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는 동안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면 건강에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더 힘들다. 뇌기능이 약해지면서 소화기능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식욕도 없어지고 간혹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양껏 먹지 못한다. 건강했던 노인이 어느 날 음식을 먹고 체한 뒤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숙면도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자주 침이 마르고 입과 입술이 건조해지는데, 잠을 못 자면 상황이 더 심해진다. 밤에 잠자다 일어나 소변을 3~4회 보는 노인도 많다. 수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설 문제도 발생한다. 특히 남성들은 전립선비대증으로 소변을 시원하게 보지 못한다. 여성들은 요실금이 잦고, 한 번 요의를 느끼면 참지 못하는 급뇨도 자주 생긴다. 이런 사람들은 밖에 나가면 화장실 위치부터 찾게 되면서 활동 반경이 좁아져 사회활동에 어려움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등과 허리가 구부러지면서 위장, 소장, 대장, 간 등 인체의 장기가 아래로 처진다. 방광 역시 그렇다. 그런데 방광은 골반 바로 위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처진 위장, 소장, 대장, 간 등의 무게를 떠받치며 짓눌리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전립선이 붓고, 괄약근도 약해지는데 뼈를 제대로 맞추는 치료법인 정골요법(osteopathy)에서는 골반 위를 지그시 눌러 방광 윗부분을 밀어 올리는 방법을 쓴다. 한의학 치료도 마찬가지다. 방광과 관련한 경락을 자극해 기운을 올려주고, 등허리를 펴게 하며, 괄약근을 튼튼하게 해준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기 때문에 중력에 의해 위장, 소장, 대장, 간, 방광이 아래로 처지게 된다. 신체에서 위장, 소장, 대장, 방광을 위로 끌어올리는 힘은 횡격막에서 나온다. 숨을 들이쉴 때 횡격막은 아래로 내려간다. 이때 장기가 처지면서 아랫배가 나온다. 반대로 숨을 내쉴 때는 횡격막이 위로 올라가면서 흉강 내 음압에 의해 장기가 위로 올라간다. 그래서 참선이나 단전호흡을 할 때 들숨이 5초이면 날숨은 10초로 내쉰다. 날숨이 길어야 처진 장기를 위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스트레스가 많으며, 이것이 과호흡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때는 들숨을 더 깊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들숨이 많아지면 장기가 처져 소화가 안 되고 대소변이 시원치 않고 가스도 많이 찬다. 이럴 때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숨을 천천히 끝까지 내쉬는 연습을 자주 해주면 몸이 좋아진다. 숨을 천천히 끝까지 내쉬는 날숨 위주의 호흡이 중요한 이유다.
폐가 좋아지면 방광기능도 좋아진다. 그래서 약간 경사진 곳을 오르거나 둘레길을 자주 걷는 것이 좋다. 햇볕도 폐를 강하게 해주므로 매일 30분 이상 쬐어주면 도움이 된다.
급뇨에는 배꼽 아래에 위치한 중극혈에 뜨는 직접구가 효험이 있다. 매일 쌀알 크기의 쑥뜸을 5~7장 해주면 좋다. 주의할 점은 바람이 들지 않고 따뜻한 곳에서 뜸을 떠야 한다. 뜸을 뜨면서 찬바람을 맞으면 뜸몸살이 발생할 수 있다. 중극혈을 자극하면 방광이 힘을 받고 괄약근이 튼튼해진다. 방광 주위 근육이 튼튼해지면 급뇨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야뇨 증상은 화장실에 가려고 잠에서 깼다기보다는 잠이 깨어 화장실을 가는 경우로 봐야 한다. 나이가 들면 부신기능이 떨어져 혈당 조절이 잘 안 되는데, 새벽녘에 혈당이 떨어지면 잠을 깨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야뇨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잠자기 전 치즈를 한 조각 정도 먹고 자면 좋다. 새벽에도 혈당이 유지되어 숙면을 하게 되고 야뇨 증상도 줄어든다.
밤낮으로 잦은 소변을 보는 경우에는 심리적 긴장을 이완시켜야 한다. 방광이 아닌 정신적 문제로 발생하는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대추차나 꿀차, 천왕보심단, 황련 같은 한약을 음용하는 것도 좋다. 아랫배에 핫팩을 30분 정도 해주는 것도 긴장 이완에 도움이 되어 야뇨를 줄여준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동의보감약선(東醫寶鑑藥膳)’, ‘사람을 살리는 음식 사람을 죽이는 음식’
날씨가 추워지면서 겨울 철새들이 제철을 만났다. 우리나라에도 철새도래지가 몇 군데 있어서 일몰 무렵이면 새들의 화려한 군무를 보기 위해서 찾아가는 탐조객들이 많아졌다. 불그스레 빛나는 석양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엄청난 철새들이 산하를 휘젓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경남 창원의 주남저수지는 남쪽 지역의 특성대로 겨울에도 따뜻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서 겨울 무렵이면 철새들이 이동해오고 있다. 또한, 지자체에서도 겨울 철새들의 서식환경을 보호하고 조성하느라 시책을 준비한다.
어둠이 풀리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도착한 12월의 주남저수지는 생각만큼 춥지는 않다. 저수지 주변과 둘레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새벽 공기의 싸늘함이 기분 좋다. 길가의 채소밭과 풀잎에는 빳빳한 서릿발이 새하얗다. 서리꽃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멋을 볼 수 있는 겨울 아침은 상쾌함 그 이상이다.
물 논에 큰기러기들이 먹이를 쪼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간간이 두루미가 살짝 날갯짓한다. 큰 고니의 도움닫기도 구경하고 휴식을 취하던 쇠기러기는 가끔 고개 숙여 물속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이다. 노을 무렵 떼 지어 날아가는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은 볼 수 없으나 군데군데 다정하게 무리 지어 있는 아침 풍경이 평화롭다.
건너편 산등성이 너머로 하늘에 조금씩 붉은빛이 번진다. 그리고 빠르게 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붉은 하늘에 무리 지어 나는 철새들의 비행이 여유롭다. 물 논에서 노닐던 원앙과 백로가 아침 해를 받아 붉은 반영 속에 잠겨있다. 온 산하가 일출의 붉은 기운을 받아 설렘을 준다. 한바탕 일출의 잔치를 즐기고 나면 행복해진다.
몽골 북부와 시베리아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온 철새는 월동한 뒤 다음 해 3월이면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면 해마다 3만여 마리가 찾아와 겨울을 난다. 철새들이 월동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다.
이제는 주남저수지 탐방 둘레길을 따라 억새를 보며 걸어볼 수 있다. 둘레길은 전체 7.5km 코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척박한 땅에 소박하게 피어나 가을을 멋지게 보내고 겨울 길을 지키는 억새 길은 지루하지 않다. 요즘 걷기 열풍에 힘입어 주남저수지 탐방 둘레길이 10월의 추천 길로 선정되기도 한 걷기 좋은 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면 주남 돌다리가 나온다. 800여 년 전 강 양쪽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돌다리인데 자연 속에 그대로 스며드는 아련한 풍경이다.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225호다.
주남저수지는 철새들이 연출하는 날갯짓과 군무뿐 아니라 돌아볼 것들이 많다. 입구의 람사르 문화관과 주남 생태관이 있어서 습지 보전의 중요성과 주변 생태 환경을 자세히 이해할 기회다. 자전거 대여도 하고 마라톤 코스도 있어서 골라서 즐겨볼 만하다.
새벽부터 주남저수지의 아침 공기 속에서 사진 촬영도 하고 둘레길 걷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은 일상을 벗어나 여유를 누리게 해 주었다. 일출과 일몰 속에서 화려하게 비상하는 철새들의 군무는 겨울에 더욱 즐길만한 풍경이다.
산골짝 사이로 강물이 흐른다. 강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선율처럼 부드럽다. 오솔길 위에 곱살한 낙엽들 폭신히 얹혀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숲엔 화염이 너울거렸으리라. 붉디붉은 단풍이 산을 태우고 숲을 살랐으리라. 그즈음, 조용히 흐르는 강물 위에 어린 건 홍조(紅潮) 아니면 황홀한 신열이었을 테지.
강가엔 절이 있어 풍경에 성(聖)을 입힌다. 여기에서 부처에 이르는 길이 가까운가? 반야사(般若寺)다. 항상 새벽처럼 깨어 있으라! 반야의 지혜를 길어 올려라! 불가의 전갈은 친절하다. 그러나 내 안에 뒤엉킨 무지몽매는 진흙처럼 뻑뻑해 깨어날 기색이 없다. 진흙을 움켜쥐고서도 꽃을 피워 올리는 연(蓮)의 뉴스는, 그저 잠시 잠깐 귓전을 스쳐갈 뿐이다. 하릴없이 저무는 가을이, 덧없이 지는 잎들이 애잔해 마음만 마냥 잠 못 이루는 밤처럼 뒤척인다.
법당 뜰에 선 배롱나무는 오백 살 나이를 자셨다. 어쩌면 반야사의 최고참 선승에 속할 이 나무는 이미 일체의 잎을 떨군 알몸이다. 오백 년을 살았으니 오백 번을 옷 벗었겠지. 오백 차례의 늦가을마다 서둘러 군더더기 털어내듯 훌훌 잎을 떨구었을 터이다. 분연한 정진의 화신이라 해야 하나? 속진을 세속을 후련히 털어버린 성자처럼 개결한 모습이다. 허영을 말끔히 벗은 뒤 드디어 본질만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자태이지 않은가.
벗이여! 삶이 기막혀 홀로 외로운 그대여! 반야사에 가거들랑 배롱나무와 눈 맞출 일이다. 버리고 또 버려 가뿐해지는 무욕의 이치를 선생으로 삼아볼 요량이라도 해볼 일이다. 싱긋, 노거수에게 윙크라도 하며 억지로 붙잡아 낑낑거렸던 마지막 사랑마저 놓아버릴 일이다.
산의 이름은 백화산, 강 이름은 구수천(일명 석천). 강과 산과 절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반야사 둘레길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급작스레 인기를 누리는, 일테면 둘레길의 신예다. 여보게! 우리 반야사 둘레길이나 걸어보세! 거기가 엄청 좋다는 것이여! 그리 선창하며 찾아드는 사람이 많다.
숲속 나뭇잎들은 거의 누렇게 말랐다. 찰랑이며 쏟아지는 햇살의 조명에도 아랑곳없이 핼쑥한 산색이 마냥 스산하다. 여전히 붉은 빛을 머금은 나무들도 있지만, 부질없다. 이수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심순애처럼, 서둘러 떠나는 가을을 애써 잡아두려 하지만, 이미 홍염의 한때는 저물었다.
오솔길 길섶에 뒹구는 돌들을 주워 모아 자그만 돌탑을 쌓는다. 돌 하나에 희망을 담고, 돌 둘에 용서를 쓰고, 돌 셋에 슬픔을 얹고, 돌 넷엔 슬픔 뒤에도 남는 한 점의 기쁨을 기입하며….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에 돌탑이 있다. 기원하거나 기도하지 않고서 견딜 수 있는 삶이 있던가. 형체 없는 게 마음이지만, 돌탑을 쌓은 이들의 마음이 숲속에 서성거리는 것만 같다.
숲길에 정적이 고인다. 떨어진 낙엽을 보듬으며, 비처럼 눈물처럼 떨어지는 마른 잎들을 껴안으며, 늦가을 오솔길은 묵은 시간처럼 고요하다. 문득 일렁이는 바람의 기척인가. 다시금, 간신히 나무의 몸에 달려 있던 잎사귀들이 흩날려 내린다. 조락의 연속이다. 잎은 입이 없으니 지면서도 유언이 없다. 눈이 없어 눈물이 없고, 여한이 없으니 부음을 전갈할 일이 없다. 떠나면서 티를 내는 건 어쩌면 사람뿐이다.
시드는 단풍 빛은 어디로 가나. 떨어진 잎들은 어디로 가나. 차가운 숲속 맨땅이 종착역일 리 없다. 일일호시일(日日好是日)이라. 어쨌거나 절정의 날은 오늘 바로 이 순간이다. 조락조차 괜찮으니 애도하지 마소! 낙엽이 그리 말하는 걸 늦가을의 숲에서 깨닫는다. 질 것들 지고, 떠날 것들 떠나는 오늘도 길일(吉日)인가?
탐방 Tip
반야사 둘레길 총연장은 7km. 경부고속도로 황간IC를 벗어나 10분을 달리면 반야사 주차장에 닿는다. 반야사, 망경대 문수전, 임천석대, 옥화서원 등 볼 만한 게 많다. 충북 영동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라 꼽는 이가 많은 숲길이다.
청소년들은 식욕이 왕성하다.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다. 어릴 때 자장면 먹으러 중국집에 간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별로 드시지 않았다. 그때는 이렇게 맛있는 자장면을 왜 안 드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이 들어 보니 알게 됐다. 어르신들은 소화기가 약하다. 먹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식사 후 속이 좋지 않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다. 이는 뇌의 노화와 관련이 있다. 뇌 활동이 약해지면서 위장 활동도 줄어든다.
장수하던 분이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한다. 장수마을 노인들은 어릴 때 먹던 음식을 나이 들어서도 섭취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평소에 먹던 음식, 조상들이 먹던 음식이 장수 음식이다. 가공식품은 우리 유전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음식이라 몸에 부담을 준다. 그래서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면 침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가급적 면, 빵, 떡 등 뭉친 음식을 피하는 게 좋다. 체하기 쉽기 때문이다. 떡은 겨울철 노인을 위한 음식이기는 하지만,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 팥고물이나 콩고물을 묻혀 깍두기, 동치미 등과 같이 먹으면 좋다. 그래야 체하지 않는다. 동지팥죽의 새알이나 팥칼국수 등은 이런 음식 궁합에 따라 만들어진 음식이다.
지나치게 단맛, 쓴맛, 매운맛, 신맛, 짠맛이 나는 음식은 몸에 해롭다. 이런 맛이 나는 음식을 먹으면 침이 마른다. 초콜릿을 먹은 후 입이 텁텁해지거나, 고추를 먹고 물을 찾는 것은 강한 맛 때문이다. 좋은 음식은 담백하면서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아침, 점심, 저녁을 어떻게 먹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아침과 점심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도 괜찮지만, 저녁은 일찍 먹고 소식을 해야 하며 고기도 피하는 것이 좋다. 저녁을 늦게 먹으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속이 더부룩해서 숙면을 방해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저녁식사로 죽을 권한다. 음식을 먹고 소화시킬 시간 없이 바로 자야 한다면 죽이 좋다. 배가 약간 꺼진 채로 자야 숙면할 수 있다. 배가 더부룩한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면 횡격막 운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즉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뇌가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밥을 먹을 때는 10번씩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폭식을 하거나 10분 이내에 식사를 끝내는 사람은 위장이 힘들다. 식사를 너무 빨리 하면 입에서 침이 분비되지 않는다. 침은 음식물과 함께 위로 들어가 펩신, 위산을 분비하게 만들고 소화를 돕는다. 나이가 들면 자주 입이 마르고 침도 잘 분비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화가 더 안 되는 것이다. 침은 소화의 핵심이다.
식사 중이나 식후에 약간 쓴맛이 나는 음식을 먹으면 침이 잘 분비된다. 봄에 입맛이 없을 때, 즉 침이 잘 안 나올 때 민들레, 씀바귀, 취나물, 두릅 등 약간 쓴 음식을 먹으면 식욕이 생기고 소화도 잘된다. 식후에 마시는, 약간 쓴맛 나는 숭늉도 소화를 도와준다. 소화력이 떨어진 어르신들은 쓴맛이 나는 반찬을 곁들여 식사를 하면 좋다.
위산이 잘 분비되지 않는 사람은 감식초나 본인 입맛에 맞는 식초를 약간 곁들여 먹으면 좋다. 위산 분비가 원활하지 않으면 소화불량은 물론 석회화건염 등 관절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신맛은 약한 것이 좋다. 강한 신맛은 오히려 침을 마르게 하고 몸에 부담을 준다. 흑초나 발사믹 식초가 장수에 좋다고 소문난 이유도 약한 신맛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보양을 강조한 ‘동의보감 신형편’에는 동물성 약재 소개가 없다. 식물성 약재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또 나이 든 사람은 육식을 피하고, 대신 우유로 죽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나이 들면 뇌도 늙고 소화력도 약해진다. 뇌의 노화를 막고 소화력 강화에 좋은 것은 발효 음식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자연 숙성된 김치, 간장, 된장, 청국장, 홍어회, 술, 식초, 요구르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발효 음식은 영양가도 높고 소화도 잘된다. 몸속 찌꺼기도 청소해준다. 그러나 인공 발효, 속성 발효한 음식은 효능이 떨어진다. 김치, 된장찌개, 홍어회를 먹을 때는 입에 침이 저절로 고인다. 천연 발효빵은 씹어 먹을 때 입에 침이 고이지만, 이스트로 속성 발효한 빵은 침을 마르게 해 우유 등을 곁들여 먹는 것이 좋다.
소화불량을 예방하고 치료하려면 침이 잘 나오게 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물도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이 아닌 생수나 약수를 마시는 게 더 도움이 된다. 혀를 입천장에 대고 있으면 침이 잘 나온다. 그리고 사지를 움직여야 소화가 잘되므로, 낮에는 햇볕을 쬐며 냇가나 둘레길을 걸어보자.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동의보감약선(東醫寶鑑藥膳)’, ‘사람을 살리는 음식 사람을 죽이는 음식’
어떤 나이에는 인간이 만든 문명들을 보며 지식을 키우는 시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이 만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그것이 아무리 대작이라 할지라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대자연 탐험을 시작한 것은…. 힘든 만큼 더 단단해지고, 땀흘린 만큼 충전이 되는 여행이 바로 트레킹 여행이었다. 알프스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는 1200km의 돌로미티 트레킹! 겨울에는 스키 천국으로, 여름엔 트레킹 천국으로 변신한다. 지구라는 이름의 건축가가 만들어낸 웅장한 조각품에 감탄하는 시간 속으로 떠나보자.
이탈리아가 숨겨놓은 천상의 트레일, 돌로미티 알타비아 넘버원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의 동쪽 끝자락에 솟아오른 바위 산맥 돌로미티(Dolomite)는 해발 3000m 이상의 봉우리를 18개나 품고 있는 웅장한 산악지대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기묘한 바위 봉우리들과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 울창한 숲과 계곡, 산상화원을 보는 듯 군락을 이룬 야생화가 어우러져 알피니스트들의 요람이자 암벽 등반가들의 성지가 된 돌로미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이 치열한 접전을 펼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돌로미티를 가기 위해 베네치아로 들어가 ‘알타비아 넘버원(AV1)’의 관문도시 격인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짐을 풀었다. 아웃도어 매장과 레스토랑이 아기자기 모여 있는 마을이 너무 청량하고 예뻐서 굳이 어딜 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마을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자주 와 머물렀고, 헤밍웨이도 집필활동을 한 곳이라고 했다. 다음 날 드디어 ‘높은 길’이라는 뜻의 ‘알타비아’ 트레킹을 시작했다. 해발 2000~3000m의 고원을 걷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날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것을 제외하곤 난이도가 아주 높진 않아서 천천히 음미하며 걸었다.
니체가 사랑하고 르코르뷔지에가 극찬한 아름다움
니체는 돌로미티를 두고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이는 다시 내려올 산을 뭐하러 힘들게 오르느냐고 묻지만 인생에서 아무 어려움도 없고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희열도 없다면 니체가 말한 대로 삭막하고 의미 없는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또한 돌로미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건축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독보적인 풍광을 지닌 돌로미티는 14좌를 알파인 스타일로 오른, 현존하는 최고의 등반가 라인폴트 매스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그가 고작 다섯 살일 때 이곳 3000m급 암봉을 올랐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트레킹을 하다 보면 세 살도 안 된 아이를 목마 태우고 마치 동네 공원 산책하듯 가벼운 차림으로 험준한 산을 오르는 가족들이 있다. 또 주말에 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걷다 쉬다 하면서 놀이하듯 등반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알프스 트레킹이나 암벽등반은 마치 우리가 매일 동네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 보였다.
트레커의 로망, 알타비아 넘버원
히말라야, 로키와 함께 세계 3대 명산에 속하는 알프스 산맥, 그중에서도 돌로미티는 트레킹 코스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3개의 봉우리 “트레치메(Tre Cime)”는 돌로미티를 말할 때 늘 대표 사진으로 등장한다. 가장 높은 치마그란데(Cima Grande) 봉우리의 높이는 무려 3003m에 이른다. 해가 지는 기울기에 따라 갖가지 색으로 변신하는 바위의 장관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유명 사진작가들로부터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체다(Seceda) 봉우리를 비롯한 거대한 암봉들이 압도적 풍광을 선사하는 알타비아 넘버원은 돌로미티에서도 가장 클래식한 트레킹 루트다. 거대한 암봉군 사이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풍경들은 그동안 수없이 유럽을 들락거렸지만 단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유럽 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해줬다. “여행의 백미는 트레킹”이라는 어느 트레커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눈이 녹아 싱그러운 빛깔을 뽐내는 알프스 산자락의 맨살은 가는 곳곳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그늘이 많지 않은 돌산이지만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너른 평지를 걷는 코스라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길을 잃기 쉬운 돌로미티 트레킹은 현지 이탈리아 산악 가이드와 함께 했는데 이들의 스틱 사용법이 우리네와 달라 참으로 신기했다. 그가 등산 스틱을 쓰는 모습은 마치 스키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 산장 사람들이 겨울이면 스키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이 산장에서 저 산장으로 다닌다고 하니 이해가 되었다. 해가 뜨면 걷기 시작해 다음 산장까지 걷다가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깔고 알프스 품에 안겨 도시락을 먹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다음 산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 막간의 시간에도 산악 가이드는 산장집 어린 아들과 암벽등반을 하러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들에겐 정말이지 산악 스포츠가 밥 먹는 것 같은 일상이구나 싶었다.
산악 가이드는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긴 등산 바지를 입고 걷는 나를 보더니 왜 반바지를 입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풀독이라도 오를까봐 늘 긴 바지를 입었던 나는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긴 바지 차림이었던 것이다. 돌로미티는 한국의 산과 다르고 바위산이라 풀독이 오를 일도 없다. 다음 날 반바지를 입었더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유러피언들은 햇살을 즐긴다. 내 긴 바지가 당연히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림 같은 알프스 산장, 그리고 이탈리아 음식의 진수
돌로미티 트레킹은 겨울이면 스키어들의 성지인 산장과 산장 사이를 걷는 것이다. 눈이 없는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잘 느끼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을 듯하다. 케이블카도 있어 걷기 싫은 곳에선 이용할 수 있다. 눈뜨면 알프스의 압도적인 풍광들 사이를 걷다가 휴게소에서 최고의 이탈리아 코스요리를 먹고, 해가 지면 해발 2000m가 넘는 드라마틱한 풍경 속에 위치한 최고급 전망을 자랑하는 산장에서 잠을 자고 알프스의 일출을 날마다 맞이하는 일은 호사롭다. 이탈리아 음식이라면 피자와 파스타, 후식이라면 고작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만을 떠올린다면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알았다. 트레킹 여행이니 다이어트가 좀 될 거라는 희망은 무궁무진 미각을 자극하는 이탈리아 코스요리 앞에서 물 건너 가버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많이 먹는다. 보름 동안 매일 맛본 요리의 순서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우선 스프리츠 같은 식전주로 입맛을 예열한다.
② 프리미라는 일종의 전체요리다. 주로 덤플링(완자탕), 굴라시, 라비올리, 야채스프, 마카로니, 파스타 중 선택하는데 양이 메인디시 수준이다.
③ 세콘디 피아티라는 메인 요리를 먹는데 스테이크 종류, 감자 요리, 폴렌타, 스파게티 등이 나왔다.
④ 디저트로 팬케이크, 브라우니, 푸딩, 젤라토(아이스크림)를 먹는다.
⑤ 식후주로 그라파같이 향이 좋은 술이나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트레치메 앞 산장에서 먹었던 라비올리의 맛과 트레킹이 끝나던 날 마지막 산장에서 마신 스프리츠의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환상적인 풍경을 벗 삼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이탈리아 정찬의 세계를 느껴보는 일, 전통주 그라파 한 잔에 피로를 풀고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 아래 대자연과 하나 되는 일, 모두가 잠든 새벽 알프스 정상에서 고요한 일출을 맞이하는 일. 이것이 바로 알타비아 트레킹의 진수다.
우포늪. 한여름의 수면으론 온갖 수생식물들 너울거려 초록 융단을 펼쳤을 테지. 이제 초가을이다. 시들거나 저물거나, 머잖아 다가올 조락을 예감한 식물들은 벌써 초록을 거둬들인다. 초록에서 쑥색으로, 약동에서 침잠으로, 그렇게 한결 내향적인 풍색을 드러낸다. 그러고서도 장엄한 건 광활한 늪이기 때문이다. 몽환적이기까지 한 건 어디서고 좀체 볼 수 없는 이채로 아롱져서다.
우포늪은 국내에서 가장 큰 자연 내륙 습지다. 이 습지의 매력은 축구장 210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는 담수 규모에만 있지는 않다. 늪가에, 늪 위에, 늪 속에 수많은 생명이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것, 즉 생태의 보고라는 데에 진정한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다. 자그마치 1000여 종에 달하는 동식물이 분포한다는 게 아닌가. 이 희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등록되었다.
늪가로는 둘레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도보로 혹은 자전거를 대여받아 타고 우포늪의 전모를 둘러볼 수 있게 해두었다. 늪 들머리에 조성한 우포늪 생태관을 비롯해, 우포늪 생태체험장, 우포생태촌, 산토끼 노래동산, 잠자리 나라 등 체험공간도 다양하다. 늪의 드높은 가치에 걸맞은 보존과 활용에 공을 들인 흔적이 완연하니 다행스럽다.
과거의 우포늪은 참 보잘 게 없었다. 계모에게 구박받는 콩쥐처럼 무시되고 괄시받았다. 늪이란 한마디로 물에 젖어 있는 땅. 해서, 사람들은 우포늪을 쓸모없는 땅으로 여겼다. 툭하면 공장이나 농경지 조성을 위해 매립해버렸고 갖가지 생활 쓰레기를 늪에 묻었다. 1990년에는 늪 인근에 쓰레기 매립장을 건립하려다 중단되기도 했다. 우포늪의 생태와 경관이 살아나기 시작한 건 보호구역 내 사유지 20만 평을 정부가 사들여 보존에 발 벗고 나선 1998년부터였다.
“나를 제발 가만히 내버려둬!” 자연은 그렇게 외칠 테지만 사람의 귀는 어두워 들리지 않는다. 여차하면 파고 묻고, 뭉개고 찢는다. 자연 말살을 일삼는 인간의 인위는 이미 고약한 습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겸손하고도 적절한 개입은 썩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입은 상처를 인간이 나서서 보듬는 일은 모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과 어울려 살고자 하는 인간 내심의 표출일 수 있다. 인간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임을 자각하는 조짐일 수도 있다. 우포늪의 회생은 어쩌면 인간의 회생이기도 하다.
다양한 관목들이 늘어서 숲을 이룬 오솔길로 늪의 향이 번진다. 비릿하고 축축하고 퀴퀴하나 늪의 원초적 향이니 별미가 아니랄 것도 없다. 늪가엔 억새와 줄풀과 창포와 마름이 지천이다. 싹눈처럼 앙증맞은 개구리밥과 생이가래는 물 위에 동동 떠 낙원을 누린다. 늪 속엔 검정말과 통발, 나사말 같은 식물들이 산다지.
생명들은, 풀들은, 물 위에 있거나 물속에 있거나, 지독히도 빛의 유혹에 약하다. 한사코 태양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한줌의 햇살이라도 더 부여잡으려는 갈망으로 생명을 지속한다. 물과 태양과 땅, 늪가와 늪 안의 식물들은 이 셋과 굳건히 연결되었다. 늪이란 그래서 명백한 생명의 전당이다. 외면적으로는 고요히 닫힌 세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들의 소용돌이로 들끓는다.
그럼에도 ‘늪’이라는 단어는 웬일로 어둡게 쓰이는가. 침체의 늪이니 망각의 늪이니 불륜의 늪이니, 한 번 빠지면 물귀신에게 붙들린 듯 영영 헤어나지 못할 곤경에 처한 상황을 흔히들 ‘늪’을 갖다 붙여 은유한다. 몸부림칠수록 더욱 가라앉는 나락을 ‘늪’에 비유한다. 이는 얄궂은 곡해에 가깝다. 늪은 생성과 생동과 창의의 도가니가 아니던가. 거기엔 침체도 망각도 불륜도 없다. 늪은 헛되이, 신의 이름을 구슬프게 부르지도 않는다.
도시의 난리통 속에서 ‘늪’에 빠진 그대여, 우포늪으로 오라. 그 생명의 숲을 보라.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오직 말짱한 낯으로 핼꼼 웃는, 저 식물들의 환희를 보라. 나의 것이 아니었던 질척한 욕망일랑 늪가에 내려놓고, 그대여, 저 재기발랄한 물풀의 생의(生意)를 가슴에 채우라.
탐방 Tip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대개 우포늪생태관 인근 무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탐방을 시작한다. 탐방 둘레길인 ‘우포늪생명길’의 총연장은 8.7km. 30분에서 3시간 30분까지, 코스에 따라 탐방 소요시간은 다양하다.
여행지의 선택은 보통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영화나 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의 수많은 장소 중 하필 그곳이 선택된 데는 그만한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더 많이 알려진 울루루(Uluru)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한 소녀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꼭 가고 싶어 했던 꿈의 장소로 나온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나 연인이 혼자 찾아온 울루루는 시간이 가져다준 무게만큼의 황량함과 상실감을 안은 채 뭔가 허무의 기운마저 자아내는 듯했다. 떠난 소녀의 갈망을 대신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매해 백만 명이나 되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아프리카보다 더 거칠고 혹독했던 땅, 호주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에서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내륙 지방에 대해 과장이란 있을 수 없으며 19세기 탐험가들이 느꼈던 표현할 수 없는 더위와 끊임없는 물 부족, 고난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멜버른에서 시작해 그레이트오션로드, 애들레이드, 앨리스스프링스를 거쳐 울루루를 탐험한 뒤 서호주의 주도 퍼스, 몽키마이어, 웨이브록, 프리맨틀을 거치는 길고 험한 한 달간의 여정은 아프리카 여행이 무색할 만큼의 혹독한 인상을 줬다. 빌 브라이슨도 나와 같았다니 언제 만나서 한잔하며 호주라는 낯선 땅에 대해 수다라도 떨고 싶은 심정이다.
해가 떠오르면 40℃가 넘는 가혹한 더위와 파리떼에 시달려야 했고, 날이 흐리면 세찬 바람과 장대비, 천둥 번개까지 쳤던 곳. 호주라 하면 시드니 정도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서호주나 남호주, 울루루가 있는 사막 지역 센트럴 호주는 좀체 상상이 되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 동안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던가. 극한의 추위와 미세먼지로 마음마저 꽁꽁 얼어버린 겨울, 지구 반대편 뜨거운 땅 호주로 향했다.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관문, 앨리스스프링스
울루루 여행을 계획할 때 주변에서 듣게 되는 대부분의 정보는 매우 더운 곳이니 반드시 열사병 약을 준비해야 하고, 모기방지 약을 뿌려야 하며, 파리들이 떼로 날아드니 망이 달린 모자를 써야 한다는 얘기 등이었다. 실제로 울루루 거점 도시인 앨리스스프링스에 가 보니 40℃가 넘는 땡볕의 날씨였다.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안 쓰면 강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행 가기 전 예약해놓은 울루루 캠핑 ‘더락투어’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걸었을 뿐인데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울루루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호주의 동서남북 주요 도시에서 앨리스스프링스로 와 투어에 참여하거나 차를 렌트하기도 한다. 편리한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에어즈록공항에 내려 인근 호텔이나 리조트에 머물며 하루 이틀 울루루를 돌아본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다 해도 에어즈록공항에 내려 고작 몇 시간 머무르는 것만으로 아웃백(호주의 오지를 뜻함)을 체험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열흘에 가까운 종단 또는 횡단여행은 아니어도 최소한 2박 3일은 소요되는,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울루루로 가는 아웃백 캠핑을 선택했다.
애보리진의 성지, 울루루
지구의 배꼽이라는 별칭처럼 울루루는 호주 대륙 한가운데, 앨리스스프링스 남서쪽 400km 지점에 있다. 약 5억 년 전 거대한 지각운동에 의해 융기한 모래바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바위로 알려져 있다. 1872년 탐험가 어니스트 길스가 발견했고 호주 초대 수상인 헨리 에어즈(Henry Ayers)의 이름을 따 ‘에어즈록’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울루루(Uluru)’가 일반 명칭이다. 애보리진(Aborigine)이라 불리는 이곳 원주민의 성지로도 알려진 울루루의 이름에는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출 때면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보이는 붉은 사암질의 바위는 크기가 해발고도 867m나 된다. 바닥에서의 높이는 330m, 둘레는 무려 8.8km에 이른다. ‘섬처럼 고립된 산’인 울루루는 바다의 빙산처럼 대부분의 덩어리는 땅속에 묻혀 있다. 암석 표면은 미세한 홈이 뒤덮고 있으며 측면에는 마치 동굴과 같은 깊은 홈이 나 있다.
바람에 실려 온 모래는 계속해서 암석을 깎아내린다. 비라도 내리면 측면의 홈을 따라 폭포가 형성되어 마치 붉은색 표면에 검은 혈관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시시각각 바뀌는 바위의 색깔이 장관이라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온종일 주변에 머물며 색의 변화를 즐긴다, 일출에는 오렌지색, 이른 아침에는 적갈색, 정오에는 호박색, 그리고 해질 무렵에는 짙은 선홍색으로 바뀐다. 울루루 주변에는 멀가나무, 청회색의 백단향, 데저트오크, 블러드우드와 유칼리나무 숲도 있지만 킹브라운, 웨스턴브라운 같은 독사도 서식하므로 걸을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울루루의 정상 정복은 매우 위험하고도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정상 등반을 적극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정상 정복을 하려다 사망한 사람이 37명에 이른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했는데, 마치 신성한 원주민의 살에 철심이라도 박은 듯 잔혹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도 종종 울루루 여행기를 읽다 보면 정상 등반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2019년 10월 26일부터 등반이 전면 금지된다고 한다.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과 킹스캐니언
2박 3일의 더락투어 일정에는 울루루 탐험 외에도 카타추타 국립공원과 킹스캐니언 탐험이 포함된다. 첫째 날엔 울루루, 둘째 날엔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 돌아오는 길엔 킹스캐니언 탐험이 일반적인 코스다. 1958년 호주 정부가 울루루와 카타추타를 호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 토지를 소유한 원주민인 아그난족과 토지반환소송이 벌어졌다. 수차례의 협상 끝에 2084년까지 이 지역을 호주 정부에 임대해주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울루루와 함께 주요 성지로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카타추타(1069m)의 이름에는 ‘머리가 많다’는 뜻이 담겨 있다. 카타추타는 다채로운 36개의 바위가 모여 바위산을 이루고 있는데, 혹자는 단순한 울루루 탐험보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가로질러 바람의 계곡을 트레킹하는 코스를 선호하기도 한다.
킹스캐니언 트레킹은 웅장한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거리 코스와 협곡을 따라 산책하는 단거리 코스로 나뉘는데, 필자가 갔을 때는 비가 많이 내려 길이 유실되는 바람에 캠핑카에서 짐을 다 내리고 홍수가 난 강을 걸어서 건너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울루루에 내리는 비와 인사이드 트랙
애보리진의 신성한 바위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기 위해 땡볕 속을 걸었다. 가시투성이의 덤불과 무자비한 풀 스피니펙스에 찔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또 더위와 파리떼의 습격에 대비해 머리엔 망을 써야 했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마법 같은 것! 5성 호텔의 그 어떤 호화로움도 수백만 개의 별이 쏟아지는 별밤 아래에서 잠드는 사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울루루 아웃백을 탐험하는 동안 체코, 헝가리, 스위스, 영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18명의 친구들은 낮엔 40℃의 태양을 견디고 밤엔 천둥과 장대비를 피하며 함께 웃고 떠들면서 2박 3일을 보냈다. 캠핑이 끝난 후 누군가는 케언스로 누군가는 고국인 동남아로, 나는 퍼스를 향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막에도 천둥 번개가 치고 그렇게 많은 비가 온다는 걸 처음 알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도 우린 즐겁게 살아남았다. 대자연은 힘들고 거친 환경 속에서도 서로 웃음을 나누고 즐기고자 한다면 진정 가능함을 가르쳐주려 한 것 같다.
여행 끝 무렵 프리맨틀의 한 서점에서 울루루를 제대로 탐험한 여성의 일대기가 담긴 책 ‘인사이드 트랙(Inside tracks)’을 만났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출발해 울루루를 지나 인도양(샤크만)까지 무려 2700km를 낙타 4마리와 함께 273일간 도보로 횡단한 27세의 로빈 데이비드슨(Robyn Davidson)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 이야기가 담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이 여행을 통해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신이 허락하는 만큼 당신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시도나 노력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첫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 내딛는 첫 발걸음이라는 사실이다.”
Travel Tip
가는 방법 호주의 대도시들(시드니, 퍼스, 애들레이드, 케언스)에서 앨리스스프링스공항이나 에어즈록공항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으며, 기차나 아웃백종단여행을 통한 방법도 있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울루루까지는 차로 약 6시간 정도 소요되며 중간중간 유서 깊은 휴게소나 낙타농장 등 야생 체험도 할 수 있다.
울루루 캠핑투어 더락투어 therocktour.com.au
여행 루트 앨리스스프링스→울루루→울루루-카타츄타 국립공원→킹스캐니언→앨리스스프링스
토박이는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한 곳에 살아온 사람을 말한다. 요즘에는 도시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면 도시 토박이로 인정하자는 주장도 있다. 무작정 한 곳에서 오래 살기는 어렵다. 토박이가 되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관악구에서 산 지 35년이 훌쩍 넘었다. 인생의 절반이다. 이웃과 정을 나누며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곳이다. 뒷동산 체육공원으로 아침 산책을 나섰다. 미성동 둘레길은 아파트 정문에서 시작하여 관악산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 호압사까지 이어진다. 오가는데 두어 시간이면 충분한,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좋은 흙산 오솔길이다. 만수천 공원, 선우 공원에는 배드민턴장, 에어로빅, 운동시설이 정돈되어 건강 다지기 딱 좋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사촌이다.
봄이 되면 붉은 진달래, 노란 개나리.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여름에 들면 아카시아가 향기를 내뿜고 뻐꾸기가 노래한다. 소나무, 잣나무가 우거져 여름에 시원하다.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가 길가를 감싼다.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몇 도쯤 시원하다. 인공시설이 거의 들어서지 않아 나팔꽃, 해바라기, 채송화, 달맞이꽃 야생화, 들풀이 무성하게 자란다.
관악산 계곡과 도림천은 여름철 물놀이 천국이다. 잣나무 삼림욕장은 천혜의 치유광장이다. 어디서나 몇십 분이면 관악산에 연결된다. 아침마다 뒷동산 체육공원에서 건강을 다질 수 있다. 산기슭 지하에서 끌어올린 만수천은 이웃 주민과 정을 나누는 동네약수터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골목길, 고갯길, 사이길 등 도시화가 덜 된 시골길이 많다. 정이 넘쳐 활기찬 골목길이 있는가 하면, 인적이 뜸해 정을 그리워하는 고갯길도 있다.
서울대학교가 있는 이곳은 ‘교육특별구’다. 한곳에서 오래 사는 덕분에 아들과 딸은 유치원부터 전학 한번 없이 가까운 곳에서 교육을 마쳤다. 결혼 후에는 이웃에서 살고 있다. 세 가족 아홉 식구가 시골의 대가족처럼 오순도순 정답게 산다. 쌍둥이 손녀, 손자가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아들과 손주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등학교 부자 동문이 되었다. 쌍둥이 아이들의 등ㆍ하교를 날마다 보살피며 즐겁게 산다.
한곳에서 오래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편리한 도시와 쾌적한 전원이 함께 어우러진 우리의 관악! 정들어 살다 보니 어느덧 도시 토박이가 되었다.
한 해에만 외국 관광에 나서는 사람들이 13억 명이라고 한다. 비행기 등 여행 수단이 발달하고 소득도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인들이 해외여행에 나서면서 어딜 가나 중국인들이 보인다.
필자가 처음 유럽에 갔을 때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럽에서 동양인들을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인들을 비롯하여 중국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어딜 가나 동양인들이 많이 보인다.
독일의 백조 궁전으로 불리는 노이슈반스타인은 그 당시만 해도 느긋하게 궁전 안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가보니 중국인들이 몰려와서 멀리 다리 건너에서 아득하게 보이는 궁전 외관만 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궁전 안에 들어가려면 한나절은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신문에 보니 베네치아광장,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 방, 에펠탑, 노트르담 사원 등이 관광객들 등쌀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을 만들 조짐이라는 것이다.
백두산 관광을 할 때도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일정이 너무 힘들어 좀 늦게 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하루 2만 명 정도로 인원 제한을 해서 늦게 가면 입장도 못 할 뿐 아니라 들어가서도 줄 서다가 시간이 다 간다는 것이었다.
이화동 벽화 마을에도 처음엔 계단에 지자체에서 거금을 지원받아 미술대 학생들이 멋진 꽃 모양을 타일로 붙여 꾸몄다. 그러나 동네 주민들이 무참히 페인트 덧칠을 하는 바람에 명물이 사라졌다. 몰려드는 여행객들 때문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며 주민들이 반발한 것이다. 북촌 마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가는 쓰레기까지 골치라는 것이다. 서울 둘레길도 자주 코스를 바꾸는 이유가 동네 주민들의 민원 때문이라고 들었다. 조용하던 동네가 둘레길 걷는 사람들의 소음과 쓰레기에 몸살을 앓으니 동네 사람들이 반발할 만하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되면 여행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지금 중국이 그렇다. 그래서 세계 어딜 가나 중국인들이 휩쓸고 다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외화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해외여행 자체가 어려웠었다. 봇물 터지듯 해외여행 붐이 일어난 것은 외화 부족으로 한동안 해외여행을 막았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니 너도나도 해외여행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국민 소득도 해외여행을 갈 만큼 올라갔다. 거기에 주 5일 근무제,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수요가 폭발했다. 고령 사회로 진행되면서 퇴직한 후 건강한 시니어들이 여행에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새로운 수요층으로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 점점 건강한 고령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속속 여행 행렬에 동참하게 될 추세이다.
앞으로는 유명 관광지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쪽으로 여행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유명 관광지들은 오버 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 가봐야 고생이다.
자신의 직업이 산악인인지 가수인지 모르겠다며 웃는 남자. 1990년 ‘난 바람 넌 눈물’의 작사·작곡자이면서 노래까지 불러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지만 마치 그 노래의 가사처럼 바람같이 사라져버린 가수, 신현대(62)를 마주했다. 대중의 시선 밖에 있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가수다. 그리고 산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산악인으로 살고 있다.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회장으로서 음악의 본질을 되물으며, 자연인이자 자유인으로서 살고 있는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백미현과 듀엣으로 부른 히트곡 ‘난 바람 넌 눈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지금은 산악인이자 산을 노래하며 포크의 부활을 꿈꾸는 가수 신현대. 1956년생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하자 그는 “요즘 동안이 너무 많아서 별 의미 없다”며 웃었다. 동안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걸까. 아니다. 공연장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에는 나이를 뛰어넘는, 시간의 무게를 털고 훨훨 날아가는 힘이 느껴졌다.
산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만의 산이 있는 것
“방송국에 가면 직업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산악인인지 가수인지.(웃음)”
일찍이 알프스 마테호른,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 그리고 히말라야 초오유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한 그는 요즘도 매년 때가 되면 히말라야를 향해 떠나는 영락없는 산악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름만 되면 무전여행을 하느라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그의 핏속에는 유랑인의 감성이 흐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산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닌 기술만을 가르치는 작금의 등산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북한산을 탄 사람들 중에 ‘종주하면 5~6시간 걸리는데 난
3시간에 갔어’라며 자랑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건 산을 다니는 게 아니에요. 북한산 코스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코스들을 다 올라야 하는 건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북한산의 일부분만 본 거지 속살을 본 게 아닙니다. 진정한 산악인은 산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야 해요. 나만의 산이 존재하는 거죠.”
산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사계의 모습이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산에 갈 때면 항상 식물도감을 가져간다고 한다. 산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에서다.
8300m 산 위에서 여는 콘서트 ‘노트콘’
산을 사랑하는 만큼 신현대는 산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산과 음악을 함께 다룬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업은 우리나라의 산 노래를 정리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산 노래들을 보면 일본 군가에 개사만 해서 붙인 곡들이 많아요. 산 노래를 정리한 사람도 거의 없었죠. ‘설악가’만 봐도 각 대학 산악회, 일반 산악회가 부르는 멜로디가 달라요. 그래서 일본 군가는 다 빼고, 내가 만든 ‘선인봉’ 등 산 노래를 집대성하고 있어요. CD 3장짜리 전집으로 제작 중인데 돈이 의외로 많이 들어가서 모금을 해서 제작하는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도 안 되는 산 노래를 왜 만드냐고 한단다. 그러나 그는 에베레스트(8848m)를 갈 때도 8300m 높이까지 기타를 갖고 간 사람이다. 산이 높으면 숨이 차서 노래를 못하는데도 그는 고소 체질이라서 고산지대에서도 노래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산을 타기 위해 몸도 타고난 것일까. 그렇게 산과 노래를 함께 아우르는 그이기에 산 노래는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호흡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매년 2월에 노트콘(노래하는 산 트레킹 콘서트)을 하고 있는데 내년 2월에도 에베레스트 트레킹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어요. 작년에도 안나푸르나 갔다 와서 사진전과 콘서트를 했고 수익은 현지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으로 사용했어요. 같이 간 사람들이 글을 쓰면 그걸로 가사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예쁜 얘기’만 해야 했던 방송이 부담돼
그는 “음악도 등산과 같다”고 강조한다. 꾸준히, 자신이 평생 추구해야 할 업으로 삼아야 진정한 가수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는 히트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가수였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방송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음악 활동이 멈춘 적은 없기 때문이다.
“방송을 가면 예쁜 얘기만 해야 해서 싫었어요. 왠지 불편하고 거기에 무대공포증까지 있다 보니 방송이 체질에 안 맞더군요. 대신 콘서트는 계속했습니다.”
요즘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얼마나 단련된 가수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후배이자 현재 제7대 국립국악원장인 왕기석 명창에게 배운 소리로 공연 전 단가와 가곡으로 목을 푸는 그는 과거에는 마당 세실에서 하루에 2회씩 30일 연속 공연을 한 적도 있다. 룰라의 히트곡 ‘비밀은 없어’를 작사·작곡한 박선민, 김광석의 노래로 유명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원작자인 블루스의 대가 김목경과는 공연장에서 인연을 맺어 지금도 함께하는 동료다.
“미디어에 나오지 않아도 꾸준히 음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타를 만들려는 지금의 세태가 어린아이들의 꿈을 죄다 연예인으로 만들고 있어요. 왜 그리도 부추기는지 모르겠어요. 연예인이 아니어도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음악에서 받은 것 음악으로 돌려줘야 한다
사단법인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최근 ‘명가의 품격’이라는 이름의 시리즈 공연을 하고 있다.
6월부터 이치현, 김목경, 백영규, 추가열 등 소위 대가로 불리는 싱어송라이터들이 학동 엠팟홀에서 릴레이로 진행하는 이 공연은 대한민국 가요의 역사와 지난 세월의 다양한 면모를 관록의 힘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예전에도 싱어송라이터협회 같은 모임이 있긴 했어요. 그러나 몇 번 해산되었다가 사단법인으로선 이곳이 처음이죠. 등록 회원은 350명 정도 됩니다.”
그가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를 맡게 된 이유는 ‘산에서 받아먹은 건 산으로 돌려줘야 하고 음악에서 받아먹은 것은 음악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는 엠팟홀과 MOU 형태로 계약을 맺고 싱어송라이터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매해 헌정 콘서트를 진행하는데 올해가 5회째이며 헌정 가수는 조동진으로 결정됐다.
“어린 친구들은 연예인이 돼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음악을 하는 경우가 많죠. 우리가 노래하던 시절에는 그저 노래가 좋아서 가수가 된 경우가 많았어요. 누군가는 다 똑같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오래 노래 부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좋아서 노래를 시작한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갑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종을 울릴 수 있는 노래
사실 ‘난 바람 넌 눈물’은 완성하기까지 5~6년이 필요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것보다는 상대방 가슴에 있는 종을 울려주는 일’이라는 신현대의 지론. 그런 그가 사람들 가슴속 종을 울릴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노래를 굉장히 잘할 때가 있고 못할 때가 있어요. 속에서 솟아오르지 않을 때는 공연을 해도 할 노래가 없어요. 하기가 싫은 거지.”
그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자연인’이었다. ‘자연인 신현대’는 거침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제주의 둘레길이 유명해지니까 산에 별것 다 만들고… 그런 길들을 보면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모기만 늘어났으니…. 얼마 전 광화문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하는 노래인 ‘산양의 노래’를 불렀어요. 거기서 백기완 선생을 만났죠. 오랜만에 봬서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는데, 후배가 그걸 보고선 ‘형, 좌파야?’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야 임마, 난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실파다. 파가 어디 있어 임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찍은 거지’ 했어요. 누구를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인 거지요. 있는 그대로가 좋은 거지,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해선 안 되죠.”
자유로운 삶이 보상해주는 즐거움
“일을 벌일 때는 ‘내가 지명도가 더 높으면 일하는 게 편했을 텐데…’ 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무 때고 술을 먹을 수 있고 누가 알아보는 것도 아니어서 편해요. 그걸 고맙게 생각해요.”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 미래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없으면 안 먹고, 있으면 먹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지금처럼 살다가 떠날 때 되면 자연스럽게 떠나면 된다는 그의 말에는 무위자연의 인생관이 담겨 있었다.
“후배 아버지 한 분이 기억나는데, 그분이 정말 멋있었어요. 술을 좋아하셨는데, 임종 세 시간 전에 아들에게 위스키 한 잔을 달라고 하셨답니다. 아들이 갖다 주니 그걸 마신 후 돌아가셨대요. 그 술맛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술맛은 낙원의 맛이 아니었을까. 그가 추구하는 낭만과 자유처럼, 신현대의 삶은 제3자의 눈에는 너무도 달콤하게 보였다.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훨훨 나는 듯한 그 자연스러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