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더운 여름철에 엉뚱하게 비빔밥 이야기를 한다.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보양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이가 많다. 지난번에도 ‘보양식은 없다’고 말했다. 비빔밥이 여름철 보양식이다. 굳이 찾자면 우리가 ‘환자식’이라 부르는 죽(粥)이 바로 보양식이다. 한식에는 보양식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 특집을 방송하는 지경이다.
외국 어느 나라도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을 소개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약한 나라들도 이렇게 ‘보양’을 찾아서 헤매지는 않는다. 우리만 튼튼하고 보양식을 먹지 않는 외국인들은 여름철이면 비실비실한가?
보양식 관련해서 한국은 문화적 후진국이다. ‘문화적 문맹’ 수준이다. 1년 내내 ‘치맥’을 먹는 한국인들이 보양식으로 또 닭을 먹는 것도 코미디다. 정작 인삼 소비는 나날이 줄고 있다. 일상에서는 인삼을 거의 찾지 않으면서, 복날에만 인삼 들어간 삼계탕을 먹는 것도 우습다. 치맥은 건강에 좋든 나쁘든,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뿐이다.
한식이 추구하는 바는 평(平)의 세계다. 음식을 평하는 게 하는 일이니, 여름철만 되면 보양식 원고청탁과 더불어 ‘보양식 강의’도 심심치 않다. 백화점 문화강좌나 공무원, 회사원 연수 프로그램 등에서도 ‘보양식 강좌’를 청한다.
강의를 할 경우 “한식은 평의 음식이다. 그러므로 보양식은 없다”고 미리 선을 긋는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상당히 실망하는 눈치다. 더러, “에이, 뭐야?” 하는 이도 있다. “오늘 낮에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먹었는데 보양식이 없다니 그럼 삼계탕, 자라, 장어, 민어를 먹고 힘이 나는 건 뭐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겨우 21일 자란 병아리 수준의 닭을 먹고, 내 몸에 보양을 했다고 좋아하는 것은 슬프지 않냐고 묻는다. 그 닭이 항생제, 성장촉진제 등을 먹으며 A4 용지보다 좁은 바닥에서 자랐음을 아냐고 묻는다.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한편으로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끝내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반가에는 보양식이 있지 않았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다. 굳이 보양식으로 꼽자면 죽과 동짓날 팥죽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비빔밥이다.
비빈다? 여러 음식을 골고루 먹다
1994년,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동양과 서양, 일본과 한국 그리고 과거와 현대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그릇에 넣고 비빈다. 그릇 속에서 여러 요소들이 뒤섞이고 충돌, 화합한다. 제3의 맛을 만들어낸다.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비빔밥을 비빌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선두에 설 것이다.”
25년 전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넷이 아직 민간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이다. 스마트폰도 없었다. 백남준 선생은 마치 예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맞았다.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이 한국에 와서 여러 번 비빔밥을 먹었다고 자랑하지 말자. 어느 항공사에서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의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고 우쭐할 일도 아니다. 백남준 선생이 먼저 비빔밥, 비빔밥 문화를 정확하게 예언(?)했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식재료를 동시에 섞고 비비는 것이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식재료를 골고루’라고 말한다. 이게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여러 가지, 골고루 먹으면 다양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다. 보양식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여러 가지 식재료’를 섞은 맛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가 비빈 비빔밥이 제일 맛있다”는 표현도 있다.
전북 전주의 한 비빔밥 집에서는 늘 주인이 밥을 비벼준다.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는 이는 없다. 이 가게에 가면 필자도 늘 “비벼주세요”라고 청한다. 주인이 ‘숟가락 두 벌로’ 쓱쓱 비벼주면 희한하게 맛있다. 전주 사람들이 설마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랴? 현지 주민들도 늘 “비벼주세요” 한다.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빔밥을 위한 변명
비빔밥의 역사는 길고 넓다.
조선시대 중기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쓴 ‘기재잡기’에는 무관 전임(田霖, ?∼1509)과 혼돈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돈반은 비빔밥이다.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과 같이 만들어 내놓으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
무관 전임은 조선시대 전기의 관리다. 15세기 중후반과 16세기 초반을 살았던 이다. 지금을 기점으로 셈하자면 500년 훨씬 전의 사람이다. 그때도 비빔밥이 있었다, 100년 이상 뒤의 사람인 문신 박동량이 그 내용을 남겼다. 특별하게 설명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혼돈반’이라고 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전임이 먹었던 것은 생선과 채소를 넣고 비빈 밥이다. ‘혼돈반=비빔밥’이다. ‘혼돈’은 뒤섞여 어지러운 상태다. 혼란, ‘골동(骨董)’과도 비슷하다. 비빔밥을 ‘골동반’이라 부르고,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인 국물을 골동갱(骨董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연스레 받아들이지만, 외국인에게 비빔밥은 어렵다.
일본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씨는 “비빔밥은 양두구육의 음식”이라고 했다. ‘양두구육’은 전임의 혼돈반과 닮았다. “처음 그릇에 내올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그걸 마구잡이로 섞어서 먹는다. 처음과 끝이 전혀 다른 음식이다.”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한국 음식, 비빔밥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아름다움을 파괴한 음식이다. 처음은 멀쩡한데 막상 먹을 때는 뒤섞어서 엉망으로 만든 음식이다. 겉으로는 ‘양 대가리’를 걸어놓고, 정작 ‘개고기’를 파는 식이다.
일본인들의 가마메시[釜飯, 부반]는 솥밥이다. 한국 비빔밥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음식이다. 비빔밥은 비비지만 가마메시는 간장을 얹어서 떠먹는 식이다. 한반도의 돌솥밥은 비비지만, 일본의 가마솥 밥은 마지막까지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가마메시가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비빔밥이 맛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가마메시는 닫힌 음식이다. 고명을 더하거나 빼지 못한다. 처음 나온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고수한다. 정해진 식재료와 정해진 방식을 따른다.
한국 비빔밥은 열린 음식이다. 정교한 아름다움만 자랑하는 닫힌 음식이 아니다. 비비다가 말고 나물을 더 넣기도 하고, 밥이나 장을 더하기도 한다. 뒤죽박죽인 듯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비비는 비빔밥의 ‘설계도’를 머리에 넣고 있다.
비빔밥, 평(平)을 향하다
너른 들판. 동네 사람들이 두레로 일을 한다. 논주인은 새참과 식사를 준비한다. 광주리에 여러 나물을 준비하고 밥을 큰 그릇에 담은 다음, 들판에 와서 광주리를 펼친다.
일하던 동네 사람들이 광주리 주변에 모여든다. 큰 그릇을 하나씩 받아든다. 그다음부터는 자유다. 밥을 얼마나 퍼 담든, 어떤 나물을 담든, 모두 자유다. 싫어하는 나물은 먹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나물은 많이 넣어도 된다. 고추장을 넣든 된장을 넣든 모두 개인의 취향이다.
‘흔한 식재료를 귀하게’ 사용하는 것이 한식의 길이다. 나물 잎사귀와 뿌리, 줄기의 맛이 다름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다. 전 세계에서 산나물을 이렇게 흔하게, 자주, 많이 먹는 민족은 없다. 산나물, 들나물로 밥상도 차렸다. 나물들을 넣고 비비면 산채비빔밥, 산나물비빔밥이다.
세상의 모든 산에는 산나물이 있다. 세상의 어떤 민족도 산나물을 넣고 비비는 ‘산채비빔밥’을 식당 메뉴로 내놓지 않는다. 산나물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건강식이다. 산나물을 이토록 다양하게 먹는 나라는 없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도 없다. 산나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것이고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보양식이다.
여름철이면 몸의 영양 균형이 무너진다. ‘영양 부족’이 아니라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균형이 허물어지면 영양을 더할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아야 한다. 특정 고기와 생선 등을 탐할 일이 아니다. 다양한 식재료를 동시에 섞은 비빔밥이 보약이자 여름철 보양식이다. 여러 영양소와 미네랄, 효소 등으로 몸의 균형을 잡아주니 건강식이다.
현대인들은 영양 부족이 아니라 영양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름 파이프가 고장 난 차량에 자꾸 휘발유를 부을 일은 아니다. 영양 과잉으로 힘든 몸에 영양분을 더할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를 넣고, 섞고 비빈 음식, 비빔밥은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시대다. ‘더하는 음식’, 호화로운 식재료가 아니라 ‘빼는 음식’, 소박한 음식이 필요한 시대다. 여름철, 시큼한 열무물김치, 보리밥, 고추장 조금 넣은 열무김치비빔밥이 그립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냉면이 뜨겁다. 2018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날, 서울의 냉면집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북한 ‘옥류관’ 냉면 때문에 평양냉면 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평양냉면은 음식, 맛집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이 여러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떠돌아다녔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정체를 알기 힘들다. 의견도 분분하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면스플레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면(麵)’+‘익스플레인(explain)’이다. 면, 냉면, 평양냉면에 대해 아는 체하며, 맛집 순위를 매기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이른 표현이다. ‘맨스플레인(man′s +explain)’에서 시작된 조어다.
이 글도 ‘면스플레인’의 일종이다. 냉면에 관해서 설명한다. ‘면스플레인’인지 냉면에 대한 올바른 지적질인지는 읽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국수, 냉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냉면도 ‘차가운 면’ 국수다.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메[山]’+‘밀[小麥]’이라고 여긴다. 모가 났다고 해서 모난 밀, 모밀, 메밀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는 대맥, 밀은 소맥,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교맥, 메밀을 흔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부른다. 구황작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 대체 작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라기보다 상용작물(常用作物)이었다. 초여름 무렵 비가 부족해도 메밀을 대파했다. 다행히 메밀은 짧은 생육기간, 6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었다. 지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처음부터 메밀을 심었다. “곡식이 부족하니 메밀을 먹어라”가 아니다. 애당초 벼농사, 곡물 농사 짓기 힘든 땅에는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주요 상용작물이었다.
메밀이 좋아서 메밀로 국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메밀국수+동치미’의 조합은 좋아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조합이 아니다. 비교적 편하고 쉬워서 등 떠밀려서 선택한 조합이다.
깊은 밤, 배가 출출하다. 입 다실 게 있으면 좋겠다. 메밀국수를 내린다. 한민족은 탕반(湯飯) 음식을 즐긴다. 국물 없는 밥상은 목이 멘다. 국물을 만들기 힘든 시간, 동치미 한 사발이면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강원도 출신들 중 결혼식 때 막국수를 먹었다는 이가 많다. 경조사에만 사용했던 귀한 음식, 국수. 국수의 대중화 역사는 길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냉면과 국수, 막국수는 모두 국수다.
메밀 함량 묻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메밀 함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컨대, 50%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분기술이 낮아 디딜방아, 절구질, 물레방아를 이용해 제분했다. 절구질한 후, 고운 천 혹은 체 등으로 메밀가루를 내린다. 고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깨진 껍질, 나머지 거친 입자는 그대로 남는다. 찌꺼기와 거친 입자를 다시 빻는다. 같은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내린다. 이 힘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운 메밀가루를 모은다.
가루 입자가 고우면 국수 만들기 좋다. 거친 입자는 국수 만들기 힘들다. 만들어도 면발이 고르지 않고 잘 끊어진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불행히도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국수 만들기가 간단치 않다. 점도가 약한 거친 입자. 기껏 국수를 만들어도 툭툭 끊어진다. 방법은 전분(澱粉)을 넣어 반죽하는 것이다. 전분은 녹말가루다. 전분을 넣으면 점도가 높아진다. 그나마 낫다.
막국수 노포에서는 대부분 ‘여름철에는 메밀 40%, 겨울에는 메밀 60%’를 고집한다. 나머지는 밀가루 혹은 전분이다. 전분이 많으면 국수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같다.
국수의 검은 점은 메밀껍질이다. 요즘은 메밀껍질이나 보리 태운 가루 혹은 색소로 검은 색깔을 낸다. 메밀껍질이 남아 있던 예전의 거친 냉면, 막국수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가장 좋은 냉면 혹은 막국수일까? 우문(愚問)이다. 시쳇말로 ‘개취(개인의 취향)’다. 어느 정도의 메밀 함량이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각자 개성에 맞춰서 고를 일이다. 메밀 함량이 낮고 높은 것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다는 표현은 틀렸다.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냉면, 막국수를 내렸다.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시기를 화가로 살았던 기산(箕山) 김준근(생몰년 미상)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사내가 벽의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온몸으로 국수를 내리고 있다. 유압식 제면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수 뽑는 사람치고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었다.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국수나 한 그릇”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메밀 함량을 따지기 힘들었다. 귀한 음식, 국수, 냉면, 막국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맛봤던 음식이었고 주방,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는 집에서나 먹었던 음식이다. 해방 후, 깊은 산골에서 잔치 때 나왔던 음식이 대중화했다. 메밀 함량을 따질 일이 없었다. 함량? 중요치 않았다. 그저 ‘국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원하는 면을 고르면 될 일이다.
계곡 장유의 ‘자장냉면’
언제부터 냉면, 막국수를 먹었을까? 막국수도 냉면과 다르지 않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생겼다. 강원도의 메밀국수를 상업화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막국수와 달리 냉면은 뚜렷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냉면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른바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계곡은 이 시에서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표현했다. 제목이 이미 ‘냉면’이다. 냉면에 대해 처음 언급한 문장으로 친다. 계곡이 ‘처음’ 냉면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냉면은 있었다.
계곡이 먹었던 냉면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인지, 눈꽃처럼 내린 옥가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계곡은 광해군, 인조 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다.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다. 계곡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지체 높은 집안이었으니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 냉면이 다시 문헌에 등장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냉면을 언급한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 이 시에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나온다. “가지런히 당겨 만든 냉면이며, 배추김치는 푸르다.” 냉면과 배추김치[菘菹, 숭저]가 등장한다. 냉면 육수는 배추김치 국물이다. 이 시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냉면과 노루고기 등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다산은 벼슬살이를 할 때 이 시를 남겼다. 냉면을 먹었던 곳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로 대도시였다. ‘임성운’ 집안도 쟁쟁하다. 큰 도시의 행정관리 책임자, 권력자와 같이 냉면을 먹었다.
18세기를 넘기면서 냉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먹는 이들도 다양하다. 서민들도 먹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순조 즉위 초기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했다는 내용이 있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왔던 순조가 냉면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는 돼지고기도 등장한다. 냉면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었다.
순조의 냉면은 궁궐 밖 가게에서 구해온 것이다. 19세기 초반, 한양 도성에는 늦은 밤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냉면은 히트 메뉴였다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년)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 나오는 냉면도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냉면이다. 영재는 음력 4월의 평양 거리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찐 돼지고기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고 표현했다. 음력 4월이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고 냉면 값이 오른다. 냉면은 길거리 주막 등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신 이인행(1758~ 1833년)도 냉면에 대해 기록했다.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동치미(?)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葅, 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이미 냉면은 민간의 풍습이 되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다. 오늘날의 평양냉면이다.
계곡 장유(한양 혹은 경기도 안산/자줏빛 육수), 다산 정약용(황해도 서흥도호부/김칫국물), 순조의 냉면(한양/돼지고기), 영재 유득공(평양/돼지고기), 이인행(평안도 위원/김칫국물)의 냉면은 장소와 내용물이 모두 다르다. 메밀 함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 1930년대 소설가 이무영이 남긴 기록에는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소는 머나먼 경남이다. 메밀 함량은커녕 어떤 색깔의 냉면인지도 불확실하다.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냉면, 막국수, 평양냉면 요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불확실하다. 메밀 함량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전통, 정통 냉면, 평양냉면’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함부로 ‘면스플레인’ 할 일이 아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조금은 마뜩잖은 내용으로 글을 시작한다.
곧 여름철이다. 여기저기서 보양식을 찾는다. 주로 닭, 장어, 민어다. 답답하다. 여름을 앞두고 ‘보양식 원고 청탁’도 많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전화로 설득한다. “보양식은 없다. 제발 보양식 원고 청탁하지 말라”고.
보양식. 참 그럴 듯하지만, 우리 시대의 탐욕이자 꼼수다. 음식을 먹었는데 몸도 좋아진다? 더하여 ‘정력에 좋다’는 소문까지 돌면 그야말로 횡재한 기분이 든다. 동식물의 여러 부위가 보양의 재료로 등장하기도 한다. 식사를 했는데 갑자기 몸이 좋아진다니 싫어할 사람이 없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식사하고 강장(强壯)도 된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다. 음식점 주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초복이면 오피스타운의 해물탕 전문점에서도 삼계탕을 내놓는다. 하루에 100그릇 이상 삼계탕을 판다. ‘초복 특수’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보양식은 없다. 음식 먹고 몸도 튼튼, 강장, 강정(強精)까지 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보양은 ‘保養’ 혹은 ‘補陽’이다. 전자의 보양은 ‘잘 보호해 양육한다’는 뜻이다. 보양식은 ‘보양(補陽)’의 의미를 갖는다. 몸의 ‘양기(陽氣)’를 잘 지키고 더하는 일이다.
우리 선조들은 늘 ‘평(平)’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정조 19년(1795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았다. 그해 윤이월 9일부터 16일까지 수원 화성(華城)에서 환갑잔치가 열렸다. 이때 차린 밥상의 반찬 그릇 수가 모두 16기(器). 그중 음의 반찬이 8기, 양의 반찬이 8기로, 평을 맞추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기록된 ‘혜경궁 홍씨 환갑날 밥상’은 한식 최고의 밥상이라도 해도 좋다. 이 밥상의 구성은 ‘보양’이 아니라 ‘평(平)’이다. ‘평’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남거나 모자라지 않음이다.
진정한 보양식은 음양이 조화를 이룬 ‘평(平)의 밥상’이다. 동지(冬至)는 깊은 겨울. 해가 가장 짧은 날이다. 황진이 시조의 한 구절,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낼 만큼 밤은 길다. 해는 양(陽)이다. 이날부터 해가 조금씩 길어진다. 음의 기운이 강하다. 양을 도와야 한다. 붉은색은 양이다. 음식 중 양의 성격을 지닌, 붉은 팥죽을 먹는다. ‘동짓날 팥죽’은 양을 돕는 소박한 식품이다. 우리 선조들은 ‘동짓날 팥죽’을 양을 보완하는, 보양식으로 여겼다. 그야말로 보양하는 음식이다.
반가의 보양식 중 으뜸은 민어다?
누가 이야기했는지 불확실하다. “반가의 보양식 중 으뜸은 민어, 두 번째는 삼계탕, 세 번째는 장어, 마지막이 개고기”라는 표현이 있다. 엉터리다. 추정컨대,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표현일 것이다.
개장국[狗醬]은 특별한 보양식이 아니라, 상식(常食)이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여섯 종류의 가축을 길러 먹도록 했다. 육축(六畜)으로 소, 말, 개, 돼지, 양, 닭이다. 소는 농경의 도구이니 함부로 도축하지 못했다. 금육(禁肉)이다. 말은 교통수단이다. 돼지는 하는 일 없이 인간의 곡물을 축낸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개와 닭만 남는다. 닭은 개체가 작으니 주막 등에서 내놓기는 힘들다. 주막에서 개고기[狗]를 된장[醬] 푼 물에 넣고 끓이면 구장, 개장국이 된다. 조선시대 후기, 청나라 만주족의 습관을 따라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개장국 대신 ‘쇠고기[肉]+개장국’, 육개장이 태어난다.
민어는 가장 흔한 생선이었다. “특별한 것이 없으니 별도로 기록하지 않는다”(허균의 ‘도문대작’)고 했던 생선이다. “큰 조기는 민어, 작은 것은 조기”라 했다. 별다를 것 없다.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도 민어를 보신, 보양 음식으로 사용했다는 흔적은 없다.
삼계탕의 인삼은 1~2년 자란 수삼이다. 어떤 방식으로, 누가 길렀는지 알 수 없다. 약효? 알 수 없다. 농약은? 비료는? 알 수 없다. 닭은 20여 일 기른, 병아리 치고도 어린 것이다. 영양가? 짐작할 수 없다. 맛은 물론 엉망이다. 삼계탕에 견과류나 들깻가루를 듬뿍 얹는 이유다. 이걸 먹고 보양을 하겠다니 부끄럽다. 20여 일 자란 병아리를 먹고 보양을 할 만큼 우리 살림살이가 허망하지는 않다.
장어도 마찬가지. 일본인들의 ‘우나기’를 옮긴 것이다. 일본인들은 초여름 ‘우나기 동(민물장어 덮밥)’을 먹고, 우리는 화력 좋은 불에 구워 먹는다. 장어에 바르는 간장 양념? 일본과 비슷하다. 장어 뼈 곤 국물에 여러 가지 한약재(?)를 넣고 졸인다. 여기에 물엿, 조미료, 어설픈 효소를 넣는다. 보양? 알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의 최고 보양식은 ‘죽(粥)’과 ‘미음(米飮)’이었다. 몸이 아픈 대비전(大妃殿)에 죽을 올렸다는 기록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지금보다 가난하던 시절이다. 왕실이라 해도 지금 서민들이 먹는 음식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음식 약’ ‘보양식’은 죽이었다. 인삼을 넣고 끓인 죽이 있는가 하면, 좁쌀을 넣고 끓인 것도 있었다.
왕대비께서 빈청에 언문(諺文)으로 하교하기를, “(중략) 나와 같은 병으로 연명하여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속미음(粟米飮)을 마셨기 때문인데 이것까지 들지 않고 날짜를 표시해놓고서 죄다 봉해서 놔두었다. 비록 미음을 든다고 대전(大殿)에 말하기는 하였으나 지금의 병세는 실로 부지하기 어렵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10년(1786년) 12월 1일
왕대비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다. 좁쌀 넣은 미음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험한 일을 당하니, 이제 그것도 끊겠다고 한다. 비록 아들인 정조에게는 “먹고 있다”고 말하지만 먹지 않고 봉해두었다고 밝힌다. 이때도 보양식은 좁쌀을 넣은 미음이었다.
조선시대의 국왕 중, 가장 장수한 이는 영조대왕이다. 평생 스트레스도 심했다. 재위 52년, 83세까지 살았다. 장수의 비결? 간단하다. 소식(小食)이다. 영조는 입이 짧았다고 전해진다. 가려 먹되 자주, 조금씩 먹었다. 보양식은 소식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살아가는 데 음식은 꼭 필요하다. 요즘은 과잉 섭취 때문에 고민이거나 다이어트가 큰 관심사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집 안 물건을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간소하게 먹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TV를 틀면 넘쳐나는 쿡방, 먹방 프로그램.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은 전문가가 나와 요리법을 시연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엔 음식점을 컨설팅해주거나 여행과 결합해 외국의 맛집까지 탐방하는 등 계속 진화 중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이 미식과 여행에 관심이 커졌다는 방증이다.
먹는 즐거움이 영원히 가능하면 좋겠지만, 시니어는 노화로 인한 신체 기능 저하로 식생활에 제한이 생긴다. 그래서 최근 고령화 사회가 심화되며 시니어를 위한 식품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시니어 식품 시장 규모 갈수록 늘어
바나나, 두유, 두부, 청국장의 공통점은? 고령화로 매출이 성장하고 있는 식품들이다. 1인 가구와 고령화로 간편식을 찾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식품의 매출 판도도 달라지고 있다. 과일도 깎지 않고 씻기만 해서 간편하게 먹는 과일이 인기다. 유통회사나 식품 관련 기업들은 이런 흐름을 파악하고, 매장 진열은 물론 시니어 식품 시장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현재 65세 이상 인구가 7명 중 1명인 고령화 사회다. 또 황혼이혼이나 사별로 인한 노인 1인 가구도 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삼시 세끼는 필수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시니어 식품 시장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기업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시니어의 식생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의 유명한 욕구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하위 단계에서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즉 가장 하위 단계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인 안전 욕구가 충족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인들의 식생활 사정은 심각해 보인다. 2015년 질병관리본부가 노인 28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6명 중 1명은 영양 섭취가 부족했다. ‘영양 섭취 부족’은 1일 권장 열량 섭취량(남성 2000kcal, 여성 1600kcal)의 75% 미만에 해당하고, 칼슘 등의 섭취량이 평균에 못 미치는 경우를 말한다. 칼슘은 전체의 약 82%, 지방은 약 71%나 부족했다. 단백질이 부족한 노인도 약 31%나 됐다. 이렇게 영양이 부족하면, 신체의 대사기능이 저하되고 면역체계에 이상이 온다. 최근 한 기업에서 40~80대 부모를 둔 자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절반이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귀찮다(26%), 소화가 안 된다(22%)는 이유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시니어는 연령대에 따라 건강상태도 다르다. 스스로 식재료를 준비하고 식사를 챙길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노화로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혼자 식사를 챙기지 못할 경우가 문제다. 나이가 들면 왜 식사하는 데 불편함을 겪게 되는 걸까. 그것은 몇 가지 신체 변화 때문이다. 우선 미각의 변화다. 혀에서 맛을 느끼는 미뢰가 크게 줄어들면서 미각이 둔해지는 탓에 짜거나 달게 먹게 되어 당뇨와 고혈압 위험이 커진다. 그다음으로는 저작(咀嚼) 장애다. 치아와 잇몸 손상으로 음식 씹기가 힘들어 영양 섭취가 어려워진다. 또 연하(嚥下) 장애(삼킴 장애)로 음식물이 기도나 폐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소화액이나 연동운동 감소로 인한 소화 장애도 생긴다. 이러한 여러 장애 때문에 고령자를 위한 별도의 식품과 서비스 개발이 시급한 것이다.
실버 푸드가 발달한 일본
고령친화산업 진흥법에 따르면, 고령친화식품은 ‘노인을 위한 건강기능식품 및 급식 서비스’로 정의된다. 건강기능식품, 특수의료용도식품, 두부류 및 묵류, 전통 및 발효식품, 인삼과 홍삼 제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농림축산식품부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고령친화식품 시장 규모는 출하액 기준 2011년 5104억 원에서 2015년 7903억 원으로 약 55%나 급증했다. 2015년 국내 전체 식품 시장 규모로 보면 아직 1.5% 수준으로 비중이 미미하지만, 고령화 속도로 볼 때 급성장이 예상된다.
같은 보고서에서 소비자 조사 결과를 보면, 고령친화식품은 영양분과 소화 용이, 저작과 연하 용이 순으로 중요했다. 또 60세 이후 건강한 간식을 챙겨 먹거나, 영양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식품의 소비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시니어를 위한 식품과 서비스 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일본은 전체 인구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노인이다.
이들을 위한 고령친화식품을 일본에선 개호(介護)식품이라 표현한다. 일본개호식품협의회는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UDF, Universal Design Food)로 식품의 굳기와 점도를 고려해 규격에 맞춘 식품을 판매한다.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는 쉽게 씹을 수 있는 1단계부터 삼킬 수 있는 4단계까지 구분된다. 이후 2014년부터 개호식품은 스마일케어식(Smile Care Foods)으로 명칭을 바꿔 판매 대상을 넓혔다. 개호 예방을 위한 식품부터 무스나 젤리 상태의 식품까지 범위도 넓다. 이런 음식들은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없이 물성을 변화시킨다.
심화되는 고령화, 실버 푸드 시장 온다
나물 종류의 채식을 좋아하는 시니어도 있고 육식을 선호하는 노인도 있다. 또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은 식단 조절이나 영양 관리를 해줘야 한다. 그래서 고령자를 위한 식품은 만성질환을 위한 건강식, 끼니를 챙기기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간편식, 저영양 상태를 보충하는 영양식, 건강이 악화된 사람의 간병식 등 세분화되어야 한다.
신체가 쇠약해져 이동이 어려우면 식재료를 사러 다니기도 힘들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구매 난민, 쇼핑 난민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편의점이 진화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배달하고 노인을 위한 식품을 판매하거나 이동 점포까지 운영한다. 또 상품배달뿐 아니라 고령자 혼자서 하기 힘든 전구 교체 등의 집안일까지 지원해 인기다.
우리나라도 최근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고령친화식품 한국산업표준(KS)을 제정했다. 식품기업들도 고령자를 위한 식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요즘 시니어는 미식과 간편식을 즐긴다. 고령친화식품 시장은 이제 막 걸음을 뗀 상태이지만, 시니어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식품과 서비스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삶에서 행복을 충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다하며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중견 여행사 ‘베스트래블’을 경영하는 음식·여행 칼럼니스트 주영욱 대표(57)가 그이다. 이외에도 사진가, 팟캐스트 DJ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노는 게 일이다. 그의 별명은 문화 유목민,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한마디로 노는 사람이다.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을 일해온 그는 2013년 52세의 나이에 여행사를 창업, 인생 2막을 ‘문화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뛰는 사람에서 ‘튀는 사람, 노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그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영욱 대표는 여행, 음식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사진 모두 전문가 수준의 취미를 갖고 있다. 57세, 보통 사람은 이제 버킷리스트를 쓰기 시작할 때다. 그는 하나씩 실행해나가며 지워나가느라 오히려 홀쭉하다. 고교 시절부터 꿈꿨던 DJ의 꿈은 팟캐스트 활동으로, 음식 칼럼을 쓰고 싶다는 꿈은 중앙일간지 연재를 통해 실현했다. 이외에도 가상역사소설, 공상과학소설로 저술을 준비하는 등, 그의 꿈은 산지사방 전 분야에 걸쳐 뻗쳐 있고 진행 중이다.
얼마 전 그는 왼쪽 팔목에 ‘매버릭’(Maverick, 개성이 강한 사람)이란 문신을 새겼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20대 젊은이들처럼 멋부리기 유행을 타서도, 폭력배처럼 위협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매버릭, 말 그대로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편견과 습관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자기다짐이고 자유선언이다. 그는 “세상의 터부 내지 스스로의 금기를 깬 느낌 때문인지 시원했다”며 “세상에 길들여져 탈색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의미에서 했다”고 말했다. 그가 정기적으로 단식과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비우는 것도 본질과 개성을 찾기 위한 일환이다. 그는 비우고 내려놓고 편견의 곁가지를 쳐내야 핵심에 집중해 생생해진다고 말한다. 삶이나 몸이나 생각이나, 심지어 음식의 맛도….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간 일하며 미국, 일본, 프랑스 글로벌리서치 사의 한국법인 CEO를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52세의 나이에 이종 분야 창업을 하신 게 특이합니다.
“경영상 이견으로 외국 회사 한국법인 CEO를 그만두고 됐어요. 20대 때부터 몸담아온 마케팅 리서치 일을 다시 할까도 생각했어요. 마케팅 리서치는 최적의 대안을 찾아내 본질에 집중하는 일이거든요. 제 성격의 완벽주의랑 맞아 신나게 일했어요. 25년 가까이 해오다 보니 스스로 타성이 느껴지더군요. 현재의 삶에 그럭저럭 안주하는 내 모습이 싫어졌습니다. 아직 젊은데 작은 성공에 취해서 한 달에 보름씩 골프를 쳐가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불안하기도 했고요. 재미가 제 삶의 중요 요소예요. 좋게 말하면 글로벌 마인드, 나쁘게 말하면 역마살이라고나 할까요. 익숙한 길보다 가지 않은 길, 새롭게 흥분할 수 있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를 던지고 싶었어요.”
주 대표께서 생각하는 여행의 재미와 의미는 무엇인가요.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사고를 유연하게 해줘요. 이분법적 사고에서 절로 벗어나게 한다고나 할까. 여행 가면 늘 낯선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룰을 따르고 새롭게 생각해야 하잖아요. 그런 게 제 성격에 맞아요. 철이 안 들어서 그런가봐요. 추하다vs아름답다, 옳다vs그르다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게 해줘요. 편견을 깨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요.”
그는 인도 여행을 갔을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초라한 행색의 인도인이 자기 배를 타달라고 호객 행위를 심하게 하더란 것. 다음 날 아침 숙소 앞에서 넘어져 잠깐 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다가오기에 또 호객 행위를 하러 온다고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고. 알고 보니 약을 주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매번 시시각각 깨닫는다고 털어놓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 사업을 하는 것은 별개인데요. 창업을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고품격 여행 상품을 개발하고 싶었어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하잖아요. 저는 그게 여행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400회 이상 해외 여행한 경험이 있으니 그런 기획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여행 계획을 짜면 모두들 즐거워하며 ‘이런 프로그램은 여행사도 못 짠다. 너, 나중에 여행사 차려라’ 하고 농담할 정도였거든요. 두 번째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여행업은 미래 산업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나름 판단했지요. 세 번째는 인맥에 대한 자신감이었지요. 제가 온갖 모임의 총무, 회장을 맡아 마당발이었거든요. 아는 VIP들만 모객해도 걱정 없겠다 생각했지요. 금방 착각임을 깨달았습니다만….”
즐기던 여행을 막상 사업으로 해보니 어떻던가요.
“일과 취미는 전혀 달라요. 지금까지 여행사를 하며 실제 고객은 모르는 분들을 개척한 거예요. 아는 사람과 도와주는 사람은 전혀 별개예요. 처음엔 섭섭하기도 했는데요. 그게 인지상정이에요. 나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친분보다 전문성을 갖고 냉정하게 판단하거든요. 인생 2막, 새로 도전하면서 과거 인맥을 바탕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을 보면 적극 말려요. 사업은 아는 사람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준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기본인데도 잊기 쉬워요.”
그는 “내가 여행상품 기획은 잘하니 호텔, 항공료 절감 등 원가 관련 문제 같은 부족한 실무 요소는 남을 통해 보완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실수였다”며 “사장이 큰 그림 보며 해야 할 일을 직원이 대신 해줄 수는 없더라”고 말했다. 만일 창업 초기로 돌아간다면 여행 가이드를 하든, 자격증을 따든, 직원을 하든 현장에서 밑바닥 경험을 1~2년 반드시 해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나마 자신은 충분한 투자금을 확보해놓고 시작해서 버틸 수 있어 다행이었다는 고백이었다.
그가 히트를 친 것은 고품격 테마여행 중국 장강삼협 크루즈 관광상품 출시다. 동종 상품의 3~4배 가격으로 고품격의 명품패키지를 기획한 게 먹힌 것이다. 2016년 그는 여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해외여행자와 서비스 제공자(여행사/랜드사/가이드/해외교민/유학생 등)를 직접 연결시키는 맞춤형 여행 도움 플랫폼 ‘티비스켓’을 창업해 사업 영역을 넓혔다.
주 대표는 “얼핏 마케팅 리서치 경력이 여행업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팅 리서치의 본질은 옥석을 가려 최고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이는 여행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직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로 끌리기보다 호기심의 본질과 원인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 대표와 대화를 하며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인생의 우선순위로 재미를 이야기하고, 본인도 재미있게 살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거나 유머가 넘치는 편은 아니었다.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해서 설명하고 단어의 정의를 내린 후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방법으로 대화를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우리나라 상위 2%의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멘사 회장을 지냈다.
음식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시지요. 일간지에 연재도 하셨고 ‘이야기가 있는 맛집’이라는 책까지 내셨습니다. 일반 음식 칼럼과는 달리 식당 셰프, 사장의 인생 사연을 곁들이는 게 특색이더군요. 잘되는 식당의 비결은 무엇이던가요.
간단히 말하면 기본에 충실한 식당입니다. 말은 쉬운데 오래 유지하긴 어려워요. 이런저런 핑곗거리와 유혹 때문에 넘어가기 쉽거든요. 유명한 집과 맛 좋은 집은 달라요. 진정한 맛집의 음식에선 주인의 정성과 열정이 느껴져요. 손님을 지갑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자체에 자부심을 가진… 결국 음식은 재료맛, 손맛, 칼맛의 조합이거든요. 주인의 정성이 깃든 음식은 첫맛, 중간맛, 끝맛이 일관되게 같아요. 단맛이나 자극적 조미료로 맛을 낸 음식은 첫입엔 당기지만 끝맛이 좋지 않아요.”
주 대표는 ‘맛집을 고르는 비결’로 2가지를 귀띔해줬다. 사장이 직접 요리하는 곳, 오랜 전통을 가진 곳, 이 두 기준으로 고르면 틀림없다는 것.
요즘 상(上)남자는 상(床)남자, 상 차리는 남자란 농담도 있더군요. 집에서 요리를 잘 하십니까.
“한동안 열심히 배웠지요. 내 손으로 메뉴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의욕이 넘쳐 비싼 칼이랑 파스타 냄비만 잔뜩 사놓고선 그만뒀어요. 손이 입을 못 따라가 중년 남자의 작심삼일 셰프놀이에 그쳤지요.(웃음) 애들이 먹지 않으니 요리할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그냥저냥 요리는 재미있는데 뒷정리 설거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아내의 고마움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요리를 배우겠다는 동년 친구들에게 충고해주는 게 있습니다. 음식 맛은 고가의 장비랑 상관없으니 비싼 그릇과 도구는 사지 말라고요. 고급 골프채를 새로 샀다고 골프 스코어가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해주지요.”
음식 칼럼니스트가 꼽는 최고의 음식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하는 음식은 아내가 해준 김치찌개입니다. 힘들고 지쳤다가도 돼지고기 넉넉하게 넣고 끓인 김치찌개만 먹으면 마음이 순식간에 풀려요. 나의 소울 푸드라고나 할까요. 밖에서 일하느라 바쁘고 지친 와중에서 집밥 해주는 정성을 알기에 일절 불평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반찬투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답니다. 음식은 입보다 마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소박한 집밥 한 끼가 어느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게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최근 아프리카 여행 때는 가수 휘성 씨 뮤직비디오 촬영도 하셨다면서요. 산악자전거 타기, 사진가, 종횡무진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데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여행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여행 전문 케이블 TV를 만들고 싶어요. 경영자로서 저는 수치에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닙니다. 선한 영향,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업이 자리가 잡히면 직원들을 소사장으로 만들어 파트너 관계로 경영하고 싶어요. 좋은 음식이 그렇듯 뒷맛이 좋고 오래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김치찌개같이 질리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DJ로 활동하는 맛집탐방 팟캐스트를 들려주었다. 촉촉한 7080의 감성 어린 목소리로 사연을 곁들여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음에 만날 때 그가 얼마나 더 ‘홀쭉해진’ 버킷리스트를 갖고 나타날지 궁금해졌다. 그때 같이 먹을 추천 식당도….
말하자면, 그때도 “오빠 믿제, 한잔해?”라는 말이 있었다는 뜻이다. 2천여 년 전, 고구려 건국 전이다.
주인공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 부인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의 기록을 따라간다. 하백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유화, 훤화, 위화다. 이들이 강가에서 놀다가 해모수를 만난다. 청춘 남녀가 만났다. 게다가 ‘천제의 아들’과 ‘강물의 신’의 세 딸이다. 잘나가는 집안의 ‘엄친아’다. 스토리가 뻔하다. “유화가 술에 취해 해모수와 통정을 했다”는 거다. 예나 지금이나 ‘술이 웬수’다. 아마 해모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빠 믿제?’
믿을 만했다. 유화 부인은 큰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이 태어났다. 주몽은 고구려를 세웠고, 주몽의 아들들이 백제를 세웠다. 무척 ‘생산적인 오빠 믿제?’였던 셈이다.
해모수가 유화 부인을 꼬드길 때 사용한 ‘작업주’는 발효주(醱酵酒)다. 발효주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긴다. 과일이나 곡물을 자연 상태에 두면 주변의 효모 등과 작용하여 술이 된다. 막걸리, 맥주, 각종 과일주, 곡물주가 모두 발효주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발효주다. 누룩을 미지근한 물에 푼다. 쪄서 식힌 고두밥과 누룩 푼 물을 섞어서 술독에 넣는다. 이게 전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술이 괸다. 거품이 보글보글 나온다. 효모의 작용이다.
이 간단한 과정을 제대로 하는 양조장이 드물다. 장난을 친다. 누룩 대신 얄궂은 일본식 개량 누룩도 사용하고, 정제한 ‘고우지[麴, 국]’도 쓴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양한 술맛이 아니라 일정한 단맛이 난다.
막걸리로 한정하자면, 전북 정읍 태인의 ‘태인양조장’에서 빚는 ‘송명섭막걸리’ 정도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술을 내놓는다. 자기 손으로 재배한 밀로 빚은 누룩과 자가 재배 쌀로 막걸리를 빚는다. 제대로 만든 술은 약이다. 한두 잔 가볍게 마시면 약이 된다.
막걸리는 우리 고유의 술이다?
참 섭섭하게도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는 자기들의 발효주가 있다. 곡물, 과일의 종류가 다르고 이름이 다를 뿐이다.
아주 좋은 막걸리는 ‘순료(醇醪)’라고 부른다. 순료는 물을 타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다. 진한 술, 즉 농주(濃酒)다. 진국, 전국술이라고도 부른다. 오래전에는 양조장에서 ‘진땡이’라고 불렀다. 진땡이가 사라진 것은 세금 때문이다. 알코올 도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고 도수가 높으면 세율이 높다. 주세법상, 8도 이하의 술인 막걸리는 세금이 낮다.
오나라 주유(175~210)는 성격이 호탕하면서도 퍽 괜찮은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오나라 장군 정보는 “주유와 사귀면 마치 순료를 마신 듯, 마침내 스스로 취한 줄을 모른다”고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순료도 역시 ‘진짜 막걸리’다. 중국에도 막걸리 혹은 막걸리 비슷한, 발효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막걸리의 장점은 다양성이다. 산촌에서 빚은 것은 ‘산료(山醪)’라 부르고, 거친 것은 ‘박료(薄醪)’라 불렀다. 조선 중기 문신 조임도는 시에서, “산촌 막걸리에 취해 세상사 잊을 수만 있다면/사람 사는 곳 어딘들 도원이 아니랴”라고 했다.
귀한 쌀로 산촌의 거친 막걸리를 빚었을 리 없다. 잡곡으로 빚은 술이니 거칠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료라도 있으면 곧 무릉도원이다. 우리는 거친 것도 귀하게 여겼다.
주막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사설 음식점 겸 숙박업소’다. 밥값, 술값은 받고 잠자리는 무료였다. 봉놋방에 여러 명이 웅크리고 잔 이유다. 술은 주로 막걸리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역참제도 아래의 역이나 참, 점과 달리 주막(酒幕)은 주점(酒店) 노릇을 했다. 술 마시는 곳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막았다. 불법이니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술을 만들면 반드시 곡물을 허비하게 된다. 막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막은 꾸준히 발전한다. ‘막(幕)’은 천막이다. 가건물이라는 뜻이다. 이 가건물이 조선 후기에는 제법 모양을 갖추고 세금도 내는 합법적인 공간이 된다.
술은 어떻게 먹어야 할까? 조선 후기 문신 이민서(1633~1688)는 “산으로 놀러 다니는 일과 술 마시는 일은 같은데, 여럿이는 시끄럽고 번잡스러우며 혼자는 무료하다”고 했다. 이민서는, “금강산에 갔을 때 미처 동행이 없어 쓸쓸했는데 다행히 산속에서 사람을 만났으니 마치 순료를 만난 것같이 기쁘다”고 했다. 나이 들어 술 마시는 일은 의 저자 이규경(1788~1863)의 말을 귀담아들을 일이다. 이규경은, ‘나이 든 이의 겨울철 섭생법’으로 ‘새벽에 일어나 순료를 마시고 양지쪽에 앉아 머리를 빗는다’고 했다. 잘 마시는, 좋은 술은 약이다.
소주 마시고 패전?
증류식 소주는 몽골의 원나라가 전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소수설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송나라 사람 전석의 말을 인용, 섬라주(태국 술)는 소주를 두 차례 내린 술인데 우리나라 환소주와 같다고 했다. 송은 원나라 이전이다. 원나라의 고려 침공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 소주가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 말, 경상도 원수 김진은 술꾼이었다. 평소 기생, 측근들과 자주 소주를 마셨다. 주변에서는 이들을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 ‘소주 퍼마시는 무리’라는 뜻이다. 막상 왜구가 합포(마산)를 침략하자, 병사들은, “소주도에게 공격하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 김진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가덕도로 귀양을 떠났다.
소주는 한반도에서 여러 번 대형 사고를 친다.
태종 4년, 조정에서 경상도로 보낸 경차관(敬差官) 김단이 옥주(沃州·지금의 옥천)에서 급작스럽게 죽는다. 사인은 소주 과다 음주였다. 김단은 청주에서 소주를 과하게 마셨고 멀지 않은 옥천에서 사망했다.
태종 17년(1417), 수원부사 박강생과 과천현감 윤돈이 파직된다. 죄목은 ‘소주 과다 음주로 인한 동료 과실치사죄’다. 윤돈이 과천현감을 그만두었을 때 금천현감 김문 등 인근의 고을 관리들이 이별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강생과 윤돈이 김문에게 소주를 과하게 권했고, 김문은 소주 과다 음주로 사망했다. 태종은 “설마 죽이려고 술을 과하게 권했겠는가? 파직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한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도 소주 과다 음주에서 빠지지 않았다. 일하는 인부들에게 술을 과하게 권했고 그중 한 명이 과다 음주로 죽었다. 대신들이 양녕대군을 탄핵하지만 세종은 관대하게 대한다. 양녕대군은 죽을 때까지 꾸준히 소주를 마신다.
양녕의 아버지 태종도 술고래였다. 아들 세종 역시 술을 잘 마셨다고 하니 이 집안의 음주 내력도 범상치 않다. 태종의 형 진안대군 이방우도 술꾼이었다. 에는 “진안군이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왜 소주 술꾼들이 쉽게 목숨을 잃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독하다. 자연발생적인 술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증류한 독주다. 독주를 지나치게 마시면 목숨이 위태롭다. 간단한 이치다. 위스키, 보드카, 한국 소주, 중국 고량주 모두 증류주다. 물에 섞어 부드럽게 마셔야 하는 이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알고 나면 그 음식은 다르게 다가온다. 맛도 다르게 느껴지고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음식인문학 여행’은 우리 땅, 우리 음식에 깃든 다양한 인문학적 의미들과 만나는 시간이다. 그 첫 번째로 강원도 음식을 만나러 간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막국수, 감자, 옥수수, 시래기는 먹고 싶어서 먹었던 음식이 아니다. 빈한했던 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음식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빈한한 음식은 다이어트 음식이 되었고 강릉, 속초 등 바닷가의 신선한 해물들은 최고급 미식 재료가 되었다. 강릉, 속초를 거치며 가난한 음식, 풍성한 해물을 만난다. 강릉의 반가 음식도 만난다.
◇ 1박 2일 일정
1. 첫날 오전 9시, 강원도로 출발
20명 기준으로 ‘인문학 여행단’이 구성됩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씨로부터 여행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인원을 20명 정도로 한정하는 이유는 조촐한 분위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시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2. 첫날 오전 11시 30분~오후 1시, 인제군 용대리 백담사 입구, ‘백담갓시래기국밥’
용대리는 황태, 두부, 버섯이 유명합니다. 용대리 ‘백담갓시래기국밥’에서 아침을 먹습니다. 두부, 버섯이 준비됩니다. 메인 음식은 ‘갓시래기국밥’입니다. 주인이 직접 음식을 마련하고 서빙합니다.
3. 첫날 오후 2시~3시 30분, 속초관광수산시장
속초관광수산시장을 돌아봅니다. 인솔 팀과 함께 다니셔도 되고, 자유롭게 다니셔도 좋습니다. 마른 건어물이나 젓갈 등 쇼핑도 가능합니다.
4. 첫날 오후 4시 30분~6시, 교산 허균의 호가 된 ‘교산’과 주문진항, 사천진항
‘도문대작’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식객으로 평가받고 있는 허균. 그의 호 ‘교산’은 외갓집인 강릉 ‘교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버지 초당 허엽은 삼척부사 시절 ‘초당두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교산’과 ‘도문대작’ 그리고 초당두부와 방풍나물 등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인근의 주문진항, 아름다운 사천진항을 돌아봅니다.
5. 첫날 오후 6시 30분~9시, 강릉 교동 ‘기사문’의 저녁식사
동해안 해산물을 자유롭게 사용해 수준급의 해물요리를 내놓는 ‘기사문’에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회, 튀김, 조림 요리, 한국식 초밥, 볶음 등등 동해안 해산물을 이용한 풍성한 해물 요리를 만납니다. 와인, 증류 소주, 강릉 ‘버드나무 블루어리’의 수제맥주 등 주류도 제공됩니다. 메뉴는 11월 동해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6. 첫날 저녁, 프리미엄 펜션에서 1박
바다와 산이 보이는 럭셔리한 펜션에서 강원도의 밤을 맞습니다. 1인 1실이 원칙이나 부부, 친구 등 원할 경우 2인 1실로 마련합니다. 숙소 관련 참고. www.pinehill.kr
7. 둘째 날 오전 8시 30분~10시, ‘기사문’의 아침 해장국
아침 해장은 ‘기사문’의 셰프가 마련한 ‘생선누룽지탕’입니다. 시원한 해장국으로 속을 풀고 출발.
8. 둘째 날 오전 10시 30분~12시, 강릉 ‘선교장’ 방문
‘열화당’ 등 의미가 있는 한옥, 정자 등이 많습니다. 반가의 전통이 살아 있는 ‘선교장’에서 산책을 합니다. 역시 인솔 팀과 동행도 가능하고 자유로운 산책도 가능합니다.
9. 둘째 날 12시 30분~오후 2시, ‘서지초가뜰’의 점심식사
창녕 조씨 가문의 음식입니다. 반가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못밥, 질상 등의 이름을 가진 독특한 음식입니다. 깊은 산골의 반가 음식을 만납니다.
10. 둘째 날 오후 2시, 서울로 출발
서울 도착 오후 6시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간단한 간식이 마련됩니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글 안성찬 대기자
연평균 기온 15도. 여름 오전 12도, 낮 22도. 아침, 저녁 쌀쌀하고. 낮엔 시원하고. “어라, 홀인원이네~” 골퍼에게 이 말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오랜 벗들과 1000원짜리 내기를 골프를 해보라. 홀마다 얘깃거리가 생기고, 티격태격하며 플레이를 하다보면 어느새 18번 홀이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라 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에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골프의 즐거움을 한 가지 더 보태자면 휴가철에 외국투어를 떠나는 것이다. 특히 ‘힐링 골프’면 더할 나위가 없다.
# 어디로 떠날까
여름철에 시원한 곳을 찾아보자. 일본 기후현의 에나에 위치한 14힐스 컨트리클럽이 딱이다. 아침, 저녁에는 한여름에도 찬 기운이 돈다. 낮에는 22~24도로 플레이하기에 그만이다. 왜 그럴까. 일본의 중앙알프스 남단의 에나산은 산악지형으로 2000m가 넘는 산맥을 이루고 있다. 골프장이 들어선 곳은 그 아래 800m 지점. 골프코스는 꿈결처럼 아늑하다. 산들이 홀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특히 쭉쭉 뻗은 편백 나무들이 천년의 숲을 이루고 있어 잔디만 밟아도 ‘힐링’을 해주는 것 같다.
# 어디서 잘까
클럽하우스에 골프텔이 있다. 호텔이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풍광이 뛰어나다. 특히 편백나무의 군락지 사이로 홀들이 조성돼 아주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다. 특히 날벌레가 없다. 여름에도 쌀쌀한 기온을 감안해 해가 넘어가는 쪽으로 방이 나 있다. 이 때문에 저녁을 마치고 돌아오면 온기가 살아 숨 쉰다.
# 뭘 먹지
일본의 먹거리는 예술이다. 청정지역에서 재배되는 쌀과 채소, 그리고 특산물 소고기가 맛의 진가를 발휘한다. 각종 채소와 함께 넣어 살짝 데쳐먹는 스기야끼가 저녁 입맛을 돌게 한다. 음식의 맛 또한 골퍼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덜 달고, 덜 짜게 했다. 여름철에는 클럽하우스 야외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가 벌어진다. 일본 술을 곁들인 19번홀 요리는 14힐스에서의 또 다른 행복을 한 아름 안겨줄 것이다.
# 코스가 어떻길래
재미있다. 즐거움을 준다.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다. 하루를 쳐보면 스코어카드에 적히는 숫자에 실망한다. 다음날에는 버디도 두, 세개 나온다. 홀들이 반기는 것이다. 홀의 배치나 홀의 난이도를 생각 하면서 볼을 치라고 홀 앞에 해저드를 배치했고, 때로 버디나 이글을 하라고 홀을 짧게 해놓은 곳도 있다. 어쨌거나 18홀 모두 색다른 맛이 나도록 디자인했다. 오픈한지 23년이나 됐는데도 그린과 페어웨이 잔디관리가 잘 돼 있다. 잔디는 우리나라 금잔디다. 잔디 잎이 적당히 솟아올라 있어 우드나 유틸리티 샷을 하기가 딱 좋다. 그린은 언쥬레이션이 살짝 있고, 조금 빠르며 컨디션이 쾌적하다. 전반적인 홀의 분위기는 국내 뉴코리아나 이스트밸리, 남서울CC를 많이 닮았다.
# 어떻게 가지
인천공항에서 떠난다. 나고야공항에 도착해서 14힐스CC의 송영차를 타고 1시간 50분 달리다 보면 에나 산자락이 나타나고 바로 골프장으로 들어선다. 3박4일 81홀 도는데 7월 15일까지 89만원이다. 7월 16일 이후는 109만원이다. 항공료는 포함됐고, 중식비만 별도다. 캐디는 원하면 써도 된다. 다만, 비용이 든다. 나고야의 코코파 리조트 이용권 회원은 10만원이 특별 할인된다. 문의 02-722-6777
골프대기자│안성찬
일간스포츠, 문화일보, 스포츠투데이 체육부 골프전문기자
이투데이 부국장겸 스포츠문화부장
뉴스웨이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