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짝 사이로 강물이 흐른다. 강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선율처럼 부드럽다. 오솔길 위에 곱살한 낙엽들 폭신히 얹혀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숲엔 화염이 너울거렸으리라. 붉디붉은 단풍이 산을 태우고 숲을 살랐으리라. 그즈음, 조용히 흐르는 강물 위에 어린 건 홍조(紅潮) 아니면 황홀한 신열이었을 테지.
강가엔 절이 있어 풍경에 성(聖)을 입힌다. 여기에서 부처에 이르는 길이 가까운가? 반야사(般若寺)다. 항상 새벽처럼 깨어 있으라! 반야의 지혜를 길어 올려라! 불가의 전갈은 친절하다. 그러나 내 안에 뒤엉킨 무지몽매는 진흙처럼 뻑뻑해 깨어날 기색이 없다. 진흙을 움켜쥐고서도 꽃을 피워 올리는 연(蓮)의 뉴스는, 그저 잠시 잠깐 귓전을 스쳐갈 뿐이다. 하릴없이 저무는 가을이, 덧없이 지는 잎들이 애잔해 마음만 마냥 잠 못 이루는 밤처럼 뒤척인다.
벗이여! 삶이 기막혀 홀로 외로운 그대여! 반야사에 가거들랑 배롱나무와 눈 맞출 일이다. 버리고 또 버려 가뿐해지는 무욕의 이치를 선생으로 삼아볼 요량이라도 해볼 일이다. 싱긋, 노거수에게 윙크라도 하며 억지로 붙잡아 낑낑거렸던 마지막 사랑마저 놓아버릴 일이다.
산의 이름은 백화산, 강 이름은 구수천(일명 석천). 강과 산과 절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반야사 둘레길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급작스레 인기를 누리는, 일테면 둘레길의 신예다. 여보게! 우리 반야사 둘레길이나 걸어보세! 거기가 엄청 좋다는 것이여! 그리 선창하며 찾아드는 사람이 많다.
숲속 나뭇잎들은 거의 누렇게 말랐다. 찰랑이며 쏟아지는 햇살의 조명에도 아랑곳없이 핼쑥한 산색이 마냥 스산하다. 여전히 붉은 빛을 머금은 나무들도 있지만, 부질없다. 이수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심순애처럼, 서둘러 떠나는 가을을 애써 잡아두려 하지만, 이미 홍염의 한때는 저물었다.
숲길에 정적이 고인다. 떨어진 낙엽을 보듬으며, 비처럼 눈물처럼 떨어지는 마른 잎들을 껴안으며, 늦가을 오솔길은 묵은 시간처럼 고요하다. 문득 일렁이는 바람의 기척인가. 다시금, 간신히 나무의 몸에 달려 있던 잎사귀들이 흩날려 내린다. 조락의 연속이다. 잎은 입이 없으니 지면서도 유언이 없다. 눈이 없어 눈물이 없고, 여한이 없으니 부음을 전갈할 일이 없다. 떠나면서 티를 내는 건 어쩌면 사람뿐이다.
시드는 단풍 빛은 어디로 가나. 떨어진 잎들은 어디로 가나. 차가운 숲속 맨땅이 종착역일 리 없다. 일일호시일(日日好是日)이라. 어쨌거나 절정의 날은 오늘 바로 이 순간이다. 조락조차 괜찮으니 애도하지 마소! 낙엽이 그리 말하는 걸 늦가을의 숲에서 깨닫는다. 질 것들 지고, 떠날 것들 떠나는 오늘도 길일(吉日)인가?
탐방 Tip
반야사 둘레길 총연장은 7km. 경부고속도로 황간IC를 벗어나 10분을 달리면 반야사 주차장에 닿는다. 반야사, 망경대 문수전, 임천석대, 옥화서원 등 볼 만한 게 많다. 충북 영동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라 꼽는 이가 많은 숲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