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지는 코로나19로 손주와 만남조차 어려운 요즘이다. 기술이 발달해 영상 통화, 메신저 등 연락할 방법은 많아졌지만, 얼굴을 보고 꼭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작은 휴대폰 화면에 담기에는 부족하다. 길을 거닐다 손주 또래의 아이가 눈에 띄면 절로 생각이 나기도 한다. 집안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적적한 시니어를 위해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꼬마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마틸다 (Matilda, 199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처럼 자식은 부모의 행실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 소녀만은 예외인 듯하다. ‘마틸다’의 이야기다.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총명한 마틸다(마라 윌슨)는 어려서부터 혼자 핫케이크를 만들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씩씩한 소녀다. 반면 마틸다의 아버지는 사기꾼에 가까운 중고차 매매업자로 돈밖에 모르고, 어머니는 게임과 사치에 빠져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그러던 어느 날 TV나 보라며 책을 빼앗는 아버지에 화가 난 마틸다는 저도 모르게 눈빛으로 TV를 망가뜨리고, 자신도 몰랐던 초능력을 발견한다. 이후 학교에 들어간 마틸다는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자 자신의 초능력으로 못된 어른을 혼내주기 시작한다. 로얄드 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로얄드 달 특유의 위트와 풍자로 무책임하고 부조리한 어른의 모습을 꼬집는다. 권선징악의 전개를 성실히 따라 극이 진행될수록 사이다를 마신 듯한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마틸다의 똘똘한 표정과 야무진 말투가 흐뭇한 미소를 자아낸다.
2. 애니 (Annie, 1982)
“사랑 대신 구박을 받아. 키스 대신 매를 맞아.” 구슬픈 가사와는 달리 씩씩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는 아이들. 이내 분주한 몸짓으로 집안일을 거든다. 그 중심에 애니(아이린 퀸)가 있다. 뮤지컬 영화 ‘애니’는 1933년 공황기, 미국 뉴욕의 아동 보호소에 사는 애니가 친부모를 찾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앞서 나온 가사처럼 아이들의 보호소 생활은 녹록지 않다. 보호소 원장이 시키면 한밤중에도 일어나 청소를 해야 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멱살을 잡히기도 한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아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만, 애니는 친부모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희망을 품고 지낸다. 그러던 중 억만장자 워벅스(알버트 피니)가 보호소를 찾아 애니를 양녀로 삼으려 하는데, 친부모가 그리운 애니가 이를 거절하자 얼떨결에 ‘친부모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애니’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애니의 명랑한 태도와 사랑스러움을 극찬한다.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하는 영화지만, 손주가 더욱 보고 싶어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3. 보스 베이비 (The Boss Baby, 2017)
탱탱한 볼살에 솜털 같은 머리카락. 영락없는 아기의 모습인데, 어딘가 이질적이다. 옷은 쫙 빼입은 양복 차림에 표정은 인생 2회 차인 듯 매사가 따분해 보이고, 목소리는 중년 남성처럼 중후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 베이비’(알렉 볼드윈)는 ‘베이비’가 아니다. 아기인 척하는 기업의 ‘보스’다. 영화 ‘보스 베이비’는 7살 팀의 집에 베이비 주식회사의 CEO가 경쟁업체인 퍼피 주식회사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아기로 위장을 하고 들어오는 이야기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아기 행세를 하다 팀 앞에서만 본래의 성격으로 돌변하는 보스 베이비의 발칙한 행동이 웃음을 유발한다. 영화는 어린 시절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형제간의 다툼과 화해, 성공에 대한 열망 등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본 감정을 기발하게 표현해 연령을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또 본의 아니게 한 팀이 되어 투덕거리면서도 우애를 쌓아나가는 두 주인공의 귀여운 동맹이 감동을 자아낸다. 보스 베이비의 귀여운 매력에 홀딱 빠졌다면 넷플릭스 독점 만화인 ‘보스 베이비: 돌아온 보스’를 이어 봐도 좋다.
2030세대는 모든 게 빠르다.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어 있고, 며칠 전 신나게 쓰던 신조어는 한물간 취급을 한다. 좁히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세대 차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20대 자녀, 혹은 회사의 막내 직원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시니어를 위해 알다가도 모를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최신 문화를 파헤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소개한다.
한때 연예인 박명수가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남긴 어록이 유행을 끈 적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는 피곤하다’, ‘티끌 모아 티끌’ 등 노력하면 결실을 맺는다는 뜻의 속담을 거꾸로 패러디한 것이다. 성과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끝없는 도전에 지친 청춘들은 그의 어록에 공감했고, 무한 경쟁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회적 인정보다는 개인의 만족과 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다. ‘힐링’과 ‘소확행’이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키워드였다.
그런데 최근 MZ세대가 달라졌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욜로(YOLO)’를 외치던 이들이 다시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자격증·영어 성적 등 정량적인 스펙을 높이기 위한 과거의 자기계발 트렌드와도 다른 모양새다. 그저 사소한 계획 몇 가지를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전부다. 계획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이용하기, 밤 12시 이후 휴대폰 보지 않기 등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하루 30분 책 읽기, 요가 1시간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는 저서 ‘밀레니얼-Z세대 트렌드 2021’에서 이 같은 현상을 ‘일상력 챌린저’라고 명명했다. 엄격한 목표 대신 ‘자기 관리’ 혹은 ‘자기 돌봄’ 차원에서 일상 속 작은 도전을 이뤄나간다는 의미다.
◇ 젊은 세대는 ‘미라클모닝’ 열풍
여러 습관 챌린지 가운데 소셜미디어(SNS)에서 인기 있는 것은 ‘미라클모닝 챌린지’다. 미라클모닝 챌린지는 2016년 ‘미라클모닝’이라는 자기계발 서적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새벽에 일어나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유튜버 ‘김유진 미국변호사’가 2019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비결을 담은 영상을 올린 후 관심이 급증했다. 이 챌린지의 유행으로 지난 1월 책 ‘미라클모닝’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300% 상승하기도 했다.
2021년 2월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미라클모닝’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27만3000건이 넘는 게시물을 볼 수 있다. 챌린지에 참여하는 이들은 기상 인증샷을 찍고 SNS에 진행 상황을 공유한다. ‘챌린저스’, ‘루티너리’ 등 목표 달성 앱의 도움을 받는 이들도 많다. 개인이 만들고 싶은 습관을 정한 뒤 일정 기간 이를 실천하고 인증하는 것이 이들 앱의 공통점이다. 특히 챌린저스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용자들의 인증샷도 볼 수 있어 인기가 많다. 최혁준 챌린저스 대표는 “‘느슨한 연대’라는 말이 있듯이 코로나19로 인해 무기력함을 느끼는 젊은 세대가 생산적인 목표를 함께 달성함으로써 동질감을 얻고 서로를 독려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시니어도 루틴 형성 중요해
미라클모닝 챌린지는 MZ세대 사이 신선한 문화처럼 떠올랐지만,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하워드 슐츠 전 스타벅스 회장,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등 세계를 주름잡은 시니어 리더들은 이미 새벽 기상과 규칙적인 생활의 힘을 극찬한 바 있다. 74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시니어 유튜버 ‘밀라논나’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매일 오전 7시에 일어나 체중을 재고 스트레칭을 하는 등 자신만의 모닝 루틴을 공개하며 건강 비결을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전문가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루틴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시니어는 ‘젊었을 때 다 해봤던 것’이라는 생각에 하루를 흘려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작은 루틴을 만들면 삶에 활력과 성취를 얻을 수 있다”며 “특히 요즘같이 코로나19로 쉽게 무기력해지는 시기에는 더욱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목표가 거창하면 패배감만 커질 수 있으니 ‘동네 한 바퀴 돌기’, ‘화초 기르기’ 등 사소한 일과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 미라클모닝,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꾸준한 도전과 실천으로 인스타그램에서 수천 명의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는 미라클모닝 챌린저 K씨와 L씨에게 그들만의 비결과 변화를 물었다.
K씨(36세·마케터·미라클모닝 8개월 차)
모닝 루틴 알람 없이 5~6시경 기상→샤워 후 커피 마시기→운동(요가 30~40분, 플랭크 200초, 스쿼트 200회)→동네 산책(1만 보 채우기)→인스타그램 인증 게시물 업로드
준비물 시간 기록 앱 ‘타임스탬프’, 영상 편집 앱 ‘키네마스터’, 만보계 앱 ‘페이서’
“루틴을 정해놓고 바로 이어서 하는 게 꾸준함의 비결이에요. 말 그대로 ‘그냥’ 하는 거죠. SNS 덕도 커요. 얼굴도 모르는 동지들과 나누는 ‘좋아요’와 ‘댓글’이 매일 눈을 뜨게 만들어줬거든요. 가끔은 SNS에 인증하기 위해 일어날 정도예요. 무엇보다 자신과의 약속이란 사실을 잊지 않고 하다 보니 작은 성취 경험이 쌓였고, 목표하던 7kg 체중 감량도 성공했어요. 이제는 아까워서 포기 못 해요.(웃음)”
L씨(43세·주부·미라클모닝 9개월 차)
모닝 루틴 눈 뜨자마자 시간 사진 촬영→간단한 스트레칭 후 명상→인스타그램 인증 게시물 및 긍정의 한마디 업로드→모닝 페이지(매일 아침 떠오르는 생각을 3페이지씩 쓰는 것) 작성→독서
준비물 탁상시계, 명상 앱 ‘캄’, 긍정의 한마디가 담긴 책, 공책, 읽고 싶은 책
“4년 전에도 미라클모닝을 시도해본 적 있는데, 그때는 도전과 포기의 반복이었어요. 그러다 코로나19로 일을 그만두고 제대로 해보자 다짐했죠. 이번엔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동기부여가 팍팍 되더라고요. 그렇게 매일 새벽 오롯이 저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면서 제 자신을 더 잘 알게 됐고, 생각도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마음을 정돈하고 시작하는 하루는 확실히 달라요.”
2021 상장 기업 업종 지도 (박찬일 저·에프엔미디어)
2100여 개 주식 종목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마인드맵 형식으로 소개한다. 새로 주목해야 할 5가지 테마와 25개 대표 업종을 정리해 주식 시장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돕는다.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 (마르타 자라스카 저·어크로스)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과학 저널리스트 마르타 자라스카가 600여 건의 논문 분석과 50여 명의 전문가 인터뷰, 현장 조사 등을 통해 노화와 장수에 관한 궁금증을 체계적으로 안내한다.
꼭두각시 조종사 (요슈타인 가아더 저·현대문학)
노년에 접어드는 언어학자가 한 여인에게 자신의 인생을 편지로 쓴 서간체 소설이다. 인생의 황혼기에서도 소속감을 찾는 주인공을 통해 외로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 평 반의 행복 (유선진 저·지성사)
어느 80대 노부부의 인생 회고록. 2015년 갑자기 쓰러진 남편을 돌보며 틈틈이 적은 글을 산문집으로 엮었다. 남편을 향한 미안함과 사소한 일상에 대한 감사함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김인선 저·나무연필)
1950년에 태어나 한 여성과 함께 독일에 사는 70대 여성의 일대기. 48년간 겪은 타지 생활 경험부터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 등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와인잔에 담긴 인문학 (황헌 저·시공사)
와인을 사랑하는 언론인 출신 저자가 와인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해설한다. 와인의 뿌리부터 포도 품종, 라벨 문화의 기원까지 와인에 대한 지식을 다방면으로 제공한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난주 동네 의원에서 폐렴 2차 예방접종을 받았다. 작년에 이어 1년 만인데, 왜 그런지 이번엔 저녁때부터 접종 부위가 붓고 몹시 아팠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몸살을 끙끙 앓았다. 다음 날 의원에 다시 찾아가 엉덩이에 주사를 이쪽저쪽 두 방이나 맞았다. 엎드리지도 않고 선 채로 바지만 까 내리고 주사를 맞았는데, 주사 놓는 사람만 있으면 될 텐데 웬일인지 간호사 두 명이 자기들끼리 잡담하며 내 빈약한 엉덩이를 다 구경했다.
의사는 미안해서 그런지, 첫날 접종을 잘못해서 그런지 이번엔 돈도 받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백신을 앞장서 맞은 수간호사가 방송 인터뷰 도중 실신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종종 실신하곤 했다는데,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으니 다행인 거지. 별말 없이 주사를 맞게 한 의사는 약도 처방해주어 하루 세 번 식후에 약을 먹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딸꾹질이 시작돼 멎지를 않았다. 좀 나아지나 싶어서 어렵사리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내 말을 들으니 내가 잠을 자면서도 계속 딸꾹거렸다고 한다. 참 재주도 좋지. 딸꾹질을 하면서 어떻게 그리 잘 수가 있어?
하여튼 몸살기는 없어졌는데, 아랫배까지 출렁거리는 이놈의 딸꾹질을 어떻게 하나. 나는 늘 하던 방식대로 숨을 참아보았다. 옛 문헌에는 딸꾹질하는 사람에게 “뭘 훔쳐 먹었느냐?” 하고 소리치면 딸꾹질이 멎는다고 돼 있다. 예전에 어른들이 흔히 써먹던 수법이다. 그러나 내가 나더러 소리를 질러봐야 웃기는 일이 되고 말 테지. 아내에게 갑자기 등을 치게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혀를 내밀고 뭐라고 글씨를 쓰면 멎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혀를 내놓고 ‘임철순 나쁜 놈’ 이렇게 써보았다. 그것도 효과가 없었다.
마침 집에 한방 요법으로 손가락 안쪽을 찌르는 전자침법, 사혈침법 책자가 있어 그것도 그대로 해보았지만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하나마나였다. 딸꾹질을 잊어버리려고 일부러 소리 내어 책을 읽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1757년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딸꾹질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편지를 보고 숙식에 별일이 없고 독서에서 맛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으니, 이것이 바로 너에게 바라던 것이다. 어떤 위안이 이만하겠느냐. 다만 딸꾹질로 고생한다고 했는데 이는 먹은 음식이 다 내려가기 전에 독서를 해서 생기는 것으로 다른 치료법이 없다. 그저 식사 후 천천히 걸으며 속이 편안해진 뒤에 느리게 읽다 보면 한참 지나 저절로 나을 것이다.”
독서를 하다 보니 딸꾹질이 생긴다고? 아들을 너무도 좋게 봐주는 거 아니야? 글씨를 좀 더 정성들여 쓰라는 잔소리도 잊지는 않았더라만, 아버지란 그저 아들이 책 읽는 것만 좋아하기 마련인가보다. 원래 부모에게 보기 좋은 건 아이들의 밥 먹는 입이고, 듣기 좋은 건 병에서 물 쏟아지듯 아이들이 글을 좔좔 읽어대는 소리라지?
그나저나 저녁 약속을 어떻게 하지? 원래 연말은 술꾼들이 즐겁고 바쁜 대목인데, 금년엔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약속도 별로 없고 있다가도 취소되는 판에 번개 모임 하나가 모처럼 생겼는데. 몸도 약해진 판에 괜히 나갔다가 코로나라도 걸리면 어쩌지? 몸살이야 나았다 치고, 사람들 만나서 딸꾹질을 해대면 누가 좋아하겠어?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불참한다고 카톡 단톡방에 알렸다. 그랬더니 의사인 친구가 내가 먹는 약에 항히스타민제가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게 딸꾹질을 일으키는 성분일 수 있다는 거였다. 약봉지를 살펴보니 과연 그런 약제가 있었다. 그래서 약은 더 이상 먹지 않고 딸꾹질 봉쇄에 전심전력 성심성의를 다 기울였다.
그리하여 밤 11시 넘어 나는 결국 끝내 드디어 마침내 딸꾹질을 잡았다. 어떻게 했느냐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음, 힘을 주면서 크게, 오래 숨을 참았다. 근데 이때의 “음”은 위 동그라미를 너덧 개쯤 그려야 할 정도의 소리다. 생각해보니 내가 딸꾹질에 시달린 시간은 20시간쯤 되는 것 같다. 이런 정도는 기네스도 뭣도 안 되는 기록이지만 한 가지 깨달은 건 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던가?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은 내 몸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이걸 깨달아 배운 것이다. 다만, 혀에 글씨를 쓰면 어떤 효과와 작용이 있기에 그런 요법을 고안해 낸 건지 그것은 지금도 궁금하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이노우에 가즈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50대부터 덧셈과 뺄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안 쓰는 물건이나 지나간 관계에 대한 집착은 빼고, 비운 공간을 필요한 것들로 채워나갈 때 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빼고, 잘 더할 수 있을까?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브라보 독자를 위해 인생에 필요한 여러 정리법을 3회에 걸쳐 안내한다. 이번 호에서는 노년기 인간관계 재정비 노하우를 알아본다.
어긋나는 관계가 우울증을 부른다
은퇴 후 노년기는 활동 반경이 직장에서 가정으로 전환되어 인간관계가 줄어들고, 사회 참여도가 낮아지는 시기다. 또 배우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고 자녀가 결혼해 출가하는 등 가족관계의 지형이 급변하는 때이기도 하다. 미국의 상담심리학자 세라 요게브는 저서 ‘행복한 은퇴’에서 이런 노년기 관계의 변화를 준비 없이 맞이할 경우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데이비드 웩슬러 역시 저서 ‘관계의 심리학‘에서 중년 이후 최악의 인간관계를 맞이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9년 발표한 보고서 ‘중·고령층 근로활동이 인지기능 및 정신건강에 미치는 효과’에 따르면, 은퇴자는 일하는 중·고령층에 비해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제한된 사회활동과 대인관계의 축소가 우울함의 주된 원인 중 하나라고 봤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일이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큰 역할을 하는데, 은퇴 후에는 이 연결망이 단절되어 자아정체감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공적 관계망의 축소뿐 아니라 은퇴 후 사적 관계망 속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도 은퇴 후 삶의 질을 낮추고 외로움을 증폭시킨다. 특히 살아온 세월 속 쌓인 갈등이 폭발하면서 관계가 망가질 때가 많다. 배우자 및 자녀와의 갈등이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의 불협화음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가 2016년 발표한 ‘4대 관계망을 통해 본 은퇴 후 인간관계의 특징’에 따르면, 배우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늘리고 싶다’고 한 은퇴자보다 6배나 많았다.
이 같은 문제들을 비추어볼 때, 은퇴 후에도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려면 삐걱대는 관계를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 또는 가까운 지인 간 어긋난 부분을 개선하고, 줄어든 인맥을 새롭게 채워나가야 사람 냄새 풍기는 노후생활을 즐길 수 있다.
배우자의 시간과 취향을 존중하라
시니어가 은퇴 후 인간관계 속에서 겪는 대표적인 어려움은 배우자와의 불화다. 부부 갈등은 시기별로 언제나 존재하지만, 은퇴 후에는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더 잦은 다툼이 일어난다. 또 부부관계를 지탱해주던 자녀가 결혼이나 취업 등의 이유로 독립할 경우 별것 아닌 일로도 큰 싸움을 하기도 한다. 특히 코로나19를 겪었던 올해처럼 외출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생기면 부부간 마찰을 빚을 확률이 높다.
평화로운 부부관계를 위해서는 ‘따로 또 같이’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함께 보내는 시간과 혼자만의 시간을 균형 있게 배분하고, 각자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부 여행을 갈 때 자신의 여행 스타일을 고집하는 대신 반나절 정도만 함께하고, 나머지 시간을 각자 원하는 곳에서 보낸다면 다투지 않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부부간의 대화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의견 차가 생기더라도 생활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상의하고 조율해야 한다. 대화를 나누는 중 언쟁이 벌어질 때는 ‘싸움 규칙’을 세우는 것이 좋다. ‘집 나가지 말기’, ‘문제가 되는 것만 얘기하기’, ‘이혼 들먹거리지 말기’ 등 갈등의 불씨를 키우는 행동을 금지하고, ‘먼저 사과하기’, ‘화가 풀리지 않았더라도 손 잡아주기’ 등을 규칙으로 정하면 잦은 싸움을 줄일 수 있다.
스포츠부터 종교, 봉사, 명상, 요리, 예술 등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찾는 것도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 중 하나다. 취미활동을 같이 하다 보면 자연스레 화젯거리는 늘고,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때 자신의 취미를 배우자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배우자의 취향에 관심을 보이면서 함께 배워보려는 포용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배우자를 향한 비현실적인 기대는 줄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는 자식 간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 소장은 “가족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자 출발점”이라며 “배우자가 자신을 위해 희생해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은 비우고, 서로의 노고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력적인 벗이 되어라
가족을 제외하면, 은퇴한 시니어의 인간관계는 학창 시절 동창 등 친밀한 관계 위주로 재편된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라고 모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를 쓴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는 “핸드폰 속 전화번호부에 수백 명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만, 정작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없는 은퇴자를 많이 만나봤다”며 “인맥의 많고 적음보다는 마음 맞는 관계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매일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세 명만 있어도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봐도 양보다는 질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말끝마다 불평불만을 쏟아낸다거나 걸핏하면 화를 내는 등 만났을 때 기분 좋은 에너지보다 불편함을 주는 사람은 알고 지낸 세월에 관계없이 자연스레 꺼려지게 마련이다. ‘앵그리 올드’(Angry old, 성난 노인)가 판치는 세상에 ‘앵그리 프렌드’와 가깝게 지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자주 만나고 싶은지, 또는 만나고 싶지 않은지 생각해보면서 자신 역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한다.
매력적인 친구가 되려면, 힘든 일이 있을 때 위로하고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는 태도 도 중요하다. 가령 독서모임에 가입하자고 제안하는 친구에게 “이 나이에 눈도 피곤한데 무슨 책을 읽느냐”며 재를 뿌리는 대신, “용기가 부럽다”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면전에 대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애정 어린 관심으로 지적을 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결국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은 바로잡아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좋은 벗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만남으로 삶을 물들여라
하지만 같이 있으면 편하다는 이유로 친구관계에 ‘올인’해서도 안 된다. 가장 최근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은퇴 직전까지 함께한 공적 관계망의 사람들이다. 이들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친구와는 또 다른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뜻밖의 만남에서도 소중한 인연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관계맺음에 도전해보는 것도 유의미하다. 예컨대 영화나 악기, 특정 스포츠 등 관심사나 흥미를 공유하는 모임에 가입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나 조건에 따라 관계를 구분 짓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유연한 시각과 공감 능력을 갖추고, 나이 차이가 나도 절친이 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젊은 세대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신선한 자극도 받고, 배울 건 받아들이다 보면 삶은 더욱 풍성해진다.
과거에는 평균수명이 60~70세였다. 이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녀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100세 시대인 오늘날은 자녀와의 관계만큼이나 부부, 친구, 사회적 관계가 중요해졌다. 노후에는 특히 열정을 나눌 관계에 투자하고,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은퇴 후에도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며 인생을 풍부하게 채워나갈 수 있다.
도움말 강학중 가족경영연구소 소장,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
민간·공공기관 퇴직자로 구성된 ‘월드프렌즈 NIPA 자문단’(이하 NIPA 자문단)은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단 사업으로, 개도국 정부 및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전공 분야의 기술 및 산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전수하고 있다. 정보통신, 산업기술, 에너지자원, 무역투자, 지역발전 등의 자문을 통해 파견국의 경제, 사회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퇴직 후 자신의 경력을 나눈다는 보람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성장에 일조했다는 자긍심까지 느낀다는 그들. NIPA 자문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미래를 여는 사람 ‘퓨처 오프너’(future opener). NIPA 자문단원 유기열(73) 씨가 직접 지은 닉네임이다. 1970년 전북 순창북중고등학교 교사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6년 제12회 농림기술고시에 합격, 이후 30년 넘게 농림수산부 본부와 산하기관에서 근무하다 국립종자원 서부지원장으로 정년을 맞았다. 자신의 닉네임에 걸맞게 퇴직 후에도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현직을 겸하며 전북대학교 외 3개 대학에서 20년간 초빙강사로 활동했습니다. 정년 후에도 강의를 이어가면서 숲해설사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2009년부터 국립수목원에서 숲해설사로 활동하다가, 2012년 말 KOICA 자문관 겸 르완다대학교 농대 교수직을 맡게 돼 르완다로 떠났습니다. 좀 더 머물 수 있었는데 집에 일이 생겨 빨리 귀국했죠.”
그는 르완다에서의 경험을 담은 글을 SNS에 올렸고 모인 글들은 ‘아프리카의 심장 르완다’와 ‘눈에 밟혀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그래도 못내 아쉬움이 남았던 것일까. 그는 NIPA 자문단의 이름으로 다시 개도국 쪽에 발길을 돌렸다. 이번엔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에서 마주한 과거의 ‘나’
그는 이미 르완다에서 NIPA 자문단에 대한 정보는 물론, 실제 활동하는 이들까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곳이 나타나길 기다리던 차, 베트남에서 농산업기술과 관련한 자문을 원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막힘없이 지원했고, NIPA 자문단이 되어 한국-베트남 인큐베이터 파크(KVIP)로 향했다.
“베트남을 비롯한 개도국들은 경제 및 과학기술 등이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 역시 역사가 짧고 기술력이 좋지 않았죠. 젊은 인력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서일까요? 타임캡슐이라도 발견한 듯 젊은 시절이 떠오르더군요. 저와 한국이 발전했던 것처럼, 그들도 제대로 된 교육과 훈련을 거치면 충분히 성장 가능하리라 판단했죠.”
시간을 거슬러 ‘청년 유기열’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는 베트남 청년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 밖에도 그에겐 3가지의 목표가 주어졌다. 첫째, 벼 가공시설을 포함한 농수산식품 가공장비의 정상화. 둘째, KVIP 창업입주회사에 대한 자문. 셋째, 메콩 델타지역 농수산업, 특히 쌀 생산, 가공, 저장 및 유통에 대한 자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초 요구했던 것들을 거의 100%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수십 년간 전문 분야의 이론과 현장을 모두 경험한 덕분인 것 같아요. 개인적인 보람과 즐거움도 있지만, 제 성과로 두 나라가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아 자긍심이 생기더군요.”
겸손한 마음이 보람을 키운다
정책 자문 이외에도 기술이전, 교육, 세미나 발표, 학회 기고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스스로 많은 일들을 찾아 하고자 했다. 덕분에 성취감과 만족감 또한 높았다고.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며 NIPA 자문단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을 들려줬다.
“파견 전 준비할 건 크게 3가지가 있어요. 우선 건강, 그리고 자기 분야의 전문 지식, 마지막으로 그 나라의 언어입니다. 그렇게 잘 준비해서 갔다면, 이제 필요한 건 겸손한 마음이에요. 개도국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대접받으려 하면 안 됩니다. 그 나라에도 유능한 전문가가 있는데 나만 잘났다고 위세를 부려서도 안 되고요. 겸손하고 경청하는 자세로 다가가야 그들도 마음을 열고 자문 내용을 잘 수용하려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견 충돌이 일어나 업무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죠. 그만큼 보람도 적을 테고요.”
그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주고 오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받은 게 더 많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NIPA 자문단으로 활동하며 얻은 보람과 자신감, 즐거움 등은 그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열쇠 꾸러미 역할을 했다.
“정년은 지났지만 퇴직은 아직 하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벌써 2021년이 다가오네요. 현재 활동 중인 GLG 그룹 컨설턴트 일을 계속하며, 조만간 르완다처럼 베트남에서의 이야기로 책을 내려고요. 또 최근 고경력과학기술인 자격을 얻었는데, 그에 관한 활동도 해나갈 예정입니다. 독서코칭에도 관심이 생겨 그쪽으로도 활동 범위를 넓혀보려 해요. 그걸 다 해내려면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니, 매일 ‘만 보 걷기’도 해나갈 계획입니다.”
△ 유기열 자문관
ㆍ파견 국가 베트남
ㆍ파견 기간 2017년 8월 14일~2019년 8월 13일
ㆍ파견 분야 산업기술
ㆍ파견 직종 농산업기술
ㆍ파견 기관 한-베 인큐베이터 파크
ㆍ자문 내용 농수산물 가공 산업 자문 및 시설 정상화
7년 전, 신아연(57) 소설가는 옷가방 두 개를 거머쥐고 21년간 살았던 호주를 떠나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국에 돌아왔을 땐 그야말로 맨몸뚱이뿐이었다. 월세 36만 원짜리 고시촌에서 김밥 한 줄로 하루를 때우며, 그녀가 허비 없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글쓰기였다. 수행처럼 글을 닦자 이윽고 ‘내 인생’을 찾고 싶다는 무의식이 샘솟았고 흐느적대던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의 질곡에서 붙잡았던 글들을 모아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을 내놓았다.
신아연은 스스로 책을 통해 위로를 얻는 사람이라 말한다. 마치 젓갈이 절여지듯 독서에 푹 잠긴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고. 그런 그녀가 이번 책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려는 위로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인간의 위대함은 운명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운명을 그대로 살아내는 데 있다고, 그것이 운명을 바꾸는 길이자 본래 자기로 사는 모습이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따금 내가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인생이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부하려 발버둥 쳤지만 결국 그 길, 그러한 운명을 가는 자신을 보면 그것이 내게 주어진 삶의 몫이고, 그것을 통해 배울 점이 있다는 거죠.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약점이나 모자람 등이 나를 성장시키고 타인을 위로한다는 걸 깨달을 때 지금의 처지도 순식간에 살 만한 자리로 변합니다. 제목처럼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다면 그대로 인정하고 껴안아버리자는 거죠.”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 그녀가 삶에서 나아지지 않지만 껴안아야 했던 것은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시국사건에 연루된 무기수였기에 가족들은 죄인 취급을 받으며 억눌려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불현듯 한국으로 돌아온 까닭도 그러했다. 결혼하자마자 호주로 이민 가, 20여 년을 매 맞는 아내로 살며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것. 좁은 교민사회에서 위로는커녕 가정폭력을 감추는 데 급급해 스스로 고립된 채 자신을 잃어갔다. 그렇게 다시 자기 인생을 찾기 위해 택한 이혼, 그 후 수순처럼 따라온 건 절박한 가난이었다.
“아픈 가족관계가 제겐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인정하고 살아갈 수밖에요. 그런데 그 아픔은 깨진 항아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길을 촉촉이 적시며 오종종히 꽃을 피우듯 나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었죠. 한국에 돌아와 겪은 가난 역시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주고 현실을 직시하게끔 도왔습니다. 방세를 내면 식비가 없어 굶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벼랑 끝 순간들 덕분에 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고요.”
더는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인정하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였고, 차츰차츰 일어설 수 있었다. 비로소 ‘내가 나로 산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생겨났다. 그녀는 그렇게 꿋꿋이 홀로 견뎌낸 세월이 자신의 고유함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존재라는 걸 명확히 인식해야 해요. 과연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내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질문해보세요. 굳이 남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의 삶을 산다면 누군가를 흉내 내거나 부러워하며 내 모습이 아닌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곰이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웅녀가 된 것처럼, 저는 4.5평 원룸에서 책과 글만 먹으며 견뎠어요. 그 지난한 시간이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제 고유함이 되어 가난과 고독을 품고 살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고유함을 키우기 위해 신아연은 3년 전부터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3시간 동안 글을 쓰는 ‘글 수행’을 자처했다. 자칫 고독한 행보로 여겨질 수 있는 나날들이었지만 그녀에겐 오히려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로 작용했다. 수행의 산물과 같은 이번 책은 ‘영혼의 혼밥’이라는 주제로 자생한방병원 블로그를 통해 독자들과 나눈 글을 추려 엮은 것이다.
“제게 글은 숨쉬기와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써야 하고, 써야만 살아지니까요. 또한 혼자 살아가는 자신을 다잡는 수행의 방편이기도 하죠. 그럼에도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소통해야 합니다. 가령 한 편의 글에서 글쓴이는 80%의 수고를 하고, 나머지 20%는 독자들이 채웁니다. 소통이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지요. 고맙게도 이메일, 문자, 댓글 등으로 피드백을 자주 보내주셔요. 저 또한 독자들과의 교감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게 참 많습니다.”
중년, 인생의 목차를 정리할 때
독자와 함께 일군 300편의 글 가운데 100편의 글이 책 속에 담겼다. 자신의 지난 글을 다시 읽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하나하나 소중하고 의미가 있을 터, 어떤 기준으로 글을 갈무리했는지 궁금했다.
“‘인생은 목차’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책을 낼 때 목차를 명확히 나누고 의미별로 파트를 구분하면 내용은 저절로 정리돼요. 삶도 마찬가지죠. 뒤섞이고 흩어져 있을 때는 길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럴 때 인생을 목차로 나눠 보면 삶은 더욱 명료해집니다. 또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중년이 되면 인생 성적표가 나오죠. 저는 가정 경영에서 낙제점이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게 현실인 것을요. 다만 이제는 다른 목차, 다른 여정으로 가야겠죠. 이번 책은 제게 혼자 가야 하는 후반생의 새로운 목차와 같습니다. 스스로 정리한 목차이기에 여생의 충실한 이정표가 되리라 생각해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그녀의 2020년 목차는 무엇으로 채워졌을지, 또 2021년을 채우게 될 목차는 무엇일지 물었다.
“올해의 키워드는 단연 ‘코로나19’죠. 저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요. 어차피 글을 쓰고 책 읽는 게 전부인 일상이었으니까요. 혼자 살고, 혼자 일하면서 코로나19와의 거리두기가 저절로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의 목차는 글쓰기와 책 읽기를 두 축으로 한 고독과 가난, 치유와 인내가 되겠네요. 남은 12월은 마무리와 시작이 맞물리니 잘 해냈고,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생채기 난 것들의 회복이라 하겠어요. 2021년엔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의 화해와 존중, 인간 간의 연민과 연대가 중요하리라 봐요. 개인적으로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 독자들과의 우정, 두 아들과의 이해 어린 사랑, 저 자신에 대한 용서, 창의, 자유 등을 새해 목차로 삼고 싶습니다.”
클래식 vs 클래식
김문경 저
동녘·1만8000원
매년 연말에는 한 해를 따뜻하게 마무리해줄 클래식 공연들이 관객을 찾아온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선율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만, 곡이 만들어진 배경이나 작곡가에 대한 숨겨진 비화 등 관련 지식을 알고 나면 감상의 재미는 배가 된다. 올 연말 클래식 공연 관람을 앞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는 것도 좋겠다.
KBS 클래식 FM ‘생생클래식’에서 매일 쉽고 흥미롭게 클래식을 설명해준 김문경 음악칼럼니스트의 신간 ‘클래식 VS 클래식’은 클래식 음악의 여러 법칙을 ‘라이벌’ 구도로 해설한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과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통해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 독주자가 등장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설명하고, 쇼팽의 ‘에튜드-흑건’과 모차르트 ‘작은별 변주곡’을 통해서는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의 차이를 분석한다.
클래식 ‘왕초보’라면 이마저도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저자는 두 음악을 단순히 비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차이를 대중가요, 영화, 소설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와 비유하며 이해를 돕는다. 예컨대 독주자가 화려한 기교를 부리는 ‘카덴차’를 기나긴 애드리브로 유명한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에 빗대고, 클래식에서 첫 시작의 힘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 ‘오만과 편견’,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인용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독서와 음악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각 장에 저자가 설명한 곡이 QR코드로 수록돼 있어 카메라를 갖다 대면 공연 실황 영상이 재생된다. “클래식 음악의 한복판에 직접 뛰어든다”고 표현한 저자의 말처럼 책을 펼치는 순간 공연장에 와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치 숨어 있듯 조용히 자리 잡은 동네 책방을 발견하면 설렌다. 서점은 어디에나 있지만 동네 책방은 그렇지 않다. 어디에나 없어서 특별하다. 언제부터인가 여행 중에 들러볼 코스로 동네 책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여 거리의 당진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낡은 이층집이 포근하게 안고 있는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났다.
당진의 면천읍성은 ‘성안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저 길목들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산책이 시작되면서 드는 생각은 ‘이 마을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가 있는 게 분명해’였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며 찾아온 듯하다.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발소, 상호의 글자가 반쯤 떨어져나간 중국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인적 드문 조용한 그 길을 따라 옛 면천초등학교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낡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다.
동네 책방의 꿈을 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넘겨보기도 하고 한참을 서서 책을 읽어도 주인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 도중에 “어서 오세요”라고 눈인사를 했던가. 하던 일이 끝나가는 것 같아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선한 웃음으로 맞는다. 책방 주인 지은숙 대표다.
그녀가 이 집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고 한다. 당진에 살면서 면천읍으로 가끔씩 놀러갔는데 그때마다 운명처럼 자꾸만 이 집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10여 년 전에 이 건물을 처음 봤어요. 면천에 놀러 가면 우연히 지나가다가도 늘 이 집이 제 눈에 확 띄었어요. 독특한 외양이었죠. ‘저 집에 책방을 차리면 참 좋겠다’ 했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찜하고 있었죠.”
‘자전거포’였던 이 집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수년간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 대표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며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관심만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시기적으로 맞아서 사들이게 되었다. 지은 지 60년이 넘은 낡은 집이었다. 손볼 데가 하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골조는 그대로 살린 채 몇 달 동안 남편이 고치고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냈다.
책방 이름 ‘오래된 미래’는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왔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 사람들이 그 지역의 땅과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 공생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 대표는 책방을 열면서 면천이라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유의 가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참 많이 고민했던 책방 이름이 정해지고 나니 의도에 맞게 착착 일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책방이 있는 면천읍성이 유적지라 개발도 제한되고 어르신들만 사는 곳인데 왜 하필 그런 동네에 책방을 내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제2의 인생 ‘무엇’이라고들 하잖아요. 저 역시도 처음엔 책방을 차린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했어요. 다들 걱정을 했으니까요. ‘돈 버는 일’을 해야지 다 늦은 나이에 무슨 ‘하고 싶은 일’을 하냐면서요. 더구나 여기서 책이 팔리겠냐고 했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책방 주인을 꿈꾸기도 한다. 지 대표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 국문학도 출신. 한때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할 때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5~6년 동안 작은 책방 투어도 많이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방을 검색하고 새로운 책방이 어디에 있나 들여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간절히 원하면 마음을 담아보세요”
“꼭 해보고 싶으면 해봐야 알지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미루어 짐작만 하면 결과를 알 수 없잖아요. 뭐든 마음이 간절하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간절함이 용기를 갖게 하더라고요.”
예쁜 카페나 책방 여는 걸 꿈꾸면서 잘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났지만 그래도 꿈만 꾸지 말고 저질러봐야 진짜 그 과정을 아는 것이라고 지 대표는 경험자로서 말한다.
“‘내가 책방을 열면 손해 보는 게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죠. 크게 타격이 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큰 수익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요. 그렇지만 타격이 크다면 바로 멈춰야죠. 시니어 세대들이 버티거나 고집부리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상황에 따라선 포기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방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기에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던 어느 날 꿈을 포기하게 될까봐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어요.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저런 상처도 받겠지만 내 마음을 담아 한다면 극복이 되지 않을까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그녀의 과정을 짐작케 해줬다.
사람들은 묻는다. “책방 해서 돈 많이 벌어요?”라고. 지은숙 대표는 사실 수익을 찬찬히 따져보면 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고 말한다. 정말 책만 사러 오는 사람이 뭐 그리 많겠냐고 반문하며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했다.
‘동네’라는 지역사회에서 만나 함께 수업을 하고 뭔가를 같이 꾸려가는 것, 그런 게 너무 새롭고 에너지가 생기고 힘이 난단다. 예쁜 소품이나 달력을 하나 만들어 와서 책방 공간에 놓아주는 소소한 마음들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면서 진달래꽃이 그려진 지도를 가리킨다. 이야기가 있는 면천 마을에 오신 분들이 읍성이나 책방만 쓰윽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좋은 사람들과 마을지도를 만들어 면의 지원을 받아 배포했는데 그 결과물이 뿌듯하단다. ‘오래된 미래’는 어느덧 책만 파는 동네 책방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가치까지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지 대표는 그 어엿한 입장을 무척 기꺼워한다.
“우리 동네를 사랑해요”
지은숙 대표는 ‘오래된 미래’가 일반 책방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다행스럽고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시내 도서관 프로그램을 이곳에서 만들어 배달 강좌도 한다. 재능을 가진 분들이 주거지에서 가까운 책방을 통해 동네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고, 작가와 함께 북 토크도 열고, 바느질·면천 역사 수업·독서모임·영화보기 등도 진행했다. 특히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각자 책을 만들고 나름의 출판 기념도 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책방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시골 마을의 책방이지만 책이 제법 많다. 책방지기의 책 욕심 때문이다. 처음에 책방을 연다고 하니까 다들 북 카페도 함께 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지 대표는 책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이 도서관은 아니므로 책을 읽으며 차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최소한의 음료를 준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미래’의 모든 책은 제가 선택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비슷해서인지 반품하는 책들이 거의 없어요. 잘 모르는 책은 딱 한 권만 주문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은 쌓아놓고 팝니다. 저는 일상적인 책들을 좋아해요. 특히 3~5권 정도 낸 작은 출판사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내용들이 너무 좋아요. 때로는 손님들이 이 책 괜찮다며 알려주기도 해요.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런 말씀 해주시면 고맙죠.”
둘러보니 어쩐지 주인을 많이 닮은 것 같은 책방이다. 책방지기로서 애착이 가는 코너도 있을 듯싶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책이 있는 코너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가 들어 있는 책은 다 구해서 갖다놓고 싶어요. 그림책 코너도 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이랑 오면 아이 책만 고르는 게 늘 마음에 걸려요. 엄마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을 편안히 골라 읽으면 좋겠어요.”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편안한 공간을 그대에게 허하노라” 하는 것 같아 고마운 느낌이 확 든다. 한쪽 옆으로는 책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방이 열려 있다. 배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방이다. 천장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공간에는 둥근 탁자와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거나 조용히 앉아 책 읽기 딱 좋아 보인다. 햇살 잘 드는 창 너머로 보이는 옛 면천초등학교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豊樂樓)가 고즈넉했다.
옆으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면 면천 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내려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사는 다소곳한 가정집들이 보인다. 깨끗하게 빤 빨래가 빨랫줄에 나란히 걸려 가을볕에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마당 끝에는 북 스테이로 활용하는 방도 하나 있는데, 이 방을 이용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면천에 머물면서 마을을 즐기고 책방을 이용해 쉼을 얻고자 하는 여자여야 한다. 식사 제공은 없는 단출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아침이면 자기도 모르게 누룽지를 끓여다준다면서 지 대표는 또 하하하 웃는다.
동네 책방이 주는 또 다른 가치 ‘나눔’
그러고 보니 ‘오래된 미래’에는 오래된 책을 따로 구비해놓은 공간도 있다. 책방을 하다 보니 옛날 책들도 정겹고 애틋해 한쪽에 코너를 만들었단다.
“책의 가치는 읽는 사람이 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변한 책들도 데리고 살기로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책방 입구 벽면에는 세 칸의 ‘나눔 책장’이 있다. 여기에 놓인 책들은 팔지 않는다. 누구라도 마음껏 가져다 읽으면 된다. 간혹 자신이 다 읽은 책을 기증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 가져오면 경우에 따라 헌책 값을 계산해주기도 한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나눔의 의미를 공유하는 좋은 아이디어다.
요즘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다.
“책방을 시작하는 이들의 계층 분포도가 의외로 넓어요. 젊은이들도 있고 퇴사한 중년이나 시니어들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대부분 임대를 얻어서 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돼요. 시니어들은 저처럼 수년씩 고민해서 결정하거나, 또 사는 집에 딸린 공간을 이용하는 분이 많아요.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임대료 부담에서 좀 더 자유롭죠. 그래서 오래가는 게 아닐까 싶네요.”
면천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주는 고즈넉함, 그 분위기 속에 ‘오래된 미래’는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지낼수록 점점 더 애착이 간다는 책방지기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네 책방이 주는 가치가 충만한 시골 마을의 가만가만한 가을 한나절이 따스했다. 문은 연 지 아직 2년 남짓밖에 안 되어 서툴렀던 부분도 있었다. 그걸 조금씩 보완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하고 싶은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지 대표는 밝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책방을 하고 싶었던 오랜 꿈이 이루어져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오랜 시간 죽음을 공부했던 김이경(56) 작가는 가족과 지인들의 생사기를 목도하며 관념 속에 있던 죽음의 실체를 경험하게 된다. 평생의 스승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기 생의 일부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성찰로 긴 애도기를 거친 그녀. 자신을 위무했던 죽음의 통찰을 담은 글귀를 모아 ‘애도의 문장들’(서해문집)을 펴내며, 애도의 시간을 보낼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Q. ‘애도의 문장들’을 펴내게 된 계기와 소감이 궁금합니다.
책을 내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한 5년 전부터였어요. 중간에 몇 번 포기도 했고, 출판사랑 계약을 파기한 적도 있었죠. 그러다 20년가량 고민해온 죽음에 대한 문제나 그사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는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매듭짓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숙제를 한다는 생각으로 마친 거죠. 사실 책이 나오고 큰 만족감은 없었어요. 해냈다는 건 뿌듯하지만, 잘했다는 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죽음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은 끝이 아닌 시작이고, 잠시 마침표를 찍은 거라 생각해요.
Q. 공부를 통해 관념적으로 알던 죽음과 실제 가족과의 이별을 통해 경험한 죽음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젊었을 때는 죽음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같아요. 가령 천재들은 요절한다거나 이런 얘기를 들으면, 죽음이 두렵거나 무서운 게 아니라 ‘짧고 굵게 사는 거지 뭐’라는 식으로 쉽게 생각했던 거죠. 그러다가 가족이 병에 걸리고 생사를 달리하는 과정 등을 보면서 ‘아, 죽음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면 그 죽음은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삶까지 크게 좌우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있는 거였죠. 어쩌면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움을 갖는 건 인생을 잘 모르기 때문일지 몰라요. 그래서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Q. 제목처럼 책에는 애도에 관한 문장들이 나오는데, 그중 자신에게 가장 위안이 됐던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책에 언급한 문장 하나하나 제게 위안이 된 셈이죠. 그래도 가장 마음에 남는 걸 꼽으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발견한 문장이에요. 아버지의 묘비명에도 쓰였는데, 아마 일종의 인생 후반기 좌우명처럼 생각하신 것 같아요. ‘모든 상대는 흐르는 물과 같다’는 거죠. 그 상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감정이 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모든 것은 계속 흘러간다는 거죠. 그러니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느끼는 이 슬픔이나 절망도 언젠가는 다 흘러간다는 거잖아요. 그 문장에 많이 기대고 위로받았습니다.
Q. 아버지는 인생의 멘토와도 같은 분이라고 하셨죠. 삶의 끝자락에서 아버지가 남긴 죽음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요?
언젠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죽음이 오면 저런 노을빛 같이 올까?’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아버지는 ‘죽음은 이런 거야’라는 식으로 단정 지어 말씀하신 적은 없어요. 사후세계나 이런 부분도 제가 여러 번 물어야 조금 이야기하신 정도였죠. 아마 그런 고민들에 대한 답은 ‘네 몫이다’라고 여기신 것 같아요. 다만 그건 확실히 말씀해주셨어요. ‘두려워할 건 없다’는 거죠. 제가 아버지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겁이 난다고 하면, 그럴 필요 없다고 다독여주셨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착하게 살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려서는 그런 말씀을 안 하셨는데, 저도 나이 들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남다르게 와 닿더라고요.
Q. 웰다잉이 곧 웰빙이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20년 가까이 죽음을 공부하면서, 달라진 일상의 변화나 태도가 있다면요?
섣불리 죽고 싶다는 말을 안 하게 됐다는 것과 타인의 상황에 대해 쉽게 얘기하지 않게 된 거죠. 특히 누군가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그게 당사자에겐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기에 더욱 조심하려 해요. 혹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어쩌면 그에게 말 못 할 두려움이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요. 아, 파리나 모기도 잘 못 죽여요.(웃음) 그만큼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 진지해진 것 같습니다.
Q.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좋은 애도’는 무엇인가요?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나는 괜찮아. 잘 살아왔어’라며 본인 스스로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아마 주변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겠죠. 물론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 애초에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진 편이긴 하지만요.
또 ‘좋은 애도’를 위해서는 충분히 슬퍼하고,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가령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왜 그리 슬픈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충분히 나이가 드셨고, 당신께서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셨는데, 결국 그분을 잃어 슬픈 건 내 문제잖아요. 애도기 동안 떠난 이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묻고, 내 삶에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정리하며, 결국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보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그런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잘 기다려줬으면 좋겠어요. ‘뭘 그리 오래 슬퍼해?’라는 식으로 무심코 던지는 말이나, 마음대로 단정 지어 내뱉는 조언은 애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Q. ‘좋은 죽음’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사실 지금도 많이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봐요. 갑자기 아프고 병이 든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확 줄어들잖아요. 소위 환자가 되면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인생이 과연 내 의지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에게 매일 물어봐요. 지금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잘살고 있나 하고요. 스스로 조금 두려운 순간이 찾아오면 ‘지금까지 잘하고 있었으니 괜찮아’라고 자신에게 얘기하고요.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제 혼(魂)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지 않도록 늘 그런 말들을 상기해두려 하죠.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공부하려 애쓰는 것도 그러한 노력 중 하나고요.
Q. 중장년 세대는 죽음과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아직 이에 대한 인식이나 준비가 덜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독서회를 오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가장 읽기 싫어하는 주제가 바로 ‘죽음’입니다. ‘나는 죽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이들조차 꺼리더군요. 저는 그럴수록 일부러 죽음에 대해 읽게 하고 대화를 나누자고 권해요.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겸손해지는 거라고 봐요. 내가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주니까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갖고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처음엔 관심 없던 분들도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인생관을 털어놓게 되죠. 그런 대화를 통해 관계는 깊어지고, 인생도 더욱 잘 살아낼 수 있어요. 사람은 살던 대로 죽는 거잖아요. 잘 사는 게 곧 잘 죽는 것이죠. 그러니 죽음을 너무 멀리 보고 막연히 두려워 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 김이경 작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대학 강사를 하다 학계를 떠난 뒤 도서관에서 혼자 ‘죽음, 시간, 여성’ 등을 주제로 공부했다. 우연히 인연이 닿은 글두레 독서회에서 26년째 강사를 하고 있다. 뒤늦게 출판사에 취직해 다양한 책을 만들었으며, 책을 주제로 한 소설집 '살아 있는 도서관'을 내면서 작가로 전향했다. 이후 '마녀의 독서처방', '마녀의 연쇄 독서', '책 먹는 법', '시의 문장들', '시 읽는 법' 외 다수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