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버킷리스트 여행지’ 중의 한 곳은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리버풀엔 ‘비틀스’가 있기 때문이다. 통기타로 번안 곡들을 들으며 젊은 시대를 보낸 사람들. 소위 말하는 ‘팝송 세대’들은 여전히 올드 팝을 들으면서 스멀스멀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감성에 젖곤 한다. 젊을 적 추억은 팝송 음률에 남아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명치끝을 아프게 꼭꼭 찌른다. 비틀스 노래를 들으며 ‘지역 맥주’를 마시던 ‘캐번 바’를 내 어찌 잊으리오.
◇ 매튜 골목에서 만나는 비틀스 첫 무대 캐번 클럽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Manchester), 리버풀(liverpool)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축구선수들이 이 도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리버풀은 맨체스터를 거쳐 가게 된다. 리버풀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주변의 대로변 옆으로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열 지어 있다.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을 비롯해 엠파이어 극장, 아트 갤러리, 도서관 등.
특히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 홀의 규모(51m 길이, 22m 넓이)가 커서 눈길을 잡아끈다. 1838년에 초석을 마련해 1854년에야 완공된 최초의 네오클래식 건물은 법정과 콘서트홀이라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물 정면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앨버트 공의 동상과 참전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활황을 기억케 한다. 실내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1871년)과 12개의 동상이 있다. 현재는 각종 전시회, 연회, 축제 등의 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무엇보다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곳은 ‘비틀스(The Beatles)’에 대한 흔적이다. 도심 곳곳에서 비틀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애비 로드와 스트로베리 필드 등 그들 노래에 영감을 준 장소들, ‘비틀스 스토리(www.beatlesstory.com)’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들. 그중에서 여행자들이 ‘비틀스 일번지’로 찾는 곳은 매튜거리(Mathew street)다. 매튜 골목에는 5~6개의 퍼브와 클럽이 뒤섞여 있다.
숨은 그림 찾듯이 비틀스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찾아내면서 걷다 보면 골목 끝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논 동상을 만난다. 비틀스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는 캐번 1클럽(The Cavern Club) 앞이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이 만들어 낸 비틀스.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980),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 등. 비틀스는 이곳에서 근 2년간(1961년~63년) 292회 공연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첫 번째 클럽이 클래식하다면, 동굴 형태로 된 제 2클럽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왁자하다.
◇ 매일 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비틀스 음악
먼저 비틀스가 첫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1클럽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온통 비틀스의 흔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실내에는 작은 무대가 있고 한쪽에는 바 카운터와 초라한 의자들이 놓여 있다. 유행 지난 촌스러움, 칙칙함, 퀴퀴함이 함께 아우러진다. 대낮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가볍게 잔술을 마신다. 신 맛과 정제되지 않은 맛을 내는 지역 생맥주는 마실수록 묘하게 매력적이다. 해가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통기타를 두드리는 무명 가수의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퇴색한 컨트리 가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의 주인공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를 닮은 듯한 무명 가수가 이미 귀에 익숙한 팝송을 부른다. ‘렛 잇 비(Let It Be)’, ‘러브 미 두(Love Me Do)’, ‘이매진(Imagine)’ 등등. 가수는 힘겨운지 간간이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노래를 불러 젖힌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무대에 나가 음률에 맞춰 막춤을 춘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매튜거리의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진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를 남긴 비틀스 멤버 네 사람의 삶을 일일이 조명할 수는 없다. 단 놀라운 것은 이들은 악보를 볼 수 없는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수한 히트곡을 만들어 낸 신화 같은 존재. 그들을 더 이해하려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를 찾으면 된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캐번클럽, 스타클럽 등의 명소들을 재현해 놓았다. 또 비틀스가 출연했던 뮤직 비디오 등의 영상자료를 비디오로 볼 수 있다. 비틀스의 오리지널 무대 의상과 존 레논이 연주했던 피아노,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세기의 뮤지션 비틀스는 리버풀을 늘 빛내고 있다. ‘리버풀의 비틀스’가 아니라, ‘비틀스의 리버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 곳곳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영화 를 보면 좋다. 13명의 배우들이 영화 스토리에 걸맞게 비틀스 음악을 잘 매치해 놓았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전 애인으로도 알려진 짐 스터게스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또 ‘비긴즈-노 웨어 보이(Begins-Nowhere boy, 2009)’에서는 존 레논의 삶을 조명해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비틀스, 오노 요코 등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올해 5월, 73세의 노장 폴 매카트니는 내한공연을 했다. 비록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설은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판타스틱’을 외쳐댔다. 라는 다큐영화를 보면 2년 전의 폴 매카트니가 출연해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틀스라는 그룹은 오래전에 흩어졌지만 단 한 명의 뮤지션이 남아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리버풀 클럽에서 만취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클럽 앞에는 술 취한 사람들을 정리, 통제하는 지킴이들이 있다. 그들은 ‘필자처럼 좋은 사람(?)’만 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 해양 무역도시의 옛 잔상들, 노예 거래
리버풀은 바닷가가 있는 항구 도시다. 오래전부터 해양 무역 도시였고 20세기 초, ‘대영 제국 제2의 도시’로 불렸다. 그러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심히 파괴되었다. 특히 리버풀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 내 다른 어떤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받았으나 전쟁 이후 재건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항구 주변은 휘황한 현대적인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이 건물에는 머시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국제 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등의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 노예박물관이 관심을 끈다.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오래전, 이 항구에는 가나, 자메이카 인 등 무수한 노예들의 거래가 이뤄졌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국제노예박물관을 둘러보면, 죄의식조차 없던 그 시절의 영국민들의 잔인함이 떠올려진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관련된 많은 영화, 다큐들이 있지만 최신작이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면 그때의 잔인성과 몰인간적인 영국 귀족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라는 현재 유명 배우의 출연 계기가 독특하다. ‘컴버배치’라는 성씨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서 노예를 부렸던 조상의 흔적이었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에이브러햄 컴버배치(1726~1785년)가 그의 조상이다. 베네딕트의 어머니인 여배우 완다 벤담은 노예제 보상 피소를 우려해 본명으로 배우활동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속죄하는 의미를 담아 이 영화에 적극 출연했다. 에서는 선량한 백인 윌리엄 포드로 분했다.
또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과 무관치 않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스햄튼(1912년 4월 10일)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항해하다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대형 여객선. 대서양 횡단여행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이 배의 공식항구는 리버풀이었고, 승무원과 승객의 상당수도 리버풀 사람들이었다. 타이타닉호의 탄생과 침몰 및 각종 배의 모형을 전시한 곳이 해양박물관이다. 해질 무렵, 리버풀 대성당(Liverpool Cathedral)을 향한다. 영국 국교회의 성당으로는 세계 최대의 크기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탑 위로 올라가 바라본 리버풀 도심은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건물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리버풀을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을 알기에 그날 바라본 낙조는 유난히 쓸쓸했다.
◇ Travel Tip
- 현지 교통 정보 런던에서 지방 이동은 특급기차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익스프레스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는 예약하지 않으면 버스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싸다.
영국 대표 음식들 영국의 아침 식사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양이나 메뉴가 풍성하다. 영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샌드위치와 피시 앤드 칩스를 들 수 있다. 카드놀이를 좋아했던 샌드위치 백작이 카드놀이를 하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냈다는 샌드위치는 영국인의 일반적인 점심 메뉴다.
시차 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까지는 서머타임으로 8시간 느리다.
전압 다른 유럽권역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꼭 어댑터가 필요하다. 표준전압은 230/240V, 50㎐. 플러그는 발이 3개 달린 BF 타입.
화폐 단위 파운드를 이용한다.
연계 도시 여행 시작을 런던에서 했다면 리버풀을 거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glasgow) ~ 에든버러(Edinburgh)로 가면 된다. 글래스고는 공업도시이고 에든버러는 옛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도(古都)다. 특히 에든버러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주 멋진 도시다.
추천 스코틀랜드 산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 : 스카치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 그중 오직 맥아의 과정을 거친 보리 한 가지로 만들어지며 동일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위스키(Single Malt Whisky)가 최고다. 현지인에게 추천 받은 브랜드로는 Glenfiddich, Jura, Talisker가 있다. 특히 탈리스커는 한국인 술 마니아에게 큰 인기다. 맥주는 이니스 앤 건스(innis & gunns)가 맛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2015년 벽두부터 올 한 해 문화 콘텐츠 흐름을 주도할 키워드는 무엇이냐는 전망이 쏟아졌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보고서 에선 올 한 해 유행할 문화 키워드로 ‘스마트 핑거 콘텐츠’를 첫손에 꼽았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스낵처럼,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10∼15분 내외로 간편하게 소비하거나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를 지칭한다.
스낵 컬처는 시장 잠재력과 이용자 급증, 무엇보다 남녀노소 누구나 제작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크게 성장하고 있다. 스낵 컬처의 대표 콘텐츠는 웹소설, 웹툰, 웹드라마, 웹예능 등이다.
‘엽기적인 그녀’ 등 1990년대 온라인 게시판에 연재됐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팬픽 등 인터넷 소설이 진화와 변모를 거듭하다 ‘웹소설’로 자리 잡았다. 2013년 1월, 네이버에서 ‘웹소설’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웹소설’이라는 용어가 보편화했다.
◇웹툰·웹소설 시장 급성장, 스낵컬처 ‘돈 되네’
네이버, 다음카카오, 문피아 등 웹소설 콘텐츠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증가하고 이들 업체의 성장세도 두드러지고 있다. 네이버가 지난 1월 웹소설 출시 2주년을 맞아 공개한 ‘네이버 웹소설 콘텐츠 현황’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동안 글을 올린 작가는 전업 작가에서부터 학생, 주부,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6만7000여 명에 달하고 작품 수는 전년 대비 115% 증가한 12만3000여 편이었다. 하루에 183명의 작가가 약 340편의 작품을 올린 셈이다.
네이버는 “원고료와 미리 보기 수익만으로 한 해 2억8000만 원을 번 작가를 비롯해 1억 원 이상 수익을 올린 작가가 7명이다. 이들의 직업은 평범한 주부부터 20대 대학생, 교사 등으로 다양하다. ‘로맨스 소설계 스타’로 불리는 이지환 작가는 현직 중학교 교사다”고 밝혔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신중년이라면 누구라도 도전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웹소설이다.
다음카카오의 카카오페이지는 최근 인기 웹소설 작가들을 영입하는 등 서비스를 개선해 인기 앱으로 부상했다. 또한 조아라, 북팔, 문피아 등 웹소설 업체들이 급성장하고 있다. 북팔은 2014년 35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으며, 2000년 온라인 소설 사이트로 창업한 조아라는 매출액이 최근 3년간 313% 성장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출판 소설과 달리 웹소설은 매해 큰 폭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2013년까지 100억 원 규모도 되지 않던 국내 웹소설 시장이 2015년 올해는 200억 원 이상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20%대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한 tvN드라마 과 출간돼 220만 부가 판매된 만화책 의 원작은 바로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이었다. 이처럼 웹툰은 최근 들어 대중문화의 강력한 먹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웹툰은 웹사이트 만화를 의미한다. 이미지 파일 만화를 총칭하며 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어다. 웹툰은 1990년대 후반 IMF 사태로 출판만화 시장이 침체하고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만화들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연재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다음이 2003년 ‘만화 속 세상’이라는 웹툰 코너를 신설해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를 소개하면서 포털들이 앞다퉈 웹툰을 게재했다. 2009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웹툰은 또 한 번 도약하면서 시장을 확장하고 있다.
웹툰 시장 규모는 2013년 기준 1500억 원에 달했다. KT 경제경영연구소는 2015년 올 한 해 웹툰 시장 규모는 30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에서부터 카카오페이지 등 모바일, 통신사 사이트, 신문사 포털, 레진코믹스를 비롯한 웹툰 전문사이트 등 다양한 플랫폼이 수많은 웹툰을 게재하고 있다. 2014년 한 해 네이버의 웹툰은 연재작품 159편, 완결작 318편에 달한 것을 비롯해 다음은 연재작품 99편과 완결작 403편, Kt(올레마켓)는 연재작품 52편과 완결작 20편, 카카오 페이지는 연재작품 70편과 완결작 1편, 레진코믹스는 연재작품 170편과 완결작 80편이다.
◇시청 100만건은 기본, TV없이 잘 나가는 웹드라마
KT 경제경영연구소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국민 3명 중 1명이 웹툰을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고 있으며 윤태호 작가의 ‘미생’등 적지 않은 웹툰 작품들은 조회 건수가 10억 건을 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즘 젊은 층뿐만 아니라 중·장년층도 스마트폰 등을 통해 시청을 많이 하는 것이 웹드라마다. 많은 업체들이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제작하고 있는 웹드라마는 대중문화의 킬러 콘텐츠로 부상하고 있다. KBS, MBC, CJ E&M 등 방송사와 드라마 제작사, SM엔터테인먼트 등 연예기획사,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오아시스픽처스 같은 영상콘텐츠 제작사, 교보와 삼성 같은 대기업들이 웹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
‘손안의 극장’, ‘모바일 무비’, ‘SNS 드라마’, ‘인터넷 드라마’로도 불리는 웹드라마는 스낵 컬처의 가장 대표적인 콘텐츠다. 웹이나 모바일을 통해 볼 수 있는 웹드라마는 정해진 포맷이 없다. 지상파 드라마 제작비 10~20분의 1선인 회당 제작비 2000만 원 정도로 만들어진다. 대체로 6~20회로 회당 3분짜리 짧은 것도 있지만, 회당 10~20분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웹드라마는 포털과 페이스북, 블로그, 유튜브 등 동영상 사이트, 모바일 등을 통해 이용자와 만나고 있다. 웹드라마 시대의 서막을 연 작품은 2013년 2월 조윤희, 정겨운 주연의 ‘러브 인 메모리’다. 이후 웹드라마 제작이 본격화하면서 2014년 한 해에 ‘아직 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생’, ‘무한동력’, ‘스무살’, ‘후유증’, ‘방과후 복불복’, ‘어떤 안녕’, ‘연애세포’ 등 30여 편의 웹드라마가 쏟아졌다.
지난 4월 SM과 라인이 공동제작한 웹드라마 ‘우리 옆집에 엑소가 산다’는 재생 건수가 1000만 건을 돌파하는 등 웹드라마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데다 TV드라마가 다루기 힘든 소재나 형식을 과감하게 도입한 것이 웹드라마의 인기요인이다.
김태옥 네이버 TV캐스트 부장은 지난 7월 열린 ‘2015 넷트렌드 콘퍼런스’에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출시하는 웹드라마 중에서 3분의 1 정도만 100만 재생 건수를 넘었는데, 최근에는 대부분이 기본 100만 건은 넘는다. 웹드라마 저변이 빠르게 확대됐다”고 말했다.
◇예능까지도 웹으로...대중문화산업 판도변화 진행중
웹소설, 웹툰, 웹드라마에 이어 웹예능도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강호동, 이승기, 이수근, 은지원 등 스타들이 출연하고 나영석 PD가 연출한 ‘신서유기’가 웹예능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지난 9월 4일 네이버 TV캐스트와 모바일을 통해 공개되자마자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9월 4일부터 10월 2일까지 조회 건수가 무려 5000만 건에 달했을 정도다.
‘신서유기’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웹예능이라는 분야가 워낙 생소하지만, 웹과 모바일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파악해 웹예능을 만들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웹예능을 많이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서유기’에 출연한 강호동은 “웹예능이라는 말을 ‘신서유기’를 하면서 처음 들었다. 웹예능은 TV예능 프로그램보다 제약이 덜해 정말 편하게 촬영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웹과 모바일기기를 통해 유통되는 스낵 컬처의 대표주자인 웹소설, 웹툰, 웹드라마, 웹예능은 콘텐츠 자체로도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미국 등 외국에 수출돼 한류 콘텐츠로도 주목받고 있다. 네이버 웹툰&웹소설은 영어·중국어·태국어 등 다양한 언어권 독자들도 웹툰과 웹 소설을 즐길 수 있도록 했고 다음카카오도 중국의 최대 포털 사이트인 텐센트의 QQ닷컴 등에 다음 웹툰 콘텐츠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방과 후 복불복’ 등 적지 않은 웹드라마가 중국, 베트남 등 해외에 수출돼 인기를 얻고 있으며 웹예능 ‘신서유기’도 중국 QQ닷컴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무엇보다 ‘뱀파이어의 꽃’, ‘올드맨’을 비롯한 웹소설과 ‘미생’, ‘이끼’, ‘지킬 박사는 하이드씨’ 등 웹툰이 영화와 드라마, 출판물로 만들어지는 등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Multi Use)의 콘텐츠로 자리 잡으면서 스낵 컬처의 대표적 콘텐츠인 웹소설, 웹툰, 웹드라마, 웹예능은 대중문화 산업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
>> 글 배국남 논설위원 겸 대중문화 전문기자 knbae@etoday.co.kr
1960년대 당시 유행하던 음악 중에는 미국 팝송같이 많지는 않았지만 샹송이나 칸초네, 그리고 라틴음악도 있었다. 필자가 샹송을 처음 접한 것은 1962년 9월쯤이었나, 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 이사로 근무하시던 선친과 명동 국립극장(현 예술극장)에서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공연을 본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그녀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혼’, ‘미라보 다리’ 등을 불렀다. 특히 ‘포르투갈의 빨래하는 여인’이라는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래가 상당히 감미로웠다는 느낌 외에 샹송에 대한 별다른 매력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샹송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6·25 전에 집에 있던 유성기 판 중 일본 여가수가 일본말로 불렀던 노래가 사실은 다미아라는 샹송가수가 부른 ‘그렇게 남의 속도 모르고(Tu Ne Sais Pas Aimer)’라는 샹송이었던 것이다. 다미아는 ‘우울한 일요일(Sombre Dimanche)’로도 유명한데, 10여 년 전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이 노래는 본래 헝가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노래 때문에 자살자가 많아 헝가리에서는 금지한 것을 다미아가 프랑스어로 부른 것이다. 그 후 미국의 재즈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영어로도 불러,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노래를 듣고 도쿄에서만 20만 명 이상이 자살했다고 한다.
1963년, 해외에 다녀오신 선친이 LP를 몇 장 사오셨다. 당시는 외화가 무척 귀할 때라 한번에 10장 이상은 반입이 불가능했고, 그것도 시중에 판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표지에 일일이 서명을 하도록 했었다. 그 대부분은 클래식이었으나 그중 한 장이 Holiday in France라는 판이었다. 이 판에 있는 파리의 하늘밑, 고엽, 파리의 아가씨, 아이 러브 파리, 파리의 다리 밑, 매혹의 왈츠, 바다 등은 나중에는 자주 듣다보니 많이 익숙해졌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하고 황홀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샹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당시 국내에는 샹송 판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이것이 샹송이다’라는 판을 구했고, 거기서 앞에 소개한 이베트 지로, 질베르 베코 등의 노래와 특히 이브 몽땅의 고엽(Les Feuilles Mortes/Autumn Leaves)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판은 고교 동창인 박명도 군이 특히 좋아해서 그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거의 이 판을 들었다. 그리고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이진섭씨가 쓴 샹송을 주제로 한 라디오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통해서 당대 최고의 샹송가수 에디뜨 피아프의 일생, 비참했던 어린 시절과 6년 연하의 이브 몽땅을 발굴해서 일류가수, 배우로 성장시켰으나 시몬 시뇨레에게 빼앗긴 사연, 그녀의 노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과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대의상은 물론,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스카프와 스타킹조차 살 수 없었고 세탁도 자주 할 형편이 못 되어 목이 긴 검정 스웨터와 검정 바지를 입고,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했던 줄리엣 그레꼬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가수로 크게 성공하자 그녀의 의상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는 이야기와 그녀의 노래, 고엽과 빨간 풍차(Moulin Rouge)도 이 드라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샹송과 친해지면서 파리를 여행할 때면 어떻게 하든 틈을 내어 몽마르뜨르 언덕에 올라가 거리 화가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집사람이 기념품가게를 구경 다니는 동안 그 옆에 있는 카페에서 옛 샹송들을 들으며 생맥주를 몇 잔 마신다. 그 후 날이 어둑해지면 언덕 아래에 있는 물랭 루즈에 입장하여 아직도 복도에 걸려 있는 로트렉의 포스터들을 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식전(食前) 연주를 들으며 기분이 나면 춤도 몇 곡 춘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프렌치 캉캉으로 끝나는 유명한 물랭 루즈쇼를 보면서 저녁을 먹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절차가 되었다.
일제 때 선친은 제1고보, 이진섭씨는 제2고보로 학교는 달랐으나 같은 학년으로서 고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댁에서 5년간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해, 친형제 이상 친했다고 한다. 그리고 옆방에는 얼마간인지 모르지만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하숙을 했다고 한다. 이진섭씨는 작가이자 기자, 아나운서, PD를 겸직하셨고 샹송에도 정통하셨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가 이진섭씨의 번역으로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였다. 그분은 술에 취해서 명동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면 순경을 향해 소변을 보셨다고 한다. 순경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한 힘없는 문화인의 상징적인 항거였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술을 드셨고 필자도 혜화동인가에 있던 그분 댁에 심부름을 자주 가서 친아저씨처럼 지냈다. 선친은 워낙 예술과 친구, 그리고 술을 좋아해 환도 후 명동에서 조그만 무역상을 할 때 돈이 좀 생기면 집보다는 친구들 뒷바라지가 우선이었다. 당시 어울리던 분들로는 이진섭씨 외에 박용구씨, 박인환씨, 송지영씨, 심연섭씨, 이봉구씨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 가운데 올해 101세인 박용구씨 외에는 이미 모두 고인이 되셨다.
1956년 3월, 선친은 당신의 중학교 후배가 되어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는 장남이 자랑스러워 명동에 있던 은성주점에 필자를 데리고 가셔서 친구들에게 마냥 자랑을 하셨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던 박인환씨가 냅킨에 시를 쓰셨고 그 옆에 계시던 이진섭씨가 역시 냅킨에 작곡을 하셨는데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그 자리에 나애심씨가 있어 노래를 불렀다고 하지만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박인희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사람은 자신의 피리어드(period) 대로 역사를 생각한다. 70의 인생을 아직 겪지 않은 사람에겐 한국영화의 지난 70년은 인식과 학습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는 현재 대부분이 망자(亡者)의 것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유현목 감독과 그의 영화 ‘오발탄’같은 것이 그렇다. 거목 유현목은 갔지만 아직 이 영화에 대한 명성과 그에 대한 기억은 계속된다. 은 언제 봐도 늘 놀랍도록 ‘현재적’이라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명화(名畵)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것.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영화 ‘오발탄’은 지난 70년 한국 영화의 역사에 있어 우리 시대의 크나 큰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결의 수순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유현목의 영화적 예감은, 마치 뛰어난 마법사의 그것처럼, 적중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직도 오발탄의 분단, 오발탄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 오발탄 때문에 생겨 버린 경제적 불평등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언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후반 임권택을 위시한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류승완 등이 일궈 낸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코리안 뉴 시네마’의 기수들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 있어 진짜 르네상스는 신상옥 감독과 그의 키드(kid)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이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빅뱅(big bang)이었다.
신상옥의 1961년작 는 죽은 남편의 친구가 인근 학교의 선생이 되어 사랑방의 객으로 머무는 동안 안주인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두 남녀의 은근한 ‘밀당’이 미망인의 딸 옥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욕정은 늘 이성의 벽을 넘어서려 하지만 그 담장 어귀에 서서 항상 머뭇대기 십상이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두근대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만큼 에로틱한 것은 없다. 단 한 번의 입맞춤 혹은 부둥키고 얽히는 섹스 없이 이처럼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그렇게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생전에 만든 등 주옥같은 80여 편의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영화적으로 원대한 꿈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위용을 떨쳤던 신상옥의 영화사 ‘신 필름’과 관련해서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1980년대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뤄 낸 신화를 한국적으로 치환시키면 이해가 빨라진다. 현대화된 한국 장르영화의 시작은 신상옥이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말은 정확한 기술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상옥의 후예들이 나왔는데 예컨대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 역시 신상옥 감독처럼 연출과 제작, 투자, 배급을 동시에 진행하며 화제작, 흥행작을 양산해 냈다. 모두 ‘아버지’’ 신상옥에게서 배우고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1 르네상스기에서 이만희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는 김태용의 작품으로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원래 이 영화는 이만희의 소실된 명화 중 하나이다. 1967년에 만들었지만 지금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김수용 감독이 1981년에 리메이크한 것은 어쩌면 이만희에 대한 오마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복역하다 잠시 휴가를 나온 여인 문정숙은 기차 안에서 위조 지폐범으로 쫓기고 있는 남자 신성일을 만나 하루살이 나방 같은 연정을 불태운다. 그 사랑 참 쓸쓸하고 허무하며 가슴이 아프다. 1960년대라면 여전히 독재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력이 동원된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력은 첨단기술로 포장된 지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건 짜릿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이만희의 수많은, 그리고 화려한 작품들, 곧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7인의 여포로’ ‘삼포 가는 길’ 등은 신상옥과 달리 그가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상옥이 시류라는 서핑을 잘 탄 인물이었다면 이만희는 올곧은 지식인의 표정을 지닌 채 살아가려 했던 감독이었다 이만희는 한마디로 위험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던 그의 이력은 이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천재는 불우한 법이다. 이만희는 1975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 역사는 이만희의 죽음과 함께 한동안 사구(砂丘)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이창동의 등장은 어쩌면 이만희의 부활과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너무나 많은 기억들, 작품들
70년사의 갈 길은 멀다. 중간중간 떠오르고 명멸하는 감독들, 제작자들, 배우들의 면면이 길고도 길다. 그중에서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혈맥 아닌 혈맥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계보에 속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로 이들의 시대였다.
이장호 감독이 이루어 낸 70년 영화 역사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가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 ‘바보선언’ 등 일련의 영화들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감독이 시대의 어둠과 어떻게 조우하고 또 스러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그중 ‘바보선언’은 탈(脫)정치적인 척, 사실은 19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적 지식인의 깊은 정치적 좌절과 그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소매치기와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가는 저지대형(低地帶型) 인간 동철이 가짜 여대생 혜영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사실은 콜걸이자 창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좌충우돌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보가 아니면 살 수가 없었던 시절, 당시 우리 사회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의 시선을 통해 삶의 가닥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바보선언’은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을 견뎌 내려는 영악한 이야기 꾼이 의도적으로 꾸며냈던 자기 모멸적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980년대의 흉포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배창호는 어두운 멜로드라마로 시대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인물이다. 배창호는 이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꼬방동네 사람들’ 처럼 사회파적 시선을 자신의 작품에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러나 곧 ‘도의 꽃’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으로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앵그리 영 맨’ 혹은 ‘비트 제너레이션’의 세대임을 갈파한다. 배창호는 한국영화계에 ‘스타일’을 들여 놓았다. 영화는 결국 빛과 어둠의 예술이라는 점을 그는 명명백백하게 낙인찍어 놓았다. ‘적도의 꽃’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배창호가 이루려고 했던 영화적 스타일은 그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세에서 빛을 발한다. 이명세는 영화보다 그림을 그리려는 쪽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회화적이면서 키치(kitch)적이다.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한 컷의 사진들을 이어 붙인 동영상의 예술에 가깝다. ‘첫사랑’과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계보는 한국영화가 스타일에 있어 한 움큼의 큰 성과를 거둬 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명세가 로 새로운 좌표를 찍을 무렵 한국영화계의 한쪽에서는 목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뉴 코리안 시네마’의 바람이다. 여기에는 홍상수와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은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에 대거 진출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이뤄냈다. 당시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경쟁부문에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 2편이, 또 다른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Uncertain Regard)’에는 김의석 감독의 이 올랐다. 2002년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신작 역시 경쟁부문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한국영화의 당시 칸 진출이 유독 눈길과 화제를 모았던 것은 해외 영화계, 특히 예술영화에 대한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 영화 권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작가적 경향에 한 관심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3~4년 전부터 한국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유럽 평단들의 시선은 여전히 한국영화 하면 신상옥, 김수용,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 등 구세대급 감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칸 영화제 진출은 한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유럽 영화계 내에서 공식적인 발판을 마련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새로운 감독들’로서는 흔히들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허진호, 김지운 등 당시 40대 감독들이 거론돼 왔으며 그 뒤를 이어 봉준호, 장준환, 류승완 등 30대 감독들까지 포함해 이들을 일컬어 충무로에서는 일명 ‘뉴 코리안 시네마 운동’의 기수들로 분류했다.
유럽 칸 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영화작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은 마치 1990년대에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이 이를 통해 대거 해외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위상을 급격하게 올려 놓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됐다. 당시 유럽영화계는 첸 카이거와 장 이모우 등 북경대학 출신의 일명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집중 소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뉴 코리안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은 모두가 ‘전후 세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으며 분단문제, 민족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1970~1980년대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한 후 영화예술이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도화된 산업화 시대의 영향과 혜택으로 인해 MTV 스타일의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때론 유머러스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공상과학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달콤한 인생’,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게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새로운 70년사를 위하여
새로움은 늘 오래된 것으로 대체된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10년을 돌진하듯 활동해 왔던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도 그렇다. 이들 모두 이제 ‘올드 보이’가 됐다. 50대를 훌쩍 넘긴 감독이 됐다.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피를, 새로운 ‘피의 혁명’을 요구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에 호응하는 듯 2010년대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 ‘가시꽃’의 이돈구 감독, ‘명왕성’의 신수원 감독 등등.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아직 지난 70년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에 눌려 완전히 개화한 상태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인생이 그렇듯, 영화도 다 그런 것이다. 바뀌고, 잊히고, 새로 기억되며, 그래서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아 남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길을 7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때론 영광스럽고, 때론 팍팍하며, 때론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참이나 참담한 심정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70년을 영화 혼자서 버텨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금의 감독과 배우가 있기까지 그 전의 감독과 배우가 있었고, 또 다시 그전의 감독과 배우, 제작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건 일직선의 끈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찬욱과 김기덕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70년 전사(全史)의 영화를 보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일별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단,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점지해 나갈 것이다. 분명한 일 하나는 과거의 영화들이 지금의 영화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간다면 세상은 언젠가 꼭, 영화처럼 될 것이다.
△ 오동진(吳東振) 영화평론가
문화일보,연합뉴스,YTN 기자를 거쳐 영화전문지 FILM2.0 편집위원과 동의대학교 초빙교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EBS 시네마 천국 MC, YTN 시네24 MC를 역임했다.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과 마리끌레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불리지만 “나는 추상주의에 속하는 화가가 아니다”라고 말한 작가, 작품을 통해 감상자와 소통하려 했던 작가,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의 작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전시가 6월 28일 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마크 로스코전에서 꼭 해 보아야 할 것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해보기
마크 로스코는 관람자와 작품 사이에 아무것도 없기를, 그리고 색이 관람객을 둘러싸는 거리에서 작품을 봐주길 원했다. 색으로 가득한 그의 그림은 인간 내면 깊숙이 숨겨진 여러 가지를 자극한다.
‘로스코 채플’에 앉아 명상해보기
이번 전시에서 재현된 ‘로스코 채플’은 단순히 전시를 위한 장소가 아닌 그림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림과 가까이 앉아 마크 로스코, 그리고 또 다른 나와 대화해보자.
이번 전시를 진행하는 코바나컨텐츠(대표 김건희)는
文化益人을 모토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콘텐츠를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전시기획사이다.
까르띠에 소장품 展으로 시작해 작년 점핑위드러브(Jumping with Love)에 이어, 미국국립미술관 대규모 최초 전시 ‘마크 로스코(Mark Rothko)’전을 진행 하고 있다.
글 영화평론가 윤성은
강제규는 (1996), (1998), (2003) 등으로 한국영화계의 큰 이정표를 세운 감독이다. 하지만 명성에 비할 때, 강제규 감독의 연출작이 몇 편 안 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는 (2011) 이후 약 3년 반 만에 개봉되는 그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로, 액션이 빠진 순수 멜로드라마다. 작년 가을, (단편)에서 보여준 그의 촉촉한 멜로 감성이 이번에는 아기자기한 유머와 함께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들에게로 옮겨간다.
까칠한 성격의 70세 ‘성칠’ 앞에 외모도 마음씨도 고운 ‘금님’이 나타나면서 스크린에는 봄바람이 살랑댄다. 처음에 성칠은 퉁명스러운 태도로 일관하지만 늘 친절하고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금님에게 조금씩 마음이 흔들린다. 금님이 저녁 식사를 제안하자 성칠이 장수마트 사장으로부터 꼼꼼하게 데이트 지도를 받는 장면에서는 절로 웃음이 난다. 사랑 앞에선 누구나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지는 법. 성칠과 금님의 만남은 모든 싱글들의 연애 세포를 깨워줄 만큼 풋풋하고 설렌다. 산뜻한 파스텔톤 의상을 입고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과연 지금부터 ‘백년해로’할 수 있을까?
(2014)에서 76년째 연애 중인 어르신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던 게 불과 한두 달 전이다. 비현실적일 만큼 순애보를 간직한 노부부가 인스턴트식 사랑에 길들여진 젊은이들과 권태기에 빠진 중장년층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는 여느 두 남녀의 보편적 연애에 노인의 특수성을 결합시킴으로써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자아낸다. 사랑에 어찌 장애가 없고 고통이 따르지 않겠는가. 그래도 화창한 봄에는 역시, 새콤한 러브 스토리 한 편이 필요하다.
일정 2015년 4월 9일 개봉
장르 드라마, 멜로, 로맨스
감독 강제규
출연 박근형, 윤여정, 조진웅, 한지민, 황우슬혜, 문가영 등
제작 ㈜빅픽쳐, CJ 엔터테인먼트
#연극
죽음을 동경하는 열아홉 소년과 자유로운 영혼의 팔순 노인의 범상치 않은 러브 스토리
콜린 히긴스의 소설 를 원작으로, 자살을 꿈꾸며 죽음을 동경하는 19세 소년 ‘해롤드’가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80세 할머니 ‘모드’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소동과 두 사람 사이의 우정, 사랑을 다뤘다. 소년과 노인의 사랑을 다룬 이 이야기는 단순히 흥미 유발을 위한 엽기적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테마를 다루면서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과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되짚어보게 한다.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공연기간: 2015년 1월 9일 ~ 2월 28일
가격: VIP 6만원, R석 5만원, S석 3만원
주최: ㈜샘컴퍼니, 국립극장
출연: 박정자, 강하늘, 홍원기, 우현주 등
연출: 양정웅
제작: 돌꽃컴퍼니
문의: 02-6925-5600
#연극
사랑, 그 진실을 찾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불륜’ 그 안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갈등과 우리사회 ‘사랑’에 대한 본질
“당신은 실수일지 몰라도 나는 운명이에요.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행복해보고 싶어요.”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공연기간: 2014년 12월 31일 ~ 2015년 2월 15일
가격: 지정석 5만원, 자유석 3만5000원
주최: 예술의전당, ㈜이다엔터테인먼트
출연: 박원상, 배해선, 홍은희, 최대훈 등 연출 장유정
문의: 02-580-1300
#뮤지컬
전 연령대가즐길 수 있는 영웅이야기
왕위를 둘러싼 끊임없는 음모 속에서, 정의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혁명이 시작된다.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공연기간: 2015년 1월 23일 ~ 3월 29일
가격: VIP석 13만원, R석 11만원, S석 8만원, A석 6만원
주최: SBS
출연: 유준상, 서영주, 이건명, 홍경수, 엄기준 등
연출: 왕용범
문의: 02-764-7857~9
#뮤지컬
시간으로 지워지지 않을 명작의위대한 울림
남북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네 연인의 운명과 사랑의 대서사시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연기간: 2015년 1월 9일 ~ 2월 15일
가격: R석 14만원, OP&S석 12만원, A석 8만원, B석 5만원
주최: ㈜쇼미디어그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유)
출연: 바다, 서현, 주진모, 김법래 등
연출: 유희성
문의: 070-4489-9550
#뮤지컬
가혹한 운명, 진실한 사랑을 통한 구원
시대의 운명에 의해 거세당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이야기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공연기간: 2015년 1월 17일 ~ 1월 25일
가격: R석 7만 7000원, S석 5만 5000원, A석 3만 3000원
주최: ㈜HJ컬쳐
출연: 고유진, 루이스초이, 안유진, 이준혁 등
연출: 김민정
문의: 02-588-7708
#뮤지컬 내한공연
1482년, 파리를 뒤흔든 욕망과 사랑 이야기
에스메랄다를 향한 안타까운 사랑의 콰지모도, 집착의 프롤로, 욕망의 페뷔스. 한 여인을 향한 이들의 엇갈린 사랑
장소: 세종문회화관 대극장
공연기간: 2015년 1월 15일 ~ 2월 27일
가격: VIP석 20만원, R석 15만원, S석 12만원, A석 9만원, B석 6만원
주최: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출연: 맷 로랑(Matt Laurent), 리샤르 샤레스트(Richard Charest), 로베르 마리엥(Robert Marien)
연출: 질 마으(Gilles Macheu)
문의: 02-541-6236
금융권 생활 20년, 돈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는 사람이 있다. 퇴직 후 10년, 불운의 연속으로 실패에 쓴 맛을 본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NGO단체 (사)러브 월드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있는 박근배 사무국장이다.
그는 자신을 한때 ‘잘 나갔던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표했했다. 그러나 전혀 거만하거나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 경험도, 바닥에서 헤메던 경험도 있던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연합회에서의 20년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라고 표현 할 뿐이다.
◇ 잃어버린 10년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박씨의 퇴직 후 10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지난 10년 간 3차례의 사업에서 실패해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탓이다.
2003년 은행연합회에서 나온 후 그가 도전한 첫 사업은 골프연습장. 골프마니아다운 야심찬 행보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골프 프로 티칭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골프 연습장은 얼마 되지 않아 폐업을 하게 된다. 씁쓸한 결과였다.
가장 운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사업이다. 2007년 그가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수고기 수입 사업이었다. 소고기 수입 회사의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확산됐다. 박씨에게는 악재였다. 대한민국 사람 그 누구도 수입 소고기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2007년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나가던 박씨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기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태국 골프투어회사 경영은 불운의 마침표였다. 그가 태국에서 골프투어회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은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시위는 과열양상을 보이나 싶더니 이윽고 유혈사태까지 벌어져 한국발 태국행 비행기는 파리만 날리게 됐다. 태국을 찾던 관광객들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푼 꿈을 안고 찾은 태국도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은행연합회에 재직하면서 모은 돈도 모두 날려버렸다.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오직 신앙에 의존해 극복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수년이 흘렀다. 그때는 절망의 기운으로 몸서리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값진 경험이 됐다.
“‘아 이게 하느님의 뜻인가’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나이가 들고 이 세상을 뜨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 이것을 쫓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 주는 것? 얻는 것이 더 많은 NGO 활동
박씨에게 3번의 쓰디쓴 실패 경험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중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문도 있었다. 그 심오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난해 필리핀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찾은 그곳의 여름은 태풍 하이옌 피해로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얽히고설킨 집단 이재민 수용소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다짐했다. 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미래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다.
박씨는 다짐을 실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 활동 범위 또한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국내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족들이 한국어 교육과 건강 검진까지 받을 수 있는 토털 케어 센터가 바로 그것이다. 자원 봉사의 현장에서 봉사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활기를 찾고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때 덩달아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NGO 활동의 매력이라고 그는 얘기한다.
박씨가 NGO 활동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베푸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꼈다면 결코 이 일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봉사와 온정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것. 살아가는 힘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박씨가 손을 놓지 않는 이유다. 자신의 힘을 보태고자 날아간 필리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탠 힘보다, 더 많은 힘을 얻어 돌아왔다고 말한다.
“동남아 봉사활동을 가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감사할 줄 알았던 저였는데 그것이 행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남아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과 넉넉하진 않아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모습. 이것을 보면서 진짜 행복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배우게 됐습니다.”
◇ 영혼이 즐거워야 인생이 행복하죠
“제가 러브 월드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영혼이 즐거워집니다. 이게 바로 행복한 인생인가 봅니다.”
박씨는 행복은 영혼의 즐거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돈은 이제 전혀 보람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금융권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쌓여가는 통장의 잔액이 보람의 척도이자 행복의 척도였지만 말이다.
그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NGO 활동. 삶의 보람을 찾은 덕분인지 몇 년 전까지 실패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인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고 패기가 넘친다.
그가 보람 있는 인생 후반전을 살고자 하는 신중년들에게 하는 조언이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 동안 가정을 위해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람된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에게는 NGO 활동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예전의 지위나 기억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퇴직 이 후는 그야말로 인생 후반전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잘 나갔던’ 때를 기억하며 상대방이 그때의 지위로 생각해주고, 행동해 주길 바란다면 보람 있는 일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거란 것이다.
인생 후반전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박씨. 그가 러브월드 활동을 하면서 생긴 철학이 있다.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은 오로지 육신뿐. 보람 있는 삶을 살아 멋진 이름 남겨놓고 가자.’
청년, 중년, 시니어 가리지 않고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살다보니 취업에 목 메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거나 물건을 팔아먹는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이야. 적어도 은퇴 이후 인생2모작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직접 겪은 경험을 공유하여 이런 류의 취업 관련 사기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적극적으로 취업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취업 관련 인터넷 사이트 한곳에 등록하고 있다. 그동안 보험회사 몇 군데와 물건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회사들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지만 적당히 응대하여 왔다.
그날 온 전화는 색달랐다. 이른바 맞춤형 사기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중의 일이고 당시에는 관심이 가는 러브 콜이었다. 산소 기기를 제조해 판매하는 회사인데 사세가 확장되어서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중에 취업 사이트에서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하는 내가 마음에 들어 전화했다고 하는 것이다. 일단 경계심이 들어 홈페이지 등을 보내주면 확인한 후에 다시 통화하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자로 보내온 회사의 홈페이지는 제법 그럴 듯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회사가 KDB로부터 벤쳐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것이다. 즉각 친구들을 동원하여 사실 여부를 체크 하였더니 상당히 우량한 회사로 KDB 벤쳐 자금을 지원받은 것도 사실이고 은행 거래도 정상적이란 것이다.
네이버에 회사 관련 기사도 검색해 보았다. 가평 어딘가에 공장도 보유하고 있고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올해에 신용평가기관에서 신용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관련 정보는 유료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용까지는 잘 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상장을 목적으로 하고 그래서 “나를 중역으로 채용하겠다는데 그 정도 투자는 해야지” 하고 내용까지도 살펴 보았다. 재무상황이 다소 좋지 않았지만 창업 2년차 재무제표라면 있을 법한 일이고 평가 자료는 2012년도분이니 작년에 비약적 발전을 했다면 별 큰 문제는 아닐 수도 있었다.
인터뷰 약속을 하고 찾아간 회사의 분위기는 보통의 다른 회사와 달랐다. 자리에 앉아 있는 수 십명의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으로 보였다. 회사의 사장이라는 분과 몇가지 얘기를 나누었고 궁금했던 사항들도 몇가지 문의했지만 답변이 썩 명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출이 급신장하고 있어 조직 확장을 해야 하고 코스닥 상장까지 준비하려니 경영지원 본부 신설이 필요하고 내가 적입자이며 상당히 고위직으로 나를 생각하고 영입한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 조금 더 지켜보자”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터뷰 후, 사세 대폭 확장으로 현재 신입 직원들을 모집 중이며 관련 교육이 있으니 참가 해서 들어 보라고 했다. 며칠간 들은 교육은 산소 관련 내용과 건강 관련 내용 등 들어서 나쁠 내용은 별로 없었다. 3일째던가 우연히 옆자리에 있던 친구와 얘기하다 보니 고교동창이어서 서로 반가운 인사도 나누게 되었다. 교육 내용 중 특이한 사항은 내가 지금까지 많은 시니어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보았던 노후설계, 관계, 건강 등 많은 자료가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다. 결국 많은 이들이 들어서 크게 저항감이 없는 내용들로 구성한 것이다.
취업이라도 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아내는 정성스럽게 정장을 내어주고 넥타이까지 골라주는 실로 오랜만의 출근 도움이었다. 물론 아직 확실한 내용이 없어서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로 기대도 일부분이지만 의심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교육은 끝내고 사장 면담을 한다고 했다. 메인 협의가 진행되리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던 순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품 판매 계약서를 들이밀면서 사인하라는 것이었다. “회사에 입사하려면 내 회사 제품을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카드로 계산하는 것도 아니고 급여에서 공재되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른 모든 직원들도 동일한 절차를 거친다” 등 도저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의문이 일시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채용계약서는 없고 물건 판매계약서에만 사인하라는 것을 누가 납득하겠는가? 여러분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거절하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잠시 후에 사장과 면담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말도 안되는 사기꾼이라면서 펄쩍 뛰고 나왔다는 것이다. 내 판단이 맞았구나 하고 다시 확신하였지만 입 맛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사인을 거절하는 10여분간 마음 한 곳에서 아내 얼굴도 떠오르고 몇 백만원 투자하는 셈 치고 응할까하는 생각도 한쪽에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나 나나 전공이 경리 쪽이어서 적어도 관리 분야는 좀 이해가 빨라 잠시만의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자들은 지금도 시내 한가운데 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취업에 목마른 시니어들을 유혹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분들은 시간 낭비에 그치고 불필요한 물품 구매는 하지 않고 나오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무실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여러 사람들처럼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물건 구매하고 속앓이 할 사람들도 제법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대부분 60대인 그들이 60대를 등 쳐 먹고 있는 것이다.
# 에필로그:
사장이라는 자가 나이도 같고 시골 중학교 1년 후배라는 사실까지 서로 확인하고 난 후의 일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한국산업은행
-한주통산 이사
-세종공업 상무(슬로바키아 사장)
노안 환자의 66.6%는 젊을 때는 시력이 좋았다가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러브안과 국제노안연구소(대표원장 박영순)는 2013년 5월부터 1년 동안 노안수술을 받은 환자 300명을 대상으로 노안의 유형을 분석한 결과, 45.3%(136명)와 21.3%(64명)가 각각 젊을 때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을 정도로 시력이 양호했다가 갑자기 노안이 온 '원시성', '정시성'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안경을 착용하다가 노안이 찾아온 '근시성'은 33.3%(100명)로 집계됐다.
원시는 가까운 거리의 사물보다 먼 거리의 사물이 잘 보인다. 정시는 원시보다 먼 거리 시력은 떨어지지만 1.0 정도의 시력으로 원거리, 근거리 모두 정상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원시와 정시는 시력교정을 안 해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나이가 들어 원시에 노안이 온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수정체의 조절력이 떨어지면서 가까운 거리의 물체나 글씨를 볼 때 근시나 정시보다 더 불편하고, 노안을 느끼는 시기도 빠르기 때문이다.
원시성 노안에 처방되는 돋보기도 무작정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원시와 노안 모두 볼록렌즈로 교정하는데, 노안용 돋보기를 처방할 때 원시 교정량까지 더해지면 도수가 높아진다. 도수가 높아질수록 불편하고 눈의 피로는 물론,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한다. 다초점 렌즈도 마찬가지다.
박영순 소장은 "원시성 노안환자들은 근거리 초점을 억지로 맞추다가 두통이나 눈의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고, 심하면 구토증상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다"면서 "침침한 것을 넘어 뿌옇게 보이기도 해 생업에 지장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 소장은 “노안을 늦추려면 외출 시 자외선 차단 선글라스 착용하고 스마트폰과 컴퓨터 사용시 주기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중간중간 눈을 깜박여 눈물을 보충하기하고 냉방기 등의 바람이 얼굴로 향하지 않게 해야 한다”며 “열무 등의 채소를 통해 비타민 C와 비타민 A를 보충하면 도움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