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바스락 낙엽이 뒹구는 10월, 가을의 중턱에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취미로 직업을 삼다 (김욱 저ㆍ책읽는고양이)
일흔의 나이에 안락한 노후를 뒤로하고 취미였던 독서를 밑천 삼아 밥벌이를 시작한 늦깎이 번역가의 생존분투기를 그렸다. 저자는 젊은 시절 문학인이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신문기자의 길을 택한다. 퇴직 후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쫄딱 망해 남의 집 묘막살이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는 잠시 잊고 지냈던 꿈을 다시 펼쳐보기로 한다. 그렇게 일흔이 넘어 시작한 제2직업을 통해, 15년 동안 무려 20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고 ‘폭주 노년’, ‘삶의 끝이 오니 보이는 것들’ 등의 저서를 펴내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우리는 모두 미지의 존재”라며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재능은 나이 들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풍성해진다”고 용기를 갖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길 조언한다. 더불어 사회적 운명에 휘둘리며 보낸 과거를 벗어나 이제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길 강조한다.
◇ 죽음의 에티켓 (롤란트 슐츠 저ㆍ스노우폭스북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의 전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어린아이, 청년, 노인, 그리고 저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각기 다른 죽음의 방식을 보여주고, 현재 삶의 의미를 고찰하게 만든다.
◇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임운석 저ㆍ시공사)
돈, 시간,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현대인들을 위한 짧은 걷기 여행 팁을 담았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부터 빈티지 감성 골목길, 수도권 인근 바닷길 등 다양한 콘셉트에 따라 사시사철 걷기 좋은 40가지 코스를 소개한다.
◇ 품위 있는 삶 (정소현 저ㆍ창비)
2019 이효석 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을 비롯한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렸다. 예기치 못한 죽음, 또는 준비된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외면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 대한민국 요즘 여행 (옥미혜, 서준규 공저ㆍ알에이치코리아)
각종 빅데이터를 활용해 약 3년간 공들여 찾아낸 국내 여행지 32개 도시, 738개 장소를 명소, 맛집, 카페, 숙소 등으로 나눠 정리했다. 22가지 테마 여행 콘텐츠를 비롯해 휴대용 ‘베스트 150 지도’까지 담겨 있어 실용적이다.
56년 전통 ‘미성당’
‘납작만두’는 동인동찜갈비, 무침회, 복어불고기 등과 함께 이른바 ‘대구10味’로 불린다. 대개 맛있는 만두라고 하면 얇은 피에 두툼하게 꽉 찬 소를 생각하지만, 납작만두는 그 반대라고 보면 된다. 그 이름처럼 납작하게 생긴 것은 물론이고, 속은 적고 피가 대부분이다. 무슨 맛으로 먹나 싶겠지만, 평양냉면의 매력처럼 삼삼하니 보들보들한 식감이 자꾸 입맛을 당긴다.
납작만두를 파는 가게는 전국 곳곳에 있지만, ‘미성당’이 그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6·25전쟁 이후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미성당의 창업주였던 故 임창규 씨가 당면, 부추, 밀가루 등 최소한의 재료로 납작만두를 고안한 것이다. 보통 만두라면 빚은 뒤 쪄내 바로 먹지만, 납작만두는 한 번 초벌로 삶은 뒤 물에 한 시간 정도 담갔다 센 불로 구워낸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만두를 조금이라도 더 크게 불려먹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덕분에 푸짐해 보이는 것은 물론 납작만두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까지 덤으로 얻게 됐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아버지의 대를 이은 2대 주인장 임수종(56) 씨는 여전히 50여 년 전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만드는 방법, 재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별것 안 들어가고 대충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일정한 맛과 모양을 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평일에는 하루 1만5000~2만 개, 주말에는 하루 3만 개 정도 그날 쓸 만두를 빚는데,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모두 20년 이상 된 베테랑이라 문제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직원들과 정직한 맛을 유지한 게 장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요.”
직원들이 오래 일했다는 건 주인장의 인심도 한몫했으리라. 임 씨는 “상부상조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고마운 점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오랜 역사만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눴을 미성당 식구들. 그러나 올해 그들은 50여 년간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가게를 떠나야만 했다. 원래 미성당이 있던 남산 4-5지구가 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시작해 이전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더 오래가기 위한 또 다른 출발로 여기고 있단다. 그 새로운 시작엔 임 씨의 아들이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섰다.
“아들도 대를 있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어요. 지금 가게가 너무 쾌적해서(웃음) 옛날 분위기가 덜 나긴 하는데, 맛을 그대로 유지하면 차차 다시 역사가 쌓이겠죠. 아들의 손맛도 무르익어 갈 테고요. 아버지께서는 제게 늘 ‘불맛’이 중요하다 강조하셨어요. 그게 우리 집의 노하우와도 같은데, 아들도 그 불맛을 잘 지켜나가길 바랍니다.”
대구3호선 남산역 2번 출구 도보 4분
주소 대구시 중구 명덕로 93
영업시간 10:30~21:00 (명절 휴무)
대표메뉴 납작만두, 쫄면, 우동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47년 전통 ‘봉산찜갈비’
대구광역시청 인근 ‘동인동 찜갈비골목’은 지역민을 비롯한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대표 먹자골목이다. 달달한 간장양념 갈비찜이 아닌, 매콤한 마늘양념 ‘찜갈비’를 맛볼 수 있다. 그중 터줏대감으로 알려진 가게가 바로 ‘봉산찜갈비’다. 원래는 인근 건설 노동자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던 국숫집이었는데, 고기를 찾는 손님들이 생기며 현재의 찜갈비가 탄생하게 됐다.
육체노동이 심한 이들의 몸보신을 위해 소갈비를 주재료로, 무더운 대구 날씨에 잃은 입맛을 찾아줄 매콤짭짤한 양념을 더했다. 여기에 다진 마늘도 듬뿍 넣는다. 별다른 고명이나 꾸밈새 없이 양푼냄비에 담아내는데, 과거 국수를 말아내던 그릇을 그대로 사용한다. 올록볼록 양푼냄비에 새겨진 세월의 주름만큼이나,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나눈 단골이 많다고. 창업주인 어머니 이순남 여사의 아들인 2대 주인장 최병열(50) 씨가 가업을 잇게 된 것도 바로 그 ‘추억’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학과 직장을 서울에서 다녔어요. 마흔이 되니 이제 내려와 가게를 물려받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거절하고 싶었지만, 외아들이라 의무감으로 일단 1년은 서울에서 오가며 손님을 맞이했는데 그러면서 마음이 달라졌죠. 우리 가게를 사랑하고, 추억을 안고 찾아오시는 분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봉산찜갈비가 사라진다면 그들의 추억도 사라진다 생각하니 책임감과 사명감이 움트더군요. 결국 이듬해에 대구로 내려와 일을 제대로 시작했죠.”
그때의 마음을 되새기며 최 씨는 ‘추억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가게의 명맥을 잇고자 한다. 더불어 ‘음식은 소통’이라는 생각으로 함께 오는 손님들 간 기분 좋은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요즘은 외식하러 와도 휴대폰만 보느라 서로 대화가 없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그나마 술자리에서 대화가 잘 오가기 때문에 저희는 어떤 술을 가져오시든 코르크 차지를 받지 않아요. 즐거운 추억을 만드셨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인생 성공의 척도는 ‘돈보다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최근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요즘 카페에서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을 하듯, 비오는 날 비닐 대신 바람으로 우산 물기를 제거하는 기계를 놓는 등 작은 실천을 해보고 있어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안 먹는 반찬을 돌려주는 손님에게 그만큼의 다른 보상을 드리는 등 새로운 방법도 계속 고민하고요. 지금의 환경은 미래 후손들에게 빌려 쓰는 거잖아요. 훗날 자녀들에게 봉산찜갈비와 함께 좋은 환경까지 물려주고 싶습니다.”
대구1호선 칠성시장역 3번 출구 도보 9분
주소 대구시 중구 동덕로36길 9-18
영업시간 10:00~22:00 (명절 휴무)
대표메뉴 찜갈비, 갈비살 찌개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추석 즈음 닭실마을에 간 적이 있다. 푸른 논 너머로 기와집들이 보였다. 기와지붕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봉긋 솟았다. 마을 앞에는 계곡이 흘렀다. 풍수지리를 몰라도 이곳이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부녀회관에 모여 추석 한과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한 할머니가 손에 쥐여준 한과를 맛봤다. 500년 전통을 이어온 닭실한과였다. 그 뒤로 이맘때면 닭실마을이 생각난다.
걷기 코스
봉화공용터미널에서 택시 탑승▶ 석천계곡 입구 하차▶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솔숲길▶ 징검다리▶ 닭실마을 충재박물관▶ 청암정▶ 충재고택▶ 닭실마을 부녀회관▶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버스 탑승▶ 봉화공용터미널 하차
전통마을인 닭실마을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세운 마을이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 때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안동 권 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이 지금까지 전통을 지키며 대대로 살고 있다. 마을에 충재 종택, 청암정, 석천정사, 삼계서원 등의 충재 선생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어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살기 좋고, 풍광이 뛰어난 마을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했다.
닭실마을은 ‘닭 모양의 마을’이란 뜻이다. 한자로는 닭 酉(유), 골짜기 谷(곡), 마을 里(리)를 쓴다. 닭을 닮은 산이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어서 옛날부터 길지로 알려졌다. 경상도에서는 닭을 ‘달’로 발음해 마을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 부른다.
닭실마을을 구석구석 여행하려면 삼계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석천계곡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코스가 좋다. 닭실마을의 옛 입구인 석천계곡으로 가기 전에 왼쪽 길로 빠져 삼계서원에 잠시 들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이정표 삼아 시골길을 걷는다. 5분쯤 걸으면 은행나무 앞에 있는 삼계서원에 닿는다. 이곳은 충재 선생의 장남인 권동보(1518~1592)가 안동 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충재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원을 둘러보고 석천계곡으로 향한다. 삼계서원에서 석천계곡 입구까지는 코 닿을 거리다.
석천정사를 품은 석천계곡
석천계곡은 폭이 넓고 골이 깊지 않다. 여름철에는 봉화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놀이와 견지낚시를 하며 피서를 즐긴다. 석천계곡 입구의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조붓한 솔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에 들어서자 ‘청하동천(靑霞洞天)’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섰다. 청하동천은 ‘하늘 아래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다. 옛날 기암괴석이 많은 석천계곡에 밤마다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선비들 공부에 방해가 되자 충재 선생의 5대손인 명필 권두웅(1656~1732)이 바위에,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오지 말라’는 뜻을 품은 청하동천을 새기고 붉은 칠을 했다. 그 뒤로 도깨비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하동천 바위를 지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콸콸” 경쾌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계곡 입구에서 400m 정도 걸으면 소나무 사이로 석천정사가 보인다. 석천정사는 권동보가 봉화의 곰솔인 춘양목으로 지은 건물이다. 기암괴석과 금강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풍경이 병풍에서 튀어나온 듯 운치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석천정사를 바라보고 섰는데 그 모습에 반해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석천정사로 가기 위해 계곡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석천정사에 관리인이 있으면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석천정사 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석천계곡이 앞마당이 된다. 계곡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난간에 앉아 있으니 마치 신선이 된 것 같다. 고요한 밤에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가 도깨비 떠드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문득 선비들이 도깨비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는 건 핑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계가 눈앞에 있는데 글이 눈에 들어왔을까.
거북바위에 올라앉은 청암정
석천정사를 지나자 시야가 트인다. 기품 넘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멀리 닭실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란 소나무들이 마을로 인도한다. 이 길 왼쪽에는 개울이 흐른다. 간밤에 비가 내려 개울물이 제법 불었다. 꼴깍꼴깍 자맥질하는 징검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뒤 왼쪽 찻길로 접어든다. 1차선 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닭실마을 초입에 있는 충재박물관에 도착한다. 박물관 옆에 닭실마을의 대표 명소인 청암정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청암정은 충재 선생이 집 안에 지은 정자다. 충재고택의 솟을대문 쪽으로 들어가면 집 안 깊숙한 곳에 안방마님처럼 자리했다. 단풍나무, 소나무, 느티나무가 둘러선 연못 한가운데에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가 솟아 있다. 바위 위에 丁자 모습을 한 청암정이 올라앉아 있다. 마치 연못에 사는 커다란 거북이 등에 청암정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북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청암정의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절해 균형을 맞추는 등 자연미를 한껏 살렸다. 연못가에는 ‘충재’라 이름 붙인 서재가 있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보다 먼저 지은 건물이다.
연못 안에 있는 청암정에 오르려면 각목처럼 생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을 신의 영역이라 여겨 돌다리 폭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을 떼며 돌다리를 건너 신선의 세계로 든다. 청암정 난간 앞에 서면 풍요로운 논과 석천정사가 자리한 남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청암정 천장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번암 채재공과 같은 대학자들이 쓴 편액이 상장처럼 걸려 있다.
500년 전통의 닭실한과
청암정 쪽문으로 나와 마을 앞 큰길로 나선다. 솟을대문을 갖춘 큰 고택이 충재고택이다. 종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사유지이므로 문이 닫혀 있을 때가 많다. 돌담 아래 핀 꽃을 구경하며 마을 끝에 있는 부녀회관까지 걷는다. 부녀회관에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닭실한과를 만든다. 아낙네들은 대부분 70~80대 고령이다. 닭실마을이 안동 권 씨 집성촌이므로 모두 한집안 식구다. 이들이 충재 선생 불천위 제사에 올리는 오색 한과의 500년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닭실한과는 화려하다. 흑임자, 자하초 등의 천연재료로 물들이고, 쌀 튀밥으로 꽃 모양 고명을 올린다. 분홍색 유과는 아기 꽃신처럼 예쁘다. 달지 않고 바삭하며 입안에 들러붙지 않게 만드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 유과를 만들지 않고 약과만 만든다.
제사상에 올리던 닭실한과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팔린다. 작업장 선반에 발송 대기 중인 한과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명절을 앞두면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더 바빠진다. 찹쌀 반죽을 온돌에 48시간 말리고, 반죽을 늘려 튀기고 조청을 발라 튀밥 옷을 입혀 완성한다. 꼬박 사흘이 걸린다.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하는 한과 세트는 서른 박스 정도다. 명절용 한과는 일찌감치 예약 마감된다. 어느 댁 혼례에 쓰일 한과인지 할머니들이 바구니에 오색한과를 색깔 맞춰 담고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포장한다. 곁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 할머니가 맛보라며 유과를 건넨다. 바삭하면서도 폭신한 유과가 깨물자마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닭실마을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963.
주변 명소 & 맛집
봉화 송이돌솥밥
봉화는 전국 송이 생산량의 15%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송이 산지다. 송이는 살아 있는 소나무 뿌리에서 자란다. 봉화의 금강소나무숲에서 자란 봉화송이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어 최고 품질로 손꼽힌다. 봉화에 송이로 돌솥밥을 짓는 이름난 식당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솔봉이식당, 용두식당, 인하원이 송이버섯돌솥밥과 능이전골로 유명하다. 올해 봉화송이버섯축제는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충재박물관
충재박물관은 충재 선생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보물 482점과 고서 및 고문서, 서첩 총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물 중에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상당하다. 재산 분배에 관해 적어놓은 분재기, 양자 입양과 관련한 예조입안,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과거시험 답안지, 서원에서 제사지낼 때 쓰던 제기, 닭실마을 종부들이 온종일 만들었던 동고떡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30, 개방 10:00~17:00(동절기 10:00~16:00) 매주 월요일 휴무.
바래미전통문화마을
바래미마을은 봉화읍 해저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의성 김 씨 집성촌이며 마을이 생긴 이래 200년 동안 과거 급제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50여 가구에서 독립운동가가 14명이나 배출됐다. 토향고택, 만회고택, 남호고택, 개암종택, 김건영가옥, 소강고택 등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한옥도 많다. 만회고택, 남호고택, 소강고택은 여행자를 위한 고택 체험 및 한옥스테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여행 정보 걷기 Tip
•봉화공용버스터미널이나 봉화역에서 21번, 23번 버스를 타고 삼계정류장에 하차하면 된다. 택시로 5분 거리이며 도보로는 15분 걸린다. 닭실마을에서 나올 때는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53번, 50번, 51번, 25번, 16번 버스를 타고 봉화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약 15분 소요.
•봉화공용버스터미널 앞에 봉화장터가 있다. 2, 7일마다 오일장이 선다.
•석천계곡 입구에서 닭실마을까지는 도보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62년 전통 ‘상주식당’
대구의 명동이라 불리는 중앙로역 인근, 화려한 빌딩 사이 좁다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아담한 옛 가옥 한 채가 나타난다. 바로 ‘상주식당’이다. 문 앞에는 ‘금주, 금연, 영업기간 3월 1일~12월 15일’이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어머니 故 천대겸 여사에 이어 상주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차상남(73) 주인장에게 그에 얽힌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어릴 때는 ‘상주집’이라는 작은 대폿집이었어요. 사춘기가 되니 친구들이 ‘술집 가시나’라고 부르는 게 싫었고, 술 파는 일이 대접 못 받는다는 걸 알게 됐죠. 어머니께 술을 팔지 말자고 간곡히 부탁했어요. 그렇게 겨울엔 곰탕, 여름엔 닭개장, 가을엔 추어탕 등을 팔게 됐죠. 근데 그런 식당은 너무 많잖아요.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까’ 고민했죠. 어머니와 유명 맛집들을 답사하며 연구를 했어요. 고기가 귀했던 시절이니, 내장으로 육수를 내서 추어탕을 만들면 어떨까 하고 끓였더니 맛이 좋더라고요.”
지금은 내장 대신 사태를 사용한다. 이 육수에 질 좋은 국내산 미꾸라지와 고랭지 배추, 마늘을 주재료를 더해 깔끔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 외의 비결이라면 오직 근면, 성실, 정직으로 임한 것이 전부라고. 주인장의 하루는 새벽 5시 배추 다듬는 일로 시작된다.
“배추를 만져보면 그날그날 수분기가 다른데, 상태에 따라 끓이는 물 양을 조절합니다. 미꾸라지만큼 중요한 재료죠. 그래서 배추가 안 나오는 동절기에는 가게를 쉬고요.”
겨울에 가게를 닫고 쉬는 것은 꼭 배추 때문만이 아니다. 한때 10년 정도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다녔던 차 씨는 주말이면 대구에 내려와 가게 일을 도왔다. 그러다 일이 바빠 한 주를 못 가고 2주 만에 가게를 찾았는데, 어머니가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계셨더란다.
“다시 어머니를 도와야겠다 싶었죠. 회사 일을 아예 접을 수는 없어 어머니께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배추가 안 나오는 겨울 서너 달이라도 좀 쉬자고요. 그러면 나머지 계절은 제가 와서 일하겠다고 말이죠. 그러다 1993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동생들이 이 가게로 자신들을 키워줘 고맙다며 유산상속포기각서를 내밀더군요. 대신 어렵겠지만 어머니의 자존심인 상주식당을 부탁한다면서요. 사실 그건 제 자존심이기도 했죠. 그렇게 25년이 흘렀네요. 앞으로도 우리의 자존심, 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추어탕을 끓일 겁니다.”
대구1호선 중앙로역 2번 출구 도보 4분
주소 대구 중구 국채보상로 598-1
영업시간 9:00~20:30 (3월 1일~12월 15일 운영)
대표메뉴 추어탕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한식은 탕반(湯飯) 음식이다. ‘반’은 밥이다. ‘탕’은 국물을 뜻한다. 우리는 국물 없는 밥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 밥상에는 밥과 국이 있고, 반찬을 더한다. 밥과 국은 우리 밥상의 기본이다.
“일본에서도 밥과 국을 같이 먹더라”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 등에서도 밥과 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을 내놓는다. 종류가 한정적이다. 아침 밥상의 ‘미소시루(일본 된장국)’ 정도다. 낮이나 밤의 밥, 술자리에서는 흔하지 않다. 아침에 먹는 국 한 종지 정도다.
한식 밥상은 국의 향연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늘 “오늘 저녁은 무슨 국을 끓일까?” 고민했다.
우리 밥상은 밥과 국을 빼고는 성립하기 힘들다. 웬만한 밥상에는 늘 국이 등장한다. 국, 밥, 김치만 있는 밥상도 즐겁다. 탕반 음식은 우리의 핏속에 녹아 있는 음식문화다. 국도 여러 종류다. 고깃국, 생선국, 각종 채소국, 이도 저도 아닌 된장국까지 국물 없는 밥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한여름철에는 근대국과 아욱국을 따로 끓인다. 얼핏 보면 비슷한 아욱과 근대. 그러나 국으로 끓이면 그 맛이 각별하다. 콩나물, 미나리, 무, 시금치, 각종 시래기와 우거지까지. 한반도의 국물은 끝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탕, 국물이 없는 밥상은 ‘국물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관계를 끝낼 때도 “국물도 없다”고 말했다. 밥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이 국물이다. “넌 앞으로 국물도 없다”는 말은 인간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것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국이 없는 밥을 먹으면 목이 메었다. “국물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매정한 표현이다.
국물의 기본
국물의 기본은 ‘대갱(大羹)’이다. 대갱은 고기 곤 국물, 고깃국물이다. ‘대’는 크다는 뜻과 더불어 으뜸, 시작, 바탕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무런 양념이나 부재료인 채소 없이 국을 끓이면 대갱이다.
‘대갱’은 중국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오래전에는 매실과 소금으로 기본적인 양념을 대신했다. 대갱은 ‘매실이나 소금 양념’도 하지 않는, 고기를 곤 국물이다. 맛을 따질 일은 아니다. 맛이 있으면 양념한 화갱을 찾을 일이다. 국물에 채소나 양념을 넣으면 ‘화갱(和羹)’이다. 중국에는 화갱이나 대갱 모두 사라졌다. 화갱은 그나마 중식 코스 요리 중, 각종 채소를 넣고 생선이나 고기를 더한 국물 음식이 남아 있다. 한식에는 아직도 대갱이 살아 있다. 곰탕이 대갱이고, 제사상의 곰국, 곰탕이 바로 대갱의 변형이다.
우리 밥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화갱이다. 채소에 고기를 넣고 끓여도, 채소만으로 끓여도 화갱이다. 고깃국, 채소, 생선이나 여러 가지 양념을 더한 것이 모두 화갱이다.
한국 사람들의 밥상에는 화갱이 늘 자리한다. 시래깃국, 김칫국, 배춧국, 뭇국, 시금칫국, 토란국, 아욱국, 근대국 그리고 해조류를 넣은 미역국, 톳을 넣은 국, 몸국(모자반국)과 해산물을 이용한 북엇국 등 숱한 국물 음식들이 그것이다.
곰탕과 설렁탕
곰탕과 설렁탕은 비슷한 음식이다. 약 100년 이상 곰탕과 설렁탕은 경쟁하고, 상대의 장점을 서로 더했다. 두 국물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곰탕은 ‘고기를 곤 국물’이다. 쇠고기 양지 부위를 중심으로 푹 곤 국물은 반가의 음식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나주 등에서 곰탕이 유행한 이유도 간단하다. 서울, 한양은 궁궐이 있었던 도시다. 각종 관청도 많았다. 궁중의 제사를 모시는 종묘가 있고 공자의 제사를 모시는 성균관, 대성전이 있다. 제사에는 귀한 쇠고기를 사용한다. 공식적으로 쇠고기 도축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곰탕을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서울, 한양의 곰탕집들은 이런 쇠고기 소비문화를 뒤따른 것이다.
나주 곰탕도 마찬가지다. 나주는 큰 도시였고 큰 관청, 관사가 있었다. 역시 향교가 있고 외부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한양 도성에도 외국에서 온 사신과 외부 관리들의 방문이 잦았다. 역시 쇠고기 소비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나주 곰탕, 진주냉면이 발달한 까닭이다.
설렁탕은 출발부터 다르다. 곰탕이 고기 곤 국물이라면 설렁탕은 뼈와 내장 곤 국물이다. 때로는 소머리를 곤 국물도 더했다. 오늘날 서울 인근 경기도 몇몇 곳에 소머리 국밥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설렁탕을 만들 때 소머리도 이용했다. 그 방식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바로 소머리 국밥이다.
오늘날의 설렁탕에는 쇠고기도 더한다. 양지나 우둔살의 일부, 업진살 등을 넣는 설렁탕 전문점도 많다. 곰탕의 장점을 받아들인 결과다. 출발은 곰탕과 다르다. 내장, 소 머릿고기 등을 사골, 잡뼈 곤 국물에 더했다. 이른바 ‘부산물’들이다. 부산물은 정육의 대칭어다. 곰탕은 정육에서, 설렁탕은 부산물에서 출발했다.
육개장과 닭개장
닭은 개체가 너무 작다. 가정에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닭은 귀한 달걀을 낳는 존재. 그나마 풀과 벌레가 흔한 여름철과 달리 추운 겨울에는 먹이가 마땅치 않았다. 봄에 병아리에서 시작, 늦가을 대부분 닭을 ‘정리’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 급격히 발달한 주막에서 개장국을 끓인 것은, 그나마 개가 개체가 크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개장국은 주막의 주요 메뉴였다.
개장국은 ‘개고기+장(醬)+국[羹, 갱]’이다. 개고기는 일상으로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명의록(明義錄)’은 정조대왕 즉위 원년(1776년)에 작업을 시작해 이듬해 완성한 책이다.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한 과정 등을 기록했다.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했던 세손, 정조대왕이 즉위한 직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반대하고 궁궐에 자객을 침투시킨 반대파를 엄벌한 것이 정당했음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드라마 ‘이산’과 영화 ‘역린(逆鱗)’의 소재가 되었다. ‘이산’과 ‘역린’에 공히 정조 암살을 위해서 자객이 궁궐에 침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반대파에 의한 정조 시해 시도는 있었다. ‘명의록’의 공초(供招) 기록에 의하면 전병문, 강용휘 등 범인들은 궁궐에 침투하기 전 ‘궁궐 밖 개 잡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거사 실패 후 남대문 언저리로 도주, 다시 ‘개 잡는 집’에서 만난다. 사건 수사기록인 공초에 아무렇지도 않게 ‘궁궐 밖 개 잡는 집’, ‘남대문 언저리 개 잡는 집’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18세기 후반에는 한양 도성 곳곳에 개 잡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장국은 저잣거리 주막의 평범한 음식임을 알 수 있다. 167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안동 장 씨 할머니의 ‘음식디미방’에도 나온다. 개장국은 반가, 저잣거리를 따지지 않고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육개장과 설렁탕 등으로 바뀐다.
육개장은 ‘육[肉=쇠고기]+개장국’이다. 즉, 쇠고기로 마치 개장국같이 끓인 음식이 육개장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닭개장은 ‘닭고기+개장국’ 형태의 음식이다. ‘닭계장’으로 쓴 것은 틀렸다. 닭개장이 맞다.
개장국이 사라진 것은 청나라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청나라는 유목, 기마민족이다. 개의 존재가 농경민족인 우리와는 다르다. 개는 동반자 때로는 생명의 은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도 청나라 문화를 받아들인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저잣거리에서도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조선시대 말기 소의 생산량도 늘어나고 국가의 금육 정책도 힘을 잃는다. 나라가 망한 일제강점기, 금육은 허물어진다. 쇠고기를 더한 육개장과 쇠고기로 끓인 곰탕, 소의 부산물을 중심으로 끓여낸 설렁탕이 널리 퍼진다.
한반도의 국물 음식 중 으뜸은 곰탕, 설렁탕, 육개장 그리고 육개장을 중심으로 변형된 해장국들이다. 선지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이 있다. 선지에 각종 채소를 더한 것도 등장하고 장터에서 간단히 만들어 내놓았던 장터해장국도 선보인다.
한반도만의 국물 문화
전 세계 모든 문명국에는 라면이 있다. 동남아, 중동, 유럽, 미국,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라면을 먹지 않는 나라는 드물지만, 라면 국물을 알뜰하게 먹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에서 라면을 먹었던 이들은 “듣기와는 달리 일본 라면이 짜더라” 말한다. 당연하다. 일본인들은 라면 국물을 우리처럼 알뜰하게 먹지 않는다. 일본은 면 중심으로, 우리는 국물 중심으로 라면을 먹는다. 면을 먹는 이들은 면에 국물이 배어든 맛을 즐긴다. 우리는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는다. “나트륨이 많은 국물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은 허망하다. 우리는 ‘국물도 없는’ 음식을 싫어한다. 면보다는 국물에 만 밥에 김치를 얹어 먹어야 속이 후련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수반(水飯)도 마찬가지다. 물에 만 밥. 입맛이 없거나 간단한 상으로 손님을 접대할 때 정식으로 수반을 내놓았다. 왕(성종)도 즐겨 먹었고, 아버지 묘소에서 간단하게 수반을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 왕도(정조) 있다.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후 일상적으로 먹는 나물국, 생선, 고깃국, 개장국과 설렁탕, 곰탕, 육개장 그리고 라면과 수반까지.
한반도만의 독특한 국물 문화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69년 전통 ‘성일집’
옛 부산시청 뒷골목, 현존하는 곰장어 가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일집은 2대 주인장 최영순 씨와 그의 아들인 김성용 씨가 함께한다. 올해 68세인 최 씨는 여전히 하루 꼬박 4시간씩 곰장어 손질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 흔히 안주로 먹는 손가락 굵기의 곰장어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먹으로 한껏 움켜쥐어야 할 정도로 두툼한 데다 길이로 치면 주인장의 팔보다 길쭉하다. 품질 좋은 국산 곰장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인장 역시 식재료만큼은 따라갈 곳이 없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다른 집에서 곰장어를 먹던 손님들이 여기서 음식 나온 거 보면 놀라요. 대부분 가게는 저렴한 수입산이나 그보다 더 값이 떨어지는 냉동 곰장어를 쓰니까요. 수익만 보면 그편이 나을 수도 있죠. 그러나 이제는 돈보다 성일집의 전통과 내 명예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이제 아들까지 이어가면 100년 역사인데, 그 정도 자신감은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돈을 좇지 않는다는 그녀이지만, 처음 시어머니에게 성일집을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생계가 녹록지 않았다. 6·25 전쟁 이후 어려운 살림에 8남매를 먹이기 위해 곰장어를 굽기 시작해 식당까지 차렸지만, 당시만 해도 그리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 성일집을 일으켜 세운 데는 며느리 최영순 씨의 강인한 의지가 한몫했다.
“스무 살에 시집왔는데, 빚이 있어서 결혼식을 못 올렸어요. 시어머니께 ‘내가 열심히 일해서 10년 뒤에 식을 올리겠다’고 했죠. 정말 독하게 곰장어에 매진했어요. 덕분에 10년 만에 빚도 갚고 가게도 왕성해져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곰장어로 자식들 잘 키우고 예쁜 손주들까지 봤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죠. 그뿐인가요. 이제는 남에게 안 빌리고, 내 것으로 남 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성일집의 자부심 또 하나.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23가지 한약재로 만든 육수가 양념의 감칠맛을 더한다. 이미 품질 좋은 곰장어에 한약재까지 고루 넣었으니, 그야말로 보양식이 따로 없다. 이만큼 정성을 다한 데에는 손주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됐다.
“곰장어가 영양가도 많고 고단백 식품이라 아이들 성장기에 참 좋거든요. 그런데 애들은 잘 안 먹더라고요. 손주에게 먹일 심산으로 최신 휴대폰을 사줄 테니 곰장어 20번만 먹자고 했죠. 그렇게 약속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맛을 낼까 밤새 고민했어요. 한약재며 해초며 야채며 이것저것 넣어보다가 지금의 양념장이 완성됐습니다. 앞으로도 조미료는 넣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직 손주에게 네 번 더 먹여야 하고요.(웃음)”
부산1호선 남포역 10번 출구 도보 3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대교로 103
영업시간 매일 11:00~23:00
대표메뉴 곰장어 소금구이, 곰장어 양념구이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인천 무의도에 딸린 섬, 소무의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012년에 소무의도 둘레길인 무의바다누리길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무의도는 해안선 길이가 2.5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섬 여행의 매력을 다 갖췄으니 가성비 좋은 섬이라고나 할까. 섬 둘레를 걸으며 고깃배가 들락거리는 아담한 포구와 정겨운 섬마을 풍경, 74m 높이의 아담한 산과 푸른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다.
추천 코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 탑승▶광명항 하차▶소무의인도교길▶마주보는길▶떼무리길▶부처깨미길▶몽여해변길▶명사의해변길▶해녀섬길▶키작은소나무길▶광명항에서 1번 버스 탑승/하나개해수욕장 하차▶하나개해수욕장 촬영세트장▶해상관광 탐방로▶1번 버스 타고 용유역 하차
미니버스 타고 무의도로 가는 길
올해 4월 무의도에 연륙교인 무의대교가 놓였다. 배 출항 여부와 상관없이 언제든 맘 편히 섬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무의도로 가는 길은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잘 돼 있어 뚜벅이 여행자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인천공항 자기부상 철도를 타고 용유역에 내린 뒤, 길 건너에서 무의도행 1번 미니버스로 갈아탄다. 거잠포와 잠진도를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갯벌 위에서 낮잠 자는 작은 고깃배와 조개를 캐는 주민들이 보인다. 무의대교가 생기기 전, 잠진도 선착장과 무의도를 무시로 오갔던 배 두 척은 먼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다. 승선 시간이 고작 5분이었지만, 뱃머리에 서서 섬 여행의 설렘을 만끽했던 일이 영영 추억으로 남게 됐다.
미니버스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무의대교에 올라타자 차창으로 바닷바람이 훅 밀고 들어온다. 무의도 큰무리선착장에 도착한 미니버스는 고개 넘어 섬 끝 광명항으로 달린다. 미니버스가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요리조리 잘도 달린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옆자리 앉은 중년여성이 “아, 너무 좋네. 자주 와야겠다”라며 혼잣말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물으니 반문한다. “안 좋으세요? 무의도에 사세요? 전 서울에서 여기 처음 왔는데 너무 좋네요. 다음에 남편이랑 같이 와야겠어요.” 무의도의 매력을 오래전에 깨달은 터라 그저 미소로 답한다.
무의도의 진주,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미니버스의 회차 지점인 광명항(소무의도 입구)에 하차한 뒤 무의인도교를 향해 걷는다. 이 다리가 광명항과 소무의도를 잇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무의바다누리길 안내판을 훑어본다. 무의바다누리길은 소무의도 해안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마주보는길’, ‘몽여해변길’, ‘부처깨미길’ 등 구간이 8개나 되지만 총 거리는 2.4km밖에 되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무의바다누리길의 1구간인 ‘소무의인도교길’를 건너며 소무의도를 굽어본다.
갯벌이 드러난 떼무리포구에서 고깃배 대여섯 척이 물 들어오길 기다린다. 포구 앞 서쪽 마을에는 원색 지붕을 얹은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여 섬마을 정취를 뽐낸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난 구멍가게에 들러 시원한 미숫가루 한 잔을 사 마시고 더위를 식힌다. 인상 좋은 주인에게 듣는 마을의 이모저모는 덤이다. 떼무리포구와 서쪽 마을 앞을 지나는 방파제길이 2구간 ‘마주보는길’이다. 방파제 끝까지 걸으면 관광안내소가 나오는데 안내소 옆 계단으로 오른다. 계단 끝에서부터 그윽한 숲길이 이어진다. 당산이 있는 이 숲길이 3구간 ‘떼무리길’이다.
흙길과 데크길을 번갈아 걷다보면 4구간 ‘부처깨미(꾸미)길’ 안내판이 나온다. 전망데크와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옛날에 소무의도 주민들이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소를 제물로 바치고 풍어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부처깨미에서 다시 1분 정도 오르면 전망대가 또 나오는데 이곳은 포토존이라 할만하다. 초승달 같은 몽여해변과 동쪽 마을이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멀리 대부도, 영흥도, 선재도 등이 어렴풋이 보인다. 서해는 누렇다는 편견을 반박하듯 오늘따라 바다 빛이 푸르디푸르다. 전망대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와 5구간 ‘몽여해변길’을 거닌다. 부모와 놀러 온 아이들은 갯바위 사이에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산과 바다를 여유롭게 즐기는 산책길
바다 풍광 좋은 몽여해변에 카페들이 하나둘 생긴다. 한 카페에 들어가니 카페 주인이 바다 쪽 폴딩도어를 활짝 열어준다. 손님들이 “와 오늘 바다 예쁘다!” 환호한다. 빨간 파라솔 아래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나가는 고깃배들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려본다. 카페 가까이에 있는 바다이야기박물관을 지나면 곧 언두꾸미에 닿는다. 이곳은 갯벌에 참나무를 세우고 언둘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주목망 어업을 하는 곳이다. 언둘꾸미가 변해 언두꾸미가 되었다고 한다. 방파제에 둘둘 말아놓은 그늘이 잔뜩 쌓여 있다.
언두꾸미를 지나 울퉁불퉁한 갯바위를 타고 넘어 6구간 ‘명사의해변길’에 도착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휴양 왔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몽돌 해변이다. 바닷가에 하얀 굴 껍데기가 가득 쌓여있다. 우뚝 선 절벽이 해변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명사의해변을 지나면 안산 꼭대기로 오르는 숲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나무 계단도 기다린다. 숨을 조절하며 중간쯤 오르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해녀도가 훤히 보인다. 옛날에 해녀가 물질하다가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해녀도 뒤로 섬들과 풍력발전기 대여섯 기가 아슴아슴 보인다. 바다와 섬 사이에 해무가 껴 섬들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이 환상적인 풍경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 길이 7구간 ‘해녀섬길’이며 무의바다누리길에서 풍광이 가장 좋다.
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안산 정상에서 하도정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하도정 주변에 해풍 맞고 자란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8구간을 ‘키작은 소나무길’이란 이름 붙였다. 하도정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소무의인도교가 코앞에 있다.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굽어보니 어느덧 바닷물이 차올라 갯벌에 박혀 있던 배들이 둥둥 떠올랐다. 광명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나개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바다 위를 걷는 하나개해수욕장 해상관광 탐방로
하나개해수욕장은 ‘섬에서 가장 큰 개펄’이라는 뜻을 지녔다. 해변은 모래밭이고, 썰물 때는 진득한 갯벌이 드러난다. 보드라운 갯벌 흙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을 즐기며 일몰을 감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나개해수욕장은 일몰 명소로 유명하다.
해변에 오래전에 방영됐던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영화 ‘칼잡이 오수정’의 주택 세트장이 있다. 실내 관람은 할 수 없다. 세트장 뒤로 해안관광 탐방로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이정표를 따라 데크를 걷다 보면 호룡곡산 등산로와 해안관광 탐방로의 갈림길이 나온다. 등산로를 뒤로 하고 해안 쪽으로 내려선다. 해안관광 탐방로는 작년에 무의도 해안절벽 옆에 조성한 해상산책로다. 만조 때는 파도 때문인지 약간 흔들거린다.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이 꽤 스릴 있다. 해안절벽에 있는 진기한 모양의 바위에 이름을 짓고, 탐방로 난간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억지스러운 이름도 있지만, 자꾸 안내판 사진과 비슷한 바위를 찾으려 애쓰게 된다. 밀물 때는 갯바위가 잠겨 일부만 찾을 수 있다. 가장 그럴싸한 바위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있는 형상의 원숭이 바위다. 탐방로 끝 해안가에 있다.
이 탐방로는 한낮보다는 해질녘 바닷바람 맞으며 걸어야 제맛이다. 매일 물때가 변하므로 이곳에 갔을 때 바닷물이 싹 빠져 갯벌이 드러나 있을 수도 있다. 바다 위를 걷는 스릴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안내판 속 바위들은 다 찾을 수 있으니 밀물이어도, 썰물이어도 좋으리라. 탐방로 개방 시간은 일출 때부터 일몰 때까지이다.
주변 명소&맛집
무의도의 휴양지 실미도
실미도는 무의도의 부속 섬이다. 1971년 8월에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부대원들이 정부의 사살 명령을 받고 온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가던 중 자폭한 사건이었다. 2003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실미도’가 개봉해 큰 관심을 얻었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마다 무의도와 연결된 징검다리가 드러난다. 이 다리를 건너 실미도를 관통하는 숲길을 지나면 섬 반대편 해변이 나온다. 실미도 영화 세트장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갯바위와 고요한 해변만 남았다. 실미도와 마주 보고 있는 실미유원지에는 100여 년 된 아름드리 노송 군락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숲에서 야영을 즐기는 여행객들이 많다. 하나개해수욕장보다 한적한 해변을 산책하거나 바닷가 식당에서 해산물 요리를 즐기기에 좋다.
맛집과 카페
무의도는 바지락 칼국수와 영양굴밥, 조개찜이 유명하다. 하나개해수욕장과 실미유원지, 광명항에 횟집과 식당이 많다. 실미유원지에서는 ‘해송회식당’이 입소문 났다. 진한 바지락 국물에 감자와 각종 채소로 맛을 낸 바지락칼국수가 일품이다. 칼칼한 국물이 입맛을 당긴다. 용유역 앞 ‘은행나무집’은 영양굴밥을 잘한다. 소무의도 몽여해변에 있는 ‘섬카페좋은날’은 루프톱 카페다. 옥상에 폭신한 소파를 준비해두었다. 길가에 있어 걷는 중에 잠시 들리기 좋다.
여행 tip
1. 대중교통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3층 7번 탑승장에서 2-1, 222번 버스 탑승, 용유역에서 하차한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타면 된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역에서 모노레일로 갈아타 종착역인 용유역에 하차,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탄다. 모노레일은 무료이며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 15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인천국제공항역에서 용유역까지 약 12분 걸린다.
-용유역 앞에서 1번 버스가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10여분 늦어 질 수 있다. 배차 간격이 넓으므로 하차할 때 버스 시간을 알아두는 게 좋다.
2. 실미도는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개해상관광탐방로는 물때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으나 바다 위를 걷고 싶다면 물때를 확인해야 한다.
52년 전통 ‘양산집’
부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돼지국밥’. 그중에서도 양산집은 깡통시장 거리에서 처음으로 돼지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래된 돼지국밥집을 생각하면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연상되지만, 이곳 주인장은 갓 서른을 넘긴 청년 노치권(31) 씨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인 만큼,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은 덕을 보리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노 씨의 사정은 좀 달랐다. 군 제대 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준비하던 무렵,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병마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속에서 남은 것은 양산집, 그리고 20대 청년의 열정뿐이었다. 주인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장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직장생활보다는 가게의 맥을 잇는 게 좋겠더라고요. 보통 가업을 이으려면 이전 세대에게 음식 만드는 법부터 가게 운영까지 노하우를 전수받게 마련인데, 저는 그럴 겨를이 없었죠. 어린 시절 어깨너머로 보던 것에 친척이나 주변 지인들 조언을 더해 나름 맛을 구현했는데, 처음엔 정말 형편없었어요. ‘아들이 하더니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죠. 그땐 차마 ‘3대째’라는 타이틀을 걸 수가 없더라고요.”
칼질도 배우지 못한 채 뛰어든 장사였다. 얼마간은 가게 일을 마치고 인근 일식집에서 일손을 도우며 칼질을 익혔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쓰던 재료 안에서 국밥을 연구해가며 차츰 본래의 맛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주변 상인들과 단골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2014년 드디어 ‘3대째’라는 타이틀을 자신 있게 내걸었다.
“손맛을 살리는 데도 노력했지만, 더불어 염두에 뒀던 건 ‘가게의 정신을 잇자’는 거였어요. 두 분께서는 고된 장사를 하시면서도 늘 주변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 하셨죠. 3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물질만 물려받는 게 아닌, 이전 세대의 이념까지 이어가면 좋겠더라고요. 원래는 지역명을 딴 가게 이름인데, ‘기를 양(養)’, ‘물 흐를 산(汕)’이라는 한자를 써서 ‘끊임없이 베풀겠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실제 양산집은 오래전부터 수익금 일부를 어려운 이웃과 기관에 기부해왔다. “모두를 배부르게 하라”던 할머니의 말씀처럼, 그는 윗세대에게 물려받은 ‘큰 그릇’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언 몸과 마음을 녹이는 것처럼, 국밥을 통해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싶어요. 내가 열심히 장사해서 번 돈으로 다른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긍심도 생기죠. 국밥처럼 따뜻한 세상을 위해 베풀 줄 아는 ‘큰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부산1호선 자갈치역 3번 출구 도보 9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중구로47번길 30
영업시간 매일 10:00~20: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
대표메뉴 돼지국밥, 수육·편육, 수육백반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60년 전통 ‘백구당’
‘흰 갈매기’를 뜻하는 백구당(白鷗堂)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 제과점이다. 60년 동안, 3대를 이어오며 잠시 ‘뉴 파리 양과’로 이름이 바뀐 적도 있고, 매장 규모가 달라지기도 했지만, 빵맛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3대 주인장인 조재붕(54) 씨는 “정직한 재료로 옛 방식을 고수하되, 연구를 통해 늘 새로운 맛을 선보인 것이 장수비결”이라 말했다. 초창기부터 만들어온 앙금빵이나 양과자를 비롯해 2대 주인장이 45년 전 탄생시킨 ‘크로이즌’, 그리고 현 주인장이 개발한 ‘쑥쌀식빵’까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조재붕 씨는 제철 국산 식재료를 빵에 접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계절마다 지역 토산품을 이용한 빵을 개발하려고 노력합니다. 봄에는 쑥 카스텔라를, 가을에는 홍시 롤케이크를 만들기도 했죠. 산지에 직접 가서 좋은 재료를 골라 옵니다. 자연발효는 물론이고, 첨가제나 방부제도 전혀 넣지 않아요. 정직한 재료에 자부심을 느끼고, 고객에게 거짓이 없으니 더 뿌듯합니다.”
장인정신이 느껴질 정도로 빵에 대한 철학과 자긍심을 지닌 그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백구당을 물려받을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본래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사 대기업을 안정적으로 다니던 터였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며, 백구당에도 위기가 닥쳤다. 백구당의 명맥을 잇는 문제로 가족들의 고뇌는 깊어졌고, 결국 장남 조재붕 씨가 나서게 된 것이다.
“대를 잇기 위해 한국제과학교를 다니면서 자격증도 땄고, 대학원에서 경영 공부도 했어요. 2000년 8월에 내려왔는데, 처음 6개월간은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꼬박 가게 일에 매달렸죠. 다행히 아버지가 기력이 좀 있으실 때라 빵 만드는 기술도 전수받았어요.”
조재붕 씨 역시 대를 물려줄 계획을 갖고 있을까? 그는 ‘대를 잇는다’는 표현 대신 “잠시 맡는다”라며 운을 뗐다.
“백구당은 계속될 거고, 그 과정에서 제가 잠시 맡았다고 생각해요. 그다음으로는 둘째 아들이 맡았으면 하는데, 장담할 수는 없어요. 아버지도 원래는 제 동생에게 물려주려 했으니까요. 결국 백구당의 다음 주인장은 사람이 아닌 백구당이 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웃음)”
부산1호선 중앙역 15번 출구 도보 1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중앙대로81번길 3
영업시간 월~토요일 8:00~22:00, 일요일 9:00~17:00, 공휴일 9:00~18:00
대표메뉴 크로이즌, 쑥쌀식빵, 파이만주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