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난주 동네 의원에서 폐렴 2차 예방접종을 받았다. 작년에 이어 1년 만인데, 왜 그런지 이번엔 저녁때부터 접종 부위가 붓고 몹시 아팠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몸살을 끙끙 앓았다. 다음 날 의원에 다시 찾아가 엉덩이에 주사를 이쪽저쪽 두 방이나 맞았다. 엎드리지도 않고 선 채로 바지만 까 내리고 주사를 맞았는데, 주사 놓는 사람만 있으면 될 텐데 웬일인지 간호사 두 명이 자기들끼리 잡담하며 내 빈약한 엉덩이를 다 구경했다.
의사는 미안해서 그런지, 첫날 접종을 잘못해서 그런지 이번엔 돈도 받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백신을 앞장서 맞은 수간호사가 방송 인터뷰 도중 실신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종종 실신하곤 했다는데,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으니 다행인 거지. 별말 없이 주사를 맞게 한 의사는 약도 처방해주어 하루 세 번 식후에 약을 먹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딸꾹질이 시작돼 멎지를 않았다. 좀 나아지나 싶어서 어렵사리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내 말을 들으니 내가 잠을 자면서도 계속 딸꾹거렸다고 한다. 참 재주도 좋지. 딸꾹질을 하면서 어떻게 그리 잘 수가 있어?
하여튼 몸살기는 없어졌는데, 아랫배까지 출렁거리는 이놈의 딸꾹질을 어떻게 하나. 나는 늘 하던 방식대로 숨을 참아보았다. 옛 문헌에는 딸꾹질하는 사람에게 “뭘 훔쳐 먹었느냐?” 하고 소리치면 딸꾹질이 멎는다고 돼 있다. 예전에 어른들이 흔히 써먹던 수법이다. 그러나 내가 나더러 소리를 질러봐야 웃기는 일이 되고 말 테지. 아내에게 갑자기 등을 치게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혀를 내밀고 뭐라고 글씨를 쓰면 멎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혀를 내놓고 ‘임철순 나쁜 놈’ 이렇게 써보았다. 그것도 효과가 없었다.
마침 집에 한방 요법으로 손가락 안쪽을 찌르는 전자침법, 사혈침법 책자가 있어 그것도 그대로 해보았지만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하나마나였다. 딸꾹질을 잊어버리려고 일부러 소리 내어 책을 읽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1757년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딸꾹질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편지를 보고 숙식에 별일이 없고 독서에서 맛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으니, 이것이 바로 너에게 바라던 것이다. 어떤 위안이 이만하겠느냐. 다만 딸꾹질로 고생한다고 했는데 이는 먹은 음식이 다 내려가기 전에 독서를 해서 생기는 것으로 다른 치료법이 없다. 그저 식사 후 천천히 걸으며 속이 편안해진 뒤에 느리게 읽다 보면 한참 지나 저절로 나을 것이다.”
독서를 하다 보니 딸꾹질이 생긴다고? 아들을 너무도 좋게 봐주는 거 아니야? 글씨를 좀 더 정성들여 쓰라는 잔소리도 잊지는 않았더라만, 아버지란 그저 아들이 책 읽는 것만 좋아하기 마련인가보다. 원래 부모에게 보기 좋은 건 아이들의 밥 먹는 입이고, 듣기 좋은 건 병에서 물 쏟아지듯 아이들이 글을 좔좔 읽어대는 소리라지?
그나저나 저녁 약속을 어떻게 하지? 원래 연말은 술꾼들이 즐겁고 바쁜 대목인데, 금년엔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약속도 별로 없고 있다가도 취소되는 판에 번개 모임 하나가 모처럼 생겼는데. 몸도 약해진 판에 괜히 나갔다가 코로나라도 걸리면 어쩌지? 몸살이야 나았다 치고, 사람들 만나서 딸꾹질을 해대면 누가 좋아하겠어?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불참한다고 카톡 단톡방에 알렸다. 그랬더니 의사인 친구가 내가 먹는 약에 항히스타민제가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게 딸꾹질을 일으키는 성분일 수 있다는 거였다. 약봉지를 살펴보니 과연 그런 약제가 있었다. 그래서 약은 더 이상 먹지 않고 딸꾹질 봉쇄에 전심전력 성심성의를 다 기울였다.
그리하여 밤 11시 넘어 나는 결국 끝내 드디어 마침내 딸꾹질을 잡았다. 어떻게 했느냐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음, 힘을 주면서 크게, 오래 숨을 참았다. 근데 이때의 “음”은 위 동그라미를 너덧 개쯤 그려야 할 정도의 소리다. 생각해보니 내가 딸꾹질에 시달린 시간은 20시간쯤 되는 것 같다. 이런 정도는 기네스도 뭣도 안 되는 기록이지만 한 가지 깨달은 건 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던가?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은 내 몸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이걸 깨달아 배운 것이다. 다만, 혀에 글씨를 쓰면 어떤 효과와 작용이 있기에 그런 요법을 고안해 낸 건지 그것은 지금도 궁금하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보면 영원한 젊음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주인공이 등장한다.
“내가 언제나 젊고 이 그림이 대신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면 세상에 내가 바치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내 영혼이라도 기꺼이 내어줄 것이야.”
도리언 그레이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영원한 젊음을 갖게 되지만 헨리 워튼 경을 통해 환락과 타락에 빠져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만다.
비단 도리언 그레이 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젊음이 영원하길 원한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주름살을 제거하기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고 조금 더 젊어 보이는 화장, 젊어 보이는 스타일에 신경을 쓴다. 나이보다 어리게 봐주면 기분이 좋다. 어쨌거나 나이 드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므로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우리에게 ‘데미안’으로 잘 알려진 작가 헤르만 헤세는 ‘늙음은 젊음만큼 좋은 인생의 숙제’라 했다. 이 숙제를 어떻게 해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헤세는 이 인생의 숙제를 아주 훌륭하게 해냄으로써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도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에서 두 번의 퇴학, 자살 기도 등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보냈고, 이혼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불안하고 평탄치 못한,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머지 생의 절반은 달랐다. 스위스 시골 마을에서 독서와 정원 가꾸기로 보낸 노년의 삶은 평화로웠다. 인세와 유명세를 가져다주는 글보다는 그리고 싶은 그림,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자연을 사랑했고 뛰어난 자연 관찰자였던 헤세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을 그렸다. 엽서에 작은 그림을 그려 넣어 받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글도 깊어졌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잡초를 뽑고 낙엽을 모으고 채소밭을 늘리며 땀 흘려 일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내 거주지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된 시기부터 늘 특별하게도 아름답게 살아왔다’
아름답게 사는 것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었음을 잊고 살았다. 이건 젊을 때보다 나이 들어 더 수월한 일일 것이니 이제부터, 특별하게, 아름답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산이 계속 되고 있어서 다들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해 나들이 보단 독서를 하며 봄을 맞이 해 보세요.
브라보에서 3월 신간을 소개합니다!
# 화전가 (배삼식 · 민음사)
배삼식의 신작 희곡이다. ‘화전가’는 봄놀이에 꽃잎 전을 부쳐 먹으며 부르던 노래다. 제목과 의미와 대비되는 암울한 전쟁의 시기를 배경으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모진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낸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 (미하우 스키빈스키 저 · 사계절)
아흔 살이 된 저자가 소년 시절 숙제로 썼던 일기에 아름다운 그림이 더해지며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다. 림 하나하나에 그날의 풍경과 상황, 소년의 천진난만한 추억이 깃들어 그림일기를 보는 듯 마음이 아련해진다.
#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임이랑 저 · 바다출판사)
식물애호가인 저자가 식물을 가꾸면서 삶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게 된 경험을 들려준다. 식물을 키우면서 시작된 고민이 다짐이 된 순간들도 담았다. 생명의 성장을 지켜보고, 지키는 과정에서 결심한 삶의 방향을 고백한다.
#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권남희 저 · 상상출판)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한 유명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해온 저자가 이번엔 자신의 인생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놨다. 아이를 키우며 가사를 병행했던 ‘번역하는 아줌마’의 삶을 재치 있게 드러내며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 죽을 때까지 치매 없이 사는 법 (딘 세르자이 외 공저 · 부키)
신경학 전문가인 두 저자는 “치매는 유전과 노화의 결과가 아니다”라며 삶의 방식 개선으로 두뇌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치매 탈출 솔루션 ‘뉴로 플랜’을 통해 중장년기 젊은 뇌를 유지하는 방법을 안내한다.
# 우리가 몰랐던 바이러스 이야기 (대한바이러스학회 저 · 범문에듀케이션)
국내 바이러스학회 전문가 18인이 바이러스에 대한 흥미롭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엮었다.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치료하는 바이러스, 영화 속 바이러스, 국내 최초 바이러스 등 다양한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한다.
주민을 위한 작은 복지관 커뮤니티 센터
지난 12월 23(월) 오후 7시부터 서울시 송파구 위례 신도시 안의 도심형 요양원인 KB 골든라이프케어 위례 빌리지 커뮤니티 센터(주민 사랑방)에서 지역주민을 위한 특강이 있었다.
올해 9월에 개관한 커뮤니티 센터는 1층에 위치한 넓고 채광이 좋은 공간으로 지역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개관 후 주민들을 위한 첫 번째 강좌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초, 중, 고생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초빙 강의를 준비했다. 초빙 강사는 강남대학교 입학 사정관으로 활동 중인 박주용 강사였다.
맞벌이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 지역 특성상 주민들의 자녀교육에 관한 관심과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강좌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란?
우리는 지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정보혁명 시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부른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의 바람직한 교육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의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 증권가에서 트레이더들의 대량 해고 사건이 있었다. 평균 연봉이 4억~5억을 호가하는 트레이더들이 하는 영역을 ‘캔쇼’라는 인공지능에 맡겨놓으니 인간 600명이 한 달 걸리는 일을 켄쇼는 혼자서 3시간 20분 만에 끝내버렸다. ‘켄쇼’는 인간보다 더 계산을 빠르게 처리하는 한편 그만큼 비용도 절감되는 효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바둑에서 알파고, 한돌 같은 인공지능이 나타나 한순간에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향후, 전문적인 분야로까지 인공지능이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의사보다 인공지능 로봇이 더욱 정확하게 병을 찾아내고 치료 방법까지 제시할 수 있는 시대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학교 교육의 진짜 문제는 상대평가 서열화이다
우리 교육의 현실은 시험점수를 잘 받고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학생들이 무한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통해 모든 문제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인생에 있어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즉,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부모가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세상에 답이 정해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배우지만 현실에서는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가르쳐 줘야 한다.
그리고 진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진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독서다.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위해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희망’을 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내면적 가치를 위한 공부는 독서이다
독서가 왜 좋은가? 독서를 통해서 깊은 사고와 문제의 연결방식을 알아갈 수가 있다.
첫째, 독서는 두뇌의 전 영역을 자극해서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다. 워싱턴 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독서는 뇌의 17개 영역을 활성화’ 시킨다고 한다.
둘째, 간접경험을 통해 다양한 관점
➀ 뇌의 측두엽은 언어의 습득 및 1차 감각을 감지한다. 즉 뇌의 신경세포는 실제
일어나지 않아도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➁ 소설을 읽고 마치 주인공의 마음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다.
➂ 단순히 공감을 넘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셋째, 언어발달과 사고의 틀이 형성된다.
➀ 독해력 향상 : 글자가 아닌 글을 읽는 능력을 키워주고 의미 있는 언어를 습득
함으로써 그만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상호 질문 및 토론시간
위례신도시 내에서 자그마한 도서관 관장을 하고 있으며 고2 자녀를 둔 학부모인 김경이씨는 “위례신도시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신도시임에도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이 살고 있어 자녀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다”고 하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바둑을 허락하면서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IT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는 초등학교 3, 5학년 자녀를 둔 직장인 김동희 씨는 IT 기술의 가장 핫한 분야는 딥 러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이들이 어떤 쪽으로 공부를 해야 보다, 좋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6학년 딸이 책을 너무 안 봐서 걱정이라는 김경아씨 부부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독서를 권유했지만 별 효과가 없어 그 방법이 궁금했다고 질문했다.
박주용 강사는 답변을 통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인 ‘해리포터’를 같이 읽으면서 중간중간 궁금증을 유발할 만한 대목에서 멈추면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제시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한 강의와 토론은 9시까지 분위기가 후끈할 정도로 가열되어 토론이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모두가 유익한 강의였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유익한 강좌가 주민 사랑방에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검단농협 오왕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은행을 찾는 손님들 외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면 빼어날 수(秀)에 많을 다(多), 집 원(院) 자가 새겨진 한자 팻말이 눈에 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궁금증을 안은 채 철문을 여니 햇살에 부서지듯 와르르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수다원입니다.” 정체불명의 공간을 책임지는 나영자(66) 수다원 원장의 목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이름을 짓는 데 신중했어요. 이 동네가 자연부락이 재개발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과 새로 유입된 사람들 사이 괴리감이 있거든요. 원래 거주하던 분들을 ‘토백이’, 새로 유입된 분들을 ‘아파트 사람들’이라 구분지어 부를 정도로 거리감이 확연했는데, 전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다 한동네 사람들인데 서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다원이란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거죠. 함께 모여 수다떨면서 융합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나영자 원장이 수다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담백하고도 의미가 깊다. 이웃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 그렇기에 수다원의 활동은 거창하진 않아도 따스하고 잔정이 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 생일을 챙겨주고, 봄가을이면 그 옛날처럼 설렘을 안은 채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때로는 곱디고운 꽃도 그려보고 사군자도 친다. 영화감상이나 네일아트, 도자기와 승마체험 등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이 동네에서 큰 호응을 받는 프로그램. 새해를 맞으면 동네별로 재료를 준비해 큰 양푼 두어 개에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을 먹는 특별한 시무식을 열고, 연말이면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는 송년회를 열기도 한다.
단절된 동네의 융화를 위한 사랑방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복하게 융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든 제약이 없다. 재미난 건 나 원장이 ‘토백이’와 ‘아파트 사람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 1980년대에 수다원 인근에 위치한 단봉초등학교에 재직한 적은 있지만 이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퇴직 직전이다. ‘토백이’ 중에는 재직 당시의 학부모들이 남아 있어 친근하고, 나 원장은 ‘아파트 사람들’에 속하기도 하니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표는 남녀노소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가을부터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꽃꽂이 강의를 열고, 젊은 엄마들의 기존 독서모임이 있는데 동화구연도 더할 생각이에요. 퇴직하신 어른들을 초빙해 초등학생들에게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가르칠 계획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실용성을 뛰어넘는 감정의 확산에 있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꽃꽂이 배운다고 플로리스트가 될 건 아니잖아요? 다만 꽃꽂이를 하고 그걸 집에서도 응용함으로써 평생 안 해본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감정을 가정에서도 공유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한자 몇 자 알게 하고, 바둑과 장기의 스킬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그걸 매개체 삼아 인성 지도를 받게 해 사람 됨됨이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에요.”
여성 회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궁금해서 슬쩍 들렀다가도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 수다원은 남성 회원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수다원에 흔쾌히 공간을 빌려준 농협의 운영시간에 맞추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밖에 문을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등학생들은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나영자 원장의 계획이다.
도서관도, 문화센터도 없는 문화 불모지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는 수다원은 2017년 5월 10일 개원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원 당월에 봄소풍을 다녀온 이래 꾸준히 배우고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간 무료로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이 단체 등록을 계기로 1365 자원봉사포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나 원장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함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는 능력은 사실 쉽지 않다. 수다원을 이끄는 나영자 원장의 리더십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시간에서 기인한다.
나 원장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15년 교감으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남편과는 주말마다 양로원에 가고, 세 자녀 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보낸다. 모범공무원 선정, 신일스승상 선정, 녹조근정훈장 수여 같은 명예로운 수상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따라온 부상들. 퇴직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정년 10년 전부터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동미술을 전공한 데다 미술교사 동아리 활동도 했고 개인 작업을 거쳐 전시회도 몇 차례 하며 국전에도 입선한 경험이 있어서 그림을 가르치며 봉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거고요. 여기서도 다양한 미술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으니 더 외연이 넓어진 셈이네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행복 추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수다원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원 회원 중에는 수십일 동안 집 안에 칩거해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고립됐던 사람도 있고, 아픈 손자 때문에 홀로 마음앓이를 했던 사람도 있다. 전문가의 치료로도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우울 증상이 깊었는데 수다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제가 상담사와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보다는 눈을 맞추고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봐요. 요즘은 오전 9시 땡 하면 수다원 문을 열고 오실 만큼 열성적인 회원이 되셨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고 나서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이곳으로 오거든요. 사람들과 함께하니 외로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사비를 털어 수다원을 개원할 당시 ‘과연 사람들이 모일까?’ 했던 기우는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지원금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할 때도 초반에는 수다원의 존재를 몰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인근에서 모두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수다원이 위치한 인천 오류왕길동은 물론 검암지구, 멀리 김포에서도 수다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으면 여기로 이사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만큼 사람들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이 적다는 방증이리라.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서 질 좋고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실용적인 정보교환이 이뤄지니 건설적이죠. 이런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이 몰려다니며 쇼핑이나 가십에 열중하게 되지 않겠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말
나영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자의 삶을 사는 이들도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 명이 모여 등산이나 나들이 갔다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흔히 남성들에게서 보이는 삶. 손자손녀들을 맡아 돌보거나 자식들 살림을 도와주는 삶.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삶 등등.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준 적도 있고,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해보기도 했지만 길러보니 자식은 부모가 키울 때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손자손녀를 돌보는 은퇴 후의 삶은 마다했다. 퇴직 후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기로 했지만 수다원을 만들기 이전에도 서구역사문화연구회를 꾸려 회장을 맡는 등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수동적이지 않다. 아니, 마치 개척자의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을 먼저 내어준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봉사를 한다 해도,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내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저도 수다원을 만들었지만 수익이 난다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건 없어요. 감자철이면 감자를 한두 박스씩 사다가 쪄서 나누는 등 오히려 퍼다 나르는 게 많지요.(웃음)”
4년 전 퇴직해 성실히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나영자 원장의 조언은 디테일하다. 과거의 영화를 잊어야 하는 건 물론 앞으로 소속되어 살아갈 커뮤니티에 맞춰 말투와 행동거지, 옷차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최악은 ‘내가 왕년에 이랬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은퇴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 대접받길 바라면 곤란하죠. 특히 전문직에 종사했던 분들이 은퇴 후 이사하거나 귀농귀촌한 동네에서 은연중 우월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춰, 편하게 말해도 될 이야기를 영어까지 섞어 말하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튀어 보일 수밖에 없죠. 손주들도 할머니가 자기들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좋아합니다. 은퇴 후에는 왕년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함께 살아갈 동지를 만들어야 해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예순여섯 살 나영자 원장은 아직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그녀가 꿈꾸는 성공한 삶, 더 많은 사람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위해 내일도 나 원장은 더 많은 사람과 신명나게 수다를 떨고 웃을 예정이다.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안고서.
1980년대 대표 국민 앵커로 불렸던 여자, 신은경. 차의과학대학교 의료미디어홍보학과 교수이자 동기부여 강사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책을 내놨다. 자신을 알고 나이를 알고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 실린 그녀의 에세이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는 환갑이 된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통해 삶의 흐름과 인생의 주름에 대한 조언들을 들어봤다.
1981년부터 1992년까지 12년 넘는 시간 동안 KBS 앵커로 사람들을 찾았던 신은경 전 앵커는 그야말로 국민 앵커로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KBS 보도본부 본부장이었던 박성범 앵커와의 결혼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에 책을 펴냈다. 제목은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문장이 주는 따스한 힘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상냥한 톤, 기품 있는 언어로 모범생 오라를 뿜어내며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반듯하고 맑은 눈빛으로 말없이 꿰뚫어보는 그녀가 더욱 반갑고 설레는 이유다. 온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나운서를 꿈꾸던 모든 여자들의 우상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여 앵커’의 대명사였다. 이제는 우아하고 품위가 더해진 중년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이 드는 게 뭐가 나빠요!
“나이가 드는 게 왜 불편할까요? 저는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거든요. 예를 들어 설익은 예쁨보다 무르익은 아름다움이 얼마나 좋은지요…. 예쁜 것에 가치를 두면 나이 들어가는 앞으로의 모든 나날이 두려워지잖아요. 스스로를 두렵게 만드는 그런 것에 가치를 둘 필요가 있을까요?”
당연한 얘기이지만 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초반보다는 30대가 훨씬 능숙하게 일을 잘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 듦은 나쁜 게 아니다.
“나쁜 게 아니라 ‘성숙하다, 능숙해졌다, 멋있어졌다’라는 의미로 나이를 받아들였으면 해요. 제가 예순 살이 넘어보니 스스로에 대해 믿음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이제는 글, 말하기, 소통, 강연 등을 할 때 잘해야겠다고 노력하면 아무리 못해도 어느 정도는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와요.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삶은 한 번, 사람은 각양각색
그녀는 ‘나이 들수록 운동을 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라’ 등등의 조언들이 많지만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은 건강해지려다 너무 걸어 족저근막염에 걸릴 수도 있고, 재산을 아이들에게 다 물려줬다가 자식에게 병원비 좀 내달라 하면서 눈치 보는 일도 생길 수 있거든요.”
그녀 말대로 사람마다 처지와 상황에 따라 나이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태도라고 강조한다. 그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녀는 57세에 루게릭병을 앓게 된 작가 닐 셀린거의 말을 가져온다.
내 근육이 약해질수록, 나의 글은 강해졌다. 나는 점차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나의 목소리를 얻었다. 몸은 점점 쪼그라들지만, 나는 성장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을 찾게 됐다.
그렇다면 신은경이라는 사람은 언제부터 나이를 편안히 받아들인 걸까?
“저는 마흔 넘어서 그게 가능했어요. 마흔 살 초반에 아이를 낳으면서부터죠. 결혼할까 말까, 아이를 낳을까 말까 하던 고민들이 사라지고 큰 욕심이 사그라들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녀가 평화를 찾은 것은 어쩌면 큰 갈등의 시기를 겪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그 이후의 삶도 그녀에게 오롯이 평온과 행복만을 전해주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녀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KBS 앵커 시절 이후 그녀가 정치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걸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쉰 살쯤 됐을 때 제 인생이 바닥을 쳤습니다. 남편의 정치활동이 끝나고, 제가 섣불리 선거에 나갔다가 실패했을 때죠. 세상이 나를 거부했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돌아보면서 이제 뭐하면서 살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인생 후반전을 위한 하프타임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의 절망감은 겪어본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 위기에 빠져 있었던 그녀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하프타임 세미나였다.
“5주짜리 프로그램이었어요. 인생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후반 삶에 들어가기 전에 하프타임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의 세미나였죠. 하프타임에는 물도 마시고 전략도 짜잖아요? 저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세미나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고 해답을 모색했다. 재정, 인간관계, 잘하는 일, 건강 등 현재를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내용들을 갖고 후반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인생의 전반전을 돈을 위해 살았다면 후반전은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한다고들 하죠. 그만큼 인생 후반은 중요한 시기예요. 제 경우는 지난 삶이 후반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 사명 선언서’를 작성하면서 ‘말하기’가 내 사명임을 깨달았죠. 딴짓하지 말고 말하기를 더 연구하고, 방송도 하고 책도 쓰자 했습니다.”
의미 있는 인생 후반전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변화하도록 돕고 싶었다. 한 명이든 천 명이든 간에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옳은 길이라는 결론이었다.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 행복해요
그녀는 요즘 차의과학대학교 의료미디어홍보학과 교수이자 동기부여 강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사명’대로 살고 있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때 꾸었던 꿈을 실현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생물 과목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물리, 화학, 수학이 안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이과는 못 가고 문과를 선택했죠. 나중에 보니 제가 이과 성향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아픈 사람 치료해주고 낫게 해주는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결혼 후 침과 뜸을 배웠는데 남편과 같이 봉사도 다니곤 해요.”
어쩌면 그녀가 동기부여와 자존감을 키워주는 강연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지금은 마음의 치유를 해주고 있으니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그녀에게 울화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물어봤다.
“힘든 것이 화로 나타나는 거죠. 예를 들어 고부갈등이 있으면 귀가 어두워졌을 때 굵직한 아들 목소리는 잘 들리는데 며느리가 내는 높은 고음은 잘 안 들린대요. 그러한 서로의 변화를 이해해야 해요. 그리고 또 몸이 힘들면 찡그리면서 말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또 화가 쌓이죠. 되도록 웃으면서 말하는 게 좋아요. 억지로라도 웃으면 좋은 호르몬이 나오거든요.”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 행복합니다’라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대로 살게 된다
말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니만큼 그녀는 말의 가치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언어는 중요해요. 사람은자기가 한 말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더워 죽겠네’ 같은 부정적인 말, 자기비하의 말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감사, 칭찬, 격려 등 기왕이면 듣기 좋은 말만 하세요.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씨앗의 말을 해보세요. ‘상대에게 무슨 칭찬을 해줄까’ 생각하다 보면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고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게 돼요. 감사할 수 없는 일에도 감사하고, 미리 감사하는 마음도 가져가보세요.”
실제로 그녀는 100가지에 대한 감사를 한다고 한다. 잘 살펴보면 감사를 표시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녀는 감사하는 마음이 지치지 않는 삶의 비결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녀가 말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데 전념하는 이유도 인생 사명과 같은 맥락에 있다.
기품 있게, 의연하게 살기
여러 우회로를 거쳐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자리에 온 신은경에게 과거는 어떤 의미일까. 그녀가 서 있었던 빛나는 자리와 그 이후의 삶에서 비롯된 아쉬움과 갈등은 없을까?
“1992년까지 뉴스 앵커를 하다가 영국 유학을 갔고, 남편이 정치인 생활을 할 때 뒷바라지까지는 뉴스에서 얘기가 됐죠.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잘 안 보이니까 궁금하실 분들이 있을 거예요. 말씀드린 것처럼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일했어요. 왕년의 나를 버리고 싶지 않으면 숨어 살면 돼요. 나이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레타 가르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변신을 해야죠.”
그녀는 나이 들고 변신을 하면서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 바로 기품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은 ‘기품 있게, 의연하게’예요. 어떤 상황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았으면 해요.”
마흔 초반에 낳은 딸은 어느새 대학생이다. 현재 동아시아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새삼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게 느껴졌다.
“아이에게 시시콜콜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잘 가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죠. 어렸을 땐 책을 많이 봐야 할 것 같아서 독서를 권한 정도? 물론 요즘도 긴밀하게 대화하면서 조언은 하죠.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독립적이에요. 좋게 말하면 그런 거고 달리 말하면 부모가 해주는 게 없으니 혼자서 알아서 하는 거죠.(웃음)”
사람들이 일찍 행복해지면 좋겠다
어느새 결혼생활도 딸 나이만큼 해온 셈이다. 사실 이번 책은 남편이 권해서 나온 책이라고 한다. 그녀가 꾸준히 쓰는 글을 보고 묶어서 내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준 것이다. 특히 남편은 그녀가 너무 신경을 써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줘 책을 완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즐겁게 사연을 말하던 그녀에게 오랜 시간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봐요. ‘남자는 존경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존경할 수 있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저는 일정 부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둘이 동등하게 사랑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좋지만 너무 선이 없다 보면 남편을 하대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거든요. 그래도 행복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남편에겐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잘 안 되긴 하죠.(웃음)”
요즘 세태에 비춰 보면 다소 고전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 전통적인 가치가 삶을 평화롭게 만들기도 한다. 나이가 자신을 포용으로 포옹하게 했다는 그녀의 말은 그런 믿음을 깨닫고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책은 시니어 대상으로 썼는데 20대, 30대에게도 격려가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젊은 사람들도 자신의 나이를 일찌감치 향유할 수 있게 되면, 앞으로 40년, 50년, 60년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을 알고 부단히 가꿔 기품이 생기면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일찍 그걸 깨달아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신은경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시작했다. 3개월 연수 후 첫 방송 날 곧바로 KBS 9시 뉴스 앵커로 발탁됐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진행했으며 88서울올림픽 메인 앵커를 맡았다. 영국 웨일스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대학교수, 방송진행자,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 중이며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을 지낸 바 있다. 현재 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미디어학과 교수로 있으며, 대한민국 대표 기독교 스마트 APP 방송, 라디오JOY에서 ‘성경 읽는 신은경 권사’로 방송 프로그램도 맡고 있다.
이상적인 병원 터는 어디일까. 아랍 의학의 아버지 라제스는 도시 곳곳에 신선한 고깃덩이를 걸어두고 장소를 물색했다. 가장 부패가 덜 된 고기가 걸린 곳에 병원을 세웠던 것. 한의사 김두섭 원장(62, 세종한방힐링센터)은 조용한 자연 속에 병원을 꾸리는 게 옳다고 봤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해서, 자못 후미진 산속으로 귀촌했다. 굳이 외진 산골까지 찾아들 환자가 몇이나 될까마는, 그는 즐겁다. 자신의 지향과 실천에 만족하기에.
준비기간은 길었다. 귀촌을 내심에 담고 이미 십수 년 전에 터를 장만해뒀다. 젊으나 늙으나 사람의 대망(大望)은 주로 서울로 쏠린다. 하지만 일찌감치 산골살이를 숙원으로 삼은 김두섭 원장에겐 오직 귀촌이 소망스런 답이었던 거다. 공들여 낫을 갈고 나서야 땔나무를 벨 수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 귀촌 준비를 해왔기에 본격적인 시동은 한결 가뿐했다. 드디어 산골에 들어가 시작한 건 4년여 전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군생활을 마치고서였다.
육사 37기 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흐른 세월은 37년. 군에서 인생의 절반쯤을 살았구나. 애당초 군에도 의업(醫業)에도 청운의 꿈을 묻은 바가 없었다지. 우연이 그의 길잡이였던 모양이다. 소싯적에 부풀린 청운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로 살고 싶다는 것, 그 하나였더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성장기의 시골생활에 넌더리가 났기에.
“가난이라는 게 너무도 싫었어요.
9남매를 건사하느라 부모님은 모진 수고를 하셨지만 다들 늘 배를 곯았어요. 아, 나는 이다음에 농고를 나와 새마을지도자가 돼 돈을 벌 거야! 꿈이랬자 겨우 그쯤이었죠.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그러니까 고3 땐 그 가당찮은 꿈을 버리고 해양대학을 가기로 맘먹었어요. 외항선을 1년만 타면 1억을 번다는 얘기를 듣고서였죠.”
“해양대학에서 육사로 목표를 바꾸었군요.”
“해양대학 입시 준비 중에 연습 삼아, 실력 테스트 삼아 육사 시험을 봤는데 묘하게도 덜커덕 붙었어요. 뜻을 두지 않았음에도 우연히 엉겁결에 육사 생도가 돼버린 겁니다. 그러나 곧 방향을 잃었어요. 육사 나와서 뭐하나? 농사 기술을 배울 곳도 아니고, 돈을 맘껏 벌 일도 못되고,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1학년 말에 그런 심각한 회의에 빠졌어요. 그러던 차 과외활동으로 참여한 동양철학반에서 침술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한의사로 변신한 우연한 계기?”
“바늘 하나로 환자를 다루는 침술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어요. 침을 잘만 배우면 돈을 모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열심히 침술을 익혔어요. 그러자 점차 한의학 전반으로 관심이 확장됩디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장교 임관 뒤 우여곡절을 거쳐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육본에서 운영하는 위탁교육생 자격으로 5년간 공부하고 졸업했죠.”
육사 생도와 운명처럼 만난 한의학
한의사 자격증을 받은 김 원장은 이후 줄곧 한방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전역 시의 직책은 국군수도병원 건강증진센터장. 건강증진! 그게 김 원장의 평생 소임이자 방향이다. 즐겁게 살지 않고서 건강할 수 없다. 건강하지 않고서 즐거울 수 없다. 생의 모든 명암은 어쩌면 몸 건강 문제에서 파생하거나 귀결된다. 불가의 통신에 따르면, 이 세계의 근본은 고(苦). 죽음 앞에 서 있는 게 생이지 않던가. 불친절한 죽음이 우리를 방문하는 날까지 가급적 건강을 지속하고자 용을 쓸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숙명이다. 늘그막에도 삶은 때로 슬프도록 아름답다. 눈부신 노을빛처럼. 하나 몸은 부질없이 낡고 닳고 시들어간다.
머잖아 조락할 수밖에 없는 건강에 관한 쓸쓸한 사념은 낯선 게 아니다. 그러나 김두섭 원장의 생각은 영 다르다. 어허! 그게 아니오! 늙어서도 청년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이치가 여기에 있는 것을! 그는 그리 탕탕 외치고 싶은 것 같다. 들어볼까. 경청해 모실 만한 대책이 흘러나올 수도 있으니.
“제가 내심 장담하는 게 뭐냐면, 난 얼마든지 장수할 자신이 있다, 칠팔십 살이 되더라도 청년처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겁니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고 관찰했는데요, 늘 궁금했던 건, 일단 병 치료를 잘 마쳤더라도 일상생활로 복귀하면 다시금 병증이 도지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어요. 이게 왜 이러지? 무엇이 원인이지?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나쁜 생활습관이 근본 병인이라는 거였어요. 타성에서 벗어나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게 무병장수의 첩경이라는 얘기.”
“매사 습관의 노예로 살다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게 사람이죠. 그걸 알면서도 쉬 고치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는 희비극일 테고.”
“무엇보다 식습관부터 바꿔야 해요. 저의 식생활을 들어보실래요? 부디 따라 해보시길. 아침엔 잡곡밥을 지어 말린 뒤 프라이팬에 볶은 튀밥 형태의 밥 한 공기를 아주 천천히 먹습니다. 아주 천천히! 이게 핵심이에요. 천천히 먹기 위해 오래 씹어야만 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좀 딱딱한 밥을 일부러 만드는 겁니다. 천천히 오래 씹을 경우 밥알에 침이 충분히 섞여 위장으로 내려갑니다. 입안의 침! 이거 놀라운 보약이에요. 침에 함유된 효소(酵素)와 프티알린(ptyalin). 이게 음식물이 위로 내려가기도 전에 입안에서부터 벌써 소화 작용을 해내는 겁니다.”
“침이 입안에서 소화 작업을 왕성히 하도록 음식물에 침을 충분히 섞어줘라? 그게 결국 위장기능을 극대화한다?”
“위장은 내장기관이라는 공장 시스템에서 중추 역할을 합니다. 위라는 장비가 부드럽게 가동할 경우, 위장이 튼튼할 경우, 오장육부가 평화로워져 온갖 병을 예방하거나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점심도 저녁도 딱딱한 밥을 먹는 거예요?”
“지나친 음식 금욕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법. 점심은 몸이 원하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최대한 잘 먹습니다. 밥상 가득 다양한 찬을 차려 식구들과 둘러앉아 천천히 즐겨요. 저녁엔 금식을 합니다. 밤엔 콩팥과 간이 하루치 독소를 거르기 위한 맹활약을 하거든요. 이럴 때 음식을 집어넣어 훼방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정 출출하면 과일즙 한 잔을 마시면 되고.”
좋은 습관이 무병장수의 첩경
인생은 육십부터라지? 이젠 백세 시대라지? 성난 수말처럼 부지런히 뛰어 세상의 정글을 괴롭게 통과한 뒤의 노후란 실로 진정한 낙원의 삶을 누릴 찬스일 수 있다. 그러자면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무병장수를 선망한다. 어떤 신들은 인간이라는 별난 종족이 오래 사는 걸 싫어할 수도 있다. 인간의 세력이 커지면 지상의 소음과 잡음도 그만큼 커지니까. 인간들 때문에 도대체 시끄러워 편히 낮잠을 잘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툴툴거리는 신도 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거북이보다 목숨이 짧고 플라스틱 바가지보다도 빨리 썩는 게 인간 몸뚱이임을 명석하게 알아 저승사자가 호명하는 대로 겸손히 응하는 게 순리일 성싶다. 하지만 욕망의 공식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던가. 내남없이 한사코 병 없이 오래 살기를 숙원사업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 숙원사업을 성취하고 싶걸랑 아침밥만이라도 침을 담뿍 섞어 드소서! 김 원장의 훈수가 그렇다.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돌아다니는 건각이 있다. 굳이 양말을 꿰신지 않아도 발이 이미 따뜻해서다. 이 사람은 벌목장에서 얻어온, 절집 대웅전 기둥만 한 통나무를 둘러메고 사뿐사뿐 행진한다. 절구통처럼 굵다랗게 토막 낸 통나무를 퍽퍽 도끼로 패 순식간에 장작을 만든다. 힘 좋기로 인근에 소문났다지? 이 중뿔난 장정이 바로 김두섭 원장이다. 난 아직 청년이오! 늘 그리 외치는 모양이다.
건강상태가 유난하니 귀촌의 나날이 영일(寧日)이다. 자연 속에 살고자 자원한 산골살이에 별다른 시름이 없다. 이게 거저 주어진 게 아니란다. 지난날 오랫동안 시난고난 지병에 시달렸단다. 의사라도 병을 달고 살 수 있는 일이지만, 여하튼 스타일 심히 구겼겠다. 그러나 그는 병을 털어냈다. 지병에서 해방되고서야 안심과 자족이 있는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일찌감치 위장에 이상이 왔어요. 소위 시절부터 근 30년, 그 긴 세월을 위장병에 부대끼며 지냈어요. 그 덕분에 술이라는 걸 거의 마시질 못하고 군생활을 했어요. 위장이 비정상적으로 축 처져서 오는 소화 장애, 즉 심한 위하수증이었어요. 만성피로에 늘 시달렸죠. 원인은 과식에 있었는데 침, 뜸, 부황, 보약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30년 된 병증을 결국 무엇으로, 어떻게 다스렸죠?”
“침이나 보약 같은 치료 수단은 결국 보조제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즉, 나쁜 생활습관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거죠. 간소하고 절제 있는 생활, 지나친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 자연을 마음에 담는 태도, 그런 게 좋은 건강과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겁니다. 식습관의 개선은 물론, 규칙적인 운동도 그 무엇에 앞서 중요해요. 귀촌 초기에 철저하게 식습관을 변화시키고 좀 격한 스트레칭을 하자 몸이 대번에 달라집디다. 현재 저의 몸 상태나 체력은 20대 시절보다 한결 낫습니다.”
고통이 엄습해도 얻어 채울 게 있다
이미 속세에 물든 범인으로선 모범적인 생활을 고수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자기 억압적인 절제는 자칫 인생을 따분하게 만들 수도 있겠고. 조선의 거목 추사 선생은 사람이 마땅히 즐겨야 할 세 가지 일을 꼽았다. 첫째는 독서, 둘째는 음주, 셋째는 호색. 독서를 첫째로 친 걸 보면, 야야 놀더라도 공부는 하고 놀아라, 뭐 그런 뉴스가 아닐까 싶지만, 일테면 하늘과 땅의 결합을 지상의 인간들이 재연하는 신성한 의식이 성(性)이지 않겠는가. 김 원장의 생각을 들어볼까.
“노년에 이르러서도 주색을 참답게 사용하는 게 현명하겠죠. 그게 무질서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사랑의 범주에 들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도 건강하게 살자는 겁니다. 비아그라 없이도 행복하게 살자는 겁니다. 몸 건강이라는 기초공사를 충실하게 하자는 거, 가급적 자연 가까이로 귀촌해 온유한 품성을 기르자는 거, 저 숲속에서 상생하는 생명들처럼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잘 사는 노후를 즐기자는 거, 이런 것들을 생각의 중심에 놓고 삽니다.”
생활습관을 바꾸라! 산속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는 남자의 입에 붙은 소리가 그렇다. 귀촌으로 모호한 낭만을 구가할 게 아니라, 몸을 남김없이 쓰는 노동으로 심신의 건강부터 복구하라는 얘기에도 뼈가 들어 있다. 편리 대신 불편을 추구해 기른 야성으로 자연을 닮으라는 권장 역시 대안이겠지.
“이런 생각 곧잘 합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부족하기에 태어났겠지. 완벽했다면 이미 전생에 해탈했겠지. 그런 생각으로 불편과 고통마저 긍정하며 살고 있어요. 불편과 고통이 엄습했을 때, 내가 깨졌을 때, 그때 오히려 얻어 채울 걸 발견하게 되니까.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이니까.”
김두섭 원장이 주는 귀농준비 Tip
•검소한 생활을 작정하고 귀촌하자. 그게 자연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가급적 모든 일들을 손수 처리하자. 인건비를 들여가며 남의 손 빌릴 것 없이 몸 단련 삼아 직접 노동을 하자. 젊게 사는 방법이다.
•감상적인 생각을 앞세운 귀촌은 실패의 첩경이다.
•처음부터 큰돈 들여 집 살 필요 없다. 일단은 세를 얻어 살며 차근차근 적응하는 게 옳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브라보! 2018 헬스콘서트’가 지난 8일 서울 팔래스 강남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오후 2시부터 열렸다. 요즘 한창 인기 높은 TV조선 토크쇼 ‘인생감정쇼, 얼마예요?’에서 자주 보던 이윤철씨가 사회자로 나왔다. 특유의 친근감 넘치는 멘트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우려와는 달리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오후에 콘서트장은 만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사회자의 소개와 멘트로 첫 번째, 명사 초청강의는 99세의 석학이신 김형석 교수님의 강제(講題) ‘백세로 산다는 것’으로 첫 강의가 이루어졌다. 작년도 헬스콘서트에서도 뵈었는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신 정정하고 건강하신 모습으로 단상에 오르시는 교수님을 뵈면서 존경의 마음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60세가 될 때까지는 학문에 대한 걱정으로 살았지만 60세가 넘으면서는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교수로써 살아야 끝까지 학교에 남을 수 있다. 나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결국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삶은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기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것은 보람이 있다. 나이 먹어서도 건강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것이 좋다. 정년퇴직을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계기를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수님의 연세 99세이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좋아 보인다.
이어서 건강강의가 시작되었다. 자생한방병원 원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이돌 가수처럼 미끈하게 잘 생긴 한창 원장의 강의는 유머와 위트로 즐겁게 해준다. 겨울철 관절건강관리에 대해서 뻔 한 이야기지만 머리속에 콕콕 박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건강을 위해서 지켜야 한 6가지를 풀어준다.
① 담배를 끊어라. 흡연은 치매관계질환에 노출시킨다.
② 술을 줄여라. 지속적인 과음은 뇌건강 질환에 절대 좋지 않다.
③ 체중을 줄여라. 5~15%의 체중을 감량하면 50%의 성인병을 줄일 수 있다.
④ 잘 먹어라. 단백질 섭취와 적절한 운동이 근육을 만들어준다.
⑤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
겨울철 운동은 가급적이면 새벽에 하지 말고 낮시간이나 실내운동을 하라.
⑥ 잠을 잘 자야 한다. 하루에 6~8시간은 자는 것이 좋다.
불행은 남하고 비교하는 순간 생기게 된다. 자주 웃고 주변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라.
두 번째 건강강사로 나선 분은 예풍한의원 백태선 원장이다.
백태선 원장은 등장할 때부터 눈길을 끌었다. 의사라고 보기에는 비교적 살집이 풍부하고 남자답게 생긴 비주얼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에 시원시원하게 쏟아내는 ‘겨울철 혈관 건강관리’에 대한 강의는 시니어들이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혈관 건강의 테마는 세 가지로 암, 심근경색, 중풍이었다.
모든 병이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일찍 찾아내어 치료하면 완치율도 높고 치료효과가 좋다. 그러나 혈관 건강은 전조증상이 없다. 혈관이 막혔을 때나 온 것을 안다. 그러니 주기적인 혈관검사를 통해서 예방이 중요하다.
겨울철은 혈관계통의 질환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어떻게 조심할 것인가?
① 겨울철에는 운동을 하지마라.
새벽에 일어나 운동할 때 사고가 많이 난다. 하려거든 낮 시간대 운동하라.
② 과격한 운동을 삼가하라. 혈압이 상승한다.
조절이 가능한 운동, 즉 걷기, 자전거 타기 물속에서 걷기등 규칙적으로
30~40분정도 하는 것이 적당하다.
③ 음식을 골고루 먹어라. 고기도 많이 먹어라.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의사들은 동물성 지방에 대한 경고차원에서 고기를 꼽는다. 기름을 제거하고 가급적 태우거나 굽지 말고 삶아서 먹되, 많은 량을 먹지 말라는 등의 권고를 한다. 그런데, 백교수님의 강의는 특이했다. 삼겹살도 가리지 말고 많이 먹으란다. 우리는 주식이 고기가 아니기에 가끔씩 먹는 육류는 괜찮다는 말에 모두들 박수로 환호한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오후, 헬스콘서트도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실버치어리더들의 깜찍한 율동과 우리 동요 ‘나비야’를 관람하면서 많이 유쾌했다. 촉촉하게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가수 신계행의 ‘가을사랑’이 물씬 가을을 음미하게 해주었다. 가수 김목경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콘서트를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아직도 가을비는 단풍나무위에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가라앉지 않은 헬스콘서트의 잔상이 잔잔하게 머릿속에 맴돈다. 멀어져 가는 가을이 왠지 모르게 아쉬웠는데, 이번 콘서트를 통해서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은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하다. 브라보! 헬스콘서트!
함께 브라운관에 울려 퍼졌던 이 말. 바로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이 라는 군인 대상 TV 프로그램 사회를 보면서 마지막에 외치던 멘트다. 어느새 칠순을 훌쩍 넘긴 그는 요즘 인기 강연자로서 제2의 인생을 숨가쁘게 살고 있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그의 소식을 우리는 듣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프로그램의 종영,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졌던 그의 침묵 뒤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뽀빠이’다운 건강을 뽐내며 살고 있는 그를 만나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활동 안 하세요?”
‘뽀빠이’ 이상용과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인데, 식당 주인이 살갑게 물어왔다. 로 전국을 누비며 당대 최고의 MC로 활약했던 그를 한참 동안 TV에서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물을 것이다.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날리면서 대답했다.
“너무 많이 해요.”
그 말대로다. 그는 요즘 하루에 서너 개의 강연을 뛰고 있다. 한 달이면 쉬는 날을 빼고 대략 오륙십 건에 달한다. 기자가 그를 만난 것도 중구보훈회관의 강연이 끝난 뒤였다. 1990년대 전성기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는 다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73세의 나이에.
죽지 않으려고 한 운동
이상용이라고 하면 누구나 ‘건강’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듯이, 그는 7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건강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기초 체력이 약하지. 여섯 살 때까지 누워 있었거든. 일곱 살 때 처음 걸음마를 뗐어요. 그래서 안 죽으려고, 삶의 의욕이 강했지.”
그에게 건강은 태어날 때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서 쟁취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한 상태로 아버지를 만나러 열 달 동안 부여에서 백두산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만나지 못했고, 다시 부여로 돌아와 그를 낳았다.
열 달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그는 12세까지 여덟 가지 병을 앓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13세에 아령 운동을 시작해 18세에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 미스터 고려대, 고대 응원단장을 거쳐 ROTC 탱크 장교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는 우리가 아는 ‘뽀빠이’의 삶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 있음에 감사
그에게 70세가 넘어서도 젊음을 유지하는 건강 비법을 물어봤다.
“건강? 밥 먹으면 돼. 오래 살려면 나이를 먹으면 되고. 그리고 숨쉬기 운동이 중요해. 숨쉬기 운동은 하다가 안 하면 죽어(웃음).”
슬쩍 치고 들어온 농담과 함께 그는 자신이 평생 담배, 술, 커피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찬물을 마신다고 한다. 밤 동안 속에 쌓인 노폐물을 씻기 위해서다.
“아침은 치즈, 계란, 바나나 하나씩 먹어. 소식이야. 그리고 저녁은 일찍 먹고. 최근에는 콩비지와 두부를 좋아하게 됐어. 고기는 일주일에 두 번 먹고.”
그는 인생의 마지막 승리자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인명은 제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는 날까지 사람들이 자신만 보면 즐거워지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단다.
“사람들이 내 강연을 들으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헛살았다’ 하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
모든 것을 무너뜨린 억울한 누명
이상용과 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89년 4월에 처음 방송을 시작해 1997년 3월에 종영된 는 군인 위문을 예능으로 만든 신선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국민 예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지막 코너인 ‘그리운 어머니’는 를 상징하는 코너로 무수히 패러디되었다. 하면 “뒤에 계신 분은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를 외치는 장병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의 사회자였던 이상용은 를 의미하는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건이 터진다. 공금횡령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당시 그는 사회봉사와 모금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주력한 것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이었다. 그런데 1996년 11월
녹화 도중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쳤고 녹화가 중단됐다. 그들은 경찰이라고 주장하면서 심장병 어린이 기금 횡령 혐의로 이상용을 수사한다고 했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고 온갖 매체에서 그를 횡령범으로 몰았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출처 불명의 소문들이 퍼져나가더니 마치 진실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벤츠 S500을 탄다, 집이 40억짜리다, 만 평이나 되는 땅이 있다….’
진실은 얼마 안 가 드러났다. 검찰에서는 조사를 착수한 지 3개월 만에 그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을 이용해 횡령을 일삼은 파렴치범’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제대로 된 해명 기사도 내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아무도 나한테 확인조차 하지 않았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한지.”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용은 42만원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벤츠S500을 탄다’는 괴소문과는 달리,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 82억원을 쓴 그는 돈 한 푼 없었다. ‘횡령범’ 이미지가 씌워져 방송에서 활동할 수도 없었다. 먹고 살려고,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훈장을 세 개나 받았는데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고 대서특필하면 40년간 해온 일이 어떻게 돼? 나쁜 놈들이야.”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그에게 누명을 씌운 걸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가 당시 제안받은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권의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불쾌하다는 듯 그때의 기억을 단답형으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이상용의 목소리에는 아직 씻지 못한 분노와 억울함이 느껴졌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도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전 재산을 털어가며 무려 567명을 치료했다. 그러나 치료받은 아이들 중 단 3명만 연락이 닿았다.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는 안 해. 다만 좀 서운한 것뿐이지. ‘고맙습니다’ 한마디만 해줘도 좋을 텐데…. 그런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못 나서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힘든 시절, 이상용에게 위로가 됐던 것은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김동길 박사가 해준 말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걱정 마라. 눈이 왔다. 쓸지 마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난다’고 말씀하셨고, 법정 스님은 ‘자루에 너를 넣고 흔든다. 많이 담으려고 그런다. 하루 종일 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땅에다 놓으면 흔들림은 없어지고 너는 많이 담기는 자루가 된다’고 말씀 주셨지. 김동길 박사는 ‘강물이 흐르다 보면 위에서 오줌 누는 놈이 있다. 그렇다고 강이 지려지지 않는다. 너는 흘러가서 큰 바닷물이 되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고마운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준 말대로, 자신을 폄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단다. 그들은 이쪽에서 상관하지 않으면 스스로 죽는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견뎌내면서 단단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멋지게 살다 간 놈’으로 기억되고 싶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매일 명동성당에 간다. 아침 6시면 성당에 앉아 있는 그를 볼 수 있다. 눈비가 와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문득 그의 얼굴이 보살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가 겪은 일들, 그리고 그것을 견뎌낸 세월이 새겨졌기 때문일까.
“법정 스님이 ‘너는 불자다’라고 말씀하셨지. 내 얼굴이 지장보살인데, 지장보살은 베푸는 보살이라고 하시면서 절도 다니라고 하셨어. 그래서 절도 다녀(웃음).”
그는 사회를 보는 것보다 강연하러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서 외로울 때는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사우나, 그리고 독서를 하지. 내가 책을 좋아해.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도 하고.”
그의 큰딸은 쉰 살, 아들은 마흔두 살, 외손주는 열일곱 살이다. 그는 자제들이 잘 자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우직하게 한마디로 말했다.
“멋지게 살다 간 놈.”
그는 마지막으로 독자들을 위해서도 한마디했다.
“브라보 독자님들, 뺏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세요. 악착같이 사는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측은합니다. 돈은 쫓아가면 도망가고 외면하면 찾아옵니다. 그저 오늘을 즐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