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반세기 전 떠나간 여자 친구 이야기를 황경춘 전 외신기자 클럽 회장이 보내주셨습니다.
황경춘 언론인
엽(葉)아, 이렇게 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네가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지 반세기가 지났구나. 차량 왕래가 드문 시골길에서 일어난 너의 사고 소식을 뒤늦게 알았을 때, 마흔도 못 채운 너의 짧은 인생이 한없이 나를 슬프게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네가 살던 도시의 중학교에 입학한 내가 하숙을 구하지 못하자 아버지가 너의 집을 임시 거처로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집 문간방에서 네 남동생과 함께 한 학기를 지낼 때 너는 단발머리의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지.
만사에 엄격한 너의 어머니는 내가 있는 문간방에 나보다 한 살 위인 너의 언니를 비롯한 세 자매가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어. 그러나 어머니가 교회에 가는 일요일이면 너희들은 내 방에서 깔깔대며 놀 때가 많았지. 세 자매는 객지에서 하숙하는 나의 쓸쓸함을 잘 달래주었어.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대학으로 유학 간 내가 다시 너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5~6년 뒤의 여름방학 때였다. 지리산에 가까운 어느 초등학교 교사였던 너는 우리 동네에 있는 너의 큰집에 다니러 온 길이었어. 젊은 처녀로서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뚱뚱해졌지만 너는 쾌활하고 꿈 많은 문학소녀였지. 상냥한 미소와 맑은 목소리는 어릴 적 그대로였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만 자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의 큰집은 빈촌인 우리 마을에서도 가난한 부류에 속하는 소작농이었다. 너의 사촌오빠는 한때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너의 큰아버지도 우리가 일본에 있을 때 우리 집에서 일했지. 어린 내가 어른들을 따라 좀 거리가 있는 이웃 마을 극장에 갔다가 잠들어 너의 큰아버지 등에 업혀 귀가한 적도 몇 번 있었어. 이런 배경 때문인지, 광복 얼마 전 네가 고향 학교로 전근해온 뒤에도 우리 부모님은 가깝게 지내는 우리 사이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셨지. 일본군 징집영장을 집에서 기다리던 전쟁 말기의 어수선했던 시절,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나를 너는 따뜻하게 위로해주었고, 내가 읽던 책을 빌려가기도 했어.
다시 몇 년이 흐르고, 결혼한 네 언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뒤, 얼마 있다가 네 남동생과 여동생도 연달아 세상을 떠났지. 다시 지리산 근처의 학교로 전근해간 네가 서른을 넘은 노처녀로 지낸다는 소식이 들리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나는 서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처음으로 너의 편지를 받았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서로 상대 이름을 불렀고 글도 옛날처럼 친구지간에 쓰는 말투 그대로였다. 이때부터 1년에 한두 번 오는 너의 편지는 언제나 “경춘아…”로 시작되었고, 차츰 편지 내용은 세상을 등진 문학소녀 같은 허무주의 냄새를 풍기곤 했지.
너는 여름방학에는 교원 강습이나 출장으로 서울에 자주 왔지. 강습이 끝난 뒤 함께 남산공원을 산책한 적도 있다. “경춘아…” 하는 너의 말투는 여전했어. 우리는 어디까지나 친구였지. 일제강점기 때 내가 빌려준 책 속의 일본 허무주의 시인의 시, “동해 작은 섬 바닷가 하얀 백사장에서/나는 눈물이 쏟아져 게와 장난질하다”를 네 신세를 한탄하는 편지 속에서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어떤 편지에서는 결혼 안 한다고 심하게 꾸짖는 네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지.
나는 이런 편지에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았으나 너는 탓하지도 않았어. 다만 가끔 내가 너무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항상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비아냥대듯 말했는데, 너는 그저 씩 웃기만 했지.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사는 누님이 네가 사십 줄의 노총각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상대가 그냥 노총각이 아니라 아이가 하나 있는 상처한 동료 교사라고 알려주었어. 너의 교통사고 이야기는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들었기에 더욱 슬펐다.
엽아, 네 마음의 아픔은 충분히 알 것 같구나. 그러나 우리는 끝내 좋은 친구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저세상에서 서로 좋은 친구로 다시 만나자. 부디 주소 없이 보내는 이 편지를 읽고, 평소에 답장 한 통 보내지 않은 나를 용서해다오.
어느덧 5월입니다. 꽃피는 춘삼월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숲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변해갑니다. 통상 3월부터 5월까지를 봄으로 분류하지만, 지구온난화 등의 여파로 인해 몇 년 전부터 종종 한낮 기온이 30도를 웃돌며 폭염주의보까지 발령되는 등 봄이란 말이 무색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나 몰라라 하겠다는 배짱인지, 5월 중순의 시기에 ‘봄맞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야생화가 여전히 피고 있다는 말에 의아해하며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 귀하다는 꽃, 나도 좀 자세히 보자.”
“뭐야? 이것 보자고 이 무더위에 서너 시간 달려왔단 말이야?”
꽃 보러 가는 길, 가끔 “바람이나 쐬러 가자. 아주 귀한 꽃 보여주겠다”며 친구들을 설득해 동행합니다. 짙푸른 바다도 보고, 시원한 바람이나 맞자며 즐겁게 떠났습니다. 다만 멀리 동해까지 가는 동안 내심 실제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텐데, 공연히 귀한 시간 빼앗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첫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정말 귀한 꽃이야. 원래는 북한 땅에 가야만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최근 남한에서도 동해안 서너 곳에서 자생하는 게 확인됐어. 워낙 희귀종이어서 국가에서 보호 대상 식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어.”
갯봄맞이의 희귀성, 중요성 등을 애써 강조하지만, 반응은 여전히 심드렁합니다.
“그런데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했듯, 5월 중순이면 봄이라기보다 여름이라고 할 수 있잖아. 실제 폭염주의보까지 발령되는 날씨인데, 식물명에 ‘봄맞이’가 들어 있으니 어째 어색하지 않니? 그게 바로 이 꽃의 유별성(類別性), 즉 주로 북한 지역에 자생하는 북방계 식물의 특성을 보여주는 거야. 옛날 봄이 늦은 함경도 바닷가에서 5~6월에 피는 이 꽃을 보고 갯봄맞이란 이름을 붙인 거라고….”
나름대로 설명을 이어가자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열심히 보고 사진 많이 찍어라” 하며 응원합니다. 먼 길 오느라, 찾느라 바빴던 마음을 진정하고 찬찬히 꽃을 들여다봅니다.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지만 비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닷물과 모래가 수시로 넘어올 성싶은 해안 호수, 이른바 석호(潟湖) 가장자리 모래밭에 핀 갯봄맞이. 키가 작은 건 5cm 안팎이고, 제법 큰 것은 20cm를 넘을 정도이지만 무리 지은 모습은 영락없이 ‘잡초’처럼 보입니다. 통통한 줄기에 잎이 좌우로 다닥다닥 달리고, 줄기와 잎 사이 겨드랑이마다 아주 옅은 붉은색이 도는 흰 꽃이 역시 다닥다닥 돋아나 있습니다. 꽃 색이 아예 흰 것도 있다고 합니다. 새끼손톱만 한 꽃은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그 가운데 수술 다섯 개와 암술 한 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잎과 꽃 모두 자루 없이 줄기에 바싹 달라붙어 있어 개개의 꽃을 예쁘게 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생지는 극히 소수이지만, 자생지에서 만나본 갯봄맞이의 개체는 수백, 수천을 넘을 만큼 풍성해 멋진 군락 사진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멸종위기 야생식물 1, 2급으로 지정된 77종 가운데 광릉요강꽃과 털복주머니란 등 대부분이 자생지와 개체 수가 극히 적은 데다 빼어난 관상 가치에 따른 남획 등 인위적인 위협 요인이 더해지면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면, 갯봄맞이와 같은 일부 북방계 식물은 지구온난화 등 자연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남한 땅에서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어, 종 다양성 유지 차원에서 각별한 보전 대책이 필요해보입니다.
Where is it?
갯봄맞이는 황해도와 함경도 등 주로 북한 지역에서 자생하는 북방계 자생식물로 알려져왔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강원도 고성과 경북 포항, 울산 등 동해안 일대 서너 곳에서 자라는 것이 확인되자 환경부가 2012년 7월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했다. 남한에서 가장 북쪽인 고성에서는 해수와 담수가 섞여 있어 염담호(鹽淡湖)라고도 불리는 송지호의 가장자리 일부 모래밭에서 자생한다(사진). 밑으로 내려와서는 포항의 구룡포 인근 해안, 그리고 최남단인 울산 북구 해안에서 각각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4월 초순경, 장고항 어부들의 몸짓이 부산하다. 실치잡이를 해야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실치가 적을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지만 많을 때는 수시로 바다에 나가 바쁘게 작업을 해야 한다. 흰 몸에 눈 점 하나 있는, 애써 눈여겨봐야 할 정도로 작은 물고기인 실치가 작은 몸집 흐느적거리면서 장고항 앞바다를 회유한다. 실치는 장고항 봄의 전령사다.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긴 어촌 마을
해돋이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오전 6시가 채 못 돼 부스스 일어나 장고항 우측 끝자락의 노적봉과 촛대바위가 잘 보이는 위치를 찾는다. 마치 뫼산[山] 형태의 기암은 장고항의 지킴이다. 오랫동안 먼 바다에 조업 갔다 오는 어부들의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계절, 기암 사이로 멋지게 떠오르는 해돋이를 기대하진 않는다. 단지 장고항을 대변해주는, 육지 끝자락에 있는 모습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이 빠져 갯벌이 다 드러나는 서해에서 바라보는 일출. 동해에서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침 햇살은 빠르게 사위를 밝게 해준다. 서둘러 장고마을로 들어선다. 장고항은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장고목’이라 불리다가 후에 장고항 마을로 개칭되었다. 이외에도 가낭골, 당산 마을이라는 이름이 있다. 여행자들도 바닷가 마을만 한갓지게 배회한다. 서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인 장고항이 특히 유명해진 것은 ‘실치’ 덕분이다.
‘실치’로 이름 알린 장고항
장고항 사람들은 1970년대 초, 실치잡이가 본격화되면서 다들 실치포를 말렸다고도 한다. 실치잡이가 성행할 때는 150여 가구가 소위 멍텅구리배로 불리는 무동력 중선으로 실치잡이를 해왔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연안에서의 실치잡이 어선이 자취를 감춘다. 지금은 인근 앞바다에서 개량 안강망 그물로 실치를 잡는다. 2000년 초부터는 장고항 실치회 축제를 만들어 ‘실치회의 원조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을 안쪽 건조대에서는 실치포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고샅 건물 벽에 씌인 손글씨를 따라 실치포 작업장을 찾아낸다. 아주 오랫동안 실치포를 만들어왔음이 느껴지는 작업장이다. 실치포 만드는 작업은 눈으로 봐도 힘겨워 보인다. 마치 김 한 장 만들 듯, 물그릇 담긴 실치를 그릇으로 적당량 떠서 사각 나무틀에 쏟아 납작하게 모양을 잡는다. 연륜이 깊고 숙련된 사람일수록 실치의 양을 정확히 가늠하고 평평하게 할 수 있다. 발에 붙은 실치는 신기하게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몇 시간 해풍을 맞으며 건조되면 실치포가 완성될 것이다. 두껍고 살색이 흴수록 좋은 실치포라는 상식을 알게 된다. 기꺼이 실치포 몇 묶음을 산다.
젓가락으로 건져낼 정도로 아주 작은 물고기
건조대를 지나 마을 끝 방파제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수산물유통센터가 나온다. 2012년 4월 28일, 제9회 축제를 맞춰 개장한 곳으로 7209㎡의 부지의 1153㎡의 1층 건물에는 20여 곳의 횟집이 들어서 있다. 난전, 포장마차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간판을 달고 한곳에서 영업하고 있다. 싱싱한 활어는 물론이고 실치와 간재미 등이 지천이다.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까? 바닷물을 가득 담은 고무 대야에 살아 있는 실치들이 헤엄치고 있다. 흰 몸에 점이 하나 있는, 마치 실처럼 가는 물고기가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 살아있어요” 하는 듯하다. 횟집들마다 부산하게 실치를 씻으며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 없다. 실치 씻는 방법도 아주 특이하다. 튀김을 건져낼 때 사용하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실치들을 휘휘 저어댄다. 젓가락에 실치가 걸쳐지면 소쿠리에 담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워낙 작은 물고기라서 손품이 많이 필요하다.
기암 촛대바위가 멋진 해안
수산센터를 지나 방파제로 가는 길목에서 멀리서만 봤던 기암을 가까이서 조우한다. 붓을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바위가 촛대바위다. 양쪽으론 기암이 감싸고 있다. 바다 쪽, 높은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른다. 바다 쪽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석굴(해식동굴)이 있다. 용천굴이라고 부르는데 으레 그렇듯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천장이 뻥 뚫려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이곳으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전설도 있다. 200여 년 전, 나라에 큰 정변이 일어나서 사람들은 피난을 갔단다. 그때 한 아이가 이 동굴에서 7년을 공부해 장원급제를 해 재상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동굴을 신성시해 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올망졸망 배들이 매어 있는 선착장으로 가 본다. 조업을 마친 배들이 들어오고 몇 팀의 낚시꾼들은 부산스럽게 배를 타고 떠난다. 한편에서는 남편의 고깃배가 들어오는지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는 아낙도 있고 일찍부터 막걸리 한 사발로 술추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물망에 걸린 실치 작업에 한창인 어부를 만난다. 이들은 실치 철이 끝날 때까지 자주 바닷가에 나가 작업을 한다. 실치가 적게 잡힐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고, 많이 잡힐 때는 수시로 그물을 털 것이다. 내겐 볼거리이지만 어부들에게는 생계의 그물이자 돈 줄 아닌가.
씹힐 틈 없이 살살 녹는 실치회
이제는 ‘당진 8미(味)’ 중 하나로 꼽히는 실치회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실치회 한 접시를 시킨다. 아주 작은, 흰색의 물고기가 무더기로 뒤섞인 접시 위로 깨소금, 참기름, 파 등의 양념이 흩뿌려져 있다. 여기에 오이, 깻잎, 쑥갓, 당근 등 갖은 야채에 고추장 양념이 더해지면, 함께 쓱쓱 버무려 입에 넣기만 하면 된다. 실치가 미끄러워 반드시 나무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한입 먹어본다. 작은 물고기라서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는 식감이 일품이다. 아욱을 넣어 끓여낸 고소한 실치 국에 실치 전, 실치 계란찜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실치라는 물고기가 어떤 놈인지 궁금해진다. 실치는 일반적으로 뱅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도라치’라는 이름도 있다. 서해에서는 흰베도라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실치는 ‘흰베도라치의 새끼’란다. 꽤 긴 이 이름을 외우려면 시간깨나 걸리겠다.
초봄 한 달간 ‘잠깐’ 먹을 수 있는 요리
첫 그물에 걸려드는 실치는 너무 연해서 회로 먹기는 어렵다. 3월 말부터 4월 초순경 적당히 몸집이 커져야 횟감으로 먹을 수 있다. 6월 말까지 잡히지만 4월 중순이 넘으면 뼈가 굵어져 맛을 잃는다. 그래서 실치회를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약 한 달간으로 눈 깜짝할 새다. 실치는 성질이 급해 잡히면 얼마 안 가 죽어버린다. 당연히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없다. 산지에나 와야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다. 이후부터 잡히는 물고기는 실치포를 만든다. 멸치처럼 데쳐서 말리는 실치포는 칼슘이 풍부한 건강식으로 알려져 있다. 집에 돌아와 장고항에서 구입한 실치포로 밑반찬을 만들어본다. 요리법은 간단하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 구워낸 포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자르면 된다. 밥하고 같이 먹으면 바삭바삭 과자 같은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과장 없이 놀라운 맛. 장고항의 바다 향이 어느새 따라와 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송악IC→38번 국도를 타고 대산 방향으로 진행→석문방조제를 지나 615번 지방도로→5㎞ 정도 직진→장고항으로 우회전.
추천 별미집 용왕횟집, 고향나루 횟집 등을 비롯해 다수의 맛집이 있다. 미식가라면 우렁이 박사는 꼭 들러야 한다. 또 당진 시내의 장춘 닭개장도 유명하다. 장어구이를 먹고 싶다면 옛날돌집장어구이, 원조장어구이를 찾으면 된다.
주변 여행지 삽교천도 좋지만 당진 시내 탐험을 해보자. 봄철 당진 장날(5일, 10일)의 장터 풍경이 정겹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실컷 들을 수 있는 색다른 여행 체험이다. 충남에서는 1위를 차지한 명품 쌀에 쑥이 어우러진 왕쑥송편, 기름을 바르지 않은 호떡을 사들고 남산 건강공원으로 가보자. 산이라기보다는 마치 구릉 같다. 그래도 당진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어 눈앞이 시원하다. 봄철에는 꽃 천국이다. 왕벚꽃이 만발한 봄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당진향교(충청남도기념물 제140호), 의인, 역대 현감, 군수 등의 선덕비, 공적비, 기념비 등 비석문화재 21점의 유적도 있다.
이 영화는 강제규 감독이 만든 137분짜리 대작이다. 한국에서 장동건, 일본에서 오다기리 죠, 중국에서 판빙빙이라는 거물급 배우를 동원하고 엄청난 투자를 한 작품이지만, 흥행에서는 별 재미를 못 봤다 해서 또한 화제가 된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투 장면이 볼만하다. 한 조선청년이 겪는 파란 만장한 운명의 장대한 스케일도 볼만하지만, 역사 면에서도 참고가 될 만한 영화이다.
무대는 1938년 경성이다. 제2의 손기정을 꿈꾸며 마라톤에 매진하던 준식(장동건)과 일본 최고의 마라토너로 타츠오(오다기리 죠)가 올림픽 출전권을 놓고 대회에 출전한다. 준식이 일등으로 들어왔으나 간교한 일본인 주최 측은 진로 방해를 했다는 이유로 올림픽 출전권을 모두 일본인들에게 준다. 이 일로 조선인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폭동에 가담한 죄로 준식은 일본 황군에 입대하게 된다.
일본군이 된 준식의 부대에 타츠오가 대위로 부임해 오면서 운명적인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둘은 라이벌로 계속해서 앙숙이지만, 이들의 운명은 요동치는 세계정세의 파도에 일엽편주처럼 맥 못 추는 존재로 역사의 희생양이 된다.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패하고, 둘은 포로로 잡힌다. 혹한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독일군이 헝가리 침공을 시작으로 소련까지 침공하자 이번에는 소련군이 되어 참전한다. 소련군으로 전투에 임하지만, 의미 없는 개죽음이라며 둘은 독일 진영으로 탈출한다. 다시 독일군이 되어 노르망디의 동방부대에 참전했다가 연합군의 상륙작전 때 탈출하던 중 준식은 총상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같이 도망치던 타츠오는 연합군에 포위되었으나 준식이 준 인식표를 가지고 조선인 행세를 해서 살아난다. 전쟁이 끝나고 타츠오는 준식이라는 이름으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다.
여기서 노몬한 전투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러일 전쟁이라고 하면 교과서에서는 일본 해군이 소련 해군을 물리치면서 일본군이 승전한 정도로만 간단하게 배웠다. 그러나 이 영화처럼 육전도 있었다. 노몬한은 몽고와 중국의 접경 지역으로 당시 남하정책을 펴던 소련과 중국 대륙을 장악한 일본의 관동군이 대치하다가 전투를 벌인 곳이다. 중국군에 연전연승하던 일본 육군이 최초로 소련의 막강한 화력에 대패한 전투이다. 관동군이 궤멸되고 수천 명이 전사했으니 일본으로서는 치욕적인 전투였다. 1939년의 일이었다.
우리가 얼핏 배운 러일 전쟁은 그 전 일이다. 1905년 소련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만주 여순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한 판 붙은 전쟁이다. 늘 그랬듯이 교활한 일본은 선전 포고 없이 기습 작전으로 소련의 여순 함대를 공격한다. 여순 항구는 항구 포대가 막강해서 일본군이 쉽게 공략하지 못했으나 육지 전투에서 밀려 결국 여순항을 잃는다. 소련은 발틱함대를 증강하여 반격을 시도하려 했으나 멀리 마다가스카르에서 출발한 발틱함대는 긴 항해에 지치고 극동의 유일한 소련 항구인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을 대한 해협으로 통과하다가 일본군에게 대패한다. 소련이 전투에서는 졌으나 일본에게 항복한 것은 아니다. 일본도 재정적으로 손해가 너무 크다 보니 미국의 중재로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어 전쟁을 끝냈다.
일본은 소련을 경계하기 위해 동해의 길목인 울릉도와 독도에 1904년 망루를 설치했다. 이때 시마네 현으로 편입시킨 것을 빌미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설사를 멎게 한다는 정로환이라는 약은 지금도 일본과 한국에서 잘 팔리는 약이다. 당시 많은 수의 일본군이 설사로 고통 받아 제대로 전투에 임하지 못하던 것을 보고 만든 약이 정로환인데 한자로 러시아를 정복한다는 의미로 정로환(征露丸)이었다고 한다.
나라를 잃으면 그 나라 사람들은 풍랑 위의 작은 나룻배처럼 운명이 위태로워진다. 전쟁은 비참한 일이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야욕 앞에 다른 것은 보이는 것이 없다. 일본은 명치유신의 체계를 제국주의로 잡고 이웃나라들을 침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 아베 수상도 그 계보에 속한 사람이라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지난달에 백두대간 선자령으로 겨울산행을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그동안 세 번이나 갔다 왔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길이었다. 스틱을 사용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출발해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멀리 강릉과 동해가 다 내려다보이는 새봉 전망대를 지나 풍력발전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선자령(1,257m)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선경(仙境) 같았다.
내려올 때는 눈이 수북이 쌓인 활엽수 숲속을 지나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양떼목장을 지나 원점회귀했다. 그날 일기예보는 영하 15도의 추위라고 했는데 선자령은 눈가루가 하얗게 섞인 칼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쯤 되는 것 같았다. 혹한에 멋진 설경 담아오겠다고 배터리도 두 개나 가지고 갔는데 추위에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행 중에 카메라 보온덮개를 준비한 사람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손가락은 꽁꽁 얼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스키 장갑만 믿고 핫팩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떼목장에 양은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가득
내려오는 코스는 숲속을 지나서 양떼목장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양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드넓은 목장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마치 동화의 나라 같았다. 끝없이 이어서 걷는 사람들 외에는 모두 흰색뿐이었다. 다양한 원색의 등산복들은 마치 설원에 핀 꽃들 같았다. 일행과 함께 하산하는 중이었지만, 잠시 멈춰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는 눈 쌓인 목장을 바라보면서 쓸쓸하다는 생각보다는 순백의 아름다움과 함께 텅 빈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돌아오는 겨울에도 다시 갈 것 같다.
고단함 끝에 얻어지는 것들
겨울산행은 아이젠과 롱 스패츠를 착용해도 위험하고 눈 속에 빠져 고생한 적도 있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앞으로 더 약해질 체력을 생각하며 일주일간 망설이면서 고민을 했다. 힘들 거 뻔히 알면서도 강행하려는 마음은 아직도 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다. 그리고 힘든 산행을 마친 후에는 몸은 고단하지만 정신은 맑아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평소에도 운동을 지나칠 정도로 하곤 한다. 이번 등반 중에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을 다섯 시간씩 맞아가며 고생했지만 바람이 적은 골짜기에 수북이 쌓인 눈 속에 누웠을 때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이 마냥 좋았다. 두 볼은 얼음사과같이 되었지만 드넓은 설원을 걷는 내내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자령에서의 멋진 경험으로 올 한 해도 혹시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버티기 힘들었던 상황을 잊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힘들었던 것만큼 깨달은 것도 많았던 겨울산행이었다.
* 겨울산행 tip
보온 유지는 필수. 두꺼운 겉옷 하나보다는 얇은 옷 여러 겹을 입는 것이 보온에 더 좋다.
스틱, 아이젠, 스패츠, 핫팩, 보온병은 필수. 카메라와 배터리 보온 커버도 준비할 것.
선자령처럼 눈과 바람이 심한 곳에서는 스키용 고글이 좋다.
일기예보를 100%로 믿지 말고 대비하는 것이 안전하다.
겨울도 어느새 그 정점을 찍고 하나, 둘 봄을 헤아리는 마음이 가슴속을 살며시 물들여갈 무렵인 2월 중순에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코스로 산행을 나섰다.
사실은 주6일 근무하느라 주말쯤이며 심신이 피로함에 젖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시간에 쫒기지 않고 하루를 늘어지게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동해안 최북단 ‘해파랑길’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어 선뜻 승낙하고야 말았다.
다소 이른 시간에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겨울산의 스산함을 파노라마처럼 스치면서 어둠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몇 시간을 달렸는지 드디어 진부령 고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낯익은 山河’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으니 흘리~장신리를 지나 드디어 뻥뚫린 듯 바다가 눈에 들어오더니 버스는 대대리 검문소를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대리~거진 구간은 내 젊은 시절 푸른 제복에 땀 마를 날이 없이 동분서주하며 훈련하던 곳이라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모습을 차창으로 내어다 보니 애틋함이 샘솟아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포병병과의 위관장교시절 이곳 대대리 하천 일대와 반암리 솔밭진지에 진지편성을 해놓고 포탄사격 훈련을 하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요 젊은 혈기로 똘똘 뭉쳤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루의 고단한 훈련을 마치고 병사들은 온종일 훈련의 고단함에 젖어 모두들 텐트에서 코를 골며 깊은 단잠에 빠져있던 시간에 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진지 순찰을 하던 중이었다. 다음 날, 실시될 포탄사격훈련에서 어떻게 해야 표적 안에 많은 량의 포탄을 명중시킬 것인가? 에 대한 염려와 고된 훈련 뒤의 병사들의 취침상태를 확인하고자 진지 주변을 돌고 있었다.
우연히 때는 보름달이 중천에 덩그러니 떠있었고 쏟아지는 별무리가 아름답던 그 밤에 파도소리는 유난히도 철썩이고 있었다.
출렁이는 물결에 비추인 달빛은 마치 황금 고기비늘처럼 일렁거렸고 수평선 너머에서 너울파도가 간간이 밀려오고 있었으니 환상적인 야경에 그만 넋을 놓고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지금 차창너머로 지나치고 있는 반암진지였다. 그 시절의 솔밭은 숱한 세월을 견디어 내고 노송(老松)이 되어 동해의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드디어 해파랑 길이 시작되는 거진항에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찌고 본격적으로 산행에 들어갔다. 초입의 가파른 계단에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 보니 다리는 뻐근하다 못해 쥐가 오를 지경이었다. 능선에 올라서고 나니 그다지 높지 않은 숲길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이어지는 능선 따라 숲길을 걸으니 마음속에 어느새 봄기운이 가득 밀려들어왔다. 더구나 동해의 푸른 바다를 조망하며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마음껏 들이키니 한층 상쾌함이 더해져 갔다.
어느새 몇 굽이를 돌아 ‘화진포 성(城)으로 가는 표지판이 나타나자 좌측으로는 멀리 건봉산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산에는 겨우내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설산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는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오니 최상의 멋진 코스임이 분명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의 산하이던가!” 어찌하여 이 평화로운 곳에 살벌한 철조망을 치고 남북이 서로 차가운 총부리를 맞대고 있단 말인가?
산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겨울에 푹 빠져 있는 화진포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호수위에는 백색의 고요만이 물들어 있어 마치 한 폭의 동화나라를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 산을 내려오는 끝자락이 ‘화진포성’이라 불리는 김일성 별장이 있었으니 아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산행이었다. 전망 좋은 별장의 옥상에 올라보니 멋진 설산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동해바다의 쪽빛 물결은 오늘따라 파고가 높아 하얗게 밀려와 부서지는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마다 세월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대진항 바로 옆 양지바른 곳에서 고단했던 발걸음을 멈추고 소박한 점심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 멋진 산행 끝에 먹는 점심식사는 그 어떤 산해진미와 비교할 수 없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소주와 막걸리를 곁들인 채, 산행담(山行談)에 열을 올리며 모두들 행복해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슬그머니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행복바이러스가 멀리 퍼져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봄은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평일에 휴가를 내서 정선으로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정선 삼척탄좌 폐허에 피어난 꽃을 보기위해서...
원주 치악산을 지나면서 엷은 주황의 여명이 부드럽고 잔잔한 색으로 고속도로 위로 펼쳐집니다.
제천을 지나고 동강을 가로질러 정선으로 가는 길은 참 아름답습니다.
산비탈에 그대로 남아있는 눈과 나목들이 겨울분위기를 한껏 살립니다.
이제 연탄은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연탄이 필요한 이웃이 많은 현실이기도 합니다.
모든 시니어들에게 연탄에 대한 사연이 많을 것입니다.
필자는 어릴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며칠 간 혼수상태로 거의 세상 뜰뻔 한 적도 있습니다.
탄광에서 일했던 수많은 광부들의 사연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이제 가동이 멈추고 사람들이 다 떠나 텅 빈 자리, 그 검고 어둡고 추운 공간에 꽃이 피었습니다.
평생을 해외에 다니면서 예술 작품을 모은 이가 있습니다.
그가 평생 모은 예술품을 정선 삼척탄좌 폐허 건물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디자인을 입혀 감동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저는 ‘삼탄 아트마인’을 둘러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국가나 지방 자치단체의 지원 하나 없이 그렇게 큰 시설을 운영한다는 것은
사명감이나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시작품도 좋고 멋진 숙박 공간, 레스토랑, 음향과 조명을 잘 갖춘 공연장도 있고 주변에 멋진 자연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근처에 하이원리조트도 있고 한 시간 안에 동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태양의 후예’를 촬영해서 그나마 좀 알려지긴 했고 그 덕분에 중국관광객도 많이 왔지만 작금의 사드사태로 이제는 방문하는 중국관광객도 거의 없습니다.
대표님과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겨울을 나는 것이 너무 힘겨워 보입니다.
문체부에서 이곳을 한국관광 100선으로 선정했다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에서 보듯 국가예산, 즉 국민세금은 엉뚱한 곳으로 다 새나가고 정작 사재를 털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런 곳에는 운영비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 절망합니다.
필자는 이렇게 멋진 문화공간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작은 희망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의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은 일본군 최전선 보루였다. 위도 상으로는 가장 북쪽이었고, 방위로는 일본과 가까운 동쪽 끝이었다. 일조유사시 언제라도 도망쳐 가기 쉬운 위치였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도 없고, 망망대해와 맞닿아 철수작전에 큰 장애가 없는 전략적 요지였다.
그런 지리적 요인에다 왜군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본진이어서 울산성은 정유재란 전투 중 손꼽히는 현장이 되었다. 허물어진 성벽만 남은 학성공원에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이 무너진 것은 세월의 작용이지, 전투 때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울산 나들이에서 그 처참했다는 울산왜성 전투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했다. 성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천지개벽 같은 변화에 세월의 두께만 느꼈을 따름이다. 먹을 것이 없어 적병의 시신을 뒤졌다거나, 기갈을 면하려고 제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마셨다는 아수라장을 엿볼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울산왜성은 3개 층으로 된 구조다. 해발 25m 지점에 산노마루(三之丸), 조금 위에 니노마루(二之丸), 맨 위에 혼마루(本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석축 일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경사면에 비스듬히 축대를 쌓은 것이 전형적인 왜성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급하게 방향을 꺾도록 돼 있는 호구(護口)도 그렇다. 기마병이나 보병에게 성이 뚫려도 바로 본성으로 달려갈 수 없도록 여러 굽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추려는 설계다. 호구에서 병력이 주춤거리는 사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때 없었을 것은 너무 많았다. 우선 허허벌판이었을 격전지가 지금은 대도시 울산의 도심지가 되었다. 4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내린 성터에 수목과 초개가 우거져 울산성은 야산의 모습으로 변했다.
격전지가 공원으로 변해 울산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된 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해발 50m 성 마루에 오르면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온통 아파트와 빌딩 숲, 그리고 공장들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표현이 한참 미흡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뜬금없이 대중가요 ‘울산 큰 애기’가 떠올랐다. 1960년대 초부터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신기하고 이채롭게 느껴진다. 두 세상을 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 /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 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 울산이라 큰 애기 제일 좋대나 /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반세기 남짓 전 울산은 큰 애기와 삼돌이의 연정이 아름답던 동해안 갯마을이었다는 증언이다. 눈 아래 펼쳐진 풍경과 비교하자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50년 세월의 간격이 이러할진대 420년 세월이야 어떠하랴.
이 노래 가사 2절에는 “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려만 준다면 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나”란 소절이 있다. 답답한 시골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공’을 향해 서울에 간 연인을 다소곳이 기다리면서 선물받을 날을 꿈꾸는 큰 애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울산성은 차츰 지옥으로
울산왜성 전투가 왜병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을 빼앗고 이 땅에서 왜를 몰아내지 못한 전투 결과로 보면 분명 조명연합군의 패전이지만, 왜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비극성이 잘 전해져온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서쪽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태화강은 동쪽으로 곧게 흐르다가 급히 동해로 든다. 그 하구 언저리에 제법 널찍한 들판이 형성되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터를 잡는 살기 좋은 땅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외로이 솟은 야산에 가토 기요마사는 성을 쌓았다. 급히 자리를 잡았던 탓인지 성안에는 식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좀 더 가면 임진년에 쌓은 서생포성이 있는데, 태화강 너머에 진을 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던 걸까. 직산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내려가다가 잡은 입지라 했다.
조명연합군은 그 성을 둘러싸고 군량과 탄약 등의 보급품과 식수공급 루트를 차단했다. 벌판에 우뚝 고립된 성을 몇 겹으로 둘러싼 조명연합군 포위망에 갇혀 현지조달도 막힌 상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의 운명적 대결을 그린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에는 당시의 참상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병사들의 다리는 가느다란 막대처럼 되었고, 그 때문에 각반이 흘러내렸으며, 얼굴은 여위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한다. 물을 찾아 야밤중 성 밖의 우물가에 가보면 우물 안에 시체가 던져져 있어서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성내의 소와 말은 모두 잡아먹었다. 그것이 동나자 적병의 시체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담벼락 흙을 빗물에 풀어 마실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울산성은 차츰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란 한 참전무사가 남긴 ‘조선이야기[朝鮮物語]’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낮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밤이면 우물을 찾아 성을 빠져나오지만 우물마다 돌로 메워졌거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화강 강변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강물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울산성에서 기아에 빠진 가토 기요마사의 농성군은 구원군의 손에 간신히 구조되어 한숨을 돌렸다. 4만의 조명연합군은 3만의 일본군을 보고 철수했다. 그들 역시 일본군의 총격으로 상당한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포위에서 해방된 농성군이지만 양식이 떨어진 그들은 종이를 씹고 담벼락의 흙을 파먹었다고 한다. 기요마사의 수염도 자랄 대로 자랐고, 뺨이 말라서 쑥 들어간 채 구원군 앞에 나섰다.”
4만 병력 조명연합군의 철수
울산성의 참상은 라는 기요마사 문서에도 나온다.
“성내의 사기 조상(阻喪)은 정점에 달했다. 식량과 식수가 없어 성병(城兵)은 벽토(壁土)와 종이를 먹었고, 자기 오줌과 군마의 피를 마시는 판이었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겪은 가토는 훗날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천수각 다다미에 고구마 잎줄기를 섞어 짜도록 했다. 식수난 경험으로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지금도 당시의 우물이 20여 개 남아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나오듯 4만 병력의 조명연합군은 완공도 되지 않은 평지성을 오래 포위하고도 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먼 나라에 와 피를 흘리기 싫었던 명군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내린 통한의 결정이었다. 35km 남쪽 서생포에서 달려온 왜군 1만3000명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한 것이다.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장수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산 위의 적들이 줄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사살했는데, 보병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많지 않고, 기마병도 죽은 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했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에 실린 이 한 줄의 보고서가 역전된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용열한 원군 장수의 결정이 조선 민중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생생한 증거다.
울산왜성은 아직 완공도 안 된 상태였다. 포위작전을 조금만 더 끌었어도 승리는 저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첫 공격이 12월 23일이었으니 착공 2개월여도 못 되었을 때였다.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
일본군의 출진기지였던 규슈 나고야(名護屋)성 임진왜란 박물관에 걸려 있다는 울산성전투도에는 전투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묘사되어 있다. 들판에 홀로 솟아 있는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개미떼처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는 장면이다. 전투 중에도 성안에서는 말을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종군일기 에는 전투 상황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소리가 연달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적군이 기습을 해왔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댄다. 성안에는 물건들이 수없이 많은데 침구와 의복, 재물과 보석 등을 담은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화재로 많은 무사와 인부들이 타죽었다.”
울산성 건축물 외곽에는 사방으로 삥 둘러 목조회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쪽으로 작은 창구를 설치해 거기에 총을 걸고 결사적으로 소총을 쏘았다. 수많은 창구에서 불을 뿜는 총격으로 조명연합군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13일간의 전투에서 피아 1만2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기록이 전투의 참상을 말해준다. 연합군 포위망이 열흘 넘도록 이어지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기요마사는 인근의 동료 장수에게 보낸 문서에서 자결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라는 일본 기록물에는 “나는 여기서 할복자살을 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 하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케이넨 일기에는 “드디어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더 이상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요마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인근에 주둔했던 일본군 지원 덕분이다. 왜성을 에워싼 조명연합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태화강 하구를 봉쇄해 지원병력의 울산 접근을 차단했다. 바닷길로 울산에 온 병력이 격퇴당한 기록도 있고, 육로로 인근 양산에 온 적을 물리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끝을 보지 못했다. 방심 아니면 포기였을 것이다. 기요마사 지원에는 숙적 유키나가 군대도 동원되었다. 둘은 불구대천지수 사이였지만 상대가 적군에게 함락되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전투
울산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였다. 너무 혼이 났는지 일본군은 그 뒤로 수성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몇 달 뒤 히데요시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계기로 임진·정유 7년 전쟁은 끝났다.
“성주님이 나에게 배를 타라고 하신다. 너무도 기쁘고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성을 내려올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울산성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 병사가 남긴 이날의 감회 한마디가 전쟁의 비극을 잘 말해준다.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한양을 목표로 진군하다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남쪽 해안으로 퇴각한 그들은 각 군별로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기요마사가 울산에 당도한 것은 그해 10월 말이었다. 기요마사 토벌을 목적으로 경주에 본진을 설영한 조명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요마사는 태화강 북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쌓은 서생포성을 두고도 가까운 북쪽에 또 성을 쌓은 것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한양을 다시 도모하려면 태화강 북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축성에 동원된 병력은 가토의 부장(部將) 구키 히로다카(九鬼廣隆) 등 5개 부대 병력 1만6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차출되어온 일반 농민 등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케이넨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새벽부터 산에 끌려가 건축자재 벌채에 동원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다 감독에게 들키면 목이 잘렸다 한다.
기요마사는 ‘일곱 자루의 창’이라 불린 히데요시 근습(近習) 가운데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가신이었다. 입이 무겁고 충직한데다가 무술까지 뛰어났으니,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무라이가 없었다. 유키나가는 머리는 좋지만 무(武)가 부족하고, 이시다 산세이(石田三成)는 머리만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주군 히데요시 인척이었다. 기요마사의 어머니는 히데요시 부인과 시누이 올케 사이였다.
히데요시 문하에서 그는 단연코 으뜸가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타고난 체격 조건과 근면성, 주군과의 관계를 의식한 충직성이 그를 모범적인 무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무사로 인정할 수 없는 유키나가에게 조선출진 제1군 장수의 명예를 빼앗긴 그는 사사건건 유키나가와 대립했다. 그러나 우직한 그는 유키나가의 지략을 당하지 못했다.
기요마사는 조선의 왕자 임해군을 인질로 잡은 일과 한국의 호랑이를 다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임금이 몽진한 평안도 방면을 유키나가에게 빼앗기고 함경도 방면을 맡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조선의 왕자 둘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에 피란해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거기서도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수령을 닦달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있는 터에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던 그는 제일 먼저 두 왕자를 붙잡아 기요마사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호랑이를 사냥해 호피를 히데요시에게 바쳐 신임을 사기도 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니 영물의 상징인 호랑이보다 귀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호랑이 고기가 강정식으로 좋다”는 시의들 말을 들은 히데요시는 고기도 보내라고 지시했다. 기요마사는 내장까지 말려서 바쳤다. 59세에 아들을 얻은 후로 그는 더욱 호랑이고기를 찾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가 기요마사와 호랑이가 엉킨 전설의 연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 토산품에는 어김없이 호랑이 이미지가 들어간다. 축제 때가 아니어도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잡는 모형이 번화가에 장식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유명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수립을 중재한 미국의 요청으로 1954년 일본을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마주앉은 자리였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던데 아직도 많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요시다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운을 떼었다. 이 말에 대통령은 “이젠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하고 말을 받았다. 동석했던 김용식 주일공사에 의해 이 말이 전해지자, 재일동포 사회는 통쾌한 반격이라고 크게 반겼다. 물론 국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요마사 승자의 영화
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는 주군을 배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에 섰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때 유키나가가 히데요시 아들 편에 섰던 것과 너무 대조적인 처신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유키나가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과 대조적으로 기요마사는 승자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자신을 길러준 히데요시를 배반한 죄의식 때문이었는지 도쿠가와, 히데요시 양 가문의 화친을 위해 애쓰다가 50세에 세상을 떴다. 그 일을 못마땅해 한 도쿠가와 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울산 방문은 해군 상륙함(LST) 일출봉호 진수식 참석이 목적이었다. 막강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그런 배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울산전투가 그렇게 치욕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망상에 젖다가 귀경 KTX에서 부족한 잠을 청했다. LST는 없어도 압도적인 병력과 전세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몇 년 전 뉴스 화면에서 2018년의 동계올림픽개최지로 “평창!”이라고 서툰 한국발음으로 불리며 선정되었던 기쁜 순간이 기억난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나라 위원들이 얼싸안고 기뻐했고 뉴스로 보던 우리 국민도 환호했었다.
많은 경쟁 도시를 제치고 우리나라가 2018년 동계올림픽을 치르게 된다니 스포츠계뿐 아니라 관광으로도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어서 기뻤다.
정책기자단에서 올해 마지막 팸투어로 ISU 쇼트트랙 월드컵대회 경기와 시설을 돌아본다는 공지가 났을 때 재빨리 신청해 기회를 얻었다.
KB ISU 쇼트트랙 월드컵 대회 경기관람과 올림픽 홍보체험관 방문, 안목 해변의 산책 등 일정표의 내용이 매우 알차게 짜여있어 1박 2일로 떠나는 취재를 겸한 겨울 여행이 매우 기대되었고 같이 가는 기자님들 명단을 보니 몇 번의 팸투어를 같이 한 분도 있어 반가운 마음에 설레었다.
12월 16일~18일까지 진행되는 행사의 명칭은 테스트 올림픽으로 우리 정책기자단에서는 토요일, 일요일(17일과 18일) 경기를 관전하기로 했다.
테스트 올림픽은 올림픽과 패럴림픽 대회에 앞서 운영준비상황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경기 운영 노하우를 쌓기 위해 해당 종목이 치러질 바로 그 경기장에서 열리는 것으로 테스트 이벤트라고 불리지만 월드컵과 세계선수권 대회 등 중요한 국제경기를 실제로 진행하게 되므로 올림픽과 비슷한 강도의 경기 운영을 통해 매우 현실적으로 대회 준비상태를 점검해 볼 기회라고 한다.
서울역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해 강릉으로 향하는 버스 안은 즐거운 취재 여행 기대감으로 훈훈했다.
3시간을 달려 강릉에 도착해 점심을 먹은 후 강릉 아이스 아레나 올림픽 파크에 갔는데 국무총리의 축사도 있었고 우리가 응원하는 것처럼 강원도 사람뿐 아니라 전국에서, 외국인까지 관심을 두고 축제를 즐기는 분위기가 즐겁게 다가왔다.
오늘은 쇼트트랙 종목이 치러지고 있어 많은 관중이 모였다.
이번 쇼트트랙 경기는 남녀 각각 개인전 500m, 1.000m, 1.500m와 단체전 5.000m 계주가 펼쳐졌는데 실제로 경기를 관람하니 TV로 볼 때보다 더 스릴 있고 짜릿한 승부 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유명 선수인 최민정, 심석희, 이정수, 서이라와 이제는 빅토르 안이 된 안현수 선수까지 모두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며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응원했다.
경기를 보며 좀 아쉬웠던 점은 개최지인 우리나라 선수에게 특별히 함성과 응원이 쏟아진 것이다. 당연한 일이긴 하겠지만 필자는 경기를 관람하는 동안 각 나라에서 출전한 선수에게 골고루 마음으로 응원을 보냈다.
그래도 1.500m 경기에서 이정수와 심석희 선수가 금메달을 따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신기한 건 우리나라 선수가 중반이나 뒤쪽에 처져 있다가 마지막 결승선 통과 직전 추월하여 일등을 하는 너무나 아슬아슬하고 신나는 장면이다.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을지 상상이 된다.
쇼트트랙은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효자종목이다. 오늘 많은 우리나라 선수가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더욱 노력하여 2018년 본선 때는 모두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경기를 본 후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인 동해 보양 온천 컨벤션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별관 시설이 깔끔했다. 2인 1실로 방 배정이 있었는데 기자님의 수가 홀수여서 필자는 혼자 독방을 쓰는 행운을 얻었다.
온천텔이라서 따끈한 물에 온천욕도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일요일엔 호텔 조식 후 평창올림픽 홍보체험관에 갔다. 올림픽은 빙상종목은 강릉 아레나에서, 스키종목은 평창 알렌시아에서 개최된다.
아담한 홍보관엔 2018년 2월 9일 올림픽 개최까지 418일 남았다는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고 4D 영상으로 직접 스키를 타는 것 같은 체험도 해 보았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동계올림픽 유치과정과 진행 상황, 대회 구성, 앞으로의 계획 등을 설명해 놓았고 마스코트인 수호랑 반다비가 귀여웠다.
수호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호동물 백호가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 참가자, 관중을 보호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랑은 호랑이와 강원도 정선 아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반다비는 반달가슴곰으로 의지와 용기를 상징하고 대회를 기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홍보관을 나와 안목 해변 카페거리에서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푸른 겨울 바다와 너무나도 깨끗한 하늘과 구름이 어찌나 예쁜지 강원도의 힘을 보여주는 듯했다.
여러 기자들과 사진도 찍으며 우정을 나눌 수 있어 더욱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