신다.
넷째 출근하기 위해 스케줄이나 술약속도 아무래도 덜하고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아서 좋다.
그러면서 모든 승객들을 보면서 전전긍긍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고 한다.
다양한 계층의 직업도 다양한 분들이 몸이 안 좋아서 타기도 하고,
빠른 이동이 전철보다 더 지름길로 빠르게 도착할 것 같아서 택시를
타기도 하고, 짐이 많은데 대중교통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여 택시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그 모든 이들이 모두
전전긍긍 걱정하면서 산다고 한다.
다리가 아파서 계단이 걱정된다는 연세 드신 분들,
학교 다니는 자녀가 학교에서 말썽피워서 학교에 불려간다는 분,
빌딩에 공실이 많아 건물만 가진 거지라고 속상함을 이야기 하는 분,
사업하는 이는 세금 때문에 힘들다는 분,
아이 대학등록금이나 유학비용 대기 어렵다는 분,
결혼할 아들 집을 사주지는 못할망정 전세라도 얻어줘야 한다는 푸념에
참으로 다양하게 나름대로 전전긍긍 살아가더라는 것이다.
우린 어떤가요.
오래전 보다 방마다 TV에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휴대전화에
삼시세끼를 먹기 위해 애쓰고 살던 시대에서 오히려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적당한 스트레스와 궁핍함이 오히려 생활을 더 열정적으로 살아내려고
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살아내는 삶이 이 시대를 살아내는 대한민국을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닐까 택시를 타서 기사님께 다양한
인생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사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라이엇 클럽(Riot Club) - 금수저의 민낯.’
젊고, 잘 생기고, 부모 잘 만나 돈 많고, 머리 좋아 세계 일류대학 옥스퍼드에 다니는 남학생들 10명이 모여 술을 마셨다. 그 분위기는 어떨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진다. 이 영화는 연극 ‘POSH'를 영화화 한 것으로 ’POSH‘는 영국에서 가장 상류층의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한다. 론 세르픽 감독이 만들었고 출연에 샘 클라플린, 맥스 아이언스, 더글라스 부스, 홀리데이 그레인저가 나온다.
옥스퍼드대학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귀족 모임 ‘라이엇 클럽’이 있다. 가문, 재력, 외모 모두가 상위 1%인 로열클럽이다. 졸업하고 나가면 집안의 힘, 학력의 힘, 명석한 두뇌의 힘으로 사회에서도 앞날이 보장된 잘 나갈 사람들이다. 이 클럽에 들어가려면 일단 출신 고등학교, 집안, 등 스펙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다음은 입단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신입생 마일즈(맥스 아이언스 분)와 알리스터(샘 클라플린 분)는 입단테스트를 거쳐 최종적으로 라이어트 클럽의 일원이 된다. 마일즈는 중산층 여자 친구 로렌(홀리데이 그랜인저 분)를 사귀는 평범한 면도 가지고 있지만, 알리스터는 부자로 태어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어 둘은 늘 티격태격한다.
드디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문인 만찬회 장면은 교외의 한 레스토랑에서 벌어진다. 모두 턱시도 정장을 맞춰 입고 제법 격식을 차렸다. 처음에 술 마시고 국가를 합창하고 다른 손님들이 불평할 정도의 소란함 정도는 학생들이니까 양해한다 치자. 술이 과했으니 토하는 것까지도 봐줄만 하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단골손님들이 학생들 때문에 너무 소란하고 서빙이 늦어지자 그냥 나갔다. 주인이 학생들에게 단골손님이 화를 내며 돈도 안내고 나갔다고 하자 돈으로 해결하겠다며 돈을 건넨다. 100파운드 정도인데 150파운드를 주며 자기네 판은 3,500파운드짜리라며 거들먹거린다. 주인이 그냥 나간 사람들 대신 학생들에게 돈을 받았다고 하자 딸이 돈 받은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얘기한다.
사태는 점점 악화된다. 누군가 콜걸을 불렀다. 단순히 저 한 명 섹스하자고 부른 것이 아니라 테이블 밑에 들어가 10명을 만족시키라는 모욕적인 주문을 한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한다. 콜걸이 거절하고 나가자 체면을 구겼다며 화를 낸다. 그 와중에 마일즈의 여자 친구 로렌이 나타난다. 마일즈가 빨리 와달라고 문자를 보내서 왔다는 것이다. 로렌이 중산층 여자라고 못 마땅해 하던 알리스터가 마일즈의 핸드폰으로 몰래 문자를 보낸 것이다. 로렌의 외모와 출신을 조롱하기도 하고 잘난 자기네들을 만나러 왔으니 돈을 내라고도 한다. 일이 이상하게 진행 될 것 같자 로렌은 되돌아 가려 하지만, 알리스터가 콜걸에게 주문했던 일을 해주면 전 학년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바로 송금하겠다고 제안한다. 아르바이트로는 매 학기 학비내기도 어려운데 워낙 큰돈이기에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남자 친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로렌이 알아서 선택하라고 대답한다. 마일즈의 순간적인 말 실수에 실망하고 로렌은 나가버린다.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모두 술이 만취하자 난동은 점점 극에 달한다. 돈 없는 서민들을 비난하고 자기네들은 타고난 귀족들임을 뽐낸다. 레스토랑의 모든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순다. 레스토랑 주인이 들어 와 보고 기가 막혀 한다. 돈으로 해결하면 될 것 아니냐며 오히려 난동은 더 심해지면서 주인에게 마구 집단폭력을 행사한다. 주인이 쓰러지자 구급차를 불렀는데 구타라고 하자 경찰이 같이 출동했다.
10명이 구치소에 들어가 조사를 받는데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함구하기로 한다. 학생의 신분이자 부모들의 영향력 덕분에 일단 구치소에서 나왔지만 증거가 보완 되는대로 다시 소환할 것이며 학교에서도 퇴학 처분이 내려질 것을 걱정한다. 책임 소재로 보면 회장이 모든 책임을 지거나 폭력을 먼저 주도한 자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퇴학처분을 면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내린 묘안은 한 명이 뒤집어쓰고 나머지 9명이 평생 미래를 지원해주자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있는 자들의 만행에 분노가 일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큰 문제로 보였다. 잘못의 책임소재를 가리는 문제에서 서로 발뺌하는 비겁한 행태에 인간적으로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금수저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회는 역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도덕과 인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영화이다. 금수저들에게 인성이 부족하면 돈은 흉기일 뿐이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던 시절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그 생활이야 오죽했을까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노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사랑채에는 몸이 불편하시어 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는 큰아버님이 야학 서당을 열고 있었기에 집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마다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창문을 넘었으니 이는 필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늘 한자에 관심을 가지고 서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필자의 유년기 시절에는 당시 초등학교 근처에 집이 있고 비교적 상태가 좋았던 터라 도시에서 섬마을로 전근해 오시는 선생님들이 필자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셨기에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곤 하였다.
60년도 3월에 집 근처에 있는 영종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학교는 집안 대대로 어르신들은 물론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이 다니던 학교다. 코 닦는 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첫 발을 떼어 놓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농촌임에도 집안은 비교적 큰 농사와 과수원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는데, 필자는 8남매 중에 일곱 번째 이었다. 서열상 위로는 형, 아래는 막내 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형은 형이라서 봐주고 동생은 막내라서 특별대우를 받다 보니 결국은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유ㆍ소년시절을 보냈다. 도맡아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 다투기라도 하면 꾸중은 비교적 필자에게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더구나 필자 집에 세를 살고 계시던 선생님들께서 보실 때마다 장난이 심해 단추가 모두 떨어진 옷을 풀어헤친 채 돌아다니는 필자를 보고 유별난 ‘장난꾸러기’라고 하기도 하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곤 했다. 형제들에 비해 외탁을 해서 키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장난삼아 했던 놀림은 청년기 시절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아마 반에서 1등은 못했어도 4,5등은 늘 했다. 언젠가 송산 백구지라는 해변으로 가을소풍을 갔는데, 전 학년을 모아놓고 장기자랑을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필자가 선생님께 호출되어 나갔는데, 고개만 푹 숙인 채 결국은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들어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시절, 집에서는 과수원을 크게 하였기에 원두막에 올라가 파수 보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다. 필자는 그 일이 제일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가서 망을 보곤 했다. 이때 음악책 한 권을 들고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혼자서는 그렇게도 잘 부르던 노래 실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풍날, 장기자랑시간에 고개만 숙이다가 들어왔으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만도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기에 졸업을 앞둔, 면소재지 내에 4개 초등학교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운 좋게 수석은 못했어도 차석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필자는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유는 그때 잘살던 필자 집이 마침 빚더미에 올라앉아 빚쟁이들이 집과 전답을 팔아 그들만의 빚잔치를 했기 때문이다.
입학금은 6600원. 차석합격자는 절반을 면제받았기에 3300원 만내면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돈조차 여의치를 않아 포기해야 했다. 등록을 끝까지 안하니 어느 날, 중학교 교감선생님께서 찾아와서 딱한 집안 사정을 알아보고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책만 사가지고 보내라고 했음에도 경황이 없으신 부모님이 포기하였다. 나중에서야 교감선생님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는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필자는 인천으로 나와 유동에 있는 대양알미늄공장에 취직했다. 그 와중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떠나지 않았기에 동인천역 전에 있는 영어ㆍ수학학원에 등록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싶어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공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에 학원으로 가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다. 그후에 둘째 형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울 화양동에 있는 씨티즌 시계회사에 취직됐다. 필자를 포함한 네 명의 형제자매는 서울 뚝섬에 5만 원짜리 단칸 셋방을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필자는 서울에서도 공장 생활을 이어갔다. 뚝섬 근처에 있던 한일공업사라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작하다가 점차 프레스 기계공으로 발전하면서 월급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런데 여사장은 서울에서는 꽤나 유명한 E여고의 전직 교사이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창업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웬만큼 신임을 얻은 후에 사장에게 슬그머니 공부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는데, 흔쾌히 야간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서울 생활이 이어졌고, 2년 후 비록 친구들보다 1년이 늦었지만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어린 마음에도 그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기에 못 먹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뚝섬유원지 둑에 홀로 앉아 아련한 강물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울기도 하고 푸념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고향에서 아버지가 그 이자가 비싸다는 장리쌀 한가마니를 얻어 둘러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던 날 밤, 농사일에 여윌 대로 여윈 아버지가 전세방에서 곤하게 코를 골고 주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주경야독의 고단한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 빛을 찾아 헤매듯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필자는 3학년이 되던 가을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었다.
서울에서 5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시작한 우리 4남매는 회사로, 공장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각자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살았다.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희망찬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적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좋은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사고와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세상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자던 어느 날, 바로 손위형님이 홀연히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나고 어머님의 생신날이 다가왔다. 군에 가신 형님의 생일은 음력 9월 9일이었고 어머님의 생신은 음력 9월 8일이었는데, 남매들은 어머님 생신날에 맞추어 미리 고향으로 모두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간 날 저녁부터 필자는 엄청난 복통과 오한에 시달리며 꼼짝 못하고 건넌방 한쪽에 누워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불현듯 군에 간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 생일이 오늘인데, 군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드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아프다고 그냥 있는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큰형님과 같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형님을 면회 가기로 했다. 군사우편에 찍힌 부대 번호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물어 그곳이 강원 가평군이라는 것만을 알고 무작정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야 할 형님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었다. 아!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비통하게 울부짖으시는 모습을 나는 그때 처음 봤다. 평소의 아버지는 산처럼 높고 엄하신 분이라 눈물도 없는 분 인줄 알았다. 가족 중에 얼굴을 확인하라고 하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형님의 얼굴을 확인하셨는데, 그 순간 오열과 통곡을 하시면서 비틀거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아주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형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유로 싸늘한 죽음을 맞았는지 너무 궁금한 필자 가족에게 부대 측에서는 순직통지서를 전하려고 서울 뚝섬 집주소로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어 전달이 안됐다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 애절하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형님의 편지!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한 순간에 스러지게 만든 사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그해 가을, 낙엽처럼 형님은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형님은 서울 동작동국립묘지에 묻혔다. 형님이 국립묘지에 묻히던 날은 다음 해 1월 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필자는 형님의 영정사진을 안고 묘지까지 행렬을 해야 했다. 행렬 내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보라 속으로 형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소용돌이 쳤다. 형님의 죽음에 항거라도 하듯이 필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4년 12월 21일 빛나는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고3 수험생으로 대입 준비를 하던 필자 인생이 전혀 뜻하지 않은 물꼬를 타고 흘러간 것이다.
무난하게 전ㆍ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필자는 1985년 가을쯤, 서울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보직을 받게 되어 서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소령 계급장을 달고 금의환향(錦衣還鄕 )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필자는 이곳에서 일반대학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주경야독의 생활은 결코 필자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94년 만기전역할 때까지 필자는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필자는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에 대한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2년간의 군복무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전방에서 보냈던 필자는 대개의 직업군인들이 그러하듯이 오직 진급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왔었다. 전역을 앞두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전역 후의 삶은 조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필자는 전역 후에 직업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원의ㅋㅋ(願意)를 가지고 있던 차에 지인의 추천으로 종교 계통에서 행정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틈틈이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여 98년 가을에 순수문학 수필작가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아울러 쉬는 날에는 열심히 출사를 나가 사진 찍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수필작가로 문단에 등단한 뒤 2년 후부터는 서예를 시작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야학서당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강포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서예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그야말로 혼을 불사르듯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2013년 9월 13일. 필자는 그동안 열심히 습작했던 글들을 모아 2권의 수필집을 출간 하게 되었다. 필자의 61세 되던 환갑 날, 서울에 있는 가락2동 성당에서 조촐한 축하미사와 함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친인척들과 6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러저러한 신세를 졌던 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수필집을 선물로 드리게 되었다. 약 150여 명의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격려와 축하의 인사가 이어졌다.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는 필자의 제1수필집으로, 태어나 힘차게 시동을 걸며 출발하였던 기차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황혼이 아름답게 빛나는 플랫폼으로 멋지게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용은 그동안 삶의 애환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황금빛 마음의 고향’ 이라는 제2수필집은 어린 시절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현한 작품집이었다.
필자는 그해 12월, 위 작품으로 순수문학 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초에는 종로 인사동에서 동인들과 함께 그동안 갈고 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청년기 크고 작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살아온 필자는 뒤늦게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여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 무한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2월 31일. 필자는 두 번째 정년퇴직을 맞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쉬지 않고 직장생활로만 만 43년을 살아왔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12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자녀들과의 만남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로 출발하였다. 필자는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자리잡아 잘 살고 있다. 외손자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첫 대면을 못했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까. 2014년 12월부터 약 2개월간 손자 현서를 만나고, 자녀들과 함께 보냈던 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필자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고향인 인천 신공항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을만한 땅을 사두었다. 이제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짓고 집필 활동을 하면서 살고자 한다. 2020년경에는 새로 지은 소박한 집에서 매년 한 번씩 지인知人들을 초대해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시회를 번갈아 열고 싶다. 삶의 멋진 이야기가 흐르는 저녁이 되지 않을까가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