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50+세대가 찾는 아지트는 ‘사는 곳 인근에 위치하며, 배움과 휴식을 위해 찾는, 동년배끼리 어울리기 쉬운 공간’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의 학교나 놀이터처럼 시니어도 친구들과 공부하고 뛰어놀 곳은 어디 없을까? ‘50플러스캠퍼스’가 그 답이 되어줄 것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운영하는 50플러스캠퍼스는 중장년 세대를 위한 교육을 비롯해 일자리 및 창업, 사회참여, 여가와 일상 등의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대학을 의미하는 ‘캠퍼스(campus)’라는 말이 붙었듯 50세 이후 다니는 학교처럼 여길 수 있다. 현재 중부(마포), 서부(은평), 남부(구로) 등 3곳이 활발히 운영 중이다. 향후 동남(강남) 캠퍼스를 비롯해 북부(도봉), 동부(광진) 캠퍼스도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도 수업 들으러 갑니다
학교와 다름없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학생들의 나이와 커리큘럼이다. 물론 중장년 위주의 공간이기 때문에 일단 캠퍼스에 들어서고 보면 ‘나이’에 대한 부담이나 위화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커리큘럼 역시 교과서 위주의 정규 교육과정이 아닌, 50플러스 세대만을 위한 실용적이고 유익한 강의로 구성된다. ‘50+인생학교’, ‘앙코르커리어’ 등 기본 과정을 비롯해 지역 캠퍼스마다 상시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학습 주제가 다양한 만큼 책상이 놓인 일반 강의실부터 요리, 춤, 공예 등을 실습할 수 있는 공간까지 캠퍼스 곳곳에 배움터가 마련돼 있다.
캠퍼스의 꽃 ‘커뮤니티 공간’
50플러스캠퍼스에 등록된 커뮤니티라면 간담회, 포럼, 토론 등을 진행하는 공간을 빌릴 수 있다. ‘커뮤니티’란 캠퍼스 프로그램 참여 후 동년배들과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동호회 또는 모임을 뜻한다. 일, 학습, 문화생활, 사회공헌 관련 활동을 하는 5명 이상의 단체(대표자는 만 50~64세)를 대상으로 지원금과 활용 공간 등을 제공한다. 이밖에 방음 시설을 갖춰 음악 감상이나 합창, 악기 연주가 가능한 ‘스튜디오 흥얼’(3만 원), 연극·뮤지컬·요가 등 몸과 소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몸짓교실’(5만 원) 등 널찍한 모임 공간도 부담 없는 가격으로 대관해준다(2시간 기준). 각 캠퍼스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 가능.
공유 사무실 ‘힘나’
공유 사무실 ‘힘나’는 업무 공간 겸 협업 공간으로 쓰인다. 창업, 창직을 위해 사람과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자원을 연계하는 도전과 실험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중부캠퍼스의 경우 개별 사무실 4개 공간과 개방형 공유 공간 11석이 마련돼 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일요일 및 공휴일 휴무), 프린트기, 팩스, 책장, 사물함 등 사무용 가구와 기기도 제공한다. 은퇴 후 사무 공간이 필요해도 임대료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은데, ‘힘나’의 사용료는 개별 사무실 월 10만 원(보증금 100만 원), 개방형 공유 공간 월 3만 원(보증금 없음)으로 부담 없이 이용 가능하다.
두루두루 모두 영화 보러 가자
서부캠퍼스에서는 국내외 유수 영화제와 관객들에게 호평받은 한국 독립영화를 무료로 상영한다. 매주 월요일 2시 ‘두루두루강당’에서 열리며 때때로 감독과의 대화 자리도 마련된다. 남부캠퍼스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후 3시에 인기영화 및 독립영화를 ‘스튜디오 흥얼’에서 볼 수 있다. 중부캠퍼스 역시 특정일을 정해 ‘모두의강당’에서 무료 영화관람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 상영 일정은 각 캠퍼스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끼리 통하는 ‘50+상담센터’
50플러스캠퍼스를 처음 방문하거나 궁금한 점이 있을 때, 50세 이후의 삶을 의미 있게 설계하고 싶거나 고민이 있을 때 등등 ‘50+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공감대 형성이 수월한 동년배 컨설턴트가 일, 재무, 사회공헌, 사회적 관계, 가족, 여가, 건강 등 중장년층에게 유용한 맞춤 정보들을 1대 1로 친절하게 이야기해준다. 상담 비용은 무료다.
50플러스캠퍼스 아지트 요모조모
중부캠퍼스 ‘50+의 서재’ 약 500여 권의 책을 편안하게 열람할 수 있는 곳이다. 스크린, 음향 시설, 무대도 갖추고 있어 강연회나 소규모 공연도 가능하다.
남부캠퍼스 ‘열린정원’ 혼자 사색을 즐기거나 동년배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에 좋은 공간이다. 지하 1층으로 이어진 ‘품은정원’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서부·중부캠퍼스 ‘모두의 부엌’ 각종 조리 시설과 식탁이 잘 마련돼 있어, 쿠킹 클래스는 물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유쾌한 파티를 열기에도 좋다.
[interview] "캠퍼스 어디든 맘 편히" 인생학교 3기 커뮤니티 ‘종횡무진 밴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는 밴드 이름답게 50플러스캠퍼스만 오면 이곳저곳 부담 없이 다닌다는 이들은 중부캠퍼스 프로그램인 ‘인생학교’ 3기로 인연을 맺었다. 본래 배움을 위해 찾은 곳이지만 동년배들과 우정을 돈독히 할 공간이 마련된 덕분에 그 이상의 즐거움을 찾아 발걸음이 잦아졌다.
밴드 대표인 정환식(60) 씨는 “학창 시절 이루지 못한 배움에 대한 열망과 음악을 향한 로망을 실현하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매니저를 맡고 있는 김석재(58) 씨 역시 “악기를 연주하는 모임은 방음 시설이 된 연습실을 빌리는 게 고충이다”라며 “밴드를 위한 안성맞춤 아지트가 바로 이곳(중부캠퍼스 ‘스튜디오 흥얼’)”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확실히 캠퍼스 내에는 젊은 사람이 드물다. 어디를 가도 또래가 보이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고 덧붙였다. 밴드에서 꽃중년 드러머로 활약하고 있는 이수영(54) 씨는 “어디 가서 눈치 보지 않고, 우리끼리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마당이 생겨 좋다”며 일주일에 한 번 커뮤니티 모임을 다녀가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이야기했다.
밴드 외에도 라인댄스, 어반스케치 등 다양한 활동을 위해 캠퍼스 곳곳을 이용한다는 서동재(61) 씨는 쾌적한 공간에 대한 만족과 동시에 남다른 책임감을 드러냈다. 그는 “50플러스캠퍼스가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시설도 편리하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사용자가 많아질 텐데 자칫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만의 아지트를 넘어 다음 50플러스 세대를 위한 아지트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김석재 씨는 “50플러스캠퍼스를 아지트 삼아 많은 중장년이 찾아왔으면 한다”고 말하며 “베이비붐 세대 인구 대비 우리를 위한 아지트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유익한 공간이 있어도 접근성이 떨어지면 잘 가지 않게 된다. 지역마다 시니어를 위한 시설이 곳곳에 늘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 (안경자, 이찬재 저ㆍ수오서재)
인스타그램 ‘drawings_for_my_grandchildren(손주들을 위한 그림)’을 통해 SNS 스타로 알려지면서 ‘BBC’, ‘가디언’ 등 해외 유력 매체들이 주목한 이찬재, 안경자 부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2015년 브라질에서 함께 살던 자녀와 손주들이 갑작스레 한국으로 돌아갔고, 부부는 허전한 마음을 글과 그림으로 달래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의 나이는 74세. 낯설고 어려웠던 SNS는 언제 어디서든 손주들과 손쉽게 교류할 수 있는 특별한 매개체가 됐다. 부부는 아이들과 추억하고 싶은 소소한 일상,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교훈 등을 공유했다. 그렇게 쌓인 그림편지들은 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콘텐츠로 널리 퍼졌다. 오랜 시간 SNS를 통해 전했던 감동을 책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거창하거나 특별하지 않지만 따뜻함이 스민 노부부의 글과 그림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가족 사랑이 담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 (와카미야 마사코 저ㆍ가나출판사)
‘세계 최고령 앱 개발자’이자 ‘노인들의 스티브 잡스’로 알려진 와카미야 마사코의 인생철학을 담았다. 82세에도 호기심을 잃지 않고 스스로 재미있어하는 일에 도전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즐거운 노후의 희망을 선사한다.
나이 든 부모와는 왜 사사건건 부딪힐까? (그레이스 리보 외 공저ㆍ한마당)
30년 가까이 노인과 그 가족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로 일해온 저자가 노년기 부모들의 모습을 6가지 행동 유형으로 설명한다. 자녀 세대가 겪는 갈등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보여준다.
버선발 이야기 (백기완 저ㆍ오마이북)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들려주는 우리 시대 민중사상.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피, 땀, 눈물로 얼룩진 세월을 살아온 서민들, 그럼에도 자유와 희망을 되찾고자 했던 이들의 힘찬 몸짓이 ‘버선발’이라는 한 인간의 삶에 녹아 있다.
완경기, 그게 뭐가 어때서? (프랑스 카르포 외 공저ㆍ온)
월경, 피임, 결혼, 임신, 출산 그리고 완경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해 그렸다. 일기 형식으로 한 여성이 태어나 완경에 이를 때까지 겪는 다양한 일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여성을 둘러싼 궁금증에 대한 전문가의 소견까지 담았다.
톨스토이만큼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러시아 작가가 있을까?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해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리바이벌되고 있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통해 젊은이들도 잘 아는 세계의 대문호다. 그가 태어나고 말년에 살았던 곳이 툴라 근처의 마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다.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두 시간 남짓한 193km 지점. 툴라에서 10분이면 닿는 곳에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한 툴라
톨스토이 고향을 가려면 툴라(Tula)로 가야 한다. 툴라는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한 ‘황금고리 도시’ 중 한 지역. 황금고리 도시란 모스크바 근교의 역사적인 도시들을 일컫는 말로 도시들의 연결 형태가 반지 모양의 원형과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지칭이다.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Kursk) 역을 통한다. 툴라 기차표를 살 때는 물론 기차를 탈 때도 짐과 ‘여권’을 검사한다. 툴라 기차 안에서 약간의 해프닝을 겪는다. 러시아에서 처음 해보는 기차 이동인 데다 매표소 직원이 영어를 전혀 못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더니 침대칸을 발권해준 것. 4인용 도미토리 침대칸 중에서 2층으로 배정되었는데 침대를 이용하려면 시트가 필수다. 시트가 없어 결국 툴라까지 가는 동안 올라보지도, 누워보지도 못한 채 보조의자에 앉아 간다. 어느 새 툴라 역에 하차. 사람들이 다 사라진 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다가 경찰관에게 부탁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간다.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는 시내에서 약간 비껴 있지만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분위기의 마당에서는 막 깎아낸 듯한 풀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친다. 오래된 사과나무 한 그루와 앙칼진 러시안 고양이가 있는 가정집 숙소가 참 매력적이다.
툴라 중심부 크렘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
숙소에서 툴라 중심부까지는 천천히 걸어 3분에서 5분 거리. 오래된 나무 가옥을 따라 호젓한 길을 걸으면 어느새 툴라 시내가 보인다. 러시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레닌 동상이 서 있고 돔 형식의 러시아 정교회 두 개 그리고 바로 크렘린(kremlin)이다. 크렘린이란 원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성채, 성벽을 뜻한다. 러시아 각 주(州)에는 꼭 있어 ‘크렘린’이라는 단어 하나만 알면 길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툴라의 크렘린은 1540년에 완공되었는데 튼튼한 벽돌식이다. 성벽 모서리에는 나무 방어탑 아홉 개가 고깔 형태로 1km 정도 간격으로 뾰족하게 솟아 올라와 있다. 성채 내부는 크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정교하다. 중앙에 대성당(1764)을 중심으로 전시관, 특산품 코너와 부속 건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필자가 툴라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축제가 열렸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만난 세르게이
툴라를 찾은 이유는 19세기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의 고향을 찾기 위함이다. 툴라에서 남쪽 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 없는 10분 거리다. 택시 기사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을 더 치러야 했지만 여행객이라면 늘 감수해야 할 일이다. 톨스토이 고향 입구의 두어 개 난전에서 지역 특산품인 당밀과자를 팔고 있다. 나름 관광지라고 물 값이 시내의 두 배 이상이다. 포기하고 그냥 매표소로 간다.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표를 사면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언어로 들어야 하는 상황.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으니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아도 될 법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톨스토이 하우스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만나게 된 세르게이(72). 젊은 층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 대부분이 단 한마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는 영어를 잘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물리학자 세르게이는 부인과 조카가 동행인이다. 영어는 못하지만 한눈에 봐도 성격이 밝고 유머러스한 부인 타냐, 그리고 조카 표토르. 낯선 그들과 함께 톨스토이 고향 투어를 시작한다.
사과 농장이 있는 톨스토이의 고향
자작나무숲이 길게 이어지는 길 옆으로 톨스토이가 농노들을 위해 직접 심었다는 사과 농장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집필했던 ‘톨스토이의 집’은 본채와는 달리 작고 초라하다. 꼭 들여다봐야 할 공간이다. 지독하게 꼼꼼한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 투어다. 박물관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소장품들의 인테리어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톨스토이가 입던 옷, 식탁, 서재 등 그의 삶이 톨스토이 하우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질곡한 삶을 잠시 살았지만 대부분을 이 영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소설 ‘부활’, ‘어둠의 힘’ 등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80세 되던 해,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를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7일 만에 모스크바 남부 톨스토이 역(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문득 그의 말년 인생을 그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이 떠오른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1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에서 그의 숨결과 흔적을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인간미 넘치는 러시아 사람들
툴라와 톨스토이 고향이 특히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사로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 고향에서 만난 세르게이는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에서 물리학자로 살았고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했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는 흔한 이름 중 하나인데 그에게 ‘세르게이 예세닌’이라는 시인 이름을 말했더니 금세 ‘자작나무숲’이라는 시를 읊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해주던 그. “툴라의 당밀과자는 이곳 아니면 살 수 없다”면서 생판 처음 만난 한국 여행객에서 선물로 안긴다. 또 조카 표토르는 기념품을 선물한다. 툴라까지 차를 태워주고 차를 세워 시원한 물까지 사준다. 관광지 앞이라 물 값이 비싸다고 했던 필자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과분한 선물을 받은 필자가 한 일은 고작 찍은 사진을 보내준 것뿐. 필자가 한국에 여행 오는 외국인들에게 이런 따사로운 애정을 베풀 수 있을까? 톨스토이 고향이 떠오를 때마다 ‘세르게이’ 가족이 필자에게 베풀어준 친절을 기억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광 안내소 스테프는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난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지만 맛있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친절히 알려줬다. 크렘린 앞에서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크(kbac)를 파는 아주머니가 시음해보라며 돈은 안 받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툴라에서뿐만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정 많고 인심 좋은 고령의 한국인을 닮은 러시아인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여행이 참으로 행복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 공항에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지 직항. 9~10시간 소요.
현지 교통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 역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음식 정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음식은 약간 짠 편이다. 툴라에서는 고층 건물을 이용하면 저렴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인터넷 평점을 보고 예약하면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3만 원 선이면 중상급 숙소에 머무를 수 있다. 도미토리 룸은 1만 원 이하다.
치안 정보 생각보다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찰이 있기 때문.
유의사항 모스크바 외에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은 나라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심카드를 구입하거나 한국에서 사서 교체해야 한다.
기타 정보 러시아는 거주지 등록이 필수다. 숙소에 말하면 바로 처리해준다. 무비자 여행 기간은 60일까지. 러시아 여행 중 가장 큰 난고는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승차표를 보여주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일명 ‘버킷리스트(bucket list)ʼ라고 한다.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버킷리스트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실행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항목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서베이를 통해 시니어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여행, 취미, 관계·가족, 일·성취, 보람, 도전 등 총 7가지 주제로 나눠 알아봤다.
서베이 대상 브라보 동년기자단,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수강생, 낭랑18세 시니어 치어리더팀 등 50세 이상 남녀 140명(50대 61명, 60대 53명, 70대 이상 26명)
서베이 방법 주제별 버킷리스트 예시 항목 15가지 중 선택(중복 선택 가능) 및 그 외 항목이 있는 경우 별도로 작성
◇브라보 버킷리스트 상위 20위 목록
7가지 주제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여행’이다. 상당수 시니어가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제주 올레길 투어’ 등 제주 여행과 관련한 버킷리스트를 희망하고 있었다. “쉽게 이룰 수 있으니까”, “외국어 부담 없이 여행하고 싶어서” 등이 대표적인 이유다.
그밖에 혼자 여행 떠나기(27),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25), 캠핑카/크루즈 여행하기(18), 해외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기(9) 등
운동이나 레포츠 등 몸을 쓰고 활동적인 취미보다는 배움, 글쓰기, 책 읽기, 전시회 관람 등 문화적, 정서적 활동을 원하는 이가 많았다. 아직 특별한 취미를 찾지 못해 ‘새로운 취미 갖기’(24)를 버킷리스트로 선택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밖에 텃밭 가꾸기(21), 그림 관련 취미 갖기(19), 수영 배우기(16), 취미 동호회 가입(14), 수화 배우기(6) 등
가족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항목들이 상위권에 올랐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애인 같은 친구를 만드는 등 새로운 관계 확장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휴대전화번호를 정리하거나 불편했던 관계를 해소하는 등 관계 정리에 관한 항목들도 눈에 띈다.
그밖에 외국인 친구 사귀기(21), 7명 용서하기(17), 휴대전화번호부 정리하기(15), 첫사랑에게 편지 쓰기(7) 등
제2직업을 향한 욕구와 더불어 전문 분야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포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고, 강연, 전시회를 여는 등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연륜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경향이다.
그밖에 귀농하기(15), 창업하기(12), 10년 후부터는 일 안 하고 놀기(8), 자격증 10개 따기(8) 등
버킷리스트 서베이 전체 항목 중에서 ‘재능기부’가 1위에 올랐다. 단순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살린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다.
그밖에 장기기증 신청하기(16), 아프리카 봉사활동 가기(15), 봉사활동 1000시간 채우기(13), 유기견 돌보기(6) 등
건강하고 즐거운 일상을 추구하는 웰빙(well being)을 넘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등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유언장 작성 등 웰다잉 관련 항목이 상위권에 올랐다.
그밖에 드레스 입고 파티하기(17), 세컨드하우스 짓기(14), 레스토랑에서 고급 코스요리 먹기(13), 주식·펀드 투자하기(12)
아직 버킷리스트가 없는 이들이 가장 빠르게 실행하고 이룰 수 있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버킷리스트 만들기’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한 가지 항목은 해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공모전 참가하기(14), 파격적으로 염색하기(13), 무인도에서 살아보기(7), 타투(문신) 해보기(6)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위한 7가지 방법
도움말 박창수 작가
하나,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라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목표는 유럽 배낭여행부터 서울 나들이까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돈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먼저 정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의 경우 오랜 시간 머물게 되면 그만큼의 비용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행 자금을 위해 적금을 든다거나 평소 걷기운동을 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등의 세부적인 목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귀농이나 창업 등 오래 준비해야 할 목록도 마찬가지다. 장기간 실천할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리스트를 차례로 적어나가자.
둘, 작은 목표는 매년 갱신하라 큰 목표가 담긴 버킷리스트와 작은 목표를 써놓은 버킷리스트를 따로 마련하고, 작은 목표 리스트는 매년 갱신한다. 원대한 목표만 적어놓고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의욕도 저하되고, 실천 의지도 약해진다. 한 해, 한 달 정도 투자해 부담 없이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작성하자. 작은 목표들을 달성해나가며 얻은 자신감은 큰 목표를 이루는 데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셋, 유행에 편승하지 마라 버킷리스트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뤄가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원하는 목표나 유행에 따라 버킷리스트를 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만족도가 높을지 등을 깊이 생각해보고 진정 나만을 위한 목록들을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넷, 남의 눈치 보지 마라 돈이 많이 든다거나 스스로 주책없어 보이는 행동이라 여기고 가족이나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버킷리스트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 또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남에게 보였을 때 더 그럴싸하고 훌륭해 보이는 일들을 적곤 한다. 이른바 체면치레 때문에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여행, 공부, 취미, 봉사 등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물론 좋은 목표이지만, 그중에 한두 가지만이라도 나만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것을 적어보면 어떨까?
다섯, 크게 쓰고 소문을 내라 자기 꿈을 소문내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혼자서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기분 좋은 속박(?)을 느끼는 편이 낫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선언을 하거나 큰 종이에 적어 서재나 화장대 등에 붙여 자주 인식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와의 약속 이행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진다.
여섯, 1+1을 생각하라 나를 위한 버킷리스트이지만, 그것이 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예를 들어, ‘외국어 배우기’와 같은 단순한 목표를 뛰어넘어 ‘외국어를 배워 어려운 아이들에게 방과 후 재능기부하기’ 등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방법까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뜻깊은 버킷리스트가 될 것이다.
일곱, 버킷리스트에는 점수가 없다 목표로 정한 버킷리스트를 꼭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물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경우에 말이다. 버킷리스트는 숙제나 시험처럼 누군가에게 검사받고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인 만큼 부담 갖거나 서두르지 말고 목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길 바란다. 무엇을 이뤘느냐보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발걸음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독자제보 브라보 버킷리스트 랭킹 20위 안에 해당하는 버킷리스트에 도전해 이뤄내신 분들을 찾습니다. 제보할 이야기가 있으신 분은 bravo@etoday.co.kr로 접수 부탁드립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장석주님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경기도 북부에 있는 파주 교하로 거처를 옮겨 첫겨울을 맞았어요. 교하의 평평한 들을 덮은 한해살이 초본식물이 서리를 맞고 시들어 헐거워진 무릎을 꺾으며 가을이 끝나고, 곧 겨울이 닥쳤지요.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에서 먼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북반구에 햇빛이 약해지고 동절기가 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올겨울은 유난히 눈도 잦고 한파도 자주 몰아쳤어요. 한파경보와 폭설주의보에 귀를 기울이며 겨우내 실내에 갇혀 겨울을 납니다. 기온이 영하 20℃ 이하로 떨어지는 혹한이 이어질 때 한강 하구 일대는 북극의 바다처럼 얼음덩이로 뒤덮였어요. 강가에서 건물 잔해처럼 나뒹구는 얼음덩이들이 펼치는 낯선 풍경을 하염없이 보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습니다. 노숙자가 동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진 날 한뎃잠을 자다가 얼어 죽은 길고양이도 드물지 않았지요.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언 땅에서 먹잇감을 찾지 못해 인가까지 내려옵니다. 이래저래 겨울은 네 발로 움직이는 동물이나 두 다리로 걷는 사람에게 두루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의 계절이지요.
사람이나 동물만 이 혹한을 견딘다고 생각하지만 풀과 나무도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묵묵하게 겨울을 납니다. 나무는 어떻게 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는 걸까요? 나무의 내부는 많은 수분이 있어 얼 수도 있을 텐데, 나무가 영하 20℃의 추위에도 얼지 않고 겨울을 난다는 게 신기하지요. 낮이 점점 짧아지면서 빛이 약해지는 신호를 받고 나무들은 월동 채비를 해요. 활엽수는 잎을 다 떨궈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하지요. 그리고 “세포벽의 투과성이 극적으로 증가해서 순수한 물은 흘러나오고 세포 안에 남은 당, 단백질, 산이 농축”된다고 해요(호프 자런, ‘랩 걸’). 아무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물은 얼지 않지요. 부동액이 얼지 않는 이치가 그것이지요. 살아 있는 유기체 거의 모두가 그렇듯이 나무 내부는 물로 채워진 상자이지만 그 액체가 순수한 상태여서 얼음 분자가 결정을 형성하지 못한다지요.
식물의 씨앗이 보여주는 기다림은 탄성이 나올 정도예요. 가을로 접어들며 초목들은 수백 개에서 수만 개의 씨앗을 제 발치께에 떨어뜨리는데, 씨앗은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배아가 함부로 자라지 못하는 구조이지요. “씨앗 안의 배아는 자라기 시작하면 일단 허리를 굽히고 기다리던 자세를 곧게 펴서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형태를 정식으로 띠기 시작한다. 복숭아씨, 혹은 참깨씨나 겨자씨, 호두씨 등을 둘러싼 딱딱한 껍질은 이런 팽창을 방지하려고 존재한다”(호프 자런, ‘랩 걸’).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배아는 딱딱한 껍질 속에서 긴 기다림을 시작하지요. 운이 좋으면 1년 만에 싹을 틔워 식물의 한 생애를 펼치지만 많은 씨앗들이 기회를 엿보다가 사라지지요. 중국의 토탄 늪지에서 나온 어떤 연꽃 씨앗의 배아는 2000년 만에 과학자의 도움으로 껍질이 벗겨지자 싹을 틔워 놀라게 했습니다. 연꽃 씨앗은 싹을 틔우려고 무려 2000년을 기다렸던 셈이지요.
씨앗은 껍질을 깨야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가 있지요. 씨앗은 생의 순환을 겪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저 울울창창한 숲은 작은 씨앗의 기다림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초목들은 지구상에서 공룡이 멸종하고 지구가 몇 번이나 빙하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도처에 숲을 이루며 번성했어요. 그 번성이 작은 씨앗의 분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아름드리 떡갈나무도 배아에서 싹을 틔워 자라난 결과일 뿐이지요. 그러나 무수한 씨앗들은 운이 나빠 싹을 틔울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아 사라지지요. 우리도 기다림 속에서 도약의 기회를 엿본다는 점에서 씨앗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요.
식물이 환경에 순응하며 인고와 복종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걸로 알지만 식물만큼 자기 숙명과 싸우는 존재는 드물지요. 붙박이로 자라는 식물이 침묵 속에서 싸움을 펼치는 까닭에 그 격렬함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할 뿐이죠. 식물은 땅속으로 뿌리를 뻗고 물과 자양분을 끌어다 줄기로 퍼 나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매화나무는 혹한을 견디며 꽃눈을 두툼하게 키우고, 튤립 같은 구근 식물은 땅속뿌리에서 싹을 틔울 준비가 한창이지요. 매운 추위라야 봄꽃이 더 화사하게 피어나는 법이지요. 화사한 봄꽃들이 혹한과 싸워 이긴 승리의 전리품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요!
우리는 식물이 환경에 맞서 싸우는 저 용기와 지혜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현호색, 복수초, 양지꽃, 노루귀, 산달래, 변산바람꽃, 개불알꽃, 제비꽃, 패랭이꽃, 민들레 같은 야생 풀꽃조차 한자리에 붙박인 채 저를 짓누르는 숙명과 맞서지요.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동백, 모란, 작약, 산수유, 풍년화, 목련, 영산홍, 개나리, 진달래, 매화나무, 벚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배나무같이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는 초목도 맹추위 속에서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가만히 들어봐요. 초목이 속삭이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요. 헤르만 헤세는 ‘봄의 말’에서 그 말을 받아 적었어요. “어린애들은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것을.//살아라, 자라라, 꽃피라, 희망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내밀라.//몸을 던지고,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느덧 입춘 지나고 우수입니다! 기세등등하던 겨울은 물러나고 곧 누리에 봄이 오겠지요!
파주 교하에서 첫겨울을 나며 오래 소식이 끊긴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젊은 날의 혼돈과 기쁨은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당신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은 따뜻한가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잘 살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살아냄은 태반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다림은 침묵과 혼돈을 견디는 인고의 시간이지요. 독일 철학자 니체가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의 그 혼돈! 기다림이라는 씨앗 속의 배아인 혼돈이 체념의 내성(耐性)을 만듭니다. 하지만 당신, 잊지 말아요. 생명은 춤추는 별이 그러하듯이 불가능한 필연으로서 꿋꿋하게 제 앞의 불확실함을, 제 안의 혼돈을 견디며 살아남음의 영광을 취한다는 것을. 삶의 광휘는 오직 혼돈을 견딘 결과로서 눈부십니다. 당신의 처지가 나쁘다면 좋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기다리기를, 부디 불행에 꺾이지 말고 끝까지 견디고 잘 살기를 바라요. 잘 있어요, 당신.
>>장석주 시인
스스로 산책자 겸 문장 노동자라 일컫는다. 매일 사과 한 알을 먹고 산책하며 침묵과 고요, 단순한 것과 느린 것, 바다와 대숲을 좋아한다.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일요일의 인문학’,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 외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50여 년간 장미를 그려온 화가의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도 화병에 꽂은 정물이 대부분일 때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장미의 화가라면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이나 황염수(黃廉秀, 1917~2008) 화백이 떠오르지만, 성백주(成百冑, 1927~) 화백만큼 긴 세월 ‘장미’라는 주제에 천착해오지는 않았다.
성백주 화백은 화필이 무르익은 중년을 지나는 1960년대 말부터 장미만 그려왔다. 물론 바닷가 풍경이나 누드화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성 화백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해 초·중등학교 교사, 지방 방송국 편성부 등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산 권역을 벗어나지 않고 동아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에도 출강했다. 1955년 부산에서 ‘민주신보 창간 10주년 기념 초대전’이 열린 것을 보면, 1948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한 이래 그림에 정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1975년 서울 명동화랑과 공간화랑의 전시가 중앙 화단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여의도 정송갤러리 초대전이 전국적으로 자신의 그림 세계를 각인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장미 그림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두어 점의 풍경이나 누드화가 겻들여지기도 했으나 장미만큼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미는 꽃병에 꽂힌, 그래서 식탁이나 서재 책상 위에 무심코 놓인 정물화다. 청화백자 항아리나 유리단지에 성기게 꽂힌 몇 송이 혹은 꽉 찬 아름진 장미 다발이 언제나 맑은 향을 뿜는다.
“그는 꽃의 실제적 형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파상적 율동에 의해 창출되어 나온 선과 터치에 의한 궤적이다. 꽃을 응시하고 연후에 그것을 화면 형상으로 바꿀 때 표현은 부드럽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하다. 담채와 농채가 적절히 배분된 화면은 활기차 보이며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라고 평자는 말한다.
주로 정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만나보면 “꽃, 그것도 장미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장미는 그 종류만 수백 종에 색깔도 가지각색일 뿐만 아니라, 꽃잎이 수십 장 포개져 있어 입체감의 표현과 꽃잎마다 빛의 반사가 다채로워 평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 화백의 장미는 극사실의 요염한 자태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장미를 많이 그렸지만, 한 번도 장미라는 물질적 속성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화폭에 어떻게 조형성을 심어가느냐의 문제였다. 항상 그랬듯이 남에게 보이기보다 내 작업을 연출된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느 전시회를 앞두고 그가 한 말이다.
이 그림[사진1]은 1992년, 서울 여의도 정송갤러리에 전시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꽃송이와 줄기가 얼비추어 푸르른 그림자를 만들고 속도감 있게 처리된 배경과 꽃잎 끝에 건듯 묻어나는 옅은 색깔, 꽃송이와 봉오리에 깊은 마티에르가 하모니를 이룬 회심작이라 생각한다. 식탁에 걸어놓고 맑은 향을 맡는다.
한때 나팔꽃을 좋아해서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나팔꽃 덩굴을 만나면, 씨가 여물 때를 기다려 몇 알씩 따두었다가 이른 봄, 마당 창가나 담장 아래 씨앗을 틔워 줄기가 늘어뜨린 끈을 감고 공중에 꽃 피우는 신선함을 즐겼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가요의 가사처럼 짧은 꽃피움이 애잔했다. 나팔꽃 기르기를 좋아하던 서예가와 경기도 여주의 도예촌을 동행하며, ‘백제도예연구소’의 정지현(1958~) 도예가를 찾았다. 몇 차례의 방문이라 익숙하게 후원을 빙 돌며 작약이며 들꽃 틈에 깨뜨려버린 도자기를 휘감은 나팔꽃 덩굴의 진분홍 꽃을 감상했다.
“어느 날 새벽 도자기 작품 구상이 안 떠올라 이곳을 거닐다가 무심코 도자 파편 위 저 나팔꽃이 이슬을 머금고 활짝 핀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팔꽃 이미지를 도자로 빚어보았지요.”
작업실 안에는 철화와 진사채로 완성된 나팔꽃 이미지의 아름드리 대형 도자기와 초벌구이한 도자기가 나란히 있었다. 정지현 도예가는 뒤늦게 도예에 입문해 예술자기와 생활자기 사이에서 많은 고뇌를 했다. 현실적 생활고도 체감했다. 이제는 일본이나 유럽으로 생활자기를 수출하며 경제적 안정을 얻었지만, 문득 일상의 쓰임을 벗어난 도자에 예술혼을 굽고 있다 고백했다.
이 대형 푼주[사진2]는 몇 달 후 그날 동행했던 서예가가 우리 집까지 날라준 크나큰 선물이다. 혼자 들기도 버거워 아내와 거실 탁자 위에 놓고 마음 깊게 감상했다. 겉은 정지현이 개발한 특유의 연록빛 유약이 자연스레 흘러넘쳐서 나팔꽃 줄기와 잎의 싱싱함을 나타내었다. 입술부터 안쪽으로는 붉은 진사의 유약을 두텁게 발라 고상함을 더해주고 있다. 도자기 속에다 속삭이면 그 잔잔한 울림이 좋았다. 이 푼주의 쓰임을 놓고 가족회의도 열어보았다. 겉과 속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낮은 탁자 위가 제자리다 싶으면, 찻잔을 나르거나 과일을 나르다 부딪힐까봐 조바심되었다. 마침내 거실 큰 유리문 앞 튼튼하고 낮은 탁자를 따로 마련해 옆에 백자 달항아리를 나란히 두어, 사계절 남향 타고 스미는 햇빛이 부서지는 반사광까지 즐기고 있다.
“가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고 첫닭이 우는 새벽, 부끄럽고 두려움에 떨면서 죄를 짓고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꺼내죠. 무슨 항아리가,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몰라요. 반은 내가 만들고 반은 불이 만들거든요. 꿈꾸던 작품을 얻었을 때의 감동과 희열, 그건 맛본 사람들만 알아요. 도예가들의 삶의 원천이죠.”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정 도예가가 한 말이다.
꽃은 인류가 문명세계를 열기 이전부터 생명의 원천이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꽃은 기쁨의 표상이고 추모의 상징이다. 구순 넘긴 노 화백의 여린 붓끝에서 피어나는 장미에서 인생의 환희를 느끼고 연륜 깊은 향을 맡는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린 푼주에서도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을 듣는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2017년도 저물어가는 12월 10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우연히 정미조 콘서트를 관람 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몇 명에게 특별히 연말보너스 처럼 돌아온 선물이었다. 오래된 서재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꺼내 든 책 한 권, 책장을 넘기다 책갈피처럼 끼워진 빛바랜 네잎클로버나 꽃잎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빛바랜 책갈피에 우러나오는 은은한 향기처럼 정미조는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콘서트는 정미조가 1년 반 만에 발표하는 새 앨범을 기념하는 무대다. 그는 45년의 긴 세월 동안 가수에서 화가로, 다시 가수로 돌아오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걸어왔다. 정미조는 작년, 37년 만에 가요계에 극적으로 복귀하며 많은 화제를 만들었다. 컴백 앨범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청취의 환희” “결코 세월이나 명성에 빚지지 않은 앨범” 등의 절찬을 받았다.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사랑의 계절’ 등 주옥같은 히트 곡을 줄줄이 쏟아냈다. 1972년 한국 가요사에 불멸(不滅)로 남은 ‘개여울’을 발표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돌연 가요계 은퇴를 선언한 1979년까지 7년간은 정미조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의 ‘마이 웨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번 공연엔 12살 ‘제주 소년’ 오연준이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오연준은 정미조의 새 앨범에 수록된 ‘바람의 이야기’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 오연준 소년 단독으로 크리마스 캐럴을 불러 많은 갈채와 사랑을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네 명이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18시 공연이라 저녁을 먹지 않고 관람했기에 '오삼불고기'를 시켜 뒤풀이 삼아 막걸리잔을 돌렸다. 건조한 공연장으로 컬컬했던 목을 추기면서 공연에 관한 뒷담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세월만큼 원숙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혔던 ‘개여울’은 김소월 시에 곡을 입혀 부른 노래로 유명하다. 개여울은 어떤 여울일까? 누군가 궁금해 했다. 개여울은 명사로써 개울에 물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물살이 빠른 곳으로 개울의 여울목이란 뜻이기도 하다. 노래 가사 중에 ‘가도’는 ‘가기는 가도’의 줄인 말로 개여울가에 앉아 여울져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연인인 그가 간다는 허전함을 애써 마음 쓰지 않으려는 애틋한 마음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어린시절 여울에서 돌수제비를 날리던 기억도 어렴풋 떠오른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음악을 접고 갑자기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난 정미조의 삶이
과연 성공적이고 좋았던 삶이었을까? 하는 논제를 가지고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도 가졌다. 의견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꽤나 의미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물을 판다’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음악 말고도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선택한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학을 떠나 새로운 배움을 통해 다시 돌아와 대학에서 당당하게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로 자리매김한 삶이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는 고희[古稀] 가까운 나이에 잊고(?) 지내왔던 음악계로 컴백했다. 작년에는 신곡 귀로(歸路)를 발표하면서 앨범도 내고, 이렇듯 콘서트를 통해서 음악적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모습이야말로 경이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귀로(歸路)의 노랫말과 영상은 정미조의 해석처럼 ‘담벼락에 기대 울던 작은 아이’ 같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울컥한다는 의미에 공감이 간다.
중년의 세월을 묵묵히 이고 가는 우리가 그를 보면서 용기를 북돋을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홀짝홀짝 막걸리 네 병을 해치우고 밥 두 공기를 볶아서 마무리 하면서 겨울 밤의 우리들만의 파티는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만 휭 하니 몰려와 취기를 건드린다.
“어린 꿈이 놀던 들판을 지나 아지랑이 피던 동산을 넘어 나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네~”…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벼루[硯], 먹[墨], 붓[筆], 종이[紙]를 말한다. 예로부터 선비나 문사(文士)들 곁에는 이 네 가지가 늘 함께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물을 적셔 종이에 글씨를 쓰면 서찰(書札)도 되고 시(詩)도 되고 서화(書畵)도 되고 상소문(上疏文)도 되었다. 보조기구로는 벼루와 먹을 넣어두는 연상(硯箱)이 있고 종이를 말아서 보관하던 지통(紙筒), 붓을 꽂아두는 필통(筆筒)도 있으나 역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적(硯滴)이라 할 수 있다. 토기나 도자기 혹은 놋쇠로 만들어진 연적은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작은 기물이다.
그런데 그 기형이 다채롭고 격이 높아 선비들의 호사(豪奢)가 되기도 했다. 서울이나 지방의 고미술 상점을 지날 때마다 연적에 눈이 쏠려 만져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서예 수업이 있어서 준비물로 문방사우와 연적을 갖추긴 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악한 품질의 것들을 팔았으나, 연적은 없어서 컵이나 주전자에 물을 준비해 조금씩 따라 먹을 갈았다. 그래도 열서너 명은 집에서 어른들이 쓰던 사기 연적을 갖고 왔는데 청채(靑彩)의 붕어 모양이 제일 많았다. 나는 형이 쓰던 푸른 문양의 사각형 사기 연적을 갖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팔던 ‘왜사기’였다.
그들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수집하려고 부산 등지에 현대식 사기 공장을 크게 짓고 밥그릇, 국그릇, 종지, 접시, 요강, 연적들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의 청자, 백자, 분청자기와 바꿈질을 했다. 그래서 오지의 초가 구석에 있던 간장종지까지 산뜻한(?) 왜사기로 바뀌게 되었다. 시골 장날이면 우리의 민속품이나 도자기들은 바리바리 일본 상인에게 들려 바다 건너로 사라졌고 흔하던 붕어연적도 씨가 마를 정도가 되었다.
나는 향리에 갈 때마다 옛 벗들에게 붕어연적을 탐문했으나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인사동의 고미술상에 있는 연적들은 희귀하고 예술성이 높은 것들이라 값이 비싸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황학동 일대의 벼룩시장,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훑고 다녔지만 옛것을 모방한 현대의 것들뿐, 조선조 말기의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출장 중에 골동품점에서 처음 청채 연적을 구입했다. 붕어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까웠는데, 구부린 자태며 비늘과 수염까지 정교한 데다 은은하고 맑은 코발트 유약이 일품이고 수구(水口)며 밑 처리도 깔끔해 얼른 지갑을 열었다. 그 뒤로 인사동 도자기 경매장에서 여러 형상의 연적들을 구입했다. 개중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에서 흘러온 것들도 있었다. 한 30여 년 수집하다 보니 조선조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100여 점 되고, 현대 도예가들에게 부탁해 빚은 연적이 300여 점이나 있다. 언젠가는 소장한 연적으로 작은 전시회를 꾸밀 계획이다.
지금은 물건이 귀해져 값이 만만치 않지만, 내가 연적을 마음에 두고 수집하기 시작할 때는 다른 도자기(항아리, 다완, 주병 등)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팔각(八角) 국화문이나 풀 무늬의 것[사진 1]은 선이 비뚤고 각(角)이 아홉인 것도 있다. 지방 가마에서 이름 없는 도공이 무심히 빚고, 우리 땅에서 나는 탁한 토청(土靑)을 바른 그 소박함이 좋다.
고미술상에는 도자기는 물론 석물(石物), 목물(木物), 서화 등 그 구색이 다양한데 고졸(古拙)한 멋의 책상이나 소반, 반닫이, 목판 따위에 밀려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짝에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대부분의 문짝들은 구옥(舊屋)이 헐리면서 수습된 것이기에 그 짜임도 지방 따라 다양하고 목수 솜씨에 따라 품질이 각색이지만, 연대가 깊지 않아 가격이 저렴하다. 20~30cm의 작은 문짝들도 그 짜임이 조밀하고 문살도 가지런해 조형미가 그만이다. 다락방 들창이었거나 고방(庫房)의 환기창으로 소용되었을 문짝 한 쌍을 벽에 걸고 보면, 벽 너머 푸른 하늘이 열릴 것 같은 아련한 환상에 젖는다.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우리의 목기를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고 손으로 툭툭 다듬은 것처럼 비뚤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든든함’이라 칭송했다.
창살 모양에 따라 완자문(卍字門), 아자문(亞字門), 격자문(格子門), 정자문(井字門), 용자문(用字門) 등 그 이름이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꽃창살문’이다. 일반 사가(私家)보다는 사찰 문에, 일일이 꽃 모양을 깎아 맞추고 단청으로 장엄(莊嚴)한 문을 바라보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전북 부안의 ‘내소사(來蘇寺)’ 법당 문의 꽃창살은 1633년에 창건된 법당과 함께 만들어졌다. 긴 세월 비바람에 단청마저 퇴색되었으나, 색을 덧바르지 않고 나무의 속살 그대로를 드러낸 채 속계(俗界)와 선계(禪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연꽃, 국화, 모란의 꽃들이 사선으로 혹은 나란히 연결된 채 500년 가까이 침묵의 고태미(古態美)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법당 문의 문창살을 이토록 정교하게 빚어낸 것은 형태와 빛깔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理事無碍法界]라는 저 화엄(華嚴)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석지현(釋智賢, 1946~) 승려 시인의 말이다.
문짝[사진 2]은 지리산 산록에 거주하며 옛 목기들을 정성스레 재현하고 있는 한 목수의 솜씨다. 1 대 2의 비율로 문틀을 짜놓고, 사선으로 문틀에 꽉 차게 두 종류의 꽃 모양을 조각한 문살을 끼웠다. 뒷면에 창호지를 바를까 하다가 공간의 멋을 즐기려 그냥 서재 책장 옆에 걸어두고 있다.
골동품을 수집하려면 주변의 민속품에 먼저 눈길을 줘보자. 아직은 값이 싼 실패, 골무 등 규방의 것부터 홀대받고 있는 작은 문짝들까지 모으다 보면 5~6년 후엔 값도 많이 오를 것이고 심미안도 높아져 ‘우리 것을 지킨다’는 자긍심이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청채의 붕어, 해태, 나비 모양 연적도 눈에 띄거든 주저 말고 수집할 일이다.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이었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으로 제8회 한국연극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을 비롯해 , , 등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도 많이 썼고요.”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의 작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로 사니 말이다.
“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 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젊은연극제란? 전국의 연극영화전공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연극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